■동각잡기(東閣雜記)
저자 이정형(李廷馨)1548-1607
본관 경주(慶州). 자 덕훈(德薰). 호 지퇴당(知退堂) · 동각(東閣).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84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왕을 호종, 개성(開城)에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특진되었다. 개성이 함락된 후 형 이정암(李廷馣 )과 황해도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격파,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93년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고, 1594년 판결사(判決事)로서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요동(遼東)에 다녀왔다. 1596년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고 후에 이조참판 · 대사성 ·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60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북인에 의해 남인 이원익(李元翼) · 이항복(李恒福)이 물러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1606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재직중에 병사하였다.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력(星曆) ·복서(卜筮) ·단수(斷數)까지 통달하였다. 춘천(春川)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문집(知退堂文集)》 《수춘잡기(壽春雜記)》 등이 있다.
▣동각 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전주(全州)에서 강릉도(江陵道)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德原)으로 갔는데,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진(鎭)을 설치하여 원 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당시 영흥(永興) 이북은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 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 영흥)에 주둔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자,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1254)이니,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1392년 7월 17일 병신에 태조가 공민왕비(恭愍王妃) 안씨의 교지를 받들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백관들이 반열을 지어 궁문 서쪽에서 맞이하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전(殿)에 들어가 즉위하되 용상(龍床)을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정유(丁酉 18일)에 비가 왔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가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흐뭇하게 비가 내리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태조가 평소에 짐승을 쏠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鴈翅骨)과 왼쪽 넙적다리 앞 근처를 맞혔는데, 이날에는 사슴 40마리를 모두 그 등성이를 바로 적중시켰다. 또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할 때에 사슴을 쫓아 절벽에 이르렀는데, 높이가 수십 척에 지형이 험하여 사람은 내려갈 수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태조 또한 말을 채찍질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밑바닥에 이르렀는데, 말이 넘어져 일어나기도 전에 곧 사슴을 쏘아 죽였다. 길을 가다가도 엎드린 꿩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날게 하여 두어 길쯤 높이 올라간 다음에 올려다 보고 쏘면 영락없이 맞혔다. 나무 공을 배[梨]만큼 크게 만들어 사람을 시켜 50~60걸음 거리에서 공중에 던지게 하고는 박두(撲頭)로써 쏘아도 번번히 맞혔다. 그러나 항상 겸손함으로 자처하여 남보다 위에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남과 더불어 활쏘기를 비교할 때에는 다만 상대방의 능력과 맞힌 횟수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겨우 상대방과 동등하게 할 뿐이요, 이기고 짐이 없게 하였다. 권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한 번이나 더 맞히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1398...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1342-1398) 등을 찾으니, 이직(李稷)과 더불어 바야흐로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있었으며,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이숙번(李叔蕃)으로 하여금 일부러 화살을 쏘아 지붕 기왓장 위에 떨어뜨리게 하고 인하여 불을 지르니, 도전이 달아나 그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지르기를,
“배가 불룩한 자가 우리집에 들어왔다.”
하였다. 군인들이 들어가 수색하자 도전이 엉금엉금 칼을 잡고 기어 나오므로 잡아 태종의 앞에 끌고 갔다. 도전이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주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왕씨를 저버렸다. 또다시 이씨를 저버리려 하느냐.”
하며 즉시 그를 베고, 그 아들 유(游)와 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 이직은 하인인 척하여 지붕에 올라가 불을 끄는 모양을 하다가 빠져 나왔다.
○야은(冶隱) 길재(1353-1419)(吉再)는 고려의 신우조(辛禑朝)에 벼슬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선산善山)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길재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세자가 되자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태종이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하였는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길재의 효행(孝行)을 갖추어 말하자, 태종이 영을 내려 부르니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왔다.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가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아니하고 태종에게 글을 올리기를,
“제가 지난날 저하(邸下)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습니다. 오늘 신을 부르신 것은 옛날의 정의를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조(辛朝)에 과거하여 벼슬하다가, 왕씨가 다시 서게 되자 곧 고향에 돌아갔으며, 장차 그대로 평생을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옛 정의를 기억하여 부르시므로 제가 올라와 뵙고서 즉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니, 벼슬을 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자제가 말한 것은 강상(綱常)으로서 바꾸지 못할 도리이니, 의리는 탈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른 사람은 나요 벼슬을 준 사람은 주상(主上)이시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시 한미(寒微)한 처지로서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鄕里)로 놓아 보내어 신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餘生)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본 고을에 명령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뒤에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사(義士)이다. 들으니 그가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 써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
하고서, 드디어 그 아들 사순(師舜)을 역마(驛馬)로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을 제수하였고, 길재가 죽자 쌀과 콩으로 부의하도록 명하였으며, 또한 장사지낼 역군(役軍)을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증직(贈職)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가 너그럽고 어진 큰 도량으로 절의(節義)를 표창한 미덕(美德)이 바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놓아 보낸 것과 한 나라 광무(光武)가 엄자릉(嚴子陵)을 돌려 보낸 것과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일은 꼭 같으니, 이것은 모두 그 절의를 높이고, 그 뜻을 이어 주어 백세토록 그 고결한 유풍(遺風)을 격려하고 만세(萬世)토록 큰 기강(紀綱)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영락(永樂) 기축년(1409, 태종 9)에 의정부 및 3공신(功臣 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佐命)) 등이 아뢰기를,
“난신(亂臣) 민무구(閔無咎)ㆍ민무질ㆍ이무(李茂)ㆍ윤목(尹穆)ㆍ유기(柳沂)ㆍ조희민(趙希閔)ㆍ이빈(李彬)ㆍ강사덕(姜思德) 등을 국법에 의해 처형하여 시체를 저자와 조정에 내 놓을 것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구와 무질은 바다 섬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청한 대로 하라.”
하였다. 이듬해에 무구와 무질은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뢴 대로 자진(自殺)하게 하였다. 그 뒤에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가 원경왕후(元敬王后)에게 문병하기 위하여 대궐에 들어갔다가 두 대군(大君)이 안에 들어가고 세자(곧 지(褆)임)만 홀로 있는 틈을 타 무회가 고하기를,
“우리 형 무구와 무질이 어찌 반역을 도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가 우리 집에서 생장하였으니 바라건대 은덕을 내리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너희 가문이 좋지 못하다.”
하였다. 이 말이 전파되어 무휼 등을 국문하였는데, 태종이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가 진실로 크지만 다만 송씨무휼의 어머니가 불안할 것이니 어찌 인정이 없겠는가.”
하고, 무휼과 무회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승정원에서 아뢴 대로 모두 죽음을 내리고, 처자는 먼 지방에 안치하였다.
※태종의 본처이자 왕권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 원경왕후(1365-1420)의 집안인 외척 민씨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종친들의 사주로 태종은 처남 4형제를 죽이고 만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원경왕후는 태종의 왕후이자 위대한 세종의 모친이나 말년은 지극히 불행하였던 것이다.
○문종(文宗) 신미년(1451, 문종 2) 무렵에 성절사(聖節使) 박이창(?-1451)(朴以昌)이 돌아오는 길에 신안관(新安館)에 이르러 자다가 밤중에 찼던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찔러 죽어가는 판이었다. 서장관 이익(李翊)이 듣고 즉시 가서보니, 창이 이익에게 이르기를,
“늙은 몸이 본시 오점(汚點)이 없이 장차 충성을 다하려고 하였다. 당초에 양식을 다만 규정에 있는 수량대로만 가지고 가려 하였는데, 통역(通譯)하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이 마침 장마철인데 팔참(八站)에 들어가 수재를 만나 중도에 지체하다가 양식이 다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양식을 더 가지고 가자고 하기에 내가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40두를 싸가지고 갔다. 장차 아뢰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법을 범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성상(聖上)을 뵈며, 또 무슨 낯으로 같은 반열의 대신들을 다시 만나겠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이런 생각을 이미 정하였다. 그러나, 호송(護送)하는 중국인이 상당히 많아 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기에 이르러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죽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창이 반드시 법을 범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찌르게 된 것이니, 내 마음에 애처롭다. 만리 길에 고생하고 오는 사람을 내가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굳이 청하므로 억지로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는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치전(致奠)하여 주고 쌀과 관곽(棺槨)을 주라.”
하였다.
○ 세종이, 다른 여러 나라는 자기 국어로 된 문자(文字)가 있어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건만 유독 우리 나라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본국의 음운(音韻)이 비록 화어(華語)와 다르나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의 청탁(淸濁)과 고저가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 어제(御製)인 언문(諺文) 자모(子母) 28자를 대궐 안에 국(局)을 설치하여 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시켜 찬정(撰定)케 하였다. 이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가 있었는데, 삼문ㆍ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찬을 보고 음운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기를 13번이나 하였다.
○ 정통 계해년(1443, 세종 25)에 장차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려 하는데, 서장관(書狀官)을 두세 번이나 바꾸어 마침내 신숙주를 추천해 임명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숙주가 오랫동안 병들었다가 새롭게 일어났다. 세종이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병으로 몸이 약해졌다 하니,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나라에 당도하게 되자 시(詩)를 청하는 사람이 떼를 지어 모였다. 숙주가 붓만 들면 곧 써냈는데, 시와 글씨가 다 아름다우니 여러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출발에서 돌아올 때까지 무릇 9개월이었는데, 이전에는 통신사의 행차가 이때와 같이 완전하고 빨리 다녀온 적이 없었다. 상사(上使) 변중문(卞仲文)이 그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그 집에 잔치를 내려 주어 영광스럽게 하여 주었다.
○ 세종이 말년에 병이 많아 능히 정무를 보지 못하므로 동궁에 있는 문종에게 명령하여 모든 정무를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의사당(議事堂)을 설치하고 군신(群臣)들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 노산(魯山) 계유년에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1383-1453)(金宗瑞)ㆍ정분(鄭笨)이 3정승이 되었는데, 종서가 지략(智略)이 많으므로 당시에 큰 호랑이라 칭하였다.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여 친히 무사 양정ㆍ유수ㆍ유서(柳漵) 및 궁노(宮奴)ㆍ임운(林芸) 등을 거느리고 어둠을 틈 타 종서의 집에 가면서, 권람ㆍ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을 지키게 하여 비록 마지막 종소리가 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종서의 집이 돈의문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종서가 수양 대군을 영접하여 이야기를 마치고 전송하러 대문까지 나오다가 뜰 가운데 서서 또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는데, 종서의 아들 승규(承珪)가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사모(紗帽) 뿔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대감의 사모뿔을 빌려 주시오.”
하였다. 종서가 승규를 시켜 안에 들어가 사모뿔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에 양정ㆍ임운 등이 종서를 쳐 땅에 넘어뜨렸다. 승규가 구하러 달려와 종서의 위에 엎드리는 것을 또한 쳐 죽이고서 세조가 달려 돌아왔다. 미리 순군장(巡軍將) 홍달손(洪達孫)과 약속하여 순군을 흩지 말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드디어 그 군사를 거느리고 노산의 시어소(時御所)로 갔다. 이때 노산이 대궐에서 나와 향교통(鄕校洞)에 있는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세조가 대문 틈으로 승정원에 고하기를,
“김종서가 반역(叛逆)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미처 아뢰지도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으니, 직접 그 연유를 아뢰겠습니다.”
하니, 승지 최항(崔恒)이 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세조가 그의 손을 이끌고 함께 들어갔다. 노산이 나이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叔父), 나를 살려 주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臣)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命牌)를 내어 모든 재상(宰相)을 부르고, 금군(禁軍)을 부서(部署)를 나누어 각 곳에 파수(把守)하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韓明澮)로 하여금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殺簿)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종서가 다시 살아나 사람을 시켜 성문(城門)에서 외쳐 정부에 고하게 하되,
“정승이 사람에게 맞아 중상을 입어 병이 중하니, 속히 위에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급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자의 가마를 타고 숭례문(崇禮門)ㆍ돈의문 등을 돌아다녔으나, 문이 닫혀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조도 종서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이튿날 새벽에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이흥상(李興商)을 시켜 살펴보니, 종서가 승규의 방안에 숨어 있었다. 끌어내니, 종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걸어가겠느냐? 내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자, 군사들이 베어 죽였다.
○ 세조가 전위(傳位)를 받던 날, 성삼문(1418-1456)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玉璽)를 받들어 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세조가 바야흐로 땅에 엎드려 굳이 사양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 및 무인 유응부(兪應孚)와 노산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고 도모하였는데, 김질(金礩)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삼문이 김질에게 이르기를,
“일이 성공되는 날에는 너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영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문 등의 거사 기일이 여러 번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질이 이에 그 음모를 정창손에게 누설시켰는데, 창손이 곧 질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비밀히 아뢰기를,
“질과 삼문 등이……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앉으매, 삼문도 승지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세조가 무사를 시켜 끌어 내려 질이 밀고한 말대로 힐문하니, 삼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모두 사실이오. 상왕이 나이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입니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증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밀고한 것은 오히려 간사한 행위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다만 이렇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쇠 조각을 불에 달구어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타는데, 삼문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쇠 조각이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또한 그의 팔을 끊으니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1417-1475)가 자리에 있었는데, 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같이 당직할 때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과인(寡人)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하니, 숙주가 몸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삼문이 죽음에 다다라 감형관(監刑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하고, 그 아버지 승(勝) 및 아우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하위지(1412-1456)(河緯地)는 선산(善山) 사람이다. 세종 무오년(1437)에 과거하여 장원에 뽑혔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엔 위지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노기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단근질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여 이때에 한창이었는데, 모두 위지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 경태 병자년(1456, 세조 2) 여름에 성삼문 등이 창덕궁에서 임금과 왕세자가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여, 부서를 나누어 이미 정하였다. 이날 한명회(1415-1487)가 우승지로서 들어와 아뢰기를,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한 무더우니, 세자는 올 것도 없고, 운검(雲劍)을 맡은 장수들도 전내(殿內)에 입시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모의가 실패되어 모두 처형되었던 것이다.
○ 남이(1441-1468)(南怡)가 날쌔기가 남보다 뛰어나, 이시애를 토벌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에 언제나 선두에 서서 힘껏 싸웠기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자헌(資憲)의 계자(階資)에 올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성화 무자년(1468, 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조 23) 문과(文科)에 장원하였고, 또 그해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으니, 한해에 세 번 장원은 과거 생긴 이래 없던 일이다. 그 뒤에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사마시(司馬試)ㆍ전시(殿試)ㆍ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니 한 사람이 세 장원이 된 것은 또한 계승한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은,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참의 정윤희(丁胤禧)가 전시ㆍ중시에서 장원이 되었고, 양성군 이승소(李承召),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사문 윤기(尹箕)가 초시(初試)ㆍ회시(會試)ㆍ전시에 장원이 되었고, 찬성 이이(李珥)가 회시ㆍ전시에 장원이 되고, 또 그해 사마시에 장원이 되었다.
○ 사문 이의무(李宜茂)가 문과(文科)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맏아들 권(菤)은 무과(武科)에 올라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가 되고, 둘째 기(芑)는 영의정이요, 셋째 행(荇)은 좌의정이요, 넷째 영(苓)은 무과 군수(武科郡守)요, 다섯째 환(芄)은 형조 판서였다. 다섯 아들이 문과와 무과에 올랐으므로,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 의무(宜茂)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정극인(1401-1481)(丁克仁)은 자는 가택(可宅)이요, 호는 불우헌(不憂軒)인데, 태인현(泰仁縣)에 살았다. 경서(經書)를 전공하여 과거에 올라 70에야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나이 많으므로 물러가 고향에 내러가 살면서 후진(後進)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면서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노래하였다. 성종이 글을 내려 그 청렴 개결함을 표창하여 3품 관원의 옷을 주었고,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생활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상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편액하였는데, 경치가 좋았다. 한번은 명 나라 사신이 그 정자에 놀러 가려고 하므로, 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미관(美觀)을 돋구자고 청하였는데,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명회가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대간(臺諫)이, 명회가 임금 앞에서 무례하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외지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후에 석방시켜 돌아 왔다.
○ 성희안(1461-1513)(成希顔)이 성종조 때에 과거하여 옥당에 들어가 가장 임금의 은총(恩寵)을 받았다. 부친의 상중에 있다가 상을 마치자, 불러 위문하고, 이어서 매(鷹)를 주며,
“이것으로 사냥하여 너의 모친을 봉양하라.”
하였다. 연산(燕山)이 왕위에 있을 때에 양화도(楊花渡) 놀이에 따라 갔는데, 연산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희안의 시에,
임금의 마음은 원래 청류를 사랑하지 않네 / 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연산이 노하여 이조 참판에서 부사용(副司勇)으로 강직(降職)시키고, 여러 해 동안 옮겨 주지 않았다. 희안이 연산의 음란과 포학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려는 것을 보고 개탄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으나, 다만 같이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박원종(1467-1510)(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으로서 걸출인데다가 일찍부터 귀하게 되어 무사(武士)들의 추앙을 받았다. 희안이 그와 일을 같이하고 싶었으나 서로 교분(交分)이 없었다. 이웃에 사는 무인(武人) 신윤무(辛允武)라는 사람이 원종과 친밀한 사이이므로 희안이 윤무를 시켜 은근히 뜻을 떠보도록 했었는데, 원종이 벌떡 일어나며,
“이것은 내 평소 간직해 오던 생각이로다.”
하고, 곧 희안과 더불어 의론을 정하였다. 또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시에 명망이 있으므로 알리지 아니할 수 없어 그 뜻을 말하니 순정이 따라 주었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 9월에 연산이 장차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 놀이를 가려하므로 희안 등이 그날을 기하여 성문을 닫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추대하면 일이 쉽게 되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 그 놀이를 정지하였다. 이때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모두 날뛰며 분발하여 저지시킬 수가 없었고, 또 날짜가 오래가면 계획이 누설될까 염려되어 모일(某日) 밤에 훈련원(訓鍊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함께 약속한 사람들과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왔다. 이에 돈화문(敦化門) 동구로 나아가 진을 치고, 역사(力士)들을 나누어 보내어, 연산의 죄악을 조장한 무리 임사홍(任士洪1445-1506))ㆍ신수근(愼守勤1450-1506)) 등을 쳐죽이자, 궁중의 숙위(宿衛), 승지(承旨) 및 장수와 사졸들이 혹은 수채구멍으로, 혹은 담을 넘어 나와 다투어 진(陣) 앞에 모여 들어 궁중이 텅 비게 되었다. 그제서야 왕대비(王大妃) 윤씨(尹氏)에게 아뢰고, 진성대군을 받들고 들어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고, 융(窿)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현(喬桐縣)으로 추방하였다. 시장(市場) 사람들이 가게를 그대로 보고, 중외(中外)가 아무 일 없이 국가가 다시 안정된 것은 희안 등의 힘이었다.
○ 연산이 이미 폐위(廢位)되자...11월에 이르러 위장(衛將)이, 연산이 역질(疫疾)로 고통스러워 한다고 급히 장계(狀啓)하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려 하였으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그 시녀(侍女)들이 말하기를,
“연산이 마지막에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愼氏)가 보고 싶다’ 하였다.”
고 하였는데, 곧 그 비(妃)였다.
○ 연산의 비(妃)는 곧 신수근(愼守勤)의 누이 동생이었으며, 수근의 딸은 또 중종의 잠저(潛邸) 시절의 부인이었다. 바야흐로 연산이 방탕하였을 때에 수근이 정승이었고, 강귀손(姜龜孫)도 같이 정승으로 있었는데, 연산을 폐하고 중종을 세울 뜻이 있었다. 마침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조용히 수근에게,
“매부와 사위 중 어느 편이 더 친한가?”
하여, 그 뜻을 탐지해 보았더니, 수근이 얼른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영특하고 분명하니, 오직 그를 믿는다.”
하였다. 귀손이 아무 말도 못하고, 드디어 명 나라로 떠나면서 날마다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다가 돌아오기도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반정하던 날 박원종 등이 역사(力士)를 시켜 수근 및 그 아우 수영(守英)ㆍ수겸(守謙) 등을 쳐죽였다. 중종이 즉위한 이튿 날,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김수동(金壽童) 등이 유자광ㆍ박원종ㆍ유순정ㆍ성희안ㆍ김감(金勘)ㆍ이손(李蓀)ㆍ권균(權鈞)ㆍ한사문(韓斯文)ㆍ송일(宋軼)ㆍ박건(朴楗)ㆍ정미수(鄭眉壽)ㆍ신준(申浚) 및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의거(義擧)할 때에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궁중에서 모시고 있으니, 만약 중전(中殿)이 되게 되면 인심이 불안할 것이요 인심이 불안하게 되면 종사(宗社)에 관계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애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말이 심히 당연하오.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할꼬.”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계(大計)인데, 어찌 하리까? 청컨대, 과감하게 결단하여 지체하지 마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종사(宗社)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찌 사정(私情)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의론을 따르겠소.”
하였다. 그날 저녁에 신씨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나가 거처하였다.
○ 유자광(1439-1512)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庶子)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는데, 용력(勇力)이 있어 갑사(甲士)에 속하였다. 이시애가 반역하였을 때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적 토벌에 나서기를 자청하므로 세조가 기특히 여겨 대궐 뜰로 불러 시험하였는데, 날쌔기가 원숭이와 같았다. 토벌에 종군하다가 돌아오자 심히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병조 정랑(兵曹 正郞)으로 있으면서 문과(文科)의 장원(壯元)에 뽑혔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자, 남이(南怡)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공신(功臣)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청성이 간사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성종이 허심탄회하게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자, 자광이 기회를 노려 이익을 도모하려 하여, 한명회(韓明澮)가 국구(國舅)의 지위를 기화로 외람한 뜻이 있다고 논하였는데, 성종이 그의 간사함을 알고 동래(東萊)로 귀양보냈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군수(成陽郡守)였을 때 자광의 시(詩)가 현판(懸板)으로 걸린 것을 보고, 그것을 뜯어 내어 불살라 버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자이기에 감히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다. 자광이 듣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종직이 임금에게 한창 총애와 신임을 받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고, 그가 죽자 제문(祭文)을 지어 조위하되, 옛날의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연산군 무오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었는데, 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고는, 그것이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이라 하여, 자광과 더불어 상세하게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고발하고,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종직을 대역죄로 처단하고, 그 문도(門徒)인 김일손(金馹孫) 등을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어, 당시의 명사가 모두 없어졌다. 자광이 그 옥사(獄事)를 국문하는데 참여하여 혹독하게 다루어 죄를 만들었으며, 죄를 의논하여 결정할 때에도 임금의 전교가 만약 더 엄중해지면, 자광이 그 전교를 전하는 내시(內侍)의 앞에 엎드려 아첨하는 추태를 가지가지로 부려서 사례하는 뜻을 표시하는 듯이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한 사람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추관(推官) 노사신(盧思愼)이 손을 흔들어 말리며 말하기를,
“무령(武靈)이 어찌 이렇게까지 말을 하시오.”
하자, 자광이 조금 주춤하였다. 전에 대궐 안각전의 액자(額字)를 김종직이 썼었는데, 자광이 모두 그것을 함양(咸陽)의 시 현판(懸板)을 불태운 보복(報復)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연산(燕山)의 비위를 맞추어 죄악을 조장하고 총애를 받으려 하여 또한 못하는 짓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할 때에 의론하기를,
“자광이 일을 많이 겪었고, 꾀가 많으니,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출발할 때에 비로소 사람을 시켜 알리면서, 만약 도망하거나 머뭇거리거든 쳐 죽이라 하였는데, 자광이 말을 듣자마자 곧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오며, 또한 하인에게 유둔(油芚) 비올 때 쓰는 우구(雨具))을 가지고 따르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진중(陣中)에 이르자, 무릇 장수와 사졸들을 지휘하여 보낼 때에 창졸간이라 표신(標信)을 삼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 곧 그 유둔을 잘라 표신을 만들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기지에 감복하였다. 공신(功臣)의 등급을 정하는 날에 자광이 원종에게 간청하기를,
“나는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공신에 참여되었으니, 오늘의 공은 자식 방(房)에게 양여(讓與)하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소.”
하니, 원종 등이 허락하였는데, 자광이 바로 그때 자신이 붓을 들고 공신의 기록을 맡고 있었고, 또한 그를 뺄 수 없으므로 부자(父子)가 드디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원종 등이 자광의 꾀에 떨어졌다 하였다.
중종(中宗) 초기에 공론이 신장(伸張)되자, 양사 및 옥당이 그의 죄악을 탄핵하므로 공훈이 삭탈되고, 서울 밖에 쫓겨나 죽었고, 그 아들 방(房)과 진(軫)도 모두 옳은 죽음을 하지 못하였다.
○ 북경에 갔던 사신이 지은 문견록(聞見錄)에,
“정덕 무인년(1518, 중종 13) 5월 15일에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에서 흰 용 한 마리와 검은 용 두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입으로 불길을 토하며, 뒤따라 뇌성 번개가 치고 바람과 구름이 휘말아 일어나므로 부근 민가 3백여 호와 배 수십 척이 공중으로 날아 들어가다가 땅에 떨어져 분쇄(粉碎)되었다…….”
하였다. 그날 우리 나라 서울과 지방에 지진(地震)이 크게 일어나 종묘(宗廟)의 기왓장이 날아가고 대궐 안 담장이 무너졌으며, 민가가 혹 무너진 것도 있어 남녀 노소가 모두 밖으로 나와 눌려 죽는 것을 면하였다. 임금이 삼공(三公)ㆍ육경(六卿)ㆍ양사(兩司)ㆍ옥당(玉堂)ㆍ예문관( 藝文館)을 불러 자문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는데,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고 삼공ㆍ 육경이 파하고 나가면 양사가 잇따라 들어가고, 또 옥상과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이 차례로 입대( 入對)하였다.
■기묘사화 전말
○ 기묘년 11월 15일 밤 2경(二更)에 비밀 전교를 내려,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여러 재상(宰相)들을 불러 들이면서 승정원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과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검열(檢閱) 이구(李構) 등이 듣고 합문(閤門) 밖으로 달려가 보니,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 공조 판서 김전(金詮), 예조 판서 남곤, 병조 판서 이장곤(李長坤),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화산군(花山君) 심정(沈貞), 병조 참지(兵曹參知) 성운(成雲) 등이 촛불을 밝히고 앉았고, 군사들이 둘러 싸고 서 있었다. 심정과 성운은 직소(直所)에서 와 모였다. 자임(自任)이 묻기를,
“정원(政院)에서 모르는데 들어 온 것은 웬일이오.”
하니, 심정이 답하기를,
“표신(標信)으로 부르시므로 왔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내시(內侍)가 성운(成雲)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성운을 승지에 제수하였으니, 빨리 입대(入對)하랍시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였는데, 성운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자임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미리 알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만 내시의 말만 듣고 감히 들어가려는 것이오?”
하였으나, 성운이 듣지 않고 들어가려 하자, 안정이 말리기를,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관(史官)은 같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성운이 어찌 감히 혼자 들어가려는 것이오. 우선 기다려야 하오.”
하고, 드디어 뒤따라 합문(閤門)에 이르러 그의 띠를 붙들고 같이 들어가려 하는데, 성운이 안정의 팔을 뿌리치고 들어갔다. 내시가 문지기를 꾸짖기를,
“왜 잡인(雜人)들을 금하지 않는고?”
하고는, 드디어 같이 안정을 붙들어 내보냈다. 삼정이 안정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임금께서 매우 화내신 것 같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성운이 나와 소매 속에서 종이 쪽지를 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이것은 어필(御筆)인데, 이 사람들을 곧 의금부에 가두라 하십니다.”
하였는데, 이때 이장곤이 판의금(判義禁)을 겸임하였음. 쪽지에 쓰인 성명은 곧 윤자임ㆍ공서린ㆍ안정ㆍ이구 및 응교 기준,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했던 사람들임.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을 모두 대궐 뜰에 잡아왔다. 어떤 이가
“수상(首相)에게 알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하므로, 그제서야 정광필(1462-1538)을 명소(命名)하여 입대시키고 조광조(1482-1519) 등의 죄안(罪案)을 보이게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중대한 일이어서 경솔하게 의론할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의 의론을 모아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초하여 하자, 남곤이 앞으로 나가 붓을 잡고 엎드렸다. 이때에 다만 승지 성운과 가주서(假注書) 심사순이 입시하였다. 다 쓰고서 임금 앞에 바치니, 보고 나서 전교하기를,
“죄안(罪案)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광조등 8인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죄인에 이르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자기네에게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네와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을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국론(國論)이 전도(顚倒)되고 정치가 날로 그릇되게 만듦으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며,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등은 광조 등의 무리와 더불어 괴이하고 과격한 풍습을 서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였다.”
고 하였다. 죄인 가운데, 처음에는 ‘임금을 속이고 사심을 부렸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아뢰어 삭제하였으며, 이자의 죄명(罪名)이 김식의 위에 있었는데, 광필이 또한 아뢰어 벗겨 주었다. 이날 밤 이조 판서 남곤, 대사헌 유운(柳雲), 대사간 윤희인(尹希仁), 승지 김근사(金謹思)와 성운은 모두 임금의 특명으로 제수하고, 인하여 옥당ㆍ양사를 모두 체직시키라고 명령하였는데, 광필이 체직시키지 말기를 청하여 두세 번 아뢰니, 임금이 다만 옥당의 관원만 체직시키지 말 것을 허락하였다.
조광조 등이 이미 옥에 갇히자, 공초(供招)를 받아 입계(入啓)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이미 의론을 정하였으니, 형장(刑杖)을 쓰지 말고 조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조율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 네 사람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승지 김근사를 탑전(榻前)으로 불러 판부(判付)를 쓰기를,
“조광조ㆍ김정은 사사(賜死)하고, 김식ㆍ김구는 장 1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먼 곳에 부처(付處)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령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사관(史官)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대한 처분을 다시 의론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다시 의론하여야겠다.”
하였다. 광필 등이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근사가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하니, 이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켜고 있었다. 광필이 전교를 듣고, 촛대를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며 곧 입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이 직책에 있은지 또한 오래되었지만,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기 때문에 사리(事理)를 몰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약간의 중한 죄를 주는 것이라면 신등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광필이 아뢸 때에 눈물이 흰 수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연 중한 일이니,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하겠소.”
하고, 승지 성운을 불러 하교하기를,
“광조 등 4명은 곤장을 쳐서 먼 곳에 안치하고, 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도록 하라.”
하니, 성운이 판부(判付)를 써 가지고 물러났다. 광필이 빈청으로 물러 나와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이미 죽음을 면하였으니, 이것은 천지와 같은 은혜입니다. 다만 모두 병약(病弱)한 자들인데, 만약 곤장을 맞고 멀리 가게 되면 중도에서 죽을지도 알 수 없으니,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되고 죽음을 면해 준 실상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며, 다섯 차려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또 성운에게 하교하기를,
“금부에 가서 광조 등을 뜰에 끌어내어 나의 뜻을 전하되,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던 신하로서, 본시는 임금과 신하가 마을을 같이하여 지치(至治)가 이루어질까 기대하였다.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어질지 않은 것도 아니나, 다만 근래에 와서 모든 일이 잘못되어 정상(正常)으로 되지 아니하여, 조정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은 어찌 편하겠으며, 조정 대신도 어찌 사심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취할 만한 사람들인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그 잘못은 내가 시초에 밝지 못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데에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죄를 만일 율문(律文)대로 처단한다면 어찌 이에 그치고 말겠느냐. 마땅히 중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너희들이 사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나라일을 하기 위하여 그 과격한 허물을 자신이 모른 것이다. 그러므로 감등(減等)하여 죄주는 것이다. 만약 보통 죄수라면, 이렇게 타이를 필요도 없겠지만 너희들은 시종하던 사람으로서 지금 다만 일을 그르쳤을 뿐이므로 이 뜻을 알린다.’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조광조의 무리를 만약 율문대로 한다면 그 죄가 심히 중하지만, 특별히 관대한 법을 써 감등하여 죄를 준다는 내 뜻을 자세히 전하라.”
하였다. 성운이 금부에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한 뒤에 회계(回啓)하기를,
“다른 사람은 하는 말이 없었고, 오직 조광조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이번에 가더라도 임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 등이 과연 과격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이약빙(李若氷) 등이 상소하여 광조 등이 죄없음을 밝히고, 서로 거느리고 대궐 뜰에 들어가 통곡하니,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곡성이 어디서 들려 오느냐?”
하고 묻자, 정원(政院)에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유생들 하는 짓이 심히 해괴하다. 과장(科場)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죄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대궐 뜰을 어찌 함부로 들어와 통곡한단 말이냐. 5~6인을 잡아 가두어 징계하고, 또한 금군(禁軍)을 시켜 몰아내라.”
하였다. 이약빙 및 윤언직(尹彦直)ㆍ박세호(朴世豪)ㆍ김수성(金遂性)ㆍ황계옥(黃季沃) 등 다섯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생원 임붕(林鵬) 등이 또한 상소하여 조광조의 일을 말하고, 또한
“어제 유생들이 옥에 갇혔는데, 신 등이 홀로 편안하게 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백 명이 모두 대궐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3일 만에 임금이 명령하여 약빙 등을 석방하고, 그들의 상소에 답하기를,
“광조 등의 애초의 뜻이 어찌 국사를 그르치려 하였겠느냐. 위에서도 지치(至治)를 보려고 기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이들이 과격한 일이 많으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대신도 조정을 안정시켜려 한 것이지, 참소하는 사특한 사람이 군자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광조 등이 귀양가고 나자, 뭇 소인들이 득세하였다. 황계옥ㆍ윤세정(尹世貞)ㆍ이뇌(李耒) 등 세 사람이 상소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 등 8인을 베자고 하여, 시론(時論)에 영합하였는데, 말이 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황계옥이 처음에 광조를 구원하려다가 옥에 갇혇었는데, 한 달도 되지 못하여 또 반드시 용서없이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심술의 고약함이 이와 같았다.
○ 유운(柳雲1485-1528))이 조정암(趙靜庵) 대신으로 대사헌에 제수되자, 사헌부의 동료 및 사간원 관원들과 더불어 모두 취임하지 않고 연명(連名)으로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모두 철없고 경솔하기 때문에 다만 성상께서 말마다 들어주고 계책마다 들어 주는 것을 믿었었는데, 하루 아침에 죄를 주니, 신 등이 그 연유를 모르겠으며, 전 대간을 까닭없이 모두 체직시킨 것도 신 등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드시 조 광조 등을 다시 등용한 후에야 신 등이 취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사람을 형벌하는 것도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해야 하고, 속이거나 비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일이 간사한 무리들의 밀계(密啓)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들으니, 위에서 비밀히 홍경주(洪景舟 경주는 순빈(順嬪)의 아버지)에게 명령하시기를, ‘지금 조광조 등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다. 전일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할 때에 내 생각에 매우 좋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것은 당파를 심으려고 한 짓이다. 지금 현량과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나, 다만 경(卿)의 사위 김명윤(金明胤)도 그 가운데 있으므로 하지 못한다.’ 하셨다 하여,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임금의 권력으로 두세명의 서생(書生)을 죄주는 것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어두운 밤에 비밀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셨습니까? 겉으로는 친하고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제거할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위태롭고 망할 징조인 것입니다. 신 등은 통곡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대간(臺諫)이 잘못 들은 말이다. 당초에 홍경주가 남곤ㆍ송철(宋鐵) 김전(金詮) 등의 집에서 무사(武士)들이 결당(結黨)하여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로 인해 같이 의론하기를 ‘이렇게 되면 장차 큰 변이 생기겠다.’ 하여, 조정에서 직접 이와 같이 하였으니, 광조 등에게는 복이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조정의 깊은 생각으로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운이 끝내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다. 유운이 젊었을 때 과거하였는데, 활달하여 기절이 있었다. 물러가 시골에 살면서 시국을 개탄하여 술을 함부로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 정덕 기묘년(1519, 중종 14) 11월 21일에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덕에 밝지 못하여 한갓 정치를 잘 해 보려는 뜻만 간절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있지 못하여, 사람을 쓰고 버릴 때에 크게 잘못됨이 있었으니, 내가 심히 부끄러워 한다.
전에 조광조ㆍ김정ㆍ김구ㆍ김식ㆍ윤자임ㆍ박세희ㆍ박훈 등이 모수 시종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성리학(性理學)을 아침저녁으로 강의하고 권하므로, 내가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보좌하여 성취시킬 만하다 하여, 좋은 벼슬을 가려서 주고 계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 주었으니, 내가 대우하여 준 것이 그들을 저버렸다고 할 수 없거늘, 뜻밖에도 광조 등이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으로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조종(祖宗)들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노성(老成)한 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하며,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이를 의론하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극구(極口) 배척하여 반드시 굴복시켜 자기들을 따르게 하여 국록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그릇되게 만들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탄식하면서도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의 소행을 살피건대, 마침내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이 이미 나타나 용서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다스려 백관(百官)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다만 전일에 시종하던 것을 생각해서 특별히 경감(輕減)하여, 광조 등 이하를 각각 그 죄대로 죄주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랴? 이러한 의론을 정부는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모두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전지(傳旨)는 남곤이 기초한 것이었다.
대사헌 이항(李沆),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합사(合司)하여 대궐에 나아가, 안당(安瑭)ㆍ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김안국(金安國)ㆍ유운(柳雲)ㆍ김정국(金正國)ㆍ조광좌(趙光佐)ㆍ이충건(李忠楗)ㆍ유용근(柳庸謹)ㆍ신광한(申光漢)ㆍ정순붕(鄭順朋)ㆍ한충(韓忠)ㆍ정응(鄭譍) 최산두(崔山斗)ㆍ장옥(張玉)ㆍ이희민(李希閔)ㆍ이청(李淸)ㆍ양팽손(梁彭孫)ㆍ구수복(具壽福)ㆍ정완(鄭浣)ㆍ이연경(李延慶)ㆍ이약빙(李若氷)ㆍ권진(權磌)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ㆍ김광복(金匡復)ㆍ조언경(曹彦卿)ㆍ유인숙(柳仁淑)ㆍ윤광령(尹光齡)ㆍ권장(權檣)ㆍ파릉군 경(巴陵君儆)ㆍ시산정 정숙(詩山正正叔)ㆍ장성수 엄(長城守儼)ㆍ숭선부정 최(嵩善副正)ㆍ강녕부정 기(江寧副正祺) 등 36인을 단자(單子)에 써서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고 또 현량과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중종이 양사 장관(兩司長官)을 인견(引見)하여, 황계옥 등이 조광조를 주벌할 것을 청한 소(疏)를 보이고 하교하기를,
“조정에 만약 공론이 있다면 유생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랴.”
하고, 또 영의정 정광필ㆍ좌의정 김전(金詮) 등을 불러 입대하게 하여, 대간이 올린 단자 및 황계옥 등의 소를 보이며 말하기를,
“근일에 재변(災變)이 거듭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죄주기를 청하는 일을 어떻게 할꼬?”
하자, 광필이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고, 김전도 또한,
“근본되는 사람을 이미 죄주었으니, 그 나머지는 반드시 낱낱이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더니, 이튿날 전교하기를,
“당초에 그 수괴(首魁)를 처단하였더라면 나머지 당(黨)은 비록 다스리지 않더라도 풍습이 절로 발라졌을 것이다. 대신이 국가의 일 보기를 남의 집 일 보듯하여 배회(徘徊)하고 관망하여 잘잘못을 결정하지 못하니, 이것은 사세를 보아 저 사람들의 죄 받음이 경하고 중함으로써 후일 자기 처신의 계책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무를 다루는 데 비유하건대, 근본이 이미 끊어지면 지엽(枝葉)은 절로 마르는 것이다. 대간이 근본 다스리기를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지엽만 다스리려고 하니, 이것은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상과 우상을 빨리 체직시키고, 새로 다른 정승을 내는 것이 옳다.”
하고, 당일에 어필(御筆)로 남곤ㆍ이유청(李惟淸)을 좌상ㆍ우상으로 삼아 바로 불러 비현각(丕顯閣)에 입대하여, 광조 등에게 죄를 더 줄 뜻을 말하고, 또 금부 당상(禁府堂上) 심정(沈貞)ㆍ손주(孫澍) 등을 불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에게는 사사(賜死)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라.”
하였다. 남곤ㆍ유청ㆍ심정 등이 아뢰기를,
“4인 가운데서도 마땅히 분별하여 괴수만 죄주면 족합니다.”
하고, 손주는 아뢰기를,
“4인을 모두 절도 안치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와 같은 은덕을 보여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금부옥(禁府獄)에서 불공한 말을 한 것만으로도 죽을 만하니,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절도 안치하게 하라.”
하고, 또 남곤ㆍ유청으로 하여금 어전(御前)에서 양사(兩司)가 죄주기를 청한 사람들은 경중을 나누어 죄주게 하여, 유용근ㆍ최산두ㆍ정응ㆍ정완 등은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최숙생ㆍ이자ㆍ양팽손ㆍ이약빙ㆍ이희민ㆍ이연경ㆍ윤광령ㆍ이충건ㆍ조광조ㆍ송호지와 호례 등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안당ㆍ김안국ㆍ유운은 파직시켰다.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귀양간 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공이 뜰 가운데 나와 꿇어 앉아 전지(傳旨)를 듣고 나서 임금의 기체(氣體)가 어떠한가를 물은 다음, 세 정승ㆍ여섯 판서의 성명을 물었으며, 목욕하고 새옷을 입고 자못 태연하였다. 금부도사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기색이 있자, 공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은 조서(詔書)를 안고 전사(傳舍)에 엎드려 우는 이도 있었는데, 어찌 그리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함과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참된 충정을 비추리.”
하고는,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끈으로 목을 졸랐다.
▣동각 잡기 하(東閣雜記下)
■본조선원보록 2
○ 문강공(文剛公) 이사균(李思鈞1471-1536)은 곧고 뻣뻣하여 시속에 맞추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기묘년의 사류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전주 부윤으로 나갔었다.
조광조ㆍ김정(金淨) 등이 죄를 입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당시의 정권을 잡은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이사균이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 감정을 품었을 것이라고 여겨 불러 승진시킨 것이었다. 들어오자 사직하며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신은 자세히 모르오나, 반드시 일을 하려 하는데 중도에 지나친 점이 없지 못하여 미워하는 자가 많아서 그리 된 것입니다. 또 조광조 등에게 내리신 전교를 보고 삼가 생각건대, 위에서 만약 이 사람들이 다만 국사를 위하고 다른 생각이 없는 줄을 아셨다면, 그 죄를 감면해야 할 것인데도 감면하지 아니하시니, 아마도 전하의 마음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상벌은 비록 보통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만약 남용되면 임금의 덕에 크게 누가 됩니다. 옛 사람은 한 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치게 한 자가 있었지만, 보잘것없는 신과 같은 자가 어찌 전하의 마음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 사직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사균은 다만 남곤(南袞) 등의 의론에 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힘껏 조광조 등을 구하니, 정언 조침(趙琛)이 탄핵하여 관직을 떠났다. 뒤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또 김안로에게 거슬려서 경상 감사로 나가는데, 김안로가 당시 정승으로 있으면서 흥인문 밖에 나가 전송하려 하였다. 이사균이 듣고는 숭례문으로 나갔다. 그 꼿꼿함이 이와 같았다.
○ 찬성 이계맹(李繼孟1458-1523)이 기개가 있고 큰 절조가 있으니, 정광필이 그를 정승의 재주가 있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후에 기묘년의 선비들이 일을 처리함이 중도에 지나치므로 이계맹이 매우 억제하였더니, 드디어 탄핵을 당하여 물러나 김제(金堤)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조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조정에서 불러 찬성에 제수되었다. 이계맹은 조금도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매양 착한 선비들이 쫓겨나고 뭇 소인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탄식하여, 선비들을 구하려 하다가 남곤 등에게 크게 거슬려 중추부의 직무가 없는 관직에 머물다가 죽었다.
○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중종이 의정부에 전교하기를,
“조정 신하 중에 맑은 절조가 본시 드러나서 늙어도 변치 않아 여러 사람이 믿고 복종하는 자가 있으면 아뢰라.”
하니, 참찬 조원기(趙元紀1457-1533)를 아뢰니, 명하여 차례를 넘어 숭정대부의 품계를 주었다. 조원기가 벼슬에 있을 때에 청렴하고 깨끗하여 추직(騶直) 및 당봉(堂封)의 남은 것은 반드시 먼저 자매에게 도와주고 불쌍한 친척까지 돌보고 자기의 생활은 심히 박하게 하면서 태연하였다. 그가 가선대부ㆍ자헌대부의 품계에 오른 것도 모두 청백함으로써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동시에 판부(判府) 송흠(宋欽1459-1547)도 청백하고 검소하며 이익에 뜻이 없어 편안히 벼슬을 물러남으로써 조원기와 명성이 같아서 여러 번 품계를 뛰어 올라 1품에 이르렀다.
○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마유량(馬惟良)의 아내 조씨(趙氏)가 나이 1백 12세인데, 빠졌던 이가 다시 나서 크기가 쌀알만큼 하고, 이마 위에 검은 털이 다시 나서 길이가 한 치쯤 되고, 귀는 전연 듣지 못하고, 눈은 겨우 물건을 살피나 때로는 혹 구별하지 못하였다. 34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은 행곤(行坤)인데 이때에 나이가 80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감사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상고시대에 요순(堯舜)의 나이도 이보다 못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듣지 못한 일이다.”
하고, 본도에 명하여 의식을 주게 하였다.
○ 연산군이 한창 음탕한 짓을 할 때에 문ㆍ무관 및 유생ㆍ삼색(三色)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는 하인에 충당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간도 거기에 충당시킬 것인가를 물었더니, 연산군이 이르기를,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무릇 놀러 다니는 곳에는 가마를 매고 다니게 하고, 때로는 글짓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의관을 차려 입는 선비의 욕됨이 지극하였다.
조정암(趙靜庵)이 일찍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연산군이 유생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게 하여도 선비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급(賞給)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여 선비의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마땅히 선비의 풍습을 변하여 추향을 바르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연산(燕山)이 온갖 악함이 다 갖추어져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을 당하였는데, 궁중의 행실이 더욱 추하여 근친(近親) 여자들에게 더러운 행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외명부(外命婦)에게 잔치를 베푼다고 대궐 안에 청하여 얼굴이 예쁜 자가 있으면 문득 끌어 들여 음행을 자행하였다. 부끄럼이 없는 여인은 혹 궁중에 머물기를 원하고, 총해하는 여인을 자주 불러 들여 유숙(留宿)하고 내보내고는 그 남편의 관직을 승진시키니, 당시의 사람들이 왕팔채(王八債)라고 조롱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성종(成宗)의 형이다. 그 재취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冠服)을 특별히 높이고, 은(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妃嬪)의 계급으로 대우하기까지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1485-1548)이 교리로 있을 때에 중종이 한 번은 야대(夜對)에 나왔다. 아뢰는 자가
“지금 태평을 이룩하려면 모름지기 당대에 제일가는 사람을 발탁하여 정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하니, 이연경이 앞으로 오며,
“이는 조광조를 가리킨 것입니다. 조광조는 진실로 훌륭합니다만, 지금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는 경력이 많고 인망(人望)이 흡족하기를 기다린 뒤라야 큰 책임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그 소문을 듣고 달려가 이연경을 보고 울면서 감사하였다.
뒤에 사화가 일어나게 되자 남곤ㆍ이빈(李蘋) 등이 귀양 보낼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보고하는데, 이연경의 이름이 첫머리에 있었다. 상이 붓으로 지우며 전교하기를,
“이연경은 내가 그 사람됨을 아니, 귀양 보내지 말라.”
하였다.
○ 〈기묘현량과방목(己卯賢良科榜目)〉에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이 발문을 짓기를,
“아! 현량과를 삭과(削科)한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었다. 옛적에 우리 중종대왕 때에 나라를 다스리자면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렸지만, 인재가 출세하는 길이 반드시 사장(詞章)과 훈고(訓詁)에 근본하여 혹 한 가지만 하고, 혹 겸하기도 하나 역시 이 길만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비록 어질고 재능이 있어도 제한에 구속을 받아 실제로 사용할 자리가 없었다.
이에 한(漢) 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대아문(大衙門) 및 팔도로 하여금 각각 학문과 조행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게 하여, 1백 20명을 얻어서 대궐 뜰에서 책문(策問)으로 시험보아 그 숫자가 열수(列宿)에 응하게 되니, 모두 당시의 쟁쟁한 명사들이었다. 위에서 기뻐하는 말씀이 계시니 선비들이 조정에서 기운이 떨치고, 백성들이 들에서 눈을 닦고 바라보더니, 얼마 안 되어 비바람이 북쪽에서 세차게 일어나서 하늘에 가득하고 해를 가리어서 그 법제가 혁파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다. 오래된 뒤에 주상의 뜻이 스스로 풀어져 점점 회복할 길을 틔웠다. ...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전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구언(求言)하는 데에 응하여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강(綱)이 하나이니, 임금의 마음이요, 목(目)이 열이니 가정(家政)을 엄하게 할 것,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기를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사람 쓰고 버림을 삼갈 것, 천도(天道)에 순종할 것, 인심을 받을 것, 언론의 길을 넓힐 것, 사치로운 욕심을 경계할 것, 군정(軍政)을 닦을 것, 기미(幾微)를 살필 것으로서, 극히 충성되고 착하고 곧은 말이었다. 중종이 깊이 탄복하고 장려하기를,
“옛적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뛰어날 수 없다.”
하여, 동궁에게 전해 보였다.
뒤에 인종이 즉위하자, 발탁하여 우찬성을 제수하였는데, 이언적이 재차 사양하니, 전교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경의 상소문을 선왕이 내려 주셔서 보고는 이미 탄복하였으며 또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듣고서 경에게 마음을 둔 지 오래였는데 어찌 찬성의 직책에 합당하지 않겠소.”
하니, 이에 직책에 나아갔다.
○ 연산군이 마음대로 음탕과 포학을 자행할 때에 어떤 사람이 언문(諺文)으로 연산군의 죄악을 거리에 방을 붙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니, 연산군이 그것은 당시에 죄를 입은 자의 친당들의 소행이라고 지목하여 귀양간 사람들을 다 체포하여 고문이 혹독하였고 또 서울과 시골에 언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금지하였다. ...
○ 세종 때에 내시 별감 김원효(金元孝)가 순왕곡(舜王穀) 30이삭을 바치니 각궁(角弓) 하나를 주었다. 김원효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종자를 얻어 배양하여 바친 것인데, 줄기는 수수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고, 열매는 조와 같았다. 상이 내농소(內農所)와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에 심어 배양하게 하였다.
○ 가정 갑진년(중종 39, 1544, 인종 즉위년)에 상이 승하하니, 묘호(廟號)를 중종으로 올렸다. 인종이 전교하기를,
“부왕(父王)께서 연산조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난리를 다스리고 바른 데로 돌려서 종묘를 편안히 하여 중흥한 공이 있었으므로 조(祖)로 칭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매, 회계하기를,
“옛적에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론할 때에 혹 조(祖)로 칭하려 하였더니, 우무(尤袤)가 말하기를,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장사정왕(長沙定王)의 후손으로 들어가 대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조(祖)라 칭한 것입니다. 고종(高宗)은 중흥은 하였지만 휘종(徽宗)의 아들로서 흠종(欽宗)을 바로 이은 것이니, 조(祖)로 칭함은 부당하다…….’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조정에서 세조를 조(祖)라 칭한 것은 중흥하여 아우로서 형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행왕(大行王)은 비록 중흥은 하였으나 성종의 계통을 바로 이었으니, 조(祖)라 칭함이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의론하라고 명하니, 대신들이,
“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큰일이니, 조정에서 의론해 정한 것을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윤임(尹任)은 인종의 외숙인데, 무인으로 중종조에 숭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인데, 사람됨이 간악하였다. 급제하여 비록 좋은 벼슬을 지냈으나,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하여 전랑ㆍ중서(中書)의 천거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므로 선비들을 분히 여기고 미워하였다. 당시 벼슬에 조급히 덤비는 무리들이 또 각각 편드는 당파가 있어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여 드디어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이란 설이 있어서 유언비어가 점점 유포되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중종이 갑자기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는 명을 내리자, 중외(中外)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인종이 울면서 굳게 사양하여 중지되었다.
기해년에 동궁에 화재가 났는데, 사람이 지른 불이라고 말하였다. 대사간 이임(李霖)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여자를 너무 가까이 하고 사랑하면 무례한 데에 이르기 쉽고, 시기하는 화란이 마침내 재앙의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어, 말이 너무 노골적이기에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곧 윤원형을 공조 참판으로 발탁하였으니, 대개 대비의 마음을 위안한 것이었다.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이 달이 넘도록 계속 탄핵하여 마침내 가선대부의 품계를 빼앗았다. 당시에 깊은 생각 있는 이들이 혹 무심한 것을 걱정하여 논의를 중지하기를 바랐다. 송인수의 종제 송기수(宋麒壽)가 송인수에게 외부의 의론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하여도 듣지 않았다.
송인수의 매부 성제원(成悌元)은 행실이 맑고 옛 학문을 좋아하는 이였으므로 인수가 마음으로 중하게 여겨 말만 하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제원이 하루는 송인수와 같이 자면서 윤원형의 일에 너무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조용히 말하였으나 끝내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고, 되풀이하여 거듭 말하니 자는 척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송인수가 평일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만은 이와 같이 고집하였다. 윤원형이 세력을 얻으매, 이임과 송인수가 모두 화를 당하였다.
○ 인종이 상주가 되어 상주 노릇을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대비를 지극한 효도로 받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애통을 억제하여 몸을 보전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날로 병이 들었다. 을사년 6월 27일에 경회루(慶會樓) 기둥에 벼락이 쳐서 기둥을 싼 쇠가 또한 부서지고 찢어졌다. 인종이 방금 병이 위독한 중에 묻기를,
“벼락이 어디에 떨어졌는가? 대비께서 놀라셨을까 염려되는구나.”
하고, 내관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7월 1일에 승하하였다.
인종이 훌륭한 성상의 자질을 타고나서 동궁에서 덕을 기른 지 30년이 되었으므로, 즉위하자 중외(中外)에서 태평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승하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자기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애통하여, 먼 지방의 유생들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싸가지고 달려와 대궐 앞에 곡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1년도 못 되는 동안에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킨 덕택이 이와 같았다.
○ 가정 을사년 10월에 우상 이기(李芑)가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근자에 죄를 정할 때에 주상께서 큰 소리도 없이 각각 적당하게 정하였으므로 인심이 모두 복종합니다. 그때 윤임ㆍ유관ㆍ유인숙ㆍ이휘(李煇)ㆍ이덕응은 극형을 당하였고, 박광우(朴光佑)ㆍ곽순(郭珣)ㆍ정희등(鄭希登) 등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이림(李霖)ㆍ나숙(羅淑)은 멀리 귀양갔고, 정원(鄭源)ㆍ이약빙(李若氷)ㆍ이약해(李若海)ㆍ김저(金䃴)ㆍ노수신(盧守愼)ㆍ이중열(李中悅)은 삭탈관직되고, 성세창(成世昌)ㆍ권벌ㆍ송인수ㆍ한숙(韓淑)ㆍ이진(李震)ㆍ김진종(金振宗)ㆍ심영ㆍ이염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림ㆍ나숙ㆍ정원ㆍ이약해ㆍ김저ㆍ이중열은 모두 사약을 받았다. 조정 신하들이 비록 파직된 자가 많았으나 또한 미진한 것이 있으니, 이는 대관이 반드시 미쳐 듣고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천계(李天啓 ? - ? 사헌부 지평)ㆍ이황(李滉 1501-1570 홍문관 전한)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은 김저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으며, 정황(丁熿)도 또한 다만 체직되고 파직은 되지 않았으니, 저들과 더불어 같이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지난 기묘사화 때의 사람들이 한갓 자기의 아는 사람만을 현량이라 하여 취하였는데, 그 중에 글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만이지만 글을 이루기만 하여 바친 자는 빠짐없이 다 합격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지극히 공정한 과거 시험입니까. 중종이 명하여 그 과거를 혁파하였더니, 인종이 위독한 때에 명하여 복과(復科)시켰습니다. 인종이 바야흐로 병환이 위독할 때에 윤임의 삼부자가 입시하여 처음에는 봉성군(鳳城君)으로서 임금을 삼으려다가 사세가 할 수 없이 된 뒤에 주상에게 전위하였으니, 이 일도 어찌 윤임의 농간이 아니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청컨대, 도로 현량과를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이천계 이하 5인에게 모두 관직을 삭탈하였다. 10여 일을 지낸 뒤에 이기가 다시 아뢰기를,
“다시 들으니, 이황은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그것은 이기의 조카 원록(元祿)이 이황은 물러가는 것을 편안히 여겨 시속의 의론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극력 말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다시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천계 : 필자의 본관이 신평입니다. 괴당은 저의 직계는 아니나 신평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중 한 분입니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형백(亨伯), 호는 괴당(槐堂). 지의정부사 첨(詹)의 현손이며, 만생(晩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충(文忠)이고, 아버지는 부장(部將) 철권(鐵拳)이고, 어머니는 한증(韓增)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 1544년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545년(인종 1) 의정부사인에 발탁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장령 권물(權勿), 지평(持平) 이잠(李湛)과 함께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대신으로 합당하지 못하니 파면시키라.”고 한 논핵으로 인하여 우의정 이기(李芑)의 배척을 받고 그 해 10월에 삭탈관직되었다.
1547년 9월 양재역의 벽서사건 때 다시 이기의 무고를 받아 영해부에 유배되었다. 1567(선조 즉위년) 10월 새로운 정권을 위한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으로 관작을 환급받았다.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사림간에 명망이 있었다.
○ 이기(1476-1552)가 중종조에 장리(贓吏)의 사위이므로 현관(顯官)이 될 수 없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이기는 재주가 있으니 파격으로 허통(許通)할 만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허통해야 한다는 의론을 더욱 주장하여 이기가 드디어 좋은 관직을 지냈다.
뒤에 이언적(1491-1553)이 이기의 심술이 부정한 것을 알아내고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사 이천계(李天啓)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조정 의론을 보니 이기가 반드시 정승이 되겠는데, 이기의 사람됨이 흉험하니, 반드시 사림에 화를 줄 것이다.”
하였다. 이천계가 조금 뒤에 지평이 되었는데, 이기가 정승이 되자 이천계가 탄핵하여 체직시키니, 이로 말미암아 이기가 이언적 및 이천계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기가 다시 정승이 되어 한 번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언적은 학문이 있어 인망(人望)이 중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합니다. 전주 부윤으로 있을 때에 상소하여 동궁을 보양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동궁이 절로 안정되었는데, 또 무슨 보양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동궁에 화재가 났을 때에 이언적이 화재의 출처를 추궁하고자 하였으니, 그 의론이 바르지 못합니다. 주상께서 즉위한 처음에 이언적이 10여 조의 경계를 만들어 안에서 내린 밀지는 신하가 그것을 봉하여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여, 임금의 손발을 묶어 두려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다 이언적이 유관으로 더불어 함께 한 일입니다. 또 밀지를 부정하다고 말하고서도 오히려 공신의 명부에 이름이 기록되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신이 이언적의 힘을 입어 허통이 되었으니, 신에게는 진실로 큰 덕이 있습니다마는, 신이 대의로서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양사가 따라서 탄핵하여 이언적이 훈적(勳籍)과 벼슬을 삭탈당하고 얼마 안 되어 멀리 귀양가고 이천계도 또한 귀양갔다.
※양재역 벽서사건
정미년(1547)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노(李櫓)가 한 봉서(封書)로 입계하기를,
“신 정언각의 딸자식이 제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가기 때문에 데리고 양재역까지 갔더니, 양재역 벽에 글이 붙었는데 국가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그대로 베껴 와서 봉하여 바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불평을 품고 임금을 원망하는 무리들의 한 짓이다.”
하여, 삼정승 윤인경(尹仁鏡)ㆍ이기(李芑)ㆍ정순붕 및 허자(許磁)ㆍ민제인(閔齊仁)ㆍ윤원형ㆍ김광준(金光準) 등을 불러서 정언각의 바친 글을 내려 주었는데, 그 글은 붉은 글씨로,
“계집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하는 것을 곧 볼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
하니 전교하기를,
“근래에 재변이 극히 많고,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별다른 사변이 생길까 염려된다.”
하였다. 윤인경ㆍ기 등이 회계하기를,
“이 글을 보니 무식한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근래에 부정한 의론이 들끓으니, 이 글을 비록 실지로 볼 것은 아니나 부정한 의논이 들끓는다는 것은 헛말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죄를 주어야 할 사람을 경중에 따라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지금 서계한 것은 이 벽서를 보고 비로소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당초에 죄를 정할 때에 가볍게 처리하여 법대로 하지 아니한 때문에 사특한 의론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것은 화근이 아직 있는 까닭입니다. 또 이번에 죄를 정한 뜻을 교서를 지어 중외(中外)에 유시함이 어떻겠습니까?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일죄(一罪 사형)를 주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滋)는 극변안치하고, 임형수(林亨秀)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하고 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정유침(鄭惟伔)ㆍ이천계(李天啓)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ㆍ한주(韓澍)ㆍ안경우(安景祐)는 원방부처하고,권벌ㆍ송희규(宋希奎)ㆍ백인걸(白仁傑)ㆍ이언침(李彦忱)ㆍ민기문(閔起文)ㆍ황박(黃博)ㆍ이진(李震)ㆍ이홍남(李洪男)ㆍ김진종(金振宗)ㆍ윤강원(尹剛元)ㆍ조박(趙璞)ㆍ안세형(安世亨)ㆍ윤충원(尹忠元)ㆍ안함(安馠)은 부처하소서. 생원 이충길(李忠吉)이 관중(館中)에서 말하기를, ‘이덕응(李德應)이 매를 견디지 못하여 자복하였을 뿐이니, 이는 허위다. 어찌 사실 이겠는가.’ 하였으니, 잡아다 심문하게 하소서.”
○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 16) 별과(別科)에 남곤(1471-1527南袞)이 독권관이 되었더니, 어느 시권을 하관(下官)은 취하지 않고자 하는데, 남곤이 극력 고집하여 글에 능한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여 드디어 취하였다. 성명을 봉한 것을 떼어 보니, 황헌(1502-1574黃憲)인데, 시골의 이름 없는 선비였다. 남곤이 부끄러워하였다. 황헌을 자기 집으로 불러 보니, 황헌이 나이가 젊고 살빛이 희어 용모가 좋았다. 남곤이 전일에 자기 지감(知鑑)이 밝았던 것을 실증시키기 위하여 극력 끌어 올려서 홍문관 정자로 발탁시켜 빨리 빛나고 중요한 관직에 올라서 명종 초년에 정승으로 들어갔으니, 나이 50이 채 못 되었다. 천성이 험하고 간사하였다. 을사 연간에는 상중에 있어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가 이때에 정승이 되자, 과거 정유년(1537, 중종 32)에 자기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김안로를 탄핵하여 죄주었던 공을 스스로 자랑하여 갖은 방법으로 활동하여 공신에 추록되었다.
한 번은 빈청에서 회의하여 당인(黨人)에게 죄를 더 줄 때에 극죄(極罪)의 이름을 쓴 것이 매우 많았는데, 이언적, 권벌 같은 이가 다 죽어야 할 명부에 들어 있었다. 대비가 그것은 너무 중하다고 하여 듣지 않으니 황헌이 굳게 청하여 밤이 깊도록 물러나지 않았고, 또 좌리공신을 새로 기록하자는 말을 내어 많은 사람을 기록하여 남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니, 이로 말미암아 공을 탐하고 남을 해치는 무리들이 다투어 옥사를 만들어 사람을 죽여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다.
윤원형(?-1565)이 황헌을 미워하여 부제학 진복창(?-1563)陳復昌)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진복창이 드디어 상소하여 황헌의 죄를 논하는데 이홍윤(李洪胤)의 옥사를 다스리기를 가볍게 하였다고 말을 만드니, 곧 명하여 정승을 갈고 얼마 안 되어 공훈과 관직을 빼앗고 고향으로 추방하였다.
진복창이 처음에 승정원에 상소문을 바치고 옥당에 물러나와 동료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권신을 탄핵하였으니, 반드시 중한 죄를 받을 것이므로 다시 동료들과 서로 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조금 뒤에 임금이 친필 편지로 표창하기를,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은 고금에 드문 바로서 주운(朱雲)ㆍ급암(汲黯)의 충성보다도 나으니, 가상히 여겨 감탄함을 금치 못하겠노라. 이에 중묘(中廟)의 의대(衣襨)와 술잔을 내려 주어 약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는 뜻을 표시하노니 강개한 충성을 끝까지 변치 말라.”
하였다.
윤원형이 황헌을 죄주자는 뜻을 이미 대비에게 아뢰었고 진복창은 그 지시에 따라 한 것이므로 반드시 죄를 얻을 염려가 없는데도 거짓으로 곧은 말을 하는 척하였으니, 어찌 옆에서 보는 자가 그의 내심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을 알랴.
○ 진복창(陣復昌)이 을미년 송경친시(松京親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가문이 낮았는데 그 아버지 의손(義孫)이 녹사(錄事)로 있다가 나가서 현감이 되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복창의 어머니가 여러 번 남자를 거친 뒤에 의손에게 갔다.’ 하여 사람들이 더욱 친하게 여겼다. 진복창이 문장에 능하고 활쏘기를 잘하고, 또 꾀가 많고 간사하여 잘난 척하므로 구수담(具壽聃)의 무리와 같은 이도 속임을 당하여 그를 남들에게 칭찬하고 추천하였다.
윤원형이 국권을 마음대로 결정하여 선비들을 모두 죽일 적에 진복창이 드디어 그에게 붙어서 사냥개가 되었다. 윤원형이 해치려고 생각하는 자가 있으면 진복창이 곧 배격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당대의 명사들이 죽고 귀양간 자가 극히 많았으므로 그를 독사라고 지목하여 모두 흘겨보았다. 구수담도 또한 마침내 그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 뒤에 윤원형도 그를 싫어하여 진복창을 삼수(三水)로 귀양보내고 또 귀양살이 하는 중에 폐단을 일으킨다고 하여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었다.
같은 때에 이무강(?-? 李無彊)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음험하고 간사하여 진복창과 결탁하여 악한 짓을 협조하였다. 진복창이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마침 홍문록(弘文錄)을 하는데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이번에는 경휴(景休)가 당연히 제일 먼저 천거될 것이다.”
하였다. 경휴란 바로 이무강의 자(字)이다. 좌우의 사람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지만 권점(圈點)을 하고 보니 이무강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짓하며, ‘누가 권점을 하지 않았나.’하며, 네가 그랬느니 내가 안 그랬느니 서로 책임을 미루었기 때문에 듣는 이가 웃었다.
이무강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북도에 갔을 때에 지방관이 을사년에 귀양온 사람을 도와 준 이가 있었는데 그를 적발하여 죄를 주었다. 뒤에 진복창이 패하여 귀양가자, 이무강도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니, 수령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전일에 수령이 귀양온 사람을 구제해 주었다고 적발하여 죄준 자이다.”
하고, 돌보아 주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제가 남에게 한 일을 제 자신이 그대로 보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준경(1499-1572 李浚慶)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이무강이 탄핵하여, 문의 재주를 겸하였으니, 병권을 맡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준경이 순변사가 되어 경원에 도착하였을 때에 역졸이 성중에 있는 오막살이집을 가리키며,
“이무강의 거처하는 곳입니다.”
하니, 이준경이 먹을 것을 후히 보내주었다. 어떤 이가 그를 원혐(怨嫌)이 있는 자에게 은혜로써 갚는다고 비웃으니, 이준경이 말하기를,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곤궁한 것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문순공(文純公) 이황(1501-1570 李滉)이 젊어서부터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다. 명종 때에 벼슬하다가 물러나 고향인 예안(禮安)에 살면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성현의 경서(經書)에 정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 주자의 글에 힘을 썼다. 벼슬하거나 그만두는 것을 오로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명종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 판서에까지 발탁되어 임금이 친필의 글을 내려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하고 나가지 않기도 하였다.
금상이 즉위하자, 찬성으로 승진시켜 두 번이나 교서로 불렀다. 무진년(1586, 선조 1)에는 부름을 받고 와서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니, 봉사(封事) 수천 자(字)를 올렸는데, 모두 시국에 적절한 내용이었다.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니 상이 매우 성의로 대우하였다. 얼마 안 되어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잇달아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만류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인견하고 물품을 하사하며, 역마로 호송하게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게 하였다.
이듬해 경오년에 나이 70이 넘은 것으로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죽으니,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예안ㆍ안동ㆍ영천(榮川)에서 모두 서원을 세워 제사지냈다. 저술한 시(詩)ㆍ문(文) 및 서(書)ㆍ소(疏) 30여 권이 세상에 행한다.
○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 金麟厚)가 5세에 글을 짓고 필법(筆法)이 또한 기특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경자년(1540, 중종 53)에 급제하여 곧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상소하여 돌아가 어버이 봉양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허락하여 수찬에서 옥과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종ㆍ인종이 잇달아 승하(昇遐)하매, 병이 있다 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지 아니하였다. 명종이 한 번은 교리로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희춘이 북도로 귀양 갈 때에 가서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멀리 귀양 가고 처자가 의탁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어린 아들을 내가 마땅히 사위로 삼겠다. 염려하지 말게.”
하였다.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이 못났으며 또 나이가 그의 딸과 서로 맞지 않는데도 마침내 사위로 삼았다.
○ 지중추 이현보(1467-1555 李賢輔)가 71세에 외간상(外艱喪 아버지의 상사)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온천에 목욕하겠다고 향리인 예안(禮安)으로 돌아가니, 은퇴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조관(朝官)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나와 전송하였다. 중종이 그 욕심 없고 사양함을 가상히 여겨 지중추에 제수하였고, 인종과 명종이 모두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품계가 여러 번 올라 숭정대부에 이르렀다. 나이 89세에 죽었다 그 때에 아들 중량(仲樑)은 안동 부사, 희량(希樑)은 의흥 현감(義興縣監), 계량(季梁)은 봉화 현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복과 장수를 잘 누렸다고 일컬었다.
○ 퇴계가 자기의 묘명(墓銘)을 스스로 지었는데 이러하다.
나서부터 매우 어리석고 / 生而大癡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어찌 관직을 외람되이 얻었는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퇴할수록 더욱 걸려 들었네 / 爵辭猶嬰
나가다가 자빠지고 / 進行之路
물러나 감추기를 굳게 하였네 / 退藏之貞
임금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慚國恩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했네 / 亶畏聖言
산은 높디 높고 / 有山嶷嶷
물은 줄줄 흐르네 / 有水源源
벼슬 버리고 돌아와 소요하여 / 婆娑初服
여러 사람의 비방을 벗어 났네 / 脫略衆訕
나의 회포는 막혔는데 / 我懷伊阻
나의 패물을 누가 구경 하리 / 我佩誰玩
내 옛사람 생각하니 / 我思古人
참으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네 / 實獲我心
어찌 알리 후세의 사람들이 / 寧知來世
오늘의 내 마음 모를 줄을 / 不獲今兮
근심하는 중에 즐거움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중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 구하리 / 復何求兮
■임진·정유왜란 개요
○ 기축년91589)에 일본국왕 평수길(平秀吉)이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우리 나라의 통신사를 청하기 때문에 황윤길(黃允吉)을 상사(上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삼고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보냈다.
임진년 4월에 왜적이 크게 침입하였는데, 의지(義智)ㆍ행장(行長)ㆍ청정(淸正) 등이 선봉이 되었다. 동래와 부산이 함락되고, 순변사 이일(李鎰)ㆍ신립(申砬) 등이 잇달아 패하니, 상이 서쪽으로 평양으로 파천하였다가 의주(義州)로 가고, 적은 연달아 삼경(三京 경성ㆍ개성ㆍ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래서 명 나라에 급한 사정을 고하니 군사를 내어 와서 구(救)하여 다음해 계사년 정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니, 왜장 행장 등이 빠져 도망하고, 개성과 경성을 잇달아 수복되었다.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이르렀는데, 적이 해상에 둔을 치며 웅거하여 철퇴하지 않자 이여송 등이 군사를 돌렸다. 10월에 임금이 해주(海州)로부터 경성으로 돌아왔다.
왜적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에 중국 조정에서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왜군에게 심부름을 보내었다. 심유경이 아비가 일찍이 왜인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심유경이 또한 어려서부터 아비를 따라 오래 왜국에 있어 그들의 실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우리가 한 번 이긴 뒤에 각도에 나누어 둔을 쳤던 왜적이 경성에 모여서 갈 뜻이 없었다. 심유경이 다시 왜적 속에 들어가서 강화할 뜻으로 타이르니 적이 곧 철퇴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사절(使節)로 삼아 보내었더니,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들을 심히 소홀히 대우하고, 다만 포로되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돌려 보내었다. 오랜 뒤에 적장 행장 등이 소리치기를,
“명 나라에서 만약 강화를 허락하여 책봉하는 조사(詔使)를 보낸다면 우리는 군사를 철퇴시키겠다.”
하였다. 심유경이 또 왕래하여 명 나라에 그 말을 전하니, 명 나라에서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誠)을 상사(上使)로 삼고, 총병 양방형(楊方亨)을 부사로 삼아서 보내었다. 그들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자 수길(秀吉)이 영접하는 사자를 보내지 아니하고, 또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종성 등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체류된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어떤 이가 비밀리에 왜적이 호의가 없어 사신을 구류하려 한다고 하니, 이종성이 몰래 도망하여 급히 달려 경성에 도착하였다. 온 나라가 놀래어 왜적이 이종성을 추격하여 덤빌까 의심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다만 양방형을 엄중히 감시할 뿐이었다. 양방형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아뢰니, 이에 이종성을 잡아 가고 양방형을 상사(上使)에 승진시키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서 그 일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거처하는 곳에 도착하자 수길이 극히 무례하게 대접하고 말하기를,
“만약 황녀(皇女)를 일본으로 시집보내기를 허락한다면 강화가 될 수 있다.”
하였다. 명 나라 병부(兵部)에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서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기에, 이에 황신(黃愼)을 상사로 삼고, 무관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아 양방형 등을 따라가게 하였다. 수길이 더욱 멸시하여 국서(國書)에 답하지 않았는데, 황신은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왔다.
당초에 강화에 관한 일은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이적(夷狄)을 금수처럼 대우하여 길들일 수는 없고 고삐로 얽어매어 발악이나 하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전연 그른 것은 아니지만 왜적의 교활한 꾀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심유경의 간사한 말을 믿고 매양 왜적의 신의를 보증할 수 있다고 하여 구차스럽게 결과를 맺으려다가 마침내 보잘것없는 왜적들에게 욕을 당하게 된 것은 석성의 죄였다. 석성과 심유경이 함께 하옥되어 죽었다.
정유년(1597, 선조 36)에 명 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와서 구원하였는데, 대장 양원(楊元)은 남원을 지키고,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켰다. 왜적이 크게 덤벼 남원을 함락시키자, 병사 이복남(李福男), 부사 임현(任鉉),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등이 모두 죽고,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전주 부윤 박경신(朴慶新)이 남원 함락의 소식을 듣고 명 나라 장수에게 전주성을 버리고 나가기를 청하니 듣지 않았다. 전주 사람들이 성문을 지키는 명 나라 군사를 죽이기까지 하고 박경신이 성문을 박차고 도망하였다. 이에 적이 하삼도(下三道)의 고을들을 짓밟고 계속 진격하여 직산(稷山)까지 이르니 경성이 물 끓는 듯하였다. 동궁(東宮 광해군)이 종묘사직의 위패 및 중전을 모시고 동대문으로 나가 관서(關西)로 향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다가 적병이 깊이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행군을 배(倍)로 재촉하여 들어와서 경성에 머물면서 날랜 기병(騎兵)을 보내 직산에서 맞아 싸워 패배시키니, 인심이 차츰 안정되고 적이 또 물러갔다. 어떤 이는 말하되, 적이 충청도에까지 이르렀다가 그친 것은 수길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병부 상서 형개(刑玠)가 잇달아 들어와서 경성에 유진(留鎭)하였다. 양호(楊鎬)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청정(淸正)을 울산의 경계인 도산책(道山柵)에서 포위하니, 적이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마침 큰 눈이 와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양식 운반도 부족하기에 군사를 돌렸다.
이때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도독 마귀(麻貴)는 양호를 따라 청정을 치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에 둔친 적을 치고, 도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에 둔친 적을 치고 진인(陳璘)은 수군을 거느려 해로를 경유하여 협공하여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는데도 여러 장수들이 서로 통제되지 아니하고 각기 성공을 요행으로 바래고 가볍게 전진하다가 동일원(蕫一元)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고, 다른 길의 군사도 모두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형개(邢玠)의 군문(軍門)에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란 자가 양호의 30가지 죄를 탄핵하여 관직을 갈게 하니, 만세덕(萬世德)이 양호를 대신하여 왔다. 그러나 양호가 아랫사람을 통솔하는데 기강이 있어 호령에 바람이 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칭송하였었다. 얼마 안 되어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병들어 죽자, 적이 차차 철퇴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한 복판에서 막아 치다가 총탄에 맞아 죽으니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 서원은 송(宋) 나라 시대에 시작하여 원(元) 나라 말년에 성하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없었다. 가정(嘉靖) 연간에 사문(斯文) 주세붕(1495-1554 周世鵬)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에 군내 백운동(白雲洞)에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 서원을 창립하여 선비들이 수양하고 글 읽을 처소로 삼고 이어서 사당을 세워 안유(安裕)를 제사지냈다. 조정에 알려지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다. 그 뒤에 잇달아 설립되니, 영천(永川)에는 임고(臨皐)서원, 함양에는 남계(藍溪) 서원, 송도에는 숭양(崧陽) 서원, 성주에는 천곡(川谷) 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 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峰) 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 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 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 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 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 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岩) 서원인데, 혹은 유선(儒先)이 거처하던 곳으로 혹은 왕래하던 땅으로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이밖에도 또한 많이 있는데, 다 기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