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희 콘서트 with 송창식
어제 저녁부터 오늘 점심까지 1박 2일의 초등학교 동창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회장으로써 최선을 다하여 정성껏 준비하고 집행하여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좋았지만 만장일치로 연임시키는 바람에 다시 3년을 봉사하게 됐다. 숙박을 희망한 18명의 친구들이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 상관스파리조트에서 함께 자고 아침에는 편백나무 숲 산행을 마친 뒤 전주로 나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 해산했다.
오후에는 대전의 박인희씨 컴백 콘서트에 가야하므로 부리나케 시골집으로 직행하여 해피와 초코에게 밥을 주고, 닭들에게는 모이를 주고, 비단잉어들에게는 맑은 물을 준 뒤 후다닥 집으로 돌아와 양드리와 함께 5시 서대전행 무궁화 열차를 탔다.
지난 4월 9일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서 박인희씨를 보게 되었고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며 깜짝 놀랐다. 곧 콘서트를 개최한다는 말에 즉시 대전공연 티켓(5월 22일)을 구매했다.
누구나 대부분 그런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도 대중음악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것도 포크에만 필이 꽂힌 나의 20대 젊은 시절은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이장희, 트윈 폴리오, 뚜아에 무아, 박인희, 양희은, 은희, 이연실과 함께 살았었다. 나는 그들의 시 다름 아닌 노랫말과 기타와 함께 부르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음색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런 정서를 잘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에게 감성과 정서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저들이라 말한다. 나는 80년대 이후에도 노래방에서 저들만의 노래를 불러 대서 친구들로부터 ?판 깬다?는 비난도 많이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저들의 노래를 그리워하고 부르는 것에 크게 만족하며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며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세시봉 가수들은 재기해서 방송에 자주 출연하고 실제로 공연도 보았고, 은희씨는 미국에서 돌아와 전남 함평에서 갈옷을 만들며 아름답게 살고 있다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려 그저『그리운 사람』이, 아니 전설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박인희와 이연실이었다.
이연실씨는 그 누구도 행방을 알 수 없다 하거니와, 미국으로 건너가서 DJ를 하며 살고 있다는 박인희씨의 귀국과 콘서트는 나를 충분히 설레게 하는 빅 뉴스였다.
나는 1945년생인 그녀가 1969년 이필원과 국내 최초 혼성 포크 듀엣 《뚜아에 무아》로 데뷔하여 부른 〈약속〉을 무지 좋아했다. 저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화음도 놀라웠지만 트로트 시대에 상상을 초월하여 느닷없이 나타난 전혀 새로운 장르의 대중음악에 나는 경악했다. 가난한 대학생이던 내겐 물론 음반도 없고 오직 테이프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게 어디론가 없어지고 90년대 이후 방송에서 포크가 시들해지자 들어볼 수조차 없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의 등장으로 다행히 환상적인 저 노래를 마음대로 들을 수가 있었다.
곧 듀엣은 해체되고 1972년부터 박인희는 맑고 청아한 음색과 시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노랫말로 큰 사랑을 받는 포크의 대표적인 시인가수가 되었다.〈모닥불〉,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봄이 오는 길〉, 〈방랑자〉 등 서정성이 강한 멜로디와 가사의 포크 음악을 직접 만들어 큰 사랑을 받은 1970년대 보기 드문 싱어 송 라이터였고, 맑고 청아한 음성으로 〈하얀 조가비〉,〈눈빛만 보아도〉,〈님이 오는 소리〉 〈썸머 와인〉을 부르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 시를 낭송한 음반으로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우리 젊은 대학생들은 해수욕장이나 여행지에서 저녁이면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반드시 〈모닥불〉을 불러야만 했다. 80년대 초인가 그녀가 서울에서 레코드판 가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찾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시골뜨기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아! 나에게 박인희는 마치 천사 같은 존재였고 어떤 그리움이었다. 20대 청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자연을 노래하고 박인환의 시를 감미롭게 낭송하는 그녀는 결코 한국의 한 여자가수가 아니라 어느 별에서 보내준 것 같은,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지성미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35년 동안이나 가요계를 떠나 미국에서 살던 그녀는 내게는 결코 잊혀 진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나마 1945년생으로 올해 72살이 된 그녀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보고 싶고 노래를 들어보고 싶었다. 본래 미인이 아닌 소박한 시골 처녀 같은 그녀이고 방송을 통해 이제 얼굴에는 주름이 많은 것도 알았지만 그녀는 결코 할머니가 아니라 분명히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는 20대의 박인희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서울, 일산, 성남, 수원에 이어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는 내게는 우선 가까워서 고마운 일인데, 대전지역만이 아닌 전국에서 모인 많은 60대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박인희는 35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 젊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살아 있었다. 다른 어느 포크가수들보다 그 목소리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얼굴은 비록 주름살이 많았지만 생머리에 가벼운 반 코트, 백바지에 긴 머플러를 한 그녀는 결코 일흔 두 살의 할머니가 아니라 저 40년 전 70년대 초의 20대 모습 그대로였다. 감성과 지성과 젊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사는 오직 유일한 한국여성은 저 박인희가 아닐까? 세월이 흐른 뒤 몸매는 전혀 관리 안 된 뚱뚱한 모습에 얼굴은 보톡스로 필러로 또 성형수술로 딴 사람처럼 변한 모습으로 방송에 나타나 나를 매우 슬프게 하는 많은 60대 여자가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나는 양희은의 노래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방송에 나오는 여걸 같은 양희은씨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도대체 옛 양희은의 모습과 음색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걸어가는 박인희의 모습은 영락없이 생머리를 한 조신한 새침 떼기 숙대생 다름 아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 썼다는 〈그리운 사람끼리〉를 들으며 양드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건을 달라고 한다. 나도 덩달아 이어지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눈물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여 주체하기 어렵다. 결코 노래가 슬퍼서가 아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리운 옛 시절이 가슴저리게 그리워지고, 그립던 박인희씨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이다.
중간에 송창식의 무대가 주어졌다. 1947년생으로 금년 나이 일흔 살이다. 1967년에 윤형주와 함께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이듬해인 1968년에〈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송창식은 1974년에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왜 불러〉,〈고래사냥〉도 대 히트곡이다. 나는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과 〈웨딩 케익〉을 좋아하고 송창식의 〈딩동댕 지난여름〉,〈한번 쯤〉,〈맨 처음 고백〉과 〈우리는〉을 지독하게도 사랑한다. 〈한번 쯤〉,〈맨 처음 고백〉이나〈우리는〉을 듣거나 부를라 치면 어쩌면 70년대 10대와 20대의 순결한 나같은 청춘남성들의 마음과 정서를 저리도 잘 읽어내어 노랫말로 그렸는지 그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다. 나는 송창식이 노래한 저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간직하며 살려한다. 그러니 누가 내게 ?당신 인생에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세종대왕이나 톨스토이나 김구선생이 아니라 바로 저 송창식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지 않겠나?
그가 트윈 폴리오에서 들려주는 윤형주와의 최고의 화음, 뛰어난 가창력과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작사와 작곡, 노래하는 열정을 보면 그는 분명 천재성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천재성을 인정하는 가수가 바로 송창식과 박인희인데 오늘 박인희의 첫 콘서트에 송창식이 찬조 출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오랜만에 최선을 다해 힘찬 목소리로 칠십 노인답지 않게 자신의 히트곡들을 열정적으로 불러주었다. 계산된 기획이겠지만 결코 박인희의 콘서트임을 잊지 않고 담담하게 최선을 다하여 노래만 불렀다. 다시 재개된 그녀의 콘서트는 계획된 대로 앵콜 송으로〈모닥불〉을 택하여 우리 모두가 일어나 신나게 함께 부르는 것으로 행복한 시간을 마무리하였다. 노래를 함께 부르는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70년대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공연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 나의 양드리가 10년 후에도 박인희씨 처럼 젊고 아름다운 마음과 모습과 정서를 가지고 마치 소녀처럼, 마치 20대의 여대생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곡히 바란다는 참으로 어이없고 어려운 주문을 했다. 그런데 그녀도 흔쾌히 동의했다. 고마운 일이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긴다. 우선 나부터 10년 세월이 흘러 얼굴은 비록 노인으로 변한다 해도 여전히 몸은 운동을 통해 건강하고, 마음은 결코 할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항상 새로운 생각과 정서와 생활리듬을 만들어내면서 욕심 없는 마음으로 여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리 안 될 것 없다는 생각이다. 11시 20분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니 오늘 하루가 피곤하기도 했으나 이런 행복한 피곤은 앞으로도 결코 거절하지 않으련다.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아련히 남아있던 먼지를 말끔히 씻어낸 느낌?
5월 25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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