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일기(黙齋日記)
묵재 이귀(李貴 1557∼1633)
안방준(安邦俊 1573-1654)지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 대호군 이수장(李壽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기(李夔)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이이(李珥 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이귀는 1582년(선조15) 생원시를 거쳐, 1603년(선조36) 문과에 합격하였다. 장성현감, 김제군수 및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김제군수 시절에는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 계생이라고도 함, 1573~1610)의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허균의 문집에는 ‘매창은 이귀의 정인(情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 해 3월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해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신경진·최명길·이흥립(李興立)·심명세(沈命世)·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건의해 국력 충진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 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 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해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묵재일기를 읽어보면 이는 이귀에 관한 기록이지 묵재가 직접 써서 남긴 글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귀는 의지가 엄청 강한 인물이다. 26세에 소과에 합격하여 낮은 벼슬을 거쳐 47세에 문과에 합격한다. 서인으로서 광해군 시절 낮은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67세 때인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서인정권을 세운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정은 높고 강직하며 학문이 깊고 계책에도 능하며 자기 스승인 이이와 성혼에 대한 의리가 크나, 대의명분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서인의 대표적인 당파주의자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는 어려운 인물이 아닌가 한다.
▣묵재일기 1
■평거언행 (平居言行)
○ 선조 8년(1575) 을해년. 조정은 의논이 갈려 당파가 동ㆍ서(東西)로 나뉘었다. 율곡은 매우 걱정하여 중간에서 화해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꺼리하고 미워하였다.
○ 계미년(1583, 선조 16) 겨울에 오랑캐 난리가 있은 후, 대사간 송응개(宋應漑)와 전한(典翰) 허봉(許篈) 등이, ‘교만하여 위를 업신여기고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그 뜻이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함이냐?’ 하는 등의 말로써 율곡을 탄핵하자, 율곡은 드디어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가 상소하여 구원하고 해명하자 당시의 의논은 우계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다. 상이 듣고 비로소 의심하자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는데, 공(公 이귀)이 여러 선비와 더불어 상소하여 사실대로 변명하여 선조가 크게 깨달아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 을유년(1585, 선조 18) 가을. 삼사(三司)의 견강부회하는 무리들이 비로소 우계와 율곡 두 어진이를 심의겸(沈義謙)의 당파라고 하여, 당적(黨籍)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공이 두 어진이의 무함을 당한 곡절을 낱낱이 들어서 상소하여 변명하니, 선조는 비답하기를,
“너의 말이 옳다. 대간이 이이와 성혼을 아울러 지적한 것은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대저 심의겸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곧 간사한 의논이지만, 이이와 성혼을 그르다고 하는 자 또한 바른 의논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잘못된 자조차 옳다고 주장하고, 만약 그르다고 한다면 옳은 자조차 그르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곧 당에 치우친 간사한 자의 소행이다.’ 하였는데, 나의 뜻은 이 말에 다했다.”
고 하였다.
또, 정여립(鄭汝立)이 우계와 율곡의 문하에 출입한 사람으로서 도리어 시론에 아부하여 우계와 율곡을 배반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어 곧 율곡의 종자(從子) 이경진(李景震)과 더불어 정여립이 율곡에게 계미년(1583, 선조 16) 9월과 11월에 보낸 편지와 갑신년(1584, 선조 17) 1월, 율곡이 죽기 사흘 전에 보낸 편지를 모두 찾아내어 상소문에 자세히 써서 봉해 올렸다. 선조는 경연에서 묻기를,
“정여립이 이이에게 준 편지를 지금 경연에 있는 사람으로서 직접 본 자가 있느냐?”
하니, 이덕형(李德馨)이 대답하기를,
“이귀(李貴)는 신과 같은 마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 편지를 신에게 보였습니다.”
하고, 김홍민(金弘敏) 또한 대답하기를,
“이귀가 일찍이 외어 전하는 것을 신도 들었습니다.”
하니, 선조는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邢恕)로군!”
하였다. 그러자 정여립은 물러가 도망쳐버렸다.
○ 신축년(1601, 선조 34). 공은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소모관으로서 순행하여 영남에 이르렀다. 공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합천(陜川)에 살며 무단으로 그 도당을 거느리고, 감사의 사명(使命)까지 위협으로 억누르는 등 제멋대로 기세부리는 상황을 익히 듣고 마음에 항상 미워했다. 가까이 안음(安陰)에 이르니, 고을 사또가 정 참의(鄭參議 정인홍)를 나가서 기다린다는 이유로 영접하지 않았다. 공은 크게 노하여.
“나를 영접하는 것은 공적인 일이요, 정인홍을 영접하는 것은 사적인 일이다. 정인홍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수령을 위협으로 억누르는가.”
하고, 먼저 합천군에 이문하기를,
“군공 첨지(軍功僉知) 정인홍이 젊을 때부터 유림에 몸을 의탁하여 헛된 이름을 얻었다. 그리하여 의리가 아닌 짓을 많이 하였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소위 유자(儒者)란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조용히 수양할 뿐, 조정의 옳고 그름과 대부의 어질고 간사함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 나라에 살면서 대부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정인홍은 그렇지 않다. 그의 평생 행실을 공평하게 상고하면, 기세를 떠벌리고 안팎으로 결탁하여 사명과 수령을 위협으로 억누르면서 제 욕심만 멋대로 채운 데 불과할 뿐이다.”
하고, 이어 정인홍이 사납게 위협하여 폐단을 지은 죄 10여 가지를 열거하여 수죄하였으며,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그의 종을 잡아 가둔 다음 첩보(牒報)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정인홍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공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전일 이문 중에 열거한 죄목을 낱낱이 들어서 상소로 항쟁하였다. 선조는 공의 상소문을 보고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인홍은 이로 하여 혐의를 피해 물러났으나, 공 또한 이로써 파직당했다.
■반정시사(反正時事)
■치역론변(治逆論辨)
○1623년 7월. 특명으로 공에게 이상(二相 찬성)을 제수하였다. 대개 양사에서 기자헌(1567-1624)을 죄주라는 의논이 바야흐로 벌어졌는데, 공과는 소견이 맞지 않아, 대각(臺閣)에 오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특명이 내려진 것이다.
○ 갑자년(1624, 인조 2) 1월. 공은 우찬성으로 있었는데, 역변이 또 일어났다. 윤의립(尹義立)의 서얼 조카 인발(仁發) 등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핑계하고 인성의 집 근처에 모여서 이괄(1587-1624)과 더불어 서로 통했다. 이우(李佑)와 문회(文晦)가 그 모의를 알고 장차 고변하려 할 즈음에, 인발이 그 일이 누설될 줄 알고 죽은 시체를 구해 얼굴 가죽을 벗긴 다음 이부현(梨府峴)에 두고는 인발의 시체라고 핑계대고 도망쳐 자취를 없앨 계획을 하였다. 문회 등이 훈신(勳臣)들에게 고변했으나, 발표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공은
“신하로서 이미 이 말을 들었으면, 고변했다는 비난을 들을지라도 화가 종묘사직에 박두하였는데, 혐의를 피해 덮어둘 수 없다.”
하고 문회 등을 머물러 두고, 군관을 발송하여 끌어댄 정찬(鄭燦)ㆍ정방열(鄭邦說)ㆍ한흔(韓訢)ㆍ한준철(韓浚哲) 등을 먼저 체포하였다.
그날 밤에 모든 훈신을 공의 집으로 불러모으고 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을 청하니, 병으로 오지 못하고 그 아들 회일(會一)만을 보냈다. 그래서 여러 공들과 함께 그 말을 들은 다음 고변하게 하고, 또 여러 대장과 더불어 각자 군관을 거느리고 궐하(闕下)를 호위하였다.
이때에 날마다 추국을 하였으나 모든 역적들이 형장을 참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때 추관이 무고라고 여겨서 고변한 자 한흔을 죽이고, 또 문회와 이우 등을 아울러 죽여서 옥사를 뒤집을 계획을 하려고 했다. 공이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탑전에서 힘껏 아뢰어 죽이지를 못했다. 일이 점점 만연되어 기자헌(奇自獻 1567-1624) 등 30여 인이 체포되었고, 이괄의 아비도 끌려나왔다. 그런데 국청에서는 그 아들 전(栴)만을 잡기를 청하고, 이괄은 묻지 않았다. 공은 생각에, ‘이괄은 한 나라의 군병을 통솔하는 대장인데, 이제 역적이란 죄명으로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면서, 그 아비는 강한 군병을 거느리고 외방에 있게 하니, 만약 반역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사랑하는 아들을 묶어 보내고 머리를 숙이면서 명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그 관직을 갈고 아울러 잡아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다가 만약 일이 억울하거나 그릇되었다면, 도로 그 맡았던 관직에 다시 보직토록 함이 가하다.’고 여겨, 곧 이런 뜻으로 탑전에서 힘껏 아뢰되 심지어는 다투기까지 하였는데, 상께서는 너무 체면을 잃었다는 이유로 특명하여 추고하게 했다.
김원량(金元亮)은 본디 이괄과 서로 친하다. 이 때문에 여러 공들에게 힘껏 구명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에게 편지하여, 이괄의 사정을 밝혔는데, 심지어는 당초에 인성군을 세우려고 의논한 일을 들어 바르다고 하고, 또 그 아들의 재주와 행실을 몹시 칭찬하면서 원통한 실상을 낱낱이 진술하고는 앞으로 사생을 같이 하고자 한다고까지 하였으나, 공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괄이 마침내 선전관을 죽이고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이괄이 반역했다는 글이 이르자, 조정과 시골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상은 즉시 공을 불러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되오. 경의 생각은 지금 적의 형세가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공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원수(元帥)의 군사가 이미 황주(黃州)에서 패하였고, 관서(關西)의 병력이 이미 적을 소멸시키지 못했으니, 해서(海西)의 병력 역시 반드시 막아낼 수 없을 것이며, 해서가 또 실패한다면 경기의 병력도 결코 당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성안에 또 내응하는 사람이 많으니, 뜻밖의 변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을 위해서 계획한다면, 먼저 종묘사직과 대비ㆍ제전(諸殿)을 받들어 강도에 옮겨 모시고, 사대부의 가속으로서 피난하는 자 또한 금하지 말 것이며, 전하께서는 친히 삼군(三軍)을 독려하여 시기를 보아 적을 소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크게 옳다고 여겨 대신에게 물어보고 장차 거행하려 했었는데, 한쪽 의논에 저지를 당해 마침내 거행되지 못했다. 이때 김원량은 오히려 이괄이 반란하지 않았다고 하여, 스스로 가서 달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옥에 있는 여러 죄수를 국문할 겨를이 없다고 여러 논의가 내어다 베기를 청하니, 상은 윤허하였다. 공은 생각에, ‘시국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죄없는 이를 한 사람이라도 죽이는 것은 왕자(王者)가 하지 않는 것이니, 그 원정(元情)을 받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여겨, 탑전에서 아뢰고 힘껏 다투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헌 등 38인이 일시에 처형되었다. 또 김원량은 일찍이 이괄이 서쪽으로 떠날 때에, 영변 판관을 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이제 또 빨리 가서 구원하기를 도모하였더니, 그가 모의함을 미리 알았다고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기에 이르렀으며, 훈적(勳籍)도 깎아버렸다.
○1624 2월 공은 연석(筵席)에서 힘껏 말하여 물리치고 또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의 조정에 신 한 사람만 없으면 국가가 자연 편안하고 고요할 것입니다. 어찌 뜻밖의 환란을 근심하십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전리(田里)로 돌아감을 특별히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위에서 혹 말고삐 잡던 저의 조그만 수고를 생각하시거든, 돈과 비단을 넉넉히 주어서 술과 밥을 먹게 해주시고 노래하는 아이와 아름다운 여색을 더 주어 남은 여생을 즐기도록 하옵소서. 이것이 또한 옛날 제왕이 공신을 보호하던 훌륭한 일입니다.”
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보니, 말이 너무 지나치오. 화합하면서 아부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일이요, 아부하면서 화합하지 않는 것은 소인의 태도인 것이오. 이로써 본다면 옥당의 장관은 군자라고 말할 수 있소. 군부(君父)를 허물없는 곳에 들이고자 하여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니, 또한 착하지 않소. 노래하는 아이와 아름다운 여색을 청한 것은 국가로서 우대하는 도리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나,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는 또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것이오. 경은 사피하지 말고 더욱 충심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시오.”
하였다. 공은 또 연석에서, 양사를 힘껏 배척하고 아울러 옥당의 장관을 배척하기를, ‘보좌한다고 핑계하고 다른 의논을 주장하여 먼 장래를 염려하는 계획을 막아버리고자 한다.’ 하여, 간사하고 교묘하게 피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정경세는 또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고, 대사헌 정엽(鄭曄) 또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1625년 3월 : 당초 이괄의 변란이 일어날 때에 38인의 죽음에 대해서 공은 힘껏 다투었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기에, 공은 신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곧 상소하기를,
“임금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인(仁)을 본받아서, 만물로 하여금 모두 각기 잘 살도록 하여, 한 사물이라도 천지 사이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한 다음이라야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옥사를 다스리는 일에 더욱 뜻을 두시어 비록 역옥에 관계된 것이라도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삼가시어 오직 한 사람이라도 잘못 걸릴까 걱정하시어 매양 석방시키는 날을 당하면 여러번 죄를 씻어주시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역적 이괄이 배반했다는 통보가 도성에 들어오던 날에, 옥에 갇혔던 38인이 모두 여러 역적의 구초에 나왔고, 그 실상과 형적이 내응에 관계가 된 것이 많았으며, 역적의 경보가 급박하여 상하가 모두 겨를이 없어 모든 의논이, ‘빨리 처단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헤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 처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세가 비록 부득이한 경우에서 나왔으나 그중에는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리는 원통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 당시 국문한 후에 죄를 정하자고 힘껏 청했는데, 다른 의논에 저지되어 정지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대신으로 하여금 그 죄안을 찾아내어 공론에 따라 명백히 조사하고 분변하여, 원한을 품은 자로 하여금 성상의 아래에서 신원이 되도록 하시면 천재지변이 없어지고 인심도 감동될 것이며, 그 하늘에 빌어 나라의 명맥을 길이 연장하는 아름다움도 반드시 여기에서 기초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살아서 죄를 입은 자는 차례로 석방되는데, 원한을 품고 죽은 자는 신원할 길이 없습니다. 왕자(王者)의 정사가 어찌 살고 죽음으로써 간격을 둘 수 있습니까? 신은 마음에 항상 원통하게 여겼으나, 일찍이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역옥에 관계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구언(求言)하는 날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옵니다.”
하였다. 상은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다 알았소. 경의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의논해서 처리하겠소.”
하였는데, 그 후에 모두 신원되었다.
▣묵재일기 2
■추숭론변(追崇論辨)
○ 병인년(1626, 인조 4) 1월, 공은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때 계운궁(인조 생모, 후일 인헌왕후 추존 1578-1626) 초상을 당하여 조정이 주상의 복제를 논의하는데, 김장생(1548-1631 金長生)이,
“전하께서 소종(小宗)의 지손(支孫)으로서 선묘(宣廟)의 대통을 계승하였으니, 한 선제(漢宣帝)와 서로 같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입후(立後)한 것은 남에게 입후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숙질간의 복(服)으로 입는 것이 옳고 삼년상의 복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온 조정은 모두 그 의논을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기를 청했으나, 성상께서 굳게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고, 대신과 삼사(三司)가 힘껏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백관은 궐문 밖에 엎드리고, 태학 유생은 소를 올려, 예경(禮經)의, ‘대통을 승중(承重)한 자는 그 소종에게 복을 낮추어 입는다’는 문구를 인용하고, 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일을 증거하면서, ‘이른바 고(考)라 일컬음은 임시 권도로 일컬은 것이다’라고까지 하였으며, 완평(完平 이원익 1547-1634)은 그때 수상(首相)으로 있었는데, 심지어 거취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기 때문에 주상은 하는 수 없어 이에 부재모상(父在母喪)의 복제에 압존(壓尊)하는 것과 같이 낮추어서 장기(杖期)로 정했었다. 그리고 백관은 회곡(會哭)하고 변복(變服)하는 것이 국상(國喪)에 혐의스럽다고 하여, 궐문 안에서만 소복을 입고 궐문 밖에 나가서는 시복(時服)을 입되, 성복(成服) 날까지로 한정하였다. 그때 조정 의논이 오히려 기년복은 불가하다 하여 끝없이 다투기 때문에 공은 전정(殿庭) 모임에서 대신과 삼사의 근거없는 말을 힘껏 비난하고, 또 차자를 올려서 삼년상 행하기를 청한 글에,
“대원군께서 만약 지금 계신다면 전하께서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상왕(相王)에게 한 것과 같이 양위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사생에 간격이 있다고 한다면, 추숭은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나, 그 복제만은 예(禮)에 따라 3년으로 정해야 될 것입니다. 동지(同知) 김장생(金長生)이 한나라 선제(宣帝)가 소제(昭帝)에게 입후한 것으로써 비유한 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선묘께서는 전하의 할아버지이고 소제는 선제의 종조(從祖) 항렬입니다. 선제는 이미 지손(支孫)으로서 소제에게 입후하고 또 그 아버지 사황손(史皇孫)을 황고(皇考)라 일컬었기 때문에 정자가, ‘소종이 대종(大宗)을 어지럽혔다’는 것으로써 배척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만약 할아버지 계통을 이은 자로서 그 아버지를 여길 수 없다고 한다면, 위 첩(衛輒)이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거역했던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영상 이원익은 원로 대신으로서 또한 그를 옳게 여겨 거취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으니, 그 식견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정하던 초기에 예관이 헌의(獻議)하여, 전하께서 대원군에게는 고(考)라 일컫고 선묘에게는 조(祖)라 일컬었으니, 이것은 남에게 입후한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김장생의 의논과 같이 숙부(叔父)라 일컫는다면 사친(私親)에 대한 복으로써 의논해야 될 것입니다. 이미 자(子)라 일컫고 고(考)라 일컬었는데, 복은 부장기(不杖期)로 정한다면 이것은 상복에만 숙부로써 대우하는 것이오니, 과연 예경(禮經)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정청(庭請)한 글에 이르기를, ‘고(考)라고 일컬은 것은 임시로 부득이한 칭호이다’ 하였습니다. 고(考)라는 명칭이 어떠한 일이기에 임시로 부득이하게 칭하옵니까? 또 옥당의 차자에도 이르기를, ‘전하께서 종묘 사직에 죄를 얻는다’ 하고 또, ‘마침내 어지럽고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이미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았던 까닭에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나라를 잃었었는데, 오늘날 모든 신하들이 또 전하께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도록 인도하고자 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조정 의논에 한 번 미혹되신다면 마침내 종묘 사직에 죄를 얻음이 도리어 광해군이 폐모한 것보다 더 심할까 염려되옵니다. 신은 저의 소견을 고집하여 남과 합치하지 않으므로, 매양 조정의 큰 의논에 모순되어 위로 체면을 잃고 아래로 뭇 비방만 불러일으키니, 신의 죄가 크옵니다. 청컨대 관직을 해면시켜서 어리석은 분수를 편하게 해 주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아뢴 바는 옳으나, 말을 만드는 사이에 타당하지 못한 의논이 없지 않니, 대강 말하지 않을 수 없소. 김장생은 할아버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오늘날 조신(朝臣)들은 종통(宗統) 있는 것만 알고 남에게 입후한 자와 다른 것은 알지 못하니, 나의 뜻에도 사리와 예문의 본뜻은 모른다고 생각이 되오. 하지만 요즈음 아뢴 차자에 타당하지 못한 말이 한두 대목 아니었으니, 내가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오. 비록 출계(出繼)를 하지 않았더라도 부재모상(父在母喪)에는 강복(降服)하는 제도가 있으니, 오늘날 강복하는 것은 대통을 높인 것이고 숙부로써 대우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경은 괴외(蒯聵)와 위 첩(衛輒)에게 비유했으니, 이 말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소. 또한 내가 선군(先君)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일이 없고 조정에서도 또한 아버지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 광해군에게 비유하고자 하니, 이것은 무슨 뜻이오. 경은 두둔해서 바로잡고자 하다가 도리어 군부(君父)를 불효한 곳에 떨어뜨리는 줄을 알지 못하니, 경의 식견도 나는 알 수 없소. 또 이원익은 선조(先朝)의 원로이며 국가의 영수인데, 여지없이 멸시하고 모욕하였으니, 이 또한 불가하오. 경은 남의 말을 너무 믿지 말고, 사대부를 가볍게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으니, 사직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완평(完平)이 사직하고 나가니, 여러 의논이 떼지어 일어나서 공을 지목하기를, ‘주상께 영합한다’ 하여, 삼사가 피혐하고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그들은 ‘딴 의논을 제창하고 공론을 배격하며, 군부를 가볍게 여기고 조정을 멸시한다’는 것으로써 죄목을 삼아서 관작을 삭탈하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비답하기를,
“이귀가 아뢴 말은 비록 차례가 없는 것도 있으나, 그의 말이 반드시 다 그른 것은 아니다. 이미 소견이 있으면 반드시 숨김이 없이 아뢰는 것이 또한 임금을 섬기는 한 도리인 것이다. 이귀는 천성이 우직하여 젊을 때부터 간사한 태도가 없었다. 너희가 그 본정은 따져보지 않고 갑자기 ‘영합한다’는 등의 말로써 죄안을 얽어 만들었으니, 오늘날 의논 또한 너무 심하지 않느냐. 이귀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벌을 줄 수는 없으니, 다시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이 또 차자를 올려 변명하고 또, ‘임금의 뜻에 영합하고, 정론(正論)에 죄를 얻고 대신을 모욕하고 심사를 꾸짖었다’는 죄명으로써 탄핵하니, 비답하기를,
“이귀의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았으나, 공이 사직을 보존하고, 지위가 높은 품계에 이르렀으니, 연소한 신진배로서는 경솔하게 업신여길 수 없는 대상이다. 요즈음 너희 무리가 제 마음대로 여지없이 모욕하니, 이 또한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그의 말을 너무 곧다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간사하다고 말함은 크게 불가하니, 너무 심한 의논은 하지 말라.”
하였다. 그 후에도 잇달아 아뢰니, 상은 병조 판서만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 임신년(1632, 인조 10) 1월. 공이 정석(政席)에서 박지계를 지평의 망(望)에 추천하려고 하니, 참판 이성구(李聖求 1584-1644)와 참의 유백증(1587-1646 兪伯曾) 등이 모두 말하기를,
“박지계(1573-1635)는 바야흐로 삭적(削籍)을 당했으니, 해결되기 전에는 청망(淸望)에 추천할 수 없고.”
하였다. 공은 생각에, ‘삭적을 하였던 선비들을 위해서 이미 특명으로 과거를 정지시켰으니, 공론이 이미 행해진 것이다. 삭적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었건 안 되었건 따질 필요가 없다’고 여겨 언성을 높여서 꺾어 버렸다.
그러자 참의와 참판은 모두 일어나 나가고 좌랑 구봉서(1596-1644 具鳳瑞) 또한 나가 버렸다. 공은 아뢰기를,
“박지계는 산림에서 40넌 동안 글 읽은 사람입니다. 사림의 영수가 되는 것이 마땅했던 까닭에 계해년(1623)에 지평으로 특별히 불렀는데, 김장생과 예를 의논하는 것이 합하지 않았다 하여, 지금까지 두었습니다. 또 한두 유생에게 삭적 당한 것은 큰 인륜을 밝히고자 하다가 삭적된 것입니다. 위에서 이미 그 유생들에게 과거를 정지시켰고, 사관(四館)에도 죄를 논하였으니, 국시가 이미 정해졌으며 공론이 이미 행해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정사에 박지계를 지평의 망에 추천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참판과 참의가 신의 말을 듣지 않고 모두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좌랑 구봉서 역시 시론이 두려워서 나가고자 하기에 신이 정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을 힘껏 말했지만, 또한 참판과 참의의 의논에 따라 곧장 나가버렸습니다. 신이 동료에게 거슬림을 받고 또 낭관에게 가벼이 여김을 당하여 정사하는 자리가 모두 비게 되었으니, 신이 제 소견만을 지킬 수 없으므로, 정사할 수가 없음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알겠소. 참판과 참의는 모두 추고하고 낭관은 파직시키시오.”
하였다.
편당론변(偏黨論辨)
○ 계해년(1623, 인조 1) 3월. 반정 초기에 공은 겸 경연(兼經筵)으로서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릇 정사를 하는 데에 편당(偏黨)을 힘써 없애야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만약 편당을 없앤다는 마음을 가지시면, 소인이 그 틈을 엿보아 반드시 군자를 편당이라 지목하여 일망타진의 계획을 할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임금을 끌어서 편당을 삼는다’ 하였고, 선묘(宣廟)께서도 하교하시기를, ‘이이와 성혼의 당(黨)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셨으니, 임금께서는 어진 이를 구하여 믿고 맡길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먼저 편당으로써 여러 신하를 의심하여 소인이 기회를 엿볼 단서를 열어 놓겠습니까.”
하자, 상은 답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조 판서 이광정(李光庭)이 병으로 사직하자, 신흠(申欽)이 대신하였다. 열흘도 못 되어 상은 특명으로 공의 품계를 자헌대부로 올리고 이어 참판으로 승진시키고 오래지 않아 또 특명으로 우참찬을 제수하였다. 대개 상께서는 공이 편당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을축년(1625, 인조 3) 2월. 공은 이조 판서 김류와 더불어 장차 경연에 입시하게 되었다. 김류가 공에게 이르기를,
“젊은 무리로서 공론을 막는 자는 반드시 외직으로 좌천시켜야만 조정이 편할 것이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주상께서 화가 났을 적에 청하는 것은 불가하오.”
하였으나, 김류(1571-1648) 마침내 경연에 들어가 아뢰기를,
“사람을 등용하는 때에 논의가 많이 엇갈려, 인재를 쓰고자 하면 번번이 다른 쪽 사람이 배척한 대상이 되어, 반드시 그 사람은 출사할 수 없게 되니, 그 배척하는 사람 중에 가장 심한 자를 뽑아서 혹은 엄중하게 문책하거나, 혹은 외직으로 좌천시키겠습니다.”
하니, 상 또한 적발해서 치죄하라는 것으로써 하교하였다. 공은 깨끗한 의논은 꺾고 막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주상 앞에서 힘껏 아뢰기를,
“전하께서 매양 당론을 타파시키고자 하시면서 위엄과 힘으로 진정시키시니, 오늘날 이 하교는 화란만 일으킬 뿐입니다. 예부터 당하관의 청망(淸望)을 낭관이 주장한 것은 대개 새로 진출하는 젊은 사람의 청탁에 대해 당상관으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윤원형(尹元衡)이 전장(銓長)으로 있을 적에도 당하관의 청망은 모든 낭관에게 맡기고 감히 손대지 않았습니다. 전장이 혹 옳은 사람이 아니었을 때, 스스로 독단하게 한다면 반드시 후일에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상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치죄하는 거조가 있게 되면 당대 명류(名流)는 모두 장차 물러가 버릴 터이니, 손상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김류는 아뢰기를,
“근거 없는 의논의 권세가 태산보다 더 무거운데,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여 적발해서 치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김상헌(1570-1652)소는 별로 딴 뜻이 없습니다. ‘붕당을 미워함으로써 여러 정직한 자를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참으로 정확한 의논입니다. 임금이 매양 붕당을 미워해서 너무 지나치게 다스리다가 나라를 망치기까지 하기 때문에 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 것입니다. 말이 뜻을 통하지 못하여 성상의 하교까지 내리시게 만들었습니다만, 김상헌은 오늘날의 곧은 신하입니다. 만약 위급한 경우가 있다면 신과 더불어 함께 죽을 자는 반드시 김상헌일 것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배척하십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가 전하의 뜻에 아첨하여 기쁘게 하면 추켜올리고 충성한 말이라도 귀에 거슬리면 물리쳐 버리니, 전하께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김상헌은 대사간이 되어 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나 만약 편당의 마음이 있다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기에, 1등인(一等人)이 되도록 고치게 한 것인데, 경이 이와 같이 논하여 두둔하는 것은 그르오.”
하였다. 이조 판서가 아뢰기를,
“김상헌의 일은 신이 지난번에도 역시 딴 마음이 없음을 아뢰었습니다만, 지금도 매양 청망에 천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조 판서가 남이공(1565-1640 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삼으니, 옥당에서 박정(朴炡)ㆍ유백증(兪伯曾)ㆍ나만갑(羅萬甲) 등이 차자를 올려 체차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은 크게 노하여 ‘임금을 속이고 자기 의견과 다른 자는 배척한다’해서 특명으로 체직시키고, 다음날 정사에 박정은 함평 현감으로, 유백증은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만갑은 강동 현령(江東縣令)으로 삼았다. 이에 대신ㆍ정원ㆍ삼사가 다투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 8월.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붕당의 화는 당초 선비들 사이에 서로 심정을 통하지 않는 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붕당을 없애고자 하다가, 꺼림과 의심을 쌓아 도리어 나라를 망하게 한 자가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도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중묘(中廟)에게 신임을 받아 사문(斯文)을 흥기시킴으로써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바야흐로 요순의 다스림을 기약했던 것입니다. 세속 무리들이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밤에 북문(北門)을 열고 고변하여 마침내 사림이 어육(魚肉)이 되는 화를 만들었습니다. 유도(儒道)가 세상에 행해지기 어려움이 과연 이와 같았으니, 이는 어찌 후세 사람으로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묘와 이이(李珥)는 또한 천년 만에 한번 만나는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직접 붕당의 조짐이 조용하지 못할 단서가 있음을 보고, 그들을 화해하고 진정시킨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이(1536-1584)가 죽은 후로부터 당론이 날로 성해져서 도리어 이이를 외척에게 아부하여 발신(發身)하였으므로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고 하고, 심지어 이이의 이름을 당적(黨籍)에 적어 넣어 여지없이 업신여기고 헐뜯었습니다.
이때 마음이 곧은 신하인 조헌(趙憲)은 이이의 문인으로서 항쟁하는 소를 올려 신구하였는데, 분한 마음이 격동되어 적중하지 못한 말이 있었습니다. 죽은 스승의 평소 함께 공경하고 화합한다는 뜻에서 위배됨이 있었기에, 신이 한두 친구와 함께 각기 견문을 참작하여, 한 상소문을 얽었는데, 먼저 죽은 스승의 지극히 공평한 의논을 아뢰고, 다음으로 조헌의 한쪽에만 치우친 말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선묘께서 이 상소를 보시고 이이가 만세의 공론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상소가 한 번 나오자, 온 세상은 혹 이이가 당론에 간섭이 있었는가 의심하던 자도 그 의혹을 통쾌하게 풀고 지금은 이이를 모두 백세의 유종(儒宗)이라 하니, 인심이 거짓없음은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성상께서 바야흐로 당론을 깨뜨리고 진정시켜서 화평한 복을 이루고자 하시니, 이것은 진실로 훌륭한 생각입니다. 다만 당론이 이미 고질화된 지 40~50년이 지나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가 듣고 본 것이 피차가 각각 하루아침 저녁에 생긴 연고가 아니기 때문에 꼬여서 풀 수도 없고 위협해서 깨뜨릴 수도 없습니다. 성상께서 이것을 애석히 여기고 염려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이는 세상에 좀처럼 나지 않는 대현(大賢)으로서, 만날 수 없는 시대를 만나 동ㆍ서(東西)의 두 함정을 막고자 하다가 마침내 모함 당함을 면치 못하였는데, 다행히 선묘(宣廟)의 성스럽고 밝음을 힘입어 그 함정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이이보다 뒤에 난 자로서 비록 이이의 마음으로 그 중간에서 진정시키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덕망과 재주가 진압할 수 없는데에 어찌 하겠습니까? 신은 비록 변변치 못하나, 이이의 문하에 직접 배워서 동ㆍ서(東西) 두 글자가 충분히 남의 나라를 망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반정하던 초기에 주희(朱熹)의 ‘임금을 끌어서 당을 만들라’라는 말을 외워서 전하께 아뢴 것인데, 어찌 당을 옹호하는 데에 뜻이 있어서 이 말을 했겠습니까. 적격자를 얻지 못하고, 상께서 한갓 함께 수용하고 아울러 길러서 붕당을 타파할 계획으로 삼고자 한다면, 겉은 비록 친절한 듯하지만 내심은 실상 멀어져 날로 심하게 국사가 허물어지고 기강이 해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고서 함께 공경히 협력하여 국사에 전념하는 아름다움을 바라는 것이 또한 계획이 소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에 전형(銓衡)을 맡았을 적에, 공평한 마음을 갖고 죽은 스승의 공정한 뜻을 본받아서 미약하게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지식이 밝지 못하여,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택하지 못하여, 위로 성상의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리고 아래로 죽은 스승의 협력하고 공경한다는 뜻을 저버렸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선묘께서는 이이를 얻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셨으니, 생각건대 하늘이 우리 동방을 평화롭게 다스리고자 않은 것입니까. 아 ! 그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그 말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만약 그 사람을 쓸 만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쓸 만하다고 여긴다면 그의 말을 쓰고 안 쓰는 데에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죽은 스승의 원통함을 신구했던 상소문 네 부를 인쇄하여 감히 올리니, 혹 바쁘신 정무의 여가에 특별히 보신 다음 그 말을 가지고 그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을 상상하여 그 도(道)를 행한다면, 죽은 스승의 이이가 비록 구천 아래에 갔다고 하더라도 성상의 세상에 쓰임을 보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이 상소문을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선현의 치우침도 없고 편당도 없는 마음을 알도록 하여, 먼 백세(百世)의 훗날까지 법으로 삼아 흥기하게 한다면, 다만 사림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예조에 계하했는데, 예조가,
“관청에서 개인의 사고(私稿)를 반포함은 혹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 판본이 호남에 있다고 하니, 감사를 시켜 인쇄하여 선비들에게 주어 서로 전해가면서 보도록 한다면, 세도에 유익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묵재일기 3
■강화론변(講和論辨)
○ 1627년 3월 22일. 공은, ‘금 나라 적이 이미 강화하고 물러가므로 시국이 조금 안정되었고, 임금이 비록 환궁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망측한 지적을 받고서 다시 조정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기고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전후 대신ㆍ대간들과 국가 대사를 논쟁한 것은 참으로 나라를 위함이요 자신을 위함이 아닌데, 대간들이 신의 죄명을 논함에 있어서 ‘효시하자’고 한 것이 두 번이고, ‘귀양보내자’고 한 것이 한 번으로 모두 한두 사람이 죄안을 구성한 것입니다.
신에게 과연 이 같은 죄악이 있다면 신을 마땅히 형조에 내려서 논죄한 대관과 허실을 따지게 한 다음, 만일 실상이 있으면 즉시 죄를 들어 형을 베풀고 중외에 알려서 하나로써 백을 징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매양 한두 대신들에게 모함 받아 장차 꼭 신을 죽이고야 말 것이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서울을 떠나자’ 한 계책은 비록 묘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이 홀로 선창한 것이지만, 철기(鐵騎)가 파죽지세로 몰아닥치는데 차마 군부로 하여금 빈 성에 앉아서 적을 맞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죄는 반드시 효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임진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가지고 죄를 신에게 돌립니다만, 당초 이서(李曙)로 하여금 강나루를 지키려 한 것은 신의 계책이 아닌데, 도리어 죄를 삼습니까? 설사 그때 신이 대신이나 병조 판서의 자리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같이 하늘을 뒤덮은 적은 형세 상 막기 어려웠으므로 관대한 용서가 있어야 할 듯하옵니다. 그런데 신이 그때에 무슨 책임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는 무슨 말을 들어 주고 무슨 계책을 써 준 일이 있었기에 지금 모두 ‘죽여야 응당 옳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신에게 죄를 돌려서 나라를 그르친 형벌로 논죄합니까? 심지어 ‘만일 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조(行朝)에 따라 들어가게 하고, 따라서 비국의 반열에 두게 된다면 후일 나라에 근심된 일이 있을 때엔 반드시 큰 계책을 다시 그르칠 염려가 있으니, 청컨대 귀양보내주소서.’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아! 사람이 비록 현저한 죄목이 있더라도 정상에 용서할 수 있으며 오히려 더러 관대히 용서해 주는 것인데, 하물며 ‘필유(必有)’란 두 글자를 가지고 미리 죄목을 정한다면,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악비(岳飛)를 죄준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다만 성상께서 밝게 헤아려 주심을 믿을 뿐입니다만, 한 달 동안에 세 번이나 엄히 추고하라는 명을 입었으니, 억울한 회포가 있사오나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추고 함답(推考緘答 추고당할 때 글로 변명하는 답사)하는 날을 기다려서 모두 숨김없이 폭로하려 하였사온데, 대간이 또 신의 스스로 해명할 것을 미워해서 ‘서울에 돌아가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핑계하면서 덮어두고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폐조(廢朝) 때 대간들이 신을 얽어넣던 고사인데, 어찌 성명의 조정에서 다시 보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그 가운데 윤훤(尹暄)을 구제한 한 일은 만 번 죽어도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곡진한 정상을 이미 두 번이나 성상께 아뢰었으니, 마땅히 현륙을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사옵고, 그 이른바 아들의 군사를 사사로 옹호하였다느니, 아들을 위하여 기복(起復)을 했다느니, 재신(宰臣)을 면대해서 욕하였다느니, 탄핵을 입고도 등대하였다느니 등의 죄목은 신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입니다. 만약 해명을 하려 한다면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두려우므로 그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에게 욕한 것에 대하여는 과연 말하는 사이에 너무 과격한 잘못이 없지 않았사오나, 본심을 추구하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에서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는 까닭에 불과한 것입니다. 매양 상의 하교가 있는데도 미친 성품을 갑자기 고치지 못하니, 이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신 또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소위 대간이란 한 시대의 공론을 주장하여 일에 따라 곧게 간하되 형구를 피하지 않는 것이 그 직책인데, 지금의 대간들은 한갓 큰소리치기를 숭상하고, 남의 아름다운 것을 가로채고, 벼슬길에 나가는 교묘한 재주만을 가졌을 뿐 일에 임하면 시비는 분변하지 않고 진정(鎭定)한다고만 합니다.
신이 옛일을 살펴보았지만 저 같은 대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남의 비난을 입어도 물러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이이첨(李爾瞻) 때의 대간과 다름이 없으므로 여러 번 면대하여 척언한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직명을 거두시고 시골로 물러가 여생을 보전토록 하옵소서.”
○1627년 5월...상께서 명하여 의정부에 내리니, 좌의정 윤방(尹昉)ㆍ우의정 신흠(申欽)이 회계하기를,
“서울을 떠나자고 먼저 말한 것은 이귀가 한 일이 아니고 소속한 군관을 이미 분송하였으니,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원통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오며, 사대부가 가장 원통하게 여기는 것은 무고를 당하고 벗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잇달아 소장을 올리어 반복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정리에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수년 전부터 강도에 구관당상(句管堂上)을 두어서 미리 보장(保障)의 곳으로 만든 것은 바로 오늘의 일을 위한 것이므로 주차(駐箚)할 계획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이것으로 이귀만을 배척한다면 참으로 사실에 가깝지도 않다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께서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워서 사대부를 예로써 대우했기 때문에 중신 이상은 보통의 벌칙으로는 크다 해도 파직이 아니면 체직에 불과했으며, 이름이 역적의 문서에 기재되고 죄가 군률에 해당되지 않는 한 효시의 형벌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귀는 사직을 보존한 공로가 있는 신하로서 도리어 법망에 걸렸는데 다행히 성상께서 밝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정 신료를 꾸짖고 대간을 욕한 실수는 한때 분노에서 온 과오입니다. 이귀가 참으로 면하기 어려우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난리에 임해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큰 절의는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그 짝이 될 만한 사람이 적은데, 어찌 말을 맞지 않게 했다는 까닭으로 하여 점점 심각해져서 그 사실 여부도 살피지 않고 실정 밖의 죄명을 억울하게 씌울 수 있습니까?
성상께서 특별히 온유를 내리시고 사관까지 보내셨으니, 조정에도 역시 그의 원통함을 모를 자 없습니다. 이 어려운 때를 당해서 마땅히 국가의 급한 것을 먼저 해야 하고 기타의 문제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빨리 출사하여 성상께서 돈면하신 뜻에 부응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은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비어론변(備禦論辨)
○ 갑자년(1624, 인조 2) 8월. 공이 아뢰기를,
“경포수(京砲手)의 일은 오늘날 큰 폐단이 됩니다. 한 나라의 국력을 다해서 급여를 후하게 주는데도 나라가 위태할 때를 당하면 즐겨 사력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평일에 군사를 양성한 본의이겠습니까? 또 금년에 서로(西路)의 일이 매우 염려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포수 2천 명을 원수(元帥)에게 보내서 잘 먹이고 잘 훈련시켜 적을 방어할 계책을 하고, 경포수 2천 명을 먹이는 양식은 별도로 모집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밑천으로 삼는다면 변성(邊城)도 믿는 것이 있게 되고, 경기도 절로 견고해질 것입니다.”...
○ 병인년(1626, 인조 4) 7월. 공은 분황(焚黃)하는 일로 익산(益山) 종가에 가다가 공주에 이르러 남군의 자송(資送)에 따르는 폐단을 보고 생각하기를, ‘모 장(毛將)의 변란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닌데, 객병을 많이 조발하여 군량도 없는 곳으로 몰아 보내므로 떠나는 이는 짐을 싸고, 있는 이는 보낼 준비를 하여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두 소란하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 하여 이에 상소를 했는데, 그 대략에,
“변성(邊城)의 군량이 모두 약탈을 당했으니 남군을 들여보내더라도 반드시 먼저 관서의 군량이 있는가 없는가를 계산하고서 그 뒤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더구나 모문룡은 바로 당장 닥치는 걱정이 아닙니다. 반드시 청천강 이북 지방을 잠식한 뒤에 다시 관서 지방을 삼킬 계책을 할 것이니, 당면한 계책으로는 청천강 이남의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각각 그 고을을 지키게 하고, 병사는 청천강 이북에서 뽑은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각각 그 고을을 지키게 하고, 병사는 청천강 이북에서 뽑은 정예한 군사를 인솔하여 먼저 응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원ㆍ황해ㆍ북도(北道)의 군사들도 역시 무장을 하고 변을 기다리게 했다가 만일 위급한 일이 있으면 적시에 출전하도록 하고, 삼남과 경기의 군사는 변을 들으면 모두 서울에 모여 호위에 전속(專屬), 그때그때 조용(調用)해 쓰는 계책을 세운다면 중요한 위치에 처하여 가벼운 적을 방어하고 근본을 튼튼히 하는 방법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설사 불행히 관서를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근본이 오히려 견고하면 회복을 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적이 국경을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근본을 피폐시킨다면 여지없이 무너질 염려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를 것이니, 신은 삼가 위태롭게 생각합니다. 신은 듣건대, ‘5천 명 군사를 자장(資裝)하는데 무명은 8만여 필이 넘고, 한 도에 자송하는 비용은 그의 배나 되며, 관서에 도착하면 당장에 먹을 양식도 없다‘ 하니, 내지(內地)만이 비고 메마를 뿐 아니라 관서의 피폐도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금년에 이와 같이 하고 명년에 이와 같이 하고 또 후명년에 이와 같이 한다면 외구(外寇)가 오지 않아도 나라의 근본은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신은 비록 어리석고 망령되오나 또한 중풍 환자는 아닙니다.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 말하고 그칠 줄 모르는 것은 국가의 흥망이 인심의 향배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비국에 계하했는데 시행되지 않았다.
○ 2월. 상은 황성(皇城)이 청병에게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대기하는데도 조정에서는 군사를 뽑아 구원할 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공은 곧 궁궐에 나아가 진계하기를,
“우리 나라와 명 나라와는 그 의리로 따지면 군신이고 은혜로 따지면 부자입니다. 이제 오랑캐의 군사가 명 나라와 몇 달 동안 서로 겨루는데, 승패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 오랑캐로부터 두세 번이나 나왔습니다. 그 말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비록 알지 못하겠으나, 신자(臣子)의 분의에 어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서 신자의 직분에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오늘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병력을 다하고 우리의 군량을 다해서 진 부총(陳副總)과 합세하여 명 나라의 망극한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그렇게 해야 할 때인데도 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아! 당당한 대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해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하늘이 만일 중국을 도와서 명 나라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우리 나라는 수수방관하고 감감하게도 천자를 위하여 힘쓰는 일이 없으니, 뒷날 천조의 책망을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설사 천조가 우리를 용서하여 내버려 두고 꾸짖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자의 분의에 어찌하겠습니까?
또 군사를 낸 뒤에 오랑캐가 맹약을 위반했다고 우리를 책한다면 대답하기를, ‘천조와는 부자의 의리가 있고 너희 나라와는 형제의 언약뿐이니, 그 경중이 판이하다. 아버지가 만일 병화를 당해서 아들에게 구원을 청했을 때 그 아들이 형제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를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할 것이니, 이같이 말을 하면 군부(君父)의 대의는 오랑캐 또한 알고 있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의 충의에 감복할 것입니다. 어찌 오랑캐의 기뻐하고 성내는 것에 구애되어 차마 이 일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혹 소요할까 염려합니다만, 신의 의사로는 군사를 내는 데는 명분이 있으니, 군사를 뽑은 뒤에 만약 황제의 명이 없으면 비록 출병은 않는다 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대의는 밝힐 수 있는 것이니, 한때의 소요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일이란 착실한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정전을 피하는 일은 중조(中朝)의 정확한 소식을 듣고 하더라도 또한 늦지가 않습니다. 지금 순서로 말하자면, 군사를 뽑는 일이 첫째이고, 정전을 피하시는 일은 그 다음입니다. 이미 정전을 피하셨으니 군사 뽑는 일을 어찌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이런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같이 적국에서 군사를 출동한 시기를 당하여 군사를 뽑고 군량을 쌓아서 위급한 일에 대비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인데, 더구나 신으로 말하면 딴 사람과 다름에리까? 직책이 병조 판서인데, 이런 말을 듣고도 군사를 뽑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신자의 의리는 아주 없어질 것입니다. 며칠 전부터 침식을 잊고 밤을 새워 밝기를 기다려서 몸소 궐하에 나와 감히 어리석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말은 매우 온당하오. 묘당으로 하여금 의론하여 처리하게 하겠소.”
하였다.
○ 1633년 2월. 공이 비국의 회의에 나가려 하는데 변사(邊事)가 걱정이 많다 해서 좌상과 상의를 하려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새벽에 그 집에 가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다가 늦어서야 아문으로 갔는데, 때를 잃은 허기증으로 갑자기 중풍에 걸려 가마에 떠메여 집으로 돌아왔다. 상은 공의 병이 중함을 듣고 의원을 보내 병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약이(藥餌)ㆍ문궤(問饋)의 사신이 길에 서로 연달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공의 정성은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더욱 간절하였다. 공은 일찍이 상이 원수(元帥)에게 출병을 명하고 오랑캐의 서신을 거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곧 병을 참고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성명이 위에 계시니, 신은 죽은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간절히 꿈속 말처럼 하는 것은 모두 나라에 대한 걱정이었고, 한 말도 집안 일에는 미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함에 미쳐 상은 중사(中使)를 보내서 문병하기를,
“경의 병이 심함을 듣고 과인이 친히 가서 문병을 하려 했으나,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오. 만일 소회가 있거든 숨김없이 모두 말하오.”
하였으나, 공은 병세가 위독해서 말을 못하므로 눈물만을 흘리자, 중사 또한 울면서 돌아갔다. 동궁이 또한 두 번이나 궁관을 보내 문병하였다. 이달 15일에 공의 병환은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이 떨어지려 하자 아침 해가 창에 비치는 것을 보고 기운을 차려 일어나 재삼 부복(俯伏)을 하였다. 병환을 모시고 있는 자가 묻기를,
“해를 보고 절하는 것은 성상을 영결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였으나, 공은 목숨이 이미 떨어지는 찰나인지라 입으로 말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잡설부록(雜說附錄) - 노랄수사(老辣瀡辭 늙은이의 맵고 미끄러운 말씀)
○ 병인년(1626, 인조 4) 7월.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 지위가 1품에 이르렀습니다. 부모의 신주가 전라도 익산(益山)의 종가에 있으니 죽기 전에 분황(焚黃)을 하고 올라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소. 경은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갔다 돌아오시오.”
하고, 유마(由馬)와 요전상(澆奠床)을 제급(題給)하였으며, 이어 전교하기를,
“내의에게 약을 가지고 따라가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이 익산에 내려갈 때 본도로 하여금 잔치를 베풀어 각별히 우대하도록 하라.”
하였다.
○1627년 12월. 당시에 성대훈(成大勳)이 장죄(贓罪)로 구금당하여 장차 정배되려는데, 공은 판의금으로 있으면서 연풍(延豊)에 정배시켰다. 대간이 집과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금부를 추고하고 서변(西邊)으로 옮겨 정배시키기를 청했다. 공은 생각에, 도년(徒年)의 죄는 이미 중도(中道)의 다음에 있는데, 이제 만일 대간의 계로 인하여 원찬(遠竄)의 형률을 적용한다면 이는 한때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써 경중을 하는 것이니, ‘법을 지키되 흔들리지 않는다.’는 본의가 아니라고 여기고 곧 차자를 올려 힘써 간쟁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대간의 말 가운데 ‘서변으로 옮겨 정배시키라’는 말은 비록 과한 듯하지만, ‘괴산 근처로 정배한 것은 잘못이다’는 말은 실로 지당하오. 그런데 이같이 과실을 꾸미어 변명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소? 또 본부가 이미 가까운 예를 따라 법을 무시하고 멀리 귀양보낸 사람이 있으니, 이른바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다’는 등의 말은 역시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서 나온 듯하오.”
하였다. 공은 또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성품이 본래 굳세지 못하여 생각이 있으면 문득 아뢰므로 ‘과실을 꾸미어 변명한다’는 하교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이 아무리 불초한들 어찌 감히 스스로 과실을 꾸미어 임금에게 여쭈어 이기기 좋아하는 계책을 하겠습니까?
이제 연풍이 마침 대훈이 사는 곳과 가까우니, 대간이 신더러 치우친 사정을 썼다 하여 추고를 청한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고, 전하께서 신을 지적하여 과실을 꾸민다 하심도 역시 이 때문입니다만, 설사 대훈의 청을 들어서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 정배를 하였다 하더라도, 원찬이 아닐 것 같으면 국법에 또한 자원부처(自願付處)하는 법규가 있으니, 대단히 사정을 쓴 일은 아닌 듯한데, 하물며 신과 대훈은 평생 알지도 못하는 사이임에리까? 신은 이제 과실을 꾸민다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신자의 분으로서는 의당 사실(私室)에 거적을 깔고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해야 합니다만, 직책이 약방을 맡고 있으므로 감히 물러감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이미 이 직책에 있으니, 지키는 법을 휘어서 고치기는 결코 어렵습니다. 청컨대, 대론(臺論)에 의하여 다른 당상관을 시켜서 서변으로 정배시키도록 하시고, 신을 빨리 파직하여 신하로서 과실을 꾸미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은 답하지 않고 전교하기를,
“병조 판서 이귀는 공훈은 비록 중하지만 또한 한 신자인데,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이같이 무례하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 차자를 도로 내어 주고, 판의금 직을 원하는 대로 체차하라.”
하였다.
○1628년 5월. 공은 또 주강에서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전번 연석에서 영상 오윤겸(吳允謙)이 사직하니, 상께서 답하기를, ‘병조 판서의 하는 짓을 나이 젊고 기운 왕성한 무리들이 본받을까 두렵다’ 하셨다 하는데, 그러하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것으로써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신에게는 자식 셋이 있습니다만, 모두 신의 하는 바를 배우지 않아서, 신이 매양 입시할 때면 신에게, ‘많은 말을 말라’고 간하는데, 더구나 딴 사람임에리까? 사람이 서로 본받는 것은 자기에게 이로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신은 원훈 중신으로서 연이어 죄출(罪黜)을 당하고 스스로 보전을 못하는데, 만일 연소한 무리들이 신의 하는 바를 본받는다면 말 한 마디가 입에서 나올 때에는 죄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진실로 중풍이 들리고 마음이 상한 자가 아니라면 반드시 신을 본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은 전번 탑전에서 다만 옛날 대신과 오늘날 정승의 일이 다른 것을 아뢰고, 이어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각기 소장이 있음을 아뢰다가 말이 영상에게 미쳤던 것입니다. 신의 무심코 한 말로 인하여 상신(相臣)이 차자를 올려 사직을 빌기까지 하였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원훈 중신이니, 그 말이 중대하므로 상신이 이같이 온당치 못해 한 거요. 내가 경에게 말조심 하기를 경계한 것도 이 때문에 한 거요.”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조정에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공의가 없고, 또 옳고 그른 것을 강정할 사우(師友)도 없어서 각자 자기 주관만을 내세워 각각 그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전랑은 비록 당세의 인물 중에서 극진히 뽑았다고 하지만, 한 사람이 사론(士論)을 주장하여 인물을 들이고 물리쳤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으면서도 세도가 청명하기를 바라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친구간에 선행을 바라는 도가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신의 옛날 친구 김장생(金長生)은 나이가 80이 넘었고 몸이 먼 곳에 있습니다만, 신의 잘못하는 일을 들으면 반드시 편지를 해서 책문합니다. 친구의 도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귀는 임금을 위한 충정(자신이 반정을 통해 왕을 만들었으므로)이 무례하여 왕까지 이에 대한 허물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왕에 대한 무례한 언사와 자기주장이 펼쳐지고, 이에 대해 왕이 못마땅해 하지만 원훈공신이기에 끝까지 보호하고 예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박근혜대통령을 만든 만든 친박파 조무래기들이 당내 민주주의와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비박을 탄압하여 지난 총선을 망치고도 아직도정신차리지 못하고 오직 박근혜를 보호하기 위해 충성이랍시고 설쳐대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