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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靑潭) 2016. 7. 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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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에 숨겨둔 조선 정치인의 속마음

 

저자 이성현(현역화가․교육자)

 

 

1. 머리말

 

우리 집 양드리님이 금년 1월에 발행된 이 책을 구입해서 읽는다. 나도 덩달아 읽어보니 예사로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학술서적은 아니로되 추사에 대한 깊고 오랜 연구를 통해 자신있게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저자는 잘 모르는 분이나 이 책은 내게 김정희  선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다시 공부하게 한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하면 대개 추사체, 금석학, 고증학, 세한도, 북한산순수비, 제주도 귀양살이 등을 연상한다.

 

내가 그래도 소위 역사교사로 보통사람들 보다는 김정희선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는 않아, 그가 우리 한국이 낳은 최고의 서예가이자 예술가이며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이되 우리의 당시현실에 대한 정치․사회․경제 관련 개혁과 관련된 저서를 남기거나 국가발전과 백성을 위한 실용적 개혁사상을 주창한 별다른 근거가 없어 왠지 의아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면서 그로 인하여  단지 국학파 범주의 실학자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을 가진 인물임을 잘 알고있다. 그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이어온 당당한 척족셰력인 경주김씨로써 경제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개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라는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오늘날 새누리당이나 더민주당 국민의 당에 속해 있는 권력지향형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런 부류들 아닌가? 그렇다고 추사선생처럼 특정분야에서나마 위대한 업적을 남길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자들임에랴!  강남좌파들이나 권력지향형 정치인들에게서 어찌 진정성을 크게 찾을 수 있으며 기대할 수 있으랴? 그것은 木求魚격이라!

 

이  책에서 저자는

첫째, 추사의 정치및 사상적 측면을 조명하고 있고

둘째, 대련과 협서의 글자 판독과 문장의 숨어있는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추사의 글씨를 예술적 관점에서만 접근하고나 겉으로 보이는 문장을 직역하는 수준이었음을 비판하며 그는 추사가 글자의 모양까지 변형시켜가며 쓴 몇 자 안 되는 문장 속에 담겨진 깊은 뜻을 찾아내고 있다. 화가이신 저자의 학문탐구 열의와 능력이 참 대단하다고  여겨지며 이제 막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한 신출내기 서예입문학도인 내가 그간의 추사체에만 매료되었던 데에서 나아가 추사체에 담긴 비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점에 대해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선 한국민족학대백과(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밝힌 추사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먼저 다시 공부하고자 한다.

 

 

2.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생

 

 

개설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생애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799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사항

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1809)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며 가늘다)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4. 평가와 의의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3. 추사 관련인물

○추사 김정희(1786-1856) 경주김씨, 참판, 대사성

○부 김노경(1766-1837) 경주김씨, 판서, 대사헌

○벗 김유근(1785-1840) 안동김씨, 순조장인 김조순의 아들, 판서

○벗 조인영(1782-1850) 풍양조씨, , 익종 장인 조만영의 아우, 영의정

○벗 권돈인(1783-1859) 안동권씨, 영의정

○정약용(1762-1836)

○백파대사(1767-1852)

○초의선사(1786-1866)

○정조(1752-1800) 순조(1800-1834) 익종대리청정(1827-1830)

헌종(1834-1849) 철종(1849-1863) 고종(1864-1907)

○이하응(1820-1898)

이 책을 읽으면서 추사가 쓴 對聯(대련 :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대구)과 脇書(협서 : 본문 옆에 따로 글을 기록한 것) 속에 숨어져 있는 의미를 저자는 신비롭게 찾아 설명해내고 있지만 우리는 이해가 어렵고 난해하여 이 독서록에 인용하기란 매우 힘들다.

 

1부 천재가 설계한 미로

○많은 연구자들이 추사의 서예작품을 일컬어 <그림 같은 글씨>라고 한다. 원래 한자는 상형문자인 까닭에 한자로 쓰인 서예작품은 기본적으로 그림 같은 글씨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추사의 글씨를 그림 같은 글씨라 하는 것은 그의 글씨가 지닌 파격성이 한자의 상형성을 벗어난 것이란 동의 아닐까?

○추사의 <그림 같은 글씨>는 그의 글씨를 <괴이한 글씨>로 여기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된다. 한자의 상형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그의 <그림 같은 글씨>는 문맥을 통해 특정 글자임을 유추해내고 있을 뿐, 아직도 그가 파격적인 글자꼴을 사용하게 된 합당한 이유나 규칙성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지점에서 필자는 추사의 <그림 같은 글씨>를 개성의 산물이라고 여길 것인지 아니면 추사만의 어법으로 이해하며 접근해야 할 문제인지 자문하게 된다. 개성으로 이해하면 그의 <그림 같은 글씨>는 영원히 괴이한 글씨가 되고 어법이라 주장하려면 <그림 같은 글씨>속에서 독창적 의미체계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추사의 <그림 같은 글씨>를 읽기 어려운 것은 우리만이 겪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추사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도 그의 작품을 읽어내기 어려워하며 괴이하다 하였고, 추사 또한 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가 무엇 때문에 괴이한 글씨를 계속 썼다고 생각하는가? 추사의 괴이한 글씨에 내포된 새로운 어법의 유용함 때문이며, 그 어법의 사용처가 제한적 대상을 위한 것이란 의미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보통 암호, 혹은 코드라고 한다.

○추사의 서예작품에서 발견되는 내용의 빈약함과 파격적 서체의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그동안 많은 추사연구가들은 추사의 학문적 업적을 부각시키는 편법을 사용해왔다.

竹爐止室(1844)

기존 해석 : 《대나무 화로가 놓여 있는 방(竹爐室)

저자 해석 : 《대나무 화로를 중궁전의 주인으로 들이지 못하게 막아라.》

(난방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궁전에 화재를 일으키기 십상 인 대나무 화로 같은 새 중전이 간택되는 것을 막아 외척이 발 호할 여지를 원천 봉쇄하라.)

 

 

2부 대밭에 묻힌 추사

新安舊家

기존해석 : 《주자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가문》이라며 최완수는 1854년 가을, 권돈인의 택호로써 준듯하다 했다.

저자해석 : 新자는 나무목 대신 아닐 미가 쓰이고 있다. 安자는 여자가 지붕 을 세게 걷어차고 있는 모습이다. 舊자는 풀초 대신 또 역자를 쓰고, 꽁지 짧은 새추는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의 모습이다.

《아직은 새로움을 추구할 때가 아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리라.》

○추사의 학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몰라도 그만, 알아도 그만인 잡학과 소위추사체로 분류되는 괴이한 문예작품 뿐이다. ....추사가 연구한 학문과 다산의 학문에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 백성도 청나라 백성처럼 잘살 수 있다는 방법을 찾아 정치에 반영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의 애민사상과 실용적 학문은 오늘날 다산학이라 불릴 만큼 널리 연구되고 있으나. 추사는 저선말기의 대표적 석학이라 불릴 뿐, 그 실체가 모호하다. 왜일까?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방법을 제도와 실용적 수단에서 찾은 이와 정치체제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의 차이 때문 아닐까?

○추사의 문예작품이 그의 논리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것에 접근할 수 있을까? 추사의 문예작품은 서예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의 생각의 편린은 문자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작품에 쓰인 서체를 살피는데 정신이 팔려 그의 작품에 숨어 있는 긍의 내용을 다각도로 검토해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때가 온 것 같다.

茗禪

기존해석 : 《차를 마시며 禪定에 들다.》

저자해석 : 초의선사가《새로운 방식의 선 운동을 펼치는 승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茶山草堂: 풀초가 아닌 풀싹초를 쓰고 있어 《풀을 엮어 지붕을 올린 집》보다는 《새싹들을 키워내는 집》에 방점을 두고 있다.

 

 

 

3부 추사의 가면극

書卷氣 文字香 : 책의 정취와 문자의 향기를 말하니 곧 技法보다는 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존중

○법을 전수받으며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면 비록 대단하여도 오래 두고 견딜 만큼 욕심낼 구석을 찾을 수 없으며(감상할 가치가 없으며), 興懷가 없으면 비록 글씨가 아름답다한들 노력하면 글씨쟁이 소리를 들 을 수 있을 뿐이다.【완당전집】

經經緯史

최완수 : 《경전을 날줄로 하고 역사를 씨줄로 한다.》

저 자 : 《고루한 경설, 왜곡된 경설, 모호한 위서, 검증되지 않은 사서는 난 세를 부르니 경계할 일이다.

格物致知 : 『大學』에 나오는 致知在格物을 줄인 말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밝히는 일(성리학)

사람 본연의 良志로 사물을 바로잡는 일(양명학)

○추사의 예술작품을 연구하며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그의 모습을 성리학의 거울을 통해 비춰보아 왔던 관행이라 생각한다. 추사의 예술작품은 대부분 성리학의 가면 뒤에 본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경』

舊染汚俗咸共維新 과거의 나쁜 풍속은 함께 바꿔나가야 한다는 뜻

○『구당서』

隋氏失馭天下沸騰 나라를 잘못 다스리니 천하가 들끓는다.

崇禎琴實 숭정금을 보관하고 있는 방

(밑둥 종 부분의 볼 시가 끝 말로 바뀌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명나라가 망한지 200년이 넘도록 명에 대한 의리와 성리학의 명분론을 내세우고 있는 조정의 작태는 권신들의 사용을 채우기 위해 내세운 구실에 불과하며, 국왕 또한 반쪽짜리 조정에 기탁하여 권좌를 지켜내니 나라꼴이 암담하다?)는 비통한 마음을 담아 둔 것이다.

三十萬 梅樹下室 삼십만 그루의 매화나무 아래에 있는 방

(세상의 易이 바뀌어 동이족이 세운 두 나라 조선과 청이 나란히 설 수 있는 호기가 찾아왔건만 200년 전 멸망한 명의 제후국을 자청하는 잘못된 정책을 펼치도록 국왕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高會夫娃臾汝결(?)

직역 : 좋은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아들, 딸, 손 자가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

저자해석 : 추사는 얼굴 예쁜 계집 왜, 꾀일 용, 너 여, 실 묶을 결을 아내 처, 사내아이 아, 계집 녀, 손자 손처럼 썼다. (부자가 팽형을 당하고 후손조차 두지 못해 조상님 제사도 모실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술로 시름을 달래고 있는데 이제 술을 그만 드시고 생강은 늙을수록 매워진다고 했으니 노익장을 과시하며 혼인을 청하라 하네. 고귀한 뜻을 함께 할 얼굴 예쁜 계집을 찾아 너의 후손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꼬드기네.)

노년에 친구를 잃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식 자랑, 돈 자랑, 그리고 출세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다.

○많은 추사 연구가들은 그동안 추사의 문예작품을 지나치게 서체중심으로 연구하며, 그의 작품에 담긴 필의를 간과하고 있는데. 이는 추사 선생도 누차 강조했듯이 서체를 통하여 옛사람을 배우거나 이해하려는 것은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서체중심의 연구보다 작품에 담긴 筆義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려는 노력을 통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재정립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추사를 문예인으로 묶어두는 오랜 관행도 이제 ?정치인의 문예?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필자가 만난 추사는 분명한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그 많은 시련 속에서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 글을 마치며

○이 책을 통하여 추사에 대한 이해가 매우 넓어졌으나 너무 어려운 책이어서 한 번 읽어서는 한계가 있는데다, 선생의 인간됨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바가 너무 많다. 선생이 남긴 글들을 통해 추사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넓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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