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완당선생전집

청담(靑潭) 2016. 7. 6. 16:52

 

 

완당선생전집

 

 

 

완당(추사 김정희)선생집

 

조선 말기의 학자·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시문집. 10권 5책. 연활자본. 1867년(고종 4)에 문인 남상길(南相吉)이 김정희의 고금체(古今體)의 시집 ≪담연재시집 覃揅齋詩集≫과 ≪완당척독 阮堂尺牘≫ 2편을 간행하였다.

이듬 해인 1868년 가을에 남상길·민규호(閔奎鎬)가 산정하여 ≪완당집≫을 간행하였다. 당시의 ≪완당집≫은 5권으로, 소(疏)·서(書)·문답·서(序)·기(記)·제문·상량문·고(攷)·변(辨)·설(說)·명(銘)·서후(書後) 등이 실려 있다.

그 뒤 1934년 김정희의 현손인 익환(翊煥)이 유일(遺逸)된 것을 수습하고 중복된 것을 산정하여 ≪완당선생전집≫을 간행하였다. 권두에 남상길의 서문과 민규호의 소전(小傳)이 있다. 권수(卷首)에는 서(序)·구서(舊序)·소전·초상(肖像)·유묵이 있다.

 

 

완당선생전집 서

 

○비록 그러나 세상에서 선생을 칭찬하는 이들은 하나의 기예(技藝)만을 들어 “필가(筆家)의 웅호이다.” “고증학(考證學)이 풍부하다.”고만 할 뿐이고, 스스로 선생을 깊이 안다고 자부하는 이는 고작 “시(詩)는 정예하고 강강하며 문(文) 또한 간결하여 세속의 비속한 투식을 벗어나 고인(古人)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데에 불과하니, 이런 정도뿐이라면 어떻게 선생을 참으로 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체로 그 강하고 모난 성품과 고고하고 개결한 행실이 절로 재능을 감추고 세속과 어울리고 함께 진퇴를 못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을 좋아하지 않은 자들이 그 단점을 조성하여 마침내 세 사람의 말에 의해 자모(慈母)의 북을 던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궁벽한 바다와 머나먼 변방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어 모진 고생과 상심 속에 구사일생으로 지내면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큰 계책을 쌓아두고 펴지 못함으로써 후인들로 하여금 한기ㆍ부필ㆍ범중엄ㆍ구양수에 비기지 않고 오직 소 문충에게만 비기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에게만 불행한 일이겠는가.

○공이 약관(弱冠) 시절에 사신 가는 부친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옹방강ㆍ완원과 교유하고 그 후로는 그들과 서신 왕래를 한 것이 매우 번다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그 사실만 보고서 마침내 그의 학문이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일찍부터 가정(家庭)과 사우(師友)들로부터 전해받은 것이요, 그들을 힘입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학문의 본원(本源)을 깊이 터득한 공에 대하여 한갓 서예와 고증학만을 중시하는 것은 또한 얕은 것이다. 그러나 그 서예와 고증학에 대해서도 다만 막연히 중시할 뿐이요, 그 진가를 능히 알 사람이야 몇이나 되겠는가.    김영한(1878-1950)

 

 

담연재시집 서

 

○완당공(阮堂公)의 시문(詩文)은 본디 뛰어난 대가(大家)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침으로써 이로 인해 시문이 가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젊었을 적에 공의 시문을 빌려다 읽어보고서야 비로소 공의 전(傳)할 만한 것이 비단 글씨에 대한 명성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공의 글씨가 천하에 널리 퍼져서 중국의 사대부들은 이를 신(神)처럼 숭배하고 있는데, 압록강(鴨綠江) 동쪽 사람들은 모두가 강아(薑芽)를 공손히 하려 들지 않으니, 이는 바로 포산공(蒲山公)이 진왕(秦王)을 보지도 않고 대단히 좋아한 격이요, 또한 난쟁이가 극장 구경하는 격일 뿐이다.  신석희(1808-1873)

 

 

완당김공 소전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義理)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ㆍ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공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젊은 시절에 엮어놓은 것들은 두 차례에 걸쳐 다 불태워 버렸고, 현재 세상에 전하는 것은 평범하게 왕복했던 서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도의(道義)의 바름과 심술(心術)의 밝음과 경례(經禮)의 발휘(發揮)에 있어 공의 대략을 알 수가 있다.     민규호(1836-1878)

 

 

완당전집 제1권

 

■고(攷)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설(說)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유(漢儒)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인재설(人才說)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흔히 총명한데, 겨우 제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전주(傳注)와 첩괄(帖括)로 그를 미혹시키어,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보지 못하고, 한번 혼탁한 먼지를 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제생(諸生)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하여 아무런 보람도 없이 어렵사리 시장(試場)을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기색(氣色)조차 쇠락해져 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재주는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생장(生長)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 산천(山川)ㆍ인물(人物)과 거실(居室)ㆍ유어(遊御)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한 일들을 직접 목격해 보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이목(耳目)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수족(手足)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재력(才力)이 꺾여 다해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고루한 유생(儒生)도 문(文)이 꼭 없을 수는 없으나, 귀로는 많은 것을 듣지 못했고 눈으로는 많은 것을 보지 못했음으로 인하여 촌스럽고 고루한 지식만을 내놓게 되니, 천하의 광대한 문(文)에 비유한다면 어찌 다시 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의 묘(妙)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영기(靈氣)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이르러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주1 : 전주(傳注)와 첩괄(帖括) : 전주는 모든 경서(經書)의 주석을 말하고, 첩괄은 과거(科擧)에 응시할 사람이 경서의 난어구(難語句)가 출제(出題)될 때에 대비하여 경서 가운데 난어구들을 모아서 이를 시부(詩賦) 등으로 엮어서 암기(暗記)하기에 용이하도록 하는 것을 이른 말로, 전하여 과거 공부를 의미한다.

주2 : 유어(遊御) : 말을 타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호탕하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변(辨)

●역서변(易筮辨) 상(上)

○...그래서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많이 열독(閱讀)하여, 《주역》이 한갓 복서(卜筮)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허물을 적게 하는 글임을 밝혔던 것이다.

●학술변(學術辨)

○학술이 천하(天下)에 있어 수백 년을 지나면 반드시 변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차 변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단서를 엶에 따라 천백 사람이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하게 되고, 그것이 이미 변한 뒤에는 또 한두 사람이 그 이룬 것을 한데 모음으로써 천백 사람이 모두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할 적에는 온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므로 그 폐단이 드러나지 않지만, 모두가 그것을 따를 적에는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므로 그 폐단이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폐단을 바로잡아 의연히 이를 견지하게 되고, 그 변한 것이 이미 오래됨에 미쳐서는 국가를 소유한 자가 법제(法制)로 얽어매고 이록(利祿)으로 유인하여, 아이들은 그 학설을 익히고 늙은이들은 그것이 그른 줄을 모름으로써 천하 사람이 서로 그것을 편히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천하 사람이 그것을 편히 여긴 지 이미 오래되면 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을 변개시킬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천고 이래 학술 변천의 대략이다.

●사폐변(私蔽辨)

○...군자가 홀로 있을 때에는 인(仁)을 생각하고, 공적으로 말을 할 적에는 의(義)를 말하며, 행동거지를 모두 예(禮)에 맞게 하는 것이니,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밝힌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신(信)이라 하며, 베푸는 것을 균평하게 하는 것을 서(恕)라 하는데, 이것을 점차로 이루어서 인(仁)하고 또 지(智)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私)와 폐(蔽)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군자가 일을 대하기 전에는 방자함이 없이 공경하여 그 소루(疏漏)함이 있을까를 염려하고, 일이 있어 행동할 적에는 사곡됨이 없이 바르게 하여 그 거짓됨이 있을까를 염려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바르게 하여 기어코 중화(中和)를 이루려고 힘써서 그 편벽됨과 어긋남이 있을까를 염려한다. 그런데 소루함을 경계하는 것은 남이 보고 듣지 않은 데서도 계신 공구(戒愼恐懼)하는 데에 달려 있고, 거짓됨을 제거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달려 있으며, 중화를 이루는 것은 예(禮)에 통달하고 의(義)에 정밀하며, 인(仁)에 지극하고 인륜[倫]을 극진히 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이 다 함께 선(善)으로 돌아가게 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지선(至善)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묵법변(墨法辨)

○서가(書家)들은 묵(墨)을 제일로 치는데, 대체로 글씨를 쓸 때에 붓털[亳]을 부리는 것은 곧 붓털로 하여금 묵을 묻히도록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종이와 벼루는 모두 묵을 도와서 서로 쓰임을 발하는 것이니, 종이가 아니면 묵을 받을 수 없고 벼루가 아니면 묵을 발산시킬 수 없다. 묵의 발산된 것은 곧 묵화(墨華)의 떠오르는 채색이니, 일단(一段)의 묵을 잘 거두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묵을 거두는 데에만 능하고 묵을 발산시키는 데에 능하지 못한 것은 또 좋은 벼루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벼루를 얻은 다음에야 글씨를 쓸 수 있으니, 벼루가 아니면 묵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종이가 묵에 대해서도 또한 벼루와 서로 비슷한 존재이니, 반드시 좋은 종이가 있어야만 이에 행묵(行墨)을 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묵과 징심당지(澄心堂紙)ㆍ옥판지(玉版紙)와 동전(桐箋)ㆍ선전(宣牋) 등의 종이를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붓은 또 다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직 붓치레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고, 묵법(墨法)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시험삼아 종이 위의 글자를 보면 오직 묵 그대로일 뿐이니 이는 백성들이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중장(韋仲將) 또한 말하기를,

“장지(張芝)의 붓과 좌백(左伯)의 종이와 신(臣)의 묵(墨)을 써야 한다.”

하였고, 또 송(宋) 나라 때에는 이정규(李廷珪)의 반 자루를 천금같이 여겼었다. 그리고 고인(古人)의 법서 진적(法書眞蹟)의 먹물 방울진 곳을 보면 마치 기장알[黍珠]이 불룩 튀어나와서 손가락에 걸릴 것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니, 여기에서 옛 묵법을 거슬러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결(古訣)에 이르기를,

먹물은 깊고 색은 진하며, 수많은 붓털이 힘을 가지런히 쓰게 한다.[漿深色濃 萬亳齊力]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묵법(墨法)과 필법(筆法)을 아울러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우리나라의 서가(書家)들은 홑으로 ‘수많은 붓털이 힘을 가지런히 쓰게 한다.[萬亳齊力]’는 한 구절만 집어내어 이것을 묘체(妙諦)로 삼고, 윗구절의 ‘먹물이 깊고 색이 진하게 한다.[漿深色濃]’는 말은 아울러 언급하지 않아서 이 두 구절이 서로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르니, 이는 꿈에도 묵법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편고(偏枯)한 데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망녕되이 논하기를,

“고려 말기 이후로는 모두가 언필(偃筆)을 썼는데, 한 획의 상하 좌우로 붓끝이 스쳐간 곳과 붓 허리가 지나간 곳에 진하고[濃] 묽고[淡] 매끄럽고[滑] 껄끄러움[澁]을 나누어 포치해서 획이 모두 편고하게 되었다.”

고 한다. 그러나 진하고 묽고 매끄럽고 껄끄러움에 대해서는 묵법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지, 어디 언필을 하고 안하고 하는 필법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묵법과 필법을 구별 없이 혼동시키어 다만 필법만 들어서 논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편고된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격물변(格物辨)

○...그러므로 격물(格物)이란 사물(事物)에 이르러 그친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가국천하(家國天下)의 오륜의 일은 의당 몸소 친히 그곳에 이르러 실천하여 지선(至善)에 그쳐야 하는 것이니, ‘물을 이르게 하다.[格物]’와 ‘지선에 그치다.[止至善]’, ‘그칠 줄을 알다.[知止]’, ‘인에 그치다.[止于仁]’, ‘경에 그치다.[止于敬]’ 등의 일이 모두 한 가지 뜻이요 두 가지 해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성현의 도는 모두가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뜻일 뿐이다.

 

 

완당전집 제2권

 

■소(疏)

●대사성을 사양하는 소[辭大司成疏]

○그런데 요즘에 성균관 대사성의 새 제명(除命)이 갑자기 천만 생각 밖에 내려왔는지라, 신은 삼가 은지(恩旨)를 받들고는 하도 두려워 놀랍고 경황이 없어 식은 땀이 옷을 흠뻑 적시는 가운데 진실로 몸둘 곳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 이 직임은 바로 영도(榮塗)의 높은 선발이요 명장(名場)의 더없는 인망으로서 세상에서 ‘사유(師儒)의 장(長)’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고 용렬하여 가장 남의 밑에 맴돌며, 재주와 식견 또한 천박하여 한 가지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신 같은 위인이야말로 한갓 자신을 반성해 보아서 잘 알뿐만 아니라 또한 온 조정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또 어떻게 감히 굽어 통촉하시는 성상의 지감을 스스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리 긴중하지 않는 한산한 부서의 별볼일 없는 직임이라 할지라도 신은 실로 삼가고 주저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더구나 인재(人材)를 양성하고 문풍(文風)을 크게 천양하는 일을 어찌 신이 책임질 수 있겠으며, 상술(庠術)의 제도를 거듭 밝히고 고과(考課)의 법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을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주관(周官)》의 성균 악정(成均樂正)이 중화(中和)를 교도하는 직임으로 우리 성조(聖朝)께서 맨 처음 선포하신 치화(治化)를 돕는 일을 더욱 어찌 신이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불합당한 조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 달려가 응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청요직을 잘못 제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미천한 사람의 소신도 억지로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헤아리시고, 잘못 내려진 은명을 속히 거두어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주시어 공기(公器 관직을 뜻함)를 엄중하게 하고 사분(私分 개인의 분수)을 편안하게 하소서.

 

■서독(書牘)

●본가에 올리다[上親庭] ※1840년 55세

○어제 선시(宣諡)의 예를 마치고 나니 신민(臣民)들이 크게 슬퍼하여 갈수록 더욱 망극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멀리 떨어져 계시는 터라 우러러 반호(攀號)하지 못하시어 기가 막히고 허전함[廓然]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시겠습니다. 저의 비통한 심정 또한 말씀으로 다 형용하여 올릴 수 없습니다. 12일에 영(營)에서 온 파발(擺撥)을 통하여 올린 편지는 이미 들어갔을 듯합니다.

또 비가 한번 오고 나니 서늘한 기운이 날로 더해가서 아침과 낮으로 기후가 급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삼가 살피지 못하건대, 편지를 올린 뒤 4~5일 이래로는 또 체후(體候)가 어떠하십니까? 근일의 제절(諸節)은 더욱 순조로워지시며, 김 의원(金醫員)은 거기에 계속 머물러 수시로 진찰하면서 요즘에는 어떤 약제(藥劑)를 올리고 있습니까? 안절부절 못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온 영내(營內)의 크고 작은 일들도 한결같이 편안하여 다른 소란이나 없으십니까? 여러가지 일들이 삼가 염려되옵니다.

●사중 명희 에게 주다[與舍仲 命喜]

○나의 행차는 그날 행장을 점검하여 배에 오르고 나니 해가 벌써 떠올랐었네. 그리고 배의 행로에 대해서는 북풍(北風)으로 들어갔다가 남풍(南風)으로 나오곤 하다가 동풍(東風) 또한 나고 들고 하는 데에 모두 유리하므로 이에 동풍으로 들어갔는데, 풍세(風勢)가 잇달아 순조로워서 정오(正午) 사이에 바다를 거의 삼분의 일이나 건너버렸었네.

그런데 오후에는 풍세가 꽤나 사납고 날카로워서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므로 금오랑(金吾郞)으로부터 이하로 우리 일행에 이르기까지 그 배에 탄 여러 초행인(初行人)들이 모두가 여기에서 현기증이 일어나 엎드러지고 낯빛이 변하였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현기증이 나지 않아서 진종일 뱃머리에 있으면서 혼자 밥을 먹고, 타공(舵工)ㆍ수사(水師) 등과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가려는 뜻이 있었다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억압된 죄인이 어찌 감히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오직 선왕(先王)의 영령이 미친 곳에 저 푸른 하늘 또한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 주신 듯하였네.

석양 무렵에 곧바로 제주성(濟州城)의 화북진(禾北鎭) 아래 당도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하선(下船)하는 곳이었네. 그런데 그곳에 구경나온 제주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북쪽의 배가 날아서 건너왔도다. 해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양에 당도한 것은 61일 동안에 보기 드문 일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아칠 줄은 또 생각지도 못했다.”

고 하였네. 그래서 내 또한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이것은 나도 모르는 가운데 또 하나의 험난함과 평탄함을 경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배가 정박한 곳으로부터 주성(州城)까지의 거리는 10리였는데, 그대로 화북진 밑의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성(城)을 들어가 아전[吏]인 고한익(高漢益)의 집에 주인 삼아 있었는데, 이 아전은 바로 전등(前等)의 이방(吏房)이었는 바, 배 안에서부터 고생을 함께 하며 왔었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인데다 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으니, 이 또한 곤궁한 처지로서 감동할 만한 일일세.

대정(大靜)은 주성의 서쪽으로 80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그 다음날에는 큰 바람이 불어서 전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날은 바로 그 달 초하루였었네. 그런데 이날은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마침내 금오랑과 함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으나, 그 길의 절반을 지난 이후로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그리고 또 밀림(密林)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 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樹木)들로서 겨울에도 새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내지(內地)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으로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취가 있었겠는가.

대체로 고을마다 성(城)의 크기는 고작 말[斗] 만한 정도였네. 정군(鄭君)이 먼저 가서 군교(軍校)인 송계순(宋啓純)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邑) 밑에서 약간 나은 집인데다 또한 꽤나 정밀하게 닦아놓았었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툇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정주(鼎廚)가 있으며, 작은 정주의 북쪽에는 또 두 칸의 정주가 있고, 또 고사(庫舍) 한 칸이 있네. 이것은 외사(外舍)이고 또 내사(內舍)가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 내사는 주인에게 예전대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네. 다만 이미 외사는 절반으로 갈라서 한계를 나누어놓아 손을 용접(容接)하기에 충분하고, 작은 정주를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이나 하인 무리들이 또 거기에 들어가 거처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였네.

그리고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家屋) 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는데, 마당과 뜨락 사이에 또한 걸어다니고 밥 먹고 할 수가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 주인 또한 매우 순박하고 근신하여 참 좋으네.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는지라 매우 감탄하는 바이로세. 이 밖의 잗단 일들이야 설령 불편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감내할 방도가 없겠는가.

금오랑이 방금 회정(回程)에 올랐는데, 또 며칠이나 순풍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네. 집안 하인을 금오랑 편에 같이 내보내면서 대략 이렇게 서신을 부치는데 어느 때나 과연 이 서신을 열어보게 될지 모르겠고, 집의 소식은 막연히 들어볼 방도가 없으므로 바라보며 애만 끊어질 뿐이로세. 아직 다 말하지 못하네.

●다섯 번째[五]

○지난달에 안 주부(安主簿) 편과 제주(濟州)의 경저리(京邸吏)가 돌아가는 편에 연달아 부친 서신이 있었는데, 듣건대 아직껏 포구로 내려가는 곳에 머물러 있어 즉시 출발하지 못했다 하니 아마 이 서신과 함께 나란히 들어갈 듯하네.

●세 번째[三]

○세선(歲船) 편에 부친 김치 항아리 등속은 과연 아무 탈 없이 도착하였네. 그래서 몇 년 동안에 처음으로 김치의 맛을 보게 되니, 매우 상쾌함을 느끼어 내 입에는 너무 과람한 듯하였네.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또 이번 인편에 약간의 김치 항아리를 보내 왔는데, 이 또한 지난번처럼 패손되지 않아서 위장을 틔워줄 수 있을 듯하네.

●우아에게 주다[與佑兒]

○난(蘭)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隸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文字)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니,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趙熙龍)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一路]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 종이를 많이 보내온 것을 보니, 너도 아직 난(蘭) 경지의 취미를 알지 못해서 이렇게 많은 종이를 보내 그려주기를 요구한 것이니, 자못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겠다. 난을 치는 데는 종이 서너 장만 가지면 충분하다. 신기(神氣)가 서로 모이고 경우(境遇)가 서로 융회되는 것은 글씨나 그림이 똑같이 그러하지만, 난을 치는 데는 그것이 더욱 많이 작용하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많은 양으로 하겠는가. 만일 화공배(畫工輩)들의 수응법(酬應法)과 같이 하기로 들면 한 붓으로 천 장의 종이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작품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 때문에 난을 그리는 데 있어 내가 많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네가 일찍이 본 바이다.

그리하여 지금 약간의 종이에만 써서 보내고 보내온 종이를 다 쓰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그 묘리를 터득하는 것이 옳다.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것을 묘로 삼는 것인데, 지금 보건대 네가 한 것은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바로 그쳤다. 그러니 모름지기 붓을 세 번 굴리는 곳에 공력을 쓰는 것이 좋다. 대체로 요즘의 난을 치는 사람들이 모두가 이 세 번 굴리는 묘를 알지 못하고 되는 대로 먹칠이나 할 뿐이다.

●석파 흥선대원군 에게 주다[與石坡 興宣大院君]

○자취가 얽매이고 형체는 떠나 있으나 매양 생각은 있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외씨(外氏)가 이렇게 몰락함으로부터 특별히 염려가 되고 금석(今昔)의 사정을 살펴보매 마음에 걸린 것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찾아 위문해 주신 성대한 은혜가 너무도 월등히 뛰어나서, 서신을 손에 쥐고는 가슴이 뭉클하여 스스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 ...내려주신 여러 가지 물품에 대해서는 정중하신 지극한 뜻을 나의 소망(素望)이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우러러 알겠습니다. 그러나 물리치는 것은 불공스러운 일이기에 마치 본디부터 소유한 것처럼 염치를 무릅쓰고서 받고 보니, 감격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눈은 더욱 어른거리고 팔목은 태산같이 무거워서 어렵스럽게 붓을 들어 이 몇 자만을 기록합니다. 우선 남겨 두고 장례(狀禮)를 갖추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五]

○서릿발이 번쩍번쩍 빛나서 손에 쥐면 차가움을 느낄 만합니다. 꽃 필 때의 한 가지 약속이 차츰 흘러서 이즈음에 이르고 보니, 경치를 대하매 마음이 서글픕니다.

삼가 받들어 살피건대, 이 늦가을철에 존체가 편안하시다니, 우러러 위로가 됩니다. 다만 공사(公私) 간의 일로 마음을 많이 쓰시는 데 대해서는 염려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척생(戚生)은 노병(老病)이 가을을 당하여 더욱 심해져서 쇠한 기운을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으니, 초목과 함께 썩어가는 것이 바로 내 분수 안의 일일 뿐입니다.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는 이 노부(老夫)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 작품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면전(面前)에서 아첨하는 하나의 꾸민 말이 아닙니다. 옛날 이장형(李長蘅)에게 이 법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것을 보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이상하단 말입니까. 합하(閤下)께서도 스스로 이 법이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몰랐으니, 이것이 바로 저절로 법도에 합치되는 묘입니다. 나머지는 벼루가 얼어서 간략히 이만 줄이고 갖추지 않습니다.

○신위당 관호 에게 주다[與申威堂 觀浩〕

허치(許癡 소치 허유)는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까?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화법(畫法)은 종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다행히 주리(珠履)의 끝에 의탁하여 후하신 비호를 입고 있으니, 영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사람을 알아주겠습니까. 그 또한 제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초사(草師 초의선사) 또한 남쪽 지방의 이름난 숙학(宿學)으로 총림(叢林) 가운데 흔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시론(詩論)을 보건대, 또한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추고 도장과 도장이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겠으니, 참으로 매우 훌륭합니다.

○조운석 인영 에게 주다[與趙雲石 寅永]

그런데 재차 비봉(碑峯)의 고비(古碑)를 가져다가 반복하여 자세히 훑어보니, 제1행 진흥태왕(眞興太王) 아래 두 글자를 처음에는 ‘구년(九年)’으로 보았었는데 ‘구년’이 아니고 바로 ‘순수(巡狩)’ 두 글자였습니다. 또 아래 ‘신(臣)’ 자 같이 생긴 것은 ‘신’ 자가 아니고 바로 ‘관(管)’ 자였습니다. 그리고 ‘관’ 자 밑에 희미하게 보인 것은 바로 ‘경(境)’ 자이니, 이것을 전부 통합해 보면 곧 ‘진흥태왕순수관경(眞興太王巡狩管境)’ 여덟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例)는 이미 함흥(咸興) 초방원(草旁院)의 북순비(北巡碑 황초령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7행의 ‘도인(道人)’ 두 글자는 또 초방원 북순비의 ‘시수가 사문도인(時隨駕沙門道人)’이란 말과 착오 없이 딱 들어맞습니다.

또 제8행에는 ‘남천(南川)’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이 두 글자는 바로 이 비(碑)의 고실(故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으니, 이 비는 의당 진흥왕 29년 이후에 세운 것이지,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주에 순행(巡幸)하여 봉강(封疆)을 척정(拓定)할 때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또 제9행의 ‘부지급간미지(夫智及干未智)’ 여섯 자는 저 초방원의 비에서 수가(隨駕)한 여러 사람들의 관작(官爵)과 성명(姓名)을 기록한 것과 부합되니, ‘부지급간미지’ 이 여섯 자는 바로 관명과 인명인 듯하나, 어느 것이 관명이고 어느 것이 인명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史)의 직관(職官)에 있어서는 예전부터 빠진 글이 많아서 또한 자세히 고증할 수가 없고, 대체로 초방원의 비와 동시에 세운 것만은 확실한데,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라고 보는 경우에 대해서는 감히 확실하게 증거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평왕(眞平王) 26년에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고 보면 이 비가 진평왕 26년 이전에 세워진 것이 또 분명해집니다.

진흥왕 29년에 남천주를 설치함으로부터 이후로 진평왕 26년까지가 모두 38년간인데, 초방원의 비에서 지금 비로소 상고해 보니, 그것이 진지왕(眞智王) 때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진지왕 때에 세운 것임을 아는가 하면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아들입니다. 진지왕 때에는 거칠부(居漆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었는데, 초방원 비문의 수가(隨駕)한 사문도인(沙門道人) 법장(法藏)ㆍ혜인(慧忍) 두 사람 아래에 ‘口等居‘ 등의 글자가 있으니 저의 소견으로는 본디 좀벌레로부터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이지러진 글자는 마침내 그것이 없어졌으나 다른 본(本)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大) 자의 왼쪽 삐침 획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이지러진 글자의 상반(上半)은 이것이 원래 이지러진 것으로서 그것이 칠(漆) 자의 윗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거칠부(居漆夫)가 상대등(上大等)이 된 때가 진지왕 원년인데 진지왕은 왕위(王位)를 4년간 누리었고, 진평왕이 이어 즉위한 원년 8월에는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니, 거칠부가 상대등으로 있었던 기간은 곧 진지왕의 재위 4년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초방원의 비 또한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 아니고 바로 진지왕 때에 세운 것으로 진지왕도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巡狩)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고, 역사에 기재된 지리(地理)는 비렬홀(比列忽)에 불과하지만, 초방원의 비를 통해 비렬홀 이북의 2백 리 지역이 또 신라(新羅)의 영토로 꺾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으나, 이 거칠부가 수가(隨駕)한 것으로 말하자면 진지왕이 또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두 비의 문자가 서로 같은 곳이 많은 것으로 보면 두 비를 동시에 세운 것이 확실하고, 그 시기 또한 모두 진지왕 때에 있었던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완당전집 제3권

 

■서독(書牘)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

○대개 인도(人道)의 떳떳함은 음식남녀(飮食男女 : 1994년 대만의 영화제목인데 본래의 뜻은 사람들이 밥 먹고 살아가는 일들?)에 불과한 것이므로, 《주역》의 가르침은 곧 음식남녀의 일을 좇아 이를 재단하고 절제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五]

○마침 인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감히 몇 자를 적어서 애오라지 내가 살아있음을 고합니다. 그러나 살아있은들 또한 무엇하겠습니까. 북쪽을 바라보는 마음만 끝이 없습니다.

이곳의 풍토(風土)와 인물(人物)은 혼돈 상태가 아직 벽파(闢破)되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어만(魚蠻)ㆍ하이(蝦夷)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그 가운데 또한 무리를 초월한 기재(奇才)가 있기는 하나, 그들이 읽은 것은 《통감(通鑑)》ㆍ《맹자(孟子)》 두 종류의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이 두 가지 책만 하더라도 어디에나 구애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책비(責備)할 수 있겠습니까. 타고난 본성은 남북이 서로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그들을 인도하여 개발시켜 줄 스승이 없으므로, 슬피 여기고 불쌍히 여겨 이와 같이 탄식을 하는 것이 정히 이곳을 위해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라산(漢拏山) 주위 4백 리 사이에 널려있는 아릅답고 진기한 감(柑)ㆍ등(橙)ㆍ귤(橘)ㆍ유(柚) 등은 사람마다 다같이 아는 바이거니와, 이 밖의 푸른 빛이 어우러진 기목명훼(奇木名卉)들은 거개가 겨울에도 푸르른 식물(植物)로서 모두 이름도 알 수 없는 것들인데, 여기에 나무하고 마소 먹는 것을 금하지 않으니, 이것이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가령 나막신 신고 지팡이를 끌고서 이곳저곳을 탐방한다면 반드시 기이한 구경거리와 들을 것들이 있으련마는 이 위리안치된 생활로 어떻게 그런 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초(楚) 나라 남쪽에 돌은 많고 사람은 적은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거니와, 한라산의 영이하고 충만한 기운 또한 초목에 모였을 뿐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어찌 그 기운이 물(物)에만 모이고 사람에게는 모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수선화(水仙花)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 지역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에는 촌리(村里)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 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ㆍ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돌아보건대 굴속에 처박힌 초췌한 이 몸이야 어떻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우마(牛馬)에게 먹이고 또 따라서 짓밟아 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난 때문에 촌리(村里)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물(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또 천엽(千葉) 한 종류가 있는데, 처음 송이가 터져 나올 때에는 마치 국화(菊花)의 청룡수(靑龍鬚)와 같아 서울에서 본 천엽과는 크게 달라서 곧 하나의 기품(奇品)입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삼가 큰 뿌리를 골라서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마는, 그때 인편이 늦어지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굴자(屈子)의 이른바,

“내가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이 방초(芳草)를 완상하리오.”

라고 한 말에 내가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접촉하는 지경마다 처량한 감회가 일어나서 더욱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열 번째[十]

○가을철로 접어든 이후로 배 소식[船信]이 약간 격조해지자 주야로 사모하던 차에 즉시 내 집의 사자가 오는 편을 인하여 삼가 내려주신 서함을 받아 보니, 이것은 20여 일에 불과한 최근의 소식이었습니다. 내가 해중(海中)에 들어온 뒤로 서신이 이토록 신속하게 전달된 것을 미처 보지 못했는지라, 존안(尊顔)을 직접 뵌 듯이 기쁠 뿐만이 아닙니다.

●열네 번째[十四]

○죄인 정희는 이렇게 병든 몸으로 이곳에 있은 지 7년(1846년)이 되었는데, 그 완둔하고 어두움이 점차로 더욱 목석(木石)보다 심해져가고 있으니, 이것이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코에는 열화(熱火)가 이글거리고, 혀에는 백태(白苔)가 끼며, 눈은 항상 어른어른하여 나날이 이 증세들이 사람을 들볶는 바람에 도저히 반 시각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속히 죽어서 아무것도 몰라버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비록 7년을 더 지낸다 하더라도 무슨 득될 것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지극히 원통한 것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제는 성명께서는 거울처럼 환히 내려다 보시고 합하께서는 성명을 잘 보상하심으로써 한 백성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어두운 구덩이에 빠진 나만은 절로 이 밝은 태평성대와 막힘으로 인하여, 문을 지키는 호표(虎豹)가 그대로 있고 실내(室內)에 들어온 과극(戈戟)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설령 빠진 나를 구원할 긴 팔이 있고, 마른 나를 적셔줄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원통하여 탄식하며 길이 호곡하여도 구름 덮인 바다만 아득할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마침 내 집의 사자(使者)가 돌아가는 것을 인하여 좋은 인편을 그냥 보내 버릴 수 없어 밝은 창문 앞에 눈을 의탁하고 대략 몇 자를 적어서 겨우 이렇게 우러러 전달하여, 애오라지 세후로 몹시 사모해오던 사사로운 생각을 펴는 바입니다. 문사가 거칠어 의식을 이루지 못하는지라, 송구하여 흐르는 땀이 붓 끝에 사무칩니다.

●스물아홉 번째[二十九]

○“말할 수는 있으나 행하지 못할 것은 군자가 말하지 않는 것이고, 행할 수는 있으나 말하지 못할 것은 군자가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서른두 번째[三十二]

○지난번 영이가 남겨둔 지도(地圖)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그 지도를 모출(摸出)한 것이 최근인지, 오래 전인지의 여하는 모르겠으나, 대개 최근에 만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논할 것도 없이 우선 우리나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중국과 일본과의 국경(國境)이 이와 같이 매우 상세하여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전도(坤輿全圖)에 비할 바가 아니요, 또 중국의 황여전도(皇輿全圖)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만일 우리 국경의 동서 남북을 수삼 차례 돌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세밀히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우리 국경을 돌던 때가 그 어느 해, 어느 때인지를 모르는 실정이고 보면, 우리나라는 어찌하여 전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단 말입니까. 일소(一笑)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이에게 이 한 지도가 있고 보면, 불랑(佛朗)ㆍ여송(呂宋)ㆍ미리(米利) 등처에서도 각기 스스로 추측하여 각각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을 것이요, 반드시 이 한 영이의 지도를 가지고 서로 전하여 모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기 스스로 추측할 때에 그 국경을 돈 것이 또 어찌 한두 차례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우연히 한번 그들의 배가 왕래 출몰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눈을 번쩍 뜬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희(正喜)는 당초에 그 지도를 보고 크게 놀란 나머지 지금까지도 늘 망연자실하는 형편입니다. 지금 이 남북으로 언뜻 나타난 것을 저 지도에 비교한다면 도리어 하찮은 일 일 뿐입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의 짧은 안목으로는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를 지구(地球)의 끝으로 여기어, 여기에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약간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나가서 하이(蝦夷)의 외계(外界)로 나가면 이곳이 바로 미리견(米利堅)과 멀지 않은데, 미리견이 바로 요즘에 번박(番舶)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보면, 이 배들도 미리견을 왕래하는 배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배들이 우리나라와 일본 등 취미 없는 곳에 생각을 두고 내왕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매우 명확하여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한 가지 소식도 동정도 없겠습니까. 이것은 깊이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 또 오늘날은 아직 근심거리가 없으나 먼 장래를 염려하는 뜻으로 말하자면, 이는 바로 먼 장래 사람들의 일이지,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나의 어리석고 옅은 견식으로는 별도로 깊이 근심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저 번박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연히 소동을 벌여 심지어 농사를 폐하고 피해 도망을 가는 지경에 이른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방백(方伯)에서부터 아래로는 주수(州倅)ㆍ현서(縣胥)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소동만 벌일 뿐, 누구 하나도 백성들을 존무하고 안집시킬 뜻이 없어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도록 내버려 두고서, 그들이 떠돌다 굶어 죽는 일이 바로 앞에 닥쳤는데도 그것은 돌볼 줄을 모르고 한갓 번박에만 탓을 돌리어 마치 ‘내 잘못이 아니라, 흉년이 든 때문이다.’는 말과 같이 하고 있으니, 나는 계손(季孫)의 근심거리가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을까가 염려됩니다.

지금 당장 급급히 백성들의 소동 없애기를 도모하는 계책이 바로 제일가는 계책인데, 묘당(廟堂)에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에게 소동이 없어진다면 비록 천만 척의 번박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말을 하자니 매우 통탄스러워서, 가생(賈生)의 하나의 장태식(長太息)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완당전집 제4권

 

■서독(書牘)

●정다산 약용 에게 주다[與丁茶山 若鏞]

○...육향(六鄕)이 왕성(王城)에 있다는 것도 어떤 분명한 증거가 있사옵니까? 보내온 가르치심이 너무도 간략하여 감히 근거삼아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대저 육향이 교(郊)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鄭)도 또한 가ㆍ마(賈馬)의 의(義)를 벽파하였으니, 이미 정의 시대로부터 일정한 논이 없었는데, 더구나 뒷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허공에 매달고서 부연하여 추측하기를 마치 몸소 그 땅에 다다르고 눈으로 그 일을 본 듯이 착착 말하는 것입니까? 설사 옛사람과 암암리에 합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자기 의견을 스스로 세우고 자기 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경(經)을 설명하는 처지로서는 감히 못할 바이며, 다만 갈수록 갈등만 더하여 뒷사람의 안목을 어지럽히는 데에 족할 따름이요 경에는 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기오(其五)(심동암 :심희순에게 보낸 편지 글)

○서울에 오셨다는 말은 들었으나 쌓인 회포를 펼 인연은 없었으니 이쪽의 매달린 바램도 단상(湍上)과 다르지 않사외다. 봄 바람이 하마 늙어서 온갖 나무는 꽃이 다 피고 마을 버들도 굵어져 새파르니, 철에 따라 먼 사람이 그리워져 견딜 수 없었는데, 갑자기 생각 밖에 영감 편지가 손에 떨어져서, 삼가 시하 동정이 다복하심을 살폈으니 축하를 드려 마지않습니다.

맥구(麥區)의 법<중국 소항(蘇杭) 간의 신법(新法)으로 맥작(麥作)의 구전법(區田法)을 이름>은 이미 시험하셨다니 매우 잘한 일이며, 이장(里長)이나 촌정(村丁)들이 이를 모방하여 시행한다면 당연히 한두 사람의 집은 따라오기 마련이니, 반드시 귀찮스레 귀를 끌어 일러주고 면대하여 시키지 않더라도 될 거외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심희순(1819-?) : 1844년 (헌종 10)에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6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고,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삼사의 여러 직을 거쳐 1856년(철종 7)에는 이조참의, 1857년에는 대사성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났기 때문에 김정희(金正喜)의 찬탄을 받은 바 있다.

※내용으로 보아 김정희가 지방행정관인 심희순에게 농정에 대한 제안(맥구의 법)을 제시한 듯하며 이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 내용이라 하겠다.

●기십육(其十六)

해가 바뀐 뒤에도 한 번 만나기가 이렇게 더디고 근일에는 왕래하는 인편마저 들쑥날쑥하여 화답마저 이렇게 늦어지니 매양 병중에 고개를 쳐들고 생각하면 영감에게는 정이 잊혀지지를 않는구려. 마른 나무 차가운 재도 다 녹아나고 다 닦여버리지 않아서 그렇단 말입니까? 붓을 쥐고 애달파 할 따름이외다. 오늘에도 시체 한결같이 왕성하여 만복이 봄과 함께 형통하신지요. 다시 비외다.

아우(젊은 심희순에게 왜 이런 표현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정희는 70이 다되고 심희순은 30대의 나이다. 누구에게나 겸손의 표현으로 쓰는 듯하다.)는 초목처럼 나이가 칠순이 꽉 찼으니 온갖 추한 꼴이 다 드러나서 사람을 대하면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오. 이는 업경(業鏡) 속의 선현(善現)인지 악현(惡現)인지 모르겠소.

●이 농장인 재규 에게 주다[與李農丈人 在奎]

○...머리는 벗겨지고 이는 빠지고 눈곱 끼고 팔 뻣뻣하여 일어나자면 남을 기다리고 앉으나 누우나 베개를 기대는 백천 가지 추하고 졸한 꼴을 보면 한창 장성한 소년들은 반드시 크게 웃고 돌아가서 그 꼴을 말할 것이니 너무도 부끄럽고 너무도 가련한 신세이외다.

 

 

완당전집 제5권

 

■서독(書牘)

●백파에게 주다[與白坡]

○백파 노사(白坡老師) 선안(禪安)하신지요? 이미 더불어 거리낌없이 말을 마구 했는데 어찌 체면을 보아 자제할 이치가 있으리오. 전후 지묵(紙墨)의 사이에 일호라도 노여움을 숨겨 둔 뜻은 없었는데 보내 온 깨우침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한 것을 보면 이는 사(師)가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머금은 밥알이 튀어나와 서안(書案)에 가득하구려.

사의 나이 장차 팔십이요, 더구나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명안(明眼)의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기봉(機鋒)을 누가 들어서 발전(撥轉)해 주리오. 정문(頂門)도 따라서 인색(湮塞)하게 되어 침침한 귀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그저 넘기고 말다가 갑자기 목놓아 말하는 사람의 큰 사자후(獅子吼)를 부딪치니 의당 그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내 비록 천박한 사람이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서 아울러 그 선장(先狀)에까지 언급하였겠소. 사는 하나의 속세 문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깊이 궁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심(甚深)한 불지(佛旨)를 꿰뚫어 갈 수 있으리오. 이에 나아가 사의 무너지고 빠침이 여지가 없음을 알겠으니 어찌 더욱 터져 나오는 밥알이 서안에 가득하지 않겠소.

지금 이 열다섯 가지의 조례에 대하여 앞의 일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의 일설은 도로 다시 몽롱하여 수미(首尾)의 천 백 말이 한 구절도 마음에 터득되어 폐부 속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전혀 없고 예전 그대로 박잡하고 윤척(倫脊)이 없는 성어만을 주워 모아 구차스레 설명해 가는 것뿐이니 어찌하지요.

지난날에 한 산중의 노고추(老古錐)와 더불어 선(禪)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이와 같은 말을 하여 묵은 먹과 식은 밥이 한 판에 찍어낸 것 같으니 이것이 바로 치문(緇門)의 베껴 전하는 묵은 종이[故紙]로서 굳을 대로 굳어져 깨뜨리지 못하는 것인지요?

●기이십(其二十) : 초의에게 보낸 글

○...백파는 상기도 성 밖에 남아 있어 석장(錫杖)을 토굴에 맡기고 겨울을 나면서 학도를 모아 강의를 열었다고 하니 매우 기쁜 일이로세.

근간에 선지(禪旨)에 대하여 왕복한 것이 있는데 만약 사와 같은 이를 얻어 서로서로 고증 발명한다면 더욱 기쁜 일일 것이나 이 어찌 흐린 세상에 얻기 쉬운 일이겠는가. ...

●기삼십사(其三十四)

○편지를 보냈지만 한번도 답은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世諦)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건가.

다만 생각하면 늙어 머리가 하얀 연령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사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사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거요.

그렇지 않으면 마조(馬祖)의 갈(喝)과 덕산(德山)의 봉(棒)을 받을 것이니, 이 한 갈과 이 한 봉은 아무리 백 천의 겁(劫)이라도 피할 길이 없을 거외다. 모두 뒤로 미루고 불식.

●기삼십오(其三十五)

○갑자기 체편(遞便)으로부터 편지와 아울러 차포를 받았는데 차의 향기에 감촉되어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으니 편지의 있고 없음은 본래 계산하지도 않았더라네.

다만 이가 아리니 몹시 답답하지만 혼자서 좋은 차를 마시고 남과 더불어 같이 못하니 이는 감실(龕室) 속의 부처도 자못 영검하여 율(律)을 시한 것이라 웃고 당할 밖에 없네.

이 몸은 차를 마시지 못해서 병이 든 것인데 지금 차를 보니 나아버렸네.

가소로운 일이로세.

인편이 서서 재촉하므로 간신히 어둔 눈을 견디며 두어 자 적었네.

봄이 따뜻하고 해가 길면 빨리 석장(錫杖)을 들고 와서 종경주림을 읽는 것이 지극히 묘한 일일 걸세. 불선.

 

 

완당전집 제6권

 

■제발(題跋)

●석파의 난권에 쓰다[題石坡蘭卷]

○...우선 화품으로부터 말한다면 형사(形似)에도 달려 있지 않고 계경(蹊逕)에도 달려 있지 않으며 또 화법만 가지고서 들어가는 것을 절대 꺼리며 또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고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의를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工)이다.

나는 몹시 노둔(鹵鈍)한데다 지금은 또 여지없는 전복(顚覆)의 신세라서 난표봉박(鸞飄鳳泊)이 되어 그리지 않은 지 하마 이십여 년이다. 사람들이 혹 와서 요구하면 일체 못한다고 사절하여 마치 마른 나무와 차가운 재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았는데 석파가 그린 것을 보니 하남(河南) 선생이 사냥꾼을 본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록 스스로 그리지는 못할망정 전일의 아는 것을 들어 경솔히 쓰기를 이와 같이 하여 석파에게 부치는 바이니 모름지기 뜻과 힘을 오로지하여 나감과 동시에 다시는 이 퇴원(退院) 노추(老錐)로 하여금 더하지 못할 것을 더하도록 하여 나의 자작(自作)에 나음이 있게 말 것이며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고 싶어하는 자는 석파에게 요구함이 옳을 것이다.

 

 

완당전집 제7권

 

제문(祭文)

●부인 예안 이씨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

○...어허! 어허! 나는 행양(桁楊)이 앞에 있고 영해(嶺海)가 뒤에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한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자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이지요.

어허! 어허! 무릇 사람이 다 죽어갈망정 유독 부인만은 죽어가서는 안 될 처지가 아니겠소.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될 처지인데도 죽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더 없는 원한을 품어서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부자(夫子)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 행양보다 영해보다 더욱더 심했던 게 아니겠소.

어허! 어허! 삼십 년 동안 그 효와 그 덕은 종당(宗黨)이 일컬었을 뿐만 아니라 붕구(朋舊)와 외인(外人)들까지도 다 느껴 칭송하지 않는 자 없었소. 그렇지만 이는 인도상 당연한 일이라 하여 부인은 즐겨 받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그러나 나 자신은 잊을 수 있겠소.

예전에 나는 희롱조로 말하기를 “부인이 만약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도리어 낫지 않겠소.”라 했더니, 부인은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크게 놀라 곧장 귀를 가리고 멀리 달아나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거요. 이는 진실로 세속의 부녀들이 크게 꺼리는 대목이지만 그 실상을 따져보면 이와 같아서 내 말이 다 희롱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었소.

지금 끝내 부인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외다.

■잡저(雜著)

●우아에게 써서 보이다[書示佑兒]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난(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은 화도(畫道)에 있어 특별히 한 격을 갖추어 있으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은 무겁고 땅은 따뜻하여 풀은 돋아나며 산은 깊고 해는 긴데 사람은 고요하고 향기는 뚫고 든다. 이 한 조(條)는 이재의 말임.

옛 사람은 난초를 그리되 한두 종이에 지나지 아니하며 일찍이 여러 폭을 연대어 다른 그림같이 하지 않는다. 이는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난화를 요청하는 자들은 이 경지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서 혹은 많은 종이로 심지어는 팔첩(八疊)을 강청(强請)하는 자도 있지만 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사절할 따름이다.

●백파에게 써서 보인다[書示白坡]

○《...화엄경》에 이르기를 “보살의 마음으로써 집을 삼고 여리(如理)의 수행으로써 가법(家法)을 삼으라.” 하였고,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불법은 세간(世間)의 상(相)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하였다.

우물 바닥의 개구리가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것 같은 범우(凡愚)들이 석(釋)을 비방하여 “임금도 없고 애비도 없으니 양주(楊朱)ㆍ묵적(墨翟)과 같다.”느니 하고 있으니, 이는 다 안색(顔色)을 보지 못하는 고론(瞽論)이다. ...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자오천(子午泉)

구주라 밖에 있는 우리나라는 / 吾邦九州外

기승이야 뉘에게 사양할쏜가 / 奇勝誰與讓

열수(洌水)의 남쪽 및 한(馯)의 지역에 / 洌陽及馯域

샘도 또한 갖가지 형상이로세 / 於泉亦多狀

...

마령에는 시루에 떡쌀 김 솟고 / 馬靈沸甑饙

(증연(甑淵)은 진안(鎭安)에 있는데 마령은 곧 고호이다. 현지(縣志)에 이르기를 ‘큰 구멍이 위로 마루턱에 뚫려 물기운이 항상 쌀을 씻어 시루에 찌는 것과 같다.’고 했음.)

함라에는 먹물이 모여드는 걸 / 咸羅聚墨浪

(함라는 함열산(咸悅山)을 이름인데 묵정(墨井)이 있음.)

모씨가 내 글씨가 시중에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구입하여 수장했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입안에 든 밥알이 벌 나오듯 튀어나왔다. 그래서 붓을 달려 써서 부끄러움을 기록함과 동시에 서도를 약술하고 또 이로써 권면하다[聞某從市中得拙書流落者 購藏之 不覺噴飯如蜂 走寫以志媿 略畧敍書道 又以勉之]

●이심암의 매화소폭시 뒤에 주제하다[走題李心葊梅花小幅詩後]

꽃 보려면 그림으로 그려서 보아야 해 / 看花要須作畫看

그림은 오래가도 꽃은 수이 시들거든 / 畫可能久花易殘

더더구나 매화는 본바탕이 경박하여 / 況復梅花質輕薄

바람과 눈 어울리면 이울어 휘날리네 / 和風並雪飄闌珊

 

이 그림은 수명이 오백 세가 갈 만하니 / 此畫可壽五百歲

이 매화 보노라면 응당 다시 신선되리 / 看到此梅應復仙

그대는 못 보았나 시 속의 향이 바로 그림 속의 향일진대 / 君不見詩中香是畫中香

꽃 그려도 향 그리기 어렵다 말을 마소 / 休道畫花畫香難

 

●산사(山寺)

기운 봉 비낀 고개 여기가 진경인데 / 側峯橫嶺箇中眞

열 길이라 홍진 속에 잘못 들어 헤매었네 / 枉却從前十丈塵

감불은 사람보고 얘기를 하자는 듯 / 龕佛見人如欲語

산새는 새끼 낀 채 절로 와서 가까운 양 / 山禽挾子自來親

 

흠대의 맑은 물에 차를 끓여 마신다면 / 點烹筧竹冷冷水

분화를 공양해라 담담한 봄이로세 / 供養盆花澹澹春

눈물 닦는 그 공부를 어느 누가 터득했노 / 拭涕工夫誰得了

만 골짝 솔바람에 한번 길게 한숨 쉬네 / 松風萬壑一嚬申

 

 

완당전집 제10권

 

■시(詩)

●황년에 술을 금하니 마을 소년이 모두 떡을 사가지고 꽃구경을 갔다. 오늘 따라 바람이 심하여 홀로 앉았자니 너무도 무료하므로 붓에 먹을 묻혀 창졸간에 썼는데 바람과 떡에만 치우치다[荒年禁酒 村少皆買餠看花去 今日風甚 獨坐無聊 泥筆率題 偏屬風餠] 2수

소년이란 본래가 닥치는 그대로라 / 少年元不費商量

비 오건 바람 불건 예사로 여기거든 / 雨雨風風大毋傷

떡을 사고 꽃을 보니 도리어 구족이라 / 買餠看花還具足

운문에 선 파하자 공양으로 또 가누나 / 雲門禪罷又公羊

 

늙은이는 바람 피해 문 밖을 못 나는데 / 老者避風不出門

저들은 하나 같이 의기가 등등하네 / 任渠村氣一騰騫

와당 같은 큰 떡에다 주머니 속 뿌듯하니 / 瓦當大餠囊無澀

꽃 앞에 둘러앉아 볼 메도록 삼켜대네 / 環坐花前滿口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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