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 자료
1일차 출국
2일차
독일(8천 만 명, GDP 4위 4만 2천 달러)
면적은 35만 7022㎢이고, 인구는 8085만 4408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베를린이다. 인구밀도는 ㎢당 228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게르만족이고, 유태인·슬라브인·위그노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언어는 고지독일어(高地獨逸語)와 저지독일어(低地獨逸語) 중 일반적으로 고지독일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으며, 16세기에 루터의 성서번역에 의해 신고지독일어(新高地獨逸語)가 확립되어 방언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종교는 신교와 구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신교는 주로 북부와 동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51%가 믿고 있으며, 구교는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48%가 믿고 있다. 기후는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의 중간형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3조 40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1955달러이며, 우리나라의 대 독일 수출액은 62억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무선전화기·선박 등이고, 수입액은 210억 달러로 자동차·직접회로반도체·자동차부품 등이 주종이다.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사회는 심대한 충격을 받아, 기사전쟁(騎士戰爭)·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15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에 의해 신·구교가 분리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독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열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인민회의가 형식상의 국가최고권력기관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헤센주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강(江)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항공·철도·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독일의 경제·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상품거래소가 있고 매년 국제박람회가 열리는데 특히 2년마다 열리는 자동차박람회가 유명하며, 그외 서적, 기계공구, 생활용품, 액세서리 등의 국제박람회로 알려졌다. 57층의 메세투름은 박람회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공업으로는 염료·약품·광학·전기기기·기계 등이 이루어지며, 괴테대학교, 국립예술대학, 자연박물관, 공예박물관, 역사박물관, 기타 문화 ·교육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구(舊)시가는 12세기에 건설된 것이고 신(新)시가는 1333년 이래 확장된 것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1806년 이후 철거되고 산책길로 바뀌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외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발전하였다. 관광지로는 대성당, 뢰머광장, 괴테생가, 팔먼가든 등이 유명하며, 사과와인과 소시지가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6천 6백만 명, GDP 6위 4만 1천 달러)
■스트라스부르
인구는 26만 3940명(1999)이다. 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이다. 파리의 동쪽 447km, 라인강(독일 국경)의 서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하며, 알자스의 경제·문화 중심지이다. 또 유럽 전체의 교통의 요지이며, 라인강(江)과 론강(江)·마른강(江)을 잇는 운하가 시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큰 하항을 이루는 동시에 육상교통도 발달하였다. 공업이 활발하여 철강·기계·화학·전기·섬유·제분·식품·양조 공장 등이 있고, 스위스·독일과의 교역량도 많다. BC 15년 로마시대에 아르겐토라툼이라 일컬어졌는데, 455년에 훈족(族)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그 후 복구되어 스트라테부르굼(大路의 도시)이 되었다.
842년 최초의 프랑스어 문헌인 ‘스트라스부르 맹약’이 만들어졌다. 855년부터는 신성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1201년에 자유도시가 되었으며, 1681년에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4년 동안 독일군 점령하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직속의 주교관할구이며, 1567년 창립된 스트라스부르대학, 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대성당(11∼16세기), 로앙 추기경의 저택(18세기 건립, 현재는 미술관), 기타 중세풍의 가옥 등이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알자스로렌주 바랭현의 스트라스부르. 1190년부터 1880년까지 약 700년에 걸쳐 지어진 노트르담대성당의 모습이다. 성당 앞면의 섬세한 입체 세공이 아름답다.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다. 1176년에 짓기 시작하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무렵이다. 높이 142m 규모의 첨탑은 1439년에 완성하였다. 성가대석,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정탑(頂塔) 등은 로마네스크양식, 뾰족한 첨탑, 서쪽의 문들, 예배당 회중석 등은 고딕양식으로 건축하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13세기에 만든 '천사의 기둥'과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각각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밖에 1838년에 완성한 천문시계가 매일 오후 12시 30분에 종소리를 내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쁘띠 프랑스마을
스트라스부르 옛시가 서쪽에 있는 마을로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프티프랑스(Petite France)란 '작은 프랑스'라는 의미이다. 어부, 가죽을 무두질하는 사람, 물방앗간 주인 등이 살던 곳으로 알자스 전통 목조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라인강으로부터 들어오는 배들은 일강(Ill R.)의 갑문을 통해 이곳으로 진입하여 거의 모든 상점들의 뒷문까지 물건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고 한다. 2008년 가평군 청평면에 이를 모방한 마을이 있다.
■콜마르
보주 산맥 동쪽 기슭 상(上)알자스 평원 서쪽 끝에 위치하며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남서쪽 약 64km 거리에 있다.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시대인 9세기 경 작은 촌락에서 콜마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자유도시가 되었다. 17세기에 일어난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30년전쟁) 중에는 스웨덴에 점령되기도 하였으며(1632)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3세에게 양도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땅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1871∼1919)는 독일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했던 콜마르전투(1946년 1월 20일∼2월 4일) 결과 알자스 지방은 다시 프랑스 땅이 되었다.
알자스 지방은 포주산지로 유명한데 오래전부터 이곳은 포도주가 유명했으며 콜마르는 포도주를 거래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내에는 로슈(Lauch) 강이 흐르는데 작은 운하로 만들어져 오래전부터 운송로로 사용되었다. 근래들어 운하주변은 관광지로 변모되었으며 '작은 베니스'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이곳의 올드타운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움직이는 하울의 성(Howl's moving castle)'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생마르탱성당(13세기)을 비롯하여 옛 건물이 많은데 튜더식 가옥들이 아담한 구시가지를 이룬다. 그리고 옛 도미니크회 수도원인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운터린덴미술관(Musee Unterlinden)은 콜마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독일의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1472~1528)의 《이젠하임 제단화 Isenheim Altarpiece》를 소장하고 있다. 섬유·피혁·담배·기계·식품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뉴욕항(港)의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한 F.바르톨디의 출신지이다.
○쁘띠 베니스
프랑스 알자스 주 오랭 데파르트망의 콜마르에 있는 유명한 강변로이다. 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16세기 화려한 반목조 알자스 전통 가옥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자스 지방 고유의 풍광을 잘 간직한 프랑스 북동부 국경 도시 콜마르(Colmar)에 있는 강변 거리이다. 운터린덴 박물관(Musée d'Unterlinden), 메종 피스테르(Maison Pfister), 콜마르 생 마르탱 교회(Église Saint-Martin de Colmar)와 함께 지역의 주요한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푸아손느리 항구(Quai de la Poissonnerie)에 있다. ‘프티 브니즈(Petite Venise)’란 이름 그대로 프랑스의 작은 베네치아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강변 경치를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거리 한가운데에는 콜마르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알자스 지방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로슈(Lauch) 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이를 연결하는 작은 다리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강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반 목조 가옥들도 인상적이다. 건물 대부분이 알자스 특유의 건축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칠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근래에는 배를 타고 16세기 전통 가옥들을 관람하는 보트 여행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방문객들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기거나 근처에 있는 콜마르 자연사 인류학 박물관(Museé d'Histoire naturelle et d'Ethnographie de Colmar)에 들러 다양한 고고학 유물들과 동물 표본을 둘러볼 수도 있다.
■다징(독일)
숙박만 하는 도시이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슈바벤(Schwaben)지역의 마을로 아우구스부르크 계획지구(Planungsregion Augsburg)에 속한다. 로마 시대의 유적이 출토되었으며 1993년에는 696년 경에 만들어 진 물방아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물방아는 알프스 이북 지역의 물방아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성 마틴 성당(St. Martin's Cathedral)이 있는데, 고딕양식의 탑과 성가대석과 바로크식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3일차
오스트리아(8백만, GDP 29위 1인당 5만 달러)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으로,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면적은 8만 3871㎢, 인구는 866만 5550명(2015년 현재), 수도는 빈(Wien)이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종교는 73.6%가 가톨릭교, 4.7%가 개신교를 믿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이 늦어졌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샬플랜을 바탕으로 1951년 이후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을 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문화와 교육면에서는 독일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7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7230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연방공화제의 의원내각제로, 임기 6년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5∼6년의 상원(62석)과 임기 4년의 하원(183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국민당, 사민당, 자유당, 녹색당 등이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현 피셔(Heinz Fischer) 대통령이 2004년 7월 취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고, 그 아래 실권자 파이만(Werner Faymann) 총리가 2008년 12월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좌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짤츠캄머굿
○호수지대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마을 세인트 길겐 및 아름다운 짤츠캄머굿 호수지대 감상. 짤츠캄머긋 유람선. 에메랄드 빛 볼프강 체험하기! 볼프 강을 끼고있는 장크트길겐에서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유람선을 이용하면 에메랄드 빛의 맑은 호수를 더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잔잔한 호수 위에서 마을 주변과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유람선에 탑승하여, 볼프강호수의 풍경을 만끽한다. 유람선은 약 40분 코스이며, 특히 겨울에는 눈이 쌓인 산과 마을이 장관을 만들어낸다.
짤츠캄머긋 케이블카. 장크트길겐 마을의 그림같은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곳. 츠벨프호른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알프스 산자락까지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마을의 모습은 물론, 탁트인 곳에서 자연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다. 스키를 타기위해 산에 오르는 현지인들이 많이 있으며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정상에는 산책로와 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 천천히 걸으면서 짤츠캄머긋의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정상부근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있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할슈타트
○구 시가지 관광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 배경지였던 동화같이 아름다운 할슈타트 호수지대 및 아기자기한 구시가지 관광. 산과 호수가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어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짤츠캄머굿의 진주라 불리우는 천국과도 같은 호숫가 마을 '할슈타트는 짤츠캄머긋의 대표 여행지로 세계적인 명소로 뽑히는 곳이다. 할슈타트 호수에 비친 동화같은 마을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준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소금을 채굴해왔던 곳으로 세계 최초로 소금광산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소금산업이 발전해가면서, 현재는 소금산업이 아닌 휴양관광지의 대표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다흐슈타인 산에 소금광산의 모습이 남아있기때문에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산에 올라 그 흔적을 볼 수있으며, 할슈타트 전망대에 호수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산자락에 위치한 할슈타트 마을에는 교회, 카페, 레스토랑과 민박집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어느 곳을 가도 그림 같은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4일차
■짤즈부르크
알프스 산 북부 기슭과 국경에서 가까운 잘차흐 강 양안의 평평한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켈트족의 부락과 로마 도시 주바붐이 있던 자리였다.
696년경 성 루페르트(St. Rupert)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장크트페터 수도원과 논베르크 수녀원을 이곳에 설립했다. 739년 성 보니파키우스(St. Bonifacius)에 의해 주교관구가 되었다가 798년 대주교관구로 승격되었다. 대주교들은 1278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로 인정되었고, 이어서 이곳은 그들의 막강한 교회 공국(公國)의 중심지가 되었다.
승정왕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들여온 볼프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Wolf Ditridh von Raitenau, 1587~1612 재위), 시립대학교를 설립한 파리스 그라프 폰 로드론(Paris Graf von Lodron, 1619~53 재위), 레오폴트 안톤 폰 피르미안(Leopold Anton Freiherr von Firmian, 1727~44 재위) 등이 있다.
아름다운 알프스 경치와 화려한 건축술의 독특한 조합으로 잘츠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중세 건축물들은 후기 대주교들의 건축활동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주교관 건물들과 시민들의 집들은 주된 자랑거리이며, 이로 인해 잘츠부르크는 '독일의 로마'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잘차흐 강 좌안의 보다 오래된 도시 중앙에 대주교의 저택(1595~1619, 건물의 정면 개조 1710, 북서쪽 익면 증축 1788~92)이 있는 주거지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탑 안에 편종(1702)이 있는 새 건물(1592~1602, 1670경 확장)이 있다. 대성당은 독일 땅에 세워진 최초의 이탈리아풍 교회로서 1614~28년에 예전의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다.
옛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수목이 울창한 묀히스베르크(493m) 산등성이 부근에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장크트페터 수도원이 있다. 대부분의 수도원 건물들은 17~18세기에 지어졌으며, 이 교회는(1130~43) 로코코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수도원 북쪽에 본당(1221), 15세기의 고딕식 성가대석, 바로크식 예배당 등이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회가 있다. 묀히스베르크 꼭대기에는 호엔잘츠부르크 요새(1077, 지금의 형태로 개조 1500년경), 장크트게오르크 교회(1501), 논베르크 수녀원 등이 있다.
잘차흐 강의 우안에 있는 신도시의 유적들로는 교회 묘지에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아내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장크트제바스티안 교회(1505~12, 개조 1749~53), 성삼위일체 교회(1694~1702), 음악학교와 연주회장, 그리고 모차르트 기록물 보관소들로 이루어진 모차르테움(1910~14), 미라벨 성(1606, 개조 1721~27) 등이 있다.
도시교외지역에는 카푸힌 수도원(1599~1602), 레오폴트스크론 성곽(1736), 헬브룬 성곽(1613~19) 등이 있다. 대학교(1623~1810)는 1964년에 재설립되었고 대학교 교회(1694~1707)는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의 바로크식 걸작품이다.
수세기 동안 음악의 중심지로 알려진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출생지로 더 유명하다.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 있는 그의 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잘츠부르크 축제가 열린다. 19세기 내내 음악축제가 이 도시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렸다. 1917년 설립된 축제극장 위원회가 잘츠부르크의 축제를 연례행사로 만들었다.
현재 잘츠부르크 축제는 독주회·관현악과 실내악 연주회·교회음악·오페라·연극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차르트의 음악이 축제를 압도한다. 축제극장은 묀히스베르크 절벽 안쪽에 지어진 궁정 마구간을 개조한 것으로 옥외연주를 위한 펠젠라이트슐레(1693), 2개의 큰 실내 오페라 하우스(1926, 1960), 환영회 장소로 이용되는 겨울 승마학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북서부 관문이며, 중요한 도로와 철도의 교차점으로 막스글란에 국제공항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주요관광지이며 국제회의의 중심지이다. 거대한 양조장들이 있고 악기·철제품·직물·피혁제품 등이 제조된다. 1945~56년에 오스트리아 내 미군 사령부가 있었다.
○미라벨 정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주(州) 잘츠부르크 시내에 있는 17세기 정원이다. 잘츠부르크 신시가지의 미라벨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정원으로, 중앙역에서 라이너슈트라세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있다. 미라벨 궁전은 1606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지었으며, 당시는 알트나우라고 불렀다. 후임자인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정원은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Fischer vonErlach)가 조성하였고, 18세기에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von Hildebrandt)가 개조하였으나 1818년 화재로 파괴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궁전에 속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완전 개방하고 있다.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하여 조성하였으며,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많은 꽃들로 잘 장식되어 있다. 중앙분수 주위에는 1690년 모스트(Most)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을 조각한 작품이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유럽의 많은 바로크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바로크 박물관이 있다. 정원 서쪽에는 1704~1718년에 만든 울타리로 주위를 두른 극장이 있고, 북쪽 문 앞에는 정교한 청동조각으로 꾸민 패가수스 분수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멀리 보이는 호헨잘츠부르크성(城)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미라벨 궁전은 규모는 작아도 콘서트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 내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하였으며, 지금도 실내악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 또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으로도 인기 있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꽃 장식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돈다. 미라벨 정원 맞은편의 미라벨 광장에는 교외로 나가는 많은 관광버스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
번화 쇼핑가이다. 잘츠부르크 시내 중심인 슈타츠(Staats) 다리를 지나 동서로 뻗어 있다. 도시의 상징인 호헨잘츠부르크성(城)을 향하여 아름다운 쇼핑가를 이루고 있으며, 잘츠부르크의 문화적 특성과 매력이 함축되어 있다.
거리 양쪽으로 보석가게, 꽃집, 옷가게 등과 레스토랑, 커피숍 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음악의 신동(神童)’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생가(生家)와 15세기에 건축된 구시청, 대성당과 레지덴츠성, 미카엘 교회, 프란치스카너 교회, 화랑,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다.
건물마다 가게의 특징을 철에 표현한 예술적인 수공간판들이 많이 달려 있어 독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거리로 알려지게 만든 철제간판들은 문맹이 많은 중세시대에 무슨 가게인지를 알리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는데, 200년 이상이나 된 것도 있으며 거리 분위기에 맞추어 현대의 패스트푸드 상점들도 철제간판을 매달아 놓은 것이 재미 있다. 수공간판만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 생가 뒤에는 대학광장과 대학성당이 있다. 대학광장에서는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꽃, 약초, 채소, 과일, 직접 구운 빵과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이 거래되는 그린시장이 열린다.
○호엔짤즈부르크 성채
호엔잘츠부르크 성채는 잘츠부르크의 상징인 곳으로 구시가 남쪽, 묀히스베르크 언덕의 120m 지점에 위치한다. 구시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이기 때문에 구시가 어디에서든 보이는 요새이다. 1077년 건축한 철옹성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 주교 서임권 투쟁(1075~1122년)을 벌이던 시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게프하르트가 남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견고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아 지금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은 요새와 대주교의 거주 공간이었지만 군대 막사와 감옥 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가 5년간 조카 마르쿠스 시티쿠스에게 감금되어 1617년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15세기에 설치된 무기고와 대포 설치대가 여전히 남아 있고, 15~16세기 동안 증축 및 보수 작업을 진행해 17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당시 대주교들이 기거하던 황금의 방과 의식의 방, 중세 고문기구가 전시되어 있는 방, 200개의 파이프 소리가 엄청나 ‘잘츠부르크의 불(황소)’이라 부르는 오르간 등 볼거리가 많다. 화려한 금으로 장식한 거실과 조각품을 통해 당시 대주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성의 전망대에서는 돔 광장과 잘자흐 강 등 잘츠부르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논베르크 수도원을 만날 수 있다. 714년에 세워진 독일권에서 가장 오래된 수녀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수녀 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주변에 있는 부르크 박물관이나 라이너 박물관도 함께 둘러볼 만하다.
슬로베니아(2백만 명 GDP 84위 3만 1천 달러)
정식 명칭은 슬로베니아공화국(Republic of Slovenia)으로,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다.
면적은 2만 273㎢, 인구는 198만 3412명(2015년 현재), 수도는 류블랴나(Ljubljana)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며, 경제적으로 구 유고 내에서 최대의 선진공화국으로서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424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870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4년의 인민의회(90석)과 임기 5년의 국가위원회(40석)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은 자유민주당, 국민당, 기민당, 사민당, 민주당, 사회당 등이다.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며, 1945년 11월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슬로베니아에서도 1990년 4월 자유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고, 그해 12월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88.5%가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1990년 4월 선거에서 쿠찬(Kucan, M.)이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블레드
○블레드 성
절벽위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와 같은 성으로 슬로베니아의 가장 오래된 성, 블레드 성은 블레드 호수를 둘러싼 절벽에 자리한 성이다.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블레드 호수와 블레드 섬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이곳의 계단은 난간이 잘 없고 경사가 져 있으니 올라갈 때 조심하자.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성을 구경하고 내려오면 한번 더 호수를 산책하는 코스를 선택하곤 한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의 종'이 있는 성당, 마리아 승천 성당은 블레드 섬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다. 6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이 지바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나, 8세기에 이르러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성당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곳에는 블레드 전통 나룻배(플레타나) 선착장부터 이어지는 99개의 돌계단이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이 계단을 지나 성당에 있는 종을 울리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덕분에 이곳에는 연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으며 결혼식 장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블레드 호수
쥴리앙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고요하고 아름다운 분지 지형 위에 빙하가 녹아서 생긴 빙하 호수인 블레드 호수는 폭 1.3km, 길이 2.1km의 크기에 수심은 약 30m, 둘레는 약 6km에 달한다. '알프스의 눈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다. 나무로 만든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Pletna)로 블레드 성까지 갈 수 있으며 온천수가 흐르는 북쪽 호수에서는 봄부터 가을 무렵까지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또한 패러글라이딩뿐만 아니라 서핑, 스키, 골프 등의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해가 뜨거나 질 무렵에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5일차
크로아티아(450만명 GDP 79위 1만 2천 달러)
1991~1999년까지의 유고슬라비아내전의 결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유고) 등 총6개 국가가 되었고 2008년에는 세르비아에 속한 코소보도 독립을 선언한 상태임. 면적은 5만 6594㎢, 인구는 446만 4844명(2015년 현재), 수도는 자그레브(Zagreb)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 요소가 가미된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52석)이다. 주요 정당은 민주연합, 사회민주당, 사회진보당, 농민당 등이다.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나, 1990년 4월 자유총선을 통하여 비공산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1991년 5월 유고연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주민의 91%가 연방탈퇴 및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6월 25일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하고 세르비아공화국으로의 편입을 요구함으로써 양 민족간에 무력충돌이 발생, 이의 수습을 명분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유고연방군이 개입하여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990년 12월 헌법이 발효되었고, 1991년 공화국 내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 정부군간의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연방군이 내전에 개입하여 내전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연방군이 같은 해 9월 크로아티아 영내로 진격하여 대통령궁을 공습하는 등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럽연합(EU)의 중재로 휴전과 교전이 반복되다가 1992년 들어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되면서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92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총선을 실시하여 투지만(Tudjman, F.)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민주연합(CDU)이 압승하였다.
1993년에 들어서서 세르비아계와 정부군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1월 유고연방측과 관계 정상화협정에 조인하였으나 문제점은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남서쪽에 있는 도시로 숙박만 한다. 코라나 강과 쿠파 강의 합류지에 있다. 동방 정교회 및 로마 가톨릭교 대성당들과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도서관이 있으며, 철도와 도로의 주요연계지로 목재·곡물·포도주·꿀 등의 무역이 매우 활발하다. 모직물·가죽·장화류·화학제품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투르크의 진입을 막기 위해 1579년에 세워진 카를로바츠 요새는 국경수비대의 초대 사령관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 17세기에 투르크는 이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라스토케
카를로바츠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동화마을이다.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라스토케라는 예쁜 마을이 있다. ‘요정이 사는 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폴리트비체의 작은 호수’라 불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사의 머릿결’이라고도 부르는 작은 마을이다. 코라나 강의 물줄기가 마을로 흘러들어 작은 폭포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도 돌리고 농사도 짓는다. 라스토케란 말이 현지어로 물레방아란 뜻이라니 이름도 어울린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 안에 있는 집도 폭포도 호수도 모두 조그맣다. 그래서 요정이 사는 작은 마을이란 별명이 붙은 곳이다.
■플리트비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벨리키슬랍 등을 비롯한 수많은 호수와 폭포로 구성된 환상적인 관광.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있는 요정의 숲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6개의 호수와 90여 개의 폭포들로 이루어진 광활한 규모의 공원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의 호수와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이 넋을 잃게 만든다. 이러한 모습을 인정하여 유네스코는 1979년에 이 공원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국립공원은 여행객들이 편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걷기 쉬운 산책로로 잘 이루어져있으며, 추천 산책 코스도 소개하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가면 가이드투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 또한 국립공원 내를 돌아다니는 파노라마 기차와 보트를 타고 더욱 여유롭게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한다면 놓치지 않고 꼭 방문해야 할 곳이다.
■스플릿
○디오클레시안 궁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자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로마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위엄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활기를 띠는, 디오클레시안 궁전.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되는 디오클레시안 궁전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 후 지낼 곳으로 세웠던 궁전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궁전은 몇백 년간 방치됐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도시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사면의 문에는 각각 별명이 있는데, 나로도니 광장으로 연결되는 서문은 '철의 문', 남문은 '청동의 문', 동문은 '은의 문', 북문은 '황금의 문'이다. 여느 궁전들과 다르게 주거지, 상점,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어 스플리트 시민들의 생활상과 밀착되어 사랑받는 곳이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
왼쪽 엄지 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는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 크로아티아가 사랑하는 동상,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10세기 경 크로아티아 닌의 주교이자 어학사전까지 편찬한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까지도 크로아티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라틴어로만 미사를 진행했던 당시, 교황에게 크로아티아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높이 4.5미터의 이 청동상은 크로아티아의 세계적인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만들었다. 왼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리바 거리
마리안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도로로 야자수와 노천 카페가 즐비한 거리다. 스플리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의 거리, 리바 거리. 바쁜 여행 일정을 소화했다면 한편으로는 휴식을 취해주어야 한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남문을 나와 해변산책로를 거닐어 보자. 이 리바 거리 왼편에는 바다, 오른편에는 분위기 있는 노천카페와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아 저렴하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들이 많다. 하얗게 뻗은 길을 따라 서 있는 야자수도 시원해보인다. 밤에는 야시장도 열리는데, 여기서 크로아티아 전통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4백만 GDP115위 7천달러)
주요 도시 모스타르를 비롯해 남단의 삼각형 모양의 지역을 차지하는 남부와 남서부의 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를 비롯해 넓은 중·북부 지역을 차지하는 보스니아로 이루어져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역사상 대부분 보스니아에 종속되었다.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서쪽·남쪽 등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에 있는 네웅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이 회랑이 크로아티아 달마치야 해안 가운데 두브로브니크 북서쪽 약 40km 가량의 지역을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갈라놓았다. 면적 51,209㎢, 인구 3,835,000(2009 추계).
이 지역은 오랫동안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경쟁해왔던 강력한 지역세력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영향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유달리 풍부한 인종적·문화적 혼합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슬람교·동방정교·로마가톨릭교가 공존하고, 이 3개 신앙들은 3가지 주요한 인종 그룹인 보스니아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에 각각 상응한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민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랫동안 민족주의의 영토 확장 열망에 불붙기 쉽게 만들었다.
1918년 새롭게 건국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분리 이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더욱 확대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움
네움(보스니아어: Neum)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해안 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때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 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 이 마을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 속하는 주인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에 속하며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으로 말미암아 크로아티아 본토와 끊어져 있는 월경지이다.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의 결과 달마티아의 거의 전역이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었던 라구사 공화국(현재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이며 당시에는 도시 국가 상태였음)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네움은 양자 간의 완충 지대로서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이때 확정된 국경선이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복잡한 분쟁을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네움에는 가파란 언덕과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 그리고 거대한 관광호텔등이 있다. 물가가 인접한 크로아티아에 비해 싸기 때문에, 이곳은 쇼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관광 산업과 교역은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와의 월경 심사는 비교적 간단하다.
네움에는 관광객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네움의 관광 산업은 거의 바닷가에 집중되어 있다. 네움의 내륙 지방에는 풍부한 고고학적 역사및 때묻지 않은 자연 지대가 있으며, 개발이 기대되고 있다. 시는 해마다 엣노페스트 네움이라는 음악 축제를 주최하고 있다. 네움의 여름은 길고 따뜻하고, 겨울은 짧고 혹독하다. 네움은 연 일조량이 가장 많은 해안지방중 하나이다. 연평균 수온은 1월에 섭씨 13도, 7월 ~ 8월에는 섭씨 32도 가량이 된다. 수영 및 일광욕, 해변 거닐기, 보트 타기 및 많은 수상 스포츠 등으로 인기가 있다. 네움은 두브로브니크에서 60km 떨어져 있고, (두브로브니크 공항에서 80km) 모스타르 및 메주고레로부터 70km, 플로체 및 메트코비치로부터 30km 거리에 있다. 양 지역과는 모두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1991년 지방 자치체 기록에 따르면 네움에는 총 4,268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의 민족별 구성비는 크로아티아인 3738명(87.6%), 세르비아인 209명(4.9%), 보스니아 이슬람교도 196명(4.7%) 그외의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92명(2.1%), 기타 33명(0.7%)의 순이었다.
네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일의 바다와 마주한 곳이지만, 남쪽 지형은 반도와 각종 섬들로 차단되어 있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려면 멀리 돌아가야 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본토와는 험준한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이 곳에 국가 경제와 대외 무역의 창구가 될 만한 거대한 항구는 없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네움에서 30km 북쪽에 있는 크로아티아의 프로체 항을 크로아티아 정부와의 협약 아래 경제적 의미의 중추 항구로 사용하는 관리권이 있다. 반면, 크로아티아는 네움지역을 통하지 않고, 크로아티아 본토와 두브르브니크를 잇는 펠리에샤츠 다리(총길이 2,374m)의 건설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로부터 승인받았다.
6일차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다.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되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경쟁한 아드리아 해안 유일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富(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다.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1205~1358)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고 지협의 각 측에 2개의 항구가 세워졌다. 15∼16세기에 무역의 전성기를 맞았고 엄격한 사회 계급 체계를 유지하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제를 폐지(1416)하는 등 높은 의식을 가진 도시였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와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시가지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도 다시 개최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달마티아 문학의 중심지로 크로아티아 문학의 일부를 이룬다. 식품·포도주·올리브유 등의 생산이 성하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유럽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는 수도원이다. 1317년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지어질 때부터 운영해온 말라 브라체약국으로 더 유명하다. 이 약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라고 하며 아직도 약을 팔고 있는데 장미크림, 라벤더 크림 등을 판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수호 성인인 블라세이 유물이 있는 대성당. 구시가지에 위치한다. 원래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667년 대지진에 의해 파괴되자 1672년부터 1713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인 안드레아 불파리니와 파올로 안드레오티가 로마-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가운데 돔 모양의 지붕이 높이 솟아올라 있어 아름답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St. Blaise)의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성당 외부는 고급스러운 회색으로 되어 있고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내부는 밝고 바람이 잘 통하게 디자인했으며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장식으로 치장했고 벽화로 마감하였다. 주 제단은 금색의 플립티크 디자인으로 되어 있으며 티탄(Titan)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졌고 옆 보조제단은 보라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플라차 거리
커피 CF[맥심]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대리석으로 깔려진 거리이다.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구시가지의 중심가이다. 필레문에서 루자광장까지 이어진 300m의거리로 석회석과 대리석으로 다져진 대로가 동서로 뻗어있는데 7세기경 수송로 역할을 한 길이라고 한다. 그 후로 도시가 번성하여 운하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 운하를 매립하여 대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거리 양쪽에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중세시대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거리이다.
○렉터 궁전
15세기 중반에 지어졌으며, 궁전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소박한 외관이 특징인 렉터 궁전
두브로브니크의 수로와 분수를 건설한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건축한 곳이다. 필레 게이트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아이콘 분수대가 바로 이 건축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 고딕-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입구에 6개 기둥이 있고, 벽면으로는 돌로 단을 쌓아 벤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성직자(rector)가 선출되어 의회가 허락하기 전까지 한달동안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안뜰에서는 클래식 공연이 열리고 있다.
○스폰자 궁과 시계탑
우아한 아케이드와 긴 고딕 양식의 창문이 인상적인 건축물인 스폰자궁과 시계탑이다.
구시가지의 스트라둔(Stradun) 거리 끝에 있다.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Ragusa Republic)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당시 드브로브니크에 지배적이었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čević)가 건설을 맡았다.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아한 아케이드, 기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 등이 특징이다. 중앙홀은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 국립조폐국이 들어섰으며 그밖에도 은행·귀중품창고·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장식은 안드리지치(Andrijić) 형제가 담당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며 1667년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말에 라구사공화국 중앙문화센터로 바뀌었다. 현재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며 중앙홀은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7일차
■자다르
숙박만 한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문헌에 나오는 오래된 도시로, 중세에는 슬라브의 상업·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달마티아의 주도(主都)였다. 사적이 많고, 고고학 박물관도 있다. 1920∼1940년은 이탈리아 영토였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어업·마라스키노술[酒] 양조업 외에 담배·주트·유류 등의 산업이 성하다.
자다르에는 특별한 오르간이 있다. 자다르의 아름다운 아드리아해 앞에 있는 대리석 계단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계단 아래 35개의 파이프가 숨겨져 있다. 이 파이프는 파도의 세기와 높이 그리고 바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크로아티아의 건축가인 니콜라 바시츠가 2005년 건축했고, 다음해인 2006년 유러피안 도시 공공장소 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자다르의 석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정도이니, 해질 무렵 바다 앞에 앉아 노을을 감상하며 바다가 연주하는 음악에 취해보자.
나로드니 광장. 잠시 쉬어가는 것마저 즐거운 곳, 자다르의 나로드니 광장자다르의 아기자기한 골목을 지나다보면 구시가지의 중심에서 나로드니 광장을 만나게 된다. 나로드니 광장은 과거 사회, 행정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으로, 지금은 교회와 시계탑 그리고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 관광안내소 등이 모여 있는 만남의 장소이다. 광장 주위에는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 르네상스 양식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건물들이 다채로운 건축미를 뽐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릿보다 작고 조용하지만, 그래서인지 노천카페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마저 즐거운 곳이 바로 여기, 자다르의 나로드니 광장이다.
포룸크로아티아에서 작은 로마를 따라 거닐다 바다오르간으로 가는 길, 성 도나트 교회 앞에는 로마식 광장인 포룸이 있다. 크로아티아는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그 후 이곳에 로마 양식의 광장이 건축되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된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매력적으로 빛나는 곳이다. 지금은 로마의 유적과 함께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자다르의 한가로운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로마의 과거 속에서 길을 잃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나스타샤 대성당. 푸른 아드리아해와 붉은 지붕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곳자다르 구시가지의 중심에 이르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아나스타샤 대성당을 마주하게된다. 12-13세기 건설된 이 성당은 3개의 회랑과 2개의 장미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아나스타샤의 석관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그 이름을 따라 성당의 이름이 지어졌다. 이 곳은 달마티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손 꼽히며 웅장한 대리석 기둥과 파이프오르간을 보면 저절로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성당 옆에 위치한 종탑은 네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성당보다 나중에 지어졌는데, 2차 세계대전에서 파괴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180개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푸른빛으로 빛나는 아드리아해와 붉은 지붕으로 둘러싸인 자다르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다. 전망대가 넓지 않으니 이 아름다운 풍경을 독차지하고 싶다면 아침 일찍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자그레브
메드베드니차(자그레바치카) 산의 경사면과 사바 강의 범람원에 걸쳐 있다. 이 도시에는 탁 트인 광장과 공원이 많다. 크로아티아의 문화 중심지이며, 과학·예술 아카데미와 자그레브대학교(1669)가 있다. 여러 미술관에는 옛날과 근대 작품들이 모두 소장되어 있으며, 다양한 미술·극장·음악 아카데미들과 박물관들이 있다.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릉 위의 구시가지는 2개의 중세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치는 민간 마을로 13세기에 투르크인들을 막기 위해 성벽으로 마을을 둘러싸면서 그라데츠(요새)로 개칭되었으며, 카프톨은 성직자 마을로 16세기에 요새화되었다.
이 두 마을은 서로 경쟁했으나 19세기에 새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이 두 마을이 이어지고, 남쪽으로 광장과 공공건물들로 된 직선형의 신도시가 생기는 등 시가지가 사바 범람원까지 확장되면서 경쟁관계가 끝났다. 1860~1914년 급속히 성장했다. 20세기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1945년 이후 사바 강 우안(남쪽)에 새 주거지역이 건설되었다. 메드베드니차 산 북쪽으로 삼림지대, 포도원, 아름다운 마을, 고대 성(城)들이 있는 자고례 지방이 있다.
근대 자그레브는 1093년 로마 가톨릭 주교관구가 되면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1241~42년의 몽골 침략 후 그라데츠는 왕의 보호를 받는 자유도시가 되고 요새화되었는데 당시 탑들 가운데 여러 개가 현존한다. 투르크인들에게 항거하고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일화 시도에 저항했던 크로아티아의 역사에 있어 자그레브는 정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크로아티아의 국가 재건 당시 범유고슬라비아 운동 및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18년 10월 이곳에서 열린 크로아티아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모든 유대를 단절하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치야를 하나의 독립 국가로 선포했다. 11월에 신생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세르비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와 연방국가를 형성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크로아티아의 국민적 자치를 열망하는 세력과 세르비아의 중앙 집권화를 원하는 세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었고,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도시지구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1년 4월 추축국 지배하에서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괴뢰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1945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장군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에 의해 추축국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크로아티아 국가는 독일이 항복한 후 곧 붕괴되었다.
오늘날 이 도시는 서부·중부 유럽에서 아드리아 해와 발칸 반도로 이어지는 도로와 철도망의 주요연계지이며, 플레소 공항의 항공편을 통해 유럽 각지로 연결되어 있다. 공업 중심지로 중장비, 철도 차량, 트럭, 전기 및 금속 소비재, 시멘트, 직물, 신발류, 화학품, 약품, 종이와 신문용지, 식품 등이 생산된다. 지역산 석유와 천연 가스를 기반으로 대규모 화학공업이 발달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국제무역박람회가 개최된다.
○자그레브 대성당 및 성모마리아상
네오 고딕양식의 쌍둥이 첨탑이 특징이다. 자그레브 대성당(성 스테판 성당). 자그레브의 대표 성당쌍둥이 종탑의 모습이 인상적인 자그레브에서 제일 큰 성당이다. 캅톨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자그레브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 1094년에 짓기 시작하여 1217년에 완공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의 피해로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당의 뒤편에는 옐라치치를 비롯한 중요인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특히, 성당은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단과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이다.
○성 마르크 교회
독특한 모자이크 문양이 인상적인 교회이다. 지붕의 모자이크가 독특한 교회. 반 옐라치치 광장 근처에 위치해 있는 작은 교회로, 이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 교회의 지붕에는 모자이크로 두 가지 문장이 새겨져있는데, 하나는 크로아티아 왕국, 슬로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의 문장을 혼합한 것으로 이 세 왕국은 크로아티아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그레브 시의 문장이다. 교회에서는 로마네크스 양식과 고딕 양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교회 내부 입장은 불가하다.
○옐라치치 광장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하며, 크로아티아의 영웅 반 옐라치치 동상이 있는 옐라치치 광장
자그레브의 중심, 옐라치치 광장. 자그레브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구시가지의 중심지이다. 옐라치치 광장은 '옐라치치'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인데, 그는 크로아티아 최초로 선거를 시행한 인물이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광장의 양옆으로는 일리차 거리가 뻗어져있는데, 이 거리가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각종 상점들이 모여있어 쇼핑을 즐기기에 좋으며, 카페,레스토랑 등이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다. 자그레브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지나치게 되는 중심지이다.
8일차
헝가리(1천만 GDP 56위 2만 5천 달러)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Republic of Hungary)으로, 1989년 10월 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Hungarian People’s Republic)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만 3028㎢, 인구는 989만 7541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45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 성격의 공화제로서, 대의기구는 임기 4년의 국민회의(386석)가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당(HSPR), 청년민주연합(FIDESZ), 민주포럼(HDF) 등이 있다.
마쟈르족은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1001년 최초로 독립왕국을 창건한 뒤 13세기부터 몽고·터키·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 화해협정이 성립,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 Monarchy)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18년 11월 함부르크 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공산지도자 쿤(Kuhn Bela)의 주도하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4개월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복귀 후 헝가리는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4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종전과 함께 소련 주둔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이 1949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스탈린식 강압정책을 채택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후 헌법은 1972·1983·1989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스탈린(Stalin, I. V.)이 죽은 뒤 온건한 나지(Nagy, I.) 수상이 등장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56년 대규모의 반소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였으며, 그 결과 나지는 축출되고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르는 1967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20년간 갱신하는 등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낙후된 경제개발에 주력하여 1968년부터 여러 차례 경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카다르의 신경제제도는 경제정책의 지방분권화, 시장원리에 의한 가격체제, 노동자의 동기 부여, 서구와의 무역확대를 도모함으로써 동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한 자유화정책과 민생중시정책이라 평가되었고, 실제로 경제체제의 진정한 전환을 가져온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소련의 공산당을 그대로 답습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으로 개칭)은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제해 왔으나 1989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다당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가원수를 기존의 대통령위원회라는 집단기구 대신 대통령 개인으로 바꾸고 의회에서 간선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좌경으로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해체된 바르샤바조약기구(WTO)·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CMEA) 등 기존 동맹권으로부터 탈피하여 전통 서유럽에로의 복귀를 국가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즉 범유럽 집단안보 및 협력체제에 참여하며, 중유럽협력구상(CEI)·중유럽자유무역협정(CEFTA) 등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정치·경제·군사적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이다.
다만 인접한 루마니아와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문제를 놓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 또한 헝가리는 1990년 이래 경제정책의 핵심과제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산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정착과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정책기조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부흥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국제경제협력기구(OECD) 등 경제 관련기구에 가입하여 있다.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Buda)와 북쪽의 오부다(Obuda), 동쪽의 페스트(Pest)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지역은 1873년 통합된 이후 지금까지 함께 공존하며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 · 산업 · 상업 · 교통 · 문화의 중심지이며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고풍스런 건축물과 문화 유적이 즐비하고, 도나우 강과 온천수가 있어 물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동유럽의 파리’, ‘도나우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헝가리의 아름다운 수도 부다페스트...도시 중심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의 부다, 동쪽의 페스트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만큼 서로 경치가 다르며 색다른 동유럽을 느낄 수 있다. 부다페스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 도나우강(다뉴브강)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나 흑해로 흐른다. 다뉴브강을 지나는 여러 나라 중에서도 부다페스트는 도나우의 진주라고 불린다. 도나우강에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면 왜 도나우의 진주가 부다페스트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세치니 다리와 다른 건물들보다 높게 솟아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의 야경은 물론이고, 부다왕궁, 국회의사당, 호텔 등 곳곳의 웅장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야경을 자아낸다.
○어부의 요새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7개의 뾰족한 탑이 인상적인 요새이다. 어부의 요새는 부다 성 구역에 위치해 있는 부다페스트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중세시대 어부의 마을이었던 곳 위에 지어진 어부의 요새는 1895년에서 1902년까지 건축가 Frigyes Schulek에 의해서 지어졌고, 2차 세계대전때 심각하게 파괴되어 Frigyes Schule의 아들인 Janos Schulek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어부의 요새에 오르면 탁트인 부다페스트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어부의 요새에는 7가지 포탑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헝가리를 만든 7가지 부족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부의 요새의 상부와 하부 모두 항상 열려있으며, 티아스교회에서 어부의 요새를 바라볼 수 있다.
○겔레르트 언덕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헝가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겔레르트 언덕. 겔게르트 언덕은 도나우강 동쪽변에 위치하고 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자유의 여신상'인 소녀의 동상과 성채를 볼 수 있다. 이 성채는 함스부르크의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망루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이 정복하였었다. 이 후, 소련군이 다시 정복하고나서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며 세운것이 자유의 여신상이다. 겔게르트 언덕 중턱에 있는 성 겔레르트를 기리는 동상, 동굴 교회까지 겔게르트 언덕은 헝가리의 다사다난했던 과거를 담고있는 역사적인 언덕이다.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포인트로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명소이다.
○마챠시 사원
흰 레이스를 두른 듯 아름다운 헝가리의 화려함과 역사가 담긴 마차슈 성당. 마차슈 성당은 13세기 중반 지어진 화려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마차슈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때, 오스만 제국이 마차슈 성당을 자신들의 모스크 장소로 사용하는 비극의 시기를 거친다. 후에 오스만제국에서 해방되고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후에 건축가 Frigyes Schule에 의해서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된다. 하지만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어 복구한 비운의 성당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헝가리만 가지는 독특하지만 화려한 건물이 어부의 요새와 붙어있어 더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높이 위치해 하늘에 가깝고, 전망도 좋아 사진을 찍는 사람은 특히 더 좋아할 것이다.
○부다 왕궁
부다 언덕에 웅장하게 솟아있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부다왕궁. 부다왕궁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왕궁이다. 몽고 침입으로 벨라4세가 부다페스트에 피신을 온 이후 부다 언덕에 지은 왕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소멸되었다가 오스트리아 지배 시절 다시 신축되었고, 대화재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번번이 파괴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세계 2차대전 이후 다시 지은 모습이다. 현재는 왕궁의 건물은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뜰에서는 종종 열리는 행사를 구경할 수 있다. 매우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망이 좋아 특히 밤에 세치니다리와 성이스트반 성당을 한번에 볼 수 있다.
○이슈트반 성당
다뉴브강 동쪽, 페스트 지역의 대표 명소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는 아름다운 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자 카톨릭 성인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한 성당으로, 화려한 돔과 장식이 특징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네오 르네상스 양식 특유의 화려함으로 성 이슈트반 대성당만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내부는 헝가리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꾸며져있는데, 특히 돔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또한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봉헌된 예배당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영웅 광장
헝가리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만든 헝가리의 역사를 새기고 있는 곳, 영웅광장 부다페스트의 안드라시거리 끝에는 영웅광장이 있다. 가운데 높고 흰 기념탑이 있으며, 주변에는 헝가리의 역대 왕들과 영웅, 그리고 헝가리를 만든 마자르의 7대 부족장들의 동상이 있다. 부다페스트 곳곳에 헝가리의 역사가 녹아있는데, 특히 영웅광장은 헝가리의 역사를 되새기는 장소이다. 끝나지 않던 긴 식민시기 동안에도 마자르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헝가리인들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슬로바키아(550만 명 GDP 63위 1만 8천 달러)
정식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다. 북쪽으로 폴란드, 서쪽으로 체코·오스트리아, 남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접한다. 1993년 1월 19일 체코와 함께 UN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2004년 5월 염원해오던 NATO와 EU 가입에 성공하였다. 슬로바키아에 사는 50만 명(전체 인구의 10%)의 헝가리인(人)에 대한 차별 문제로 헝가리와 갈등을 빚고 있다. 행정구역은 8개주(kraj)로 되어 있다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의 수도이다.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헝가리어로는 포조니(Pozsony)라고 한다. 슬로바키아 남부 도나우강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도나우 강변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를 이루었는데 현재도 동유럽의 중요한 철도의 분기점으로 역할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켈트 족이 이주해와 살았다. 로마에 정복되었을 때는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으로 군사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6세기 부터는 슬라브인이 이주해와 거주하였다. 슬라브인은 일대 모라비아와 니트라 왕국을 세웠다. 9세기에는 브라티슬라바 언덕위에 성채가 건설되었고 외곽 데빈에도 성채를 쌓았다. 이후 헝가리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으며 이후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침입했던 1541∼1784년에는 헝가리의 수도였으며, 18세기 말부터 정치·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1918년 체코와 합병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되면서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1992년 체코와 분리하여 다시 슬로바키아의 수도로 회복하였다. 화학·기계·전기·정유·건축자재·라디오·전선·식품·고무·섬유 등의 공업이 발달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 송유되는 송유관의 종점이기도 하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부침이 심하였는데 9세기 경에 처음 세워진 브라티슬라바 고성이 있다. 이후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가 1957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며 의회와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고성 아래에는 구시가지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막시밀리안 분수대, 구시청사와 미하엘 탑문 등이 볼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도나우 강에 설치된 현수교인 에스엔페 대교에는 접시모양의 전망대가 있고 야간에는 특별한 조명으로 연출한다.
슬로바키아의 정치·경제뿐 아니라 문화·교육의 중심지이며, 코멘스키대학(1467)을 비롯하여 슬로바키아 공과대학·음악대학 등 여러 교육기관, 과학아카데미·극장 등이 있다. 브라티슬라바에는 외곽에는 데빈의 고성(devin hrad:古城)과 프란치시칸 대성당(1294) 등이 있다.
○브라티블라바 성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이는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 남쪽언덕(해발 150m)에 있다. 이 성은 대모라비아왕국 시대에는 중요한 정치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대모라비아왕국 소멸 이후 헝가리 정부의 국경요새로 역할을 했다. 1811년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 재건되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브라티슬라바 거처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었다. 현재에도 일부분은 슬로바키아 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성마틴 대성당 및 마카엘스 탑
14세기 초에 3개의 네이브를 가진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1452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성 소피아(St.Sophia) 고딕양식 예배당, 성 안나 (St.Anna) 예배당과 성 존(St.John)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이 추가되었다. 교회의 규모는 길이 69.37m, 높이 16.02m, 너비22.85m이다.
3개의 네이브와 동시에 건축된 성당의 타워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타워의 높이는 85m로 타워의 상층부는 2㎡의 금으로 도금된 받침대가 있고, 300kg의 무게가 나가는 1m 높이의 헝가리 황실 왕관 복사본이 놓여졌다. 이 곳에서 1563-1830년 사이에 11명의 헝가리 왕이 즉위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Missa Solemnis)가 처음으로 연주된 곳이기도 하다.
○구 시가지 관광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 여행은 미카엘스 탑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14세기에 세워진 미카엘스 탑은 오랫동안 브라티슬라바의 관문이었다. 성 마틴 대성당, 성 프란시스코 교회, 시청사 등 대부분의 볼거리들이 인근에 몰려 있다. 성 마틴 대성당은 슬로바키아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고 있으며 성 프란시스코 교회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 골목은 중세의 ‘고도’임을 항변하듯 규칙 없는 미로 같은 길이다. 흐비쯔도슬라보브 광장(Hviezdoslav Square) 등 구도시의 거리들은 빛바랜 건물과 그 건물에 기대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옛 시청사가 있는 광장 앞 주변은 노천바와 조각품들로 채색된다. 브라티슬라바의 명물인 소를 주제로 한 조각과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노천바에 앉아 맥주를 주문하면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 가득 담겨 나온다. 알싸한 맛이 강한 보헤미안 맥주는 구시가의 향취를 더욱 몽롱하게 만든다. 음악가인 프란츠 리스트 역시 도시에 취해 15차례나 브라티슬라바를 찾았다고 한다.
9일차
■비엔나(오스트리아)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체코어로는 비덴(Videň), 헝가리어로는 베치(Becs)라고도 한다. 도나우강(江) 상류 우안에 있는 유럽의 고도(古都)로, 지금도 중부 유럽에서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수백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으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정치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중부 유럽을 동서 방향으로 달리면서 민족·기후·식생 등의 경계를 이루는 알프스·카르파티아 산맥을 관류하고 있는 도나우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BC500년에 켈트 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가 들어오면서 정치, 문화, 예술, 과학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수도로써의 기능을 독일 베를린에 넘겨주었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베토벤(Beethoven)과 모차르트(Mozart)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과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쇤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 빈 공원(Wiener parks)등이 유명하다.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ZE), 국제 원자력 기구(IAEA)등과 같은 중요한 국제 기구들의 본부가 이곳에 위치한다. 도나우강은 북서 유럽과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의 동맥이며, 13세기 이래 빈 남서쪽 70km 지점에 있는 젬메링 고개의 개통에 따라 빈은 동알프스 및 이탈리아와의 교통이 용이하게 되었다. 예전의 파노니엔호(湖)와 옛 도나우강의 유로가 시가지 서쪽 변두리의 ‘빈의 숲’이라고 불리는 산지와 그것에 이어지는 토지에 명확한 단구(段丘)를 이루어 놓았다.빈의 숲의 작은 골짜기는 계단 모양을 이루는 산지사면에 형성되어 있다. 주변지역을 포함한 시역(市域)은 1,215km로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이루는 마르히강까지 펼쳐지는 광대한 마루히 평원에서 반원형으로 높아진 단구면을 포함하여 빈의 숲까지를 가리킨다.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는 빈의 숲은 건축 등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05년 그린벨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25㎢를 차지하는 이 구역은 주로 사암(砂岩)으로 이루어져 있다.알프스·카르파티아 산맥이 끊어지는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북서쪽의 중부 유럽 기후에서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우며 강수량도 비교적 적은 동쪽의 대륙성 기후로 옮겨지는 점이지역(漸移地域)에 해당한다.1월 평균기온은 0.4℃, 7월은 19℃이며 한낮에는 24℃가 된다. 연강수량은 691mm 내외이며 여름에 다소 많이 내린다. 식생도 기후를 반영하여 서쪽의 발틱 식물구와 동쪽의 파노니엔 식물구의 점이지대를 이룬다. 빈의 숲 서쪽은 너도밤나무의 숲이 무성하다. 동쪽과 남쪽은 떡갈나무와 흑송 숲이 무성하여 좋은 대조를 이룬다.
○쉔부른 궁전과 정원
이 훌륭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주거지였다. '합스부르크 옐로'로 알려진 독특한 색채의 건물은 내부에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며 황금으로 된 장식, 크리스털 샹들리에, 커다란 거울 등을 볼 수 있다. 쇤브룬에는 1,441개라는 엄청난 개수의 방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녀의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는 쇤브룬에서 여름을 보냈으며, 그들이 통치하던 시절 여섯 살 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에 초대받아 여제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쇤브룬에서 1830년 출생했으며 여든여섯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게 된다. 이 궁전은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이며 애칭으로 '시시'라 불리기도 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와의 인연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쇤브룬을 매우 사랑하여 결혼한 이후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합스부르크 가의 이 궁전은 17세기에는 사냥 별장이었으며, 터키가 빈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자리에 세워졌다. '쇤브룬'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샘물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왕실의 식수를 제공해 주던 천연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쇤브룬 궁전은 '글로리에테'라는 이름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웅장한 신고전주의풍 아치들, 모조 로마 유적, 화려한 분수, 인상적인 종려나무 온실을 완벽하게 갖춘 눈부시게 화려한 대정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궁전에는 또한 프란츠 황제가 1750년대에 조성한 작은 동물원의 후손인 동물원도 있다. 이 동물원은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남아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때문에 동물 우리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1918년 카를 1세 황제가 왕위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그는 퇴임 연설을 쇤브룬에서 거행했고, 궁전은 공화국의 소유가 되었다. 쇤브룬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피해를 입어 1950년대에 복구되었다. 오늘날 이 궁전은 마땅히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른트너 거리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며, 비엔나에서 가장 화려한 게른트너 거리. 국립 오페라 극장부터 슈테판 성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보행자 전용 도로이며 길이가 600m에 이른다. 1974년 오스트리아 Garinthia(Karnten)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거리로 꼽힌다. 도로 양쪽에는 선물용품점과 액세서리점,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가 늘어서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
비엔나의 상징이며, 모자이크 지붕이 인상적인 성. 역사가 잠들어 있는 성스러운 곳, 성 슈테판 대성당성 슈테판 대성당은 비엔나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1147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졌지만 이후 고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실되어 새롭게 복원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건축물이자 빈의 최고 관광명소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다. 이 성당은 외관 뿐만아니라 내관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 그리고 곳곳에 장식된 조각들은 엄숙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지나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당 남탑전망대에 오르면 비엔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는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성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둘러볼 수 있다.
○국회의사당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한 국회의사당. 고대 그리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비엔나 국회의사당 건물은 13년에 걸쳐 1883년에 완공되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본따왔으며, 최대한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입법 중심지이다. 1902년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는 아테네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다. 가이드투어를 통해 국회의사당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며, 비엔나의 주요 관광지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방문해보는 것이 좋다.
○국립오페라 극장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은 극장으로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이다
체코(1천만, GDP 48위 2만 달러)
정식명칭은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이다. 북쪽으로 독일·폴란드,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공산주의 국가 중 최고의 생활수준과 높은 문화를 유지한 공업국가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민족적·언어적·문화적 이질감과 경제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0년 슬로바키아공화국과 연방제를 구성하였다가 1993년에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하여 체코공화국이 되었다. 행정구역은 13개주(kraj), 1개 특별시(hlavni mesto)로 되어 있다.
■체스키크롬로프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 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 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다른 중세 도시들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차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이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해마다 6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거리에서 공연을 한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회나 18세기 귀족들의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체스키크롬로프 성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번째로 큰 성이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은 역사적으로도 건축적으로도 유럽에서 중요한 건물로 꼽힌다. 스보르노스티 광장을 지나 '이발사의 다리'로 유명한 라제브니키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13세기에 영주 크롬로프가 성을 세운 이후부터 시기별로 지배자에 따라 건물의 증축과 함께 그 양식 또한 혼합되어 갔다. 현재 이 성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 입구인 '붉은 문'과 탑, 화려하게 꾸며진 외관이 특히 눈에 띈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청사 및 스보르노스티 광장
체스키크롬로프의 상징인 체스키크롬로프의 알록달록한 중앙광장, 스보르노스티 광장은 체스키크롬로프 성, 볼타바 강과 함께 '동화마을' 체스키크롬로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다. 중세 시대의 오래된 르네상스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소박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풍긴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모두 다른 모양의 지붕과 외관을 가지고 있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독특한 재미를 준다. 건물들마다 독수리 문장과 체코 국기, 그리고 로젠베르크 영주 가문의 문장인 꽃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10일차
■프라하
19세기에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체코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요공업은 중·정밀기계 제조업과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프라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강의 서쪽과 동쪽 모두 역사적 기념물들이 많으며 프라하 궁은 강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전체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인 국립박물관까지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하다. 문화의 도시로도 유명하여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이 있다.
블타바 강 유역에 있다. 9세기부터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한 도시이다. 작은 정착촌들에서 비롯되었으며, 점차 확장되어 지금은 시가지가 구릉지대, 블타바 강 지류의 유역들, 강 연안의 계단식 대지까지 펼쳐져 있다. 19세기에 직물과 기계류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한 이래 프라하는 체크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조업 분야에 가장 많은 노동력이 종사하고 있으며, 상업·건설업·교육·문화·행정·교통·통신·과학연구 분야가 그뒤를 잇고 있다. 주요공업은 중기계 및 정밀기계 제조업과 유명한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제품·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프라하 중앙을 가로지른다. 강의 서쪽 기슭에는 왕립 정원, 흐라트차니(프라하의 성),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말라스트라나[小地域] 등이 있다.
강의 동쪽 기슭은 주로 12세기에 조성된 스타레메스토(구시가지)와 14세기의 노베메스토(신시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구역 모두에 역사적 기념물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다. 특히 노베메스트의 건축물들로 인해 프라하는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래된 구역들의 좁은 거리들, 작은 선술집들, 식당들과 넓게 트인 바츨레프스케 광장 및 현대적인 공원, 주택단지들이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으며, 주택난의 해소를 위해 시의 변두리 지역에 신주택촌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
10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를 비롯하여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틴 교회, 바로크 양식의 발트슈테인 궁과 츨람갈라스 궁, 로코코 양식의 골스킨스키 궁, 고전주의 양식의 베드르지흐스메타나 박물관과 벨베데레 궁, 신고전주의 양식의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프라하에는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훌륭한 건축물들이 많다. 유대인들이 오래전부터 프라하에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이는 구예배당, 신예배당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유대인 묘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도시계획에 의해 옛 도심지가 보존되는 한편 새 건축물들의 건립이 규제되면서 프라하는 건축면에서 더욱더 조화로운 도시로 가꾸어졌다. 프라하는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며 특히 음악과 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체크의 위대한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닌 드보르자크, 레오슈 야나체크를 기념하는 음악제가 매년 봄축제 때 개최되며, 프라하가 자랑하는 관현악단인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편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야로슬라프 하셰크 등이 있다.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카렐대학교(1348)이다. 프라하는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활동했던 도시로 그 전통을 이은 과학연구활동이 체크 과학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술 아카데미와 음악 아카데미도 있다. 대중교통수단으로는 버스·시가전차·지하철이 있으며, 철도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블타바 강에서는 여객선이 운항되며, 근처 루지네에 국제공항이 있다.
○화약탑
1475년에 건설된 높이 65m의 고딕 양식 성문이다. 1757년 러시아와의 전쟁 때 화약탑으로 사용되어 개축된 이후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시가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으로 남아있다.
○구 시가 광장
프라하 구시가 광장은 블타바 강 오른쪽 오래된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이다. 11세기 무렵부터 교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지역이며 역사가 오래된 만큼 광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건축물들에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별 건축 양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구시가 광장과 그 주변으로 얀 후스 동상,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틴 성모 교회, 골드 킨스키 궁전, 돌종의 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구시가 광장 한가운데에는 체코인이 자랑스러워하는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군상이 시민들을 바라보고 서 있어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고 있다. 구시가 광장의 남서쪽에는 구시청사가 있는데 시청사 건물의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었지만 벽면의 천문시계(Orloj)는 무사하다. 이 시계는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의 명물로 매시 정각에 시계의 인형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볼거리다. 시청사 탑에 올라가면 구시가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천장 돔에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성 미쿨라세 교회는 광장의 북서쪽에 있다. 보헤미안 글라스가 아름답게 빛나는 샹들리에도 볼거리다. 구시가 광장에서 화약탑 쪽으로 이어지는 첼레트나 거리에는 귀족들이 살던 바로크 양식의 저택이 많다. 현재는 보석과 액세서리 가게가 들어서 있다. 길 모퉁이에는 검은 마돈나의 집이라고 불리는, 큐비즘 양식의 독특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1층은 상점이고 4층은 큐비즘 전시실이다. 조금 더 가면 화약탑이라고 불리는 고딕 양식의 중세 성문이 보이는데 17세기 러시아와의 전쟁 당시에 화약고로 사용되었던 65m의 탑이다. 지금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화약탑 위에도 전망대가 있다.
검은 마돈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타보브스케 극장이 있다. 18세기에 세워진 이 극장은 1787년에 모차르트가 프라하 시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초연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 아마데우스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틴 성당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로, 136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변형을 가해 17세기까지 다양한 건물 양식이 가미되었다. 외관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특히 80m 높이까지 치솟은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부는 바로크양식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어두운 느낌을 준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시청사 동쪽 맞은편, 골즈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다.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 출입문이 유명하며, 황금 성배(聖杯)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像), 고딕양식으로 조각된 실내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상, 백랍으로 만든 세례 받침 등도 성당의 명물로 꼽힌다.
성당 안에는 루돌프 2세를 위해 일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he)가 묻혀 있다.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며, 교회 바로 옆에는 《성(城)》의 작가 카프카(Franz Kafka)의 생가가 있다.
○구 시청사
프라하의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 지구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구시가 광장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천문시계가 있는 구 시청사는 최고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구 시청사는 1338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상당 부분 훼손되는 시련을 겼었다. 그러나 천문시계가 있는 서쪽 동은 다행히 소실을 면했으며 그 후 복원과 증축 공사가 진행돼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 시청사 관광의 핵심은 독특하고 화려한 천문시계이다. 1410년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는 체코 고딕 시대의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결정판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기발하고 정교하다. 600년 넘게 프라하의 역사와 함께한 시계는 원형에 거의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아래 시계의 둥근 판 중심에는 구시가의 문장이 있고 둘레에는 별자리가 새겨 있다. 또 이를 둘러싸고 한 해의 열두 달을 농민의 생활로 표현한 그림이 있다. 위쪽 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해 만들었다는 천문시계이다. 시간, 일출, 일몰, 월출, 월몰까지 표시해 준다고 한다.
매 시각 정시에 시계가 짧게 작동하므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놓치지 않는다.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왼손의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계의 맨 위쪽 창이 열리면서 12사도가 등장한다. 이들이 한 바퀴를 다 돌면 닭이 울고 종이 울리는 순서다. 이를 보기 위해 정시가 가까워지면 천문시계 앞은 관광객들로 만원이 된다. 구 시청사 안에는 역사박물관, 예배당, 집무실 등이 있다. 예배당에서는 천문시계 내부를 볼 수 있다. 중세에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계를 높은 탑 위에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구 시청사의 시계탑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었을 것이다. 또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높이 69m의 시청사 탑 전망대는 프라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므로 꼭 올라가 보자.
○까를교 관광
블타바 강 우안의 구시가지와 좌안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프라하 성을 연결해 주는 카렐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다. 135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프라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카를 4세가 블타바 강에 놓은 다리로 너비 10m, 길이 520m에 이른다. 성 비투스 성당을 지은 페테르 파를레르시가 공사를 맡아 바츨라프 4세 때인 1402년에 완공되었다.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이 다리는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다리의 시작과 끝 부분에 놓인 탑은 본래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30개의 성인상도 볼거리다. 다리 양옆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루이트가르트,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한 성인 조각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거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을 새겨 놓은 것인데 그중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이 가장 유명하다.
성 요한 네포무크는 바츨라프 4세가 왕비 조피에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 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난간에는 작은 청동 십자가 5개가 있는데 십자가에 손을 내밀어 5개의 별 중 하나를 만지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 조각상 밑단에 그의 순교 장면이 묘사된 부조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에 유독 새까맣게 손때가 많이 탔다. 성인상들은 모두 모조품이고 국립 박물관에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볼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렐교는 원래 마차가 다니며 양쪽의 교역 역할을 하는 용도로 쓰였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거친 후 지금은 보행자 전용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기 때문에 음악과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예술의 다리로도 유명하며 악사와 초상화 그리는 화가,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펼쳐진다. 단,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인 만큼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이 많으니 소지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카렐교는 프라하 성의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시가 교탑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성과 블타바 강의 전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카렐교를 지나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 프라하 성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인 네루도바 거리에는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즐비해 시내 관광 중 잠시 쉬어가기 좋다.
11일차
■뮌헨(독일)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강(江)에 면하여 있다. 베네딕투스회(會)를 기원으로 하는 도시이다. 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수도사들에게 잘츠부르크로부터 이자르강에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듬해 이자르강을 건너는 다리가 건설되었고 시장 주위로는 성이 구축되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이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14세기 말~15세기 초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치하에서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1618∼1648) 중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고(1632), 1634년에는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825~1848년 재위에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으며, 그가 선임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하여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도시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인 맥주 창고는 아직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구시가는 점차 기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과거의 특징을 많이 상실하였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는 7개의 성문 중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등 3개가 있는데 모두 14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다른 중세의 건축물로는 뮌헨대성당, 1468∼1488년 건립된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1470∼1480년 건립된 구시청사 등이 있다.
부근에는 1169년 건립된 장크트페터성당이 있는데, 뮌헨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옛날 무기고였던 곳은 2000년 현재 시립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들 중세 건물 이외에도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도 많다.
바이에른 최대의 도시이자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금융·상업·공업·교통·통신·문화의 중심지이다. 식품가공, 정밀 광학기기, 전기제품, 화장품, 의류, 맥주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또 영화 제작과 도서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유럽 최대의 도산매 시장도 자리 잡고 있다. 각종 행사와 회의가 자주 개최되고 있다.
독일 국제 공항 중 두 번째로 큰 국제공항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공항(Flughafen München-Franz Josef Strauß) 이 시가지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독일 내의 주요 도시와는 ICE(Inter City Express)라 불리는 고속철도를 통해 잘 연결되어 있으며 EC(Euro City Express)를 통해 유럽의 주요 도시들과의 교통편이 잘 발달되어있다.
시가지에는 마리엔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명소가 몰려있다. 신시청사(Neues Rathaus)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건립되었고 총 85m의 탑과 종루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가 유명하다. 옛 바이에른 왕가의 궁전이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레지덴츠 궁(München Residenz Palace)은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100여 개의 방에 미술품과 보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다른 유명 미술관으로는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가 있으며, 이외 관광 명소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BMW의 박물관,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 등이 있다.
뮌헨에서는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걸쳐 열린다. 옥토버페스트는 10월을 뜻하는 '옥토버(Oktober)'와 축제를 뜻하는 '페스트(fest)'의 조합으로, 1810년 경 바이에른 왕국의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연 것이 이 축제의 기원이다.
뮌헨은 스포츠 레저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각종 스포츠 대회가 여러번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경기로 1972년 제 20회 하계 올림픽 대회가 있으며,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당시 주요 거점 도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2년 올림픽 당시 대대적으로 건립되었던 올림피아 파크(Germany Munich Olympic Park)는 하계 스포츠 용도로 설계되었지만, 현재 빙상경기장을 신축해 동계스포츠 인프라도 함께 구축하고 있다. 이외에도 독일 월드컵 당시 지어진 알리안츠 아레나 스타디움(Alianz Arena)이 있다.
○프라우엔교회
1488년 완공된 뮌헨 프라우엔 교회는 후기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축물로, 교회로서는 뮌헨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교회 전면에 쌍둥이처럼 솟아 있는 두 개의 탑과 탑 위의 양파 모양 지붕은 눈에 쉽게 띄어 뮌헨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두 탑은 높이가 같아 보이지만 북탑이 99m, 남탑이 1m 더 높은 100m이다. 남탑의 전망대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으며 뮌헨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프라우엔 교회로 들어서면 바닥에 한쪽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악마의 발자국(Teufelstritt)’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교회의 명물이다. 악마의 발자국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교회를 건축할 당시 건축가는 악마와 거래를 했는데, 창문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만든다면 악마가 건설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악마는 교회 건설을 도왔으며 완공이 되자 건축가는 악마를 교회 안으로 안내했다. 악마가 선 자리에서는 교회의 창문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악마의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람들이 몰래 창문을 만든 것을 알아차린 악마가 화를 내며 교회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고 도망쳤다고도 한다.
교회 내부에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묘사한 제단화가 있고, 악마를 속이고 만들었다는 창문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4세의 묘를 비롯해 비텔스바흐 왕가의 묘지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뮌헨의 성직자들도 묻혀 있다.
○신 시청사
높이는 85m에 이른다. 시내의 중심인 마리엔 광장에 위치한다. 지붕 한가운데에 가늘고 높은 시계탑이 솟아 있는 신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세련되고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겉모습만 봐서는 수백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10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 시청사 탑에서는 뮌헨의 아름다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의 종루에는 독일 최대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인 글로켄슈필이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작동하며,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정오 12시와 오후 5시에도 볼 수 있다. 사람 크기만한 인형들이 출연하는데 처음에는 빌헬름 5세의 결혼식 가운데 실감나는 기마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다음에는 1517년 페스트가 만연해 외출금지되었을 당시 페스트가 없어짐을 알리고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며 신나게 춤추는 모습 등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해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2일차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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