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문화답사기
서언
문화원 서예실에 오신 사무국장님이 느닷없이 예고 없는 번개팅 같은 제천문화답사 참가자를 구두로 모집한다. 무조건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동유럽 여행을 취소한데다 동유럽 여행계획으로 인해 원불교 이리교당 답사회에서 추진한 수원성 답사도 가지 못했던 터라 조건 없이 신청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천문화원에서 제천문화관람초청행사의 일환으로 추진한 공모사업에 우리 사무국장께서 신속하게 신청하여 차편을 보조받아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참석자는 김태현 원장님, 채수환 부원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이사님들, 추가로 모집한 회원들로 모두 40여명이다. 우리 서예반에서는 인천 이기용 회장님, 화곡 김종학 선생님, 죽산 소병석 선생님, 나, 그리고 손희숙 선생 모두 5명이 참가하다. 답사일은 11월 18일(금)이다.
제천은 먼 곳이다. 강원도와 인접한 내륙지역이라서 비록 고속도로만 타고 가게 된 세상인데도 서울 가기보다도 더 힘든 곳이다. 기억으로 세 번째 나의 제천행이다.
제천은 신라시대에 내제군이었고, 고려 건국후 제주로 불렸다. 고려 현종 9년에 제주군과 청풍현으로 개편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제천현과 청풍군이었다. 1940년대에 제천현이 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도에는 시로 승격하였고, 1995년도에 시군이 도농통합으로 현재에 이른다.
박달재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박달재에 도착한다. 박달재를 생각해보니 맨 처음 온 것은 1980년대 여름 직원여행인 듯 하고 어렴풋이 비포장길로 넘는 박달재 고갯마루엔 정말 간단한 표지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기억이다.
?이곳이 박달재입니다.?라는 누군가의 안내로 내려 보니 더운 날씨에 매점하나 없어 모두들 급히 다시 버스에 올랐지 않았나 싶다.
오늘의 선진국 대한민국의 박달재엔 위락시설들이 많이도 보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확성기에서 크게 들려오는 저 노래 소리. 반야월 선생이 지은 유명한 대중가요《울고 넘는 박달재》이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둘아 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의 전설을 노래한 것이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 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달재 고갯마루에 박달이와 금봉이의 불타는(?), 아니 애틋하고 서글픈 사랑을 주제로 한 목각과 청동조각 작품들이 여기 저기 놓여 있다. 유명조각가들이 제작한 청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어본다.
의림지
제천시내로 들어가 식당 《황금들》에서 쇠 불고기 버섯전골로 점심을 먹다. 이미 배가 고파 반 공기를 더 먹은 데다 남은 산채에 참기름을 넣어 한 공기를 부어 만든 비빔밥을 두어 숟갈 또 나누어 먹으니 배가 대단히 부르다.
이곳에서 제천 문화원장님의 인사말을 듣고 국가명승 제 20호인 의림지로 출발한다. 해설사님의 말로 제천시 인구가 무려 13만 6천 여 명이라 하니 놀랍다. 전북에서 4번째인 정읍인구가 겨우 11만 6천인데 산골지역인 제천이 2만 여명이나 더 많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시대변화도를 잘 비교해 준다. 의림지를 생각해보니 꼭 13년 전에 양드리와 함께 이곳 제천에 왔었고 그 때 의림지를 찾았었다.
의림지는 우리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다고 한다. 호반 둘레 약 2km, 수심이 8m~13m인 대수원지로서 외부의 물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고, 용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기도 하지만 바닥에서 자연히 샘솟는 물로 이루어진 호수라 한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둘레에 서있는 수백 년을 자랑하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세워진 <경호루>, 높이 30m의 자연폭포가 있다. 우리 김제의 벽골제에서는 <지평선 축제>를 개최하여 전국 최고의 향토문화축제로 각광을 받고는 있으나 호수가 남아 있지 않아 너무 아쉬운데 그렇다고 이미 없어져버린 호수를 팔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타깝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의림지에는 찾아오는 연중 관광객들이 있어 돈을 쓰고 가겠지만 벽골제에는 축제가 끝나면 찾아오는 관광객이 없으니 돈을 쓰는 사람은 물론 당연 없는 것이다. 그래 순논농사 지역인 내 고향 김제는 계속 경제가 어렵다.
한방엑스포공원
제천은 조선시대부터 대구 금산과 함께 3대 약령시장으로 유명하였고 지금도 많은 약초가 생산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지역의 역사적 특성을 살려 <2010 제천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조성된 공원이다. 시간관계상 이곳저곳을 모두 방문할 수 없으므로 한방엑스포생명과학관만을 찾는다. 먼저 3층부터 관람한다. 3층에는 이해관, 학습관, 4D영상관이 있고, 2층에는 각종 탐험관, 체험관 및 전시실이 있다. 1층에 기획전시실, 다목적강당, 우리 몸 퍼즐 안내데스크가 있다. 3층과 2층을 좀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 신체의 각종 구조를 잘 알 수 있도록 입체학습도구를 설치하고 잘 설명되어 있다. 시간이 허용되면 더 자세하게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17년 9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2017제천 국제한방바이오산업엑스포>가 다시 개최된다고 한다. 한방의 바이오산업으로의 진화를 꿈꾸는 엑스포이다.
청풍문화재 단지
충청도에는 대규모 인공호수가 있다. 대청호와 충주호이다. 대청호는 면적 72.8㎢, 저수량 15억 톤이며, 이곳 충주호는 저수면적 67.5㎢, 저수량 27.5억 톤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수이다. 우리 전북의 옥정호가 면적 26.51㎢, 저수량 4억 6600만 톤이고, 용담호가 면적 31.4㎢, 8억 1500만 톤이니 충주호의 규모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청풍호라고 부른다. 제천의 청풍면 지역이 수몰되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충주호의 절반은 청풍면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고집스레 부르는 명칭이라고 한다.
청풍은 원래 조선시대의 고을이다. 원래 고구려 때의 사열이현을 신라 경덕왕 때 청풍으로 고쳐 제천군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충주에 예속되면서 감무를 두었는데, 1317년(충숙왕 4)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660년에 부(府)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제천군에 병합되었다.
청풍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많은 문화 유적을 갖고 있었으나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던 마을이 문화재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있었다. 충청북도청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다.
단지에는 향교, 관아, 민가, 석물군 등 43점의 문화재를 옮겨 놓았는데 민가 4채 안에는 생활 유품 1,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단지로 오르니 팔영루가 나타난다.
팔영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조선시대에 청풍부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던 누문이다. 아래는 문이고 위에는 누각의 형태로 되어 있다. 고종(재위 1863∼1907) 때의 부사 민치상이 청풍 8경을 노래한 팔영시로 인하여 팔영루라 불리게 되었다. 충주댐 건설로 1983년 지금 위치로 옮겨서 복원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이다. 안에는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르고 있다.
한벽루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4년 (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한벽루에 관한 하륜(河崙)의 기록에 의하면 ‘산과 계류가 좋고 누각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청풍과 한벽의 이름은 듣기만 하여도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서늘하게 한다’고 했다. 주열(朱悅)은 시에서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 기운 자욱하여 연기 아닌 연기로다. 차고 푸르름이 서로 엉키어 한 고을 되었거늘, 맑은 바람(淸風)은 만고에 전할 이 없네’라고 했다. 여기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충청도의 양반 기질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귀라고 할 때 ‘맑은 바람’으로서의 청풍은 바로 청풍군에서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응청각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금병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34호)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건물이다. 이 건물은 숙종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금남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 도화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 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청풍 황석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쉽게 '사랑나무' 라고도 부른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석조여래입상 (보물 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cm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 (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 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귀가
청풍문화재 단지내 유적들을 두루 돌아보고 3시 50분에 출발하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다 토요일이라 고속도로가 막혀 차가 느리고 더디기가 한이 없다. 무려 4시간이 너머 걸려 8시 15분에야 문화원에 도착하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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