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동유럽과 발칸반도 여행(2017)

청담(靑潭) 2017. 3. 31. 23:56

 

동유럽과 발칸반도

프롤로그

우리나라 여행업계의 유럽여행 패키지는 크게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 남서유럽, 남동유럽권으로 나뉜다. 나는 2010년에 남동유럽권(그리스․터키․<이집트>)을, 2012년에 북유럽의 핀란드를, 2015년에 서유럽(영국․프랑스․스위스․모나코․이탈리아․바티칸시티․오스트리아․독일․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을, 2016년에 남서유럽권(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을 다녀온 바 있다.

이번 동유럽여행은 혼자 가게 되었다. 양드리가 이미 3년 전에 자매들과 다녀왔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초에 여행사에 예약했으나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어쩔 수 없이 취소했다가 요즈음 어머니의 건강이 좋으시므로 다시 급히 추진한 터이다. 4월 말이나 5월초에 다녀오면 최고로 아름다운 동유럽의 경치를 볼 수 있으므로 좀 좋으련만 4월부터는 3달간 교원대학교에서 중등교장연수협력위원으로 봉사하게 될 터이기에 부득이 3월로 잡았다. 요즈음 대세라는 ○○○여행사로 확정하였다. 되도록 많은 나라와 도시를 찾아서 많이 보고 많은 공부를 하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여행목적이므로 발칸반도의 일부까지 아우르는 패키지 상품이면서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여 마음에 드는 것을 찾게 되어 행운이다. 혼자서 객실을 사용하므로 추가요금을 지불했다. 모두 9개국을 찾는 11박 12일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농장일은 양드리에게 맡겼더니만 아버지께서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농장의 가축(개 두 마리, 닭 4마리, 토끼 9마리, 잉어 30마리)돌봄은 고학력자 두 분에게 넘겨드리고는 안심하고 출발한다.

2013년 연말에 tvN에서 방영한 《꽃보다 누나》는 이승기, 윤여정, 고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등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하는 모습을 담은 것인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탓으로 이후 발칸과 동유럽은 여성들이 엄청나게 찾는 곳이 되었다.

로마제국이후 유럽 및 서남아시아의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소련지역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과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395년에 동서로 분열한다. 게르만족이 밀고 들어와 476에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여 프랑크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에 베르됭조약(843)과 메르센조약(870)으로 프랑크왕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갈라진다. 훗날 동프랑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신성로마제국(962-1806)으로 발전하고,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되며 중프랑크는 이탈리아가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발칸반도와 서아시아, 아프리카 북부는 물론 이탈리아까지 지배하던 동로마제국(395-1453 : 비잔틴제국)은 곧 이슬람제국에 의해 위축되었고, 이어 서아시아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1037-1219)가 지배하게 되었으나 몽고에게 망하였으며, 뒤이어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1299-1922)가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오늘날 동유럽이라 불리는 지역은 체코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였고, 폴란드와 헝가리는 독립왕국이었으나 발칸반도 지역은 대부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발칸반도에는 그리스,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이 독립국가로 존재하였다. 그중 유고슬라비아는 1991~1999년까지의 내전의 결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유고) 등 총 6개 국가가 되었고 2008년에는 세르비아에 속한 코소보도 독립을 선언한 상태가 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서프랑크 지역인 프랑스, 동프랑크 지역인 독일오스트리아, , 슬로바키아, 독립국이던 헝가리,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면서 독립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총 9개국을 여행하게 된다.

 

 

1일차 13일(월)

7시에 집을 나선다. 양드리가 친히(?) 터미널까지 바래다준다. 군산을 거쳐 11시 30분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미팅장소를 찾아 가이드와 만났다. 3시 30분에 이륙하는 루프트 한자 LH713편에 올라 자리를 찾다가 바로 뒤편에 군산에 사시는 우리 육일회원이신 강교장 내외분이 계신 것을 발견했다.

?나와 같이 여행을 하게 되는구나.?

라는 직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12일간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고 부인인 이 선생님은 국세청 간부관리 출신인 나의 중학교 동창의 동생이었다. 나는 여행 내내 강교장님 내외분의 융숭한 배려를 받아 황송하고 감사하기 그지없다.

비행기 항로는 항로안내화면을 지켜본 결과 중국과 몽골을 거치며 북진하여 몽골과 카자흐스탄의 북부지역 러시아 땅을 오랫동안 날아서 모스크바의 북부와 리두아니아와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8시간이 늦으므로 우리시간으로는 03시, 독일시간으로는 오후 7시에 루프트한자 713편은 11시간을 비행하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는 체코 소속의 P&P 회사의 차인데 기사는 33세의 라덱이라는 젊은이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세 아이 아빠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나이다. 가이드가 버스에서 간단히 여행객 31명을 소개한다. 일행은 전국각지에서 모였는데 여수 광주 부산 청송 용인 홍천 서울 수원 서산 등에서 오셨다고 하며 남자가 15명이고 여자가 16명인데 가이드가 남자이니 각 16명이 되었다. 일행 중에는 친구사이인 두 명의 젊은 40대와 50대인 두 분의 남자 분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11명이 60대 은퇴자들인데 그 중 다섯 분이 나를 포함하여 학교장 출신이다. 가이드님은 50세의 베테랑으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대단히 정확하고 유머도 능하여 우리를 자주 즐겁게 해 주었고 리더십도 강한 유능한 전문가이드이다. 12일 동안의 여행기간동안 진행에 거의 차질이라는 것이 없었다.

독일(8천 만 명, GDP 4위 4만 2천 달러)

2015년 서유럽 여행시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북상하여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룩셈부르크로 들어갔었다.

면적은 35만 7,022㎢이고, 인구는 8,085만 4,408명이며, 수도는 베를린이다.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1871)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 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2015년 서부유럽 여행 시에는 이 도시를 탐방했었으나 오늘은 동유럽 여행의 첫 기착지가 되어 동유럽 여행의 시작점이 될 뿐이므로 공항에서 곧 버스에 올라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콜마르로 향한다.

헤센주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강(江)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외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발전하였다. 관광지로는 대성당, 뢰머 광장, 괴테생가, 팔먼 가든 등이 유명하며, 사과와인과 소시지가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3시간 30분을 달려 국경을 넘어 11시 30분에야 프랑스 알자스지방의 콜마르에 있는 콤포트 호텔에 도착했다. 집을 떠난 지 24시간 30분만이다. 2년 전 서유럽 여행 시 프랑스에서 너무나 불쾌했던 기억은 파리 근교의 여행자숙소에서 잤던 일이다. 오늘은 작지만 새로 지은 현대식 호텔로 별 3개짜리라는데 다른 나라로서는 4개 격이라고 한다. 오늘부터 호텔 독방을 쓰는 호강이 시작되었다. 콜마르는 2년 전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기 위해 내렸던 벨포르가 아주 가깝다. 두도시 모두 같은 알자스주에 속한다.

 

 

2일차 14일 (화)

프랑스 (6천 6백만 명, GDP 6위 4만 1천 달러)

2015년 서유럽 여행시 영국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여 탐방하였으나 머무른 건 겨우 하루였다. 기차로 알자스 지방의 벨포르까지 간 뒤 곧 버스로 스위스로 들어갔었다.

면적은 63만 3,801㎢이고, 인구는 6,700만 명이며, 수도는 파리이다. 서기전 2000년경 북프랑스에 켈트족이 이동해 와 서기전 5∼3세기 사이에는 프랑스·영국·스페인 등을 정복하였다. 부족국가간의 대립으로 서기전 2세기경부터 로마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5세기경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었고 800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로 대관되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분열되어 843년 베르덩조약으로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로 3분되어 현재와 같은 프랑스의 판도가 정립되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1907년 프랑스·영국·러시아의 3국협상 체제를 완성하여 독일과 대립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 승리하였다. 베르사유조약에 의하여 독일의 약체화와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고자 국제연맹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었다.

이번 여행코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동유럽이 아닌 나라인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을 찾게 되는 것으로 대단히 유혹적인 상품미끼가 되었다. 알자스와 로렌지방은 보통 묶어서 부르는데 이는 역사가 궤도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알자스-로렌 지역은 9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1600년대 초반부터 독일 내에 30년 전쟁이 일어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프랑스령으로 복속되어 병합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알자스-로렌은 새로 만들어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되돌려졌다. 독일 제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 지역에 가능한 한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하여 프랑스 문화 및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일 제국령으로 자연히 물들이기 위해 적극 추진하려고 했으나, 주변 보수파들(융커 계층)의 반발이 심해 결국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 제국령으로 복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잠시 독립국(알자스-로렌 독립 공화국)으로 있다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알자스로렌의 양도에 따라서 프랑스에 독일식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지역은 1940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합병되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에게 되돌아갔다. 특기할 점은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로렌의 약 1/4이 독일 제국의 영토가 된 바, 당시 프랑스의 주 경계와 상관없이 영토의 할양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주의 경계가 조정되었다. 이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령으로 되돌려진 이후에도 조정된 경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알퐁스 도테(1840-1897)의 『마지막 수업』을 통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후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알자스 -로렌지방 사람들의 아픔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콜마르

콤포트 호텔에 일행 모두들 만족한다. 어쩐지 이번 여행의 호텔들은 왠지 모두 마음에 흡족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시대인 9세기 경 작은 촌락에서 콜마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자유도시가 되었다. 현재 인구는 6만 3천명이라고 한다. 17세기에 일어난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30년 전쟁)중에는 스웨덴에 점령되기도 하였으며(1632)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3세에게 양도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땅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1871∼1919)는 독일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했던 콜마르전투(1946년 1월 20일∼2월 4일) 결과 알자스 지방은 다시 프랑스 땅이 되었다.

알자스 지방은 포주산지로 유명한데 오래전부터 이곳은 포도주가 유명했으며 콜마르는 포도주를 거래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내에는 로슈(Lauch) 강이 흐르는데 작은 운하로 만들어져 오래전부터 운송로로 사용되었다. 근래 들어 운하주변은 관광지로 변모되었으며 '작은 베니스'로 불리기도 한다. 뉴욕항의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한 F. 바르톨디(1834-1904)의 출신지이다. 콜마르 입구에 큰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데 바르톨디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터키와의 전쟁 때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는 슈벤디 (1522-1583)장군의 동상도 볼 수 있다.○쁘띠 ○쁘띠 베니스

작은 베니스라는 뜻이다. 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16세기 화려한 반 목조 알자스 전통 가옥들을 관람할 수 있다. 알자스 지방 고유의 풍광을 잘 간직한 강변 거리이다. ‘프티 브니즈(Petite Venise)’란 이름 그대로 프랑스의 작은 베네치아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강변 경치를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거리 한가운데에는 콜마르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알자스 지방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로슈(Lauch) 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이를 연결하는 작은 다리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강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반 목조 가옥들도 인상적이다. 건물 대부분이 알자스 특유의 건축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칠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침 들뜬 기분으로 시내로 나간다. 작은 도시의 예쁘고 오래된 건물들의 모습들에 정감이 간다. 나는 이미 베네치아(베니스)를 여행해서인지 큰 감동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작지만 아름다운 강과 그 주변에 베란다를 만들어놓은 소박하고 오밀조밀한 찻집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스트라스부르

먼저 남쪽에 있는 콜마르를 찾은 다음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것은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던 길은 되돌아가는 셈이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트라스부르는 인구가 27만 명이라고 한다. 내가 사는 익산이나 군산만한 도시라 하겠다.

라인강(독일 국경)의 서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하며, 알자스의 주도로 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또 유럽 전체의 교통의 요지이며, 라인강(江)과 론강(江)·마른강(江)을 잇는 운하가 시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큰 하항을 이루는 동시에 육상교통도 발달하였다. BC 15년 로마시대에 아르겐토라툼이라 일컬어졌는데, 455년에 훈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그 후 복구되어 스트라테부르굼(대로의 도시)이 되었다.

855년부터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했으나 1201년에 자유도시가 되었으며, 1681년에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4년 동안 독일군 점령하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직속의 주교관할구라고 한다.

구텐베르크 대광장이 있는데 구텐베르크(1394-1468)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1334-44년경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곳을 기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의 동상이 서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를 크게 내세우며 자랑할 만하다. 점심은 닭다리 하나씩을 먹었는데 맛이 썩 괜찮다. 오늘은 휴식시간이 많은 아주 여유로운 여행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1190년부터 1880년까지 약 700년에 걸쳐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 앞면의 섬세한 입체 세공이 아름답다.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다. 1176년에 짓기 시작하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무렵이다. 높이 142m 규모의 첨탑은 1439년에 완성하였다. 성가대석,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정탑(頂塔) 등은 로마네스크양식, 뾰족한 첨탑, 서쪽의 문들, 예배당 회중석 등은 고딕양식으로 건축하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13세기에 만든 '천사의 기둥'과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각각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밖에 1838년에 완성한 천문시계가 매일 오후 12시 30분에 종소리를 내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밖에서 보는 위용만으로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못지않은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규모의 성당이었다.

○쁘띠 프랑스마을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 서쪽에 있는 마을로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쁘띠 프랑스(Petite France)란 '작은 프랑스'라는 의미이다. 어부, 가죽을 무두질하는 사람, 물방앗간 주인 등이 살던 곳으로 알자스 전통 목조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라인강으로부터 들어오는 배들은 갑문을 통해 이곳으로 진입하여 거의 모든 상점들의 뒷문까지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고 한다.

2008년 가평군 청평면에 이를 모방한 마을이 생겼다.

 

 

■괸즈부르크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버스는 북쪽으로 아우토반을 달린다. 마치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듯 하다.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어 환호했던 그 도시인 바덴바덴을 지나 우회전하여 독일 프로축구팀으로 유명한 슈트트가르트를 지난다. 지도를 보니 가까운 곳에 튀빙겐이 있다. 또래 동료교사였던 김 선생이 오랫동안 공부한 튀빙겐 대학이 생각났다. 두 시간 반 만에 울름이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이동하여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괸즈부르크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오신 젊고 잘 생기고 매력적인 부부와 식탁을 함께 하였는데 두 분이 생맥주 한잔씩을 우리까지 주문하여 주신다. 내가 요즈음 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주 생맥주 한잔씩을 마시는데다 큰 술을 한 번 마시면 목이 매우 나빠짐에도 약을 먹지 않고 여행을 떠나와 적이 걱정이 되는지라 되도록 술을 삼가고 여행에만 전념하기로 한 터이나 고맙게 마셨다. 나는 내가 평소에 마시는 벨기에산 하켄버그만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강교장은 맥주 맛이 일품이라고 감탄한다. 젊은 두 부부는 나이가 54세라하여 모두 깜짝 놀랐다. 여행을 좋아하며 즐기는 멋진 부부! 괸즈부르크는 순전히 우리가 두 번째 잠을 자기 위한 호텔이 있는 곳이다. 독일에서는 베르크는 산성에 있던 곳에 발달한 도시이고, 부르크는 평지에 발달한 도시에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한다. 비엔나 하우스 호텔 역시 흡족하다.

 

 

3일차 15일(수)

오스트리아(8백만, GDP 29위 1인당 5만 달러)

독일, 프랑스와 같이 두 번째 방문하는 나라이다. 아름다운 알프스와 인스부르크 산장호텔에서의 추억이 새롭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으로, 면적은 8만 3871㎢, 인구는 866만 5550명, 수도는 빈(비엔나)이다.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14세기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962-1806) 자리에도 오르면서, 이후 650여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대를 연다.

오스트리아는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서 독일 제후의 하나로서 완전한 영방주권을 획득하였으나 10년 후에 즉위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는 사보이공 오이겐의 힘으로 다시 투르크의 침입을 억압하고 전 헝가리령을 평정하였다. 에스파냐 계승전쟁1701~13)에서는 프랑스를 격파하고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의 결과 밀라노 ·나폴리 ·네덜란드 등을 획득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이전의 에스파냐 의존체제에서 벗어나 프랑스와 어깨를 겨루는 유럽의 열강이 되었다.

그러나 분산된 영토와 이민족의 문제로 시달리게 되어 결국 독일의 주도권을 신흥프로이센에 넘겨주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최후의 남자황제인 카를 6세(재위 1711~40)가 국가기본법(프래그머틱생크션)을 제정하여 전 합스부르크가령의 영구 불분할과 여자상속제를 정하여 관계 열국의 승인을 얻으려 한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죽자 바로 바이에른 ·작센 및 에스파냐가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나 사르데냐도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것을 지지하여 결국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48)이 시작되었다.

한편, 프로이센도 또 이 기회를 틈타서 예전부터 바라고 있었던 중요자원지역인 슐레지엔(실레지아)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80)는 결국 아헨 화약으로 계승권을 승인받고, 대신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할양하였다. 슐레지엔 탈환을 꾀하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재상 카우니츠를 채용, 국력 충실에 진력하는 한편, 프랑스 ·러시아 및 독일의 여러 영방과 손을 잡고 프로이센과 싸웠으나(7년 전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절대주의적 근대국가로 확립시킨 것은 그녀의 힘이었으며 나중에는 폴란드 분할에도 참여하여 갈리시아 지방을 획득하였다. 요제프 2세(재위 1780~90)는 계몽적 전제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농민해방, 종교의 관용 등 계몽주의적 개혁에 주력하였으나 복잡한 국정 때문에 충분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 파급을 두려워하였고, 또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걱정한 레오폴트 2세(재위 1790~92)는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프랑스에 간섭하였다.

다음 대인 프란츠 2세(재위 1793~1806)도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과 대동맹을 체결하고 여러 차례 프랑스와 싸웠으나 패전을 거듭하여 1791년에는 캄포포르미오 화약에서 북이탈리아의 영토 밀라노와 네덜란드를, 1801년 뤼네빌 화약에서는 라인 좌안지방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네덜란드 ·스위스 ·롬바르디아 등지에서의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하였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화약에서는 티롤 ·베네치아 지방을 할양하였다.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조직했고 프란츠 2세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났으며(물러나기 2년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음), 이에 따라 중세 이래의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되었다. 1809년 빈 화약에서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굴복하고 왕녀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황후가 되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1812)에도 참가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함으로써 독일에서의 패권을 잃고 또한 베네치아 지방을 상실하게 되자 국가의 통일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내부 이민족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기가 곤란해졌다. 결국 1867년 헝가리의 마자르인 귀족과 타협을 맺어 헝가리왕국의 건설을 허락하였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 국왕을 겸함으로써 여기에 동군연합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2중 제국이 성립되었다. 군사 ·외교 ·재정을 공동으로 하는 외에도 각각 별개의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독립된 정치를 행하며, 10년마다 갱신되는 관세 및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2중 제국 결합의 핵심은 역시 군주이며 이 체제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붕괴될 때까지 지속된 것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성실한 인격에 의한바 컸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이 늦어졌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샬플랜을 바탕으로 1951년 이후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을 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문화와 교육면에서는 독일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1918년 제정의 폐지로 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 빈조약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이 나라에서 독립되면서 현재의 국경선이 결정되어 게르만민족만의 국가가 되었다. 1920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1955년 10월 개정한 바 있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8시에 괸즈부르크를 출발하다. 버스는 계속 동진한다. 유명한 아우크스부르크가 나온다. 종교개혁이후 루터파 신교를 공인한 회의(1555)가 열린 곳이다. 이어 뮌헨을 돌아가는데 가이드는 아레나 올림픽경기장을 안내한다. 1972년에 올림픽이 열린 도시로 유명하고 축구팀 바이에른 뮌헨팀의 본거지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하여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바로 그 유명한 뮌헨을 미리 지나가고 있다. 뮌헨을 지나 계속 동진하여 알프스를 넘어간다.

2015년 서유럽 여행시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었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4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경유하여 북부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고 나는 버스를 타고 알프스를 처음 넘어갔던 것이다. 우리 버스는 나폴레옹이 넘어갔던 곳으로 여겨지는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을 타고 스위스를 경유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벨포르에서 버스를 타고 스위스로 들어가 수도인 베른을 경유하여 인터라켄의 융프라우에 올랐고 계속 남진하여 루가노 호수를 찾았었다. 이탈리아로 들어가 꼬모 호수를 보고는 밀라노 곁을 지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알프스를 넘은 때는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한 뒤에 베네치아(베니스)를 지나 북진하여 오스트리아로 들어가 인스부르크에서 하루 묵은 뒤 아마도 곧바로 독일로 들어가 올름을 경유하여 하이델베르크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짤츠캄머굿

볼프강을 끼고 있는 장크트 길겐에서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유람선을 이용하면 에메랄드 빛의 맑은 호수를 더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잔잔한 호수 위에서 마을 주변과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유람선에 탑승하여, 볼프강 호수의 풍경을 만끽한다. 츠벨프호른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알프스 산자락까지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마을의 모습은 물론, 탁 트인 곳에서 자연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알프스를 넘어 가는데 전혀 다른 길이다. 뮌헨에서 계속 동진하더니 짤즈부르크를 지나치고 피앙제 호수와 휘슬호수 등을 보며 지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에는 모두 76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볼프강 호수의 짤즈캄머굿에 도착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버스가 도착한 마을은 정작 짤즈캄머굿이 아니고 길겐마을이다. 이 마을은 모짜르트 어머니가 태어난 집이 있으니 바로 모차르트의 외갓집이다. 지금도 호숫가에 잘 보존되어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팀이 무려 6팀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없으니 볼프강 호수는 모두 한국인들이 차지한 셈이다. 유람선을 타고 짤즈캄머굿 마을부근까지 다녀오는데 이 짤즈캄머긋 마을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고 촬영이 많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한다. 1965년에 제작된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은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나에게도 역시 영원히 아름답고 다시 보게 될라 치면 항상 가슴을 뛰게 하는 영화이다. 환상적인 아름다운 알프스는 바로 이곳에서 촬영된 것이며 알프스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에델바이스》는 내가 좋아하며 가끔씩 부르는 노래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인 쥴리 앤드류스는 가슴을 뛰게 하는 남성들의 영원한 이상형의 여인이며 트랩대령이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에델바이스는 너무 멋있다. 유람선을 타고 온 뒤에는 길겐마을 뒷산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산 정상에는 아직도 눈이 있어 눈을 밟으며 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여행사의 안내장을 보면 할슈타트를 포함하여 이 지역 전체를 짤츠캄머굿이라고 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지도를 찾아보거나 실제로 답사한 결과로는 볼프강 호수 주변의 가장 큰 마을이 짤츠캄머굿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우리가 정작 방문한 마을은 길겐마을이며 할슈타트는 자동차로 무려 한 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짤즈부르크

739년 성 보니파키우스(St. Bonifacius)에 의해 주교관구가 되었다가 798년 대주교관구로 승격되었다. 대주교들은 1278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로 인정되었고, 이어서 이곳은 그들의 막강한 교회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네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아름다운 알프스 경치와 화려한 건축술의 독특한 조합으로 잘츠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중세 건축물들은 후기 대주교들의 건축활동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주교관 건물들과 시민들의 집들은 주된 자랑거리이며, 이로 인해 잘츠부르크는 '독일의 로마'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수세기 동안 음악의 중심지로 알려진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1756-1791)의 출생지로 더 유명하다. 게트라이데가 9번지에 있는 그의 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잘츠부르크 축제가 열린다. 19세기 내내 음악축제가 이 도시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렸다. 1917년 설립된 축제극장 위원회가 잘츠부르크의 축제를 연례행사로 만들었다. 현재 잘츠부르크 축제는 독주회·관현악과 실내악 연주회·교회음악·오페라·연극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차르트의 음악이 축제를 압도한다.

길겐마을에서 짤즈부르크가 아주 가깝다. 미라벨 정원을 찾았고 호엔짤즈부르크 성채가 멀리 보인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도시라고 할 만한데 캬라얀(1908-1989) 생가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중학교 때 음악시간을 통해 최고의 지휘자인 그의 이름을 익히 알았었다. 모차르트가 살던 집과 게트라이데거리, 돔성당 등을 보다.

짤츠부르크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모차르트』의 도시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길거리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이용한 홍보와 물건들이 판매되고 우리가 찾아가는 곳들은 대부분 모차르트와 관련이 있다.

○미라벨 정원

잘츠부르크 시내에 있는 17세기 정원이다. 잘츠부르크 신시가지의 미라벨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정원으로, 중앙역에서 라이너슈트라세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있다. 미라벨 궁전은 1606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지었으며, 당시는 알트나우라고 불렀다. 후임자인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정원은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Fischer vonErlach)가 조성하였고, 18세기에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von Hildebrandt)가 개조하였으나 1818년 화재로 파괴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궁전에 속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완전 개방하고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멀리 보이는 호헨잘츠부르크성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미라벨 궁전은 규모는 작아도 콘서트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 내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하였으며, 지금도 실내악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 또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으로도 인기 있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꽃 장식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돈다.

매우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은 정원수들의 잎들이 나지 않은데다 온갖 꽃들을 장식하는 꽃밭에도 아직 꽃을 심기 전이어서 사진에서 보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이번 여행은 아직 관광철이 아니어서 한가하고 여유롭게 다니는 장점이 있지만 봄이 제대로 오기 전이어서 나무의 잎도 나오지 않고 꽃도 거의 피지 않고 들판의 잔디나 밀밭도 아직 파랗지 않아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매우 덜한 아쉬움이 크다.

○게트라이데 거리

번화 쇼핑가이다. 잘츠부르크 시내 중심인 슈타츠(Staats) 다리를 지나 동서로 뻗어 있다. 도시의 상징인 호헨잘츠부르크성을 향하여 아름다운 쇼핑가를 이루고 있으며, 잘츠부르크의 문화적 특성과 매력이 함축되어 있다. 거리 양쪽으로 보석가게, 꽃집, 옷가게 등과 레스토랑, 커피숍 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생가와 15세기에 건축된 구시청, 대성당과 레지덴츠성, 미카엘 교회, 프란치스카너 교회, 화랑,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다. 모차르트 생가 뒤에는 대학광장과 대학성당이 있다. 대학광장에서는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꽃, 약초, 채소, 과일, 직접 구운 빵과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이 거래되는 그린시장이 열린다.

○호엔짤즈부르크 성채

호엔잘츠부르크 성채는 잘츠부르크의 상징인 곳으로 구시가 남쪽, 묀히스베르크 언덕의 120m 지점에 위치한다. 구시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이기 때문에 구시가 어디에서든 보이는 요새이다. 1077년 건축한 철옹성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 주교 서임권 투쟁(1075~1122년)을 벌이던 시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게프하르트가 남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견고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아 지금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은 요새와 대주교의 거주 공간이었지만 군대 막사와 감옥 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가 5년간 조카 마르쿠스 시티쿠스에게 감금되어 1617년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15세기에 설치된 무기고와 대포 설치대가 여전히 남아 있고, 15~16세기 동안 증축 및 보수 작업을 진행해 17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짤즈부르크 관광을 마치고 버스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알버트호수의 호숫가 마을인 베에르그 암 아테제 마을의 가도프 소네 산장호텔에서 묵었다. 이 호수는 볼프강 호수 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며 규모도 더 큰 호수이다. 아침에 일어나 호숫가로 나가니 안개 낀 호수가 너무나 아름답다. 회사동료 사이인 40대의 두 청년들도 호숫가로 나와 함께 안개낀 알버트 호수의 경치를 즐겼다.

 

 

4일차 16일(목)

■할슈타트

산과 호수가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어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힌다. 할슈타트 호수에 비친 동화 같은 마을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준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소금을 채굴해왔던 곳으로 세계 최초로 소금광산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소금산업이 발전해가면서, 현재는 소금산업이 아닌 휴양관광지의 대표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다흐슈타인 산에 소금광산의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산에 올라 그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할슈타트 전망대에 호수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할슈타트는 우리가 묵은 알버트 호수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호수마을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 배경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예정에 없어 산위로 올라가는 트램형 케이블카를 타지는 않고 마을길을 따라 30여 분 간 산책을 하며 다녀왔다. 산자락에 위치한 할슈타트 마을에는 교회, 카페, 레스토랑과 민박집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어느 곳을 가도 그림 같은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호수와 어울려 아름답기도 하지만 옛 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어서인지 많은 분들이 감탄하며 좋아들 하신다. 너무나 낭만적인 곳이어서 인지 여행이 거의 끝날 즈음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고 말씀하시는 여성분들이 있었다.

 

 

슬로베니아(2백만 명 GDP 84위 3만 1천 달러)

정식 명칭은 슬로베니아공화국(Republic of Slovenia)으로,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다. 면적은 2만 273㎢, 인구는 200여만 명, 수도는 류블랴나(Ljubljana)이다. 주민은 슬로베니아인 83.1%, 크로아티아인 1.8%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는 슬로베니아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가톨릭교가 57.8%, 이슬람교 2.4%, 정교 2.3% 정도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며, 경제적으로 구 유고 내에서 최대의 선진공화국으로서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424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870달러이다.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며, 1945년 11월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슬로베니아에서도 1990년 4월 자유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고, 그해 12월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88.5%가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처음 찾는 나라이다.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알프스를 끼고 있는 나라이며 유고연방에서 갈라진 일곱 나라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데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만 큼 일찍 산업발전이 컸던 이유라고 한다.

■블레드

블레드 성

절벽위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와 같은 성으로 슬로베니아의 가장 오래된 성, 블레드 성은 블레드 호수를 둘러싼 절벽에 자리한 성이다.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블레드 호수와 블레드 섬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산성을 직접 찾아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산속에 있는 성인줄 알았더니만 블레드가 꽤나 큰 도시이다. 블레드시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아주 견고하고도 아름답고 오밀조밀하게 잘 지어져 있고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운 성이다. 너무도 아름다운곳이어서인지 마리아 테레지아도 자주 찾았고 티토대통령은 베오그라드(현재는 세르비아의 수도)에서 비동맹회의를 열었는데 김일성이 참석하여 며칠 연기하면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블레드 호수

쥴리앙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고요하고 아름다운 분지 지형 위에 빙하가 녹아서 생긴 빙하 호수인 블레드 호수는 폭 1.3km, 길이 2.1km의 크기에 수심은 약 30m, 둘레는 약 6km에 달한다. '알프스의 눈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다. 나무로 만든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Pletna)로 블레드 섬까지 갈 수 있으며 온천수가 흐르는 북쪽 호수에서는 봄부터 가을 무렵까지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의 종'이 있는 성당, 마리아 승천 성당은 블레드 섬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다. 6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이 지바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나, 8세기에 이르러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성당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곳에는 블레드 전통 나룻배(플레타나) 선착장부터 이어지는 99개의 돌계단이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이 계단을 지나 성당에 있는 종을 울리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덕분에 이곳에는 연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으며 결혼식 장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만일 5월의 녹음과 꽃이 어우러지거나 10월 단풍이 든 시기에 찾았더라면 관광홍보 책자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정말 무지무지하게 황홀한 아름다움을 보았을 것이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은 탓에 그런 감동을 맛보지는 못했다. 아쉽다. 섬으로 가는 나룻배에 이 나라 30대의 젊은이들이 함께 탔는데 그 중 한명이 이 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며 자랑한다. 돌아오는 나룻배 주인은 자신이 E․B․S에 출연하였다고 자랑하는데 일행 중에 기억하는 분들이 여럿이다. 주인은 자신의 아들도 대를 이어 나룻배를 운행하기로 한 것도 자랑하였다. 우리나라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니 기분이 좋다. 수도인 류블라냐를 들리지 않고 그냥 거치면서 남으로 향한다. 크로아티아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오스트리아의 알버트 호수에 있는 베예르그 암 아테제 호텔에서 먹고 점심은 슬로베니아의 블레드에서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크로아티아의 카를로바크에서 먹었다. 하루 동안에 세 나라에서 식사를 한 것이다.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인데 아마도 다시는 이런 경험이 있을 것 같지 않다.

 

 

 

5일차 17일(금)

크로아티아(450만 명 GDP 79위 1만 2천 달러)

물론 처음 찾는 나라이지만 슬로베니아가 매우 생소한데 비하여 크로아티아는 전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사람들은 크로아티아를 모르면 이미 문화인이 아니다. 불과 3년 전에 방영한 《꽃보다 누나》로 인하여 한국의 여성들은 크로아티아를 동경하게 되고 너도나도 이곳을 찾았다. 내가 찾아온 이 나라가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이 아니어서인지 국경통과가 까다롭다. 양국 경찰이 버스로 들어와 여권을 심사한다. 카를로바크 인터체인지 입구에 있는 호텔인 유로파 카를로바츠 호텔에 들었다. 1991~1999년까지의 유고슬라비아내전의 결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유고) 등 총 6개 국가가 되었고 2008년에는 세르비아에 속한 코소보도 독립을 선언한 상태이다. 면적은 5만 6594㎢, 인구는 450만 명, 수도는 자그레브(Zagreb)이다.

정식 명칭은 크로아티아공화국(Republic of Croatia)으로, 아드리아해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5835㎞이다. 주민은 크로아티아인 75%, 세르비아인 12% 등이다.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가 공용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나 동북부는 대륙성 기후이며, 주요 산업은 금속·조선·직물·식품·관광 분야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7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1696 달러이다. 유럽의 국가로는 경제가 어려운 편에 속한다.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나, 1990년 4월 자유총선을 통하여 비공산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1991년 5월 유고연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주민의 91%가 연방탈퇴 및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6월 25일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1년 공화국 내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 정부군간의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연방군이 내전에 개입하여 내전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연방군이 같은 해 9월 크로아티아 영내로 진격하여 대통령궁을 공습하는 등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1992년 들어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되면서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992년 독립 하였다.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남서쪽에 있는 도시로 숙박만 한다. 코라나 강과 쿠파 강의 합류지에 있다. 동방 정교회 및 로마 가톨릭교 대성당들과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도서관이 있으며, 철도와 도로의 주요연계지로 목재·곡물·포도주·꿀 등의 무역이 매우 활발하다. 모직물·가죽·장화류·화학제품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투르크의 진입을 막기 위해 1579년에 세워진 카를로바츠 요새는 국경수비대의 초대 사령관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 17세기에 투르크는 이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라스토케

카를로바츠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동화마을이다.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예쁜 마을이다. ‘요정이 사는 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폴리트비체의 작은 호수’라 불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사의 머릿결’이라고도 부르는 작은 마을이다. 코라나 강의 물줄기가 마을로 흘러들어 작은 폭포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도 돌리고 농사도 짓는다. 라스토케란 말이 현지어로 물레방아란 뜻이라니 이름도 어울린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 안에 있는 집도 폭포도 호수도 모두 조그맣다. 그래서 요정이 사는 작은 마을이란 별명이 붙은 곳이다. 마을안쪽은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작은 마을위에서 폭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마을을 가르며 흘러내리더니 또 마을 아래 큰 강줄기로 합쳐진다. 물길들을 잘 이용하여 마을이 조성되었기에 아주 환상적인데 가이드는 이 마을관광은 주로 ○○○여행사가 개척하여 찾는 답사지라고 자랑한다.

■플리트비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벨리키슬랍 등을 비롯한 수많은 호수와 폭포로 구성된 환상적인 관광지이다.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있는 요정의 숲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6개의 호수와 90여 개의 폭포들로 이루어진 광활한 규모의 공원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의 호수와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이 넋을 잃게 만든다. 이러한 모습을 인정하여 유네스코는 1979년에 이 공원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국립공원은 여행객들이 편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걷기 쉬운 산책로로 잘 이루어져있으며, 추천 산책 코스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국립공원 내를 돌아다니는 파노라마 기차와 보트를 타고 더욱 여유롭게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국립공원으로 무려 16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들어가 산행을 1시간가량 한다. 폭포들은 장관이다. 폭포들의 웅장한 위용이 대단하였는데 제철에 와서 아름다운 숲까지 어우러진 모습을 보았으면 오죽이나 더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아직 나이아가라 폭포나 이구아수 폭포를 직접 보지 못한 탓이겠지만 가장 대단한 폭포를 처음 보았다. 점심은 양송이버섯수프를 곁들인 송어구이다. 우리에게는 여름철 활어를 대신하는 횟감인 송어를 구워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스플리트

플리트비체까지는 알프스의 자락이 이어진 탓인지 아름다운 모습이더니만 차츰 아래로 내려가며 스플리트로 가는 크로아티아는 결코, 전혀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고속도로 주변은 높은 산이건 낮은 지대이건 온통 석회암으로 뒤 덮여 식물이 크게 자라지 못하므로 잡목으로 덮여 있다. 강교장이 매우 실망하며 안타까워한다. 가도 가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거의 보이지 않고 어쩌다가 마을이라도 보일라 치면 단 몇 가구정도이며 그저 가축이나 방목할 수 있을 지언정 밭농사를 지으며 살 농지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크로아티아 여행 내내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 크로아티아는 TV에서 보이는 아름답기만 한 나라는 결단코 아니다. 2차나 3차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호텔에서 밤에 TV를 보면 대중문화가 매우 발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중가요가 아주 매력적이고 가수나 다른 연예인들이 잘생기고 미인들이 대부분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과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건가?

스플리트는 아드리아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터키의 이즈미르로 배를 타고 간 일이 있고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배를 타고 가기도했다. 또 인천과 군산에서 산뚱반도로 배를 타고 가기도 했다.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의 바다로 우리로 치면 대한해협정도의 거리이다. 고대부터 이탈리아와 발칸반도는 이미 그리 먼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필릿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로마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5-316)가 퇴임하고 살았던 고향이었고 그가 지어 살았던 궁전이 있는 곳이기에 큰 의미가 있는 도시다. 이곳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자국민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가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다는 것이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자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로마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위엄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활기를 띠는 곳이 디오클레시안 궁전이다.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되는 디오클레시안 궁전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 후 지낼 곳으로 세웠던 궁전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궁전은 몇 백 년간 방치됐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도시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사면의 문에는 각각 별명이 있는데, 나로도니 광장으로 연결되는 서문은 '철의 문', 남문은 '청동의 문', 동문은 '은의 문', 북문은 '황금의 문'이다. 여느 궁전들과 다르게 주거지, 상점,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어 스플리트 시민들의 생활상과 밀착되어 사랑받는 곳이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 284~305)는 달마티아의 디오클레아에서 출생했다. 비천한 데서부터 승진하여,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친위 대장이 되고, 황제가 암살된 후,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암살 책임자를 처형하고, 곧 구동료 막시미아누스를 부제로 기용하여, 갈리아의 바가우데인의 반란을 진정케 한 후, 286년 경 정제에 승진케 했다. 제국을 동서로 구분하여 다스리고, 286년 자기는 동방의 정제로 취임, 갈레우스를 부제로 한 후, 또 서방에는 정제 막시미아누스,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두어 통치케 했는데, 이로써 제국의 4분치제도가 성립되었다.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고, 군사 경제상 중요한 동방을 직할하면서, 전 제국을 통치했다. 301년 재정상 광범한 개혁을 단행, 징세의 신제도를 토지의 단위와 인두의 단위에 기초하여 15년마다 조정하도록 한 후, 화폐의 혼란과 물가 앙등에 대처하여 최고 가격령을 발했는데, 후자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또 동양풍의 의례를 채용하여 군주의 존엄을 높이고, 전제 군주 정치의 실현을 계획, 황제 예배를 성행케 함과 동시에 갈레리우스의 권면을 수납하여서, 303년 기독교의 최후적인 박해를 했다. 그 해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치정 20년 기념제를 개최하고,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준 후, 달마티아의 살로네(Salonae)에서 여생을 보냈다.

황제가 퇴위한 후 10여 년 동안 살던 궁전이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임에도 궁전 안은 대부분 이미 시민들의 사적 재산으로 변해 있어 특이한 곳이다. 상점으로 쓰이고 있고 또는 연립주택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일반민들의 삶의 터가 되어 버린 듯하며 이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는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이다. 크로아티아가 사랑하는 동상, 10세기 경 크로아티아 닌의 주교이자 어학사전까지 편찬한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까지도 크로아티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라틴어로만 미사를 진행했던 당시, 교황에게 크로아티아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높이 4.5미터의 이 청동상은 크로아티아의 세계적인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만들었다. 왼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리바 거리

마리안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도로로 야자수와 노천카페가 즐비한 거리다. 스플리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의 거리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남문을 나와 해변산책로를 거닐어 보면 이 리바 거리 왼편에는 바다, 오른편에는 분위기 있는 노천카페와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아 저렴하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들이 많다. 하얗게 뻗은 길을 따라 서 있는 야자수도 시원해 보인다. 밤에는 야시장도 열리는데, 여기서 크로아티아 전통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강교장님 내외분과 한가롭게 엄청 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으면서 해변가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아이스크림을 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강교장은 값이 20유로(2,500원)라 무지 싸다며 좋아하신다. 크로아티아는 〈쿠나〉를 사용하지만 유로가 당연히 통한다. 이번 여행하는 국가들 중에는 유럽연합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는 유로 사용 국가인데 반하여 크로아티아는 〈쿠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마르카〉, 헝가리는 〈포린트〉, 첵코는 〈코루나〉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어떤 나라에서도 유로는 통용되며 호텔객실서비스료는 여전히 1달러가 통한다. 1달러든, 1유로든 놓으면 되지만 1달러 지폐는 우아한데 반해 1유로 하얀 동전은 볼품이 없어 여전히 1달러가 매력 있는 팁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4백만 명 GDP115위 7천 달러)

보스니아는 우리의 여행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코스에 보스니아의 네움에서 하루를 숙박한다는 것을 매우 유쾌한 일이라 여겨져 이 상품의 매력포인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아래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크로아티아가 중간이 끊어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지하고 있어 부득이 이 나라를 지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보스니아의 네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지역이 20여 년 전만 해도 유고슬라비아라는 하나의 나라에 속하였었다. 수도인 사라예보는 제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된 곳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 보스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오랜 기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고양되었다. 특히 슬라브인들에게는 오스만제국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남슬라브 단일국가를 건설하자는 범슬라브주의가 확산되었고, 19세기 초반 두 차례에 걸친 봉기로 오스만제국에게서 자치권을 획득했던 세르비아가 그 중심에 있었다.

러시아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러한 범슬라브주의를 지원했다. 1877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제국은 산스테파노조약으로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유럽의 영토를 잃었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루마니아가 독립했고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자치권을 얻었다.

그러나 열강들의 개입으로 발칸반도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국의 서부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로의 동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지중해 지역과 중앙아시아 등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마침내 유럽의 열강들은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했다. 그 결과 불가리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다시 오스만제국으로 반환되었으며,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동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려고 했으며, 1908년에는 보스니아를 완전히 병합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책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으며, 이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나 ‘검은 손(Crna ruka)’ 등 범슬라브주의에 기초한 비밀결사가 1910년 이후에 잇달아 구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사건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그의 부인인 조피(Sophie Chotek)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서쪽·남쪽 등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에 있는 네움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이 회랑이 크로아티아 달마치야 해안 가운데 두브로브니크 북서쪽 약 21km 가량의 지역을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갈라놓았다. 면적 51,209㎢이며 인구는 400만 명이다.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경쟁해왔던 강력한 지역세력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영향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유달리 풍부한 인종적·문화적 혼합 지역으로 만들었다.

1918년 새롭게 건국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분리 이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더욱 확대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움

네움(Neum)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해안 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때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 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으로 말미암아 크로아티아 본토와 끊어져 있는 월경지이다. 크로아티아와의 월경 심사는 비교적 간단하다.

네움에는 총 5천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네움지역을 통하지 않고, 크로아티아 본토와 두브르브니크를 잇는 펠리에샤츠 다리(총길이 2,374m)의 건설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로부터 승인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숙박한 아드리아 네움호텔은 도시의 언덕에 있는데 두브로브니크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정말 기이하다. 지하로 4층까지 내려간다. 오르고 내리는데 많이 헷갈린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서 해안을 보니 별이 아주 잘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밝은 별들이다. 별들을 감상하니 어린 시절 여름밤이면 항상 보았던 그 찬란한 밤하늘이 또렷이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니 푸른 바다와 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기분이 상쾌하다. 좀 더 일찍 일어나 네움 시내를 산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6일차 18일(토)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다.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되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경쟁한 아드리아 해안 유일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다.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1205~1358)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고 지협의 각 측에 2개의 항구가 세워졌다. 15∼16세기에 무역의 전성기를 맞았고 엄격한 사회 계급 체계를 유지하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제를 폐지(1416)하는 등 높은 의식을 가진 도시였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와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시가지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도 다시 개최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달마티아 문학의 중심지로 크로아티아 문학의 일부를 이룬다. 식품·포도주·올리브유 등의 생산이 성하다.

《꽃보다 누나》에서는 스플리트와 이곳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여정이 방영되었고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지게 되었다는데 나는 방송을 제대로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잘 몰랐던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SUV 차량으로 가파른 도시 뒷산인 벤 시르즈 산을 오른다. 1991년 세르비아의 폭격으로 부서진 나폴레옹 성곽은 부서진 모습으로 기념물로 남겨져 있다. 산 정상에서 도시 전체가 조망되는데 무척이나 아름답다. 아마도 하얀 벽과 빨간 지붕들이 주는 것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멀리 보이는 보스니아의 산들은 역시 석회암 바위덩어리 산들이어서 황량하기 그지없다. 다시 내려와 렉터 궁전을 비롯한 구 시가지를 돌아보고 유료로 해안성벽투어를 하는데 바닷가에 세워진 높은 성벽을 한 바퀴 돌면서 가정집들의 뒤뜰도 보고 중고등학교도 보다. 유명관광지임에도 가정의 뒤뜰 정원은 전혀 가꾸어지지 못하고 있다. 점심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해물 스파게티인데 먹어보니 그게 아니다. 꽤나 많이 좋다. 해안을 배로 30여분 돌아보는데 나체족들이 모인다는 섬이 항구 바로 앞에 있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수욕장이 아니라 바위들이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데 아하! 인터넷에 떠도는 나체촌 사진들이 바로 이곳에서 나오는듯 싶다는 감이 온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배를 타고 여름이면 나체로 섬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들은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한다니 배에서 찍은 나체족들의 수많은 사진들이 인터넷을 막 떠다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

○프란체스코 수도원

유럽에서 세 번 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는 수도원이다. 1317년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지어질 때부터 운영해온 말라 브라체약국으로 더 유명하다. 이 약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라고 하며 아직도 약을 팔고 있는데 장미크림, 라벤더 크림 등을 판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수호성인인 블라세이 유물이 있는 대성당이다. 구시가지에 위치한다. 원래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667년 대지진에 의해 파괴되자 1672년부터 1713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인 안드레아 불파리니와 파올로 안드레오티가 로마-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가운데 돔 모양의 지붕이 높이 솟아올라 있어 아름답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St. Blaise)의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성당 외부는 고급스러운 회색으로 되어 있고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내부는 밝고 바람이 잘 통하게 디자인했으며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장식으로 치장했고 벽화로 마감하였다. 주 제단은 금색의 플립티크 디자인으로 되어 있으며 티탄(Titan)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졌고 옆 보조제단은 보라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플라차 거리

커피 CF[맥심]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대리석으로 깔려진 거리이다.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구시가지의 중심가이다. 필레문에서 루자광장까지 이어진 300m의 거리로 석회석과 대리석으로 다져진 대로가 동서로 뻗어있는데 7세기경 수송로 역할을 한 길이라고 한다. 그 후로 도시가 번성하여 운하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 운하를 매립하여 대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거리 양쪽에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중세시대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거리이다.

○렉터 궁전

15세기 중반에 지어졌으며, 궁전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소박한 외관이 특징인 렉터 궁전은

두브로브니크의 수로와 분수를 건설한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건축한 곳이다. 필레 게이트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아이콘 분수대가 바로 이 건축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 고딕-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입구에 6개 기둥이 있고, 벽면으로는 돌로 단을 쌓아 벤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성직자(rector)가 선출되어 의회가 허락하기 전까지 한 달동안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안뜰에서는 클래식 공연이 열리고 있다.

○스폰자 궁과 시계탑

우아한 아케이드와 긴 고딕 양식의 창문이 인상적인 건축물인 스폰자궁과 시계탑이다. 구시가지의 스트라둔(Stradun) 거리 끝에 있다.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Ragusa Republic)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당시 드브로브니크에 지배적이었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čević)가 건설을 맡았다.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아한 아케이드, 기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 등이 특징이다. 중앙홀은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 국립조폐국이 들어섰으며 그밖에도 은행·귀중품창고·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장식은 안드리지치(Andrijić) 형제가 담당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며 1667년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말에 라구사공화국 중앙문화센터로 바뀌었다. 현재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며 중앙홀은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7일차 19일(일)

■자다르

두브로브니크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어제 오후 내내 5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자다르는 큰 도시임에도 우리는 숙박만 한다. 한나절을 버스만 탄 셈이다. 콜로바레 호텔인데 별 4개짜리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문헌에 나오는 오래된 도시로, 중세에는 슬라브의 상업·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달마티아의 주도였다. 사적이 많고, 고고학 박물관도 있다. 1920∼1940년은 이탈리아 영토였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어업·마라스키노술 양조업 외에 담배·주트·유류 등의 산업이 성하다.

자다르에는 특별한 오르간이 있다. 자다르의 아름다운 아드리아해 앞에 있는 대리석 계단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계단 아래 35개의 파이프가 숨겨져 있다. 이 파이프는 파도의 세기와 높이 그리고 바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크로아티아의 건축가인 니콜라 바시츠가 2005년 건축했고, 다음해인 2006년 유러피안 도시 공공장소 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자다르의 석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크로아티아는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그 후 이곳에 로마 양식의 광장이 건축되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된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매력적으로 빛나는 곳이다. 지금은 로마의 유적과 함께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자다르의 한가로운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자다르도 한때는 관광객들이 찾던 곳이라는데 우리는 저녁에 들어가 잠만 자고는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는 곧 자그레브로 출발하니 못내 서운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호텔 밖으로 나가니 일행들 중 여러분들이 이미 바닷가를 다녀오시며 바닷가 위치를 알려주시는데 아니 우리가 묵은 코롤바레 호텔이 바로 바닷가 호텔이 아닌가? 강교장님 부부와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잘 읽었는지 일정상 어쩔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해명해준다.

 

 

■자그레브

자그레브까지 3시간이나 달리는 중에도 여전히 척박한 야산들이 계속된다. 나의 잘못된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안쓰러운 나라이다. 아마도 이 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되기는 매우 힘들 것 같은 생각이 지배한다. 자그레브 시내는 사바강(다뉴브 지류)이 흐르고 있다.

탁 트인 광장과 공원이 많다. 크로아티아의 문화 중심지이며, 과학·예술 아카데미와 자그레브대학교(1669)가 있다. 여러 미술관에는 옛날과 근대 작품들이 모두 소장되어 있으며, 다양한 미술·극장·음악 아카데미들과 박물관들이 있다.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릉 위의 구시가지는 2개의 중세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치는 민간 마을로 13세기에 투르크인들을 막기 위해 성벽으로 마을을 둘러싸면서 그라데츠(요새)로 개칭되었으며, 카프톨은 성직자 마을로 16세기에 요새화되었다.

이 두 마을은 서로 경쟁했으나 19세기에 새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이 두 마을이 이어지고, 남쪽으로 광장과 공공건물들로 된 직선형의 신도시가 생기는 등 시가지가 사바 범람원까지 확장되면서 경쟁관계가 끝났다. 1860~1914년 급속히 성장했다. 20세기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1945년 이후 사바 강 우안(남쪽)에 새 주거지역이 건설되었다. 메드베드니차 산 북쪽으로 삼림지대, 포도원, 아름다운 마을, 고대 성들이 있는 자고례 지방이 있다.

근대 자그레브는 1093년 로마 가톨릭 주교관구가 되면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1241~42년의 몽골 침략 후 그라데츠는 왕의 보호를 받는 자유도시가 되고 요새화되었는데 당시 탑들 가운데 여러 개가 현존한다. 투르크인들에게 항거하고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일화 시도에 저항했던 크로아티아의 역사에 있어 자그레브는 정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크로아티아의 국가 재건 당시 범유고슬라비아 운동 및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18년 10월 이곳에서 열린 크로아티아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모든 유대를 단절하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치아를 하나의 독립 국가로 선포했다. 11월에 신생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세르비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와 연방국가를 형성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크로아티아의 국민적 자치를 열망하는 세력과 세르비아의 중앙 집권화를 원하는 세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었고,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도시지구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4월 추축국 지배하에서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괴뢰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1945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장군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에 의해 추축국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크로아티아 국가는 독일이 항복한 후 곧 붕괴되었다.

○자그레브 대성당 및 성모마리아상

네오 고딕양식의 쌍둥이 첨탑이 특징이다. 자그레브의 대표 성당쌍둥이 종탑의 모습이 인상적인 자그레브에서 제일 큰 성당이다. 캅톨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자그레브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 1094년에 짓기 시작하여 1217년에 완공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의 피해로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당의 뒤편에는 옐라치치를 비롯한 중요인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특히, 성당은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단과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이다.

○성 마르크 교회

독특한 모자이크 문양이 인상적인 교회이다. 지붕의 모자이크가 독특한 교회. 반 옐라치치 광장 근처에 위치해 있는 작은 교회로, 이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 교회의 지붕에는 모자이크로 두 가지 문장이 새겨져있는데, 하나는 크로아티아 왕국, 슬로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의 문장을 혼합한 것으로 이 세 왕국은 크로아티아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그레브 시의 문장이다. 교회에서는 로마네크스 양식과 고딕 양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교회 내부 입장은 불가하다.

옐라치치 광장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하며, 크로아티아의 영웅 반 옐라치치 동상이 있는 옐라치치 광장은

자그레브의 중심이다. 자그레브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구시가지의 중심지이다. 옐라치치 광장은 '옐라치치'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인데, 그는 크로아티아 최초로 선거를 시행한 인물이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광장의 양옆으로는 일리차 거리가 뻗어져있는데, 이 거리가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각종 상점들이 모여 있어 쇼핑을 즐기기에 좋으며,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다. 자그레브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지나치게 되는 중심지이다.

그래도 크로아티아의 수도인데 겨우 두어 시간의 관광은 너무하다. 그런데 자그레브를 돌아보니 과연 경제가 매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의 벽이 돌이 아닌 시멘트로 발라져 있는데 많은 건물들에서 그 시멘트들이 떨어져 나가있으나 보수하지 못한 채로 사용되는 것 같다. 야채시장에서 구경하며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다 출발했다. 핸드폰을 깜박하고 차에 놓고 내려 사진을 찍지 못해 이영규 선생님이 찍은 것을 카톡으로 받았다.

 

 

국경검문소에서 여권심사를 하기 위해 1시간 동안이나 대기한 탓에 5시간 30분을 걸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헝가리로 들어서니 크로아티아보다는 훨씬 평탄하고 비옥한 토지들이 계속 나타나고 그리 부유하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농촌마을 풍경들이 아름답다. 부슬 부슬 비가 내리는데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부지런히 따라가다가 돌출한 쇠막대에 정강이를 부딪쳤다. 약간 부었는데 다행히 저녁에 강교장이 준비한 파스가 있어 붙였다. 준비한 파스가 쓰임새가 생겼다면서 강교장이 흐뭇해한다. 파스 덕에 다행이도 하루 만에 붓기는 가라앉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헝가리는 과학기술이 오래전부터 발달된 나라이며 노벨상 수상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수소폭탄, 냉장고, 성냥, 변속기 등이 모두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저녁에 배를 타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감상한다. 어찌보면 파리의 야경보다도 더 굉장하다. 세느강보다 훨씬 넓은 다뉴브 강변 양안에 국회의사당, 왕국, 공과대학 등 엄청난 건물들이 즐비한데 훌륭한 야경을 위해 건물들마다 휘황찬란하게 조명시설이 되어 있다. 엑스포 콘그레스 부다페스트호텔은 시내에 있는데 수학여행 온 남녀 중고생들이 가득하여 시끌벅적하다. 빌딩모양의 상당히 큰 건물로 된 호텔이고 방의 시설은 최고다. 사진을 찍어 보내니 양드리와 이쁜 딸이 매우 놀란다.

 

 

 

8일차 20일(월)

헝가리(1천만 GDP 56위 2만 5천 달러)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으로, 1989년 10월 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만 3028㎢, 인구는 989만 7541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중학교 때 마자르족은 아시안계라고 지리시간에 배운 것을 대부분 기억한다. 국토 80%가 평지여서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로 보인다.

기후는 다습한 대륙성기후로서 봄·가을이 짧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경제는 농업 위주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광업·알루미늄공업·자동차·전자기기 등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요 자원은 석탄·천연가스·보오크사이트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450 달러이다.

우리나라와 1인당 국민소득이 거의 비슷하다.

마쟈르족은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1001년 최초로 독립왕국을 창건한 뒤 13세기부터 몽고·터키·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 화해협정이 성립,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18년 11월 함부르크 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공산지도자 쿤의 주도하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4개월 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복귀 후 헝가리는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4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종전과 함께 소련 주둔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이 1949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스탈린식 강압정책을 채택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스탈린(Stalin, I. V.)이 죽은 뒤 온건한 나지(Nagy, I.) 수상이 등장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56년 대규모의 반소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였으며, 그 결과 나지는 축출되고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르의 신경제제도는 경제정책의 지방분권화, 시장원리에 의한 가격체제, 노동자의 동기 부여, 서구와의 무역확대를 도모함으로써 동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한 자유화정책과 민생중시정책이라 평가되었고, 실제로 경제체제의 진정한 전환을 가져온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소련의 공산당을 그대로 답습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으로 개칭)은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제해 왔으나 1989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다당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가원수를 기존의 대통령위원회라는 집단기구 대신 대통령 개인으로 바꾸고 의회에서 간선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인접한 루마니아와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문제를 놓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 또한 헝가리는 1990년 이래 경제정책의 핵심과제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산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정착과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정책기조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Buda)와 북쪽의 오부다(Obuda), 동쪽의 페스트(Pest)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지역은 1873년 통합된 이후 지금까지 함께 공존하며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 · 산업 · 상업 · 교통 · 문화의 중심지이며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고풍스런 건축물과 문화 유적이 즐비하고, 도나우 강과 온천수가 있어 물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동유럽의 파리’, ‘도나우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헝가리의 아름다운 수도 부다페스트는 중심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의 부다, 동쪽의 페스트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경치가 다르며 색다른 동유럽을 느낄 수 있다. 부다페스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나우강(다뉴브강)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나 흑해로 흐른다. 다뉴브강을 지나는 여러 나라 중에서도 부다페스트는 도나우의 진주라고 불린다. 도나우강에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면 왜 도나우의 진주가 부다페스트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세치니 다리와 다른 건물들보다 높게 솟아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의 야경은 물론이고, 부다왕궁, 국회의사당, 호텔 등 곳곳의 웅장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야경을 자아낸다.

수도인구는 186만 명, 수도권은 약 200만 명이다. 신시가지인 페스트 지역에 있는 영웅광장과 성 이스트반 성당의 위용은 대단하다. 도시가 아름답고 깨끗한데 번화가인 샹데리제 거리에 우리 한국의 대사관이 있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다.

○영웅 광장

헝가리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만든 헝가리의 역사를 새기고 있는 곳, 영웅광장 부다페스트의 안드라시거리 끝에는 영웅광장이 있다. 가운데 높고 흰 기념탑이 있으며, 주변에는 헝가리의 역대 왕들과 영웅, 그리고 헝가리를 만든 마자르의 7대 부족장들의 동상이 있다. 부다페스트 곳곳에 헝가리의 역사가 녹아있는데, 특히 영웅광장은 헝가리의 역사를 되새기는 장소이다. 끝나지 않던 긴 식민시기 동안에도 마자르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헝가리인들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어부의 요새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7개의 뾰족한 탑이 인상적인 요새이다. 어부의 요새는 부다 성 구역에 위치해 있는 부다페스트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중세시대 어부의 마을이었던 곳 위에 지어진 어부의 요새는 1895년에서 1902년까지 건축가 Frigyes Schulek에 의해서 지어졌고, 2차 세계대전때 심각하게 파괴되어 Frigyes Schule의 아들인 Janos Schulek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어부의 요새에 오르면 탁트인 부다페스트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어부의 요새에는 7가지 포탑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헝가리를 만든 7가지 부족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부의 요새의 상부와 하부 모두 항상 열려있으며, 티아스교회에서 어부의 요새를 바라볼 수 있다.

○겔레르트 언덕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헝가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겔레르트 언덕. 겔게르트 언덕은 도나우강 동쪽변에 위치하고 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자유의 여신상'인 소녀의 동상과 성채를 볼 수 있다. 이 성채는 함스부르크의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망루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이 정복하였었다. 이 후, 소련군이 다시 정복하고 나서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며 세운 것이 자유의 여신상이다. 동굴 교회까지 겔게르트 언덕은 헝가리의 다사다난했던 과거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언덕이다.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로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명소이다.

주변의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건물들과 전혀 다른 힐튼 호텔이 언덕위에 있다.

마챠시 사원

흰 레이스를 두른 듯 아름다운 헝가리의 화려함과 역사가 담긴 마차슈 성당은 13세기 중반 지어진 화려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마차슈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때, 오스만 제국이 마차슈 성당을 자신들의 모스크 장소로 사용하는 비극의 시기를 거친다. 후에 오스만제국에서 해방되고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후에 건축가 Frigyes Schule에 의해서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된다. 하지만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어 복구한 비운의 성당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헝가리만 가지는 독특하지만 화려한 건물이 어부의 요새와 붙어있어 더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높이 위치해 하늘에 가깝고, 전망도 좋다.

부다 왕궁

부다 언덕에 웅장하게 솟아있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부다왕궁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왕궁이다. 몽고 침입으로 벨라4세가 부다페스트에 피신을 온 이후 부다 언덕에 지은 왕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소멸되었다가 오스트리아 지배 시절 다시 신축되었고, 대화재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번번이 파괴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세계 2차대전 이후 다시 지은 모습이다. 현재는 왕궁의 건물은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뜰에서는 종종 열리는 행사를 구경할 수 있다. 매우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망이 좋아 특히 밤에 세치니다리와 성이스트반 성당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이슈트반 성당

다뉴브강 동쪽, 페스트 지역의 대표 명소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는 아름다운인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자 카톨릭 성인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한 성당으로, 화려한 돔과 장식이 특징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네오 르네상스 양식 특유의 화려함으로 성 이슈트반 대성당만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내부는 헝가리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꾸며져 있는데, 특히 돔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또한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봉헌된 예배당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슬로바키아(550만 명 GDP 63위 1만 8천 달러)

중부 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패망과 소련의 해방에 따른 공산당 지배 하에서 체코와 함께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 1990년 3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한 후, 1993년 1월 1일 체코와의 분리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슬로바키아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독립국가로 평화롭게 공식출범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식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다. 북쪽으로 폴란드, 서쪽으로 체코·오스트리아, 남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접한다. 1993년 1월 19일 체코와 함께 UN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2004년 5월 염원해오던 NATO와 EU 가입에 성공하였다. 슬로바키아에 사는 50만 명(전체 인구의 10%)의 헝가리인에 대한 차별 문제로 헝가리와 갈등을 빚고 있다. 행정구역은 8개주(kraj)로 되어 있다.

■브라티슬라바

인구 40만 명의 슬로바키아의 수도이다. 국토의 가장 왼편에 치우쳐 있다. 슬로바키아 남부 도나우강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도나우 강변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를 이루었는데 현재도 동유럽의 중요한 철도의 분기점으로 역할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켈트 족이 이주해와 살았다. 로마에 정복되었을 때는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으로 군사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6세기 부터는 슬라브인이 이주해와 거주하였다. 슬라브인은 일대 모라비아와 니트라 왕국을 세웠다. 9세기에는 브라티슬라바 언덕위에 성채가 건설되었고 외곽 데빈에도 성채를 쌓았다. 이후 헝가리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으며 이후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침입했던 1541∼1784년에는 헝가리의 수도였으며, 18세기 말부터 정치·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1918년 체코와 합병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되면서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1992년 체코와 분리하여 다시 슬로바키아의 수도로 회복하였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부침이 심하였는데 9세기경에 처음 세워진 브라티슬라바 고성이 있다. 이후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가 1957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며 의회와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고성 아래에는 구시가지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막시밀리안 분수대, 구시청사와 미하엘 탑문 등이 볼거리로 남아있다. 또한 도나우 강에 설치된 현수교인 에스엔페 대교에는 접시모양의 전망대가 있고 야간에는 특별한 조명으로 연출한다.

겨우 이 도시에 1시간 30분 머무른 것 같아 서운하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밖에서 바라보았을 뿐이고 도심 시가지를 휘익 한 바퀴 돌고 난 느낌이다. 슬로바키아에서 비엔나로 가는 길은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풍력발전기가 장관이다. 처음 보는 모습이며 대단하다. 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화력발전이나 원전을 중단하고 자연을 이용하는 에너지 생산은 풍력이나 태양력이 가장 효과적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도 더욱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브라티블라바 성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이는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 남쪽언덕(해발 150m)에 있다. 이 성은 대모라비아왕국 시대에는 중요한 정치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대모라비아왕국 소멸 이후 헝가리 정부의 국경요새로 역할을 했다. 1811년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 재건되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브라티슬라바 거처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었다. 현재에도 일부분은 슬로바키아 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성마틴 대성당 및 마카엘스 탑

14세기 초에 3개의 네이브를 가진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1452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성 소피아(St.Sophia) 고딕양식 예배당, 성 안나 (St.Anna) 예배당과 성 존(St.John)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이 추가되었다. 교회의 규모는 길이 69.37m, 높이 16.02m, 너비22.85m이다.

3개의 네이브와 동시에 건축된 성당의 타워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타워의 높이는 85m로 타워의 상층부는 2㎡의 금으로 도금된 받침대가 있고, 300kg의 무게가 나가는 1m 높이의 헝가리 황실 왕관 복사본이 놓여졌다. 이 곳에서 1563-1830년 사이에 11명의 헝가리 왕이 즉위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Missa Solemnis)가 처음으로 연주된 곳이기도 하다.

○구 시가지 관광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 여행은 미카엘스 탑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14세기에 세워진 미카엘스 탑은 오랫동안 브라티슬라바의 관문이었다. 성 마틴 대성당, 성 프란시스코 교회, 시청사 등 대부분의 볼거리들이 인근에 몰려 있다. 성 마틴 대성당은 슬로바키아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고 있으며 성 프란시스코 교회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 골목은 중세의 ‘고도’임을 항변하듯 규칙 없는 미로 같은 길이다. 흐비쯔도슬라보브 광장(Hviezdoslav Square) 등 구도시의 거리들은 빛바랜 건물과 그 건물에 기대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옛 시청사가 있는 광장 앞 주변은 노천바와 조각품들로 채색된다. 브라티슬라바의 명물인 소를 주제로 한 조각과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노천바에 앉아 맥주를 주문하면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 가득 담겨 나온다. 알싸한 맛이 강한 보헤미안 맥주는 구시가의 향취를 더욱 몽롱하게 만든다. 음악가인 프란츠 리스트 역시 도시에 취해 15차례나 브라티슬라바를 찾았다고 한다.

 

비엔나에 도착하다. 오늘은 가슴 설레이는 궁중음악회에 참석한다. 이번 여행의 선택관광은 모두 5개인데, ①짤즈 캄머굿의 배타기와 케이블카, ②블레드 호수의 보트, ③두브로브니크의 성벽투어 ④스르지산 전망대 오르기 ⑤비엔나 음악회 등인데 오늘 바로 음악회에 가는 날이다. 3년 전 우리 양드리 일행들은 음악회만큼은 모두 참석치 않았다는데 우리는 31명 중 나를 포함하여 8명이 신청하였다. 국내 대중음악가수들의 지방공연 티켓도 10만원이씩이나 하는데 80유로로 비엔나에 와서 이곳 연주가들의 옛 궁중음악연주회와 같은 형식으로 열리는 음악회를 다시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연주홀은 옛 왕궁의 하나라고하며 300-400여명 정도의 청중들이 모였다.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서양인이 섞였다. 우리 일행들의 참석이 너무 적음에 안타까워하며 행복한 연주회를 감상하다. 모차르트와 요한 스트라우스의 곡들을 연주하는데 바이올린 2, 비올라1, 첼로1, 콘트라베스1, 풀룻1, 피아노1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고, 수석연주자인 제1 바이올린 주자의 밝고 장난기 어린 표정과 말없이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아주 인상 깊은데 연주수준으로 보아 아마도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가인 듯싶다. 

 

 

 

9일차 21일(화)

■비엔나(오스트리아)

거쳐간 오스트리아에 다시 들어왔다. 독일어로는 빈, 영어로는 비엔나(Vienna)라고 한다. 중학교 때 쯤에 비인이라고 배우기도 했다. 이웃인 충남 서천군에 비인면이 있고 해수욕장이 있다. 그 이름이 오스트리아의 비인과 같은데다 예뻐서 가보고 싶었으나 어린시절엔 경제 형편상 꿈꾸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 자가용이 생기고 나서야 자주가게 되었는데 해수욕장은 없어지고 부근에는 아름다운 동백정이 있어 가끔 찾아간다. 비인의 음악회 가이드에게 비인면을 소개해주었다.

도나우강 상류 우안에 있는 유럽의 고도로, 지금도 중부 유럽에서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수백 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으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정치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중부 유럽을 동서 방향으로 달리면서 민족·기후·식생 등의 경계를 이루는 알프스·카르파티아 산맥을 관류하고 있는 도나우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B.C500년에 켈트 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가 들어오면서 정치, 문화, 예술, 과학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수도로써의 기능을 독일 베를린에 넘겨주었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베토벤(Beethoven)과 모차르트(Mozart)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과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쇤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 빈 공원(Wiener parks)등이 유명하다.

오늘은 게른트너 거리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양드리와 아버지께서 필요한 「악마의 발톱」이라는 관절염 연고를 샀다. 내 목이 가끔씩 좋지 않은 때가 있어 목 염증에 좋다는 약도 샀다. 이게 여행 선물의 전부다.

○쉔부른 궁전과 정원

웅대한 모습부터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연상케 하는 이 훌륭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주거지였다. '합스부르크 옐로'로 알려진 독특한 색채의 건물은 내부에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며 황금으로 된 장식, 크리스털 샹들리에, 커다란 거울 등을 볼 수 있다. 쇤브룬에는 1,441개라는 엄청난 개수의 방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1717-1780)와 그녀의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는 쇤브룬에서 여름을 보냈으며, 그들이 통치하던 시절 여섯 살 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에 초대받아 여제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쇤브룬에서 1830년 출생했으며 여든여섯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게 된다. 이 궁전은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이며 애칭으로 '시시'라 불리기도 했던 황후와의 인연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쇤브룬을 매우 사랑하여 결혼한 이후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합스부르크 가의 이 궁전은 17세기에는 사냥 별장이었으며, 터키가 빈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자리에 세워졌다. '쇤브룬'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샘물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왕실의 식수를 제공해 주던 천연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쇤브룬 궁전은 '글로리에테'라는 이름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웅장한 신고전주의풍 아치들, 모조 로마 유적, 화려한 분수, 인상적인 종려나무 온실을 완벽하게 갖춘 눈부시게 화려한 대정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궁전에는 또한 프란츠 황제가 1750년대에 조성한 작은 동물원의 후손인 동물원도 있다.

1918년 카를 1세 황제가 왕위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그는 퇴임 연설을 쇤브룬에서 거행했고, 궁전은 공화국의 소유가 되었다. 쇤브룬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피해를 입어 1950년대에 복구되었다.

궁의 내부는 화려했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황금침대와 키가 147cm였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프랑스 루이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었던 마리 루이즈(1791-1847)의 작은 침대를 볼 수 있었다. 외부 관람에 주어진 30분을 이용하여 궁전의 가장 윗쪽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이 있는 곳까지 부지런히 다녀왔다. 시민들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공원이 되어 있고 유산소운동으로 열심히 걷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게른트너 거리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며, 비엔나에서 가장 화려한 게른트너 거리는 국립 오페라 극장부터 슈테판 성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보행자 전용 도로이며 길이가 600m에 이른다. 1974년 오스트리아 Garinthia(Karnten)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거리로 꼽힌다. 도로 양쪽에는 선물용품점과 액세서리점,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가 늘어서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

비엔나의 상징이며, 모자이크 지붕이 인상적인 성. 역사가 잠들어 있는 성스러운 곳, 성 슈테판 대성당성 슈테판 대성당은 비엔나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1147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졌지만 이후 고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실되어 새롭게 복원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건축물이자 빈의 최고 관광명소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다. 이 성당은 외관 뿐만아니라 내관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 그리고 곳곳에 장식된 조각들은 엄숙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지나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당 남탑 전망대에 오르면 비엔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유럽여행 중 너무나 많은 성당들을 보고 내부에도 들어가 보았기에 그냥 지나치려다가 외관이 화려하여 내부에 들어가 보니 과연 서유럽의 성당만큼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전혀 손색이 없다.

○국회의사당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한 국회의사당. 고대 그리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비엔나 국회의사당 건물은 13년에 걸쳐 1883년에 완공되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본따왔으며, 최대한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입법 중심지이다. 1902년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는 아테네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다. 가이드투어를 통해 국회의사당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며, 비엔나의 주요 관광지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방문해보는 것이 좋다.

○국립오페라 극장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은 극장으로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이다.

○본왕궁

버스로 지나치면서 잠간 볼 수 있었다. 쇤부른 궁전보다 더 크고 방도 많다고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큰 건물만 보이고 공개도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오후에는 체코로 간다. 비엔나를 떠나 2시간을 달리니 오스트리아의 3대도시라는 린쯔를 지나고 3시간이 되니 국경을 지난다. 그 유명한 체스키크롬로프를 찾게 된다.

체코(1천만, GDP 48위 2만 달러)

600년경에는 유목국가였다. 게르만족 사이에 점차 슬라브족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5, 6세기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우세한 주민이 되었다. 서슬라브에 의한 최초의 통일은 사모왕국이 이룩하였으며, 623∼658년까지의 35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중심으로 삼았다.

9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동프랑크 왕국의 압력이 강해지자 대모라비아제국의 대공로스티슬라프는 프랑크 왕국이나 교황의 세력을 피하기 위하여 비잔틴제국에 사자를 보내 슬라브어로 포교할 수 있는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는 모라비아에 키릴(콘스탄틴)과 ‘슬라브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그의 동생 메토디우스를 보냈으며, 이들은 슬라브어를 적을 수 있는 문자를 고안하였다. 이 키릴 문자에 의하여 복음서 등이 슬라브어로 번역되었으며, 이 문자는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불가리아인·세르비아인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여 885년 메토디우스가 죽은 뒤 곧 라틴 전례(典禮)가 부활하였으며, 10세기 초에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대모라비아 왕국도 멸망하였다.

그 후 역사의 중심은 보헤미아로 옮겨졌고 프르셰미슬왕조가 형성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바츨라프왕이 나타났다. 14세기 초에 바츨라프 3세가 죽음으로써 프르셰미슬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룩셈부르크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특히 1346년 제2대 왕 카를 4세(1316-1378)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써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했다.

※카를 4세는 체코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보헤미아의 왕, 로마의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탈리아 왕, 부르군디 왕 등 많은 지위를 이용해 보헤미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성장에 기여한 인물이다. 카를 4세는 통치 기간 동안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중부 유럽 최초로 대학을 설립하는 등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발표해 제국의 황제 선출을 명문화하여 19세기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제국의 기틀이 되는 원칙을 마련했다.

1348년에는 프라하대학이 창립되어 프라하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초 프라하대학의 총장이며 선구적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1372-1415)가 교회제도를 비판하다가 화형에 처해지자 1419년 후스전쟁이 일어났다. 후스전쟁은 종교·사회개혁과 함께 보헤미아의 독일화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후스파는 교황이 파견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5회에 걸쳐 격파하고 1436년 화약을 성립시켰다.

이 화약에서 공인된 후스주의는 문어로 확립된 체크어와 더불어 이 민족의 지주가 되었다. 1526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 이후 독일인 제왕의 통치가 계속되어, 1918년까지 300여 년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617년 가톨릭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프로테스탄트의 탄압을 시작, 이것이 원인이 되어 1618년에는 ‘30년전쟁’이 일어났다. 1468~1780년은 암흑시대로, 특히 1740∼1780년의 마리아테레지아 시대는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시대였다.

짧은 기간 동안 계몽전제군주인 요제프 2세의 통치시대를 거친 다음에는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으며, 1805년에는 남모라비아의 슬라프코프에서 아우슈테를리츠 전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메테르니히가 오스트리아의 재상으로 등장, 경찰정치를 전개, 군주체제를 옹호하였으나 자유주의 운동이 점차 강화되어 1848년에는 혁명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끝내 실패하고 그 이후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바흐에 의해 절대전제주의의 암흑시대가 재현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가 약체화되고 체코인(체크인)들은 점차 자기의 권리를 되찾았으나 리게르가 지도하는 보수파의 노(老)체크당과 브리치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체크당’으로 분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 독립하였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인위적으로 합쳐진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고쳤고 1993년 1월 1일 평화적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2개 공화국으로 서로 분리·독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식명칭은 체코공화국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공산주의 국가 중 최고의 생활수준과 높은 문화를 유지한 공업국가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민족적·언어적·문화적 이질감과 경제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0년 슬로바키아공화국과 연방제를 구성하였다가 1993년에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하여 체코공화국이 되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체코의 서쪽 지방은 보헤미아 지역이라고 한다. 시골에 대규모 농촌마을들이 많이 보이고 남부독일이나 남 프랑스보다 위도가 높음에도 웬 일인지 오히려 계절이 빨라 밭의 밀이 이미 파랗게 자랐다. 이곳 가이드 의견으로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일찍 파종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알프스가 끝나는 지역이라 낮은 산과 평원이지만 체코의 시골마을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와 비슷하게 매우 아름답다.

■체스키크롬로프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 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다른 중세 도시들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차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이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해마다 6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거리에서 공연을 한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회나 18세기 귀족들의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체스키크롬로프 성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번째로 큰 성이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은 역사적으로도 건축적으로도 유럽에서 중요한 건물로 꼽힌다. 스보르노스티 광장을 지나 '이발사의 다리'로 유명한 라제브니키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13세기에 영주 크롬로프가 성을 세운 이후부터 시기별로 지배자에 따라 건물의 증축과 함께 그 양식 또한 혼합되어 갔다. 현재 이 성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 입구인 '붉은 문'과 탑, 화려하게 꾸며진 외관이 특히 눈에 띈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이나 공주나 부여나 경주 그리고 익산을 비롯하여 중국이나 유럽의 많은 옛 수도들을 찾았으나 실로 공국의 성을 찾기는 처음이다. 봉건제후(영주)가 다스리는 장원의 영주의 성인 것이다. 중국으로 비하면 주나라 시절 제후국들의 왕궁이라 할 수 있고 일본으로 말하면 번의 영주들의 성인 격이다. 유럽의 중세는 프랑스와 영국의 왕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다스린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의 직할령은 그리 많지 않고 전 유럽의 대부분은 제후(기사)가 다스리는 공국이나 주교가 다스리는 공국들이었던 것이다. 왕이 아닌 제후, 기사들을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주라고 부르며 그들이 농노들을 지배하면서 장원을 다스렸다. 이 성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 대제후가 다스리던 장원이며 장원의 중심인 영주가 살던 성인데 규모가 마치 왕이 살던 궁전 못지않다. 세계사를 가르칠 때에는 고작 교과서에 있는 그림으로 가르쳤었다.

 

 

시청사 및 스보르노스티 광장

체스키크롬로프의 상징인 체스키크롬로프의 알록달록한 중앙광장인 스보르노스티 광장은 체스키크롬로프 성, 볼타바 강과 함께 '동화마을' 체스키크롬로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다. 중세 시대의 오래된 르네상스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소박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풍긴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모두 다른 모양의 지붕과 외관을 가지고 있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독특한 재미를 준다. 건물들마다 독수리 문장과 체코 국기, 그리고 로젠베르크 영주 가문의 문장인 꽃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블타바(몰다우) 강물은 이상하게 맑지 못한데 철분이 많아 그러하며 생수로 먹지 못한다고 한다. 백탑의 도시라는 프라하에 도착하여 간단한 야경을 구경하는데 비가 와서 우산을 받고 잠간 걸었다. 프라하의 강도 역시 볼타바 강이다. 일본사람들은 까를교를 걷기 위해 비가 오는데도 다리에 오르는데 우리는 비도 오는데다 내일 아침에 다리를 걸을 계획이라서 바삐 비를 피해 베스트웨스턴 호텔로 향했다. TV를 켜니 KBS한국방송채널이 있어 연속극을 내내 방영한다. 심심하지 않아 좋다.

 

 

 

10일차 22일(수)

■프라하

19세기에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체코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요공업은 중·정밀기계 제조업과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프라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강의 서쪽과 동쪽 모두 역사적 기념물들이 많으며 프라하 궁은 강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전체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인 국립박물관까지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하다. 문화의 도시로도 유명하여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이 있다. 9세기부터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한 도시이다.

블타바 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프라하 중앙을 가로지른다. 강의 서쪽 기슭에는 왕립 정원, 흐라트차니(프라하의 성),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말라스트라나[小地域] 등이 있다.

강의 동쪽 기슭은 주로 12세기에 조성된 스타레메스토(구시가지)와 14세기의 노베메스토(신시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구역 모두에 역사적 기념물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다. 특히 노베메스트의 건축물들로 인해 프라하는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래된 구역들의 좁은 거리들, 작은 선술집들, 식당들과 넓게 트인 바츨레프스케 광장 및 현대적인 공원, 주택단지들이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으며, 주택난의 해소를 위해 시의 변두리 지역에 신 주택촌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

아침에 비가 내리고 있지만 별로 걱정되는 수준은 아니어서 카를교를 걷고 트램을 타고 이동한다. 그것도 환승까지 한다. 중앙역광장인 바츨라프 광장에 가다. 우리는 『프라하의 봄』을 기억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 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프라하 시 중심부에 있는 "프라하의 봄" 혁명광장으로 알려진 바츨라프 광장은 대로 양 옆으로 상점, 은행, 카페가 줄지어 있다. 중세기에는 말 시장이었다고 한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한참동안 걸어서 이동한다. 이곳에 볼거리가 많고 관광객들이 엄청나다. 프라하도 부다페스트 못지않게 경관이 볼만 하고 볼거리가 많고 그래서인지 관광객들 대단하다.

○까를교

블타바 강 우안의 구시가지와 좌안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프라하 성을 연결해 주는 카렐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다. 135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프라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카를 4세가 블타바 강에 놓은 다리로 너비 10m, 길이 520m에 이른다. 성 비투스 성당을 지은 페테르 파를레르시가 공사를 맡아 바츨라프 4세 때인 1402년에 완공되었다.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이 다리는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다리의 시작과 끝 부분에 놓인 탑은 본래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볼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렐교는 원래 마차가 다니며 양쪽의 교역 역할을 하는 용도로 쓰였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거친 후 지금은 보행자 전용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기 때문에 음악과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예술의 다리로도 유명하며 악사와 초상화 그리는 화가,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카렐교는 프라하 성의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시가 교탑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성과 블타바 강의 전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카렐교를 지나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 프라하 성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인 네루도바 거리에는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즐비하다.

○화약탑

1475년에 건설된 높이 65m의 고딕 양식 성문이다. 1757년 러시아와의 전쟁 때 화약탑으로 사용되어 개축된 이후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시가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으로 남아있다.

○구 시가 광장

프라하 구시가 광장은 블타바 강 오른쪽 오래된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이다. 11세기 무렵부터 교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지역이며 역사가 오래된 만큼 광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건축물들에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별 건축 양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구시가 광장과 그 주변으로 얀 후스 동상,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틴 성모 교회, 골드 킨스키 궁전, 돌종의 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구시가 광장 한가운데에는 체코인이 자랑스러워하는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군상이 시민들을 바라보고 서 있어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고 있다. 구시가 광장의 남서쪽에는 구시청사가 있는데 시청사 건물의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었지만 벽면의 천문시계(Orloj)는 무사하다. 이 시계는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의 명물로 매시 정각에 시계의 인형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볼거리다. 시청사 탑에 올라가면 구시가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천장 돔에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성 미쿨라세 교회는 광장의 북서쪽에 있다. 보헤미안 글라스가 아름답게 빛나는 샹들리에도 볼거리다. 구시가 광장에서 화약탑 쪽으로 이어지는 첼레트나 거리에는 귀족들이 살던 바로크 양식의 저택이 많다. 현재는 보석과 액세서리 가게가 들어서 있다. 길 모퉁이에는 검은 마돈나의 집이라고 불리는, 큐비즘 양식의 독특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1층은 상점이고 4층은 큐비즘 전시실이다. 조금 더 가면 화약탑이라고 불리는 고딕 양식의 중세 성문이 보이는데 17세기 러시아와의 전쟁 당시에 화약고로 사용되었던 65m의 탑이다. 지금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화약탑 위에도 전망대가 있다.

검은 마돈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타보브스케 극장이 있다. 18세기에 세워진 이 극장은 1787년에 모차르트가 프라하 시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초연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 아마데우스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틴 성당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로, 136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변형을 가해 17세기까지 다양한 건물 양식이 가미되었다. 외관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특히 80m 높이까지 치솟은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부는 바로크양식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어두운 느낌을 준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시청사 동쪽 맞은편, 골즈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다.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 출입문이 유명하며, 황금 성배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 고딕양식으로 조각된 실내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상, 백랍으로 만든 세례 받침 등도 성당의 명물로 꼽힌다.

성당 안에는 루돌프 2세를 위해 일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he)가 묻혀 있다.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며, 교회 바로 옆에는 카프카(Franz Kafka)의 생가가 있다.

○구 시청사

프라하의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 지구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구시가 광장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천문시계가 있는 구 시청사는 최고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구 시청사는 1338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상당 부분 훼손되는 시련을 겼었다. 그러나 천문시계가 있는 서쪽 동은 다행히 소실을 면했으며 그 후 복원과 증축 공사가 진행돼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 시청사 관광의 핵심은 독특하고 화려한 천문시계이다. 1410년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는 체코 고딕 시대의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결정판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기발하고 정교하다. 600년 넘게 프라하의 역사와 함께한 시계는 원형에 거의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아래 시계의 둥근 판 중심에는 구시가의 문장이 있고 둘레에는 별자리가 새겨 있다. 또 이를 둘러싸고 한 해의 열두 달을 농민의 생활로 표현한 그림이 있다. 위쪽 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해 만들었다는 천문시계이다. 시간, 일출, 일몰, 월출, 월몰까지 표시해 준다고 한다.

매 시각 정시에 시계가 짧게 작동하므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놓치지 않는다.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왼손의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계의 맨 위쪽 창이 열리면서 12사도가 등장한다. 이들이 한 바퀴를 다 돌면 닭이 울고 종이 울리는 순서다. 이를 보기 위해 정시가 가까워지면 천문시계 앞은 관광객들로 만원이 된다. 구 시청사 안에는 역사박물관, 예배당, 집무실 등이 있다. 예배당에서는 천문시계 내부를 볼 수 있다. 중세에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계를 높은 탑 위에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구 시청사의 시계탑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었을 것이다.

 

 

 

프라하에서 마지막 종착지인 뮌헨으로 이동한다. 고속도로를 4시간을 달려 고속도로 주변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로 버스가 들어간다. 처음엔 독일땅인 줄 알았더니만 아직도 국경근처의 체코땅이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로즈바도프 지역의 시골 마을(체코인인 버스기사에게 물으니 바쇼프스구른이라고 대답한다.)인데 작은 호텔이 두 개가 있고 작은 관공서들이 있다. 마을이 너무도 예뻐 식사전에 급히 우산을 받고 강교장 부부와 마을구경을 했다. 식사는 호텔(프치 틀레르 호텔) 앞 식당에서 하는데 저녁은 너무 볼품이 없더니 아침식사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아침에도 이곳저곳 마을을 구경하는데 그림이나 달력에 나오는 유럽의 아름다운 마을 바로 그대로이다.

 

 

11일차 23일(목)

■뮌헨(독일)

다시 독일이다. 뮌헨은 바이에른 뮌헨의 주도이다.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강에 면하여 있다. 베네딕투스회를 기원으로 하는 도시이다. 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수도사들에게 잘츠부르크로부터 이자르강에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듬해 이자르강을 건너는 다리가 건설되었고 시장 주위로는 성이 구축되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이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14세기 말~15세기 초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치하에서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30년전쟁(1618∼1648) 중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고(1632), 1634년에는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825~1848년 재위에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으며, 그가 선임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하여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도시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인 맥주 창고는 아직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구시가는 점차 기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과거의 특징을 많이 상실하였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는 7개의 성문 중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등 3개가 있는데 모두 14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다른 중세의 건축물로는 뮌헨대성당, 1468∼1488년 건립된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1470∼1480년 건립된 구시청사 등이 있다.

독일 국제 공항 중 두 번째로 큰 국제공항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공항(Flughafen München-Franz Josef Strauß) 이 시가지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독일 내의 주요 도시와는 ICE(Inter City Express)라 불리는 고속철도를 통해 잘 연결되어 있으며 EC(Euro City Express)를 통해 유럽의 주요 도시들과의 교통편이 잘 발달되어있다.

시가지에는 마리엔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명소가 몰려있다. 신시청사(Neues Rathaus)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건립되었고 총 85m의 탑과 종루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가 유명하다. 옛 바이에른 왕가의 궁전이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레지덴츠 궁(München Residenz Palace)은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100여 개의 방에 미술품과 보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다른 유명 미술관으로는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가 있으며, 이외 관광 명소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BMW의 박물관,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 등이 있다.

뮌헨에서는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걸쳐 열린다. 옥토버페스트는 10월을 뜻하는 '옥토버(Oktober)'와 축제를 뜻하는 '페스트(fest)'의 조합으로, 1810년 경 바이에른 왕국의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연 것이 이 축제의 기원이다.

뮌헨은 스포츠 레저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각종 스포츠 대회가 여러 번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경기로 1972년 제 20회 하계 올림픽 대회가 있으며,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당시 주요 거점 도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2년 올림픽 당시 대대적으로 건립되었던 올림피아 파크(Germany Munich Olympic Park)는 하계 스포츠 용도로 설계되었지만, 현재 빙상경기장을 신축해 동계스포츠 인프라도 함께 구축하고 있다. 이외에도 독일 월드컵 당시 지어진 알리안츠 아레나 스타디움(Alianz Arena)이 있다.

뮌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뮌헨올림픽》이고 다음은 《바이에른 뮌헨》이다. 우리는 이미 오스트리아로 가면서 뮌헨지역을 비잉 돌아 내려갔는데 오늘 다시 찾은 것이다. 뮌헨은 출국하기 위해 온 것처럼 한국인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를 들리고 신시청사를 비롯하여 히틀러가 나치를 모아 결성했다는 세계 최대의 맥줏집 호프브로이 하우스( Hofbräuhaus am Platzl)가 있다. 애초는 1589년 개장한 바이에른 왕실의 전용 양조장이었다. 그리고 훗날 왕실에서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지난날 그 근처에 살았다는 모차르트는 물론 레닌, 그리고 히틀러도 이 술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1920년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 단체는 호프브로이 하우스 3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나치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라하여 후다닥 사진을 찍어 놓았다. 건물을 대충 구경하고는 근처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그리고는 공항으로 향하였다.

오후 4시 10분 출발하여 인천에는 내일 오전에 도착한다. 올 때보다는 1시간이 단축되었다. 10시간 비행하여 도착하게 되었다.

○프라우엔교회

1488년 완공된 뮌헨 프라우엔 교회는 후기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축물로, 교회로서는 뮌헨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교회 전면에 쌍둥이처럼 솟아 있는 두 개의 탑과 탑 위의 양파 모양 지붕은 눈에 쉽게 띄어 뮌헨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두 탑은 높이가 같아 보이지만 북탑이 99m, 남탑이 1m 더 높은 100m이다. 남탑의 전망대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으며 뮌헨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프라우엔 교회로 들어서면 바닥에 한쪽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악마의 발자국(Teufelstritt)’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교회의 명물이다. 악마의 발자국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교회를 건축할 당시 건축가는 악마와 거래를 했는데, 창문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만든다면 악마가 건설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악마는 교회 건설을 도왔으며 완공이 되자 건축가는 악마를 교회 안으로 안내했다. 악마가 선 자리에서는 교회의 창문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악마의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람들이 몰래 창문을 만든 것을 알아차린 악마가 화를 내며 교회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고 도망쳤다고도 한다.

교회 내부에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묘사한 제단화가 있고, 악마를 속이고 만들었다는 창문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4세의 묘를 비롯해 비텔스바흐 왕가의 묘지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뮌헨의 성직자들도 묻혀 있다.

○신 시청사

높이는 85m에 이른다. 시내의 중심인 마리엔 광장에 위치한다. 지붕 한가운데에 가늘고 높은 시계탑이 솟아 있는 신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세련되고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겉모습만 봐서는 수백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10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 시청사 탑에서는 뮌헨의 아름다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의 종루에는 독일 최대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인 글로켄슈필이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작동하며,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정오 12시와 오후 5시에도 볼 수 있다. 사람 크기만한 인형들이 출연하는데 처음에는 빌헬름 5세의 결혼식 가운데 실감나는 기마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다음에는 1517년 페스트가 만연해 외출 금지되었을 당시 페스트가 없어짐을 알리고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며 신나게 춤추는 모습 등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해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2일차 24일(금) 귀국

인천공항에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한다. 일행들과 인사하고 강교장 부부와 12시50분 발 익산․군산행 공항버스를 탔다. 덜컹거리는 이상한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5시가 되다. 이번 여행 스토리는 좀 허술한 기록이 되었다. 짧은 기간에 많은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는데다 종이에 펜으로 일일이 느낌을 적지 않고 그저 간단하게 핸드폰의 컬러노트를 이용하여 적어놓았을 뿐이어서인지 찾아본 건물이나 기념물들에 대한 기억들이 확실치 않고 파악이 잘 안 된다. 혹시 남이 보면 부끄럽지만 이 정도로 그친다. 구태여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행문은 아니고 나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만족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지 일주일, 3월의 마지막 날 11시 56분에 급한 마음으로 올린다. 후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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