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문화답사기
1. 두 번째 가을 여행
익산문화원에서 후반기 답사를 떠난다. 공고를 현관에 붙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사무실에 들려 신청했다. 수요일인 9월 28에 떠나는 1차 답사반이다. 나로서는 올가을 두 번째 답사여행이 될 터이다.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인 전경욱교장과 함께 하니 더욱 즐겁다.
요즈음은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산청을 지나는 일이 가끔씩 있지만 순전히 산청을 목적으로 처음 찾은 것은 90년대 초, 약 20여 년 전의 일인 듯싶다. 확실치는 않지만 초등학교 계모임에서 여름 1박 2일 여행을 지리산 뱀사골에서 가졌는데 이튿날 자가용 네 대에 나누어 타고 무리를 지어 아침에 출발하여 노고단을 거쳐 청학동과 삼천궁을 거쳐 진주를 돌아 산청으로 가는 길에 목면시배유지를 들렀고, 산청읍과 함양읍을 돌아 88고속도로를 거치고 남원을 경유하여 지리산을 한 바퀴 삐잉 돌아왔었다. 그 더운 여름날에 무슨 재미로 힘든 여행을 했는지? 40대의 젊음이니까 능히 가능했었다. 수년 전 무주고에 근무할 때 학생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천황봉에서 이곳 산청으로 내려왔던 일도 있다.
2. 목면 시배유지
사적 제108호로 단성면 사월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이 유적은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몰래 붓통에 숨겨가지고 들여와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 선생에게 부탁하여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였던 곳이다.
또, 부근의 마을은 문익점의 출생지이기도 한데, 이 마을은 목화재배의 유래를 간직해오면서 지금도 배양(培養)마을로 불리고 있다.
배양마을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한길가에는 오른편으로 나지막한 돌담을 둘러싼 100여 평의 밭이 있고 목화를 재배하고 있다. 밭의 오른쪽에는 기와지붕을 올린 비각이 있으며, 그 안에 ‘三憂堂文先生棉花始培地(삼우당문선생면화시배지)’라고 제목을 붙인 사적비가 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처음으로 문익점에 의해서 들여온 목화가 번식에 성공하였던 옛터이다. 안내판에 기록된 문익점 선생의 생존연대가 틀려서(1329-1398 로 되어 있음) 해설사님께 조언 드렸다. 대단히 멋있고 웅장한 한옥의 전시관이 있어 직물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모직, 견직, 마직, 면직을 잘 구분하여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 등 마직물에 의존하거나 기껏해야 짐승의 가죽과 털을 이용하는 의복생활에서 살다가 비로소 누구나 따뜻한 솜옷과 면직물로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문익점 선생의 깊은 뜻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목화재배의 성공과 일반화는 우리역사에서 실로 위대한 의류혁명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시골마을에서는 1960년경까지 목화를 재배하여 직접 솜을 타는 집이 있었으며 1960년대까지도 목화를 재배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50대 분들은 실제로 목화재배를 한 것은 잘 모른다 한다. 그런데 1949년생인 어느 여성분은 1970년대까지도 고향인 전남의 고향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하였으며, 자신의 결혼 때 부모님이 집에서 딴 목화솜으로 솜이불을 해주었다고 말씀하신다.
■문익점(1331-1400)
1. 출생과 관직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2.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옴
1360년 계품사(啓稟使)로 원(元) 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緜)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7년 6월 13일자에는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에도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수는 차이가 있지만 붓두껍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목화재배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鄕里)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木棉)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정사품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4. 업적평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가져와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숭앙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태조는 그에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의 직위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封號)를 추증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그의 아들인 문중용(文中庸)에게 사헌감찰(司憲監察)의 벼슬을 내렸다. 세조 때에는 그의 관향(貫鄕)에 사당을 세워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그를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에서 ‘부민후(富民候)’로 추봉하는 한편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정조 때인 1785년에는 그의 위패를 안치한 서원에 임금이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액자를 보냈다.
한편, 최근 백제 시대의 유적지인 부여 능산리 절터의 출토 유물에서 목면으로 된 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면직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면직이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양서(梁書)≫, ≪한원(翰苑)≫ 등의 기록을 근거로 품종은 다르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 마, 면 등을 직조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면서 면직물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비판되고 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 재배와 보급이 면직물 생산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백성들의 옷감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3. 남사 예담촌
단성면 남사리에 있는 옛 고을인데 멋스럽게 새로 붙인 이름이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옛 담의 신비로움과 전통과 예를 중요시하는 이 마을의 단정한 마음가짐을 담아가자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백 여리를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 니구산에서,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泗水,남사천,淸溪)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勝地)로 쌍룡교구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 지역의 만경강의 옛 이름도 泗水인데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하천에 붙여 부른 강이름이라 하겠다. 이 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된 바 있다는데 과연 실제로 돌아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마을임이 틀림없다.
먼저 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씨 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극 보고 두 번째로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찾았다. 세 번째로는 1920년에 아주 잘 지어진 양반고택인 최씨 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를 구경하다. 최씨 고가와 사해정사는 모두 1920년에 지어진 집들이다. 사해정사는 학당인데 대단히 잘 지은 집이다. 우리 전라도지방에서는 이러한 거창한 양반 고택이나 학당건물은 여간해서 찾아보기 어렵다. 경상도는 비록 논농사가 번창한 곳이 아니지만 양반지주들은 저처럼 대궐 같은 집들을 짓고 살았으니 나머지 일반 농민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어떠했을고? 잘 지은 집들이 있고 또 마을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잘 보존해가며 자랑하는 것이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1920년에, 저 양반지주들은 나라의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궐 같은 집도 짓고 살아가며, 대궐 같은 학당도 지어 동네 아이들에게 철 지난 한학을 공부시켰겠구나?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일행들이 예담원이라는 마을 한 가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기다리는 사이에 양드리와 마을길을 걸어 나가니 《지금 이 꽃자리》안내 표시가 있어 따라가다. 강변에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이고 잔디마당이 잘 조성된 아주 정갈한 집이 나타난다. 대밭을 이용한 아주 멋있는 깔끔한 조경이다. 안주인이 나와 문을 열어주며 맞이하여 들어갔는데 깨끗한 한옥으로 된 카페다. 대지가 650평인데 안집은 한옥으로 지어 부부가 살고 바깥쪽에는 이 건물을 지어 카페와 주인의 그림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주인은 유명한 동양화가인 이호신 선생이라고 하는데 집에 와서 양드리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상당히 유명하고 대단한 활동을 하시는 동양화가시라고 한다.
예담원의 점심은 비빔밥인데 반찬들이 깔끔하다. 소주와 맥주를 시켜 마시는데 나는 식사시에 소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비싼 동동주를 개인적으로 사서 마시려했더니 사무국장께서 그냥 신청하여 마셔도 된단다. 8천 원짜리 동동주를 공짜로 마시니 더 맛이 있다.
이 밖에도 이 마을에는 기산국악당과 이순신장군이 하룻밤을 묵었다는 이사재가 있고 사양정사 등 고가에서 1박 5만 원 정도로 민박을 할 수 있다.
4. 동의보감촌
금서면에 있는 동의보감촌을 찾는다. 놀랍고 부러워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도대체 산청에 언제 이런 거대한 관광시설을 해놓은 건지! 어찌 아직까지 나는 이런 엄청난 규모의 관광지를 알지 못하였는지! 우리는 겨우 버스로 동의보감촌의 제일 위에 위치한 한방기체험장에 들러 보았을 뿐이다. 해설사를 따라 기체험장 한 곳을 관람하는데에만 1시간 이상이 걸렸으니 동의보감촌을 모두 구경하려면 넉넉히 하루 일정을 잡아야 할 듯하다. 산청군이 2007년 5월 한의학 박물관 개관을 시작으로 국내 최초 한방테마공원을 표방하며 2010년 5월 개관한 동의보감촌이 그 중심에 있으며, 2013년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함으로써 확실한 방점을 찍었다.
한방가족호텔과 다산콘도가 있어 2인 가족은 비수기(7.15-8.31외) 주중 8만원이니 한번쯤 찾아 여유 있는 관람과 순례길 산행을 하면 좋을 듯싶다. 한방을 테마로 저토록 훌륭한 관광자원을 개발한 산청군이 부럽기만 하다.
허준 (許浚 1539 ~ 1615)
자(字)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陽川)이다.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내신 허론이며, 조부는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허곤이다.
서자로 태어난 허준은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고향인 산음 정태(현 산청군 신안면 상정)로 갔다가 그곳에서 신의로 칭송받는 류의태 선생을 만나 의술을 배웠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허준선생은 30대 초반에 내의원에 들어가 37세에 어의로서 국왕의 병을 직접 진료하며, 내의원 의관을 총괄하는 수의로서 활약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1610년(광해2)에 완성하고 1613년(광해5)에 초판을 간행한 의학서적으로 25권 25책으로 발행되었으며,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허중 선생께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동의보감 집례(東醫寶鑑 集禮)’에 나와 있듯이 “옛적에 이동원이 「동원십서(東洹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로서 관중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은 동방에 치우쳐 있지만 의약의 도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의학도 가히 동의(東醫)라고 할만하다.”고 하여 우리나라 전통의학과 동의보감을 중국 의학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이동원, 주단계와 견주고자 했던 것이다.
2009년 7월 30일 바베이도스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에서 공중보건서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전문의학서로 인정을 받았고, 우리의 전통의약인 한의약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한의약의 우수성과 가치를 전국민과 더불어 지구촌 인류에게 홍보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지난 2013.9.6 ~ 10.20(45일간)에 이곳 동의보감촌에서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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