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50년대)

청담(靑潭) 2017. 1. 29. 23:33

 

 

한국현대생활문화사

 

창비(2016. 8.30)

 

《창작과비평》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내놓는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다양한 조건과 행위가 맞물리며 역사가 창조되는 공간으로서 생활문화 영역, 일상 생활문화를 통해 시대의 특성을 불어넣는 인간들의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변화를 풍부하게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다.

출판사 근무를 그만두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애칭 ?이쁜 딸?이 보내준 책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권으로 묶어져 있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 교직에 들어서서 결혼을 하고 우리 아들딸을 낳아 학교에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내가 직접 살아온 시절이요, 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보통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주의 깊게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지켜 보아온 터이다. 이 책은 정치사를 되도록 배제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상당히 엄격하게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더불어 북한의 변화과정과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의 변화과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제1권 1950년대

 

■종결되지 못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난민의 삶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승인과 지원을 받은 북한국니 38선을 넘어 전면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휴전직후부터 소련, 중국, 동유럽 등 공산주이 국가의 후원을 읻어 재빨리 전후 복구 작업에 나섰다. ...이 무렵 북한은 한국보다 빠른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명분과 예의를 중시하던 종전이 가치관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실용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했다.?고 지적된다.

●전통적으로 농촌에 영향력을 미쳤던 문중 등 친족집단의 유대는 약화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약화되면서 사람들은 소가족 단위로 흩어졌고, 이러한 가족과 국가를 매개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이익단체, 시민단체 등이 발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족주의가 유례없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계층적으로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가운데, 파편화된 가족들은 교육을 통해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엄청난 교육열을 보이기도 했다.

 

■자유진영의 최전선에 선 국민

●만일 공산주의 세력 절멸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만 <애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면, 그렇지 않은 모든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공산주의에 협력하고 용인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 붙이면 최전선에서 적의 절멸을 위해 싸우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적?과 싸우는 전선에 서지 않은 모든 국민들은 잠재적인 적인 ?내부의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광기어린 논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약 6년간 지리산 인근지역은 한국전쟁과 무관한 군사작전이 지속된 ?내전지대?였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특정 정치사상과 활동 혹은 정당 자체를 금지하고 불법화한 사례는 거의 없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무력북진통일 이외의 모든 통일방안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미망인 그리고 자유부인

●근대가 가져온 수많은 변화가운데서도 여성의 지위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한국에서 1920년대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여성해방론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했다.

●해방 바로 다음날 일제시기 좌우합작 여성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인 황신덕(1898-1983), 박순천(1898-1983, 임영신(1899-1977), 노천명(1911-1957) 등이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했다.

●6.25 전쟁은 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을 합해 322만 명의 군인 피해가 발생했고, 300만 명의 남북 민간인이 사망했다. 한반도 전체 인구 3,000만 명중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400만(남북군인 100만 명) 명 이상이었다.

●분단과 정쟁은 농촌에서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같은 곳에서 머물던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 초 1만 명도 안 되던 대학생이 1950년대 말에는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전통시대부터 사교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계는 1950년대에 서민 금융을 대신하는 대표적인 공동체 조직이었다.

●국회에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여성 관련 형법안이 제출되었다. 바로 간통죄, 중혼죄, 낙태죄 관련 법안이 그것이었다.

●1950년대 한국여성들에게 강한 출산 억제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은 한국사회의 절대 빈곤이었다.

 

■전쟁미망인 그리고 자유부인

●피난민에 대한 발포와 사살지시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으로 1949년 제네바 협약은 물로 일반적인 전쟁관습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팽창하는 학교와 학생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대학졸업생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매우 제한되었다. 즉,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해도 대부분이 고등실업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김동리의 소설과 김소월의 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토마스 하디의 『테스』, 펄벅의 『대지』등이 주요 독서대상이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학생들은 『새벗』, 『소년세계』, 중고등학생들은 『학원』, 대학생들은 『사상계』,『여원』을 많이 읽었다. 그 중 『학원』은 당시 일간신문에 맞먹는 매월 10만에ㅐ 가까운 발간부수를 기록하면서 동시대 어떤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이상 대학생은 전원 의무적으로 학도호국단에 편입되어 학생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4.19 혁명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생 시위는 그동안 관제 데모를 이끌었던 학고호국단 간부들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학생들을 통제, 동원하는 과정에서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 사이에 일정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화와 욕망하는 사회

●1950년대 후반 국내에서 발행된 농민, 농업관련 잡지는 극소수였고 발행부수도 적었지만, 미공보원이

발행한 농촌대상 월간잡지 중 배포량이 가장 많았던 『새힘』의 발행부수는 35만부에 이르렀다.

●미군 부대의 피엑스는 미제 물건이 유통되는 가장 확실한 경로였다. PX는?Post Exchange?의 약자로서 간단한 군것질감이나 약간의 주류를 파는 작은 가게라는 의미에서 酒保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의 피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꼽혔다. 피엑스는 미군은 물론, 중국인을 제외한 주한 외국인 전원과 이와 결연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요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이 매년 제공한 군사경제 원조액이 평균 3억 달러 정도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미제?의 세계는 세계에 눈뜬 서민들에게 미제 물건을 쓴다는 것은 곧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주한미군방송(AFKN)라디오 프로그램은 미국 대중음악의 가장 직접적인 통로였지만, 한국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미국의 인기 연예인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미군 캠프마다 진행한 위문공연이었다. ...마리린 몬로, 밥 호프,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등 당대 최고의 배우와 가수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공연은 AFKN 라디오를 통해 중계되기도 했다.

●이들 쇼단이 미8군 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한 미공보원이 주관하는 공개오디션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전문적인 음악적 식견을 가진 심사위원들이 AA, A, B, C 로 등급을 매겼다. ...한 마디로 미8군 쇼는 실력과 대중성이 검증된 스타급 음악인의 산실로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인력 풀이었다. ...미8군 무대를 거쳐간 스타급 가수로는 김씨스터즈(1953 결성), 한명숙(1935- ), 최희준(1936- ), 윤복희(1946- ), 패티 김(1938- ), 현미(1938- ), (유주용(1939- ), 위키리(이한필 1936-2015), 박형준(?) 등이 있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한국사회에 물질만능주의와 퇴폐문화를 불러온다는 비판의 결정적인 근거는 댄스홀의 성행과 춤바람 열풍이 제공했다.

 

■이웃을 향한 열린 문과 닫힌 문, 그리스도인의 전후 체험

●당시 전쟁미망인이 30만이 아니라 40만 명도 넘었고, ...전쟁으로 부상당한 남한 군인의 수가 45만 명 이상이며 민간인 부상자도 30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해방 직후 10만 명이 조금 넘을 정도였던 남한 개신교의 교세는 1950년대 끝 무렵에는 100만 명까지 확장되었다. (2015년 현재는 968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1948년 발발해 거의 3만 명에 달하는 도민이 학살된 4.3사건이나, 1950년 황해도 신천에서 3만 5천 명 이상이 학살된 신천대학살 사건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해자는 폭력적인 개신교도였다. ...이 시기 개신교의 성장은 친미와 결합된 반공주의적 호전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49년 12월, 27명으로 시작한 한경직의 영락교회는 이듬해 말, 불과 1년만에 신도수가 1,000명이 넘었고, 1949년 말에는 5,000명이 넘는 신도를 거느린 남한 최대의 메가쳐치가 되었다. ...1955년에 한경직(1902-2000)은 남한 최대 교파이자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가진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는 장로교 내에서 다른 결의 대화담론으로 신학교육을 펴고자 했던 김재준(1901-1987)을 교단에서 축출한 탓에 그를 따르던 세력이 그와 함께 이탈한 직후였다.

●1958년 박태선(1917-1990)의 경기도 소사의 노구산집회에는 단일 집회에 70만 명의 대중이 모였다. ...이 전통을 물려받은 나운몽(1914-2009)의 제자 조용기(1936- )는 1960년대 이후 대중적 신비주의 운동을 통해 대부흥을 이끌었다. ...1960년-90년 한국 교회성장의 표본은 조용기의 순복음교회다.

 

■전쟁의 공포와 반미 애국주의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밝혔듯이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가 ?전쟁은 난폭한 선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온갖 이기심이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전장의 풍경이다.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전쟁을 계기로 폭발한다.

●외국군대 문제는 1958년 중국인민지원군이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서 모두 철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농업협동화의 물결

●일본과 일본인, 한국인 지주 등에게서 몰수한 토지는 농가별 가족수와 나이, 성별 등을 기준으로 한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분배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가구당 약 4,000평의 땅을 받았다.

●북한정부는 농민들의 완고한 정서를 고려해 처음에는 매우조심스럽게 협동화를 추진했다. ...농업협동화가 대세로 굳어지면서 부농이나 중농들이 취한 전형적인 대응약식은 그들만의 조합을 따로 결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합 규약상 조합원에게는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고 조합 탈퇴 시 출자 토지를 반환받을 수 있었다.

●협동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순식간에 1만 2,0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지만 ?해방처녀?라는 말도 유행하였다. 이 말은 국군이 들어왔을 때 국군과 사랑하다가 국군이 후퇴한 뒤에는 다시 처녀 노릇을 하는 여자를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농업협동화가 4-5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료됨에 따라 농촌 마을 건설도 그에 맞추어 빨리 진행되었다. ...집단마을은 주거공간과 생산공간으로 구분되어 지어졌다. ...마을에 공동작업장이 생기면서 개별 농가의 경제적 기능은 상실되었다. ...부부가 혼자된 장모 또는 장인을 부양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농업협동화는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전환시켰다. ...농업협동화는 농민의 습과 사회의식에도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부모나 시부모를 존중하는 충습은 ?미풍양속?으로 장려되었다.

■북한사람들의 지구화 경험

●1950년대 북한은 놀라울 정도로 개방이었다. ...해외로 나간 북한의 전쟁고아수는 2만 4,000명 이상일 것이다. ...첫째는 고아들의 이동, 체류 및 교육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초빙국가가 부담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육이 끝난 청소년들은 모두 북한으로 돌아가 전후 복구 사업에 전문가로서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총 5,000여명의 북한 대학생들이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중 2,000여명은 소련으로 갔다. ...유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생, 대학 재학생, 군인의 세 그룹에서 선발되었다. ...1957년부터 학업이 끝나지 않은 고아들과 대학생들을 대대적ㅇ로 소환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퇴폐적 사상이고,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 반하는 사상이었다.

●북한이 1950년대에 겪은 지구화는 약 4만 명의 광, 대학생, 노동자가 세계로 나가 직업교육과 대학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 형태는 사람, 물품, 자본 등 다양했다.

■일본 : 빈곤에서 벗어나다

중국 : 자력갱생의 노선

●사실상 미군의 일본 점령은 1952년 4월까지 약 7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전시체제를 혁신하기 위해 미군이 설시한 일련의 개혁을 GHQ혁명이라고 한다. 맥아더의 지휘아래 전개된 이 혁명은 밖으로부터의 혁명이자 강요된 혁신이었으나, 전후 일본 사회를 대폭 개조함으로써 일본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GHQ는 사상경찰을 없애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천황에 관한 자유토론을 천명했다. 또 민주화에 관한 5대 개혁으로 부인의 해방, 노동조합의 결성, 학교 교육의 민주화, 비밀심문 사법제도의 펄폐, 경제기구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전쟁수행에 협조했던 미쓰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재벌은 해체시켰다. 재벌 가족은 경영에서 퇴진해야 했고 대기업은 100-200여개의 회사로 분할되었다. 재계를 장악하고 있던 구 재벌이 해체됨으로써 각 부문의 진입 장벽이 낮아져 소니, 혼다 등 새로운 혁신기업이 성장 할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중국혁명에 이은 조선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동족상잔의 처절한 내전을 가져왔다. 미국과 중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향후 40년간 세계를 성격 짓는 냉전의 시작 버튼을 눌렀고, 각국의 진로를 비튼 세계사적 사건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바닥을 치던 일본 경제를 즉각적으로 소생시켰다. 이른바 조선특수이다. 일본은 미국의 군수품을 조달하는 배후기지가 되었다. 생산이 크게 늘고 막대한 달러가 굴러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 경제의 부활을 오로지 한국전쟁이 가져온 요행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일본은 탄탄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1955년에 이미 1인당 GDP가 전전 수준을 넘어섰다.

●1955년 이래 자민당 정권이 완전고용을 목표로 ?경제자립 5개년 계획?을 추진해 연평균 9-10%의 지속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경제의 안정된 발전과 함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1958년에는 아파트 생활자를 지칭하는 <團地族>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단지족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가정의 행복을 최우선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지닌 새로운 사회집단을 상징한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으로부터 시작된 15년간의 항일전쟁과 연이은 국공내전까지 20여 년의 전쟁으로 누더기가 된 중국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중국의 신정권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물적 지원을 소련에 요구했다. 1950년 2월 14일 마오쩌뚱은 이례적으로 모스크바에 석 달이나 장기체류한 끝에, 소련과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을 이끌어 냈다.

●내전을 끝내고 정권장악에 성공한 중국공산당은 물론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내전으로 정권을 잡았기에 북한의 한반도 통일전쟁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타이완의 국민당 정권이 미군의 도움으로 권토중래할 것을 두려워했던 중국의 신정권은 미군이 국경을 넘어서 중국에 진격하기 전에 한반도에서 막는다는 방침을 세우게 된다.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는 컸다. 중국은 130만 명이나 되는 파견군을 유지해야 했으며, 3년 동안 36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가 예산의 절반을 전쟁 수행비용에 퍼부어야 했다.

●군사적으로는 1950년 10월 이후 반혁명진압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국민당 잔존세력과 지방 무장세력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약 150만 명이 체포되고 50만 명이 처형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57년 6월부터 50만 명이상을 인민공화국을 적대시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우파로 규정하고 직위를 박탈한 뒤 노동 개조를 위한 정치수용소로 보내는 등 강력하게 탄압했다. ?반우파투쟁?이후 중국의 정치권력을 비판할 목소리는 사실상 사라졌다.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말할 수도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1959년부터 1960년 사이에 2,00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1959년 중국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명백한 정책 실패 앞에서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넘겨주었다.

●1959년 3월에는 티베트 지도층이 라싸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포했다. 중국의 무력진압으로 달라이 라마 14세는 라싸를 탈출해 인도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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