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70년대)

청담(靑潭) 2017. 2. 5. 23:06

 

 

한국현대생활문화사

 

창비(2016. 8.30)

 

 

창작과비평》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내놓는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다양한 조건과 행위가 맞물리며 역사가 창조되는 공간으로서 생활문화 영역, 일상 생활문화를 통해 시대의 특성을 불어넣는 인간들의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변화를 풍부하게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다.

출판사 근무를 그만두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애칭 ?이쁜 딸?이 보내준 책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권으로 묶어져 있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 교직에 들어서서 결혼을 하고 우리 아들딸을 낳아 학교에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내가 직접 살아온 시절이요, 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보통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주의 깊게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지켜 보아온 터이다. 이 책은 정치사를 되도록 배제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상당히 엄격하게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더불어 북한의 변화과정과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의 변화과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제3권 1970년대

 

 

■불신의 시대, 일상의 저항에서 희망을 일구다

●유신시대는 총력안보태세 확립이란 기치아래 국민총화, 홍화단결을 일상적으로 외친 시대였다. ...1973년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은 국민 저변에 확산되고 있는 불신과 불안감을 불식시키지 않는 한 ?국가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유신시대 국가권력은 규율과 통제, 자신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며 지배에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고자 했지만, 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1971년 대학가는 교련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로 뒤덮혔다.

●1972년 남북 대화를 진행하며 다른 한편에서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을 도모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동북아 국제질서의 병화를 주요한 구실로 들어 비상게엄을 선포한 뒤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1978년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결과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의득표율을 앞질렀다. ...1979년 8월 11일 경찰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중인 YH무역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을 강제 해산하는 와중에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했으나 공안당국은 생존권 투쟁을 벌인 여공들을 용공주의자로 몰려 책임을 회피했다. YH사건이후 정부와 야당의 대립은 극으로 치달았고, 야당총재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낳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주화 항쟁이 다시 일어나면 대규모 유혈사태를 일으켜서라도 강경 진압하려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입장을 달리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로부터 총격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유신시대 학교와 학생의 일상사

●유신선포 직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과 남북대화에 대한 정부시책을 학교교육에 반영하기 위해 사회, 국사, 반공 교과서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중등교육과정의 경우 한 권에 불과했던 반공교과서가 각 학년별로 세 권으로 바뀌었다.

●이미 문교부는 1969학년도부터 군사훈련에 ?교련?이란 정규 학과목 명칭을 부여하고 매주 2시간씩 실시하는 방침을 세웠다. ...교련 실시는 1970년 2학기부터 여고생과 여대생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유신시대 고등학생들이 3년 동안 이수해야하는 교련교육 시간은 총 216시간이었다. ...1970년부터 대학생 전국교련실기대회가 개최되었고, 1972년부터는 고등학생 교련실기대회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971년에 초등학교 5학년생부터 고등학교 3학년생까지 체력장제도가 실시되었고, 1972년에 고교입시에 적용된데 이어 1973년에는 대학입시에까지 체력장제도가 적용되었다.

●총력안보체제 확립을 목표로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학교 개편 정책은 1975년 학도호국단의 설치로 완결되었다. ...1994년 고교 군사훈련은 완전히 폐지되어 안전교육으로 대체되었고, 1996년에는 ?교련?이라는 교과명도 ? 안전보건?으로 바뀌었다.

 

■산업전사에서 민주투사까지, 도시로 간 여공의 삶

●수출지향형 산업화 전략에 따른 고도의 경제성장은 한국사회를 전통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공장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 범국민 약진운동으로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노동자의 직장과 조국이 운명공동체라는 가상의 신념을 불어넣었다.

●이시기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중간규모 이상의 공장기숙사는 민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난방과 온수, 세탁장, 텔레비전, 오락실 등 근대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기숙사를 장으로 하는 집단생활은 도시의 타향살이에서 오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1970년 전태일로 표상되는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과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YH무역의 박태연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군사문화의 억압과 폭력이 지배하는 산업구조, 여성을 무시하는 가부장의 사히문화가 복합으로 작용하면서 여성노동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민주노조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민주화운동과 결합해 1970년대 말에는 유신체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세력으로 성장했다.

 

■새마을 운동과 농촌탈출

●1970년 인구 총조사에 의하면 전체인구 3088만 중에서 도시인구는 1270만으로 41%(읍지역까지는 50%)였으나 1980년에는 3741만 중에서 도시인구는 2141만으로 57%(읍지역까지는 70%)가 되었다.

●농촌 몰락의 명백한 이유는 산업화였다. 농민들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은 산업하 전략에 따르면 바람직한 것이다. 산업ㅈ화에 따라 도시에서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은 농촌밖에 없었다.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간회의 석상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또는 ? 알뜰한 마을 만들기?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근면, 자조, 협동을 새마을운동의 원리로 정하는가 하면, 물질적 성장보다는 주민의 정신적 단결과 협동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정부는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넘어 전국적 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가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은 주민의 정신 계발, 사회의 질서 확립과 사회개발,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경제개발, 생활양식의 근대화운동이었다.

●박정희체제의 핵심슬로건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었다. ..환경개선과 소득증대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새마을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판단이었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역사상 최초로 농촌사회에서 ? 자발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의식혁명?으로 규정하면서 ?모든 것이 내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에 새마음운동 ?이라고 천명했다.

●민족주의가 강조된 이유는 분명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박정희 체제는 산업화에 따른 서구화를 크게 우려하여 자유주의나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등을 모두서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규정하고 극도의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새마을운동은 서구적 근대화가 아니라, 민족의 오랜 전통을 되살려내는것, 다시 말해 민족중흥을 의미했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알 수 있듯이 농업생산력 증가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고미가정책과 신품종 도입이었다. ...여기에 농약, 비료 등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농업생산력 제고에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농업과 공업을 막론하고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한 총력전이 치러졌음에도 1974년 도시가구 소득을 추월했던 농가소득은 1978년부터 다시 뒤처지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독특한 근대화 가정의 중요한 한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적 삶을 일반화하면서 농민들이 그에 걸맞은 인간형으로 거듭날 것을 추구했다. 이윤동기와 경제적 합리성을 아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농민의 미래상으로 제시된 셈이다. 이는 분명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자유주의 기획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마을운동은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기획이기도 했다. 국가는 자유주의를 기각하고 집단주의를 강조하면서 개인보다 전체집단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이는 각자도생의 세계를 만들면서 집단적 생존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문화계, 획일주의에 맞선 저항의 우회로

●정권의 핵심목표는 부국강병을 위한 조국근대화 실현에 있었고 문화정책도 이를 위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박정희는 부국강병의 길을?산업화 ?보았고, 그것을 위해 서구의 물질문명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수용의 자세는 항상 ?동양적인 정신문화?의 바탕위에서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권은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서도 민족적 자주성을 지켜나갔던 ?민족수난극복사?를 강조하고, 금속활자, 훈민정음 등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민족문화를 창조해왔던 사실들을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했다. ...전통문화 인식과 관련해 중요한 소재는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1975년 6월 문화공보부는 ?퇴폐풍조를 없애기 위해 가요, 음반, 연극, 연화, 쑈 등 공연 및 예술 활동에 대한 사전심사 및 검열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연예술 정화방침 ?을 발표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외부간섭 배제?등을 요구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 기자들의?불온한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게재 광고를 철회하도록 하는 ?광고탄압?을 그해 12월에 시작했다.1974년 12월 26일부터 『동아일보』광고란에는 백지광고들이 수록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기자들의 언론자유회복투쟁을 지지하는 광고를 내거나 구독 문의를 통해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저항을 성원했다.

●1950-6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상계』가 김지하의 「오적」필화사건을 계기로 폐간되었고, 『사상계』의 간판필자였던 함석헌은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씨알)주의적 관점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

●청년문화 논쟁은 동아일보 김병익 기자가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에서 ?불루진과 통기타와 생맥주, 이것은 육당과 춘원,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4.19와 6.3데모로 연연이 이어온 청년운동이 70년대에 착용한 새로운 의상이다?라고 의미부여하면서 촉발되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청년문화선언」을 통해 그러한 대중문화현상으로서의 청년문화에 대해 기성 지식인들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최인호는 기성 지식인들이 청년ㅁ누화를 이해가는 방식을 엘리트주의라 비판하며 문화수용자의 관점에서 통기타와 고고춤,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유행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5월 27일 김종필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청소년들과 부녀자들이 열차, 공원, 유원지 등에서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 부르는 퇴폐풍조가 만연해 있다며, 이를 강력하게 단속할 것을 지시했다.

●청년문화는 청년세대가 기성문화와의 구별 짓기를 표현한 일종의 의상이자, 조국 근대화와 총화단결을 요구받던 대중들이 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일탈과 반항을 일삼을 수 있게 한 하나의 양식이었다. ...정권의 정책 의도와 달리 1970년대 사람들은 권력자의 시선으로 볼 때 ?퇴폐적이고 저속한?대중문화를 향유하며 체제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고도성장기 서민의 체감경제

●1970년대는 한국사회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고도성장의 시대였다. 1970년부터 1979년 사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47%에 달했고, 1965년 1억 7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총수출액이 1979년에 이르면 150억 5500만 달러에 이를 만큼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이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도성장의 반대편에서는 빈부격차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은 제1차 석유파동ㅇ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조치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우선 월수입은 1년 사이에 변동 없이 7만 6000원이었다. 윤모씨는 스스로 자기가구의 생활수준을 ?중류살림살이?로 진단했는데, 1974년 8월 기준 한국노총 산하 전체 근로자 월평균임금 3만 6000원에 비하면 도시 중산층 가정이 맞다. ...1973년 9월 말 전 도시 월급생활자 가계(5인기준)의 한 달 평균 생활비는 4만 7850원이었다. 1974년 2월 기준 공무원 평균 월급이 3만 7900원이었으므로 물가상승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공무원 외벌이 5인 가족의 생활경제는 매월 1만 원 가량의 적자 발생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경제개발은 공간에 대한 권력의 조직적 관리와 재구성의 과정이었고, 그것은 농촌과 도시 사이의 격차, 대도시와 위성도시 사이의 격차, 영남지역과 호남지역 사이의 격차 등 공간의 위계적 서열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남지역 땅값은 폭등을 거듭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16년 동안 강북지역인 중구 신당동의 땅값이 3만 원에서 50만원으로 약 17배가량 오른데 비해서 같은 시기 강남구신사동의 땅값은 400원에서 40만원으로 무려 1000배가 올랐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해 번 월급을 알뜰히 모아 저축하는 서민들은 부동산으로 쉽게 돈을 벌어 쉽게 탕진하는 벼락부자의 모습을 보며 근로의욕을 잃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 소비수준의 향상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상품은 역시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같은 내구성 상품이었다.

 

■안방극장과 대중의 문화생활

●1961년 12월 31일 한국방송공사KBS텔레비전 방송국이 출범한 이후... 1956년경제력에 비해 비교적 일찍 도입된 HLKZ-TV가 있었음에도(미국 가전사 RCA주도하에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로 개국했지만 1959년 2월 비운의 화재로 소실됨)...

●...문화주택이라는 아파트와 연립주택, 심지어는 새롭게 신축되는 단독주택에도 거의 예외 없이 거실, 혹은 응접실이라 일컫는 공간이 도입됐다.

●1970년대 텔레비전은 연극이나 영화, 스포츠 관람, 라디오 청취의 상대적 쇠퇴를 가져와 대준문화의 지형을 크게 바꿔놓았다.

●1957년에 시작된 AFKN-TV는 주로 오락 장르를 편성하여 한국에 미국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사랑방 좌담회와 바람몰이, 그리고 지역 대결

●금권선거의 실태는 특히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라고 불린 1967년 총선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1971년 2월 공화당 출신 국회의장 이효상은 당원모임에서 군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당선되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대선이 다가왔을 때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의 손쉬운 승리를 예측했다. ...그러나 야당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이출승 등 젊은 정치인들이 등장하여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열띤 대통령 후보 경선을 연출했다. ...1971년 대선 때에도 공화당은 사랑방 좌담회를 일찍부터 가장 핵심적인 선거운동 방식으로 정립했다. ...아울러 여당 인사와 그 지지자들은 이러한 소모임 활동을 통해 마을문고 만들기, 마을 장학회 설치, 문패달기 운동 등 생활개선운동을 했다고 한다. ...영남지역에서 박정희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 비해 약 3배 정도 더 득표를 했고, 호남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에 비래 약 2배 정도 더 득표를 했다. ...아무튼 1971년 대선은 지역 대결 투표 양상이 처음으로 가시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우려하기 시작한 선거였다.

●1963년 경남의 1인당 지역 주민소득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경북 역시 전북에 비해 13%가 낮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하에서 경제개발이 영남지역에 편중되면서 1970년대에는 영남의 생활수준이 충청과 호남을 크게 앞질렀으며, 경기지역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었다.

 

■북한의 대중운동과 음악정치

●북한에서는 인민들이 극장에서 관람한 공연작품의 내용과 감동이 노동현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까지 이어지는 것이 참 예술이라고 보았다.

●「피바다」근위대와 「 꽃파는 처녀 」근위대 대원들은 작업 시작 전이나 끝난 후, 또는 작업 중간에 해당 가극의 노래를 함게 부르며 극장을 작업장으로 불러들이고 다시 속도전의 결의를 다졌다.

●북한의 1970년대는 1960년대 경제성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완전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때이다.

●북한은 항일역명문학예술을 대중화시켜 전 인민을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항일무장투쟁의 감성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강반석과 김정숙을 본받아

●북한정권은 두 명이 여성을 역할모델로 내세웠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상은 남편과 아들에게 헌신하는 강반석과 김정숙이었다.

●1970년대 중반이후 북한 계획경제의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드러났다. 많은 수의 공장과 기업소가 자재 및 원료부족 등으로 불안정하게 가동되었다.

 

■일본 : 고도성장을 넘어 선진국으로

중국 : 마오쩌둥 시대의 종언

●1972년 5월 15일, 미군이 점령하던 오키나와 섬이 일본에 반환되었다.

●1971년 7월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1923- )미 국무장관은 저우언라이(주은래 : 1898-1976) 총리와 만났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으로 미중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일본 역시 대중관계 개선에 나섰다. ...1972년 9월 다나카 수상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때 밢된 중일공동성명으로 중국은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하고,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하여 타이완과 단교했다. ...1978년 8월에 중일평화우호조약도 체결되어 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국가의 패권시도에도 반대한다고 합의했다.

●1968년 일본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영국, 서독을 누르고 미국에 이어 국민총생산(GNP) 세계 제2위(소련 포함 세계3위)에 올라섰지만, 1인당 GNP는 세계 20위로브라질과 비슷한 정도였다. 일본 국민들이 높은 소비생활을 무리며 자국이 잘 산다고 느끼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으나, 이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국내에서는 극좌적 노선을 견지하고 사상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미국에 접근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1969년 7월 23일 닉슨 미 대통령은 장기간의 아시아 순방 중에 괌에 들러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1972년 2월 닉슨 미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한 후 미중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양국은 패권주의 반대와 평화공존에 한 목소리를 내고, 중국은 하나이며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의 주장을 채택했다.

●린바오(임모 1907-1971)는 1969년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971년 9월 린바오는 마오쩌둥 암살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처자식을 데리고 소련으로 망면을 꾀했다.하지만 탈출에 사용한 공군기가 연료 부족으로 내몽골 상공에 추락하는 바람에 탑승자 정원이 사망했다.

●린바오 실각이후 저우언라이(주은래 1898-1976)는 피폐된 경제와 행정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주력했다. 그의 노력으로 1972년과 1973년 사이에 문혁으로 실각한 당 간부들이 복권되기 시작했는데,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1893-1976)을 설득해 수용소에 있던 덩샤오핑(1904-1997)을 다시 발탁했다.

● ...덩샤오핑은 1973년 3월에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했고, 저우언라이가 입언한 1974년 후반부터 사실상 국무원을 지휘했다. ...1976년 1월 8일 덩샤오핑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저우언라이가 암으로 사망했다. 1월 15일에 열린 저우언라이 추도대회에서 조사를 읽은 덩샤오핑은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잠시 공식 무대에서 사라졌다. 1976년 저우언라이의 죽음에 이어 주더(주덕 1886-1976)와 마오쩌둥의 죽음이 이어졌다. 이 혼란을 수습할 적임자로 덩샤오핑이 당내에서 부상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차 전체회의는 덩샤오핑의 노선이 당내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역사적 행사가 되었다.

●화궈펑(1921-2008)이 실각하고 덩샤오핑 시대가 완전히 열리는 것은 1981년~82년에 가서의 일이지만. 이 시점에서 중국공산당의 진로는 덩샤오핑이 추진하는 근대화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부유하던 인구정책에서는 1979년부터 인구 억제로 방향이 확정되어 한 자녀 정책이 추진되었다.

●1979년 1월 1일에는 중국과 미국의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1981년부터는 지주나 반동 계급 출신의 자녀에게도 수험자격이 주어져, 출신에 따른 교육차별이 사라지고 마침내 계급 구분 없는 경쟁사회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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