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60년대)

청담(靑潭) 2017. 2. 3. 03:23

 

 

한국현대생활문화사

 

창비(2016. 8.30)

 

 

창작과비평》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내놓는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다양한 조건과 행위가 맞물리며 역사가 창조되는 공간으로서 생활문화 영역, 일상 생활문화를 통해 시대의 특성을 불어넣는 인간들의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변화를 풍부하게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다.

 

출판사 근무를 그만두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애칭 ?이쁜 딸?이 보내준 책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권으로 묶어져 있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 교직에 들어서서 결혼을 하고 우리 아들딸을 낳아 학교에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내가 직접 살아온 시절이요, 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보통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주의 깊게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지켜 보아온 터이다. 이 책은 정치사를 되도록 배제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상당히 엄격하게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더불어 북한의 변화과정과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의 변화과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제2권 1960년대

 

■겨울공화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외침

●1962년 6월부터 사람들은 자정이 되기 전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거리를 배회하면 안 되었다. ...야간통행금지는 치안을 위해 국민이 자율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회적 품행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자는 부랑자나 불량 청소년이거나 아니면 불륜 남녀나 난잡한 유흥에 빠진 대학생들이거나 , 그렇지 않다면 밤을 타 잠행을 하는 불온분자들로 간주되었다.

●박정희는 빈곤을 전체사회, 민족, 국가의 수준으로 추상화시켜 빈곤의 단위를 국가/민족으로 확정하는 후진성의 비교체계를 논리화함으로써 근대적 생산력의 증강을 국가/민족적 목표로 내세울 수 있었다.

●1960년대는 영화의 시대라 할 만큼 다양하고 많은 영하들이 제작되었다.

●한편, 1960년대는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있어 자신감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4.19혁명 전후 도시빈민

●1942년 서울의 토막과 같은 불량주택 거주자만 해도 약 7500여 호, 3만 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남한 인구 1600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750만 명이 구호물자를 받을 정도였다. 특히 미군정 3년 동안 신체장애 등을 지닌 요구호자가 최소 200만 명 이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중 절반은 해방이후 남한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약 150-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북한에서 내려왔는데 이들 월남인들은 도시 곳곳에 정착해 판자촌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민빈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서울이 경우 1955년 150만 정도였던 인구가 1960년에는 250만으로 늘어났다.

●도항노동자 대부분은 돌아올 때 머물렀던 항구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부산항과 마산항이었다.

●이러한 과격한 시위를 벌인 사람들 중에는 소수의 대학생도 포함되어있었지만 대부분은 야간 중고등학교나 공민학교에 재학중인 어린 고학생을 비롯한 도시빈민이었다.

●4.19과정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총 186명이다. 이 중 대학생은 22명인데 비해, 도시빈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층 노동자(61명)와 무직자(33명)는 무려 94명이나 된다.

●그 시절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안정적이 직업을 갖고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수수에 불과했다.

 

■대학과 광장의 탄생

●대학생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4.19 참여자들은 학생을 ?진정한 시민의 탄생?을 실현시킨 주체이자 ?권력의 감시자?로 규정했다.

●1960년대에는 대학신문 발행이 활성화되었고, 이들 매체는 4.19를 전후해 , 그리고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진리와 자유의 광장?으로 기능한다.

●1964년 3월 24일에서 이듬해 9월까지 계속된 한일협정반대투쟁은 연인원 350만 명이 참여했으며, 시위 통제과정에서 500여 명의 구속자와 수천 명에 이르는 연행자, 부상자, 제적생이 생겨났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주역은 대학생이었다.

●학생들은 5.16을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재인식함으로써 박정희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았다.

●1960년대의 역사는 말하자면 4.19와 5.16간의 투쟁이었다는 규정은 이 연대에 가장 첨예한 갈등관계에 놓였던 주체들이 다름 아닌 학생과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박정희가 민정이양 의사를 번복하고 대권에 도전한 이후 군부세력에 호의적이었던 여론은 급속히 냉각되었다.

 

 

■지식인과 잡지 문화

●단연 주시할 만한 현상은 잡지 붐이다. ...『새교육』,『교육평론』등 교육 분야의 전문지가 오랜 기간 명맥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고,『현대문학』,『사상계』,『여원』,『새벗』,『학원』,『아리랑』등의 잡지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면서 통권 100호를 넘겼다.

●1953년 4월 장준하(1918-1975)에 의해 창간된 『사상계』는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 매체였다. ...사실상 『사상계』가 처음부터 5.16군부세력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민정이양 포기 방침이나 다름없던 3.16성명을 계기로 『사상계』는 군사정권에 대한 입장을 새로이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체의 정치적 지향과 투쟁의 목록을 재정비해 나갔다. ...『사상계』도 김지하의 『오적』이 실린 1970년 5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70년에 발생한 유명한 필화사건인 김지하(1941- )의『오적』사건은 단지 해당 시의 문제성을 짚고 창작자를 처벌하기 위해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사회에는 바야흐로 주간지의 시대가 도래했다. ...주갖지 붐을 일으킨 것은 신문매체를 소유하고 있던 언론사였다. ...『 주간한국』(1964년 9월), 『 주간중앙』(1968년 8월),『선데이 서울』(1968년 9월), 『주간조선』(1968년 10월), 『주간경향』(1968년 11월) 등이 연이어 창간되었다. ...주간지는 온 나라의 週歷이었고 주말의 유원지였다고 일컬어 질 만큼 주 단위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도시 생활자들의 삶의 리듬을 더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1년 1월에 창간된 『창비』는 초창기만 해도 100여 면 남짓한 분량으로 출발해 소수의 제한된 독자들에게 동인지처럼 읽혔으나 5년이 채 안되어 300면에 가까운 규모를 갖추는 것은 물론 4,000여명의 독자를 갖게 된다.

 

 

■영화, 독보적인 대중문화

●『춘향전』이후 충무로의 다방은 돈뭉치를 들고 몰려든 전주들과 그들의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영화인과 연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생산, 보급하고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민간의 역량까지 총동원해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을 만들었다.

●1969년에 연간 제작편수는 229편에 이르렀고 전국 극장의 수효도 1962년 344개에서 1970년 690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56년 미국영화 『성의』가 개봉된 이래 한국의 외화시장은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한국영화는 1958년 『생명』으로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열었지만 여전히 흑백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1960년 마침내 혁신을 위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영화계의 라이벌 감독-여배우 커풀이었던 신상옥(1926-2006)․최은희(1926- )와 홍성기(1928-2001)․김지미(1940- )가 동시에 『춘향전』을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시네마스코프 : 와이드 화면

●실제로 일본영화 수입개방은 식민지 세대가 일선에서 물러난 김대중 정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1966년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 방송국이 전국방송을 개시함으로써 텔레비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68년에『미워도 다시한번』은 서울관객 37만 명을 동원하고 타이완고 k일본에 수출되면서 신상옥이 거둔 『성춘향』이 거둔 성공을 재연했다.

 

 

■재벌의 탄생, 부정축재자의 비상

●재벌은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성장 방식을 이끌어온 중요축 중의 하나이자, 가장 큰 수혜자이다.

●재벌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때는 이승만 정권기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법적 처벌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1960 4.19혁명 이후였다.

●1961년 1월 11일 국내 최초의 대자본가 단체인 ?한국경제협의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회장은 김연수, 부회장은 이한원․전택보였다. ...자본가들이 점차 목소리에 힘을 낼 수 있었던 데는 4.19 이후의 국정 목표를 ?경제제일주의?로 내걸었던 장면 정권의 역할이 컸다. 대자본가가 모아주는 정치자금을 받으며 정치권이 경제성장을 갈구하면 할수록 성장담론으로 무장한 대자본의사회적 입지는 커져갔다. ...1968년 8월 28일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일명 전경련으로 개칭했다.

●경제성장을 위한 정부의 파트너로 안착한 후 전경련과 그 회원인 대자본가들은 ?부정축재자?로 자신들을 비판했던 사회여론을 향해서도 발언을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의 안과 밖

●짧게는 한국군이 참전한 8년 6개월, 길게는 1975년 베트남이 몰락할 때까지 한국은 ?월남붐?으로 뜨거웠다. ...최초의 파월은 1964년 8월 24일 의료부대 130명, 태권도 교관단 10명으로 시작했다. ...1965년 3월 건설지원단인 비둘기 부대, 간은 해 전투부대인 청룡․맹호부대, 1966년 6월 백마부대의 추가파병으로 이어졌다. 140명에서 시작된 파병인원은 불과 2년여 만에 4만 5,605명으로 늘었다.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연병력 32만 4864명의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5099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부상자는 1만 962명이었고, 고엽제 환자수는 후유증 4만 5663명, 후유의증 8만 8288명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라기보다는 한국전부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를 반영했다. ...초기 3차(맹호․청룡), 4차 (백마) 전투병 파병은 부대단위로 차출되어 강제로 가야 했다.

●정부는 초기에 군납품을 중심으로 수출계획을 세웠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인력수출에 주력했다. ...1965년 7월 노동청의 공개보집으로 파월기술자 송출이 시작되었다. 당시 최대월급은 450달러 였는데 그해 말에는 600달러가 넘는 액수가 제시됐다. 이는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10배가 훨씬 넘는 액수였다. ...박정히 정권은 베트남의 전장을?제2전선?으로 위치 지움과 동시에 경제전선으로 이미지화했다.

●파월장병들의 눈에 비친 베트남인들은 너무도 무표정했고,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책물자박스?라는 이름으로 전쟁물자가 체계적으로 국내에 유입되었다. 되도록 많은 물자를 획득하는 사람이 애국자요, 유능한 장교였다.

●한국군의 용맹은 한편으로는 베트남인들에 대한 잔혹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조국의 이름?으로 뽑힌 장병들은 파월되기 전 파월장병교육대에서 베트남인들은 모두 적이며 믿어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베트남인들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베트남인들에 대한 양가적 인식, 전장의 불안과 공포, 피해 등이 버무려지면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이 학살이라는 비극이 잉태되었다.

●1967년 징병제도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었고,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1968년 11월 21일부터는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고, 12월 5일에는 총 393자로 이루어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됐다.

 

■병영사회와 군사주의 문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군의 주요 보직을 담당했던 군사영어학교나 육사 선배기수 출신들은 대부분 30세 전후에 젊은 나이에 별을 다는 등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장교양성을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주로 과거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출신들이 입교했다. ...1946년 5월 1일 태릉에 조선경비사관학교가 만들어졌다. 1948년 9월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된 이 학교는 오늘날까지 한국군 간부양성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군내부의 인사 적체로 불만이 가득했던 젊은 장교들은 병력 감축이 군 보직 수의 감소로 이어져 자신들의 생존을 더욱 위협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중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장교들은 육사 8기생들이었다. ...이들은 4.19 혁명을 계기로 부패한 선배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정군운동이? 하극상?으로 규정되어 좌절되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함께 4.19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군사쿠데타를 실행에 옮겼다. 즉 군 장교들의 인사문제에 대한 불만은 그들의 권력욕, 정치 참여 의지와 더불어 쿠데타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 ?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징병제를 합리화하는 가장 원초적인 담론이 되었다.

●1969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교육이 실시되면서, 한국인들은 군대에 가기 전 학교에서부터 군대식 훈육을 받아야 했다.

●향토예비군은 1968년 초,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던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4월 1일 창설되었다.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 근로인민의 탄생

●전후복구사업이 한창이던 1955년, 길확실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평양제사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한다. 그리고 3년 뒤인 1958년 겨욱 21세의 나이에 48명의 동료 노동자를 이끄는 제2직장 제 4작업반장이 된다. 북한역사에서 가장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천리마운동 시기(1950년대 중후반~1960년대)를 상징하는 노력영웅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북으로 간 재일조선인 ?째포?의 삶

●1949년 말 962만 200명에 달하던 북한 인구는 전쟁이 끝난 1953년 12월 849만 1000명으로 전쟁기간 113만 1000명이나 감소했다. ...1956년 김일성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을 요구했으며 1958년 철군이 완료되었다.

●중국 조선족의 귀국사업은 북한과 중국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중국 조선족은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조국에 기여할 꿈에 부풀어 북한으로 귀국했다.

●북한과 어떤 연고도 없는 재일조선인까지 귀국하게 된 데에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에 대한 혹독한 차별과 멸시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상황에서 남한은 대안이 아니었다. 이승만 독재, 5.16군사 쿠데타 등 남한은 정치적으로 혼란을 면치 못했으며, 해이동포에 대해서도 사실상 방기정책을 취했다. 반면에 북한은 교통편 뿐 만 아니라 입국비용까지 부담해가면서 재일조선인을 조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전했다. 북한을 평등한 국가, 노동자의 국가로 선전해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들의 정체성은 조선이었으며 북한에 가도 남한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또한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열렬한 활동가나 일본 공산당 당원, 조선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탓에 온천이나 해외여행을 가듯이 가볍게 생각하고 가방만 하나가지고 간 쟁리 조선인도 적지 않았다. ...재일 조선인은 청진항에 도착하자마자 북한의 ?지상낙원?선전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한주민은 일본에서 온 귀국자를 ?째포 ?즉 在胞라고 부르며 뿌리 없는 존재라고 멸시했다.

●송금액에 따라 연간 100만 엔 이상을 받는 귀국자는 상, 10만 엔 전후는 중, 10만 엔 이하는 하로 분류되었으며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귀국자는 북한주민보다 생활이 더 어려워 ?귀국자 꽃제비?라고 불렀다. ...귀국자가 소지한 개인 재산및 친척 원조는 북한에서 암시장 형성 및 발달에 기초적인 틀을 마련하는 데 역동적 힘을 불어 넣었다. ...당시 평양시 소재 편직, 봉제, 맥주공장 등 북한에서 자랑할 만한 공장은 귀국자의 투자에 의해 지어졌다. ...귀국자는 일본에서 가져온 재산 또는 친척 원조를 통해 막대한 불로소득을 올렸으며 이를 토대로 재산축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건국 초부터 시작된 귀국자의 유입은 북한을 획일적이고 일체화된 사회로 규정할 수 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히려 북한이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였음을 뒷받침한다.

 

■일본 : 고도경제성장 중국 : 문화대혁명의 돌풍

●1960년 7월 성립한 이케다 내각은 ?소득배증계획?을 발표하여 ,이제 정치투쟁은 그만하고 10년 동안 국민소득을 2배 높여 잘살게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국민총생산도 10년보다 더 빠른 7년만인 1968년에 2배로 늘어났다. 이 해에 일본의 GNP는 영국과 서독을 누르고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3이가 된다. 1955년에 전전 수준을 회복한 뒤로 10여년 만에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도성장 시대는 1955~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기 전까지 약 18년간을 지칭한다.

●기업이 활성화된 만큼 노동 수요 역시 급증해 취업시장은 늘 공급부족이었다. ?집단취업열차?가 동북지역에서 도쿄로 젊은이들을 실어 날랐고, 종신고용과 연공제가 고용의 일반적 형태가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국민들에게 일본이 戰火에서완전히 회복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일본경제를 재차 도약시킨 것이 1965년부터 본격화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였다.

●1965년 일본의 텔레비전 보급률은 95%에 육박해 거의 모든 가정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도쿄의 도시경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1950년대 중국은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며 비극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중국의 1960년대는 중소분쟁으로 서막이 올랐다. ...1962년 봄 신장 서부에서 6만 명 이상의 카자흐인가 위구르인이 소련 영내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연말에는 국경분쟁을 겪고 있던 중국과 인도 사이에 대규모 군사충돌이 발생했을 때 소련이 적극적으로 인도를 지원하면서 중소관계는 다시 틀어졌다. 1963년 중국은 다시 공개적으로 소련공산당을 ?수정주의?로 비난하고 나섰다.

●1954년 베트민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패시킨 이면에는 중국군의 막대한 중화기 지원이 있었다. 그 직후 미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은 프랑스를 몰아내고도 남북으로 분열되어 재차 분단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1960년에 들어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망가진 중국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 수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을 대신해 류사오치(유소기)와 덩샤오핑(등소평)이 전면에 나서 경제회복을 지휘했다. ...그러나 경제조정정책이 추진되면서 공산당 지도부 내에 마오쩌둥을 주축으로 하는 극좌파와 실용파사이에는 갈등이 깊어갔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봉건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는 기치 아래 벌어진 대규모 정치운동이다.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권의 중심에서 빌려난 마오쩌둥이 대중동원의형태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실용파를 수정주의로 공격하고 정권을 되찾은 권력투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문화대혁명으로 100만 명 이상이 사망 또는 부상당했으며, 수많은 문화재가 봉건 문화의 잔재라는 명복으로 파괴되었다. ...1400만 명 이상의 어린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상경해 텐안먼광장에서 집회를 가졌고, 마오쩌둥이 직접 광장에 나와 혁명을 격려했다.

●어른들의 장기판의 말이 된 것은 대부분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홍위병과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이었다. ...하이힐과 청바지, 클래식 음악은 공격받았고, 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파괴한다는 ?破四舊?의 슬로건 아래 베이징 시내의 6843 문화재 시설 중 4922개가 홍위병의 공격을 받았다. 문화인과 지식인은 ?학계의 반동적 권위??반혁명분자?로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정적을 다 제거한 후, 1968년부터 청소년들을 지방으로 내려가 농민과 노동자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며 도시청년들을 농촌과 지방 공업단지로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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