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80년대)

청담(靑潭) 2017. 2. 7. 10:55

 

 

한국현대생활문화사

 

창비(2016. 8.30)

 

《창작과비평》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내놓는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다양한 조건과 행위가 맞물리며 역사가 창조되는 공간으로서 생활문화 영역, 일상 생활문화를 통해 시대의 특성을 불어넣는 인간들의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변화를 풍부하게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다.

 

출판사 근무를 그만두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애칭 ?이쁜 딸?이 보내준 책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권으로 묶어져 있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 교직에 들어서서 결혼을 하고 우리 아들딸을 낳아 학교에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내가 직접 살아온 시절이요, 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보통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주의 깊게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지켜 보아온 터이다. 이 책은 정치사를 되도록 배제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상당히 엄격하게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더불어 북한의 변화과정과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의 변화과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제4권 1980년대

 

 

■1980년대, 5월에서 6월로, 그리고...

●..시대적 분기점은 1980년이 아니라 1987년에 주어질 것이다. ...한국경제가 도약할 기회를 얻었던 1985년을 전환의 시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사 사건이 발생했다. ...6.10 국민대회 참가결의대회가 열린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실제로 1987년 노동 대투쟁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과 실질임금이 빠른 속도로 상승했고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도 개선되어갔다. ...1985년 플라자합의가 일본경제의 침체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동시에 한국 경제의 도약기회였다. 경제성장률은 높았고, 물가는 안정적이었다. ...아무튼 대중의 실질소득 증가는 식단의 육식화, 외식의 증가, 스포츠에 대한 관심 증대, 영화관람 기회 증가 등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는 남한이 경제력 면에서 북한을 완전히 압도해나가는 시기였지만 ...북한도 나름의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시대였으며, 그런 점에서 남북간에 어떤 대칭성이 유지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1980년대는 민주화를 경유하며 국제관계에서 일상생활사 수준에까지 엄청난 복잡성과 다양성을 가진 시대로 흘러들어갔다. ...우리 욕망과 접맥되어 작동하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은 독재와의 싸움보다 한결 어려운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시대

●5.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10일간의 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체를 규정했다.

●1985년과 1986년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변곡점이 되는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985년 5월 23-26일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 6월 24-29일 구로동맹파업, 1986년 5.3 인천항쟁이 그것이다.

●6월항쟁이 분출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6월 10밤부터 15일까지 이어진 5박 6일의 병동성당 농성투쟁이었다. ...5.18의 광주와 달리 명동성당은 결코 고립되지 않았고, 6월 항쟁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전국적인 항쟁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으로 마무리 과정에 접어들었다.

●6월항쟁 직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장 먼저 집단적으로 외친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임금인상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야당의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 후보의 통합실패와 분열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우리사회에서독재를 청산하는 길은 멀어져갔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후 1991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였다. ...대략 4년동안 한편으로는 혁명적인 민주화의 열망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고 민중운동세력이 기초적인 조직화의 틀을 마련해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9년 황석영 작가,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의 방북과 관련된 공안통치와 1990년 1월 22일 보수대연합이라 불리는 3당 합당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과정을 끊임없이 역전시키려고 했다.

●1992년 대선에서 군부 출신이 아닌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그것은 국민의 분열을 조장하는 지역주의를 고착시켰던 3당 합당의 열매였다.

 

■80년대의 먹거리 문화, 삼겹살과 양념통닭

●우리의 경우 GDP 500달러를 넘긴 때가 1974년이고 5000달러를 넘긴 때는 1989년이다. ...전체 변화는 곡류소비의 감소와 육류 소비의 대폭적인 증가로 나타났다. ...1980년대의 음식 문화 변동의 중심이 식단의 육식하였다면 1960-70년대에는 식단의 분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식단의 육식화를 뒷받침할 외국산 사료의 대량 수입이이루어지고 국내의 공장식 사육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때는 1990년대라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언제나 중심 육류는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였고, 닭고기보다는 오리고기였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전통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돼지고기보다 쇠고기였고, 오리고기보다 닭고기였다.

●인간이 식육으로 소비할 수 있는 동물은 다양하다. 아마도 전통사회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다양한 동물이 식육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만 해도 꿩고기나 토끼고기가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축산업의 발달은 몇 가지 식육에 생산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런 공급의 힘 때문에 소비도 같은 종류의 식육에 수렴되어가게 마련이다.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가 전체 식육 소비의 95%에 육박하는 우리 사회의 양상도 이런 법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큼직한 비계부위를 가진 삼겹살은 처음부터 소주와 짝지어져 탄광촌을 원점으로 하여 공단지대를 거치고 기업의 저렴한 회식문화를 거쳐 마침내 국민적 사랑을 받는 음식으로 부상해갔다.

●1980년대를 통하여 식육문화에서 영광의 길을 걸은 것은 쇠고기도 돼지고기도 아니고 닭고기였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은 치킨산업의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맥주와 치킨의 조합이 삼겹살과 소주의 조합과 경쟁관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프로야구에 열광하다.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이 ?우리 국민들은 여가 선용의 기회가 별로 없고, 또 한국인은 스포츠를 좋아하니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해보라.?고지시한 지 7개월 만에 이루어진 결과였기 때문이다.

●1904년 황성 YMCA 의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소개했고, 그 무렵부터 YMCA 야구단을 비롯한 한국인 야구클럽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학원야구의 최고 권위는 지금도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고시엔 대회였는데, 지역예선에서 일본인 학교를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한 한국인 학교는 1923년 휘문고보가 유일했다. ...야구는 값비싼 장비와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야구를 할 수 있었다.

●1946년 일보의 고시엔 대회를 본떠 만든 청룡기쟁탈전 전국중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는 전국 각지에서 온 24개 팀, 58명이 출전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1970년대 이후 이촌향도 현상이 급격히 진행된 것 또한 학원야구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어 모은 계기로 작용했다. 생계를 위해 기회를 찾아 도시로 떠나온 이들에게 지역의 명문 야구팀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출신지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원천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1980년 이전까지 실업야구에 참가했던 야구팀은 모두 21개였는데 그중에서 9개팀은 1959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제아무리 재벌 기업과 정치권의지원이 있었다하더라도 대중의 인기가 없었다면 프로야구가 일상에 자리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 직전까지 한국사회에서 절정을 구가하던 고교야구의 인기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점이다. 그 비결은 지역연고제에 있다. ...?지역연고권?의 기준이 선수의 출신지도 최종학교도 아닌 출신 고등학교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프로야구가 당시 고교야구의지역적 인기를 흡수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1980년대 이후 점증해온 프로야구의 인기는 이 무렵 시행된 3S 정책(섹스스크린, 스포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삼엄한 권위주의 통치에 숨죽이던 이 시기 대중에게 야구 관람은 잠깐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바깥공기였고, 야구장은 억눌러온 정치적 울분을 완화된 형태로나마 터트릴 수 있는 해소의 공간이었다. 한편 고도성장이 가져온 전례 없는 풍요 속에서 1980년대의 프로야구는 야구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소비되는 여가 문화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다. 야구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88서울 올림픽과 시선의 사회정치

●서울올림픽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경제성장과 민주화, 중산층의 형성 등 당시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대변했으며 중산층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마이카, 외식, 여가 등이 일상에 자리 잡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서울 올림픽이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게 된 데에는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는 7년간 서울의 풍경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지, 간선도로, 불량 주거지 등에 대한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펼쳐졌다. ...왜 이렇게 많은 변화들이 있었을까? 그것은 정권이 올림픽을 금속한 산업화 과정에서서울이 지녀온 도시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사회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울올림픽은 서울을 위시한 도시민들의 삶을 뒤바꿔놓았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550만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980년 8월 이병철 삼성회장의 주선으로 일본정계의 ?흑막?이라 불리던 세지마 고토 이토추상사 대표와 고토 노보루 도쿄그룹 회장을 만났다. 세지마와고토는 이 자리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 경험을 전하며 국민의사 결집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책으로 올림픽 개최를 제안했다.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의 기적?이라 불리는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이 들어왔다.

●1980년대에는 개방화와 자율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자율화 등이 대표적인 예로, 이는 사회라는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있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고 세계에 우리를 보여주자는 것, 즉 과시가 올림픽의 주요 목적으로 설정되자 반대로 우리가 세계의 시선에 노출되어있다는 인식이 이어졌다. ...도심부 재개발 사업과 주택 개량 재개발 사업, 한강종합개발사업, 도시 녹화사업 등이 1982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83년 2월 서울시는 1986년과 1988년에 있을 두 행사 전에 53개 도심지구와 42개 간선도로변 재개발을 마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그중에는 마포로가 가장 중요한 사업대상이었다. 서울시는 을지로(6개 지구), 태평로(6개 지구), 의주로(4개 지구)보다 훨씬 더 많은 13개 지구를 마포로 주변 재개발 대상지로 선정했다. 이 도로는 1979년 지미 카터 미대통령 방문에 맞춰 개발사업이 진행된 후 ?귀빈로?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 북방정책, 그리고 임수경

●1983년에 발생한 많은 사건들 중 세계사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KAL 007편 보잉747기 격추사건이다. ...19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는 이 사건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발간하는데, 여기서 소련이 고의적으로 민간항공기를 격추한 것이 아니며, 미국 정찰기로 오인한 소련의 실수에서 비롯됐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가장 큰 의문은 KAL기조종사들의 행동이었다. 항공기가 소련 영공 내에 들어갔다는 것을 모를 확률이 거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장은 자신이 정상할로를 밟고 있다고 계속 지상 관측소에 보고했으며, 소련기의 합법적인 경고 시그널을 철저히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태 전개였다.

●1984년부터 새로운 사고를 가진 젊은 고르바초프(1931- )가 소련의 새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 취임 연설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를 강조해 주목을 끌었고, 1986년 4월에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은 1983년의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총 10만 952건의 신청이 접수되어 1만 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2015년 10월 초,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국제자문위원회 회의에서 관련 기록물을 심사 완료하여 10월 9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1985년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남북사이의 대화는 1986년이 되면서 급작스럽게 멈췄다. 북한이 한국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실로 남북체육회담을 제외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1986년에는 북한의 ?금강산댐?건설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사회를 지배했으며, 1987년에는 김현희 등에 의한 KAL 858편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1988년 이후 정부차원의 북방정책과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은 박철언(1942- )과 임수경(1968- )이다.

●1989년 2월에 헝가리와, 11월과 12월에 각각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와 각각수교를 맺었다. 이어 1990년 3월에는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수교했다. 그리고 1990년 9월 마침내 소련과,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에는 북한을 대화와 교류의 대상이라고 천명한 1988년 7.7선언 이후의 모든 노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폐쇄되었다.

 

■500만 호에서 5개 신도시까지

●1945년부터 공공주택 건설의 핵심은 ?국민주택 건설?이었다. ...1972년 주택건설촉진법에서 규정한 국민주택의 규모는 10-12.5 평이었지만, 이듬 해 18-25.7평(40-85㎡)로 확대됐다. ...1980년 서울에서 분양된 주택의 약 80%가 국민주택 규모 이하였다.

●1980년에는 우리나라 전체가구 중 32%가 수도권의 단독주택에서 전월세로 살았고, 1990년에도 33%가 그랬다. 그 10년간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는 42%나 증가한 반면 단독주택 전월세 가구의 비율이 그대로였던 것은 늘어나는 가구 수를 다세대주택으로 변한 단독주택이 수용했다는 의미이다.

●1980년대는 비교적 물가가 안정된 시기였다. ...1980년 ?초호화?아파트의 분양가가 평당 100만원 정도였는데, 1990년 소형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215만원에 달했다. 원가연동제를 통해 주택가격이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안정된 시기에도 전셋값은 요동을 쳤다. 1987년 1월에는 한 달 akas에 강남의 소형아파트 전셋값이 30%나 오른 일도 있었다. 1987년에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주요도시에서 주택임대료가 상승했다. 이 무렵 집값은 안정세를 이어갔던 탓에 전세가가 집값의 70-8-% 선까지 올랐다. 춘천, 원주와 서울 강남구 일부아파트에서는 전세가와 집값이 역전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어찌됐든 1988-91년 돈안 서울지역 아파트 값이 평균 2.6배 상승하고...

●1980년대 초에 추진된 사회주택으로서의 공공주택 정책과 1980년대 후반의 조처들은 서민들로 하여금 언젠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완전승리의 전시장이 된 평양의 명암

●2002년 6월 20-25일 와다 하루키 교수가 평양을 찾았다. ...?새산 평양은 극장도시, 북은 극장국가라고 느꼈다.?라고 술회했다. ...극장국가란 힘이나 정통성보다는 형식과 의례에 의해 권력이 유지되는 국가형태를 말한다.

●북한이 극장국가라면 그 수도인 평양은 북한체제가 세우고 싶어 하는 권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평양이라는 도시는 그자체가 ?우리식 사회주의?의 승리를 외쳐대는 확성기이자, 그 승리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거대한 스펙터클이다.

●1980년대 평양의 도시개발은 도시 확장과 국제도시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과시용 시설의 건설은 ? 이르는 곳마다 극장, 영화관, 야영소, 휴양소, 정양소, 공원, 유원지, 유희장을 비롯한 온갖 문화시설이 꾸려져 있다.?는 김정일의 호언장담과 연결된 것이었다.

●북한은 전 세계를 향해 ?우리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뽐내기 위해 평양을 ?극장도시?로 만들었다. 그 극장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경제가 이미 어렵던 상황에 무리하게 축전을 개최하고 대규모 건설사업을 강행한 것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촉발했다는 평가도 있다. 거대한 마천루는 그 그림자도 긴 법이리라.

●북한 사람들은 지위와 계층에 따라 규격화된 독립가옥이나 아파트 등을 지정받아 사용하고 임대료를 지불한다. ...한 편 평양시민들은 선택받은 집단으로서의 선민의식을 가졌다. ...평양시민들은 평양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가지 특권을 노렸지만 각종 정치행사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보천보전자악단과 북한의 신세대

●김정은 시대의 모란봉악단, 김정일 시대의 보천보전자악단

●김정은은 ?백두산 줄기 만경대 가문?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할아버지 김일성과 닮아 보이게 했다.

●2012년 5월에 있었던 모란봉악단 창단 공연은 파격의 결정판이었다. 단원들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10센티미터 이상 되는 킬힐을 신었다.

●김일성은 음악이 인민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적군을 와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 인민대중의 사상과 정서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 인민 스스로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새로운 사회부의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북한 음악의 방향성은 김정일의 『음악 예술론』으로 집약되었다. 『음악 예술론』은 가요부터 연주, 지휘에 이르기까지 북한 음악의 창작 규범을 세운 경정이자 지침서이다. 김정일은 여기서 형식과 내용의 인민성을 강조했는데, 인민성이란 ?인민들의 정서에 맞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즉 내용과 창법 모두 인민의 정서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장 큰 특징은 전자음악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일본 : 풍요의 끝에서

중국 : 걸음마를 뗀 경제 근대화

●레이건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 국민들은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진 미국 수입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거꾸로 일본은 가치가 2배로 뛴 엔화를 이용해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1980년 일본 GNP는 세계 GNP의 9%였으나, 1988년에는 14%로 늘어났다. 1950년의 1%, 1960년의 3%, 1970년의 6%와 비교하면 일본경제는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팽창 속에서도 10배 가까운 속도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엔화가치의 폭등과 내수 확대정책은 일본 국내에 과잉유동성과 부동산 가격 급등을 야기했고, 이는 결국 거품경제로 이어졌다.

●빌려가는 사람이 없어 은행에 돈이 쌓여 있으니 일본 시장에는 돈이 넘쳐나는 과잉 유동성이 발생했다.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폭등하자 쌓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던 은행이 나서서 부동산에 대한 직접투자와 부동산 투자회사 및 제2금융권에 대한 대출을 크게 늘렸다. ...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1990년 일본 전체 토지가격 총액은 1985년 말의 2.4배로 뛰면서 미국 전체 토지 가격의 4배나 되었다. ...1955년부터 1990년까지 소비자 물가가 약 5배 오른데 반해 전국 평균 주택가격은 약 72배나 올랐다. ?부동산 불패신화?가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부동산과 주식투자는 ?재테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일반인에게 붐을 이뤘다.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 세계 1위 국가는 1872년부터 2013년까지 141년간 예외 없이 미국이었지만, 2위 자리는 1985년 마침내 소렴을 밀어낸 일본에 돌아갔다.

●1989년을 거점으로 일본은 전후 성장 신화에 마침표를 찍고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1990년 10월 1일 일본주가는 2만 엔대로 폴락해 1년 전 최고치에 비해 무려 49%나 하락했다. ...마치 바통터치라도 한 것처럼 한국과 중국의 경제가 맹렬한 성장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중국의 농촌 곳곳에서 개인 또는 2-3개 농가가 힘을 합쳐 기업을 운영하는 사례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농업과 향진기업 주도의 경제성장이 도시 위주의 공업 주도로 바뀐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90년부터 무역이 흑자로 전환되었고, 1993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무역 흑자가 안정적으로 증가했다.

●1989년 ...자오쯔양(조자양 1919-2005)은 학생시위를 애국적 민주화운동이라고 칭하고, 5월 19일 텐안먼 광장에 나타나 학생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후 공적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 2005년 사망할 때까지 다시는 정치무대에서 볼 수 없었다. ...1980년대를 이끌었던 덩샤오핑, 후야오방, 자오쯔양 트로이카도 깨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