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다산시문집(정약용)

청담(靑潭) 2017. 5. 28. 22:41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약용(1762~1836)

1762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났다. 다산은 7세 때 ‘산’이라는 시를 쓸 정도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실학에 뜻을 두었으며 유교 경전과 주자의 집주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다산은 1783년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28세 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762-1789 : 학문기(28세까지)

1789-1801 : 관료시기(40세까지)

1801-1818 : 강진유배기, 저술기(57세까지)

1818-1836 : 고향 마현 시기, 학문 마무리 시기(75세 졸)

 

■석지부(惜志賦)

서글퍼라 내 인생 좋은 때를 못 만나 / 愍余生之不際兮

가는 앞길 험난하여 자주 죄에 걸리었네 / 數迍邅以離尤

기특한 재주 안고서 오락가락 맴도니 / 抱瓌瑋而徊徨兮

뭇사람 하찮게 여겨 재앙을 끼치누나 / 衆芥視而詒災

내 자신을 반성하여 행실 더욱 닦았지만 / 聿反躬而篤修兮

억울하고 번뇌로움 사라지진 않는다네 / 遝僝僽其靡休

궁궐문이 이미 막혀 들어가지 못하니 / 閽旣閡而弗達兮

쇠스랑과 괭이로써 논밭 어찌 다스리리 / 何銚鎒以治疇

처음에는 숨어서 소곤소곤 비방터니 / 始譻而微吹兮

나중에는 시끌버끌 떼지어서 소란피워 / 迺詾擾而群啾

내 스스로 살펴보면 깔끔하고 해맑으니 / 余內視其的皪兮

죄를 비록 씌운대도 마음 어찌 상하리 / 雖糾譑亦何傷

공야장은 새소리 듣고 포승줄에 묶였으나 / 冶聆禽而速縲兮

중니께서 억울함 밝혀 그 이름이 드러났고 / 尼訟枉而名揚

장재는 불가를 믿고 중년에 숨었으나 / 載信釋而中遯兮

주자가 스승으로 높여 모든 공격 그치었네 / 晦師崇而息攻

올바르고 고운 사람 넘어진 게 애달픈데 / 悲嬥嬈之倖兮

두들기고 짓밟아서 여지없이 부러졌네 / 紛㩢揳而胥折

입으로는 말하고파도 얼버무려 분명찮고 / 口欲言而䛠譳兮

기운은 겁나고 불안하여 가슴에 응어리졌네 / 氣螴蜳而內結

물들여도 의를 지켜 변치를 아니하니 / 義雖緇而不涅兮

날더러 추잡함을 씻기 어렵다 이르네 / 謂吾涴其難雪

그들의 어리석음 탓할 것이 뭐 있겠나 / 彼怐愗其奚訕兮

내 허물 애써 살펴 장차 잘하면 그만인걸 / 蘉省戾以追來

용은 힘차게 꼬리치며 높은 하늘 달리는데 / 龍蚴蟉以上騰兮

도마뱀은 비실비실 기를 펴지 못하고 / 蝘委頓而低回

준마 발굽 씩씩하여 드넓은 길 치닫는데 / 驥馺以騁康兮

두꺼비는 엉금엉금 제 신세를 슬퍼할 뿐 / 蟾蜍蠢而自哀

두 아름다움 지니고서 이를 모두 놓쳤으나 / 執兩美而並遺兮

그 가지 무성하고 뿌리 깊길 바란다네 / 冀峻茂而栽培

비할 데 없이 맛 좋은 오자 음식 앞에 두고 / 旨五齊其莫況兮

싱거운 걸 씹으며 어찌 만족할 수 있으리 / 曰䭕澉而可厭

아스라이 넓은 바다 물결 없이 잔잔한데 / 海漫漫其無潮兮

고래 놈이 모두 쓸어 한 입에 삼키려네 / 鯨鯢嗿而欲餂

궁한 귀신 보낸 한유 더한층 따라붙고 / 愈餞窮而益附兮

재주 뽐낸 소자첨 역시 좌천당하였네 / 瞻詡才亦遭貶

이미 천명 신봉하여 어기지를 아니하니 / 旣戴命而莫違兮

한스러워할 것이 또한 뭐가 있으리 / 又何爲乎內慊

※賦 : 한문문체의 하나로 본래 ≪시경≫의 표현방법의 하나로서,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과문(科文)에서, 여섯 글자로 한 글귀를 만들어 짓는 글을 말한다.

※다산 40세 때인 순조 1년(1801) 경상도 장기에서 귀양살이 도중에 지은 작품이다.

 

■봄에 막내숙부를 모시고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면서

[春日陪季父乘舟赴漢陽] : 15세 때 작품

아침 햇살 받은 산 맑고도 멀고 / 旭日山晴遠

봄바람이 스친 물 일렁거리네 / 春風水動搖

도는 기슭 만나자 키를 돌린 뒤 / 岸廻初轉柁

여울 빨라 노 소리 울리지 않아 / 湍駛不鳴橈

옅푸른 풀 그림자 물위에 뜨고 / 淺碧浮莎葉

노오란 버들가지 하늘거린다 / 微黃着柳條

차츰차츰 서울이 가까워지니 / 漸看京闕近

울창한 삼각산이 높이 솟았네 / 三角鬱岧嶢

 

■장차 화순으로 가려면서 가군을 모시고 소내로 와 여러 숙부ㆍ형들과 작별하다[將赴和順 陪家君至苕川 留別諸父諸兄]

남쪽 고을 수레를 따라가는 날 / 南縣隨車日

동산에 이별 술잔 기울이는 때 / 東岡飮餞時

머언 여행 즐겁지 않을까마는 / 遠游非不快

오랜 이별 그리움 어찌 견딜꼬 / 久別奈相思

일찍이 보던 서책 어른거리고 / 書憶曾抽卷

전에 기댄 소나무 생각나겠지 / 松憐舊倚枝

호시의 뜻을 살려 길을 떠나세 / 行哉弧矢志

민간의 풍속 또한 두루 알아야 / 謠俗合周知

※이때 부친께서 현감이 되셨는데 10월이다. 아내도 따라서 소내로 함께 왔다

 

■전주를 지나며[過全州]

큰 나라라 왕 자취 환희 빛나고 / 大國昭王跡

이름난 성 길손 눈 휘둥그레져 / 名城壯客眸

들판은 거발에서 멀리 트였고 / 野從居拔遠

산맥은 대방 닿아 끝이 안 보여 / 山接帶方幽

누각 궁궐 서울을 옮겨 놓았고 / 樓闕移京邑

의관 문물 사류와 다름없고녀 / 衣冠擬士流

임금 위엄 만백성 가슴 놀래고 / 王威驚萬衆

사당 모습 천년토록 엄숙하구나 / 廟貌肅千秋

옥신발 구름 기운 일어나는데 / 玉躞生雲氣

붉은 활로 달밑에 노니셨으리 / 彤弓想月遊

아름답네 풍패의 거룩한 이름 / 洵哉豐沛號

두 문의 머리 위에 휘황찬란해 / 輝赫二門頭

 

■순창에서 못가의 누각에 올라[登淳昌池閣]

대숲 속에 단청한 누각이 있는데 / 綵閣脩篁裏

버드나무 물가엔 붉은 놀잇배 / 紅船臥柳邊

모래톱이 따스해 물오리 졸고 / 沙暄容鴨睡

마름이 움직이자 고기 헤엄쳐 / 藻動任魚穿

큰 읍이라 거두는 세금이 많아 / 大邑饒租賦

부잣집엔 풍악을 즐겨 노는데 / 豪家嗜管絃

술잔 따라 돌리는 나이 어린 기생 / 傳觴有小妓

치맛자락 연달아 펄럭이누나 / 裙帶自翩翩

 

■여름에 소내로 돌아오다[夏日還苕川]

긴 여름 도성에서 시름하다가 / 長夏愁城邑

조각배로 물 고을 돌아왔다네 / 扁舟返水鄕

드문 촌가 먼 경치 바라다보니 / 村稀成遠眺

우거진 숲 서늘함 충만하여라 / 林茂有餘涼

의관은 게을러서 아니 정돈코 / 衣帶從吾懶

시서는 전일의 것 읽어 본다네 / 詩書閱舊藏

진퇴를 아무래도 정하지 못해 / 行休苦未定

생리를 어부에게 물어나 보리 / 生理問漁郞

※1780년 경, 홍공(洪公 다산의 장인 홍화보(洪和輔 1726-1791)께서 경상우도 병사(慶尙右道兵使)로 나가셨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소내로 왔다가 얼마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은 1776년 화순현감을 지내고 1780년(정조 4)에는 예천군수를, 1790년에는 진주목사를 지냈다.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려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悵然有作]

호남의 나그네로 오래 있다가 / 久作湖南客

이제는 대숲 정자 하직하누나 / 今辭竹裏亭

문 나서니 봄 들판 새파랗고요 / 出門春野綠

고개 돌리니 새벽 연기 푸르르구나 / 回首曉煙靑

늘어선 산은 마치 길을 막는 듯 / 列岫如遮路

외론 솔은 뜨락에 그대로 있다 / 孤松好在庭

정든 조공 그 어찌 잊을 수 있나 / 曺公那可忘

말 멈추고 산가 문 두드린다네 / 駐馬叩山扃

※ 이른 봄에 백씨(伯氏 다산의 맏형 약현(若鉉))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홍일보(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때 부친께서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洪公)께서 이때 영우절도사(嶺右節度使)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 1780년 경 다산의 나이 19세 때 지은 시이다.

 

■부친을 모시고 소내로 돌아오다[陪家君還苕川]

봄바람 온누리에 가득 일어나 / 春風滿天地

산들산들 옷깃을 불어주누나 / 拍拍吹人衣

이로부터 고향땅 돌아가면은 / 自玆返鄕里

그 어찌 시시비비 다시 있으리 / 寧復有是非

우리집의 남새밭 한두 뙈기는 / 園田一二頃

토질 고와 채소 과일 탐스럽거니 / 土軟蔬果肥

찌고 구운 고기야 있지 않지만 / 爒雖不備

그 또한 주린 창자 채울 만하네 / 亦足充吾饑

정성 들여 닭 돼지 기르며 살면 / 勞心養鷄豚

왕도 정치 백성에 흠이 없으리 / 王政可無違

흐뭇하게 천륜을 즐기는 생활 / 陶然樂天倫

이 일은 그야말로 희귀하다오 / 此事良所稀

※신축년(1781년 다산의 나이 20세)이다. 이때 부친과 홍공께서 다 문초를 받아 부친은 고신(告身)을 환수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홍공은 숙천(肅川)으로 귀양갔는데, 2월이었다

 

■지루한 객지의 생활[倦遊]

고향에서 처자와 살 만도 한데 / 鄕里堪携隱

서울에서 또다시 지루한 생활 / 京城又倦遊

문장은 세속 안목과 맞지 않고 / 文章違俗眼

꽃과 버들은 나그네 시름 자아내 / 花柳入羈愁

먼지 막는 부채를 여러 번 들고 / 屢擧遮塵扇

산골로 가는 배를 노상 그리네 / 長懷上峽舟

사마상여 그 또한 천박한 사람 / 馬卿亦賤子

제주한 일 무엇을 구하렸던고 / 題柱俗何求

※이때 성균관 시험에 세 번째 낙방하고 회현방(會賢坊)에 머물러 있었다. 제주는 기둥에 글을 쓴다는 뜻인데 한(漢) 나라 사마상여가 처음에 벼슬하기 위해 서쪽의 장안(長安)으로 들어갈 때 승선교(昇仙橋)를 지나가다가 다리 기둥에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으리라.”라고 쓴 일을 말한다. 곧 반드시 고관대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것인데, 다산은 그것이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임인년 중춘에 체천정사에서 지내며 짓다[壬寅歲仲春 僑居棣泉作]

오래 전에 서울로 오려 했던건 / 久欲就京城

살림집 마련하자 한 게 아니니 / 非爲居室營

좋은 벗의 즐거움이 있지 않으면 / 不有良友樂

그 어찌 깊은 정을 풀 수 있으리 / 何以暢幽情

안절부절 나그네 한탄하다가 / 棲棲歎行旅

세월이 문득 이미 바뀌었는데 / 歲月忽已更

남산 곁에 자그만 집이 생기어 / 小屋南山側

다행히도 숙원을 이루었다네 / 幸玆夙志成

몸 하나 기거하면 그걸로 충분 / 取足庇微軀

탁 트인 머름 난간 필요치 않아 / 不必敞軒楹

수시로 궤안 좌석 마련 하여 / 時時設几席

형제처럼 화기가 넘친 가운데 / 湛私如弟兄

묘한 글 의문난 곳 분석해 보며 / 奇文析疑義

속마음을 즐겁게 서로 나누니 / 有懷欣與傾

가난한 형편이야 말이 아니나 / 簞瓢雖不給

그런대로 이 인생 즐길 만하네 / 可以娛此生

※선혜창(宣惠倉)이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으므로 그곳을 창동(倉洞)이라 하며 그 동에 두 우물이 있는데, 그것을 형제천(兄弟泉)이라 한다. 임인년(1882년) 봄에 이곳을 사들여 살면서 체천정사(棣泉精舍)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정사는 냇물의 남쪽 지역에 있으며 사립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나의 하소연[述志]

소년시절 서울로 나가 노닐어 / 弱歲游王京

교제하는 수준이 아니 낮았네 / 結交不自卑

속기 벗은 운치가 있는 그걸로 / 但有拔俗韻

충분히 속마음을 통할 수 있네 / 斯足通心期

힘을 다해 공맹의 도를 따르고 / 戮力返洙泗

두 번 다시 시속을 묻지 않아서 / 不復問時宜

예의는 비록 잠깐 새로웠으나 / 禮義雖暫新

허물 후회 이에서 또한 생겼네 / 尤悔亦由玆

지닌 뜻 확고하지 않다면 / 秉志不堅確

가는 이 길 그 어찌 순탄할쏘냐 / 此路寧坦夷

언제나 두려워라 중도에 변해 / 常恐中途改

뭇사람 웃음거리 되지 않을지 / 永爲衆所嗤

우리나라 사람들 애닯다마다 / 嗟哉我邦人

주머니 속에 처한 듯 궁벽하거니 / 辟如處囊中

삼면으로 바다가 에워쌌는데 / 三方繞圓海

북방에는 산맥이 누르고 있어 / 北方縐高崧

사지 삭신 언제나 펴지 못하니 / 四體常拳曲

욕망 염원 그 어찌 채울 수 있나 / 氣志何由充

성현은 만 리 밖에 멀리 있거니 / 聖賢在萬里

뉘 능히 이 어둠을 밝혀 주려나 / 誰能豁此蒙

고개를 들어 온 누리 쳐다보아도 / 擧頭望人間

보이는 것 없어라 정신만 흐려 / 見鮮情瞳曨

남의 것 모방하기 급급하느라 / 汲汲爲慕傚

흠은 미처 정밀히 못 따지는데 / 未暇揀精工

뭇 바보가 한 천치 치켜세우고 / 衆愚捧一癡

왁자지껄 다 함께 받들게 하니 / 唅令共崇

순박한 옛 풍속을 간직하였던 / 未若檀君世

단군의 세상보다 못하다는 거야 / 質朴有古風

 

■사마시의 방방하던 날 창덕궁으로 나아가 임금을 뵙고 물러나서 짓다[司馬試放榜日 詣昌德宮上謁 退而有作]

남포를 지어 입고 대궐로 들어가니 / 齊綴藍袍入紫宸

승지가 안내하여 섬돌 아래 늘어섰네 / 鴻臚引接到階陳

옥피리가 바람따라 신선 의장대 옮기고 / 玉簫風轉移仙杖

고운 일산 깊은 곳에 성인이 앉으셨네 / 華蓋雲深坐聖人

법주에다 은술잔 은총 두루 입었고 / 法酒銀杯沾渥遍

백패에다 붉은 모자 가슴에 처음 안았지 / 賜牌紅帕挿懷新

임금 말씀 대답하고 기분좋게 물러나니 / 恩言對罷委蛇退

궁중 버들 성안의 꽃 바야흐로 늦봄일레 / 宮柳城花正暮春

 

■감흥(感興) : 24세 때

전국시대 오히려 태고적이라 / 戰國猶近古

유능한 인재만을 선발했거니 / 選士唯其賢

유세하는 선비가 경상이 되고 / 游談取卿相

다른 나라 사람도 앞에 섰었네 / 客旅多居前

홍도라 경쟁의 문 열린 뒤로는 / 鴻都啓爭門

겉치레 문장만이 날로 성해져 / 詞藻日紛然

영욕이 한 글자로 결판이 나서 / 榮悴判一字

하늘과 땅 차이로 일생 갈리니 / 畢世分天淵

의기 높은 선비는 아니 굽히고 / 伉厲恥屈首

산야에 버려짐을 달게 여겼네 / 山澤甘棄捐

세상살이 음주와 흡사하거니 / 涉世如飮酒

처음에 마실 때는 한두 잔이나 / 始飮宜細斟

마신 뒤엔 금방 곧 취기가 돌고 / 旣飮便易醉

취한 뒤엔 본마음 어두워져서 / 旣醉迷素心

몽롱한 정신으로 백 잔 마시고 / 沈冥倒百壺

거친 숨 몰아쉬며 계속 마시네 / 豕息常淫淫

저 넓은 산림에는 살 곳이 많아 / 山林多曠居

슬기론 자 일찍이 찾아가는데 / 智者能早尋

생각만 간절할 뿐 가지 못하고 / 長懷不能邁

헛되이 남산 기슭 지키고 있네 / 空守南山陰

■인일에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서 짓다[人日熙政堂上謁 退而有作] : 1788년 27세 때

호관에서 수많은 선비를 불러 / 虎觀徵儒廣

용문에서 오늘날 책문 올렸네 / 龍門獻策新

대궐 뜰 상서로운 눈이 남았고 / 禁庭餘瑞雪

궁중 술 아름다운 때에 나왔네 / 宮酒屬佳辰

미천한 몸 무거운 은총을 받아 / 疏逖承恩重

오랜 시간 접견을 베푸셨다네 / 淹留賜顧頻

흩날리는 궁중의 개천가 버들 / 霏霏御溝柳

온 성안의 봄빛을 기다리는 듯 / 應待一城春

 

■완두가(豌豆歌) ※천연두

작은 아이 말 배워도 그대 아니 기뻐했고 / 小兒學語君莫喜

큰 아이 글자 배워도 그대 아니 믿었었지 / 大兒學字君莫恃

완두창을 이겨내자 골격 이제 변하여 / 豌豆瘡成骨格變

오늘에야 의젓이 두 아들을 두었구나 / 今日居然有二子

두 아들에게 내 장차 큰 덕을 밝히게 하여 / 吾令二子昭大德

제왕의 고굉으로 큰 재목이 되고 지고 / 擎天捧日隨所使

 

■정월 스무이렛날 문과에 급제하여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 짓다[正月卄七日賜第 熙政堂上謁 退而有作]

임헌시에 여러 번 응시했다가 / 屢應臨軒試

마침내 포의 벗는 영광 얻었네 / 終紆釋褐榮

하늘이 끼친 조화 깊기도 하니 / 上天深造化

미물이 낳고 자람 후히 입었네 / 微物厚生成

무능해 임무 수행 어렵겠지만 / 鈍拙難充使

공정과 청렴으로 충성 바치리 / 公廉願效誠

격려하신 옥음이 많이 내리어 / 玉音多激勵

그런대로 노친의 마음 흐뭇해 / 頗慰老親情

※이때 반시(泮試 : 성균관에서 선비들에게 보이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내각에서 여러 강관과 함께 물러나오며[內閣同諸講官退朝]

협양문 밖에 군현들 질서 있게 앉아서 / 協陽門外序群賢

아침나절 경을 펴고 저녁에는 전 올리네 / 朝日橫經夕進箋

박학하신 임금님은 제자도 많을시고 / 博學君王多弟子

문장 짓는 경사들은 청아하기 신선일레 / 摛文卿士若神仙

솔은 상쾌한 바람 궁 벼루에 불어주고 / 松含爽籟吹宮硯

꽃향기 조복에 묻어 어연으로 오르누나 / 花撲朝衣上御筵

본디부터 응유 재주 천하에 독보이거니 / 自是應劉才獨步

거친 문사 무딘 필치 어찌 감히 앞서리까 / 蕪詞鈍筆敢居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

 

■귀양간 지 열흘 만에 특별히 사면의 교지를 받다[在謫十日特蒙赦旨] : 1790년 3월

탱자꽃 성마을에 대궐 꿈을 꾸던 중 / 枳花城邑夢丹墀

천상 금계 움직여 금방 사면이 되었네 / 天上金鷄放未遲

이웃집서 보내온 병술 아직 남았는데 / 隣餽尙贏壺裏酒

보따리엔 객창의 시 지은 게 전혀 없네 / 客游全少橐中詩

비 내린 산정에는 매실이 살이 찌고 / 山亭送雨團梅子

봄이 지난 역마길엔 버들가지 치렁치렁 / 驛路經春長柳絲

돌보아주신 임금의 후한 마음 입었지만 / 縱荷荃心紆眷顧

황혼이라 가기에 감히 가지 못할레라 / 黃昏不敢赴佳期

 

 

▣다산시문집 제2권

■남원 광한루에 올라[登南原廣寒樓]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 層城曲壘枕寒流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 / 萬馬東穿得一樓

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 井地已荒劉帥府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 / 關防舊鞏帶方州

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 雙溪草綠春陰靜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 / 八嶺花濃戰氣收

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 烽火不來歌舞盛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 / 柳邊猶繫木蘭舟

 

■추풍령을 넘으며[踰秋風嶺]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 二白飛騰脊勢强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 神龍於此地中藏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 溪通北地趨黃澗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쌌네 / 山出西枝繞赤裳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았다만 / 每向高峯增塹壘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느 누가 안단 말고 / 誰知平陸是關防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 淸州大野開千里

추풍령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 一據秋風便搤吭

 

■교지를 받들고 지방을 순찰하던 중 적성의 시골집에서 짓다[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 : 1794 암행어사 파견시

시냇가 찌그러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 臨溪破屋如瓷鉢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다 / 北風捲茅榱齾齾

묵은 재에 눈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 舊灰和雪竈口冷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 壞壁透星篩眼豁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 室中所有太蕭條

모조리 다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된다오 / 變賣不抵錢七八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 걸려 있고 / 尨尾三條山粟穎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놓여 있다 / 鷄心一串番椒辣

깨진 항아리 뚫린 곳 헝겊으로 발랐고 / 破甖布糊穿漏

찌그러진 시렁대는 새끼줄로 얽매었네 / 庋架索縛防墜脫

놋수저는 지난날 이정에게 빼앗기고 / 銅匙舊遭里正攘

쇠냄비는 엊그제 옆집 부자 앗아갔지 / 鐵鍋新被隣豪奪

닳아 해진 무명이불 오직 한 채뿐이라서 / 靑錦敝衾只一領

부부유별 그 말은 가당치도 않구나 / 夫婦有別論非達

어린것들 입힌 적삼 어깨 팔뚝 나왔거니 / 兒稚穿襦露肩肘

태어나서 바지 버선 한번 걸쳐보았겠나 / 生來不著袴與襪

큰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 大兒五歲騎兵簽

작은애도 세 살에 군적에 올라 있어 / 小兒三歲軍官括

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 兩兒歲貢錢五百

어서 죽길 원할 판에 옷이 다 무엇이랴 / 願渠速死況衣褐

갓난 강아지 세 마리 애들 함께 잠자는데 / 狗生三子兒共宿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으르렁거려 / 豹虎夜夜籬邊喝

남편은 산에 가 나무하고 아내는 방아품 팔러 가 / 郞去山樵婦傭舂

대낮에도 사립 닫혀 그 모습 참담하다 / 白晝掩門氣慘怛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 晝闕再食夜還炊

여름에는 솜 누더기 겨울에는 삼베 적삼 / 夏每一裘冬必葛

들냉이나 캐려 하나 땅이 아직 아니 녹아 / 野薺苗沈待地融

이웃집 술 익어야만 찌끼라도 얻어먹지 / 村篘糟出須酒醱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자가 닷 말이라 / 餉米前春食五斗

이로 인해 금년은 정말 살 길 막막하다 / 此事今年定未活

나졸놈들 문밖에 들이닥칠까 겁날 뿐 / 只怕邏卒到門扉

관가 곤장 맞을 일 걱정일랑 하지 않네 / 不愁縣閣受笞撻

어허 이런 집들이 온 천하에 가득한데 / 嗚呼此屋滿天地

구중 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 九重如海那盡察

직지사자 그 벼슬은 한 나라 때 벼슬로서 / 直指使者漢時官

이천석 지방관도 마음대로 처분했지 / 吏二千石專黜殺

어지럽고 못된 근원 하도 많아 손도 못대 / 獘源亂本棼未正

공황 다시 일어나도 바로잡기 어려우리 / 龔黃復起難自拔

아서라 옛날 정협 유민도를 본받아 / 遠摹鄭俠流民圖

이 시 한 편 그려내어 임에게나 바쳐볼까 / 聊寫新詩歸紫闥

 

■굶주리는 백성들[飢民詩]

풀인 양 나무인 양 우리네 인생 / 人生若草木

물이며 흙으로만 살아간다네 / 水土延其支

힘껏 일해 땅의 털 먹고 살거니 / 俛焉食地毛

콩과 조 그게 바로 적합하건만 / 菽粟乃其宜

콩과 조 진귀하기 주옥 같으니 / 菽粟如珠玉

혈기가 무슨 수로 기름질쏘냐 / 榮衛何由滋

야윈 목은 늘어져 따오기 모양 / 槁項頫鵠形

병든 살결 주름져 닭가죽일세 / 病肉縐鷄皮

우물 두고 새벽 물 긷지를 않고 / 有井不晨汲

땔감 두고 저녁밥 짓지를 않아 / 有薪不夜炊

사지는 그런대로 움직이지만 / 四肢雖得運

걸음걸인 맘대로 못하는 형편 / 行步不自持

너른 들판 매서운 바람 많은데 / 曠野多悲風

슬픈 기럭 저물녘 어디로 가나 / 哀鴻暮何之

고을 사또 어진 정사 행하고 / 縣官行仁政

사재 털어 구제해 준다는 말에 / 賑恤云捐私

엉금엉금 관아문 걸어들어가 / 行行至縣門

입 쳐들고 죽가마 앞으로 간다 / 喁喁就湯糜

개돼지도 버리어 마다할 것을 / 狗彘棄不顧

사람으로 엿처럼 달게 먹다니 / 乃人甘如飴

어진 정사 행하길 원치 않았고 / 亦不願行仁

사재 털어 구제도 헛소리였네 / 亦不願捐貲

관가 재물 남이 혹 볼까 숨기니 / 官篋惡人窺

우리가 굶주리지 않을 수 있나 / 豈非我所羸

관가의 마구간에 살진 저 말은 / 官廏愛馬肥

진실로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 / 實爲我膚肌

슬피 울며 관아문 나서고 보니 / 哀號出縣門

앞길이 캄캄하다 어디로 갈꼬 / 眩旋迷路岐

누런 잔디 언덕에 잠깐 멈추어 / 暫就黃莎岸

무릎 펴고 보채는 아기 달래다 / 舒膝挽啼兒

고개 숙여 서캐를 잡고 있자니 / 低頭捕蟣蝨

두 눈에 피눈물이 왈칵 쏟아져 / 汪然雙淚垂

심오한 하늘땅의 조화 이치를 / 悠悠大化理

고금에 어느 누가 알 수 있으랴 / 今古有誰知

많고 많은 백성들 태어났건만 / 林林生蒸民

고생하여 야윈 몸 병까지 들어 / 憔悴含瘡痍

메마른 산 송장이 쓰러져 있고 / 槁莩弱不振

거리마다 만나느니 유랑민들뿐 / 道塗逢流離

이고 지고 다니나 오라는 데 없어 / 負戴靡所聘

어디로 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 不知竟何之

부모 자식 부양도 제대로 못해 / 骨肉且莫保

고난에 빠진 이 몸 천륜도 몰라 / 迫厄傷天彝

상농군도 마침내 거지가 되어 / 上農爲丐子

서투른 말솜씨로 구걸하는데 / 叩門拙言辭

가난한 집 들르면 되레 하소연 / 貧家反訴哀

부잣집 모르는 척 반기지 않네 / 富家故自遲

새 아니라 벌레도 쪼지 못하고 / 非鳥莫啄蟲

고기 아니라 물만 먹지도 못해 / 非魚莫泳池

얼굴은 부어올라 부황 들었고 / 顔色慘浮黃

머리털 흐트러져 삼발 같구나 / 鬢髮如亂絲

옛날에 성현들이 인정 베풀 때 / 聖賢施仁政

홀아비 과부 먼저 돌봤다지만 / 常言鰥寡悲

이젠 그들 도리어 부러울 줄을 / 鰥寡眞足羨

굶어도 자기 한몸 굶었을 따름 / 飢亦是己飢

매인 가족 돌아볼 걱정 없다면 / 令無家室累

그 어찌 온갖 근심 생기겠는가 / 豈有逢百罹

봄바람이 단비를 몰아온다면 / 春風引好雨

온갖 초목 꽃 피고 잎이 돋아나 / 艸木發榮滋

생기가 온 누리에 충만하거니 / 生意藹天地

빈민을 구제함은 바로 이때지 / 賑貸此其時

엄숙하고 점잖은 조정의 고관 / 肅肅廊廟賢

경제에 나라 안위 달려 있다네 / 經濟仗安危

도탄에 허덕이는 이 나라 백성 / 生靈在塗炭

이들을 구제할 자 공들 아닌가 / 拯拔非公誰

누렇게 뜬 얼굴은 생기가 없어 / 黃馘索無光

가을 앞서 시들은 버들가지요 / 枯柳先秋萎

구부러진 허리에 걸음 못 걸어 / 傴僂不成步

담벼락 부여잡고 겨우 일어나 / 循牆强扶持

골육도 보전하지 못하는 판에 / 骨肉不相保

길가는 남을 어찌 동정할 수가 / 行路那足悲

어려운 삶에 착한 본성을 잃어 / 生理梏天仁

굶주려 병든 자를 웃고만 보네 / 談笑見尫羸

이 마을 저 마을로 전전하는데 / 宛轉之四隣

마을 풍속 본디가 이러했으랴 / 里俗本如斯

부러워라 저 들판에 참새떼들은 / 羨彼野田雀

가지 위에 앉아서 벌레를 쪼아 / 啄蟲坐枯枝

고관집엔 술 고기 많기도 한데 / 朱門多酒肉

이름난 기생 맞아 풍악을 울려 / 絲管邀名姬

태평 세월 만난 듯 한껏 즐기고 / 熙熙太平象

대감님네 풍도라 거드름 피워 / 儼儼廊廟姿

간민은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 奸民好詐言

오유는 걱정되어 고작 하는 말 / 迂儒多憂時

오곡이 풍성하여 지천인데도 / 五穀且如土

농사에 게으르니 굶을 게 당연 / 惰農自乏貲

총총한 수풀 같은 하많은 백성 / 林蔥何其繁

요순도 고루고루 살피지 못해 / 堯舜病博施

하늘에서 쌀비가 아니 내리면 / 不有天雨粟

무슨 수로 이 흉년 구한단 말고 / 何以救歲飢

두어라 술이나 더 취하게 마셔 / 且復倒一壺

펄럭이는 깃발에 봄꿈을 꾸자 / 曲旃春迷離

저 골짝엔 묻힐 땅 아직 있거니 / 溝壑有餘地

한 번 죽음 누구나 면할 수 없다 / 一死人所期

내 비록 오매초 얻었더라도 / 雖有烏昧草

대궐에 이걸 바쳐 무엇을 하랴 / 不必獻丹墀

형제간 서로서로 사랑 않는데 / 兄長不相憐

부모인들 자애를 베풀까 보냐 / 父母安施慈

※오매초 : 들보리의 일종.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강회(江淮) 지방의 안무사(按撫使)로 나갔다가 조정에 돌아와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 사는 들보리를 천자에게 올리고, 그것을 육궁(六宮)의 귀족들에게 보여주어 사치를 억제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는 데서 인용한 것이다.

 

■가안빈낙도 배우려 작정했으나 / 請事安貧語

가난 속에 처하니 편안치 않네 / 貧來却未安

한숨짓는 아내에 기풍 꺾이고 / 妻咨文采屈

굶주리는 자식에 교훈은 뒷전 / 兒餒敎規寬

꽃과 나무 도무지 쓸쓸하다면 / 花木渾蕭颯

시서는 하나같이 너절한 따름 / 詩書摠汗漫

농가의 울타리 밑 저 보리 보소 / 陶莊籬下麥

차라리 농부된 게 낫지 않을까 / 好付野人看

 

■지방으로 내보내 금정도 찰방에 보임한다는 임금의 엄중한 분부를 받고 해질 무렵 동작나루를 건너며 짓다[有嚴旨出補金井道察訪 晩渡銅雀津作] : 1795년

해질 무렵 동작나루 물결이 출렁이는데 / 銅津斜日浪花翻

종남산의 내 옛 동산 배꼬리에 멀어지네 / 船尾終南是故園

수양버들 들다리 소나기 쏟아지고 / 垂柳野橋猶白雨

엷은 안개 성 대궐 황혼에 접어드네 / 澹煙城闕近黃昏

금마문의 대조만 좋은 계책 아니거니 / 金門待詔非長策

멀리 해변 역참으로 좌천함도 성은일레 / 水驛投荒也聖恩

그 지방의 천주교도 얼빠졌단 말 들리니 / 聞說西人迷不悟

내 이 걸음 회양태수 급암과도 비슷해 / 此行還似出淮藩

※조선시대 충청도 청양(靑陽)의 금정역(金井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1795년에 다산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 변복잠입사건에 연루돼 금정역 찰방(金井驛察訪)으로 좌천된다. 5개월 정도 근무하였다고 한다.

 

■내 자신 우스워라[自笑]

우스워라 내 인생 머리도 희기 전에 / 自笑吾生鬢未班

험난한 태행산길 수레를 몰아가네 / 太行車轍苦間關

천 권 책을 독파하여 대궐에 들어갔고 / 破書千卷入金闕

집 한 칸을 사들여 푸른 산에 남겼는데 / 買宅一區留碧山

그림자 형체 어울려 해변으로 내려오고 / 形與影隣來海上

이름 따라 생긴 비방 온 세상에 가득 찼네 / 謗隨名至滿人間

비를 만나 누각 위에 베개 높이 누웠으니 / 小樓値雨成高臥

사시마조 말직이라 종일토록 한가롭네 / 似是馬曹終日閒

 

 

▣다산시문집 제3권

■음주(飮酒)

국미는 취하게 만들어 좋고 / 麴米醺皆好

운화는 안기를 비스듬히 하지 / 雲和抱更斜

혼자서 천 년 전 벗을 생각하고 / 獨思千載友

권세 있는 집안엔 가지 않아 / 不向五侯家

만물 형태도 변함이 없겠으랴만 / 物態寧無變

어이하여 우리 인생 한계가 있을까 / 吾生奈有涯

뜰에 옮겨 가는 해 그림자를 보게 / 閒看庭日轉

꽃 그림자 몇 가지로나 갈라지는가 / 花影幾枝叉

좋은 말들 앞 다투어 들어오고 / 細馬爭門入

고관들 와 집에 가득하면 / 豐貂滿院來

의대가 달아오를까 걱정되어 / 直愁衣帶熱

짐짓 술집 곁으로 간다네 / 故傍酒家廻

마셔도 끄떡없어야 비범한 자이지만 / 牢落聊全性

고결한 자가 방탕해지기도 하지 / 嶔崎任散才

자기 만족이 그저 제일이니 / 所欣惟自適

우묵한 잔이라도 웃질랑 말게 / 莫笑坳堂杯

※麴米 : 술의 이칭 雲和 : 거문고의 이칭

 

 

▣다산시문집 제4권

■담배[煙]

육우가 남긴 다경도 좋고 / 陸羽茶經好

유령의 주송도 특이하거니와 / 劉伶酒頌奇

담바고가 지금 새로 나와서 / 淡婆今始出

귀양살이하는 자에게 제일이라네 / 遷客最相知

가만히 빨아들이면 향기가 물씬하고 / 細吸涵芳烈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이 되어 간들간들 / 微噴看裊絲

여관 잠자리가 늘 편치 못하여 / 旅眠常不穩

봄날이 지루하기만 하다 / 春日更遲遲

 

■백발(白髮)

백발이 초저녁의 별 나듯이 나타나 / 白髮勢如昏星生

처음에는 별 하나만 깜박깜박 보이다가 / 初來只見一星呈

금방새 별이 둘 별 셋이 나타나고 / 須臾二星三星出

별 셋이 나온 후론 뭇 별들이 시새우지 / 三星出後衆星爭

어지럽게 여기저기 초롱초롱 깜박깜박 / 的的歷歷紛錯亂

미처 셀 새도 없이 바둑판에 바둑처럼 가득하다 / 應接不暇棋滿枰

작년에 턱 밑의 털 하나가 변하더니 / 去年頷下一毛變

남으로 오자 어느새 두 개가 더 났네그려 / 南來焂忽添二莖

이 일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을 내 아느니 / 自知此事禁不得

뽑지 말고 돋아나게 내버려 두어야지 / 且休鋤拔安其萌

고기가시 같은 모양 논하잘 게 뭐 있으리 / 細瑣何論魚鯁刺

앞으로 촘촘하게 파뿌리처럼 날 것인데 / 茂密將見葱鬚縈

족집게 대령할 첩도 없는 신세거니 / 旣無婢妾供鐵鑷

황정을 가져다줄 신선이 있을 쏜가 / 詎有仙客遺黃精

백발을 또 다시 검게 만들 수가 있다해도 / 白髮可使有還黑

말라버린 이 마음이 다시 피기는 어려우니 / 此心已枯難再榮

 

■낮술[午酌]

저습지대라서 자칫 병에 걸려 / 湫卑常苦病

낮술로 얼근히 취해본다네 / 午酌取微醺

물 불어나는 것 밀물 때문이고 / 小漲添潮水

침침한 날씨 역시 장기 탓이지 / 重陰帶瘴雲

닭들은 늦새끼 데리고 다니고 / 村鷄將暮子

벼는 이제 초벌김 매는구나 / 浦稻受初芸

머나먼 고향 궁금한 소식을 / 迢遞鄕園事

가을에나 혹시 들을 수 있을는지 / 秋來倘有聞

 

 

▣다산시문집 제5권

■혼자 웃다[獨笑]

곡식 있어도 먹을 사람 없는가 하면 / 有粟無人食

자식 많은 자는 배고파 걱정이고 / 多男必患飢

높은 벼슬아친 꼭 바보여야 한다면 / 達官必憃愚

영리한 자는 써먹을 곳이 없지 / 才者無所施

온갖 복을 다 갖춘 집 적고 / 家室少完福

최고의 길은 늘 쇠퇴하기 마련이야 / 至道常陵遲

아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방탕하기 쉽고 / 翁嗇子每蕩

아내가 지혜로우면 사내는 꼭 어리석으며 / 婦慧郞必癡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 月滿頻値雲

꽃이 피면 바람이 망쳐놓지 / 花開風誤之

천지만물이 다 그렇고 그런 것 / 物物盡如此

혼자 웃는 걸 아는 사람이 없네 / 獨笑無人知

 

 

▣다산시문집 제6권

■산목(山木)

초여름의 기운이 널리 퍼지니 / 首夏氣布濩

산의 나무들이 함께 푸르러지도다 / 山木交蔥蒨

여린 잎새는 아침 햇살을 머금어 / 嫩葉含朝暉

볕에 있는 누런 명주처럼 통명한데 / 通明曬黃絹

짙은 녹음 서로 번갈아 차례로 번져 / 濃綠遞相次

비스듬하게 한계선을 이루누나 / 邐迤引界線

소나무 향나무는 늙은 게 부끄러워서 / 松栝羞老蒼

가지 끝에 새로 고운 싹을 뱉어 내고 / 新梢吐昭絢

해묵은 등넝쿨 또한 마음이 있어 / 壽藤亦生心

간들간들 넝쿨을 죽죽 뻗어 나가네 / 裊裊舒蔓莚

요컨대 이 모두가 속물이 아닌지라 / 要皆非俗物

서로 기뻐하며 조용히 구경하노라 / 熙怡共幽眄

다행히도 벼슬에 얽매임이 없으니 / 幸無簪組累

어찌 다시 집안일을 연연하리오 / 奚復室家戀

부여잡고 오를 제 이미 수고했기에 / 躋攀旣費勞

기쁨을 누림이 의당 절로 만족하네 / 享受宜自便

생성의 이치를 조용히 연구해 보면 / 靜究生成理

충분히 서책 읽은 것과 맞먹으리라 / 足以當書卷

온 산이 붉게 단풍 든 한가을에 / 高秋滿山紅

거듭 와서 시절의 변천을 보노라 / 重來覽時變

 

▣다산시문집 제8권

■인재책(人才策)

신은 일찍이, 붕당(朋黨)에서 수반되는 화(禍)를 음식에 대한 경쟁에 비교하였습니다. 잘못은 음식을 독차지하는 데에 있는데도 그 말은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따지지 않았다.’ 하고 경쟁은 작록(爵祿)에 있는데도 그 말은 ‘의리를 강론하지 않았다.’ 하니, 그 수식하는 말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연유를 살펴보면 대체로 작(爵)과 녹(祿)일 뿐입니다. 아, 경쟁에의 결판은 힘이므로 힘이 부족하면 응원이 따르고 응원이 따르면 당(黨)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당을 아끼는 마음은 응원을 바라는 데서 생기고 응원을 바라는 마음은 힘을 합하려는 마음에서 나오고 힘을 합하려는 마음은 먹을 것을 경쟁하는 데서 나오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붕당이 발생된 연유는 추(醜)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크게 반성하시어 탕평(蕩平)의 정책으로 편당의 습속을 한번 씻으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은 우매하여 죽을 죄를 모르고, 그윽이 전하의 일월(日月) 같은 명철로도 오히려 붕당 테두리 밖의 것을 살피시지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북(西北 황해ㆍ평안ㆍ함경 세 도(道)) 지방의 백성과 여항(閭巷)의 천류(賤流)가 일찍이 붕당을 지은 죄가 없는데도 오히려 탕평의 정책 이내에 거론하지 못하시니, 신의 ‘살피지 못한 점’이란 바로 이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용에는 비록 치우치지 않은 것 같으나 선발에는 너무 범람하는 것이 걱정이다. 음직(蔭職) 출신의 무인(武人)이나 고단한 서얼(庶孽)들과 촌락의 상인(常人)이나 초야에 묻힌 사람들은, 경륜을 간직하고도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목이 비쩍 말라붙도록 한번도 그 간직한 재능을 펴보지 못하니, 하늘이 인재를 낸 본의가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이를 미루어본다면 수맥(水脈)과 토질의 적합함을 살피고 가뭄과 장마의 징조를 점쳐서 팔다리를 게을리 않음으로써 흉년을 거뜬히 극복하는 것은 늙은 농사꾼의 지혜요, 산택(山澤)의 이익을 분별하고 물건의 귀천(貴賤)을 살펴서 천리 밖의 사정을 가만히 헤아렸다가 솔개처럼 날쌔게 움직이는 것은 장사꾼의 용맹이요, 거북 껍데기를 사용하거나 시초(蓍草)를 세면서 도시(都市)에 앉아 있는 것은 어진이로서 복서(卜筮)에 몸을 붙여 있는 것이요, 병을 치료해 주거나 귀신과 접촉하는 것은 《주례(周禮)》에 열거되었으니 성인도 의약과 무당을 폐기하지 않은 것이요, 중[僧]들에 대해서는 사실 첫째가는 이단(異端)이나, 피나는 계행(戒行)은 보통 사람으로서 미치기 어렵고 선을 지향하는 마음은 우리와 똑같으니, 그 처리를 적절히 해야 할 것이다. 어찌 한 물건이라도 그냥 버릴 수 있겠는가.

...신이 생각하건대, 신은 과거 출신으로서 전하께서 발탁 등용하신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스스로를 헤아려보면 참으로 텅텅 비었습니다. 이같은 존재로서 백성을 임하여 정치를 한다는 것은 아예 음직(蔭職)으로 올라온 하급 관리만 같지 못하며, 군사를 조련(調練)하고 강궁(强弓)을 잡아당긴다는 것은 아예 대오(隊伍)에 편성된 하찮은 병졸만 못합니다. 신은 서얼들 중에 재학(才學)이 높고 초야에서 행실이 뛰어난 사람들과 동일하게 평론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신이 뽐내고 자부할 것으로는 ‘과목출신(科目出身)’ 네 글자뿐이니, 이 무슨 이치입니까.

 

■전폐(錢幣)에 대하여 물음

대저 돈의 용도는 능히 물건에 따라 오르내리고 유무(有無)를 서로 교역(交易)하는 것이므로, 진정 국가의 큰 보배요, 생민(生民)의 긴요한 물건이다. 포백(布帛)ㆍ숙속(菽粟)은 무거움에 구애되고 금은(金銀)ㆍ주옥(珠玉)은 희귀(稀貴)해서 걱정이므로, 귀천(貴賤)의 중간을 절충하고 빈부(貧富)의 사이에 유통하기는 돈처럼 편리한 것이 없다. 다만 그 수송이 더욱 편리할수록 사기(詐欺)가 더욱 불어나고, 교역(交易)이 더욱 번창할수록 사치가 더욱 넓어졌다. 교역하는 법으로 말하면 파촉(巴蜀)의 삼베와 오지(吳地)의 소금은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교역하지 않고, 판매하는 이익으로 말하면 남방(南方)의 모시와 북방(北方)의 모직(毛織)은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것을 보태 주지 않으므로, 장사하는 이익은 비록 남으나 민생(民生)은 날로 피폐해지니, 돈이 국가에 주는 이해의 영향력이 이와 같다.

오직 우리나라는 바다 한쪽에 위치하여 예부터 나라에는 돈에 대한 법이 없고, 백성은 돈에 대한 이로움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병력(兵力)은 부강하고 풍속은 순후하였으니, 이는 풍속이 소박하여 변통할 줄을 몰라서 뿐만 아니라, 그 지형 삼면이 바다로서 뱃길이 교차되어 있으므로 교역(交易)할 때 수송의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여러 대(代)를 내려오면서 돈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돈이 통행한 지는 이제 1백 40여년이 된다. 맨 처음 오영청(五營廳)에서 쓰기 시작하여 이도(二都 수원(水原)과 강화(江華))에까지 파급되었으며, 드디어 태농(太農)에서 주조한 돈으로 탁지(度支 호조(戶曹)를 말함)의 비용을 충당한다. 이에 수천 년 동안 막혔던 풍속이 이제 이미 확 트이게 되었으니, 의당 백성들의 생업이 풍부해지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해져야 할 것인데도, 어찌하여 1백여 년 이래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고갈되고 남북(南北)의 재화(財貨)가 유통되지 않음으로써, 조그마한 이익을 다투어 풍속이 나날이 각박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벼슬아치의 탐습(貪習)을 징계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진실로 그 까닭을 따져보면 돈에 허물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한 군데에 모아서 주전(鑄錢)하되 그 통용 지역을 확대하면 그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각기 구별해서 주전하되 그 통행하는 지역을 제한하면 그 쓰임새가 절약될 것이라 하며, 어떤 이는 돈을 빌려 달라는 주문(奏文)은 북경(北京)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어떤 이는 구리 캐는 법은 일본(日本)에서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며, 어떤 이는 별도로 은전(銀錢)을 만들어 중국 상인의 이익을 막아야 한다 하고, 어떤 이는 지폐(紙幣) 통행법을 익혀서 명(明) 나라 제도를 따라야 한다 하며, 어떤 이는 본전(本錢)에 이자(利子)를 증식(增殖)하는 것을 엄금하여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 하고, 어떤 이는 상평창(常平倉)의 곡식과 겸용(兼用)하여 풍요와 검소를 균일하게 해야 된다고 하니, 여러 설 가운데 어느 것이 마땅하고 어느 것이 마땅치 않으며, 어느 것이 따르기 쉽고 어느 것이 시행하기 어려운가.

 

■선비에 대하여 물음 : 곡산부(谷山府) 향교(鄕校)에서 선비를 시험 보였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선비를 높이고 도학(道學)을 중히 여기시며, 문학(文學)을 두둔하고 학관을 일으키시어, 즉위(即位)하신 지 20년에 지극한 교화가 넘쳐흐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팔도(八道) 모든 고을의 선비라 이름하는 이는 함께 인재를 육성하는 교화에 젖어서 모두, 현인(賢人)이 많다는 노래에 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곡산(谷山) 고을만은 홀로 따뜻한 봄을 막고 스스로 우로(雨露)의 은택을 뒤로 하는가. 향례(鄕禮)에 관한 서적을 반포(頒布)하여도 예의로써 사양하는 풍속이 진작되지 않고, 향약(鄕約)의 제도를 밝혀도 효제(孝悌)한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으며, 석채(釋采 선사(先師)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것) 올리는 반열(班列)에는 떠들어대어 엄숙하지 않고, 채소만을 먹어야 하는 향교(鄕校)에는 글 읽는 소리가 멎었으며, 독점하는 재임(齋任 향교를 관리하는 임원)은 솔개가 새를 채어가듯 하여, 치고받는 송사(訟事)가 반드시 재임과 관련되고, 소위 훈장(訓長)이라는 사람은 살쾡이가 호랑이 행세를 하듯이 빈번한 소장(訴狀)이 모두 훈장에 의해 작성되는가 하면, 시장의 푸줏간에 팔을 흔들며 출입(出入)하고, 산림(山林)의 몸을 닦는 선비를 차가운 눈으로 흘겨보며, 학교의 전지(田地)에서 생산된 쌀을 자기 주머니에 든 것처럼 마구 쓰고, 향교의 저장된 책을 모두 자기 집 창(牕)과 벽(壁)에 도배하며, 투호(投壺 주객(主客)이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던 놀이)하는 자리에는 싸우는 기색이 먼저 나타나고, 잔치 모임에는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선비의 관(冠)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는 장소에서 이러한 풍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전폐(錢幣)에 대한 의

우리나라에 전화(錢貨)가 시행된 것은 이제 1백 년이 넘었는데, 대개 이를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고 불편하다고 하는 자는 한두 사람 정도입니다. 옛날에 돈이 없었던 것은 편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리가 없었기 때문이며, 구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구리를 주조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리를 주조하는 법은 한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배워 오게 할 경우 이는 수개월이면 되는 일인데도 하지 않았으니 딴 것이야 어찌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돈이 폐단이 되는 것은 이익을 탐하여 돈 모양을 작게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주조한 것은 오히려 단단하고 실한데 근년에 주조한 것은 얇기가 느릅나무 잎과 같아서 이것을 저장해두면 썩고 삭아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사용하면 부서지고 이지러져서 쓸모가 없으니 아안전(鵝眼錢)이나 연환전(綖環錢)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 거의 드뭅니다. 이렇게 되면 백 년이 넘지 않아서 나라에는 돈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돈이 없어지게 되면 다시 주조할 것이니 비용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지금 새로 주조한 얇고 조악(粗惡)한 것을 모아 큰 돈[大錢]으로 고쳐 주조하여 10전으로 1전을 만들고, 그 쓰는 것을 1전으로 10전을 당하게 하거나 1백 전으로 1전을 만들고 그 쓰는 것을 1전으로 백 전에 당하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백성이 잃는 것이 없이도 돈의 제도를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익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오래 걸리는 것이 그 하나이고 절약하여 쓰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백성의 심정은 작은 것은 하찮게 여기고 큰 것은 아낍니다. 한 닢이 얇고 작기 때문에 쓰는 데 있어 절약함이 없으니, 돈을 크게 만든다면 쓰기에 불편할 것이며, 쓰기에 불편해지면 백성의 이익입니다. 또한 옛날에 주조한 돈을 남겨두어 큰 장사꾼과 멀리 장사하는 사람은 큰 돈을 쓰게 하고, 조그마한 시장의 자잘한 화물은 옛날 돈을 쓰도록 하면 크게 쓰는 것과 작게 쓰는 데에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금과 은이 해마다 중국으로 가는데 이것은 국가의 손해입니다. 마땅히 금전과 은전을 주조하여 각각 값에 따라 쓰게 한다면 큰 장사꾼이나 멀리 장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다투어 금전과 은전을 사용할 것이니, 이는 운반하기에 수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금전ㆍ은전에 글이 새겨 있으니, 비록 통역관들이 이익을 중히 여기고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하더라도 감히 몰래 숨겨서 연경(燕京)으로 가져가지 못할 것입니다. 금과 은이 연경으로 가는 것은 비단을 사오기 때문입니다. 금ㆍ은은 광산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정이 있고, 비단은 누에고치를 풀어 만드는 것으로 다함이 없는데, 금ㆍ은은 백세(百世)가 지나도 녹아 없어지지 않고 비단은 1년만 지나면 곧 해집니다. 한정이 있는 보배로 다함이 없는 실을 당해 내며, 녹아 없어지지 않는 보배로 쉽게 해지는 물건과 바꾸니, 국가의 이롭지 못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웃 나라와 틈이 생겨 급박한 경계가 있게 될 경우 금ㆍ은이 아니면 장차 무엇으로 뇌물을 주어 달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어전 의장(御前儀仗)의 기치(旗幟)와 큰 상사(喪事)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는 깁과 비단을 일체 엄금하고, 사가(私家)에서는 비록 혼인과 상사에 쓰는 것일지라도 일체 엄금하며, 갓끈이나 호항(護項) 따위의 세세한 것을 모두 입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해마다 무역하는 비단이 반드시 10분의 9가 줄어들 것입니다. 비단의 무역이 이미 줄어들면 금ㆍ은이 해마다 중국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끊어질 것입니다.

 

■서인(庶人)의 복장에 대한 의

현재 포정(庖丁 백정을 가리킨다)과 개백정 따위의 천인들도 모두 도포(道袍)를 입는바, 도포 속에는 반드시 창의가 있고 창의 속에는 반드시 장유(長襦)가 있는데 이 세 옷의 제도는 모두 소매가 넓고 깁니다. 장유는 소매가 좁다. 포백(布帛)으로 이런 따위의 소매가 넓고 긴 옷을 만드는 것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몸을 가리는 데에 모두 해당되지 않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몸을 가리는 데에 해당됨이 없이 해져서 버린다면 이는 하늘이 내린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니 어찌 될 일입니까. 넓은 소매와 긴 옷깃을 줄인다면 포백값이 싸질 것이고 포백값이 싸지면 추위에 떠는 자와 헐벗은 자가 좁은 소매와 짧은 옷깃의 옷을 얻어 입어 즐거워할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복제(服制)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산시문집 제10권

■병아리를 구경한 데 대한 설[觀鷄雛說]

옛날 정부자(程夫子)가 병아리를 관찰하였는데 기록하는 이가 ‘인(仁)이라’ 하였다.

우리 집은 서울에 있어도 해마다 닭 한 배씩을 기르고 그 병아리를 즐겁게 관찰하고 있다. 그것이 처음 알에서 깨어나오면 노란 주둥이가 연하고 부드러우며 녹색을 띤 털이 더부룩한 것이 잠시도 어미의 날개를 떠나지 않고, 어미가 마시면 따라 마시고 어미가 쪼면 따라 쪼며, 화기가 애애하여 자정(慈情)과 효도(孝道)가 지극하다. 조금 자라 어미를 떠나면 또 아우와 형이 서로 따르며 항상 같이 다니고 같이 자고, 개가 기웃거리면 서로 호위하고 새매가 지나가면 서로 소리친다. 그 우애의 정이 볼 만하니 효도와 공손이란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

너희들은 병아리보다는 조금 자랐으니 비록 부모만 오로지 사랑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형제끼리 정을 독실히 하지 않아서, 도리어 저 매우 비천한 미물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멸시를 당할 수 있겠느냐. 아.

 

 

▣다산시문집 제11권

■전론(田論) 1

어떤 사람이 있어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 1백 이랑, 즉 백묘(百畝)의 지적(地積)을 말함)이었고, 그의 아들은 10인(人)이었다. 그의 아들 1인은 전지 3경을 얻고, 2인은 2경을 얻고, 3인은 1경을 얻고 나니 나머지 4인은 전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짖어 울고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다면 그들의 부모된 사람이 부모 노릇을 잘 한 것일까?

하늘이 이 백성을 내어 그들을 위해 먼저 전지(田地)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군주(君主)를 세우고 목민관(牧民官)을 세워서 군주와 목민관으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마련해서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그 여러 자식들이 서로 치고 빼앗아 남의 것을 강탈해서 제 것으로 만들곤 하는 것을, 팔짱을 낀 채 눈여겨 보고서도 이를 금지시키지 못하여 강한 자는 더 차지하고 약한 자는 떠밀려서 땅에 넘어져 죽도록 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과연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것일까?

그러므로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마련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한 사람은 참다운 군주와 목민관이고, 그 산업을 골고루 마련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책임을 저버린 사람이다. 지금 국중(國中)의 전지(田地)는 대략 80만 결(結) 영종(英宗) 기축년(1769)에 팔도(八道)의 현재 기간(起墾)된 수전(水田)은 34만 3천 결이고, 한전(旱田)은 45만 7천 8백 결 남짓인데, 간악(奸惡)한 관리가 빠뜨린 전결(田結) 및 산전(山田)ㆍ화전(火田)은 이 안에 들지 않는다. 이고, 백성이 대략 8백 만 인구(人口) 영종(英宗) 계유년(1753)에 서울과 지방의 총 인구가 7백 30만이 조금 부족하였는데, 그 당시 숫자에 빠진 인구 및 그 사이에 나서 불어난 인구가 의당 70만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인데, 시험삼아 10구(口)를 1호(戶)로 쳐본다면 매양 1호마다 전지 1결(結)씩을 얻은 다음에야 그 재산이 똑 고르게 된다.

지금 문관(文官)ㆍ무관(武官) 등의 귀신(貴臣)들과 여항(閭巷)의 부인(富人) 가운데는 1호당 곡식 수천 석(石)을 거두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1백 결(結)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9백 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 국중(國中)의 부인(富人)으로서 영남(嶺南)의 최씨(崔氏)와 호남(湖南)의 왕씨(王氏) 같은 경우는 곡식 1만 석(石)을 거두는 자도 있는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4백 결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3천 9백 90인의 생명을 해쳐서 1호만을 살찌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정(朝廷)에서 벼슬하는 관리들이 부지런히 시급하게 서둘러서 오직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주어서 그 재산을 골고루 제정하기를 힘쓰지 않고 있으니, 그들은 군주와 목민관의 도리로써 그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

 

■전론 3(여전제)

여(閭)가 하나 있는데 30가(家)가 함께 한 여(閭)로 되었다. 여장(閭長)이 ‘아무개는 저 전지를 갈고, 아무개는 저 전지를 김매라.’ 하여 직사(職事)가 이미 나누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농구(農具)를 짊어지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한 터전을 주시기 바랍니다.’고 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려(閭)의 전지는 더 넓어지지 않는데 1려의 백성은 일정한 수(數)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백성이 이(利)를 따라가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전지는 넓은데도 인력(人力)이 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전지는 적은데도 곡식 수확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가을에 양곡 분배가 많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농구(農具)를 짊어지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한 터전을 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또 여(閭) 하나가 있는데, 20가(家)가 1려(閭)로 되었다. 여장(閭長)이 ‘아무개는 저 전지에 잡초(雜草)를 불사르고, 아무개는 저 전지에 거름을 주라.’ 하여 직사(職事)가 이미 나누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농구(農具)를 짊어지고 처자(妻子)를 데리고서 ‘저 살기 좋은 곳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떠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또한 그의 소원을 들어줄 뿐인 것이다. 백성이 해(害)를 피해 가는 것은 마치 불이 습기(濕氣)를 피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전지가 좁아서 인력(人力)이 남아도는 것을 알고 있으며, 힘은 배(倍)나 들어도 곡식 수확이 적은 것을 알고 있으며, 가을에 양곡 분배가 적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농구를 짊어지고 처자를 데리고 떠나서 저 살기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영(令)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택리(宅里)가 고르게 되고, 위에서 영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전지(田地)가 고르게 되고, 위에서 영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빈부(貧富)가 똑 고르게 되어,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로 자주 왕래하게 되리니, 이렇게 되면 8-9년도 지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전지가 고르게 될 것이다.

백성을 전지로써 경계[域]를 만드는 것은 마치 양(羊)을 우리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제 그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하니 이는 마치 새나 짐승이 서로 쫓아다니는 것과 같게 된다. 백성들이 마치 새나 짐승처럼 서로 쫓아다니는 것과 같이 된다면 이는 바로 난(亂)의 근본이다.

그러나 이를 시행한 지 8,9년이 지나면 백성이 차츰 고르게 될 것이고, 이를 시행한 지 10여 년이 지나면 백성이 아주 고르게 될 것이다. 백성이 아주 고르게 된 연후에야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그 가옥(家屋)과 주거(住居)를 등록(登錄)시키고, 문권(文券)을 만들어서 그 이주(移住)에 대한 일을 관리(管理)하여, 한 백성이 오는 데에도 그를 받아들이는 데에 제한(制限)을 두고, 한 백성이 가는 데에도 그를 허가(許可)하는 데에 절차를 두어, 전지는 넓으나 사람이 적은 곳은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람은 적은데도 곡식 생산이 많은 곳은 역시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며, 전지는 좁은데 사람이 많은 곳은 떠나는 것을 허가해 주고, 사람은 많은데 곡식 생산이 적은 곳은 역시 사람이 떠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이와 같지 않은데도 옮겨 다니는 사람은 떠도는 나그네가 되어 갈 데가 없을 것이니, 나그네가 되어 갈 데가 없게 되면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을 것이다.

 

■직관론(職官論) 1

온 천하가 어떻게 하면 잘 다스려지겠는가? 관각(館閣 홍문관)이나 대간(臺諫사간원)의 관직(官職)을 없애야만 온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겠는가? 관각이나 대간의 관직을 없애야만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이다. 임금의 덕(德)이 어찌하면 바르게 되며, 백관(百官)이 어찌하면 직무(職務)를 잘 수행하게 되며, 기강(紀綱)이 어찌하면 서게 되며, 풍속(風俗)이 어찌하면 돈후(敦厚)해지겠는가? 관각이나 대간의 관직을 없애야만 임금의 덕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직무를 잘 수행하게 되고, 기강이 서게 되고, 풍속이 돈후해질 것이다.

...지금은 몇 사람으로 하여금 언관(言官)의 지위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위포(韋布 위대(韋帶)와 포의(布衣), 즉 빈천한 사람을 가리킴)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문득 머리를 흔들며 싫어하면서,

“이것은 대간의 직책이다.”

한다. 이리하여 온 세상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어 다시는 그 지위(地位)를 벗어나지 않으니, 온 천하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어찌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관각이나 대간의 직책에 있는 자들은, 무릇 남을 탄핵하고 공박하여 내쫓을 때에는 문득 지나치게 배척하여 제거하면서,

“나는 법(法)을 지키는 관리(官吏)이니, 법을 지키는 논의(論議)는 엄격함이 있을 뿐 관대해서는 안 된다.”

하여, 한 번만 배척을 당하면 비록 평생 동안 사귀어 온 친구일지라도 감히 그의 무죄(無罪)함을 호소하여 말하지 못하고 다만 이를 속박(束縛)하는 데만 힘쓰며, 물러와서는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진실로 마지못해 한 일이다.”

하니, 그 기강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퇴패(頹敗)시킴이 또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관각이나 대간의 관직을 없애야만 온 천하가 잘 다스려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직관론(職官論) 2

육관(六官)의 소속(所屬)을 두고 청직(淸職)을 폐지하며, 장리(長吏 수령(守令)을 가리킴)를 두어 그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청직을 폐지하며, 백집사(百執事)를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 직무에 힘을 다하게 하고 청직을 폐지해야 한다. 청직이 폐지됨으로써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 그 직책을 완수하지 못하고 녹봉(祿俸)만 타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게 될 것이고, 청직이 폐지됨으로써 하늘이 임금을 세우고 목민관(牧民官)을 설치한 것이 본디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청직이 폐지됨으로써 문벌(門閥)을 숭상하고 비천(卑賤)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출세길을 막는 풍속이 차츰 없어질 것이며, 청직이 폐지됨으로써 시비 곡직(是非曲直)을 불문하고 자기편 사람은 무조건 도와주고 반대편 사람은 무조건 공격하며, 반대편 사람은 죄에 빠뜨리고 자기편 사람에겐 아첨하고 영합(迎合)하는 폐습이 없어질 것이다.

대저 백성을 위하여 관(官)을 설치하고 직사(職事)를 위하여 관을 설치하였으니, 관이 잘 다스려지면 그를 현능(賢能)하게 여기고, 관이 높으면 그를 공경할 뿐이다. 그런데 저 이른바 청직(淸職)이란 백성을 위한 것인가, 또는 직사(職事)를 위한 것인가. 요컨대, 사대부(士大夫)가 장차 벼슬하러 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한 몸뚱이만 영광(榮光)과 총애(寵愛)를 받게 하고 있을 뿐이다. 국사를 꾀하는 자가 무엇 때문에 이 관직을 설치하였는가.

※청직(淸職) : 청귀(淸貴)한 관직으로 간관(諫官)이나 시강(侍講) 등을 가리키는데, 특히 조선 시대에서는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ㆍ홍문관(弘文館)ㆍ대간 등에 속한 벼슬을 일컬었다.

 

■기예론(技藝論) 1

우리나라에 있는 백공(百工)의 기예는 모두 옛날에 배웠던 중국(中國)의 법인데, 수백 년 이후로 딱 잘라 끊듯이 다시는 중국에 가서 배워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의 신식 묘제(新式妙制)는 날로 증가하고 달로 많아져서 다시 수백 년 이전의 중국이 아닌데도 우리는 또한 막연하게 서로 모르는 것을 묻지도 않고 오직 예전의 것만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만일 백성이 사용하는 기물(器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財物)을 풍부히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과, 백공(百工)의 기예의 재능은, 그 뒤에 나온 제도를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그 몽매하고 고루함을 타파하고 이익과 은택(恩澤)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국가를 도모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일이다.

 

■향리론(鄕吏論) 1

...그런데 지금의 수령(守令)은, 오래 있는 사람은 3~4년 정도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1년 정도뿐이므로, 그들이 벼슬자리에 있는 것은 마치 여관[逆旅]의 과객(過客)과 같다. 그러나 향리(鄕吏)는 여기에 은의(恩義)로써 서로 계속(係屬)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권력이 항상 향리에게 있어서 그들이 빠뜨리고 속이는 짓을 가벼이 할 수 있게 된다. 이 일로 미루어 말한다면 그 해독의 미치는 것이 옛날의 대부(大夫) 정도에서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이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주인(主人)을 부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부리게 되는데, 그 권력을 옮겨 잡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향리가 항상 그 권력을 잡게 되는 이유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재화(災禍)를 주고 복록(福祿)을 주는 것이 달려 있으니, 그들이 악(惡)을 널리 전파시키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학론(五學論) 1

성리학(性理學)은 도(道)를 알고 자신을 알아서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理)니 기(氣)니 성(性)이니 정(情)이니 체(體)니 용(用)이니 하는가 하면, 본연(本然)이니 기질(氣質)이니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이발(已發)이니 미발(未發)이니 단지(單指)니 겸지(兼指)니 이동기이(理同氣異)니 기동이이(氣同理異)니 심선무악(心善無惡)이니 심유선악(心有善惡)이니 하면서 줄기와 가지와 잎새가 수천 수만으로 갈라져 있다. 이렇게 터럭 끝까지 세밀히 분석하면서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기세를 올리면서 남의 주장을 배척하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가다듬어 연구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 끝에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스스로 천하의 고묘(高妙)한 이치를 다 터득했다고 떠든다. 그러나 한쪽에는 맞지만 다른 한쪽에는 틀리고 아래는 맞지만 위가 틀리기 일쑤다. 그렇건만 저마다 하나의 주장을 내세우고 보루를 구축하여, 한 세대가 끝나도록 시비(是非)를 판결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고 대대로 전해가면서도 서로의 원망을 풀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주장에 찬동하는 사람은 존대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천시하며,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은 떠받들고 달리하는 사람은 공격하였다. 이러면서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지극히 올바른 것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찌 엉성한 짓이 아니겠는가.

 

■풍수론(風水論) 2

지금 어떤 사람이 길에서 떨어뜨린 보따리를 주워 풀어보니 은(銀) 1정(錠)이 들어 있었다고 하자. 이 화폐의 가치는 베 1필을 살 수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사방을 휘돌아보면서 품속에 숨겨 가지고 남이 뺏으러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빨리 달려간다. 이것은 인정(人情)이다.

이른바 길지(吉地)라고 하는 것은, 위로는 부모의 시체와 혼백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이 복록(福祿)을 받아 후손을 번창하게 하고 재물이 풍족하게 함은 물론, 혹 수십 세대토록 그 음덕(陰德)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천하에 더없이 큰 보배이다. 따라서 천만 금의 보옥(寶玉)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지사(地師)가 이미 이런 큰 보배 덩어리를 얻었다면, 어째서 자기의 부모를 그곳에다 몰래 장사지내지 않고 도리어 빨리 경상(卿相)의 집으로 달려가서 이를 바친단 말인가. 어째서 자기에게 청렴(淸廉)하기는 오릉중자(於陵仲子)보다 더하고 경상들에게 충성(忠誠)하기는 개자추(介子推)보다 더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깊이 믿을 수 없는 점이다.

어떤 지사가 손바닥을 치면서 자기가 잡아준 길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산줄기의 기복은 용과 호랑이가 일어나 덮치는 듯한 형세이고 감싼 산줄기는 난새와 봉황이 춤추는 모습이다. 인시(寅時)에 장사지내면 묘시(卯時)에 발복(發福)하여 아들은 경상(卿相)이 되고 손자는 후백(侯伯)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야말로 천리(千里)에 한 자리 있을까 말까한 길지이다.”

나는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이면, 어째서 너의 어미를 장사지내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

 

 

▣다산시문집 제12권

■백제론(百濟論)

백제(百濟)는 삼국(三國) 중에서 제일 강성했지만 가장 먼저 망한 나라이다. 어떤 사람은,

“신라(新羅)는 남쪽으로 간사한 왜국(倭國)과 이웃해 있고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동(遼東)과 접해 있으므로 항상 무비(武備)를 철저히 했었다. 백제는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외환(外患)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병력(兵力)이 해이(解弛)하고 약해져서 쉽사리 망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풍속이 교만하고 간사하여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쉽사리 망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백제의 단점일 뿐, 이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국운이 장구히 이어가는 것은 도읍을 정하는 데 달린 경우가 많다. 반드시 요새지(要塞地)에 웅거하여 위력(威力)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을 길러서, 견고하여 요지부동(搖之不動)하게 민심(民心)을 잡아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이 행해져서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백제가 처음에는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했었다. 위례는 지금 한양(漢陽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른바 하남위례(河南慰禮)란 곳은 지금 광주(廣州)의 고읍(古邑)이다. 《동국지리고(東國地理考)》에 상세히 보인다. 북으로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막혀 있고 남으로는 한강(漢江)을 띠고 있다. 그리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뻗쳐 있고 남해(南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천연적인 요새라 할 수 있는 땅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나라를 누린 것이 4백 94년이나 되었다.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을 굴복시켰고 동으로는 예맥(濊貊)을 복종시켰으며, 고구려와 신라 사람도 모두 겁이 나서 숨을 죽였었다. 문주왕(文周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웅천(熊川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겼고 또 이어 부여(扶餘)로 옮겼으나 옮긴 지 겨우 1백 85년 만에 망해버렸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지형적인 공고함만을 믿고서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부여는 넓은 들의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1백 리 안에 의지할 만한 성벽이나 정장(亭障)이 없고 엄폐할 수 있는 울타리가 없는데다가 의자왕(義慈王)은 주색(酒色)에 빠진 임금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노닐면서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창졸간에 적군이 대대적으로 들이닥치자 사방의 군현(郡縣)에서는 관망만 할 뿐 머뭇거리면서 나아와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신라가 배후를 공격할 수가 있었고 도성(都城)이 함락되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는 사람은 지세(地勢)를 잘 살펴 도읍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계속해 옮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침략은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은(殷) 나라는 자주 도읍을 옮김으로써 장구한 국운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옛 이야기다.

 

■요동론(遼東論)

고구려(高句麗) 때는 강토를 널리 개척하였다. 그래서 북부(北部)는 실위(室韋) 지금의 만주(滿洲)로서 또한 북부에 들어있다. 와 맞닿았고, 남부(南部)는 개모(蓋牟) 지금 산해관(山海關) 동쪽이 모두 남부이다. 에 이르렀다.

고려(高麗) 이후 북부와 남부는 모두 거란(契丹)에게 점령당하였고, 금(金) 나라와 원(元) 나라 이후는 다시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은 채 압록강(鴨綠江) 일대가 마침내 천연적인 경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 와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으로 천 리나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바둑돌처럼 설치했고, 밖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수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논(論)하는 사람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武力)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는 명(明) 나라가 이미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진실로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아직 오랑캐들에게 소속되었더라도 세종과 세조께서는 이를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척박하여 아무런 이익도 거둘 수 없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적국(敵國)을 증가시키는 일은 영명(英明)한 임금은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때에도 오히려 주(周) 나라와 진(秦) 나라의 옛일을 살펴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한 뒤에 위력으로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것은 동경(東京 낙양(洛陽))과 서경(西京 관중(關中))의 우열일 뿐이었다.

명(明) 나라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지만 강성한 몽고(蒙古)와 여진(女眞)을 멀리서는 제어할 수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북경(北京))에 귀속시켰다. 그 뒤 중국을 통치한 임금들이 이를 변경하지 않았고, 대명부(大名府)는 끝내 중국의 수도(首都)가 되었다. 이러니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세(地勢)는 북으로는 두 강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다. 을 경계로 삼고 나머지 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국경의 형세가 그대로 자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므로 요동을 얻는 것이 도리어 군더더기를 붙이는 격이 된다. 이러니 유감으로 여길 게 뭐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어 한 걸음이라도 중원(中原)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서쪽으로 요동을 획득하고 동쪽으로 여진을 평정, 북쪽으로는 국경을 넓혀 위로 흑룡강(黑龍江)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서얼론(庶孼論)

옛날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는 서얼(庶孼)의 등용이 막힌 것을 민망히 여겨 이조(吏曹)에 하명, 그들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성대중(成大中) 등을 위시하여 10명을 뽑아서 대간(臺諫)의 직(職)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재보(宰輔)의 지위에 있는 신하들을 불러서 유시(諭示)했다.

“하늘은 지극히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 또한 지극히 높지만 임금이라 일컫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적모(嫡母)를 말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도 감히 논란(論難)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성대중 등 서얼들에게 대간(臺諫)의 직을 제수한 것은 작은 것이다. 반드시 재상(宰相)에 임명해야 옳다.”

 

■환상론(還上論)

법 가운데 환상법(還上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환상법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일지라도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시골의 늙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 열 사람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고는 아침에 열 아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재물 관리에 소홀하고 며느리들은 씀씀이가 크니 명년에는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양곡을 운반하여 나의 광[窖]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명년 봄에 내가 너희들에게 돌려주겠다.”

했다 하자. 그러면 아들들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말할 것이고 아내들은 눈썹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별 간섭을 다한다고 종알거리면서 그 명령을 괴롭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縣官)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간리론(奸吏論)

그러나 저들은 대대로 그 직책에 오랫동안 종사하였으므로 세력이 단단히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비록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걱정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방법이 있다. 모든 아전의 직책 가운데 중요하고 권한이 있는 자리는 한 고을에 10자리를 넘지 않는다. 그것은 파견(派遣)의 차송(差送)을 맡은 사람, 곡식 장부를 맡은 사람, 전지(田地)를 맡은 사람, 군사(軍事)에 관한 행정 사무를 맡은 사람이다. 아무리 큰 고을이라도 10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 10인을 지금 영리(營吏)를 뽑는 법처럼 매양 몇 백 리의 밖에서 뽑아오고 또 그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오래 있다 해야 2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1년으로 만기를 삼는다면 아전이 간사한 짓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무릇 간사한 짓은 오래 있는 데서 생기게 된다. 따라서 오래 있지 못하게 하면 간사함도 노련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들이 모두 여러 군현(郡縣)으로 옮겨다님으로써 일정히 머물 곳이 없게 되면, 창고에 간사한 짓이 있을 경우 이를 감출 수 있겠는가.

 

■감사론(監司論)

밤에 담구멍을 뚫고 문고리를 따고 들어가서 주머니를 뒤지고 상자를 열어 의복ㆍ이불ㆍ제기(祭器)ㆍ술그릇 등을 훔치기도 하고 가마솥을 떼어 메고 도망하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굶주린 자가 배고픈 나머지 저지른 것이다. 칼과 몽둥이를 품에 품고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길가는 사람을 가로막고 소ㆍ말과 돈을 빼앗은 다음 그 사람을 찔러 죽임으로써 증거를 없앤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단지 본성(本性)을 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일 뿐이다. 수놓은 언치를 깐 준마를 타고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가서 횃불을 벌여 세우고 창과 칼을 벌여 세운 다음 부잣집을 골라 곧장 마루로 올라가 주인을 포박, 재물이 들어 있는 창고를 전부 털고 나서는 창고를 불사른 다음 감히 말하지 못하도록 거듭 다짐을 받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단지 배우지 못한 오만한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적인가?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인수(印綬)를 띠고서 한 성(城)이나 한 보(堡)를 독차지하고 온갖 형구(形具)를 진열해 놓고 날마다 춥고 배고파 지칠대로 지친 백성들을 매질하면서, 피를 빨고 기름을 핥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비슷할 뿐이요 역시 작은 도적이다.

큰 도적이 있다. 큰 깃발을 세우고 큰 양산을 받치고 큰 북을 치고 큰 나팔을 불면서 쌍 말의 교자(轎子)를 타고 옥로(玉鷺)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종자(從者)는 부(府) 2인, 사(史) 2인, 서(胥) 6인, 보졸(步卒)이 수십 인, 하인과 심부름꾼과 졸복의 무리가 수십 수백 명이다. 여러 현(縣)과 역(驛)에 안부를 묻고 영접하는 아전과 하인이 수십 수백 명, 기마(騎馬)가 1백 필, 복마(卜馬)가 1백 필,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예쁘게 화장한 부인이 수십 명, 동개에 넣은 화살을 짊어지고 행렬의 맨 앞에 서서 가는 비장(裨將)이 2인, 맨 뒤에 가는 사람이 3인, 따라가는 역관이 1인, 말 타고 따라가는 향정관(鄕亭官)이 3인,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끈을 늘어뜨린 채 숨을 죽이면서 말 타고 따라가는 사람이 4, 5인,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족가(足枷)와 뭉둥이를 포개어 싣고 가는 자가 4인, 등에는 횃불을 지고 손에는 청사초롱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수백 인, 손에는 채찍을 쥐고서 백성들을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8인, 길가에서 보고 탄식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이르는 곳마다 화포(火礮)를 쏘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태뢰(太牢)를 갖추어 올리는 사람이 넘어지고, 한번의 식사에 혹시라도 간을 잘못 맞추었거나 음식이 식었거나 하면 담당자를 곤장치게 하니, 곤장치는 사람이 모두 10여 인이나 된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월파정 야유기(月波亭夜游記)

정미년(1787, 정조 11) 여름에 나는 이휴길(李休吉) 이름은 기경(基慶)임. 의 강정(江亭)에서 함께 변려문(騈儷文 과문(科文)을 말함)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권영석(權永錫)ㆍ정필동(鄭弼東) 제군(諸君)이 또한 와서 그곳에 모였다.

하루는 비가 조금 뿌리다가 어느덧 개어 하늘은 호수처럼 맑았다. 이군(李君)이 말하기를,

“인간이 세상에 사는 날이 그 얼마나 된다고 답답하게 글 짓는 것을 노고스럽게 할 것인가. 집에서 빚은 소주[火酒]도 마침 내어 왔고, 좋은 오이도 가져왔으니, 어찌 술을 싣고 오이를 띄우면서 월파정(月波亭)에서 놀지 않을 것인가.”

하니, 모두,

“좋은 말이다.”

하였다. 이에 조그마한 배를 타고 용산(龍山)에서부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며, 중류에서 한가롭게 동쪽으로는 동작(銅雀) 나루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파릉(巴陵) 입구를 바라보니, 내 낀 강은 넓고도 아득한데 만경(萬頃) 물결이 한결같이 푸르렀다. 월파정(月波亭)에 도착하자 해가 졌다. 서로들 난간에 기대어 술을 가져오라고 하고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려니 물에 낀 내가 비스름히 걷혀가고 잔잔한 물결이 점점 밝아졌다. 이군(李君)이 말하기를,

“달이 지금 떠오른다.”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 배에 올라 달을 맞으니, 오로지 만 길이나 되는 황금빛 줄기가 수면에 내려 쐬더니, 잠깐 돌아보는 동안에도 천태백상(千態百狀)으로 순간순간 광경이 바뀌었다. 수면이 움직일 때는 부서지는 모습이 구슬이 땅에 흩어지듯 하고, 조용할 때는 평활(平滑)하기가 유리가 빛을 내는 것과 같았다. 달을 잡고 물놀이를 하는 등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했다. 시를 짓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에 나는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글 짓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인데, 다시 괴롭게 눈쌀을 찌푸리고 수염을 비비 꼬면서 어려운 운자를 내어 좋은 글을 짓느라 어근버근하며 이 월파정(月波亭)의 풍경을 헛되이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제군(諸君)들이 마시지 않는다면 이 정자의 이름에 맞지 않는다.”

하니, 마침내 각자 실컷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

 

 

▣다산시문집 제14권

■세검정(洗劍亭)에서 노닌 기

세검정의 뛰어난 경치는 소나기가 쏟아질 때 폭포를 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비가 막 내릴 때는 사람들이 수레를 적시면서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아니하고, 비가 갠 뒤에는 산골짜기의 물도 이미 그 기세가 줄어든다. 이 때문에 정자는 근교에 있으나, 성 안의 사대부 중에 정자의 뛰어난 경치를 만끽한 사람은 드물다.

신해년(1791, 정조 15) 여름에 나는 한혜보(韓徯甫) 등 여러 사람과 명례방(明禮坊)에 모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뜨거운 열기가 찌는 듯하더니 검은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고, 마른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나는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폭우가 쏟아질 징조이다. 제군들은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는가. 만약 가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주(罰酒) 열 병을 한꺼번에 주겠다.”

하니, 모두들,

“이를 말인가.”

하였다.

이리하여 마부를 재촉하여 나왔다. 창의문(彰義門)을 나서자 빗방울이 서너 개 떨어졌는데 크기가 주먹만큼 하였다. 말을 달려 정자의 밑에 이르자 수문(水門) 좌우(左右)의 산골짜기에서는 이미 물줄기가 암수의 고래[鯨鯢]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고, 옷소매도 또한 빗방울에 얼룩졌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난간 앞에 앉아 있으려니, 수목은 이미 미친 듯이 흔들렸고 한기(寒氣)가 뼈에 스며들었다. 이때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였다. 흘러내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이 내리치는 물 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물은 정자의 초석(楚石)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형세는 웅장하고 소리는 맹렬하여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오들오들 떨려 편안치가 못하였다.

내가 묻기를,

“어떻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고 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고 익살스러운 농담을 하며 즐겼다. 조금 있자니 비도 그치고 구름도 걷혔으며 산골 물도 점점 잔잔해졌다. 석양이 나무에 걸리니, 붉으락푸르락 천태만상이었다. 서로를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한참 지나자 심화오(沈華五)가 이 일을 듣고 정자에 뒤쫓아 왔으나, 물은 잔잔해진 뒤였다. 처음에 화오(華五)는 같이 오자고 하였으나 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조롱하고 욕을 해댔다. 그와 함께 술을 한 순배 마시고 돌아왔는데 그때에 홍약여(洪約汝)ㆍ이휘조(李輝祖)ㆍ윤무구(尹无咎) 등도 함께 있었다.

 

■오죽헌기(梧竹軒記)

오죽헌(梧竹軒)이라는 것은 금정역(金井驛) 찰방(察訪)이 거처하는 곳이다. 뜰 앞에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있고 고죽(苦竹참대)이 몇 떨기 있어, 이것 때문에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찰방은 7품직(品職)이다. 을묘년(1795, 정조 19) 가을에 나는 승지(承旨)로 있다가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니, 조정의 진신대부(搢紳大夫)들로서 글을 보내어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찰방직은 즐거운 것이 세 가지 있으니, 밖에 나가면 빠른 말을 탈 수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모든 속역(屬驛)이 있는 지역의 산수(山水)를 유람할 때면 가는 곳마다 식량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항상 일이 적어서 쌀과 소금을 처리하는 일과 송사(訟事)와 장부를 기록하는 일 등의 번거로움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이 고을의 사우(士友)들은 와서 보고 이것으로 축하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 저 진신대부들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나 이 고을 사우들이 나를 축하하는 것은 모두 내 뜻이 아니다.

대저 벼슬이라는 것은 갑자기 올라가면 쉽게 넘어지게 되고, 총애가 항상 융성하면 쉽게 쇠하게 된다. 내가 3품(品)에서 7품(品)으로 옮겨진 것은 복이니 슬퍼할 것이 없다. 그러나 찰방직은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병폐를 찾아내는 것이다. 말이 병들어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면 찰방의 죄이고, 역부(驛夫)의 노역(勞役)이 고르지 않아 원망하게 하면 찰방의 죄이고, 사명을 받은 신하가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하여 사람과 말을 고달프게 할 때 범례를 들어 그와 다투어서 그런 짓을 그치게 하지 못하면 찰방의 죄이다. 이것이 곧 찰방직이 힘든 이유이니 기뻐할 것이 못 된다.

앞의 세 가지 즐거움만 누리고 뒤의 세 가지 고통을 알지 못하면 귀양살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인데, 어찌 7품직이나마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면려(勉勵)하고, 글을 지어 벽에 써놓아 뒤에 올 사람에게 알린다.

 

■강역고(疆域考)의 권단(卷耑)에 제함

열수(洌水 한강) 이북에서 압록강 이남은 한 무제(漢武帝) 이후로 늘 한 나라 땅이었었는데, 광무제(光武帝) 때부터 살수(薩水 청천강) 이북은 고구려에 소속시키고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 이북임. 이남은 한 나라에 소속시켰었는데, 그 후에 패수(浿水 대동강) 이북은 모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대동강 이북임. 그러나 패수 이남과 한수 이북은 마침내 한 나라 관리의 관할하에 들어갔고 위(魏)ㆍ진(晉)을 지나 북위(北魏) 때까지 시대마다 그렇게 하였다. 그러니 동사(東史)를 엮는 자는 패수 이남과 열수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리표(漢吏表)를 만들고, 아울러 그 사실을 기록하여 그 자취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铠 이른바 동사에는 모두 이러한 사실이 빠졌으니, 이것은 불완전한 사례 가운데 큰 것이다.

열수(洌水)는 지금 서울에 있는 강이다. 이 열수 이북은 본래 한 나라 땅에 속하였고 이남은 삼한(三韓)으로서, 이 강물은 곧 삼한과 한 나라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므로 삼한 사람들은 이 열수를 가리켜 ‘한강(漢江)’이라고 한다.

 

■하피첩(霞帔帖)에 제함

내가 강진(康津)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이 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그것은 시집올 적에 가져온 훈염(纁袡 시집갈 때 입는 활옷)으로서 붉은빛이 담황색으로 바래서 서본(書本)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리하여 이를 재단, 조그만 첩(帖)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전해 준다. 다음 날에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곧 홍군(紅裙)의 전용된 말이다.

가경(嘉慶) 경오년(1810, 순조 10) 초가을에 다산(茶山)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다산시문집 제15권

■강계고 서(疆界考敍)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서계(西界)ㆍ북계(北界)는 역대로 변천이 잦았다. 기씨(箕氏) 말엽에는 연(燕) 나라와 접경(接境)하여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았고, 위만(衛滿) 때에는 한(漢) 나라와 접경하여 역시 패수를 경계로 삼았으니,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패수는 본래 대동강(大同江)의 이름인데, 《사기(史記)》에 압록강을 패수로 잘못 기록하였다. 그러나 지금《사기》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한 무제(漢武帝)가 우거(右渠)를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할 적에 사군의 하나인 진번(眞番)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다.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곧 그 하류 지금의 의주(義州)를 이름 이고, 지금처럼 그 상류쪽을 경계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그 뒤 고구려가 북방에서 일어났으니,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 바로 그 본원지이다. 남쪽으로 땅을 개척하여 평양에까지 그 세력을 펼쳤는데, 한(漢)ㆍ위(魏) 이후 남계(南界)에는 변동이 있었으나 북계는 일찍이 줄어든 적이 없었고, 그 뒤 수(隋)ㆍ당(唐) 때에도 요하(遼河)로 서계를 삼았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일어나서는 비록 압록강 연안을 서경(西京)으로 정하였으나 중국과의 경계는 북으로 개원(開原)부터 남으로 압록강의 하구(河口)까지를 서계로 삼았으니, 우리의 영토가 본래는 이처럼 넓었었다. 그러나 거란(契丹)이 세력을 떨쳐 압록강의 북쪽을 모두 차지한 뒤로는 보주(保州 지금의 의주)를 우리의 서계로 정하여 이때부터 압록이 천참(天塹 천연의 요충지)의 서계가 되었으니, 옛날에 비해 강토가 많이 축소되었다.

북계의 두만강 남쪽은 본래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고구려 때부터 우리나라에 예속되었었고, 발해 때 남경(南京) 소속이던 옥(沃)ㆍ정(睛)ㆍ초(椒) 등 3주(州)는 지금의 함흥(咸興)ㆍ영흥(永興) 땅이고, 그 동경(東京) 소속이던 경(慶)ㆍ염(鹽)ㆍ목(穆)ㆍ하(賀) 등 4주는 지금 육진(六鎭)이 있는 땅인데, 금(金) 나라가 이곳을 점거하여 지금의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을 휼품로(恤品路)라 이름하고 함흥ㆍ영흥을 갈뢰전(曷懶甸)이라 이름했으며, 갈뢰를 혹은 야뢰(耶懶) 혹은 이뢰(移懶)라고 칭하기도 하나 모두 같은 말이다. 원 나라에 와서 다시 이곳을 합란로(合蘭路)라 칭하여 여전히 점거하였으나 고려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 땅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조선조가 일어나서는 함경(咸鏡)의 남쪽과 마천령(摩天嶺)의 북쪽을 차츰 우리의 판도(版圖)로 끌어들였고,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이래로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康熙) 만년에 오랄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지금 저들의 땅과 우리 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을 상고해 보면, 연하(沿河) 지방에 군(郡)ㆍ현(縣)ㆍ보(堡)ㆍ위(衛)가 있지는 않으나 두만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영고탑부내(寧古塔部內) 혼춘(渾春) 와이객(瓦爾喀)이고, 압록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길림부내(吉林部內) 책외번지(柵外藩地)로서, 흥경(興京)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따라서 삼(蔘)을 캐고 담비 사냥을 하는 흥경 백성들이 이따금 월경(越境)하는 경우가 많고, 강계(江界)ㆍ위원(渭原)ㆍ벽동(碧潼)ㆍ초산(楚山)에 사는 우리 백성들도 불법으로 저들 땅에 들어가 삼도 캐고 사냥도 하므로 두 나라는 엄한 조약을 맺어 서로 금하여 왔다. 또 우리의 강북(江北)이 저들 땅이긴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살게 되면 월경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고 그러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저들이 강 연안에 방수(防守)를 설치하고자 할 적마다 우리는 매번 철거를 진정하였는데, 저들도 따라 주었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 사이에 쟁상(爭桑)의 근심과 복망(伏莽)의 화가 없어진다면 다행이겠다. 그러므로 정계(定界) 이후로 왕복한 문자(文字)를 모아 강계고를 만든다.

 

■고금도(古今島) 장씨(張氏) 딸에 대한 기사

고금도(古今島)는 옛날의 고이도(皐夷島)이다. 장씨(張氏) 딸은 망명인(亡命人) 장현경(張玄慶)의 혈족(血族)이다. 현경은 본래 인동인(仁同人)으로서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장현광(張顯光)의 봉사손(奉祀孫)이다. 가경(嘉慶) 경신년(1800, 순조 즉위년) 여름에 우리 정종대왕께서 돌아가셨는데,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갑회(李甲會)가 공제(公除 국왕이나 왕비가 선왕의 상사에 이일역월(以日易月)로 복을 벗는 것)가 끝나기 며칠 전에 그 아버지 생일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녀(妓女)를 불렀다. 그리고 현경의 부자(父子)에게 함께 와서 놀기를 청하니, 현경의 아버지가 그에게 답하기를,

“공제(公除)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잔치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나가서 이방(吏房)의 아전[首史]에게 말하기를,

“국휼(國恤 국상)이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잔치하고 술을 마시는가? 때를 보아서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현경의 아버지는 부사의 아버지와 성(姓)이 다른 친척이었으므로 자주 부중(府中)에 들어가 만나보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현경의 아버지가,

“시상(時相)이 역의(逆醫) 심인(沈鏔)을 천거하여 그에게 독약을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 역적을 내 손으로 제거할 수 없다.”

하니, 이갑회의 아버지는 그 말에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아전이 와서 전하는 말을 듣자, 이갑회는 자기의 죄를 성토하며 모함하려는 것이라 하고 재빨리 감영으로 달려가, 현경이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임금 측근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반역의 기미가 있다고 고(告)하였다. 관찰사(觀察使) 신기(申耆)는, 돌아가서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으라고 명하였다. 갑회가 밤에 잘 훈련된 군교(軍校)와 이졸(吏卒) 2백여 명에게 횃불을 들게 하고 현경의 집을 포위하니 불빛에 밤하늘이 환하였다.

현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랍고 두려워 무슨 변고인지도 모른 채 담장을 넘어 달아났고 그 아우는 벼랑에 떨어져 죽었으며, 그 아버지만이 잡혔다. 갖은 방법으로 다스려도 잡히는 바가 없이 연루자가 수백 인이었으므로 체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나가니 온 마을이 소란하여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를 못했다. 그때는 마침 가을이라 목화가 눈처럼 피었으나, 줍는 자가 없어 모두 바람에 불려서 굴러다녔다. 조정에서는 안핵사(按覈使) 이서구(李書九)를 보내어 그 사건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수한 문서(文書)라고는 서지(筮紙) 한 장뿐이었는데, 그 점사(占辭)에는 ‘건마(乾馬)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라는 말이 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또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번(平反)하여 대부분 풀어주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현경은 마침내 망명(亡命)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처와 아들딸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귀양보냈다.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이었는데, 큰딸은 22세, 작은 딸은 14세, 사내애는 겨우 10여 세였다. 하루는 진영(鎭營)의 군졸 하나가 술에 취하여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는 말로 그를 꾀었는데, 이 뒤로 계속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

하였다. 큰딸은 너무도 비분한 나머지 남몰래 항구(港口)로 나아가 조수를 바라보다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또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작은딸이 따라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

“너는 돌아가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에 멈추고 뒤따르지 않았다.

돌아가서 보장(堡將)에게 알리니, 보장은 현(縣)에 그 말을 상신하였고, 현감(縣監) 이건식(李健植)은 검시(檢屍)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수일 후 해남수군사(海南水軍使) 권탁(權逴)이 장계(狀啓)를 올려 신지도(薪智島) 수장(守將)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아울러 파출(罷出)할 것을 청했는데, 이는 고례(故例)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파출당하게 된 건식은 곧 아전과 의논하여 천냥(千兩)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주었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을 현에 되돌려주고 장계는 수영(水營)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래서 관(官)은 무사하게 되었고 그 군졸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이듬해 경오년(1810, 순조 10)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처럼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하였다. 그 뒤 암행어사(暗行御史) 홍대호(洪大浩)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다산시문집 제21권

■두 아들에게 답함 임술(1802, 순조 2년, 선생 41세) 12월

우리 농(農)이가 죽었다니, 슬프고 슬프구나. 그의 인생이 가련하다. 나의 노쇠함이 더욱 심한데, 이러한 비통을 만나니, 진실로 조금도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구나. 너희들 아래로 사내아이 넷과 계집아이 하나를 잃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겨우 열흘이 좀 지나서 죽었기 때문에 그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형편이고,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세 살 때여서 한창 품에서 재롱을 피우다가 죽었었다. 그러나 모두 나와 너희 어머니 손에서 죽었으니, 그 죽음은 운명이라고 여겨 이번처럼 가슴을 저미듯이 아프지는 않았었다. 내가 이 천애일각(天涯一角)에 있어 작별한 지가 무척 오래인데 죽었으니, 다른 아이의 죽음보다 한층 더 슬프구나. 나는 생사고락(生死苦樂)의 이치를 대략 알고 있는 터에도 이처럼 비통한데, 하물며 너의 어머니는 직접 품속에서 낳아 흙 속에다가 묻었으니, 그 애가 살았을 때의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몸짓들이 모두 귀에 쟁쟁하고 눈에 삼삼할 것이다. 더군다나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부인들에 있어서랴.

나는 여기에 있고, 너희들은 이미 장대해서 하는 짓이 밉기만 했을 것이니, 너희 어머니가 목숨을 의탁하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은 오직 그 아이뿐이었는데, 더구나 큰 병을 앓아서 점점 수척해진 뒤에 이러한 일을 당하였으니 하루 이틀 사이에 따라 죽지 않는 것만도 크게 괴이한 일이다. 이 때문에 나는 너희들 어머니 처지를 생각하여 내가 그 아이의 아비란 것은 홀연히 잊은 채 다만 너희 어머니만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마음을 다하여 효성으로 봉양해서 너희들 어머니 목숨을 보전하도록 하여라.

차후로 너희들은 모름지기 성심으로 인도하여 두 며느리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부엌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어머니의 거처가 따뜻한가 차가운가를 살펴서 시시각각으로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곱고 부드러운 모습을 가지고 모든 방법으로 기쁘게 해 드리도록 해야 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혹시 쓸쓸해하면서 즐겨 받으려 하지 않거든 마땅히 성심껏 힘을 다해서 기필코 환심을 사도록 힘쓰게 해야 할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매우 화락해서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간격이 없게 되면 오랜 뒤에는 자연히 서로 믿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규문에 하나의 화기가 빚어지게 되면 천지의 화기가 응해서 닭이나 개, 채소나 과일 따위도 또한 제각기 무럭무럭 잘 자라서 일찍 죽는 일이 없고,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며, 나 또한 하늘의 은혜를 입어서 자연히 풀려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

너희들은 편지에서 항상 일가친척 중에 한 사람도 돌봐주고 긍휼히 여겨 주는 이가 없다고 이르면서, 신세가 기구하여 구당(瞿唐)의 염예(灩澦)라 하기도 하고 태행(太行)의 양장(羊膓)이라 하기도 하며 한탄하는데, 모두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말이니, 이것이 큰 병통이다. 내가 벼슬할 때에 약간의 우환과 질병이 있을 적마다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크게 입었다. 날마다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고 다독거리며 부축해 주는 이도 있었고 약을 보내오는 이도 있었으며 양식을 대어 주는 이도 있었는데, 너희들은 이러한 일들을 눈에 익숙히 보아서 남의 은혜를 희망하는 마음이 있으니, 빈천한 자의 본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본디 남의 보살핌을 받는 법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더구나 여러 일가들이 오래 전부터 모두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살아서 서로 은혜로운 정이 없으니, 요즘 같은 세상에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만도 후(厚)하다 할 것인데 어떻게 그들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들이 오늘날 이와 같이 잔패(殘敗)하기는 하였으나, 여러 일가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부호하다. 다만 저들에게까지 미칠 힘이 없을 뿐이다. 매우 가난하지도 않고 또 남에게 미칠 힘이 없으니, 진실로 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모든 일을 규문 안의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두어 계획 조치하고 심중에 남의 은혜를 희망하는 의사를 완전히 끊어 버린다면 자연히 심기가 화평해져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병통이 없어질 것이다.

여러 일가 중에 며칠째 밥을 짓지 못하는 자가 있을 때 너희는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느냐. 눈 속에 얼어서 쓰러진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땔나무 한 묶음을 나누어주어 따뜻하게 해 주었느냐.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해야 할 자가 있으면 너희는 약간의 돈으로 약을 지어 주어 일어나게 하였느냐. 늙고 곤궁한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때때로 찾아 뵙고 공손히 존경을 하였느냐. 우환(憂患)이 있는 자가 있으면 너희는 근심스러운 얼굴빛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환의 고통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잘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 보았느냐. 이 몇 가지 일을 너희들은 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러 집안에서 너희들의 급박하고 어려운 일에 서둘러 돌보아 주기를 바랄 수 있느냐.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해서 평소 일이 없을 때에 공손하고 화목하며 근신하고 충성하여 여러 집안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절대로 마음속에 보답을 바라는 근성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후로는 너희들에게 우환이 있는데도 저들이 돌보지 않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마음에 한을 품지 말고 오로지 곧게 추서(推恕)하여 ‘저 사람이 마침 서로 방해되는 일이 있어서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고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22권

■파리를 조문하는 글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전신(轉身)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큰 기근을 겪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 다시 가혹한 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에 널려 즐비하였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恒河)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아!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인가로 날아드는 것이다. 아! 이 파리가 어찌 우리의 유(類)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청해 와 모이게 하니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라.”

하고 다음과 같이 조문하였다.

파리야, 날아와서 이 음식 소반에 모여라. 소북이 담은 흰 쌀밥에 국도 간 맞춰 끓여 놓았고, 무르익은 술과 단술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겸하였으니, 그대의 마른 목구멍과 그대의 타는 창자를 축이라.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여한 없이 한번 실컷 포식하라. 그대의 옛집을 보니, 쑥대가 가득하며 뜰은 무너지고 벽과 문짝도 찌그러졌는데,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또 그대의 옛 밭을 보니 가라지만 길게 자랐다. 금년에는 비가 많아 흙에 윤기가 흐르건만,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아 황무한 폐허가 되었다.

파리야, 날아와 이 기름진 고깃덩이에 앉으라. 살진 소다리의 그 살집도 깊으며 초장에 파도 쪄놓고 농어 생선회도 갖추어 놓았으니, 그대의 굶주린 창자를 채우고 얼굴을 활짝 펴라. 그리고 또 도마에 남은 고기가 있으니 그대의 무리에게 먹이라. 그대의 시체를 보니 이리저리 언덕 위에 넘어져 있는데, 옷도 못 입고 모두 거적에 싸여 있다. 장마비가 내리고 날씨가 더워지자 모두 이물(異物)로 변하여, 꿈틀꿈틀 어지러이 구물거리면서 옆구리에 차고 넘쳐 콧구멍까지 가득하다. 이에 허물을 벗고 변신하여 구속에서 벗어나고, 송장만 길가에 있어 행인이 놀라곤 한다. 그래도 어린 아이는 어미 가슴이라고 파고들어 그 젖통을 물고 있다. 마을에서 그 썩는 시체를 묻지 않아 산에는 무덤이 없고, 그저 움푹 파인 구렁창을 채워 잡초가 무성하다. 이리가 와 뜯어 먹으며 좋아 날뛰는데, 구멍이 뻐끔뻐끔한 해골만이 나뒹군다. 그대는 이미 나비되어 날고 번데기만 남겨 놓았구나.

파리야, 날아서 고을[縣]로 들어가지 마라. 굶주린 사람만 엄격히 가리는데 서리가 붓대잡고 그 얼굴을 세찰(細察)한다. 대나무처럼 빽빽이 늘어선 사람 중에 다행히 한번 간택된다 하여도 물 같이 멀건 죽 한 모금 얻어 마시면 그만인데도 묵은 곡식에서 생긴 쌀벌레는 상하에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돼지처럼 살찐 건 호세 부리는 아전들인데, 서로 부동하여 공로를 아뢰면 가상히 여겨 견책하지 않는다. 보리만 익으면 진장(賑場 기민(飢民)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 구호소)을 거두고 연회를 베푸는데, 북소리와 피리소리 요란하며, 아미(蛾眉)의 아리따운 기생들은 춤추며 빙빙 돌고 교태를 부리면서 비단 부채로 가리운다. 비록 풍성한 음식이 있어도 그대는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단다.

파리야, 날아서 관(館)으로 들어가지 마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나열하여 꽂혀 있다. 돼지고기 쇠고기국이 푹 물러 소담하고 메추리구이와 붕어 지짐에 오리국, 그리고 꽃무늬 아름다운 중배끼 약과를 실컷 먹고 즐기며 어루만지고 구경하지만, 큰 부채를 흔들어 날리므로 그대는 엿볼 수도 없단다. 장리(長吏)가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살피는데. 쟁개비에 고기를 지지며 입으로 불을 분다. 계피물 설탕물에 칭찬도 자자하나,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철통같이 막아 서서 애처로운 호소를 물리치면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안에선 조용히 앉아 음식 먹으며 즐기고 있고 아전놈은 주막에 앉아 제멋데로 판결하여, 역마를 달려 여리(閭里)가 안일하다고 치보(馳報)하면서, 길에는 굶주린 사람 없고 태평하여 걱정이 없다고 한다. 파리야, 날아와 환혼(還魂)하지 말라. 지각없이 영원토록 흔흔한 그대를 축하한다. 죽어도 앙화는 남아 형제에게 미치게 되니, 6월에 벌써 조세를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호령은 사자의 울음 같아 산악(山岳)을 뒤흔든다. 가마와 솥도 빼앗아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어간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관가로 끌어다가 볼기를 치는데 그 매를 맞고 돌아오면 기진하여 염병에 걸려서 풀 쓰러지듯 고기 물크러지듯 죽어가지만 만민의 원망, 천지 사방 어느 곳에도 호소할 데가 없고, 백성이 모두 사지에 놓여도 슬퍼할 수가 없다. 어진이는 위축되어 있고 뭇 소인배가 날뛰니 봉황은 입을 다물고 까마귀가 짖어대는 격이다.

파리야, 날아가려거든 북쪽으로 날아가라, 북쪽 천리를 날아가 구중궁궐에 가서 그대의 충정(衷情)을 호소하고 그 깊은 슬픔을 진달하라. 강어(强禦)를 겁내지 않고 시비가 없다. 해와 달이 밝게 비치어 그 빛을 날리니, 정사를 폄에 인(仁)을 베풀고 신명에 고함에 규(圭)를 쓴다. 뇌정(雷霆)같이 울려 천위(天威)를 감격시키면 곡식도 잘되어 풍년을 이룰 것이다. 파리야, 그때에 남쪽으로 날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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