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동국이상국집 2

청담(靑潭) 2017. 6. 27. 17:20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동국이상국전집 제19권

○거란(契丹)을 평정한 데 대한 송

사나운 저 오랑캐 / 獷彼頑戎

우리 변방에 함부로 들어오네 / 闌入邊鄙

우리 백성을 씹어서 / 呑噬我生民

피가 그 이[齒]에 흐르네 / 血流于齒

우리 성황 크게 성내시어 / 聖皇赫怒

그 무리 몰아냈구려 / 克掃厥類

모르는 자는 모두 이렇게 말하네 / 不知者皆曰

이것은 달단(韃靼)의 도움이며 / 是韃靼之助

우리 군사가 용병을 잘한 때문이라고 / 與夫我軍善用兵之致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네 / 予曰不是

이것은 너희들이 논할 바 아니요 / 非爾所議

우리 성황의 받으신 명은 / 聖皇受命

실로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네 / 寔天所畀

하느님이 우리 성황을 위하여 / 天爲我聖皇

달단에게 손을 빈 것이네 / 假手韃靼耳

달단이 아무리 사납다 하나 / 韃靼雖狼

하느님의 사명을 어찌 피할까보냐 / 天其可避

우리 성황 지극히 인자하시어 / 我皇至仁

백성 보기를 자식같이 하시는데 / 視人如子

백성들은 어찌 차마 군부(君父)의 명을 쓰지 아니하고 / 人其忍不用君父之命

도리어 적에게 이 공을 돌려주려 하느냐 / 反以賊是遺耶

이는 천심의 도운 바이며 / 是則天心之所助

또한 성공으로 인한 것인데 / 與聖功之所自

달단이나 우리 군사가 / 夫韃靼與我軍

어찌 이에 참여한단 말이냐 / 何與是耶

※1218(고종 5)~1219년 양년에 걸쳐 몽고 원수 합진이 동진병(東眞兵)과 우리나라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와 합세하여 강동성(江東城)의 거란병(契丹兵)을 격파한 데 대해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를 강동성의 역이라고 하며 달단은 몽고족을 말한다.

 

○도잠(陶潛)에 대한 찬 병서

나는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본전과 시집을 읽고 그 활발한 성격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찬을 짓는다.

줄 없는 거문고 위에 / 無絃琴上

즐겁고 즐거운 그 마음일세 / 怡怡其心

사람들은 말하되 줄이 없으면 / 人曰無絃

거문고는 있어 무엇하리 / 不如無琴

거문고만 있고 줄이 없으면 / 有琴無絃

어디서 소리가 나올 것인가 / 安有厥音

만약 뜻을 붙인 것이라면 / 若曰寓意

무슨 물건이건 다 그렇지 / 凡物皆是

연명이 술을 즐기어 / 淵明嗜酒

날마다 술에 취했는데 / 惟日以醉

술잔만 있고 술이 없었으면 / 有杯無酒

그래도 취할 수 있었단 말인가 / 其可醉止

달관(達觀)한 선비의 취지를 / 達士之趣

사람들이 어찌 쉽게 알리요 / 人豈易會

간직할 것은 안[內]의 것이요 / 所攝者內

버릴 것은 바깥 것일세 / 可遺者外

진실로 바깥 것을 사모하면 / 苟慕於外

그것이 바로 욕심의 시초로세 / 惟慾之漸

어찌 거문고 줄뿐이겠는가 / 豈獨絃耳

뇌물도 싫어하지 않으리 / 需索莫猒

진실로 안의 것을 버리면 / 苟遺其內

단명(短命)을 자초하는 것일세 / 短折之招

진인이 연단하는 것은 / 眞人鍊丹

장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네 / 長生是邀

술도 역시 신약이라 / 酒亦神藥

아니 마시면 병을 따르는 걸 / 不飮病隨

거문고 줄을 차라리 잊을망정 / 絃寧可忘

술은 끊을 수 없으리 / 酒不可離

 

달마대사(達磨大師 ? - 528)의 상에 대한 찬

소림사(小林寺)에서 면벽(面壁) 참선한 것은 / 面壁小林

마음을 전하자는 것이었네 / 欲傳心耳

마음이 이미 동방에 전해졌으니 / 心已傳於震旦

몸과 형체는 서국(西國)으로 갈 걸세 / 將身與形而西矣

현재에 있어서도 / 當其見在

전할 것은 마음이요 / 可傳者心兮

쓸데없는 것은 몸이라 / 無用者身

몸이 이미 떠났거늘 / 身已去矣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 / 何必寫眞

상을 그려 마음을 구하는 것은 / 寫眞求心

뱀 허물에서 구슬을 구하는 격일세 / 若尋蛇蛻而索珠

몸이건 상이건 / 曰身曰眞

어느 것은 있고 어느 것은 없으리 / 孰有孰無

몸이 꿈속의 물건이라면 / 身是夢中物

상은 꿈속의 꿈일세 / 眞爲夢中夢

몸과 형체는 까마득히 / 混混溟溟

모두 무로 돌아가고 / 皆歸于無兮

오직 마음만 달과 함께 길이 남으리 / 唯心兮與月長共

 

○꿀벌에 대한 찬

꽃을 따서 만드는 꿀 / 採花作蜜

엿과 같구나 / 惟飴之似

기름과 짝을 이루니 / 與油作對

그 용도가 무궁하도다 / 其用不匱

사람들은 마구 긁어내어 / 人不廉取

바닥을 보고야 그만둔다 / 罄倒乃已

네가 죽지 않은 한 / 汝若不死

인욕이 그치겠는가 / 人欲奚旣

 

○소연(小硯)에 대한 명銘

벼루야 벼루야 / 硯乎硯乎

네가 작다 하여 너의 수치가 아니다 / 爾麽非爾之恥

네 비록 한 치쯤 된 웅덩이이지만 / 爾雖一寸窪

나의 무궁한 뜻을 쓰게 한다 / 寫我無盡意

나는 비록 육척 장신인데도 / 吾雖六尺長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 / 事業借汝遂

벼루야 너는 나와 일체가 되어 / 硯乎吾與汝同歸

생사를 함께 하자꾸나 / 生由是死由是

 

○스스로 경계할 일에 대한 명銘

친근하다 해서 나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 / 無曰親眤而漏吾微

총애하는 처첩(妻妾)은 이불은 같이해도 뜻은 다르다 / 寵妻嬖妾兮同衾異意

부르는 노복(奴僕)이라고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 無謂傼御兮輕其言

겉으로는 순종하나 속에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다 / 外若無骨兮苞蓄有地

더구나 나에게 친근한 사람도 부리는 사람도 아님에랴/況吾不媟近不驅使者乎

※銘 : 금석(金石), 기물(器物), 비석 따위에 남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나 사물의 내력을 새김. 또는 그런 문구. 흔히 한문 문체 형식으로 하는데, 대개 운(韻)을 넣어 넉 자가 한 짝이 되어 구(句)를 이루게 한다.

 

○면잠(面箴)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으면 / 有愧于心

네가 반드시 먼저 부끄러워한다 / 汝必先耻

빛은 주홍빛처럼 붉고 / 色赬若朱

땀은 물같이 떨어진다 / 泚滴如水

사람을 대하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 對人莫擡

살며시 숙이고 피하게 된다 / 斜回低避

마음의 하는 짓이 / 以心之爲

너에게 옮겨진다 / 迺移於爾

모든 군자는 / 凡百君子

의(義)를 행하고 위의(威儀)를 가지라 / 行義且儀

능히 마음이 활발하면 / 能肆于中

너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리라 / 毋使汝愧

※잠(箴) : 훈계하는 뜻을 적은 글의 형식. 箴言 :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

 

○요잠(腰箴)

활처럼 굽히지 않고 항상 꼿꼿하면 / 常直不弓

남에게 노여움을 받게 된다 / 被人怒嗔

경쇠[磬] 등처럼 굽히면 / 能曲如磬

몸에 욕이 미치지 않는다 / 遠辱於身

오직 사람의 화복은 / 惟人禍福

너의 굴신(屈伸)에 달린 것이다 / 係爾屈伸

 

○사잠(思箴)

내가 갑작스레 일을 처리하고 나서 / 我卒作事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 悔不思之

생각한 뒤에 일을 처리하였더라면 / 思而後行

어찌 화가 따르겠는가 / 寧有禍隨

내가 갑자기 말을 하고 나서 / 我卒吐言

재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 悔不復思

생각한 뒤에 말을 하였더라면 / 思而後吐

어찌 욕이 따르겠는가 / 寧有辱追

생각하되 경솔하게 생각지 말라 / 思之勿遽

경솔히 생각하면 어긋나는 것이 많다 / 遽則多違

생각하되 깊이 생각지 말라 / 思之勿深

깊이 생각하면 의심이 많게 된다 / 深則多疑

참작하고 절충하여 / 商酌折衷

세 번 생각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 三思最宜

 

○슬잠(虱箴)

이[虱]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 蝨從何生

간악하기 너와 같은 것이 없다 / 黠莫如爾

반드시 꿰맨 틈으로 깊이 들어가서 / 入必深縫

눈에 뜨이지 않을 곳에 숨고 / 目所未到

흔히 잠방이 밑에 들어가서 / 多匿褌底

손이 닿지 못할 곳에 숨는다 / 手所未至

제딴은 잘된 꾀라 하여 / 自謂得計

사람을 물어 그칠 줄 모른다 / 噆人不止

사람은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 人不堪毒

반드시 그대로 두지 않는다 / 必莫忍置

더듬어 찾아내어 / 捫之搜之

불에다 던진다 / 投畀火熾

불이 받아주지 않으면 / 熾火不受

굶주린 개미에게 던져 준다 / 投畀饞蟻

개미도 받아주지 않으면 / 饞蟻不受

사람의 손톱이 또한 죽인다 / 爪甲亦利

이야 이야 / 蝨兮蝨兮

너의 죽음을 재촉하지 말라 / 毋促乃死

 

♣漢文體의 장르

시(詩):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

부(賦) : 1.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직접 서술하 는 작법

2. 한문체에서 글귀끝에 운을 달고 흔히 대(對)를 맞추어 짓는 글

3. 과문(科文)에서, 여섯 글자로 한 글귀를 만들어 짓는 글

송(頌) : 공덕을 기리는 글이나 문장

책(策) :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구호(口號) : 입타령(노래의 절과 절 사이에 뜻 없이 부르는 소리).

찬(讚·) : 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

명(銘) : 금석(金石), 기물(器物), 비석 따위에 남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 사물의 내력을 새김.  또 는 그런 문구

의(議) : 의논하다. 토의하다.

잠(箴) : 훈계하는 뜻을 적은 글의 형식. 箴言 :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

전(傳) : 어떤 사람의 독특한 행적을 기록하고, 여기에 교훈적인 내용이나 비 판을 덧붙인 글. 크게 열전, 사전(私傳), 탁전(托傳), 가전(假傳)으로 나뉜다.

어록(語錄) : 위인들이 한 말을 간추려 모은 기록.

설(說) : 구체적(具體的)인 사물(事物)에 관(關)하여 자기(自己)의 의견(意見) 을 서술(敍述)하면서 사물(事物)의 도리(道理)를 설명(說明)하는 문장(文章).

서(序) : 사적(事蹟)의 요지(要旨)를 적은 글. 서술하는 글. 서문 . 머리말 

발(跋):발문(跋文). 책의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논(論) : 論說

기(記) : 주로 사적(事蹟) 또는 풍경(風景)을 적은 산문체(散文體)의 글

서(書) : 편지

표(表) : 임금에게 올리는 서장(書狀).

장(狀) : 장계를 이르며 벼슬아치가 임금의 명을 받들고 지방(地方)에 나가 민정을 살핀 결과(結果)를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報告)

전(牋) : 한(漢)ㆍ위(魏) 시대(時代)에는 천자(天子)ㆍ태자(太子)ㆍ제왕(帝王) 등(等)에 대(對)한 상주문(上奏文)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었으며, 후 세(後世)에는 황후(皇后)ㆍ태자(太子)에 대(對)한 것을 이르던 말임

 

 

▣동국이상국전집 제20권

○쥐를 저주하는 글

우리 집에는 평소에 고양이를 기르지 않으므로 쥐 떼들이 마구 날뛴다. 그래서 그것이 미워서 저주한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른이 되고, 곁에서 이를 돕는 데에는 각각 맡은 바가 있다.음식 만드는 일을 맡은 자는 계집종이고, 마소 치는 일을 맡은 자는 사내종이며, 아래로 육축(六畜)에 이르기까지 직책에 각기 구분이 있다.말은 수고를 대신하여 사람이나 짐을 싣고 달리며, 소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밭을 갈며, 닭은 울어서 새벽을 알리며, 개는 짖어서 문을 지키는 등 모두 맡은 바 직책으로 주인집을 돕고 있다.뭇 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맡은 일이 무엇이고 누가 길렀으며 어디서 생겨나서 번성하는가?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 것은 오직 너희만이 아는 바다. 대개 도둑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거늘 너희는 어찌 안에 살면서 도리어 주인의 집에 해를 끼치는가? 구멍을 많이 만들어 이리저리 들락날락하며, 어둠을 틈타 마구 쏘다녀 밤새도록 시끄럽게 하며, 잠이 들면 더욱 방자하고 대낮에도 떳떳이 다니며, 방에서 부엌으로 가고 마루에서 방으로 가며, 부처에게 드리는 음식과 신령을 섬기는 물품을 너희가 먼저 맛보니, 이는 신령을 능멸하고 부처를 무시하는 것이다.단단한 것을 구멍 뚫어 상자나 궤 속에 잘 들어가며 굴뚝을 뚫어 구석에서 연기가 나게 하면서 음식을 먹으니 이는 도둑이다. 너희도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일진대, 어찌하여 옷감을 씹어서 옷을 이루지 못하게 하며, 실을 씹어서 명주를 짜지 못하게 하는가?

너희를 제어할 것은 고양이이지만 내가 기르지 않는 것은, 성품이 본래 인자하여 차마 악독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덕성을 알아주지 않고 날뛰어 저촉되는 짓을 하게 된다면 너희를 응징하여 후회하게 할 것이니, 빨리 나의 집을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나운 고양이를 풀어서 하루에 너희 족속을 도륙하게 하여, 고양이의 입술에 너희 기름을 칠하게 하고, 고양이의 뱃속에 너희 살을 장사지내게 할 것이다. 그때에는 비록 부활(復活)하려 하여도 생명이 다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니 속히 가거라. 속히 가거라. 율령(律令)과 같이 급급히 하여라.

 

○국선생전(麴先生傳)

국성(麴聖)의 자는 중지(中之)이니, 주천(酒泉) 고을 사람이다. 어려서 서막(徐邈)에게 사랑을 받아, 막(邈)이 이름과 자를 지어 주었다. ※서막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당시 금주령이 엄한 속에서도 항시 술에 취했고, 술을 중성인(中聖人)이라고 높여 부르기까지 하였다. 먼 조상은 온(溫) 땅 사람으로 항상 힘써 농사지어 자급(自給)하더니, 정(鄭) 나라가 주(周) 나라를 칠 때에 잡아 데려왔으므로, 그 자손이 혹 정 나라에 퍼져 있기도 하다. 증조(曾祖)는 역사 기록에 그 이름이 빠졌고, 조부 모(牟)가 주천(酒泉)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눌러 살아 드디어 주천 고을 사람이 되었다. 아비 차(醝 흰 술)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여 평원독우(平原督郵)가 되고, 사농경(司農卿) 곡씨(穀氏)의 딸과 결혼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聖)이 어려서부터 이미 깊숙한 국량이 있어, 손님이 아비를 보러 왔다가 눈여겨보고 사랑스러워서 말하기를,

“이 애의 심기(心器)가 출렁출렁 넘실넘실 만경(萬頃)의 물결과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니 그대와 더불어 이야기함이 성(聖)과 즐김만 못하네.”

하였다. 장성하자 중산(中山)의 유영(劉伶)과 심양(潯陽)의 도잠(陶潛)과 더불어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루만 이 친구를 보지 못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싹튼다.”

하며, 서로 만날 때마다 며칠 동안 피곤을 잊고 마음이 취해서야 돌아왔다.

고을에서 조구연(槽丘掾)으로 불렀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였더니 또 불러서 청주종사(靑州從事)로 삼았다. 공경(公卿)이 번갈아 천거하니, 임금이 공거(公車)에서 조령(詔令)을 대기하게 하였다. 얼마 안 가서 불러 보고 목송(目送)하며 말하기를,

“이가 주천(酒泉)의 국생(麴生)인가? 짐이 향명(香名)을 들은 지 오래였노라.”

하였다. 이에 앞서 태사(太史)가,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을 낸다고 아뢰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성(聖)이 이르니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히 여겼다. 곧 주객 낭중(主客郎中)에 임명하고, 이윽고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올려 예의사(禮儀使)를 겸하게 하니, 무릇 조회(朝會)의 연향(宴饗)과 종묘(宗廟)의 모든 제사의 작헌(酌獻)하는 예(禮)를 맡아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으므로 임금이 그의 기국(器局)이 쓸 만하다 하여 올려서 후설(喉舌)의 직에 두고, 후한 예로 대접하여 매양 들어와 뵐 적에 교자(轎子)를 탄 채로 전(殿)에 오르라 명하며, 국선생(麴先生)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임금이 불쾌한 마음이 있다가도 성(聖)이 들어와 뵈면 비로소 크게 웃으니, 대범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성품이 온순하므로 날로 친근하며 임금과 더불어 조금도 거스름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더욱 사랑을 받아 임금을 따라 함부로 잔치에 노닐었다.

아들 혹(酷)ㆍ폭(䤖)ㆍ역(醳)이 아비의 총애를 받고 자못 방자하니, 중서령(中書令) 모영(毛穎)이 상소하여 탄핵하기를,

“행신(倖臣)이 총애를 독차지함은 천하가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온데, 이제 국성(麴聖)이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요행히 벼슬에 올라 위(位)가 3품(品) 에 놓이고, 내심이 가혹하여 사람을 중상하기를 좋아하므로 만인이 외치고 소리지르며 골머리를 앓고 마음 아파하오니, 이는 나라의 병을 고치는 충신(忠臣)이 아니요, 실은 백성에게 독을 끼치는 적부(賊夫)입니다. 성(聖)의 세 아들이 아비의 총애를 믿고 횡행 방자하여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니, 청컨대 폐하께서는 아울러 사사(賜死)하여 뭇사람의 입을 막으소서.”

하니, 아들 혹(酷) 등이 그날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성(聖)은 죄로 폐직되어 서인(庶人)이 되고, 치이자(鴟夷子 술항아리)도 역시 일찍이 성(聖)과 친했기 때문에 수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 일찍이 치이자가 익살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서로 친한 벗이 되어 매양 임금이 출입할 때마다 속거(屬車)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치이자가 일찍이 곤하여 누워 있으므로 성(聖)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자네 배가 비록 크나 속은 텅 비었으니, 무엇이 있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자네들 따위 수백은 담을 수 있네.”

하였으니, 서로 희학(戲謔)함이 이와 같았다.

성(聖)이 파면되자, 제(齊 제(臍)) 고을과 격(鬲 격(膈)) 고을 사이에 뭇 도둑이 떼지어 일어났다. 임금이 명하여 토벌하고자 하나 적당한 사람이 없어 다시 성(聖)을 발탁하여 원수(元帥)로 삼으니, 성(聖)이 군사를 통솔함이 엄하고 사졸(士卒)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여 수성(愁城)에 물을 대어 한 번 싸움에 함락시키고 장락판(長樂阪)을 쌓고 돌아오니, 임금이 공으로 상동후(湘東侯)에 봉하였다.

1년 뒤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빌기를,

“신(臣)은 본시 옹유(甕牖)의 아들로 어려서 빈천하여 사람에게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우연히 성주(聖主)를 만나 성주께서 허심탄회하게 저를 후하게 받아 주시어 침닉(沈溺)에서 건져내어 하해 같은 넓은 도량으로 포용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홍조(洪造)에 누만 끼치고 국체(國體)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앞서 삼가지 못한 탓으로 향리(鄕里)에 물러가 편안히 있을 때 비록 엷은 이슬이 거의 다하였으나 요행히 남은 물방울이 유지되어, 일월의 밝음을 기뻐하여 다시 벌레가 덮인 것을 열어젖혔습니다. 또한 양이 차면 넘어지는 것은 물(物)의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제 신이 소갈병(消渴病)을 만나 목숨이 뜬 거품보다 급박하니, 한 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물러가 여생을 보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송계(松桂)ㆍ창포(菖蒲) 등 약물을 가지고 그 집에 가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성(聖)이 여러 번 표(表)를 올려 굳이 사직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자 그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 살다가 천명으로 세상을 마쳤다.

아우 현(賢 약주)은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고, 아들 익(䣧 색주(色酒))ㆍ두(酘 중양주(重釀酒))ㆍ앙(? 막걸리)ㆍ남(醂 과주(果酒))은 도화즙(桃花汁)을 마셔 신선술(神仙術)을 배웠고, 족자(族子) 추(?)ㆍ미(䤍)ㆍ엄()은 다 적(籍)이 평씨(萍氏)에 속하였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한다.

“국씨(麴氏)는 대대로 농가(農家) 태생이며, 성(聖)은 순덕(醇德)과 청재(淸才)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국정(國政)을 돕고 임금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여 거의 태평을 이루었으니, 그 공이 성대하도다. 그 총애를 극도로 받음에 미쳐서는 거의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혔으니, 그 화가 비록 자손에 미쳤더라도 유감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만년에 분수에 족함을 알고 스스로 물러가 능히 천명으로 세상을 마쳤다. 《역(易)》에 이르기를 ‘기미를 보아 떠난다’ 하였으니, 성(聖)이 거의 그에 가깝도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1권

○몽설(夢說)

내가 3품~4품의 벼슬에 있을 때부터 늘 꿈을 꾸면 큰 누각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는 큰 바다였으며 물이 누각 위까지 올라와서 잠자리를 적시는데, 나는 그 속에 누워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6~7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깰 적마다 이상스럽게 여겼으며, 혹은 《주공몽서(周公夢書)》로써 징험해 보고서 마음속으로 서몽(瑞夢)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경인년(1230, 고종 17)에 와서 내가 아무 죄도 없이 위도(猬島)로 귀양 가서 나이 많은 어떤 사호(司戶)의 집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높은 누각이 큰 바다를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어 마치 훨훨 날아갈 듯한 기상이었고, 물이 헌창(軒窓)에까지 치밀어올랐으니, 꼭 꿈에 보던 그 누각과 같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전일의 꿈을 징험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의 출세와 은퇴, 잘되고 못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모두가 모르는 가운데 미리 정해지는 일일 것이다.

당시에는 꼭 그 땅에서 죽으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안 가서 서울에 돌아와 지위가 정승에까지 올랐으니, 이도 역시 하늘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갑오년(1234, 고종 21) 월 일에 쓴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2권

○당서(唐書)에 최치원(崔致遠)의 열전(列傳)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의(議)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 《사륙문(四六文)》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렸다. 그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인데, 빈공급제(賓貢及第)로 고변(高騈)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하였다.

내가 이것을 읽어보고, 과연 중국인은 도량이 넓다는 것을 가상히 여겼으니, 그것은 외국인이라고 해서 가볍게 다루지 않고, 이미 그 문집을 세상에 배포하게 하였고, 또 역사책에 이렇게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傳)을 지어 넣지 않았으니, 나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만일 전을 지어 넣을 만한 행적이 없다고 한다면,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은 12살 때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유학하여 단번에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소(黃巢)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자 황소가 기가 꺾이게 되었고,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 이르렀으며,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주었는데, 대략 그 가사에

열두 살 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 十二乘船過海來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 / 文章感動中華國

하였으니,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다. 이것을 가지고 전을 지어 넣는다면 진실로 그 문예열전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 되는 열전(列傳)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최고운을 이미 예문지에 나타냈으며, 또 번진 호용(藩鎭虎勇) 열전에서는 이정기(李正己)와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모두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적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는데, 어찌 문예열전에서 유독 최고운을 위하여 그 전을 만들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로 헤아리건대, 옛날 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가 있었는데,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서생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인들을 짓밟았음에랴? 이는 중국인의 시기에 가까운 것이다. 만약 전을 만들어 그 사적을 바로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한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는 나의 이해하지 못할 바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3권

○접과기(接菓記)

일 중에 처음에는 허탄 망괴한 것인 듯하다가 나중에는 진실한 것이 있으니, 그는 바로 과목(菓木)을 접(接)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나의 선군(先君) 때에 키다리 전씨(田氏)라 불리는 이가 과목 접을 잘하였으므로 선인이 시험삼아 접하게 하였다.

동산에 나쁜 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전씨는 모두 톱으로 자르고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한 배나무를 구하여 몇 개의 가지를 깎아서 자른 나무에 꽂고 기름진 진흙으로 봉하였다. 그때에 그것을 보니, 허탄한 것만 같았고, 비록 싹이 뾰족이 나오고 잎이 필 때에 이르러서도 또한 괴이한 요술만 같았다. 그러다가 여름에 지엽이 무성하고 가을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 다음에야 마침내 진실이라는 것을 믿어서, 허탄 망괴하다고 여긴 의심이 비로소 마음에서 없어졌다.

선군이 별세하신 지가 무릇 아홉 해라 나무를 보고 열매를 먹으니, 그 엄하시던 얼굴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혹은 나무를 부여잡고 목이 메어서 차마 떠나지 못한 적도 있다.

또 옛사람은 소백(召伯)과 한 선자(韓宣子)의 일 때문에 감당(甘棠)을 꺾지 않고 아름다운 나무를 잘 북돋아 가꾸는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버지가 일찍이 보유하고 계시다가 자식에게 물려주신 이것이야 그 공경하는 마음이 어찌 꺾지 않고 북돋아 심은 그 정도일 뿐이랴? 그 열매도 또한 꿇어앉아서 먹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생각하건대, 선군이 이것을 나에게 물려주신 까닭은, 나로 하여금 개과천선을 마땅히 이 나무처럼 하도록 하신 것이리라. 이에 기록하여 경계하는 바이다.

 

○사가재기(四可齋記)

옛날 나의 선군(先君)이 서쪽 성곽 밖에 별장을 두었었는데, 계곡이 깊숙하고, 경지가 궁벽하여 즐길 만한 딴세상을 이루어 놓은 것 같았다. 내가 그것을 얻어서 차지하고 자주 왕래하면서 글을 읽으며 한적하게 지낼 곳으로 삼았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하기에 가하다. 나의 뜻에 가한 것이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집을 ‘사가(四可)’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또 녹봉이 많고 벼슬이 높아 위세를 부리는 자는 무릇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거니와, 나 같은 사람은 곤궁하여 평생에 백에 하나도 가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네 가지나 가한 것을 차지하였으니, 그 얼마나 참람한 일인가?

대저 태뢰(太牢 : 성대한 음식)를 먹은 것도 명아주국에서 시작하고 천 리를 가는 것도 문 앞에서 시작하니, 대개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집에 거하면서 만일 전원(田園)의 낙을 얻게 되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입고서는 고원(故園)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어서, 격양(擊壤)하고 배를 두드리며 성왕의 교화를 가영(歌詠)하여, 그 가영 소리를 관현(管絃)에 올리면 또한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일찍이 이 집에서 시 3수를 지었는데, 시집 가운데 있는 ‘서교초당시(西郊草堂詩)’가 바로 그것이다. 그 한 글귀에

쾌하구나 농가의 즐거움이여 / 快哉農家樂

전원에 돌아감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 歸田從此始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나의 뜻이다.

모월 모일에 백운거사는 기(記)한다.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경신년(1200, 신종 3) 계동(季冬)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꺼내 보았더니 너무 소략해서 읽을 수가 없었으니, 자신이 기록한 것인데도 도리어 우습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 가져다가 불살라버리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읽을 만한 것을 모아서 우선 차례로 적어보겠다.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百濟國)이다.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풍(故國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은 모두 점잖은 사인(士人)과 같아, 행동거지의 신중함이 볼 만하였다.

중자산(中子山 : 기린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이란 산이 가장 울창하니, 그 고을에서는 제일 큰 진산(鎭山)이었다. 소위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주 소재지에서 1천 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경복사(景福寺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던 절)가 있고 그 절에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 이것을 내가 예전부터 들었으나 사무에 바빠서 한 번 찾아보지 못하였다가 하루는 휴가를 이용하여 결국 가보았다.

이른바 ‘비래방장’이란 것은 옛날 보덕대사(普德大士)가 반룡산(盤龍山 함흥(咸興)에 있다)으로부터 날려서 옮겨온 당(堂)이다.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인데,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거처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도교(道敎)만을 존숭하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피난을 해야 하겠는데 어느 곳이 좋을까?”

하자,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이 바로 편안히 머무를 만한 땅입니다.”

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 보장왕 26)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당(堂)이 이미 고달산으로 옮겨갔는데, 반룡산에서 1천여 리의 거리였다. 명덕이 말하기를,

“이 산이 비록 기절(奇絶)하기는 하나 샘물이 없다. 내가 만일 스승이 옮겨올 줄 알았더라면 반드시 옛 산에 있는 샘물까지 옮겨왔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전(傳)을 지어 이에 대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약한다.

11월 기사일(己巳日)에 비로소 속군(屬郡)들을 두루 다녀 보았더니, 마령(馬靈 현 진안군 마령면)ㆍ진안(鎭安 : 현 진안군 진안읍)은 산곡간(山谷間)의 옛 고을이라, 그 백성들이 질박하고 미개하여 얼굴은 원숭이와 같고, 배반(杯盤)이나 음식에는 오랑캐의 풍속이 있으며, 꾸짖거나 나무라면 형상이 마치 놀란 사슴과 같아서 달아날 것만 같았다.

산을 따라 감돌아 가서 운제(雲梯 : 현 완주군 운주면)에 이르렀다. 운제에서 고산(高山 : 현 완주군 고산면)에 이르기까지는 높은 봉우리와 고개가 만길이나 솟고 길이 매우 좁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고산은 다른 군에 비하여 질이 낮지 않았다. 고산에서 예양(禮陽 : 완주군 비봉면 또는 화산면 또는 익산시 여산면 중의 어느 곳으로 보임)으로, 예양에서 낭산(朗山 : 현 익산시 낭산면)으로 갔는데, 모두 하룻밤씩 자고 갔다.

다음날 금마군(金馬郡 : 익산시 금마면)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 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적(奇迹)으로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

다음날 이성(伊城 : 현 완주군 이서면)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조잔(凋殘)하고 이락(籬落)이 소조(蕭條)하여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와 뵙는 자는 4~5인에 불과하였으니, 보기에 측은하고 서글펐다.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 : 현 부안군 변산면)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변산이란 곳은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宮室)을 수리 영건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치솟은 나무는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군사 거느리고 권세부리니 그 영화 자랑할 만한데 / 權在擁軍榮可詑

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네 / 官呼斫木辱堪知

이는 나의 맡은 일이 담부(擔夫)ㆍ초자(樵者)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층층한 봉우리와 겹겹한 멧부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여, 그 머리나 꼬리의 놓인 곳과 뒤축과 팔죽지의 끝난 곳이 도대체 몇 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도(群山島 : 현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ㆍ위도(猬島 : 부안군 위도면)ㆍ구도(鳩島 : 현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를 말하는 듯함)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

“순풍을 만나 쏜살같이 가면 중국을 가기가 또한 멀지 않다.”

고 한다. 산중에는 밤[栗]이 많은데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얼마쯤 가노라니, 수백 보 가량 아름다운 대나무가 마치 삼대처럼 서 있는데, 모두 울타리로 막아놓았다. 대숲을 가로질러 곧장 내려가서 비로소 평탄한 길을 만났다. 그 길로 가서 한 고을에 이르렀더니, 거기는 바로 보안(保安 : 현 부안군 보안면)이란 곳이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탄한 길이라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의 진퇴를 보아서 다니는 시기를 정해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는 조수가 막 들어오는데 사람이 선 곳에서 오히려 50보 정도의 거리는 있었다. 그래서 급히 채찍질하여 말을 달려서 먼저 가려고 하였더니, 종자(從者)가 깜짝 놀라며 급히 말린다. 내가 듣지 않고 그냥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 하고 휘몰아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사뭇 만군(萬軍)이 배도(倍道)로 달려오는 듯하여 매우 겁이 났다. 내가 넋을 잃고 급히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겨우 화는 면하였으나, 조수가 거기까지 따라와서 말의 배에 넘실거린다. 푸른 물결, 파란 멧부리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음청(陰晴)ㆍ혼조(昏朝)에 경상(景狀)이 각기 다르며,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푸르락 그 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이 만첩(萬疊)의 화병(畫屛)을 두른 듯하였다. 눈을 들어 그 경치를 바라볼 때 시를 잘하는 두세 명과 더불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면서 함께 읊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러나 만경(萬景)이 넋을 건드리매 정서(情緖)가 스스로 뒤흔들려서 시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시가 저절로 지어졌다. 일찍이 주사포(主史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올라 해변의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는데, 그러는 중에 시 한 수를 지었었다…….

윤12월 정미에 또 조정의 영을 받아 여러 고을의 원옥(冤獄)을 감찰하게 되어 먼저 진례현(進禮縣 : 현 금산군 금산읍)으로 향하였다. 산이 매우 높고 들어갈수록 점점 깊숙하여 마치 딴 나라의 별경을 밟는 듯하여, 마음이 울적하고 무료하였다. 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군사(郡舍)에 들어가니, 현령(縣令)과 수리(首吏)가 모두 부재중이었다. 밤 2경(更) 무렵에 현령과 수리가 각기 8천 보 밖에서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그들은 문기둥에 말을 매어놓고 여물을 주지 못하게 경계하였다. 무릇 매우 달린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는 척하면서 들었다. 그 두 사람이 이 노부(老夫)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을 알고서는 부득이 술자리를 허락하였다. 한 기생이 비파(琵琶)를 타는데, 꽤 들을 만하였다. 내가 다른 고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여기에 와서 유쾌히 마시고 또 현악(絃樂)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은 아마 머나먼 길을 달려왔으므로 마치 딴 나라에 들어온 기분으로 사물을 보고 쉽게 감동되어 그런 것이리라.

진례현에서 떠나 남원부(南原府 : 현 남원시)에 이르렀다. 남원은 옛날의 대방국(帶方國)이다. 객관(客館) 뒤에 죽루(竹樓)가 있는데, 한적하여 사랑스럽기에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경신년 춘3월에 또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할 때 수촌(水村)ㆍ사호(沙戶)ㆍ어등(漁燈)ㆍ염시(鹽市)를 유열(遊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경(萬頃 : 현 김제시 만경읍)ㆍ임피(臨陂 현 군산시 임피면)ㆍ옥구(沃溝 : 현 군산시 옥구읍)에 들러 며칠을 묵고 떠나 장사(長沙 : 현 고창군 상하면 공음면 심원면 일대)로 향하였다. 길가에 한 바위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彌勒像)이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 그 미륵상에서 몇 보 떨어진 지점에 또 속이 텅 빈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안을 경유하여 들어갔더니, 땅이 점차 넓어지고 위가 갑자기 환하게 트이며 집이 굉장히 화려하고 불상이 준엄하게 빛났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사(兜率寺)였다. 날이 저물기에 말을 채찍질해 달려서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잤다.

다음날 장사에 들렀다 장사에서 떠나 무송(茂松 : 현 고창군 무장면 성송면 일대)에 이르렀는데, 모두 잔폐(殘弊)한 작은 고을인지라,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만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하고 척수를 계산했을 뿐이다.

평소에 샘 하나 못 하나를 만나면 움켜 마시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여 그지없이 애완(愛翫)하였던 것은, 강해(江海)를 그리워하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바다와 함께 노닌 지 오래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역시 물이 고함치는 소리이므로 싫증이 날 지경이다.

왜 하느님은 마치 배고픈 자를 갑자기 배불리 먹여서 도리어 맛있는 음식을 물리치게 하는 것처럼 이같이 실컷 먹이는가?

이해 8월 20일은 내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었다. 하루 앞서 변산 소래사(蘇來寺 : 현 내소사)에 갔는데, 벽 위에 고(故)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가 있으므로 나도 2수를 화답하여 벽에 썼다.

다음날 부령(현 부안군 부안읍)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 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나의 배리(陪吏)가 슬그머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대사는 일찍이 전주에 우거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횡포하매, 사람들이 모두 성가시게 여기더니 그 뒤 간 곳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대사이옵니다.”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저 중품ㆍ하품의 사람은 그 기국이 일정하기 때문에 변동이 없지만, 악(惡)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는 그 기국이 보통 사람과 다르므로 한번 선(善)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이처럼 초월하는 것이다. 옛날에 사냥하던 장수가 우두 이조대사(牛頭二祖大士)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아 마침내 숙덕(宿德)을 이루었고, 해동(海東)의 명덕대사(明德大士)도 매사냥을 하다가 보덕성사(普德聖師)의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이런 유로 미루어본다면, 이 대사가 마음을 고쳐 개연(介然)히 특이한 행실을 닦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이른바 ‘불사의 발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효공의 방장의 만 배였고 높이 1백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樓臺)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眞表大士)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眞表)이며 벽골군(碧骨郡 : 현 김제시) 대정촌(大井村) 사람이다. 그는 12살 때 현계산(賢戒山) 불사의암(不思議巖)에 와서 거처하였는데 현계산이 바로 이 산이다. 그는 명심(冥心)하고 가만히 앉아 자씨(慈氏 미륵보살)와 지장(地藏 지장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이에 몸을 구렁에 던지니, 두 명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으면서 말하기를,

“대사의 법력(法力)이 약한 때문에 두 성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노력하여 삼칠일(三七日)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 위에 자씨와 지장이 현신(現身)하여 계(戒)를 주고, 자씨는 친히 《점찰경(占察經)》 2권을 주고 아울러 1백 99생(栍)을 주어 도왕(導往 중생을 인도해 감)의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돌아오려 할 때 현재(縣宰)가 한 산꼭대기에 술자리를 베풀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망해대(望海臺)입니다. 제가 공(公)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서 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게 했으니, 잠깐 쉬십시오.”

하였다. 내가 드디어 올라가서 바라보니,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산에서 거리가 겨우 백여 보쯤 되었다. 한 잔 술, 한 구 시를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제 스스로 아양을 부려 도무지 인간 세상의 한 점 속된 생각이 없어 표연히 속골(俗骨)을 벗고 날개를 붙여 육합(六合) 밖으로 날아나가는 듯,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장차 뭇 신선을 손짓하여 부를 듯하였다. 동석한 10여 인이 다 취하였는데, 내 선군의 기일(忌日)이므로 관현(管絃)과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

무릇 내가 지난 곳에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적지 않았다. 대저 경사(京師)를 몸으로 보고 사방(四方)을 지체(支體)로 보면, 내가 노닌 곳은 남도의 한쪽, 한 지체 중에도 한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기록은 다 잊고 빠뜨린 나머지인데 어찌 후일의 볼 만한 것이 되랴? 우선 이것을 간직하여, 뒤에 동서남북을 모조리 노닐며 온통 기록할 때를 기다렸다가 합하여 1통(通)을 만들어서 늘그막에 소일할 자료를 삼는 것도 또한 좋지 않겠는가?

신유년(1201년) 3월 일에 쓴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4권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

길이 계양(桂陽)의 변두리에 사방으로 나 있으나 한 면만 육지에 통하고 삼면은 다 물이다. 처음 내가 이 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어 올 때 망망대해의 푸른 물을 돌아보니 섬 가운데 들어온 듯하므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보려 하지 않았다.

2년 후 6월에 문하성의 낭관에 제배되어 장차 날짜를 정하여 서울로 가게 되니, 전일에 보던 망망대해의 푸른 물이 다 좋게만 보였다. 그래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모두 놀러가 보았다.

처음 만일사(萬日寺)의 누대(樓臺)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사승(寺僧)이 와서 바라보는 일을 돕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자연도(紫燕島)ㆍ고연도(高燕島)ㆍ기린도(麒麟島)입니다.”

하고,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경도(京都)의 곡령(鵠嶺), 저것은 승천부(昇天府)의 진산(鎭山)ㆍ용산(龍山), 인주(仁州)의 망산(望山), 통진(通津)의 망산입니다.”

하며, 역력히 잘 가르쳐 주었다. 이날 내가 매우 즐거워서 함께 놀러온 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

며칠 후에 명월사(明月寺)에 가서 앞서와 같이 놀았다. 그러나 명월사는 많은 산들이 가려서 만일사의 툭 트인 것만 못하였다.

며칠 후에 다시 산을 따라 북으로 바다를 끼고 동으로 향하여 조수가 밀려오는 것과 해시(海市)의 변괴를 구경하는데,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피곤한 뒤에야 돌아오니, 함께 놀던 자 모모인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따랐다.

아, 저 물은 전일의 물이요 마음도 전일의 마음인데, 전일에 보기 싫던 것을 지금은 도리어 즐거운 구경거리로 삼으니, 그것은 구구한 한 벼슬을 얻은 때문일까? 마음은 나의 마음이거늘 능히 자제하지 못하고 이처럼 때를 따라 바뀌게 하니, 그 사생을 동일하게 하고 득실을 동등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후일에 경계할 만한 것이기에 적는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5권

○동년재상서명기(同年宰相書名記)

나는 대정(大定) 30년인 즉 경술년(1190, 명종 20)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동년(同年)이 모두 30인이었는데, 그 후 모두들 승진 발탁되어 재상(宰相)이나 현관(顯官)에 올랐으니, 우리 동년만큼 융성한 때가 없었다.

양부(兩府)로 말하면, 상국(相國) 조충(趙冲)은 재상가의 아들로서 일찍이 벼슬하여 수태위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수국사 상장군 판예부사(守太尉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修國史上將軍判禮部事)에 이르고 50세에 졸(卒)하였으며, 상국 유승단(兪升旦)은 한미한 집안에서 출세하여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수국사 판예부사(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修國史判禮部事)에 이르고 65세에 졸하였다.

그리고 추밀(樞密) 한광연(韓光衍)도 또한 재상의 아들로 여러 벼슬을 거쳐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예부상서 보문각대학사(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禮部尙書寶文閣大學士)에 이르고 연만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지금도 건강하여 나이 83이다. 추밀 진식(陳湜)은 여러 벼슬을 거쳐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한림학사(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御史大夫翰林學士)에 이르고 58세에 졸하였다.

나도 또한 승핍(承乏)하여 수태위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守太尉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戶部事太子太保)에 이르렀으니, 비록 한미한 분수로는 이미 만족하나 또한 끝내는 어떠한 벼슬에 이를지도 모른다. 아, 동년 중에 다섯 사람이나 재상이 된 일은 비록 우리나라의 전성시에도 아마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머지는, 혹은 3품ㆍ4품에 이르고, 혹은 제고(制誥)ㆍ대간(臺諫)ㆍ낭관(郎官)에 이른 자가 11인이고, 비록 참상관(參上官)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혹은 7품ㆍ8품ㆍ9품에 이른 자가 6인이다. 이렇게 세어본다면 산관(散官)으로 마친 자가 나머지 몇 사람이 되겠는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는 자도 또한 우리 동년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동년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우리 동년을 으뜸이라 일컫는다.

이해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지명(李知命)이 주시관(主試官)이었고 승선(承宣) 임유(任濡)가 부시관이었는데, 세상에서는 또한 이 두 분의 사람 뽑음이 이와 같았음을 감복한다.

이것은 진실로 사림(士林)의 거룩한 일인데, 만일 기록해서 후일에 보이지 않는다면 오랜 후에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기록하여 후세의 표지(標識)를 삼는 바이다. 아, 47년 사이에 다 작고하고 오직 한공(韓公)과 나만이 살아 있을 뿐이니, 슬프지 않을 수 있으랴?

을미년(1235, 고종 22) 모월 일에 적는다.

 

○대장경(大藏經)을 판각할 때 군신(君臣)의 기고문(祈告文)

국왕(國王) 휘(諱)는 태자(太子)ㆍ공(公)ㆍ후(侯)ㆍ백(伯)ㆍ재추(宰樞), 문무 백관 등과 함께 목욕 재계하고 끝없는 허공계(虛空界),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諸佛菩薩)과 천제석(天帝釋)을 수반으로 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일체 호법영관(護法靈官)에게 기고(祈告)합니다.

심하도다, 달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혼암함도 또한 금수(禽獸)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佛像)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워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된 대장경(大藏經)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되었습니다. 제불다천(諸佛多天)의 대자심(大慈心)에 대해서도 이런 짓을 하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제자 등이 지혜가 어둡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방어할 계책을 못하고 힘이 능히 불승(佛乘)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큰 보배가 상실되는 재화를 보게 되었으니, 실은 제자 등이 무상한 소치입니다.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금구옥설(金口玉說)은 본래 이루게 되거나 헐게 되는 것이 아니요, 그 붙여 있는 바가 그릇이라 그릇의 이루어지고 헐어지는 것은 자연의 운수입니다. 헐어지면 고쳐 만드는 일은 또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국가가 불법을 존중해 받드는 처지이므로 진실로 우물우물 넘길 수는 없는 일이며,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으면 어찌 감히 역사가 거대한 것을 염려하여 그 고쳐 만드는 일을 꺼려하겠습니까?

이제 재집(宰執)과 문무 백관 등과 함께 큰 서원(誓願)을 발하여 이미 담당 관사(官司)를 두어 그 일을 경영하게 하였고, 따라서 맨 처음 초창(草創)한 동기를 고찰하였더니, 옛적 현종 2년에 거란주(契丹主)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불다천(諸佛多天)이 어느 정도를 보살펴 주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지성으로 하는 바가 전조(前朝)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니, 원하옵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양찰하셔서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母后)와 저군(儲君)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제자 등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法門)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제자 등은 간절히 비는 마음 지극합니다. 밝게 살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운운.

 

 

▣동국이상국전집 제26권

○진강후(晉康侯)에게 올려 직한림(直翰林)을 사례하는 계

홍초 금서(紅綃禁署 한림원)를 원래 선관(仙官)이라 부르는데, 빈한한 가문의 외로운 제가 잘못 총전(寵典)을 받게 되었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 영광은 대개 후(侯)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저는 지벌(地閥)이 한미하고 가문(家門)이 미미하며, 성격이 개결하고 자질이 편협하나, 조년(早年)에 학문을 힘쓴 것은, 대개 깨끗하게 몸을 씻고 벼슬하려던 것인데, 말로에 일신이 곤궁하여 티끌을 덮어쓰고 빛을 감춘 듯하기에, 이미 진탕에 헤맴을 분수로 여기고, 물을 박차고 구만리(九萬里)를 날려는 마음을 끊었습니다. 어찌 높은 자리에 열지어 있는 지음(知音)들이 없어서리까. 천수공(天水公)으로부터 무릇 세 정승을 겪도록 처음에는 장차 끌어 주려 하였으나 끝을 이루지 못하였고, 예부(禮部)의 과거에 오른 지 무려 10년이나 되었으니, 기구하고 곤궁한데 처한 지 오래이나 시운(時運)이 비색하니, 세상에서 누가 애처롭게 여기겠습니까.

현후(賢侯)께서 나라를 쇄신하는 처음에 이르러, 일이 번극(煩劇)한 고을에 장서(掌書)의 책임을 맡겨 주셨는데, 우매하고 세상 일을 겪어보지 못한 탓으로 항상 고지식하게 장관(長官)에게 굴하지 않다가, 과연 교묘한 참소를 만나 거의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자하고 밝게 살펴 주시는 지혜가 아니면, 누가 모함하여 조작하는 말들을 분별해서 평인(平人)과 같게 하여 주고, 중한 죄책도 주지 못하도록 하였겠습니까. 법망에 걸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크나큰 다행인데, 어떻게 벼슬의 등급이 오르기를 바랐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취를 감추고 물러나 숨어서 바야흐로 문을 닫고 자신을 반성하는 참인데, 뜻밖에 영공(令公) 각하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지난날의 흠을 씻어버리고, 내가 고루하고 졸렬하나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이해하여 연마시켜 합당한지 시험해 보려 하시어, 군침 흘리는 악어(鰐魚)의 입에서 놀란 넋을 수습하게 하시고, 수레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에게 윤택한 은덕을 내리시어, 과분하게 쓸모없는 자질을 거두어 대언(代言)의 자리에 발탁하여 주시니, 해묵은 원통이 하루아침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천지가 나를 낳아 주었으나 내 몸을 윤택하게는 못하였고, 부모가 나를 길러 주셨으나 날개를 붙여 주지는 못하였는데, 무릇 나의 살아가는 것이 한결같이 모두 공께서 생성(生成)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아, 각하께서 저를 써 주신 것은, 작은 기예(技藝)나마 문장(文章)으로써 다소라도 조정에 공효 세우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저는, 마음의 모색(茅塞)을 정리(整理)하고 묵은 우물의 두레박 줄을 수리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업(業)을 닦아 조금이라도 황상(皇上)의 모훈(謨訓)을 윤색하겠으며, 손 씻고 공을 받들어 명감(明鑑)에 오점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구구한 마음인지라 더듬느라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8권

○살리타(撒里打) 관인(官人)에게 보내는 서 임진년 1232년 4월

아룁니다. 초여름에, 엎드려 생각하건대 태후(台候) 안녕하시고 만복(萬福)하신지, 충심으로 우러러 마지않습니다.

전번에 황제(皇帝)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물건 중에 수달피(水獺皮) 1천 장을 좋은 것으로 보내 오라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이를 잡은 것이 없었는데, 귀국이 요구한 후부터 비로소 온갖 계책을 써 잡았으나, 또한 많이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공부(貢賦)를 바치는데 준비하기가 어려우며, 지금 필요로 하여 요구하는 바는 그 숫자가 너무도 많고 그것을 구하여도 또한 얻기가 어려워 따라 응하기에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방에 널리 구하여 달로 모으고 날로 저축하였으되 아직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하여, 대략 9백 77장을 바치니 오직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또 국왕(國王)ㆍ제왕(諸王)의 공주(公主)와, 군주(郡主)ㆍ대관(大官)의 총각 처녀 각 5백 명씩을 인솔해 보내라는 일에 대해서는, 전번에 보내드린 편지에 기재된 바와 같이, 우리나라 법은 비록 위의 임금이 된 이라도 오직 적실(嫡室)을 둘 뿐이요, 다시 잉첩(媵妾)이 없기 때문에 왕족의 자손이 으레 번창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나라가 협소한 까닭으로 신료(臣僚)로서 반열에 있는 자도 또한 많지 못하고, 많다 하더라도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에 지나지 않아, 소생이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며 있어도 많지 않으니, 만약 모두 상국으로 뽑혀 가버리면 그 누가 왕위와 조정의 관직을 이어받아서 대국을 받들어 섬기겠습니까. 만약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어루만져 보존하사 만대에 서로 좋게 지내려면, 이 편협한 땅에서 감당해 낼 수 없는 이와 같은 일을 덜어 주어, 작은 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붙들어 주는 의리를 보여 주소서. 이와 같이 해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하겠습니다.

또 여러 부류의 공인(工人)을 보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공인이 부족한 데다가 기근(飢饉)과 질병(疾病)으로 인해 또한 많이 없어졌으며, 더구나 귀국의 병마(兵馬)가 크고 작은 성보(城堡)를 거쳐감으로써 피해를 입었거나 쫓겨난 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사라지고 분산되어 정착해 전업하는 자가 없기에 명령대로 절차에 따라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이와 같은 애처로운 사정을 양찰(諒察)하시기 바랍니다.

또 조 병마(趙兵馬 조창숙(趙昌叔) 에게 소속된 의주 민호(義州民戶)를 조사하여 물색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그 지방의 병마에게 명령하여 그 근원을 조사케 하였더니, 보고하기를 ‘그 성수(城守)와 민가(民家) 등이 떼[桴]를 타고 급히 도망치다가 바람으로 배가 침몰되어 모두 익사하였기 때문에 분명히 조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알아 주시기 바라며, 그 밖에 서한 속에 언급한 바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귀국이 회군(回軍)할 때 두고 간 여윈 말은 곳곳에서 수집한 바 모두 15필입니다. 곧 거둬 먹이다가 이번 사행(使行)에 함께 보내드립니다. 지극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운운.

 

 

▣동국이상국전집 제29권

○시중(侍中) 이항(李抗)을 위하여 첫 번째 퇴휴(退休)를 청하는 표

운운. 은총을 덜기 어려워서 일찍이 물러가려는 마음을 저버렸으나, 몸이 노쇠해지니 더욱 야행(夜行)의 견책이 두려워, 감히 옷깃을 여미고 아뢰어 번거로운 기무(機務)에서 물러나기를 빕니다. 중사(中謝)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쓰임이 시대에 적합하지 못하고 재주도 먼 것을 경륜할 만하지 못합니다. 문음(門蔭)을 빙자하여 벼슬에 종사하였고, 경술(經術)로 몸을 수식함도 없는데, 다행히 모이는 즈음의 형통함을 인연하여 논사(論思)의 기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고(聖考)의 즉위하심을 당하여 승진의 은혜를 후히 입었고, 폐하께서 즉위하심에 미쳐 지나치게 재주를 인정해 맡겨 주심을 입어, 갑자기 정승의 중한 직책과 높은 자급에 올랐으니, 지위는 신하로서 더할 수 없이 높으나 물망은 사윤(師尹)에 부합되지 아니하매, 어진이가 진출하는 길에 방해만 되고 국가에 보익함이 없습니다. 분수는 진실로 넘치지 말아야 하기에 본래 사피하려 하였으나, 일이란 기필하기 어려워 앉아서 녹만 허비하는 허물을 쌓았던 것인데, 지금은 나이가 종심(從心)에 이르렀으니 사리로 보아 당연히 노퇴를 고해야 하겠습니다. 어찌 만족하지 못한 소망을 두어 다시 눌러 있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간곡한 정성을 양찰하시고 윤허를 내리시어 규상(珪裳)의 속박을 풀어서 산수(山水)에서 노님을 이루게 하여 주시면, 날다 지친 새가 돌아와 제 둥지에서 편안히 쉴 것을 기약할 것이며, 여윈 말이 물러가 마구에 엎드렸다 해도 수레를 그리는 마음이야 어찌 없으리까. 운운.

 

 

▣동국이상국전집 제37권

○아버지에게 올리는 제문 다른 사람을 대신해 지었다.

모월 모일 운운. 옛날 아버지께서 남쪽에 계시고 제가 서울에서 공부할 적엔 3백 리 길이 비록 멀다 해도 가기만 하면 뵐 수 있었는데, 지금 계시는 북녘 산기슭은 도성(都城)과의 거리가 몇 걸음 되지 않아, 잠깐 사이에 갈 수는 있어도 간들 누구를 뵈오리까. 저의 일생이 끝나도록 다시 뵈올 길이 없습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려 하나 목이 메어 사뢰기 어렵고, 다만 이 엷은 술잔으로 저의 속정을 표하오니 아, 슬프기만 합니다.

 

○아내에게 지내는 제문 남을 대신해 지었다. 세 글자가 한 구이다.

나이 16에 나에게 시집왔는데, 그때 벌써 곤칙(壼則 내법(內法))이 익숙하고 부의(婦儀)가 아담한지라, 나의 지시하는 대로 잘 따랐고 시부모를 섬기되 조그마한 허물도 없었으며. 게으름없이 제사를 정성껏 모셨고 모든 어려움과 험한 일을 함께 겪었네. 집이 조금 윤택해지자 명을 빌지 못해 문득 가 버리니 꽃이 홀연 졌구려. 하늘의 하시는 일이라 어찌할 도리 없도다. 창자가 찢어지고 눈물이 떨어져, 박주나마 한 잔 가득 채웠으니, 나의 정성인줄 알고 한번 마셔 주었으면 좋겠소. 아, 슬프도다.

 

○전주에서 보안현(保安縣) 마포대왕(馬浦大王)에게 거듭 고하는 제문

모년 모월 모일에 모관(某官)은 삼가 동년 진사(同年進士) 황민인(黃敏仁)을 보내어 산록(山鹿) 한 마리와 맑은 술 등 제수를 갖춰 거듭 마포대왕의 영전에 제사 지내노라. 정직한 귀신은 사람이 존경하고, 청렴한 관리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법이라. 이것으로 비교해 볼 때 누가 높고 누가 낮은가. 더구나 내가 다스리는 완산(完山)은 한 지방의 중심이고, 대왕이 맡은 마포도 완산의 소속이라, 장관(長官)의 관리로서 하읍(下邑)의 귀신에 대해 절을 하지 않고 읍(揖)하는 것이 예(禮)에 있어서 마땅하리. 이 때문에 노[筊 대오리로 꼰 노. 구슬을 노에 매어 물에 던져서 귀신의 뜻을 물어보는 것]를 던진 나머지 귀신이 곧 허락하였고, 나도 무릎을 꿇어 절하지 않고서 읍만 하고 갔다오. 그런데 그 제사의 진설에 고기를 쓰지 않고 나물만을 갖추었더니 바야흐로 사당을 떠나 말[馬]을 서서히 모는 찰나에, 어떤 사슴이 몹시 당황하여 미친 듯이 날뛰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고 말이 놀라 넘어지니 이것이 해괴한 일이라, 이리저리 생각해보건대, 아니 귀신이 그 제사에 내가 고기를 쓰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보답에 대한 사례의 인사가 늦었다 해서 나를 깨우쳐 주는 것인가. 어쨌든 제수를 희생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해서 사람을 사당에 보내어 잔을 드리노니, 그 흠향하여 나를 나무라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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