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집(孤雲集)
▣고운(최치원 857~908년 이후) 선생 사적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삼국사기 권 46 최치원 열전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공을 종사순관(從事巡官)에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하고 고격(告檄)하는 글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공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나이 28세 때에 희종이 공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詔書)를 지닌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 태수로 있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면서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나라에 간 적이 있다.
진성왕 8년(894)에 공이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에 임명하였다.
공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나 모두 어렵고 험한 운세를 만나서 걸핏하면 낭패를 당하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신세를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山林) 아래나 강해(江海)의 주변에서 소요하고 자적하며, 대사(臺榭)를 짓고 송죽(松竹)을 심는가 하면 서사(書史)를 벗 삼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는데, 예컨대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와 합포(合浦)의 월영대(月影臺) 같은 곳은 모두 공이 노닐던 곳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마음 편히 노닐면서 노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라고 기재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인(高麗人)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상국(上國)에 이름을 떨친 것이 이와 같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신라 헌강왕(憲康王) 을사(乙巳) 11년(885) - 당나라 광계(光啓) 1년 - 봄 3월에 최치원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최치원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세에 등제(登第)한 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조용(調用)되었으며,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천직(遷職)되었다.
이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최치원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 등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또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를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이 입조(入朝)하여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强兵)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總章) 1년(668)에는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게 하고 그곳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는데,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들도 하남의 농우(隴右)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개원(開元) 20년(732)에 천조(天朝)에 원한을 품고서 군대를 이끌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현종황제(玄宗皇帝)가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인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인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우리 왕 김모(金某)를 가자(加資)하여 정태위(正太尉)에 임명한 뒤에 절부(節符)를 쥐고 영해군사(寧海郡事)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 가면서 눈이 많이 쌓여 번방(蕃邦)과 중국의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였으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치원이 유문(儒門)의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에 조회하러 왔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으면 모두 토로하여 진달하는 것이 예의상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817)에 본국의 왕자(王子) 김장렴(金張廉)이 표풍(飄風)으로 명주(明州)에 와서 상륙하였는데, 절동(浙東)의 모 관원이 발송하여 입경(入京)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중화(中和) 2년(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해서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사례가 분명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태사시중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수륙(水陸)의 권첩(券牒)을 내리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숙식(熟食)과 먼 거리 여행에 필요한 마필(馬匹)과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시고, 이와 함께 군대 장교를 차출하여 어가(御駕) 앞까지 보호해서 이르게 해 주시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최치원이 돌아오자 왕이 그를 머무르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최치원은 중국에 가서 얻은 것이 많은 만큼 가슴속에 쌓인 경륜을 발휘해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나, 쇠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 용납받지 못하였으므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동사찬요〔東史纂要〕
조위(曺偉)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자는 의심하기를 “고운(孤雲)이 그 큰 재주를 거두어 속에 품고 동방에 돌아온 뒤에 있는 힘을 다해서 반열(班列)에 나아가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잡아 구제하며 그 궐실(闕失)을 미봉(彌縫)하고 그 문치(文治)를 분식(粉飾)했더라면, 나라의 형세가 그토록 위태롭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어떻게 함부로 날뛸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산수(山水) 간에 소요하며 편히 노닐기만 하였을 뿐, 나라의 위망(危亡)을 보기를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살지고 여윈 것을 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는 일이나 보배를 속에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놔두는 일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공이 어린 나이에 멀리 바다를 건너면서 험하고 먼 길을 꺼리지 않았고,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마치 턱수염을 만지듯 과거에 쉽게 급제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찌 상자평(向子平)이나 대효위(臺孝威)를 본받으려고 했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가 공명(功名)의 뜻을 가다듬으면서 입신양명에 뜻을 둔 것이야말로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당나라에서 벼슬하려니 환시(宦侍)가 안에서 권세를 독점하고 번진(藩鎭)이 밖에서 횡행하는 가운데 주량(朱梁)이 찬탈할 조짐이 이미 싹트고 있었고, 본국에서 벼슬하려니 혼주(昏主)가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정사를 맡기고 여후(女后)가 음란하여 기강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아첨하여 총애받는 신하들만 조정에 가득하여 부화뇌동하며 헐뜯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때에는 원래 자기 한 몸도 용납받을 수가 없을 것인데 자기의 도가 행해지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공의 밝은 식견은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에서도 이미 환히 드러난 바이지만,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는 나무 하나로 지탱할 수가 없고, 큰물이 범람할 때에는 한 손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깊은 산골을 찾아 사슴과 벗을 하거나 벽라(薜蘿)를 부여잡고 명월(明月)과 노닌 것이 어찌 공의 본심이었겠는가.
아, 삼국 시대 이래로 문인과 재사가 각 세대마다 없지는 않았지만, 공의 이름이 유독 전무후무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평소에 공의 발길이 닿은 곳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초인(樵人)과 목수(牧豎) 모두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최공(崔公)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여염의 평민이나 시골의 아낙네들까지도 모두 공의 성명을 외우고 공의 문장을 사모할 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이 한 몸에 얻어 쌓은 것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이 분명한데 사람과 시대가 서로 맞지 않고 명운과 재질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으니, 이 어찌 천고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소싯적에 언젠가 “인간의 요로와 통진은 눈이 뜨일 만한 곳이 없고, 물외의 청산과 녹수는 가끔 꿈속에 돌아간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라는 공의 글귀를 접하고는, 공의 회포가 표표(飄飄)하여 속진(俗塵) 속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 공의 평생의 행적(行跡)을 살피다가 국내에 있는 명승지마다 공의 발길이 두루 미친 것을 확인하고는, 청산(靑山) 녹수(綠水)의 글귀가 본래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공의 아의(雅意)의 소재를 알고서 더욱 탄복하였다.
■가승〔家乘〕
○진성왕(眞聖王) 7년(894) 갑인 - 당 소종(唐昭宗) 건녕(乾寧) 1년 - 에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가 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길에 도적이 많아서 가지 못하였다. 2월에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스스로 난세를 만난 것을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자적하며 오직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광해(光海) 을묘년(1615)에 태인(泰仁) 무성(武城)에 서원을 세웠다. 태인에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본군(本郡)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이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닭 잡던 당일부터 퍼지기 시작한 맑은 향기 / 割雞當日播淸芬
가시나무 위의 봉황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오 / 枳棘棲鸞衆所云
천년 전 읊던 혼을 어디에서 찾을거나 / 千載吟魂何處覓
일만 송이 연꽃 속에 일만 개의 고운 / 芙蕖萬柄萬孤雲
■낭산 독서당의 유허비〔狼山讀書堂遺墟碑〕
선생은 신라 시대 사람인데, 세대가 멀어서 상세히 알아볼 수가 없다. 선생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으로 말하면 성인의 사당에 올랐고, 문장으로 말하면 문단의 맹주가 되었으며, 생애로 말하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하였고, 자취로 말하면 자방(子房 장량(張良))처럼 선도(仙道)에 의탁하였다. 선생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아,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만당(晩唐)의 여러 시인들과 어깨를 겨루었으며, 황소(黃巢)의 반란 때 지은 격문(檄文)의 한 구절은 구비(口碑)로 전송(傳頌)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동방으로 돌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신라의 운세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기미를 환히 살펴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 밖에서 구름처럼 노닐었으니, 강역 안에서 명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은 모두 선생 덕분에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선비였다. 한 모퉁이의 동국(東國)도 선생을 포용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구구하게 작은 하나의 주(州)나 하나의 리(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 안락(顔樂)의 정자를 세운 것을 보면 반드시 태어나 자란 곳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고을의 기록을 살펴 보건대, 선생의 고택은 본피부(本彼部)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있고, 상서장(上書莊)은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수(蚊水) 위에 있는데, 이곳은 동도(東都)에서 지령(地靈)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과연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이곳은 성명(聲明)의 기반이 된 곳이요, 후손이 대대로 지켜 온 곳이니, 어찌 기억에서 없어지게 해서야 될 말이겠는가.
이 고을 동쪽의 낭산(狼山)에 독서당(讀書堂)의 옛터가 있고 예전의 그 우물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옛날의 주춧돌 위에 건물을 세우고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후손 사간(思衎) 씨가 비석을 세워 기념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하였는데, 여러 종인(宗人)들이 합의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자,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생의 위대함이 천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당(堂)으로 내려왔으니 이를 참으로 가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로 벋어 나간 것을 감안하면 선생의 사업과 문장이 꼭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이 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이 일을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백연사의 기문〔柏淵祠記〕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 문창(文昌) 최공 고운(崔公孤雲)의 사당이 함양(咸陽) 백연(柏淵)의 위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이 일찍이 천령(天嶺)의 수재(守宰)를 지냈는데 떠난 뒤에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천령은 지금에 와서는 함양이 되었다. 그래서 함양부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내는 것이다.
공의 휘(諱)는 치원(致遠)이다. 어린 나이에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건부(乾符) 1년(874)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광계(光啓) 1년(885)에 조사(詔使)의 신분으로 동방에 돌아와 김씨(金氏)를 섬기면서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가 되었다. 건녕(乾寧) 1년(894)에 시무 십사(時務十事)를 올렸으나 왕이 채용하지 않자 이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국사(國史)를 살펴보건대, 공이 본국에 돌아온 뒤로 21년이 지나서 좌복야(左僕射) 배추(裴樞) 등 38인이 청류(淸流)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으면서 당(唐)나라가 결국 멸망(906)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29년이 지나서 김씨의 나라도 멸망(935)을 당하고 말았다.
대개 이때는 공이 이미 은거한 뒤였다. 이는 공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고, 또 종국(宗國)이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멀리 떠나서 세상을 피해 살면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공이 마음속으로 후량(後梁)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고, 또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변이 황소를 토벌할 적에 공이 비분강개하여 고변을 위해 격문을 지어 제도(諸道)의 군병을 모아서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황소의 토벌을 마친 뒤에는 조서(詔書)를 받들고서 동방으로 돌아왔다. 가령 공이 종신토록 당나라에서 벼슬했더라면, 청류의 화(禍)를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이 그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까지 후량의 조정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집 제1권 : 詩
■접시꽃〔蜀葵花〕
적막하여라 묵정밭 가까운 곳에 / 寂寞荒田側
여린 가지 무겁게 다닥다닥 핀 꽃 / 繁花壓柔枝
향기는 매우를 거쳐 시들해지고 / 香經梅雨歇
그림자는 맥풍을 띠고서 기우뚱 / 影帶麥風欹
거마를 타신 어느 분이 감상하리오 / 車馬誰見賞
그저 벌과 나비만 와서 엿볼 따름 / 蜂蝶徒相窺
출신이 천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터에 / 自慙生地賤
사람의 버림받는다고 원망을 또 하리오 / 堪恨人棄遺
■강남의 여인〔江南女〕
강남의 풍속은 예의범절이 없어서 / 江南蕩風俗
딸을 기를 때도 오냐오냐 귀엽게만 / 養女嬌且憐
허영심이 많아서 바느질은 수치로 / 性冶恥針線
화장하고는 둥둥 퉁기는 가야금 줄 / 粧成調管絃
배우는 노래도 고상한 가곡이 아니요 / 所學非雅音
남녀의 사랑을 읊은 유행가가 대부분 / 多被春心牽
자기 생각에는 활짝 꽃 핀 이 안색 / 自謂芳華色
길이길이 청춘 시절 누릴 줄로만 / 長占艶陽年
그러고는 하루 종일 베틀과 씨름하는 / 却笑隣舍女
이웃집 여인을 비웃으면서 하는 말 / 終朝弄機杼
베를 짜느라고 죽을 고생한다마는 / 機杼縱勞身
정작 비단옷은 너에게 가지 않는다고 / 羅衣不到汝
■가을밤 비 내리는 속에〔秋夜雨中〕
가을바람 속에 오직 괴롭게 시 읊기만 / 秋風惟苦吟
온 세상 통틀어 알아주는 이 드무니까 / 擧世少知音
창문 밖에 내리는 삼경의 빗소리 들으면서 / 窓外三更雨
등잔 앞에서 만고를 향해 이 마음 달리노라 / 燈前萬古心
■서경 김 소윤 준 과 작별하며 남겨 준 시〔留別西京金少尹 峻〕
만나서 두 밤 자고 다시금 이별 / 相逢信宿又分離
갈림길에 또 갈림길 시름겹기만 / 愁見岐中更有岐
소진되려 하는 손안의 계수 향기 / 手裏桂香銷欲盡
헤어지면 누구와 속마음 얘기할지 / 別君無處話心期
▣고운집 제2권
■진감 화상 비명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반인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하여 널리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또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요,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에서 벼슬하는 집안이었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었는데, 그때 뜻을 굽혀 고구려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성당(聖唐)의 시대에 와서 옛날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이 판도로 들어올 적에, 지금의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은 창원(昌元)이라고 하는데, 재가 중에 출가인의 행동을 보였다. 모친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니 범승(梵僧)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阿㜷〕의 아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잉태하였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울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찍부터 언성(言聲)을 내지 않는 상서로운 싹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피우는가 하면 꽃을 꺾어 헌화하곤 하였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 그림자가 옮겨 가도록 꼼짝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사의 선본(善本)은 원래 백천겁(劫) 이전부터 길러진 것으로서 사람들이 발돋움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머리를 땋은 아동 때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절실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고, 또 천시(天時)를 훔칠 만한 조그마한 땅도 없어서 구복(口腹)의 봉양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는데, 손은 수고롭게 그물을 짜지 않았어도 마음은 물고기 잡는 일을 이미 잘 알아서 철숙(啜菽)의 봉양을 넉넉히 하며 채란(采蘭)의 노래에 걸맞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흙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 봉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애오라지 힘닿는 대로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희미(希微)의 경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뒤웅박〔匏瓜〕처럼 젊은 나이에 그냥 한 곳에만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804, 애장왕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겠다고 청하여 서쪽으로 가는 배에 발을 붙인 뒤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길도 평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비의 배를 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넌 뒤에 피안(彼岸)에 도착하고 나서 국사(國使)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니, 여기에서 작별할까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와서 신감 대사(神鑑大師)를 찾아보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올렸는데, 절이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생에서 아쉽게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다시 만나니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에 얼른 인계(印戒)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불이 마른 쑥으로 타 들어가고 물이 저습(低濕)한 곳으로 번져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승도(僧徒)들은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聖人)을 여기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하였다.
선사는 형모(形貌)가 검었으므로,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며 말없이 처하는 것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니, 어찌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邑中之黔〕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만 비교될 뿐이었겠는가. 길이 적자(赤頿)와 청안(靑眼)과 더불어 색상(色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원화(元和) 5년(810, 헌덕왕2)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이는 성선(聖善)의 예전의 꿈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구슬처럼 맑게 한 뒤에 다시 배움의 바다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마치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을 능가하였다. 마음은 지수(止水)와 같이 맑았지만 행적은 조각구름과 같이 떠돌았다.
본국의 승려인 도의(道義)가 선사보다 먼저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는데, 해후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適願〕, 이는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불지견(佛知見)을 증득하고는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만 길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송실(松實)을 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3년이요, 그 뒤에 다시 자각(紫閣)으로 나와 번화한 교통의 요지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布施)하며 바쁘게 왕래한 것이 또 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행(苦行)의 수행을 일단 마친 뒤에, 다른 지방에 만행(萬行)을 하는 일도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를 터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몸의 근본인 고향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태화(太和) 4년(830, 흥덕왕5)에 귀국하니, 대각(大覺) 상승(上乘)의 빛이 우리 인역(仁域)을 환히 비췄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봉필(鳳筆)을 날려 영접하여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상인(上人)이 잇따라 이르러서 두 분의 보살(菩薩)이 되셨도다. 예전에 흑의(黑衣)의 인걸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납의(衲衣)의 영걸을 보게 되었도다. 미천(彌天)의 자애와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며 의지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雞林)의 경내를 가지고 길상(吉祥)의 집을 이룩하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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