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동문선1(서거정)

청담(靑潭) 2017. 8. 11. 22:53

 

 

동문선(東文選) 1 

 

서거정 (1420-1488)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동문선은 3번에 걸쳐 편찬되었다. 첫 번째는 1478년 서거정이 만든 133권 45책으로 〈정편동문선〉이라고도 한다. 사·부·시·문 등 여러 종류의 작품 4,300여 편이 실려 있다. 두 번째는 1518년 신용개 등이 23권 11책에 약 1,300 편의 작품이 실은 〈속동문선〉을 편찬하였다. 세 번째 개편은 1713년(숙종 39) 송상기 등에 의해 개편된 것으로 35권 15책에 약 1,200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 책은 청의 강희제에게 우리나라의 시문을 보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신찬동문선〉이라고도 부른다.<BR>역사적·문학적 의의나 분량 상 첫 번째 〈동문선〉이 가장 중요하다. 서거정은 서문에 조선의 글의 우수함과 생동감에 대해 언급하여 독자적 국학의식과 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의식을 드러내었다.

동문선이 무척 방대한 책이라서 모두 읽을 수나 있을 지 모르겠다. 대충이라도 훑어보면서 특이한 작품 몇 점 모아 보련다.

 

 

동문선 제1권

※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부(賦) : 시나 산문이 아닌 운문인 점에서는 사와 비슷하나 서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사와 구별되는데, 〈이소(離騷)〉와 〈풍부(風賦)〉같은 것은 부인지 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아계부(啞鷄賦) 김부식(1075-1151)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 / 歲崢嶸而向暯

낮이 짧고 밤이 긴 것이 괴로운데 / 苦晝短而夜長

등 없어 글 읽지 못하랴마는 / 豈無燈以讀書

병으로 꾸준히 노력할 수 없어 / 病不能以自强

밤새껏 뒤척이며 잠못 이루니 / 但展轉以不寐

온갖 걱정이 뱃속에 감돈다 / 百慮縈于寸膓

닭의 홰가 근처에 놓여 있으니 / 想鷄塒之在邇

조금만 있으면 날개쳐 울리 / 早晚鼓翼以一鳴

잠옷 그대로 가만히 일어나 앉아 / 擁寢衣而幽坐

창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다가 / 見牕隙之微明

갑자기 문 열고 바라보니 / 遽出戶以迎望

별들이 가뭇가뭇 서쪽으로 기울어 있다 / 參昴澹其西傾

아이놈 불러 일으켜서 / 呼童子而今起

닭이 죽었나 물어보았다 / 乃問雞之死生

잡아서 제자상에 놓지 않았는데 / 旣不羞於俎豆

삵에게 물렸는가 / 恐見害於貍猩

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 何低頭而瞑目

입을 다물고 아무말 없는가 / 竟緘口而無聲

옛 시엔 네 울음에 군자를 생각해 / 國風思其君子

풍우에도 그치지 않음을 탄식했는데 / 嘆風雨而不已

이제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니 / 今可鳴而反嘿

이 어찌 천리를 어김이 아닌가 / 豈不違其天理

개가 도적을 알고도 안 짖으며 / 與夫狗知盜而不吠

고양이가 쥐를 보고도 쫓지 않는 것 같이 / 猫見鼠而不追

제 구실 못하기는 매일반이니 / 校不才之一揆

잡아버려도 마땅하다마는 / 雖屠之而亦宜

다만 옛 성인의 가르치심에 / 惟聖人之敎誡

안 죽임이 어질다 하였으니 / 以不殺而爲仁

네가 생각해서 고마움 알면 / 倘有心而知感

부디 회개하여 새로워져라 / 可悔過而自新

 

●몽비부(夢悲賦) 이규보(1168-1241)

아름다운 한 왕손이 / 有羙王孫

대대의 화족으로 / 蟬聮茂族

멋들어진 풍류에 / 邈風流之可愛兮

번질번질 옥 같은 얼굴 / 顔又澤腴兮如玊

나갈땐 높은 수레 / 出擁髙盖

들어오면 화려한 집 / 入處華屋

여의주를 들어 산호를 부수고도 / 舞如意兮碎珊瑚

마음 속에 조금도 거리낌 없네 / 曾何蔕乎心曲

뒷방의 미인들은 / 後房蛾眉

푸른 비녀에 비단 옷 끌며 / 簮翠曵

아장아장 줄지어 번갈아 모시니 / 爛盈盈兮更侍

쨍그랑 구슬 패물 맞부딪는 소리 / 琤然珠佩之相觸

화사한 차림에 눈이 지치고 / 目倦乎華靡

갖은 음악에 귀가 물리며 / 耳慣乎絲竹

겨울에는 서늘해 추운 줄을 모르고 / 冬而至於凉不知其凝嚴

여름엔 따스해 더운 줄 모르니 / 夏而至於溫不知其暑溽

더구나 어찌 알 것인가 인생에 기구한 신세 / 又安知人生

곤궁한 생활,근심,걱정,슬픔,원망 따위가 있는줄을 / 有覊窮困躓憂愁哀怨之屬哉

봄철이라 좋은 때 / 當春陽之旣舒兮

꽃다운 봄경치 즐기고자 / 感芳華之蕩意

친구들을 화려한 집에 초대하니 / 召賓友於華堂兮

옥잠에다 구슬신들 / 王爲簮兮珠爲履

향긋한 술을 금잔에 부어 / 酌芳醑兮行金鍾

모두 곤드레 취했는데 / 莫不濡首而霑醉

푸른 계수를 불살라 밤을 밝혀 / 焚綠桂兮繼頽光

아직도 환락이 안 끝났겠다 / 尙歡樂之未已

봄밤이 어느덧 깊어지는 / 倐春宵之易䦨兮

달이 창을 정답게 엿보는데 / 落月窺䆫兮嫵媚

문득 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피곤하여 / 忽體倦以神疲

깜빡 잠이 깊이 들었네 / 遂頽然兮就寐

박산 향로는 향연을 뿜고 / 博山熏兮噴香炷

비단 장막 속엔 기라의 이불 / 斗帳垂兮掩綺被

해가 불끈 솟아 부상에 올라도 / 赤羽奮迅登扶桒兮

아직도 깊은 밤에 뇌성 같은 코고는 소리 / 尙雷鳴而酣睡

꿈인가 생시인가 / 於是怳然惚然

꿈에 이른 곳은 / 夢遊乎

휑하니 넓은 터, 사람 없는 땅 / 廣漠之墟無人之地

사면이 망망하여 / 四顧茫茫

마을은 안 보이고 / 不見阡里

강은 절로 물결치고 / 深江自波

나무숲이 우중충 / 灌木叢倚

들의 풀은 시들었고 / 野草少色

위태로운 바위는 떨어질 듯 / 危石如墮

해는 뉘엿 뉘엿 붉은 빛 잠겨지고 / 日掩掩兮沈紅

연기가 어둑어둑 푸른 빛을 겹쳤는데 / 煙冥冥兮疊翠

잔나비들이 마주 울며 조상하고 / 猿哀哭兮相弔

뭇 새들은 구슬픈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 衆鳥啾啾兮不止

몸서리치며 집 생각에 어서 돌아오려 했으나 / 慘然思家欲亟還兮

길이 어디인지 까마득하다 / 迷不知兮路何自

시첩들은 어디 있는가 / 念嬪御兮安在

푸른 소매로 눈물 씻네 / 掩翠衫而拭淚

언덕에 올라 기대어 서니 / 登崇阿以延佇兮

천봉이 굼틀굼틀 뭉켜 있다 / 鬱千峯之邐迤

덤불을 헤치고 험한 길을 찾노라니 / 披蒙茸兮㝷崎嶇

금방 범이 숨어 있다가 내달아 나올 듯 / 慮髬髵之攸庇

깜짝 놀라 언덕으로 내려오니 / ?奔還以降隴兮

무덤이 옹기종기 놓여 있는데 / 墳纍纍兮錯峙

그 위에 여우 토끼들이 쭈그리고 엎드리고 / 上有蹲狐與伏兎兮

떼를 지어 모여 날친다 / 紛侶集兮族戲

넘어진 비석을 굽어살피니 / 拂頹碑以俯窺兮

옛날 한때 부귀하던 공자 아닌가 / 伊昔綺紈之公子

가당 무관을 어디다 두고 / 歌堂舞館屬何人兮

이 산 밑에 흙무덤이 되어 있는고 / 爲此一丘兮山之趾

부귀는 뜬 구름 / 富貴兮如浮

영화는 한 때의 꽃이로구나 / 瓊華兮易悴

이 사람을 조상하며 방황하노라니 / 弔斯人以彷徨兮

더욱 더 처량해서 코가 시어지는데 / 益淒切以酸鼻

발이 부르터 돌아올 수는 없고 / 足累繭兮無攸歸

기갈(飢渴)은 번갈아 찾아 드네 / 飢與渴兮交至

그러자 얼핏 꿈을 깨니 / 俄欠伸以忽寤兮

시원해라, 창문 난간이 여전히 그대로 있네 / 喜窓櫳之猶是

몸은 상에 그대로 누워 있는데 / 顧尙臥於一床

어떻게 한바탕 멀리 놀았을까 / 夫何爲此遐遊

잠깐 동안의 한 꿈으로 / 以須臾之一夢

인생의 영욕을 깨달았구나 / 悟榮辱之相酬

왕손아, 부디 명심하여서 / 王孫兮可以銘肌

빈천하여 떠다니는 사람들의 시름을 길이 잊지 마소서 / 永不忘貧賤羇離者之憂

 

 

동문선 제3권

묵군부(墨君賦) 이첨(1345-1405)

제가 신평이씨이고 이첨 선생은 우리 신평이씨가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조상이시다.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할아버지는 보문각제학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증 참찬의정부사(贈參贊議政府事)이희상(李熙祥)이다.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의 제2인으로 합격했고, 1368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이 되고, 이듬해 우정언에 이어 1371년 지통사(知通事)로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그 뒤 1375년(우왕 1) 우헌납에 올라 권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10년간 유배되었다. 1388년 유배에서 풀려나 내부부령(內府副令)·예문응교를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며, 1391년(공양왕 3)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사를 맡았으나, 이 해에 장류(杖流)된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연루되어 결성(結城: 충청남도 홍성)에 다시 유배되었다.

조선조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등용되어 동지중추원학사(同知中樞院學士)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로 전위사(傳位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태종 2)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륜(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의 부사(副使)로서 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명에 다녀왔다. 그 때 고명(誥命: 명에서 조선의 왕을 인정하는 승인서)과 인장(印章: 옥새)을 고쳐 주도록 주청(奏請)하였다. 뒤에 그 공로로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고 정헌대부에 올랐다. 그 해 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을 겸했으며, 1403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하륜 등과 함께『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했고, 소설『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며, 유저로는『쌍매당협장문집(雙梅堂篋藏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합포(合浦 마산의 옛 이름) 정원루(靖遠樓)가 낙성(落成)되자 박공(朴公)이 산인(山人) 풍공(豐公)에게 명하여 동ㆍ서벽(壁)에 묵군(墨君)을 그리고 내개 부(賦)를 지으라 명하기에, 내가 공의 명을 어기기 어려워 감히 부를 지었으니, 사(辭)에 이르기를,

 

한 도사가 / 有一道士

표연히 바람을 타고 / 飄然御風

천리를 멀다 않고 / 不遠千里

하늘 동편에서 와서 / 來自天東

남해를 따라 전망을 달리며 / 遵南海而聘望

새 다락에 올라 거닐었네 / 登新樓以從容

이윽고 설당(雪堂 소동파가지은당)을부르고 석실에 읍하고서 / 於焉招雪堂揖石室

먹을 갈아 용사(龍蛇 글씨나 그림을 잘 그린 것)를 일으키고 / 起龍蛇於墨池

붓끝에 풍운을 달리니 / 走風雲於筆錄

조화가 깜짝 놀라고 / 造化罔措

산천이 실색하여 / 山川失色

낮이 어둑해지며 아이들은 숨고 / 晝冥而兒童藏

밤이 캄캄해지고 귀신이 울었다/ 夜晦而鬼神哭

조금 있다가 동쪽이 훤히 밝아 / 俄而啓明東隅

서쪽 끝까지 환해지니 / 破暗西極

위수(渭水 대가 많다고 한다 )가의 총총한 모습 / 掃渭濱之團欒

그리고기원의우거진숲[위나라무공(武功)의덕을읊은시]를 모사했네/寫淇園之如簀

맑은 이슬이 천막에 뿌려지는 듯 / 觀其湛露洒帷

푸른 안개가 옥을 축이는 듯 / 蒼煙滋玉

달이 와 덩실덩실 / 月來婆娑

바람이 불어 우수수 / 風至蕭瑟

시냇물이 어린 싹을 감돌고 / 帶苟萌兮絕磵

돌이 서리 뿌리에 꿰어 들어 / 貫霜根兮頑石

변치 않는 빼어난 자세와 굳센 절개 / 亢貞姿兮勁節

사시로 아침ㆍ저녁에 / 亘四時兮朝夕

홍(泓 벼루)과 영(穎 영)에게 몸을 받아 / 幻前身於泓穎

순식간에 변화하네 / 紛變化其瞬息

합포 영주가 / 合浦營主

다락에 올라 서성거리다가 / 登樓躑躅

문득 얻은 바가 있는 듯 / 怳然若有所得

쌍송자(雙松子 작위의 호)를 돌아보며 이르되 / 顧謂雙松子曰

이게 꿈인가, 그림인가 / 此其夢耶畫耶

보이는 것이 오직 대 뿐으로 / 所見惟竹

앞의 경계가 홀연히 달라졌으니 / 旣前境之忽非

웬일인지 신명에게 물어볼 일 / 盍天明之是質

그대 날 위해 점쳐 보소 / 子其爲我筮之

쌍송자가 시초 가지를 세어 점쳐서 / 雙松子揲策而筮

진괘의 여(旅)를 얻으니 / 遇震之旅

그 요사(謠辭)에 일렀으되 / 其繇曰

진은 푸른 대인데 / 震爲蒼筤

동방이 그 고장 / 東方其所

가운데가 비어 이(离)가 되니 / 虛中爲离

응용이 이러이러하겠고 / 應用如許

마디가 많아 간(艮)이니 / 多節爲艮

춥거나 덥거나 변치 않으리라 / 不變寒暑

쌍송자가 시초를 주머니에 넣고 예를 끝낸 뒤에 / 雙松子韜蓍禮畢

공에게 이르는 말 / 謂公曰

우리 도사가 / 惟吾道士

가까운 비유를 취했으니 / 取譬甚邇

어찌 뜻없는 먹장난이리오 / 豈墨戲之徒然

단연코 공을 두고 그린 것이외다 / 決我公之謂耳

군무가 일신에 모여들 때 / 當戎務之叢身

가슴이 물처럼 맑아 / 坦胷府兮如水

남이 기뻐하거나 불평하거나 / 任彼喜愠

의로만 따라 하니 / 義之與比

그것이 허중의 뜻이요 / 則取虛中之義矣

험난이 앞에 닥쳐도 / 雖險難之在前

살[矢]같이 곧음을 잡고 / 確秉直兮如矢

이름과 행실을 닦아 / 砥礪名行

끝내 자기를 안 굽힘은 / 終不枉己

그것이 ‘마디가 많음’의 뜻을 숭상함이외다 / 尙多節之義爾

그러므로 공손이 공자님의 탄식을 들었고 / 故公孫得聞夫子之歎

시인이 위무공의 미덕을 노래하지 않았는가 / 詩人托興武公之美

열매를 드리워 봉을 맞음은 / 至若垂實値鳳

어진 인재를 기르는 길을 힘씀이요 / 以勉養賢之道

죽순이 뽑아나 큰 대를 이룸은 / 擢筍成幹

덕으로 나아가는 선비를 권하는 일 / 以勸進德之士

종묘에서는 댓자리되어 / 在宗廟而爲篾席

극진한 효도와 공경을 펴고 / 展孝敬之不弛

악기로서는 생황이 되어 / 在樂器而爲笙篁

신과 사람이 감동하게 하니 / 致神人之格止

아아, 우리 도사의 그림 뜻은 / 噫吾道士寫眞之意

아마 이에 있으렸다 / 其在此乎

공이 흔연히 도사에게 가 물어보되 / 公欣然就道士而問焉曰

이 말이 참인가 / 此語誠然乎哉

도사가 잠잠했다 / 道士默然

아까 본 것은 / 向來所見

꿈도 그림도 아니요 / 非夢也畫也

실은 공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었다 / 乃公之心之所宣也

 

 

동문선 제4권

●삼월 이십삼일 우(三月二十三日雨) : 최해(崔瀣 1287-1340)

작년에는 기후가 고르지 못해 / 去歲乖雨暘

농가에선 모내기도 못하였었네 / 農家未插秧

백성들은 모두 주림 속에 떨어져 / 萬民落饑坎

서로 보매 얼굴빛 처량하여라 / 相視顔色涼

금년 봄도 또 다시 가뭄이 들어 / 今年春又旱

두 손 잡고 흉년을 근심하나니 / 拱手愁愆陽

우물은 말라서 푸른 진흙 되고 / 青泥井水涸

붉은 피처럼 아침 해는 빛나네 / 赤血朝暾光

거리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많고 / 道路多餓殍

들에는 뽕나무와 곡식이 틀려졌네 / 郊原阻農桑

나는 게을러 언제나 늦게 일어나 / 我慵常晏起

맑은 아침에 초당에 누웠더니 / 清曉臥草堂

비 기운이 우수수 바람 일으켜 / 雨意作蕭蕭

추녀 끝에 빗소리 뚝뚝 / 薝語俄琅琅

문득 놀라 베개 밀쳐 벌떡 일어나 / 推枕忽驚起

창을 여니 기쁜 마음 미칠 것 같네 / 開窓喜欲狂

버드나무 언덕에 푸른 눈썹 적시고 / 柳堤濕翠黛

꽃나무 동산에는 붉은 단장 엉기네 / 花塢凝紅粧

모든 물색이 윤기가 다시 생겨 / 物色沃更生

하나하나 모두 향기를 토하네 / 一一吐芬芳

이제 알았네 상제의 마음 / 迺知上帝心

끝내 백성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줄을 / 終不負民望

따비와 보습이 남쪽 들에 찼거니 / 耒耜滿南畝

여기 천 개 창고가 찰 것을 기약하네 / 可計千斯倉

비 새는 집에 우산 받는 것 어떻다 하지 말라 / 敢辭破屋傘

내 이미 구복 걱정 잊어버렸네 / 口腹吾已忘

 

 

동문선 제5권

●원시(怨詩) : 성간(成侃 1427-1456)

새벽밥 먹고 동쪽 언덕에 갔다가 / 蓐食向東阡

저물게는 쓸쓸한 마을에 돌아와 운다 / 暮返荒村哭

옷은 찢어져 두 팔뚝이 드러나고 / 衣裂露兩肘

병은 비어 쌓인 곡식이 없다 / 缾空無儲粟

어진 자식이 옷을 끌어당기며 우니 / 稚子牽衣啼

어찌 하면 밥과 죽을 얻을까 / 安得饘與粥

아전들이 와서 돈을 토색하여 / 里胥來索錢

늙은 아내가 묶임을 당했다 / 老妻遭縛束

담을 넘고 높은 데 기어올라 / 踰墻陟崢嶸

열흘 동안 가시밭 속에 숨었었다 / 十日竄荊棘

몸을 숨겨 풀 속으로 다니니 / 潛身草閒行

해는 떨어지고 산골은 컴컴하다 / 日落山谷黑

도깨비는 언덕에서 휘파람 불고 / 魑魅憑岸嘯

처량한 바람은 숲 사이에서 분다 / 凄風振林木

벌벌 떨리고 혼백이 흩어지니 / 凜然魂魄裭

한 걸음에 세 번 네 번 숨을 쉰다 / 一步三四息

슬프다, 저 간악한 아전들 / 嗟嗟黠吏徒

토색질이 어찌 그리 빠른고 / 誅求一何速

관청은 어질지 않은 것 아니지만 / 公門非不仁

너희들의 마음이 심히 독하도다 / 汝輩心甚毒

 

 

동문선 제6권

화암사 운제(花岩寺雲梯) : 백문절(白文節 ? - 1282)

어지러운 산 틈에서 놀랜 여울물 달리는데 / 亂山罅口驚湍馳

몇 리를 찾아드니 점점 깊숙하고 기이하더라 / 偶尋數里漸幽奇

소나무 전나무는 하늘을 찌르는데 칡덩쿨 드리웠고 / 松檜參天藤蘿垂

백 첩의 이끼길은 미끄러워 디디기 어렵도다 / 百疊蘚磴滑難依

말을 버리고 걸어가매 다리 힘은 지쳤는데 / 捨馬而徒脚力疲

길을 통하는 외나무다리 마른 등걸가지로세 / 通蹊略杓枯槎枝

한 방망이 성긴 종소리는 골짝을 빠져나가기 더딘데 / 疏鍾一杵出谷遲

구름 끝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붕이 희미하네 / 雲端有無屋脊微

시내에 걸터앉은 작은 정자 벽에는 시가 가득한데 / 跨溪小亭滿壁詩

풍헌과 보배 현판 〈글씨는〉 용과 이무기가 서로 당긴다 / 風軒寶牓拏龍螭

현공은 집고사의 기를 지었는데 / 玄公作記集古辭

황견유부 세상에 드물다 / 黃綃幼婦世所稀

샘물은 비녀다리처럼 갈라 구슬을 뿜고 / 泉分釵股噴珠璣

옴팍 패인 돌을 만나 몇 군데 못을 이루었네 / 輒遇石凹成幾池

고기 백 마리는 거기서 놀 만한데 / 魚可百尾游於斯

아홉 마디 창포는 어지러운 푸른 실인네 / 菖蒲九節亂靑絲

열 걸음을 못 가서 소나무 사립 있다 / 行無十步有松屝

사립을 두드리매 산새는 모두 놀라 나는구나 / 扣之山鳥皆驚飛

지팡이 짚고 웃으며 맞는 이는 참으로 흰 눈썹인데 / 携筇笑迎眞厖眉

종남산의 엄노인의 직계 제자로세 / 終南儼老的骨兒

흰 옷 입은 선인(백의관세음(白衣觀世音))은 보름달 모습인데 / 白衣仙人滿月姿

높은 대에 단정히 앉으니 팔부가 에워쌌다 / 端坐高堂八部圍

누른 모란꽃은 지대뜰을 비추고 / 黃牧丹花映庭墀

작약에도 또한 취서시(작약의 일종)가 있더라 / 芍藥亦有醉西施

홈통을 이은 가는 흐름에 입 씻을 만하고 / 連筒細溜與漱資

약초밭과 소채밭은 가뭄에도 싱그럽다 / 藥畦菜畝旱中滋

포단에 차를 놓고 한참 동안 말하니 / 蒲團置茶語移時

비로해장은 혀 밑으로 헤친다 / 毗盧海藏舌底披

안마는 선정을 대하면 항복하는 기를 세우나니 / 眠魔對定豎降旗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팔십 세 노인이네 / 脇不霑床八十朞

나는 와서 도를 묻고 스승 삼기를 비는데 / 我來問道乞爲師

창고를 기울여 헛되게 돌아가기 면하였네 / 傾囷倒廩免虛歸

한가함에 의탁하여 한밤을 자니 문득 기를 잊었거니 / 投閑一宿便忘機

십 년 홍진에 만사가 글렀었다 / 十載紅塵萬事非

어찌하면 이 몸은 얽매임을 버리고 / 安得此身謝縶維

늙은 스승을 따라와서 구름에 취하랴 / 來隨老爛酣煙霏

산의 중은 산을 사랑해 나올 기약 없거니 / 山僧愛山出無期

세속 선비가 거듭 오는 것도 알 수 없구나 / 俗士重來未可知

어정거리며 차마 곧 떠나지 못하나니 / 彷徨未忍卽分離

소나무 머리에 떨어지는 해가 석 자 남았다 / 松頭落日三竿欹

※화암사(花巖寺):현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佛明山)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 제가 30여년 전부터 가벼운 등산을 하기 위해 자주 찾는 절이며, 지금도 조용하고 여유로운 정취가 남아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운제현(雲梯縣):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화산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조선시대에는 고산현.

※終南山: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송광사 뒷산이다.

 

 

동문선 제7권

●원별리(怨別離) : 정포(鄭誧 1309-1345)

내 나이 열 다섯 때 어리광 피며 철이 없어 / 妾年十五嬌且癡

남의 이별 설워함 보곤 항상 비웃었더니 / 見人惜別常發嗤

어찌 알았으랴, 내 평생에도 이 시름 있어 / 豈知吾生有此恨

푸르던 귀밑 하룻밤에 흰 실이 나붓거릴 줄 / 靑鬢一夜垂霜絲

임을 사랑했으나 붙들 길이 없더라 / 愛君無術可得留

가슴에 부푸른 풍운의 뜻 때문에 / 滿懷都是風雲期

남아의 공명은 마땅히 날이 있으련만 / 男兒功名當有日

여자의 고운 얼굴 얼마나 가리 / 女子盛麗能幾時

울음을 삼키며, 어이 이별의 괴로움을 원망하랴 / 呑聲敢怨別離苦

곰곰히 생각하면 후회로다, 차라리 늦게 만나지 못한 것이 / 静思悔不相逢遲

돌아가는 길 이미 강성현을 지났으련만 / 歸程已過康城縣

거문고 안고 오래오래 강남 물가에 섰노라 / 抱琴久立江南湄

이 몸 강상(江上)의 기러기만 못한 것이 한스러워라 / 恨妾不似江上雁

그들은 상사만리를 날아서 서로 따르는데 / 相思萬里蜚相隨

거울을 비춰 보며 머리 단장도 안하거니 / 床頭粧鏡且不照

어찌 차마 잔치 때 옷을 갈아입으리 / 那堪更着宴時衣

시름에 잠기다간 곧 잠에 들고파 / 愁來唯欲徑就睡

꿈에라도 한 번 웃으면 손 잡고 돌아오련만 / 夢中一笑携手歸

그대 있는 머나먼 길은 꿈속의 혼도 모르리니 / 天涯魂夢不識路

인생은 어떻게 상사를 위로하리 / 人生何以慰相思

 

●고한음(苦寒吟) : 이연종(李衍宗 고려후기)

변방에 겨울 들어 거의 다 될 무렵 / 閉塞成冬冬欲竟

추위 점점 더하고 음산한 기운 더욱 짙으니 / 寒氣屭贔陰轉盛

눈은 촌락을 묻고 시내에도 가득한데 / 平埋聚落雪滿川

얼굴에 부딪는 바람 칼 같이 송곳 같이 모질구나 / 着面錐刀風冽猛

서울에 사는 사람들 문밖 출입 적어져 / 長安居人少出門

술 값이 높다 해도 대들지 않을테지 / 酒價雖高力不竸

햇빛은 짧고 엷어 쉬이 기울고 / 白日短薄易頹光

서리는 별과 달에 차가움을 더해준다 / 霜華凝添星月冷

구리 주전자 얼어 터지느라 빈 마루 울리건만 / 銅壺凍裂響空堂

이웃 닭 소리 없구나 밤은 어찌 그리 긴고 / 隣鷄無聲夜何永

방 안에 몸을 감췄으나 뼈는 얼음이라 / 潛身屋底骨欲氷

짧은 옷깃을 자주 여미며 목을 깊이 움추린다 / 數挽衣衿深縮頸

가슴에 오직 한 줌 온기 남아 있긴 하나 / 胸次唯留一掬溫

그것이 잠깐 동안의 목숨을 보전할런지 / 其能保得須臾命

실오라기 솜 붙인 내 몸 오히려 이러하거든 / 絲緜吾身尙如斯

하물며 누더기가 종아리도 못 덮는 축이랴 / 況被藍縷不掩脛

비노니 하느님은 급히 봄으로 돌려 / 願天火急布陽和

온 세상의 궁한 백성을 모두 살려 주소서 / 活盡寰中窮百姓

 

동문선 제8권

●봉래역 유감(蓬萊驛有感) : 박의중(朴宜中 1337-1403)

작년 단옷날은 김제골에서 / 去年重五金堤郡

금년 단옷날은 봉래역에서 / 今年重五蓬萊驛

김제골 안에 모두 일가며 친구들 / 金堤郡中盡鄕黨

봉래역에는 모조리 색다른 풍속 / 蓬萊驛裏皆殊俗

일가들은 다투어 술과 고기를 가져다가 먹었지 / 鄕黨爭持酒肉饗

마침 내가 선영에 분황 할 때 / 値我先壠焚黃席

녹음 속에 그네 뛰는 고운 아가씨들 / 紅粉鞦韆綠陰動

금 안장엔 죽방울 치는 소년들 / 打毬年少金鞍勒

그런데 여기는 풍속이 아주 달라 / 此中風俗殊不同

쓸쓸한 빈 객사에 인적도 끊겼구나 / 空館寥寥人迹絶

해마다 이날이면 하늘 끝 한 쪽에서 / 年年此日天一涯

처자들 술상 앞에서 응당 나를 말하리 / 妻孥應向尊前說

 

 

동문선 제9권

●송인(送人) : 정지상(鄭知常 1068-1135)

뜰 앞에 한 잎 떨어지고 / 庭前一葉落

마루밑 온갖 벌레 슬프구나 / 床下百蟲悲

훌훌이 떠남을 말릴 수 없네만 / 忽忽不可止

유유히 어디로 가는가 / 悠悠何所之

한 조각 마음은 산 다한 곳 / 片心山盡處

외로운 꿈, 달 밝을 때 / 孤夢月明時

남포에 봄 물결 푸르러질 때 / 南浦春波綠

뒷 기약 그대는 제발 잊지 마소 / 君休負後期

 

●숙 용담(宿龍潭驛) : 안축(安軸 1287-1348)

초가 밑을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느라니 / 寄宿芧茨下

서리가 짙고 추운 기운 엄하구나 / 霜濃洌氣嚴

몹시 피곤하여 병든 다리 뻗쳤다가 / 困來伸病脚

정좌하고 앉아서 성긴 수염을 꼬네 / 危坐撚疏髯

집은 낡아빠져 벽에 먼지투성이 / 屋老塵栖壁

창만은 원하니 달이 추녀에 걸렸네 / 窓明月掛簷

마음이 바빠서 잠 편히 못 드는데 / 心忙眠未穩

밤은 왜 이리도 긴고, 몹시 지루하구나 / 斗覺夜厭厭

 

 

동문선 제10권

김제로 어머니를 뵈러 가는 박부령 의중을 보내며[送朴部令宜中覲母金堤] : 이인복(李仁復 1308-1374)

명성이 자자한 근궁의 손이여 / 籍甚芹宮客

드높은 계방의 장원일세 / 飄然桂榜魁

사문이 아직 상실되지 않았구나 / 斯文今未喪

자네에겐 재주가 많으이 / 吾子故多才

전별하는 자리에는 서녘바람이 급하고 / 祖席西風急

가는 안마는 후기가 재촉하네 / 歸鞍後騎催

애달파라 나 혼자 무슨 일로 / 嗟余獨何事

가고자 하다가 다시 머뭇거리는고 / 欲去更徘徊

※박부령(1337-1403) : 1362년 문과에 장원급제

 

●지휘를 따라가는 이첨에게[贈李詹從指揮] : 윤소종(尹紹宗 1345-1393)

자하각에서 친히 과거를 보이시던 날 임금의 / 紫霞親試日

맑은 물으심은 유우의 풍이었네 / 淸問有虞風

황갑에 이름은 겨눌 이가 없었고 / 黃甲名無右

현릉(공민왕)의 권애하는 가운데다 / 玄陵眷在中

도서는 하락을 천명하네 / 圖書闡河洛

문물은 기풍이 찬란하네 / 文物煥岐豐

아아 창오는 멀구나 / 惆悵蒼梧遠

군사를 따라 해동을 평정하러 나가네 / 從戎平海東

 

 

동문선 제11권

부령 말 위에서 본대로 [扶寧馬上記所見] : 이규보(李奎報)

근심을 나눈 몸 쉴 틈이 없어 / 分憂無暇日

역마타고 넓은 벌을 달려 가누나 / 乘馹走平原

이 곳은 꽃 천지에 길을 잃은 듯 / 是處花迷路

저기 저 대 동산은 뉘집 것인가 / 誰家竹鎖園

등이 서로 얽혀서 넘어간 덩굴 붙들고 / 藤纏扶倒蔓

느티나무 넘어져 뿌리 보이네 / 槐仆露孤根

학이라도 탄 듯, 달리는 말 / 逸駕如鞭鶴

원숭이 걸음 따를 가벼운 행장 / 輕裝可趁猿

호수 위 하늘에는 봄 안개 자욱 / 湖天春霧暗

길가 주막에는 구름이 따스해라 / 蠻店瘴雲溫

이끼는 파릇파릇 새 무리 짓고 / 苔活添新暈

조수 와락 밀려서 옛 자국 넘네 / 潮狂過舊痕

마을에 들어서자 제비 오는 사일 만나고 / 入村逢燕社

바다를 바라보며 선부에 오번을 묻네 / 望海問鼇番

낡은 둑엔 새벽부터 수문 열렸고 / 古堰晨開塹

고을 성은 낮에도 문 잠갔는데 / 宮城晝掩門

아전들이 맞아서 길 인도하고 / 郡胥迎導路

원이 나와 술병을 열어 놓네 / 邑宰出開樽

골몰히 돌아다님 왕사 때문이나 / 役役皆王事

거나하게 취함도 성은이로세 / 陶陶亦聖恩

모랫가에 갈매기가 둥실 춤추고 / 沙邊鷗獨舞

숲속의 새들도 짹짹거리네 / 林表鳥能言

부로들아, 놀라서 피하지 마소 / 父老休驚避

나는 서생이라서 거만할 줄 모르네 / 書生不自尊

 

●망부석(望夫石) : 무명씨

옛날에 절개 굳은 어떤 부인이 / 昔有貞心婦

멀리서 아득한 길을 따르기 어려워 / 難追杳杳途

몸이 산밑의 돌로 되어서 / 化爲山下石

전장간 남편을 기다리누나 / 空望戰場夫

비가 뿌려 구슬 같은 눈물 더하고 / 雨酒添珠淚

먼지 날아 눈 같은 살 위에 앉네 / 塵侵染雪膚

푸른 구름이 귓머리에 연달아 일고 / 綠雲連鬢起

초승달이 눈썹 가에 외로이 뜨네 / 新月帶眉孤

얌전한 모습은 그대로지만 / 窈窕形容在

상긋 웃는 말씀은 한 마디 없네 / 玲瓏笑語無

아황이 만일 이 돌을 보면 / 娥皇如見此

창오에 울던 일을 부끄러워하리 / 應恥泣蒼梧

※창오(蒼梧) : 순(舜) 임금이 남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산에서 돌아가니 그의 두 비(妃) 아황(娥皇)ㆍ여영(女英)이 슬피 울었다. 그 눈물이 떨어져서 소상(瀟湘)의 반죽(班竹)이 되었다 한다.

 

 

동문선 제12권

●제 변산 소래사(題邊山蘇來寺) : 정지상(鄭知常)

적막한 맑은 길에 솔 뿌리가 얼기설기 / 古徑寂寞縈松根

하늘이 가까워 두우성을 숫제 만질 듯 / 天近斗牛聊可捫

뜬구름 흐르는 물 길손이 절간에 이르렀고 / 浮雲流水客到寺

단풍잎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는구나 / 紅葉蒼苔僧閉門

가을 바람 산들산들 지는 해에 불고 / 秋風微涼吹落日

산 달이 차츰 훤한데 맑은 잔나비 울음 들린다 / 山月漸白啼淸猿

기특도 한지고 긴 눈썹 저 늙은 중은 / 奇哉厖眉一老衲

한 평생 인간의 시끄러움 꿈조차 안 꾸누나 / 長年不夢人閒喧

 

 

동문선 제13권

고산현 공관의 배꽃[高山縣公館梨花] : 채보문(蔡寶文 12C)

3월의 온갖 꽃이 다 지려 하는데 / 三月芳菲看欲暮

담 옆의 배나무는 비로소 꽃을 여네 / 墻東梨樹始開花

싸늘한 것이 싱겁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 人言冷艶淸無味

꽃다운 마음 소탈함을 나는 못내 사랑하네 / 我愛芳心静不奢

원에 가득 향긋한 바람은 발을 스쳐 오고 / 滿院香風動簾額

가지를 누른 흰 눈은 사창에 흩날리네 / 壓枝殘雪拂窓紗

세상의 분홍 자주는 내 짝이 아니로세 / 世間紅紫非吾偶

네 앞엔 내 흰머리도 과히 숭없지 않아라 / 對此誰嫌白髮多

 

●장난삼아 밀주 원님에게 주다[戱贈密州倅] : 임춘(林椿 고려)

작자(作者)가 밀주(密州)에 들렸는데, 원이 기생을 보내어 동침하기를 명령하였더니, 밤에 기생이 도망갔으므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새벽에 단장하고 금비녀 꽂고서 / 紅粧待曉帖金鈿

재촉해 불리워서 잔치 자리에 올랐네 / 爲被催呼上綺筵

원님의 엄하신 호령은 안 무섭고 / 不怕長官嚴號令

부질없는 과객의 궂은 인연을 탓할 뿐 / 謾嗔行客惡因緣

누에는 올랐어도 퉁소 부는 짝이 되어주지 않고 / 乘樓未作吹簫伴

달로 달아나 약 도적한 선녀가 되는구나 / 奔月還爲竊藥仙

청운의 학사님께 말 부치노니 / 寄語靑雲賢學士

어진 마음으로 부들포 채찍을 제발 쓰지 마옵소 / 仁心不用示蒲鞭

 

 

동문선 제14권

부령 포구(扶寧浦口) : 이규보(李奎報)

아침저녁으로 들리느니 물소리뿐 / 流水聲中暮復朝

바닷가 촌락이 하도 쓸쓸하구나 / 海村籬落苦蕭條

호수 한복판엔 달이 도장 찍었는데 / 湖淸巧印當心月

포구는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듯 삼키고 / 浦闊貪吞入口潮

찧는 물결에 바위가 닳아 숫돌이 되고 / 古石浪舂平作礪

부서진 배가 이끼에 묻혀 누운 채 다리가 되었네 / 壞船苔沒臥成橋

이 강산의 온갖 경칠 어이 다 읊으리 / 江山萬景吟難狀

화가를 좀 빌려다가 단청으로 그렸으면 / 須倩丹靑畫筆描

 

●두문(杜門) : 이규보

인간의 비방과 의논을 피하려고 / 爲避人間謗議騰

문 닫고 누웠으니 머리가 덥수룩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엔 마음 설렌 봄처녀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차츰 고요한 여름 참선하는 중이 되네 / 漸作寥寥結夏僧

애들이 장난으로 옷을 당기니, 어와, 두리둥둥 / 兒戲牽衣聊足樂

손님 와 문을 두드려도 들은 둥 만 둥 / 客來敲戶不須應

궁통과 영욕이 모두 하늘이 명하는 것 / 窮通榮辱皆天賦

메추리 암만 작아도 대붕이 부럽잖네 / 斥鷃何曾羨大鵬

※ 메추리 암만 …… 부럽잖네 : 붕새는 9만 리를 솟아 올라 북명(北冥)에서 남명(南冥)으로 훨훨 날아가는데, 메추리가 가지와 가지 사이로 팔짝팔짝 날며 하는 말, “저 붕새는 뭘 하러 9만 리씩 남쪽으로 가는고.” 《장자》

 

 

동문선 제16권

●등 전주 망경대(登全州望景臺) : 정몽주(1337-1392)

천 길 산봉 위에 돌 길이 비꼈는데 / 千仞岡頭石徑橫

올라서 바라보니 감회가 그지없네 / 登臨使我不勝情

청산은 보이는 듯 아닌 듯 부여국이요 / 靑山隱約扶餘國

누른 잎이 우수수 와수수 백제성이라 / 黃葉繽紛百濟城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 시름을 자아내고 / 九月高風愁客子

백 년 호기는 서생의 신세를 잡쳤구나 / 百年豪氣誤書生

하늘 가에 해는 지고 뜬 구름 어울렸으니 / 天涯日沒浮雲合

옥경이 아아 어딘고 바라볼 길 없구나 / 怊悵無由望玉京

 

 

동문선 제19권

●추야 우중(秋夜雨中비 내리는 가을 밤 ) : 최치원

가을바람에 처량한 이 읊조림만 / 秋風唯苦吟

온 세상에 지음 적네 / 擧世少知音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 窓外三更雨

등불 앞에 아물아물 만리의 마음이여 / 燈前萬里心

※우전 신호열 선생의 이상한 번역

秋風惟苦吟/가을 바람만 애처로이 부는데

世路少知音/세상 길엔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한밤중 창밖에는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송인(送人) : 정지상

비 갠 긴 언덕엔 풀 빛이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울먹이네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 마를거나 /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 눈물 강물을 더하는 것을 / 別淚年年添綠波

 

●제 임실군 공관(題任實郡公館) : 김약수(金若水)

늙은 나무 거친 개암 옛 개울을 덮고 / 老木荒榛夾古蹊

집집마다 나물로도 오히려 배 못 불리네 / 家家猶未飽蔬藜

산새는 군수의 백성 걱정한 뜻을 모르고 / 山禽不識憂民意

그저 숲 사이에서 마음대로 지저귀네 / 唯向林閒自在啼

 

 

동문선 제21권

●제임실현벽(題任實縣壁) : 석선탄(釋禪坦 고려)

진흙을 차는 여윈 말로 산성을 지나다가 / 衝泥瘦馬過山城

찬 등불 다 돋우고 비소리를 듣고 있다 / 挑盡寒燈聽雨聲

나그네 길은 해를 따라 끝나지 않거니 / 客路不隨年矢盡

명년에는 어디서 설을 맞이하려나 / 明年何處見新正

 

●부임공주(赴任公州) : 전유(田濡)

공사는 구름 같아 귀밑머리 세려 하네 / 公事如雲髮欲絲

눈 멎은 강가 길에 말걸음 더디어라 / 雪晴江路馬遲遲

내가 백성 걱정하는 뜻 아전들은 모르고 / 吏人不識憂民意

시내와 산에서 좋은 시를 찾는다고 잘못 말하네 / 誤道溪山覓好

 

 

동문선 제22권

야 과함벽루 문 탄금성 유작(夜過涵碧樓聞彈琴聲有作) : 이첨(李詹)

신선 패옥 소리 뎅그렁뎅그렁 / 神仙腰佩玉摐摐

높은 다락에 올라 푸른 창문에 걸어 올린다 / 來上高樓掛碧窓

밤이 되자 다시 유수곡을 타니 / 入夜更彈流水曲

한 수레바퀴의 밝은 달이 가을강에 내리네 / 一輪明月下秋江

 

 

동문선 제24권

●정 대마도 교서(征對馬島敎書) : 어변갑(魚變甲)

왕은 말하노라. 무력만 일삼는 것은 성현이 경계하는 바이나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의 부득이한 일이다. 옛적에 성왕(成王)과 탕왕(湯王)이 농사일을 버리고 하(夏) 나라를 쳤으며, 주 선왕(周宣王)이 6월에 험윤(玁狁)을 쳤는데, 그 일이 비록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은 마찬가지다.

대마도(對馬島)라는 섬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누추한 곳이므로 왜노가 웅거해 사는 것을 들어 주었던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 이후로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군민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의 부형을 잡아가고, 가옥을 불태운 탓에,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 섬 속에서 울고 헤매지 않는 해가 없었다. 이에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치며 분통이 터져서, 놈들의 살을 씹어 먹고 놈들의 살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용비(龍飛)의 운에 응하여 위엄과 덕을 사방에 입히어 신의로 무마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 흉하고 탐내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여 병자년에 동래(東萊)에서 우리 병선 20여 척을 약탈하고 군민을 살해하였다.

내가 대통(大統)을 이어 즉위한 이후에도 병술년에는 전라도에서, 무자년에는 충청도에서, 배에 실은 양곡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병선을 불사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만호(萬戶)까지 죽이기도 하여 그 포학이 극도에 달하였고, 두 번 제주(濟州)에 들어와서 살상한 것이 또한 많았다. 이것은 사람을 탐내는 성낸 짐승이 간교한 생각만 품고 있는 것으로,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도 내가 오히려 그 죄악을 용서하여, 함께 따지지 않은 굶주린 것을 진휼했으며, 통상(通商)도 허락하는 등, 무릇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 주어 함께 살아갈 것을 기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또 이제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는 몰래 비인포(庇仁浦)에 들어와서 인민 3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는 병선을 불태우고 장사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황해(黃海)에 떠서 평안도(平安道)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장차 명 나라의 지경을 범하려 하였다. 그러니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고 천상(天常)을 어지럽힌 것이 어찌 심하지 않은가.

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으면 오히려 천지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왜구가 제 마음대로 탐욕과 해독을 부리어 백성을 살육하여, 스스로 하늘의 앙화를 불렀다. 그런데도 참고서 정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지금 농사 때를 당하여 장수를 명하고 군사를 내어 그 죄악을 치는 것은 또한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아, 간흉을 쓸어 버리고, 백성들은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여 이렇게 이해(利害)를 열거하여 내 뜻을 신민에게 알리는 것이라.

 

 

동문선 제25권

●봉 진양후 교서(封晋陽侯敎書) : 이규보(李奎報)

운운. 짐이 살펴 보건대, 옛날로부터 다른 성을 가진 자에게 제후를 봉하는 것은 종실과 같이 으레 봉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걸출한 자로서 공적이 풍부하고 명망이 무거운 자라야만 책봉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세상에도 또한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국한 이래로 풍부한 공훈과 무거운 명망이 경과 같은 사람이 다시 몇 사람이나 있기에, 내가 유독 경으로 하여금 모토(茅土)의 봉작을 누리게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일찍이 분봉(分封)의 명이 있었으나 경이 굳이 사양함으로 인해 드디어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을 집집마다 효유할 수도 없으니, 사람들이 짐더러 인(印)을 아낀다고 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이러니 짐의 뜻에도 미안할 뿐 아니라,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다. 또 경이 나 한 사람을 옹립하여 계책을 정하고 천명(天命)을 도운 것은 나로서는 황하가 띠같이 되고 태산이 숫돌같이 되어도 잊지 못할 공이다.

악하고 사나운 무리가 날뛰던 때를 당하여 적을 헤아리고 변에 응하여 기미를 알기를 귀신과 같이 알았고, 얼마 뒤에 백성을 거느리고 도성을 옮기어 우리 사직을 보존하였고, 반역자를 섬멸하여 조정의 기강자를 다시 떨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삼한(三韓)의 공이다. 그리고 천하가 모두 괴롭게 여기던 달단(韃靼)의 통군(統軍) 살리타(撒里打)를 경의 기이한 꾀로써 한 화살에 죽여서 만국으로 하여금 함께 기뻐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공이다.

아, 나에 대하여, 삼한에 대하여, 천하에 대하여, 이런 기이하고 위대하고 비상한 공적이 있는 바, 이는 고금을 찾아보아도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일 경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오래 끌고 결단하지 못한다면, 삼한 뿐 아니라 천하 사람이 나를 어떻다 하겠는가. 하물며 진작 아비의 작위를 승습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데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이는 청렴한 행동이었다. 자기가 스스로 수립한 것이 남의 뜻에 만족한 뒤에 받으면 이것은 덕으로 된 것이오, 세음(世蔭)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런즉 짐작하고 취사한 것이 온당하여 천년토록 미담으로 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겠는가. 상(賞)은 오래 멈출 수 없고 때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마땅히 높은 자리에 등용하는 예식을 거행하여 조금이나마 안팎의 인심이 믿게 해야겠다.

이제 사신 금자광록대부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 공부 상서(金紫光祿大夫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工部尙書) 최종준(崔宗峻)과 부사(副使)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 김숙룡(金叔龍) 등을 보내어 예절을 갖추어 너를 진양후(晋陽侯)로 책봉한 다음, 덕업(德業)을 나열하여 사책(史冊)에 싣고 가장(家藏)을 빛나게 하며, 관원을 배치하여 연부(蓮府 대신의 관저(官邸))를 크게 열고 빈객들을 빛나게 한다. 겸하여 하사하는 물건은 별록과 같으니 이르거든 잘 받으라. 겨울 추위에 운운.

※진양후는 최우(1170년대?-1249)이며 이 일은 1234년의 일이다. 최충헌이 1196년에 권력을 잡았으나 공식적으로 대권을 장악한 것은 1201년(신종 4년)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규보는 이미 1999년 당시의 무인집권기구를 막부(幕府)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의 막부는 마치 훌륭한 정치체제인것 처럼 보여지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막부를 숨기다시피 하면서 부정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인가? 무인들이 부국강병과 민생을 위한 정치에서 멀어진 귀족정치를 타파하고 권력을 잡으면 정녕 무조건 나쁜 것인가?

최충헌에게 1205년(희종 1)에 내장전(內莊田) 100결(結)이 하사되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의 호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며,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의 관작과 식읍(食邑) 3천호에 실봉 3백호를 받았다. 이듬해진강후(晉康侯)가 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웠다. 이때부터 궁궐을 출입함에 있어서 평시 의복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들고 시종하는 문객(門客)을 3,000여 명이나 거느렸다. 이어서 1234년에 최우가 봉작을 받아 제후가 되고 교정도감(1209년 설치)의 교정별감으로 실질적인 집권자이며 정방(1225년)을 설치하고 인사를 담당하였으며 진양공이 되었다.

우리역사에서는 정권을 탈취하면 무조건 악이고, 왕의 권력을 누르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100여년이나 고려의 국정을 담당한 무인정권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의 막부정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성계의 반역은 혁명으로 미화한다. 또 세조의 계유정난과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부정적으로만 보고 87혁명과 작년의 촛불혁명은 긍정적으로만 본다. 세조의 집권과 5.16은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틀린 역사관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을 단편적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공과 과를 함께 보는 시각이 필요하며 무인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비현실적 논리에 맞추어 우리의 무인정권의 100년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동문선 제28권

책공주(冊公主) : 노단(盧旦)

연덕궁(延德宮) 둘째 딸에게 교하노라. 너는 선원(璿源)의 순수한 혈통으로, 위악(韡萼)의 꽃다움이 서로 연하였다. 곱고도 현숙함으로 몸가짐을 정제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어진 행실이 드러났고, 부드럽고 정숙하여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였으니 마땅히 은총과 영화로 표시하여야 하겠다. 이에 명칭을 높이고 주는 것을 넉넉히 한다. 이제 사신 모관(某官) 모(某)와 부사(副使) 모관 모 등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예를 갖추어 너를 책봉하여 공주를 삼게 하고, 아울러 아무 물건들을 별록과 같이 준다.

 

 

동문선 제29권

문하평장 상장군 김원의(1147-1217) 걸 치사 불윤교서(門下平章上將軍金元義乞致仕不允敎書) : 이규보(李奎報)

운운.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70세에 치사(致仕)한다 함은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자리만 치지하고 있는 신하가 영화를 탐하고 임금의 총애를 즐겨 늙어도 물러갈 줄 모르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정작 견식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여 나라를 경륜하는 이로, 하루라도 정사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그가 비록 만족함을 알고 복이 너무 가득함을 두려워하여 물러감을 빌기에 급급한들, 어찌 반드시 예제에 구애되어 그 청을 응낙하겠는가.

경은 다섯 조정에 벼슬하는 동안 한결같은 절개를 닦았다. 겸양과 공손으로 몸을 검속하여 옛날 군자의 풍을 가졌고, 용맹하고 과감함이 남보다 뛰어나 대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조정에서의 경륜이 과감하며 장수로서의 방략이 깊어서, 온 나라가 의지하여 장성으로 삼고 짐이 보배로이 여겨 으뜸가는 거울로 삼았다. 하물며 지금은 짐이 새로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려고 부지런히 구하는 때로, 바야흐로 빛나게 도와주는 공을 의지하여 태평의 경사를 이룩하고자 하는 데이겠는가.

경은 어찌하여 갑자기 황비(黃扉)의 영화를 싫어하여 녹야(綠野)의 놀이를 좇고자 하는가. 한 몸을 사랑하여 번잡한 정사를 벗어나려 함은 경의 사정(私情)이니, 그것은 오히려 억지로 돌릴 수 있겠거니와, 만백성을 위하여 옛 중신을 임용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나라의 공론(公論)이니,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짐이 귀를 기울이기 어려우니, 경은 말을 되뇌지 말지어다.

 

 

동문선 제30권

●성석린(1338-1423) 걸퇴 불윤 비답(成石璘乞退不允批答) : 무명씨(無名氏)

가득 참을 두려워하여 물러나게 해 주기를 청원함은 비록 경이 스스로 겸양하는 뜻이나, 성심으로 어진 이에게 명함은 실로 나의 선치(善治)를 원하는 마음이다. 하물며 여러 사람의 기대가 노성(老成)한 이를 의지하고 있고, 경의 풍채가 조정의 모범이 되니, 어찌 물러가 한가히 처하게 할 수 있겠는가.

경은 세상을 지도할 웅재(雄才)요, 나라를 경륜할 석덕(碩德)이다. 학문은 천인(天人)의 사이를 관통하였고, 식견은 고금(古今)의 바른 도리를 통달하였다. 도(道)가 모두 경륜에 맞으매 일찍이 삼공(三公)에 올랐으며, 익량(翼亮)의 공이 있으매 정승의 자리에 적합하다. 과인이 왕위를 이어 즉위한 뒤 다시 원로(元老)를 번거로이 하여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삼았더니, 과연 10년 동안에 평소의 배운 바를 다 펴서 흔들림과 요란함을 진정하고, 쓰고 달고 마르고 축축함을 슬기롭게 조화하였다. 온갖 일에 근로하면서 종시토록 절개를 한결같이 하기에, 바야흐로 장한 시책이 더욱 효과를 나타내어 서정(庶政)이 모두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올린 전(箋)을 보매 중한 짐을 벗고자 하였으니, 경의 자처(自處)는 좋지마는 나의 바라는 바는 어찌하겠는가.

아, 상보(尙父 여상(呂尙))는 어진 이로서 조정에 나와 문왕(文王)의 정치를 도왔고, 필공(畢公)은 늙어서도 조정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실(周室)의 스승이 되었다. 하물며 경과 같은 원로 중신(重臣)은 선철(先哲)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니 마땅히 조정에 나와서 일을 볼 것이요, 병을 핑계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라.

 

동문선 제33권

발해(渤海 : 698-926)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 최치원(崔致遠 857-908)

신 모는 아뢰나이다.

신이 당번(當番) 숙위원(宿衛院) 장보(狀報)를 보니, 지난 건녕(乾寧) 4년 7월중에 발해(渤海) 하정왕자(賀正王子) 대봉예(大封裔)가 장(狀)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거(居)하기를 청허(請許)하였었는데 그에 대한 칙지(勅旨)를 엎드려 보니, “국명(國名)의 선후(先後)는 원래 강약(强弱)에 인하여 일컬은 것이 아니다. 조제(朝制)의 등위(等威)를 어찌 성쇠(盛衰)로써 고치랴. 마땅히 구례(舊例)대로 할 것이니 이에 선시(宣示)하노라.” 하였나이다

한조(漢詔)의 윤음(綸音)을 내리사 주반(周班)의 법도를 명시(明示)하시니, 적신(積薪 적수(積水)의 동북에 있는 별 이름)의 수탄(愁歎)이 이미 사라짐에 집목(集木)의 근심이 도리어 간절한데, 하늘만은 심정을 아실 것이니 어느 땅에 몸을 용납하오리이까.

신이 듣잡건대, 예(禮)에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 귀함은 바로 부허(浮虛)를 경계하기 때문이요, 서(書)에 그 법도를 능히 삼감을 일컬은 것은 오직 참월(僭越)함을 막기 위함이니, 진실로 그 분수를 좇지 않으면 끝내 뉘우침을 스스로 부르는가 하나이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部落)으로 앙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그때 고구려의 유신(遺燼)으로 물길(勿吉)의 잡류(雜流)인 효음(梟音)은 백산(白山)에 소취(嘯聚)하고, 치의(鴟義)는 흑수(黑水)에 훤장(喧張)하여 처음은 거란(契丹)과 행악(行惡)하고, 이어 돌궐과 통모(通謀)하여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면서 여러번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를 항거했으며,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야 한(漢) 나라에 항복하는 기(旗)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자 와서 인접(隣接)을 청하기에 그 추장(酋長)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번(臣蕃)의 제5품(品) 벼슬인 대아찬(大阿餐)을 주었더니, 뒤에 선천(先天) 2년에 이르러 바야흐로 대조(大朝)의 총명(寵命)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封)해졌나이다.

근대에 그들이 차츰 황은(皇恩)을 입게 되자 갑자기 신번(臣蕃)과 항례(抗禮)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강(絳)ㆍ관(灌) 이 열(列)을 같이함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이요, 염(廉)ㆍ인(藺)이 서로 화목했음은 전계(前誡)가 된다 할 것이나, 저 발해가 원래 사력(沙礫)의 도태물(淘汰物)로 본국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사거늘, 삼가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직 위를 범하기만 도모하며, 우후(牛後)가 되기를 부끄럽게 여겨 앙큼하게도 용두(龍頭)가 되고자 망령되이 진론(陳論)하고 있으니 이는 애초부터 외기(畏忌)함이 없어서인데 어찌 자리를 격(隔)한 데 대한 예의를 지키오리까. 실로 아래품계가 지킬 예법에 몽매한 짓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 높은 데 계시나 찬찬히 살피시고 멀리 보심이 사뭇 환하시어 생각하시되, 신번(臣蕃)의 기마[驥]는 혹 여위었어도 일컬을 만하여, 소는 파리했어도 혀를 빼무는 것이 아닌 반면에, 저 오랑캐의 매[鷹]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되 방자히 탐욕만 낸다고 여기시어 길이 제항(梯航)을 함께 함만 허하시고 관리(冠屨)를 거꾸로 두지 않게 하시니, 노부(魯府)가 구관(舊貫) 그대로 두어짐을 듣자 주(周) 나라의 명(命)이 오직 새로움을 징험하리로소이다.

한편으로 또한 명위(名位)가 같지 않으매 등급이 엄연히 있습니다. 신의 나라는 진관(秦官)의 극품(極品)을 받았사옵고, 저 번국(蕃國)은 주례(周禮)의 하경(夏卿)을 빌었을 뿐인데, 요즘 선조(先朝)에 이르러 갑자기 우대(優待)의 은총에 젖었으니, 융적(戎狄)은 만족시킴이 불가하므로 요(堯)ㆍ순(舜)도 오히려 이에는 골치를 앓으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등(滕) 나라의 다툼을 틈타 스스로 갈왕(葛王)의 꾸지람을 취하였으니, 만일 황제폐하께서 영금(英襟)으로 독단(獨斷)하시고 신필(神筆)로 쭉 그어 비답하시기 않았던들 근화향(槿花鄕)의 염양(廉讓 염치와 예양)이 스스로 침몰하고 호시국(楛矢國 숙신(肅愼))의 독기가 더욱 성할 뻔하였나이다.

이제 멀리 남월(南越)을 수안(綏安)한 한문제(漢文帝)의 깊은 뜻이 봄같이 무르녹고, 동조(東曹)의 성(省)을 파(罷)한 위 태조(魏太祖)의 아름다운 말을 함께 효득(曉得)하게 되었사오니, 이로부터 팔예(八裔)가 조급히 구하는 희망을 끊어버리고 만방(萬邦)에 망동(妄動)하는 무리가 없어져서 확실히 정규(定規)를 지키며 조용히 분쟁이 사라지리이다.

신이 엎드려 해우(海隅)에 통융(統戎)하기에 구애되어 천조(天朝)에 달려가 뵈지 못하나이다.

 

 

동문선 제38권

표류인을 돌려보내 주신 데 대해 사례하는 글[謝發還漂海人表] : 무명씨

폐하께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시어 도탑게 위무하시고 바닷가에까지 은혜가 미치니, 더욱 깊이 감격하여 금석에 새긴들 그만두겠으며 몸이 가루가 된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신은 다행히 좋은 때를 만나 외람되이 누추한 땅에 거하여, 오직 속국의 예절을 닦을 줄만 알고, 일찍이 티끌만큼도 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표류한 배가 중국의 언덕에 표착하여 특별히 폐하께서 돌보심에 힘입어 남은 목숨을 살려주시고 우리 사신이 돌아오는 편에 딸려보내어 다시 옛 보금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니, 기뻐함이 고향에 가득하고 일이 사책(史冊)에 빛납니다. 이것은 대개 폐하께서 큰 도량이 거친 것을 포용하시고, 지극한 인(仁)으로 만물을 길러서 만백성을 보호하기를 자식같이 여기심이요, 덕이 천지와 같아 사해를 한 집안으로 삼고, 혜택이 외국과 중국에 흡족하여서 드디어 먼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넓고 특수한 은혜를 입게 하심을 만난 것입니다. 신이 삼가 마땅히 기봉(箕封)을 정성껏 지켜서, 동방을 다스리는 직분을 다하고, 항상 화축(華祝)을 올려 폐하께 향하는 정성을 배나 바치겠습니다.

 

 

동문선 제39권

●신라왕이 당 고종황제에게 올리는 진정 표[新羅上唐高宗皇帝陳情表] : 무명씨

신 모는 황송하옵게도 삼가 아뢰옵나이다.

전번에 신이 위급하여 상정이 거꾸로 매달린 듯하였는데, 멀리 구원해 주심을 입어 멸망을 면하였사으니,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죽이 되어도 위로 큰 은혜를 갚을 수 없고, 머리를 부숴 재와 티끌을 만든다해도 어찌 우러러 인자하신 덕택을 보답하오리까. 그러나 신의 깊은 원수로서 신의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백제(百濟)가 상국(上國)에 고하여 군사를 끌어다가 신의 나라를 멸하고 설치(雪恥)하려 하기에, 신이 얼른 이를 쳐부숴 자존(自存)을 구하다가 억울하게도 흉역(凶逆)의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고, 드디어 용서하기 어려운 죄에 빠져들어간 바,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형륙(刑戮)을 받게 되면 살아서도 명을 거역하는 신하가 되고, 죽어서도 은혜를 배반하는 귀신이 되겠기에, 삼가 사건의 경과를 기록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성(神聖) 한 귀를 기울이시어 원유(元由)를 환히 살펴주시옵소서.

신이 선대(先代) 이래로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는데, 근년에 백제 때문에 두 번이나 직공(職貢)이 빠져, 드디어 성조(聖朝)에서 조칙(詔勅)을 내려 신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어도 형벌이 부족할지라, 남산(南山)의 대[竹]로도 신의 죄를 다 쓰지 못할 것이요, 포사(褒斜 촉(蜀)의 땅 이름)의 삼림(森林)으로도 신의 차꼬[械]를 만들 수 없겠으며, 신의 종사(宗社)를 웅덩이 못으로 만들고, 신이 몸둥이를 찢어발겨도 칙재(勅裁)의 분부하신 대로 감심(甘心)하고 주륙(誅戮)을 받겠습니다. 신이 관(棺)과 상여(喪轝)를 옆에 놓고 머리에 진흙을 묻힌 채로 울면서 대죄(待罪)하여 엎드려 형별이 내리는 대로 하겠으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으어와 만물이 모두 비춤을 받고, 덕(德)이 하늘과 땅과 같아 동식물(動植物)이 다 은덕을 입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멀리 곤충(昆虫)에까지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仁)이 이에 어조(魚鳥)에까지 흐르는 바, 혹시 용서하시는 은전(恩典)을 내리시어 허리와 목을 보전하게 하여 주시면, 비록 금방 죽는 한이 있어도 거듭 산 것 같겠으니, 이는 신의 바랄 바가 아니나 감히 소회(所懷)를 아뢰며, 복검(伏劍)의 뜻을 가누지 못합니다.

삼가 원천(原川) 등을 보내어 표를 받들어 사죄하며,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모(某)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며 황송 또 황송합니다.

 

●몽고 사자가 가지고 가는, 황제에게 올리는 표[蒙古行李?去上皇帝表] : 이규보

하늘로부터 책망을 내리시니 몸 들 땅이 없어, 온 나라가 놀라 떨고 함께 부르짖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외람되이 하잘것없는 몸으로 구석진 변방에 있어, 일찍 대방(大邦)의 구원을 입어 우리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세(永世)토록 친호(親好)를 맺어 자손에까지 이르기를 가약하였으니, 어찌 두 마음이 있으며 감히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리까. 그러한데 문득 힐란을 받으니 깊이 충심(衷心)에 서글픈 바가 있기에, 이에 사건의 경위(經緯)를 아뢰니 어찌 숨김이 있으리까.

첫째, 저고여(箸古與)가 요저(了底)를 살해한 사건은 기실 이웃 도적이 한 짓인 바, 아마 성지(聖智)로 환하게 아실 듯하며 그가 경유(經由)한 곳이 증거할 것입니다.

두 번째 온, 사신이 화살을 맞은 사건은, 그보다 앞서 가불애(哥不愛)가 거짓 상국의 복장을 하고, 여러 번 본국의 변방 백성들을 침해하여 오랜 뒤에 그 거짓이 탄로났던 바, 금년 봄에도 또 그런 일이 있기로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더니, 사람은 금시 보이지 않고 그가 버리고 간 털옷과 비단 관(冠)과 안마(鞍馬) 등을 주어 왔는데, 비단관 때문에 그 거짓임을 알았사오나 아직도 의심하여 현관(縣官)에게 간수해 두게 하고, 장차 대국에서 오는 사람을 기다려 그 진안(眞贋)을 변별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모두 다 상국의 대군(大軍)에게 부쳤은즉 다른 뜻이 없는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으며, 또 아토(阿土) 등을 결박했던 사건은, 처음 뜻밖에 화친을 맺었던 대국이 연고없이 소방(小邦)에 폭행을 가하기에 도적이 와 침노하는 줄로 생각하여 군사를 내어 바야흐로 싸우는 중에, 문득 두 사람이 아군(我軍)으로 돌입 하니, 어리석은 군사들이 숫제 따져 신문(訊問)하지도 않고 평주(平州)로 잡아 보내었습니다. 평주 사람이 그들이 도망칠까 하여 대강 차꼬를 채우고 조정에 보고하였기로 조정에서 통역을 보내어 알아보니 그들의 말씨가 상국과 비슷한지라, 그런 뒤에 차꼬를 풀고 위로하고 겸하여 의복ㆍ물품들까지 주어 통역까지 붙여서 보낸즉, 처음엔 불명(不明)의 소치로 그리 되었으나 기실은 또한 용서받을 만하다.

가불애(哥不愛) 인호(人戶)가 저희 나라 성(城)안에 입주(入住)하는 일은 원래 그 자들이 일찍 저희 나라 변방 사람들과 서로 침벌(侵伐)하여 원수가 된 지 오래인데, 변방 백성이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원수와 더불어 함께 거처하리까. 일이 차츰 분명해질 터이니, 말을 어찌 꾸미리까.

투배(投拜)한 일은 전자에 하칭찰라(河秤札刺)가 왔을 때에도 이미 일찍이 투배하였기에, 이번 사신이 왔을 때에도 옛날의 친선 관계를 거듭 강(講)하였을 따름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운운.

건곤이 덮어주시고 일월이 조림(照臨)하시어, 사실을 물어보고 사정을 살피시어 거친 것을 포용하는 도량을 넓혀주시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더욱 위를 받드는 의례(儀禮)를 드리겠나이다.

 

 

동문선 제41권

●백제가 위주(魏主)에게 고구려를 토벌하기를 청한 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 : 무명씨

운운. 신은 동쪽 변방에 나라를 세웠는데 시랑(고구려를 말한 것)이 길을 가로 막고 있사오니,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입었사오나, 번직(藩職)을 받들 길이 없사옵기로, 멀리 대궐을 바라오며 망극한 정을 쏟을 뿐이옵니다. 서늘 바람이 살며시 이는 이때에 황제폐하께서 천휴(天休 하늘이 준 아름다움)에 협화(協和)하시온지, 우러르는 정회를 이길 수 없사옵니다. 삼가 사서(私署)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한바다[波阻]에 배를 띄우고, 아득한 물가[玄津]에서 길을 찾으며, 운명을 자연에 맡기고 만분의 일이나마 정성을 아뢰게 하오니, 바라옵건대, 신명이 감동하고 황령(皇靈)이 보호하사, 능히 조정에 도달하여 신의 뜻이 통하게 되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을지라도 영원히 여한이 없겠사옵니다. 또한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扶餘)에서 나왔사옵기로 선조 때부터 옛정을 존중히 여겼사온데, 그 조상 교(釗)가 이웃의 의(義)를 가볍게 버려버리고, 친히 군사를 인솔하여 신의 국경을 침범하므로, 신의 조상 수(須)가 군사를 이끌고 번개같이 나가. 사기(事機)에 응하여 들이쳐 시석(矢石)이 잠깐 어울리자 교의 머리를 베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침범하지 못하더니, 풍(馮)씨의 운수가 종말을 고함으로부터 남은 놈들이 도피해 들어가서 떼가 차츰 성해지자 드디어 다시 침략하여 원망이 맺히고 전화(戰禍)가 연속되어 30여 년을 지내고 보니, 재정은 고갈되고 힘도 다 빠져서 갈수록 군색하옵니다. 만약 천자(天慈)께오서 가엾게 여기시고, 멀리 끝없이 미치시와 빨리 한 장수를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면, 마땅히 신의 딸을 바치어 후궁에서 기추(箕箒)를 잡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외구(外廐 말먹이는 외양간)에서 말을 먹이게 할 것이오며, 한 자의 땅과 한 사람의 백성도 감히 제 것으로 여기지 않겠사옵니다.

지금 연(璉)이 죄가 있어, 나라는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강족(彊族)들은 살륙만을 일삼아 죄가 가득 차고 악이 쌓여서,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으니 이야말로 멸망할 때이오라, 손을 써서 쳐부술 기회가 왔다고 봅니다. 더구나 마족(馬族)의 군사는 조축(鳥畜)의 그리움이 있고, 낙랑(樂浪)의 여러 고을은 수구(首丘)의 마음을 품었사오니, 천위(天威)를 한 번 떨치시면 토벌은 있을망정 싸움은 없을 것이오며, 신도 비록 불민하오나 있는 힘을 다하여 마땅히 군사를 통솔하고, 그 바람을 따라 향응할 생각이옵니다. 또 고구려는 불의(不義)와 역사(逆詐)가 하나 둘만이 아니여서, 밖으로 외효(隈囂)ㆍ번비(藩卑)의 언사를 사모하는 척하며, 안으로 재앙과 저돌(猪突)의 행동을 품고, 혹 남으로 유(劉)씨와 통하며 혹 북으로 연연(蠕蠕)과 약속하고, 함께 서로 순치(脣齒)가 되어 왕정(王政)을 능멸하길 꾀하고 있사옵니다. 옛날 당요(唐堯)는 지극한 성인이오나 자기 아들을 단수(丹水)로 벌을 내렸고,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이라 칭하되, 도리(塗詈)를 놓아주지 아니하였으니, 한 방울이라도 새는 물은 마땅히 일찍 막아야 하오니, 지금 만약 탈취하지 아니하면 장차 후회를 끼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에 신의 나라 서쪽 경계인 소석산(小石山) 북국(北國) 바다 가운데에서 시체 10여 구와 아울러 의복ㆍ기구(器具)ㆍ말ㆍ안장 등이 발견되었기로, 조사해 본즉 고구려의 물건은 아니었사오며, 뒤에 듣자오니 바로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에 오는데 그 놈들이 길을 가로막고 바다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직접 당한 것은 아니오나 분함을 깊이 품고 있사옵니다. 옛날에 송(宋)이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 장왕(楚莊王)이 발 벗고 나섰으며, 매[鷂]가 챘다 놓친 비들기를 신릉군(信陵君)은 먹지 아니하였사오니,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융성함이 다함이 없으니 무릇 구구한 편비(偏鄙)로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옵거늘, 하물며 폐하께서는 기운이 천지와 합하고 세력이 산하를 기울일 수 있사온데, 어찌 조그마한 이이가 상국의 통로를 막고 있게 하렵니까. 그때에 주워서 보관해 두었던 안장을 올리어 실험해 보시도록 하옵소서.

 

동문선 제42권

●걸사표(乞辭表) : 김부식(金富軾 1071-1151)

배신(陪臣) 김부식 등은 아뢰옵니다. 고명(高明)이 위에 계시어 사해(四海)를 빠짐없이 덮어 주시기로, 속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한 말씀을 표하여 아뢰오나 우러러 위덕(威德)을 모독함이 중하오니, 깊이 송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 등은 사명을 받들고 와서 빙문하는 예를 닦으므로 고국을 떠난 지는 이미 6개월이 지났사옵고 경관(京館)에 머물기도 거의 백 일이 되었습니다. 이미 특이한 은혜에 후히 젖었사옵고 또 즐거운 곳에서 실컷 노니므로 육소(蓼蕭)의 지는 이슬에 다만 함초롬히 젖어드는 것을 깨달을 뿐이오며, 가을물이 바다를 바라보듯 넓어 가를 모르겠사와 오래오래 느끼고 그립거늘, 어찌 차마 하직을 하겠사옵니까. 그러하오나 사신의 임무가 이미 끝났으므로 사리로 보아 마땅히 돌아가 보고를 해야 하오며, 근왕(勤王)의 기간이 한정이 있사와 형세가 편안히 있을 수 없사옵기로, 드디어 옷깃을 여미고 우러러 아뢰오니 엷은 얼음장을 밟는 것처럼 두려움에 쌓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도(道)를 체받아 용서를 잘하시고 하늘을 법 삼아 아랫사람의 소원을 반드시 이뤄 주시와 신이 비록 성조(聖朝)에 연연하고 있으나 신이 왕사(王事)를 다 못 마쳐서 그렇다고 여기시고, 빛나는 명령으로 윤허를 내리시와 신 등으로 하여금 이달 정원 하순에 사관을 떠나서 3월에 명주(明州)에 당도하고, 4월에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오면, 북해(北海)의 놀라운 파도가 잠잠하여 길이 성덕(聖德)을 의지하게 될 것이오며, 은지(恩旨)를 전달하여 속히 제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겠사옵니다. 구구한 정성이 청원 얻기를 기대하옵니다.

 

 

동문선 제44권

●진 용비어천가 전(進龍飛御天歌箋) : 이계전(李季甸1404-1459)

신 등은 아뢰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과 인(仁)을 쌓아서 큰 운을 여셨으니, 공을 칭송하고 실적을 기록하여 마땅히 노래하여야 하옵기로, 이에 무사(蕪詞)를 찬술하여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더욱 길어지옵나니, 주(周) 나라가 면과(緜瓜)를 읊은 것은 그 소생의 근본을 미룬 것이옵고, 은(殷) 나라가 현조(玄鳥)를 노래한 것은 그 유래를 서술한 것이오니, 이로써도 왕자(王者)의 작흥(作興)에 있어서는 반드시 선세(先世)의 공적을 힘입은 것임을 알 수 있사옵니다.

우리 본조(本朝)는 사공(司空)이 비로소 신라 시대에 현달하여 대대로 계승하였사옵고, 목왕(穆王)이 처음으로 북방에서 흥기하여 큰 운명이 이미 징조를 보였사오며, 익조(翼祖)ㆍ탁조(度祖)께서 연이어 경사를 기르셨고, 성스러운 환조(桓祖)에 이르러 발상(發詳)되었사온데, 은혜와 신의가 본시 흡족하여 귀부(歸附)하는 사람이 한두 대만이 아니옵고, 상서와 부명(符命)이 자주 나타났으며 하늘의 돌보심이 거의 수백 년이었사옵니다.

태조 강헌대왕께옵서 상성(上聖)의 자품을 지니시고 천년의 운수에 응하시어, 신과(神戈)를 휘둘러 위무(威武)를 떨쳐 오랑캐놈들을 쓸어버리시고, 보명(寶命 직위를 이름)을 받아 관(寬)ㆍ인(仁)을 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태종(太宗) 공정대왕(恭靖大王)께옵서 영명(英明)은 옛 임금을 만나시고, 용지(勇智)는 짝이 없으시며, 기선(幾先)에 밝아 국가를 세워 공적은 만세에 높으시고 화란을 극복하고 사직(社稷)을 안정하여 덕은 백왕(百王)의 으뜸이 되셨으니, 거룩하신 여러 대의 큰 업적은 전성(前聖)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짝할 수 있사오며, 노래와 시에 올려 현재와 장래에 명시하지 않을 수 있사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옵서 오직 전일하시고 정밀하시며, 잘 계승하시고 기술하시며, 도는 흡족하고 정사는 다스려져 흐뭇한 덕택이 골고루 젖어들고, 예(禮)는 갖추고 악(樂)은 화하여 찬란한 문물(文物)이 극치를 이루었사오니, 오직 시가(詩歌)를 짓는 것은 이같이 융성하고 태평한 때에 속하는 것이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재주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소임을 맡았사오며, 삼가 민속의 칭송을 채집하여 감히 조묘(朝廟)의 악가(樂歌)와 비교할 양으로, 드디어 목조(穆祖)의 터전을 잡으신 시대로부터 태종의 잠저(潛邸)하신 날까지에, 무릇 신기하고 위대한 사적을 빠짐없이 뒤져내고, 또한 왕업(王業)의 어려운 고비를 갖추 진술하여, 옛일에 증거하고 국어로 노래를 짓고, 따라서 시를 붙여 그 말을 해석하게 하였사오니, 천지와 일월을 그려내는 데는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는 못했사오나, 금석(金石)에 새기고 관(管)ㆍ현(絃)에 올리오면 조금이나마 공렬(功烈)을 선양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시 살펴 받아들이시어 마침내 발행(發行)을 허가하시오면,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시골에도 쓰고 나라에도 써서 영원한 세대에 이르도록 잊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동문선 제48권

●왕사 걸 하산 장(王師乞下山狀) : 이규보

직함을 갖추어 아룁니다.

거룩한 칭호와 크나큰 이름을 어찌 오래도록 누릴 수 있겠습니까. 쇠잔한 나이와 저문 날에 진실로 물러가 쉬는 것이 합당하기에 감히 절박한 정성을 포고하여, 우러러 총청(聰聽)을 구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모(某)는 심령이 어둡고 용렬하며, 계행(戒行)이 서투르고 생소한데, 운명은 시기와 함께 와서 진작 선문(禪門)의 높은 계급에 올랐고, 식견과 기지(機智)가 모두 천박하여 조해(祖海)의 깊은 근원을 궁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날 성조(聖祖 조사(祖師)의 깊은 도)께서 중용하시어 그릇되게 승류(僧流)의 말품(末品)을 채택해서 특별히 소승의 예를 높이시고 명령하여 신의 진로를 버리게 하셨으니, 이와 같이 임금의 존엄을 낮추신 것은, 대개 수명을 많이 연장하시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늙은 중놈의 무능으로써 선로(仙路 임금의 승하를 말한 것)의 기한을 재촉하시게 하였으니, 낯이 열 겹이나 두터움과 동시에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한데, 그 현저한 징벌을 받지 아니한 것만도 큰 다행이거늘 또 능히 스스로 인책하고 물러가지도 못했습니다.

뜻밖에 성상폐하께서 잘 계승하는 효성이 독실하시어 전 조정의 구물(舊物)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외로운 발자취를 포용하여 오래 영화스러운 길에 붙어 있게 하셨으나 헛되이 풍부한 녹봉만 받아먹고 아무런 이익도 보태드림이 없으니, 부끄러움을 알고도 물러나지 않으므로 비방을 입은 것도 또한 많았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이미 노쇠한 지경에 임박하여 질병도 또한 약점을 타고 찾아드니, 나아가도 능히 대궐에 따르는 의식을 갖출 수 없고, 물러가도 절간에 전전하기 어려울 듯하기에 한적한 곳을 가려서 여생을 마칠까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폐하께서는 큰 도량을 여시어 이 애원을 양찰해주시고 간청을 허락하시는 말씀을 내리시어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면, 운림(雲林) 속에 편히 누워 하루의 목숨을 연장하며 조석으로 향화(香火)를 올려 감히 만년수를 축원하는 일에 게을리하오리까.

 

 

동문선 제49권

●면잠(面箴) : 이규보(李奎報)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으면 네[面]가 반드시 먼저 부끄러워 한다. 낯빛은 붉어 주홍같고 땀[汗]은 떨어지기를 물 쏟아지듯 한다. 사람을 대하면 머리를 들 수가 없고 살며시 숙이고 피하게 된다. 자기 마음에서 한 것으로 너[面]에게 옮게 된다. 모든 군자(君子)는 의(義)를 행하고 위의[儀 : 엄숙한 태도]를 가져야 된다. 능히 마음이 활발하면 너[面]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리라.

●요잠(腰箴) : 이규보(李奎報)

항상 뻣뻣하여 굽힐 줄을 모르다가는 남에게 성냄을 당하게 된다. 능히 굽히기를, 경(磬) 쇠 덩어리 같게 하여야 몸에 욕이 미치지 아니하느니라. 대개 사람의 화복(禍福)이란 너[腰]의 굽힘과 뻣뻣한 데에 매인 것이다.

●사잠(思箴) : 이규보(李奎報)

내가 갑자기 일을 하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뉘우친다. 생각한 뒤에 일을 하였다면 어찌 화(禍)가 따라 오겠는가. 내가 갑자기 말을 하고는 더 한번 생각하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 생각한 뒤에 말을 하였더라면 어찌 욕됨이 따라 붙겠는가. 생각하여 경솔히 하지 말라. 경솔히 하면 어긋나는 것이 많으니라. 생각하기를 너무나 깊게 하지는 말라. 깊게 하면 의심이 많게 된다. 참작하고 절충하여 세 번쯤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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