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동국이상국후집 서
○동국이상국후집 서
맏아들 함(涵)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대인(大人)께서 평생에 저술하신 글이 퍽 많았으나 본래부터 글을 모아 두지 않으셨고, 또 타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거나 혹은 불에 태워 버리신 것들도 있어서 전집(前集)에 ‘원고를 태운다’는 시가 있다. 현존하는 것은 오직 열에 두셋 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편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대저 대인께서 몸소 찾으셨던 유자(儒者)의 집이나 사찰, 또는 평소에 교유하셨던 사대부(士大夫)들을 두루 찾아 수집한 약간의 시문(詩文)을 41권으로 나누어 전집(前集)으로 만들고 시랑(侍郞) 이수(李需)가 서(序)를 지었습니다.
전집이 이루어진 후 다시 빠졌던 것과 최근에 지으신 고율시(古律詩) 8백 7수와 잡문(雜文) 50편으로 후집(後集) 12권을 만들었습니다.
아, 혹시 불행하게 세상에 전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집안의 자손들이 대대로 전할 가보는 됩니다.
대인께서 처음 과거에 급제하시고 일찍이 네댓 명의 동년(同年 동방 급제를 말한다)들과 함께 통제원(通濟院)에 노시면서 말안장을 나란히 하고 서로 화창하셨는데, 그때에 읊으신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절름대는 당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은 저물고 / 蹇驢影裏碧山晩
외기러기 소리에 단풍 지는 가을일레 / 斷鴈聲中紅樹秋
사운(四韻)에서 세 구는 잊어 버렸다.
듣건대, 이 시구가 송나라로 전해지자 그곳의 재상이 크게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시는 대인께서 젊은 시절에 지으신 것이요, 또 겨우 한 시구에 불과하건만 이렇듯 높이 평가되었는데, 하물며 그들이 전집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높이 평했겠습니까?
또 ‘금 학사(琴學士)를 대신하여 지은 양관표(讓官表)’에서는,
“전에 두 학사를 겸임하였을 적에도 분수에 넘친다고 비난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오늘에는 세 대부(大夫)를 겸했으니, 장차 어진이를 어디에 두려고 하십니까?”
하였는데, 이 글도 사람들에게 애송되었으나 여기 전부를 수록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이렇게 볼 때에 잃어버리고 빠뜨림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된 주옥 같은 글들이 이것들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축년 12월 지홍주사부사 겸 권농사 관구학사 장사랑 상식봉어(知洪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事將仕郞尙食奉御) 함(涵)은 삼가 서합니다.
▣동국이상국후집 1권
○취한 서시(西施) 같은 작약(芍藥)
어여쁘다 무르익은 교태로 온갖 아양 떠는 모습 / 好箇嬌饒百媚姿
사람들은 취기 어린 서시라 하네 / 人言此是醉西施
이슬에 쓰러진 꽃봉오리 바람 타고 치솟는 품이 / 露葩欹倒風擡擧
오궁의 취한 서시 춤을 추는 듯 / 恰似吳宮起舞時
○강남(江南)에서 옛 친구를 만나
가는 곳마다 새 벗을 만나기는 쉬우나 / 到處得逢新進易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나기는 어렵네 / 異鄕相見故人難
헤어진 후 백발이 얼마나 성성했는가 / 別來多少添華皓
서로 흰 수염을 자세히 들여다보네 / 各將霜鬚仔細看
○농부를 대신하여 2수
비 맞으며 논바닥에 엎드려 김매니 / 帶雨鋤禾伏畝中
흙투성이 험한 꼴이 어찌 사람 모습이랴만 / 形容醜黑豈人容
왕손 공자들아 나를 멸시 말라 / 王孫公子休輕侮
그대들의 부귀영화 농부로부터 나오나니 / 富貴豪奢出自儂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 新穀靑靑猶在畝
아전들 벌써부터 조세 거둔다고 성화네 / 縣胥官吏已徵租
힘써 농사지어 부국케함 우리들 농부거늘 / 力耕富國關吾輩
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레 침탈하는가 / 何苦相侵剝及膚
○시를 논하다
시 짓기가 무엇보다 어려우니 / 作詩尤所難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 語意得雙美
함축된 뜻이 참으로 깊어야 / 含蓄意苟深
음미할수록 더욱 맛이 참되네 / 咀嚼味愈粹
뜻은 있으나 말이 원숙하지 못하면 / 意立語不圓
난삽하여 바른 뜻을 펴지 못한다오 / 澁莫行其意
이 중에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 就中所可後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세 / 雕刻華艶耳
아름다운 문장을 굳이 배제하랴 / 華艶豈必排
이것 또한 많은 정신 써야 한다네 / 頗亦費精思
꽃만을 잡고 열매를 버리니 / 攬華遺其實
이 때문에 시의 본지 잃게 되느니 / 所以失詩旨
근래의 시 짓는 무리들은 / 邇來作者輩
풍아의 깊은 뜻을 저버리고 / 不思風雅義
외식으로 단청만을 빌려 / 外飾假丹靑
한때의 기호에 맞추고자 하네 / 求中一時嗜
뜻은 본래 자연에서 나오는 것 / 意本得於天
쉽게 이뤄지기 어렵네 / 難可率爾致
스스로 어려운 줄 알고는 / 自揣得之難
인하여 겉만을 꾸며 / 因之事綺靡
이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시켜 / 以此眩諸人
깊은 뜻이 없음을 엄폐하려 하네 / 欲掩意所匱
이러한 풍속이 점점 이루어져 / 此俗寖已成
사문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 斯文垂墮地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다시 나오지 않으니 / 李杜不復生
누구와 함께 진위를 분별하리 / 誰與辨眞僞
나는 허물어진 터를 다시 쌓으려 하는데 / 我欲築頹基
누구 하나 조그만 힘도 도와주지 않네 / 無人助一簣
시경 삼백 편을 왼들 / 誦詩三百篇
어느 곳에 풍자하여 보익(補益)하리 / 何處補諷刺
나만이 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 自行亦云可
남들은 반드시 비웃으리 / 孤唱人必戲
○미인을 이별하는 시를 대작하다
떠나는 나에게 돌아오는 날 묻지도 못하고 / 不問儂歸幾日廻
부질없이 옷소매를 잡으며 서성이네 / 謾牽衫袖重徘徊
천 줄기 구슬 같은 눈물을 쏟지 말았다가 / 千行玉淚休多費
빗방울 되어 때때로 꿈속에 찾아주오 / 作雨時時入夢來
○술자리에서 어린 기생에게 보이다
열다섯 어린 소녀의 피어나는 그 얼굴 / 十五女兒顔稍姸
불러도 모르는 체 곁눈질도 하지 않네 / 呼之使前佯不睞
백발의 늙은이 무엇을 하랴 / 白首衰翁何所爲
굳이 수줍어하는 교태 부리지 말렸다 / 不須多作嬌羞態
○술을 덜 마시다
주정꾼이라고 나무라는 소리 듣기 싫어 / 厭聽人間誚酒狂
요사이 덜 마시니 탈은 없지만 / 邇來省飮亦無傷
다만 붓을 잡고 시를 읊을 때에는 / 唯於放筆高吟處
날개가 꺾어진 듯 높이 날지 못하겠네 / 一翮微摧莫欻張
○시벽(詩癖)
스스로 점점 고질화된 줄은 알았지만 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시를 지어 자탄한 것이다.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으며 / 年已涉縱心
지위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 位亦登台司
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 / 始可放雕篆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 胡爲不能辭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 朝吟類蜻蛚
밤에는 솔개처럼 읊노라 / 暮嘯如鳶鴟
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詩魔)가 있어 / 無奈有魔者
아침 저녁으로 남몰래 따르고는 / 夙夜潛相隨
한번 몸에 붙자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 一着不暫捨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 使我至於斯
나날이 심간을 깎아서 / 日日剝心肝
몇 편의 시를 짜내니 / 汁出幾篇詩
기름기와 진액이 / 滋膏與脂液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네 / 不復留膚肌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 骨立苦吟哦
내 이 모습 참으로 우습구나 / 此狀良可嗤
남을 놀라게 할 문장으로 / 亦無驚人語
천년 뒤에 물려 줄 만한 시 못 지었으니 / 足爲千載貽
스스로 손뼉치며 크게 웃다가 / 撫掌自大笑
문득 웃음을 멈추고는 다시 읊는다 / 笑罷復吟之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 生死必由是
내 이 병 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 此病醫難醫
○아들 함(涵)이 나의 시문을 편집하였기에, 그 위에 쓰다
심간을 기울여 일가를 이루니 / 雕刻心肝作一家
그 노력 한유(韓愈)나 두보(杜甫)보다 더하리 / 於韓於杜可堪過
만약 백세 후에 나의 시가 성행한다 하여도 / 假敎百世行之盛
죽은 다음의 뜬 이름이야 내게 무엇하리 / 身後浮名奈我何
초목과 함께 시드는 우리이니 / 草木同枯是我徒
하찮은 시권이야 없느니만 못하리라 / 區區詩卷不如無
아득한 천년 후에 그 누가 알아주리 / 茫然千載能知不
이씨 성 가진 사람이 동해 한 구석에 살았음을 / 姓李人生東海隅
○다시 이가 아파서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며 / 人以食而生
먹을 때에는 반드시 이로 씹는데 / 食必以其齒
이가 몹시 아파 먹지를 못하니 / 齒痛莫加飧
하늘이 나를 죽이려는가보네 / 天殆使我死
강하면 꺾이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 剛折亦云經
늙고 이 빠지니 더욱 부끄럽네 / 老豁更堪恥
아직도 몇 개가 남아 있지만 / 餘有幾箇存
뿌리가 흔들려서 붙을 데 없더니 / 浮動根無寄
이제 다시 쑤시고 아파서 / 今者又復痛
두통까지 일어나네 / 延及頭亦爾
찬물도 마실 수 없고 / 水寒不可飮
뜨거운 물도 입에 댈 수 없네 / 湯亦不可試
죽도 식기를 기다려 / 糜粥候冷熱
겨우 핥아 먹노라 / 然後僅能舐
하물며 고기를 씹을 수 있으랴 / 矧可齕肉爲
고기가 있어도 한갓 도마에 있을 뿐이네 / 有肉空在杫
이 모두가 늙은 때문이니 / 是實老所然
죽어야 비로소 끝나리 / 無身始迺已
○늙은 기생
고운 얼굴 어느덧 꽃 떨어진 가지로 변했으니 / 紅顔換作落花枝
그 누가 아리땁던 너인 줄 알아보랴 / 誰見嬌饒十五時
가무는 아직도 예와 같이 아름다우니 / 歌舞餘姸猶似舊
재기가 쇠하지 않음 사랑할 만하네 / 可憐才技未全衰
▣동국이상국후집 2권
○병중에 짓다
수척한 몸 뼈 솟아 겨우 가죽만 남았고 / 殘骸骨立僅存皮
병 기운 젖어드니 사지가 나른하네 / 戾氣侵淫霧四支
꿈속 같은 정신은 침접보다 파리하고 / 夢裏精神疲枕蝶
병들어 할딱거리는 숨은 상구와도 같구나 / 病中喘息劣床龜
점점 술잔 적게 드니 처자들도 의아하고 / 妻兒漸怪含盃少
사직이 늦었다고 조야에선 흉보리라 / 朝野應譏解綬遲
한적하게 지낼 계책 생각해 보았지만 / 不是不思閑適計
사퇴하기 어려운 형세 그 누가 알아주랴 / 勢難辭去世誰知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며
몸이 많이 말랐는지 알 수 없어도 / 未知形大瘦
남에게 부끄럽지는 않았는데 / 猶不愧於人
오늘 거울 속에 비추어 보니 / 今日鏡中炤
내 자신이 보기가 부끄럽구나 / 飜慙見自身
○병중에 다섯 절구(絶句)를 짓다
옛날엔 걸음 빨라 날 따르는 이 적었고 / 當年步捷鮮人隨
말솜씨와 시 짓는 것도 모두가 빠르다 하였네 / 語與詩然世共知
옛날에는 친구들 사이에 나는 삼첩(三捷)으로 알려졌다. 걸음이 잰 것이 1첩, 말 빠른 것이 2첩, 시가 빠른 것이 3첩이었다.
평소에는 함부로 삼첩이라 뽐냈는데 / 平日謾誇三捷在
오직 병만은 낫기가 더디구나 / 獨於沉瘵得痊遲
가쁜 숨은 끊어지려는 실 같지만 / 餘喘雖微欲絶絲
명이 길고 짧은 것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 / 壽殤脩短在天爲
세인들은 살기만을 탐하는 뜻을 지녔지만 / 世人只抱貪生志
늙어서 죽는 것도 어려서 죽는 거와 다를 바 없는 것을 / 老死猶同夭死時
목이 타면 술을 부어 입술은 늘 젖어 있고 / 酒澆焦涸吻長濡
시가 풍류 끌어들여 생각은 마르지 않는다 / 詩引風流思不枯
오직 파리한 몸 살 오르지 않는데 / 唯是癯身肥不得
몸이 있어 걱정이라면 없는 것만 못한 거지 / 患緣身有不如無
천만 가지 일 생각에 잠시 잠 못 이루었지 / 算量千事暫妨眠
진리를 찾으려고 좌선(坐禪)함은 아니다 / 不是觀空衲子禪
한가한 취미 더해진 게 기쁘기만 하노니 / 唯喜得添閑氣味
퇴임한 늙은이에게 공문서가 다시 오랴 / 簿書那到退翁前
가벼운 병 가지고 어찌 크게 근심하랴 / 豈爲微疴特地憂
절름거리는 걸음이 나가 노는 것만 방해한다 / 步欹唯礙出門遊
문 나선다고 마음이 트일 것도 아니지만 / 出門未必心開豁
그래도 푸른 바다에 떠나는 배 보고 싶다 / 猶望滄溟去去舟
○이불 속에서 웃다
인간에 우스운 일 자주 일어나지만 / 人間可笑事頻生
낮에야 생각이 많아 웃을 겨를도 없네 / 晝日情多笑未遑
밤중에 이불 속에서 슬며시 웃으니 / 半夜衾中潛自笑
손뼉 치고 큰 입으로 웃는 것보다 더 큰 웃음이네 / 殷於手拍口兼張
이불 속에서 웃는 것 한 가지 일만은 아니다 / 衾中所笑雖非一
제일 먼저 소리내어 웃는 일 무엇인가 / 第一呵呵孰最先
글재주 졸렬해서 평시에는 꾸물대던 사람이 / 文拙平時遲澁者
귀인 앞에서 붓을 잡고 날렵한 척하는 걸세 / 揮毫示捷貴人前
웃는 중에 둘째는 그 무엇인가 / 笑中第二又誰是
관리로 탐욕하면서도 깊이 숨기는 자일세 / 爲吏稍貪深自秘
뇌물 하나 집에 들여도 남이 모두 아는데 / 一物入門人盡知
사람들에겐 물보다 맑다고 떠들어대네 / 對人好說淸於水
웃는 중에 셋째는 잘 나지도 못한 여인네가 / 笑中第三女不颺
거울 속에서 스스로 보면서도 자기를 모르고 / 鏡裏自看難自識
어떤 사람이 얼굴이 곱다고 추어주면 / 有人報道你顔姝
정말로 고운 줄 알고 온갖 교태 다 짓는 걸세 / 妄擬正姸多作色
웃는 중에 넷째는 바로 내 자신인데 / 笑中第四是予身
세상살이 잘못 없음은 순전히 요행 덕택일세 / 涉世無差僥倖耳
곧고 모나고 어리석음 누구나 알건만 / 直方迂闊人皆知
스스로 원만하여 이 지위에 올랐다 하는 걸세 / 自謂能圓登此位
웃는 중에 다섯째는 중들인데 / 笑中第五是浮屠
미인을 만나면 마음은 벌써 끌려가도 / 邂逅佳人心已寄
하늘 나는 기러기에 눈 돌리고 못 본 척하니 / 目送飛鴻佯不看
짐짓 불꺼진 재 같은 마음을 무심이라 하는 걸세 / 故爲灰冷無心士
▣동국이상국후집 3권
○백주시(白酒詩) 1수 병서
내 옛날 벼슬 않고 떠돌던 때는 / 我昔浪遊時
마시는 것이 오직 막걸리여서 / 所飮惟賢耳
어쩌다 맑은 술을 만나면 / 時或値聖者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無奈易昏醉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을 적엔 / 及涉地位高
막걸리 마시려도 있을 리 없었다 / 飮濁無是理
이젠 늙어 물러난 몸 되니 / 今者作退翁
봉급 적어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지네 / 俸少家屢匱
좋은 술 늘 있지 않아 / 綠醑斷復連
막걸리를 먹는 일이 자주 있는데 / 篘飮亦多矣
체하여 가슴속이 막히는 듯 / 滯在胷隔間
독우가 나쁜 것을 이제 알겠네 / 始覺督郵鄙
막걸리에 묘리가 있다고 하나 / 濁醪稱有妙
두공의 말한 뜻을 아직 몰랐는데 / 未會杜公意
이제야 알리로다 사람의 성품이란 / 迺知人之性
습관과 함께 젖어든다는 것을 / 與習自漸漬
음식이란 처지에 따르는 거라 / 飮食地使然
즐기고 안 즐기고가 어디 있으랴 / 何有嗜不嗜
이래서 살림하는 부인에게 일러두노니 / 爲報中饋人
돈 있어도 부비(浮費)를 헤프게 말아 / 有入愼輕費
독 속에 있는 술로 하여금 / 無使樽中酒
맑기가 물 같게는 하지 말라 / 不作澄淸水
○집의 샘이 말라 술 또한 잇지 못하기에 이것을 글로 읊다
샘은 가뭄으로 이제 막 말랐고 / 泉因天旱今方涸
술은 가난 때문에 갑자기 말라 버렸네 / 酒爲家貧忽自枯
빚은 술 없으니 시름하는 마음 달랠 길 없고 / 釀斷莫供愁肺仰
길어 올 길 머니 마른 입술 적시기 어려워라 / 汲遙難趁燥脣須
깨어 있어도 굴원처럼 맑은 자는 아니거니 / 醒非楚客淸然者
소갈증(消渴症)이 어찌 문원만의 병이랴 / 渴豈文園病也夫
이몸을 구운들 무슨 물건 될 것 같아 / 炮却此身爲底物
어쩌자고 두 가지 액이 한꺼번에 갖추었나 / 如何兩厄一時俱
▣동국이상국후집 4권
○자신을 조롱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데 두서너 잔쯤의 술 / 度日兩三盃許酒
한 해를 지나는 데 일백여 수의 시 / 涉年一百首餘詩
쓸쓸한 백발의 늙은 거사를 / 蕭然白髮老居士
누가 재상직을 지냈다고 하겠는가 / 誰謂曾經鼎鼐司
한가하게 칠십 년 전의 일들 생각해 보니 / 閑思七十年前事
괴목 굴 앞에서의 꿈 깬 때다 / 槐穴前頭夢覺時
▣동국이상국후집 5권
○또 희롱하여 짓다
불이 기생집을 다 태워도 / 火能殘妓家
어찌하여 꺼줄 사람 없었나 / 胡奈無人救
내 만일 젊은 시절이라면 / 我若少年時
머리 타는 것도 겁내지 않았으리 / 焦頭猶不懼
▣동국이상국후집 6권
○여러 자식에게 부탁하다
집 가난하여 나누어 줄 물건은 없고 / 家貧無物得支分
대그릇과 표주박 쓰다 남은 질그릇뿐이란다 / 唯是簟瓢老瓦盆
광주리에 가득한 금옥은 씀씀이에 따라 없어지나니 / 金玉滿籯隨手散
자손에게 청백한 행실 당부함만 못하리라 / 不如淸白付兒孫
○기생에게 희롱으로 지어 주다
서생이 여색 좋아하는 데 고질이 되어 / 書生於色眞膏肓
볼 때마다 눈이 자꾸만 쏠리누나 / 每一見之目頻役
지금은 이미 늙었기에 못 본 체는 하지만 / 今因身老佯不看
전보다 흥겨움이 덜해서 그런 것은 아니네 / 非是風情減平昔
한 잔 마시고 얼근해지면 흥취가 다시 솟아나서 / 一盃醺醉情復生
부끄럼도 아랑곳없이 불러서 자리를 재촉하네 / 無復慙羞呼促席
너는 응당 추한 늙은이라고 나를 욕하겠지만 / 汝應憎我老醜顔
너 역시 금석이 아님을 내가 아노라 / 我亦知渠匪金石
○샘물이 마르고 술이 떨어지다
집 남쪽의 샘이 벌써 마르고 / 舍南泉已枯
집안에는 술이 또한 떨어졌네 / 舍裏酒復斷
내 목구멍은 타서 연기가 날 지경이니 / 我殆喉生煙
이제부터는 갈증만 나겠구나 / 從茲成渴漢
○혼자 술 마시면서 자신을 비웃다
좋은 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 聞有芳醪耳輒傾
한 잔 들이키니 눈이 번쩍 뜨이누나 / 一盃方到眼還明
혼자서 술 마시는 걸 일로 삼고 / 自將樽酒供聞見
나머지 일은 본체만체 / 餘事來干故聵盲
▣동국이상국후집 7권
○술이 없어서
집이 가난하여 술 빚기 드무니 / 家貧醞酒遲
창자가 말라도 마시기 어렵구나 / 肺渴含盃少
승상이 어디로 도망쳐 달아났나 / 丞相何雷逃
창문 구석에서 말없이 웃기만 하네 / 隈窓但黙笑
○오랫동안 병들어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
만연된 내 신병 너무도 극심하다 / 纏綿疾云劇
까물까물 죽어가며 목숨만 붙어있네 / 幾頓恃微脉
이 또한 죽을 병은 아니나 / 此亦非死病
죽은들 또한 무엇이 아까우랴 / 死我天何惜
일흔세 살 된 이 늙은이 / 七十有三翁
저승길 막히지 아니했네 / 昇天路非隔
어느 해 상제께 읍하며 돌아갈고 / 何年長揖歸
상제께 물어봐도 대답이 없네 / 問天天自黙
헤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 步算頗可知
나의 셈은 때로 잘못이 있구나 / 吾算有時忒
○추위가 괴로워서
일천여 권의 책을 읽어 / 讀書千卷强
지위가 황각에 올랐네 / 位至登黃閣
귀하기는 하였지만 부하지는 못했으니 / 能貴不能富
분복이 왜 그리 안 고른가 / 賦分何雜駁
이것 역시 사물에 오활하고 / 是亦與事迂
생활의 영위에 담백해서겠지 / 營生信淡薄
다른 집들은 손 덥힐 수 있는데 / 他門手可灸
우리 집은 추위가 뼈를 긁어내네 / 我屋冷如剝
추위 막는 것도 마련하지 못했거니 / 禦寒猶未備
나머지 일이야 짐작할 수 있지 / 餘事亦可酌
죽어가는 이 목숨 얼마나 남았을까 / 殘生能幾存
한 달도 제대로 즐겨보지 못했네 / 一月鮮歡樂
▣동국이상국후집 8권
○자신의 시벽(詩癖)을 다시 서글퍼하다
내가 이전에도 시를 지을 적마다 시벽을 서글퍼했으나 끝내 시를 그만두지 못하므로 다시 서글퍼한다.
병으로 누운 지 몇달 만에 / 臥病數四月
지은 시가 몇 편이던가 / 作詩幾許篇
앓는 소리 읊조리는 소리가 / 呻吟與謳吟
한데 뒤섞여 그칠 줄 몰랐네 / 相雜仍相連
이 버릇도 한 가지 병이라 / 比癖亦一病
약석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 難以藥石痊
스스로 한 것 같으나 그렇지도 않고 / 自召非自召
우연한 것 같으나 우연도 아닌 듯하네 / 偶然非偶然
이불 쓰고 가만히 있으려 해도 / 掩被欲黙己
나도 몰래 입가에 맴돌곤 하니 / 嘯忽來吻邊
하늘의 조화인지 귀신의 장난인지 / 天耶必鬼耶
마치 무슨 빌미에 지핀 것만 같구려 / 似有崇所牽
취미를 딴 데 붙여 보려 했지만 / 或欲移他事
마음이 말을 들어 주지 않네 / 驅之心不前
아 끝내 고칠 수 없으니 / 嗟嗟竟莫理
끝내 이대로 죽을 수밖에 / 終以此死焉
○어떤 사인(士人)의 딸이 밥을 빌러 왔기에 밥을 주고 나서 시를 짓다
네 비록 사족의 집에 태어났으나 / 汝雖生士族
밥을 비니 이미 비천하게 되었네 / 丐食已云卑
더 이상 뭐가 부끄럽다고 / 更亦懷何恥
떨어진 두건 뒤집어 썼을까 / 猶蒙破羃䍦
○또 읊다
눈이 어두워 글자를 쓸 수 없으니 / 目暗不成藁
이젠 졸작도 그만두어야 하는데 / 宜停此鄙作
입가엔 읊조리는 소리 예와 같으니 / 尙吟脣吻間
이를 두고 진짜 시벽이라 하나 보다 / 是謂眞詩癖
○우두커니 앉아 자신을 묘사하다
하얀 수염에 왜소한 늙은이가 / 霜鬚矮小翁
언제나 두건만 비스듬이 쓰고 / 欹着巾一事
말없이 앉아 눈만 말똥거리니 / 兀坐瞪無言
남들이 모두 괴물로 취급하네 / 人以怪物視
그러나 이 보잘것없고 조그만 가운데도 / 不知蕞爾中
하늘 땅 용납할 수 있음은 모르누나 / 大可容天地
가끔 시구도 읊조리고 / 時復覓詩句
늘 큰소리를 질러대므로 / 長嘯不自止
남들이 늙은 여우 소리로 여겨 / 人疑老狐聲
저마다 귀막고 피해 달아나니 / 掩耳走自避
이 멋없이 읊조리는 가운데도 / 不知謳吟中
금석의 소리 나는 줄 모르누나 / 金石聲出此
너희가 지금 나를 여우로 여기고 / 汝今欲狐我
또 괴물로 취급하고 싶으며 / 又作怪物類
말이나 소라 부르고 싶다면 / 呼馬亦呼牛
너희들 마음대로 하려므나 / 任爾所當指
▣동국이상국후집 9권
○미인과 희롱하는 꿈을 깨고 나서
내 나이 지금 칠십 넷이라 / 我年七十四
방사(房事)를 끊은 지 오래인데 / 久斷衾中事
어찌해 꿈속에서 / 云何夢魂中
우연히 미인과 희롱했을까 / 偶與美人戲
숱 많은 머리는 까만 구름 같고 / 鬒髮嚲烏雲
맑은 눈동자는 가을 물 같았네 / 明瞳注秋水
어찌 은근히 집적거리다 뿐인가 / 豈惟以心挑
소매 속의 팔까지 비벼대며 / 摩撫袖中臂
옥 같은 뺨 슬며시 드러내고 / 佯若露頩頰
이어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 未幾開笑齒
선뜻 나에게 접근하여 / 迺反邀我愛
온갖 교태 다 부렸어라 / 解作百般媚
평소 꿈이나 생시가 같다 하여 / 嘗謂夢覺同
이로써 생과 사를 비례하였네 / 以此例生死
나는 이미 색욕을 끊었는데 / 我今已斷慾
꿈속에선 왜 그렇지 못하였나 / 夢裏何未爾
이러다가 연이어 훈습(熏習)되어 / 因恐比所熏
깨끗한 마음 자리가 / 淸凈一心地
- 원문 2자(字) 빠짐 - 지금만도 못할 거라고 / □□不如今
괜히 스스로 의심되네 / 妄意自疑耳
돌이켜 생각하면 이 세계는 / 飜思是器界
일체가 다 꿈속일세 / 一切皆夢寐
마등가 또한 이 꿈인데 / 摩登伽亦夢
너를 유혹한 자 누구란 말가 / 留汝者誰是
다만 경계(境界)를 해탈하면 / 但得境解脫
한 바탕 꿈에서 깬 것 같거든 / 如寤一場睡
하물며 꿈속의 꿈을 가지고 / 況以夢中夢
무슨 진위를 의심할 나위가 있으랴 / 而疑眞與僞
이 마음을 참이라 이르지 말라 / 毋謂此眞心
생사가 다를지도 모르네 / 生死或有異
○우연히 읊다
술이 없으면 시도 무미하고 / 無酒詩可停
시가 없으면 술도 시들해 / 無詩酒可斥
시와 술은 다 즐기는 바이라 / 詩酒皆所嗜
서로 걸맞고 서로 있어야 하네 / 相値兩相得
손 내키는 대로 한 구의 시를 쓰고 / 信手書一句
입 내키는 대로 한 잔의 술을 마시니 / 信口傾一酌
어쩌다가 딱한 이 늙은이가 / 奈何遮老子
시벽과 주벽을 함께 가졌네 / 俱得詩酒癖
그러나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어서 / 酒亦飮未多
천백 수를 짓는 시의 비례는 안 되지만 / 未似詩千百
마주 대하면 흥이 그저 발발하니 / 相逢迺發興
이 까닭 끝내 헤아리기 어려워 / 是意終莫測
이로 인해 병마저 더욱 깊었으니 / 由此病亦深
죽은 뒤에야 이 병도 없어지리 / 方死始可息
이는 나 자신만 상심하는 바 아니라 / 不唯我自傷
남들도 모두 이를 나무라곤 한다네 / 人亦以之責
▣동국이상국후집 10권
○내가 연로하여 오랫동안 색욕(色慾)을 물리쳤으되 시주(詩酒)는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주도 때로 흥미를 붙일 뿐 성벽을 이루어서는 아니 되니 성벽을 이루면 곧 마(魔)가 되는 것이다. 내 이를 걱정한 지 오랜 터이라 점차 덜고자 하여 먼저 삼마시(三魔詩)를 지어 내 뜻을 보인다
색마(色魔)
제 얼굴 내밀고 아양 떠는 것 나도 기쁘거니 / 自顔和好猶堪喜
저 얼굴 어여쁜들 내게 무슨 상관이냐 / 彼面雖姸奈我何
많이들 미인을 향해 홀리고 마나니 / 多向美人終蠱惑
어느 남아 색마에 몸 버리지 않으리 / 男兒誰免誤於魔
주마(酒魔)
사람마다 음식 중엔 신 음식을 싫어하되 / 人於喫物嫌辛物
술맛은 시고 시어도 좋은 것을 어찌하랴 / 酒味深辛樂奈何
기필코 사람 창자 녹이려는 음식이라 / 必欲使人腸腐爛
아지 못괘라 이것 원래 독중의 마로다 / 不知元是毒中魔
시마(詩魔)
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건 아니련만 / 詩不飛從天上降
애태우며 찾아냄은 무슨 뜻에선가 / 勞神搜得竟如何
좋은 바람 밝은 달 첨엔 서로 즐기지만 / 好風明月初相諭
오래되면 홀리나니 이게 바로 시마라네 / 着久成淫卽詩魔
▣동국이상국후집 11권
○학사(學士) 정이안(丁而安)이 묵죽(墨竹) 네 그루를 그려 주기에 각각 찬을 짓다
노죽(露竹)
우뚝이 선 외로운 대 자라는 것도 간구하다. 하늘이 그를 어여삐 여겨 이슬로 적셔 주네. 하늘의 뜻 체득하여 눈을 맞더라도 겁내지 말아야 하리.
풍죽(風竹)
너에게 소중한 것은 곧은 절개뿐이다. 흔들리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바람이 시킨 걸세. 이도 또한 본래 빈 것인데 누가 이것을 흔들까.
노죽(老竹)
차라리 늙어서 꺾일망정 절개야 어찌 변할쏜가. 옥은 꺾여도 그 곧은 절개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큰 잎사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맑은 바람 불러 들이리.
신죽(新竹)
흙을 뚫고 돋아날 적엔 비단 같은 껍질에 싸였더니, 누가 그 목을 뽑아 당겼나 솟아나온 그 모습 아름답네. 하늘을 찌르는 것도 좋지만 높으면 위태롭기 쉬운 법이다.
○새로 편차한 상정례문(詳定禮文)에 대한 발미(跋尾)
대저 제왕(帝王)의 정사에는 예(禮)를 제정하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연혁하거나 손익하거나 그것을 한 번 제정하여 인심을 바루고 풍속을 동일하게 해야 한다. 어찌 옛것만을 따르고 어물어물 모면하여 일정한 전법(典法)을 세우지 못하고 분분히 서로 같지 않게 해서야 되겠는가?
본조(本朝 고려)는 건국한 이래로 예제(禮制)를 손익함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한 번 뿐이아니었으므로 이를 병되게 여긴 지 오래었더니, 인종(仁宗) 때에 와서 비로소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의 신하에게 명하여 고금의 서로 다른 예문을 모아 참작하고 절충하여 50권의 책을 만들고 그것을《상정례문(詳定禮文)》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이 세상에 행해진 뒤에는 예가 제자리에 귀착되어 사람이 의혹되지 않았다.
이 책이 여러 해를 지났으므로 책장이 없어지고 글자가 결락되어 상고하기가 어려웠는데 나의 선공(先公)이 이를 보즙(補緝)하여 두 본(本)을 만들어 한 본은 예관(禮官)에게 보내고 한 본은 집에 간수하였으니, 그 뜻이 원대하였다. 과연 천도(遷都)할 때 예관이 창황하여 미처 그것을 싸가지고 오지 못했으니, 그 책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는데, 가장본 한 책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때에 와서야 나는 선공의 뜻을 더욱 알게 되었고, 또 그 책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래서 결국 주자(鑄字)를 사용 28본을 인출하여 제사(諸司)에 나누어 보내 간수하게 하니, 모든 유사(有司)들은 일실되지 않게 삼가 전하여 나의 통절한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월일에 모는 발문을 쓴다.
○갑오년에 예부(禮部)에서 시험한 책문(策問)
문 : 우리 국가는 오랑캐의 난으로 인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도읍을 옮겨서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는 비록 성스러운 천자와 어진 재상의 묘책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다. 과연 하늘이 도운 바라면 필시 흥복(興復)할 기회가 있을 것인데,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는가, 부지런히 인사(人事)를 닦아서 천심(天心)에 응해야 옳겠는가?
이른바 인사라는 것은 덕화를 베풀어 인민을 편안하게 하고, 농사에 힘써 수재ㆍ한재를 방비하는 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 보면, 열군(列郡)의 잔민(殘民)들이 떠돌아 다니며 토착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을 안집(安集)시키려면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할 것이며, 토지가 황폐하여 묵은 땅이 많은데 흥농(興農)을 하려면 또한 어떠한 술책을 써야 할 것이며, 그 수재ㆍ한재를 방비하는 것과 덕화를 베푸는 것은 어떤 것이 으뜸이 되는가? 제생(諸生)들은 고금의 이체(理體)에 밝으리니, 숨김없이 다 진술하라.
○갑오년에 예부에서 시험한 책문
문 : 전(傳)에 이르기를,
“문무(文武)를 병용하는 것이 장구하는 방법이다.”
하였으니, 예로부터 국가가 그 어느 한 가지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은 문무가 바로 그것이다.
본조(本朝)가 문무를 병용하는 데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근년 이래로 군대(軍隊)는 매우 허하여 실하지 못하고, 유풍(儒風)은 극히 쇠하여 떨치지 못하니, 그것은 그 문무를 닦는 방법이 지극하지 못해서인가, 천명이 시켜서 그런 것인가?
사림(士林)으로 말하면, 옛날에는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선비가 반드시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쉬우므로 반드시 과거를 보아야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적다. 그 벼슬에 나감의 어렵고 쉬움이 고금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폐단을 개혁하여 옛날대로 회복하는 방법은 또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군대로 말하면, 모두 각자가 받는 바의 분전(分田)이 있으니, 지금 어디에 간들 대오(隊伍)가 차지 않겠는가. 그런데 반드시 그 전지가 있는 곳으로 흩어 돌려보내 놓고 만일 일이 있어 유사(有司)가 갑자기 돌아오게 하면, 기한에 허덕이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만이 이르고, 또는 일이 힘들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후환을 돌보지 않고 도망하는 자가 많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 지경이 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서울과 지방의 유사들이 상고하여 일일이 징계하지 못한 때문인가? 그 상고하여 징계하는 방법은 또한 어디에 있는가? 제생들은 숨김없이 다 말하라.
▣동국이상국집 부록
○백운소설(白雲小說)
우리나라는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면서부터 문헌(文獻)이 비로소 생겼는데, 그동안에 있었던 작자(作者)들은 세대가 멀어서 들을 수가 없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적이 갖추 기록되어 있고, 또 그가 수(隋) 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시(五言詩) 네 구(句)가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통달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꾀는 지리를 다하였네 / 妙算窮地理
싸움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 / 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아서 중지하게나 / 知足願云止
구법(句法)이 기고(奇高)하여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으니, 어찌 후세의 부화(浮華)한 자가 미칠 바이겠는가. 상고하니,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의 태평시(太平詩)가《당시류기(唐詩類記)》에 실려 있는데, 그 시는 고고(高古)하고 웅혼(雄渾)하니 초당(初唐)의 모든 저작에 비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때 동방의 문풍(文風)이 아직 왕성하지 못했는지라, 을지문덕의 이 한 절구시(絶句詩) 외에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주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기이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큰 업을 열었으니 / 大唐開鴻業
높고 높은 제왕의 모책이 창성하도다 / 巍巍皇猷昌
무(武)는 한번 융의 입어 천하를 평정했고 / 止戈戎衣定
문(文)을 닦아 백왕을 이었네 / 修文繼百王
하늘을 대신하여 은택을 비처럼 뿌리고 / 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엔 땅의 도를 법받았네 / 理物體含章
인(仁)을 깊이 펴기를 일월과 같이하고 / 深仁諧日月
천운을 따라서 치세(治世)를 힘쓰네 / 撫運邁時康
번기(幡旗)는 뚜렷이 빛나는데 / 幡旗旣赫赫
정고(鉦鼓)는 어찌 그리도 찬란한가 / 鉦鼓何煌煌
외방 오랑캐로서 명을 어긴 자는 / 外夷違命者
하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하리라 / 翦覆被天殃
화평한 풍기가 우주에 어리어 / 和風凝宇宙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 遐邇競呈祥
사시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 四時調玉燭
칠요는 만방을 순행한다 / 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가 재보(宰輔)를 탄생시키고 / 維岳降宰輔
임금은 그 충량(忠良)을 쓰도다 / 維帝用忠良
오삼(五三)의 덕을 겸했으니 / 五三成一德
황가(皇家)인 당 나라가 밝도다 / 昭載皇家唐
그 소주(小註)를 상고하니,
“영휘(永徽) 원년에 진덕 여주가 백제 군사를 대파하고 나서 곧 오언으로 태평시(太平詩)를 지어 바쳤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영휘는 바로 고종의 연호이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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