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목민심서 2

청담(靑潭) 2017. 9. 7. 23:11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

 

제1조 속리(束吏) : 아전 단속

▣아전(衙前)을 단속하는 기본은 자기의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잘 시행되고,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명령해도 잘 시행되지 않는다.

●참판(參判) 유의(柳誼 1734-?)는 언젠가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 홍주 아전들의 간활한 버릇은 충청도 지방에서 제일갔다. 그러나 공이 청렴과 검소로 몸을 지키고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자 아전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형벌을 쓰지 않았지만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것으로 자기의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아전을 단속하는 기본임을 알았다.

▣예(禮)로써 정연하게 하고 은혜로써 대우한 다음 법으로써 단속해야 한다. 업신여기고 짓밟거나 잔악하게 부리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거나 속임수를 쓴다면 단속을 받지 않는다.

●아전이란 원래 교만 방자한 인물이므로 관장(官長)도 안중에 두지 않고 사민(士民 선비와 백성)을 마구 제 마음대로 부린다. 그런데 만일 허리 굽히는 법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처신이 자신을 더욱 존대(尊大)하여 제압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억압하여 목에 새끼를 걸어 돌을 달거나 거꾸로 매달아 땅에 드리우거나 하는 것은 모두가 해괴한 짓이니, 군자는 하지 않을 일이다. 그들 중에 혹시 거만을 피우는 자가 있거든 그 죄를 따져 - 허리 굽히지 않는 죄 - 뜰에 엎드리게 했다가 잠시 후에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 무방하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성인이 이미 경계하였다. 너그럽게 하되 너무 지나쳐서 해이하지 않고, 인자하되 너무 지나쳐서 나약하지 않아야 또한 그르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끌어 주고 도와주고 가르쳐 주면 그들 또한 사람의 성품을 가졌으니 고치지 않을 리가 없다. 위엄을 먼저 베풀어서는 안 된다.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아주 간악한 자는 형벌로써 다스려야 한다.

▣아주 간악한 자는 모름지기 포정사(布政司) 밖에 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새겨 영원토록 복직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수령이 좋아하는 것이면 아전들은 영합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쪽이 재물을 좋아하는 줄 알면 반드시 이(利)로 유인할 것이니 한번 꾐을 받으면 그때는 그들과 함께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수령의 성품이 편벽되면 아전은 그 틈을 엿보아 이내 격동시켜서 제 간계를 쓰게 되니, 그 술책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면서 술술 응해 주는 것은 수령이 아전의 간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집을 떠나 천리 밖으로 와서 홀로 많은 아전들과 여러 백성들 위에 우뚝 앉아, 평생 꿈에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을 맡게 되니, 사무에 어두울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수령은 일에 어두운 것을 수치로 여겨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며 명령을 내려 시행케 하되, 일체 곡절은 묻지도 않고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도장을 꾹꾹 찍으며 마치 물 흐르듯 술술 응대하여 스스로 모든 일에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것으로 자처하니. 이것은 수령 자신이 술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명령이나 한 패(牌)를 내더라도 수리(首吏)와 그 해당 아전에게 물어 일의 근본과 졸가리를 속속들이 캐서 자신이 환하게 알고 난 다음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몇 달 안 가서 사무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현성(縣城)에 있을 때 매양 들으매, 새로 부임한 관원이 사무에 서툴러서 뿌리를 캐는 경우에는 그 고을 늙은 아전들이,

“앞으로 몹시 괴로울 징조다.”

하고, 술술 응대해 주는 자의 경우에는 서로 웃으면서,

“앞으로 있을 징조를 알 만하다.”

한다 하였으니, 아전을 단속하는 요령은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전들이 구걸하면 백성들은 고통스러워 한다. 그것을 금지하고 단속하여 함부로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전의 인원수가 적으면 한가하게 지내는 자가 적어서 백성을 침학하고 가렴하는 일이 심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향리들은 재상(宰相)과 결탁하고 감사(監司)와 내통하여, 위로는 관장(官長)을 가볍게 보고, 아래로는 민생을 들볶는다. 능히 이들에게 굴하지 않는 자라야 현명한 수령이다.

●내가 오랜 동안 현성(縣城)에 있으면서 현령(縣令)의 출척(黜陟) 권한이 오로지 아전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았다.

수리(首吏 : 이방)는 권한이 무거우니 치우치게 맡겨도 안 되고 자주 불러도 안 되며 죄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하여, 백성들의 의혹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전들의 잔치 놀이는 백성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니, 엄중히 금지하고 자주 경계하여 감히 놀이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청(吏廳)에서 매질하는 일도 역시 엄금해야 한다.

▣아전이 간사한 짓을 하는 데는 사(史 : 書客)가 주모자가 되니, 아전의 간사한 짓을 막으려면 그 사를 혼내야 하고, 아전의 간사한 짓을 들추려면 그 사를 캐물어야 한다.

 

제2조 어중(御衆) : 부하 통솔

▣부하를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의뿐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생기고 신의는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충성스러우면서 청렴할 수 있다면 이에 부하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군교(軍校)는 무인(武人)으로 사나운 무리들이니 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엄하게 해야 한다.

●대체로 읍내 사람 중에 배우지 못하여 글도 모르고 사나워서 가르칠 수도 없는 자는 반드시 군교(軍校)로 들어간다. 그래서 기생을 끼고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을 직분으로, 사람을 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생리(生理)로 삼는다. ...대체로 말해서, 포도군관(捕盜軍官)은 중앙이나 지방이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큰 도둑이다. 그는 도둑질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그 장물(贓物)을 나누어 먹고, 마음대로 도둑질하게 하는 한편 따라서 도둑질 방법을 일러 준다. 그리고 수령이 도둑을 잡으려 하면 먼저 비밀을 누설하여 멀리 도망치게 하고, 수령이 도둑을 죽이려 하면 슬며시 옥졸(獄卒)을 시켜서 고의로 놓치게 한다. 그들의 갖은 죄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문졸(門卒)은 옛날의 조례(皁隷)라는 것이니 관속들 중에서 가장 가르치기 힘든 자들이다.

●문졸을 일수(日守)라고도 하고, 사령(使令)이라고도 하며, 혹은 나장(羅將)이라고도 한다. 이자들은 본래 떠돌이로 근거지가 없는 무리들이다. 혹 광대 출신도 있고, 혹은 괴뢰 출신도 있으므로 가장 천하여 교화시키기 어려운 백성이다.

그들이 가진 권세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 혼권(閽權), 둘째 장권(杖權), 셋째 옥권(獄權), 넷째 저권(邸權), 다섯째 포권(捕權)이다. 이 다섯 가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이리처럼 무서워한다. 수령된 자가 그들이 포악한 짓을 하도록 놓아두면 백성은 곤궁하게 될 것이다. ...문졸(門卒)에는 으레 도두(都頭) - 도사령(都使令) - 라는 것이 있다. ...곡산부(谷山府)에는 군수고(軍需庫)가 있어, 1년 수입이 2천 냥이었는데, 그 절반을 도두가 독식하였다. 그런데 내가 그 법을 고쳐 문졸 30명에게 월급조로 2냥 씩을 정해서 1년분 720냥을 쳐 균등 분배하게 하고 나머지 280냥은 도두(都頭)의 녹봉으로 하게 하고서는, 동령(動鈴)이니 조곤(釣鯤)이니 하는 짓은 일체 엄금하였더니, 환호성이 우레와 같았으며 모두 적절한 조치라고들 하였다.

관노(官奴)의 농간질은 오직 창고에 있다. 그러나 아전이 있으니, 폐해가 심하지 않으면 은혜로써 어루만지고 때로 지나친 것이나 막을 것이다.

●시노로서 간계를 지나치게 부리는 자는, 혹 송사하러 온 백성이 관정(官庭)에 있을 때 수령은 아무 말을 않는데도 제가 나서서 성내어 꾸짖고, 수령은 부드럽게 말하는데도 제가 나서서 고함을 지르고, 수령은 긴 말을 하지 않는데도 제가 나서서 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수령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데 나서서 요긴한 기밀을 들추어내고, 수령은 명령하지 않는데도 나서서 큰 소리로 세차게 치라고 해서, 백성의 비난을 사고 수령의 체면을 손상시킨다. 이와 같은 자는 거듭 엄하게 약속할 것이며, 약속을 범할 경우에는 처벌해야 한다.

시동(侍童 : 通引)은 잘 어루만져 기르고 죄가 있더라도 가볍게 다스려야 하나, 이미 장성한 자는 아전처럼 단속해야 한다.

 

제3조 용인(用人) : 향승(鄕丞)ㆍ좌수(座首)ㆍ풍헌(風憲)ㆍ약정(約正) 등의 임용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인재를 잘 임용하는 데 달렸으니, 군ㆍ현이 비록 규모가 작지만 사람을 쓰는 일은 나라와 다르지 않다.

●향승ㆍ군교(軍校) 등 여러 이서(吏胥)에서부터 풍헌(風憲)ㆍ약정(約正)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인재를 얻는 데 힘써야 하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향승(鄕丞)은 현령(縣令)의 보좌관이다. 반드시 한 고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골라서 그 직책에 있게 해야 한다.

좌수(座首)는 빈석(賓席)의 우두머리니 진실로 옳은 인재를 얻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좌수는 향대승(鄕大丞)이라 부르는 것이 좋고 별감(別監)은 좌부승(左副丞)ㆍ우부승(右副丞)이라 부르는 것이 좋으며, 그들에게 모두 종사랑(從仕郞)의 품계를 주고 매년 공적을 평가하여 감사와 어사로 하여금 식년(式年)에 각각 9명씩을 추천하게 해서 그중에서 3명을 뽑아 경관(京官)을 준다면 명예와 행실을 연마하는 자가 반드시 그 속에서 점차 나올 것이다. 이것은 조정에서 강구해야 할 일이다.

좌우별감(左右別監)은 수석의 다음이니, 또한 올바른 인재를 얻어서 모든 정사를 의논해야 한다.

▣적격자를 얻지 못하면 그냥 자리나 채워 둘 뿐이지, 모든 정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아첨을 잘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하고, 간쟁(諫諍)을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는다. 이 점을 살피면 실수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다산필담》에 이렇게 말했다.

“현령(縣令)은 지위가 비록 낮으나 임금의 규모가 있으니, 아첨을 힘써 물리치고 간언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일에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전과 노예는 지체가 낮으니 간쟁을 감히 못 하거니와 아첨부리기도 또한 불편한 입장이고, 오직 향승(鄕丞)이나 수교(首校)의 무리들만이 수령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제대로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첨으로 비위를 맞추어 수령을 악으로 인도한다. 수령에 대한 비방이 들끓어도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다.’ 하고, 수령이 파직될 기미가 있는데도 오히려 ‘오래 재직할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한다. 그러면 수령은 기뻐서 이 사람만이 충성스럽다고 여기고 감영의 공문이 이미 도착해 있는 줄을 모른다. 조사를 당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어제까지 면전에서 아첨하던 자는 스스로 나서서 부정의 증인이 되어 자잘한 잘못까지도 들추어 내지만, 그래도 혹 참고 잘못을 덮어 주는 자는 바로 전날 귀찮게 간쟁하던 사람일 것이다. 수령된 자는 반드시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군관(軍官)과 장관(將官)으로서 무반(武班)에 서게 되는 자는 모두가 씩씩하고 용감하여 외적을 방어할 기상이 있어야 옳다.

막비(幕裨 : 비장)를 두는 수령은 신중하게 인재를 고르되 충성되고 진실함을 우선으로 하고 재주 있고 슬기로움을 다음으로 해야 한다.

●의주(義州)ㆍ동래(東萊)ㆍ강계(江界)ㆍ제주(濟州)의 수령 및 방어사(防禦使)를 겸한 수령은 모두 감사나 절도사처럼 막비를 거느린다.

사대부의 염치와 예의가 날로 무너져서, 면전(棉廛)의 흥정꾼이나 땔나무 시장 장사치라도 일찍이 거래상의 혜택을 준 자들이면 모두 불러서 막비로 삼는가 하면, 무변(武弁)과 경대부(卿大夫)의 서자들은 함께 짝을 지어서 기생이나 가까이하고 아전들과 어울려 수령을 속이고 백성을 박해하여 씻기 어려운 수치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수령은 마땅히 이런 사정을 알아서, 반드시 깨끗한 지체에서 충성과 신의가 있고 사리에 밝은 자를 선택하여 - 중인(中人)도 또한 세록(世祿)의 집안에서 취해야 한다. - 막비로 앉혀야 한다.

 

제4조 거현(擧賢) : 인재 천거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일은 수령의 직책이다. 그 제도는 고금이 다르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일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경서에 밝고 행실이 탁월하며 행정 능력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나라의 정한 법이 있으니 한 고을에서 드러난 선사(善士)도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옛 법을 본떠 매양 식년(式年)이 되면 군현에서 어진 이를 천거하게끔 되어 있으나, 중세 이래로 당의(黨議)가 점점 고질화되어 제 당이 아니면 군현에서 추천된 사람도 가려 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이 드디어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진 이를 덮어두는 죄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므로 차라리 쓰이지 않을망정 어찌 추천조차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오늘날 군현에서 올리는 추천장에는 으레 ‘없습니다〔無乎〕’로 보고하고 있으니, - 무호(無乎)는 그런 사람이 없다〔無是〕는 말이다. - 또한 잘못이 아닌가?

- 지금은 오직 영남의 천거만을 전가(銓家)가 때로 수용(收用)하고 있다. -

《속대전(續大典)》에 이렇게 적혀 있다.

“각 도(道)의 전함(前銜) - 이미 벼슬을 지낸 사람을 말한다. - 및 생진(生進) - 경의(經義) 출신은 생원(生員), 시부(詩賦) 출신은 진사(進士)라 한다. - 과 유학(幼學) - 백도(白徒)이다. - 중에서 재주와 행동이 드러난 자는 매 식년(式年) 연초에 한 고을 사람들이 수령에게 보거(保擧)하고, - 고을 사람이 수령에게 천거하는 것을 보거(保擧)라 한다. -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는 그중에서 뽑아서 이조(吏曹)에 추천한다. - 하삼도(下三道)에서는 세 사람을 초과하지 못하고, 상오도(上五道)에서는 두 사람을 초과하지 못한다. - 혹시 추천된 사람이 소문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거나 나이를 속여 기록한 자는 - 생진(生進)은 30세 이상을 취하고, 유학은 40세 이상을 취한다. - 죄를 논하여 처벌한다.”

무릇 추천장을 쓰는 방법은 성명을 기록하고, 그 밑에 여덟 자 문구로 주를 단다. 이를테면,

“이(李) 아무는 경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친척간에 화목을 도모하는데 법도가 있다.〔窮經不解 睦親有規〕”

라는 식이다.

또, 행정능력이 있는 자를 추천하는 방법도 있다. 한 현(縣)에서 각각 세 사람씩을 추천하면, 감사는 여러 고을의 추천자를 종합하여 그중에서 다시 세 사람을 뽑아 이조(吏曹)에 보고한다.

한 고을의 여론을 채택하여 민의가 흡족하도록 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보건대, 요즈음 이러한 일도 모두 뇌물로 선택을 한다. 부자로서 오래 전부터 민심을 잃은 자가 효행(孝行)의 추천에 많이 들고 있으니, 또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과거(科擧)란 과목(科目)을 천거하는 것이다. 지금 그 법이 비록 결여되었더라도 폐단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변하는 법이니 사람을 천거하는 일은 수령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중국 과거의 법은 지극히 상세하고 치밀하니, 그것을 본받아 시행하게 된다면 천거하는 일은 수령의 직책이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에는 교관도 없고 제학도 없다. 생원 응시자를 뽑는 일은 오직 군수와 현령이 그 책임을 맡고 있을 뿐이다.

▣과거(科擧) 향공(鄕貢)이 비록 우리나라의 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문학하는 선비를 천거장(薦擧狀)에 적어서 올려야 하지, 아무렇게나 적어 올려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과거법은 고려 때에 시작되었다. 광종(光宗) 때에 시주(柴周) 사람 쌍기(雙冀)가 조사(詔使)를 따라 왔다가 병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이에 과거법을 우리나라에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당시에 왜 향거법(鄕擧法)을 상세하게 전해 주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의 법에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천거해야만 과거에 응시하게끔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법에는 애당초 천거하는 자가 없는데도 외람되이 과거에 응시한다 하니 이름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는 것이 대개 이런 것들이다.

▣관내에 덕행을 독실히 닦는 선비가 있으면 수령은 마땅히 몸소 나아가 그를 방문하고 명절에 문안을 드려 예의를 닦아야 한다.

 

제5조 찰물(察物) : 관내의 일 살핌

▣수령은 외로이 있으니 자신이 앉은 자리 밖은 모두 속이는 자들 뿐이다. 눈을 사방에 밝히고 귀를 사방에 통하게 하는 일은 제왕(帝王)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항통(缿筩 : 투서)의 법은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니, 절대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 구거(鉤鉅 : 유도신문)로 탐문하는 방법도 속임수에 가까우니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사철마다 첫달 초하룻날에는 향교(鄕校)에 체문(帖文)을 내려서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 이해(利害)를 지적해서 진술하게 한다.

▣자제와 친한 빈객 중에 마음가짐이 단정 결백하고 아울러 실무에도 능한 자가 있거든 그를 시켜 민간의 일을 몰래 살피게 하는 것이 좋다.

▣수리(首吏)의 실권이 막중해서 수령의 총명을 가려 백성의 실정이 상달되지 못하니 별도의 염탐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이방을 교체하면 반드시 말썽이 많게 될 것이니 곤장이나 매를 때려 징계하되 도태시키지는 말고 제 스스로 행동을 고치도록 했다가 전임되어 갈 때에 이르러서야 대체하도록 한다.

비록 그가 한 말이 혹시 모함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죄주지는 말아 언로(言路)를 틔워 놓아야 한다.

매양 보면, 슬기롭지 못한 수령은 이방을 사인(私人)으로 삼아 이방과 좋은 일이건 싫은 일이건 같이하면서 그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는 의심을 두지도 않고 이방과 적대되는 모든 자들을 넘어뜨려 편안하게 살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자신의 총명을 스스로 가리고는 외로이 있다가 문밖의 일은 한 가지도 듣지 못하여, 아전들이 이반하고 백성들이 저주해서 드디어 낭패하게 되는 자가 많다.

▣무릇 잗다란 실수나 작은 흠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지나치게 밝히는 것은 진정한 밝음이 아니다. 가끔 부정을 적발하되 그 기민함이 귀신과 같아야 백성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관장으로서 아전이나 백성들의 한두 가지 숨겨진 부정을 듣고는 마치 기화(奇貨)라도 얻은 양 그 부정을 들추어 냄으로써 스스로 그 관찰력을 과시하는 것은 천하에 박덕한 짓이다.

큰 사건은 들추어 내되 작은 것은 지나쳐버리기도 하고, 혹은 속으로 짐작만 하기도 하며, 혹은 또 가만히 그 사람을 불러 따뜻한 말로 타일러서 스스로 개전하도록 하기도 하여 너그러우면서도 멋대로 하도록 버려두지 않고 엄하면서도 가혹하지 않으며 온후한 덕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감복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을 부리는 방법이다. 세심하게 연못 속의 고기를 찾아내고 경솔하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것이 수령의 할 일이겠는가?

▣좌우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들어서는 안 된다. 비록 실없이 지껄이는 말 같아도 모두 사의(私意)가 들어 있다.

▣미행(微行)은 물정을 원만히 살피지도 못하고 체모만 손상시킬 뿐이니, 해서는 안 된다.

▣감사가 염문(廉問)할 경우 감영(監營)의 이서(吏胥)를 시켜서는 안 된다.

 

제6조 고공(考功) : 아전들의 공적 고과

▣아전들의 하는 일도 반드시 그 공적을 고과(考課)해야 한다. 공적을 고과하지 않으면 백성을 권면할 수 없다.

▣국법에 없는 것을 혼자 행할 수는 없지만, 그 공과(功過)를 적어 두었다가 연말에 그 공적을 고과해서 상을 주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한 책자를 비치해 두고 한 장에 한 사람의 이름을 쓰되 모든 향임(鄕任)과 모든 군교(軍校), - 향승(鄕丞) 및 군관(軍官)이다. - 여러 아전과 여러 조례(皁隷)들의 공과를 모두 기록한다. 과오는 범할 때마다 다스리고, 공적은 연말에 상고 조사해서 9등으로 구분하여, 상(上)의 3등에 든 자는 새해 차임할 적에 반드시 요직을 주고, 중(中)의 3등에 든 자는 상(賞)을 논함에 차등이 있게 하고, 하(下)의 3등에 든 자는 1년 동안 정직시켜 차임을 얻지 못하게 하면 어느 정도 권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향승(鄕丞)과 군교(軍校)는 그 정원이 많지 않으니, 상등과 하등은 1인을 넘지 말도록 하고, - 그 공과(功課)에 따라 상상(上上)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상중(上中)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상하(上下)로 하기도 한다. 하등 역시 마찬가지다. - 여러 아전들은 9등을 적용한다.

아전의 정원이 30인이면 상상과 하하에 각 1인, 상중과 하중에 각 2인, 상하와 하상에 각 2인, 중상(中上)과 중하(中下)에 각 3인을 넣고, 그 나머지 14인은 혹 중중(中中)에 넣기도 한다.

상상에 든 자는 제일가는 자리를 주고, 상중에 든 자는 다음 자리를 주고, 상하에 든 자는 또 그다음 자리를 주고, 중상에 든 자는 또 그다음 자리를 주고, 중중에 든 자는 이방(吏房)에게 맡겨서 박한 자리를 주도록 하며, 중하에 든 자는 반년 동안 정직시키되 차역(差役)은 면제해 주고, 하의 3등에 든 자는 1년 동안 정직시키되 하하에 든 자는 반드시 고된 역사(役事)에 징발한다.

향승과 군교는 자리가 많지 않으니 옮겨 줄 자리가 없는 자는 활이나 화살, 붓이나 먹 따위로 차등 있게 상을 주고 모두 체문(帖文)을 주어 각기 후세에 전하게 한다.

문졸(門卒)과 관노(官奴)들 역시 모두 위의 법에 준한다.

풍헌(風憲)ㆍ약정(約正)ㆍ저졸(邸卒) 등도 모두 위의 법에 준하되, 풍헌이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여 상상에 든 경우는 올려서 향승을 삼는다.

▣6년으로 수령의 임기를 정해야 한다. 수령이 우선 임기가 길어야만 고공(考功)을 의논할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오직 신상필벌(信賞必罰)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영(令)을 미덥게 할 뿐이다.

●20년 이래론 수령들이 자주 교체되어 오래가야 2년이요, 나머지는 혹 1년에 끝나기도 한다. 이 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관리와 백성들은 장구적인 계책이 없을 것이고 고공의 법도 웃음거리일 뿐이다.

부 감사고공지법(附監司考功之法)

▣감사가 고공하는 법도 따라서 의논하겠다. 이미 그 고공의 법이 소략하므로 책임지워 실효를 거두게 할 수 없으니 상주(上奏)해서 그 방식을 고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방관아의 여러 직책(정리)

○아전(향리) : 이방 등 6방이 있고 그 아래 여러 아전들이 있다. 많게는 30여명까지 있고 그 중 이방이 우두머리(首吏)이며 인사를 담당한다. 그들이 근무하는 집을 吏廳이라 한다.

○군교 : 장교(군관)들이다. 그 중에 포도군관(경찰임무)도 있다.

○막비(비장) : 감사, 절도사 및 일부 부사와 목사에게 주어진 비서직

○문졸(옛 조예) : 일수, 사령, 나장이라고도 하며 우두머리는 도두 또는 도사령이라고 한다. 관아의 온갖 일을 맡아 한다. 곡산부에 30여명이 있었다.

○시동(통인) : 지방관의 곁에서 시중드는 일을 한다.

○관노 : 관청소속의 노비들

○저졸 : 일반 하급군인

○향청(貳衙) : 수령 휘하에서 그를 보좌해 행정 실무의 일부를 집행하는 기구이며 2-3명의 향임(향정 또는 향승)이 있다. 대표는 좌수이고 좌별감과 우별감이 있다.

-좌수 : 향청의 우두머리이며 수석보좌관이다.

풍헌 : 면단위로 풍기를 바로잡고 규찰을 담당하는 직책

○도약정, 약정 : 면단위로 조직된 향약의 우두머리는 약정이며 군현단위의 우두머리는 도약정으로 향정이 겸한다.

○면임(면 책임자), 이임(리 책임자) : 요즈음의 이장이나 통장같은 직책

 

 

 

목민심서 호전(戶典) 6조

 

제1조 전정(田政) : 전제

▣수령의 직분 54조 중에 전정(田政)이 가장 어렵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법(田法)이 본래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행 전산법(田算法)에는 방전(方田)ㆍ직전(直田)ㆍ구전(句田)ㆍ제전(梯田)ㆍ규전(圭田)ㆍ사전(梭田)ㆍ요고전(腰鼓田) 등의 명칭이 있는데, 그 추산(推算)하고 타량(打量)하는 법식이 곧 사법(死法)이기 때문에 다른 모양의 전지에는 통용할 수 없다.

▣개량(改量)이란, 전정(田政)의 큰일이다. 진전(陳田)이나 은결(隱結)을 조사해내어 별 일 없기만을 도모할 것이다. 만일 부득이할 경우에는 마지못해 개량하되 큰 폐해가 없는 것은 모두 예전대로 따르고 아주 심한 것은 개량하여 원액(原額)을 채울 것이다.

▣개량의 조례(條例)는 매양 조정에서 반포하는 것이 있으니 그중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거듭 밝혀서 지키기를 약속해야 한다.

▣양전하는 법은 아래로는 백성을 해치지 않고 위로는 국가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직 공평하게만 할 뿐이다. 그러나 먼저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이 일을 논의할 수가 있다.

●민여검(閔汝儉 1564-1627)이 울산 부사(蔚山府使)가 되었다. 울산부는 오래도록 전정(田政)을 방치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그는 사사로이 양전을 행하되 단지 공평하게만 하고 본래의 결수가 불어나지 않도록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장군(將軍) 김응하(金應河 1580-1619)가 한미한 시절에 철원(鐵原)의 양전감관(量田監官)이 되었다. 균전사가 그 전지의 등급을 높여 조세를 올리려고 하자 그는 고집하여 따르지 않았는데, 철원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덕을 감사하게 여긴다.

▣경기의 전지는 비록 척박하지만 그 세가 본래 가볍게 되어 있고, 남쪽 지방의 전지는 비록 비옥하지만 그 세가 본래 무겁게 되어 있으니, 그 결부의 수는 모두 옛날의 것에 따라야 한다.

●내가 가진 박전(薄田)이 경기도 양근군(楊根郡)에 있는데 수전(水田논)이 70두락 한전(旱田밭)이 20일 갈이로 모두 합쳐야 1결밖에 안 된다. 내가 남쪽 변방으로 귀양와서 보니 수전 중에 약간 비옥한 것은 거개 20두락이 1결이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남방의 전지는 대부분이 1등과 2등에 속하고, 그중에 척박한 것은 3등과 4등이 되었다. 경기의 전지는 기름진 것은 혹 5등에 드는 것도 있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6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진전(陳田 : 황폐하여 버려두는 땅)이 끝내 묵게 되는 것은 분명 그 세액이 과중하기 때문이니 불가불 그 등급을 낮춰야 한다. ...진전(陳田)이 등급이 낮추어져 자호(字號)가 바뀌면 장차 백성들의 송사가 많아질 것이니, 자호가 바뀐 것은 모두 전패(田牌) 한 장을 지급해 줄 것이다.

▣총체적으로 논하면 양전법은 어린도(魚鱗圖)로써 방전(方田)을 만드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시행할 수 있다.

▣진전(陳田) 조사는 전정(田政)의 큰 조목이다. 진전의 징세에는 억울함이 많으니 진전을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전의 개간은, 백성들을 믿을 수 없으니 수령은 마땅히 지성껏 경작을 권유하고 또 그 힘을 도와주어야 한다.

▣은결(隱結)과 여결(餘結 : 실제의 면적을 줄여 양안에 올리고 남은 땅)은 해마다 불어나고 궁결(宮結)과 둔결(屯結)은 해마다 늘어나서 국가에 납부되는 원전(原田)의 세액이 해마다 줄어드니,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은결의 이름을 듣기는 하나, 심산궁곡의 조각조각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 은결인 줄만 알고 원전(原田)의 총수(總數) 외에 남아도는 결수(結數)가 은결인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잡초가 우거진 황폐한 전지, 물에 잠기고 사태가 난 전지, 백성이 떠나가서 버려진 전지가 원전의 총수에 채워지고, 기름지게 걸우어진 전지가 모두 은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세를 받을 즈음에는 우선 한 고을의 전지를 거머쥐고 그중에서 좋은 전지는 뽑아 은결의 수에 채운 다음 거칠고 묵은 전지로 왕세(王稅)를 채우는 것이 상습이 되어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 지가 이제 수백 년이 되었다. ...하천이 된 것이나 물에 떠내려간 것은 원전의 결수에서 빼어 버리고 신기전(新起田)과 환기전(還起田) - 기(起)는 개간(開墾)의 뜻이다. - 은 은결에 보태고 있으니, 그 형세는 반드시 한 나라의 전지를 모조리 삼켜서 전부 아전의 목구멍에 들어간 뒤에야 끝장이 날 것이다. 이런 때문에 ‘전정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제2조 세법(稅法) : 세제

▣전제(田制)가 이미 엉망이라 세법(稅法)도 따라서 문란하다. 연분(年分)에서 손실을 보고 콩에서 손실을 보니 나라의 세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애당초 양전할 때에 이미 토질의 비옥함과 척박함으로써 6등급을 나누었으니 1등전은 1결(結), 2등전은 85부, 3등전은 70부, 이런 식으로 모두 체감(遞減)하여 6등전에 이르게 된다. - 《대전(大典)》에 보인다. - 그러니 1등전 1결과 6등전 1결은 그 소출이 서로 같으니 그 세액도 응당 같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을 덮어 씌워서 하지하년(下之下年)은 4두(斗), 하지중년은 6두, 하지상년은 8두,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상지상년(上之上年)은 20두로 하여 조세를 징수하는 법으로 삼았으니, - 《대전》에 보인다. - 피차가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어지럽고 혼란하여 그 단서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법을 세웠으면 마땅히 그 분등(分等)은 해마다 달라야 할 것인데도 이른바 연분법에서는 하하전(下下田) 몇천 결은 계속 하지하년(下之下年)이 되고 하중전(下中田) 몇천 결은 계속 하지중년(下之中年)이 되니, - 모든 고을의 대개장(大槩狀)은 그 법식이 이와 같다. - 이것은 연분이 아니라 바로 토분(土分)인 것이다. 이미 전분6등(田分六等)할 때에 토품(土品)으로써 등급을 나누고 또 연분9등할 때에도 또 토품으로 등급을 나누니 이미 정중한 처사는 아니다. 그러나 법이 이미 이러할진대 그대로 준행하는 것이 사리에 맞겠거늘,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할 때에는 9등의 전지에서 통틀어 6두를 징수한다.

▣집재(執災재해토지조사)와 표재(俵災 재해 토지세 감면)는 전정의 말단에 속하는 일이다. 대본(大本)이 이미 거칠고 조리(條理)가 모두 문란하니 비록 마음과 힘을 다 기울여서 한다 하더라도 만족하게 될 수는 없다.

▣서원이 간평하러 들에 나갈 때 면전에 불러놓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기도 하고 위엄 있는 말로 겁주기도 하여 지성스럽고 간절함이 그들을 족히 감동시킬 만하면 도움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너희(아전)는 은결을 가지고 있어 이미 열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고 서청(書廳)의 잡비가 한 군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만약 다시 재결을 함부로 농간질한다면 이것은 너희 스스로 중죄에 빠지는 것이다.

▣가뭄이 심한 해에 미처 이앙을 하지 못한 것을 답험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적임자를 골라 임명해야 한다.

▣상사(上司)에 재결을 보고할 때에는 마땅히 실제의 숫자에 의해야 하고 혹시 삭감을 당할 것 같으면 스스로 인책하고 다시 보고해야 할 것이다.

▣간활한 아전이 민결(民結)을 몰래 취하여 제역촌(除役村공역이 면제되는 마을)에 이록(移錄)한 것은 밝게 조사하여 엄금해야 한다.

▣정월에 창고를 열며 세미를 수납하는 날에는 수령이 마땅히 친히 받아야 한다.

▣장차 창고를 열려고 할 때에는 창촌(倉村)에 방문을 붙여서 잡류들을 엄금해야 한다.

창촌에서 금해야 할 대상이 첫째는 우파(優婆), - 방언에는 사당(舍堂)이라 한다. - 둘째는 창기(娼妓), - 늙은 퇴기도 금할 것이다. - 셋째는 주파(酒婆), - 소주나 약주를 앉아서 파는 자 - 넷째는 화랑(花郞), - 즉 무당의 서방인데 방언에는 광대라 한다. - 다섯째는 악공(樂工) - 거문고 타고 피리 불고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 여섯째는 뇌자(櫑子) - 방언에는 초라니라 한다. - 일곱째는 마조(馬吊), - 곧 투전이다. - 여덟째는 도사(屠肆), - 소 잡고 돼지 잡는 일 따위이다. - 이다.

이들 잡류들은 노래와 여색과 술과 고기로써 만 가지로 유혹하니 창리(倉吏)와 뱃사람이 유혹에 넘어가 씀씀이가 헤프게 되고 탐욕이 깊어지면 횡포하게 거두어들여 그 축난 것을 채우게 되니, 이는 마땅히 엄금해야 한다.

▣비록 백성들이 수납 기일을 어기더라도 아전을 풀어 납부를 독촉하는 것은 마치 호랑이를 양 우리에 풀어놓는 것과 같으니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조운선(漕運船)에 짐을 실어 보내는 일은 법조문을 상세히 검토하여 각별히 준수하고 범하지 말아야 한다.

●조운선에 딴 물건을 덧붙여 싣는 일을 금하는 것은 그 조례가 지극히 엄한데도 범하는 자가 잇따르고 이 때문에 파직되고 구속되는 자가 없는 해가 없으니, 어찌 재물에 혹한 것이 아니겠는가? 매양 조운선이 출발하는 날이면 대나무 장대ㆍ나무절구ㆍ쇠솥ㆍ왕골자리ㆍ대자리 등을 새끼로 묶고 짚으로 싸서 포구에 내어놓는데, 백성들은 비웃고 손가락질하여 탐욕으로 빼앗은 물건으로 지목하고, 뱃사람들은 성내어 던지면서 죗덩어리〔罪塊〕라 이름하니, 천금이라도 귀중히 여길 것이 못 된다. 속물들이 연변(沿邊)의 수령 자리를 얻으면 집안 사람들이 서로 경사로 여겨,

“화두(火斗) - 화두는 방언으로 부등가리라고 한다. - 도 모두 실어라.”

라고 하니, 이런 말은 부끄러워해야 할 추한 말이 아니겠는가? 설령 싣는다 하더라도 어찌 사선(私船)이 없겠는가? 이렇게 매우 두려운 법령을 어긴다 하더라도 얻는 것은 몇 푼에 지나지 않는 뱃삯인데 이것으로 벼슬과 녹봉을 아울러 잃어야 하겠는가? 그 지혜롭지 못함이 심한 것이다.

연해의 고을은 조선(漕船)이나 임선(賃船)을 막론하고 그 세미 수송이 어렵지 않은데, 내지에서 조창으로 운반하는 것은 백성들이 등에 지거나 어깨에 메거나 하고 수백 리 밖에까지 운반해야 하니 그 고통이 심하다. 감사는 마땅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길을 평평하게 닦아서 조창에 닿도록 내고 유형거(游衡車) - 선조(先朝 정조) 때 화성(華城)의 역사에서 이 수레를 제작하였는데, 그 제도가 〈성화주략(城華籌略)〉에 보인다. - 를 만들어 한 고을에 각각 40~50대씩을 비치시키면 한 대에 쌀 4~5석을 실을 수 있을 뿐더러 인부 두 사람이 운반하고, 또 큰 것은 소 한 마리가 끌게 된다. 오직 고개 밑에 이르렀을 때만이 잠깐 등짐으로 운반하면 힘을 크게 덜게 되니, 조운의 담당자는 마땅히 강구할 일이다. 이것은 한 고을이 단독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 이웃 고을에서 길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

▣궁전(宮田)과 둔전(屯田)의 경우 그 부세 침탈이 심한 것은 살펴서 관대하게 해주어야 한다.

●여러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과 경사(京司)의 둔전으로 말하면, 그 도장(導掌)으로 내려온 자가 혹은 차인(差人)으로서 그 세를 거두어 궁방과 경사에 바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도장 자리를 사서 그 세를 거두어 먹기도 한다. 요컨대 침탈하는 자는 많고 은혜를 베푸는 자는 적은 것이다. 그러나 또 궁전과 둔전을 경작하는 백성들은 모두 요역(徭役)이 면제되어 본현의 요부(徭賦)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빈부와 고락을 수령은 유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나의 백성이거늘 어찌 널리 보살피지 않겠는가? 수령은 마땅히 별도로 염탐해서 비리로 백성을 침탈하는 도장은 불러서 타이르기도 하고 혹은 붙들어다 죄주기도 하여 횡포를 못 하게 해야 한다.

궁전촌(宮田村)과 둔전촌(屯田村)은 패망하여 지탱하지 못할 마을이 있는가 하면 혹은 부유하면서 요역이 없는 마을도 있는데, 그 부유한 마을은 민역을 도피하는 자의 소굴인 것이다.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은 습속이 서로 달라서 종자와 부세를 혹은 전주(田主)가 내기도 하고 혹은 전부(佃夫)가 내기도 한다. 수령은 다만 습속을 따라 다스려서 백성들의 원망이 없게 할 뿐이다.

●그 종자와 세미를 북쪽 지방에서는 전주가 내고 남쪽 지방에서는 전부가 내는데, 그 까닭은 타작하는 법이 다른 데 있다. 또 볏짚을 북쪽 지방에서는 전주와 전부가 똑같이 나누는데, 남쪽 지방에서는 전부가 모두 차지한다. 그런 까닭에 종자와 세미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흉년으로 굶주리는 해에 벼를 전부가 모두 먹어버리고 종자와 세미를 내지 않으면 전주가 대신 관청의 독촉을 받아 스스로 그 세미를 납부한다. 전주가 먼 곳에 살 경우에는 한 말의 벼도 받아보지 못하고서 세미만 바치게 된다. 그러므로 흉년에 부잣집들이 많이 파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지의 공리(公理)로 논하면, 농부가 국토를 경작하여 9분의 1세를 국고에 바치고 나머지 9분의 8을 먹으며, 그 밖에 다시 침식을 받지 않는 것이 옛법이다. 놀고 먹는 인사가 전지를 넓게 차지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여 그 10분의 5를 거두면서 국세까지도 전부에게 물게 하는 일이 옳겠는가?

▣화속세(火粟稅 화전세)는 관례를 상고하여 세액 총수에 비교할 것이며, 오직 크게 흉년 든 해에만 적당하게 견감하고, 크게 황폐한 마을에만 적당하게 견감할 것이다.

●법전(法典)에,

“화전(火田)은 모두 6등전(等田)에 해당시킨다.”

 

제3조 곡부(穀簿) : 환곡

환상(還上)이란 사창(社倉)이 한 번 변해서 된 것인데, 곡식을 내어 파는 것도 아니고 곡식을 사들이는 것도 아니면서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병통만 안겨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임박간에 있을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폐단에 폐단을 낳고 문란에 문란을 거듭하여, 마치 구름이 피어나듯 파도가 출렁거리듯 하여 천하에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나라에서 쓰는 경비에 보탬이 되는 것은 10분의 1이요, 여러 아문(衙門)에서 관장하여 그들의 녹봉을 삼는 것은 10분의 2요, 군현(郡縣)의 아전들이 농간 부리고 판매하여 장사의 이득을 보는 것이 10분의 7이다. 백성들은 한 톨의 곡식도 일찍이 본 적이 없건만 까닭없이 쌀과 조를 실어다 바치는 것이 해마다 천 석이나 만 석이 되니, 이것은 곧 부렴(賦斂)이지 어찌 진대(振貸)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강탈이지 어찌 부렴이라 할 수 있겠는가?

...수령은 소싯적에 혹은 시부(詩賦)나 익히고, 혹은 궁시(弓矢)나 익히고, 항우패공(項羽沛公)의 시구를 놓고 부채를 두들기며 스스로 호기를 부리기나 하고, 마조(馬吊)ㆍ강패(江牌)의 놀이로 돈내기를 하며 스스로 즐기기나 하고, 그보다 단수가 높은 자는 태극 원회(太極元會)의 이치와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수와 이기(理氣)의 논쟁과 성정(性情)의 논변을 천하에 더없는 고묘(高妙)로 생각하고 전제(田制)와 부법(賦法), 그리고 창름(倉廩)의 계수에 대해서는 한 글자 반 글귀도 일찍이 강습하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등용하여 그를 귀신같이 간활한 아전들의 위에 앉히고 말하기를,

“너는 그들의 농간을 살피라.”

하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즈음 진신대부(搢紳大夫)로서 환상의 폐단을 논하는 자는 기껏해야,

“가을에는 정(精)한 곡식을 받되 말에 넘치게 받고, 봄에는 거친 곡식을 나누어 주되 말에 우묵 들어가게 나누어 주므로 백성들에 있어서는 매우 원통한 일이다.”

라고 할 뿐이다. 그리고 아전의 포흠을 논하는 자는 기껏해야 아전이 밤에 창고 문을 열고 가마니를 져내서 제 집으로 나르는 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령 중에는 미행하여 창고를 엿보는 자가 많으니 아! 오원한 일이 아닌가? 팔도 중에 남쪽 지방의 아전이 더욱 교사스럽고 역대 이래로 오늘날이 가장 심한데 이처럼 흉악한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한 톨의 곡식도 본래 나누어 주는 일이 없는데도 해마다 거저 내야 하는 곡식이 한 집에 10점(苫)씩이나 된다. 아! 백성들이 비록 잠시 동안이나마 죽지 않으려고 한들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환상(還上)이 폐단이 되는 것은 그 법의 근본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근본이 이미 어지러운데 어떻게 말단이 다스려지겠는가?

감사〔上司〕가 무역하는 일은 상판(商販)의 문을 크게 열어 놓는 것이다. 수령이 범법하는 것쯤은 거론할 것이 못 된다.

●감사가 여러 고을에 영을 내리어 매월 시중 가격을 알리게 해서 곡가의 비싸고 헐함을 자세히 알고 난 다음 곧 상판(商販)의 법을 행한다. 예를 들어 벼 한 섬 - 15두 - 이 갑현(甲縣)의 싯가로는 7전 - 70닢 - 이고 을현(乙縣)의 싯가로는 1냥 4전 - 산읍(山邑)과 연읍(沿邑)은 그 풍년 들고 흉년 드는 것이 같지 않다. - 이면, 을현의 벼 2천 석을 취해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2800냥을 얻은 뒤에 그중 절반은 훔쳐내서 제가 차지하고 - 1400냥 - 나머지 절반을 갑현에 투입하여 - 1400냥 - 곡식을 사들여서 다시 벼 2천 석을 만드니 이것이 이른바 이무(移貿)요, 입본(立本)이요, 보속(步粟)이란 것이다.

감사의 녹봉은 본래 박하지도 않은데 장사치의 일을 해서 백성의 고혈을 짜냄으로써 국가의 동맥을 상하게 하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해마다 돈 수만 관(貫)을 얻어 봉식(封殖)하는데, 곡식을 방출하는 고을에서는 값을 높여서 돈을 거두고 곡식을 수매하는 고을에서는 값을 깎아서 돈을 지급하면 백성의 피해가 무궁함을 모르는 것이다.

수령이 시중 가격을 알릴 때는 감사의 비위를 맞추어 곡식을 방출해야 할 고을에서는 반드시 높은 값으로 보고하고 - 시가에 비해 더 높게 한다. - 곡식을 수매해야 할 고을에서는 반드시 낮은 값으로 보고하는데, - 시가에 비해 더 낮게 한다. - 한 고을 수령이 이미 감사의 비위를 맞추었으면 다른 이웃 고을 수령들은 감사에게 책망을 받게 된다. - 시중가격을 보고한 문서가 퇴짜를 당한다. - 이래서 모두 가장 뜻대로 보고된 고을로 준칙을 삼으니, 백성들의 피해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가 전에 암행 어사가 되었을 때 보건대 인접해 있는 대여섯 고을에서 보고한 시중 가격이 각각 같지 않았는데 결국에 가서는 모두 높은 가격을 따랐으니, 이에 그 실정을 짐작할 수 있다.

▣수령이 농간을 부려서 남은 이익을 도둑질하니 아전들이 농간 부리는 것쯤은 거론할 것이 못 된다.

▣상류가 흐리니 하류가 맑기 어렵다. 아전들이 농간 부리는 방법은 갖출 대로 갖추어져서 귀신같은 간계를 살필 길이 없다.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수령으로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출납(出納)의 수량과 분류(分留)의 실수만이라도 수령 자신이 잘 파악하고 있으면 아전들의 횡포가 그리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릇 환상(還上)은 잘 거두어들인 후에라야 비로소 잘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잘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면 또 다음 1년을 어지럽히게 되니 구제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외창(外倉)이 없는 경우에는 수령은 마땅히 5일마다 한 번씩 나아가서 몸소 받아들여야 하고 외창이 있는 경우에는 오직 창고를 여는 날에만 친히 그 거두어들이는 법을 정해야 할 것이다.

●목민(牧民)하는 길은 ‘고르게 한다’는 고를 균(均)자 한 자가 있을 뿐이다.

▣환상(還上)이란 받아들일 때에는 비록 수령이 몸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누어 줄 때에는 반드시 몸소 나누어 주어야 한다. 한 되 한 홉도 향승으로 하여금 대신 나누어 주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순분(巡分)의 법에 구애할 필요는 없다.

●환곡이 적은 읍은 호당 받아야 할 것이 2석에 불과하니 2석은 30두인 것이다. 1호의 환곡은 대략 3~4집에서 나누어 먹으므로 - 3~4집이 합하여 1호가 된다. - ...대략 하루 방출량은 8백 석에 불과해야 옳을 것이다. 매호 2석이면 4백 호분이다. 한 면이 2백 호라면 하루에 두 면분만 방출하는 것이 역시 마땅할 것이다.

▣한두 사민(士民)이 사사로이 창고 쌀을 구걸하는 것을 별환(別還)이라 하는데 그 일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

▣명절에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오직 흉년이 들어서 곡식이 귀할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혹시 민호(民戸)는 많지 않은데 곡부(穀簿)에 적힌 수량이 너무 많을 경우에는 상부에 청해서 감하고, 곡부에 적힌 수량이 너무 적어서 구제할 방책이 없을 경우에는 상부에 청해서 늘려야 한다.

 

제4조 호적(戶籍)

▣호적이란 모든 부(賦)의 근원이요, 온갖 요(徭)의 근본이니, 호적이 균평한 뒤에야 부세와 요역이 균평하게 될 것이다.

▣호적이 문란하여 전혀 기강이 없으니 큰 역량을 갖추지 않고서는 균평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차 호적을 정리 하려거든 먼저 가좌(家坐)를 살펴서 허와 실을 두루 파악하여야 이에 호수를 증감할 수 있으니 가좌의 장부는 소홀히 다룰 것이 아니다. 호적을 작성할 시기가 이르렀거든 이 가좌부에 의거 증감(增減)ㆍ추이(推移)하여 여러 마을의 호액(戶額)으로 하여금 아주 확실하여 허위가 없게 할 것이다. 새 호적이 작성되었거든 곧 관청의 명령으로 호총(戶總)을 여러 이(里)에 반포하고, 엄숙히 금령을 세워서 번거로운 이의가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연호(烟戶 : 민호)가 쇠잔하여 호액(戶額)을 채울 수 없는 경우에는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고, 큰 흉년이 든 나머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빌 지경이 되어 호액을 채울 수가 없는 경우에도 상사에게 보고하여 그 호액을 줄여 주도록 청할 것이다.

▣인구미(人口米)나 정서조(正書租)와 같은 것은 구례(舊例)에 따라 그대로 백성들이 바치는 것은 허용해도 되지만 그 밖의 침탈은 모두 엄금해야 한다.

▣나이를 올린 자, 나이를 줄인 자, 유학(幼學)을 허위로 사칭한 자, 관작(官爵)을 거짓으로 기재한 자, 거짓 홀아비라고 칭한 자, 거짓 과적(科籍)에 이름을 등재한 자는 모두 조사하여 금할 것이다.

▣호적이란 나라의 큰 정사인 것이니 지극히 엄정하게 하고 지극히 정밀하게 하여야만 백성들의 부세(賦稅)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나 지금 여기서 논하는 바는 시속(時俗)을 따른 것이다.

▣다섯 집으로 통(統)을 조직하고 열 집으로 패(牌)를 조직하는 것은 옛 법을 따르고 게다가 새로운 규약(規約)을 보태서 시행한다면 농간과 도적은 용납할 곳이 없어질 것이다.

 

제5조 평부(平賦) 상 : 부역

▣부역균(賦役均)이란 7사(七事) 중의 요긴한 일이다. 무릇 공평하지 못한 부(賦)는 징수할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공평치 않으면 옳은 정치가 아니다.

수령 7사(守令七事)로써 농상성(農桑盛)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사송간(詞訟簡)ㆍ간활식(奸猾息 : 간악하고 교활한 사람이 없어지게 하는 일 )이다. 이 수령 7사는 조선 때에 와서는 지방 수령들의 성적 고과에 대한 조항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화되었으며, 새로 임명된 수령은 으레 대궐을 하직하고 임소로 떠날 때 계판(啓板 게시판의 일종) 앞에서 이를 외게 되었던 것이다.

▣전부(田賦) 외에 가장 큰 부담은 민고(民庫)인데 혹은 토지에 부과하기도 하고, 혹은 가호(家戶)에 부과하기도 하여 비용이 날로 확대되므로 백성들이 살 수가 없다.

●민고의 폐단은 그 원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아전들은 거기에 참여되지 않는다. 하나는 감사가 위엄을 함부로 부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수령이 탐욕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인이 없으면 본래 민고가 없을 것이요, 아전들도 그 농간을 용납할 곳이 없을 것이다.

▣민고의 규례가 고을마다 각기 다르지만 소용이 있을 때마다 무절제하게 마구 거둬들이는 것은 백성을 괴롭힘이 더욱더 심한 것이다.

계방(契房)이란 모든 폐단의 근원이요, 뭇 농간의 구멍인 것이니 계방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제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계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이계(里契)요, 다른 하나는 호계(戶契)이다. 이계란 것은 온 마을을 계방으로 삼아 해마다 돈 수백 냥을 거두는 일이요, 호계란 것은 특정한 호(戶)를 뽑아서 계방으로 삼아 해마다 돈 백여 냥을 거두는 일이다. - 나주(羅州)ㆍ장성(長城)에는 호계가 많다. -

▣궁방전(宮房田)ㆍ둔전(屯田)ㆍ교촌(校村)ㆍ원촌(院村)을 조사하여 그 비호 아래 숨겨져 원래의 정액보다 초과된 전호(佃戶)를 모두 적발해 내어 공부(公賦)를 공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역촌(驛村)ㆍ참촌(站村)ㆍ점촌(店村)ㆍ창촌(倉村)을 조사하여 그 비호 아래 숨겨져 법리(法理)에 맞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적발해 내서 공부를 공평하게 해야 할 것이다.

※각 호의 빈부가 비록 고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10가(家)의 촌락은 2호를 넘지 않을 것이니 2호가 부담하는 역은 10가에 공평하게 배정될 것이며,

▣쌀로 징수하는 것은 돈으로 징수하는 것만 못하다. 본래 쌀로 징수하던 것도 마땅히 고쳐서 돈으로 징수해야 할 것이다.

▣쌀로 징수하는 것은 돈으로 징수하는 것만 못하다. 본래 쌀로 징수하던 것도 마땅히 고쳐서 돈으로 징수해야 할 것이다.

▣교묘하게 명목을 세워 수령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없앨 것이며, 여러 종목 중에서 과도하거나 허위로 만들어진 것은 삭제해서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조관(朝官)의 호(戶)는 요역을 면제한다는 규정이 법전에 실려 있지 않으나, 서울 부근의 문명한 땅에서는 면제해 주지 말고 먼 시골에서는 적당히 면제해 줄 것이다.

▣대저 민고의 폐단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본읍을 위한 하나의 장구적인 계책을 생각하여 공전(公田)을 설정해서 민고의 역을 충당해야 할 것이다.

●이적(李積)이 영덕 현령(盈德縣令)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영덕현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연해 있어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였는데, 그는 어염(魚鹽)과 화전(火田)에서 거둔 세로 백성들의 요역을 도와주고, 전세(田稅)ㆍ대동(大同)ㆍ세폐(歲幣) 및 기타를 모두 관에서 마련해 주니, 몇 년 사이에 백성들은 휴식을 얻게 되었다.

▣민고(民庫)의 하기(下記)를 향유(鄕儒)들을 불러 검사하도록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균역법(均役法)이 있은 이후로 어세(漁稅)ㆍ염세(鹽稅)ㆍ선세(船稅)가 모두 일정한 세율이 있는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겨서 아전들이 그로 인해 농간을 부린다. 배〔船〕에는 많은 등급이 있어 도(道)마다 각각 다르니 배를 점검하는 데는 오직 예전의 관례만을 따를 것이고, 세금을 거두는 데는 단지 중복된 징수만을 살필 것이다. 어세(漁稅)의 대상지는 모두 바다 가운데 있으니 세밀히 살필 길이 없다. 오직 총수를 비례하는 것만을 기할 것이며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수시로 살필 것이다.염세(鹽稅)는 본래 가벼우므로 백성에게 고통이 되지 않으니 오직 총수만 비례하기를 기할 것이고 때때로 무리한 징수가 있는가를 살필 것이다.

▣토선(土船)과 관선(官船)을 이용하는 고기장수ㆍ소금장수ㆍ김장수ㆍ미역장수로서 깊은 원한이 있어도 고소할 곳조차 없는 것이 바로 저세(邸稅)이다.

▣장세(場稅)ㆍ관세(關稅)ㆍ진세(津稅)ㆍ점세(店稅)와 승혜(僧鞋)ㆍ무녀포(巫女布)에 대하여 지나치게 징수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역역(力役)에 대한 정사는 신중하게 다루되 백성들의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역역(力役)의 부과는 첫째 둑 쌓는 일, - 바다의 조수를 막는 경우 - 둘째는 도랑 파는 일, - 속칭 보막이다. - 셋째는 저수지 준설하는 일, - 저수지에 찬 진흙을 파내는 경우 - 넷째는 상여 메는 일, - 객지에서 죽은 벼슬아치를 운상(運喪)하는 경우 - 다섯째는 배 끄는 일, - 배로 운상하는 경우 - 여섯째는 목재(木材) 운반하는 일, - 황장목(黃腸木) 및 관재(官材)ㆍ선재(船材) 등 - 일곱째는 공물(貢物) 수송하는 일, - 제주(濟州)의 토산물 - 여덟째는 말 모는 일, - 제주의 공마(貢馬)임 - 아홉째는 얼음 저장하는 일, - 관에서 쓰는 것 - 열 번째는 장사(葬事) 돕는 일, - 묘상각(墓上閣)과 삼물막(三物幕) 등 - 열한 번째는 가마 메는 일, - 고개를 넘는 경우 - 열두 번째는 노임(路任) - 방언으로는 길짐(吉朕)이라 한다. - 이며, 그 밖의 자질구레한 고통스러운 일은 낱낱이 들 수 없고, 성을 수축하거나 관청을 수리하는 따위는 이 안에 들어 있지도 않는다.

▣명목 없는 세금이 한때의 잘못된 관례에서 생긴 것은 마땅히 급히 혁파해야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부역(賦役)을 크게 공평하게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호포법(戶布法)과 구전법(口錢法)을 강구, 시행하여야만 민생이 이에 안정될 것이다.

 

제6조 권농(勸農)

▣농사란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이다. 백성들 스스로가 힘쓸 바이지만, 더없이 어리석은 자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선왕(先王)은 그들을 권면하였다.

▣옛날 현명한 수령들은 농사를 권장하는 일에 근면하는 것으로써 명성과 공적을 삼았으니 농사를 권장하는 일은 수령의 으뜸가는 정무인 것이다. 농사를 권장하는 요체는 조세를 덜어주거나 가볍게 함으로써 그 근본을 배양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하면 토지가 개간될 것이다.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는 곡식 심는 일만 권장할 것이 아니라, 원예ㆍ목축ㆍ양잠ㆍ길쌈 등의 일도 권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농사는 식생활의 근본이며 양잠은 의생활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일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농기(農器)와 직기(織器)를 만들어서 백성들의 용구를 이롭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는 일 또한 백성의 수령된 자의 힘쓸 바이다.

▣농사는로 짓는 것이니 관에서 소를 제공하거나 혹은 백성들에게 서로 소를 빌려 주도록 권장하는 것 역시 권농에 있어서 항상 힘쓸 일이다. 농사는 소로 짓는 것이니 진실로 농사를 권장하려 한다면 마땅히 도살을 경계하고 목축을 권해야 할 것이다.

▣총괄해 보건대, 권농의 정사는 마땅히 먼저 직책을 정해 주어야 한다. 직책을 분담시키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잡다하게 시키는 것은 선왕(先王)의 법이 아니다.

▣무릇 권농의 정사는 마땅히 육과(六科)로 나누어 그 직무를 맡겨 주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등용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업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원전(園廛)에 아홉 가지의 조항을 둘 것이니, 대추ㆍ밤ㆍ배ㆍ감ㆍ매실ㆍ살구ㆍ복숭아ㆍ오얏ㆍ호두로 아홉 가지의 과일을 삼아 그 성적을 고과하되, 나머지 여러 과일은 각각 토산(土産)에 따라 혹 출입이 있을 수 있다. 능금ㆍ빈파(頻婆) - 방언에 사과라고도 한다. - ㆍ앵두ㆍ석류ㆍ귤ㆍ치자ㆍ모과 등은 그 토의(土宜)에 따를 것이다.

포사(圃師)에 아홉 가지의 조항을 둘 것이니, 파ㆍ부추ㆍ마늘ㆍ생강ㆍ오이ㆍ박ㆍ배추ㆍ겨자ㆍ무로 아홉 가지의 채소를 삼아 그 성적을 고과하되, 그 나머지 여러 채소는 비슷한 종류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 참외ㆍ수박은 오이에 포함시키고, 호박ㆍ동아는 박에 포함시킨다. - 혹은 토의에 따라 서로 출입이 있을 수도 있다. - 아욱ㆍ상치ㆍ감자ㆍ토란 등 -

부공(婦功)에 아홉 가지의 조항을 둘 것이니, 통나무ㆍ산뽕나무ㆍ삼 - 즉 모마(牡麻)임 - ㆍ수삼 - 유자마(有子麻)임 - ㆍ모시ㆍ면(綿) - 즉 목화 - ㆍ청람(靑藍) - 즉 대청(大靑)임 - ㆍ잇꽃ㆍ자열(紫茢) - 즉 자초(紫草)임 - 이다.

이상의 아홉 가지로 그 성적을 고과하되, 닥나무와 옻나무도 함께 재배하여 백성의 용도를 넉넉하게 한다.

우형(虞衡)에 아홉 가지의 조항을 둘 것이니, 소나무 - 측백나무와 잣나무도 이에 포함시킨다. - ㆍ전나무ㆍ느릅나무ㆍ회화나무ㆍ오동나무ㆍ버드나무ㆍ상수리나무ㆍ단풍나무ㆍ은행나무이다.

이상의 아홉 가지로 그 성적을 고과하되, 남방의 죽전(竹箭)ㆍ기목(奇木) - 비자(榧子)나무ㆍ가사목(加斜木) 같은 것이다. - 은 각기 토의에 따르도록 한다.

목축(牧畜)에 아홉 가지의 조항을 둘 것이니, 말ㆍ소ㆍ양ㆍ돼지ㆍ당나귀ㆍ닭ㆍ거위ㆍ오리연못에 기르는 고기이다. 이상의 아홉 가지로 그 성적을 고과한다.

▣매년 춘분(春分)날에는 여러 면에 체문(帖文)을 내려 농사의 빠르고 늦음을 가지고 상벌 대상을 심사할 것이라고 약속할 것이다.

 

 

 

 

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제1조 제사(祭祀)

▣군현(郡縣)에서는 삼단(三壇 : 사직단 여단 성황단)과 일묘(一廟 : 문묘)에 제사 지내는데, 제사 지내는 대상의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알아야 마음에 향함이 있고 마음에 향하는 바가 있어야 재계하고 공경할 수 있다.

▣문묘(文廟)의 제사는 목민관(牧民官)이 몸소 행하되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목욕재계하여 많은 선비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기우제(祈雨祭)는 하늘에 비는 것인데, 지금의 기우제는 희롱하는 짓거리로 하늘을 모독하니 크게 예가 아니다.

●가뭄을 만나면 수령은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계하고 묵묵히 신의 은혜를 빌어야 하고 일체의 속된 풍속은 모두 엄히 금해야 할 것이다.

 

제2조 빈객(賓客)

▣빈(賓)은 오례(五禮)의 하나이므로 희뢰(餼牢 희생(犧牲)) 등 여러 물품이 너무 후하면 재물을 낭비함이 되고 너무 박하면 환대(歡待)의 뜻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그것을 조절하고 알맞은 제도(制度)를 만들어 후한 경우라도 제도를 넘지 않고 박한 경우라도 정한 제도 이하로 줄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예를 제정한 본뜻을 찾아 구명(究明)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감사의 순행이 천하의 큰 폐단이다. 이 폐단을 없애지 않는다면 부역(賦役)이 가중(加重)되어 백성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남방의 고을에서는 순사(巡使)의 순행 때가 되면 미리 살찐 소 한 마리를 준비하여 안채에다 매어 두고 한 달 남짓 동안 깨죽을 먹여 기르니 그 소의 고기가 기름지고 연하여 보통 소의 고기와 다르다. 그러면 순사는 크게 칭찬하고 고과(考課)에 최(最)를 준다.

아! 세속의 풍습이 이 지경이니 관리 노릇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빈객의 접대는 한결같이 옛 예를 따라 그 격식을 정하고, 비록 법은 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는 항상 강명(講明)해야 할 것이다.

▣옛날에 어진 수령은 상관(上官)을 접대하는 데 감히 예를 넘지 않았으므로 모두 아름다운 명예가 전적(典籍)에 실려 있다.

▣비록 상관(上官)이 아니라 하더라도 때때로 지나는 사성(使星)에게는 법에 따라 공경을 극진히 할 것이나, 횡포한 자는 받아들이지 말고, 그 이외의 사성에게는 삼가고 공손히 해야 된다.

▣옛사람은 내시(內侍)가 지나는 데에도 오히려 굽히지 않고 강직하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임금이 지나는 데에도 백성을 괴롭혀 가면서 임금께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남의 무덤을 깔아 뭉개고 남의 집을 부수어 감사가 지나는 길을 넓히는 자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제3조 교민(敎民)

▣수령의 직분은 백성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전산(田產)을 균등하게 하는 것도 가르치기 위함이요, 부역(賦役)을 공평히 하는 것도 가르치기 위함이요, 관직(官職)을 만들어 수령을 두는 것도 가르치기 위함이요,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하는 것도 가르치기 위함이다. 모든 정사가 닦여지지 않으면 교화(敎化)를 일으킬 겨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백세(百世)에 선치(善治)가 없었던 이유이다.

▣백성을 묶어 오(伍)로 만들어 향약(鄕約)을 행하는 것도 옛 향(鄕)ㆍ당(黨)ㆍ주(州)ㆍ족(族)의 유의(遺意)로 위혜(威惠)가 이미 흡족하였으니, 힘써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르치지 않고 형벌하는 것을 망민(罔民)이라 하니, 아무리 큰 악과 불효라 하더라도 먼저 가르치고 그래도 고치지 않은 뒤에 죽일 것이다.

▣형제간에 우애하지 않고 부끄럼 없이 송사를 하는 자도 우선 먼저 가르칠 것이고 바로 죽이지 말 것이다.

●필선(弼善) 윤전(尹烇 : 인조대 관료)이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되었을 때, 형제가 송사하는 백성이 있었다. 윤전이 그 아우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형과 소송을 하느냐.”

하니,

“나에게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아서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그 형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하니,

“아버지의 명이어서 감히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윤전은 곧 그를 꾸짖기를,

“너의 아우는 진실로 죄가 있다. 그러나 너의 아비가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옛사람 중에는 아비의 난명(亂命)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너의 재물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의 죄는 팔형(八刑)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가르치지 않고 형벌하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 여긴다.”

하고, 인륜(人倫)의 도리를 이야기하여 보냈더니, 그다음 날 다시 와서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먼 시골은 왕화(王化)와 거리가 머니 예속(禮俗) 행하기를 권면하는 것도 수령이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효자ㆍ열녀ㆍ충신ㆍ절사(節士)들의 숨은 행적을 들추어 정표(旌表)하는 것도 수령의 직분이다.

▣말세(末世)의 풍속이 아무리 박하다 하더라도 가르치고 인도하면 귀화(歸化)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제4조 흥학(興學)

▣옛날의 학교에서는 예악(禮樂)을 익혔는데, 지금은 예악이 붕괴(崩壞)되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라고는 독서(讀書)뿐이다.

▣문학(文學)이란 소학(小學)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의 흥학(興學)이란 것은 아마도 소학을 일으킴인 듯하다.

▣학문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니 스승이 있은 뒤에야 배움이 있는 것이다. 덕망(德望)이 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사장(師長)을 삼은 뒤라야 학규(學規)를 의논할 수 있다.

▣당무(堂廡)를 수리하고 늠미(廩米)를 조관(照管)하며 서적을 많이 비치(備置)하는 것도 어진 수령이 유의할 바이다.

▣단정한 사람을 골라 재장(齋長)으로 삼아 모든 사람의 표솔(表率)이 되게 하고, 예로써 대우하여 염치(廉恥)를 기르게 할 것이다.

향교의 일을 맡은 사람은 교장(校長)이 1인, 장의(掌議) 1인, 색장(色掌) 1인이다. 먼 벽지(僻地)에는 사족(士族)은 드물고 토족(土族)이 많으니 사족들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일체 향교에 왕래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토족들이 학궁(學宮)을 독점하여 저희들의 소굴로 삼는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이 불학 무식한 무리들로서 끼리끼리 모여 당파를 만들어 남을 모함하려면 그의 비밀을 들추어내고 쟁탈하는 것을 조정의 판국에 비교하며 간리(奸吏)들과 결탁하려면 감사에게 뜬소문을 퍼뜨리며, 수령의 애기(愛妓)와 교통하려면 현관(縣官)에게 뇌물을 바친다.

이들은 항상 아전들의 가까운 친구가 되어 너니 나니 하며 교장(校長) 될 사람을 상의하고 술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여 밤낮 싸움질만 한다. 그들이 계획하는 일은 부잣집 자제를 끌어들여 재임(齋任)을 맡기거나 제사에 집사(執事)를 시켜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스스로의 배를 불리려는 것뿐이다. 수령은 이러한 풍속을 알아 단정한 선비를 골라 재임을 맡겨야 한다.

▣계추(季秋)에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여 노인 봉양하는 것을 가르치고, 맹동(孟冬)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여 어른 공경하는 것을 가르치고, 중춘(仲春)에 향고례(饗孤禮)를 행하여 외로운 사람 구제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제5조 변등(辨等)

▣변등은 민지(民志)를 안정시키는 요의(要義)이다. 등위(等威)가 밝지 않아 위급(位級)이 어지러우면 민심(民心)이 흩어져 기강(紀綱)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도 등급을 분별함이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상하의 질서가 유지되어 각각 분수를 지켰는데, 근래에 와서 작록(爵祿)이 한쪽으로 치우쳐 귀족(貴族)이 쇠퇴하자, 호부(豪富)한 아전과 백성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호기를 부려 집과 안마(鞍馬)와 의복과 음식의 사치스러움이 법도를 넘어, 상(上)은 쇠퇴하고 하(下)는 상을 능멸하여 다시 등급이 없어졌으니, 장차 무엇으로 질서를 유지하여 원기(元氣)를 북돋고 혈맥을 통하게 하겠는가. 등급을 분별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족(族)에도 귀천이 있으니 그 등급을 분변해야 하고, 세(勢)에도 강약(强弱)이 있으니 그 실정을 살펴야 한다. 이 두 가지에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

●- 양반(兩班)은 동서(東西) 두 반(班)이고, 사(士)는 당하관(堂下官)이며, 대부(大夫)는 당상관(堂上官)이다. 요즈음에는 귀족을 양반이라고도 하고 사대부라 하기도 하니 이는 잘못인 것이다. -

▣궁실(宮室)ㆍ거승(車乘)ㆍ의복(衣服)ㆍ기용(器用)이 참람하고 사치스러워 법제(法制)를 넘은 것은 모두 엄히 금해야 된다.

▣대개 노비법(奴婢法)이 변한 뒤로 민속(民俗)이 크게 쇠하였으니 국가의 이익이 아니다.

●지금 먼 시골의 무지한 토인(土人)들은 대부분 형편이 넉넉한 반면 고가(故家)의 후예(後裔)들은 형편이 말이 아닌데, 수령이 되어 온 자들은 백 년 전에 떠돌던 말만을 듣고 오히려 이 모양 아닌 고가의 후예들을 귀족(貴族)과 호강(豪强)으로 여겨 소송 사건이 있을 적마다 먼저 억강(抑强)할 마음을 두니, 이는 큰 잘못이다. 대세가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선견(先見)만을 고집하여 사족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신해년에 노비법을 변경한 뒤부터 귀족은 날로 쇠퇴하고 천류는 날로 방자하여 상하의 질서가 문란하고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만약 변란이 생긴다면 토붕(土崩) 와해(瓦解)의 형세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서울이 이미 멀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데 현관(縣官)마저 임시로 머무는 나그네 꼴이니, 같은 마을과 이웃에 어리석은 백성을 통솔할 사람이 없다면 그 백성들이 난민(亂民)이 되지 않고 무엇이 될 것이며 또 어떻게 그 백성들의 난동을 막을 수 있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노비법을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난망(亂亡)을 구제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몰락한 귀족을 천류들이 번갈아 무함(誣陷)하는데도 관장(官長)이 조사하여 다스리는 데 그 진실을 모르고 잘못 다스리는 경우가 많으니, 이것이 또 오늘날 세속의 폐단이다.

●가난한 선비가 시골에 살면 으레 자질구레한 비방이 많은 것인데, 호강(豪强)하고 방자한 천류가 관리(官吏)와 체결(締結)하여 참소하고 무함하는 말을 은밀히 유포(流布)시키면 이를 들은 찰사(察使)는 관문(關文)을 보내어 마치 강도를 잡듯이 그 선비를 잡아다가 차꼬〔桁楊〕를 채우는 곤욕(困辱)을 준다. 가난한 선비가 이러한 곤욕을 한 번 겪으면 고개가 처지고 기운이 꺾여 다시는 감히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신분이 높은 호족(豪族)으로 백성의 전지(田地)를 빼앗고 남의 부녀를 강간하여 죄악이 길거리에까지 드러난 자는 징계하여 다스려야 되지만, 세세한 비난만이 있고 큰 죄악이 없는 자에게는 법관(法官)이 우선 너그러이 용서하여 경계하고 계속 그의 행동을 주시(注視)하는 것만으로도 허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 충분하니, 경솔히 그의 기를 꺾을 필요까지는 없다.

 

제6조 과예(課藝)

▣과거(科擧)의 학(學)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법(選擧法)을 고치지 않는 한, 과거 공부의 이습(肄習)을 권면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를 과예라 한다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제3이 ‘학교흥(學校興)’인데, 속리(俗吏)들은 학교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과예를 거기에 해당시킨다. 집에서 과시(課試)에 응하는 것을 순제(旬題)라 하고 관청에 가서 재예(才藝)를 겨루는 것을 백일장(白日場)이라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과시에 응할 만한 자는 문읍(文邑)이라 해도 수십 명에 불과하고 질읍(質邑)인 경우에는 5~6명에 불과한 실정인데, 그 거두어들이는 시권(試券)이 많은 고을에는 천 장, 작은 고을에도 5백 장은 되니, 이는 글자 한 자 모르는 초동 목수(樵童牧豎)까지 남의 글을 빌어 위권(僞券)을 내기 때문이다. ...백일장(白日場) 역시 민폐(民弊)이다. 읍(邑)에서 수십 리 거리에 사는 사람일 경우 기일(期日) 전에 성중(城中)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그 왕래에 필요한 주식(酒食)ㆍ연혜(煙鞋 연초와 신발)의 비용과 시지(試紙)ㆍ필묵(筆墨)의 값이 두 사람일 경우 1백 전(錢) 이상이 소요되니, 만약 한 집에서 5,6명이 백일장에 나간다면 그 경비가 3백 전이 된다. 3백 전이면 송아지가 한 마리이다. 그런데도 어린 자식들은 마음이 들떠서 나가겠다고 고집만 부리니, 백일장이 있을 적마다 가난한 아비의 이마에 주름살이 는다. 이것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 법도가 없기 때문에 한 집의 비용이 3천에 이르고 읍과(邑課)에 법도가 없기 때문에 한 집의 비용이 3백에 이른다. 법도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당(堪當)할 수 없는 것이다.

▣과예(課藝)에도 정원(定員)이 있어야 한다. 천거하여 선발이 끝나면 시험을 보여 명부(名簿)를 작성(作成)하고서 재예(才藝)를 시험할 것이다.

▣근세 이후로 문체(文體)가 비하(卑下)되어 구법(句法)이 요패(澆悖)하고, 편법(篇法)이 단촉(短促)하니,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된다.

▣동몽(童蒙) 중에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자는 따로 뽑아 가르칠 것이다.

●군현(郡縣)에서는 보통 1향(鄕)이 수십 개의 촌락(村落)을 거느리고 있는데 대략 4~5개의 촌락마다 반드시 하나의 서재(書齋)가 있다. 서재에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스승〔都都平丈〕 한 사람이 앉아서 수십 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 중에서 수재(秀才)를 선발하되, 수재의 기준은 10세 내외의 어린이로서 하루에 글 3~4천 자를 배워 십여 번을 읽고서 배송(背誦)하는 자를 상등(上等) 수재로 정하고, 하루에 2천 자를 배워 20번을 읽고서 배송하는 자를 중등 수재로, 하루에 글 천여 자를 배워 30번을 읽고서 배송하는 자를 하등 수재로 정할 것이다. 이 이하는 수재라 칭할 수 없다.

수령은 학궁에 첩문(帖文)을 내려, 학궁에서 여러 향리(鄕里)의 서재에 공문을 보내어 세 등급의 수재에 해당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성명(姓名)ㆍ연치(年齒)와 평소에 읽은 글과 현재 몇 자를 배워 몇 번 읽고 배송할 수 있는가를 성명 밑에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학궁으로 회보(回報)하게 하고 학궁에서는 수령에게 보고하게 할 것이다.

명부가 다 도착하면 수령은 날짜를 정하여 그 추천된 수재들을 소집하여 친히 면전(面前)에서 그 서재의 스승으로 하여금 그 아동이 읽지 않은 새로운 글을 가르치게 하여 그 아동이 과연 명부에 적힌 대로 될 수 있는가를 관찰하여 명실(名實)이 서로 맞는 자는 수재로 기록하고, 별도로 명부를 만들어 순제(旬題)나 백일장 때마다 수재로 선발된 자에게만 정권(呈券)을 허락할 것이다.

사맹(四孟)의 초하룻날에 수령은 수재로 뽑힌 여러 아동들을 불러 3개월 동안의 과제(課題)를 주어 읽어 외도록 하고, 다음 맹월(孟月) 초하룻 날에 현관이 강을 받아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상을 줄 것이다.

수재 선발에서 빠진 자 중에 혹 몇 달 사이에 머리가 갑자기 트여 수재로 선발되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거든 그 허실(虛實)을 면전에서 시험하여 추가로 기록할 것이다.

혹 수재로 선발된 자 중에 뛰어나게 영특한 자가 있거든 수령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데려와서 큰 인재(人材)로 만들어 국가에 바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수령들의 일정한 직무(職務)였다.

▣과예(課藝)를 부지런히 하여 급제(及第)가 속출(續出)하여 문명(文明)의 고장이 되는 것도 수령의 지극한 영광이다.

 

 

 

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제1조 첨정(簽丁)) : 군을 뽑아 등록하고 그들로부터 군포를 거두어들이는 실태

▣군정(軍丁)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포목(布木)을 거두는 법은 양연(梁淵 : ? - 1542)에게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려오는 폐단이 커져서 생민의 뼈에 사무치는 병통이 되었으니, 이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백성은 모두 죽고야 말 것이다

●국초(國初)에 호포(戶布)는 있었어도 군포(軍布)는 없었는데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 양연이 군적(軍籍)이 있는 자에게 포목 거두는 법을 위에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 양연은 바로 김안로(金安老)를 쫓아낸 사람이다. - 그러나 군적이 있는 자에게 포목 거두는 것을 공포(貢布)라 하고 번포(番布)라 하지 않았다.

●영종(英宗) 9년(1733) - 계축(癸丑) - 에 비로소 이 제도를 고치자고 의논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은 구전(口錢)으로 하자는 의견을 주장하였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진보(鎭堡)를 없애자는 의견을 주장하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은 대동세(大同稅)를 감하고 결전(結錢)을 더하자고 청하는 등, 의논이 분분하다가 26년(1750)에 이르러 비로소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게 되었다. 처음 의논할 때에는 호포(戶布), 혹은 결포(結布), - 결전(結田)에 의하여 포목을 거두는 것 - 혹은 구전(口錢), 혹은 유포(游布) - 문인(文人)도 무인(武人)도 아니면서 놀며 입고 먹고 사는 자에게 포목을 거두는 것 - 를 주장하였는데, 끝내는 은결(隱結)을 찾아내고 어염세(魚鹽稅)를 거두며, 유포(游布)를 두고 - 선무 군관(選武軍官)인데 곧 유포를 뜻한다. - 결전(結錢)을 거두어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군포(軍布)를 절반으로 감하여 2필 내던 것을 1필로 하고, 4냥 내던 것을 2냥으로 하고, 12두 내던 것을 6두로 하게 되니 그제서야 민력(民力)이 조금 펴지게 되었다.

1필을 감함에 따라 민력이 좀 펴진 것 같기는 하나, 첨군(簽軍)의 액수가 해마다 더해지고 달마다 불어나서 양군(良軍)에게 포목을 거두는 것이 숙종(肅宗) 초기에는 30만 명에 불과하던 것이, 영종(英宗)이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할 때에는 이미 50만 명이나 되었다.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적성(積城 양성(陽城)의 옛이름)고을 어느 촌가에 이르러 이렇게 시(詩)를 지었다.

시냇가 무너진 집 접시처럼 납작한데 / 臨溪破屋如磁盋

북풍에 지붕은 벗겨지고 서까래만 듬성듬성 / 北風捲茅榱齾齾

묵은 재 눈에 섞여 아궁이는 싸늘한데 / 舊灰和雪竈口冷

별빛 새는 떨어진 벽은 구멍이 뻐끔뻐끔 / 壞壁透星篩眼濶

집안의 살림 도구 너무도 초라하여 / 室中所有太蕭條

들고 나가 팔아도 칠팔 푼이 못 되겠네 / 變賣不抵錢七八

서너 개의 조 이삭은 삽살개꼬리 비슷하고 / 尨尾三條山粟穎

한 꿰미 매운 고추 대추를 연상하네 / 鷄心一串番椒辣

깨어진 항아리 베로 발라 새는 구멍 막았고 / 破罌布糊杜穿漏

시렁은 새끼로 얽어 천장에 매달았네 / 庋架索縛防墜脫

구리 수저는 벌써 이정(里正)이 앗아갔고 / 銅匙舊遭里正攘

쇠남비마저 이웃 토호에게 빼앗겨 버렸네 / 鐵鍋新被隣豪奪

푸르둥한 떨어진 무명 이불 한 채 뿐이니 / 靑棉敝衾只一領

부부유별이란 그 말이 통할 수 있으랴 / 夫婦有別論非達

어린애는 적삼이 뚫어져 어깨가 드러나고 / 兒穉穿襦露肩肘

태어난 이래 바지와 버선은 이름도 몰라 / 生來不識袴與韈

다섯 살 난 큰애는 기병에 뽑혀 있고 / 大兒五歲騎兵簽

세 살짜리 작은 애도 벌써 군관에 올랐다네 / 小兒三歲軍官括

두 아이 바치는 돈 일 년에 닷 냥이라 / 兩兒歲貢錢五百

하루 빨리 죽기가 소원이니 옷이야 무엇하랴 / 願渠速死況衣褐

세 마리 강아지가 애기들과 함께 자는데 / 狗生三子兒共宿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으르렁대네 / 豹虎夜夜籬邊喝

남정은 나무하러 가고 아내는 방아 품팔이 가니 / 郞去山樵婦傭舂

대낮에도 사립문 닫혀 보기에도 참혹하다 / 白晝掩扉氣慘怛

낮에는 두 끼나 굶고 밤에 와 밥을 짓고 / 晝闕再食夜還炊

여름엔 갖옷 하나 겨울엔 베옷만 입네 / 夏每一裘冬必葛

들 냉이 싹이 묻혀 땅 풀리기만 기다리고 / 野薺苗沈待地融

마을의 지게미도 술이 다 괴길 기다려야 하네 / 村篘糟出須酒醱

지난봄엔 관청 쌀 닷 말을 먹었는데 / 餉米前春食五斗

올해는 그것마저 믿지 못하는 실정이네 / 此事今年定未活

나졸이 대문 밖에 이를 땐 겁이 나지만 / 只怕邏卒到門扉

관청에 가서 매맞는 건 걱정하지 않네 / 不愁縣閣受笞撻

아! 이런 집이 온 천지에 가득한데 / 嗚呼此屋滿天地

구중궁궐 아득하니 어이 다 살펴주랴 / 九重如海那盡察

직지사란 한나라 때 생긴 벼슬이라 / 直指使者漢時官

이천석의 관리로서 상벌을 좌우했네 / 中二千石專黜罰

피폐하고 어지러움 바로잡지 못하거니 / 敝源亂本棼未正

공ㆍ황이 다시 나도 근절하기 어려우리 / 龔黃復起難自拔

멀리 정협의 유민도를 본떠서 / 遠摹鄭俠流民圖

새로운 시를 써 구중에 드릴까 하네 / 聊寫新詩歸紫闥

이 시는 건륭 갑인년(1794, 정조18) 겨울에 내가 지은 것이다. 양경(陽莖) 자른 것을 슬퍼한 시는 이러하다.

노전의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도 길다 / 蘆田少婦哭聲長

현문을 향해 슬피 울며 하늘에 호소하네 / 哭向縣門呼穹蒼

싸움터에 간 남편이야 못 돌아올 수 있지만 / 夫征不復尙可有

남자가 양경을 자른단 말은 듣지를 못했네 /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비 상복 벌써 벗고 아기는 탯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 舅喪已縞兒未澡

삼대가 군대에 뽑혀 군보에 있다네 / 三代名簽在軍保

잠깐 호소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지켜 섰고 / 薄言往愬虎守閽

이정의 호통에 외양간 소만 가 버렸네 / 里正咆哮牛去皁

칼 갈아 방에 들자 유혈이 낭자한데 / 磨刀入房血滿席

애 낳아 이런 고생한다며 자탄만 하네 / 自恨生兒遭窘厄

잠실의 음형이 어찌 죄 있어 그러하랴 / 蠶室淫刑豈有罪

아이 자지 끊는 것도 또한 슬픈 일일세 / 閩囝去勢良亦慽

생생하는 그 이치 하늘이 준 것이라 / 生生之理天所予

하늘의 도는 사내요 땅의 도는 여자로다 / 乾道成男坤道女

짐승들의 새끼 없음도 오히려 슬프거늘 / 騸馬豶豕猶云悲

생민들의 혈속이야 더할 말 있으랴 / 況乃生民思繼序

부호한 집은 일 년 내내 음악만 연주하며 / 豪家終歲奏管絃

쌀 한 톨 비단 한 치 내놓지 않네 / 粒米寸帛無所捐

다 같은 백성인데 후박이 웬말이냐 / 均吾赤子何厚薄

여관에서 자꾸만 시구편을 외노라 / 客窓重誦鳲鳩篇

이 시는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계해년(1803, 순조3) 가을에 강진(康津)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에 노전(蘆田)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에 들어가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갔다. 백성이 칼을 뽑아 그 양경(陽莖)을 스스로 자르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욕을 받는다.”

라고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경을 가지고 관아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백성들의 실정은 걱정하지 않고 속례(俗例)만 따르므로, 그 당시 어떤 독살스러운 백성이 이와 같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 한둘을 뽑아 보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넉넉한 집을 찾아내어 역전(役田)을 보충하고 그것으로 실제의 군사를 고용토록 하여야 한다.

●대개 양역(良役)이란 것은 근본 없는 서인(庶人)이 모두 뽑히게 된다. 특별히 넉넉한 집이나 세력이 있는 백성은 권세도 있고 재력도 있어 원한을 품을 수 있고 저주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령도 겁을 내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곧 떠돌이 비렁뱅이나 질병에 지치고 의지할 데 없는 궁한 백성만 잡아, 4부자를 한 군안(軍案)에 같이 등록시키기도 하고, 3~4역을 한 몸에 중복 부담시키므로 그 원성에 화평을 잃게 한다. 차라리 넉넉한 집에서 돈을 거두어 역전(役田)을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가난한 자는 무슨 죄로 이미 천한 이름을 갖게 되고 또 재물까지 내야 하며, 부자는 무슨 복으로 천한 이름을 벗고 또 재물도 손해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군역(軍役) 한 근(根)에 5~6명을 뽑아 두고 모두 미포(米布)를 거두어 아전들의 주머니를 채우게 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군안(軍案)과 군부(軍簿)는 모두 정당(政堂)에 두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가서 아전들의 손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포목 거두는 날에는 목민관이 친히 받아야 한다. 하리(下吏)에게 맡기면 백성들의 비용이 갑절이나 늘게 된다.

▣족보(族譜)를 위조하고 직첩(職牒)을 몰래 사서 군첨(軍簽)을 면하려 하는 자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향(遐鄕)의 문과 출신(文科出身) 자들은 분관(分館)에서부터 낭서(郞署)에 이르기까지 그 직첩(職帖)을 얻은 것이 많은 자는 수십 장이며 적은 자도 10여 장이나 된다. 죽은 후 그 자손이 빈한하면 직첩 중 깨끗하고 화려한 직첩 - 장령(掌令)이나 이조랑(吏曹郞) 같은 벼슬 - 은 그대로 두어 가보(家寶)로 삼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내어 파는데, 천민으로서 동성(同姓)이 되는 자들이 모두 비싼 값으로 이 직첩을 사서 - 한 장의 값이 혹 1백 냥까지 간다. - 조상으로 떠받들고 그 호적을 고친 다음에는 그 집에서 전해 오던 군역(軍役)을 들고 나와 원통함을 호소한다. 이에 관에서 믿을 만한 문서를 바치라고 하면 사 두었던 직첩을 높이 받드는데, 어인(御印)이 빛나고 관원의 글씨 또한 틀림없으므로 의심 없이 믿고 곧 면제를 허락한다. 어리석다는 조롱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10식년의 호적과 군안을 거슬러 상고하여 1백 년까지 이르게 되면 그 근본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상번군(上番軍)을 치장해 보내는 일이 한 고을의 큰 폐단이 되니, 십분 엄하게 살펴야 백성의 피해가 없을 것이다.

●기병(騎兵)ㆍ어영군(御營軍)ㆍ금위군(禁衛軍)의 번상법(番上法)을 보면, 큰 고을은 50~60명을 징집하고 작은 고을은 30~40명을 징집하는데 , 옛날의 군(軍)이 얼마든 관계없이 새로 뽑는 군이 항상 많다. 상영(上營)에서 공문이 올 때마다 군리(軍吏)들은 좋아 날뛰면서 마치 뜻을 이룰 좋은 기회나 만난 것처럼 여겨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 한다.

 

제2조 연졸(練卒) : 군사 조련

▣연졸(練卒)은 무비(武備)의 요긴한 일이니 곧 조연(操演)과 교기(敎旗)의 술법이다.

▣오늘날에 이른바 연졸(練卒)이라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 첫째는 속오(束伍), 둘째는 별대(別隊), 셋째는 이노대(吏奴隊), 넷째는 수군(水軍)인데, 이에 대한 법이 갖추어지지 못한 터이라 훈련해도 소용이 없고 단지 형식뿐이니, 구태여 요란하게 훈련할 필요가 없다.

▣만약 풍년이 들고 수비가 완화되더라도 조련을 행하라는 명령이 멈추지 아니하면, 그 대오를 채우고 장비를 갖추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군중에서 금품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군율이 지극히 엄중하다. 공사간의 조련에서는 마땅히 이 폐단을 살펴야 할 것이다.

 

제3조 수병(修兵) : 병기를 수리하고 관리하는 것

▣병(兵)이란 병기(兵器)를 말한다. 병기는 백 년 동안 쓰지 않아도 좋으나 하루라도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병기를 관리하는 것은 곧 수령의 직무이다.

▣전죽(箭竹 :화살)을 옮겨 반포하는 것과 월과(月課)에 쓸 화약을 나누어 보내는 일은, 마땅히 그 입법(立法)의 본의를 생각하여 그 출납을 삼가야 한다.

 

제4조 권무(勸武) : 무예를 권장하고 따라서 훌륭한 무사를 선발 보충하는 것

▣우리나라 풍속은 온순하고 근신하여 무예를 즐기지 않고 익히는 것은 오직 활쏘기뿐인데, 요즈음은 이것마저 익히지 않으니 무예를 권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목민관으로서 구임(久任)하는 자는 혹 6주년까지 이른다. 실로 이와 같은 자라야 무예를 권장할 수 있고, 백성들도 이를 따라 서로 권면하게 될 것이다.

▣강한 쇠뇌〔强弩〕를 설치하고 발사하는 일은 익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5조 응변(應變) : 예측하지 못할 변란에 대비하여 항시 임시응변의 방법을 강구할 일과, 난을 진압함에 있어서는 항상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중한 태도로 처리할 것

▣수령은 곧 병부를 가진 관원이다. 일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변화가 많으니, 임기응변의 방법을 미리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개 괘서(掛書)나 투서(投書)는 태워서 없애버리거나 말 없이 살펴야 한다.

▣대개 변란이 있을 때 경동하지 말고 조용히 그 귀추를 생각하여 처리해야 한다.

●권준(權晙)이 금상(今上) 임신년(1812, 순조12)에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이때 가산(嘉山)의 역적 홍경래(洪景來)가 험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으니 서쪽 지방이 온통 흉흉하였다. 전의 수령은 아전ㆍ장교ㆍ관노ㆍ사령을 뽑아 관청을 둘러싸고 주야로 수비하기를 쉬지 않아 고을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권준(權晙)이 부임해서는 둘러싸고 수비하는 일을 없애고 평일처럼 성문(城門)을 활짝 열어젖히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지방 풍속이 포학하여 관장을 죽이려고 음모하면, 그들을 잡아 죽이든가 조용히 진압하되 그 기미를 살피고 간사함을 꺾어 없애는 것을 외곬으로 해서는 안 된다.

●신계(新溪)ㆍ곡산(谷山)ㆍ수안(遂安) 등지는 지방 풍속이 사납고 포학하여 관리의 다스림이 훌륭하지 못하면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곤 하였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736~1795) 연간에 토족들이 수안 언진산(彦眞山)에 웅거하고 있는 것을 힘겹게 쳐서 사로잡았으며, 수십 년 전에는 곡산 백성들이 군포(軍布)를 많이 거둔다 하여 천여 명이 일제히 관가에 몰려와 호소하며 난을 일으켜 관장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였는데, 그런 지 십여 년 뒤에 과연 난민이 도호(都護)를 쫓아냈다. 이에 안핵어사(按覈御史) 홍희신(洪羲臣)이 이대성(李大成)ㆍ한경일(韓經一) 등 40여 명을 죽이고 수백 명을 여러 곳에 나누어 귀양 보냈으니, 이는 모두 관장이 기미에 밝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일을 다스리는 법은 그 두목만을 잡아 죽이고,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벌주지 말아서 민심을 안정시킬 뿐이요, 잡아 죽이는 것을 최선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강도와 유적(流賊)들이 서로 모여 난을 일으키면, 혹 타일러서 항복을 받거나 혹 꾀를 내어 사로잡아야 한다.

●고려조의 윤위(尹威 : 1158-?)가 남원부(南原府)의 염찰(廉察)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을 외곽에 도둑의 무리가 많이 모여 산에 주둔하고 스스로 방위하고 있었다. 윤위는 단기로 부에 들어가서 화복(禍福)으로 달래니, 도둑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명령에 따랐다. 이에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니 온 경내가 편안해졌다.

▣토적(土賊)이 이미 평정되었는데도 민심이 흉흉하니, 성심을 다하고 신의를 보여 동요하는 민심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이수일(李守一)이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가 되었다. 앞서 반란자 국경인(鞠景仁) 등이 왕자를 잡아 적에게 넘기려고 모의하였다. 그런데 일이 진정되자 백성들은 모두 자기들을 죄로 몰아 죽이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남몰래 강을 건너 북호(北胡)에 투탁하였는데, 공이 위로하고 회유하여 달포 사이에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수일(李守一) : 1554~1632.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岩),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 공신(振武功臣) 2등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해진 뒤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경인(鞠景仁) : ?~1592. 회령(會寧)에 유배되어 그곳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어가 치부(致富)하였으나, 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침략해 오자,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그곳에서 피란 중이던 임해군(臨海君 珒)과 순화군(順和君 珏)을 포박하여 왜장에게 넘겨주었다. 남쪽으로 퇴각하는 가등청정으로부터 회령 수비를 위임받았으나 북평사(北評使)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유생 신세준(申世俊)ㆍ오윤적(吳允廸)에게 잡혀 참살당했다.

 

제6조 어구(禦寇) :외침을 방어 공격하여 그 지역을 사수해야 하는 책무

▣도적의 난리를 만나게 되면 지방을 지키는 신하는 마땅히 그 지역을 지켜야 하니, 그 방어의 책임은 장신(將臣)과 같은 것이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허(虛)한데 실(實)한 것으로 보여 주며, 실한데 허한 것으로 보여 준다.” 했으니, 이것 또한 수어(守禦)하는 자로서 알아야 할 일이다.

▣지키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아 적으로 하여금 지경을 지나게 하면, 이것은 적을 임금에게 보내 주는 것이니 추격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높은 충절로 사졸을 격려하여 작은 공이나마 세우면 이것이 으뜸이요,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죽음으로 끝을 맺어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의를 세우는 것 역시 분수를 다하는 일이다.

▣임금의 행차가 지방으로 피난갔을 때, 지방을 지키는 신하가 그 지방 산물의 식찬을 올려 충성을 표하는 것 역시 맡은 바 직분의 당연한 일이다.

▣난리가 미치지 않는 지방에서는 백성을 위로하여 편안하게 하며, 인재를 기르고 농사를 권장하여 군사의 부담을 넉넉하게 하는 것 역시 지방을 지키는 수령의 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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