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 형전(刑典) 6조
제1조 청송(聽訟) : 모든 송사를 들어 처리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송사를 처리하는 자 자신의 성실한 태도가 중요하고, 따라서 공명정대하며 신속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청송(聽訟)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근본은 신독(愼獨)에 있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것이니, 백성을 가르쳐서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또한 송사를 없애는 일이다.
▣송사 처리를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쉽게 하는 것은 타고난 재질이 있어야 하나 그 방법은 몹시 위험하고, 송사 처리를 반드시 분명히 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는 데 있으나 그 법이 사실에 꼭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송사를 줄이려는 사람은 그 판결을 반드시 더디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한 번 판결하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다.
▣막고 가리워서 통하지 못하면 민정이 답답하게 되니, 하소하러 오는 백성으로 하여금 부모의 집에 들어오는 것 같이 하게 하면 이것이 어진 목민관이다.
▣무릇 소송이 있을 경우 급히 달려와서 고하는 자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니, 이에 응하기를 여유 있게 하여 천천히 그 사실을 살펴야 한다.
▣골육(骨肉) 간에 서로 다투어 의리를 잊고 재물을 탐내는 자는 징계하기를 엄히 해야 한다.
▣전지(田地)에 대한 송사는 백성의 산업에 관계되는 것이니,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여야 백성들이 따를 것이다.
▣나라 법전(法典)의 기록 역시 분명히 잘라 정한 법문이 없어서 관에서 좌우하는 대로 하게 되니,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분쟁과 송사가 많아지는 것이다.
▣노비(奴婢)에 관한 송사는 법전에 실린 것이 번잡하고 기록이 많아서 의거할 수가 없으니, 인정을 참작하여 할 것이요 법문에만 구애할 일이 아니다.
▣차대(借貸)에 관한 소송은 마땅히 오르내림이 있어야 한다. 혹은 엄중히 하여 빚을 독촉하여 주기도 하고, 혹은 은혜를 베풀어 빚을 탕감하여 주게도 하여 고지식하게 법만 지킬 것이 아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사채(私債)의 이자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자는 장팔십(杖八十)에 처한다.” - 금제조(禁制條) -
하고 그 주에,
“이율(利率)을 10푼으로 정하여 매달 1푼을 받으면 곧 10승(升)에 1승을 받는 유와 같은 것이며, 매해 5푼을 받으면 10승에 5승을 받는 유와 같은 것이다. 연월(年月)이 많이 지났더라도 이자는 본전의 갑절을 지나지 못한다.”
하였다.
▣군첨(軍簽) 관계의 소송으로 두 마을에서 서로 다툴 때는, 그 근맥(根脈)을 고찰하여 확실하게 어느 한 쪽으로 결정해야 한다.
제2조 단옥(斷獄) : 옥사의 판결이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지중한 일이기 때문에 보다 밝고 신중해야 하며, 취조할 때 남형(濫刑)을 가하는 것은 법례를 잘 알지 못하는 소치이므로 되도록 삼가야 한다.
▣옥사를 처리하는 요령은 밝고 삼가는 것뿐이다. 사람의 죽고 삶이 내가 한 번 살피고 생각하는 데 달렸으니 어찌 밝히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선(鄭瑄)은 말하기를,
“시골 백성들이 한 번 관문에 이르면 이졸(吏卒)들이 호통치고 매질하여 그만 혼비백산하고 기맥이 떨어져 그 구속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빨리 벗어나고자 망녕되이 스스로 거짓 죄를 자백하는 자도 있고, 아전들은 빨리 처리하기만 힘써서 강제로 고문하여 초사(招辭)를 인정하도록 핍박하는 자도 있으며, 관장(官長)은 스스로 자기 견해만 믿고 멋대로 억측하는 자가 있는데, 아전들은 그 뜻을 순순히 좇아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자가 없다. 아! 한 사람이 옥에 들어가면 온 가족이 함께 울고, 한 가지 죄안이 성립되면 아내와 자식이 팔려가게 된다. 원서(爰書)의 몇 마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다뤄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민(下民)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려면 관청 문을 크게 열어서 스스로 호소하게 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고, 그중 은미(隱微)하여 밝히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거리에서나 읍에서도 찾아 묻고 꾀하여 자나 깨나 잊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귀신이라도 와서 알려 줄 것이다.”
하였다.
▣큰 옥사가 만연하면 원통한 자가 열에 아홉은 된다. 자기 힘이 미치는 데까지 남몰래 구해내면 은덕을 베풀어서 복을 구하는 일이 이 일보다 더 클 수 없을 것이다.
▣그 괴수(魁首)는 죽이고 그 주련(株連 : 연루자)은 용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원한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의심나는 옥사는 밝히기가 어려우니 용서하는 것이 제일 착한 일이며 덕의 기본이다.
▣
오래 갇힌 죄수를 놓아 주지 않고 세월만 끄는 것보다는, 그 부채를 면제하고 옥문을 열어 내보내는 것이 또한 세상의 쾌한 일이다.
▣명확한 판단으로 즉시 판결하여 막히고 걸리는 일이 없으면, 마치 어두운 먹구름에 번개가 스치고 맑은 바람이 말끔히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잘못된 생각으로 그릇 처결한 것에 대해 그 잘못을 뉘우치고 감히 허물을 숨기지 않는 것은 역시 군자의 행실이다.
▣혹독한 관리로서 각박하게 법문만을 전용하여 그 위엄과 밝음을 펴는 자는 흔히 좋게 죽지 못한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율문(律文)을 읽지 않으므로 사부(詞賦)는 잘하나 형명(刑名)에는 어두우니, 이것이 오늘날의 속폐(俗弊)인 것이다.
▣인명(人命)에 관한 옥사는 옛날에는 소홀히 했고 지금은 엄밀하게 하니, 이에 대한 전문학(專門學)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박환(朴煥 1584-1671)이 금구 현령(金溝縣令)이 되었는데, 여덟 살짜리 전 남편의 애를 데리고 있는 어떤 백성의 처가 있었다. 그 백성이 취해 누웠는데 애가 도끼를 가지고 그 옆에서 희롱하다가 실수하여 도끼를 떨어뜨려 아비의 다리를 다쳤다. 그 백성이 아이가 제 친아비 아님을 밉게 여겨 고의로 찍은 것으로 의심하고 드디어 관가에 소송하여, 옥사가 올라가니 순찰사는 법으로 처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여러 번 아이가 실수로 다치게 한 것이지 고의는 아니라고 다투니 순찰사가 책망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차라리 수판(手板)을 내놓고 돌아가는 일이 있을지언정 죄 없는 사람은 차마 죽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어찌 나만이 그렇지 않겠느냐?”
하면서, 더욱 힘써 다투므로 아이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었다.
▣옥사가 일어난 곳에는 아전과 군교들이 횡포를 부려 집을 부수며 침략하므로 그 마을은 그만 망하게 되니 가장 먼저 염려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부임하여 처음 정사할 때는 의당 이런 일에 대하여 분명한 약속이 되어 있어야 한다.
●대개 살옥(殺獄)이 있으면 그 주범(主犯)이 된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간련(干連)ㆍ간증(看證)ㆍ인보(隣保)의 무리들은 본래 죄를 범한 것이 없다. 그런데 한 번 목록(目錄)에 들어가면 반드시 재검(再檢)을 거치고, 혹 불행히 3검, 4검, 5사(査), 6사에 수갑을 차고 옥에 갇혀 걸핏하면 몇 달에 이른다. 혹 여러 해 뒤에 별사(別査)로 심리(審理)하면 그때 또 잡아들이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이웃에 원수를 맺으므로 동리에서 보존하지 못하고, 안면으로 돌봐 주면 관장(官長)이 죄를 씌워 억울하게 곤형(棍刑)을 받는다. 옥에 들어가면 유문(踰門먼저 들어온 죄수에게 바치는 예물)ㆍ해가(解枷 칼을 벗으면 선배죄수에게 주는 선물)의 비용이 있고 구류(拘留)되면 주반(酒飯)ㆍ연항(烟炕 온돌 피우는 비용)의 비용이 있어 백에 하나도 온전함 없이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살인옥을 난리와 같이 겁내어 한 번 말이 나기만 하면 물고기가 놀라듯, 짐승이 숨듯 하여 삽시간에 그만 사방으로 흩어진다. 여기서 완악한 장교와 악질 아전들이 으르고 소리치면서 그 노약(老弱)을 묶고 부녀들을 잡으며, 솥을 앗아가고 돼지와 송아지를 몰아가며, 항아리를 찾아내고 길쌈한 것을 모두 노략질하여 간다.
▣무고(誣告)로 옥사를 일으키는 것을 이름하여 도뢰(圖賴)라 하는데, 이런 것은 엄중히 다스려 용서하지 말고 반좌율(反坐律)로 처결해야 한다.
▣크고 작은 옥사 처결에는 모두 기한 날짜가 있다. 해가 지나고 세월이 가서 죄인이 늙고 수척하게 버려두는 것은 법이 아니다.
▣살인(殺人)하여 몰래 매장한 것은 모두 파내서 검시해야 한다. 《대전(大典)》의 주는 본시 잘못된 기록이니 구애할 필요가 없다.
제3조 신형(愼刑) : 형벌로 백성을 규제하는 것이 가장 말단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덕행을 쌓아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형벌을 쓰더라도 꼭 법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민사(民事)ㆍ공사(公事)ㆍ관사(官事)ㆍ사사(私事) 등을 구분하여 그 완급(緩急)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목민관의 용형(用刑)은 3등으로 나눈다. 민사(民事)는 상형(上刑)을 사용하고, 공사(公事)는 중형(中刑)을 사용하고, 관사(官事)는 하형(下刑)을 사용하며, 사사(私事)는 형벌이 없는 것이 옳다.
●사사(私事)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공경을 드리더라도 관의 위치에서는 사사이며, 아내가 내실에 거처하는 것, 아들이 책방에 거처하는 것, 가묘(家廟)에서 제사 받드는 것, 친구 접대하는 것도 사사이며, 관주(官厨)의 쌀과 현사(縣司)의 땔감 등 일용 소비와 동기(銅器)ㆍ목사(木笥)의 제작과 포백저면(布帛苧棉)을 사고파는 것도 모두 사사이다. 이러한 일체의 사사에서 과오가 있는 자에게는 비록 한 대의 태장, 반 대의 회초리라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사사엔 형벌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아버지에게 병환이 있어서 의리(醫吏)를 시켜 약을 달이는데, 약 속에 인삼ㆍ녹용이 들어 있는 것을 의리가 피곤해서 자다가 그만 다 태워 버렸다 하더라도 목민관은 마땅히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기를,
“네 역시 오랫동안 수고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며, 허물을 책망하지 말고 다시 다른 약을 달이게 하면 의리는 감격하여 기뻐할 것이다. 만약 엄한 곤형을 가하고 약 값을 물어내라 하면 의리는 관문을 나가자마자 그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저주하며 축원하게 될 것이니 도리어 불효가 되지 않겠는가?
▣집장 졸(執杖卒)을 그 자리에서 노해 꾸짖어서는 안 된다. 평시에 약속을 거듭 엄중히 하고 일이 지난 후에 징계하여 다스리기를 반드시 신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얼굴빛을 변하고 음성을 높이지 않아도 장형(杖刑)의 너그럽고 사나움이 뜻대로 될 것이다.
●목민관으로 사나운 형벌을 숭상하는 자는 죄수에게 장형을 실시할 때마다 먼저 매 때리는 군졸을 매질하는데, 그 방법은 반드시 붉은 곤장으로 뒷 복사뼈를 쳐서 그 자리에 푹 쓰러지게 한다. 곤장 치는 자가 세게 치지 않으면 곤장 치는 군졸을 때리니, 갑(甲)으로 인하여 을(乙)의 복사뼈가 터지고, 을로 인하여 병(丙)의 복사뼈가 깨어진다. 그래서 덩굴이 뻗어 엉키고 나무가 가지 치듯, 정(丁)에도 이르고 무(戊)에도 이른다. 그래서 본래의 죄수 다스리는 일은 도리어 뒷전으로 돌아가고 엉뚱한 난리가 갑자기 평지에서 일어난다. 아주 심한 자는 뼈가 부서지고 기절하였다가 끝내는 죽기까지 하여 이름 없는 귀신이 앞뒤로 잇따르니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다. 죽는 자의 슬프고 원통함은 고사하고라도, 정치하는 체모에 있어서 어찌 전도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버릇은 다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령으로서 시행할 수 있는 형벌은 태형(笞刑) 50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여기서 넘는 것은 모두 남형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큰 곤장 사용하기를 좋아하여 2태(笞) 3장(杖)으로는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형벌은 백성을 바르게 하는 일에 있어서의 최후 수단이다. 자신을 단속하고 법을 받들어 엄정하게 임하면 백성이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형벌은 쓰지 않더라도 좋을 것이다.
▣일시의 분으로 형장을 몹시 심하게 하는 것은 큰 죄이다. 열성조의 남긴 훈계가 간책에 빛나고 있다.
▣부녀자에게는 큰 죄가 아니면 형벌은 결행하지 못한다. 신장(訊杖)은 오히려 가하나 볼기를 치는 것은 더욱 욕된 일이다.
●부녀자는 비록 살옥죄를 범하였더라도 그 태아(胎兒)의 유무를 살피고 나서 형벌을 시행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른 죄에 있어서랴? 부녀자에게 볼기를 치는 자는 그 고쟁이를 벗기고 속치마만 입힌 다음 물을 끼얹어서 옷이 살에 착 달라붙게 하니, 그것이 법정(法庭)에 있어서도 오히려 보기에 거리낀다. 그런데 근래는 관장들이 볼기를 노출시키게 하거나 곤장을 사용하여 생기는 해괴하고 놀라운 일은 차마 들을 수 없다. 어떤 현령이 신칙하여 볼기를 노출하도록 하니 그 부인이 옷을 추키고 일어서서 관장을 향해 꾸짖는데, 관장의 어미를 들추고 할미를 끌어내며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니 관장 또한 난처하여 미치광이로 돌리면서 내보냈다 한다. 윗사람이 그 도를 잃었으니 아랫사람이 거만하고 무례한들 어찌할 것인가? 목민관은 마땅히 이를 생각하고 예법을 삼가 지켜서 후회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늙은이와 어린이를 고문 취조하지 못하는 것은 율문에 명시되어 있다.
●《대명률(大明律)》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70세 이상과 15세 이하 및 불치의 병으로 폐인이 된 자를 고문 취조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만약 어기는 자는 태형 50에 처한다.”
세종 12년 교서에 이러했다.
“감옥에 갇히는 것과 엄중한 매는 사람들이 다 같이 괴로워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가긍한 것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이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은 살인 강도를 제외하고는 구금(拘禁)을 허락하지 않으며, 80세 이상과 10세 이하는 비록 죽을죄를 범했더라도 또한 구금 고문하지 말고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처리하게 한다.”
▣악형(惡刑)은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니, 평민들에게 경솔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제4조 휼수(恤囚) : 옥이란 산 사람의 지옥이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관장으로서 충분히 그 고초를 염두에 두어 몸소 보살펴 주어야 하며,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우는 것 또한 옛 성왕(聖王)의 법이 아니므로 되도록이면 시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옥(獄)이라는 것은 양계(陽界)의 지옥이니 옥에 갇힌 죄수의 고통은 어진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살펴야 할 일이다.
▣칼을 목에 씌우는 것은 후세에 생긴 일이요, 선왕의 법은 아니다.
▣옥중에서 토색을 당하는 것은 남모르는 원통한 일이다. 목민관이 이 원통함을 살피면 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들어 아픈 고통은 제집에 편히 있을 때에도 오히려 견딜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옥중에 있어서랴.
▣옥이라는 것은 이웃 없는 집이요, 죄수는 걸어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니, 한 번 추위와 굶주림이 닥쳐오면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옥에 갇힌 죄수가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긴 밤에 새벽을 기다리는 것 같으니, 다섯 가지 고통 중에도 오래 끄는 고통이 가장 심하다.
▣장벽이 허술하여 중죄수가 탈출하면 상사(上司)에서 문책하게 되니, 역시 봉공(奉公)하는 수령으로서 걱정할 일이다.
▣설 명절〔歲時〕에는 죄수들도 집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 은혜와 신의로 서로 믿는다면 도망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왕지(王志)가 동양 태수(東陽太守)가 되었는데 옥중에 중죄수 40여 명이 있었다. 동짓날에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더니 명절을 쇠고 모두 돌아왔는데, 오직 한 사람이 기약을 어기니 옥관이 사실을 말하였다. 왕지가 말하기를,
“이것은 태수의 일이니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튿날 아침 과연 죄수가 스스로 옥으로 나와서,
“아내가 임신한 관계였다.”
고 사죄하니, 이속과 백성들이 탄복하였다.
▣장기 죄수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자녀의 생산이 끊기게 되는 자는 그 정상과 소원을 참작하여 자애와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
▣늙고 약한 자를 대신 가두는 것도 측은히 여겨야 할 일이나, 부녀자를 대신 가두는 일은 더욱 어렵게 여기고 조심해야 한다.
●영조(英祖) 37년에 이렇게 하교하였다.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은 정사를 잘하는 도리이다. 무릇 범죄를 조사하고 다스릴 때에, 아들로 아버지를 대신하고 아우로 형을 대신하는 것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아버지로 아들을 대신하고 형으로 아우를 대신하기에 이르며 심지어는 그 어머니까지 미치니, 기강에 어긋나고 풍화에도 관계가 된다. 또 잡직(雜職)의 유에 있어서는 그 정실 아내를 가두고 차지(次知)라 이름하며 침노해 낚아내는데 그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후로는 아버지로 아들을 대신하거나 형으로 아우를 대신하거나, 정실 아내를 조사해 다스려 차지라 대신하는 일은 일체 엄금한다. 혹시라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대소 관원을 막론하고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다스리며, 그 부하들은 사실이 발견되는 대로 형장을 쳐서 귀양 보낸다.”
▣유배(流配)되어 온 죄인은 집을 떠나 멀리 귀양살이 하는 사람으로 그 정상이 슬프고 측은하니, 집과 양곡을 주어 편안히 거처하게 하는 것이 목민관의 책임이다.
●죄가 죽을 데까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니, 그를 업신여기고 핍박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정사가 아니다. 유배에는 대략 네 가지의 등분이 있다. 하나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서 안치(安置)의 귀양인 것이요, 하나는 죄인의 친족으로서 연좌된 귀양인 것이요, 하나는 탐관오리로서 법에 의하여 도류(徒流)를 당한 귀양이요, 하나는 천인들의 잡범으로 아래에서 보내어 온 자들이다. 정국이 한번 변하여 대세가 기울어지면 비록 의정대신(議政大臣)이라도 능욕을 당하는데 하물며 사대부(士大夫) 이하의 사람이야 더할 말 있으랴? 반복될 희망이 있는 자라면 수령이 비밀히 먹을 것을 보내고, 아전들이 남몰래 충성을 바치지만 근본이 외롭고 위태로워 이제는 희망이 없는 자라면 이 업신여기고 학대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 시에,
조금 궁하면 동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 小窮有人憐
아주 궁하면 도와줄 사람이 없다네 / 大窮無人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5조 금포(禁暴) : 하민(下民)을 괴롭히는 폭력배, 곧 토호(土豪)ㆍ호강(豪强) 귀척(貴戚) 등을 기탄없이 단속해야 하며, 권문 세가의 힘을 믿고 약탈을 자행하는 무리와, 건달패ㆍ투전꾼ㆍ주정꾼 등을 일체 근절하여 양민의 피해가 없게 해야 한다.
▣횡포와 난동을 금지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니, 호강(豪强)을 쳐 물리치고 귀근(貴近)을 꺼리지 않는 것 또한 목민관 된 자가 힘써야 할 일이다.
●호강(豪强)의 종류를 종합하여 말하면 대개 7종이 있으니, 1은 귀척(貴戚), 2는 권문(權門), 3은 금군(禁軍), 4는 내신(內臣), 5는 토호(土豪), 6은 간리(奸吏), 7은 유협(游俠)이다. 무릇 이 일곱 가지 무리에 대해서는 힘써 억제하여 백성을 편안히 해야 한다.
▣권문 세가에서 종을 놓아 횡행하여 백성에게 해를 주는 것은 금해야 한다.
●정복시(鄭復始 1522-1595)가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 - 1565)의 집 종이 그 고을에 살면서 세력을 믿고 마음대로 횡행하여 소민들을 침해하였다. 전후의 수령들은 감히 무어라 말을 못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자 곧 잡아들여 사실을 캐어 법으로 다스리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후원(李厚源 1598-1660) - 호는 오재(迂齋) - 이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심기원(沈器遠 ? - 1644)이 그때 대관(大官)으로 이웃 고을에 귀양 와 있으면서 고을 사람을 위협하여 종을 삼고 공에게 잡아 보내 달라고 하였다. 공이 허락하지 않으니 심기원의 종자들이 제 마음대로 백성들을 결박하여 갔다. 공이 곧 그 종자들을 잡아다 엄중히 다스리니, 심기원은 매우 분하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김효성(金孝誠 1585-1651)이 청안 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귀척근신(貴戚近臣) 집 두 종이 고을 안에 살면서 세력을 믿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졸을 보내어도 잡아오지 못하므로 공이 친히 가서 결박하여다가 온 고을에 돌려 보이고 형장을 쳐 죽였다.
유정원(柳正源 1703-1761)이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당시 정승집 종이 세력을 믿고 남의 관재(棺材) 수십 구를 빼앗고, 또 사람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다. 이졸을 보내어 잡아 다스리고 값을 받아 그 주인에게 돌려 주니, 정승이 듣고서 말하기를,
“우리 집 종이 정말 죄가 있었는데 유 아무개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금군(禁軍)과 내관(內官)이 왕의 은총을 믿고 횡행 방자하며 여러 가지의 구실로 백성을 괴롭히는데 모두 금지해야 한다.
●김시진(金始振 1618-1667)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내시 이일선(李一善)의 아우가 경내에 살면서 세력을 믿고 횡행 방자하는가 하면 남몰래 국사를 누설하는 일도 있었다. 공이 불러다 앞에 놓고 곧 머리를 베어 저자에 돌리게 하니, 좌중 사람들의 말이 ‘먼저 위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일이 생기면 내가 벌을 받을 것이다. 조정에까지 알릴 것은 없다.”
하였다. 여기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는데, 이일선이 와서도 감히 문책하지 못하였다.
▣토호의 횡포는 소민(小民)들에게는 시랑과 호랑이다. 그 해독을 제거하고 양같은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목민관이라 하겠다.
▣악소배(惡少輩)가 협기를 부리며 도둑질과 약탈로 포학을 자행하는 자는 빨리 금지하여야 한다.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
▣호강(豪强)들이 포악하여 백성들에게 독해와 고통을 주는 데는 그 길이 너무도 많아서 이루 다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다.
●지금 호강의 제도 중 가장 심한 것은 첫째 궁토(宮土), 둘째 둔전(屯田), 셋째 패점(霸占), 넷째 입안(立案)이다. 여기서 대략 그 내용을 말하여 본다.
소위 궁토라는 것은 날마다 불고 날마다 는다. 여러 궁의 내외 친척들이 널리 전장(田莊)을 마련하여 두고 사람을 보내어 도조(賭租)를 받으니 이것을 도장(導掌)이라 한다. 그 부세를 면제하고 사사 수입을 후히 하되 수령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 감히 참견하지 못한다. 긁어 빼앗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정이 없는데, 실지 궁집에 들어가는 것은 10의 1이요 개인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은 10의 9이다. 위로는 나라 토지가 날마다 줄어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혈이 날마다 깎인다. 그 가운데서 궁집에 도움도 없고, 떠돌아다니는 간사한 무뢰배들만 살찌고 기름지게 한다. 이것이 꼭 금하여야 할 것의 첫째이다.
소위 둔전이라는 것은 날마다 불고 날마다 늘어간다. 여러 군영과 여러 관청에서 널리 전장을 마련하여 두고 하급 장교나 하급 이속을 보내어 감독하는 것을 둔감(屯監)이라 한다. 사납고 간사한 짓이 갖가지로 생기며 두드려 짜내기를 뼈에 사무치게 하지만 실지 군영이나 관청에 들어가는 것은 10의 1이요, 개인 주머니에 돌아가는 것이 10의 9다. 위로는 나라 토지가 날마다 줄어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혈이 날로 깎이며, 중간에는 군영이나 관청에도 도움이 없고 떠돌아다니는 교활한 무뢰배의 무리만을 도와주고 잘 살게 한다. 이것이 그 반드시 금하여야 할 것의 둘째이다.
패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부잣집에는 모두 낭자(浪子)가 있어 그가 도박하고 술 마시는 것으로 그 아버지가 속을 태우는데, 지체 높은 양반들이 이 자들과 결탁하여 속으로 약속을 하고 빚을 준 것처럼 문서를 만드는데 그 돈이 천만이나 된다. 목민관으로서 체신이 없는 자는 그들의 부탁을 듣고 곧 잡아다가 혹독하게 매를 때리며 엄격한 칼과 올가미로 다루어 기름진 전답의 약속 문서를 강제로 받아다가 지체 높은 집에 준다. 이 풍습이 어디서나 이루어지고 있는데 충청(忠淸)ㆍ공홍(公洪)의 두 도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하다. 목민관이 비록 외롭고 한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차마 앉아서 보기만 하고 금하지 않을 것인가?
입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황무한 산간이나 첩첩한 봉만, 그리고 먼 갯벌이나 작은 섬은 천지개벽 이래로 강역 정리에 들지 않았는데, 지체 높은 대갓집들이 마음대로 문권을 만드니 이것을 입안이라 한다. 즉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 한 마리의 고기, 한 마리의 게라도 모두 내 것이라 하여 앉아서 조세를 받는다. 나무하는 길이 막혀 도끼 가진 것도 화가 되며, 어홍(漁篊)이 나라에 매이지 않고 염분(鹽盆)은 모두 사사 취념에 시달린다. 또 혹은 공신ㆍ척신의 먼 후손들이 매양 민간의 전지를 빼앗아 사패지(賜牌地)라 하는데, 온 구릉(丘陵)과 원습(原隰)을 차지하고 모두 내 땅이라고 하며 마음대로 약탈을 자행하여도 누가 감히 말하지 못한다. 여기서 세력 없는 백성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그만 잔멸(殘滅)하게 되는데, 비록 약하고 배알이 없는 목민관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금하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모두 오늘의 굳어진 풍습이다.
▣간사하고 음탕하여 기생을 데리고 다니며 창가(娼家)에서 자는 것을 금한다.
▣시장에서 술주정하며 상품을 빼앗거나, 거리에서 술주정하며 존장자에게 욕설하는 것을 금지한다.
▣도박을 직업으로 삼아 판을 벌리고 무리를 지어 모이는 것을 금한다.
▣배우(俳優)의 유희와 괴뢰(傀儡)의 재주, 그리고 나악(儺樂)으로 시주를 청하며 요사한 말로 행술하는 자는 모두 금해야 한다.
●남쪽 지방의 이속과 장교들은 그 사치한 것이 풍속이 되어 봄ㆍ여름철 기후가 화창할 때만 되면 곧 배우의 익살부리는 연기 - 방언으로는 덕담(德談)이라 한다. - 와 꼭두각시의 장대 희롱으로 - 방언으로 초라니〔焦蘭伊〕라 하고 또 산디〔山臺〕라고도 이름한다. - 해가 지도록 밤이 새도록 놀면서 즐기는데, 목민관이 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정(法庭)에 끌어들이며, 심지어 내아의 권속들까지 발을 드리우고 그 음탕하고 외설한 것을 구경하니 크게 무례한 일이다. 이런 것으로 백성에게 보여 주니 백성이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남녀들은 물결처럼 몰려다니면서 난잡하게 황음(荒淫)한 짓을 자행한다. 창고의 곡식이 축나고 세납을 도둑맞는 것이 대개 이런 일로 하여 생기는 것이니, 목민관은 마땅히 방을 붙여 백성에게 효유하여 이런 잡것들이 지경 안에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하여야만 민간 풍속이 조용해질 것이다.
▣사사로이 우마(牛馬)를 도살하는 것은 금지해야 할 일이요, 돈을 바쳐 속죄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족보를 위조하는 것은 그 주모자만 처벌하고 종범(從犯)은 용서한다.
제6조 제해(除害) : 백성들에게 독해가 되는 것은 대개 도둑ㆍ미신ㆍ맹수 등인데, 이들이 성행하게 되는 이유를 들고 따라서 이를 제거하는 방법
▣백성을 위하여 피해를 제거하는 일은 목민관의 임무이니 그 첫째는 도적이요, 둘째는 귀신붙이요, 셋째는 호랑이다. 이 세 가지가 없어야 백성의 걱정이 제거될 것이다.
▣도적이 생기는 것은 그 이유가 세 가지가 있으니, 위에서 위의를 단정히 못하고 중간에서 명령을 받들어 행하지 않고 아래에서 법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적을 없애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임금의 덕의를 펴고 그 죄악을 용서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의 악행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와져 각각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한 후에야 악행을 고치고 자취를 숨기며, 길에서는 흘린 것을 줍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또 바르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간악하고 세력 있는 자들이 서로 모여 악행을 자행하며 고치지 않으면, 강한 위력으로 쳐부수어서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그다음 방법일 것이다.
▣현상(懸賞)도 걸고 면죄(免罪)를 허락하기도 하여, 서로 잡고 서로 고발하게 하여 잔멸을 기하는 것이 또 그다음 방법이다.
▣이치를 살피고 사물을 분간하면 누구나 그 실상을 속이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밝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잘못 평민을 잡아다가 고문하여 강제로 도둑을 만드는 예가 있는데, 능히 그 원통함을 살펴서 양민을 만들어 주면 이를 어진 목민관이라 할 것이다.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진천현(鎭川縣)에서 강도를 국문하여 그 공안(供案)이 완성되자 공문으로 법 시행하기를 청하는데, 도적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 공문을 가지고 공에게로 왔다. 공이 가까이 불러서 여러 모로 도둑 잡던 상황을 묻다가 그 말과 기색을 살피고 곧 아전을 꾸짖어 문부를 거두라 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주인을 배신한 종이다. 반드시 가난한 선비가 강한 종을 찾으러 왔다가 도리어 결박을 당한 것인데, 아전이 그 뇌물을 받고 청을 들어 이렇게 옥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며 문초하니 과연 사실대로 자복하였다.
▣부민(富民)을 무고로 끌어들여 함부로 잔악한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도적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고 아전과 교졸을 위하여 돈을 벌어 주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어리석은 목민관이라 한다.
▣귀신붙이가 변고를 일으키는 것은 무당이 인도하여 만드는 것이니, 그 무당을 목 베고 신당을 헐어야만 요귀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거짓 부처나 귀신에 의탁하여 요사한 말로 백성을 현혹하는 자는 제거해야 한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가고 자주 소나 돼지를 해치면 틀과 함정을 놓아 잡아서 그 걱정을 없애야 한다.
목민심서 공전(工典) 6조
제1조 산림(山林) : 모든 산림의 관리ㆍ수호
▣산림은 나라의 공부(貢賦)가 나는 곳이므로, 산림에 대한 정사를 고대(古代)의 성왕(聖王)이 소중하게 여기었다.
▣봉산(封山)의 양송(養松)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엄중한 금령(禁令)이 있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지켜야 하며, 또 농간하는 폐단이 있으니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다산록(茶山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하루는 산불이 완도(莞島)에서 일어나 그 불빛이 온 천지를 덮었고 불에 탄 나무는 수천만 주나 되었는데, 완도의 아전과 고을의 아전이 서로 짜고 불탄 나무가 80주라고 감영(監營)에 보고하고는 돈 8천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주어 드디어 무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탄(薪炭)을 두 아전이 나누어 먹었다. 무릇 봉산(封山)의 실화(失火)에 대하여는 수령이 마땅히 몸소 살펴보아야 할 것이요, 아전에게 대신 시켜서는 안 된다.”
▣사유림(私有林)의 사벌(私伐)을 금지하는 것도 봉산(封山)과 같다.
▣상인(商人)이 몰래 금송(禁松)의 송판을 실어 내는 것을 금해야 하니, 법을 삼가 지키고 재물에 청렴하여야 이를 금할 수 있다.
▣금은(金銀) 동철(銅鐵)은, 예전부터 있어온 광산에 대하여는 간악한 짓을 살펴야 하고, 새로 광산을 채굴하려는 자에 대하여는 그 제련 설비를 금지시켜야 한다.
▣금(金)을 채취하는 방법에 또 새로운 방법이 있으니 조정의 명령이 있다면 시험하여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 호군(金護軍)의 사금론(篩金論)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팔도(八道)에 다 황금이 생산된다. 그러나 그것을 채취하지 않고 금지하는 것은 두 가지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농사에 방해되는 것이요, 한 가지는 난(亂)을 초래하는 것이다. 농사에 방해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금을 채취하는 자는 반드시 물에 들어가서 일어야 하는데 이것은 추운 때에는 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봄이나 여름에 하게 되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利)를 소중하게 여겨서 근본은 버리고 말리(末利)를 따르기 때문에 농사가 때를 놓치게 되니 이것이 한 가지 폐단이다. 또 난(亂)을 초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금 채취에 대한 세를 받는 방법은 본래 채취하는 인수(人數)에 따라 계산한다. 그런 까닭에 인수가 많으면 세도 많고 인수가 적으면 세도 적다. 그렇기 때문에 채금(採金)을 감독하는 사람은 그 채굴할 인부를 모집하는 날을 당하면 그 내력도 묻지 않고 많은 것만 탐내게 된다. 그러므로, 개미떼나 까마귀떼처럼 몰려들어 질서없이 난잡을 이루며 범행자를 감춰 주고 간악한 자를 숨겨주는 데에 꾀를 부리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한 가지 폐단이다. 조정에서 법을 세워 엄중히 금지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나 간민(奸民)의 도채(盜採)가 마침내 그치지 아니하여 금지한다는 이름만 있고 금지의 효과는 없어서 위로는 공용에 보충됨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풍습을 바로잡지 못하니, 왕정(王政)에 비추어 마땅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따로 규제(規制)를 만들어 다음과 같이 조목을 열거한다. ...
제2조 천택(川澤) : 농리(農利 : 저수지와 둑 등)
▣천택(川澤)은 농리(農利)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천택에 대한 정사를 성왕(聖王)은 소중하게 여겼다.
▣냇물이 흘러서 고을을 지나면 도랑을 파서 그 물을 끌어다가 전지(田地)에 대고, 백성과 더불어 공전(公田)을 경작하여 백성의 부담에 보충하는 것이 선정(善政)이다.
●허만석(許晚石)이 연기 현감(燕岐縣監)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현의 북쪽 15리에 큰 제방을 만들고 도랑을 뚫어 천여 경의 논에 물을 대게 하였으니, 그 제방이 청주(淸州)와의 경계에 있었다. 그 제방을 처음 쌓을 때 허만석이 친히 감독하였는데 청주 사람들이 떼지어 와서 불손한 말을 퍼붓고 허만석이 걸터앉았던 호상(胡床)을 부수었다. 허만석이 활을 당겨 쫓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방이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칭송하고 있다.
▣작은 것은 지소(池沼)라 하고 큰 것은 호택(湖澤)이라 하며, 그 막는 것을 방축〔陂〕 또는 제방〔堤〕이라 하니, 이는 곧 물을 절제〔節水〕하는 것이다. 이것이 ‘못에 물이 있는 것〔澤上有水〕이 절(節)’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에는 호(湖)라고 이름하는 것이 겨우 7~8개소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좁고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방기풀이 우거져 있고 수리하지 아니하였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말하기를,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고부(古阜)의 눌제(訥堤), 익산(益山)과 전주(全州) 사이의 황등제(黄登堤) 등은 다 저수지(貯水池)로서 큰 것이어서 한 지방에 큰 이익을 주는 것이다. 옛날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축조한 것인데 이제 다 폐결(廢決)되었다. 그러나 폐결된 것은 두어 길〔數丈〕에 불과하니, 그것을 수축하는 공력(功力)을 계산한다면 1000명의 10일 동안의 노역(勞役)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축조할 때의 공력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못 되건만 아무도 건의하는 이가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만약 이 세 저수지로 하여금 1000경의 물을 저축할 수 있는 저수지가 되게 한다면 노령(蘆嶺) 이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우리나라의 큰 저수지로는 또 함창(咸昌)의 공골제(空骨堤), 제천(堤川)의 의림지(義林池), 덕산(德山)의 합덕지(合德池), 광주(光州)의 경양지(慶陽池), 연안(延安)의 남대지(南大池) 등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해감이 앉아서 막혀버렸으니 이것은 모두 고을을 지키는 자들의 책임이다.
●김제(金堤) 벽골제기(碧骨堤記)에,
“태종(太宗) 15년에 경차관(敬差官)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어 다시 중수(重修)하였다. 그 비(碑)에 말하기를, ‘벽골제(碧骨堤)는 그 내부의 둘레가 7만 7406보(步)이다. 5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그 논은 모두 9840결(結) 95부(負)로서 이는 옛 문서에 기재된 것이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 - 한 물줄기는 만경현(萬頃縣) 남쪽까지 흘러간다. - 라 하고, 그 둘째 도랑을 장생거(長生渠) - 두 물줄기가 만경현의 서쪽까지 흘러간다. - 라 하며, 그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 - 한 물줄기는 고부군(古阜郡)의 북쪽까지 흘러간다. - 라 하고, 그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 - 한 물줄기는 인의현(仁義縣 : 지금의 태인면에 속하며 태인과 고부의 중간에 위치한다.) 서쪽까지 흘러 들어간다. - 라 하며, 그 다섯째를 유통거(流通渠) - 역시 인의현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 라고 한다. 이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토지는 모두 비옥한데, 이 도랑들은 백제ㆍ신라 시대부터 백성들이 혜택을 입어 왔다. -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축조(築造)하였다. - 고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 옛 제도대로 수리하였고, - 인종(仁宗) 21년인 계해년에 다시 증축하였다. - 우리 성상(聖上 : 태종)이 을미년 봄에 관찰사 박습(?-1418) 등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였다. 이에 위에 상주하여 각 고을의 민정(民丁) 1만 명과 간사(幹事) 300명을 징발, 9월 갑인일(甲寅日)에 기공하여 10월 정축일에 준공하였다. 제방의 북쪽에 태극포(太極浦)가 있으니 조수의 물결이 세차고 급격하며, 남쪽에는 양파교(楊波橋)가 있는데 물이 깊이 고여 있어서 옛날부터 난공사(難工事)로 되어 있었다. 이제 먼저 태극포(太極浦)에 둑을 쌓아서 그 세찬 수세(水勢)를 죽이고, 다음에 양지교(楊枝橋)에 아람드리 나무를 세워서 기둥을 삼고 나무 다리를 걸쳐서 목책(木柵) 다섯을 만들고 속을 흙으로 채웠으며, 또 제방이 깎이고 무너진 곳에는 모두 흙을 올려 메워서 평평하게 하였다. 또 둑의 안과 밖에는 버드나무를 두 줄로 심어서 견고하게 하였으며, 둑의 하광(下廣)은 50척, 상광(上廣)은 30척, 높이는 17척이었다. 수문(水門)은 마치 구롱(丘壟) 같이 보였다. 가운데의 세 수문은 그대로 옛 돌기둥을 수리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깎아서 주춧돌로 삼고 괴목(槐木)의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 곁의 돌기둥이 움푹 빠진 곳에는 괴목의 판자를 가로로 설비하여 안팎에 고리로 연결된 쇠사슬을 달아서 문의 판자를 들게 하였으니, 그 문의 너비는 모두 13척이고, 돌기둥의 높이는 15척이며, 땅속에 들어간 것이 5척이다. 아래는 돌로 다지고 쇠를 녹여서 굳히었다. 문의 양쪽 곁은 돌을 깎아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다리를 만들어 통행하게 하였다. 때는 영락(永樂) 13년(1415)이다.”하였다.
▣토호(土豪)와 귀족(貴族)이 수리(水利)를 멋대로 하여 자기의 전지에만 물 대기를 독점하는 것은 엄금하여야 한다.
▣만약 바닷가에 조수를 방지하는 제방을 쌓고 안에 기름진 전지를 만들면, 이것을 해언(海堰)이라고 이름한다.
▣강하(江河)의 물가가 해마다 물에 부딪쳐 파괴되어 백성들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제방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안정하게 하여 주어야 한다.
▣뱃길이 통하는 곳과 상인이 모여드는 곳에 범람하는 물을 소통시키고, 그 제방을 견고하게 하는 것 역시 잘하는 일이다.
▣못에서 생산되는 물고기, 연마름, 마른꼴, 부들 등속은 엄중하게 지켜서 그 수입으로 백성들의 용역에 보충해야 하고, 수령이 스스로 취득하여 사복을 채워서는 안 된다.
제3조 선해(繕廨) : 공공시설물의 환경 정리
▣청사(廳舍)가 퇴락하여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쳐도 수선하지 아니하고 그냥 헐어지게 내버려두는 것은 역시 목민관의 큰 잘못이다
▣율문에 함부로 기공한 자를 벌하는 조항이 있고, 나라에는 사사로이 건축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있었지만, 선배들은 이런 것에 아무런 구애도 없이 수리를 하였던 것이다.
▣누정(樓亭)의 한가하고 운치있는 경관 또한 성읍(城邑)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첨(李詹)이 강화(江華) 이섭정기(利渉亭記)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읍치(邑治)에 유관(游觀)을 두는 것은 본래 논의할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심기가 번잡하고 생각이 혼란하고 시야가 막히고 뜻이 정체한 때를 당하면, 군자는 반드시 노닐고 휴식할 대상물과 상쾌하게 할 수 있는 설비가 있어서, 그를 돌아보고 배회하여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는 번잡한 것이 간이해지고, 혼란한 것이 진정되고, 막힌 것이 트이고, 정체한 것이 진행된다.”
▣이교(吏校)와 노예 등속은 마땅히 부역에 나가게 해야 하며, 중들을 불러 모아 공사를 돕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민효열(閔孝悅)이 인천 부사(仁川府使)가 되어 그곳에 향교를 세우고자 공무의 여가를 틈타 밤낮으로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는 일에도 모두 공인을 모집하여 하였고, 또 향리(鄕吏)와 관노(官奴)들을 윤번으로 돌려가며 사역을 시켰다. 그리하여 백성은 한 사람도 부리지 않고 1년 만에 준공하였다.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는 데는 모두 요령이 있어야 한다. 폐단이 생길 구멍을 먼저 막지 않을 수 없으며, 노력과 비용의 절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원을 조달하는 방법은 마땅히 아전과 관노를 주로 하고, 백성의 인부는 보조하는 정도로 하여야 한다. 일을 시작하는 날 문무 장교와 아전과 관노들을 불러서 타이르기를,
“이 집이 누구의 집인가. 목민관은 나그네라, 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어찌 목민관의 집이겠는가. 농민은 들에 사는 사람들로서 뜨거운 날에도 심한 비에도 이 집의 신세를 조금도 지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농민들의 집이겠는가. 아버지가 정해 주면 아들이 이어받으면서 볕을 가리고 비를 가리는 혜택을 입는 것이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너희들의 집을 짓는데, 나로 하여금 홀로 수고하게 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피땀을 흘리게 하는 이러한 사리(事理)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제4조 수성(修城) : 성루(城壘)의 시설과 그에 대한 관리
▣성을 수축하고 해자를 파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 또한 수령들의 직분이다.
▣전쟁이 일어나 적이 몰려오는 그런 급박한 때에 성을 쌓을 경우에는 마땅히 그 지세를 살피고 민정에 순응하여야 한다.
▣성을 쌓되 제때가 아니면 쌓지 않는 것만 못하다. 성은 반드시 농한기에 쌓는 것이 옛날의 법이다.
▣옛날의 이른바 축성(築城)이라는 것은 토성(土城)을 말한 것이다. 난리를 당하여 적을 방어하는 데는 토성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시에 있어서 성원(城垣)을 수축하여 길 가는 나그네로 하여금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마땅히 그 옛것에 따라서 돌로 보수하는 것이 좋다.
제5조 도로(道路) : 도로ㆍ교량 등의 시설과 관리
▣도로를 보수하여 길 가는 나그네로 하여금 그 길로 다니기를 원하게 만드는 것 또한 훌륭한 목민관의 정치이다.
▣교량이란 것은 사람을 건네주는 시설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즉시 놓아야 한다.
●판서(判書) 정민시(鄭民始 1745-1800)가 호남 안찰사(湖南按察使)로 나가니, 전주부(全州府)의 남쪽 강물이 해마다 가로 터져 교량이 자주 무너지므로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여기었다. 공이 돌을 쌓아서 교량을 만들고 아래에 무지개 모양의 수문을 만드니, 3도의 행인들이 다 편리하게 여기었다.
상고하건대, 함흥(咸興)의 만세교(萬歲橋)도 마땅히 돌로 쌓아야 할 것인데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막대한 비용을 꺼려서 긴 널빤지만 깔아 놓았다. 그러나 번번이 떠내려가 해마다 고쳐야 하므로 민폐가 적지 않으니 실로 딱한 일이다. 예전에는 승려들이 즐겨 이 일을 하였고, 선배들의 문집에도 교량모연문(橋梁募緣文)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중들도 쇠잔하여져서 이 일을 할 자가 없다.
▣나루터에 배가 없는 곳이 없고, 역정에 돈대가 없는 곳이 없는 것 또한 행상인들과 나그네들이 즐거워하는 바이다.
●《유산필담(酉山筆談)》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원주(原州)의 개채(開砦) 나루터에 한 비루한 사나이가 배를 부리고 있었다. 스스로 사족(士族)이라고 일컬으면서 사람 건네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인이나 나그네가 지나가면, 선가(船價)를 다른 나루터보다 배나 비싸게 받고서야 비로소 건네주곤 하였다. 만약 유람(遊覽)하는 깨끗한 차림의 선비인데 선가를 비싸게 받을 수 없는 자에게는 배를 바위 틈에 감춰버리고 종일토록 응낙(應諾)하지 아니하였다. 이런 따위의 일도 역시 목민관(牧民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릇 관내에 나루터가 있으면 마땅히 게시(揭示)하여 엄중하게 단속(團束)하여야 하며, 선가를 배나 요구하여 받는 자와, 불러도 응하지 않는 자는 엄중히 감시하여야 한다. ”
▣여점(旅店)에서 짐을 전체(傳遞)하지 아니하고, 재에서 가마를 메게 하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어깨를 쉴 수 있을 것이며, 여점에서 간악한 자를 숨기지 아니하고 참원(站院)에서 음탕한 짓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전체짐〔傳任〕이라는 것은 여점의 큰 폐단이다. - 속담에 전체짐〔傳任〕을 노복(路卜)이라 한다. - 여러 영(營)의 비장(裨將)들과 여러 고을의 책객(册客)들이 그 상사(上司)를 속이고, 사사로이 행장을 꾸려 가지고 관아(官衙)의 문을 겨우 나서기만 하면 당장에 매질을 가한다. 갑점(甲店)에서 그 모진 매질에 견디지 못하여 한번 이 행장을 짊어지면 곧 을점(乙店)으로, 병점(丙店)으로 이렇게 순풍처럼 전체되어 명령하지 않아도 위엄이 발휘된다. 이런 일이 한번 시작되자 내리 전해 가며 서로 본받게 되었다. 저리(邸吏)ㆍ도장(道掌)ㆍ토호(土豪)ㆍ탕자(蕩子)들까지도 머리에 전립(氈笠)을 쓴 교활한 하인 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여점의 우두머리를 불러내어 그 등을 채찍으로 갈기고 꽁무니를 발로 차면서 전체짐을 독촉하지 않는 자가 없다. 임금의 공물(貢物)을 수송하는 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여 차역(差役)ㆍ면역(免役)의 법을 여러 번 변경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필부(匹夫)와 천인(賤人)까지도 도리어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목민관으로서 통로에 있는 자는 마땅히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그의 방유(榜諭)를 받아서 엄중히 금단해야 하며, 특히 따로 유능한 자를 점사(店舍)에 보내어 잠복하였다가 기회를 엿 보아 한 놈씩 잡아오게 하고 상사에 보고하여 징계 방출한다면, 이 풍습이 조금은 멎을 것이다.”
제6조 장작(匠作) : 공작물(工作物)의 제작ㆍ활용ㆍ관리
▣공작(工作)을 번다하게 일으키고, 기교 있는 장인(匠人)을 다 모아들이는 것은 탐욕을 드러내는 처사이다. 비록 온갖 공장이 구비되었더라도 전혀 물건을 제조하지 않는 것은 청렴한 선비의 관부(官府)이다.
▣설사 기물을 제조하는 일이 있더라도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이 기명(器皿)에까지 미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모든 기물과 용품을 제조하는 데는 마땅히 인첩(印帖)이 있어야 한다.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의 경작을 권장하고, 직조 기구를 만들어서 부녀들의 길쌈을 권장하는 것은 목민관의 직책이다.
▣전거(田車)를 만들어서 농사를 권장하고, 병선(兵船)을 만들어서 전쟁에 대비를 하는 것은 목민관의 직책이다.
●전거(田車)는 간단하여서 만들기가 매우 쉽건만, 백성들은 아직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전거 한 대의 적재량은 소 4필에 당할 만하니 그것으로 풀을 운반하고 분뇨를 실어 내고 곡식을 실어 들인다면 어찌 노력을 덜 수 있지 않겠는가. 전거 만들기가 어려운 까닭은 바퀴살과 바퀴통 때문이다. 가로다지 판자 하나, 세우는 가지 둘로써 ‘廾’ 자 모양을 만들고, 그 중간에 굴대를 꿰고 그 둘레를 보좌하여 바퀴를 달면 반전(半錢)도 쓰지 않고 전거 한 대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멍에를 만들고, 수레 바탕을 갖추어서 전거를 만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닷가의 군현에 있는 전선(戰船)ㆍ병선(兵船)을 혹 수리 개조해야 할 때가 되거든 마땅히 몸소 그 일을 감독하여 편리하고 빠르고 견고하고 완전하게 하여 실용에 대비하고, 만약 급박한 경보가 있어서 쓸 일이 눈 앞에 닥쳤거든 마땅히 널리 새로운 제도를 참고하여 적을 깨뜨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 반드시 유회(油灰)로 틈을 메워야 뚫어지거나 새지 않을 것이다.
▣벽돌 굽는 법을 강구하고, 따라서 기와를 구워서 읍의 성내를 모두 기와집이 되게 하는 것 또한 선정(善政)이다.
▣말〔斗〕과 저울〔衡〕이 집집마다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모든 창고와 시장의 것은 일정하게 하여야 한다.
목민심서 진황(賑荒) 6조
제l조 비자(備資) : 흉년의 대책에 있어서 필요한 양곡과 자금 등을 예비함
▣황정(荒政 흉년 기근정책)은 선왕(先王)이 마음을 다하던 바이니, 목민(牧民)의 재능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황정을 잘 다스려야만 목민의 일을 다하였다고 할 것이다.
▣구황(救荒)의 정사는 예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예비하지 않으면 모두 구차할 뿐이다.
▣연사(年事)가 이미 판정되면, 급히 감영(監營)에 나아가서 곡식 옮겨 올 것과 조세(租稅) 감할 것을 의논하여야 한다.
●영조 38년(1762)에 삼남(三南)에 큰 흉년이 들자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호서 안집사(湖西安集使) - 윤동섬(尹東暹)이다. - 의 서계(書啓)를 보니 저 주린 백성들을 내가 눈으로 보는 듯하다. 강도(江都)의 미곡 2천 석과 북도 교제창(交濟倉)의 곡식 3만 석을 특별히〔特〕 허급(許給)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令〕 헤아려서 배로 실어다가 아우성치는 기민들을 구제하도록 하라. 교제창의 곡식을 호남에 4만 석, 영남에 3만 석을 일체 허급한다.”
하였다.
▣임금의 은혜가 고르더라도 선량한 목민관이라야 받들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김필진(金必振 1635-1691)이 원성 현감(原城縣監)으로 있을 때였다. 이해에 큰 흉년이 들어 관에서 먹여 주는 것에 의지하는 백성들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공은 사부(使府)에 공문을 보내어 조정에 청해서, 곡식 2천 석과 돈 14만 냥을 얻어 나누어 진휼하니, 이 1만여 명이 모두 살아나게 되었다.
▣강이나 바다의 어귀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저점(邸店)을 살펴서 그 횡포를 금하여 장삿배가 모여들게 해야 한다.
●흉년에 장삿배가 포구에 정박했을 때 점주(店主) - 여관 주인 - 와 아랑(牙郞) - 마질하는 자 - 이 제 마음대로 값을 깎는다든지 관교(官校)와 읍리(邑吏)가 침탈(侵奪)하여 농간을 부리면, 장사꾼들은 이 소문을 듣고 뱃머리를 돌려 멀리 달아나니, 이것이 바로 쌀값이 날로 오르는 까닭이다. 목민관은 이것을 알아서 상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힘을 써서 그들이 모여들게 하면 돈 있는 자가 곡식을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조령(詔令)을 기다리지 않고 형편에 따라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방출하는 것이 옛날 뜻이며, 사신(使臣)이 행할 일이다. 오늘날 현령으로선 어찌 감히 할 수 있으랴.
제2조 권분(勸分) : 흉년에 관내의 부잣집에 전곡(錢穀)의 의연(義捐)이나 대여(貸與)를 권유함
▣권분(勸分)의 법은 멀리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세도(世道)가 그릇되고 정치가 쇠퇴해져서 명실(名實)이 같지 않아졌으니, 오늘날의 권분은 옛날의 권분하는 법이 아니다.
▣우리 동방(東方)의 권분(勸分)하는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을 바치게 하여 만민에게 나누어 주니, 이는 옛 법이 아니나 관례가 되어 버렸다.
▣찰방(察訪)과 별좌(別坐)의 벼슬로 갚아줌은 예전 사례가 있어 국승(國乘)에 실려 있다.
●숙종 계해년(1683)에 진청(賑廳)에서 역관(譯官) 변이창(卞爾昌)이 쌀 50석을 바쳤다 하여 가설첨지첩(加設僉知帖)을 주기를 청하자, 정원(政院)과 대간(臺諫)에서는,
“무릇, 가설직(加設職)을 사족(士族)에게만 허락하는 일은 이미 위의 재결이 계십니다.”
하니, 주상이 해청(該廳)에 명하여 다른 상을 주도록 하였다.
▣향리의 인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날을 정하여 도타이 불러다가, 그 공의(公議)를 채택해서 요호(饒戶 부잣집)를 정한다.
▣권분(勸分)이란, 스스로 나누어 주기를 권하는 것이니, 스스로 나누어 주기를 권함으로써 관의 부담을 덜어 줌이 많다.
▣권분(勸分)의 영이 나오면 부잣집은 물고기처럼 놀라고 가난한 선비는 파리처럼 덤벼들 것이니, 기밀을 삼가지 않으면 욕심을 내어 제 몸만 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남쪽 지방의 여러 절에 혹 부자 중이 있거든, 그 곡식을 권분(勸分)하여 가져다가 산 주위에 있는 백성을 구제하고 속연(俗緣)의 친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함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
●기사년(1809, 순조9)ㆍ갑술년(1814, 순조14) 흉년에, 수령이 아전과 군교(軍校)를 보내어 절의 재물을 수색하여 공용(公用)에 쓸 쌀을 빼앗고 불공(佛供)에 쓸 양식을 감손하였으며, 심지어 종(鐘)과 징을 팔고, 솥과 가마〔釜〕를 팔아가니, 뭇 중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목민관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제3조 규모(規模) : 기민 구호의 계획
▣진황(賑荒)에 두 가지 관점이 있으니,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요, 둘째는 규모가 있는 것이다. 불에 타는 것을 구제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데 어찌 기회를 소홀히 할 수 있겠으며, 대중을 부리고 물(物)을 균평하게 하는 데 어찌 그 규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재가 혹독하기는 하나 그 화는 물가의 민가나 전지에 그치고, 풍재(風災)ㆍ상재(霜災)ㆍ충재(蟲災)ㆍ박재(雹災)도 반드시 온 천하가 재앙을 입지는 않는다. 다만 큰 가뭄은 산을 태워, 천 리가 모두 같은 만큼 온 나라가 같이 기근이 들어서 손을 쓸 수가 없다.
▣진조(賑糶)의 법으로 말하면, 국법에는 없는 바이지만, 현령이 사사로이 사들인 쌀이 있으면 또한 시행하는 것이 좋다.
▣진장(賑場)을 설치함에 있어서는 작은 고을에는 마땅히 한두 곳에 그치고, 큰 고을에는 모름지기 10여 곳을 만들 것이니 이것이 옛 법이다.
●진장 10여 곳을 설치하는 데는 외창(外倉)이나 혹은 산사(山寺) 혹은 부자의 사장(私莊)에다가 조장(糶場) - 돈을 받고 곡식을 파는 곳 - 을 설치하기도 하고, 희장(餼場) - 값을 받지 않고 쌀을 주는 곳 - 을 설치하는 것이 곧 옛 법이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분환(分還) - 곧 환자(還上)를 말한다. - 하는 것으로써 진조(賑糶)를 대신하고 있으니, 이는 현령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령이 스스로 돈을 내어 쌀 수천 석을 마련하여 조장(糶場)을 설치하고 그 이익을 받아서 희자(餼資)에 보충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어진 사람이 진휼하는 데는 불쌍히 여길 뿐이다.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자는 받아들이고 이곳에서 다른 데로 가는 자는 머물러 두어, 내 고을이나 남의 고을이나 다름없이 할 것이다.
▣오늘날의 유민들은 가도 돌아갈 곳이 없으니, 오직 간절히 권유해서 그들로 하여금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제4조 설시(設施) : 기민 구호의 실행에 있어 모든 계획, 시설
▣진청(賑廳)을 설치하고 감리(監吏)를 두며, 가마솥을 갖추고 소금과 간장ㆍ미역ㆍ마른 새우를 갖춘다.
●매양 보면, 촌감이 뇌물을 받고 간사한 짓을 해서 쌀독에 저축이 있는 자도 혹 몇 식구를 붙여주어 희미(餼米)를 주며, 홀아비나 과부로서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은 혹 희구(餼口)에서 빠뜨려서, 그들을 굶어죽게 한다. 그리고 아전들과 어울려서 간사한 짓을 하여 갖은 방법으로 농간질을 한다. 대저, 기호(飢戶)를 뽑는 권리는 절대로 이런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을 엄하게 골라서 이들을 진장(賑長)으로 삼고, 1면〔鄕〕마다 1인씩을 두어서, 그 면 안의 일을 맡아보도록 한다. 기구의 나고 듦과 죽고 사는 수효가 없을 수 없으니, 그중에 집안 살림이 가난한 자는 한두 식구를 붙여주도록 한다.
▣알곡을 까불러서 실지 수효를 알고 기구(飢口)를 세어서 실지 수효를 정해야 한다.
●곡식에서 먹는 것은 알맹이뿐이므로 피곡(皮穀)은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대로 먹지 못하며, 겨가 아무리 많더라도 먹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공적으로 주는 곡식〔公下之穀〕이나 감영에서 떼어주는 곡식들은 모두 겨뿐으로 그 쌀이 얼마라고 헛이름만 떠벌여서, 몇 섬이니 몇 섬이니 해도 이것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면 먹을 것은 없으니, 이것을 어디에 쓰랴.
▣유리 걸식하는 거지는 천하의 궁민(窮民)으로서 호소할 데가 없는 자이다. 어진 목민관은 마음을 다할 바이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풍년에는 거지를 볼 수 없고 마을에는 양민들만이 있다가, 흉년이 되면 이런 거지들을 보게 된다. 그러니 거지도 본래는 양민이었고 버린 목숨들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육친(六親)이 흩어져 없어지고 온 이웃에서 모두 거절하여 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불구자가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개구리밥〔萍〕처럼 떠다니고 쑥대같이 굴러다니다가 오랫동안 굶주리고 그 본성을 잃어 염치가 모두 없어지고, 총명과 식견이 드디어 어두워져서, 귀신과 짐승같이 되어 사람들이 밉살스럽게 보게 된 것이지 이 어찌 본질이야 다름이 있겠는가. ...
참판(參判) 유의(柳誼)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였다. 작은 흉년을 당하여 거지 5~6명이 읍중에 다니고 있었다. 공(公)이 이를 불쌍히 여겨 마방(馬房) - 정당(政堂) 뜰에 있음 - 에 거처하게하고 죽을 먹이고 불을 피워 주었다. 아전들이 간하기를,
“거지를 이같이 안락(安樂)하게 해 주면 다른 거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것인데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하였다. 며칠이 안 되어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거지 떼가 수십 명이 되었는데, 공(公)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좌우가 극력 간해도 듣지 않았다. 모여든 자가 이미 많아지자 그 이상 더 모이지는 않았다.
▣기근(饑饉)이 드는 해에는 반드시 전염병이 있는 법이니, 그 구료하는 방법과 시체를 거두어 묻는 정사에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
▣버린 갓난아이는 길러서 자녀로 삼고, 떠돌아다니는 어린이는 길러서 노비(奴婢)로 삼되, 모두 마땅히 국법을 거듭 밝혀서 상호(上戶)에게 효유(曉喩)해야 한다.
제5조 보력(補力) : 흉년에 민력(民力)을 보조함
▣연사(年事 흉년)가 이미 판정되면, 마땅히 신칙하여 논을 갈아서〔垡〕 밭으로 만들어, 일찍 딴 곡식을 뿌리도록 하고, 가을이 되면 보리를 갈도록 거듭 권한다.
▣흉년에는 도둑을 없애는 정사에 힘을 써야 하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실정을 알고 보면 불쌍해서 죽일 수 없다.
▣곡식을 소모하는 데는 술과 단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술을 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공채(公債)를 탕감하는 것〔薄征已責〕은 선왕(先王)의 법이다. 겨울에 양식을 거두고 봄에 조세(租稅) 거두는 것과 민고(民庫)의 잡역(雜役)과 저리(邸吏)의 사채(私債)도 모두 너그럽게 완화해 주고 재촉해서는 안 된다.
제6조 준사(竣事) : 진휼(賑恤)을 완료함
▣진휼(賑恤)하는 일이 끝나가면 시종(始終)을 점검해서, 범한 바 허물을 일일이 살핀다.
▣스스로 비축한 곡식은 장차 상사(上司)에 보고할 것이니, 스스로 실정을 조사해서 감히 거짓 기록하지 말 것이다.
▣큰 흉년이 든 뒤에는 백성들의 기진함이 마치 큰 병을 치른 뒤에 원기가 회복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무휼(撫恤)하고 안집(安集)시키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목민심서 해관(解官 수령이 관직에서 해임될 때 필요한 사항) 6조
제1조 체대(遞代) : 수령의 자리에서 교체되는 것
▣관직은 반드시 체임(遞任)이 있는 것이니, 갈려도 놀라지 않고 잃어도 미련을 갖지 않으면 백성들이 공경한다.
●체대(遞代)의 이름이 모두 20가지가 있다. 첫째 과체(瓜遞) - 6년ㆍ3년의 과기(瓜期)가 차는 것. - 둘째 승체(陞遞) - 현(縣)에서 군(郡)으로, 부(府)에서 목(牧)으로 승진하는 따위. - 셋째 내체(內遞) - 경관(京官)으로 옮기는 것. - 넷째는 소체(召遞) - 삼사(三司)와 각(閣)ㆍ원(院)의 직으로 임금의 소명(召命)을 받는 것. - 다섯째는 환체(換遞) - 다른 고을과 서로 바꾸는 것. - 이니 이 다섯가지는 순체(順遞)라고 이름한다. 여섯째는 피체(避遞) - 상관(上官)과 친족ㆍ인척(姻戚)의 관계가 있어서 피하는 것. - 일곱째는 혐체(嫌遞) - 상관과 선대(先代)적에 혐의가 있는 것. - 여덟째는 내체(來遞) - 신관(新官)이 갑자기 외직(外職)에 전보(轉補)되어 오는 것. - 아홉째는 소체(疏遞) - 소(疏)를 올려 체임하기를 빌어서 윤허(允許)를 받는 것. - 열째는 유체(由遞) - 말미를 받아 집에 돌아와서 임지에 돌아가지 않는 것. - 이니, 이 다섯 가지는 경체(徑遞)라고 이름한다. 열한째는 폄체(貶遞) - 고과(考課) 때에 하등(下等)을 맞는 것. - 열두째는 출체(黜遞) - 장계(狀啓)로 파면되어 쫓겨나는 것 - 열셋째는 박체(駁遞) - 대각(臺閣)에서 탄핵(彈劾)하는 것. - 열넷째는 나체(拿遞) - 전의 일이나 혹 공죄(公罪)로 잡혀 와서 파면되는 것. - 열다섯째는 봉체(封遞) -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봉고파직(封庫罷職) 시키는 것. - 이니, 이 다섯 가지는 죄체(罪遞)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열여섯째는 사체(辭遞) - 상사(上司)가 예로 대접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글을 올려 인퇴(引退)하는 것. - 열일곱째는 투체(投遞) - 상사(上司)와 다투고 인수(印綬)를 던지고 지레 돌아가는 것. - 열여덟째는 병체(病遞) - 신병이 실지로 깊은 자 - 열아홉째는 상체(喪遞) - 부모의 상사를 당한 것. - 스무째는 종체(終遞) - 관(官)에서 죽는 것 - 이니, 이 다섯 가지는 불행하여 체임되는 것이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은 옛사람의 의리이니, 체임되고서 슬퍼하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도잠(陶潜)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때에 군수(郡守)가 독우(督郵)를 보내어 그가 이르자, 아전이 말하기를,
“큰 띠를 띠고 보소서.”
하였다. 도잠이 탄식하여,
“쌀 5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서 향리(鄕里)의 조무래기를 섬길 수는 없다.”
하고, 곧 인끈을 풀어 놓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 버렸다.
상고하건대, 독우(督郵)라는 것은 속현(屬縣)의 잘못을 살피는 관원인데, 본디 소리(小吏)로 승진하여 이 관원이 되었으므로 향리(鄕里)의 조무래기라고 한 것이다. 5말 쌀이라는 것은 사람의 한 달 양식이요, 팽택의 한 달 녹봉이 5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문부를 정리해 두어서 이튿날 곧 떠나는 것은 맑은 선비의 기풍이요, 문부를 청렴하고 밝게 마감하여 뒷근심이 없게 하는 것은 지혜있는 선비의 행동이다.
▣부로(父老)들이 교외(郊外)에서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 같이 정이 인사에 보이는 것은, 역시 인간 세상의 지극한 영광이다.
▣돌아오는 길에 완악한 백성을 만나 꾸짖음과 욕을 당하여, 나쁜 소문이 멀리 전파되는 것은 인간 세상의 지극한 욕인 것이다.
제2조 귀장(歸裝) : 돌아가는 행장
▣맑은 선비가 돌아가는 행장은 가뿐하게 깨끗하여 해어진 수레와 파리한 말이라도 맑은 바람이 사람을 감돈다.
▣상자와 채롱은 새로 만든 그릇이 없고, 구슬과 비단은 토산(土產)의 물건이 없으면 맑은 선비의 행장이다.
▣대저 물건을 못에 던지고 불에 집어넣어 물건을 천히 하고 아끼지 않으면서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이름을 내려고 하는 자는 이것도 천리(天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물건이 없어 검소하기가 전과 같은 것이 으뜸이고, 방편을 마련하여 종족(宗族)들을 도와주는 것이 그 다음이다.
제3조 원류(願留) : 수령의 유임을 원하는 것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김이 간절하여 길을 막고 머무르기를 원하여, 광채를 사책(史册)에 남겨 후세에 전하게 하는 것은 말과 형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유철(兪㯙 1606-1671)이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내가 크게 다스려져서 고을에 보리 이삭이 두 가닥으로 나오는 상서가 있었다. 얼마 뒤에 공이 사면하고 돌아갈 뜻이 있어 부모를 뵈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고을 사람이 날마다 그의 집에 나아가 청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고을에 포흠(조세를 내지 않는 것)진 사람이 많은데, 내가 때리고 독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사면하려 한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서로 말하여 한꺼번에 모두 바쳤다.
유정원(柳正源 1703-1761)이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있을 적에 휴가를 받아 돌아오면서 그대로 벼슬을 그만둘 뜻이 있었다. 고을 백성들이 아문(衙門)을 지키고 사흘 동안 밤낮으로 가지 않으므로 그는 식구들을 아문에 머물러 두어 다시 올 뜻을 보였다. 돌아와서는, 세 번 사장(辭狀)을 올리니, 순사(巡使)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민심이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허둥지둥하는데 사정(私情)을 따라 공사(公事)를 폐할 수는 없다.”
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관에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교외에 나와 환영하였다.
김희채(金熙采 1744-1802)가 장련 현감(長連縣監)이 되어 인자하고 착하게 정치를 하였다. 안협(安峽)으로 옮기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길을 열 겹으로 막았다. 그는 밤을 타서 빠져 도망하여 갔다.
▣궐하(闕下)에 달려가 유임(留任)하기를 빌면 나라에서 그대로 허락하여 주어서 민정(民情)에 따르는 것은 예전에 착한 것을 권하는 큰 방법이다.
●강수곤(姜秀崑)이 고창 현감(高敞縣監)이 되었는데, 어떤 일로 견책당하여 파면되었다. 고을 부로(父老)들이 길을 막고 감사에게 유임시켜 주기를 빌고, 민간에서 앞을 다투어 군량을 내어 그 벌을 속(贖)하려 하였다. 그러나 되지 않자 모두 눈물을 흘리며 친척을 잃은 것처럼 하였다.
▣명성(名聲)이 드러나서 이웃 고을에서 얻기를 청하거나, 두 고을이 서로 얻기를 다투면 이것은 어진 수령의 좋은 평가이다.
▣수령의 직을 오래 맡아 서로 편안하게 되거나, 이미 늙었으나 애써 유임시키기를 오직 백성의 뜻에 따르고 법에 구애되지 않는 것은 태평세대의 일이다.
▣수령의 직을 오래 맡아 서로 편안하게 되거나, 이미 늙었으나 애써 유임시키기를 오직 백성의 뜻에 따르고 법에 구애되지 않는 것은 태평세대의 일이다.
▣친상을 만나서 돌아간 자는 오히려 백성들이 놓지 않기 때문에 기복(起復)하여 환임(還任)시키기도 하고, 상사를 마친 뒤에 다시 제수하기도 한다.
▣몰래 아전과 함께 모의하여 간사한 백성을 꾀어 움직여서 대궐에 나아가서 유임하기를 빌게 하는 것은,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그 죄가 심히 크다.
제4조 걸유(乞宥) : 수령이 법에 저촉되었을 때 백성들이 용서해 주기를 비는 것
▣몰래 아전과 함께 모의하여 간사한 백성을 꾀어 움직여서 대궐에 나아가서 유임하기를 빌게 하는 것은,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그 죄가 심히 크다.
제5조 은졸(隱卒) : 수령이 임지에서 죽었을 때 백성들이 서러워함
▣임소(任所)에 있을 적에 죽어서 맑은 덕행이 더욱 빛나, 아전과 백성이 슬퍼하여 상여(喪輿)를 붙잡고 부르짖어 울고, 오래되어도 잊지 못하는 것은 어진 수령의 유종(有終)의 미(美)이다.
▣오래 병으로 누워 위독하면 곧 거처를 옮겨야 할 것이요, 정당(政堂)에서 운명하여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상(喪)에 소용되는 쌀을 이미 나라에서 주는 것이 있으니, 백성이 부의(賻儀)하는 돈을 어찌 두 번 받을 것이 있으랴. 유언으로 못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가하다.
●《속대전(續大典)》 〈호전(戶典)〉 외관공급조(外官供給條)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관찰사(觀察使) 및 수령이 임지에서 상사를 당하면 호남ㆍ영남은 40석이고, 호서(湖西)는 30석이며, 자신이 죽으면 호남ㆍ영남은 40석이고, 호서는 35석이며, 해서(海西)는 친상이나 자신의 상이거나 35석이다. 처상(妻喪)에는 모두 자신의 상에 비하여 절반이다.” - “병사(兵使)의 상에는 영남ㆍ호남은 35석이고, 호서ㆍ해서는 30석이다.” “수사(水使)의 상에는 영남ㆍ호남은 30석이고, 호서ㆍ해서는 15석이다.” “영장(營將)의 상에는 호남ㆍ영남은 30석이고 호서는 15석인데, 모두 저치미(儲置米)로 준다.” -
살피건대, 나라에서 주는 쌀이 이렇게 넉넉한 것은, 아래 백성에게 거두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치적(治績)의 소문이 널리 퍼져 특이한 소문이 있으면 사람들이 칭송하게 된다.
제6조 유애(遺愛) : 인애(仁愛)의 유풍(遺風)
▣죽은 뒤에 사모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면, 그 인애(仁愛)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돌에 새겨 덕을 칭송하여 영원토록 보여 주는 것이 이른바 선정비(善政碑)인데, 마음으로 반성하여 부끄럽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유정원(柳正源 1703-1761)이 통천 군수(通川郡守)가 되어 은혜스러운 정사가 많았다.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자, 공이 한 필 말로 왕의 부름에 응하여 나아갔다. 백성이 늙은이나 어린이나 말머리를 막고 부르짖어 울며 혹은 길 가운데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공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떠나왔다. 뒤에 고을 사람들이 동비(銅碑)를 만들어서 그 덕을 칭송하였다.
▣목비(木碑)를 세워 덕정(德政)을 칭송하는 것은 찬양하는 것도 있고 아첨하는 것도 있으니, 세우는 대로 곧바로 없애고 엄금하여 치욕에 이르지 않게 하여야 한다.
●판서(判書) 이상황(李相璜 1763-1841)이 충청도 암행 어사(忠淸道暗行御史)가 되었을 때였다. 새벽에 괴산군(槐山郡)으로 가서, 고을 5리쯤 못 미쳤는데 아직도 컴컴하였다. 이상황이 보니, 멀리 미나리밭 가운데에 한 백성이 소매에서 나무조각을 꺼내어 진흙 속에 거꾸로 꽂았다가 조금 뒤에 또 길 옆에 세우고, 또 앞으로 수십 보를 가더니 또 소매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어 진흙칠을 하며 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이나 하는 것이었다. 어사가 묻기를,
“그것이 무슨 물건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선정비(善政碑)인데, 나그네는 알지 못하오. 이것이 선정비라오.”
하였다. 어사가 말하기를,
“왜 진흙칠을 하오.”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암행 어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므로 이방(吏房)이 나를 불러 이 비 열 개를 주고 나를 시켜 동쪽 길에 다섯 개를 세우고, 서쪽 길에 다섯 개를 세우라고 하였는데, 눈먼 어사가 이것을 진짜 비로 알까 염려하여 그 때문에 진흙칠을 하여 세우는 것이오.”
하였다. 어사가 그길로 군에 들어가서 일을 조사하여 먼저 진흙비〔泥碑〕의 일을 수죄하고 봉고파직(封庫罷職) 시켰다.
▣떠나간 지 오랜 뒤에 다시 그 고을을 지날 적에, 백성들이 반갑게 맞아서 항아리의 장과 도시락 밥이 앞에 가득하면 말몰이꾼도 빛이 난다.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면 그 정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있을 때에는 혁혁(赫赫)한 명예가 없고, 간 뒤에 사모하는 것은 공을 자랑하지 않고 남모르게 착한 일을 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진 사람이 가는 곳에 따르는 자가 시장과 같고, 돌아와도 따름이 있는 것은 덕의 징험이다.
▣훼방과 칭찬의 참됨과 선과 악의 판단 같은 것은 반드시 군자의 말을 기다려서 공안(公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