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東文選) 2
동문선 제52권
●풍왕서(諷王書) : 설총(薛聰)
신은 듣자오니, 옛날 화왕(花王 모란(牧丹))이 처음으로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향내 풍기는 동산 속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써 둘렀더니, 늦은 봄을 당해 곱게 피자, 온갖 꽃을 무시하고 유독 빼어났답니다. 그러자 가깝고 먼 곳에서 곱고 고운 정령과 젊디젊은 꽃들이 모두 달려와서 화왕을 뵙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답니다. 별안간 한 아리다운 아가씨가 고운 얼굴 하얀 이빨, 밝은 단장과 고운 옷차림으로 사뿐사뿐 걸으며 어여쁘게 앞에 와서 아뢰기를, “저는 눈처럼 흰 모래 물가를 밟고 거울인 양 맑은 바다 위를 마주보면서,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쏘여 스스로 노닐었사옵니다. 저의 이름은 장미라 하옵니다. 대왕의 아름다운 덕망을 듣사옵고, 저 향내 풍기는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오니, 대왕께서 저를 허용하시겠사옵니까.”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내가 베옷에 가죽 띠를 띠고 흰 머리로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고불고불 걸어 오더니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한 길가에 살고 있사옵니다. 아래로는 아득한 들 경치를 굽어보고, 위로는 높이 솟은 산 빛을 비겼사옵니다. 저의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 하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왕께서는 좌우의 공급이 넉넉하여 비록 기름진 쌀과 고기로써 창자를 채우고 아름다운 차(荼)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 하오나,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한 좋은 약으로써 기운을 도울 것이요, 영사(靈砂)로써 독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비록 실과 삼의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갈[菅]이나 사초[蒯]도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는 결핍될 때를 대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왕께서 뜻이 있으신지요,” 하였답니다.
어떤 자가 아뢰기를, “이 둘이 함께 왔으니,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놓친단 말씀입니까.” 하였더니, 화왕은, “저 사내의 말도 일리는 있겠지마는,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아가씨를 놓치게 되겠으니, 장차 어떻게 하였으면 좋단 말인가.” 하고 답하였답니다. 그제서야 그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저는 대왕을 총명하고도 의리를 아시는 분인 줄 알고 왔더니, 이제 보니 글렀습니다. 대개 임금된 분들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곧고 올바른 자를 싫어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에, 맹가(孟軻)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었고, 풍당(馮唐)은 말단 벼슬로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낸들 어이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화왕은 곧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 했다.” 하고 사과하였답니다.
동문선 제52권
●논 신돈 소(論辛旽疏) : 이존오(李存吾)
※주의(奏議) :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하나의 문체(文體) 이름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를 논하여 경계한 것이다.
신 등이 삼가 보오니, 3월 18일 궁전 안에서 문수(文殊會)가 열렸을 때에, 영 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재상의 반열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더불어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놀라 뛰어 흉흉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니, 대체 예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온데,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마련하였음은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하여 그 꾀가 깊고 그 생각이 먼 것이었습니다.
적이 보옵건대 신돈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니, 애당초에 영 도첨의로서 감찰(監察)을 맡았을 제, 명령이 내리던 날에 예법으로서는 의당히 조복을 차리고 나아가 은혜를 사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월이 되어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궐정에 들어와서는 그 무릎을 조금도 굽이지 않은 채 늘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여 전하와 함께 호상(胡床)을 웅거하였고, 그 집에 있을 때는 재상들은 그 뜨락 밑에서 절을 하였으나 모두 앉아서 접대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위로도 역시 이러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앞서는 중인 만큼 의당히 도외(度外)에 두어서 그 무례함을 책망할 것은 없었지마는, 이젠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예법을 잃고 윤리를 허물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그 원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라는 이름을 의탁하겠지마는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의 스승이었으나, 신 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런 일을 하였다는 말을 못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의 외조부였으므로 인왕께서 겸양하여 조손의 예로써 서로 만나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명분이란 본디부터 정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법이란 군신이 생긴 이래로 만고를 지나도 바꾸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신돈과 전하께서 사사로이 고칠 바는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신돈이 어떠한 사람이건대,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오직 임금이라야 복을 짓고, 오직 임금이라야 위엄을 지으며, 오직 임금이라야 옥식(玉食)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신하로서 복을 짓거나, 위엄을 짓거나, 옥식을 하는 자 있다면 반드시 그 집을 해치고 나라를 해쳐서 백성은 참람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서 임금의 권력을 참람하여 쓴다면 모든 관원이 그 분수에 편안하지 않을 뿐아니라, 세민들 역시 이에 따라 분수에 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돈은 능히 복을 지으며 위세를 짓고 또 전하와 더불어 한 자리에 앉았으니, 이는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참람함이 극도에 달하여 교만이 습관으로 되었으므로, 백관들이 그 분수를 지키지 않고 세민이 분수에 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간웅(奸雄)이 망칙한 마음을 품는다면 예법은 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습관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만일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여서 만 백성에게 재해가 사라진다면 그의 머리를 깎고 그의 옷을 물들이고 그의 벼슬을 삭탈하여 사원(寺院)에다 두고서 공경할 것이요, 반드시 이 사람을 써야만 국가가 평안하겠다면 그 권력을 제재하여 상하의 예법을 엄하게 한 뒤에 부리게 되어야만 백성의 마음이 정해질 것이요, 나라의 어려움도 펴질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신돈을 어진 이라 한다면 신돈이 일을 맡은 이래로 음양이 절후를 잃어서 겨울철에 우뢰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을 메이는 듯 하여, 열흘이 넘도록 해가 검고 밤중에 붉은 기운이 돌고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졌으며, 나무의 고드름이 지나치게 심하고, 청명(淸明)이 지난 뒤에도 우박과 찬바람이 일어 하늘의 기후가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이 백주에 성중으로 날아들어 달리니, 신돈에게 내린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와 조종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까.
신 등은 직책이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므로, 전하를 돕는 이로 그 자격이 못되어 장차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며, 만세에 기롱의 대상이 될까 보아서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면하려 하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는지라, 대답하심이 있기를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동문선 제52권
●상 시무 서(上時務書) : 최승로(崔承老)
...신이 비록 우매하오나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어 이미 주달할 마음도 있거니와 또 회피하려 하여도 길이 없습니다. 신이 이제 삼가 하찮은 회포를 기록하여 시무(時務)에 벗어남이 없이 무릇 28조를 글월과 함게 별도로 봉해서 드리옵니다.
〈제1조〉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이미 47년이 되었으나, 사졸들은 편안히 잠을 못 이루고 군량만 허비함을 면치 못한 것은, 서북이 오랑캐들에게 가까와서 국방의 일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를 생각하시옵소서. 대개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었고, 압록강 가 돌성을 경계로 삼은 것은 중국에서 정한 것인데, 원하건대 이 두 곳에서 어느 것이든지 영단을 내려 요새지를 골라 강역을 정하시고, 활 잘 쏘고 말 잘 달리는 선비를 뽑아서 그 방수(防戍)의 역(役)을 맡길 것이며, 또 그 중에서 두세 명의 편장(偏將)을 뽑아서 그를 통솔하게 하면 서울의 군사는 번갈아 수자리 하는 괴로움이 없을 것이요, 군량과 마초를 운반하는 비용이 덜어질 것입니다. ...
동문선 제53권
●진시무 서(陳時務書) : 이색(李穡)
...유사(有司)가 비록 공문(公文)에 붉은 글씨의 선후로써 빈주(賓主)를 정하였으나, 만일 갑(甲)이 유력하다면 을(乙)에게서 무리하게 빼앗는 것인데, 하물며 공문의 붉은 글씨도 생선의 눈이 구슬에 섞여 있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농토를 받은 집들은 모두 임금의 신하로써 힘을 다한 공신의 자손이 이것으로 농사를 대치함이니, 저편에서는 비록 잃어버렸으나, 이편에서는 얻음이 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초(楚) 나라 사람이 활을 잃었는데, 초 나라 사람이 얻은 것같아서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마는, 다만 백성이 하늘처럼 믿고 있는 것은 밭에 있을 것이니, 두어 이랑의 밭을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부모 처자의 부양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조세를 거두는 자가 이미 이르렀으니, 만일 그 밭의 주인이 한 사람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더러는 서너 집도 있고, 일고 여덟 집도 없지 않으니 진실로 힘이 서로 같고 형편이 서로 대적이 될 수 있다면 누가 즐거이 양보하겠습니까.
이러한 관계로 그 조세를 장만하여 부족하면, 또 꾸어서 보태어 바치는데, 무엇으로써 그의 부모를 봉양하며, 무엇으로써 그의 처자를 살리겠습니까. 백성이 곤궁에 빠지는 것이 곧 이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부(富)한 사람은 그럴 수 있겠지마는, 이 간난하고 의로운 자가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자리에 오르시던 처음에 전제를 급무로 삼으셨고, 이어서 교지를 내리시되 역시 이 일에 대하여 권권하셨던 바, 깊은 꾀와 깊은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서 나왔으니, 아, 거룩하옵니다. ...
동문선 제55권
●사병을 없애도록 주청하는 장계(請罷私兵狀) : 권근(權近)
...우리 태상왕(太上王 이성계(李成桂))께서는 개국(開國)하신 초기에 특히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셔서 병권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셨사온데, 그 규모가 원대(遠大)한 것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의논은 혁명의 초기여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의외의 변란에 대비함이 마땅하다 하여, 나라에 공훈이 있는 왕족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두게 해서 급한 일을 막도록 하자는 것이 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사병이 모두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사병을 둔 사람들이 오히려 난리를 일으켜 위태롭게 되었사오나 다행히 하느님의 보우하심으로 전하(정종〈定宗〉)께서 난리를 평정하시고 사직을 안정시켜서 오늘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사병에 대한 의논은 다시 예전과 같이 구습에 젖어 제거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이미 상서를 올려 사병을 없애도록 청하였사오나, 전하께서는,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이니 다른 일이 없을 것이다.”하시면서 다시 사병을 두게 하셨사옵니다. 그러하온데 오래지 않아 내란이 지친(至親)들의 사이에서 났사옵니다. 이로써 보건대 사병을 두게 하는 것은 한갓 난리만 일으킬 뿐이요 그 이익은 볼 수 없는 것이오며, 대간의 말이 맞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사병을 지금까지 없애지 않고 있사오니 장래의 우환은 실로 염려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사옵니다. ...
동문선 제56권
●농상 권과 차자(農桑勸課箚子) : 이첨(李詹)
농상(農桑)은 의식(衣食)의 근원이옵고 위정(爲政)의 요체이오니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사옵니다. 이 까닭을 홍범(洪範)에서는 팔정(八政) 가운데 식화(食貨)를 가장 우선으로 삼았고, 맹자(孟子)도 이것으로써 제(齊) 나라 양(梁) 나라의 임금을 권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왕조에는 비록 권과의 규정은 있사오나 실천이 없사와 백성이 기한[饑]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사오니 개탄할 일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거니와 전하께서는 권과의 영(令)을 독실히 시행하사,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시기를 잃지 말게 하여 성적을 얻게 하옵소서. 나라가 풍족하고 백성이 부유하게 되는 길이 오로지 여기에 있사옵니다.
동문선 제57권
●대 견훤 기 고려왕 서(代甄萱寄高麗王書) : 최승우(崔承祐 870년경-930년경)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하니, 마치 암자라[鼈]가 수자라[黿]의 소리에 응하는 것 같고,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가지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社稷)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므로, 이에 먼저 조적(祖逖)은 말채를 잡았고 한금호(韓擒虎)는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백관들에게 맹세(盟誓)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하였고, 육부(六部)에 효유(曉諭)하기를 의풍(義風)으로 하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신하는 도망하고 임금은 변을 당하여 죽었으므로, 곧 경명왕(景明王)의 외종(外從)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을 권하여 즉위하게 하니 “위태로웠던 나라는 중흥되고 잃었던 임금은 있게 되었다.”는 말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족하는 충고(忠告)하는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다만 유언(流言)을 듣고 여러 가지 꾀로 넘겨다 보고 다방면으로 침략하였으되, 아직 나의 말머리[馬首]를 보지 못하였고 나의 소털 하나를 뽑지 못하였습니다. ...
동문선 제62권
●상 정동성 서(上征東省書) : 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국 늙은 여러 관원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정동성 여러 상국 집사께 글을 올립니다. 조정 사신 두적(朶赤) 등이 교천대사(郊天大赦)의 말씀을 받들고 왕경에 옴에 있어 우리 보탑실린왕(寶塔實憐王 :충선왕)께서 관리를 이끌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밖까지 출영하고 본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서를 다 듣고 나서 사신 등이 나아가 왕을 붙잡아 말에 태워서 돌아갔습니다. 일이 창졸간에 일어나 모든 배신(陪臣)들도 몸 둘 곳이 없었으니, 오히려 다시 어떻게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면, 왕은 연소해서 많을 일을 겪지 못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에 이에 이른 것이지, 원래 그 본 뜻은 또한 다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
동문선 제66권
●남행월 일기(南行月日記)
이규보(李奎報)
내가 일찍이 사방을 두루 다녀 무릇 내 말[馬] 발굽이 이르는 곳에 만일 특이한 이야기나 볼거리가 있으면, 곧 시(詩)로써 거두고 문(文)으로써 채집(採集)하여, 후일에 볼거리로 만들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무엇이었던가. 가령 내가 제법 늙어 다리에 힘이 없고 허리가 굽어 거처하는 곳이 방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보는 것이 깔고 있는 자리 사이에 지나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손수 모은 것을 가져다가 옛날 젊었을 때 분주히 다니며 유람하고 감상하던 자취를 보면 지난 일이 바로 어젯일처럼 또렷이 나타나 족히 울적한 회포를 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서였다.
내 시집 중에 강남시(江南詩) 약간 수(首)가 있는데, 이제 와서 그 시들을 읽으면, 당일에 노닐던 일이 역력(歷歷)히 눈앞에 있는 듯하다.
그뒤 5년 후에 전주막부(全州幕府)로 나가 2년 동안에 무릇 유람하고 다닌 일이 꽤 많았다. 그러나 늘 강산과 풍월을 만나 휘파람이 겨우 입에서 나올 만하면 부서(簿書)와 옥송(獄訟)이 번갈아 시끄럽게 침노하여 겨우 한 연(聯) 한 구(句)를 얻고 그마저 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전편(全篇)을 얻은 것은 불과 60여 수(首)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군(郡)의 풍토(風土)와 산천의 형세로 기록할 만한 것이 있는데 즉석에서 노래하여 읊을 수 없는 것은 간략히 종이 조각에 써두어 일기(日記)로 삼았는데 방언(方言)과 속어(俗語)를 섞어 사용하였다. 경신년(1195년) 늦겨울[季冬]에 이르러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을 내어 읽어보니, 적은 것이 너무 간략하여 알아볼 수 없고, 제가 한 것인데 도리어 우스워 다 꺼내어 불살라 버렸다. 그중에서 한두 가지 읽을 만한 것을 주워서 그나마 차례로 적어본다.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百濟)의 땅이다. 인구가 많고 집들이 즐비(櫛比)하여 옛 나라의 기풍(氣風)이 있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유치하거나 무지하지 않으며, 아전들이 다 점잖은 선비와 같아 행동 거취가 찬찬함을 볼 만하다. 중자산(中子山)이란 산이 있는데, 가장 울창하여 고을의 웅장한 진산(鎭山)이 된다. 이른바 완산이란 것은 다만 나지막한 한 봉우리일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이름을 얻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주리(州理 주를 다스리는 곳 지금의 군청)에서 일천 보(步)쯤 떨어진 곳에 경복사(景福寺)가 있고, 그 절에 날아온 방장(方丈 절의 주지가 있는 곳)이 있다 한다. 내가 예전부터 들었으나 사무(事務)에 바빠 한번도 찾아보지 못하다가, 어떤 날 휴가(休暇)를 이용하여 드디어 가보았다. 이른바 날아온 방장이란 것은 옛날 보덕대사(普德大士)가 반룡산(盤龍山 함흥에 있다.)에서 날려온 집이다. 보덕대사의 자(字)는 지법(智法)인데, 일찍이 고구려(高句麗)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거처하다가, 하루는 문득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구려가 오직 도교(道敎)를 높이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가 반드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몸을 안전히 하여 난(難)을 피하고자 하는데, 어느 곳이 좋을까.” 하였다. 그러자 제자(弟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 고달산(高達山)은 편안히 머물 만한 안전한 땅입니다.” 하였다. 건봉(乾封) 2년 정묘년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와보니, 집이 벌써 고달산으로 옮겨졌는데, 이곳은 반룡산에서 거리가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명덕이 말하기를, “이 산이 비록 빼어나긴 하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가 스승이 이리로 옮겨 올 줄 알았다면 반드시 옛 산의 샘물까지를 옮겨 왔으리다.”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전(傳)을 지어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여기서는 대충만 기록한다.
12월 기사일에 비로소 속군(屬郡)들을 두루 다녀보았다. 마령(馬靈)ㆍ진안(鎭安)은 산골 사이의 옛 고을인데, 그 백성들이 질박하여 얼굴이 잔나비같고 그릇의 음식이 비린내가 나는 것이 오랑캐풍(風)이 있으며, 꾸짖거나 나무라면 마치 놀란 사람과 같이 금방 달아날 듯하다. 산을 따라 감돌아 가서 운제(雲梯)에 이르렀다. 운제로부터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봉우리와 드높은 고개가 만인(萬仞 1인은 8자이다)이나 솟아 있으며,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고산은 여러 고을 중에서 상당히 누추하지 않았다. 고산서 예양(禮陽)으로, 예양서 낭산(朗山)으로 갔는데 다 하룻밤씩 자고 갔다.
다음날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고인돌[支石]’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고인돌이란 것은 민간에 전하기로는 옛날 성인(聖人)이 고인 것이라 하는데, 과연 이상한 기적(奇迹)도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거의 없고 울타리가 쓸쓸한데,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찾아오는 자가 불과 4ㆍ5명뿐이어서 보기에도 불쌍하고 서글펐다.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변산이란 곳은 우리 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宮室)을 짓고 고치노라고 해마다 재목을 베지 않은 적이 없으나, 소도 가릴 만한 두께와 하늘을 찌를 듯한 재목이 항상 없어지지 않았다. 내가 나무베기를 늘 감독하므로 나를 불러 작목사(斫木使)라 한다. 내가 노상(路上)에서 장난삼아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권세는 짐꾼과 같으니 영화를 알 만하고 / 權在擁軍榮可詫
벼슬은 나무꾼이니 창피함을 알겠구나 / 官呼斫木辱堪知
라고 하였으니, 이는 내가 맡은 일이 짐꾼이나 나무꾼의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임진년 정월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겹겹의 봉우리가 솟았다 꺼졌다 구불구불 펼쳐서 머리며 꼬리가 어디 놓였는지, 발꿈치와 팔이 어떻게 뻗었는지 도대체 몇 리(里)인지를 알 수 없었다. 바로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群山)섬ㆍ고슴도치섬[猬島]ㆍ비둘기섬[鳩島]이 있는데 다 아침저녁으로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바닷사람들이 이르기를, “순풍(順風)을 얻어 쏜살같이 가면 거기서 중국(中國)이 멀지 않다.” 하였다. 산중에는 더욱 밤[栗]이 많아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양식의 일부를 삼는다. 얼마를 가니 아름다운 대숲이 빽빽이 삼대[麻]처럼 서 있는데, 수백 보(步)쯤마다 울타리로 막아놓았다. 대수풀을 건너질러 바로 내려가 비로소 평탄한 길을 얻어 가서 한 고을에 이르니, 보안(保安)이란 곳이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로(平路)라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潮水)의 진퇴(進退)를 기다려 때맞추어 가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 조수가 한창 들어오는데, 아직도 50보쯤 거리가 있었다. 내가 채찍질하며 말을 달려 먼저 가려 하니, 종자(從者)가 깜짝 놀라 급히 말렸다. 내가 듣지 않고 그냥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거리며 휘몰아쳐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마치 만군(萬軍)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듯 엄청나 몹시 두려웠다. 내가 넋을 잃고 급히 달아나 산으로 올라간 뒤에야 겨우 면하였으나, 거기까지 따라와서 말의 배[腹] 있는 데까지 넘실거렸다. 바라보니 푸른 물결, 푸른 산이 나타났다가 숨었다가 들락날락하며, 맑은 날이나 흐린 날, 아침과 저녁의 풍경이 각기 다르고,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 푸르락 그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히 만 겹의 그림 병풍을 두른 듯하였다. 눈을 들어 바라보자 시(詩)를 잘하는 두세 명의 벗과 더불어 가지런히 고삐를 늦추고 가면서 함께 읊지 못하는 것이 한(恨)스러웠다. 그러나 펼쳐진 경치가 정신을 사로잡아 정서(情緖)가 저절로 발하여 시(詩)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틈에 시가 술술 나왔다. 일찍이 주사포(主史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 위에 떠 해변의 모래 벌판을 휘영청히 비치어서 기분이 매우 상쾌하여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읊조렸더니, 마부(馬夫)가 이상히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시 한 수(首)를 지었다.
정미년 윤12월에 또 조정의 명(命)을 받아 여러 고을의 원옥(冤獄)을 감찰(監察)하게 되어 먼저 진례현(進禮縣)으로 향하였다. 산이 매우 높고 들어갈수록 점점 깊숙하여 마치 딴 나라의 별경(別境)을 밟는 듯 마음이 어쩐지 우울하고 무료하였는데, 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군사(郡舍)에 들어가보니, 현령(縣令)과 수리(首吏)가 다 부재(不在)중이었다. 밤 2경(更)쯤에 영(令)과 이(吏)가 각기 8천 보(步)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헐떡이며 달려와 말을 문기둥에 매어놓고 아예 꼴과 여물을 주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대개 몹시 달린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는 체하면서 들으니, 두 군(君)이 노부(老夫)를 상당히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부득이 술자리를 베풀도록 허락하였는데, 한 기생의 비파(琵琶) 연주가 꽤 들을 만하였다. 내가 다른 고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여기 와서 좀 실컷 마시고 또 현악(絃樂) 소리를 들었으니, 아마 머나먼 땅의 절경(絶境) 길에 와서 다른 나라에나 들어온 듯, 사물(事物)에 감촉(感觸)되어 감상적(感傷的)인 기분을 발하는가 보다.
진례(進禮)로부터 남원부(南原府)에 이르렀다. 남원은 옛날 대방국(帶方國)이다. 객관(客館) 뒤에 죽루(竹樓)가 있는데, 한적하니 좋아서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경신년 봄 3월에 또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할 때, 무릇 수촌(水村)ㆍ사호(沙戶)와 어등(漁燈)ㆍ염시(鹽市)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경(萬頃)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에 들어가 수일(數日)을 묵고 떠나 장사(長沙)로 향하는데, 길가에 한 바위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彌勒像)이 우뚝 서 있었는데, 이는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 그 상(像)에서 몇 보(步)떨어진 곳에 또 큰 바위가 있어 속이 텅 비었기에 그 안으로 들어가니, 땅이 차츰 넓고 탁 트였는데 위가 갑자기 훤히 트이며 집이 굉장히 화려하고 불상(佛像)이 장엄(莊嚴)하게 빛나니, 이것이 도솔사(兜率寺)였다. 날이 점점 저물기에 채찍질하여 달려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잤다.
다음날 장사에 들어가고 장사로부터 무송(茂松)에 이르니, 다 쓰러진 작은 고을이라, 기록할 만한 일이 없고, 다만 바다를 따라 배를 검문하고 척수(隻數)를 헤아릴 뿐이었다. 생각하니 내가 평소에 샘[泉] 하나 못[池] 하나만 보아도 움켜마시고 놀고 헤엄쳐 그지없이 즐겼던 것이 강해(江海)를 그리워하면서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다와 함께 노닌 지 오래되니 눈 앞의 광경이 전부 물이요, 귀에 들리는 것이 또한 물의 고함지르는 소리라, 이제는 이미 권태로워 보기 싫을 지경이었다. 하느님은 왜 사람에게 너무 빨리 먹여서 배고픈 자를 갑자기 배부르게 하여 도리어 맛난 음식을 질리게 하는가.
그해 8월 20일은 나의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다. 하루 앞서 변산(邊山) 소래사(蘇來寺)에 가니, 벽(壁) 위에 고(故)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詩)가 있어, 나도 2수를 화답하여 벽(壁)에 썼다.
다음날 부령현(扶寧縣) 현령(縣令)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ㆍ7명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짚 앞의 계단과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부여잡고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하였다. 곁에 한 암자(庵子)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뱀포[蛇包] 성인(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인데, 원효(元曉)가 와서 살았으므로 뱀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자 이 물이 바위 틈에서 문득 솟아났는데 물맛이 매우 달아 젖같아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의 늙은 중 한 명이 거처하는데, 삽살개 눈썹과 다 해진 누비옷을 입은 모습이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외실(內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內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을 모셨고, 외실(外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어, 다만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를 참예할 뿐이라 하였다. 나의 배리(陪吏)가 슬그머니 내게 말하기를, “이 사(師)가 일찍이 전주(全州)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횡포하여 사람들이 모두 성가시게 여겼습니다. 그뒤 간 곳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사입니다.”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개 중(中)ㆍ하(下)의 사람은 그 그릇이 일정(一定)하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옮겨지지 않으나, 무릇 악(惡)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는 그릇이 보통 사람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한번 선(善)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드높고 탁월(卓越)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 사냥하던 장수가 우두(牛頭) 이조(二祖) 대사(大士)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아 마침내 숙덕(宿德)이 되었고, 해동(海東)의 명덕대사(明德大士)도 매사냥을 하다가 보덕성사(普德聖師)의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이런 유(類)로 미루어본다면, 이 사가 마음을 결단하여 행실을 고치고 특이하게 이상한 행실을 한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이른바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 구경하여보니, 그 높고 험함이 효공(曉公)의 방장(方丈)의 만배(萬倍)는 되었다. 높이가 백 척(百尺)쯤 되는 나무 사다리가 바로 절벽(絶壁)에 의지해 있는데, 삼면(三面)은 다 아득한 구렁이라, 몸을 돌려 층(層)을 헤아리며 내려가야 방장에 이를 수 있는데, 한 발만 실수하면 다시 어쩔 수 없다. 내가 평일(平日)에 한 대(臺) 한 다락[樓]에 오를 적에 높이가 심(尋)ㆍ장(丈) 정도만 되어도 신경이 약해 머리가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빼어난 곳에 대해 익히 들었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왔으니, 만일 그 방장(方丈)을 들어가보지 못하고 진표대사(眞表大士)의 상(像)에 예(禮)를 갖추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에 머뭇거리며 기어 내려가니, 발은 사다리에 있는데도 벌써 몸이 굴러 떨어지는 듯하였으나 마침내 들어갔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를 갖추었다.
율사의 이름은 진표(眞表), 벽골군(碧骨郡) 대병촌(大幷村) 사람이다. 나이 12살에 현계산(賢戒山)불사의암(不思議巖)에 거처하였으니, 현계산이 바로 이산이다. 마음을 재우고 가만히 앉아 자씨(慈氏 관세음보살의 별칭)와 지장(地藏)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몇 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는지라, 이에 몸을 절벽 아래로 던졌더니, 두 명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말하기를, “사(師)의 법력(法力)이 작기 때문에 2성(聖)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더욱 부지런히 노력하여 21일이 되자, 바위 앞 나무 위에 자씨와 지장보살이 몸을 나타내어 계(戒)를 주고, 자씨는 친히《점찰경(占察經)》 2권을 주고, 또 아울러 199생(栍)을 주어 가르치는 도구를 삼았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일반에 전하기로는 바다의 용(龍)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돌아오려 할 때 현령이 한 산꼭대기에 술자리를 베풀어 말하기를, “이곳이 망해대(望海臺)입니다. 제가 공(公)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 좌석을 베풀고 기다리니, 잠깐 쉬십시오.” 하였다. 내가 드디어 올라가 바라보니, 대해(大海)가 빙 둘러 있는데, 산(山)과의 거리가 겨우 백여 보(步)였다. 한 잔 술, 한 구절의 시(詩)를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제 스스로 모양을 뽐내어 도무지 속세에 대한 미련이 한 점도 없어 가볍게 몸을 벗어버리고 날개짓하여 육합(六合) 밖에 날아다니는 듯하고, 머리를 들어 한번 바라보니 바로 뭇 신선(神仙)을 손짓하여 부를 듯하다. 동석(同席)한 10여 사람이 다 취하였고, 내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므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없을 뿐이었다.
무릇 내가 경력(經歷)한 곳에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적지 않았다. 대개 경사(京師)를 몸으로 보고 사방(四方)을 지체(支體)로 보면, 내가 노닌 곳은 남도의 한 쪽, 한 지체 중에도 한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기록은 다 잊고 빠뜨리고 깎인 나머지이니, 어찌 후일의 구경거리가 되겠는가. 우선 간직하여 두고 뒤에 동서남북으로 모조리 노닐러 다니며 모두 기록할 때를 기다렸다가 합하여 한 벌[通]을 만들었다가 늘그막에 근심을 잊을 자료로 삼음이 좋지 않을까 한다.
신유년 3월 일에 쓰다.
※이 글은 당시 전라북도의 모습을 찾는데 중요한 자료가되고 있다. 이규보는 1199년 6월부터 1200년 12월까지 전주목 사록겸서기로 근무하였는데 바로 이때의 기록이다. 위 글중에 예양현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여량현을 잘 못 알고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의 익산시 여산면은 당시 여량현이었다. 완주군 고산면에서 고개를 넘으면 익산시 여산면이고 낭산면은 바로 이웃이다.
또 진례현은 구례현을 잘 못 표기한 것이다. 진례현은 오늘날 충남 금산군이며 구례현은 남원부 바로 아래에 있다.
동문선 제71권
●전주 관풍루 기(全州觀風樓記) : 이달충(李達衷 1309-1384)
지정 정미년에 판사 한공(韓公) 계상(系祥)이 전주 목사가 되었다. 정사가 너그럽고 어진 것을 숭상하여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함이 없고, 1년도 못 되어 백성들이 여유가 있었다. 고을의 원로들에게 묻기를, “당신들 고을은 옛날의 도읍터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한 지방에서 으뜸이고 안찰사의 군영이 있다. 왕명을 반포하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없고, 민정(民情)의 소송(訴訟)도 여기에서 집중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절기가 무더운 달이 되면 관사(舘舍)가 낮고 습하여 더위와 습기를 피할 수 없다. 청사 북쪽에 있는 작은 정자가 녹균헌(綠筠軒)인데, 아주 좁고 막혀 있어서 거처할 수가 없다. 관청에서 비용을 댈 터이니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만드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리저리 분주하게 장인들을 모아 집을 짓고 흙손질을 하고 기와를 얹되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여 며칠도 안 되어 준공되었다. 올라가 둘러보니 시원스럽고 널찍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미 누각이 되었으니 이름짓지 않을 수 없고 기(記)를 짓지 않을 수 없다.”하고, 편지로 계림윤(鷄林尹) 이씨에게 고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다. ...
동문선 제81권
●고창현 빈풍루 기(高敞縣豳風樓記) : 정이오(鄭以吾 1347-1434)
고창은 본시 산수가 아름답다 일컬었고,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에 알맞다고 하였다. 지난 무술년 여름에 이후(李侯)가 현감이 되어 왔었는데, 이듬해에 풍년이 들고 사람은 화평하며 정사는 맑고 일은 간편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공관이 비좁아서 사신이 오면 답답한 심정을 풀고 맑은 기운을 마실 만한 곳이 없었다. 항상 걱정하던 나머지 드디어 옛날의 정자터를 다듬고 몇 칸의 누를 세워 시냇가에 임하게 했는데 벽 바르고 단청하는 것까지 모두 두 달이 걸려서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바라보면 날 듯하였다. 동ㆍ남ㆍ북의 모든 산이 아득한 저 구름 속으로 층층이 보이고 첩첩이 나타나서 마치 책상 앞에 있는 것 같고, 왼편으로는 평야가 열려서 연꽃의 향기와 대숲의 푸른 빛이 바람에 따라 풍기고 비에 젖어 산뜻하며, 펀펀한 들판에는 많은 벼가 가득 차서, 봄이면 농부들이 나란히 나와 일을 하고 가을이면 역시 함께 거둬들이는데, 이는 바로 이후(李侯)가 편지에 써서 기를 청하고 또 누의 이름으로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후의 편지를 읽고 누워서 이 누의 경치를 구경하며 한 번이라도 이후와 더불어 그 누에 올라보고 술을 들어 서로 즐기며 여러분의 시를 읊고 싶었으나, 서로 천리 밖에 있어 뜻을 이룰 길이 막연하니, 고개를 쳐들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누의 경치는 하나만이 아니라 누의 흥미는 벼가 많은 데에 있으니, 감히 청컨대 이름을 빈풍(豳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대개 빈(豳)은 하(夏)의 열국(列國)으로 주(周)의 선국(先國)이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으로 민생의 명맥이 달려 있기 때문에 주 나라 선대가 그 어려움을 알아서 심고 가꾸는 것을 가르쳤다. 성왕(成王)이 즉위하게 되자 주공(周公)은 곧 후직(后稷)ㆍ공유(公劉)의 교화를 서술하여 성왕을 경계하고 그것을 빈풍이라 하였다. 그 칠월편(七月篇)의 시를 보면 마음속에 한 번도 농사를 잊은 적이 없으며, 1년 내 하루도 농사를 보살피지 않은 적이 없으며, 한 집안에 한 사람도 농사에 힘을 쓰지 않은 자가 없다. 그리고 농부나 길쌈하는 아낙네들의 수고로운 현상을 빠짐없이 다 진술하였으니,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주공이 어찌 체험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랴. 이른바, “성인(聖人)은 능히 천하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고금을 통하여 일식(一息)을 만든다.”는 것이니, 오직 주공만이 능히 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군(君)과 상(相)의 마음이 한결같이 성왕과 주공의 마음을 살펴서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농사에 힘을 다하여 태평의 정치를 다졌고, 더욱이 수령(守令)의 선택을 중히 하여 농사를 권장하는 직무를 겸하게 하였으니,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어찌 그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때를 맞추어 거두고 흩어서 백성의 모자라는 것을 보조하고, 오는 자를 위로하며 서로 권하여 농부가 민첩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윗사람에게 달린 것이요, 밭을 갈고 논을 김매어 몸은 땀에 젖고 발에 흙이 묻어 노고를 다하여, 벼 곡식이 잘 되게 하는 것은 실상 농부의 힘이다. 만약에 그때를 빼앗고 그 봉양을 누리면서,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禮)가 그렇다.” 한다면, 어찌 빈풍의 충후(忠厚)한 뜻이겠는가. 이후의 이름은 종문(種文)인데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여 가는 곳마다 치적이 현저하였다. 나는 이미 이 누에 올라서 산수의 운치를 구경하고 풍경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길이 없는 고로, 다만 벼가 많다는 말을 취하여 다가(多稼)로 그 이름을 명하는 것이다. 아, 백성으로써 그 근심을 삼고 백성으로써 낙을 삼는 자가 아니면, 이것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문선 제92권
●중국 서울로 돌아가는 행인 역공절을 전송한 글[送行人易公節還京序] : 변계량(卞季良)
조선이 비록 해외에 있으나 다행히 기자(箕子)의 본성에 바탕을 둔 가르침을 받아서, 사람들이 충효를 알고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여 중국을 높이고 신하로 순종하여 대대로 지켜오며 변함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 국왕은 천성이 충성하고 공경하여 신하로서 중국 조정을 섬김이 지성에서 나왔다. 시절에 따라서 조공을 바치는데, 항상 어루만져 사랑하는 후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을 하여 그 직책을 봉행하는데 더욱 조심성 있게 하니, 천자가 지극한 심정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생각이 더욱 두터웠다. 영락(永樂) 18년 봄에 천자가 우리 먼저 국왕이 삼가히 사대(事大)하던 것을 생각하여 아름다운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내리고, 이어 제사를 지내며 특별히 위로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그 명령을 받들고 예절을 잘 진행할 사람을 가려서 예부원외(禮部員外) 조공(趙公)과 행인(行人) 역공(易公)을 수레 앞에서 보내고 덕음(德音)을 선포하게 하여 그 사명이 우리 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왕이 배신(陪臣)을 시켜 멀리 나가 맞게 하여 지난 4월 8일에 서울 근교에 이르니, 왕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나가 사절을 맞아 관(舘)으로 인도하고 엎드려 천자의 명령을 받았으니, 임금과 신하가 마음껏 즐겨하고 도성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 어쩔 줄 몰랐으며 서로 경사스럽게 여기는 것은 황제의 은혜에 감격하고 사명을 공경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그리도 지극한가. 그가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가게 되니, 조정의 사대부들은 사모하는 생각이 매우 간절하여 돌아가는 시기가 너무 빠른 것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더 머무를 수 없으므로 시를 지어 보내는데 나에게 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예부(禮部)는 한 시대의 예악을 총괄하는 곳이요, 행인은 사방의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이다. 그 직책이 중대함이 이러하니 어찌 하루인들 천자의 앞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우리 나라에 오니 성천자(聖天子)께서 작은 나라를 우대하는 거룩한 뜻에 더욱 감동된다. 더구나 역공은 마음 가짐이 단정하고 정직하며 학술이 밝고 민첩하며 말솜씨와 용모가 모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하니, 어찌 다만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그 일을 전담할 뿐이겠는가. 반드시 장래에는 아침저녁으로 성천자의 덕을 깨우치고 보좌하게 될 것이니, 돌아간 후 천자에게 우리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큰 나라 섬기는 정성을 자세히 아뢰어서, 지금부터 오랜 뒷 세상까지 상하 모든 사람이 성의를 가지고 서로 믿어서 영구히 동쪽으로 펴지는 덕화를 입게 해 주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이 점을 잘 생각해 둘지어다.
동문선 제96권
●시사설(市肆說) : 이곡(李穀 1298-1352)
장사꾼들이 모여서 유무(有無)를 거래하는 곳을 시장(市場)이라 한다.
내가 일찍이 서울에 와서 골목에 들어가 보니, 얼굴을 단장하고 매음(賣淫)을 가르치는 자가 그 고움의 정도에 따라 값을 올리고 내리는데, 버젓이 그런 짓을 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을 계집 시장이라 이르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알겠다.
또 관청에 들어가 보니, 붓대를 놀려 법(法)을 희롱하는 자가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값을 올리고 내려 버젓이 돈을 받으며 조금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을 관리 시장이라 이르니 형정(刑政)이 엉망진창인 줄을 알겠다.
지금은 또 사람 시장이 생겼다. 작년부터 장마와 가뭄에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서, 강한 자는 도둑이 되고 약한 자는 다 거지가 되어, 입에 풀칠할 길이 없어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종을 팔아 저자에 늘어놓고 싼값에 매매하니, 개ㆍ돼지만도 못한데 담당자는 본체만체 한다.
아, 앞의 두 시장은 그 풍정이 밉살스러우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요, 뒤의 한 시장은 그 정상이 불쌍하니 또한 빨리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이 세 시장을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내 생각에는 그 아름답지 못하고 이치에 어긋남이 장차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동문선 제99권
●당의 역사에 간하는 신하를 죽인 것을 논함[唐史殺諫臣論] : 이규보(李奎報)
내가 당기(唐紀)를 보니까, 습유(拾遺)인 후창업(侯昌業)은 희종(僖宗)이 정사를 직접 보지 않고, 다만 놀기만 힘쓰는 것을 글을 올려서 심하게 간했더니 임금이 그를 죽었으며, 또 보궐(補闕)인 상준(常濬)이 글을 올려, 지방의 군벌이 너무 심한 데도 오히려 이를 깨닫지 못하니, 마땅히 법과 형벌을 바로잡아 사방에 위신을 세우기를 간하였더니, 임금이 노하여 또 그를 죽였다. 두 신하의 말은 절실하고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으로서 그만일 터인데,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전후하여 임금이 간하는 신하를 죽이는 사실은 많이 있겠으나, 지금 마침 희종(僖宗)의 기록을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이것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또한 걸(桀)ㆍ주(紂)가 간하는 신하를 죽인 데 대하여는, 그의 폭정이 백세(百世) 이후에까지 드러나서,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매우 비난하며 드러나게 책망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후대의 임금이 간하는 신하를 죽인데 대하여는, 비록 이것이 책과 역사에 실려 있을지라도, 그 나쁜 것을 걸주처럼 드러내는 사람이 적으니,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저 곰이나 범이 사람을 물어 뜯는 것은 사람이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되, 다른 것이 물어 뜯는다면 곧 사람이 이상스럽게 여긴다. 이로 본다면, 무도한 임금이 간하는 신하를 죽이는 것은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만일 그가 나쁜 짓 하는 것이 걸ㆍ주와 같은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는 곧 괴이하게 여긴다. 희종(僖宗)은 당(唐) 말기의 임금인데, 역량도 약하고 권력도 가벼워서 비록 걸ㆍ주와 같이 나쁜 짓을 하려하더라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간하는 신하를 죽였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볼 때에 또한 이상스럽지 않은가. 아,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한흠(韓歆)에게 대하여 그의 언사가 박절하자, 곧은 말을 미워하여 그를 시골로 추방하였다가 다시 추후에 문책하고 그를 죽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심하였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광무(光武)를 성군(聖君)이라고들 많이 일컫는데, 성군이라고 이름하는 사람도 그렇거늘 그 나머지야 말하여 무엇하랴. 사마광(司馬光)이 그것이 어질며 밝은 임금으로서 험이 된다 하여 크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를 성군이라 하여 일부러 숨긴 것인가. 나는 나쁜 짓으로는 간하는 신하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나쁜 짓이 큰 덕을 가리워 버리는데 어떻게 성군이라고 이를 수 있는가. 그를 현군(賢君)이라고 만하여도 족할 것이다.
●걸식론(乞食論)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문제는 중대한 것이다.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하루라도 구차스럽게 먹을 수는 없다. 먹지 않으면 생명을 해치며, 구차하게 먹으면 의리를 해친다. 홍범(洪範)의 여덟 가지 정사에 먹는 것과 재화가 먼저 있으며,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다섯 가지의 가르침에도 오직 먹는 것이 맨 앞에 놓여 있으며, 자공(子貢)이 정치를 물었을 때에 곧 공자는 먹을 것을 풍족히 할 것을 일러 주었다. 이것은 옛 성인이 백성을 살피는 방법에 있어서 하루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며, 세금을 바치는 제도를 마련하여 군사와 행정에 예산을 세우며,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에 경비를 두며, 홀아비와 과부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먹고 살게 되어 식량이 결핍되거나 굶주리는 탄식이 없었다. 성인은 백성을 위하여 염려하는 생각이 원대하였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천자와 공(公)ㆍ경(卿)ㆍ대부(大夫)는 백성을 다스리며 먹고 살았고, 아래에 있는 농업ㆍ공업ㆍ상업을 하는 백성은 노동에 부지런히 힘써 먹고 살았고, 중간에 있는 선비는 들어와서 효도하며 나와서는 공경하여 선왕의 도를 지키며 후일의 학자를 기다려 먹고 살았으니, 이는 옛 성인이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각기 직업을 두어 하늘이 먹여 살리는 혜택을 받게 했으니, 백성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지 않고 생활하는 자는 모두 옳지 못한 백성이니, 임금의 법에 비추어 반드시 죄를 받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그 때에 세존(世尊)이 먹을 때에 옷을 입고 바리때를 가지고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서 그 성 안에서 빌어 먹었다.” 하였다. 그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남녀간에 가정생활 하는 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생각하며,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을 옳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인간의 윤리를 떠나서 농사짓는 일을 버리며, 삶을 살아가는 근본을 끊었다. 그 방법을 가지고 천하를 개혁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그 방법대로 된다면 이것은 천하를 개혁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그 방법대로 된다면 이것은 천하에 사람이 없어질 터이니, 과연 빌어먹을 음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란 자는 서역(西域)의 임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왕위를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거하지 않았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며, 남자가 농사하며 여자가 길쌈하는 것을 의롭지 않다 하여 이를 포기하였으니, 아무런 노력하는 것도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를 무시하였으니, 선왕의 도리를 지키지도 않은 자다. 이는 비록 하루에 쌀 한 알을 먹는다 할지라도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이 방법대로 한다면 정말 지렁이처럼 먹지 않은 뒤라야 될 것이니, 어찌하여 빌어먹는단 말인가. 또한 먹는 것이 자기의 노력에 의하면 곧 불의(不義)가 되고, 빌어먹는 데 있어서는 곧 의가 된다는 말인가. 부처의 말은 의(義)도 없으며 이치도 없다. 책을 펴니 곧 이런 것이 보였으므로 이것을 논(論)한다.
동문선 제101권
●저생전(楮生傳) : 이첨(李詹 1345-1405)
생(生)의 성(姓)은 저(楮 닥)이요, 이름은 백(白 흼)이요, 자(字)는 무점(無玷 깨끗)이니, 회계(會稽) 사람이고, 한(漢)나라 중상시(中常侍) 상방령(尙方令) 채륜(蔡倫)의 후손이다. 생이 날 때에 난초탕[湯]에 목욕하고 흰 구슬[璋]을 희롱하고 흰 띠[茅]로 꾸렸으므로, 빛이 새하얗다. 같은 배의 아우가 무릇 19명인데, 다 서로 친목하여 잠깐도 그 차서를 잃지 않았다. 성질이 본시 정결하여 무인(武人)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즐겨 문사와 더불어 노니는데, 중산(中山) 모학사(毛學士 붓)가 그 계우(契友)로서 매양 친하게 놀아, 비록 그 얼굴을 점찍어 더럽혀도 씻지 않았다. 학문은 천지ㆍ음양의 이치를 통하고 성현ㆍ성명(性命)의 근원을 통달하며 제자(諸子)ㆍ백가(百家)의 글과 이단(異端)ㆍ적멸(寂滅)ㆍ의 교(敎)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적어 징험하여 역력히 볼 수 있다. 한(漢)나라가 선비를 책(策)으로 시험할 때 생(生)이 방정과(方正科)에 응하여 드디어 말씀을 올리니 말하기를, “고금의 서계(書契)가 흔희 대쪽을 엮고 겸하여 흰 비단을 사용하오나 둘 다 불편하오니, 신이 비록 두텁지 못하오나, 청컨대 참마음으로 대신하고자 하옵나니, 만일 효과가 없거든 저를 먹칠하옵소서.” 하였다.
화제(和帝)가 사람을 시켜 징험하니, 과연 능히 강기(强記)하여 백의 하나도 놓침이 없이 방책(方策)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에 저(楮)를 포상(褒賞)하여 저국공(楮國公) 백주 자사(白州刺史)의 벼슬에 올려 만자군(萬字軍)을 통솔하게 하고 봉읍으로써 씨(氏)를 삼았다. 수부(樹膚)ㆍ마두(麻頭)ㆍ어망(魚網)ㆍ□근(□根) 네 사람이 또한 같이 아뢰었는데 통솔함이 아뢴 것처럼 완전치 못함으로써 파면되었다. 이윽고 장생(長生)의 술을 배워 바람ㆍ비를 맞지 아니하고 좀에 먹히지 않고 매양 초일에 양정(陽精)을 마시며 먼지를 털고 그 옷에 향을 피워 고요히 처하였다. 진(晉)나라 좌태충(左太沖)이 〈성도부(成都賦)〉를 지으매, 생(生)이 한 번 보고 곧 외워 사람들이 다투어 베껴 쓰니, 비록 평소에 서로 알던 이도 그를 만나봄이 드물었다. 뒤에 왕우군(王右軍)의 묵적을 받아 그 해법(楷法)이 천하에 묘하였고, 양(梁)나라 태자(太子) 통(統)을 섬겨 함께 《고문선(古文選)》을 엮어 세상에 전하였으며, 조명(詔命)을 받아 위수(魏收)를 일으켜 함께 국사(國史)를 닦았으나, 수(收)가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명하지 못함으로써 예사(穢史)라 일렀다. 해직을 청하고 소작(蘇綽)과 함께 계장(計帳)을 상고하자고 청하니, 조서(詔書)로 허락하는지라, 이에 지출(支出)을 붉은 빛으로, 수입을 먹칠로 분명히 상고하여 기록하니, 사람들이 그 재능을 일컬었다. 뒤에 진후주(陳後主)에게 총애를 받아 늘 행신(幸臣) 여학사(女學士)의 무리와 임춘각(臨春閣)에서 시를 짓더니, 수군(隋軍)이 경구(京口)를 지나매 진(陳)의 장수가 밀계(密啓)하여 급한 사태를 고하였으나 생(生)이 숨겨 봉(封)을 열지 않아, 이 때문에 진(陳)이 패하였다. 대업(大業 수양제의 연호) 연간에 왕주(王冑)ㆍ설도형(薛道衡)과 함께 양제(煬帝)를 섬겨 함께 정초(庭草)ㆍ연이(燕泥)의 글귀를 읊었고, 이윽고 제(帝)가 다른 사람이 저보다 나음을 원치 않으므로 드디어 소박을 맞아 뚤뚤 말아 품고 나왔다.
당(唐)나라가 흥하자 홍문관을 두니, 생이 본관(本官)으로 학사(學士)를 겸하여 저수량(楮遂良)ㆍ구양순(歐陽詢)과 함께 전고(前古)를 강론하고 정사(政事)를 상각(商搉 어떤 일을 헤아려 정함)하여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었으며,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바야흐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엮을 때 생(生)을 박아(博雅)라 하여 매번 더불어 자문(咨問)하였다. 그때 마침 왕형공(王荊公 왕안석)이 권세를 부려 춘추(春秋)의 학(學)을 즐기지 않아 그것을 가리켜 찢어져 떨어진 조보(朝報 신문)라 하거늘 생(生)이 옳지 않다 하니, 드디어 배척되어 쓰이지 않았다. 원(元)나라 처음에는 본업을 힘쓰지 않고 오직 장사만을 익혀 몸에 돈꿰미를 띠고다방(茶房)과 주사(酒肆)에 드나들며 그 분(分)ㆍ가(厘)를 계교하니, 사람들이 혹 비루하게 여겼다. 원(元)나라가 망하자 명(明)나라에 벼슬하여 그제야 총임을 받아 그 자손이 심히 많아 혹은 대대로 사씨(史氏)가 되고, 혹은 시가(詩家)의 문(門)을 이루고, 선록(禪錄)을 초봉(草封)하며, 등용되어 관직에 있는 자는 돈과 곡식의 수효를 알고 군무에 종사하는 자는 갑병(甲兵)의 공을 기록하니, 그 직사(職事)는 비록 귀천이 있으나 다 구실을 비운다는 비난은 없었다. 대부가 된 뒤로부터 거의 다 흰띠[素]를 띤다고 이른다. 태사공(太史公)이 가로되 무왕(武王)이 은(殷)을 이기고 아우 숙도(叔度)를 채(蔡)에 봉하여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도와 은(殷)나라의 유민(遺民)을 다스리게 하였다. 무왕이 돌아가고 성왕(成王)이 나이 어려 주공(周公)이 도울 때 채숙(蔡叔)이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리매 주공이 그를 귀양 보내었고, 그 아들 호(胡)가 행실을 고쳐 덕(德)을 닦거늘 주공이 천거하여 경사(卿士)를 삼고 성왕이 다시 호(胡)를 신채(新蔡)에 봉하니 그가 곧 채중(蔡仲)이었다. 그뒤에 초공왕(楚共王)이 애후(哀侯)를 잡아 돌아오니, 그가 식부인(息夫人)을 공경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채 사람이 그 아들 힐(肸)을 세우니 그가 무후(繆侯)인데, 제환공(齊桓公)이 그가 채나라 여자를 끊지 않고 다른 데 장가 갔다 하여 무후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무후가 죽자 아들 갑오(甲午)가 섰고, 초령왕(楚靈王)이 영후(靈侯) 아비의 원수 때문에 갑병(甲兵)을 매복하여 술 먹여 죽이고 채를 둘러싸 멸하고 경후(景侯)의 소자(少子) 여(盧)를 구하여 싸우니 그가 평후(平侯)였다. 하채(下蔡)로 옮겨 살더니, 초혜왕(楚惠王)이 다시 채의 제후(齊侯)를 멸하여 그 뒤에 마침내 쇠미하게 되었다. 슬프다. 왕자(王者)의 후손이 대대로 쌓은 두터운 덕으로써 국가를 소유하였으나, 그 성하고 쇠함은 운기(運氣)와 교화의 탓이다. 채(蔡)가 본시 주(周)의 동성으로 강국 사이에 끼어 애꿎은 침벌을 입었으나, 제법 연면(延綿)히 그 유서(遺緖)를 떨어뜨리지 않아 한말(漢末)에 이르러 드디어 봉읍으로써 그 성(姓)을 바꾸었으니, 나라가 변하여 집이 되고, 집이 커져서 자손이 천하에 가득한 것은 내가 오직 채씨(蔡氏)의 후손에서 볼 뿐이다.
●용부전(傭夫傳) : 성간(成侃 1427-1456)
용부(慵夫)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모든 하는 짓이 전부가 게으른 것 뿐이므로 세상에서 용부(慵夫 게으름뱅이)라고 부른다. 벼슬은 산관(散官)으로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집에 책이 5천 권이 있으나 게을러서 펴보지 아니하며 머리가 헐고 몸에 부스럼이 났으나 게을러서 치료하지 아니하였다. 방에서는 앉아 있는 것이 귀찮고 길에서는 걷기가 귀찮아 멍청하게 나무로 깎아 놓은 허수아비와 같았다. 온 집안이 이를 염려하여 무당에게 데리고 가서 빌기까지 하였으나 마침내 금할 수가 없었다. 근수자(勤須子)가 학문이 성취되어 비장히 사람을 구제해 보겠다는 뜻을 가졌다. 그가 배운 것을 가지고 와서 다스려 보려하는데 용부는 마침 게으름병으로 인하여 다리를 쭉 뻗고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앉아 있었다. 근수자가 이르기를, “예로부터 사람이란 부지런해야만 살고 게을러서는 실패하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두 부지런함으로 자기의 몸을 가졌다. 문왕(文王)은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겨를이 없었고, 우(禹)는 한 치의 시간도 아껴서 썼다. 이 뿐만 아니라, 바람과 비, 서리와 눈이 사시(四時)로 일정하게 일며 모든 물건을 내며 육성하는 것은 하늘의 부지런함이다. 하늘은 배워야 할지언정 어겨서는 안 되며 하늘을 어기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하니, 용부는 상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가르칠 터인데 자네가 어떻게 나를 가르치려 드는가. 사람이 백 년동안 사는데, 정신과 몸이 모두 피로하면서 낮에는 허덕거리며 일을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하지 않는 일이 없다가 밤이 들어 자는둥 마는둥 하며 잠꼬대를 하다가 아침이 또 되게 된다.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인(至人)은 이렇지 않다.” 하며, 창을 들고 나와 그를 쫓아버렸다. 근수자는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말하기를, “내가 방법을 알았다.” 하고는, 곧 그릇에 술을 담고 기생을 데리고 기회를 보아서 그에게 가서 이르기를, “오늘 바람씨가 온화하고 산에는 새소리가 들린다. 내가 자네와 즐겁게 놀고 싶어서 왔으니 가주겠나.” 하니, 용부는 반갑게 웃으며 옷을 집어던지고 일어나더니 어느새 신이 문앞에 나오고 지팡이가 길바닥에 나오기가 바빴다. 수십 년 동안의 게으름이 일시에 모조리 없어져 버렸다. 서로 술을 들면서 크게 즐기고 뒤에 드디어 부지런함으로 마치었다.
동문선 제105권
●미친 자에 대한 변[狂辨]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세상 사람들이 다 거사(居士)를 미쳤다고 하나, 거사는 미친 것이 아니요, 아마 거사를 미쳤다고 말하는 자가 더 심하게 미친 자일 것이다. 그 자들이 거사의 미친 짓 하는 것을 보았는가. 또는 들었는가. 거사가 미친 것을 보고 들었으면 어떠하던가. 알몸에 맨발로 물이나 불에 뛰어들던가. 이가 으스러지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모래와 돌을 깨물어 씹던가.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하던가. 땅을 발로 굴려 제끼며 꾸짖던가. 산발머리를 하고 울부짖던가. 잠방이를 벗고 뛰어 다니던가. 겨울에 추위를 모르며, 여름에 더위를 모르던가. 바람을 잡으려 하고, 달을 붙들려 하던가. 이런 일이 있으면, 미쳤다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어찌 미쳤다 하느냐.
아, 세상 사람은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용모와 언어, 의복 차림이 사람 같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자리에 앉으면 손[手]은 하나인데 손놀림이 전과 같지 않고 마음은 하나인데 옳지 못한 두 가지 마음으로 바른 길을 좇지 않고, 이목(耳目)과 총명이 뒤바뀌며, 동쪽ㆍ서쪽이 바뀌어지며 서로 속여 현란하여서 중도로 돌아갈 줄 모르고, 필경 궤도를 상실하여 엎어지고 뒤집어진 뒤에야 그만 두니, 이는 겉으로만 엄연하고 속은 실상 미친 자인 것이라. 이 미친 것은 저 물과 불에 뛰어들고, 모래와 돌을 깨물어 씹는 자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아, 세상에는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은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어느 겨를에 거사를 보고 미쳤다고 웃느냐. 거사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 형적은 미친 듯하나 그 뜻은 바른 것이다.
동문선 제107권
●색유(色喩)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세상에서 색(色)에 혹하는 자가 있는데, 소위 색이란 것은 붉은가, 흰가, 푸른가, 빨간가. 해ㆍ달ㆍ별ㆍ놀ㆍ구름ㆍ안개ㆍ풀ㆍ나무ㆍ새ㆍ짐승이 모두 빛이 있으니, 이것이 능히 사람을 현혹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금과 옥의 아름다운 것, 옷의 현란한 것, 궁실(宮室)과 집의 크고 사치한 것, 능라ㆍ금수의 화려한 것, 이것들이 모두 빛의 더욱 갖춘 것이라, 이것이 능히 사람을 현혹하는가. 그럴 듯하나 그렇지도 않다.
대개 이른바 색이란 것은 사람(여자)의 고운 빛이다. 푸른 머리, 흰 살결, 기름과 분을 바르고, 마음을 건네며 눈으로 맞으면, 한번 웃음에 나라를 기울이니, 보는 자는 모두 정신이 아찔하고, 만나는 자는 모두 마음에 혹하여, 몹시 귀애하고 사랑하기에 이르면 형제와 친척도 그만 못하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귀애함을 받고는 이에 배척하고 사랑을 받고는 이에 도둑질하나니,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눈의 애교 있는 것은 이를 칼날이라 하고, 눈썹의 꼬부라진 것은 이를 도끼라 하며, 두 볼이 볼록한 것은 독약, 살이 매끄러운 것은 안 보이는 좀벌레이다. 도끼로 찍고 칼로 찌르며 안 보이는 좀으로 파먹고, 독약으로 괴롭히니, 이것이 해로움의 끔찍한 것이 아닌가. 해(害)가 적(敵)이 되면, 그 어찌 이길 수 있으랴. 그러므로 도둑이라고 하고, 도둑을 만나면 죽는데 어찌 다시 친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배척한다고 한다.
안으로의 해(害)가 이미 이와 같으나 밖으로의 해는 또 이보다 더 심하다. 색(色)의 아름다움을 들으면 곧 가산(家産)을 망치는데도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색의 꾐에 빠지면, 호랑(虎狼)을 범하면서도 뛰어들기를 사양하지 않는다. 좋은 색을 집안에 기르면 사람들이 시기하며 샘하고, 아름다운 색을 몸에 부딪치면 공명(功名)도 타락하고 만다. 크게는 임금, 작게는 경사(卿士)가 나라를 망치고 집을 잃음이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주(周) 나라의 포사(褒姒)와 오(吳) 나라의 서자(西子)며, 진 후주(陳後主)의 여화(麗華), 당 현종(唐玄宗)의 양씨(楊氏)가 모두 임금께 아양떨고 임금을 현혹시켜 화태(禍胎)를 길러내어 주 나라가 그 때문에 넘어지고, 오 나라가 그 때문에 거꾸러졌으며, 진(陳) 나라 당(唐) 나라가 그 때문에 무너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작게는 녹주(綠珠)의 아양 부리는 태도가 석숭(石崇)을 망치고, 손수(孫壽)의 요망한 단장이 양기(梁冀)를 현혹하였으나, 이같은 유례(類例)를 어찌 모두 이루 적으랴.
아, 나는 장차 풀무를 흔들고 숯을 피워 막모(嫫母)ㆍ돈흡(敦洽 둘 다 추녀〈醜女〉의 이름)의 얼굴 천천(千千), 만만(萬萬)을 부어[鑄] 만들고, 그 요망스러운 얼굴들을 모조리 그 속에 가두어 버리려 한다. 그런 뒤에 칼로 화부(華父)의 눈을 후벼다가 정직한 눈알로 바꾸고, 쇠로 광평(廣平)의 창자를 만들어 음란한 자의 뱃속에 집어넣으려 한다. 그리하면 비록 난초의 향내나는 기름과 분[脂粉]의 연모가 있어도, 똥ㆍ오줌ㆍ진흙ㆍ흙덩이일 뿐이요, 모장(毛嬙) 서시(西施 미녀 이름)의 예쁨이 있어도 돈흡과 막모일 뿐, 또 제 어찌 혹함이 있으랴.
동문선 제107권
●가난(家難) : 정도전(鄭道傳)
내가 죄를 얻어 쫓겨서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니,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이 주장(譸張 허위로 떠드는 것)하므로 앞으로 닥쳐올 화를 측량할 수 없다. 아내가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어, 내게 말하기를,
“경(卿)이 평일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 몰랐으며, 집이 곤궁하여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기한(飢寒)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맡아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경이 독학(篤學)하여 입신양명해서 처자식들이 바라보고 힘을 입으며, 문호의 영광을 일으키게 하리라 하였더니, 마침내는 나라의 형법에 걸려 이름이 욕되고 자취가 깎여서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를 들이마시고서 형제가 나가 쓰러지고 가문이 분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렇게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정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나요.” 하기에, 내가 답장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고는 뜬구름같이 헤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써 친하였고 은혜로써 친한 것이 아닌 까닭인가보다. 부부의 도는 한번 결혼을 하게 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함이며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 그리고 대개 성패와 이둔(利鈍)과 영욕과 득실같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속동문선 제3권
●영 대마도(詠對馬島) : 김흔(金訢 1251-1309)
바다 건너 별유천지가 있으니 / 跨海別有天
섬이 취락을 이루었네 / 環島自成聚
백성들은 어민이 많고 / 民物多漁人
마을은 거지반 소금구이 집들 / 村居半鹽戶
어린애들도 칼을 차고 / 兒童亦佩刀
부녀도 노 저을 줄을 아네 / 婦女解搖櫓
띠 지붕 덮어 기와를 대신하고 / 蔭茅代陶瓦
대를 쪼개어 화살만드네 / 剖竹作弓弩
대울타리엔 게들이 와글와글 / 竹籬閙螃蟹
자갈반엔 찰벼ㆍ멧벼가 적네 / 石山少秔稌
고기국엔 칡 뿌리를 끊이고 / 羹臛煮葛根
전통엔 닭의 깃을 꼿고 / 矢房揷鷄羽
조개로 양식을 대신 / 蚌蛤充糇糧
후추와 차가 주요한 상품 / 椒荈資商賈
쑥뜸으로 병을 고치고 / 炷艾醫疾病
짐승의 뼈를 구워서 풍우를 점치고 / 灼骨占風雨
시주를 잘하여 부처를 받들고 / 檀施奉浮屠
죄 짓곤 도망쳐 신사에 모이고 / 逋逃萃祠宇
신을 벗어 어른을 공경하고 / 脫履知敬長
한 자리에 앉아 아비를 피하지 않고 / 同席不避父
뾰죽 상투에 이를 흔히 물들이고 / 椎髻齒多染
합장할 때 등을 약간 구부리네 / 合掌背微傴
눈을 흘긴 데도 분노하여 / 睚眦生忿狠
표독해서 번쩍하면 사람 죽이고 / 慓悍輕殺掠
말을 내면 매양 많이 지껄이고 / 發語毋呶呶
서로 씨름하자면 기뻐서 뛰네 / 相力嘉躍躍
술 권할 땐 특수한 예가 우습고 / 酬酢嗤異禮
배반은 허식을 놀랬네 / 杯盤驚詭作
산 안주론 귤ㆍ유자 더미 / 山肴堆橘柚
바다의 진미론 악어ㆍ이무기 / 海錯斫蛟鰐
주고 받는 수작은 새가 찍찍ㆍ짹 / 辭舌鳥喃喃
노래와 악기는 개구리 깍깍 / 歌吹蛙閣閣
몸을 뒤흔들며 칼춤을 추고 / 縈身舞白刃
탈 쓰고 채막에서 불쑥 나오고 / 假面出彩幙
주인의 대접은 대단히 친절 / 主人殊繾綣
객들도 제법 흥겹게 웃으며 노네 / 旅客頗懽謔
멀리 와 노는 맛이 점입가경 / 遠遊如啖蔗
풍미가 쓴 것 단 것 섞이어 있네 / 風味雜甛苦
가자, 내 일찍 돌아가련다 / 行矣早歸來
아름답긴 하여도 내 땅 아닌 걸 / 信美非吾土
속동문선 제5권
●유 민 탄(流民嘆) : 어무적(魚無赤 : 연산군시기)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 蒼生難蒼生難
흉년 들어 네가 먹을 것이 없을 때 / 年貧爾無食
나는 너를 건질 마음이 있어도 / 我有濟爾心
너를 건질 힘이 없구나 / 而無濟爾力
백성들 불쌍해라, 백성들 불쌍해라 / 蒼生苦蒼生苦
날이 추워 네가 이불이 없을 때 / 天寒爾無衾
저들은 너를 건질 힘이 있어도 / 彼有濟爾力
너를 건질 마음이 없구나 / 而無濟爾心
원컨대, 소인의 뱃장을 돌려 / 願回小人腹
잠시 군자를 위하여 염려하노니 / 暫爲君子慮
잠깐 군자의 귀를 빌려 / 暫借君子耳
소민의 말을 들어 보소 / 試聽小民語
소민들이 말하여도 그대는 모르네 / 小民有語君不知
금년엔 백성들이 다 살 길 없네 / 今歲蒼生皆失所
나라에선 우민조를 내리셨으나 / 北闕雖下憂民詔
주ㆍ현에선 돌려보는 빈 종이 한 장 / 州縣傳看一虛紙
특파하는 경관이 민막 물으려 / 特遣京官問民瘼
역마로 하루에 삼백 리를 달려도 / 馹騎日馳三百里
백성들은 문턱에도 나설 힘이 없으니 / 吾民無力出門限
하가 맘속 일을 진정하오리 / 何暇面陳心內事
한 골에 한 경관이 온다 하여도 / 縱使一郡一京官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네 / 京官無耳民無口
급회양을 기용함이 그나마 상책 / 不如喚起汲淮陽
죽기 전 남은 백성들을 구함직도 하건만 / 未死孑遺猶可救
속동문선 제6권
●옥구현 차 판운(沃溝縣次板韻) : 이의무(李宜茂 1449-1507)
성 위의 구름이 바다에 이었는데 / 城上雲連海
다락이 높아 호기(넓고 맑은 기운)가 맑다 / 樓高灝氣淸
다락에 올라 나그네를 슬퍼하고 / 登臨悲客子
세상 일에 어두워 서생이 부끄럽다 / 迂闊愧書生
항상 취하는 것은 여가 많기 때문이요 / 長醉緣多暇
외로이 읊조림은 그 불평 때문이다 / 孤吟爲不平
바라보면 고기잡이 마을은 은은한데 / 漁村看隱隱
밤새껏 등불은 밝아 있으니 / 燈火夜來明
속동문선 제10권
●농구(農謳) :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우양약(雨暘若)
성스러운 임금이 황극을 세워 / 聖君建皇極
깊은 은덕이 가만히 통하여 / 玄德潛通
비와 볕이 때를 따라 순한 것이 / 雨暘時旣若
흐리고 쬠이 극도로 없게 되면 / 雨暘極備
우리 벼를 해침이란 한가지라 / 無一切傷我穡
흙덩이 깨지지 않고 가지 흔들리지 않게 / 塊不破枝不揚
다사롭게 옥촉이 고르게 되면 / 絪縕調玉燭
아, 늙은 농부들이야 / 吁老農
어찌 임금의 힘을 입은 줄 알리오 / 豈知蒙帝力
희희히 즐거워하며 갈고 파고만 하리라 / 熙熙但耕鑿
권로(捲露)
맑은 새벽 호미 메고 남묘로 돌아오니 / 淸晨荷鋤南畝歸
이슬이 동글동글 마르지 않았더라 / 露漙漙猶未晞
다만당 우리 벼에 이슬이 젖는다면 / 但使我苗長厭浥
내 옷이 젖었던들 무엇이 슬프리 / 何傷霑我衣
영양(迎陽)
메 위에 처음 햇빛 뜨니 / 山頭初日上
푸른 벼싹 잎이 가지런히 손바닥인 양 / 綠秧齊葉平如掌
해를 맞아 밭에 내려 김을 매니 / 迎陽下田理荒穢
아름다운 곡식 날로 자라나누나 / 嘉穀日日長
제서(提鋤)
호미 멜 제 술잔 멜 것 잊지 마소 / 提鋤莫忘提酒鍾
술잔 멤도 호미 멘 공이라네 / 提酒元是提鋤功
김 매는 일에 일년 기포 달렸으니 / 一年饑飽在提鋤
호미 메는 그 일을 어이 게을리 하리 / 提鋤安敢慵
토초(討草)
저 가래초 벼싹과 다름 없어 / 彼莨莠與眞同
보아도 분간 못해 늙은이 시름이라 / 看來不辨愁老翁
같지 않은 것 뽑아내어 서로 허용 말아주면 / 細討非類莫相容
저 가래초는 일체 없어지리라 / 盡使莨莠空
과농(誇農)
그저께 저자로 지났더니 / 昨從市中過
시중 여러 청년 얼굴이 꽃같았다 / 市中諸子顔如花
다투어 와서 늙고 더럼 조소하여 / 爭來嗤老醜
제각기 사치와 번화 자랑하네 / 各自逞奢華
늙은이 막대 멎고 그들에게 말하였네 / 老夫拄杖語市人
장사아치 이문 있다 자랑 마소 / 刀錐 末利安肯誇
금과 옥을 쌓은 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 長金積玉細商量
모두가 우리 농가에서 나는 것을 / 皆自吾家
상권(相勸)
내 몸은 아까운 몸 / 我身足可惜
나의 생애는 문틈을 지나는 망아지 / 我生駒過隙
안일하게 앉아 늙음 뉘라서 싫어하랴마는 / 豈厭終歲坐安閑
안일 끝엔 먹을 것 없는 것이 / 安閑食不足
힘써 부지런히 일을 합시다 / 勉勤苦
전준(농사 일을 독려하는 관리)이 와서 서로 재촉하리다 / 田畯來相促
대엽(待饁)
큰 시누이 방아 찧기에 비하여 / 大姑舂政急
작은 시누이 부엌에 드니 푸른 연기 둘렸어라 / 小姑入廚煙橫碧
주린 창자에 은은히 우레 짓고 / 饑腸暗作吼雷鳴
헛꽃이 두 눈에 가물가물 / 空花生兩目
한창 점심밥 기다릴 젠 / 待饁時
호미 메도 힘이 나지 않는 것을 / 提鋤不得力
고복(鼓腹)
보리밥 향내 풍겨 광주리에 담겨 있고 / 麥飯香饛在筥
아욱국 단맛 숟갈에 줄줄 흐르누나 / 藜羹甛滑流匕
어른ㆍ젊은이 모여들어 차례로 앉았는데 / 少長集次第
사방에서 지껄이며 향기롭고 아름답다 자랑하네 / 止四座喧誇
한 번 배불러 벌름하면 / 香美得一飽撑脰裏
배 튀기며 거닐 적이 참으로 문득 즐거움일세 / 行鼓腹便欣喜
망추(望秋)
보리가 등장되니 풍년을 점치었고 / 麥登場占年祥
우리 벼 풍성하니 재해 없길 원하노라 / 我稼穰願無傷
아, 그 누런 벼가 상자랑 수레랑 가득하면 / 汚耶黃滿車箱
염소와 양을 잡아 축수 잔을 올리련다 / 殺羔羊稱壽觴
경장묘(竟長畋)
긴 사래를 다투면 농사가 거칠 것이 / 竟長畝畝政荒
햇빛이 등을 쬐어 땀이 장물처럼 내리도다 / 日灸我背汗飜漿
큰 아들 작은 아들만치 튼튼하지 못하네 / 大郞不及小郞强
지척을 다투면서 손발 재빨라서 / 爭咫尺手脚忙
긴 사래 다 매고는 / 竟長畝
머리 돌려 큰 아들을 조소한다 / 回頭笑大郞
큰 아들은 되려 작은 아들 튼튼함을 부끄러워하였어라 / 大郞却慚小郞强
긴 사래를 다툰다면 농사는 거칠 것이다 / 竟長畝畝政荒
수계명(水鷄鳴)
비오리 울면 의당 술잔을 든다 / 水鷄鳴當擧巵
아침 닭 소리에 몇 잔이 거듭되니 / 朝鷄累數巵
내가 굶주린 것을 벌써 알겠네 / 已覺醺人飢
늦닭이 이미 울었거늘 / 晩鷄已報
술 걸러 오려더니 어이 그리 더디었나 / 釃酒來何遲
비오리 울면 의당 술잔을 들리라 / 水鷄鳴當擧巵
일함산(日銜山)
돌아보니 비낀 해가 메에 삼켜지고 / 回看斜日已銜山
저녁 이슬 약간 올라 잎끝에 맺히었네 / 夕露微升凝葉端
긴 호미 잡아 허리에 꽂고 / 捲却長鋤揷腰閒
마을 터전 거닐다가 까마귀와 함께 돌아오노라 / 行趁村墟戴鴉還
탁족(濯足)
발을 씻으련다 십분을 씻을 것 없어라 / 濯足不用十分濯
집에 와서 눈 감으니 닭 소리 꼬끼오 하네 / 還家瞌眠鷄咿喔
닭 소리 꼬끼오 하니 호미를 다시 잡으련다 / 鷄咿喔鋤還握
하루라 열두 시에 언제나 발을 펼꼬 / 十二時何時可伸脚
여름 밤 짧으니 몇 분이나 쉬겠는가 / 夏夜短休幾刻
발을 씻더라도 십분일랑 씻지 마소 / 濯足不用十分濯
속동문선 제21권
●유 지리산록(遊智異山錄) : 이육(李陸 1438-1498)
지리산은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영남ㆍ호남의 교차로에 웅거하여 높고 넓음은 몇 백 리인지 알 수 없다. 산을 둘러서 목(牧)이 하나, 부(府)가 하나, 군(郡)이 둘, 현(縣)이 다섯, 부읍(附邑)이 넷이 있는데, 그 동은 진주(晉州)ㆍ단성(丹城)이요, 그 남은 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살천(薩川)ㆍ적량(赤良)ㆍ화개(花開)ㆍ악양(岳陽)이요, 그 서는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광양(光陽)이요, 그 북은 함양(咸陽)ㆍ산음(山陰)이다. 산 위에 최고봉이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요,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인데, 서로 백여 리가 떨어지고 항상 구름이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 서쪽으로 가면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 가면 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다. 서로 20리를 내려가면 공허한 벌판이 있는데, 편편하고 기름져 종횡이 6ㆍ7리가량 되고, 왕왕 저습한 데가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다. 해묵은 잣나무가 하늘을 가려 있어 그 낙엽에 무릎이 묻히고, 한가운데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뵈지 아니하여 완연히 하나의 평야다. 돌아서 남으로 시내를 따라 내려가면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 등 세 절이 있다.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어 20리를 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있고, 쌍계사에서 동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그밖의 명사(名寺)ㆍ승찰(勝刹)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산의 절정에 있는 향적사(香積寺) 등 두어 절은 다 목판으로 덮고 거처하는 중도 없는데,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덮었다. 그러나, 거처하는 중은 역시 한두 명에 불과하다. 산세가 동떨어지게 높아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접촉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 고승(高僧)이 아니고서는 안착할 수 없게 되었다. 물이 영신사(靈神寺)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되어 신흥사(新興寺) 앞에 이르러서는, 이미 큰 내가 되어 섬진(蟾津)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를 화개동천(花開洞川)이라 이른다. 천왕봉에서 동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어, 동으로 큰 바다에 다다르고 서로 천왕봉을 짊어졌는데, 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으며 이름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법계사(法戒寺) 밑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합쳐서 하나가 되어, 소남진(召南津)의 하류로 들어가 진주(晉州)를 둘러 동으로 가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부른다. 소남진(召南津)은 산 북쪽의 물이 동쪽으로 와서,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또 꺾어져 서쪽으로 흐른다. 살천 마을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는데, 그 살천 마을 이내는 내산(內山)이라 이르고, 이외는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보암사(普庵寺)에서 곧장 올라 빨리 가면 하루 반에 천왕봉에 당도할 수 있다. 그러나 돌비탈이 험준하여 오솔길을 찾기 어렵고, 또 느티나무ㆍ회나무가 하늘을 가려 있고, 아래는 멧대가 빽빽이 들어차고, 혹은 나무가 천길의 비탈에 비껴 있어, 이끼가 부스러져 떨어지고 또 샘 줄기가 멀리 구름 끝에서 날아와 그 사이를 가로질러, 아슬한 밑바닥으로 쏟으니 나아가려고 해도 발뒤축을 돌릴 수 없고, 돌아서려고 해도 뒤가 보이지 아니한다. 수십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야 비로소 조금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왕왕 돌덩이를 주워서 바위 위에 두고, 노정을 표시하며 골짝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아니하고, 6월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며, 7월에 눈이 내리고, 8월에는 얼음장이 깔리고, 초겨울을 당하면 눈이 심하여 온 골짝이 다 편편하니 사람이 오고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자가 가을에 들어가면, 이듬해 늦봄에야 비로소 산을 내려오게 되며, 혹 산 밑에서는 크게 뇌성하고 비가 쏟아지더라도, 산상은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으니, 대개 산이 높아 하늘과 가깝기 때문에 기후가 자연 평지와 더불어 엉뚱하게 다른 모양이다. 대부분 산의 모습이 아래는 감나무ㆍ밤나무가 많고, 조금 올라가면 느티나무뿐이요, 느티나무가 끝나면 삼회(杉檜)가 가득한데, 반이나 말라 죽어 청백(靑白)이 서로 섞여서 바라보기에 그림과 같다. 최상에는 다만 철쭉나무가 있을 뿐인데, 높이가 한 자에 차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산나물과 진기한 과실이 다른 산보다 많아서, 이 산과 가까이 수십 골들이 모두 그 이익을 얻어 먹고 있다.
●유 금강산기(遊金剛山記) :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기원되어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혔다. 그 산의 큰 것은 영안도(永安道)에 있어서는 오도산(五道山)이요, 강원도(江原道)에 있어서는 금강산(金剛山)이며,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는 지리산(智異山)인데, 수석이 가장 빼어나고 또 특이한 것은 금강산이 제일이다. 산 이름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개골(皆骨), 하나는 풍악(楓岳), 하나는 열반(涅槃)인데 방언(方言)이요, 하나는 지달(枳怛), 하나는 금강(金剛)인데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왔고, 하나는 중향성(衆香城)으로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왔는데 신라 법흥왕(法興王) 이후의 칭호이다.
내가 삼가 살펴보니, 부처는 본시 서융(西戎)의 태자이다. 그 나라가 중국 함양(咸陽)과 9천여 리가 동떨어져서, 유사(流沙)ㆍ흑수(黑水)의 먼 땅과 용퇴(龍堆)ㆍ총령(葱嶺)의 험산으로 한계하여 중국과 더불어 통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중국을 넘어서 동국(東國)에 이 산이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특히 이 산이 있는 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선국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로써 상고하면 주 소왕(周昭王)의 세대는 우리 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중엽에 해당되고, 부처는 실로 서방(西方)인 사위국(舍衛國)에서 낳았다. 그 불설(佛說)의 천함(千凾)ㆍ만축(萬軸) 속에 무한의 세계를 말했으나, 일찍이 한마디 말로 ‘조선국’이라 칭한 것이 없은즉, 그가 이 나라 이 산을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정녕 부처가 설법할 때 그 일을 과장하여, 바다 가운데 금강ㆍ지단ㆍ중향 여러 산이 있는데, 억만의 담무갈(曇無渴)이 그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하여, 어리석은 속인(俗人)을 놀라게 하기를 장주(莊周)의 곤붕(鯤鵬) 천지(天地)의 설과 고사(姑射)ㆍ구자(具茨)의 논과 같이 하여, 까마득한 가운데 말을 붙여 두고 고대(高大)한 지경으로 세속을 놀라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무식한 대중을 뒤흔들어 꾀어내자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참으로 금강ㆍ지단이 이처럼 괴이한 것이 있겠느냐. 부처가 말을 붙여 둔 것이 이와 같은데, 신라 중으로 부처를 배우던 자도 역시 망령되어 스스로 자기 나라를 높이 평가하여 풍악(楓岳)으로써 금강산을 만들고, 담무갈의 상(像)을 추작(追作)하여 망령된 말 실지화한 것임에랴. 동해를 지적한 것인 줄을 알 것이요. 동서남북이 바다 아닌 것이 없거늘, 어찌 유독 동해(東海)만이 해중이 되려고 하여 풍악을 금강으로 단정하려는 것인가.
더더구나, 우리 나라를 중국에서 비록 해외(海外)라고 하지만, 서북은 뭍으로 요동(遼東)을 연(連)하고, 그 사이에 다만 압록강 하나가 가로막혔을 뿐이며, 압록강이 결코 바다가 아닌데 우리 나라를 지적하여 해중이라 하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금강의 칭호가 세대를 지난 지 오래라, 졸지에 변경하기 어려워서 나 역시 ‘금강산’이라 지칭한다. 대개 산의 모양이 하늘의 남북에 우뚝 솟아 큰 땅덩어리로 누르고 있는데 큰 봉우리가 36봉이요, 작은 봉우리가 1만 3천봉이다. 한 가지가 남으로 이백여 리를 뻗었는데, 산 모양이 높고 뾰족하여 대략 금강의 본상과 같은 것은 설악산(雪岳山)이요, 그 남쪽에는 곁따른 영(嶺)과 악(岳)이 있다. 동쪽의 한 가지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뤘으니 천보산(天寶山)인데, 하늘이 장차 눈이나 비가 오려면 산이 저절로 운다. 그러므로 이름을 읍산(泣山)이라 한다. 읍산이 또 양양(襄陽) 고을 후면을 돌아서 바닷가로 닫는데, 오봉(五峯)이 특별히 섰으니 낙산(洛山)이다. 금강의 한 가지는 또 북으로 백여 리를 뻗어 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은 추지(湫池)요, 추지의 산이 또 통천(通川) 고을 후면에서 잔산(殘山)과 서로 만나서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북으로 굴러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은 총석정(叢石亭)이다. 산의 동쪽은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군(杆城郡)이요, 서쪽은 금성현(金城縣) 회양부(淮陽府)이다. 산에 벌여 있는 것이 부(府)가 하나, 군(郡)이 셋, 현(縣)이 하나이다.
을사년(1485)4월 보름날에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普濟院)에서 유숙하였다. 정묘일에 90리를 가서 입암(笠巖)에서 유숙하였다. 무신일에 소요산(逍遙山)을 지나서 큰 여울을 건너 60리를 갔다. 연천(連川) 거인(居仁)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기사일에 보개산(寶蓋山)을 지나고 또 철원(鐵原) 고동주(古東州) 들을 지나고 남으로 머리 돌려 백여 리를 갔다. 금화(金化)에서 유숙하였다. 경오일에 금화현(金化縣)을 지나서 60리를 갔다. 금성(金城) 향교(鄕校)에서 유숙하였다. 신미일에 창도역(昌道驛)을 지나서 보리진(菩提津)을 건너 78리를 갔다. 신안역(新安驛)에서 유숙하였다. 입신일에 비에 막혀 신안(新安) 후동(後洞) 백성 심달중(沈達中)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계유일에 우독현(牛犢峴)을 건너서 화천현(花川縣)을 지나고 보리진(菩提津) 상류(上流)를 건너 추지동(湫池洞)으로 가는데,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일기가 매우 차고 산의 나무는 바람을 받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연한 잎이 겨우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아가위는 만발하여 진달래는 아직 싱싱하니, 일기가 서울보다 2, 3배나 차운 것을 깨닫겠다. 추지(湫池)는 보리진에서 나오고, 보리진은 금강산 외두솔(外兠率)에 이르러 금성진(金城津)과 더불어 합하고 또 산기슭을 다 지나서 만포천(萬瀑川)과 더불어 합하고, 또 춘천(春川)에 이르러 병항진(甁項津)과 더불어 합해서 소양강(昭陽江)이 된다. 예를 들면 나무꾼이 우연히 그곳에 갔다가 두 번 다시 찾으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산 아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선경(仙境)이 되었다고 한다. 재마루에 추지원(湫池院)이 있고 추지원을 지나니 동쪽 가에 하늘빛이 매우 새파랗다. 운산(雲山)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니고 바로 바닷물이다.” 하므로, 나는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본 연후에야 하늘과 물을 구별하게 되었다. 그 물이 언덕과 동떨어져서 차츰 멀어질수록 높아져 아슬하게 하늘과 더불어 서로 맞닿았으니, 평소에 본 물[水]은 모두 이이들 재롱에 불과하다. 재마루에 동으로 내려가니 일기가 점점 따뜻하여 철쭉이 바야흐로 피고,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비로소 여름 맛이 난다. 왕왕나무를 깎아 질러 길을 보수하였으니, 이른바 잔도(棧道)라는 것이다. 때때로 말 위에서 산 살구를 따서 먹었다. 재마루에서 20리를 가니 중대원(中臺院)이 있다. 또 5리를 더 가서 냇가에서 요기하고 비로소 평지를 밟기 시작했다. 또 15리를 더 가서 통천군(通川郡)에 당도하였다. 이날에 산을 걸은 것이 모두 90리요, 평지를 걸은 것이 15리였다. 군수(郡守) 자달(子達)을 찾아보니 자달(子達)이 나를 동헌(東軒)의 별실에 있게 한다. 자달의 춘부장이 나를 매우 다정스레 대우하였다. 갑술일에 자달과 작별하고 15리를 가서 총석정(叢石亭)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 아래 이르러 보니 과연 돌산이 바다 굽은 턱으로 들어가 뱀 형상과 같이 칭칭 감았다. 산이 바다에 들어가 그치는 대목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정자에 다다르기 전 3, 40보 거리에서 북으로 한 가닥 길을 넘으니, 네 돌이 바다 속에서 솟아나 자른 듯이 석주(石柱)를 묶어놓은 것 같다. 총석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바다 서쪽 변안(邊岸)은 모두 총석의 형태로 되어 1마장쯤 뻗었다. 총석의 곁에 하나의 평석(平石)이 또한 물 가운데 있고, 작은 돌이 잡되게 쌓여 뭍으로 연했다. 나는 운산(雲山)과 더불어 맨발로 기슭을 내려가 평석 위에 앉고, 종놈을 시켜서 석결명(石決明)ㆍ소라(小螺)ㆍ홍합ㆍ미역 등의 종류를 따오게 하였다. 운산과 더불어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서로 희롱하며 고개를 쳐들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 끝과 땅 끝이 툭 틔어 유리 명경이 서로 비치는 듯하고, 위언(韋偃)과 곽희(郭熙)가 재주를 다하여 그림을 그려 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뒤숭숭하여 꿈속이 아닌가 의심하다가 한참만에야 밝혀졌다. 나는 사랑스러워서 떠나려고 하지 아니하니, 운산이, “해가 벌써 많이 갔다.” 한다. 나는 비로소 걸어 나와 사선정에 오르니, 정사에 손순효공(孫舜孫公)의 현판시(懸板詩)가 있고, 또 중인[僧人] 석자(釋子)의 이름과 호가 많이 씌어 있다. 나는 그 안에 앉아서 한 바다를 굽어보니 네 총석(叢石)이 더욱더 기이하며, 보이는 것은 아래 평석(平石)에서 보는 것과 같으나 안계(眼界)는 더욱 광활하다. 정자 남쪽에 기울어진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없어져서 어느 때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고, 정자 동쪽으로 약 4,50리쯤에 섬 하나가 바다 가운데 있어 완연히 서로 마주 대한 것 같으며, 정자 밑 바위 아래 두어 척 배가 오락가락하여 고기를 낚고, 남으로 어점(漁店)이 있어 어부들이 그곳에서 그물을 말린다. 물 가운데 온갖 잡새가 좌우로 날아들어 우짖는데, 어떤 것은 몸이 하얗고, 어떤 것은 몸이 검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 길고, 어떤 것은 부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 붉고, 어떤 것은 부리가 파랗고, 어떤 것은 꼬리가 길고, 어떤 것은 꼬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날개가 검고, 어떤 것은 날개가 푸르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사언시(四言詩) 네 수를 정자 기둥에 쓰고 조금 앉았노라니, 풍랑이 일었다. 그래서 내려와 바닷가 백사장을 따라 나가는데, 모래가 허해서 말발굽이 빠지고, 오직 물가의 추진 땅만이 굳어서 굽이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파도가 칠 때는 간혹 언덕에 대질러 말안장에까지 뛰어오르므로, 말이 놀래서 언덕으로 나온다. 종놈을 시켜 말고삐를 끌고 가는데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왕왕 모래통이 산을 이루었다. 바다가 뒤집힐 적에 물결에 밀린 것이다. 또 바닷물이 백사장 가에서 혹은 모여서 배설되지 않는 것과, 혹은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고, 또 조그마한 흰 돌이 뒤섞여서 해안을 이룬 것도 있고, 또 뭇 돌이 쫑긋하게 바닷가에 서서 송곳 같은 것, 채찍 같은 것, 사람 같은 것, 짐승 같은 것, 머리는 크되 부리는 뾰족한 것이 있다. 그리고 사석(沙石)가에 해당화가 서로 잇달아 혹은 꽃이 피고, 혹은 망울이 맺고, 혹은 붉고, 혹은 희고, 혹은 단엽(單葉)으로 되고, 혹은 여러 잎으로 되었다. 나는 도중에서 요기하고 60리를 가서 동자원(童子院)을 지나 등도역(登道驛)에서 유숙하는데, 밤에 큰 바람이 불어서 지붕이 걷히고 나무가 뽑혔다. 을해일에 등도역을 출발하여 만안역(萬安驛)을 지나는데, 경유하는 곳마다 방죽이 많고, 바닷가의 보이는 것은 전날과 같았다. 옹천(瓮遷)에 당도하니, 쌓인 돌이 언덕을 이뤄 대략 총석(叢石)의 백분지 일이나 된다. 옹천을 다 지나니 조그만 돌벼랑이 있어 푸른 독을 깎아지르듯 하고 냇물이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위 밑을 빙 둘러 거위알처럼 툭 틔었다. 종놈을 시켜 미역을 따서 국을 끓이게 하고, 석결명(石決明)을 따서 소금에 구워 점심을 먹었다. 장정(長井)의 해변(海邊)을 지나서 고성(高城)의 온정(溫井)에 당도하니, 온정은 바로 금강산의 북동(北洞)이다. 이날 60리를 걸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병자일에 바람이 불어 돈정에서 머물렀다. 정축일에 금강산에 들어가 5,6리를 걸어서 한 고개를 넘어 남으로 신계사(新戒寺)에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에는 관음봉(觀音峯)이 있고, 북쪽에는 미륵봉(彌勒峯)이 있다. 서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미륵봉에 비하면 더욱 빼어났으나 그 이름은 무엇이지 알 수 없다. 또 그 서쪽에 한 봉우리가 멀리 구름 밖에 있으니, 비로봉(毗盧峯)의 북쪽 가닥이다. 신계사는 곧 신라 구왕(九王)이 창설한 것인데, 중 지료(智了)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다. 절 앞에 지공백천동(指空百川洞)이 있고, 그 남쪽에 큰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보문봉(普門峯)이다. 그 봉우리 앞에는 세존백천동(世尊百川洞)이 있다. 동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향로봉 동쪽으로 큰 봉우리 일곱이 서로 연하여 큰 산 하나를 이루었는데, 관음봉ㆍ미륵봉에 비하면 몇 십배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비로봉의 한 가닥이요, 하나는 원적봉(元寂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 위가 평평한 것은 안문봉(雁門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 계조봉(繼祖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 상불사의(上不思議)요, 또 하나는 중불사의(中不思議)요, 또 하나는 하불사의(下不思議)다. 불사의라는 것은 암자 이름인데, 신라 중 율사(律師)가 지은 것이다. 일곱 봉의 아래에는 대명(大明)ㆍ대평(大平)ㆍ길상(吉祥)ㆍ두솔(兜率) 등의 암자가 있어 세존천(世尊川)의 곁에 있다. 나는 지공천(指空川)을 걸어 보문암(普門庵)을 넘어 산으로 5ㆍ6리 가니 솜대[綿竹]가 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 도착하니 사주(社主) 조은(祖恩)은 바로 운산(雲山)의 친구라 나를 대접하는 것이 자못 정의가 있었다. 암자에 올라앉으니 동북은 바다가 바라뵈고 동남은 고성포(高城浦)가 보인다. 암자 앞에 나옹(懶翁) 근선사(勤禪師)의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자리가 정해지자 조은이 생생한 배[梨]와 잣을 대접하고 다음에 밥상을 드리는데, 목이(木耳 버섯)와 석이(石耳)도 있고 산나물이 없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두견새가 낮에 우니 밑은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조은과 작별하고 산으로 5ㆍ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나고, 거기서 또 반 마장을 더 가서 발연암(鉢淵庵)에 이르렀다. 중이 전하기를, “중 율사(律師)가 이 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龍王)이 살 수 있는 땅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절을 짓고 이름을 발연암이라 하였다.” 한다. 암자 뒤에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보문암에서 바라보던 일곱 봉우리의 맨 끝 봉이다. 암자 위로 조금 가면 폭포가 있어 수십 길을 드리우고, 좌우에는 모두 흰 돌이 있어 다듬은 옥과 같이 미끄러우니 앉을 수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나는 행장을 풀어 놓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입을 축인 다음 꿀물을 마시었다. 발연의 고사(故事)에 “유희(遊戱)를 좋아하는 중들이 폭포위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놓고 그 위에 앉아 물 뒤에 놓아 물결을 타고 순류로 내려간다. 그러면 교(巧)한 자는 순하게 내려가고, 졸(拙)한 자는 거꾸로 내려가는데, 거꾸로 내려가게 되면 머리와 눈이 물에 빠져서 한참 허우적거리다 도로 나오니, 곁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 돌이 미끄럽고 윤택해서 비록 거꾸로 날아와도 몸이 상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희롱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운산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게 하고 뒤를 이어 따라갔는데, 운산은 여덟 번을 해서 여덟 번을 다 맞히고, 나는 여덟 번 해서 여섯 번 밖에 못 맞혔다. 그리고 바위 위로 나오니 손뼉을 치고 모두 웃는다. 이에 책을 베고 돌 위에 누워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사주(社主) 축명(竺明)이 와서 나를 끌고 사(社)로 들어가 사의 뒤뜰에 있는 비석을 보게 하였다. 비석은 바로 율사(律師)의 뼈를 저장한 비로서, 고려 중 형잠(瑩岑)의 소작이요, 때는 승안(承安) 5년 기미 5월이었다. 비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율사의 비가 섬으로부터 5백여 년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했는데, 지금 다시 말랐다고 한다. 구경을 다하고 도로 암자로 내려와 밝을 적에 저녁밥을 먹고 또 폭포에 갔다가 밤이 깊고 찬기가 들어서야 비로소 들어왔다. 무인일에 발연을 떠나 폭포 하류를 건너 소인령(小人嶺)을 올라가는데, 재가 험악하고 준급하여 걸음걸음이 쳐다보고 올라가기만 하니, 소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겠다. 나는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어서 바야흐로 첫 번 고개를 올라가니 유점산(楡岾山)이 왼편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峯)이 바른편에 있으며, 동해(東海)가 뒤에 있고 환희점(歡喜帖)이 앞에 있다. 소인령(小人嶺)이 무릇 여덟 고개인데, 점점 나아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당도하면 세 불사의봉과 더불어 나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산은 다 눈 아래 있다.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 등 세 고을이 산 밑에 벌여 있고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가이 없다. 여덟 번째 고개를 오르니 불사의봉이 이제는 아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돌아 산그늘을 따라가는데, 길은 너무도 험준하며 측백(側柏)은 길에 비껴 있고 동청(冬靑 사철나무)은 섞여서 나고, 쌓인 눈은 골짝에 가득하고, 송라(松蘿 소나무 겨우살이)는 나무를 칭칭 감았다. 나는 호표(虎豹)에 걸앉고 규룡(虯龍)에 오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가게 되어, 몹시 피곤하기에 눈을 가져다 꿀을 타서 마시니 갈증이 문득 풀린다. 이윽고 다시 나서서 돌고 돌며 엉금엉금 기어서 환희점을 오르니, 소인령의 제 팔봉보가 또 한두 등(等)이 더 높다. 점(岾)의 동쪽은 토봉(土峯)이 하나요, 점의 서쪽은 석봉(石峯)이 셋이다. 환희점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니 철쭉이 덤불을 이루는데 날씨가 차서 망울만 맺고 꽃은 피지 않았다. 작은 시내 하나 있는 데를 당도하여, 손과 얼굴을 씻고 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두솔암(兜率菴)에 당도하였는데 이름을 백전(柏田)이라고 한다. 발연에서 여기까지가 삼십여 리나 암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앉았다가 도로 나와 출발하여 1리쯤 가서 적멸암(寂滅庵)에 들어가니, 중 하나가 가사(袈裟)를 입고 입정(入定)하였다. 암자 뒤에 토산(土山) 하나가 있는데 적멸봉(寂滅峯)이요, 암자 앞 골짝 동쪽에 석산(石山)이 있는데 성불봉(成佛峯)이다. 암자를 지나서 또 돌아서 서북으로 향하여 곧장 한 골짝으로 내려가니 두 개천이 어울려 흐르고 수석이 밝고 상쾌하다. 바로 12폭포의 원류이다. 내를 건너서 올라가니 개심암(開心庵)이 있고, 그 암자에 들어가니 중이 납의(衲衣)를 입고 있을 따름이다. 또 개심전대(開心前臺)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앞에는 적멸봉 하나가 있고 뒤에는 개심후봉(開心後峯)이 둘이 있고, 왼편으론 백석봉(白石峯) 하나가 있는데, 이 봉은 봉우리가 스물다섯이다. 그 아래는 운서굴(雲栖窟)이 있고 바른 편에는 동구(洞口)이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요기하고 서울에서 온 거사(居士) 송생(宋生)이란 자를 보니 그 말이 몹시 허황했다. 운산이 말하기를, “지금 해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이 암자에서는 유숙할 필요가 없고 다시 떠나서 더 가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따라 개심후점(開心後岾)을 넘으니, 이 재는 환희재에 비해 한두 등급이 더 높다. 이로부터는 돌과 나무가 모두 하얗다. 왼편으로 가니 높은 봉 둘이 마주 섰고, 바른편으로 가니 석봉(石峯) 하나가 송곳과 같이 뾰족한데 아래에는 계조굴(繼祖窟)이 있다. 남쪽 가에 두 봉이 있어 솔과 잣나무가 울창하다. 두 봉이 합친 곳에 오르니 개심후점에 비해 또 한두 등급이 더 높다. 그 등성이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니, 측백나무가 길을 메우고 두견화가 만개하여 진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동(洞)은 바로 대장동(大藏洞)인데 수석이 맑고 상쾌하여, 지나온 곳은 이에 비교가 안 되고 동(洞)은 또 그윽하고 깊다. 이 물 근원을 따라가면 3ㆍ4일 후에 바야흐로 비로봉(毗盧峯)에 당도한다고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면 내의 북쪽에는 석봉이 다섯이요 남쪽에는 석봉이 둘인데, 그 중 하나는 흰 돌이 포개져 서책(書冊)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호승(胡僧) 지공(指空)이 이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안에 대장경이 있으므로 동(洞)이 이로 인하여 대장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행장을 풀고 오래도록 앉아 구경하며 석상에서 노숙할 계획을 하니, 운산이 말하기를, “안개가 사람에게 스며드니 곤란하다. 오늘은 날이 비록 저물었지만, 오히려 원적암까지는 갈 수 있다.” 하므로, 그 말에 의해 대장봉(大藏峯)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돌로 된 봉 다섯이 바른편에 있고 흙으로 된 봉 아홉이 왼편에 있고, 골짝 물은 남쪽으로 쏟는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 바른편 산중 허리를 끼고 한 큰 재에 오르니, 이름은 안문점(雁門岾)인데 안문봉(雁門峯)의 남쪽 가닥이다. 재는 대장후점(大藏後岾)에 비해 또 한두 등급이 더 높다. 고개를 내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시내를 따라가니 왼편에는 산이 있는데, 모두 소나무, 잣나무가 늘어서서, 그 봉우리를 분별하지 못하겠고, 바른 편에는 큰 봉 다섯이 있는데, 모두 내산(內山)의 남쪽 가닥이다. 냇물 남쪽 토산(土山)의 서쪽에 솟은 봉 셋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관음봉(觀音峯)이다. 그 봉 아래 돌이 있어 부처 형상과 같은 고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아래 원적천(元寂川)은 안문천(雁門川)과 더불어 서로 합쳐, 맑고 넓은 것이 대략 대장동 물과 더불어 비슷하다. 잠깐 동안 앉아 구경하고 물줄기를 거슬러 북으로 올라가니, 밟히는 것이 모두 시냇가 하얀 돌이요, 좌우로 산 수십여 봉우리가 흰 병풍을 두른 것 같았다. 이윽고 원적암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큰 봉이 있어, 지난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배나 더 높은지 알 수 없으니 이른바 원적봉이요, 원적봉 남쪽에 봉이 있어 원적봉에 비하면 몹시 낮게 보이나,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또한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峯)이요, 암자 동남쪽을 바라보면 토봉(土峯) 하나가 높이는 원적봉과 같고 그 위는 오목하니, 이른바 안문봉이다. 중이 이르기를, “사자가 그 위에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백전(柏田)에서 여기까지가 또 30리이다. 암자에 중 계능(戒能)이 있어 문자를 조금 이해한다. 기묘(己卯)일에 원적암을 출발하여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 안문수(雁門水)와 합류하는 시내 위에 손을 씻고 입을 축이고 물줄기를 따라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당도하니, 암자가 시냇가에 있어 수석이 매우 명쾌해 보였다. 여기서부터 철쭉이 피기 시작했다. 냇물 남쪽에 봉우리 넷이 있고, 냇물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나가 있다. 나는 시냇가 반석 위에 앉아 양추를 하고 암자에 들어가 제명(題名)하였다. 암자에는 노승 도봉(道逢)이란 자가 있었는데 용문사(龍門寺)의 사승(邪僧) 처안(處安)과 회암사(檜岩寺) 사승 책변(策卞)이 모두 대우하여 스승으로 섬기니, 이 때문에 명망이 여러 절에 떨쳐 재물을 모은 것이 가장 많았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데 매우 거만하므로 나는 말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터가 있고, 절터 안에 돌부처가 석벽 사이에 새겨져 있다. 절터 아래 큰 돌이 있어 위가 편편한데, 냇가 곁에 있으므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북쪽에는 봉 여덟이 있고 남쪽에는 관음봉 이하 다섯 봉이 있고, 북쪽에는 여덟 봉이 있고 그 뒤에 큰 봉 둘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원적봉으로 서쪽으로 향해 있고, 그 중 하나는 월출봉(月出峯)인데 남쪽으로 향해 있고, 그 아래는 불지암(佛知庵)과 거빈굴(去賓窟)이 있다. 나는 이 두 암자를 지나서 마하연(摩訶衍) 전대(前臺)에 이르니, 담무갈(曇無竭)의 석상(石像)이 있다. 대(臺)는 바로 이 산의 한 중심지인데 담무갈은 이 산의 주불(主佛)이다. 그러므로 승속간(僧俗間)에서 여기를 지나는 이는 손을 모아 절하고 가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운산은 지팡이로 그 이마를 두들겼다. 늙은 중 나융(懶融)이 마중 나와서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마하연의 사적을 보여 주었다. 이때에 우는 비둘기가 뜰 안에 가까이 다니니, 산 사람의 기심(機心)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뜰에 있는 풀은 그 형상이 부추와 같은데 그 꽃이 조금 붉다. 나옹은 말하기를, “옛날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말하기를, ‘이 산은 흙이나 돌이 모두 부처형상으로 되었는데 유독 여기에만 없다.’ 하여, 부처를 세워 예배하였으니 바로 산정(山頂)의 석관음(石觀音)이다. 그 부처가 선 곳에 이 풀이 나서 지금 백여 년이 지났어도 시들지 아니하니, 산 사람이 지공초(指空草)라고 부른다. 지공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술사(術士)로서 고려 말에 들어와 그 도술로서 불법을 널리 선포하였다.”고 한다. 나는 만경대(萬景臺)로 가는 것을 나옹에게 청하니, 나옹은 자못 싫어하며 비로봉의 정상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나옹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당도하여 종놈을 시켜 밥을 지어 싸가지고 만경대에 오르기로 하니 만회암 중도 역시 싫어하며 말리면서 하는 말이, “길이 없으니 가서는 안 됩니다.” 한다. 그리고 운산 역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내가 강행하여 한 산마루를 넘어 한 골짜기를 내려가고 또 한 마루를 올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내려가는데, 낙엽이 쌓여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겹쌓여 동쪽인지 서쪽인지를 분간할 수 없고 새 한 마리도 울지 아니하며, 다만 두어 길 폭포가 숲 밖에서 울릴 따름이다. 운산이 바윗돌을 타고 올라가니 폭포 위에 또 폭포가 있어 아래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운산은 몸이 오싹하여 간신히 내려오며 하는 말이, “산길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수목 밑만 억측하고 무인지경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만회암으로 와서 요기를 하고 도로 마하연을 지나고 또 묘봉(妙逢) 사자(獅子) 두 암자를 지나서 사자 목에 이르니, 그 돌에 쇠줄이 밑으로 드리워져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가는 잡이로 삼았다. 민채(閔漬)의 유점기(楡岾記)에 이르기를, “호승 종단(宗旦)이 이 산에 들어와서 차지하고자 하니, 사자가 길목에 와서 막고 있으므로 종단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운산은 산마루의 한 돌을 가리키며 저것이 사자의 형상이라 하는데, 나는 자세히 보니 자못 사자와 같지 아니하고 바로 투박한 하나의 둥근 돌이다. 냇물이 여기 와서는 더욱더 기이하고 맑아서 10여 리가 한결같이 하얀 돌이 끊어지지 않고, 곳곳마다 폭포가 있어 그 아래는 깊은 못이요, 못 아래도 역시 폭포가 있다. 그러므로 동명(洞名)을 만폭동(萬瀑洞)이라 하니, 폭포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쪽 가를 따라 내려갔다. 사자항에서 서쪽 가로 내려가면 봉 넷이 있는데, 하나는 윤필봉(潤筆峯)이요, 하나는 비로봉(毗盧峯)의 향로봉(香爐峯)이요, 하나는 향로봉의 다음 봉이요, 하나는 금강대(金剛臺)이다. 동쪽에 봉 셋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이 세 봉을 다 지나면 보덕굴(普德窟)이 있고, 굴 앞의 냇가에 하얀 큰 반석이 있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위로 폭포가 있고 폭포 아래는 모두 못이 있다. 반석에 앉아서 암자를 쳐다보니 매우 아름다웠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와서 이 산을 구경할 때에, 한 두목이 있어 하느님께 맹서하기를, “이는 참으로 불경(佛境)이니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부처의 세계를 보련다.” 하고 드디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지금 저 위 못이 바로 그 못이다. 나는 바위 면에 이름을 쓰고 굴에 오르는데, 돌을 쌓아서 운제(雲梯)를 만들어 높이가 수백여 길이 된다. 그 계단을 다 지나면 암자가 벽 사이에 걸려 있는데, 구리 기둥 두 개가 약 두어 길 되는 것으로 고이고, 기둥 위에다 집 하나로 짓고 쇠줄 하나를 만들어, 한 끝은 기둥에 매고 한 끝은 돌에 매어 또 쇠줄 하나를 만들어, 그 집을 묶어서 두 끝을 돌에 매고 관음(觀音)의 소상을 그 위에 안치하였다. 또한 사(社)를 지어 중이 거처할 곳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그 곁에다 집 하나를 만들어 포주(庖廚)로 삼았다. 승사(僧舍)의 서쪽 관음굴(觀音窟)의 위에다 대(臺) 하나를 두어 이름을 보덕대(普德臺)라 하였는데, 보덕(普德)이란 것은 관음 화신(化身)의 이름이다. 나는 먼저 승사(僧社)에 들어가니, 바로 친구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의 벽기(壁記)가 있고, 허주(虛舟)의 그림이 있다. 이윽고 사(社)에서 굴로 내려오니 쇠줄이 둘이 있으므로 나는 더위잡고 내려오는데, 판자 소리가 삐걱삐걱하여 공포심이 들었다. 이른바 관음 앞에는 원장(願壯)이 자못 많았다. 나는 나와서 대상(臺上)을 둘러보고 도로 승사(僧舍)로 들어가 밥을 먹고 내려와, 다시 냇물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흰 돌이 하도 윤택하여 맨발로 거닐어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앞으로 나가 수건암(手巾岩)에 당도하니, 동봉(東峯)이 기(記)에 이르기를, “관음이 변해서 아름다운 계집이 되어 수건을 이 바위에서 씻다가 중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밑에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바윗돌이 비스듬하여 혹은 깊은 못이 되고 혹은 폭포도 되었으며, 바위 가에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볼수록 심신이 상쾌하므로, 나는 앉았다 누웠다 하며 물을 희롱하여, 그 기이(奇異)함을 구경하고 떠날 줄 몰랐는데, 운산이 떠나자고 재촉하여 표훈사(表訓寺)로 내려왔다. 서쪽으로는 금강대(金剛臺)로부터 이하에 열 한 봉을 거쳐왔고 동쪽으로는 보덕굴(普德窟)로부터 이하에 일곱 봉을 거쳐서 왔다. 이날에 산을 타고 간 것이 전부 30리였다. 주지승 지희(智熙)는 운산의 친구인데, 나를 대우하기를 매우 후히 하여 등불을 켜고 차와 밥을 준비하여 준다. 절에, 지원(至元) 4년 무신 2월에 세운 비가 있는데, 바로 원(元) 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봉명신(奉命臣) 양재(梁載)가 글을 짓고, 고려 우정승(右政丞)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황제가 표훈사 중을 재(齋)하여 만인의 결연(結緣)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비석의 뒷면에 태황(太皇) 태후(太后)가 은포(銀布) 얼마,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얼마, 황후(皇后)가 얼마, 관자불화(觀者不花) 태자(太子) 및 두 낭자(娘子)가 얼마, 완택독심왕(完澤禿瀋王) 등이 얼마, 대소 신료(臣僚)가 얼마라는 것을 기재하였으니, 이는 곧 시주한 것을 적은 것이다. 이날 밤에 나를 위해 조그마한 침방을 치워주니 친함을 표시한 것이다.
경진일에 지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산중의 별미를 있는 대로 장만하여 나를 대접하고 노복들에게도 역시 후하게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부채 하나 가죽신 하나를 나에게 선사하고 또 운상에게도 똑같이 선사하였다. 나는 냇가를 따라 오리쯤 내려가서 동남으로 한 산에 들어가 나무 밑으로 가는데 고개를 들어 보아도 하늘이 뵈지 않으며 역로(歷路)의 봉만(峯巒)도 헤아릴 수 없었다. 또 5ㆍ6리쯤 가니 묵은 성이 있다. 아마도 왜적의 난리를 피할 때에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터를 지나서 한 높은 산에 오르니 절정의 동편에 두 암자가 있는데 대송라(大松蘿)ㆍ소송라(小松蘿)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발이 다 부르터 걷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대송라에 당도하여 누워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깨자 그 절의 중 성호(性湖)에게 청하여 산길의 앞잡이가 되게 하고 망고대(望高臺)에 올라 암자 뒤 동쪽 가의 산상을 따라 측백나무 가지를 더위잡고 나뭇가지를 헤치고 한 산마루에 올라서 또 곧장 산 중허리로 내려가 거기서 돌아서 북으로 올라가니, 깎은 듯한 하얀 돌을 깎아 세운 것이 몇 천인지 알 수 없는데 드리운 것도 같고 떨어질 것도 같으며 왕왕히 쇠줄이 아래로 드리워 손으로 끊고 올라가 승상(僧床)ㆍ응암(鷹岩)의 두 봉 사이로 벗어났다. 승상(僧床)이란 이름은 봉의 아래 돌이 있어 승상과 같기 때문이요, 응암이란 이름은 봉의 위에 돌이 있어 매의 형상과 같기 때문이다. 응암(鷹岩)의 북쪽에서 절벽으로 오르는데, 혹은 나뭇가지 혹은 돌의 모서리를 더위잡았다. 모두 계산하니 암상(岩上)으로 걸은 것이 약 10여 리쯤 된다. 대상(臺上)에 오르니 4통5달(四通五達)하여 승상(僧床)ㆍ응암(鷹岩) 두 봉이 도리어 산 밑에 있고 전일 만폭동에서 거쳐서 온 여러 봉은 구질(丘垤)과 같아 분변할 수 없다. 다만 보니 진견성봉(眞見性峯)이 북쪽에 당해있고 그 봉 뒤에는 비로봉(毗盧峯)이 형세가 하늘을 고인 듯하여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 배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전에 평지에서 쳐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요, 상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봉우리 서쪽에 만경대(萬景臺)ㆍ백운대(白雲臺)ㆍ중향성(衆香城)이 있고 그 다음으로 마하연(摩訶衍) 후봉(後峯)이 서 비로봉과 연결하여 한 산악을 이룬 것 같다. 동북에 안문봉(雁門峯)이 있어 비로봉에 다음가고 안문봉 뒤에 대장(大藏)ㆍ상개심(上開心) 여러 봉이 있는데, 다만 뾰족한 머리가 붓끝처럼 보일 뿐이며 여러 뾰족한 봉우리 남쪽에 두 봉이 있어 여러 뾰족한 봉우리에 비하면 2ㆍ3 등급이 나직하게 보이는데, 이름은 십왕봉(十王峯)이다. 봉 뒤에 십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 있고 냇가에 영원암(寧原庵)이 있다. 운산이 일찍이 이곳에 올랐다고 한다. 또 십왕수(十王水)가 내려와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하여 장안사(長安寺) 앞 내가 되고 십왕봉 뒤 백천동 동쪽에 토봉(土峯) 하나가 있어 위는 평평한데 십왕봉보다 약간 높으니, 그것은 천등봉(天燈峯)이요, 그 남쪽에 솟은 봉이 천등봉보다 한두 등급 높으니, 그것은 미륵봉이요, 천등봉ㆍ비륵봉의 사이에 두 봉이 그 머리를 내보인 것은 관음봉(觀音峯)ㆍ지장봉(地藏峯)이요 미륵봉 남쪽에 토봉(土峯)이 있어 미륵봉보다 1ㆍ2등급이 낮게 보이는 것이 달마봉(達磨峯)이요, 달마봉의 서쪽에 또한 토산 하나가 있어 몹시 나직한데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산의 남쪽은 곧 금장(金藏) 은장면(銀藏面)이다. 장안사(長安寺) 서북쪽에 신림사(新林寺)가 있고 신림사 서북쪽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정양사 서북쪽에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개심대 서쪽에 개심암(開心庵)이 있다. 그 산이 위까지 통해서 수목이 새파랗게 한쪽을 내리덮었다. 그러나 그 봉이 퍽이나 낮아서 여러 봉과 비교가 아니된다. 개심대 북쪽에 토산(土山)이 있어 몹시 높아 미륵봉과 더불어 동서로 마주 섰는데, 이름은 서수정봉(西水精峯)이라 그 봉의 남쪽에는 웅호암(熊虎庵)이 있고 봉의 뒤에는 수정암(水精庵)이 있는데, 곧 비로봉 북면의 물이 쏟는 골짝이다. 개심대의 뒤 수정암의 남쪽에 한 토산이 있어 개심대 뒷산보다 약간 높은데 이름은 발령(髮嶺)이다. 중이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를 지나다가 이 재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고 수없이 예배를 드리며 머리카락을 끊어 가지에 걸고 사문(沙門)으로 들어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므로 이 재를 발령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나는 대석(臺石) 위에 앉아 봉의 이름을 다 묻고서 사방을 두루보니 신기가 화평하고 상쾌하여 몸이 높은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겠다. 한 시간이 지났기로 내려가려 하는데, 안변(安邊) 중 네 사람이 뒤미처 올라오기에 네 명의 중과 함께 내려왔다. 네 명의 중은 상운점(上雲帖)으로 돌아가고 나는 승상석(僧床石)에 오르니, 심신이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이 들기로 도로 내려와 송라암(松蘿庵)에 당도하여 벽상을 보니, 친구 대유(大猶)의 이름 및 자와 절구시(絶句詩) 한 수가 있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모두 25ㆍ6리였다. 윤사월 신사일에 송라암을 출발하여 옛 성터를 거쳐 남으로 한 골짝을 내려가 왼편으로 두 봉을 지나고 바른편으로 네 봉을 지나서 안양암(安養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나한전(羅漢殿)이 있어 개명(開明)하여 앉을 수 있기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일기를 썼다. 암자 앞에 깊은 못이 있으니, 이름은 울연(鬱淵)인데 김동(金同)이 빠져 죽은 곳이다. 김동은 고려 시대 부자 사람인데 평생에 부처를 좋아하여 울연의 위에다 암자를 짓고 모든 바위의 면에다 불상(佛像)을 조각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중을 재(齋)하니 쌀바리가 개성과 연속하였다.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김동을 보고 외도(外道)라고 지적하니 김동이 불복하였다. 지공이 맹서를 지어 말하기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내가 천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옳고 네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네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니 김동이 그러자고 하였다. 지공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자는데 과연 밤에 뇌성벽력이 일어나 김동사가 물과 돌에 부딪쳐 김동은 절의 부처와 절의 종 그리고 절의 중과 한꺼번에 울연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울연 위 한 마장쯤에 김동사 옛터가 있다. 안양암을 지나서 동으로 산 중턱을 돌아드니 붉은 척촉과 푸른 솜대[綿竹]가 길가에 가득하다. 미타암(彌陀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칠봉(七峯)이 열립해 있고 암자 앞에 물이 있다. 이 물은 바로 울연의 하류(下流)이다. 주승(主僧) 해봉(解逢)에게 청하여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식사 후에 왼편으로 명수(明水)ㆍ지장(地藏)ㆍ관음(觀音) 세 암자를 지나고 바른편으로 양심(養心)ㆍ영쇠(靈碎) 두 암자를 지나니 십왕백천수(十王百川水)가 여기 와서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한다. 이곳을 벗어나니 냇가 돌들이 청흑색으로 변하였다. 미타암으로부터 십여 리를 향하여 장안사(長安寺)에 당도하니, 이 절은 바로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초창하였고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기황후(奇皇后)가 더불어 중창(重創)하였다. 바깥문에는 천왕(天王) 둘이 있고 맨 안에 법당이 있고, 좌상에 큰 부처 셋과 중 부처 둘이 있다. 부처 앞에 금으로 쓴 액자(額字)에는, “황제 만만세(皇帝萬萬世)”라 하였다. 법당의 4면에 작은 부처 만 5천이 있는데, 모두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그 동쪽 모퉁이에 무진등(無盡燈)이 있는데, 그 등의 내부 4면은 모두 동경(銅鏡)으로 되고, 가운데다 촛불 하나를 두고 곁으로 여러 중의 형상을 세워, 이내 초에 불을 붙이면 여러 중이 모두 촛불을 잡고 있는 듯한데, 역시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다섯 왕불(王佛) 위에 또 다섯 중불(中佛)이 있는데, 복성정(福城正)의 소작이다. 당(堂)의 서실(西室)에 달마(達磨)의 초상이 있고 동북 모퉁이에 나한전이 있고 당에는 금불(金佛) 다섯이 있고, 좌우로 나한의 소상 16개가 있다. 나한의 곁에 각각 시봉승(侍奉僧) 둘씩이 딸려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나한전의 남쪽에 한 집이 있고, 그 집안에 대장경함(大藏經凾)이 있다. 나무로 새겨 3층 집을 만들고 그 가운데 철구(鐵臼)가 있고, 철주(鐵柱)를 그 위에 두어 위로 집 대들보와 연속하게 하고, 함(凾)을 그 가운데 두어 집 한 모퉁이를 잡고 흔들면 3층이 저절로 돌아가게 되니 구경할 만하다. 역시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다. 구경을 다하고 나니 주지(住持) 조징(祖澄)이 차와 밥을 준비하였다. 식사 후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그 전에 오던 천변(川邊)을 따라 올라가서, 울연 보현암(普賢庵)을 지나서 신림사(新林寺)에 당도하여 잠깐 쉬었다. 장안사에서 지나온 여러 봉과 아울러, 아침나절 지나온 일곱 봉과 십왕동(十王洞) 어귀에서 바라보이는 여러 봉을 합쳐 헤아려보면, 냇물 동쪽에 봉 29개가 있고 냇물 서쪽에 봉 18개가 있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는 데는 전록(前錄)에 실려 있다. 신림사(新林寺)로부터 천친암(庵)에 오르고, 천친암으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올라가면 절재[拜岵]가 바른편에 있다. 중이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산에 들어왔을 적에, 5만의 담무갈(曇無竭)이 이곳 재에서 현신(現身)하므로, 태조는 무수히 절을 올렸다. 그래서 이름을 절재라 하였다.”고 하였다. 정양사로부터 또 비를 무릅쓰고 쌓인 수목 속으로 약 10리쯤 올라가서 보현령(普賢嶺)에 올라, 거기서 서쪽으로 3ㆍ4리쯤 올라가서 개심암(開心庵)에 당도하니, 옷이 다 젖고 또 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이날에 산길로 모두 40리를 걸었다.
임오일에 비가 개어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望高臺)와 더불어 대략 같고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로봉 중향성(衆香城)은 동쪽에 있고 선암(禪庵) 뒷봉은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니, 곧 비로봉이 서쪽 가지이다. 마가연 뒷봉은 바로 선암봉(禪庵峯) 앞에 있고 영랑현(永郞峴)은 선암봉 뒤에 있고 서수정봉(西水精峯)은 영랑현 서쪽에 있고, 월출봉(月出峯)은 비로봉 동남에 있고, 일출봉(日出峯)은 월출봉(月出峯) 남쪽에 있고, 원적봉(元寂峯)은 일출봉 남쪽에 있는데, 망고대(望高臺)는 보이지 않는다.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峯)은 원적봉 남쪽에 있고, 안문봉(雁門峯)은 또 그 남쪽에 있고, 안문봉 북쪽에 한두 봉이 있어 멀리 보이는데, 보문(普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것이다. 진견성봉(眞見性峯)은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는 또 그 남쪽에 있고 십왕봉은 망고대 위에 두각만 나타내고, 천등(天燈)ㆍ관음(觀音)ㆍ지장(地藏)ㆍ미륵(彌勒)ㆍ달마(達摩) 여러 봉은 그 동남에 퍼져있는데 이는 그 대략이다. 대 남쪽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대 곁에 개심태자(開心太子)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중이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 태자와 개심 태자가 안심태자와 양심태자 돈대부인(頓臺夫人)과 함께 여기 와서 수도하였는데, 모두 법흥왕의 아들이다.”라고 한다. 지금 네 암자가 있어 그대로 옛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런지 않은지 자상하지 않다. 식사 후에 개심암으로부터 서쪽으로 묘덕암(妙德庵)을 내려가, 견극선암(見克禪庵)에 들어가니 뒤에 느린목[緩項]이라 이름된 것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산에 들어오던 길이라고 한다. 천덕암(天德庵)을 지나니 암자 앞 수원부(水原府)에 사는 양반집 과부가 도산재(都山齋)를 베풀어, 중 수백 명이 산 중턱에 열지어 앉아 떠드는 소리가 온 골짝을 요란하게 하는데, 과부는 뭇 중들 가운데 낯을 드러내놓고 결연(結緣)하고 있었다. 또 원통암(元通庵)을 지나니 암자의 좌우에 두개의 내가 있어, 암자 앞에 와서 합류하는데, 역시 승경이다. 여기를 지나서 원통암 뒷재 영랑현(永郞峴)을 오르니 지나온 봉이 일곱이었고, 또 윤필암(潤筆庵) 고개를 넘어 윤필암을 지나고, 또 사자령(獅子嶺)을 넘어 동으로 가니 바로 지난 날 보던 사자암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역시 전록(前錄)에 기재되었거니와, 산천이 다름없고 하얀 돌도 여전한데, 다만 냇가 양쪽에 철쭉꽃이 지난 밤 비에 활짝 피어 끊임없이 서로 연속하여 가다가는 무더기로 있으니 구경할 만하다. 나는 그전 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안문점(雁門岾)을 채 못가서, 동남으로 한 골짝에 들어가 요기하고 수점(水岾)을 넘어 동으로 내려 왼편으로 시내 줄기를 보고, 바른편으로 남산을 끼고 나무 그늘 속으로 거닐어 성불암(成佛庵)에 당도하여 불암 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니, 비가 지난 뒤라 더욱더 환하여 전날에 비할 바 아니었다. 객승(客僧) 죽희(竹熙)란 자가 나를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였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죽희ㆍ성통(性通)과 더불어 불정암(佛頂庵)을 가보니 암자가 지난해에 화재를 만났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가니 대 가운데 구멍이 있어, 산 밑 깊은 못에 통하여 바람이 그 속에서 나온다. 중이 말하기를, “옛적에 용녀(龍女)가 이 구멍에서 나와, 차(茶)를 불정조사(佛頂祖師)에게 받들었다.” 하는데, 그 말이 매우 순진하고 대 아래에 청학(靑鶴)이 해마다 그 가운데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나는 대 위에 앉아 바라보니 동에는 바다가 있고 서에는 안문봉이 있고, 북에는 상개심(上開心)ㆍ적멸(寂滅)ㆍ백전(柏田) 등의 절이 있고, 그 아래는 흰 바위가 한 벼랑을 이루고 폭포가 아래로 드리워 11층을 내려가는데, 반은 숲 속에 들었고 내가 바라본 것은 6층일 따름이다. 저물녘에 돌아와 성불암(成佛庵)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60리였다.
계미일에 성불암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여명(黎明)으로부터 하늘 동쪽에 붉은 빛이 비치더니, 잠깐 사이에 해가 솟아올라 온 바다가 다 붉게 보이고, 해가 간대[竿] 세 길이쯤 올라오니 바다 빛이 맑고 하얗다. 나는 단편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 작은 고개를 넘어 10리쯤 가서 유점사(楡岾寺)에 당도하니, 구연동(九淵洞) 물 근원이 미륵봉(彌勒峯)에서 나와 절 앞에 당해서는 수점천(水岾川)과 함께 합류한다. 절에 수각(水閣)이 있어 내 남북쪽을 깔고 앉았는데, 물고기가 앞에서 뛰다가 큰물이 지면 연어(連魚)ㆍ송어(松魚)가 모두 수각 앞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절의 바깥문은 해탈문(解脫門)인데 천왕(天王) 둘이 있고, 다음은 반야문(般若門)인데 천왕 넷이 있고 다음은 범종루(泛鍾樓)가 있는데, 누 곁에 한 방에 노춘(盧偆)의 상(像)이 있고, 맨 안에 능인보전(能仁寶殿)이 있고 전 안에는 나무를 새겨서 산 모양을 만들어, 53구의 부처가 그 사이에 열립해 있고 전 뒤에는 한 우물이 있어 이름을 오탁수(烏啄水)라 한다. 맨 처음 까마귀가 쪼는 것을 보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절에 명(明)이란 사주(社主)가 있어 묵헌(黙軒)ㆍ민채(閔漬)의 유점기(楡岾記)를 내보는데, 그 대략에 53구의 부처에 대해서는 본시 서역(西域) 사위국(舍衛國)에서 세존(世尊)을 보지 못한 삼만가(三萬家)가 문수보살의 말을 받아서, 석가의 상을 지어 부어[鑄] 쇠북 속에 담아 바다에 띄워 저 갈 데로 가게 하였다. 부처가 월지국(月氏國)에 이르자 그 나라 왕이 집을 지어 부처를 안치하였는데 그 집이 화재를 만났다. 부처가 왕에게 현몽하여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니, 왕이 부처를 쇠북 속에 넣어서 또 바다에 띄웠다. 부처가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이르니, 태수(太守) 노춘(盧偆)이 부처에게 살고자 하는 곳을 물으매, 부처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지라 노춘은 뒤를 따라 찾아가는데, 중[尼]이 돌 위에 앉아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이대(尼臺)라 하고, 개가 재 위에 있어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구점(狗岾)이라 하고, 노루가 산협(山峽) 입구에서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장항(獐項)이라 하고, 부처의 머무른 곳에 당도하여 쇠북 소리를 듣고 반긴 데는, 그 땅 이름을 환희점(歡喜岾)이라 하였다. 노춘이 남해왕(南解王)에게 아뢰어 큰 절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는데, 이름은, “유점사(楡岾寺)”라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민채의 설이 여섯 가지 큰 망언(妄言)이 있는데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쇠가 물에 뜨는 이치가 없는데, 그, “사위국(舍衛國)에서 지어 부은 쇠북과, 부처가 바다에 떠나 월지국(月氏國)을 거쳐 신라에 왔다.”는 것이, 제1의 크나 큰 망언이요, 쇠란 스스로 걸어가는 이치가 없는데, 그, “고성강에 밀린 금부처가 저절로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고, 또 물탕에서 끓어오르는 물방울을 피하여 구연동(九淵洞) 바윗돌 위로 날아서 들어갔다.”는 것이 제2의 크나 큰 망언이요, 불교는 본시 서융(西戎)의 교로써 후한(後漢) 명제(明帝) 시대부터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고, 또 수백 년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로 신라의 중엽에 당하여 동방으로 유입되어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그 법을 이룬 사실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는데, 그, “전한(前漢) 평제(平帝)의 세상인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조정에 일이 있어 비로소 유점사를 창설하였다.”는 것은 제3의 큰 망언이요, 가령 민채의 설과 같이 부처가 비록 한 나라 명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우리 나라에 부처가 있기는 남해왕 때부터 비롯되어, 실로 중국보다 앞섰다면 어찌하여 사적에 실리지 않았겠는가. 우리 사람이 무식하여 부처를 받들기를 제 아버지처럼 받든다. 그래서 왕건(王建) 태조의 고명(高名)으로도 속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숭상하기를, “우리가 나라를 지니게 된 것은 실로 부처의 힘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해서 이런 사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언어와 문장을 크게 과장하여 역사에 실었을 터인데, 사가는 오히려 기재하지 않았거늘, 민채는 바로 무식한 야인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으니 제4의 큰 망언이요, 가령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백성의 중도 있게 되고 신중[尼]도 있게 되어, 반드시 불법(佛法)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전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그, “노춘이 부처를 찾아갈 적에 신중이 길을 인도하였다.”고 했으니, 불교가 있기도 전에 어찌 신중이 있겠는가. 이것이 제5의 큰 망언이요, 더구나 중국 인물들의 널리 듣고 많이 본 그것으로도, 오히려 서역(西域)의 범서(梵書)를 통하지 못하여 호승(胡僧)과 더불어 번역을 하고서야 그 글이 세상에 밝혀졌는데, 사위국 월지국에서 기록한 쇠북에서 글자를 노춘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때에 문적(文籍)이 희귀하여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였는데, 서역의 사적을 말한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제6의 큰 망언이니, 민채의 황당무계함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여섯 가지 큰 망언이 있고 한 마디도 명교에 보탬 될 것이 없으니, 이 기록은 빼버리는 것이 옳겠다. 더구나 삼국의 초기에 사람이 일정한 성이 없고, 이름 자도 사람의 이름과 같지 않은즉 노춘이란 이름부터가 후세에서 지어 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어찌 신라 말엽에 학식 있는 술승(術僧) 원효(元曉)ㆍ의상(義相) 율사(律師)의 무리들이 비로소 이 산의 사적을 과장하고자 하여 추후에 써놓은 것이라 아니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도 그릇된 점이 많단 말인가. 두루 다 구경하고 누각으로 나와 앉으니, 명(明)이 우리를 위하여 냇가에까지 보내주었다. 개복대(改服臺)를 지나니 이 대는 바로 지난 병술년에 유점사에서 불공할 적에 거가(車駕)가 옷을 바꿔 입던 곳이다. 또 단풍교(丹楓橋)를 지나자 다리 머리에서 잠깐 쉬었고, 또 장항(獐項)을 지나다가 말을 가지고 나를 맞기 위하여 온정(溫井)으로 오는 자를 만났다. 그래서 말을 타고 구점(狗岾)을 넘는데, 길이 험악하여 혹은 말을 타기도 했고 혹은 걷기도 했다. 이대석(尼臺石)을 지나서 마루로부터 평지에 당도하여, 건천(乾川) 가에서 요기를 하고 준방(蹲房)을 지나서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유점사에서 여기까지는 60리였다. 태수(太守) 조공(趙公)은 나의 조부와 더불어 좋아하는 처지라, 나를 보고 후히 대우하였다. 때마침 양양 군수(襄陽郡守) 유자한(柳自漢)이 먼저 와서 좌상의 반찬을 준비하였다.
갑신일에 태수 조공이 유양양을 위해 삼일포(三日浦)의 놀이를 하게 되어 나도 따라갔다. 삼일포는 신라 시대에 화랑(花郞) 안상(安祥)ㆍ영랑(永郞)의 무리가 와서 3일 동안을 놀고 파했다. 그래서 이름이 되었다. 포구의 암벽(巖壁) 사이에 단서(丹書) 여섯 글자가 있는데,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라고 한다. 수면(水面)에서 4ㆍ5리를 가면 돌섬 하나가 있고, 낙락장송이 두어 그루가 있으므로 이름을 송도(松島)라 하고, 동남의 모퉁이에서 바라보면 돌이 거북 모양과 같으므로 귀암(龜岩)이라 하고, 귀암의 뒤에 하얀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름을 설암(雪巖)이라 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터가 있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나는 훈도(訓導) 전대륜(全大倫) 및 유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정박하였다가 또 배를 노질하여 단서(丹書)가 있는 암벽(巖壁) 아래 당도하니, 과연 여섯 글자가 있어,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 하였는데, 그 글자가 돌에 심한 공격을 받았다. 전대륜은 말하기를, “옛날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는데, 손이 이 고을에 오게 되면 반드시 단서를 보고자 하는 고로, 태수가 그 비용을 대어 주기 싫어서 쳐부숴버리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 글자가 획이 인멸되지 않아서 해독할 수 있다. 나는 그 글의 뜻을 물으니 대륜은 말하기를, “영랑(永郞)이란, 신라 사선(四仙)의 하나요, 남석(南石)은 이 돌을 지적한 것이요, 행(行)이란 돌 위로 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이 돌이 고성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에서 보면 동북간에 있고, 동해 바다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데, 그 ‘남석’이라 칭한 것은 더욱 해득할 수가 없고, 또 여섯 글자가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 문리(文理)가 대단히 소략(疎略)하여 아희들의 솜씨와 같으니, 옛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하는 아희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곧 수랑의 무리 가운데 남석행(南石行)이란 성명을 가진 자가 제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배를 멈추고 돌 위에 오르니, 그 정상(頂上)에 미륵불(彌勒佛)을 위한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운 것이다. 배를 타고 송도로 돌아와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반찬이 매우 풍성하였다. 혹은 어부를 시켜 고기를 그물질하여 회를 쳐서 먹기도 하고, 혹은 연구시(聯句詩)를 지어 부르고 화답하기도 했다. 오후에 큰 바람이 부니 태수는 무서워서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나는 온정(溫井)으로 돌아왔다.
을유(乙酉)일에 온탕에 들어가 목욕하고, 병술(丙戌)일에 목욕하고, 정해(丁亥)일에 목욕하며 무자(戊子)일에 목욕하고 나와 쉬었다. 기축ㆍ경인 양일간에 다 쉬었다. 가서(家書)를 받았는데 자당께서 안녕하시다고 했다.
신묘(辛卯)일에 회정(回程)하여 온정을 떠나가면서 고사리를 캤다. 고성군을 지나고 또 만호도(萬戶渡)를 지나서 배를 타고 고성포(高城浦)를 건너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영동(嶺東)의 민속이 매년 3ㆍ4ㆍ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을 맞이하여 수륙(水陸)의 별미를 성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부자는 말바리로 실어오고, 가난한 자는 이고 지고 와서 신전에 차려 놓고 피리를 불고 비파를 타고 연 삼일을 재미나게 놀고 취해 배부른 연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내려와 사람과 사고팔고 하며, 만약 제사를 아니 지내면 한 자치 베도 사람과 매매를 못한다. 고성의 민속제는 바로 이날인지라, 가는 길 곳곳마다 남녀들이 몸단장을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왕왕 저자와 같이 많이 모인 데도 있었다. 설암(雪巖)을 지나니 설암의 이남에는 기묘한 돌이 몹시 많았다. 안창역(安昌驛)을 지나서 안석도(安石島)에 오르니 잘잘한 돌이 밑으로 연하고, 전죽(箭竹)이 덤불을 이루며, 전죽 아래는 해당화가 있고 해당화 아래는 하얀 돌이 있어, 혹은 평평하고 혹은 솟고 혹은 쌓이고 혹은 부숴졌다. 나는 섬 아래서 한바퀴 돌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실컷 구경하다가 도로 나와 구장천(仇莊遷)을 지나니 역시 기묘한 곳인데, 옹천(瓮遷)만은 조금 못하다. 사천(蛇川)을 건너 명파역(明波驛)을 지나 냇가에서 요기하고, 술산(戌山)을 넘어 다시 바닷가를 따라 무송정(茂松亭)에 당도하니 정자는 바로 바다 굽은 턱에 있는데, 역시 육로(陸路)와 연결하여 장송(長松)이 그 맨 꼭대기에 나고, 하얀 돌은 그 기슭을 이뤘다. 그리고 안석(安石)에 비해 몇 배가 높은지 알 수 없다. 열산(烈山)을 지나서 간성(杆城) 땅에 들어가 포남(浦南)에 있는 어떤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바다를 따라 행한 것이 모두 1백 20리였다.
임진(壬辰)일에 비를 무릅쓰고 포남에서 출발하여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니 비가 몹시 퍼부어서 간성(杆城) 객사(客舍)에서 유숙하는데 태수 원보곤(元輔昆)이 술밥을 보내와서 운산은 취해 넘어졌다.
계사(癸巳)일에 비가 갰다. 출발하여 문암(門巖)을 지나 바다를 따라 45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당도하니, 누가 물가에 가까이 있고, 누의 뒤에는 절벽이 깎아지르고, 누 앞에는 많은 돌이 쫑긋쫑긋 솟았다. 나는 누의 뒤 절벽 위에 오르니, 바라보이는 것이 더욱 넓어 서쪽으로 설악(雪岳)을 보니 비가 내리 쏟아지는 것 같은데, 하늘 남쪽에는 해가 중천에 둥실 떴다. 그리고 앞에는 바다가 어둑하고, 뒤에는 꽃이 환하여 절묘한 경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절벽 위에서 요기하고 또 바닷가로 행하여 사령(沙嶺)의 해안을 지나니 이때에 동남풍이 거세게 불어 바다 물결이 기슭에 대지르는데, 천병(千兵) 만마(萬馬)가 몰아서 노는 것 같았다. 물이 부딪는 곳에 붉은 무지개가 건각에 나타났다 도로 사라지곤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죽도(竹島)를 바라보니 백죽(白竹)이 연기와 같고, 개울 밑 돌 위에 해달(海獺)이 줄지어 떼로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더불어 어울려 해안에 진동하였다. 또 부석(腐石)에 당도하니 청간(淸澗)에서 여기까지는 20리이다. 또 바른편으로 천보산(天寶山)을 지나 송정(松亭)에 당도하여 여기서부터 낙산(洛山)을 바라보며 20리를 가서 낙산동(洛山洞)에 들어갔다. 또 10리를 가서 낙산사(洛山寺)에 당도하니, 지나는 길에 피택(陂澤)이 많아서 그 크기를 10리 혹은 20여리 되는 것이 여섯이나 된다. 그리고 두 곳의 큰 개와 두 곳의 큰 내를 건너고 죽도(竹島)를 셋이나 지났는데, 기암(奇巖) 괴석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낙산사는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인데, 그 절의 중이 그 사적을 전하기를, “의상이 직접 관음(觀音) 대사를 해변 굴속에서 만나니 관음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고 용왕(龍王)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치기에 의상은 두 구슬을 받았다. 이에 절을 짓고 전단토(旃檀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다. 지금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굴이 바로 관음의 머무른 곳이요, 뜰 가운데 있는 석탑이 바로 두 구슬을 수장한 탑이요, 관음 소상은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이다.” 한다. 무자(戊子) 연간에 요승(妖僧) 학열(學悅)이란 자가 있어 나라에 아뢰어 절터에다 큰 법당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곁에 있는 민간의 전답을 다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학열이 죽은 지 1년인데, 그 도제 지생(智生)이 일찍이 학열에게 곱게 보였던 관계로 학열이 죽자 노비(奴婢) 전답, 재물을 다 얻어서 그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 절 앞에 정자 하나가 바닷가에 가까이 있고, 감나무 숲이 여러 겹을 두르고, 대와 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다.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정자를 내려와 언덕 밑을 지나서 큰 대숲에 갔다가 도로 주사(廚舍)를 지나서 곡구(谷口)로 내려가 왼편으로 암석(巖石)을 거쳐 조그마한 댓가지를 헤치고 반 마장쯤 가서 이른바 관음굴이란 곳에 당도하니, 조그마한 동불(銅佛)이 굴속의 조그마한 실내에 있어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고 방 아래서는 파도 물결이 돌을 대질러 산 형상이 흔들리는 듯하고, 지붕 판자가 노상 울린다. 나는 내려와 동구에 당도하자 운산이 중 계천(繼千)을 데리고 와서 나를 맞아 절로 들어가니 지생이 나와 영접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갑오(甲午)일 이른 아침에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해뜨는 것을 구경하였다. 지생이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을 구경시키는데 이른바 관음상은 제작한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정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전 앞에 정취전(正趣殿)이 있고, 전 안에는 금불 셋이 있다. 나는 출발하여 남쪽 길로 가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 냇가에 당도하여 말을 쉬게 하고, 또 10리를 가서 설악(雪岳)으로 들어가 소어령(所於嶺)을 올라 고개를 내려오니 냇물은 왼편에 있고, 봉만(峯巒)은 바른편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서 냇물을 건너 왼편으로 가니 물은 맑고 산은 빼어나고 하얀 돌이 담 쌓여 대략 금강산의 대장동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을 당도하니, 하얀 달이 벌써 산 위에 둥실 높이 떴다. 이날 뭍으로 30리를 걷고 산으로 40리를 걸었다.
을미(乙未)일에,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지나니, 설악산이 무려 수십여 봉우리인데, 다 정상은 희고, 시냇가 돌과 나무도 또한 희게 보인다. 세상에서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에 다른 산은 서리가 미처 오지 않았는데도, 이 산만은 먼저 눈이 내리므로 설악이라 한다.” 하였다. 재마루 돌 위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시 한 수가 있는데, “무진년에 난 단군(檀君)보다 먼저 나서 기준(箕準)의 마한(馬韓)을 목도하였네. 영랑(永郞)과 함께 수부(水府)에 노닐고, 또 술을 마시며 인간에 머물렀네.” 하였다. 먹발[墨跡]이 아직도 쌕쌕하니, 반드시 쓴 적이 오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신선이라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일 좋아하는 자가 우연히 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정자(정이(程頣))는, “하늘에 빌어 나라 운명(運命)을 길게 하는 것과 보통 사람이 성인에 이르는 것으로써 신체를 수련하여 연령을 끌어가는 것에 비한다.” 하였으니, 깊은 산중에 역시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시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들게 한다. 나는 재마루에서 동해 바다와 하직하고, 재를 내려와 서남으로 나무 밑으로 걸어가니 길이 험악하고 골짝기가 깊숙하였다. 정향(丁香)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내를 맡으며 면암(眠巖)을 지나 30리를 가서 말을 쉬고 신원(新院)을 지나 또 15리를 가니 냇물이 설악의 서쪽으로부터 와서 소솔천(所率川)과 합류하여 원통역(元通驛) 아래 이르러서는 큰 강이 되었다. 원통으로 전진하니 산천이 광활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원통으로부터 평지를 밟고 또 25리를 가서 원통천(元通川)을 건너서 기린현(麒獜縣) 물이 여기와 합류하였다. 강을 따라 5리를 가서 인제현(麟蹄縣)에 유숙했다. 이 날에 산으로 60리를 걷고, 뭍으로 30리를 걸었다.
병신(丙申)일에 배를 타고 병항진(甁項津)을 건너 서ㆍ남으로 향하여 선천(船遷)을 지나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만의역(萬義驛)을 지나며, 또 산간으로 향하여 홍천(洪川) 땅에 들어가 천감역(泉甘驛)에 유숙했다. 모두 80리를 걸었다.
정유(丁酉)일에 또 서ㆍ남으로 향하여 마령(馬嶺)을 넘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큰 강을 따라 내려가 구질천(仇叱遷) 영봉역(迎逢驛)을 지나 60리를 가서 홍천현에 당도하여 현감(縣監) 백기(伯起)를 만나보고 동숙(同宿)하였다.
무술(戊戌)일에 배를 타고 앞강을 건너 괘전령(掛錢嶺)을 넘어 백동역(百同驛) 뒷산을 거쳐 지평현(砥平縣)을 지내고, 또 천곡원(天谷院)을 지나서 서남에 돌길로 들어갔다. 이날에 도합 90리를 걸어서 권교리(權校理) 경우(景祐)의 집에서 잤다.
기해(己亥)일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향하여 천곡천(天谷川) 하류로 건너 오빈력(吾賓驛) 양근군(楊根郡)을 지나고, 또 월계천(月溪遷) 우원(偶院)ㆍ요원(腰院)ㆍ말원(末院)을 지나서 용진(龍津)을 건너 봉안역(奉安驛)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도합 80여 리를 걸었다.
경자(庚子)일에 두미천(豆尾遷) 평구역(平丘驛)을 지나 중녕포(中寧浦)를 건너 70리를 향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총계하니 산으로 향한 것이 4백 85리요. 바다로 향한 것이 2백 74리요, 뭍으로 향한 것이 9백 37리였다. 을사 윤 4월 20일 신축에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