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목민심서 1(정약용)

청담(靑潭) 2017. 8. 29. 22:10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자서(自序)

 

...그렇다면 군자(君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말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다. 요즈음의 사목(司牧)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진구렁이에 떨어져 죽는데도 그들 사목된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이한 구절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역(周易)》 〈대축(大畜)〉에 “전 사람의 말이나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나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하필 꼭 목민하기 위해서만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 21년인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서(序)한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6조

 

제1조 제배(除拜) : 수령에 임명되는 것

▣다른 관직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관직은 구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수령은 홀로 만민의 위에 우뚝 서서 간사한 백성 세 사람을 좌(佐)로 삼고, 간사한 아전 60~70명을 보(輔)로 삼으며, 사나운 자 몇 사람을 막빈(幕賓)으로 삼고, 패악한 무리 10명을 복례(僕隷)로 삼았다. 이들은 서로 끼리끼리 뭉치어 수령 한 사람의 총명을 가리우고, 사기와 농간을 일삼아서 만백성을 못살게 한다.

●대체로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되, 끼니도 잇기 어려운 것은 그 사정으로 보아서는 진실로 딱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천지의 공리(公理)로 말하면 벼슬을 위해서 사람을 고르는 것이요, 사람을 위해서 벼슬을 고르는 법은 없다. 한 집안의 봉양을 위하여 만민의 수령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남의 신하 된 이가 만민에게 거두어다가 내 부모 봉양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요, 남의 임금 된 이가 만민에게 거두어다가 네 부모를 봉양하라 허락하는 것도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다.

만약, 재주를 가지고 도(道)를 지닌 사람이 스스로 제 능력을 헤아려 보아, 목민(牧民)할 만하면,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하여, 한 군을 다스리기를 청하는 것은 좋다. 그저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는데 봉양이 어려움을 핑계 삼아 한 군을 빌어 얻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다.

▣임명된 처음에 재물을 함부로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조정에서 백성을 위하여 수령을 보낼 때에는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도록 타일러야 할 것인데, 먼저 액례(掖隷)와 원례(院隷)를 풀어놓아 명목 없는 돈을 토색하여, 기생을 끼고 모여서 술추렴하거나 거문고를 타고 저〔笛〕를 불며 노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니, 이는 어떤 예(禮)인가.

▣저보(邸報)를 내려보내는 처음에 폐단을 덜 만한 것은 덜어야 한다.

●신영(新迎)하는 기치(旗幟)는 으레 속오군(束伍軍)을 잡아다가 받들어 잡도록 하는데, 읍에 들어오는 자는 수십 일씩 묵고, 읍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사사로이 징렴(徵斂)함이 있어, 농사철을 당하면 더욱 백성들의 폐해가 되니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신영(新迎)하는 쇄마(刷馬)의 비용을 이미 국비로 타고, 다시 백성에게서 거둬들인다면, 이는 임금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짓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

●저보(邸報)를 내려보내는 날에는 따로 공형(公兄)에게 이렇게 전령을 내려야 할 것이다.

“신영의 부쇄가(夫刷價)는 영을 받지 않고 이미 거두었을 것 같으나, 벌써 국비로 지급되었으니 또다시 민간에서 거두어 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거둔 돈을 민간에 다시 돌려주자면 중간에서 없어질 걱정이 또 있다. 여러 동리의 부역(賦役) 중에서 군전(軍錢)이나 세전(稅錢)을 막론하고, 반드시 몇 달 안에 바쳐야 할 돈이 있을 것이니, 부쇄가(夫刷價)를 이미 바친 자는 이로써 충당하도록 한다. 마땅히 바쳐야 할 것 중에서 그 액수만큼은 제하고, 다시 바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다. 모름지기 이 뜻을 향청(鄕廳)에서 영을 내려 일일이 일러 주어 각각 알도록 하라.”

만약 신ㆍ구 수령의 교체가 서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읍에서 미처 알지 못하면 이렇게 영을 내려야 할 것이다.

“신영의 부쇄가(夫刷價)는 국비로 지급되었으니, 또다시 민간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있겠는가. 삼가 거두어들이지 말도록 하라.” - 한 자도 더 보태서는 안 된다. -

무릇 신관(新官)이 처음 나타나면 백성이 그 풍채를 상상하고 기대할 것이니, 이러한 때에 이런 영이 내려가면 환호성이 우레와 같고, 칭송하는 노래가 먼저 일어날 것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나오는 것이니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겁을 낼 것이며, 영을 내리고 시행함에 백성들은 따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아! 버리는 것은 3백 냥인데 3백 냥으로 이렇듯 환호성을 사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상하로 따져서 수백 년이요, 종횡으로 따져서 4천 리인데, 도임하기 전에 이런 영을 내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는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마다 모두 청렴하지 않아서가 아닐 것이다.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예(例)를 모르고, 도임한 후에는 이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부터 먼저 이 의로운 영을 내린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는가.

 

제2조 치장(治裝) : 부임할 때의 행장

▣행장을 차릴 때, 의복과 안마(鞍馬)는 모두 옛것을 그대로 쓰고 새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

●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고, 비용을 절약하는 근본은 검소한 데 있다. 검소한 뒤에야 청렴하고, 청렴한 뒤에야 자애로울 것이니, 검소야말로 목민(牧民)하는 데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못 배우고 지식이 없어서 산뜻한 옷차림에 고운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고서는, 위풍을 떨치면서 세상에 자랑하려고 하지만, 노련한 아전은 신관(新官)의 태도를 살필 때, 먼저 그의 의복과 안마를 묻되 만일 사치스럽고 화려하다면 비웃으면서 ‘알 만하다’ 하고, 만일 검소하고 허술하면 놀라면서 ‘두려운 분이다’ 하는 줄은 모르고 있다. 거리의 애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기니,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남들이 자기를 부러워하는 줄 착각하고 있지만, 부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미워한다. 자기 재산을 털어다가 자기 명예마저 손상시키고, 게다가 남의 미움까지 사게 되니 이 또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무릇 사치스러운 짓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다.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경관(京官)으로서 나가는 것이다. 의복ㆍ안마(鞍馬)는 다 대강 갖추어 있을 것이니 그대로 행차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한 가지도 새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행(同行)이 많아서는 안 된다.

●자제 한 사람이 따라가면 좋을 것이다.

요즈음 풍습에 소위 책객(冊客 : 개인비서)이라는 것이 있어 회계를 맡고 있는데, 이는 예(禮)가 아니니 없애야 한다. 만약 자기의 글 솜씨가 거칠고 졸렬하면, 한 사람쯤 데리고 가서 서기(書記)의 일을 맡기는 것은 좋다.

겸인(傔人 : 사적인 종)은 관부(官府)의 큰 좀이니, 절대로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 만약 공이 많은 자가 있으면, 후하게 줄 것을 약속하면 된다.

노복(奴僕)을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 다만 한 사람쯤은 내행(內行) 때 따라오도록 한다.

▣이부자리와 솜옷 외에 책 한 수레를 싣고 가면, 청사(淸士)의 행장(行裝)일 것이다.

●요즈음 현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겨우 역서(曆書) 한 권을 가지고 가고, 그 밖의 서적들은 한 권도 행장 속에 넣지 않는다. 가면 으레 많은 재물을 얻게 되어 돌아오는 행장은 무겁게 마련이니, 한 권 책일망정 누(累)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엾다, 그 마음가짐의 비루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또 목민(牧民)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문사(文士)가 벼슬을 살게 되면, 이웃에 사는 선비들이 물으러 오는 일이 절로 있을 것이요, 이보다 한 등 아래로는 선비들이 과거 공부로 글짓기 배우는 것을 권장하기 위해 글 제목을 낼 때에도 모름지기 서적이 있어야 하고, 이보다 한 등 아래로는 혹 이웃 고을 수령이나 벼슬아치들과 한자리에 모여, 산수(山水)에 노닐게 될 때 운을 내어 시도 짓게 되리니, 고인의 시집(詩集)도 있어야 한다. 하물며 전정(田政)ㆍ부역ㆍ진휼(賑恤)ㆍ형옥(刑獄)에 관하여서도, 옛 책을 상고하지 않고서 어찌 일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남북의 먼 변방은 기후 풍토가 아주 다른데, 질병은 걸리고 의원은 구하기 힘드니, 의서(醫書) 몇 권이 없어서야 어찌 될 말인가. 변방에서는 군대를 맡아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하는데, 곧 척계광(戚繼光)ㆍ유대유(兪大猷)ㆍ왕명학(王鳴鶴)ㆍ모원의(茅元儀)가 편술한 책들은 또 불가불 항상 펴 보아야 할 것이니, 책을 한 수레 싣고 가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는 날에 토산물은 싣지 말고, 이 책수레만 끌고 오면 청풍(淸風)이 길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제3조 사조(辭朝) : 관원으로 임명된 자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이 끝나고서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린다.

●살피건대, 서경이란 내외 사조(內外四祖)를 갖추어 기록하고 - 아울러 처족의 사조까지 고찰한다. - 흠의 유무를 고찰하여, - 자기 자신의 흠도 고찰한다. - 가부를 결정하는 것인데, 임금의 특별 분부가 있으면 일사(一司)의 서경은 그만두어도 된다. 이제는 형식만 있을 뿐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수령은 사서일경(四書一經)ㆍ《대명률(大明律)》ㆍ《경국대전》 - 《통편(通編)》에 “3책을 통하지 못한 자는 도태해 버린다. 3차 응시하지 않은 자도 같다. 1책을 불통하고 2차 응시하지 않은 자와 2책을 불통하고 1차 응시하지 않은 자는 도태한다.” 하였다. - 에 대한 강(講)과 치민방략(治民方略)에 대한 제술(製述) - 지금은 폐했다. - 을 시험 보인다.”

살피건대, 옛법은 수령의 임명을 가장 중히 여겨, 임명하기 전에 천거(薦擧)의 절차를 두었고 임명한 후에는 서경(署經)의 절차를 두었으며, 이에 또 경서(經書)와 법률로써 시험하여, 그 재주와 학식을 고찰한 것이다. 이제 이 법은 형식만 갖추었을 뿐 유명무실해져서, 용렬하고 무식한 자도 거리낌 없이 다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다. - 지금은 오직 과거(科擧)를 경유하지 아니한 백도(白徒)로서 벼슬살이하게 된 자가 처음 6품으로 올라갈 때에만 강(講)에 응한다. -

●공경(公卿)과 대간(臺諫)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드릴 때에는 스스로 재기(才器)의 부족함을 말할 일이지, 봉록의 많고 적음을 말해서는 안 된다.

▣전관(銓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할 때에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전관(銓官)은 국가를 위하여 사람을 뽑아 썼으니 사은(私恩)을 끌어대서는 안 될 것이요, 수령은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었으니 사은으로 마음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 한자리에서 상대하더라도 말이 주의(注擬)에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니, 전관이 만약 스스로 그 말을 꺼내거든 다만,

“명공(明公)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잘못 천거하셨습니다. 일을 그르쳐 훗날에 명공께 누를 끼칠까 매우 두렵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무신으로서 수령이 되어 나가는 자는 전관의 집을 두루 돌아 하직할 때에 반드시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고, 전관이 짐짓 하찮은 물건을 구하는 척하면 수령은 다시 후한 것으로써 바치기를 청하며, 그가 부임하게 되면 공공연히 뇌물을 실어다 바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니, 염치의 도(道)가 없어짐이 곧 이에 이르렀다. 선배들에게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다.

▣임금을 하직하고 궐문을 나서게 되면 개연(慨然)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다짐해야 한다.

●임금을 하직하고 대궐 문밖에 나와서는 곧 몸을 돌려 대궐을 향하고 마음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여 속으로 말하기를,

“임금께서 천 사람 만 사람의 백성들을 오로지 나 소신(小臣)에게 맡기어 사랑해서 다스리게 하시니, 소신이 그 뜻을 공경히 받들지 아니하면 죽어도 죄가 남으리라.”

하고 몸을 돌이켜 말을 타야 할 것이다.

▣이웃 고을로 관직이 옮겨져 편도(便道)로 부임하게 되는 경우에는 사조(辭朝)하는 예(禮)가 없다.

 

제4조 계행(啓行) : 부임의 행차

▣부임하는 길에 있어서는 또한 정중하고 화평하며 간결하고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하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

●우리나라 풍속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여 많은 추종들이 벼슬아치를 옹위(擁衛)하고 잡된 소리를 어지러이 발하여 백성이 바라보기에 엄숙하고 장중한 기상이 없어 보인다. 무릇 근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이런 소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성을 위하여 수령이 된 자는 비록 말을 타고 있더라도 마땅히 지혜를 짜내고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에게 편의한 정사(政事)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결같이 들뜨기만 하면 어찌 침착하고 세밀한 생각이 나올 수 있겠는가?

▣지나가는 길에 미신으로 기휘(忌諱)하는 것이 있어 정로(正路)를 버리고 먼 길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면 정로로 지나감으로써 사특하고 괴이한 말을 타파해야 한다.

▣공청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하거나 아전들이 금기(禁忌)를 고하더라도 마땅히 아울러 구애받지 말고 현혹된 습속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지나다가 들르는 관부(官府)에서는 마땅히 선배 수령들을 좇아서 다스리는 이치를 깊이 강구할 것이고 해학(諧謔)으로 밤을 지새워서는 안 된다.

▣부임 전 하룻밤은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한다.

 

제5조 상관(上官) : 관리가 임지에 부임하는 것

▣부임할 때에 날을 받을 것이 없고 비가 오면 개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매양 보면, 신관(新官)이 이미 가까운 곳에 당도하여서 혹은 하루에 겨우 한 역참(驛站)만 가기도 하고, 혹은 종일 지체해서 길일을 기다리기도 한다. 읍(邑)에 남아 있는 이속(吏屬)들은 수군수군 비웃으며 그의 슬기롭지 못함을 추측하게 될 것이요, 부임 행차를 따르는 관속들은 집 생각에 마음이 초조한데 앉아서 노자〔盤纒〕만 소비하므로, 모두들 그 곤란을 원망할 것이다. 길일(吉日)이 도리어 원망을 당해내지 못하니 필경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다만 부임하는 날 비바람이 치고 일기가 흐리면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명한 날씨를 잠깐 기다림이 좋을 것이다.

기치(旗幟)는 폐단이 있으므로, 다만 영기(令旗) 두 쌍만 쓰고 - 위의 제배조(除拜條)에 나와 있다. - 그 나머지 관속들의 영접하는 절차는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

고을의 경계에 들어서면 말을 달리지 말도록 단속하고, 길가에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을 금하지 말 것이며, 읍에 들어서면 더욱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무겁게 보이는 방법이다.

말 위에서는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몸을 비스듬히 하지 말고, 의관을 엄숙하게 정제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장엄하게 보이는 방법이다.

▣이에 부임해서 관속들의 참알(參謁)을 받는다.

좌수(座首)를 불러 앉히고 이렇게 말한다.

“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출관(出官)까지 기다리되, - 부임한 지 3일 만에 출관(出官)한다. - 만일 시급한 공사(公事)가 있으면 비록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구애치 말고 아뢰어도 좋다.”

공청이 굉장하고 화려하더라도 좋다는 말을 하지 말며, 공청이 퇴락하였더라도 누추하다는 말을 하지 말고, 좌우의 온갖 기물들이 아름답거나 추하더라도 또한 입을 열지 말고 일체 침묵을 지키어, 눈은 마치 보이지 않고 입은 마치 말을 못하는 것 같이 해서 숙연히 지껄이지 아니하여 부중(府中)이 물을 끼얹은 듯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일찍 조례(朝禮)를 행하는 것이 옛날의 예법이다. 군현이 작더라도 조례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매양 보면, 수령들이 기거(起居)하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해가 세 발이나 떠오르도록 깊이 잠들어 있고, 아전이나 장교 등 여러 일을 맡은 자들이 문밖에 모여서 느릅나무ㆍ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성거리고 있으며, 송사하러 온 백성들이 머물러서 드디어 하루 품을 버리게 된다. 온갖 사무가 지체되며 만사가 엉망이 되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혹 너무 일찍 일어나도 아전들이 괴롭게 여긴다. 비나 눈으로 땅이 질척거리면 참알(參謁)을 생략하도록 한다.

▣참알하고 물러가면 묵연히 단좌해서 백성을 다스릴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너그럽고 엄숙하고 간결하고 치밀하게 규모를 미리 정하되, 오직 시의(時宜)에 알맞도록 할 것이며 굳게 스스로 지켜 나가도록 해야 한다.

●《치현결(治縣訣)》에,

“군자가 백성을 대할 적에 먼저 나의 성품이 편벽된 곳을 찾아 바로잡아야 한다. 유약한 것은 강하도록 고치고, 게으른 것은 부지런하도록 고치고, 강한 데 치우친 것은 관대하도록 고치고, 원만한 데 치우친 것은 위맹(威猛)하도록 고쳐야 한다.”

▣그 이튿날 향교(鄕校)에 나아가 선성(先聖)에게 알현(謁見)하고 이어 사직단(社稷壇)으로 가서 봉심(奉審)하되 오직 공손히 행해야 한다.

 

제6조 이사(莅事) : 수령이 부임하여 실무를 맡아보는 일

▣이튿날 새벽에 개좌(開坐)하여 정사에 임(臨)한다.

●혹 의심스러운 것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수리(首吏)와 담당 아전을 불러 자세히 묻고 조사하여 그 본말을 분명히 안 뒤에 성첩하는 것이 옳다. 매양 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일을 잘 아는 체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어름어름 의심스러운 것을 그냥 덮어둔 채, 다만 문서 끝에 서명하는 것만 착실히 하다가 아전들의 술수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

혹 본읍의 잘못된 전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그것이 전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보고할 기한이 급박하지 않으면 책상에 그냥 두어 성첩하지 말고 개혁할 것을 도모할 것이요, 그 기한이 급박하고 혹 일의 단서가 복잡하여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은 일단 명령을 내려놓고 천천히 개혁할 것을 도모해야 한다.

▣이날로 사족(士族)과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민폐되는 것을 묻고 민간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해야 한다.

▣이날에 백성들의 소장(訴狀)이 들어오면 그 판결하는 제사(題詞)를 간결하게 해야 한다.

●《치현결(治縣訣)》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성들이 와서 호소하는 것은 억울함이 있기 때문이다. 군포(軍布)의 일로 호소하면 나의 군정(軍政)이 잘못된 것이요, 전세(田税) 문제로 호소가 있으면 나의 전정(田政)이 잘못된 것이요, 요역(徭役)의 일로 호소가 있으면 이것은 내가 부역을 공평하게 매기지 못한 것이요, 창곡(倉穀)의 일로 호소가 있으면 내가 재무(財務)의 관리를 잘못한 것이요, 침학(侵虐)을 당하고 호소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토호(土豪)들을 누르지 못한 것이요, 백성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호소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아전들을 단속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호소를 보고서 내가 잘 다스리는지, 잘못 다스리는지 알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그 큰 강령(綱領)을 바로잡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억울한 일이 없어질 것이니 어찌 소장이 분분하게 들어오겠는가?”

▣이날 영을 내려서 백성들과 몇 가지 일로써 약속하고 관아 바깥 문설주에 특별히 북 하나를 걸어 둔다.

●“행현령(行縣令)이 알리고자 하는 일.

관가와 백성 사이에 마땅히 약속이 있어야 하니 다음에 기록하는 조항을 일일이 깨우치고 살펴서 이에 의하여 준행하되 어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라.”

▣관청의 일은 기한이 있는데, 기한을 믿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명령을 희롱하는 것이니, 기한은 믿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책력(册曆)에 맞추어서 작은 책자를 만들고 모든 일의 정해진 기한을 기록하여 비망을 삼아야 한다.

▣다음날 노리(老吏)를 불러서 화공(畵工)을 모아 본현(本縣)의 사경도(四境圖)를 그려 관아의 벽에 걸어 두도록 한다.

우리나라의 지도는 지형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방형(方形)으로 만들어서 쓸모가 없다. 모름지기 먼저 경위선(經緯線)을 그어놓고 1칸을 10리로 하여 동쪽으로 1백 리 거리에 있는 것이면 지도상에는 동쪽 10칸에 있게 하고, 서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것이면 지도상에는 1칸 서쪽에 있게 그려야 하며, 현의 관아가 꼭 중앙에 그려져 있게 할 필요는 없다. 1백 호가 있는 마을은 호수를 다 그려 넣을 수 없으나 집이 조밀하게 있는 모양을 그려서 큰 마을임을 알게 하면 된다. 한 집 두 집이 산골짜기에 끼여 있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게 하여야 한다. 기와집과 큰 집도 또한 각각 표시하여 토호(土豪)의 집임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인장(印章)의 글씨는 마멸되어서는 안 되고, 화압(花押 : 수결)은 조잡해서는 안 된다.

▣이날에 나무 인장 몇 개를 새겨 각 면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

●향촌의 풍헌과 약정이 모두 인장이 없다. 그래서 관아에 올라오는 보장(報狀)들이 혹 중간의 위작(僞作)이 많으니, 그 소홀함이 이와 같다. 마땅히 목각으로 인장을 만들어 먹으로 찍고 인주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혹 한 면민들의 회의의 보장에 통용해도 된다. 그러므로 ‘풍헌지인(風憲之印)’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헌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여야 한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 자신을 가다듬는 일) 6조

 

제1조 칙궁(飭躬) : 자기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

▣일상생활에는 절도가 있고, 관대(冠帶)는 단정히 하며, 백성들에게 임할 때에는 장중(莊重)하게 하는 것이 옛사람의 도(道)이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세수하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띠를 띠고 묵묵히 꿇어앉아서 신기(神氣)를 함양(涵養)한다. 얼마쯤 있다가 생각을 정리하여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놓고 먼저 선후의 차례를 결정한다. 제일 먼저 무슨 문서를 처리하며, 다음에는 무슨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다 마음속에 분명히 정해야 한다. 그리고서 제일 먼저 할 일에 대하여 그 선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며, 다음 할 일에 대하여 선처할 법을 생각하되, 힘써 사욕(私慾)을 끊어 버리고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르도록 한다.

▣공사(公事)에 틈이 있으면,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고요히 생각하며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을 헤아려내어 지성으로 잘 되기를 강구해야 한다.

▣많이 말하지도 말고 갑자기 성내지도 말아야 한다.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면 순종하지 않는 백성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윗사람이 되어 너그럽지 아니하고 예를 차리되 공경하지 않으면 그에게 무엇을 보랴.” 하였고, 또 “너그러우면 뭇사람을 얻는다.” 하였다.

▣관부(官府)의 체모는 엄숙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니 수령의 자리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군자가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는 몸가짐을 진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술을 금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가무(歌舞)를 물리치며 공손하고 단엄하기를 대제(大祭) 받들 듯하며, 유흥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히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매지(梅摯)가 소주 지주(韶州知州)로 있을 때 장설(瘴說)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벼슬살이에 다섯 가지 고질적인 병통이 있다. 급히 재촉하고 함부로 거두어들이며 아랫사람에게서 긁어다가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은 조부(租賦)의 병통이요, 엄한 법조문을 함부로 사용하여 선악을 분명하게 못하는 것은 형옥(刑獄)의 병통이요, 밤낮으로 주연을 베풀고 국사를 등한히 하는 것은 음식의 병통이요,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자기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재물의 병통이요, 계집을 많이 골라 음악과 여색을 즐기는 것은 유박(帷薄 : 깊숙한 여자의 거소)의 병통이다.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백성은 원망하고 신(神)은 노하여, 편안하던 자는 반드시 병이 들고 병이 든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벼슬살이하는 자가 이것을 모르고 풍토의 병을 탓하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상산록(象山錄)》에,

술을 즐기는 것은 모두 객기(客氣)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인식하여 청취(淸趣)인 양하지만, 다시 객기를 낳아서 그것이 오랜 습성이 되면 폭음하는 주광(酒狂)이 되어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마시면 주정하는 자, 마시면 말이 많은 자, 마시면 자는 자도 있다. 주정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폐단이 없다고 생각하나, 잔소리나 군소리는 이속들이 괴롭게 여기고, 술에 곯아떨어져 깊이 잠들어 오래 누워 있으면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다. 어찌 미친 듯 소리 지르고 마구 떠들어대며 부당한 형벌과 지나친 곤장질을 해야만 정사에 해를 끼친다고 하겠는가. 수령이 된 자는 술을 끊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한가히 놀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내는 일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니, 단정하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치적(治績)이 이미 이루어지고 뭇사람의 마음도 이미 즐거워하면 풍류(風流)를 꾸며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도 선배들의 성대한 일이었다.

●현령이 절에서 한 번 놀면 중이 평소 소비하는 비용의 거의 반 년분을 쓴다. 일행들이 술ㆍ밥ㆍ담배ㆍ신 등을 으레 토색질하고, 또 만약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연주하며 창우(倡優)들을 시켜서 잡희(雜戱) 놀음을 벌이면 구경 온 남녀들이 모두 중에게 밥을 요구하게 되니 중들이 견뎌내겠는가. 혹시 돈과 쌀을 주어 그 비용을 갚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록 현령의 면전에서 친히 준다고 하더라도 현령이 문 밖만 나서면 이속과 관노(官奴)들이 빼앗아 가버린다. 혹 세미자문(稅米尺文) - 쌀을 받으라는 것을 적은 문권(文券) - 을 주는데, 그래야만 겨우 받게 된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지난해 봄에 내가 작은 배를 타고 가우도(駕牛島) 어촌에 놀러갔는데 마침 현감(縣監)도 배를 타고 만덕사(萬德寺)에 와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내가 어촌에 와서 어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바다에 있던 배가 항구로 들어오면 이속과 군교들이 배 한 척마다 2백 전씩 토색질 해 가고, 고기잡이 통발이 바다 가운데에 수십 군데 있는데 밀물 썰물에 잡히는 고기를 깡그리 빼앗아가되, 모두 현령의 놀이를 핑계로 삼는다고 하였다. 아, 현령이 어찌 알겠는가. 내가 석양에 작은 노를 저어 갈대와 버들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산 중턱의 절간을 바라다보니 붉고 푸른 옷이 어울려 있고, 피리ㆍ장구 소리가 한창 울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촌 백성들이 눈을 흘겨 저주하며 욕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 백성들의 윗사람 되기란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하였다.

▣추종(騶從)을 간략하게 하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민정(民情)을 물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당(政堂)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면 이는 맑은 선비라 할 수 있다.

▣만약 시(詩)나 읊조리고 바둑이나 두면서 정사를 아래 아전들에게만 맡겨 두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성종조(成宗朝)에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이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여 산음 현감(山陰縣監)이 되었다. 영남(嶺南)의 방백(方伯)이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는,

“나의 친구 유호인이 산음 현감으로 임명되었으니 경(卿)은 그를 두둔(斗頓) - 부호(扶護)해 준다는 뜻이다. - 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그 방백은 마침내 그가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조리고 있다 하여 파면시켰다.

▣전례(前例)에 따라 일을 줄이고 대체(大體)를 힘써 지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풍속이 맑고 순후하며 지위도 높고 명망도 두터운 사람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제2조 청심(淸心) : 청렴한 마음가짐

▣청렴은 수령의 본무로,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모든 덕(德)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상산록(象山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에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은 봉급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먹고 남는 것이 있더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떠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는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최하로는 무릇 이미 규례(規例)가 된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규례가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며, 향임(鄕任)의 자리를 팔지 않고, 재감(災減)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팔아먹지 않으며, 세(稅)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이른바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나쁜 짓을 갖추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두가 그러하다. 최상이 되는 것은 본디 좋지만,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다음이라도 좋다. 이른바 최하의 것은 옛날에는 반드시 팽형(烹刑)을 당하였을 것이니, 무릇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않은 것은 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인자(仁者)는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하였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청렴한 자는 청렴함을 편안히 여기고 슬기로운 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

하겠다. 왜냐하면, 재물이란 우리 사람들이 모두 크게 욕심내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 중에는 재물보다도 더 큰 것이 있으므로 재물을 버리고 취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비록 재물을 얻는 데 뜻을 둔다 하더라도 염리(廉吏)가 되어야 할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매양 보면, 지벌(地閥)이 드러나고 재망(才望)이 뛰어난 자가 겨우 수백 꾸러미의 돈에 빠져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 가서 10년 동안이나 쓰이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비록 세력이 높고 운이 좋아서 형벌이나 극형(極刑)은 면하게 되는 수가 있지만, 여론은 비루하게 여겨 깨끗한 명망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문신(文臣)이 이에 관련되어 관각(館閣)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무신(武臣)이 이에 관련되어 장수(將帥)가 되지 못한 자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지혜가 원대하고 생각이 깊은 자는 그 욕심이 크기 때문에 염리(廉吏)가 되고, 지혜가 짧고 생각이 얕은 자는 그 욕심이 작기 때문에 탐리(貪吏)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생각이 여기에 이를 수 있다면 아마도 청렴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수령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여 마을을 지날 때는 더럽히고 욕하는 소리가 드높을 것이니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정선(鄭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관원이 한 도적을 심문하면서 ‘네가 도둑질하던 상황을 말해 보아라.’ 하니, 도적은 짐짓 딴전을 피우면서 ‘무엇을 도적이라 합니까?’ 하자, 관원이 ‘네가 도적이면서 그것을 모르느냐. 궤짝을 열고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적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자 도적이 웃으면서 ‘만일 공(公)의 말대로라면 내가 어찌 도적일 수 있겠습니까? 공과 같은 관원이 참으로 도적입니다. 유생(儒生)이 첩괄(帖括)을 외면서 일찍이 고금을 상고하거나 천인(天人)의 이치를 연구하거나 국가의 경제(經濟)와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밤낮으로 권력을 손에 쥐고 일확천금(一攫千金)할 것을 바라며, 아비와 스승이 가르치는 것이나 벗들에게서 배우는 것들도 도둑질을 익히는 것뿐입니다.

관복 차림에 홀〔手板〕을 쥐고 정당(政堂)에 높이 앉아 있으면 아전들이 옆에 늘어서고 구종(驅從)들이 아래에서 옹위하니 존엄함이 마치 천제(天帝)와도 같습니다. 벼슬은 이끝으로부터 나오고 정사(政事)는 뇌물로 이루어집니다. 원섭(原渉)ㆍ곽해(郭解)같은 큰 토호(土豪)가 대낮에 살인하더라도 뇌물이 한번 들어가면 법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며, 황금에 권력이 있으니 백일(白曰)도 빛을 잃어, 다시 풀려나와서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나다니고 있습니다. 마을의 천민(賤民)들은 벌을 돈으로 속죄하여 더욱 가난의 고초를 겪어서 머리털은 흘어지고 살갗은 깎여 집을 유지하지 못하고 처자들을 팔게 되어 바다에 투신하거나 구렁에 떨어져도 수령은 이를 근심하고 살필 줄 모르니 신(神)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합니다. 그러나 돈의 신령스러움이 하늘까지 통해서 명관(名官)이라는 칭찬이 자자합니다. 큰 저택은 구름 같이 이어 있고 음악 소리는 땅을 울리며 종들은 벌 떼 같고 기첩(妓妾)은 방에 가득하니, 이것이 진정 천하의 큰 도둑입니다.

땅을 파고 지붕을 뚫어 남의 돈 한 푼을 훔치면 곧 도둑으로 논죄(論罪)하고, 관원들은 높이 앉아 그저 팔짱만 끼고 있으면서 거만(鉅萬)의 돈을 긁어모으는데도 좋은 관원이란 칭찬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큰 도둑은 불문에 부치고 민간의 거지들과 좀도둑만 문죄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에 그 관원이 즉시 이 도둑을 놓아 주었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누가 비밀히 하지 않으랴만 밤중에 한 일이 아침이면 드러난다.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맺어졌으니 이미 사정(私情)이 행해진 것이다.

▣청렴한 관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지나는 곳은 산림(山林)과 천석(泉石)도 모두 맑은 빛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무릇 본읍(本邑)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반드시 고을에 폐단이 될 것이니,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격(矯激 : 정직을 가장하는 행동)한 행동이나 각박(刻迫)한 정사(政事)는 인정(人情)에 맞지 않으므로 군자가 내치는 바이니 취할 것이 못 된다.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상관(上官)이 탐욕스러우면 백성들은 오히려 살 길이 있으나, 청렴하고 각박하면 바로 살 길이 끊어진다.’라고 하였다. 고금을 통해서 청리(淸吏)의 자손이 흔히 떨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각박함 때문이다.”

▣청렴하면서도 치밀하지 못하여 재물을 내놓되 실효가 없으면 또한 일컬을 것이 못 된다.

▣무릇 민간의 물건을 사들일 때에 그 관식(官式)이 너무 헐한 것은 시가(時價)로 사들여야 한다.

무릇 전부터 내려오는 그릇된 관례는 굳은 결심으로 고치도록 하고, 혹 고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자신은 범하지 말 것이다.

●고려 김지석(金之錫)은 고종(高宗) 말에 제주부사(濟州副使)가 되었다. 제주도 풍속에 남자 나이 15세 이상은 콩 1곡(斛)씩을 바치고 아문(衙門)의 아전 수백 명이 각각 해마다 말 1필씩을 바치면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이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수재(守宰)가 되면 비록 가난한 자라도 다 치부하게 되었다. 정기(井奇)ㆍ이저(李著) 두 사람이 이 주(州)의 수령으로 있다가 모두 장죄(贓罪)로 파면되었다. 김지석이 제주에 부임하자 바로 콩과 말〔馬〕을 공바치는 제도를 없애고 청렴한 아전 10명을 골라 아문의 아전으로 삼으니 정사가 물처럼 맑아지고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고 복종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세봉(慶世封)이란 사람이 제주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또한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이,

“전에는 세봉(世封)이 있었고 뒤에는 지석(之錫)이 있었다.”

하였다.

▣무릇 포목과 비단을 사들일 경우에 인첩(印帖)이 있어야 한다.

▣무릇 날마다 쓰는 장부는 자세히 볼 것이 아니니 끝에 서명을 빨리 해야 한다.

수령의 생일에는 아전과 군교(軍校) 등 제청(諸廳)이 혹 성찬(盛饌)을 올리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제청(諸廳)에서 바치는 성찬은 모두 백성들의 재력과 노력에서 나온 것이니, 계방(契房)의 돈을 거두기도 하고 보솔(保率)의 돈을 거두기도 하는데, 이것을 빙자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가혹하게 거두어들인다. 어민들의 물고기를 빼앗고 민촌의 개를 때려잡으며, 밀가루와 기름은 절에서 가져 오고 주발과 접시는 질그릇집에서 가져 오니, 이는 원한을 사는 물건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혹 유기(鍮器) 1벌, 세포(細布) 몇 끝을 헌수(獻壽)를 위하여 바치는 경우에는 더욱 받아서는 안 된다.

수령의 부모 생신에 바치는 물건은 더군다나 받아서는 안 된다.

▣무릇 받지 않고 내어놓는 것이 있더라도 공공연히 말하지 말고 자랑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말고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말며, 전임자(前任者)의 허물도 말하지 말라.

청렴한 자는 은혜롭게 용서하는 일이 적으니 사람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 자기는 잘하려고 애쓰고 남을 책(責)하는 일이 적은 것이 좋다. 청탁이 행해지지 않으면 청렴하다 할 수 있다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드러나면 또한 인생의 지극한 영화이다.

 

 

제3조 제가(齊家) :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

▣몸을 닦은 뒤에 집을 다스리고, 집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림은 천하의 공통된 원칙이다. 고을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제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국법에 어머니가 아들의 임지에 가서 봉양을 받으면 나라에서 그 비용을 대 주고, 아버지의 경우에는 그 비용을 회계해 주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아들의 임지에 가서 있으면 친구들은 춘부(春府)라 부르고, 이노(吏奴)들은 대감(大監)이라 부른다. 대감의 나이 60이 넘어 노쇠해져서 봉양을 받아야 할 처지이면 부득이 따라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록 효자가 간청하더라도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

만약 부득이 따라가야 할 처지라면 내사(內舍) - 속칭 내아(內衙)라 한다. - 에 따뜻한 방 한 간을 택하여 깊이 거처하면서 병을 조리하도록 하고, 외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예(禮)에 맞는 일이다. 매양 보면, 춘부(春府)들이 흔히 예를 모르고 외사(外舍)에 나가 앉아서 아전들을 꾸짖고 종들을 호령하며, 기생들을 희롱하고 손님들을 끌어들이며, 심지어는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팔아서 관정(官政)을 어지럽히므로 저주하는 자가 성안에 가득차고 비방하는 자가 경내에 그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면 부모의 자애(慈愛)와 아들의 효도가 다 상하게 되며 공과 사가 모두 병들게 되니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청렴한 선비가 수령으로 나갈 때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 하였는데, 가족은 처자를 두고 이른 말이다.

▣형제간에 서로 생각이 날 때는 가끔 왕래할 것이나 오래 묵어서는 안 된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더라도 부득불 잠시 이별해야 할 것이다. 아우는 그래도 따라가도 좋으나 형은 더욱 안 된다.

내가 본 바로는 수령의 형이 아우를 따라가서 관사(官舍)에 있게 되면, 이노(吏奴)들이 그를 관백(官伯)이라 부르는데, 왜국의 천황(天皇)은 자리만 지키고 관백(關白)이 집권하는 것이 마치 현령(縣令)은 자리만 지키고 관백(官伯)이 일을 다 하는 것과 같으므로 이와 같이 기롱한 것이다.

▣빈종(賓從)이 많더라도 따뜻한 말로 작별하고 종이 많더라도 양순한 자를 고를 것이요,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행장을 아주 검소하게 해야 한.

의복의 사치는 뭇사람이 꺼리는 바이고 귀신이 질투하는 바이니 복을 꺾는 길이다.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는 것은 재화(財貨)를 소비하고 물자를 탕진하는 것이니 재앙을 불러들이는 길이다.

청탁이 행해지지 않고 뇌물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이것이 집을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살 때에 가격을 따지지 않고 위력으로 사람을 부리지 않으면 규문(閨門)이 존엄해질 것이다.

▣집안에 애첩(愛妾)을 두면 부인은 질투하기 마련이다. 행동이 한번 잘못되면 소문이 사방에 퍼지니 일찍 부정한 정욕을 끊어 후회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의 교훈이 있고 처자들이 계율을 지키면 이를 일러 법도 있는 집안이라 할 수 있고 백성들도 이를 본받을 것이다.

 

 

제4조 병객(屛客) : 지방 관청에 있는 책객(册客)ㆍ겸인(傔人) 등 객인(客人)과 외부로부터의 청탁을 물리침

▣무릇 관부(官府)에 책객(册客)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 오직 서기(書記) 한 사람이 겸임하여 안 일을 보살피도록 해야 한다.

▣무릇 본 고을 백성과 이웃 고을 사람들을 인접(引接)해서는 안 된다. 무릇 관부(官府)는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

▣친척이나 친구가 관내(管內)에 많이 살면 단단히 약속하여 의심하거나 헐뜯는 일이 없게 하고 서로 좋은 정을 보존하도록 해야 한다.

▣무릇 조정의 고관이 사서(私書)를 보내어 관절(關節)로 청탁하는 것은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친구와 궁한 친척이 먼 데서 찾아오는 경우에는 곧 영접하여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야 한다.

▣혼금(閽禁 ; 관청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은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제5조 절용(節用) : 씀씀이를 절약함

▣수령 노릇을 잘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애로워야 하고, 자애로우려면 반드시 청렴해야 하며, 청렴하려면 반드시 절약해야 한다. 절용은 수령이 맨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자는 한 고을을 얻기만 하면 방자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서 절제(節制)하는 바가 없다. 닥치는 대로 함부로 쓰니 빚이 많아지고 따라서 반드시 탐욕하기 마련이다. 탐욕하면 아전들과 공모하고 아전들과 공모하면 그 이익을 나누어 먹으며 그 이익을 나누어 먹으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짠다. 그러므로 절용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맨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절(節)이란 한계를 두어 억제하는 것이다. 한계를 두어 억제하는 데는 반드시 법식(法式)이 있어야 한다. 법식은 절용의 근본이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함을 법식으로 삼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법식을 넘어서면 지출에 절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제사(祭祀)와 빈객(賓客)은 비록 사사(私事)이지만 일정한 법식이 있어야 한다. 피폐하고 작은 고을에는 법식보다 줄여야 한다.

▣무릇 내사(內舍)에 보내는 물건은 다 법식을 정하되 한 달에 쓰이는 것은 모두 초하룻날 바치게 해야 한다.

▣공적인 손을 대접하는 데도 먼저 법식을 정하고 기일 전에 물건을 마련하여 예리(禮吏)에게 주며 비록 남는 것이 생기더라도 도로 찾지 말아야 한다.

●...설령 남은 술이나 식어 버린 고기구이가 남았더라도 수고한 사람의 차지이니 넘겨다 보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아전들이 모든 물건을 받아 자기 것처럼 여겨서 씀씀이를 절약하여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손을 보내는 날에도 다시 장부를 조사하지 말고 남은 물건이 있으면 모두 아전의 집으로 가져가게 하면 관(官)에는 낭비가 없고 아전에게는 혜택이 되니 이는 좋은 방법이다.

▣무릇 아전과 노복들이 바치는 물건으로서 회계가 없는 것은 더욱 절약해야 한다.

▣사용(私用)의 절약은 보통사람도 할 수 있지만 공고(公庫)를 절약하는 이는 드물다. 공물(公物)을 사물(私物)처럼 보아야 어진 수령인 것이다.

▣갈려 돌아가는 날에는 반드시 기부(記付)가 있어야 한다. 기부하는 액수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천지가 물(物)을 낳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누려서 쓰게 한 것이니, 한 물건이라도 버림이 없게 해야 재물을 잘 쓴다 할 수 있다.

 

 

제6조 낙시(樂施) : 은혜 베풀기를 즐거워하는 일

▣절약만 하고 쓰지 않으면 친척이 멀어지니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덕(德)을 심는 근본이다.

●...내가 귀양살이할 때 매양 보면, 수령이 나 같은 사람을 늘 가엾게 생각하여 도움을 주는 이는 그의 의복을 보면 으레 검소하였고, 의복이 화려하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면서 음란하고 방탕한 것을 즐기는 자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가난한 친구나 궁한 친척들은 힘을 헤아려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 내 녹봉에 남는 것이 있어야 남에게 베풀 수 있고, 관가의 재물을 빼내어 사인(私人)을 돌보아 주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내 녹봉에 남는 것이 있어야 남에게 베풀 수 있고, 관가의 재물을 빼내어 사인(私人)을 돌보아 주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관에서 받는 녹봉을 절약하여 그 지방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자기 농토의 수입으로 친척들을 돌보아 주면 원망이 없을 것이다.

▣귀양살이하는 이가 객지에서 곤궁하면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도 어진 사람의 할 일이다.

●...김영구(金永耇)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되었는데 그때 부처(付處) 이하 모든 죄수에게 돈으로 속죄(贖罪)하게 하는 영이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수(金睟)가 만경(萬頃)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가난하여 속전(贖錢)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김영구는 김수의 집안과 본래 좋게 지냈으므로 노비 7명과 한강가의 석 섬지기 전지를 속전으로 주고 고을 백성에게는 누를 끼치지 않았다.

▣전쟁 때 피란하여 떠돌아다니며 임시로 붙여사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보호해 주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할 일이다.

● 강수곤(姜秀崑)이 고창 현감(高敞縣監)으로 있을 때 바야흐로 전쟁 중에 국내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 공은 계획을 잘 세우고 마련을 잘하였는데, 호남ㆍ호서 지방의 유랑민이 1천여 명이 되는 데다 북방의 친척과 친구로서 기한(飢寒) 때문에 식객이 되는 사람이 날마다 1천 명에 이르렀다. 공은 자신의 생활을 박하게 하면서도 남을 도와주어 그때 살린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권문(權門)과 세가(勢家)는 후히 섬겨서는 안 된다.

●권문에 선물 보내는 것을 후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은혜를 입었거나 혹시 의뢰하여 서로 좋게 지내는 사이에는 때때로 선물을 보내 주되 먹는 것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아야 하며 그 밖에 초피(貂皮)ㆍ인삼(人蔘)ㆍ비단 같은 값진 물품들을 바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청렴하고 맑고 식견이 있는 재상은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비루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며 혹 임금께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기도 할 것이다. 이는 재물을 손상하고 자신을 망치는 것이니 위험한 일이다.

만일 그 재상이 뇌물을 받기 좋아하여 이로 말미암아 끌어올려 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서 패망할 것이요, 공론도 자신을 가리켜 그 사람의 사인(私人)이라고 하여, 크게는 연루자가 되고 작게는 앞길이 막히게 될 것은 필연한 이치이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 일을 무엇 때문에 굳이 하겠는가.

 

 

 

 

목민심서 봉공(奉公 :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웃

 

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봉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 6조

 

제1조 선화(宣化) : 선화란 임금의 교화를 편다는 말.

▣군수(郡守)ㆍ현령(縣令)은 본래 은택을 입히어 덕화(德化)를 펴는 것인데, 요즈음은 감사(監司)만이 이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살펴보건대, 덕화를 펴고 은택을 입히는 것이 수령의 책임인데도 오늘날은 감사의 정청(政廳)에만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현판을 써 붙였다. 수령들은 평소에 이 현판을 익히 보고 마음속으로 덕화를 펴고 은택을 입히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며, 우리들은 부세(賦稅)를 독촉하여 거두어들여서, 상사(上司)의 꾸지람만 면하면 그뿐이라고 여긴다. 슬프다! 어찌 고루하지 않은가.

▣윤음(綸音 : 임금의 말)이 현에 도착하면 백성들을 모아놓고 선유(宣諭)하여 국가의 은덕을 알게 하여야 한다.

●내가 영남(嶺南) 지방으로 귀양 갔을 때 보니, 쓸쓸하고 작은 마을에도 윤음각(綸音閣)이 있었다. 한 칸 집인데, 북쪽 담벽에다 긴 판자를 가로 걸어 놓고, 윤음이 있을 때마다 판자 위에 붙여 놓고, 부로(父老)들이 그 앞에 늘어서서 절을 한다. 국가에 경사가 있어도 늘어서서 절을 하고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어도 늘어서서 절을 한다. 드디어 그 앞에서 망곡례(望哭禮)도 행하고, 중요한 의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아래에서 모인다. 이는 천하의 아름다운 풍속이니, 이 풍속은 제도(諸道)에서 통용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교문(敎文 : 임금이 내리는 유시문)이나 사문(赦文 죄수를 석방할 때 임금이 내리는 글)이 현에 도착하면 또한 사실의 요점을 따서 백성들에게 선유(宣諭)하여 제각기 다 잘 알도록 하여야 한다.

▣무릇 망하례(望賀禮)는 마땅히 엄숙하고 조용하여 경건을 다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해야 한다.

▣망위례(望慰禮)는 일체 의주(儀注)를 따라야 하나, 고례(古禮)는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기일(忌日)에는 공무를 보지 않고 형벌도 집행하지 않고 음악도 베풀지 않기를 모두 법례대로 해야 한다.

●요즈음 수령들은 나라의 기일에도 연회를 베풀고 풍악을 울려서, 아전과 백성이 예에 어긋남을 비방하는 소리가 경내(境內)에 떠들썩하건만, 수령만은 듣지 못한 척하니, 이는 삼가야 할 일이다.

▣내려온 조정의 법령을 백성들이 싫어하여 봉행할 수 없으면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려야 한다.

▣새서(璽書)가 멀리 내려오는 것은 수령의 영광이요, 꾸짖는 유시(諭示)가 때때로 오는 것은 수령의 두려움이다.

●송 태종(宋太宗)이 각 지방에 계비(戒碑)를 세우는데, 그 비문(碑文)에,

네 녹봉은 백성들의 고혈이다. 백성을 학대하기는 쉽지만, 하늘은 속이기 어렵다.”

하였다.

 

 

제2조 수법(守法) : 수법이란 법을 지키는 일

▣법이란 임금의 명령이다. 법을 지키지 않음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 남의 신하로서 감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책상 위에는 《대명률(大明律)》 한 부와 《대전통편(大典通編)》 한 부를 놓아두고, 항상 보아서 조례(條例)를 갖추 알도록 하며, 그것으로 법을 지키고, 그것으로 영을 행하고, 그것으로 송사를 결단하며, 그것으로 사무를 처리하되, 무릇 법의 조례에 금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읍의 전례가 되어 오래도록 내려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국법에서 뚜렷이 어긋난 것은 범해서는 안 된다.

▣법을 굳게 지켜서, 굽히지도 흔들리지도 않으면 인욕(人慾)이 물러가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게 될 것이다.

▣무릇 국법이 금하는 것과 형률(刑律)에 실려 있는 것은 몹시 두려워하며 감히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일체 법만 지킨다면 때에 따라서는 너무 구애받게 된다. 다소 융통성을 두더라도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옛사람들도 변통하여 처리하는 수가 있었다. 요컨대, 자기 마음이 천리(天理)의 공정에서 나왔다면 법이라고 해서 고집스럽게 지킬 필요는 없으며 자기 마음이 인욕(人慾)의 사정에서 나왔다면 조금이라도 법을 범해서는 안 된다.

법을 범하고 죄를 받는 날,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법을 범했더라도 반드시 백성에게 이롭고 편한 일일 것이니, 그런 경우에는 다소 융통성이 있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이익에 유혹되지 않고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도리이다. 비록 상사가 독촉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음이 있어야 한다.

▣해가 없는 법은 지키어 변경하지 말고, 사리에 맞는 관례는 따라서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극선(趙克善)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반드시 동틀 무렵에 일찍 일어나서 관대(冠帶)를 차리고 일을 보았으며 어지럽게 다시 뜯어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하기를,

무릇 일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점차로 다루어야 한다. 도임하자마자 일체의 폐단을 제거해 놓고 그 뒤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처음만 있고 끝이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마땅히 먼저 지나친 것만을 제거한 후 점차로 완전히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생각하건대, 옛사람들이 시끄럽게 뜯어고치는 것을 경계한 것은 지킬 만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읍례(邑例)란 한 고을의 법이다. 그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 때에는 수정하여 이를 지켜야 한다.

 

 

제3조 예제(禮際) : 예제란 예의로 상대하는 것

▣예의로 교제함은 군자가 신중히 여기는 바이니, 공손함이 예의에 알맞으면 치욕을 면할 것이다.

●존비(尊卑)에는 등급이 있고 상하(上下)에는 표시가 있는 것이 옛날의 예법이다. 수레와 복장이 서로 제도가 다르고 깃발의 장식에 그 문채를 다르게 하는 것은 그 분수를 밝히는 것이다. 자신이 하관(下官)이면 본분을 삼가 지키어 상관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나는 문관이요 상대는 무관일지라도 비교해서 괄시해서는 안 되며, 나는 혁혁하고 상대는 한미할지라도 교만을 부려서는 안 되며, 나는 잘났고 그는 어리석다 해도 말해서는 안 되며, 나는 늙고 그는 젊다 해도 한탄해서는 안 된다.

▣감사(監司)는 법을 집행하는 관리이니, 비록 오랜 정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예를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상사(上司)가 아전과 군교(軍校)들을 추문(推問)하여 다스릴 때는, 일이 비록 사리에 어긋나더라도 순종하고 어기지 않는 것이 좋다.

●죄가 본읍에 있어서 상사가 추문(推問)하여 다스릴 때는 본디 논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혹시 생트집을 잡아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을 덮어 씌우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그의 아랫자리에 있으니 그저 순종할 따름이다. 만일 상사의 뜻이 과오에서 나왔고 악한 마음이 있은 것이 아닌 경우에는, 내가 죄인을 호송하는 문서에 그 사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관대한 처분을 빌어서, 내 아전과 군교가 억울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충후(忠厚)하고 겸손한 도리이다.

만약 감사의 본의가 해치기 위한 것이어서 말로 다툴 문제가 아닌 것은 공형 문장(公兄文狀)으로 죄수들을 호송하고, 따라서 사직서를 써서 같이 올리도록 해야 한다. - 사직서에는 “신병이 갑자기 중하여 책임을 다할 수 없다.” 한다. - 감사가 사과하면 그대로 힘써 일을 보고 만약 끝내 무례하면 세 번 계속해서 사직서를 내어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감사가 만일 겉으로는 관용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아직도 노여움을 품고, 고과(考課) 때에 하고(下考)에 두려는 자에게는, 즉시 인부(印符)를 끌러서 예향(禮鄕)ㆍ예리(禮吏)를 시켜 감영(監營)으로 가서 바치도록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올 일이지, 구차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스스로 욕됨을 자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사가 명령한 것이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가 되는 것이면 꿋꿋하게 굽히지 말고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박환(朴煥 1584-1671)이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있을 때, 청(淸)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사람 - 한족(漢族)을 말한다. - 을 찾아 보내도록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도 감히 거부하지 못하였다. 각 군읍에 영이 내리니, 각 군읍이 떨고 놀라 다 샅샅이 찾아내지 못하면 중한 견책을 당할까 걱정하여 찾아내느라고 어수선하였다. 그는 탄식하기를,

“관직을 그만둘 수는 있어도 이 일만은 할 수 없다.”

하고, 우리 현에는 찾아낼 한인(漢人)이 없다고 신보(申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현에 사는 한인만은 태연히 지낼 수 있었다. 보고 듣는 사람마다 그의 의리에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전관(前官)이 흠이 있으면 덮어주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전관이 죄가 있으면 도와서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전관이 공금〔公貨〕에 손을 댔거나 창곡(倉穀)을 축내고 혹 허위 문서를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을 들추어 내지 말고 모름지기 기한을 정하여 배상하도록 하되, 기한이 지나도 배상하지 못하거든 상사와 의논하도록 한다.

혹 전관이 세력있는 집안이나 호족에 속해서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일을 어그러지게 처리하면서 뒷일은 걱정하지 않는 자일 경우, 내가 그를 대응하는 데에는 강경하고 엄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이 때문에 죄를 입어서 평생토록 불우하게 되더라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제4조 문보(文報) : 문보는 제반 공문서

▣공이문첩(公移文牒)은 마땅히 정밀하게 생각하여 손수 써야지 아전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인명(人命)에 관한 보장(報狀)은 고치고 지우는 것을 염려해야 하고, 도적에 관한 보장은 그 봉함(封緘)을 비밀히 해야 할 것이다.

▣농형(農形)의 보장(報狀)과 우택(雨澤)의 보장에는 완급(緩急)이 있는데, 요는 모두 제때를 맞추어야 일이 없을 것이다.

●오래 가물다가 비가 내리면, 그 보고서는 반드시 시각을 다투게 된다. 만일 5일이나 10일마다 농형을 으레 보고하는 것은 혹 형식만 갖추는 데 가깝다. 무릇 변방 고을이어서 상사(上司)가 있는 곳과 멀 때에는 이웃 고을편에 부쳐도 해로울 것이 없다. 감영과의 거리가 수백 리나 되면 노비(路費)가 적지 않으니, 이웃 고을편에 부쳐서 비용을 절약하고자 하는 것은 상정(常情)인데, 어찌 반드시 금하겠는가? 이런 경우는 하루 전에 문첩(文牒)을 만들어야 기한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마감(磨勘)의 보장(報狀)은 잘못된 관례는 바로잡아야 하고 연분(年分)의 보장은 부정의 사단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환곡(還穀)을 마감(磨勘)하는 서장은 그 지출하고 남은 숫자와, 전년도의 남은 것과 신년도의 모곡(耗穀)의 숫자를 나열하여 회계(會計)한 것이니 착잡하여 분명하지 않으면 이를 격식대로 바로잡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의혹을 갖지 않도록 해 놓아야 할 것이다. 연분(年分)은 대개의 보장(報狀)의 경우 요긴한 것은 모두 8~9줄에 지나지 않는다. 전답의 등급을 살피거나 미두(米豆)의 세를 계산해서 한데 묶어서 계산하되, 평균해서 한 결(結)에 쌀 몇 말을 거두는 것이다. 수령으로서 눈여겨 둘 곳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조금이라도 분명하지 못한 점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웃 고을로 보내는 문서〔移文〕는 그 말투를 좋게 하여, 틈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역승(驛丞)ㆍ목관(牧官)ㆍ변보(邊堡)의 장수로 말하면 비록 그 지위나 문벌은 낮고 미약하지만 모두 관장(官長)이니, 사리에 서로 존경하고 말씨도 유의해서 오로지 공손하게 하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문첩(文牒)이 지체되면, 반드시 상사의 독촉과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니, 이는 봉공(奉公)의 도리가 아니다.

●문첩을 맡은 아전이 먼저 여비로 책정된 쌀을 먹어버리고, 여름ㆍ가을 이래로 결핍(缺乏)이 심해지면, 반드시 문첩을 모아서 일시에 싸서 보내거나, 혹은 이웃 고을에 부탁하여 부치려 하니, 이것이 문서가 지체되어 기한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이다. 사건이 생긴 후에는 간사한 말로 거짓말을 꾸며서 혹 지자(持者) - 문첩(文牒)을 전하는 사람을 지자라 한다. - 가 병이 났다고 하고 혹은 저리(邸吏)가 잊어버렸다 하는데,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위로 올리고 아래로 전하는 문첩(文牒)들은 마땅히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후일의 고검(考檢)에 대비하되, 기한이 정해진 것은 따로 작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사에게 보고한 것들은 한 책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내린 명령도 한 책을 만들되, 글자를 정(精)하게 써서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도록 해야 한다.

매달의 관례나 긴요치 않은 문자들은 수록해 둘 필요가 없다.

상사가 관문(關文)을 보내어 본읍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은 각각 기한이 있는 것인데, 아전들은 이를 등한히 하니 마땅히 따로 한 책을 만들어 놓고, 기한이 지났는지 일일이 고찰하여 그들의 근무 상태를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말고 죄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전들은 눈치만 슬슬 보면서 잊어버리고 넘어가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니, 모든 일들이 허물어지고 감영(監營)의 문책이 반드시 이르고야 말 것이다.

 

 

제5조 공납(貢納) : 공납은 공물을 바치는 것

▣재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이를 수납하는 자는 수령이다. 아전의 부정을 잘 살피기만 하면 비록 수령이 관대하게 하더라도 폐해가 없지만, 아전의 부정을 살피지 못하면 비록 엄하게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전조(田租)나 전포(田布)는 국가의 재정에 가장 긴급한 것들이다. 넉넉한 민호(民戶)의 것을 먼저 징수하되, 아전들이 훔쳐 빼돌리지 못하게 해야만 제 기한에 댈 수 있을 것이다.

▣군전(軍錢)ㆍ군포(軍布)는 경영(京營)에서 항상 독촉하는 것들이다. 거듭 징수하는가를 잘 살피고, 퇴하는 일이 없게 하여야 백성의 원망이 없을 것이다.

대개 수령이란 백성에게 친히 임하는 벼슬이다. 임금은 지존하여 몸소 백성에게 임하지 못하므로, 나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니, 사리로는 몸소 서무(庶務)를 다루면서 백성의 고통을 살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수령은 망녕되게도 자신이 높은 체하여 대체만을 지키기에 힘쓰고 무릇 상납하는 물건은 일체 아전들 손에 내맡겨, 온갖 침학(侵虐)이 자행되어도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니, 수령의 직임이 어찌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겠는가?

▣공물(貢物)이나 토산물(土產物)은 상사(上司)에서 배정하는 것이다. 전에 있던 것은 성심껏 이행하고 새로 요구하는 것을 막아야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다산록(茶山錄)》에 이렇게 말하였다.

“제주에서 전복이 나는데 크기가 자라만 하였다. 재 속에 묻었다가 꺼내어 말리는데 대꼬챙이로 궤뚫은 구멍이 없으므로 무혈복(無穴鰒)이라 한다. 수년 이래 감사가 이를 요구하므로 점차로 민폐가 되었다.

또 강진(康津)ㆍ해남(海南) 등지에는 이른바 생달자(生達子)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나무의 잎이 겨울에도 푸르러 마치 산다(山茶) 같으며, 기름을 짜서 나쁜 종기를 치료할 수 있다. 수년 이래 감사가 이를 요구하므로 점차로 민폐가 되었다. 이런 일들을 수령이 이어받아서는 안 된다.”

▣잡세(雜稅)나 잡물(雜物)은 가난한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는 것들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보내주고, 갖추기 어려운 것은 사절하여야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렇게 말하였다.

“가경(嘉慶) 기미년(1799, 정조23) 봄에 칙사(勅使) 장승훈(張承勛)이 황주(黃州)에 이르러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나의 장인이 일찍이 칙사로서 황주에 도착하자, 그때 관찰사가 토산물인 주반(朱槃) - 방언으로는 함지(函支)라고 한다. - 5합(合)을 주었는데, 장인은 돌아와서 딸인 나의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부서졌으므로 마침 내가 또 그런 직분을 띠고 떠나게 되니, 아내의 요구가 있기에 감히 부탁하는 것이요.’ 하였다.

관찰사는 후일의 폐단이 될까 두려워서 이를 거절하였다. 왕이 듣고는 ‘어찌 칙사가 이런 작은 물건을 요구하는데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서 칙사가 돌아가는 길에 대어 주도록 하였다.

이에 감사는 갑자기 곡산부(谷山府)에 영을 내려 성화처럼 독촉하여 만들도록 하였으나, 칙사가 돌아가는 날은 3일 밖에 남지 않았으며, 역참(驛站)에서 곡산부의 나무가 나는 곳까지는 3백 리나 되었다. 감독하는 아전은 애달프게 부르짖으며 목매어 죽으려고까지 하였다.

내가 몰래 사람을 서울로 보내서 주반(朱槃)을 사오도록 하여 그것을 바쳤다. 반송사(伴送使) - 김사목(金思穆) - 와 관찰사 - 조윤대(曺允大) - 는 깜짝 놀라 귀신 같다고 칭찬하였는데 그것을 서울에서 사온 줄을 몰랐던 것이다.” - 주반(朱槃)은 아주 커서 물 10여 동이가 든다. -

▣상사(上司)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군현에 강제로 배정하면 수령은 마땅히 그 이해를 차근차근히 설명하여 봉행하지 않도록 기해야 한다.

▣내수사(內需司)나 제궁(諸宮)에의 상납은 그 기일을 어기면 또한 사단(事端)이 생길 것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제6조 왕역(往役) : 왕역이란 일상 업무 이외에 딴 일에 차출되는 일

▣상사(上司)에서 차출하여 보내면 모두 순순히 받들어 행해야 한다. 일이 있다거나 병이 났다고 핑계하여 스스로 편하기를 꾀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상사의 공문서를 가지고 서울에 가는 인원으로 차출되었을 때는 사절해서는 안 된다.

▣시원(試院)에 경관(京官)과 같은 고시관(考試官)으로 차출되어 과장(科場)에 나가게 되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정하게 집행하여야 하고 만일 경관이 사정(私情)을 쓰려고 하면 마땅히 불가함을 고집해야 할 것이다.

●수령으로서 고시관(考試官)이 되면, 반드시 제 고을 유생(儒生)들과 서로 관절(關節)을 통하여 사사로운 일을 행하려 도모하는데, 몇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온 고을이 원망을 품을 것이니, 슬기로운 사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무릇 수령으로서 고시관이 된 사람이 팔짱 끼고 입 다물고 허수아비처럼 앉아만 있어도 또한 의리가 아니다. ...경관이 졸문(拙文)을 뽑으려 하면 다투어야 하고, 좋은 글을 버리려 하면 다투어야 하고, 뇌물을 받은 흔적이 있으면 다투어서, 반드시 전 방(榜)이 하나라도 공도(公道)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한 도(道)의 사람이 모두 그의 명성을 찬양할 것이다.

▣수령이 조운(漕運)의 출발을 감독하는 차원(差員)이 되어, 조창(漕倉)에 가서 그 잡비를 견감하고 아전의 침탈(侵奪)을 금지하면, 칭송하는 소리가 길가에 가득할 것이다.

●조창의 소재지로 말하면, 영남에는 창원(昌原)에 마산창(馬山倉)이 있고, 진주(晉州)에 가산창(駕山倉)이 있고, 밀양(密陽)에 삼랑창(三浪倉)이 있으며, 호남에는 나주(羅州)에 영산창(榮山倉)이 있고, 영광(靈光)에 법성창(法聖倉)이 있고, 함열(咸悅)에 덕성창(德城倉)이 있으며, 호서(湖西)에는 아산(牙山)에 공세창(貢稅倉)이 있다.

내지에서 조세(租稅)를 수송하는 백성들은 지게로 지거나 수레에 싣고,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조창에 도착하면, 사나운 창노(倉奴)와 교활한 아전들이 뱃사공과 결탁하여 말질을 함부로 속이고, 저리(邸吏)의 침해는 더욱 악독하여 등을 맞고 볼기를 채여서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한데도 차원(差員)은 기생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귀먹은 듯하니 그래도 그 직책을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떠나는 날에 먼저 영리한 책객(册客) 한 사람을 조창 있는 곳으로 몰래 보내어 백성들의 말을 염탐하게 하면 간사하고 사나운 무리를 억제하고 지치고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할 수가 있을 것이니 즉시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강을 이용하는 조창(漕倉)으로는, 충주(忠州)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원주(原州)에 흥원창(興元倉)이 있다.

매양 보면, 조선(漕船)이 떠나려 할 무렵에는 창졸(倉卒)과 진장(津長)이 장삿배를 강제로 잡아 조선(漕船)을 호송하게 한다는 핑계로 키도 뺏고 노도 끌어가며 며칠씩 머무르게 하므로 배 한 척의 뇌물이 수백 전에 이르게 된다. 차관(差官)은 마땅히 이런 일을 세밀히 살펴서 엄금하여야 할 것이다.

표류선(漂流船)에 대하여 실정을 물을 때는, 사정은 급하고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시각을 다투어 달려가야 한다.

●1. 외국 사람들과의 예의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매양 그들의 깎은 머리와 좁은 옷소매를 보면 마음속으로 업신여겨서, 그들을 대접하고 문답할 때에 체모를 잃게 됨으로써 경박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번지게 될 우려가 있으니, 이것이 첫째로 경계할 일이다.

1. 표류선에 대하여 정황을 묻는 일은 반드시 섬에서 일어난다. 섬사람들은 본래 모두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인데, 조사하는 일에 따라간 아전들이 조사관의 접대를 빙자하고, 침탈(侵奪)을 자행하여 솥ㆍ항아리 등까지 남은 것이라고는 없게 만들어 놓는다.

표류선이 한번 지나가면 몇 개의 섬은 온통 망해 버리므로, 표류선이 도착하면 섬사람들은 반드시 칼을 빼 들고 활을 겨누어 그들을 살해할 뜻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도망쳐 버리게 한다.

또 간혹 바람은 급하게 불고 암초는 사나워, 파선 직전에 있는 자들이 울부짖으면서 구원을 청하여도, 섬사람들은 엿보기만 하고 나가 보지 않으며, 침몰하도록 내버려 둔다. 배가 침몰하고 사람이 죽고 나면, 이웃끼리 비밀히 모의하여, 배와 화물을 모조리 태워서 그 흔적을 없애버린다.

10여 년 전에, 나주의 여러 섬에서 자주 이런 일이 있었는데, 타버린 염소 가죽이 수만 벌〔領〕이고, 타버린 감초가 수만 근이었다. 혹 불에 타서 남은 것들이 있어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본래, 어두운 수령이 아전들을 단속하지 못하고,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하게 버려두므로,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해 버리는 것이다. 해외 여러 나라가 이 소문을 들으면, 우리를 일러 사람의 고기를 포를 뜨고 씹어먹는 나라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표류선의 정황을 조사하는 관리들은 눈을 밝게 뜨고 엄밀히 살펴서, 아전들의 침해를 엄금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따로 큰 집 하나를 빌어서 가마솥을 늘어놓고, 그들 일행의 아전들을 다 함께 같은 집에서 거처하게 하며, 그들이 먹는 쌀이나 소금도 관에서 돈을 주어 사들여서, 날마다 수량을 배정하여 지급하는 것이 좋다. 나오는 날에 따로 조처하여 한 톨의 쌀이나 한 줌의 소금이라도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한다면, 아마 하루의 책임을 조금은 메울 수 있을 것이다.

1.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작은 일이라도 그래야 한다.

오늘날 해외 제국의 선제(船制)는 기묘하여 운항에 편리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였는데도 선제가 소박하고 고루하다. 매양 표류선을 만나면, 그 선제(船制)의 도설(圖說)을 각각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이니, 재목은 어떤 나무를 썼고, 뱃전 판자는 몇 장이고,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는 몇 도나 되며, 배 앞머리의 구부리고 치솟은 형세는 어떠하며, 돛대ㆍ선실의 창문 만드는 방법과 상앗대ㆍ노ㆍ키ㆍ돛의 모양은 어떠하며, 유회(油灰)로서 배를 수리하는 법과 익판(翼板)이 파도를 헤치게 하는 기술은 어떠한가 등의 여러 가지 묘리를 자세히 물어서 상세하게 기록하여 그것을 모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표류인이 상륙하면, 곧 큰 도끼로 빠개고 부수어 즉시 불살라 버리니, 이는 도대체 무슨 법인가? 뜻있는 선비가 이미 이런 일을 맡았으면, 마땅히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가엾게 여기는 빛을 보여 주어야 하며, 음식 등 필요한 것을 줄 때는 싱싱하고 깨끗한 것을 주도록 하여, 우리의 지성(至誠)과 후의가 얼굴빛에 나타나도록 하면, 그들이 감복하고 기꺼워하여 돌아가서 좋은 말을 할 것이다.

▣제방(隄防)을 수리하고 성을 쌓을 때, 차원(差員)이 가서 감독하게 되면, 기쁘게 백성들을 위로하여 인심을 얻도록 힘쓰면, 그 일의 공이 이루어질 것이다.

●옛날에 하천을 준설(濬渫)하고 돈대〔臺〕와 성(城)을 쌓을 때는 모두 고을 백성들을 부역시켰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호수를 파거나 성을 쌓을 때는 또한 각 고을에서 백성을 거느리고 이 일을 돕도록 하였다. 이때 훌륭한 수령은 또한 백성들의 환심을 얻고 백성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널리 퍼지게 할 수 있다. 늙고 여윈 사람을 돌려보내 주고, 굶주린 자와 넉넉한 자를 살펴서 그 일거리를 고르게 해 주며, 술과 담배를 대어 주며, 노래로써 일을 권하며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으로써 경계한다면, 백성이 흥기되어 공사의 성취를 기뻐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목민심서 애민(愛民 : 백성을 사랑함) 6조

제1조 양로(養老) : 양로란 노인을 존경 우대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노인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는 일을 말한다.

▣양로(養老)의 예가 폐지된 후로 백성들은 효도에 뜻을 두지 않으니 수령이 된 사람은 다시 거행(擧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재력(財力)이 부족한데 양로연(養老宴) 참여의 범위를 넓혀서는 안 된다. 80세 이상만을 선발해야 한다.

●동월(董越 : 성종때 온 사신)의 《조선부(朝鮮賦)》에,

“나라 안에 80세 된 노인이 있으면, 남녀 모두 연회를 베풀어 임금의 은혜를 널리 펴게 한다.”

하고, 스스로 주(注)를 달기를,

“매년 늦가을에 임금은 80세된 노인을, 왕비는 80세된 부인을 궁전(宮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다.”

하였다. 국초(國初)에는 해마다 상례로 했기 때문에 동월(董越)의 부(賦)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양로(養老)의 예에는 반드시 말을 구하는〔乞言〕 절차가 있으니, 백성의 폐해를 묻고 질병을 물어서 이 예(禮)에 맞추도록 해야 한다.

▣예법에 의하되 절차는 간략하게 하고, 이를 학궁(學宮 : 향교)에서 거행하도록 한다.

▣옛날 훌륭한 이들이 이를 닦아서 시행하여 이미 상례가 되었으므로 오히려 그 여운(餘韻)이 있다.

▣때때로 노인을 우대하는 혜택을 베풀면 백성들이 노인에게 공경할 줄을 알 것이다.

●《상산록(象山錄) : 정약용의 저서로 보임》에 이렇게 말하였다.

“80세 이상 장수한 남자 21명과, 여자 15명을 뽑아서 전모(氈帽) 36개를 사서, 남자는 자주색으로 여자는 검은색으로 하여 입동(立冬) 날에 관(官)에서 나누어 주니, 그 비용이 불과 1관(貫) - 돈 10냥 - 인데, 백성들은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계피와 생강을 넣은 엿을 법대로 36근을 만들어서 유지(油紙)에 싸 두었다가, 동짓날 관에서 나누어 주면, 그 비용이 1관이 채 못 되는데 백성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섣달 그믐〔歲除〕이틀 전에 노인들에게 음식물을 돌려야 한다.

●남자로서 80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각각 쌀 1말과 고기 2근씩을 예단(禮單)을 갖추어서 존문(存問)하고, - 여자는 감등(減等)해도 무방하다. - 90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귀한 반찬 2접시를 더 보탠다. - 꼬치떡〔繭餠〕ㆍ마른 꿩〔乾雉〕. - 시험 삼아 생각해 본다면, 비록 큰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80세 이상 된 노인이 불과 수십 명일 것이요, 90세 이상 된 노인은 불과 몇 사람일 것이니, 쌀은 2섬에 불과하고 고기는 60근에 불과한데 이것이 어찌 쓰기 어려운 재물이겠는가?

제2조 자유(慈幼) : 자유는 어린아이를 돌보아 양육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慈幼)란 선왕(先王)의 큰 정사였다. 역대로 이를 닦아 행하여 법으로 삼았다.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자식을 낳아도 거두지 못하니, 이들을 타이르고 길러서 내 자식처럼 보호해야 한다.

●송(宋)나라 유위 중관(俞偉仲寬)이 검주(劍州)의 순창지현(順昌知縣)이 되었다. 앞서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서 3~4명이 넘으면 모두 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아이를 낳을 때 그릇에 물을 담아 두었다가 낳자마자 물에 넣어 죽이니, 이를 일러 ‘세아(洗兒)’라 하였다. 중관(仲寬)이 자식 죽이는 일을 경계하는 글〔戒殺子文〕을 지어서 깨우쳐 주었더니, 온전히 살아나게 된 자가 1천 명이나 되었고, 자식을 낳으면 흔히 유(兪)를 아명〔小字〕으로 삼았다. 중관이 그만두고 떠났다가 뒤에 그 고을을 지나는데 어린이 수백 명이 교외(郊外)로 나와서 영접하였다.

▣흉년 든 해에는 자식 버리기를 물건 버리듯하니, 거두어 주고 길러 주어 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

●유이(劉彛)가 건주 지주(虔州知州)가 되었는데, 마침 강서(江西)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길가에 버리는 자가 많았다. 유이는 큰 길거리에 방을 써 붙이고, 사람들을 불러서 버린 아이를 거두어 기르도록 하되, 매일 광혜창(廣惠倉)의 쌀 2되씩을 주면서 매일 한 차례씩 애를 관아에 안고 오게 하여 살펴보았다. 가난한 백성들이 쌀 2되씩 받음을 이롭게 여겨 잘 기르게 되니, 한 경내에 자녀들이 일찍 죽는 자가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법을 세워 거두어 기른 아이를 자식으로 삼거나 종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 조례(條例)는 상세하고도 치밀하다.

●“유기된 아이는 거지 여인 중에서 젖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한 사람마다 두 아이씩을 나누어 맡기되, 젖먹이는 여자에게는 매일 식구를 계산하여 쌀을 지급하고, 간장과 미역〔藿〕 - 해대(海帶) - 을 함께 지급한다. 비록 떠돌이 거지가 아니더라도 만일 자원해서 데려다 기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 아이만 주되, 쌀과 간장을 헤아려 지급한다.”

“떠돌이 거지 아이나 유기된 아이를 자원해서 거두어 기르려는 자에게는 일체 《속대전(續大典)》의 사목(事目)에 의거한다.”

살피건대, 이상은 곧 정종(正宗) 계묘년(1783)에 반포한 것이다. 비록 흉년이 아니더라도 그 유기된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일은 구애되는 바가 없으며, 다만 거두어 기르는 자가 있으면 의당 입안(立案)을 만들어 지급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기근이 든 해가 아닌데도 유기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민간에서 거두어 기를 사람을 모집하되 관에서 그 식량을 도와주어야 한다.

●진휼(賑恤)을 해야 할 때에는 의당 진장(賑場)에서 양식을 도와줄 것이나, 평년에는 민간에서 거두어 기를 사람을 모집하는데 마침 스스로 길러 낼 힘이 없는 가난한 부인이 응모하였을 경우에는, 수령이 양곡을 내어 도와주되, 한 달에 쌀 2말씩 지급하고, 여름에는 매월 보리 4말씩을 지급하여 2년 동안 계속해야 한다.

흉년에 유기하는 경우 외에도 서울 개천에는 간혹 유기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흔히 간음하는 자의 소생이다. 그러나 천지가 만물을 내는 이치에 있어서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하지는 않는 법이니, 또한 거두어 길러서 백성들이 자식이나 종으로 삼는 것을 허락해야 할 것이다.

제3조 진궁(振窮) : 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늙어 자식 없는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홀아비〔鱞〕ㆍ과부〔寡〕ㆍ고아〔孤〕ㆍ늙어 자식 없는 사람〔獨〕을 사궁(四窮)이라 하는데, 궁하여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일어날 수 있다. 진(振)이란 일으켜 주는 것이다.

●《대명률(大明律)》 호율(戶律) 수양고로(收養孤老)에 이렇게 규정하였다.

“무릇 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늙어 자식 없는 사람 및 독질(篤疾)ㆍ폐질(廢疾)의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의지할 친척도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그 소재지의 관에서 거두어 주어야 하는 것인데, 거두어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곤장 60대의 벌을 받는다. 만일 지급해야 할 옷과 양식을 관리가 그 수랑을 감해 버린 경우에는 감수자도(監守自盜)로 논한다.”

율령이 이와 같으니, 비록 도와주지 않으려 해도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과년(過年)하도록 혼인을 못 하는 자는 관에서 성혼시키도록 해야 한다.

▣혼인을 장려하는 정책은 우리나라 역대 임금의 유법(遺法)이니, 수령으로서는 성심으로 준수해야 할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에 이렇게 규정하였다.

“사족(士族)의 자녀로서 나이 30세가 가까워도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자가 있으면, 본조(本曹) - 예조를 말한다. - 에서 계문(啓聞)하여 헤아려 자재(資材)를 지급하고 그 가장(家長)은 중죄로 논한다.”

▣매년 정월에, 과년토록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를 골라서 아울러 2월에 성혼하도록 해야 한다.

●읍중에서 남자는 25세, 여자는 20세 이상 된 자를 골라서 그들의 부모나 친척이 있고 또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독촉하여 성혼하도록 하며, 태만한 자는 벌을 준다. 친척이 전혀 없고 재산도 전혀 없는 자에게는 마을에서 덕망이 있는 이를 뽑아 중매 들게 하여 짝을 구하여 성혼하도록 하되, 관에서 돈과 포목 약간을 내어서 도와주고, 도포(道袍)ㆍ사모(紗帽)ㆍ띠〔帶〕ㆍ신〔靴〕ㆍ초롱〔燭籠〕ㆍ흑의(黑衣) 등속은 관에서 빌려 주도록 한다. 혹 가난한 집과 부잣집이 서로 결합하거나 양쪽 다 궁한 집이 결합할 경우라도, 수령이 한 번 권장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백 번 말하는 것보다도 나을 것인데, 어찌하여 말 한마디를 아껴서 이런 음덕을 심으려 하지 않겠는가?

▣합독(合獨)의 정사도 실행할 만한 것이다.

●《관자(管子)》 입국(入國)에 말하였다.

“무릇 국도(國都)에는 중매를 맡은 이가 있어서 홀아비와 과부를 골라 화합시켜 결혼하게 하니, 이를 합독(合獨)이라 부른다.”

제4조 애상(哀喪) : 애상이란 상사를 당한 사람을 보살펴 주는 것을 말한다.

▣상(喪)을 당한 사람에게 요역(徭役)을 감하는 것이 옛날 도(道)이다. 스스로 전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감해 주는 것이 좋다.

▣지극히 궁하고 가난한 백성이 있어 죽어도 염(斂)하지 못하고 개천이나 구렁텅이에 내버릴 형편인 자에게는 관에서 돈을 내어 장사 지내도록 하게 해야 한다.

▣기근과 유행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면 거두어 매장하는 성사를 진휼(賑恤)과 함께 시행하여야 한다.

●《속대전(續大典)》 예전(禮典) 혜휼(惠恤)에 이렇게 규정하였다.

“서울과 지방에서 유행병으로 전 가족이 몰사하여 매장을 못하는 자가 있으면 휼전(恤典)을 거행한다.”

가경(嘉慶) 무오년(1798, 정조22) 겨울에 독감〔寒疾〕이 갑자기 성하였다. 그때 나는 황해도 곡산(谷山)에 있었는데, 맨 먼저 매장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아전이 말하기를,

“조정의 명이 없으니 실행해도 공이 없습니다.”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실행하라. 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5일마다 사망자의 장부를 만들고 친척이 없는 자는 관에서 비용을 지급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비로소 조정의 명이 도착하니, 감사의 장부 독촉이 성화같았다. 다른 읍에서는 모두 창졸에 장부를 정리하느라 여러 차례 문책을 받았지만, 나는 이미 정리해 놓은 것을 바치고 조용히 아무 일도 없으니 아전도 크게 기뻐하였다.

▣혹시 비참한 사연이 눈에 띄어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 없으면, 즉시 구제해 주고 다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정선(鄭瑄 : 명나라 관리)이 말하였다.

하나의 선행을 저해하는 것이 있으니, 상사(喪事)를 도와주는 것을 보면 산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남을 구제하는 것을 보면 궁한 친척을 도와주는 것이 중하다 한다. 과연 그렇다면, 친척을 친애(親愛)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일은 반드시 한 가지 일이 끝난 뒤라야만 다른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개 액운을 당하는 대로 곧 도와주고 일은 쉬운 대로 거행하며, 마음은 우연히 감촉되는 대로 따르고 가능한 대로 좇아야 한다. 여러 가지로 남을 힐난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심으로 남의 위급을 돌보아 줄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혹 먼 객지(客地)에서 벼슬살던 이의 영구(靈柩)가 그 고을을 지나가면 운반도 돕고 비용도 도와주는 것을 성심껏 후하게 하도록 힘을 써야 한다.

▣향승(鄕丞)이나 아전과 군교(軍校)가 상사(喪事)를 당했거나, 본인이 죽었거나 했을 때는, 마땅히 부의하고 조문하여 은정(恩情)을 남기도록 하여야 한다.

제5조 관질(寬疾) : 관질이란 불구자와 중환자에게 신역(身役)을 관대하게 면제하는 것을 말한다.

▣폐질자(廢疾者)와 독질자(篤疾者)에게 조세(租稅)와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데, 이것을 관질(寬疾)이라 한다.

▣곱사등이나 불치병자들 중 자력으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의지할 곳과 살아갈 길을 터 주어야 한다.

●장님ㆍ절름발이ㆍ손발병신ㆍ나환자 같은 자들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싫어하는 바이다. 또 육친(六親)이 없어서 일정한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종족(宗族)들을 타이르거나 관에서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주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들 중에 친척이 하나도 없어서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자에게는, 그의 고향에서 덕망 있는 이를 골라 보호해 주도록 하되,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어 비용을 대신케 해 주도록 해야 한다.

▣군졸들 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하여 여위고 병든 자에게는 의복과 음식을 주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염병〔瘟疫〕이 유행할 때 어리석은 풍속에 기(忌)하는 것이 많으니, 달래며 치료해 주어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염병〔瘟疫〕ㆍ천연두〔麻疹〕및 모든 백성이 병으로 사망(死亡)ㆍ요사(夭死)하는 천재(天災)가 유행할 때는 의당 관에서 구조하여야 한다.

●내가 강진(康津)에 있을 때인 가경(嘉慶) 기사년ㆍ갑술년에 큰 기근을 당했고, 그 이듬해 봄에 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내가 이 처방을 전해 주어 살아난 사람이 또한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혹 포부자(泡附子)를 사용하여 영험이 없을 때에 반드시 생부자(生附子)를 쓰면 금방 기이한 효험이 있을 것이다. - 본방(本方)에는 포(泡)자가 없다. - 수령이 된 자가 만약 염병이 유행하는 때를 만나면 수만 전을 써서라도 이 약을 많이 제조하여, 의리(醫吏)들로 하여금 헐값에 팔도록 하면 널리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값은 본래 헐한 것이니, - 한 첩이 돈 7닢에 지나지 않는다. - 비록 가난한 백성이라도 복용하기 어렵지 않다.

▣유행병이 돌면 사망하는 자가 아주 많을 것이니, 이들을 구료(救療)하고 매장해 주는 자에게는 상전(賞典)이 있도록 신청하여야 한다.

무오년(1798, 정조22) 겨울에 독감〔寒疾〕이 갑자기 성하여 죽는 자가 셀 수 없었다. 조정에서 부민(富民)에게 구료하고 염(斂)하고 매장하게 하고, 그 부민에게 3품(品)이나 2품의 자급(資級)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내가 곡산부(谷山府)에 있을 때, 윤음(綸音)으로 일렀더니, 이에 응한 자가 5명이었다. 일이 끝나자 상사(上司)에게 일일이 보고하였더니 상사는,

“다른 고을에서는 봉행한 자가 없으므로 한 고을 백성만을 상주(上奏)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고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나는 즉시 승정원(承政院)에 급히 보고하기를,

“이제부터 앞으로는 윤음(綸音)의 성지(聖旨)를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빨리 어전에 아뢰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직접 상경하여 상소할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그 감사는 2등을 감봉〔越俸〕하고, 5명의 백성에게는 모두 해당 자급(資級)을 제수하였다.

제6조 구재(救災) : 구재란 재난을 구재하는 것을 말한다.

▣수재(水災)와 화재(火災)에 대해서는 나라에 휼전(恤典)이 있으니 오직 정성스럽게 행할 것이요, 일정한 규정이 없는 것은 수령이 자량해서 구제해야 한다.

▣무릇 재해와 액운이 있으면 불탄 것을 구하고 빠진 것을 건져내기를, 마치 내가 불에 타고 물에 빠진 듯 서둘러야 할 것이요 늦추어서는 안 된다.

▣환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것은 또한 재앙을 당한 뒤에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둑을 쌓고 방죽을 만들어 수재도 막고 수리(水利)도 일으키는 것은 두 가지 이익이 있는 방법이다.

●무릇 현읍이 큰 강물 가에 있는 경우에는 수령이 수촌(水村)을 순행하여, 떠내려가거나 잠길 염려가 있는 것은 높은 곳으로 옮기도록 신칙해야 하며, 큰 산기슭에 있는 경우에는 마을 뒤에 따로 긴 둑을 쌓아 물의 폭급(暴急)을 막아야 할 것이니, 이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 재해(災害)가 이미 사라지고 나면 다독거리고 편안히 모여 살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이 또한 수령의 인정(仁政)인 것이다.

▣황충(蝗蟲)이 하늘을 뒤덮을 때 물러가도록 빌기도 하고 잡아 죽이고 하여 백성들의 재해를 덜어 주면, 인애(仁愛)하다는 명성을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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