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 준비 자료

청담(靑潭) 2017. 9. 30. 07:54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01년 1월 1일2

●면적 : 7,741,220km² (6위)

●인구 : 2015년 23,966,800명 (51위)

●경제 : GDP(PPP) 2017년 • 전체 $ 1조 3597억 (13위)

• 일인당 $ 55,215 (9위)

●국제 전화 : +61

●호주 1달러 : 900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줄여서 오스트레일리아 또는 호주(濠洲)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나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와 태즈메이니아 섬, 그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의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6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 제도와 바누아투, 누벨칼레도니, 그리고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있다.

18세기 말 유럽인들의 이주 이전에 최소 40,000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606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이후 1770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쪽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으며, 1788년 1월 26일부터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식민지로 죄인들을 수송해 정착시키기 시작하면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인구는 차츰 늘기 시작했고, 대륙은 계속 탐험되어 다섯 개의 자치 식민지가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1901년 1월 1일, 여섯개의 식민지가 연합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설립하였다. 모국인 영국과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42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행정적으로 모국과 분리되었으며, 1948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대영 제국 신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 법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 의회의 오스트레일리아 내 입법권이 정지되었으며, 사법권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으로 옮겨짐으로서 영국과의 남은 법적 종속관계를 단절하여 자주국가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과 캐나다,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표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며,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연방 성립 이후부터 대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 6개의 특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2,290만 정도의 오스트레일리아 인구는 대부분 동쪽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도시화 비율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DP가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높고, 1인당 GDP은 6번째로 높은 대표적 선진국이다. 군비지출은 12번째로 많으며, 인간 개발 지수에서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등 다양한 국가간 비교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20, OECD, WTO, APEC, 국제 연합, 영국 연방, 앤저스(ANZUS), 태평양 제도 포럼에 가입되어 있다. 한편, 2012년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나타났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는 몇만 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애버리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고대 인류와 DNA가 가장 비슷한 종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이 나라의 역사는 17세기경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를 목격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1770년에 영국의 선장 제임스 쿡이 본격적으로 이곳을 탐험한 이래, 1901년 1월 1일에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얼마 후에 군대가 창설되었다. 1931년 12월 11일부터 웨스터민스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의 접촉, 그리고 최초의 영국인 정착자들에 관한 문제들 등은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버리진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도착하였다. 그 후 2~4만 년 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된다.

처음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을 때 약 100만 명의 원주민(애버리진)들이 30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사용되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부족들은 각자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었으나, 드림타임에 대한 전승은 대개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인의 탐험 활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업의 일환으로서 실시되었는데 경비가 가중되고 이익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1699년 영국의 해적 윌리엄 댐피어가 뉴홀랜드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보고는 비관적인 것이어서 탐험 열기는 냉각되었다.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등의 탐험가가 그 일부를 바라본 데에 그치기도 하였다. 1769년 태평양에서의 금성 관측에 참가했던 제임스 쿡에 의해서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탐험이 실시되어, 그곳의 일대를 ‘국왕의 이름과 국왕의 깃발 아래’ 점령하고, 뉴사우스웨일스(영국 웨일스에서 연유)라고 명명했다. 쿡은 그 보고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업 개발에 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때부터 이 땅이 하나의 대륙으로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얼마 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남쪽 대륙인 테라 아우스트랄리스에서 유래된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3]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 혁명(1776년)으로 인해 영국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 새로운 유형(流刑)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개발은 진척되지 않았다.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당시 영국의 왕은 조지 3세였다. 이와는 별개로, 179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유 정착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자, 시드니 서쪽에 급사면을 맞대고 솟아 있는 동부 고지의 일부를 이루는 산들이 식민지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산들을 넘어가는 길이 발견되고, 산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농목의 적지에 개발의 손이 뻗쳤다. 즉 1850년대에 골드 러시의 시대가 됐다. 배서스트, 밴디고, 밸러랫 등에서 발견된 금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빅토리아주와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시작된 금광시대는 중국부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850년의 40만 인구는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장사꾼도 모여들어 이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영국 식민지 총독은 가혹한 세금 및 결정을 내리고, 결국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유혈 투쟁이 일어난다. 이를 유레카 혁명이라고 한다. 현재 멜버른에 있는 유레카 타워는 이 유레카 혁명을 기념한 것이다. 1880년대 시드니와 멜버른의 세련된 현재적인 모습은 이 금광시대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1901년 1월 1일에 뉴질랜드를 제외한 6개의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독립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1901년,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각 식민지는 각 주로 재출발함으로써, 이 땅에 영연방(英聯邦)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였다. 1942년 10월 9일에는 외교권과 국방권을 얻은 자치령에서 독립국으로 발전하였다. 1986년 3월 3일에는 독자적인 헌법도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ANZAC(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중요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중 하나이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ANZAC은 아주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웬만한 동네에는 Anzac Hill이 있을 정도로 일상에 파고 들기도 한다. 기념일은 매년 4월 25일이다.

 

 

 

 

뉴질랜드

 

 

●독립 : 1907년 9월 26일

●면적 : 268,680km² (75위)

●인구 : 2015년 4,569,840명 (122위)

●경제 : GDP(PPP) 2008년 • 전체 $ 1157.1억 (60위)

2017년 • 일인당 $ 41,108 (20위)

●국제 전화 : +64

●뉴질랜드 1달러 : 820원

 

뉴질랜드(영어: New Zealand), 아오테아로아(마오리어: Aotearoa)는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두 개의 큰 섬(남섬과 북섬) 그리고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태즈먼 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부터 1,500 킬로미터 (1,000 mi) 정도 떨어져 있고, 피지, 누벨칼레도니, 통가와 같은 태평양의 섬들로부터 대략 1,000 킬로미터 (750 mi) 정도 떨어져 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발견한 마지막 섬 중 하나였다.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동물, 식물, 균류의 다양성이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수의 독특한 새 종류이다. 다양한 지형과 뾰족한 산봉우리는 섬의 융기와 화산 분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기 1250년부터 1300년 사이에 폴리네시아인이 정착하고 나서 독특한 마오리족 문화가 발전되었다. 1642년에는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19세기 초반 뉴질랜드에 감자와 머스킷 총이 도입되면서 머스킷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고, 마오리족은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영국에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민자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갈등이 커졌고, 마오리족이 북섬 중부 땅을 몰수당하게 되는 뉴질랜드 전쟁(en)으로 이어진다. 1890년대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경제 불황이 찾아왔고 1930년대부터 복지 국가가 확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함께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ANZUS)에 가입했으나, 나중에 군사 동맹 체제로 전환된다. 1950년대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나라 중 하나였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으로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졌다. 1980년대 동안 보호 무역이 완화되고 변형된 자유 무역 경제가 퍼지면서 한때 수출품의 대부분이었던 양(털, 고기)이 유제품, 육류, 와인으로부터 추월당하는 등 주요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뉴질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유럽계이다. 가장 큰 소수 민족은 원주민인 마오리족이며, 이어 아시아인, 태평양 제도민 순이다. 영어, 마오리어, 뉴질랜드 수화가 공용어이며, 이 중 영어가 지배적이다. 뉴질랜드 문화의 대부분은 마오리족과 초기 유럽 정착민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초기 유럽인들의 예술은 풍경화가 대부분이였는데, 마오리족의 묘사가 적었다. 마오리족의 문화는 최근 다시 알려지고 있는데, 조각, 세공, 문신 등 전통 예술이 주류이다. 이러한 뉴질랜드 문화는 세계적으로 퍼졌고 태평양과 아시아 이민자들을 증가시켰다. 뉴질랜드의 다양한 풍경은 많은 야외 활동의 기회를 주며 고예산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다.

뉴질랜드는 11개 행정 구역과 지방 자치의 목적인 67개의 지역 당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는 지금은 없어진 주 제도보다 더 자율성을 가진다. 뉴질랜드의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이지만, 총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뉴질랜드 왕국은 토켈라우(속령), 쿡 제도, 니우에(뉴질랜드와 자유 연합 관계를 맺은 자치령), 뉴질랜드의 남극 영유권 주장이라고 주장하는 로스 속령을 포함한다, 뉴질랜드는 국제 연합, 영국 연방, ANZUS, 경제 협력 개발 기구, 태평양 제도 포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의 가입국이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이었다. 그는 이곳을 고향 제일란트의 이름을 따서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 말의 영어식 번역이다. 타스만 이후 뉴질랜드를 찾은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었다. 쿡 선장은 1769~177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식민지로서, 고래와 바다표범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초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에서도 농목업이 발전하였고,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지강탈과 관련하여 마오리족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겼고, 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은 마오리족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는 한편,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온건파 회유에 노력하여,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약해지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였는데 이는 본토와의 거리가 엄청난데다가 특별한 지하자원등의 메리트가 없기 때문인 영향이 컸다. 그 후 뉴질랜드는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1907년 영국의 자치국이 되었다가 1947년 11월 25일 독립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 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1949년 7월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총 5,350명이 영국 연방으로 참전하였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또한 1964~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195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은 공식적으로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ANZUS Treaty)을 체결했다. 이는 태평양 지역 방어를 위한 군사동맹이다. 1985년에는 비핵화지대(Nuclear freezone)을 선언하였으며 1985년 남태평양 국가들과의 비핵화선언인 라로통가 조약(Treaty of Rarotonga)을 체결했다. 1987년 데이빗 레인지가 이끄는 노동당에 의해 뉴질랜드 비핵화지대 선언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핵추진함에 대한 뉴질랜드 기항불허로 이어져 ANZUS조약의 권리가 중지되기도 했다. 2006년 기준 노동당(Labour Government) 헬렌 클라크 총리는 야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의 지지도 함께 이끌며 뉴질랜드 비핵화지대(Nuclear-free zone)의 입지를 고수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1,600㎞ 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쿡 해협으로 격리된 남·북 두 섬으로 이루어지는 산이 많은 섬나라로서, 해발 200m 이하의 땅은 온 섬의 6분의 1 정도이다. 총면적은 북섬, 남섬, 스튜어트 섬, 그 외 작은 섬들을 모두 합쳐 268,680㎞로 영국보다는 약간 크고, 일본보다는 작으며, 미국의 콜로라도주와 비슷하며, 대한민국의 2.7배, 한반도의 1.3배이다. 전체면적의 44%가 북섬, 56%가 남섬으로서 남섬이 더 크다.

 

 

 

 

일정

 

1일 : 인천 출발

2일 : 시드니 도착, 블루마운틴 국립공원, 페더데일 야생동물원, 시드니 타워, 4D시네마 체험, 시드니

       항 디너크루즈, 시드니 숙박

3일 : 시드니 동부해안, 하버브릿지, 오페라 하우스,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숙박

4일 : 시내관광, 모나 베일, 마운트 쿡 숙박

5일 : 마운트 쿡 국립공원 도착, 아오라키 마ㅑ운트 쿡 드래킹, 캔터베리 대평원, 푸카키, 데카포 호

       수, 선한 양치기 개동상, 초대교회, 퀸스타운 숙박

6일 : 피요르트 국립공원, 거울호수, 밀포드 유람선,  와카티푸 호수, 퀸스타운 숙박

7일 : 와카티카 호수, 에로우 타운, 번지점프대,  

      북섬 오클랜드 장미공원, 미션베이 또는 와이테마 조망,오클랜드 숙박

8일 : 와이토모 반딧불 석회동굴,

       로토루아 : 테푸이아 민속촌(항이디 너와 원주민 민속쇼), 폴리네시안 풀 유황온천욕, 로토루아

       숙박

9일 : 레드우드 삼림욕, 가번먼트 가든,로토루아 호수,아그로돔 농장, 팜투어,스카이라인 곤돌라 탑승

       오클랜드 숙박

10일 : 인천 도착

'즐거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키나와 기행 2(2018)  (0) 2018.03.24
호주 뉴질랜드 여행기(2017)  (0) 2017.11.15
통영과 거제도 답사  (0) 2017.04.25
문화답사 셋  (0) 2017.04.02
동유럽과 발칸반도 여행(2017)  (0) 2017.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