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기행 Ⅱ
1. 오키나와 紀行序
작년에 성우회 총무를 맡게 된 강선생이 갑자기 해외여행을 추진하였다. 성우회에서는 이미 2005년과 2010년에 해외여행을 다녀온 바 있는데, 2010년의 여행추진시 회원들의 이론이 분분하여 준비과정이 매우 힘들어서 포기를 결정했으나 내가 홀로 재추진하여 겨우 다녀온 바가 있기로 그리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냥 조건 없이 따르기로 했다. 여행지를 정함에 있어 동남아 지역은 대부분 다녀왔으므로 의견통일이 잘 안 되고 있는 차에 오끼나와만큼은 나 말고는 다녀온 사람이 없는지라 내가 기꺼이 동의하여 가게 되었으므로 나는 오끼나와를 두 번째 여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행비는 매월 적금을 넣어 마련했는데 총무가 가장 비싼 상품을 선택하였다. 이미 다녀온 곳을 비싼 상품으로 가려니 마음이 꽤 아프(?)지만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무려 두 번이나 다녀올 돈인데...?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덟 명 회원부부 전원(16명)이 참여하는 듯 하더니, 정작 다섯 부부 10명만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모두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구태여 힘든 단체여행을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므로 앞으로 여러 모임에서 추진하는 단체여행은 단호히 지양하고자 하는 나의 뜻을 여행 중에 열린 회의에서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아직 매년 1회 가고자 하는 장거리 큰 여행이 많이 남아있고,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이미 4년 전 여행기에 자세한 기록을 하였으므로 이번에는 오키나와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모아 보고자 한다.
2. 류큐제도
●류큐 제도(琉球諸島)는 일본 규슈(九州)에서 타이완으로 이어지는 난세이 제도(南西諸島) 중 남서부에 해당하는 섬들의 총칭이다. 태평양과 동중국해와의 경계에 161개의 섬이 호상(弧牀)으로 늘어서 있으며 대부분이 육도(陸島) 기원의 비화산도이다. 류큐라는 지명은 중국 쪽에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15세기까지 류큐 왕국이 있었으나 1609년에 일본에 복속되어 1879년 오키나와 현(沖繩縣)이 되었다.
3. 유구국(琉球國 류큐王國)
●1429년 류큐왕국 성립
●1467년(세조 13년)과 1471년(성종 2년) 유구국이 조선에 사신 파견
●1591년 사츠마(가고시마)현이 침략시작
●1609년 일본에 복속
●1875년 메이지 정부가 왕국 폐지
●1879년 메이지 정부가 복속하고 현 설치
●1945년 미군이 점령하여 통치
●1972년 일본에 반환
4. 오끼나와 현
●면적 2281㎢(제주도 면적 1883㎢)
●인구 150만 명
●오키나와 본 섬 면적 1199㎢(길이 112km 너비평균 11km)
5. 북포백성 김구남․부차웅의 유구국 표류기(1726-1728)
●2월초 9일, 이들이 물건을 팔려고 배로 떠났다. 동행은 모두 9명이었다. 추자도를 지나는데 동북풍이 크게 일어서 키가 다 부러졌다. 배는 이미 진도 서쪽 바다로 벗어났다.
●우리 가운데 글을 아는 자가 없었으므로 알 수가 없었다. ...<언해천자문>이 있어 꺼내 주니 저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저들이 손으로 하늘천자를 짚으며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 음으로 이를 말했다. 다른 글자를 짚으면 또 우리 음으로 불렀다. 이에 서로 큰 소리로 떠들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말을 배운 뒤에 그 말을 생각하며 말했다.
“중국의 음과 한가지다.”
그러자 그들이 ‘고려! 고려!’하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고려가 조선의 옛 이름인줄 몰랐다.
●한 번만 죄인의 명부에 오르면 관가에서 비록 형벌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부모와 친족들이 모두 내쳐서 사람숫자에 꼽지 않는다.
●표류과정
▶1726년(영조3년) 2월 9일 표류
▶50여일 후 유구의 어느 섬에 도착
▶왕도에서 70-80여일 보냄
▶11월 9일 중국으로 출발
▶1727년 1월 27일 복건성(푸젠성) 천해진 도착. 10월초 복건 출발
▶항저우 ▶쑤저우 ▶난징 ▶양저우 ▶2월 9일 베이징 도착
▶동지사 행렬을 따라 귀국, 1728년 4월 18일 제주도착
6. 유득공의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1801)에 보이는 유구관련 기록
●사인(舍人) 묵장(墨莊) 이정원(李鼎元)을 방문하고 예전 친분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우촌(雨村) 선생도 평안하십니까?”
“아직 평안하시답니다.”
“듣자니, 선생은 1품(品)의 복(服)을 하사받아, 명(命)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 번왕(藩王)을 책봉하였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 또 있겠소. 선생이 바로 부사(副使)였다면 누가 정사(正使)였지요?”
“조공(趙公)으로 이름은 문해(文楷)인데 병진년에 장원 급제한 분이지요.”
“유구(琉球)가 수로(水路)로 따진다면 얼마나 됩니까?”
“7000여 리가 되지요. 오호문(五虎門)에서 거기까지 통계하면 이와 같습니다. 예전 사람들이 만 리다 혹은 4000여 리다 하였는데 이는 다 정확하지 못한 것이지요.”
“유구 국왕의 성은 상씨(尙氏)라는데, 새로 책봉 받은 왕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상온(尙溫)이라 하더군요.”
“바다를 건너시는데 무슨 기이한 광경이라도 있었습니까?”
“별다른 광경은 없었고 해적(海賊)을 만나 공격하여 쫓아 버렸지요.”
“배 안에 인력은 얼마였으며 무기라도 있었습니까?”
“200여 명의 인력이 있었고 대포와 기타 무기가 다 구비되어 있었지요.”
“그곳의 풍속과 의복은 어떠합디까?”
“왕과 관리만이 짚신을 신는 형편이고 평민들은 모두 맨발인데, 의장(衣章)을 따질 게 있겠소.”
“《주시강략(周詩講畧)》과 같은 대작(大作)이 많을 줄로 생각되는데 어떠 하신지요?”
“이번 걸음에 시 300여 수를 지어서 한 책에 기록하게 한 것이 있고, 그 밖에 《유구역서(琉球譯書)》 상ㆍ하 두 권이 이미 탈고(脫藁)된 것이 있는데, 시록(詩錄)은 아직 다 나오지 않았소.”
묵장(墨莊)은 또 나에게,
“나는 새로이 바다를 건너가 귀국의 문헌을 얻어서 한 책을 만들어 외번(外藩)의 관면(冠冕)이 되게 하고자 하오.”
하고 말하기에 나는,
“노자(老子)는, 한비자(韓非子)와 더불어 동전(同傳)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오.”
하니, 묵장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서로 소흥주(紹興酒)를 마시는데, 술맛이 그다지 독하지는 않으나 종일토록 강권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공은 토인(吐茵)을 두려워하지 않소?”
하고 물으니,
“여기는 승상(丞相)의 집이 아닙니다.”
하였다. 묵장은 또,
“그대는 해동(海東)의 선비로서 바다 같은 도량인데, 어찌 냇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하기에 내가,
“그대는 강에서 발적하였으니, 남상(濫觴)이 없겠소.”
하자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찐 생선을 먹게 되어 그 이름을 물으니,
“이곳에서는 해즉(海鯽)이라 일컬으며 속명(俗名)은 대두어(大頭魚)라 하오. 귀국에서는 무어라 하지요?”
“우리 고장에는 이 생선이 몹시 많으며 이름을 독미어(禿尾魚)라 하지요. 두 초당(杜草堂)의 시에 이른바, ‘서주 독미도 나을 게 없다.[徐州禿尾不足珍]’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 고기는 머리가 제일 맛있다지만, 묘한 맛은 바로 두 눈깔에 있거든요.”
하였다. 묵장은 또,
“귀국이 일찍이 유구와 통상(通商)을 하다가 뒤에 틈이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떠하오?”
“국초(國初)에는 그들이 와서 조공하다가 지금은 오지 않으나, 특별한 혐극(嫌隙)은 없소이다.”
“궁벽하고 협소하여 가소롭지요.”
“그들이 왜놈에게 소속되어, 만력(萬曆) 연간에 평수길(平秀吉)이 그 국왕을 잡아 갔다는군요.”
“왜놈에게 소속되었다는 사실은, 그 나라 사람들이 심히 비밀로 삼고 있기 때문에 기록에 들어가지 못한 거지요.”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홍려시(鴻臚寺)에서 연례(演禮) 할 적에 보았는데, 그 진공사(進貢使) 정사는 향필현(向必顯), 부사는 완익(阮翼)이요, 그 사은사(謝恩使) 정사는 모국동(毛國棟), 부사는 정득공(鄭得功)이었다.
그들의 머리에 쓴 관은 평정건(平頂巾)과 비슷한데, 또아리처럼 납작하며, 혹은 노랗고 혹은 붉어 이로써 직품을 분변한다고 한다. 옷은 다 왜단(倭緞)으로 만들어 큰 띠로써 단단히 묶고, 가진 것은 또 왜선(倭扇)이었다. 모(毛)란 자는 키가 크고 수염은 하얀데, 이묵장(李墨莊)의 이른바 ‘한자(漢字)는 하나도 모른다.’는 자이고, 정(鄭)이란 자는 키가 작고 정상(精詳)하며, 곧 네 번이나 중국을 들어왔다는 자이다. 그가 중국어에 능하므로 나는 그더러,
“서호(西湖) 금산(金山)의 승경(勝景)을 보았는가?”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모두 보고말고요.”
하기에, 나는 또,
“지은 시(詩)가 있는가?”
하자,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모릅니다. 지은 것이 없습니다.”
고 대답한다. 이 정(鄭)은 또 우리나라 말로 천지(天地), 일월(日月), 수목(數目)을 대략 알므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바다에 표류된 사람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정은 아무튼 구양(球陽)의 재자(才子)인 것 같다. 그 종인(從人)들은 검은색 관을 썼는데, 역시 중국어에 능한 자도 있었다. 내가 묻기를,
“너희 사신은 관직이 무엇이냐?”
하였더니, 대답이,
“금자대부(金紫大夫) 법사(法司)이지요.”
하였다. 나는 또,
“너는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
물었더니, 여기저기 품속을 더듬어 작은 칼 하나를 꺼내어 보이는데 곧 접었다 폈다 하는 주머니 칼로서, 우리나라 제품과 흡사하였다. 뒷날 오문(午門) 안에서 반상(頒賞)할 적에 또 보았는데, 모두 왜국의 반포의(班布衣)를 입었다. 그들 네 사신이 몸을 일으켜 공수(拱手)하고 섰다가, 정(鄭)이 앞에 나와서 ‘평안하냐.’고 묻기에, 나 역시 ‘평안하냐.’고 물었다. 그는 또 나더러,
“어느 날에 떠나십니까?”
묻기에 나는,
“오늘로 길을 떠나오.”
하고 대답하였다.
동무(東廡) 아래에서 사람이 소란을 피우고 있기에 가서 보니, 내무부(內務府) 이속(吏屬)들이, 유구 사신의 상받은 비단을 가져다가 포장을 끄르고 필마다 두서너 자씩을 끊어 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들으니,
“유구 사신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리어 말하기를, ‘비단이 필마다 짧고 끊어 낸 흔적이 있으며, 또 포장지에는 ‘홍(紅)’ 자 표가 찍혔는데 청단(靑緞)이 들어 있고, ‘청’ 자 표가 찍힌 데는 장단(醬緞)이 들었으니,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는 대개 내무부 사람들이 바삐 잘라내고 아무렇게나 싸서 그렇게 된 것이니, 중국의 기강(紀綱)도 알 수 있으려니와, 이 일로써 글을 올린 유구도 역시 만(蠻)이라 이르겠다.
7. 연원직지(1832 김경선 저)에 보이는 기록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사람 둘이 우리나라에 표류해 왔었는데, 이번 길에 데리고 가 북경에 넘기려 한다.
●저녁에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사신이 도착하였다. 따로 유구관기(琉球館記)가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표류한 사람 26명을 끌고 와 예부에 넘겼는데, 본부(本部 유구국을 말함)로부터 우리 일행에 압송되어 와서 대자리로 얽어 만든 긴 집에 거처케 하고는 회정(回程)을 기다려서 데리고 가라 하였다.
夕間。琉球國使臣來到。別有琉球館記 率我國濟州漂人二十六人。到付禮部。自本部押送于行中。以簟席搆成長屋以處之。待回程將携去云。
●유구관기(琉球館記)
●제주 표인 문답기(濟州漂人問答記)
밤에 표류인들을 온돌방 앞에 불러다 놓고 묻기를,
“너희들은 본주(本州 제주도)로부터 몇 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로 어디를 향하여 배를 띄웠고 며칟날 무슨 바람을 만났으며, 또 며칟날 유구국 어느 지방에 배를 대었고 그곳에 머문 지 몇 달 만에 출발하였으며, 또 몇 달 만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대략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표류인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난해인 신묘년(1831, 순조 31) 11월 23일 술시(戌時)쯤에 장사하러 내지(內地)로 가려고 33인이 한 배를 함께 타고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출발하였다. 그 다음날 오시(午時)에 역풍(逆風)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치솟았다. 배는 나는 듯이 가면서 파도에 따라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니, 여러 사람이 어지러워 넘어졌으며 산 사람의 안색이 없었다.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어서 배가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다만 때때로 크고 작은 섬들이 솟구치는 파도 바깥에서 나타났다가 숨었다. 혹 울창한 수목도 있었고, 혹 깎아지른 석벽(石壁)도 있어 올라 보려 하였으나 배를 댈 수가 없었다. 또 정신은 더욱 혼미한 데다가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절하였다. 이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연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조금 들어서 눈을 뜨고 둘러보니, 거처하고 있는 곳이 배가 아니고 집이었으며, 보이는 것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말을 하여 물어볼 기력도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나 점차로 정신이 수습되어서 일어나 앉아 서로 보니 26인만이 겨우 한 가닥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으며 또 2인이 옆에서 구호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문답을 주고받았다.
“여기는 어느 나라 어느 곳인가?”
“이곳은 유구국에 소속된 이강도(伊江島)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 사람은 역관이요, 한 사람은 가노이다.”
“우리들 33인 중에 7인과 배 안에 있던 물건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언제 이곳에 배가 닿았고 오늘은 며칠인가?”
“오늘은 12월 11일이다. 그대들의 배가 이달 7일에 이 섬에 닿았다. 그래서 문정(問情)하러 가 보았더니, 배 안에는 27인만이 있었고 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으며 다른 물화(物貨)는 없고 죽사모(竹絲帽) 이른바 제주의 양대(涼臺)임. 몇 입만이 있었다. 드디어 죽은 사람은 물가 언덕에 매장하고 교자(轎子)로 여러분을 메고 이곳에 데려왔다. 약수와 미음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간호한 것이 이제 5일이 되었다.”
그런데 역관이 지껄이는 우리 말이 겨우 더듬더듬 얽어 놓은 것이어서 똑똑히 다 알아서 요량할 수는 없었으나, 그 말뜻이 대개 위와 같았다.
또 며칠 있다가 비로소 여러 동료들과 함께 배를 대었던 곳에 가 보니, 돛대는 이미 다 꺾여 있었고 썼던 패랭이[平涼子]는 언덕 옆에 버려져 있었다. 여섯 사람은 언제 어디서 빠져 죽었는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의 외로운 분묘(墳墓)는 높다랗게 만 리 이국의 쓴 안개와 독한 장기(瘴氣)가 서린 물가에 홀로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드디어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니, 역관이 옆에서 위로하였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여섯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시체는 마땅히 배 안에 있었을 것이고, 또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의심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득이 그 집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강도(伊江島)는 길이가 7리, 너비가 5리이다. 토지는 기름지고 평탄하며, 민가는 즐비하고 지키는 벼슬아치가 있어 우리나라의 한 고을과 비슷했다.
다시 며칠이 지난 12월 24일에, 역관이 비로소 우리를 압송하여 국성(國城)으로 갔다. 청강도(淸江島), 북강도(北江島), 동북도(東北島)를 지나서 성 못 미쳐 3리쯤에 전총역(磚總驛)이 있었다. 역 안에는 초가집 13칸이 있었다. 이 역은 아마도 외국 사람들을 구제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홍제원(弘濟院)과 같은 곳이라 하겠다. 이른바 삼사관(三司官)이 전례대로 표류인의 옷과 음식의 공급을 관장하였는데, 나와서 옷과 모자를 모두 본을 떠 가지고 갔다. 며칠이 못 되어 옷을 만들어 가져왔는데, 베는 우리나라의 면포(綿布)와 같았지만 얇아서 해지기 쉬웠으며, 갓은 죽사(竹絲)로 성글게 엮어 검은 종이를 붙여서 오래 쓸 수가 없었다. 하정(下程)은 매일 세 끼에 쌀 각각 8홉(合)을 준다 하였으나, 밥은 겨우 반 주발이었으며 반찬은 어물류(魚物類), 두부, 채소, 소금, 장 따위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이 많았다. 명절[節日] 때마다 특별한 하정(下程)이 있어, 소주 1병, 과실, 떡 따위를 보내 왔는데, 맛이 모두 입에 맞았다. 세시(歲時)의 절차는 우리나라 풍속과 대략 같았다.
그곳의 왕기(王畿)는 사방이 각각 300리가 되지 못하며, 그 바깥의 이강(伊江), 청강(淸江)과 같은 여러 섬들이 바다 가운데에 둘러 있다. 왕성(王城)의 둘레는 10리에 불과한데, 중산(中山)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러 중산왕(中山王)이라 일컫기도 한다. 지역이 남극(南極)에 가까워 겨울 날씨가 봄과 같다. 섣달에 모내기를 하여 다음해 5, 6월에 수확하며 2월에 보리와 오이를 먹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모두 유순하고 나라는 작고 힘은 약하다. 일본과 멀지 않아 일본 사람들이 늘 와서 교역(交易)하는데, 그들을 심히 두려워하여 왕성에 들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해 5월에 지나가던 안남(安南)의 배가 근처에 와서 정박하고는 왕성에 들어가 보기를 청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군사를 내어 지키기까지 하였다 한다.
표류인들이 전총역에 머물고 있을 때에, 바깥에 나와 한가하게 거닐며 구경하였으나, 그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궁실(宮室)ㆍ성궐(城闕)의 제도와 종묘사직ㆍ조정ㆍ시장의 위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바깥에서 바라보니, 중산의 한 줄기가 높이 하늘 속에 꽂혀 있었으며, 산 전체가 돌로 되었는데 돌 빛깔은 푸르고 윤기가 났다. 맥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다를 건너와서 우뚝 솟아난 중조(中祖)라 생각된다. 산 아래에 있는 왕의 궁궐은 그다지 장려하지 않으나 원앙와(鴛鴦瓦)가 순수한 녹색으로 해에 비쳐 찬란히 빛나 그 광경이 눈길을 빼앗았다. 여리(閭里)와 가방(街坊)은 대략 작은 규모였다.
국속(國俗)으로 무릇 빈객(賓客), 제사, 혼인, 상장(喪葬)에는 모두 고례(古禮)를 쓰되 국제(國制)를 참작한다. 무릇 시사(市肆)의 매매는 모두 여자들이 주관한다. 귀신을 심히 숭상하여 매일 산천과 절과 도관에 기도를 드리는데 여기에도 또한 여자가 많았다. 남자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니기도 한다. 남녀의 분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아서 여자가 길을 가다가 남자를 만나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양산을 기울여 자기 얼굴을 대략 가리며, 남자 또한 돌아보지 않고 갔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대략 중국과 같아서 온돌을 만들지 않고 대자리를 깐 평상(平床)이 있을 뿐이었다. 주방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었다. 복식(服飾)으로, 조사(朝士)의 장복(章服)에 대하여는 이미 유구관기(琉球館記)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들의 일반 백성들은 겨울이나 여름을 가리지 않고 모두 홑바지를 입고 위에는 두루마기[周衣]를 걸쳤으며 간혹 홑두루마기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버선이나 신발을 신지 않는데, 손님이나 제사 같은 일이 있을 때면 비로소 버선과 신발을 신는다. 신발 모양은 우리나라의 미투리[繩鞋]와 같은데 다만 앞에 두 귀가 있었다. 머리에 쓰는 것으로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머리쓰개를 썼는데 대략 치포관(緇布冠)과 비슷했으며, 나다닐 때에는 갓을 썼는데 우리나라의 삿갓과 같았다. 천인들은 온몸을 발가벗었고 다만 두어 자의 거친 베로 궁둥이와 허벅지만을 가렸을 뿐이다.
음식은 대략 우리나라와 같으나, 대개 감자[甘藷]를 항식(恒食)으로 삼았다. 그곳의 산물로는 해물(海物), 곡물, 채소 등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석류(石榴), 감자(柑子), 귤(橘), 유자(柚子)는 더욱이 그곳 땅에 적합하였다. 금, 은, 동, 주석은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였으니, 한 구역의 낙원이라고 할 만했다. 더욱이 사람들의 성품이 부드럽고 착한 데다가 예의를 조금 알며 부귀(富貴)하다고 교만하지도 않고 모질게 싸우거나 용맹을 좋아하는 풍습도 없다 하였다. 부드럽기는 남음이 있고 강하기는 부족하니 곧 《중용(中庸)》에 이른바 남방(南方)의 강함이다.
그 나라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중국에 조공(朝貢)한다. 중국에서는 유구 사람들이 한어(漢語)를 해득하지 못한다고 하여 옛날에 몇 사람을 유구에 보내 한어를 가르치게 했다. 그 사람들이 대대로 구미촌(九尾村)에 살면서 역학(譯學)으로 생업(生業)을 삼았다 한다. 그리하여 진공(進貢)하는 해마다 세 사신 이외에 구미촌 사람을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우리나라의 역관(譯官)과 같다.
8. 여행일정
제1일 맑음
●오전 7시 30분 익산역에서 여행사 전세버스로 출발
●대한항공으로 가게 되어서 금년에 개관한 제2청사를 처음 이용하게 되었다. 일행은 총 28명인데 우리가 10명, 고향이 여수인 가족팀 6명, 여성친구팀 4명, 남도에서 온 두 부부 4명, 모녀팀 2명, 전주에서 온 부부 2명으로거의가 전라도 사람들인데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사잔비치 호텔에서 2박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하는데 특급호텔이라고 한다. 특급여행이라서인지 여행사에서 과일바구니세트를 선물하였는데 맥주, 물, 과자, 과일 등이 들어있다.
제2일 맑음
●오키나와 월드(옥천동굴 포함) - 에이샤 민속공연 - 천연아로마 온천욕 - 아메리칸 빌리지 - 오선생 생일파티
제3일 흐림
●만좌모 - 코우리오션타워(조개박물관) - 오키나와 국영기념공원(츄라우미수족관) - 국제거리
●시티나하호텔
제4일 흐림
●참치 해체쇼 - 수리성 - 면세점 - 우미카지테라스
●여행사 전세버스로 오후 12시(자정)에 익산역 도착
9. 여행후기
우리 성우회 회원들이 만난 지 어언 45년이 되었다. 나로서는 부부가 함께 만나는 모임 두 개 중 하나이며, 우리 양드리와 만난것도 이 인연과 맥을 같이 하므로 나에게 정말 소중한 모임임에도 단지 연 2회 정기모임이 있을 뿐이어서 평소 가깝게 지내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자녀들 문제도 잘 풀어가는 모임인데도 여행을 준비할라치면 회원들 간 의견일치가 어려운 측면이 많이 엿보인다. 그래서 내가 연 4회 정도로 만남은 늘리고 해외여행은 지양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가을 모임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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