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담일기(石潭日記) 2
이 이(李 珥 1536-1584)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
1. 만력 삼년 을해(萬曆三年乙亥) 1575(선조8)
○ 10월. 김효원(1542-1590)을 부령(富寧) 부사로 삼고, 심의겸(1535-1587)을 개성(開城) 유수(留守)로 삼았다. 이때에 의겸과 효원의 각립(角立)한 의론이 분분하기를 마지 아니하니, 이이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보고 말하기를, “두 사람이 다 사류로 흑ㆍ백ㆍ사(邪)ㆍ정(正)을 구분할 것도 아니며, 또 진정으로 혐극(嫌隙)이 생기어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요, 다만 말속(末俗)이 시끄러워 사소한 틈으로 말미암아 허황한 말들이 소란하고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니 마땅히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내보냄으로써 들뜬 의론을 진정시킬 것이니 대신이 마땅히 경석에서 그 사유를 아뢰십시오.” 하니, 수신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석에서 아뢰면 더욱 소란이 생길는 지 알 수 없지 않소?” 하였다. 마침내 간원에서 이조를 논핵하게 되자 수신이 의겸의 형세가 너무 성대해 질까 의심하고 드디어 경석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일에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결점을 말하여 이로 인해 말썽이 분분하여 사림(士林)이 화평치 못할 조짐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이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일을 가지고 말하오?” 물었다. 수신이 대답하기를, “서로 평일의 과실을 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기를, “조정에 같이 있는 선비가 마땅히 뜻을 함께 할 것인데 서로 비방하니 심히 옳지 않다. 두 사람을 다 보외(補外)시켜라.”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이 깊은 혐극까지는 이루지 아니한 것이나, 우리 나라의 인심이 경조(輕躁)하고 말속이 시끄럽기 더욱 심하여 두 사람의 친척과 친구가 각각 소문을 전하여 마침내 어지럽게 되었으니 대신이 마땅히 진정하려고 하여 두 사람을 지방으로 내보내어 언근(言根)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또 주상께서도 이 일을 아셔야 할 것이니, 지금 조정에는 비록 간인(奸人)으로 뚜렷이 나타난 이는 없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소인이 이들을 붕당(朋黨)이라 지목하고 두 편을 다 제거하려는 계략을 쓴다면 사림의 화가 반드시 생길 것이니, 이것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대신은 마땅히 진정할 생각을 가질 것이오.” 하였다. 홍문관 정자 김수(金晬)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그러한 줄을 이미 아셨으면 두 사람의 재주가 다 쓸 만하니 꼭 보외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들이 스스로 풀고 화합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그것도 그러하다. 다만 두 사람이 실상 원수 같은 혐의가 있어 서로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효박한 풍속이 조용하지 아니하여 허황한 말의 근본이 된 것이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헌국(李憲國)이 말하기를, “지금은 위로 성상(聖上)이 계시고 아래로 현상(賢相)이 있으므로 사림이 염려가 없지만 만일 권간(權奸)이 조정에 있었으면 이 일이 또한 사림의 화를 양성할 것입니다. 그 전 정사년에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가 서로 비방하였는데, 홍도가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은 것을 항상 분하게 여기어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부가 원형에게 고하여 원형이 감정을 품었으나, 만일 홍도의 이 말로 죄를 만들면 명종(明宗)께서 반드시 듣지 아니하실 것이므로 다른 죄로 얽어매어 귀양까지 보내고, 사류가 많이 폄척(貶斥)되었으니 이것은 원형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분분한 말이 많으나 어찌 일이 생기게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 버릴 인재가 아니오니 주상께서 두 사람을 부르시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걸리던 것을 다 풀게 하면 서로 용납하여 입조(立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친정을 하시는데 특지로 효원으로 경흥(慶興) 부사를 시키며 말씀하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먼 고을로 보낼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경흥은 주변으로 호인과 접근되어 있으니 서생(書生)이 진무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여러번 아뢰어서야 부령(富寧)으로 바꾸라는 명이 내렸다. 심의겸은 개성 유수로 임명하였다. 이에 연소한 사류가 의구하기 더욱 심하였다. 이이가 중간에 서서 이편 저편을 진정시키려 하니 사람이 의지하였다. 수신이 이미 효원을 내어보낸 뒤에 허엽(許曄)은 그가 경솔하게 처리했다고 허물하였다. 그러자 수신이 사류에게 의심을 받을까 염려하여 허엽에게 자신은 편당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노라고 맹세를 여러번 하니 식자가 웃었다.
○ 김효원이 부령으로 가게 되니 사류가 두려워하여 안정치 못하고, 또 효원이 병이 중하여 북방에 부임할 수 없었다. 이이가 휴가를 얻어 장차 성묘(省墓)하러 가려고 하직하는 날에 홀로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던 것이 있으나 면대(面對)치 못하였으니 지금 배사(拜辭)함에 있어 감히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김효원을 보외하는 것은 다만 대신의 뜻이 신과 합할뿐 아니라 실상 사림간의 공론이오며, 주상께서 육진(六鎭)을 무부(武夫)의 손에만 두기를 근심하시어 문사(文士)의 명망있는 사람으로 앉아 진압하게 하려 하시었으니, 주상의 뜻도 실상 우연이 아닌 것을 압니다. 만일 효원이 병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극은(國恩)을 갚는 것이 진실로 때를 만났다 하겠으나, 다만 효원이 신기(身氣)가 심히 허(虛)하여 질병이 심중하니 이 근력을 가지고 북방에 가게 되어 상설(霜雪) 중에서 지나다 더디 죽는 것만이 다행이오니, 어떻게 능히 주획(籌劃)함이 있어 국경을 굳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대신의 뜻도 말썽들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두 사람을 보외하여 진정시키려는 계책뿐이며, 효원이 죄가 있다고 방축(放逐)하자는 것은 아니오니 내지(內地)의 벽읍(僻邑)을 효원에게 주시어 안으로는 군신의 의(義)가 보전되게 하고 밖으로는 변방의 수비를 굳게 하십시오.” 하였더니, 임금이 이이가 효원을 편드는가 의심하고 노하여 답하는 말이 사정(私情)을 좇는다고 극히 나무랐다. 뒤에는 그렇지 아니한 것을 알았다.
2. 만력 사년 병자(萬曆四年丙子) 1576년(선조 9)
삼가 생각건대 맹자의 말에, “한 설거주(薛居州)가 홀로 송왕(宋王)을 어찌 할 수 있으랴.” 하였다. 대개 양기(陽氣)가 성하고 음기(陰氣)가 쇠하면 군자가 쓰이고 소인은 배척되는 것이며,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하면 소인은 쓰이고 군자는 물러가는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상리(常理)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 정(正)이 이기는 것은 항상 적고 부정(不正)한 것이 이기는 것은 항상 많다. 이러므로 군자가 비록 성하나 한 소인의 참언이 가만히 임금에게 들어가면 족히 치(治)를 난(亂)으로 바꾸어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소인이 많고 군자가 적으면 어찌 하랴. 을해ㆍ병자년 사이에 속류(俗流)가 조정에 충만하여 항상 정의(廷議)가 있으면 사론(邪論)이 떼로 지껄이니 바른 의논의 약함이 머리털로 천균(鈞)을 끄는 것 같다. 더구나 임금의 마음이 사류를 심히 싫어하니, 가령 공자ㆍ맹자ㆍ관중ㆍ제갈량이 조정에 있다 하여도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이ㆍ김우옹(金宇顒)들이 그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임금을 바로잡고 잘된 정치를 해보려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으니, 아! 그 정경이 슬퍼할 만하고 또한 자기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이르리로다.
■당쟁이 생겨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내용
○ 이이(1536-1584)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갔다. 이이가 이미 부제학이 체직된 후에 박순(1523-1589)이 항상 경석에서 그가 어질고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이 사람은 교격(矯激)하고 또 제가 나를 섬기지 않으려 하니 내가 어찌 억지로 머물려둘 수가 있겠소? 예전부터 물러감을 허락하여 제 뜻을 이루게 한 일도 많소. 또 가의(賈誼 한 나라 사람)는 독서하고 말만 능할 뿐이라 실상 쓸 만한 인재는 아니었소.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를 쓰지 아니한 것은 참으로 소견이 있었소.” 하였다. 윤근수(尹根壽 1537-1626))가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주상께서 군이 물러가려 하는 것을 교격하다 하시고 머물러두려 하지 아니하시니 군은 좀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머물려 두려 하지 아니하시면 비록 더 머물러 있은들 될 것인가, 진실로 물러가야겠다. 물러가라는 허락을 듣고 물러가지 아니하면 이것은 거취(去就)로써 시도(市道 장꾼 모양으로 이윤을 흥정하는 것)를 삼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김효원이 명류를 천거하기를 좋아하니 연소한 사류들이 중하게 여기어 세력이 심히 성하였다. 전배(前輩) 사류가 그들을 미워하나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손을 못 대었다. 이이가 조정에 있으면서 차차 조정이 불화할까 염려하여 그 세력을 줄이려고 보외(補外)하자는 말을 내니 공론이 신뢰하여 중하게 여겼다. 이이의 뜻은 다만 진정만 시키려는 것뿐이며 깊이 다스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효원(1542-1590)을 내보내니 조정 공론이 문득 지나쳐서 깊이 다스리려 하기에 이이가 극력 말리고, 이발(李潑 1544-1589)을 끌어다 전랑(銓郞)을 삼았다. 당시 무리들이 윤현(尹睍 1536-1597))을 전랑에 천거하려 하니 이이의 마음에 윤현이 전랑에 합당치 아니한 것을 알았으나 화합하기 위해서 감히 말리지 못하고, 또 생각하기를, “이발이 이조에 있으면 윤현이 사사롭게 행하는 것을 제어할 것이다.” 하였다. 윤현이 이랑(吏郞)이 되자 이발(潑)이 마침 도승지 지이조(都承旨知吏曹 승지로서 이조를 담당한 사람) 박호원(朴好元 1527- ?))과 동서가 되어 상피(相避 친척간에 관청에 있지 못함)하는 규례가 있었다. 전례에 이런 일이 있으면 도승지가 타조(他曹)의 일을 맡아 담당하고 이조에 있는 사람은 갈지 아니하는 것이라, 정원에서 호원으로 타조를 맡아보게 하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이발은 체직시키지 못할 사람이 아니다.” 하고, 이발을 체직시키니 윤현이 비로소 권세를 부리게 되어 조원(趙瑗 1544-1595))을 이랑으로 천거하려 하였다. 조원은 경박하여 인재가 아니고 다만 효원과 서로 틀려서 정언으로 있을 때에 양사를 체직하여 효원의 세력을 꺾기를 주창하였기 때문에 윤현이 그 공을 갚으려 하는 것이다. 이이가 말하기를, “백옥(伯玉 조원의 자)은 쓸 인재가 아니다. 만일 인물의 어떠한 것을 논하지 아니하고 다만 인백(仁伯 김효원의 자)을 미워하는 사람만 쓰려 하면 군들이 반드시 패하리라.” 하였다. 윤현이 이이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천거하여 이랑이 되었다. 이이가 힘써 화합을 주장하나 시의(時議)가 오히려 이이보고 모호 불명하다 하였다. 이해수(1536-1599)가 이이에게 말하기를, “김인백(金仁伯 =김효원)은 반드시 일을 그르칠 소인이다. 군이 그의 마음 쓰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석에서 시비를 분명하게 아니하고 몽롱하게 아뢴 것은 지극히 온당치 못했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인백은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라 할 뿐이며, 군들처럼 소인으로 여기지는 아니한다.” 하였다. 정철ㆍ구봉령(具鳳齡)ㆍ신응시(辛應時) 등은 다 효원을 소인이라 하고 깊이 배척하려 하였다. 정철(1536-1593)이 장차 남으로 돌아갈 때 이이에게, “효원을 배척하라.” 권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저 사람의 죄상이 형적이 없고 사류가 소중하게 여기니 만일 깊이 배척하면 반드시 사류에게 연루가 되어 크게 분란을 일으키어 조정이 손상하리라.”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였더니, 정철이 시를 지어 보이기를,
군의 뜻은 산과 같아 끝내 움직이지 않고 / 君意似山終不動
나는 물처럼 흘러가니 어느 때에나 돌아올고 / 我行如水幾時回
하고, 개탄하고 돌아갔다. 전배는 효원을 이렇게 미워하고, 후배 사류는 효원을 매우 아끼어 이이보고 효원을 내어보낸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이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둘다 옳거나 둘다 그른 경우는 없는 것인데, 공의 근일 처사에는 시비를 분별치 아니 하고 둘다 온전하게 하려 하니 인심이 불만히 여긴다.”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둘다 옳거나 둘다 그른 경우가 있다. 백이(伯夷 )ㆍ숙제(叔齊)가 군위(君位)를 서로 사양하는 것과 무왕(武王)과 이(夷)ㆍ제(齊)가 서로 합하지 아니한 것은 둘다 옳은 경우이고, 춘추전국 시절에 의로운 전쟁이 없었던 것은 둘다 그른 경우이다. 근일에 심(沈)ㆍ김(金)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일도 아닌 것으로 서로 견제하고 틀어서 조정을 안정치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둘다 그른 경우이다. 비록 둘다 그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는 두 편이 다 사류(士類)니 융화시키는 것이 옳고, 반드시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 하면 생겨나는 말썽과 서로 트는 형세가 어느 때나 끝날 것이냐?” 하였다. 이에 전배는 이이가 효원을 공격하지 아니함을 허물하며 점점 이이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후배는 이이가 효원을 쓰지 아니한다고 허물하여 조정 여론이 심히 서로 어긋났다. 대사간 홍성민(洪聖民)이 이이에게 이르기를, “이성중(李誠中 1539-1593)이 지평이 되자 공론이 논핵 체직하려 하니 어떤가?” 했다.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성중이 별로 허물이 없고 또 남달리 딴 짓을 하려 하지도 아니하며, 다만 인백과 친교가 깊을 뿐이다. 인백도 오히려 공격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그 당우(黨友)를 공격할 것인가? 만일 그리하면 더욱 분란을 유발하게 될 것이니 절대 논박하지 말라.” 하였더니, 성민이 처음에는 이이의 말을 옳게 여기었다. 그러나 나중에 당시 무리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 이에 성중을 탄핵하니 사류가 더욱 놀라고 나라 사람의 비난이 시끄러웠다. 이이가 위로는 군부에게 맞지 않고 아래로는 동료들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니 물러갈 뜻을 더욱 결연히 하였다. 한수(韓脩)ㆍ남언경(南彦經)과 시사를 논하기를, “근일에 시론이 급급히 시비를 굳게 정하려 하니, 시비를 어찌 한때 기세의 강약(强弱)으로써 정하겠소? 당초에 인백을 좀 누르는 것은 실상 공론인데 지금 와서는 의논이 과격하여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사류 가운데 공심(公心)으로 중립한 사람들을 오히려 의심하니, 이렇게 하기를 마지아니하면 반드시 인심을 싫어 인백을 옳다는 것이 도리어 공론이 될 것이오.” 하였다. 언경이 말하기를, “다만 인백 한 사람만 보외하고 그 나머지 사람을 모두 전대로 청반(淸班)에 두면 사림이 안정하고 무사할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 뜻이오.” 하였다. 남언경이 말하기를, “공이 물러가서는 안 되오.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어찌 생각지 아니하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아래 위로 신임을 못 얻었으니, 어찌하겠소.” 하였다. 언경이 말하기를, “어찌 조금의 유익이라도 없으리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조금의 유익을 위하여 나의 평생을 그르치는 데야 어떻게 하겠소.” 하였다. 언경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 말도 옳소.” 하였다. 김우옹(1540-1603)이 이이를 보고 효원을 매우 애석히 여기는 의사가 있었다. 이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인백을 보는 것이 네 가지 부류가 있소. 한 부류의 의논은 인백을 변변찮은 소인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계함(季涵) 등이고, 다른 한 부류의 의논은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라는 것이니 이것은 나이며, 또 다른 한 부류의 의논은 비록 명예를 좋아하는 의사를 띠었으나 역시 선인(善人)이란 것이니 이것은 그대들이요, 또 다른 부류의 의논은 흠 없는 군자라는 것이니 이것은 그의 동류들이요. 한 사람 몸에 네 가지 부류의 의논을 가져서 사람마다 제 소견만 옳다고 하니 서로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오. 이것으로 허다한 분쟁을 일으켜 나라의 기강과 백성들의 고용이 방치되어 도외시되고 급급히 시비만 정하려 하니 조정이 자연 날로 문란하게 되는 것이요, 이것도 역시 천운이오.” 하였다. 우옹이, “이것은 옳은 말이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분란이 유발되었소?” 물으니, 이이가 말하기를, “김인백(김효원)의 과실이 먼저이었소. 인백이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국사를 하고자 했고, 혐오를 피치 않고 선배를 배척하니 선배 사류의 연장자들이 노여움을 품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소. 내가 인백의 처사를 보니 후폐가 없지 아니할 것이기에 좀 누르자는 의논을 내었소, 당초에는 선배들이 나를 중하게 여겨 말마다 듣더니 내 손으로 인백을 눌러놓은 뒤에는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은 것과 같아서 가소롭소. 대체 이 일은 인백을 누르는 것은 옳거니와 너무 공격하는 것은 그르니, 드러난 죄가 없는 까닭이요, 나의 말이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한 것은 계함의 소견이 지나친 까닭이요, 계함(정철)이 청명(淸名)으로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동류들이 계함을 믿고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구하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견(而見)유성룡(柳成龍)의 자 ㆍ숙부(肅夫)김우옹(金宇顒)의 자 ㆍ경함(景涵)이발(李潑)의 자 이 요지에 모이면 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공도 가는데 우리들이 비록 머문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의 진퇴는 이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어찌 경석에서 통절히 아뢰지 아니하였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말하기 매우 어렵소. 반드시 군신이 서로 믿기를 기다려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주상께서 군하의 마음을 알지 못하시니 만일 사실대로 다 아뢰면 주상이 반드시 조정에 붕당(朋黨)이 형성된 것으로 의심하시어 소인들로 하여금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게 할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공은 가히 애써 머무를 수 없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만일 수개 월 안으로 화패(禍敗)가 생길 것이면 내가 억지로 머물러 서로 구할 것이나 지금은 별로 드러난 화는 없소. 그러나 조정 여론이 서로 어긋나서 화기(和氣)가 날로 없어지고 더구나 속론이 행세하게 되어 청의(淸議)가 점점 쇠미해 가고 있으니, 수년 후에는 비로소 그 증세를 볼 것이오. 내가 지금 위로 말하고 아래로 지껄여도 다 서로 믿지 아니하니, 어찌 수년 후의 환란을 기다리고 외롭게 머물러 있겠소.” 하였다. 허엽이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근일의 일은 진실로 한심하오.” 하니, 이이가, “무슨 말이오?” 물었다. 허엽(1517-1580)이 말하기를, “백년 이래로 외척이 항상 국권을 잡아서 세상 사람들이 귀에 익고 눈에 젖어서 당연하게 알다가 하루 아침에 연소한 선비가(효원을 가리킴) 외척을(의겸을 가리킴) 배척하니,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괴상하게 여기는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은 바른 듯하나 실은 그릇되었소. 오늘 인백을 그르다 하는 이가 어찌 방숙(方叔 심의겸)을 위한 것이겠소? 공의 말이 그르오.”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순의 자)ㆍ계진(季眞 이후백의 자)ㆍ중회(重晦 김계휘의 자)가 비록 시망(時望)이 있으나, 식자(識者)가 논한다면 반드시 방숙의 문객이라고 할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이 크게 그르오. 이 세 사람은 다 사림(士林)에게 인망이 있는 사람들이오. 어찌 방숙에 의지하여 발신(發身)한 사람이겠소.” 하였다. 허엽의 의사에는 대개 의겸을 외척ㆍ권간으로 여기고, 박순 무리들이 다 외척에게 붙어서 대관(大官)이 되었다가 효원이 외척을 누르니까 시론(時論)이 효원을 재제(裁制)한다는 것이다. 이이가 한수ㆍ남언경에게 이르기를, “허태휘(許太輝 허엽의 자)의 소견이 심히 그릇되었소. 후일에 시사를 그르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오.” 하였다. 이이가 노수신(1515-1590)을 보고 말하기를, “시론이 분운한데 상공(相公)이 어찌 진정시키지 아니하오?”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능히 진정시키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이 이것을 맡지 아니하면 다시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겠소?”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공 같은 이는 퇴거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오늘날 김효원을 그르다 하는 사람들이 급급히 그의 잘못을 드러내려다 오히려 남의 의심을 일으킨 것이오. 당초에 김을 제재한 것은 중도(中道)를 얻어 사람들이 다 공론이라 하였는데 공격을 너무 심히 함에 이르러 사류들이 도리어 의심하기를 사감(私憾)을 가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그(김효원)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 하여 오히려 그를 옳게 여기는 의논이 나오게 만들었으니, 그르다고 하기에 더욱 주력하면 반드시 옳다고 하기를 더욱 강조하는 자가 있을 것이오.” 하니, 수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소. 제공(諸公)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이가 구봉령(1526-1586)을 보고 말하기를, “사림이 분열되어 인심이 흉흉한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이 주론(主論)한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니, 봉령이 말하기를, “내가 병으로 한 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어찌 능히 주론하겠소. 만일 지금에 다시 처분이 있으면 시사가 그르게 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하게 진정시킬 것이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 뜻이오.” 하였다. 이이가 박순(1523-1589)을 보고 말하기를, “시사에 진보할 만한 곳이 없으니 구차하게라도 화패(禍敗)를 면하면 족하게 되었소. 조정이 불화하게 된 것이 깊이 근심할 바이요, 연소한 사류의 의구(疑懼)가 매우 심하니 모름지기 안정시키는 것이 가하오.” 하니, 박순이 묻기를, “계책을 어떻게 해야 하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유성룡(柳成龍 1542-1607)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무리가 귀향하고 오지 않는 것은 아마 이간하는 말에 흔들린 모양이니, 이 말을 주상께 아뢰어 특명으로 부르게 하시오. 그리고 김우옹이 근래에 주상께 소대(疏待)를 당하니 또한 주상께 아뢰어 경연으로 끌어들여 이발 무리와 더불어 시론(時論)을 잡게 하고, 계함(季涵 정철) 역시 오지 아니하니 역시 특명으로 부르도록 청하시오. 이렇게 인재를 모아 등용할 때에 저울질을 공정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조화롭게 진정하기를 힘쓰시오. 이렇게 1, 2년만 하면 조정이 맑아질 것이오. 그렇지 아니하면, 속론(俗論)이 승(勝)하고 청의(淸議)가 쇠하여 장차 조정이 혼탁하게 되고, 청명(淸名)은 모두 효원의 무리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전배가 크게 인심을 잃어 마침내 화평한 날을 보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박순이 말하기를, “이 말이 진실로 옳소.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오.” 하고, 이어서 이이에게 머물기를 간절히 권하였다. 이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 년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책 한 권도 읽지 못하였으니, 이렿게 건몰(乾沒)하면 일생을 그르칠까 염려되오.” 하니 박순이 말하기를, “군은 이미 읽은 글이 많은데 오히려 물러가 독서하려고 하니, 나같이 본래 독서하지 못한 사람은 장차 어떻게 자처하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은 대신이 되어 이미 명을 받아 국사를 담당하니 물러갈 뜻을 두지 못할 것이오. 나에게 비할 것은 아니오.” 하였다. 어운해(魚雲海 1536-1585)가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유응서(柳應瑞 몽학(夢鶴)의 자)가 나로 하여금 공에게 머물기를 권하더군요.”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를 머물게 하여 장차 어찌 하자는 것이오.” 하였다. 운해가 말하기를, “주상의 마음이 자주 드나드시니, 만일 후일에 선단(善端)이 개발될 때를 만나도 조정에 유자가 없으면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앉아서 임금의 마음이 개발되기를 기다리려고 하여서 개발되기 전에는 시위소찬을 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면 자신부터 먼저 굽히는 것이니, 어찌 임금을 바르게 하겠소. 과연 앉아서 좋은 때를 기다리는 도리가 있다면, 성현도 역시 의당 앉아서 기다렸을 것인데, 자고로 앉아서 기다렸다는 성현이 없음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운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이 옳소.” 하였다. 사류가 이이가 이미 물러가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이발ㆍ송대립(宋大立)ㆍ이운해ㆍ허상(許鏛)ㆍ안민학(安敏學) 등이 와서 작별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정론(定論)을 하려 하니, 제공은 시험삼아 들어보오.” 하니, 다 그리하마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권간이 탁란(濁亂)한 지 오래 되었소. 그것을 꺾어 환하고 맑게 하여 사론이 신장되게 한 것은 어찌 방숙(方淑 심의겸 1535-1587) 제공의 공이 아니겠소. 인백(仁伯)이 국사를 하려면 거실(巨室)에게 인심을 잃지 아니하여야 할 것인데, 이에 전배를 배척하여 전배가 분을 품고 사림이 반목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인백의 허물이며, 이미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공론이 그를 제어하여 외관으로 내어보냈으니 이미 중도를 얻었는데, 오히려 미워하기를 너무 깊이 하고, 공격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은 전배의 허물이오. 이렇게 논단(論斷)하면 그 사정을 알았을 것이오. 지금부터는 서로 의심과 간격을 두지 말고 솔직하게 처하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소. 그렇지 아니하면 조정의 근심이 끊이지 아니할 것이오. 전에는 사류와 속류 양변(兩邊)뿐이더니 지금은 사류 중에 스스로 양변으로 나누어졌으니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은 인백이 아니고 누구이겠소.” 하였다. 어운해가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공론이오. 오늘 앉아 있는 사람이 다 이 의논을 좇으면 시론이 정(定)해질 것이오.” 하니, 좌중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이를 작별하며 탄식하기를, “지금 임금은 영명(英明)하게 뛰어나시고 뭇 현인이 조정에 모여있어 나 같은 무능한 사람은 다만 앉아서 태평이나 보렸더니, 일이 마침내 되지 아니하니 애석하오.” 하였다. 이이가 이미 귀향하니 시론이 더욱 나뉘어져 구할 수가 없었다.
※참고 : 사림의 등장과 전배와 후배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세자책봉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 (北人)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그뒤 선조대의 정국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李恒福)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비의 출처는 구차스러운 것이 아니다. 임금을 성취시켜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군자의 소원이나, 말이 쓰이지 아니하고 도(道)가 행해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부득이 물러가는 것이지 물러가는 것이 본래의 뜻은 아니다. 이상하다, 홍혼의 출처여, 말의 쓰이고 아니 쓰이는 것과 도(道)의 행하고 행치 아니하는 것은 논하지 않고 다만 김효원의 진퇴로 자기의 출처를 삼으니 어찌 그리 자중하지 못하는가. 아! 혼(渾) 같은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만 한때의 사류들이 모두 휩쓸려 효원에게 따르는 것으로 국시(國是)를 삼으니, 아! 괴이하다.
3. 만력 오년 정축(萬曆五年丁丑) 1577년(선조 10)
○ 5월. 임금이 장차 대원군 묘에 친제를 지내려 하니, 홍문관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예(禮)로 사묘(私廟)에 제사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노하여 말하기를, “누가 이런 의논을 내었느냐?” 하였다. 그리고는 장차 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려 하다가, 대신이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이때 김우옹(金宇顒)이 마침 옥당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약간 나무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일을 알지 못하니 말할 것 없지만 자네는 독서한 사람인데 어찌 근거없는 말을 하였는가?” 하니, 김우옹이 대답하기를, “요의(僚議)가 매우 날카롭게 나오는데 나의 지식이 부족하여 말리지 못하였다.”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길러주신 의리가 진실로 중한 것이지만 낳아주신 은혜도 경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통(正統)에 전일(專一)한다 하지만 생가(生家)의 사친(私親)의 정의를 끊을 수 있겠는가. 임금이 대원군의 묘에 친히 제사하는 것은 예에도 어김이 없는 일이고 정리(情理)에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옥당에서 무슨 소견으로 중지하도록 청하였던가.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임금이 대원군에게 제사하는데 만일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임하는 예로 한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아들이 아버지 사당에 들어가는 예로 한다면 정통을 존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까닭에 친히 제사하는 것이 불가하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옛일을 상고하지 못한 말들이다. 예에는 공조례(公朝禮)ㆍ가인례(家人禮)ㆍ학궁례(學宮禮)가 있으니, 공조례는 임금을 존중하므로 비록 제부(諸父)라도 공손히 신하의 예로 행하나, 다만 친부(親父)는 신하로 삼지 못하는 것이다. 가인례는 존속을 존중하는 까닭으로 임금이라도 부형의 아래에 가는 것이니, 한 나라 효혜황제(孝惠皇帝)가 궁중에서 제왕(齊王)의 아래에 앉았던 것이 이 때문이다. 학궁례는 스승을 높이는 것이므로, 비록 천자라도 노인에게 절하는 의식이 있으니, 한 나라 효명황제(孝明皇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더구나 대원군이 임금을 탄생하게 하셨으니, 가령 살아있다 하더라도 임금이 감히 신하로 생각할 수 없고, 궁중에서 서로 보면 꼭 절을 할 것이다. 지금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가 숙부에게 제사하는 예로 하면 무엇이 불가할 것인가. 속유(俗儒)들의 의리를 고찰하는 공부가 없고 단지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것만을 예로 알고, 사친(私親)을 끊을 수 없는 것은 알지 못하고 근거없는 의논을 아뢰어 임금으로 하여금 노하게 하여 지나친 거조가 있을 뻔하였으니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다.
4. 만력 육년 무인(萬曆六年戊寅) 1578년(선조 11)
금상(今上) 11년 정월. 흰 무지개가 해를 궤뚫으니, 삼공(三公)이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전에 서울에 놀던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관보(官報)를 인행(印行)한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본받아 생계(生計)를 하려 하여 의정부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조정의 관보를 인행하여 각 관청에 내고 그 값을 받아 생활의 밑천을 하겠습니다.” 했다. 이것을 정부에서 허락하였고, 또 사헌부(司憲府)에 품신하니 사헌부에서도 허락하였다. 그 사람들이 활자(活字)를 만들어 조정의 관보를 인쇄하여 각 관청과 외방 관청의 서울 주재 사무소[外方邸吏]와 사대부들에게 파니 받아 보는 사람들이 모두 편의하다 생각하였다. 이렇게 행한 지 두어 달 뒤에 임금이 우연히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관보를 간행하는 것은 사사로 사국(史局)을 설치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만일 다른 나라에 유전(流傳)되면 나라의 악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대신에게 묻기를, “누가 이 일을 주장한 것이오?” 하니, 대신이 황송하여 명백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그 사람들을 금부(禁府)에 가두고 형을 캐고 주모한 사람을 추궁하였다. 그 사람들이 이것으로 생활의 밑천을 삼으려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 주모한 사람은 없었다. 매를 많이 맞아 거의 죽게 되자 대간(臺諫)이 형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대신이 계청(啓請)한 뒤에야 법에 비추어 처리하라 하고는, 마땅히 대역 부도(大逆不道) 법으로 정하라 하였다. 금부에서 과중하다고 아뢰니, 처음에는 따르려 하지 않았으나, 뒤에 그 다음 가는 형률에 해당시켜 모두 귀양보내었다.
삼가 생각건대, 조정 관보를 인행한 것이 처음부터 간사한 모의가 아니요, 우망(愚妄)한 사람들이 사소한 이익으로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당초 정부와 사헌부에 품신하자 모두 인행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과실은 두 관청에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어리석은 백성만 죄를 줄 것인가. 설사 임금의 위엄이 진동하더라도 두 관청에서 인행을 허가한 사실을 자수(自首)하여 그 사람들을 구원하였으면 비록 견책은 당하였을 망정, 어찌 죽기까지 되었겠는가. 머뭇머뭇하고 말을 하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은 형벌을 당하게 하고, 임금이 백성을 속이는 거조를 행하도록 하니, 겁만 먹고 나약하여 의리가 없는 자들이라 하겠다.
○4월 이이(李珥 1536-1584)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이가 매번 우국(憂國)하는 생각을 품고 위훈(僞勳)을 삭제한 일이 좋은 정치의 기미가 되리라 생각하였고, 또 임금이 상중에 계시므로 올라와서 입시(入侍)하여 시정(時政)을 극진히 논하고 이어서 해골(骸骨 아주 돌아가는 것)을 청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못 본 체 하고 접견할 뜻이 없으므로 병을 핑계하고 대사간을 사면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이를 만류하였다. 김천일(1537-1593)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다른 나라와 다르다. 대개 사족(士族)은 가업(家業)을 대대로 전하는 것이 봉건(封建)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마땅히 나라와 좋고 궂음을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세가 급급한 때를 당하여 결단코 돌아가도 될 때가 아니다. 공이 지금 가려는 것은 다만 극히 위급한 형세를 보지 못한 까닭이다. 만일 위급한 것을 알 것 같으면 어찌 차마 버리고 돌아가리오. 지금 진보적으로 일을 하기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묵묵히 관위(官位)에 있으면서 인재를 수습하여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일을 부지(扶持)할 계책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나 원하는 것은 지금 세상의 군자는 모두 영무자(寗武子)의 미련한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심히 간절하니 내 마음이 척척(戚戚)하다. 이 말을 한 벌 적어서 친우들에게 보여라. 그러나 나는 이미 사퇴하였다. 지금은 무단히 다시 나올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지금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군이 어찌 차마 퇴거(退去)할 것인가.” 하고 이이를 책망하였다. 이이가, “내가 잘못하는가?” 말하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비유하면 부모의 병이 극히 위중하여 죽음이 조석에 달렸는데 자식된 사람이 약을 드리면 병든 어버이가 극히 노하여 그 약을 먹지 않고 혹 사발을 땅에 던지거나 자식의 얼굴에 던져서 코와 눈이 상한다면 자식된 사람이 물러갈 것인가, 울면서 간절히 권하여 노할수록 더욱 더 권할 것인가? 이것으로 군의 시비를 알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비유는 간절하오. 그러나 군신과 부자는 서로 다르지 않을까요? 만일 존장(尊丈)의 말씀 같으면 인신(人臣)이 어찌 물러갈 의리가 있겠소.” 했다. 이이가 떠나면서 정철(鄭澈)에게 말하기를,“지금 시사(時事)는 손을 댈 만한 곳이 없고, 오직 사림(士林)이 화합하여 논의가 중(中)을 얻어 맑은 의론이 조정에 현저하게 행해지면 한쪽 반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연소한 선비들에게 의심받고 있고 부박한 무리들이 그대의 말을 빙자하고 두 사람 사이를 교란하여 시비에 현혹되게 하니, 그대가 만일 조정에 있어서 의논을 평화롭게 가지면 선비들이 의심을 풀 것이요. 말을 만들고 일을 꾸미려는 무리들이 뜻을 잃어 함부로 굴지 못할 것이니 그 유익함이 어찌 적으랴. 또 그대는 진퇴를 정하지 않아 나와 같이 이미 물러갈 것을 정하고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니, 그대는 머물러 있어라. 내가 사림을 조화시킬 책임을 그대에게 부탁하고 간다.” 하였다. 정철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 경상(慶尙) 우후(虞侯) 손익(孫翌)이 군사를 시켜 군기(軍器)를 수련하는 데 너무 엄하게 독촉하여 군사들이 원한을 품고 밤중에 문을 열고 진을 쳐서 장차 난을 일으키려 했다. 손익이 겁을 먹고 몸소 나가 사과하니, 풀리었다. 절도사 곽영(郭嶸)이 수모자(首謀者)를 몰래 잡아 가둔 뒤에 그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크게 놀라고 수모자를 목베어 그 머리를 매달아 군중(軍衆)에게 위엄을 보이고 손익도 죄를 주었다. 무인(武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군(鎭軍)이 진장(鎭將)의 명령을 좋지 않게 생각하면 성(城) 밖에서 진(陣)을 치는 것은 근래의 상사(常事)이다. 단지 진장이 죄를 당할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던 것인데, 지금 마침 발각되어 수모자가 죽은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다.” 하였다. 군정(軍政)의 문란함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5월 정철(鄭澈)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삼았다. 정철이 직제학은 배명(拜命)하고 머물며 사림을 평화하게 하려 하더니 승지가 된 뒤로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출사(出仕)하였다. 그후 정원에 있으면서 바른 것으로 복역(復逆 임금의 잘못된 하교가 있으면 정원에서 도로 올리어 바로잡게 하는 것)하여 심히 사기(士氣)를 폈다. 이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당파설(黨派說)이 더욱 성하여 심의겸의 무리를 서(西)라 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東)이라 하니, 조정 신하 가운데 독립하여 뛰어나게 행하는 사람이나 용렬하여 이름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모두 동이나 서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정철은 남들이 서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이이가 정철에게 연소한 선비들과 통정하여 동ㆍ서라는 말을 타파하라고 권하였다. 홍가신(洪可臣)으로 사헌부 지평을 삼았다. 홍가신은 자못 남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조원(趙瑗)과 젊었을 때부터의 벗이었는데, 조원이 이조 좌랑이 되어 사정(私情)을 따르는 허물이 있고 또 조원이 경솔하여 인망이 없었으므로 홍가신이 먼저 조원에게 말하기를, “공(公)을 섬기려면 사(私)를 돌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군이 실수가 많으니 내가 사정을 따르노라고 탄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조원을 논박하여 체직(遞職)하게 하니 공론이 쾌하다 하였다. 홍가신은 사람들이 동인이라 지목하고, 조원은 사람들이 서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말을 만드는 사람들이, “동인이 서인과 화합하지 못하고 공격하여 이런 꼴이 되었다.” 하였다. 정철 역시 평정시키지 못했다.
○6월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이 병으로 사면하였다. 이후백이 전장(詮長)이 된 뒤로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아 정사가 볼 만하였다.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가보면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는 족인(族人)이 찾아가 보면서 말끝에 관직을 구하는 의사를 보이니 이후백이 얼굴빛을 고치며 사람들의 성명이 많이 기록된 종이 한 장을 내어보이는데 모두 장차 벼슬을 시킬 사람들이었고 그 족인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 이름을 기록하여 장차 천거하려 하였더니, 지금 자네가 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니 그것을 구하게 된다면 공도(公道)가 아니다. 애석하다. 자네가 만일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할 뻔하였는데.” 하였다. 그 사람이 그만 부끄러워서 돌아가버렸다. 이후백은 매양 하나의 벼슬이라도 시키려면 꼭 그 사람이 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두루 물어서 만일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잘못 시켰다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내가 국사를 그르쳤다.” 할 정도였다. 시론(時論)이, “이후백 같은 공정한 마음은 근세에는 비할 사람이 없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 병으로 사면하고 정대년(鄭大年)이 대신하였다.
○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죽었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적어 외물(外物)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 더위 주림 갈증을 능히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에 앉았고 혹은 열흘을 음식 하나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으로 효성이 있고 우의가 있어 형제간에 재물을 함께 나누어 쓰고 사사로이 감추는 것이 없었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으며 세상의 분화(芬華)와 성색(聲色)은 담담하여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성질이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하여 바다에 떠서 위험을 당하여도 놀라지 않았다. 하루는 표연(飄然)히 제주(濟州)에 들어갔었는데 제주 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객관(客館)으로 환영하고 아름다운 기생을 선택하여 같이 자게 하고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기생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약 이군(李君)에게 사랑을 받으면 이 광 하나를 상으로 주겠다.” 하였다. 기생이 이지함의 위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꼭 그를 유혹하려고 밤에 갖은 애교를 다 부렸으나 이지함이 끝끝내 끌리지 않으니 목사(牧使)가 더욱 경중(敬重)하였다. 젊었을 때 공부를 하지 않더니, 장성한 뒤에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이 독서하라 권하니, 그때야 발분하여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더니 얼마되지 않아 문의(文義)를 통하였다. 과거를 일삼지 않고 구속없이 스스로 방종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이와 매우 친숙하게 알았다. 이이가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할 것을 권하였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 성리학을 못한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명리(名利)와 성색(聲色)은 존장(尊丈)이 좋아하지 않으니, 무슨 욕심으로 학문에 방해가 되겠소?” 하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어찌 명리 성색만 욕심인가. 마음이 가는 곳이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욕심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방종하는 것을 좋아하여 규칙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이것은 물욕(物欲)이 아닌가.” 하였다. 그 형 이지번이 세상을 떠나자 이지함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하고 기년복(期年服)을 입은 뒤에도 또 심상(心喪)을 지냈다. 혹 예가 과하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자, 이지함이 말하기를, “형은 나의 스승이니, 내가 스승을 위하여 심상 3년을 한 것이다.” 하였다. 이해에 아산 현감을 시키니 친한 사람들이 부임할 것을 권하였다. 이지함이 홀연히 부임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으니, 아산에 어지(魚池)가 있어 괴로운 것이 된다 하였다. 대개 읍에는 양어지(養魚池)가 있으며, 인민을 시켜 돌려가며 고기를 잡아들이게 하므로 영세민들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이래서 이지함이 그 못을 없애버리니 후환이 영영 끊어졌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백성들이 바야흐로 그를 애모하였으나, 문득 이질(痢疾)을 얻어 오래지 않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 세였다. 읍민(邑民)이 애도하기를 친척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전에 김계휘(金繼輝)가 이이에게 “형중(馨仲 이지함의 자)이 어떤 사람인가? 누가 제갈량(諸葛亮)에게 비하니 과연 어떠한가?” 묻기에, 이이가 답하기를, “토정(土亭)지함의 헌호(軒號) 은 적용(適用)될 인재가 아니다. 어찌 제갈량에게 비하리오. 물건에 비유하면 기화 이초(奇花異草)와 진금 괴석(珍禽怪石) 같고 포백(布帛)이나 숙속(菽粟)은 아니다.” 하였다. 이지함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숙속은 아니나, 도토리나 밤 등속은 못 되랴. 어찌 전혀 쓸 곳이 없단 말인가.” 하였다. 대개 이지함이 내구성(耐久性)이 없어 일을 하는 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일이 많아 오래 일할 수 있는 재목이 못 되었으며 또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상도(常道)로 일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이의 말이 이러하였다.
○ 임금이 출행(出幸)하다가 소동(小童)이 행렬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관광하는 아이로 알았다가 다시 보니 군사였다. 임금이 측은히 여기고 하교하기를, “이런 아이들은 자모의 품을 떠나기 싫어할 것인데, 어찌 간과(干戈)의 역(役)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 아이를 보고서는 심회가 불편하여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불민(不敏)한 사람으로 임금의 자리에 있게 되어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더욱 한탄할 바이다. 병조에서는 군사를 점검하고, 만일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들이 있으면 모두 돌려보내어 나이가 찬 뒤에 병역을 시키도록 하라. 내가 차라리 수천의 군사를 잃을지언정 차마 아동을 복역시킬 수는 없다.” 하였다. 병조에서 군졸을 모아 그들의 나이를 말하게 하고 그들을 내려보내려 하였다. 군졸 가운데는 어린 자들이 있어도 고을에 돌아간 뒤에 수령(守令)이 다시 고역을 시킬까 두려워하여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삼가 생각건대,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은 누구에겐들 없으리오. 더구나 주상(主上)의 영명(英明)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리오. 지금 하교(下敎)를 읽으니 사람이 감동되어 눈물이 흐른다. 진실로 이 마음을 미루어 인정(仁政)을 행하면 적자(赤子)의 괴로움이 무엇인들 풀리지 않으리오. 애석하다. 애연(藹然)한 선(善)의 단서가 한때 발(發)하나 끝내 정사(政事)에 베풀어져 폐단의 개혁은 볼 수가 없으니, 하늘이 어찌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임금이 어진 마음을 가지고도 어진 정치는 행하지 못하는가? 아! 한탄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 양사(兩司)가 논박하여,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윤현(尹晛)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이때에 선비들이 둘로 나누어지니 소위 동인에는 청명(淸明)이 있는 후진이 많고, 서인에는 다만 전배(前輩) 수 인뿐이요 따르는 사람은 모두 시망(時望)이 없었다. 이에 선비들이 동인이 성하고 서인이 쇠한 것을 알고, 또 서인이 김효원을 내어보낼 때에 거조(擧措)가 적당치 못하여 공론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진취적인 무리들이 모두 동인으로 들어가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기세를 올렸다. 김계휘(金繼輝)는 비록 서인이라 지목받았으나 연소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연소한 선비가 간혹 김계휘(1526-1582 대사헌)에게 품명(稟命)을 하였다. ...홍문관 수찬(修撰) 강서(姜緖)가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선비들이 동ㆍ서 두쪽으로 분립되었으나, 모두들 쓸 만한 사람들이니 한쪽만 쓰고 한쪽은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동ㆍ서라는 것을 알았다. 이발(李潑)은 동편을 주장하고, 정철은 서편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견해는 같지 않았으나 모두 인망이 있고 나라에 봉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당시 제일이었다. 이이가 매양 정철과 이발에게 이르기를, “군들 두 사람이 화합하여 동심(同心)으로 조화시키면 사림(士林)이 가히 무사할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간절히 말하니, 정철이 합심하여 이발과 교제하며 서로 화평을 이룰 것을 논하려 하였으나, 동인 가운데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인의 착하지 못한 사람들을 공격하여 후환을 막으려고 하여 모두 윤두수 삼 부자(父子)를 서인의 괴수라 하여 쫓아버리기로 결의하였다. 오로지 유성룡(柳成龍)과 이발(李潑)은 따르지 않았다.
5. 만력 칠년 기묘(萬曆七年己卯) 1579년(선조2)
○ 3월. 사헌부에서 구언하는 하교에 응하여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란하고, 동ㆍ서의 시비를 분별하여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배척하고 김계휘(金繼輝)ㆍ정철(鄭澈)을 모두 사당(邪黨)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비가 벌떼 같이 일어났다. 이때에 동인이 매우 성하여 명예를 구하는 자들이 동인으로 가고 관작을 바라는 자가 동으로 붙고 속류(俗流) 재상(宰相)으로 전일 서인에게 배척당한 자들이 모두 이 틈을 타서 동인에 아첨하여 많이들 요직을 얻었다. 대사헌 이식은 이미 요직에 있었으나 바야흐로 지위를 굳게 하려 하였고, 집의(執義) 홍혼(洪渾)은 전에 동인을 배척한 까닭으로 퇴거(退去)당한 것을 후회하더니 동인들이 세력을 얻게 되자 팔을 걷어부치고 일어서며 말하기를, “지금이야말로 군자가 일을 할 때이다.” 하고 입론(立論)을 매우 편벽되게 하였다. 장령(掌令) 정희적(鄭熙績)은 전에 심의겸의 일로 스스로 미움을 당하리라 생각하던 차에 을해년에 서인이 정희적을 지방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정희적이 분을 품었었다. 이때 장령이 되자 상소하여 심의겸과 그의 무리를 배척하고 장차 국시(國是)를 정하여 서인이 다시 들어올 길을 막으려 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은 안정되지 않았다.
삼가 생각건대, 심의겸(沈義謙)은 외척으로 약간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다. 비록 사류(士類)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어찌 그가 있고 없는 것이 관계 있으리오. 김효원(金孝元)은 비록 재주는 조금 있으나 도를 듣지 못하고 도량이 가볍고 식견이 천박하니 사림의 영수는 될 수가 없다. 이 두 사람의 시비를 분간하는 것이 어찌 치란안위(治亂安危)에 관계될 것인가. 서인은 꼭, “심이 옳고 김이 그르다.” 하는데, 진실로 미혹한 일이요, 동인의, “김이 옳고 심이 그르다.”는 말도 저쪽에서 하는 말을 막자는 것이니, 이것 역시 미혹(迷惑)이 아닐 수 없다. 심의겸이 자신의 덕과 힘을 헤아리지 않고 국사(國事)를 하려는 것이 이미 글렀고, 김효원이 선배를 경솔하게 훼방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동ㆍ서 양쪽으로 분열되게 한 것이 또 어찌 옳으랴. 일을 말하면 두 사람이 모두 그르고 재주를 말하면 두 사람이 모두 속류(俗流)보다 나으니 버려서는 되지 않는다. 만약, “김이 심보다 낫다.” 하면, 말이 옳거니와, 만약, “김이 옳고 심이 그르다.” 하면,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다. 가령 두 사람이 분명히 시비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국가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분별하려 하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결렬되어 인재를 버리고 국맥(國脈)을 상하게 하여 큰 화단(禍端)이 되었다. 온 세상이 이에 휘말려들어 잘못을 깨닫지 못하니, 아! 어찌 운명이 아니랴. 지금 서인을 눌러 기운을 펴지 못하게 하니, 유속비부(流俗鄙夫)들이 틈을 타 권세를 잡고 동인과 합세하여 하나가 되고, 동인은 또 유속들에게 명령을 받고 서인을 밉게 보아 서인이 다시 들어올까 염려하니, 심히 미혹된 것이다. 오늘날의 도(道)를 그대로 좇고 오늘날의 의논을 고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거룩한 군주와 어진 정승이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아! 탄식을 금할 수 없다.
○9월 ...백인걸(1497-1579)이 이이와 조광조와 이황(李滉)의 우열을 말할 때, 이이가 말하기를, “자품(資稟)을 논하면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이 월등히 나으나, 조예(造詣)로 말하면 퇴계(退溪 이황의 호)가 낫습니다.” 하였더니, 백인걸이 머리를 흔들고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아주 틀렸어! 퇴계가 어찌 정암을 바라보랴.” 했다. 그뒤에 백인걸이 성혼과 이이가 크게 쓰일 사람이라고 천거하였으나, 이이는 경솔한 병통이 있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나무랐다. 백인걸이 말하기를, “그(이이)가 정암을 부족하게 여기고, ‘정암이 퇴계 아래에 간다.’ 하므로 내 말이 이러한 것이다.” 하였다. 백인걸이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나, 재주는 실용에 적합하지 못하고, 다만 강개(慷慨)하게 의논을 세울 뿐이었다. 성혼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백공의 재주는 바둑에다 비하면 어떤 때는 묘한 수를 두어 국수를 대적할 만하나 어떤 때는 잘못 두니 믿을 재주는 못 된다.” 하였다. 말년에 상경하여 자헌(資憲 정 2품)에 올랐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83세였다.
6. 만력 팔년 경진(萬曆八年庚辰) 1580년(선조 3)
○...정철(鄭澈 1536-1593)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정철이 대사간에서 갈린 뒤로 관직에서 물러나 나오지 않고 여러번 소명(召命)을 사양하더니, 이 벼슬을 시키자, 선인(先人)에게 추증되는 것을 중히 여겨 배명(拜命)하고 부임하였다. 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굳세고 개결(介潔)했으나,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 6월. 큰 비가 내려 강과 바다가 넘치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떠내려가고 능곡(陵谷)이 변하니 근년의 수재가 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이때에 하삼도(下三道)에는 전염병이 오히려 성하니 민생에 재액이 끊이지 않았다. 홍성민(洪聖民)이 이문(吏文)을 짓는데 일등이 되니 가선(嘉善)으로 올렸다. 사헌부에서, “작은 일로 품계를 올리는 것은 덕을 명하는 정사가 아니오니 개정하십시오.” 하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정원에서 아뢰기를, “금년의 수재는 전보다 더욱 심하여 밖에서 들어오는 보고가 극히 괴상합니다. 서울에까지도 하룻밤 사이에 큰 비가 퍼부어 평지의 물이 한 길이 넘고 교량이 무너지고 도로에 가득 물이 넘쳐나며 집이 무너져 떠내려가고 깔려서 다치거나 빠져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교외의 수많은 분묘가 무너져 내려 백골(白骨)들이 드러나 삼태기를 들고 백골을 덮어 묻는 사람들이 잇달았으며, 전곡은 다 매몰되고 채소밭은 남은 것이 없어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창황히 울고 있어 듣고 보기에 참혹하고 측은합니다. 변이 까닭없이 생긴 것이 아니니, 도(道)로써 이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수성(修省)하십시오.” 하였다. 답하기를, “아뢴 말이 옳다. 금년 수재는 극히 놀랍다. 내가 조심하여 더욱 성념(省念)하겠다.” 하였다.
○ 10월. 이산해(李山海 1539-1609)로 형조 판서를 삼으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은한 뒤에 3번이나 사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길에 나온 후로 청관요직(淸官要職)을 지냈으며 육경(六卿)의 지위까지 올랐다. 위인이 청신(淸愼)하였으나 기절(氣節)이 적고 부드러워서 남의 말썽을 피하였기 때문에 위 아래로 미움을 받지 않아 물망(物望)을 잃지 않았다. 동ㆍ서로 당이 갈린 뒤에 의논이 한결같이 동인을 따라 능히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이이(李珥)ㆍ정철(鄭澈)이 모두 그의 친구였으나 서로 저버리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니, 식자가 웃었다. 이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 여수(汝受 이산해의 자)는 오래지 않아 정승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승은 순직하고 삼가며 재기(才氣)도 없고 하는 것은 없으나 청명(淸名)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니, 여수가 바로 그렇다.” 하였다.
7. 만력 구년 신사(萬曆九年辛巳) 1581년(선조 14)
○ 대사간 이이(1536-1584)는 병으로 글을 3번이나 올려서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휴가만을 내리고 직을 갈아주지 않았다. 임금이 조금 편치 않으므로, 나가서 사은하고, 또 간관(諫官)을 사퇴하고 서사(庶司 보통의 벼슬자리)에서 분수에 따라 직(職)을 다할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조리(調理)하여 직무를 행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일본의 사신을 근정전(勤政殿)에서 접견하려고 하였는데, 관례로써는 마땅히 여악(女樂)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삼사(三司)에서 서로 글을 올려, 여악을 쓰지 말고, 멀리서 온 이에게 예(禮)로써 보이기를 청하여 여러 날을 다투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간원에서는 먼저 다투기를 중지하였다. 사람들이 혹시 의심하였으나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니 먼저 백성들의 거꾸로 달린 듯한 곤경을 풀어놓고 난 뒤에야 예(禮)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예악(禮樂)부터 먼저 일삼겠는가.” 하였었다. 연회하는 날 여악을 쓰니 요사한 교태를 다하였는데, 정철(鄭澈)이 시위병관(侍衛兵官)으로서 보고 나서 이이에게 말하기를, “형(兄)이 간관으로서 이것을 그만두게 하지 못해 정전(正殿)에서 요귀(妖鬼)의 놀이를 하였으니, 옛 사람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풍으로 제재하여 백료들이 진작(振作)되고 숙정(肅正)되었고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 한 무부(武夫)가 시골에서 입경하여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장령 정인홍은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위엄이 먼 외방(外方)까지 뻗치어 병사ㆍ수사나 수령 무리까지도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하니, 진실로 장부다.” 하였다. 이 말을 이이가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덕원(德遠)인홍(仁弘)의 자 이 헌관(憲官)이 되니 많은 사람이 꺼려하고 미워하는데, 이 무부는 감히 칭찬하니 그가 바로 장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어버이를 뵈려 시골로 돌아가니, 성(城) 안의 방종한 자들은 모두 기뻐하기를, “이제야 어깨를 펴겠다.” 하였다. 다만 인홍은 기운이 경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처사가 혹 조급하고 떠들썩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이가 매양 글을 보내어 권하고 경계하기를, “큰 일에는 마땅히 분발하여 일어날 것이지만 작은 일은 혹 간략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소. 뭇 사람의 말썽이 떼지어 일어나게 되면 시사(時事)가 더욱 할 수 없이 될 것이오.” 하였다. 인홍은 이이가 지나치게 유약하다고 의심하여 안민학(安敏學)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 이이의 자)은 굳세게 꿋꿋하게 일할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민학이 이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덕원을 위(韋)로 삼고 덕원은 나를 현(弦)으로 삼아 덕원이 나와 하나로 합친다면 어찌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하였다. 이때 청명(淸名)의 선비인 성혼(1535-1598)ㆍ이이(1536-1584)ㆍ유성룡(1542-1607)ㆍ이발(1544-1589)ㆍ김우옹(1540-1603)ㆍ정인홍(1535-1623) 등이 성 안에 모이기는 하였으나, 임금의 뜻이 선비를 믿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시사가 진보될 형세가 없었다. 유성룡이 이이에게 묻기를, “지난번 대궐 뜰에서의 의논을, 공은 근본적인 장책(長策)이 아니라 하였는데, 근본적인 장책이란 어떤 것이오?” 하기에, 이이는 대답하기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아래로는 조정을 맑히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이오. 임금의 마음이 사류를 가벼이 여기고 오히려 유속(流俗)을 좋아하시는데 어찌 시사가 다스려질 가망이 있겠소?” 하였다.
○ 이조에서 김효원(金孝元)을 사간(司諫)의 망(望)에 추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을 불화하게 한 자는 모두 그르다. 김효원은 다만 서관(庶官)이나 낭료(郞僚)에 두면 족할 것이지, 어찌 사간의 망에 올리겠는가?” 하니, 이에 사류들이 매우 불안해하였다. 이발이 이이에게 묻기를,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이 일을 논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이이가 답하기를, “이 일은 다만 대신이 아뢸 일이지, 젊은 사류들이 경솔히 아뢴다면 주상의 의심만 더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박순을 보고 말하기를, “지금 사류들이 화합하지 않는 것은 동인ㆍ서인의 말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까닭이므로 지금 마땅히 동ㆍ서를 씻어버리고, 다만 재기(才器)를 보아 기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김효원은 쓸 만한 재기인데도 주상께서 청직(淸職)의 망(望)에 올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직 동ㆍ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 계책을 얻음이 아니요, 대신이 마땅히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에 경연에서 박순이 아뢰기를, “동ㆍ서란 말은 항간의 잡담이오니, 조정에서는 마땅히 입에 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기용해야 될 인재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김효원은 재기가 가히 쓸 만하므로 버리기는 아깝습니다. 근일 동ㆍ서란 말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논박을 당하는 사람이나 산직(散職)에 두어진 사람들이 모두 동ㆍ서로써 구실을 삼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효원을 기용하지 않는다면 핑계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효원을 기용하지 않는다 해도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이는 아뢰기를, “한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것은 비록 큰 상관이야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동ㆍ서란 말이 해소되지 못한다면, 사류들이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무사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반드시 동ㆍ서를 씻어서 털끝만한 흔적도 없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효원이 재기가 없다면 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효원의 재주가 가히 쓸 만한데도 동ㆍ서의 말썽에 이끌리어 쓰지 않는다면 심히 사류들이 불안해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柳成龍)ㆍ수찬(修撰) 한효순(韓孝純)도 역시 효원의 쓸 만한 점을 되풀이하여 진달하였고 옥당에서는 차자까지 올렸으나, 임금은 끝내 석연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 이조 판서 이산해(李山海)가 모상(母喪)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산해는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로지 공변된 도리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의논이 모두 그의 선(善)함을 칭송하였었다. 그런데 뜻밖에 모상(母喪)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김귀영(金貴榮)이 대신하자 청탁하려는 무리들이 갓을 털고 일어나 귀영의 문간에 저자같이 모여드니 당시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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