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석담일기 1(이이)

청담(靑潭) 2017. 12. 6. 23:45

 

석담일기(石潭日記) 1

이 이(李 珥 1536-1584)

석담일기 상권(石潭日記卷之上)

 

1. 명종대왕(明宗大王) 20년(1565)

○ 8월. 윤원형( ? -1565)의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방축하였다. 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나 사람됨이 음흉ㆍ독살스럽고 재리를 탐했다. 중종 말년에, 인종(仁宗)은 동궁으로 있으면서 장성하였으나 아들이 없고, 명종(明宗)은 어린 채 대군이 되었다.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 1487-1545)은 윤원형과 그 형 윤원로(元老 ? -1547)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릴 때라 동궁(東宮 인종(仁宗))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중궁(中宮)을 누르고 그들의 세력을 펴려 하여 임금께 아뢰어, 윤원로 형제를 외직(外職)으로 추방하니,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김안로(1481-1537)가 패하고, 윤원로 등이 조정에 돌아오자 날로 유언비어가 나돌아 인종은 몹시 불안해 했고, 문정왕후는 또 명종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여 외신(外臣)들에 의탁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려 하니, 이기(李芑 1476-1552)가 몰래 안정과 공고를 기할 수 있는 계책을 바쳐 윤원로 형제와 결탁하게 하였다. 인종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대신들에게, “중종의 적자가 대군(大君 명종을 가리킴)뿐이니 왕위를 계승케 하라.” 했다. 인종이 돌아가자 대신들이 명종을 맞아 즉위하게 하였다. 윤원형 등이 그 기회에 화를 일으키려 하여, 이기ㆍ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ㆍ허자(許磁)ㆍ김광준(金光準) 등과 음모하고 말을 만들어 퍼뜨리기를, “유관ㆍ유인숙(柳仁淑)ㆍ윤임(尹任) 등이 모반하여 임금을 폐하고, 계림군 유(桂林君瑠)를 세우려 한다.” 하고, 또 봉성군 완(鳳城君岏)의 현명함을 꺼려 하여, “그는 간신들에게 추대되었다.” 하여, 드디어 문정왕후에게 고하고 밀지를 내리게 하여 대옥(大獄)을 일으키니, 당시의 선비들로 그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위사공신(衛士功臣)으로 녹명(錄名)되었다. 또 공론이 사라지지 않음을 걱정하여, 항간의 말들이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면 그대로 역당(逆黨)이라 지목하니, 이 때문에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눈짓만 하였다. 윤원형의 세력이 크게 떨치자, 또 윤원로가 세력을 다투려 할까 두려워하여, 유사(有司)를 사주하여 죄를 논하여 사사(賜死)하게 하고, 권세를 부리고 이익을 노림에 못하는 짓이 없었다. 윤원형은 서울에 큰 집 10여 채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재물이 넘쳐날 지경이었으며, 외람되게 의복과 수레를 마치 대궐안의 그것과 같이하고, 또 그 본처를 내쫓고 첩 난정(蘭貞)을 아내로 삼아, 그녀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의 말이면 다 따랐으니, 뇌물을 받아들이고 수탈하는 것이 또한 그 첩의 충동질이 많았던 것이다. 그가 생살(生殺)의 권리를 잡은 지 20년에 사림(士林)은 분함을 품고서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에서야 대사간 박순(朴淳)이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와 의논하여 합계(合啓)를 올려 그를 원방(遠方)으로 추방하기를 청하고 합문 밖에서 허락을 기다려 엎드려 있기 여러 날, 위로 삼공(三公)으로부터 아래로 수문(守門)에 이르기까지 모두 죄를 주자고 입을 모아 청하자, 이에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추방하도록 명을 내렸다. 예조 판서 윤춘년(尹春年 1514-1567)도 논핵으로 파직되었다. 윤춘년은 윤원형의 족제(族弟)로 원형에게 아부하여, 윤원로를 벌하자고 청하여 이 일을 계기로 출세하여 급속히 여러 청환현직(淸宦顯職)을 거쳐 올라, 함부로 방자히 놀고 자신을 가졌었다. 부박한 무리들이 그를 따라 학문을 배우려 하는 자가 많아지자, 윤춘년은 망령스럽게 부로 잘난 체하여 사도(師道)로 자처하고, 득도(得道)하였다고 자칭했으나, 그 논설이란 것이 모두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를 주어 모은 것이요, 실은 아무런 주견이 없는 것이어서 식자들이 그 망령됨을 비웃었다. 그러나 관직 생활만은 다소 청렴하였으므로 원한을 적게 사서, 그 직위만 파면한 데 그친 것이다.

○ 11월. 윤원형이 죽었다. 윤원형이 실직하자 백성들은 거리에 모여 욕질하며 돌과 기와조각을 던지는 등 심지어 쏘아 죽이려 하는 자까지 있었다. 윤원형이 모래 교하(交河)로 갔으나, 원한을 품은 자가 추적해 올까 겁이 나서, 다시 몰래 강음(江陰)으로 옮겨가서 그 첩 난정(蘭貞)과 매일 울분을 머금고 서로 마주보고 울기만 하였다. 이때 윤원형의 전처 김씨의 계모 강씨(姜氏)가 형조(刑曹)에 글을 올려, 난정이 김씨(金氏)를 독살한 것을 고발하였다. 인륜의 대변(大變)이니 형조에서 판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여 의금부(義禁府)로 넘겨 연루자를 잡도록 임금에게 아뢰니,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에서 난정을 금부(禁府)에 하옥시키자 청했으나, 임금이 차마 처벌할 수 없어서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난정이 이 말을 듣고 몹시 겁을 먹고 있는 차에 어떤 사람이,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온다고 잘못 전하자, 난정이 놀라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윤원형이 몹시 애통해 하다가 오래지 않아 그도 또한 죽으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지 마지 않았다.

이황(李滉 1501-1570)을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로 삼고, 전지(傳旨) 내리기를, “내가 불민(不敏)한 탓으로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는 듯하다.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노병(老病)이라 하여 사퇴하니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경(卿)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하였다. 이황(李滉)은 어릴 때부터 도(道)를 즐기어, 만년에는 더욱 힘써서 학문이 심히 정밀했으며,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예안(禮安)에 물러나 있으며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쉬이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았다. 이때에 윤원형이 죽고, 사림(士林)은 교화(敎化)의 정치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이황을 부르는 명령이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2. 병인(1566) 21년

○ 4월. 양종선과(兩宗禪科)를 폐지하고 내수사(內需司)의 인신(印信)을 없애버렸다. 당초에 중 보우(普雨 1509-1565)가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풀어 중들과 속인에게 추앙을 받게 되자 명성이 대궐까지 들려왔다. 이에 위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속이고 세를 얻어 세인들을 현혹시키고 불사(佛事)를 크게 벌리며 양종선과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보우는 자칭 득도(得道)하였다 하고, 거처하기를 참람스럽게 대궐처럼 하였다. 문정왕후가 돌아간 뒤로, 조정과 유생들이 연달아 소(疏)를 올려 청하니, 제주(濟州)로 유배시키게 되었고, 마침내 목사(牧使) 변협(邊協)에게 죽었다. 양종선과는 그때까지도 혁파되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양사가 합계하여 폐지한 것이다. 내수사는 본시 제조(提調)의 벼슬과 인장(印章)을 주지 않았던 것인데, 인장을 쓰게 된 뒤로는 환관들이 공사를 빙자하고 사리를 취하여 자못 위세를 부리는 폐단이 있었다. 이때 와서 양사가 합계하여 인신을 폐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제도를 혁파하자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였다.

 

3. 정묘(1567) 22년

○ 6월 27일. 중전(中殿)이, “천지(天地) 신지(神祗)에게 기도드리라.” 명하고, 또 죄인들을 소방(疏放)하도록 하였다. 한낮이 되자 임금의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비록 야건수를 구해 들어갔으나, 미처 드시지를 못하였다. 삼경에 중전이 급히 대신을 부르니 이준경 등이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들과 함께 침전에 들어갔으나, 임금은 이미 말을 못하고 또 보지도 못하고, 나인들이 관대(冠帶)를 와내(臥內 임금이 누운 곳)에 들여놓았을 뿐이었다. 이준경 등이 나아가 큰 소리로, “신(臣)들이 왔습니다.” 하였으나, 끝내 대답이 없었다. 이준경 등이 사관(史官)을 시켜 그들의 이름을 크게 써서 임금 앞에 들어보였으나, 역시 보지도 못해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준경 등이 중전에게 아뢰기를, “일이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이 되었사오니, 마땅히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임금께서 고명(顧命 유언(遺言))을 못하시니, 중전께서 지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중전이 답하기를, “을축년 위급하셨을 때 이미 왕명으로 봉서(封書) 한 통을 내렸으니 마땅히 그 사람으로 이어야 할 것이오.” 하니, 준경 등은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사직의 대계는 정해졌습니다.” 하고, 준경 등이 빈청(賓廳)으로 나와 앉으니, 조금 후에 곡성이 들리었다. 이미 승하했던 것이다. 준경 등이 도승지 이양원(李陽元)ㆍ동부승지(同副承旨) 박소립(朴素立)ㆍ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와 시위장사(侍衛將士)를 시켜 덕흥군(德興君) 저택으로 가서 사위(嗣位)할 분을 모셔 오도록 하였다. 이양원이 나가려 하자, 황대수가 말하기를, “어느 군(君)을 모셔올 겁니까? 어찌 대신에게 물어보지 않소?” 하니, 이양원이 말하기를,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물을 필요 없지 않소?” 하였다. 황대수가 말하기를, “비록 정해졌다 하더라도 꼭 대신의 말씀을 들어보는 것이 옳소.” 하였다. 그래서 대신에게 묻기를, “덕흥군(德興君)의 몇 째 아드님을 맞아올 것입니까?”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이시다.” 하였다. 이양원 등이 저택에 당도하니 위사(衛士)들이 아직 모이지 않아 잡인(雜人)들이 함부로 들락거려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양원 등이 정창서(鄭昌瑞 선조의 외숙)를 불러 뵙겠다고만 하고 어느 군(君)을 모셔 간다고 밝혀 말하지 않았다. 황대수가 말하기를, “양손 세 분을 다 나오시라 청하여 직접 사자(嗣子)를 뵌 뒤에 호위합시다.” 하니, 양원이 정창서에게 묻기를, “어느 군(君)이 장속(裝束)하였나?” 하니, 정창서가 말하기를, “궁중에서도 하성군이신 줄 안다.” 하니, 양원등이 그제야 뵙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경박한 자들이 호종하면 공신이 된다고 망언하여 다투어 이름을 적었고, 궁노(宮奴)가 그 녹명한 것을 양원 등에게 주니, 양원 등이 이것을 받았다. 해가 높이 솟아, 사자가 경복궁(景福宮)에 들어와 상주(喪主)가 되었다. 그 후 대간(臺諫)에게 계청하여 그 명록은 불태워버렸고, 양원 등은 모두 파직되었다. 금상 실록에 있다.

 

4. 융경 원년 정묘(隆慶元年丁卯) 1567년(명종 22)

○ 이황(李滉)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황은 산중에서 도(道)를 지켜 인망(人望)이 날로 무거워 져 명종이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말년에 이황을 불러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하니, 이황이 올라와 미처 명령을 받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시니, 이황은 조정에 있으면서 명종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그러다가 종백(宗伯 예조 판서)을 시키자 병으로 사직했다. 임금께서, “경(卿)의 어진 덕을 들은 지 오래요, 이렇게 새로 정치를 시작하는 때에 경이 만일 벼슬에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소. 사직하지 마오.” 하고 일렀으나, 이황은 끝내 직을 맡을 의사가 없었다. 이이(李珥)가 이황을 뵙고서, “어린 임금님이 처음 서시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했더니, 이황은,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재주도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소.” 하였다. 그때 성혼(成渾)으로 참봉(參奉)을 시켰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좌석에 있던 한 사람이, “성혼은 왜 오지 않소?” 물으니, 이이가,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에 종사하지를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하라 하면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했더니, 이황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숙헌(叔獻 이이의 자)은 어째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하니, 이이가 이에 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일신(一身)의 사계(私計)를 생각해 줄 여지가 없습니다. 성혼으로 하여금 낮은 벼슬에 분주하도록 한대야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經筵)에 계신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이황이 말하기를,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남에게는 이로움이 미치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게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이 조정에 계시면서 가령 아무 계책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임금님이 중하게 생각하여 의지하신다면 다른 사람들도 기뻐하며 힘입을 것이니, 이 역시 이익이 남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이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대신은 도(道)로서 군주를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이황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기왕 다시 조정에 섰으면 당연히 새 임금을 보필하다가 되지 않는 것을 알면, 그때 물러나도 될 것을 이처럼 간곡히 사절하니, 이른바 능력을 알고 분수를 헤아려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않는 것을 편히 생각하는 분인가?

 

○ 예조 판서 이황(李滉)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이황이 병으로 여러 번 사직하려 하니, 체직(遞職)을 허락한 것이다. 다음날 조정에 하직도 하지 않고 돌아가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산릉(山陵 국장을 가리킴)이 임박하였는데 장례에 참례하지 않고 곧장 가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황은 학문인 정심(精深)하여,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쉬이함이 이와 같았다.

○ 9월. 심통원(沈通源 1499 - ?)이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시골로 쫒겨났다. 심통원은 심연원(沈連源)의 아우이며, 왕대비에게는 종조[從季祖]가 된다. 젊을 때 누차 과거에 응하였으나 붙지 않아 몹시 의기를 잃었다가 김안로(金安老)가 나라 일을 맡자, 심통원이 대정(大庭)에서 대책(對策)을 쓰며 김안로를 충직하다 하여 장원에 합격하였다. 중종(中宗)께서 이것을 매우 옳지 못하게 여겼기 때문에 좋은 벼슬자리는 얻지 못하다가 명종이 즉위하자 인척(姻戚)으로 발신(發身)하여 별안간 청환요직(淸宦要職)을 지나 드디어 정승에까지 올랐다. 사람됨이 용렬하고 나약하며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 처사가 흐리멍텅한데다 탐욕이 한이 없어 뇌물이 폭주(輻輳)하여 집이 마치 저자와 같았다. 큰아들 유(鑐)와 막내아들 화(鏵)가 이익만을 일삼아 남의 종과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이 도적과 다름이 없었다. 동복(童僕)들도 이것을 본받아 백성들을 해롭게 하였다.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 죽었다. 춘년은 사람됨이 경망하며 그 학문이 심히 잡박하여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어 모아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도(道)를 얻었다 말하고 또 음률(音律)에 매우 밝다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사람의 두어 구절 단편(短篇)만 보면, 그 사람이 어진지 아닌지, 오래 살지 일찍 죽을지, 귀하게 될지 천하게 될지를 알 수 있다.” 했다. 처음 윤원형(尹元衡)에 붙어 윤원로(尹元老)를 공격 제거한 것으로 갑자기 대관(大官)이 되었고, 학생(學生)들을 모아 강학하면서 망령되게 사도(師道)로 자처하니 부박(浮薄)하고 명예를 구하는 자들이 그를 따라 놀았다. 논의(論議)가 활발하고 걸핏하면 성현(聖賢)을 끌어다 말하였는데 그의 말인즉, “성인이란 별것 인가. 단지 천심(天心)과 합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전통이 없더니 전 왕조(고려를 가리킴)의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처음 발단을 시켰으나 법도가 마치지 못하였고, 우리 왕조(李朝))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그 단서를 이어받았으나 아직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광조가 도(道)를 주창함에 미쳐서 배우는 이들이 모두 함께 그를 추존하였다. 지금 성리학(性理學)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광조(1482-1519)의 힘인 것이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옛사람들은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야 도(道)를 행하려 했던 것이다. 도를 행하는 요체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 애석하다. 조 문정(趙文正 문정은 광조의 시호)은 현철(賢哲)한 자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을 가지고서 학문이 미처 대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요로(要路)에 올라 위로는 임금 마음의 잘못됨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권력 대가(大家)들의 비방을 막지 못하여 겨우 충성(忠誠)을 들이려 하자 참소하는 입이 벌써 열려, 몸은 죽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게 되어 도리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징계(懲戒)삼아 감히 일을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늘이 이 도[斯道 즉 유교의 도(道)를 말함]를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였던가. 어째서 이 사람(조광조를 가리킴)을 낳기만 하고 도를 성취하게는 하지 않았는가. 문정공(文正公)이 비록 진퇴(進退)의 기미에는 밝지 못한 점이 있었으나,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性理學)을 높일 만하고 왕도(王道)가 귀하며 패도(覇道)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그의 이 도[斯道]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뒷사람들이 태산(泰山)과 북두(北斗)같이 우러러 보고, 또 조정으로부터의 은총(恩寵)을 내림이 갈수록 더욱 융숭함은 실로 당연하다.

 

5. 융경 이년 무진(隆慶二年戊辰) 1567년(선조 1)

○금상(今上) 원년(元年) 정월. 이조 참의 강사필(姜士弼)이 죄로 파면되었다. 강사필(1526-1576)은 본래 재주도 덕망도 없었는데, 그릇되게 시속 무리들의 추앙을 받아 사헌부 사간원을 모두 거쳐서, 벼슬길에 나온 지 10년도 못 되어 이미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다. 사람됨이 우매하고 지조가 없으며, 술만 좋아할 뿐인데, 망령되게 당로(當路) 요직을 바라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크게 실망하고는 앙앙(怏怏)히 불만을 털어 놓으며 직사(職事)는 다스리지 않고 술에 방종하여 체면을 못 차리니 공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 우의정 민기(閔箕 1504-1568)가 죽었다. 민기는 비록 당시의 공론(公論)이 그를 칭허(稱許)하였으나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며, 볼 만한 행위는 없었다. 정승 자리에 오르자 외면으로는 올바른 사람들을 도우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사실 남의 눈치만 보았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 4월. 홍섬(洪暹 1504-1585)이 우의정이 되었다. 홍섬은 문학으로는 이름이 났으나 지조는 없으며 몸을 사려 녹봉이나 보전할 따름이다. 이때 여망(輿望)이 이황(李滉)에게 쏠려 여러 번 불렀으나 이황이 나오지 않자, 홍섬을 정승으로 뽑으니, 사림(士林)이 실망하였다.

홍인경(洪仁慶 1525-1568)이 부상(父喪)으로 벼슬을 떠났다. 인경과 이문형(李文馨 1510-1582)이 함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인경이 자못 기세를 폈고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문형이 그 흉을 말하자, 문경이 분해 하여 역시 문형의 과오를 주워 섬기게 되어, 드디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조정관리 가운데는 두 사람의 친구가 많았는데, 그들이 각각 친한 사람의 편을 들게 되어 자못 붕당(朋黨)이 일어날 징조마저 있어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대신들이 문형을 두둔하는 까닭으로 인경은 득의하지 못하여 대사간으로 있다가 병(病)을 핑계로 사직하였다가 이때에 부상(父喪)을 당하니, 붕당의 말썽이 없어졌다.

○ 가을에 이황(李滉)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와서 숭정대부 판중추부사로 임명받았다. 임금께서는 꼭 이황을 오게 하려고 여러 번 부르시고 말씀도 매우 간곡하여, 이황이 할 수 없이 대궐로 알현하여 사은(謝恩)하였으나 오래 있을 생각은 없고 그저 우러러 은명(恩命)에 답할 뿐이었다.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 병을 핑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인걸은 지기(志氣)는 뛰어났으나 학술은 엉성하였으며 과감한 직언을 하기 좋아하였으나 역시 일에 합당하지는 못하였다. 이때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이 바야흐로 여망(輿望)이 있었는데, 인걸이 누구에게 말하기를, “기대승은 자신(自信)이 너무 과하여 반드시 국사를 그르칠 것이요, 심의겸은 외척이니 어찌 정사에 참여하랴. 지금 선비들이 모두 심의겸의 문객(門客)이다. 외척의 권세는 너무 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 말은 들을 사람들은 백인걸이 그들을 공격할 뜻이 있는가 의심하고, 혹은 백인걸이 기대승과 심의겸을 제거하려 한다고 오전(誤傳)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류(士類)들이 인걸이 어진 사람을 질시한다고 법석거리니, 백인걸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간 것이다.

 

6. 융경 삼년 기사(隆慶三年己巳) 1569년(선조 2)

○ 3월. 이황(1501-1570)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황이 스스로 늙고 병들었음을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간곡히 빌어 누차 글월을 올리니 임금께서 허락하시고, 편전(便殿)으로 불러 물으시기를, “경(卿)이 무슨 말을 하고 싶소?” 하니, 이황이 답하기를, “성상(聖上)은 사림(士林)을 애호하소서.” 하였다. 임금님께서는, “경을 위하여 힘쓰겠소.” 하였다. 그리고 또 물으시기를, “조정 선비로는 누가 믿을 만하며, 누가 도학(道學)하는 사람이오?” 하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이준경(1499-1572)은 대사(大事)를 맡길 수 있으니 신임하시고 의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대승(奇大升)은 학문하는 선비입니다. 다만 아직 정미(精微)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곧 명철한 것이다. 요제(堯帝)도 사람 알아보기를 어렵게 여겼다니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이 문순이 석덕(碩德) 유종(儒宗)으로 임금께서 현인(賢人)을 구하려는 즈음에 당하여 천거한 사람이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이준경은 수상(首相) 자리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도(道)에 인도하지 못하고 널리 준걸(俊傑)들을 불러들이지도 못하고서 빳빳하게 자기만 잘난체하여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 다만 근세의 규칙만 준수하려 하여 유자의 논의를 막아 버렸으니 구신(具臣 자리만 차지하여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신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기대승으로 말하면 재주는 호매(豪邁)하나 기질은 엉성하여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自信)은 아주 높아 선비들을 경시하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미워하고 같은 사람은 좋아하니, 만약 임금의 뜻을 얻게 된다면 그 집요(執拗)의 병통으로 인하여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이 문순(李文純) 같은 현명함을 가지고서도 그 추천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이황이 하직하고 떠나매 조정 신하와 유생(儒生)들이 성(城)을 비우다시피 나와 전송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강상(江上 한강(漢江)가를 말함)에서 사흘밤을 자고 남으로 돌아갔다.

김개(金鎧 1504-1569)가 죄를 지어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냈다. 김개는 구신(舊臣)으로서 몸가짐과 벼슬살이에는 다소 청렴 간정(簡貞)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강팍스럽고 자신만 믿고서는 도학자(道學者)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유속(流俗)과 다른 사람만 보면 아주 미워하였다.

...지평(持平) 정철(鄭澈 1536-1593)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개가 성총을 현혹시켜 사림에게 화를 넘기려 하니 성상(聖上)께서는 살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소리지르시기를, “정철이 과하다. 김개가 그 지경까지 갔을라고.” 하였다. 정철은, “임금님의 위엄이 비록 엄하시나 신은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하고는, 계속 김개의 과오를 말하니, 모두 그의 병통을 절실히 맞힌 말이라 김개의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먼저 절하고 나가 버렸다. 이리하여 선비들이 함께 김개를 공격하였다. 승지 기대승(奇大升) 등이 어전에 면대하기를 청하여 극언했더니, 격분을 참지 못하여 말이 두서없이 되어 식자들이 웃었다. 이래서 삼사(三司)가 모두 글월을 올려 관작을 삭탈하고 쫓아내기를 청하여 여러 날 만에 허락이 떨어졌다. 김개가 탄핵을 입고 도성을 나가는데 어떤 이가 대간의 계사(啓辭)를 보이니 김개가 놀라 말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나를 소인(小人)이라 했구나.” 하였다. 그는 마침내 분통이 병이 되어 두어 달 지나 죽었다.

○ 윤월(閏月). 이조 판서 홍담(洪曇 1509-1576)이 면직되었다. 홍담은 조정에 나와 청백하고 간정(簡靜)하다는 칭찬은 있었으나 다만 학문있는 선비를 미워하였다. 그는 누구에게 말하기를, “진유(眞儒)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오겠는가. 지금 학문을 한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가짜다. 만일 진유가 있다면 내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하지 어찌 감히 흠을 잡겠는가.” 하였다. 중종(中宗)때부터 권간들이 국권(國權)을 잡는 것이 예사가 되어 뇌물 주고받는 것이 풍습이 되어 벼슬길이 혼탁해졌다. 윤원형(尹元衡)ㆍ심통원(沈通源)들이 잇달아 죄를 받으니, 조야가 눈을 닦고 청명한 정치를 바랐으나, 전형(銓衡 이조(吏曹))에 있는 사람들이 구습을 혁신하지 못했으니, 민기(閔箕) 같은 사람도 신망이 있었으나 역시 청탁을 받고 벼슬을 시키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탁(李鐸)이 이조 판서가 되자 공도(公道)를 펴기에 힘써,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 진사 출신이 아니면 재주를 시험하는 것이지만 현자(賢者)가 어찌 재주를 시험하러 나오겠는가.” 생각하고,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지명(知名)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여 낭관의 추천을 받은 사람은 시험을 거치지 않더라도 임관(任官)하게 하니 이래서 차차 벼슬길이 좀 맑아졌다. ...홍담(洪曇)이 판서가 되자 이탁이 하던 것을 바꾸어 유속(流俗)을 따르려 하니 낭관(郞官)들이 듣지 않아, 홍담이 매우 분노하였으며, 특히 좌랑(佐郞) 정철(鄭澈)과 서로 틀렸다. 하루는 임관(任官)하는데 정철이 낭관의 추천을 받은 사람을 망(望 세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의 결정을 받는 것)에 올리려 하니, 홍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하니, 정철이 답하기를, “낭관의 추천을 받으면 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임관(任官)할 수 있는 것이 이미 근래의 규례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홍담이 말하기를, “이러한 새 규례를 시작했으나 여론이 떠들썩하니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하였다. 정철이 굳이 우기니, 홍담이 심히 노하여 선비들을 더욱 꺼려 하여 쫓아낼 방도를 생각했다. 이때 구신(舊臣)으로 홍담의 종형(從兄)인 우의정 홍섬(洪暹)과 판서 송순(宋純) 및 김개(金鎧)가 모두 홍담과 마음이 합하였으므로 먼저 송순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해 두고는 장차 선비들을 공격하려 하다가 마침 송순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갈려나갔다. 이에 김개를 대사헌으로 등용했으나 김개도 죄를 얻었다. 홍담은 불안하여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임금이 사람을 알아 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홍담(洪曇) 같은 사람은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행실이 있고 조정에 서서는 청렴결백하다는 명성이 드러났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재간이 많았으니, 유속배(流俗輩)들이 누가 어진 사람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속심을 살퍼보면 고집스럽고 편벽하며 자신만 믿어 어진 이를 좋아하는 도량이 없었다.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을 보면 문득 거짓이라 의심한다. 단지 의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질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진유(眞儒)가 있으면 내 응당 경모하겠다.” 하나, 이 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령 진유가 지금 세상에 나왔거나 홍담이 진유의 몸가짐이 유속(流俗)과 다른 점을 보았다면 그는 역시 거짓이라 의심했을 것이니, 무슨 경모함이 있으리오. 그는 전장(全長 이조 판서)이 되었을 때 자신은 지극히 공정하고 사심이 없다고 일컬었으나, 그가 말하는 지극히 공정하다는 것은 현명함과 우매함, 능란함과 졸렬함을 분별하지 않고, 오직 이력(履歷)이 오래고 오래지 않은 것을 차례로 삼아 승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서는 말하기를, “조정 선비가 모두 같은데 어찌 그 중에서 취사(取捨)할 수 있겠는가.” 했다. 그의 생각으론 조정 선비의 흑백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요직(要職)을 주려는 것으로, 한갓 균일(均一)한 것만을 지극히 공정한 것으로 여겼으니 아! 이 역시 이상한 것이다.

 

○ 7월. 이조 판서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이 사임하다. 박충원은 원래 재주와 행실이 없고 그럭저럭 처세하여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다. 전장(銓長)을 배수하자 공론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정철(鄭澈)ㆍ신응시(辛應時)ㆍ오건(吳健)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조보(朝報)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전장에 합당한가.” 하였다. 어떤 객군이 이 말을 듣고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에게 말하였다. 백인걸이 그의 조카 백유온(白惟溫)에게 말하기를, “정철ㆍ신응시가 나더러 충원을 논박하라 하나, 내가 아직 참는다.” 하였다. 유온이 이 말을 충원에게 누설시키니 충원이 스스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7. 융경 사년 경오(隆慶四年庚午) 1570년(선조 3)

○ 큰 기근이 들었다. 그 중에도 경기도ㆍ경상도ㆍ충청도가 더욱 심하였다. 임금이 경연에서 홍섬(洪暹 우의정 1504-1585)에게, “어사를 3도(道)에 파견하여 폐단을 조사하고 기근을 구제하려면 누구를 보내면 좋겠는가?” 물으시니, 홍섬이 답하기를, “신(臣)이 망매(茫昧)하여 사람을 알지 못하오니 성상(聖上)께서 직접 뽑아 임명하시는 것이 의당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그리고 나와 권철(權轍 우의정 1503-1578)과 의논하고 아뢰기를, “어사는 성상께서 선택하실 것이오, 신등이 간여할 바가 아니옵니다.” 하니, 임금이 굳이 묻자, 삼공이 합의하여 아뢰기를, “삼공이 어사를 천거하는 전례가 없사오니, 후일 폐가 있을까 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그만두시고 묻지 않았다. ※영의정 이준경(1499-1572)

 

삼가 생각해보건대, 대신이란 나라의 정권을 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니 나라의 일을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인재를 천거하여 직무를 맡기는 것은 그들의 책임인 것이다. 삼공이 정부에 앉아 자리나 메우고 봉록을 먹으면서 국사에 관해서는 잘못을 알지 못하며, 인재에 대해서는 어질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여, 졸지에 물으니 어쩔 줄을 몰라 전례가 없다는 것으로 변명하니, 제 몸을 위하는 데는 좋은 일이나 천하 후세에 받을 조소는 어찌할 것인가. 아! 나라 일은 날로 잘못 되어가고 폐습은 고질이 되었는데 다만 전례를 준수하며 앉아서 망하기만 기다린다. 대신들이 직책에 걸맞은 적임자가 아니니 그 화가 그칠 수 있겠는가.

 

○ 이때 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 삼공이 되었으나, 권철과 홍섬은 본래 용렬한 재질로 직계(職階)의 순서로 정승 자리에 이르렀고, 이준경만은 인망이 다소 있었으나 다만 재질과 견식이 부족하고 성질이 거만하여 선비들에게 몸을 굽히고 말을 들어줄 아량이 없었는데도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뒤숭숭한 때를 당하여도 건의하고 아뢰는 말이 별로 없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그르게 여기자 이준경 역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신진(新進) 선비들과 화협(和協)하지 못하였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재기(才氣)가 남음이 있고 일을 의논하는 데 과감하고도 빨라, 이준경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기대승이 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선비들이 애석해 하는 이가 많았다.

○ 12월 신축(辛丑)일. 숭정대부 판 중추부사 이황(李滉 1501-1570)이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그 명성를 꺼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 이황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明宗)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작계(爵階)를 여러 급 올려 자헌(資憲 정2품)까지 되었다. 이황은 예안(禮安)의 퇴계촌(退溪村)에 살면서 퇴계(退溪)라 호(號)하고 의식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같이 보았다. 말련에 도산(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리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 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 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弟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사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아니하였다. 한성(漢城)에 우거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하여 손수 주워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陶山)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조야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등의 예(例)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寯)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太學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ㆍ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花潭處士) 서경덕(徐敬德)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趙光祖)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8. 융경 오년 신미(隆慶五年辛未) 1571년(선조 4)

삼가 생각해보건대,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은 학력이 비록 부족하였으나, 역시 스스로 명예와 절개는 아끼는 사람이니 어찌 사림을 모해하겠는가. 필시 노쇠한 탓으로 뭇 소인들에게 팔리어 시비를 분간하는 데 어두었던 것이다. 백인걸이 쇠퇴한 것이 안타깝지만, 그러나 조정의 일이 더욱 한심한 것이다. 어진 사람과 나쁜 사람이 뒤섞였고, 올려주고, 내쫓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며, 묘당(廟堂)에는 중심이 될 중신이 없고, 대각(臺閣)에는 꿋꿋하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 천리의 나라를 텅 빈 지경에 버려두어 이원경(李元慶)ㆍ정창서(鄭昌瑞) 같은 서캐[蟣]ㆍ가[虱]ㆍ여우ㆍ쥐 같은 무리들이 그 틈에 날뛰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아아! 위태롭다.

 

○ 겨울에 경기지방(京畿地方)에 호랑이가 자주 나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잡게 하니, 군사들이 촌 마을에서 노략질을 하여 백성들이 호랑이보다 더욱 괴로워하였다.

 

9. 융경 육년 임신(隆慶六年壬申) 1572년(선조 5)

삼가 생각해보건대, 조식(1501-1572)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일민(逸民 산림처사)이다. 다만 그의 논저(論著)를 보면 학문에 실제로 체득한 주견이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경세제민의 방책은 못 되었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와 일을 했다 하더라도 능히 치도(治道)를 성취시켰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근대(近代)의 처사라고 하는 이들로서 시종 절개를 보전하여 천길 벼랑 같은 기상(氣象)을 가진 이는 조식에 비견할 만한 이가 얼마 없었다. 성관(星官 점성가(占星家)를 말함)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누구에게 준 글에, “금년에는 처사성(處士星)이 광채가 없다.” 하더니, 오래지 않아 조식이 과연 사망하였다. 조식은 시세(時世)에 응한 비상한 선비라고 하겠다.

 

○ 7월. 영중추부사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사망하였다. 준경의 자(字)는 원길(原吉)인데, 어려서부터 인품이 탁월하고 풍채가 걸출하여 선비 사이에 유명했었다. 조정에 서자 청렴하고 엄정하게 몸을 가지니, 그의 형 윤경(潤慶)과 같이 인망이 있었다. 다만 윤경은 겉으로는 온화하나 속으로는 꿋꿋하고, 준경은 겉으로는 굳세나 속으로는 겁이 있었다. 인종(仁宗) 말년에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이 이휘(李煇)와 개인적인 말을 하다가 당시 금기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이 이휘의 말을 가지고 고변하여 자기를 변명하려고 하여 윤경에게 문의하니, 윤경은 말하기를, “죽음이 비록 두려운 일이나 친구를 어찌 배반하랴.” 하므로, 준경에게 물었더니 준경은 말하기를, “친구를 위하여 죽을 땅으로 자진해 나갈 수는 없다.” 하였다. 중열이 이에 조정에 자수하였으나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윤경은 전주 부윤(全州府尹)이요 준경은 도원수(都元帥)로 금산(錦山)에 진을 쳤는데 윤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의 칼날이 매우 예리하니 형은 앞으로 나가지 말고 좀 피하시오.” 하였다. 윤경이 답하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음으로 갚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영암(靈岩)으로 가서 싸움을 도와 이겼다. 준경은 자못 망설이는 태도가 드러나 남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에 사람들은 그 아우가 형보다 못한 것을 알았으나 권간이 세력을 펼 때에 준경이 감히 이론(異論)은 제기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사류(士類)를 보호한 까닭에 인망이 떨어지지는 아니하였다. 원형(元衡)이 패하자 그가 나라일을 맡게 되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사림(士林)이 그가 큰 일을 해내기를 크게 바랐으나 주경은 경세제민의 재주가 없고, 또 성품이 거만하여 선비에게 몸을 낮추지 아니하고, 또 옛법을 고수하는 것으로만 임금을 인도하여 그럭저럭 꾸려나갔으니,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볼 것이 없어 사림이 부족하게 여기었다. 기대승(奇大升)이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니 준경이 듣고 분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사류(士類)와 화합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하자 차자를 올려 조신(朝臣) 사이에 붕당의 편사(偏私)가 있으니 타파하라고 논하였다. 임금이 놀라서 대신에게 묻기를, “만일 붕당이 있으면 조정은 어지러워진다.” 하였다. 대신이 설명했으나 말이 매우 모호하고, 임금도 자세히 묻지 아니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사림은 준경을 옳은 것을 비방하는 사람으로 지목하여 그 명성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준경은 사조(四朝)의 원로신(元老臣)으로 몸가짐을 청백히 하고 일하는 데 굳세며, 권간을 내쫓고 성군을 모시어 왔으니, 누가 어진 재상이라고 아니하리오마는 다만 그가 거만하여 혼자만 똑똑하다 하고 선비에게 굽히지 아니하여 선비들과의 사이에 말썽이 쌓이고 쌓여 끝내는 나라 망할 말로 임금을 그르쳐 놓아서, 명예를 잃어버리니 참 애석한 일이다.

 

○ 궁성(宮城) 밑에 있는 민가를 헐었다. 임금이 《대전(大典)》대로 준행하려 했는데 《대전》에, “궁성 밑 1천 척의 한계 내에서는 민가 짓기를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법전(法典)에는 이러했으나 실제에는 행하지 못하고 역대 이래로 금하지 아니하여 궁성의 지척에 민가가 즐비하여 백여 년의 오랜 집들도 많이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이 궁성에 바짝 붙여 집을 짓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여 법전을 상고하여 1백 척 안에 있는 집을 헐어라 하였다. 이로써 서울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뒤숭숭해지자 많은 군신들이 아뢰고, 또 중국 사신이 국경에 다다를 즈음에 민심을 동요시킴은 옳지 않으니 다른 해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말했으나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곧 헐되 거리는 30척으로 줄이도록 명했다. 대간(臺諫)이 중지하도록 번갈아 글을 올려 청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더 노하여 독촉이 더욱 심하니, 백성 중에 울부짖는 자들이 많았다.

 

○이이가 말하기를, “신의 의사는 초 나라의 장왕이나 제 나라의 위왕에게서 취할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기를, ‘초 나라 장왕이나 제 나라의 위왕도 능히 분발해서 한 것이 있었는데 주상께서 어찌 못하시겠습니까.” 한 것입니다. 예전부터 사람의 소견이 같지 아니하여 오활한 선비를 요순의 정치를 아침저녁 사이에 할 수 있다 하고, 범속한 사람은 옛 도는 결코 지금에 행할 수 없다 하나, 이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정치는 모름지기 당(唐)ㆍ우(虞)를 목적할 것이나, 일을 함은 마땅히 점진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전에 옥당(玉堂)에 있을 때에 매양 당ㆍ우ㆍ삼대(三代)의 일로써 아뢰니 주상께서 대답하시기를, ‘어찌 갑자기 할 수가 있느냐.’ 하셨으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신의 뜻도 급하게 그 효과를 보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오늘에 한 가지를 행하고 내일에 한 일을 행하여 점차 좋은 경지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은 지 오랩니다. 오직 세종대왕의 정치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때에는 사람 쓰는 것을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않고 어진 이를 임명하고 능한 이를 부리어 그 재질에 마땅하게 했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과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그 분수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모름지기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주어 국정을 맡기면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기묘년에 조광조(趙光祖)가 중종(中宗)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크게 사업을 할 가망이 있었더니, 나이가 적은 선비로서 일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 소요(騷擾)함을 면하지 못해서 소인이 이 틈을 타서 사림을 해쳤습니다. 지금까지 정사를 맡은 사람들이 기묘년의 일로써 경계를 삼으니, 기묘 인물들이 일을 함에 점차로 하지 못한 것은 비록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금일처럼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해보건대, 선비에게는 행(幸)과 불행이 있으니, 누구나 때를 만남을 행으로 알고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그러나 혹 때를 만나되 불행하고, 불우하되 다행한 이도 있으니 일률로 말할 것이 아니다. 옛날 당(唐) 나라의 유자후(柳子厚)는 먼 지방으로 귀양가 죽었으나 문학과 문장이 빛나게 후세에 전하니, 이것은 불우한 중에서의 다행이요, 왕개보(王介甫)는 정권을 잡아 일을 하였으나 뭇 소인들이 아부하여 마침내 나라일을 그르쳤으니, 이것은 때를 만난 중에서의 불행이다. 대승은 영재(英才)와 박학(博學)으로 기운이 일세를 덮을 만하였으되, 스스로 믿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였고 바른 말하는 벗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뜻을 얻어 그 배운 바를 행했다면 그의 때를 만남이 행이 되었을지 불행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일찍이 들으니, 누가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처소에서 대승과 친한 사람에게 대승의 상(喪)을 조위하는 말로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하니, 영경은 불끈 낯빛을 변하고 말하기를, “기명언(奇明彦 기대승 1527-1572)은 재학(才學)은 조금 있으나 큰 병통이 있었으니, 을사년의 뭇 간인(姦人)을 공이 있다 하였고, 조남명(曹南溟 조식 1501-1572)은 조정을 요란하게 하였다 했으니,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만일 일을 했다면 반드시 정치에 해를 끼쳤을 터이니, 이 사람의 죽음이 사문에 불행될 것이 무언가?” 하였다. 영경의 말이 비록 과하나 식자(識者)가 혹 전연 그르다고는 아니하였다.

 

10. 만력 원년 계유 겨울(萬曆元年癸酉冬) 1573년(선조 6)

○ 5월. 왕이 명하여 높은 행실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 하니, 이조에서 이지함(李之菡1517-1578)ㆍ최영경(崔永慶1529-1590)ㆍ정인홍(鄭仁弘 1535-1623)ㆍ조목(趙穆 1524-1606)ㆍ김천일(金千鎰 1537-1593)을 천거하거니 모두 육품관을 시키었다.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범인과 다르고 효도와 우애가 남보다 뛰어났다. 젊을 때에 해변 후미진 곳에다 부모를 장사지냈더니 조수(潮水)가 차차 넘쳐들었다. 오랜 세월 뒤에는 바닷물이 반드시 분묘를 쓸어갈 것이라 염려하여 제방을 쌓아 물을 막으려고 곡식을 식리(殖利)하고 자재(資財)를 모르는데 매우 근면하였다. 사람들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일을 계획함을 조롱했더니, 지함이 말하기를, “인력(人力)이 미치고 못 미치는 것은 내가 힘쓸 것이요, 일이 되고 아니되는 것은 하늘에 있다. 자식이 되어 어찌 함이 부족하다고 후환을 막으려 하지 아니하랴.” 하였다. 바다 어귀가 넓어서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지함의 정성은 그치지 아니하였다. 본래 욕심이 없어 명리(名利)나 성색(聲色)에는 담담하였으나 이따금 점잖지 못하게 농담도 하니, 남들이 그가 공부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최영경은 전에 조식을 좇아 배웠고 청렴개결하기로 세상에 뛰어나 의(義)가 아니면 일호(一毫)라도 취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자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장사지내어 마침내 곤궁하여졌다. 집을 성안에 두었으나 친구를 사귀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 있는 선비라 할 뿐이었다. 안민학(安敏學)이 처음 그를 찾아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는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성혼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서로 알게 되었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성혼이 서울에 왔다가 그를 방문하였다. 문을 두드린 지 한참 뒤에 맨발의 조그만 여종이 나와 영접하고, 들어가니 방초(芳草)만 뜰에 가득하였다. 좀 있다가 영경이 나오는데 포의(布衣)에 떨어진 신을 신고 있어 빈한한 기색이 쓸쓸히 풍겼으나 그 모양은 엄숙하고 장중하여 감히 범치 못할 점이 보였다. 앉아 이야기하는데 한 점의 속태(俗態)가 없었다. 성혼이 매우 좋아하여 돌아와 백인걸(白仁傑)에게 말하기를, “내가 최모(崔某)를 보고 돌아오매 문득 청풍(淸風)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하니, 인걸이 놀라며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사림(士林)에 퍼졌다. 정인홍은 조식의 고제(高弟)로 강직하고 엄숙하며 효제(孝悌)에 독실하였다. 조목은 이황의 고제로 순실 방정하고 온순 근엄하니 이황이 매우 중하게 여기었다. 김천일은 이항(李恒)의 고제로 정밀 단아한 사람이었다. 이상의 다섯 사람은 모두 인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 특명으로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을 대사헌에 임명하니, 정언(正言) 정희적(鄭熙績)이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특명은 외척에게 쓰실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사람의 현부(賢否)에 있지 외척이 무슨 상관이냐.” 하니, 희적이 매우 기가 죽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집의 신응시(辛應時)가 아뢰기를, “희적이 말이 공론이오니 너무 꺾지 마사옵소서.” 하였다. 경연이 끝난 후에 희적이 빈청(賓廳 정승이 있는 처소)에 나와서 응시를 보고 매우 감사하게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 희적은 곧 의겸의 집으로 가서, “영공(令公)을 해치려 함이 아니라 다만 사람 쓰는 일의 대체를 말함이었다.” 하고, 사과하였다. 희적이 비록 직언을 하였으나 돌아가서 곧 아첨하는 태도를 지으니 식자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 이때 군적(軍籍)을 정리하였는데, 유사(有司)들이 서류만 완전하게 하기를 힘쓰고 실제의 허실은 조사하지 않고서 고용살이나 걸인까지도 다 실제 역으로 정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군ㆍ읍에서 혹 상소로 교정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유사가 일체 거부하였다. 승정원에서 이에 아뢰기를, “지금 백성이 살 수 없는 것은 어디를 가나 그러합니다. 군적을 하려는 본의는 군액(軍額)의 궐(闕)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실제가 없이 허위로 문서를 꾸며 족징(族徵)ㆍ인징(隣徵) 의 폐단이 있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까 염려하여 헛 문서를 없애고 실제 인원만 기록하여 백성이 조그만 폐단이라도 구하려는 것입니다. 계축년 군적을 만들 때에 일을 담당할 관리가 국가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본의를 본받지 못하고 다만 일을 갖추는 것만을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엄하고 급하게 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주(州)ㆍ현(縣)에서도 그 풍조를 이어받아 헛되이 문서상으로 인원만 채워 걸인까지도 찾아 모두 넣지 않음이 없었고, 닭ㆍ개의 이름도 수효로 채워졌으니, 적(籍)을 만든 지 얼마 아니 되어 태반이나 축이 나서 이를 채우기 위해 이웃을 침노하며 일가를 족치니, 어디를 가나 원성뿐입니다.

○ 대사헌 노진(盧禛 1518-1578)이 상소하여 그의 어머니가 연로하다고 말하고, 관직을 사면하고 돌아가 봉양해야겠다고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의 상소를 살펴보고 정상(情狀)의 절박함을 알았다. 다만 경이 온 지 얼마 안 되니 내가 어찌 문득 사퇴를 허락하겠소. 경은 더 머물러 나라를 도울 계책을 진술하여 나의 취사(取舍)를 기다리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다.” 했다. 노진은 사직하고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렸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군신의 의리는 천지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은 인륜의 변괴요, 그 본심은 아닌 것이다. 지금 노진이 가는 것이 단지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딴 뜻에서인가? 비록 부득이하여 물러가게 되더라도 임금의 사랑과 물음이 그와 같았으니, 가슴에 쌓인 포부를 한번 진술하여 임금의 용사(用舍)를 두고 보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이 두텁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직책이 풍헌(風憲)에 있으면서 시정(時政)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비록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말하더라도 나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들은 바에 의하면 노진은 선명(善名)은 있으나 실상 세상을 구할 재주가 없다 하니, 정 이러하다면 아무리 말을 하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무슨 책망할 것이 있으랴.

 

11. 만력 이년 갑술(萬曆二年甲戌) 1574년 (선조 7)

○임금이 김우옹(1540-1603)에게 이르기를, “매번 경연에서 너의 말을 들으니 너의 자질이 아름답고 또 학술이 있는 것을 알겠다. 네가 물러 가서 평일에 사우에게 들은 것과 자신이 터득한 것으로 잠(箴 경계될 글)을 지어 올려라.” 하니, 김우옹이 물러나와 여섯 가지의 잠(箴)을 지어 올리니, 첫째 〈정지(定志)〉, 둘째 〈강학(講學)〉, 셋째 〈경신(敬身)〉, 넷째 〈극기(克己)〉, 다섯째 〈친군자(親君子)〉, 여섯째 〈원소인(遠小人)〉이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남전 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의 강령(綱領)이 바르고 조항이 상세한데, 이것은 동지와 선비들이 서로 약속하여 예를 강구하는 것이지, 널리 백성들에게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주자(朱子)도 동지를 데리고 이것을 행하려다 마침내 실행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이 말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서 그 항심(恒心)을 잃어 부자가 서로 함께 있지 못하여, 형제 처자가 헤어지는 이 마당에 느닷없이 이들을 유자(儒者)의 행실로 구속하려 하니, 이른바 결승의 정치[結繩之治]로 어지러운 진(秦) 나라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것과 간척의 춤[干戚之舞]으로 평성의 포위[平城之圍]를 풀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향약의 약정(約正 회장(會長)) 직월(直月 월 당번(月當番))은 맡을 만한 사람을 얻기 어려우니, 토호(土豪)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칠 것이 뻔하다. 이것을 누가 검제(檢制)할 것인가. 만약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반드시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다. 허엽(許曄 1517-1580) 같은 어둡고 허망한 선비는 한갓 옛것을 앙모할 줄만 알고,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못하며, 다스림의 도(道)에 본말(本末)과 완급(緩急)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이에 향약으로 말속(末俗)을 만회하여 태평을 이루려하고 있으니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삼가 생각해보건대, 대신(大臣)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노수신이 시폐(時弊)를 구제할 재주가 없으면 마땅히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생각하여 함부로 정승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재주가 있다면 마땅히 정성껏 아뢰고, 그 말을 써주지 않으면 그때야 사퇴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지금 우두커니 정승의 지위에 앉아 건의하는 것도 없이 단지 병으로 사퇴하는 것만 능사로 삼다가 임금이 간절히 물으시는 데도 한 가지 방책(方策)도 아뢰지 못하였다. 노수신의 청명(淸名)과 중망으로도 시무(時務)에 통달하지 못하고 마침내 소식(素食 일은 하지 않고 녹만 먹는것)함을 면하지 못함이 애석하구나.

 

○ 이이(李珥)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이가 전에 병으로 승지(承旨)를 사직하였더니 얼마 안 있다가 간장(諫長)을 시켰다. 이이가 사직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기강의 퇴폐함과 민생의 곤난함은 주상께서도 이미 자세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더욱 근심스러운 것은 주상께서 이미 마음을 미루어 위임하실 뜻이 적으시고 조정 신하가 일을 담당하여 몸을 바칠 의사가 없으며, 대관(大官)은 유속(流俗)을 편안히 여겨 손을 움츠리고 방관만 하여 일의 성패를 되는 대로 내맡겨 두고, 소관(小官)은 비록 건의하는 것은 있으나 혹은 과격하고 혹은 오활하여 실용에 적당하지 않으니 의논이 분분하여 통일되지 않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 국가의 형세가 날로 낮아지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위로 허물과 착오를 바로잡고 아래로 경망스럽고 나태함을 바로잡는 것은 오직 간관(諫官)에게 힘입어야 할 것인데, 진실로 재주와 도량을 겸비하고 지식과 사려가 명달(明達)한 사람이 아니면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같이 매사에 서툴어서 잘못이 많고 병들어 쇠약한 자가 어찌 명기(名器)를 더럽히겠습니까. 급히 체직(遞職)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 8월.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지함(李之菡)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지함은 포천에 곡식이 적어서 민생을 구제할 수 없음을 걱정하고, 어량(魚梁)을 떼어 받아,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꾸어 고을 비용에 보태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이지함은 본시 고을 원으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고 다만 유희로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자 곧 관을 버리고 돌아간 것이다.

 

12. 만력 삼년 을해(萬曆三年乙亥) 1575년(선조 8)

○ 임금이 노수신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진 선비를 천거하오.” 하니, 수신이 대답하기를, “신이 사람 알아보는 식견이 없으니 어찌 감히 경솔하게 천거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본 바로는 이이(1536-1580)와 허엽(許曄 1517-1580)이 쓸 만한 사람인가 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이이는 내가 가히 대용(大用)할 사람으로 알고, 다만 언론이 매우 과격하니 이것은 연소한 까닭으로 그러한가보며, 허엽은 가장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니 쓸 만한 사람이겠느냐?” 하였다. 임금의 뜻이 이이를 쓰려 하신 것이었다.

○ 좌의정 박순(1523-1589)이 병으로 사직하니 대신으로서 논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이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에 공사 관계로 윤원형(尹元衡 ? -1565)의 집에 갔더니 원형의 사위 이조민(李肇敏)이 의겸과 아는 사이여서 자기의 서실로 끌어들였다. 서실에 침구가 많은 것을 보고 의겸이 누구의 침구인가를 물으니 조민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침구였다. 효원이 그때에 아직 과거는 못하였으나 글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의겸이 속으로, “어찌 문학하는 선비가 권문의 무식한 자제와 같이 거처하는고? 결코 개결(介潔)한 선비는 아니로군.” 하고, 비루하게 여겼다. 그 뒤에 효원이 장원급제(1565)하여 재명이 날로 성하여 몸 단속을 청간(淸簡)하게 하고 관직에 책임을 다하니 조사(朝士)들이 다투어 추장(推獎)하고 오건(吳健)이 더욱 힘써 천거하였다. 의겸은 전에 사림(士林)을 보호한 공이 있었으므로 전배(前輩) 사류가 많이 추허(推許)하니 이로 인하여 요로에 올라갈 형세가 있었다. 오건이 효원을 전랑(銓郞 이조 좌랑)으로 천거하려하니 의겸이 항상 전의 일(효원이 권문에 있던 일)을 가지고 가로막았다. 그러므로 효원이 낭료(郞僚)가 된 지 6, 7년 만에 전랑이 되었다. 효원이 청류(淸流)를 진출시키기를 좋아하며 일을 당하면 곧바로 행하고 회피 동요하지 아니하니 후배(後輩) 사류가 모두 추대하였다. 효원이 의겸의 사람됨을 부족하게 여기며 항상 남에게 말하기를, “심(沈)은 마음이 어리석고 기운이 거치니, 크게 쓸 수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이에 의겸의 무리들은 효원이 원한을 품고 보복할 뜻이 있다 하여 혹 소인(小人)이라고 지목하는 이도 있고, 효원의 무리들은 또 의겸을 미워하여 바른 사람을 해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사림(士林)의 전ㆍ후배(前後輩)가 화합이 못 되어 분당할 징조가 있었다. 효원이 사간이 되고 허엽이 대사간이 되니 엽은 비록 전배이나 효원을 추허하므로 연소 사류들이 허엽을 종주(宗主)로 추존하고, 박순은 청명(淸名)과 중망(重望)이 있고 전배이므로 사람들이 혹 의겸의 당이라 지목하였다. 허엽이 박순의 안옥(按獄)하는 것이 체통을 잃었다고 추고(推考)하기를 청할 때에 효원도 그 의론에 이의를 달지 아니하고 추고를 청하였다. 뒤에 박순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사림이 효원을 더욱 의심하기를 효원이 박순을 공격하여 의겸의 세력을 외롭게 하려 한다 하여 물정이 심히 마땅치 않게 여기었다. 신응시(辛應時)가 이이에게 이르기를, “간원에서 대신을 추고하자는 것은 크게 사체를 잃은 것이니, 옥당에서 어찌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지 아니하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옥당은 논박하는 책임이 없고 양사(兩司)가 피혐(避嫌)한 뒤에 처치하는 것이 규례이며 일마다 논박하는 것은 혹시 남이 할 일을 침해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철(鄭澈)이 이이에게 이르기를, “대신을 추고하자는 것은 사의(邪意)를 품고 현상(賢相)을 요동시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한 것이니 옥당에서 어찌 말이 없겠느냐?”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김효원이 할 것이며, 허 대간의 의론이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 정철이 말하기를, “공(公)은 이것을 지나친 것으로만 여기는가? 태휘(太輝 허엽의 자)가 인백(仁伯 김효원의 자)과 합심하여 근일 사론(邪論)의 종주가 되었으니, 이것은 어진 재상을 공격하여 제거하려 하는 것으로 뜻 없이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조 판서 노진(盧禛)이 병으로 사직하고 나오지 아니하므로 정종영(鄭宗榮)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종영은 본시 인망이 없고, 또 효원에게 붙었다는 말을 들었다. 정철이 또 이이에게 이르기를, “정(鄭) 전장(銓長 이조 판서)을 어찌 그대로 둘 수가 있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논박하는 것은 옥당의 책임이 아니다.” 하였다. 정철이 개탄하고 시를 짓기를,

 

군자(君子 박순을 지목)는 황각(黃閣 의정부)에서 물러나고 / 君子辭黃閣 指朴涥

소인은(정종영을 지목)은 동전(東銓 이조)을 잡았네 / 小人秉東銓

어진 이는 물러가고 간사한 이는 나아오는 때에 / 賢邪進退際

부학(副學 이이를 지목)의 마음은 편하구나 / 副學心恬然

 

 

※참고 :조선시대 관직 품계

정1품 : 의정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종1품 : 의정부 좌우찬성

정2품 : 의정부 좌우참찬, 6조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제학

종2품 : 6조 참판, 한성부 좌우윤,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관찰사, 병사, 부윤

정3품 : 6조 참의,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및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목사, 대도호부사, 수사

○종3품 :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홍문관 전한, 성균관 사성, 도호부사, 절제사

○정4품 :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성균관 사예, 우후

종4품 : 의정부 사인, 군수, 첨절제사, 만호

○정5품 : 6조 정랑,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종5품 : 현령

○정6품 : 6조 좌랑,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종6품 : 홍문관 부수찬, 현감, 교수, 절제도위

정7품 : 성균관 및 홍문관 박사

○종7품 :

○정8품 :

○종8품 :

○정9품 : 홍문관 정자

종9품 : 참봉, 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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