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쇄록(謏聞瑣錄)
조신(曺伸) : 1454년 ~ 1529년
■조신(曺伸)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형으로 조위(曺偉)가 있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매형이다.
빼어난 문장과 외국어 실력으로 성종을 놀라게 하였고,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중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필찰(筆札)을 책임지는 외교 문서 전문가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였다. 성종은 여러 차례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상을 주기도 하였다.
1479년(성종 10) 신숙주(申叔舟)가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자 역관으로 수행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세 차례나 더 일본을 왕래하면서 문장으로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한 적도 일곱 차례나 된다.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아 베트남과 교류의 문을 열었고, 조신의 문명은 동남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공적으로 서얼로서는 파격적인 종3품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479년 2월 왕이 조신에게 시(詩)를 짓게 하였고, 그 시가 매우 좋으므로 통신사 군관(通信使軍官)으로 차임(差任)하였다가 곧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조위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인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 남지(南智)가 새로 경상도 도사(都事)로 임명되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되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니가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이므로, 반드시 직무를 옳게 처리하지 못할 것인데 내 어찌할까.” 하였다. 남지가 처음 도착하여 뵈려 들어올 때에, 공이 시험해 보려고 판별하기 어려운 공사(公事) 문서를 뽑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그가 물러가자 사람을 시켜 하는 행동을 엿보게 했더니, 한창 손[客]과 함께 장중(帳中)에서 술만 마구 마시고 있으므로 공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같구나.” 하였다. 이튿날 남지가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를 하고 공에게 드리면서, “아무 글자가 빠졌으니 아마 잘못된 것이요,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판별해 보아야겠습니다.” 하므로, 공이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그로부터 특별히 남다르게 대접하였다. 남지가 한 기생을 사랑하여 임신하게 했는데, 하루는 선물로 들어온 배[梨]가 남은 것이 있으므로 공이 짐짓 남지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가 앓고 있어 배를 보내려는데 그대도 응당 병든 친구가 물론 있겠지.” 하니, 곧 일어나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 그릇을 나누어주고 몰래 엿보게 하였더니 그 기생이 먹고 있었다. 남지가 뒤에 공이 농으로 그랬던 것을 알았다. 진양(晉陽 진주)에 이르러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공이 남지를 돌아보며, “우리 고장의 산수가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더니, 남지가 쳐다보며 하는 말이, “산천은 아름다운데 원님이 농을 좋아해서 탈입니다.” 하고, 서로 희롱을 하였다. 뒤에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남지도 정승이 되자 하연이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도사(都事)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서하(西河)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의 자는 자심(子深)인데 총명이 매우 뛰어났었다. 일찍이 죄를 짓고 밀양부(密陽府)로 귀양갔을 때, 관찰사 박(朴)이 순행하다가 밀양부에 이르러 그의 문장을 시험해 보니, 메아리처럼 대답을 잘하였다. 또 그의 기억력을 시험하려고 무려 5백 명이나 되는 관기(官妓)의 명부를 가져다가 공에게 한번 보인 뒤에 그 명부를 감추고 공으로 하여금 이름을 불러보게 하였더니,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 순서도 틀리지 않았다.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일찍이 시를 지어 성균관에 쓰기를,
곳곳에 향등 달아 부처에게 기원하고 / 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풍류잡아 신을 제사하는데 / 絃管家家盡祀神
홀로 한 칸 부자의 사당에는 / 獨有一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하여 사람 없이 쓸쓸하구나 / 滿庭春草寂無人
라고 개탄하고는, 유학(儒學)의 진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노비 1백 가구(家口)를 성균관에 바쳤다. 죽은 뒤에 문묘에 배향되어 조정이나 민간에서 제사지낸다. 지금 공에게 제사지내는 자손이 10대를 이어 모두 과거에 올랐으니, 그의 보답을 누린다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는 옛날에 무명이 없어 다만 삼ㆍ모시ㆍ명주실로만 천을 만들었는데, 고려 말에 진주(晉州) 사람 문익점(文益漸)이 일찍이 중국에 갔다가 목면(木綿)의 씨를 구하여 주머니 속에 감추어 넣고, 아울러 씨 뽑는 기구와 실 잣는 기구를 가지고 왔다.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그 방법을 전하여 1백 년도 못 되어 온 나라 안에 퍼져서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대체로 다 이 무명옷을 입었다. 또 그것을 돈으로 바꾸기도 하고 쌓아두기도 하는 일이 세상에 널리 행하여졌는데, 삼베에 비하여 갑절이나 많이 쓰였다. 처음에는 민월(閩越) 등 아주 남쪽 지방에서 났으나,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사람을 이롭게 했다. 전에는 없었던 이런 물건이 지금 동방에 성하게 된 것은, 익점의 공이 황도파(黃道婆)에 못지 아니하여 나라에서 그 자손을 기용했다고 했다. ‘성(盛)하게’의 성(盛)은 작(作)으로도 썼다. 옛날에는 그 나라의 부(富)를 물으면 말의 수효로 대답하였고, 중국 사람은 동전(銅錢)이나 금ㆍ은으로써 빈부를 비교하였지마는, 우리 동방에는 금ㆍ은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전법(錢法)을 시행하지 않고 다만 무명으로 화폐를 삼았다. 무명 35자가 한 필이고, 50필이 한 동인데, 쌓아둔 것이 많아야 1천 동에 불과하였다. 근대의 재상 윤파평(尹坡平)ㆍ상인 심금손(沈金孫)이 무명을 무려 1천여 동이나 쌓아두었다가 갑자ㆍ병인 연간에 함께 뜻밖의 화를 입었다.
■서울과 연경(燕京) 사이는 3천 2백 45리인데, 서울 성문(城門)에서 의주(義州)까지가 1천 1백 40리요, 의주에서 요동(遼東)까지는 5백 50리이다. 요동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사이에는 안산(鞍山)ㆍ해주위(海州衛)ㆍ우가장(牛家莊)ㆍ사령(沙嶺)ㆍ고평(高平)ㆍ반산(盤山)ㆍ광녕위(廣寧衛)ㆍ여양(閭陽)ㆍ십삼산(十三山)ㆍ능하(凌河)ㆍ행산(杏山)ㆍ연산(連山)ㆍ조장(曹莊)ㆍ동관(東關)ㆍ사하(沙河)ㆍ고령(高嶺) 등 16파발이 있는데, 도합 8백 80리이며, 관내에서 연경까지의 사이에 천안(遷安)ㆍ유관(楡關)ㆍ노봉구(蘆峯口)ㆍ난하(灤河)ㆍ칠가령(七家嶺)ㆍ의풍(義豐)ㆍ영제(永濟)ㆍ양번(陽樊)ㆍ어양(漁陽)ㆍ공락(公樂)ㆍ하점(夏店)ㆍ노하(潞河) 등 12 파발이 있는데, 도합 6백 70리이다.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그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겠지마는, 대개 우리 나라의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長興)에 이르기까지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江界)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59리가 되며, 서남쪽으로는 진도(珍島)까지 9백 리, 서북쪽으로는 의주(義州)까지 1천 1백 40리, 동남쪽으로는 울산(蔚山)까지 9백 20리가 되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까지 5백 40리이고, 서쪽으로 고양(高陽)까지 30리이니, 이로써 활구가 타원형임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기까지 5천 4백 30리인데... (正統) 8년 계해(1443년) 라의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 :1417-1475)다녀온 후 지금은 통신하지 않는데, 문충공이 말하기를, “일본의 땅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제주도의 남쪽에까지 이르러 유구와 서로 접하여 그 지형이 매우 길다. 최초에는 곳곳에 부락을 이루고 각기 나라를 만들었는데, 주(周) 나라의 평왕(平王) 48년에 그 시조가 좁은 들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치고 처음으로 주현을 두었다. 대신이 각각 갈라 맡아서 다스리는데, 중국의 봉건(封建)과 비슷하다.” 하였다.
■대마도에는 군(郡)이 8인데, 대략 82포(浦)에 주민 8천 3백 70호가 있다. 도주(島主)는 종씨(宗氏)인데, 그 선조 종경(宗慶)이 죽은 뒤에 아들 영감(靈鑒)이 대를 잇고, 그 영감의 아들, 정무(貞茂), 그 정무의 아들 정성(貞盛)이 대를 이었는데, 정성의 아들 성직(盛職)이 죽자 아들이 없어, 성화(成化) 정해년에 섬 사람들이 정성의 어머니의 아우 성국(盛國)의 아들 정국(貞國)을 세워 도주로 삼았다. 정국이 죽은 뒤 아들 정수(貞秀)가 대를 이었고, 군수 이하 사관(士官)을 다 도주가 임명했는데, 그것도 세습이다. 토지ㆍ염전(鹽田)ㆍ민호(民戶)를 나누어주고, 삼번제(三番制)로 하여 7일씩 교대하며 도주의 집을 지키게 한다. 군수는 3분의 1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고 또 그것을 3분하여 도주에게 바치고 3분의 1을 자기가 쓴다. 목장이 넷이고 말이 한 2천 필 된다. 풍기군(豐崎郡)은 섬의 동북쪽에 있고, 두두군(豆豆郡)은 바로 남쪽에, 이내군(伊乃郡)은 서쪽에 조금 치우친 북쪽에 있고, 괘로군(卦老郡)은 서쪽에, 요라군(要羅郡)은 남쪽에 조금 치우친 서쪽에 미녀군(美女郡)은 서남쪽에, 쌍고군(雙古郡)은 북쪽에 있는데, 이 3군은 도주 자신이 지킨다. 이로군(尼老郡)은 쌍고군의 남쪽에 있다. 일기도(一岐島)에는 마을이 7개 있는데, 대략 13리에 호수는 1천 3백 60여 호이다. 14포(浦)에 호수는 7백여 호, 논은 6백 20 정보인데, 땅이 오곡을 심기에 알맞고, 세 곳의 시장이 있다. 지좌(志佐)ㆍ좌지(佐志)ㆍ호자(呼子)ㆍ압타(鴨打)ㆍ염류(鹽霤)를 나누어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기는 대마도와 같다. 지형이 수레바퀴 같이 동서가 반날 길, 남북이 하룻길이고, 면적이 대마도의 절반쯤 된다. 내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6번, 대마도에 3번 갔었는데, 대마도의 문물과 기후에 대하여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대마도가 우리나라 보기를 우리나라가 중국을 보는 것과 같이 한다.” 하였다.
■연산(燕山)의 비(妣 폐비신씨 1476-1537)는 재상 신승선(愼承善)의 딸인데, 연산의 황음(荒淫)하고 패륜함이 날로 심하여 매번 바른 말로 간하다가 여러 부당한 능욕을 당하였다. 이때 숙의전(淑儀殿)의 노자(奴子)라고 일컫는 자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재물을 독점하여 이익을 취하고 평민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였으나, 공사간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신비는 항시 탄식하되, “여러 궁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나는 그 나쁜 것을 본받을 수는 없다.” 하고, 일찍이 내수사(內需司)에게 따끔히 경계하기를,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 이로써 본궁의 노자들은 감히 횡포하지 못하였다. ...그의 친척 가운데 지방 고을의 원이 있었는데 홍람(紅藍 빨간 물감의 원료가 되는 풀) 몇 섬과 흰 솜[雪綿子] 수십 근을 바쳤다. 신비는 이것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못 살고 있는데 이런 물건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는 차마 받아둘 수 없다.” 하였다.
연산은 평상시에 한 짓이 한없이 잔인하고 사나워서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없이 하였으므로, 폐위되어 물러갈 때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다가 간신히 교동(喬桐)에 닿았다. 호위하여 고을 뜰[縣庭]에 들어가니 장수와 군졸들이 둘러섰는데, 연산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궁에서 나갈 때에 신비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때에 여러 장수에게 청하여 귀양간 곳으로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하고, 탄식하였다.
■문충공 신숙주(1417-1475)의 병이 위독하자 성종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려면 일본과 통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성화(成化) 기해년(1479년)에 통신사ㆍ부사(副使)ㆍ서장관(書狀官)을 일본에 보내고, 또 문사(文士)를 더 증원하였다. 그때 홍 문광(洪文匡) 겸손(兼善 홍귀달(洪貴達)의 자)과 채 인천(蔡仁川) 기지(耆之 채수(蔡壽)의 자)가 승지로 있으면서 나를 추천하여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더니, 임금이 어제(御題) 다섯을 내어 시를 지어 바치라 하였고, 또 여섯 승지에게 명하여 각기 어려운 제목을 내게 하여 시험을 보았다. 이튿날 또 어제가 나와 5편을 지어 바쳤더니 모두 칭찬을 받았다. 드디어 통신사에 임명되어 차비하고 떠나는데, 점필재(佔畢齋)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천리마도 향쑥을 배불리 먹어야 / 赤驥飽香?
연월 사이를 하루에 왕래하고 / 燕越朝暮返
강한 쇠뇌도 가득 당겨야만이 / 强弩能持滿
반드시 먼 데까지 나가는 걸세 / 其發必及遠
숙도는 내 아내의 아우인데 / 叔度吾婦弟
퍽이나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 頗好紙田墾
약관에 스승에게 배움도 없이 / 弱冠無師資
세 모퉁이를 유추하여 깨달았네 / 能以三隅反
시와 역사를 두루 탐색하고 / 詩史遍搜討
경학 또한 깊이 연구를 하여 / 經菑亦穮蔉
중씨 계씨가 마치 훈지와 같고 / 仲季若塤箎
난초 혜초가 밭에 가득하여라 / 蘭蕙滿畦畹
충적된 것은 이미 유여하건만 / 充積己有餘
누가 그 잠긴 문을 열어 줄꼬 / 誰爲發關鍵
때로는 불평 어린 시문 지어서 / 時作不平鳴
명백하게 예원을 압도하였고 / 班班傾藝苑
그 파란이 점차로 광대해져서 / 波瀾漸滂沛
기괴함과 화려함이 뒤섞이었네 / 奇峭雜華婉
향인들이 절신을 가벼이 여기니 / 鄕人輕節信
내 힘으론 밀기 끌기 어려워라 / 吾力難推挽
성조에선 인재를 잘 안 빠뜨리는데 / 聖朝少遺材
더구나 이런 훌륭한 인재임에랴 / 何況此琰琬
어느 날 그 명성이 성상께 들리니 / 一日聲徹天
어찌 담장 넘어 피하길 배우리오 / 寧學踰墻遯
공거에서 조서를 기다렸다가 / 待詔於公車
마침내 태관의 밥을 먹게 되었네 / 得喫太官飯
어제의 시문 동아줄처럼 나올 제 / 御題出如綸
붓을 대자 물병을 거꾸로 세운 듯 / 筆落瓴水建
도리어 두자미를 비웃을 정도라 / 却笑杜子美
춘관으로 포곤의 영광 주었네 / 春官與褒袞
그러자 항백의 하풍을 추향하여 / 巷伯趣下風
허리에 인끈 이미 편안히 매었는데 / 腰綬繫已穩
이윽고 국경 나가는 사신을 따라 / 俄從出疆使
돛 펼치고 일본을 향해 가누나 / 張帆指日本
웅대한 뜻으로 이험을 하나로 보는 / 撫壯一夷險
그대 마음을 내 스스로 안다오 / 君心吾自忖
때는 오직 해가 남륙으로 가서 / 時維日南陸
경풍이 보리밭을 요동시키는데 / 景風搖麥坂
바닷물은 마치 기름처럼 말갛고 / 海水澹似油
어패류들도 서로 싸우지 않으니 / 鱗介無鬪狼
배 타는 것이 말 타기와 같아서 / 乘舡如騎馬
마치 와상에 드러누운 것 같도다 / 如在牀息偃
어서가서 그곳 풍토를 기록하여 / 去去抬風土
세모에 서로 만나길 기약하세나 / 團欒期歲晩
인정은 훼방과 청산이 용이하나니 / 物情易毁譽
이익을 얻으려면 스스로 겸손해야지 / 受益宜自損
돌아와서 은총이 더욱 높아지면 / 歸來增睿渥
어찌 한갓 호권만 종사하리오 / 豈徒從虎圈
그대는 충성과 효도를 힘쓸지어다 / 勉哉忠與孝
내 시는 참으로 정성을 다한 거로세 / 吾詩誠繾綣
하였다. 매계(梅溪)와 가운데 형 자진(子眞)도 모두 시를 지었는데, 배 안에서 한가로울 때에 각기 전송하는 시들을 꺼내니, 모여서 큰 두루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만은 적었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집에는 시 3편이면 충분하다. 어찌 많을 필요가 있으랴.” 하였다. 갑인년(1494년)에 나는 또 권(權) 참판 지경(支卿)을 따라 대마도에 갔었는데, 문광(文匡)이 적암(適菴)에게 지어 보낸 부(賦)에,
연경에는 이전에 두 번 다녀 왔고 / 燕京之前赴者再兮
대마도에는 이제 가면 세 번째로다 / 馬島今去三也
하였는데, 모두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정(婷)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풍월정(風月亭)인데, 술을 즐기고 문사를 좋아하였다. 성화(成化) 을사ㆍ병오년(1485-1486년) 무렵에 여러 번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모셨는데, 일찍이 나에게 주는 시에,
신은 풍류객이요 / 伸也風騷客
시명 또한 뛰어나도다. / 詩名又一奇
홀로 능히 고시를 겸하였으니 / 獨能兼古律
어찌 아름다운 구슬이 아니랴. / 不柰是珠璣
시 속의 생각이 무궁무진하여 / 吟裏思無盡
한가로운 기망 있음을 기뻐하노라. / 閑中喜有期
서로 만나 한 통 술을 마시며 / 相逢一樽酒
담소하니 흥취가 진진하도다. / 談笑興遲遲
하였다. 시의 품격이 높고 깊어서 예사 시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성화 정미년(성종 18년 : 1487) 겨울에 교리 최부(崔溥 1454-1504)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윤월 초3일에 배를 출발시켰는데,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뱃사람 43명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기만 기다리다가, 11일에야 한 섬에 닿아 비로소 물을 얻어 마셨다. 13일에는 중국 영파부(寧波府) 근처의 산에서 도적을 만나 가진 금품을 모두 빼앗기고, 도적이 닻과 노를 꺾어버린 다음 배를 끌고 가 바다 한가운데 내버리고 달아났다. 또 동서로 표류하다가 16일에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 근처의 우두(牛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에서 또 어선들에게 포위되어 왜적(倭賊)이라는 지목을 받았다. 17일, 비를 무릅쓰고 겨우 피하여 촌집에 투숙[出投]출몰(出沒)이라고도 한다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끌고 다니면서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18일에 포봉리(浦蓬里)에 이르렀는데, 수당두채(守塘頭寨) 천호(千戶) 허청(許淸)이 불러서 심문하더니 끌고 갔다. 피로에 지쳐 다리는 절룩거리며 천신만고 끝에 도저소(桃渚所)에 이르렀다. 21일에는 송문(松門)의 비왜지휘(備倭指揮) 유택(劉澤)이 와서 취조하고, 천호 적용(翟勇)을 시켜 호송하였다. 2월 초4일에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니, 비왜서(備倭署) 도지휘(都指揮) 및 포정사관(布政司官) 등이 최부에게 본국의 일을 캐어 물어보고, 왜인이 아님을 가려내었다. 초6일에 항주(沆州)에 이르니, 지휘(指揮) 양왕(楊旺)을 보내어 기행(起行)으로 압송하였다. 가흥(嘉興)ㆍ소주(蘇州)ㆍ상주(常州)ㆍ양자강(揚子江)ㆍ양주(楊州)ㆍ고우주(高郵州)ㆍ회안부(淮安府)ㆍ질주(郅州)ㆍ서주(徐州)ㆍ패현(沛縣)ㆍ제령주(濟寧州)ㆍ동창부(東昌府)ㆍ덕주(德州)ㆍ창주(滄州)ㆍ정해현(靜海縣)ㆍ천진(天津)ㆍ위곽현(衛漷縣)ㆍ장가만(張家灣)을 거쳐, 3월 28일에 북경(北京)에 이르렀다가 4월에 떠나 6월 4일에 본국으로 돌아와, 14일 청파역(靑坡驛 서울 청파동 근처에 있었다)에 도착하여, 임금의 명에 의하여 표류 일기(표해록)를 써 가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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