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속잡록 1,2(조경남)

청담(靑潭) 2018. 2. 14. 23:00

 

 

속잡록(續雜錄) 1 , 2

 

조경남(趙慶男) : 1570년 ~ 1641년

 

■조경남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와 함께 살았다. 13세부터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난중잡록)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도덕·의리를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격장으로 활약하며 10여 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왜적에 포위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을 찾아가 성을 방어할 계책을 전달하였으나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후 뛰어난 계책으로 전장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159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하에서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에 들어가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처하며 살았다. 성리학에 능통하고, 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난중잡록(亂中雜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07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난중잡록》은 1582년(선조 15)부터 1610년(인조 16)까지 즉 조경남이 13세 되던 해부터 69세까지 57년간 쓴 일기로, 당시의 전란 기록과 정세·풍속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윤리변(倫理辨)》, 《성리석(性理釋)》, 《오상론(五常論)》 등의 책도 썼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속잡록(續雜錄)》도 조경남이 쓴 일기(1611년~1638년)로 후일 난중잡록과 합쳐 발간되었는데‘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속잡록 1(續雜錄一)

 

■신해년 : 광해군(光海君) 4년(1611년)

○가을에 황해도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률(申慄)이 고변(告變)하기를, “삭탈관직된 문신(文臣) 김직재(金直哉)가 몰래 진릉군(晉陵君 1594-1612)과 역모하였다.” 하니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다가 국문하니, 김직재와 진릉군은 변명하지 못하고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진릉군은 순화군(順和君)의 후계자이다. 황혁(黃赫)도 잡아다가 고문하여 목숨을 빼앗고 인하여 노륙연좌(孥戮緣坐)의 법을 시행하였다.

■임자년 : 광해군 5년(1612년)

○요동(遼東)에서 지휘사(指揮使) 황응양(黃應陽)을 보내 우리 나라를 순시하게 하였다. 황응양은 서울에 이르렀다가 영남ㆍ호남을 순시하고 돌아갔는데, 그가 점검한 여덟 가지 일은, 군무(軍務)의 수행 여부, 요해지의 수호 여부, 호령(號令)의 시행 여부, 사졸의 훈련 여부, 군량의 저축 여부, 인심의 화합 여부, 무기의 정비 여부 등이었다.

 

■계축년 : 광해군 6년(1613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선조(先祖)의 장인 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 이름은 의(㼁))을 폐하여 강화(江華)에 안치하였다. 그때 나이 8살 이 일에 앞서 죽은 수상(首相) 박순(朴淳)의 아들 박응서(朴應瑞)와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의 아들 박치인(朴致仁)ㆍ박치의(朴致義)는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 등과 더불어 사생(死生)의 교우를 맺고, 여강(驪江)에 살면서 ‘강변 칠우(江邊七友)’라고 자칭하고 몰래 도둑질과 약탈을 일삼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다. 이때에 박응서는 장사치들과 동래(東萊)에 내려가서 장사하고 돌아올 때, 도중에 동료를 살해하고 은덩이를 절취해 가지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고발당해 체포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박응서가 금방 자백하려 할 때 한희길(韓希吉)과 정항(鄭沆)이 포도대장이 되어 고의로 국문을 늦추고, 박응서를 유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약 여차여차 한다면 죽음을 면할 뿐만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네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초사(招辭)를 바꾸어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박응서는 갑자기 초사를 고쳐 말하기를, “우리들은 절도가 아니요, 장차 큰일을 하는 데 양식과 군기를 갖추려고 한 것입니다. 일찍이 일곱 친구들과 함께 국구(國舅)와 몰래 통하고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으로 섬길 것을 계획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정항 등은 기꺼워하며 말을 꾸며서 들어와 아뢰니, 즉시로 김제남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사사(賜死)하고 병진년 전에 극형을 추가 시행하였음영창대군을 폐하여 강화에 가두었다. 인하여 김제남에게는 노륙연좌법을 시행하고, 박치인ㆍ서양갑등은 모두 사형되었다. 다만 박치의만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8도에 영을 내려 상금을 걸고 잡아들이도록 하였는데, 박치의를 잡는 자로서 양반이면 호조 판서 이품(二品)의 직을 제수할 것이며, 천인(賤人)이면 무명베 2백 동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박응서는 변을 고했다고 해서 용서를 받았으며, 정항과 한희길은 수훈(首勳)이 되었다.

전라도 군산(群山)의 창고에 불이 나서 세미(稅米)를 다 태웠다. 그래서 그 부속 고을 백성의 결복(結卜)으로 다시 갖추어서 바쳤다.

○영상(領相)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고자 하였으나 화가 늙은 아비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주저하고 감히 결단하지 못하였다. 부친이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네가 젊은 나이에 조정에 들어가서 지위가 인신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죽고 사는 것과 기쁘고 슬픈 일을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같이 하여야 하거늘, 어찌 참고 견디는 마음을 품어 평생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였다. 영상은 이에 절하고 곡하면서 영결하고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였는데, 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였다. 임금은 노여워 부르르 떠는데, 또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명을 내려 관직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영상은 그날로 양근(陽根)의 전장(田莊)으로 달려나가 연일 먹지도 않고 밤낮으로 호읍(號泣)하니 열흘이 못 되어 병이 나 죽었다. 광해군이 이를 듣고 슬퍼하고 곧 품질(品秩)을 회복하도록 하고, 조회(朝會)와 시장(市場)을 쉬게 하고 예장(禮葬)을 내려 조문하게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영상이 양근으로 나아가 막 강두에 이르렀을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말 앞에 부복했다가 앞에서 인도하고 가는데 집에 이르자 가버렸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한음(漢陰)영상의 자호 의 만사(輓詞)를 짓기를

촌락에 묻혀서 말을 삼가려 하였더니 / 淪落村閭舌欲捫

공이 돌아가매 남몰래 혼이 녹아버리도다 / 自公長逝暗銷魂

만사를 씀에 감히 분명히 말하지 못함은 / 題詞不敢分明語

각박한 풍속이 남을 엿보아 조언을 좋아하기 때문이로다 / 薄俗窺人喜造言

하였다. 이때 오성도 역시 은혜를 온전히 하기를 주장하였으므로 파직되어 시골에 있었다.

 

■갑인년 : 광해군 7년(1614년)

○...가을에 경기전(慶基殿)이 완성되었으므로 좌승지 이호의(李好義)와 예조 참의 김개(金闓)를 영변(寧邊)에 보내 수용(晬容 임금의 사진)을 받들어 가지고 와서 전주(全州)에다 모시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9월 18일에 본전(本殿)에 봉안(奉安)하고, 21일에 정시(庭試)를 시행하였다. 임진년에 영변으로 모시고 갔다가 곧 돌려오지 못했었다.

○ 예조에 명하여 서울 안과 8도의 과방(科榜)을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과거의 폐단이 더욱 심하여, 자표(字標)를 서로 주고 받으며 미리 제목을 내어주어 집에서 지어오고, 과장에서는 서로 답안을 교환하였다. 그러므로 시험관이 반드시 친한 사람과 권세있는 사람과 뇌물을 바치 사람만을 뽑으니, 응시자들은 두루 독서하고 좋은 글을 짓는 데에는 관계 않고 다만 부정한 방법에만 힘쓸 뿐이므로, 한 차례의 방(榜) 중에서 공정한 것이 열에 두세 개도 없었다. 이것은 모두 이이첨(李爾瞻)ㆍ김개(金闓)ㆍ허균(許筠) 등 세 도둑이 저지른 일인데, 이이첨이 예조 판서이었으므로 조사하여도 실효가 없었다.

 

 

■을묘년 : 광해군 8년(1615년)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소를 올려 대비를 모실 것을 청했는데, “신은 이전 조정의 늙은 신하로서 충성은 정온에게 미치지 못하며, 죽음은 이덕형(李德馨)보다 앞서지 못하여 나라를 잊고 임금을 속였사오니 만번 죽음을 피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였다. 윤인(尹訒)이 팔뚝을 휘두르면서 이원익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하지 않다가, 정조(鄭造) 등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곧 파직하여 내쫓을 것을 명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 때문에 충원(忠原)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고 친구들이 도와주어도 한 되나 한 말의 곡식이라도 받지 않고 몸소 짚자리를 엮어 집안 사람들을 거느렸다.

○ 군수ㆍ변장(邊將)ㆍ내직(內職)ㆍ외임(外任)을 제수할 때, 돈으로 사들이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다소(多少)의 한도가 있었으며 이조 판서는 값이 비싸므로 바라보기가 어려워 참판과 함께 비워 두었다. 참의 이정원(李挺元)만이 홀로 흉악한 무리들에게 아부하고 궁궐 안 사람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독차지한 지 7ㆍ8년에 부유함이 왕공(王公)에 비길 만하였다. 위로 감사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ㆍ찰방에 이르기까지 천냥 백냥 하는 식으로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어 값에 따라 주의(注擬)하고, 낙점도 또한 이런 액수로 정하였다. 김 상궁(金尙宮)이 붓을 잡고 마음대로 하니 임금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6명의 시위(侍衛)와 10명의 소원(昭媛)들도 머리를 모아 낙점을 애걸할 때에는 김 상궁이 없는 때를 엿보고, 김 상궁이 나타나면 흩어졌다.

 

 

■병진년 : 광해군 9년(1616년)

○영건도감(營建都監)을 다시 설치하여 경덕궁(慶德宮)ㆍ수성궁(壽聖宮)의 두 궁전을 지었다. 민가 수천 구(區)를 허물고, 8도에서 궁성에 쓰이는 재목을 징수하고, 8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했으므로 민간에서는 떠들썩하였다.

○진사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상소하기를...이이첨의 네 아들은 모두 미리 내준 제목과 남이 지어준 것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합니다. 그의 네 아들에는 하나도 여러 사람이 모두 알 만한 재주가 없는데도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고, 혹은 전혀 학문이 없는데도 과거에 급제하기를 마치 초개를 줍듯이 쉽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이첨(1560-1623)의 도당들이 이미 과거급제를 자기의 물건으로 삼았으니, 이이첨의 자제들의 일은 이것 저것 따질 것도 못되므로 신은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소가 올라가자 쫓겨나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정사년 : 광해군 10년(1617년)

○경운궁(慶運宮)에 투서가 들어왔는데, 망측한 말이 많았다. 영상 기자헌(奇自獻 :1562-1624)은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나갔다. 우상 한효순(韓孝純)도 사직서를 내놓고 강상(江上)으로 나가니, 이이첨(1560-1623)도 또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임금은 승지를 시켜 그들을 부르게 하여 모두 다시 일을 보도록 하였다. 역적 허균(許筠 1569-1618)은 간교하고 속이기를 잘하여 이이첨과 더불어 표리(表裏)가 상응하였다. 몰래 역모를 품어 나라의 명맥을 동요시키려고 투서를 한 것은 실은 허균이 한 일이었다.

○형조 판서 허균이 나라를 해칠 마음을 품고 먼저 공을 세워, 나라의 권세를 휘어잡으려고 언제나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왕실이 전복되도록 했다. 이때에 경사(京師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중원(中原)에 《임거만록(林居漫錄)》이란 책이 있는데, 왕실(王室)의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되어 있어 기금까지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했다. 광해(光海)가 듣고 놀라서 의혹에 싸여 즉시 역적 허균으로 하여금 가서 고치도록 하였다. 역적 허균은 금은 보화를 많이 싣고 갔다 온 것처럼 하고 저쪽과 이쪽 임금이 사용하는 문서에 도장을 위조하여 찍고 황제의 결정을 얻었다고 보고했다. 이에 광해는 곧 경사라고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증광과(增廣科)를 실시하였다. 모든 관원들이 조정에서 치하하여 ‘서륜입기 명성광열(敍倫立紀明誠光烈)’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원임(原任) 심희수(沈喜壽)는 역적들의 정상을 알고, 동료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기축년에 이미 다 밝히고 씻었는데, 오늘 또 무슨 잘못을 고친다는 것인지 모르겠소.” 하였다. 역적 허균은 이 말에 매우 혐의를 품고 무고하여 심희수를 배척하여 축출하니, 심희수(1548-1622)가 성문을 나설 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성문 밖에 쫓겨나는 것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 出官非是棄官歸

고개를 돌리니 강산 어느 곳에 의지할거나 / 回首江山何處依

작은 배 사고 싶으나 한 푼의 돈도 없고 / 欲買小舟無片價

상자를 기울여 보니 다만 옛날의 낡은 조의뿐이네 / 傾箱猶有舊朝衣

하였다.

○역적 허균은 광해가 일에 낭패하여 나라를 기울게 하려고 몰래 그의 당인 유생과 여러 관원들을 꼬여 흉악한 의논을 제일 먼저 제기하였다. 그러자 유학 이지호(李志浩)ㆍ한보길(韓輔吉)ㆍ윤유겸(尹惟謙), 생원 김우성(金宇成) 등은 잇달아 상소하여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서 관학ㆍ삼사가 연일 정청(庭請)하니, 임금은 신료들에게 의논을 모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기자헌은 차자로 불가함을 논하고 서강(西江)으로 나가 명을 기다렸다.

○이때에 궐궁의 부역이 겹쳐 혹심하였고, 궁궐의 목(木)과 결(結)을 베로 거두어 들이는 일이 거듭하여 겹쳐서 이루어졌으므로 백성은 가난해지고 재물은 탕진되어 원망과 고통의 소리가 동시에 일어나니, 부득이 백성을 위협하여 관직을 팔았다. 은(銀)ㆍ명주ㆍ소금ㆍ철과 집터와 숙석(熟石 인공으로 다듬은 돌)을 공납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자가 많아 금띠를 허리에 두르고 옥관자를 머리에 단 자가 도로에 연이었다. 그래서 시정의 노래에

금을 찬 자 옥을 찬 자 은이냐 돌이냐 / 金者玉者銀耶石耶

비단옷 명주옷 입은 자 명주냐 무명이냐 / 錦衣紬衣土耶木耶

하니, 진신(搢紳)들이 수치로 여겼다.

 

 

■무오년 : 광해군 11년(1618년)

○참판 강홍립(姜弘立 1560-1627)으로 경기ㆍ양호(兩湖)ㆍ양서(兩西) 등 5도 도원수로 삼고, 평안 병사 김경서(金景瑞)응서(應瑞)의 개명(改名) 로 부원수를 겸하게 하고, 이민환(李民寏)ㆍ이정남(李挺男)ㆍ정응정(鄭應井)으로 문무종사(文武從事)로 삼아 5도의 병마 2만여 명을 조발(調發)하여 서변(西邊)으로 보냈으며, 경상도ㆍ강원도의 병마는 북도(北道 함경도)로 보내었다.

허균(許筠)이 몰래 도당을 시켜 밤마다 남산에 올라가서, “서적(西賊)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유구(琉球)의 군대는 해도(海島)에 와서 숨었는데, 성안 사람들은 어찌 피하여 나가지 않는가?”라고 외치게 하였고, 또 노래를 지어

성은 들보다 못하고 / 城不如野

들은 달아나는 것만 못하다 / 野不如越

하였다. 성안 사람들은 흉흉하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달아나고 흩어져 시정이 바야흐로 텅 비려고 하였다.

참찬 허균이 반역을 꾀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그의 당인 김개(金闓)ㆍ하인준(河仁俊)ㆍ김우성(金宇成)ㆍ황정필(黃廷弼)ㆍ김윤황(金胤黃)ㆍ우경방(禹慶邦)ㆍ현응민(玄應旻) 등을 모두 죽이고, 노륙연좌(孥戮緣坐)의 형벌을 시행하게 되자 조야가 고무하였으며, 도성 안이 편안하게 되었다. 허균은 일찍이 참기(讖記) 수천 마디를 지어 세상에 비전(祕傳)하게 하였는데, 모두 흉악하고 참혹하여 상서롭지 못한 뜻이었다. 근일 과거의 폐해와 남산에서 밤마다 외친 일은 모두 이 역적의 무리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에게 권하여 서강 용선(龍船)에 임하게 하여 왕을 죽이는 꾀를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하늘과 귀신이 말없이 도우시어 사적이 폭로되었다

 

 

■기미년 : 광해군 12년(1619년)

○3월 4일 제독(提督) 유정 등은 오랑캐 진중에서 패사(敗死)하고, 강홍립 등은 잡혔으며, 좌영장(左營將)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앞서 대군이 탄현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양호(楊鎬)는 다시 분부하여 그달 1일 군대를 움직일 기일로 정했다. 그래서 지난달 21일 행군하여 세 길로 나누어 건주(建州)에 도착하려고 하였다. 유정의 군대는 동로(東路)로, 두송(杜松)의 군대는 서로(西路)로 진병했으나 모두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아래 홍립의 계사(啓辭)에 자세하게 나왔다.

○10일 성첩(成貼)된 평안 감사의 장계에 이르기를, “그날 중영(中營)에 소속된 용강(龍岡) 포수(砲手) 김충남(金忠男)의 공초 안에, ‘2일 접전할 때에 적병은 겨우 3백여 명으로 명 나라 군사와 아군이 이겼습니다. 3일에는 군사를 쉬고, 4일에는 명 나라 군사와 때를 같이하여 행군했는데, 명 나라 군사가 먼저 들어가고, 우리 나라 좌영이 다음, 우영이 그 다음, 중영은 뒤에 갔었습니다. 그래서 20리 정도의 넓은 들 가운데서 적병이 크게 이르니 명 나라 군대가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적병이 충돌하여 먼저 명군이 패몰되므로 우리 나라 좌ㆍ우영이 차례로 계속 원조했으나 적병이 충돌하여 역시 전멸되었습니다. 중영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진을 치고 병영을 만들고 적병과 더불어 5리 정도를 두고 서로 버티었는데,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았습니다. 칼에 찔린 명 나라 군사 10여 명이 중영으로 뛰어 들어올 때, 적병이 명 나라 군사를 내보내라고 독촉하여 모두 죽였습니다. 신시(申時)에 적의 기병(騎兵)이 우리 중영을 포위하므로 형세가 저항할 수가 없어, 만포향(滿浦鄕)의 통사(通事) 하세국(河世國)을 보내어 강화(講和)를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돌아왔는데, 여러 날 전에 강홍립(姜弘立) 등이 하세국(河世國)을 오랑캐 진중으로 보냈으니, 지금의 하세국은 반드시 다른 통사(通事)일 것이다. 김충남(金忠男)이 모르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적 한 명이 따라와서 대장이 나올 것을 청하였습니다. 김경서(金景瑞)가 갑옷을 벗고 표범 가죽옷으로 바꾸어 입고 적진으로 갔다가 초경(初更)에 돌아왔는데, 적은 술을 먹이고 보내주어 중영에 와서 잤습니다. 5일 새벽에 명 나라 군사 수백이 높은 언덕에 모여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적장이 우리 진에 만약 명 나라 군사가 거기 있으면, 빠뜨리지 말고 찾아내어 명 나라 군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라고 말하므로 부득이 30여 명을 뽑아내어 교일기(喬一騎)가 탈출하여 들어왔다가 또한 이 때문에 나가서 피살되었다. 명 나라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또 그들은 명 나라 군사에게 여기에 조선 사람이 있으면 하나하나 찾아내라고 명령하니, 명 나라 군사들은 곧 우리 군사 3명을 뽑아냈는데, 중영으로 보낸 뒤에 군대를 지휘하여 마구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적추(賊酋)가 또 도원수를 청하므로, 강홍립은 초록빛의 도포를 입고 모관(毛冠)을 쓰고 갔다가 미시(未時)에 중영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또 기수(旗手)를 보내어 우리 군사들을 하나하나 무장 해제를 시키고, 즉시 두 원수의 종사관과 중영장(中營將) 문희성(文希聖) 및 군병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말을 타고 먼저 갈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우영장 순천 군수(順天郡守)가 칼에 맞고 상처를 입어 중영에 와 있었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가운데에 있고, 적병은 돌아서서 내려갈 때에 우리 군사를 끼고 양을 몰듯이 내려갔습니다. 이날 30리를 가서 머물러 잤습니다. 6일에는 행군하여 한 고개에 이르렀을 때, 수목이 매우 번성하였으므로 같은 고을 사람 정희국(鄭希國)ㆍ이남준(李南俊) 등이 도망나왔습니다. 도중에 적을 만나서 각각 분산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문안사(問安使) 성시헌(成時憲)이 아뢰기를, “9일 진강(鎭江) 땅의 명인(明人)들이 관전(寬奠)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접전의 상황을 물으니, 김충남(金忠男)이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경략(經略)은 적병(賊兵)이 쫓아올까 두려워하여 성을 지킬 계책을 할 뿐입니다. 평양 포수(砲手) 김경립(金景立) 등 8명이 서로(西路)의 두송(杜松)이 싸우던 곳으로부터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 패전한 곡절을 물으니, 두송 등의 세 총병(總兵)이 앞을 다투어 진병하여 물을 채 반도 건너지 못하였을 때, 적병이 사방에서 갑자기 닥쳐 삼[麻]을 치듯 찍고 베므로, 명 나라 병사는 화살 한 개 쏘아 보지도 못하고 서로 넘어지고 엎어져서 태반이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들은 바위와 동굴 사이로 들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마 총병(馬總兵)은 개원(開元)으로부터 들어가서 싸웠는데,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습니다. 이여백(李如栢)은 철령(鐵嶺)을 방위ㆍ수비하는 일로 들어가 버렸다 합니다.” 하였다.

○ 강홍립 등이 오랑캐 진중에 가니, 만주(滿住)가 유시(諭示)하는 문서에 이르기를, “한(汗)은 조선의 장수들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리노라. 이제 그대들의 생각에 그대 나라의 왕은 장차 그대들을 끝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을 찾아갈 것인가? 그대 나라의 왕은 또 남조(南朝 명 나라)를 도울 것인가? 이 일은 뒷날에 어찌될 것인가? 그대들은 이제 속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여기에서 세월을 보내기를 원하는가? 그대들은 명백하게 말하라. 특별히 유시하노라.” 하였다. 강홍립이 답하기를, “엎드려 유시의 문서를 받잡고 성대한 뜻에 감격하고 은혜로 여깁니다. 수천의 인명(人命)을 본국에서 어찌 결국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출병한 것은 핍박을 받아 부득이한 일이나 무슨 병력이 있어 또 도울 수 있겠습니까? 집으로 돌아가기를 빨리 하고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똑 같은 바입니다. 늦고 빠른 것은 오직 한(汗)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다시 유시하기를, “한(汗)은 조선의 장수들에게 타이르노니, 전날의 잠깐 사이의 실례를 말하지 말라. 남조(南朝)에 군대를 원조하는 것이 어찌 큰일이 아니겠는가? 큰일을 오히려 계교하지 않고 차마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명예가 전파되고 천양하기를 도모한 것이다. 이제 조그만 과실을 짐(朕)이 용서하지 못하고 또 계교한다면 사해(四海)에 이름을 드날리고 후세에 향기가 흐르도록 하려고 했던 처음의 뜻에 무슨 이익될 것이 있겠는가? 짐은 시종 한결같이 할 것이니, 그대들은 부질없이 걱정하거나 쓸데없이 생각하여 짐의 큰 뜻을 등지지 말라. 특별히 타이르노라.” 하였다.

강홍립은 답하기를, “삼가 재배하고 글월을 받자옵니다. 하늘이 두 나라를 내시어 지난날부터 친후하여 조금도 원수진 일이나 원망할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汗國)이 보내 주신 데 대하여 우리 나라가 보답하기를 해마다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출병한 것은 실로 본국의 뜻이 아니고 중조(中朝)에서 임진에 왜란을 구해 준 공을 가지고 징발을 독촉함이 엄중하므로 군사를 뽑았으나 만 명을 채우지 않았고, 명군 진영의 뒤만을 좇았습니다. 만약 실로 군대를 원조할 마음이었다면 어떻게 먼저 통사(通事)를 보내어 전보하도록 하였겠으며, 또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시켜 소롱이(小弄耳) 북도(北道)의 번호(藩胡)로 그쪽과 우리 쪽을 왕래하던 자 에게 전언(傳言)하였겠습니까? 전일 진중(陣中)에서 저희들은 살길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장군들까지도 모두 한(汗)의 큰 덕을 본받았으므로 온전히 살아서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한(汗)을 접견할 때 패군의 장수가 예의까지는 갖출 수 없어 잘못 한(汗)의 위엄을 범(犯)하였으니 뒤미쳐 뉘우쳐도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한(汗)께서는 더욱 이웃 사이의 우호를 더하시어 두 나라의 화락한 기운이 만세토록 무궁하게 하옵소서. 어찌 한갓 저희들만이 감사하겠습니까? 저희 나라 사람들도 모두 한(汗)의 크나큰 덕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4월 23일 실상이 없는 일에 놀라운 일이 생겼으니, 왜적이 혹 고부(古阜)와 금구(金溝)로 침범해 왔다고도 하고, 혹은 임실과 남원에도 들이닥쳤다 해서 피난을 가는 사람이 길에 가득했다.

○9월 각 도에서 사운군(四運軍)을 발송했다. 24일에 본도의 감병사(監兵使)가 익산에 도착하여 호군(犒軍)하는데 대략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영남 군대는 이로부터 군량을 운반하여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로부터 자목(資木) 8결(結)을 거두어 주었다.

○오랑캐 차사(差使)가 서신을 또 가지고 왔는데 그 서신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다름이 아니라 명 나라를 섬기지 말 것이요, 자자손손이 영원히 맹약을 맺고, 국서(國書)에 도장을 찍어 고관을 시켜 들여보내면 마땅히 그 사람을 여기 머물게 하고, 또한 우리 나라 사람을 귀국의 서울 대궐문 아래로 직접 보내어 귀국의 정승과 이야기하게 하고,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사례하고, 검은 소를 잡아 땅에 제사를 지내며, 피를 마시고 맹서한 후에 원수 이하 군사를 모두 돌려보내고, 그런 뒤에는 각기 무기를 버리고 다만 하나의 채찍만으로 왕래하면서 전과 같이 시장을 열고 무역하자.” 하였다.

○예조에서 크게 무과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변경의 일이 날로 급박하므로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면 사세가 늦어지게 될 것이므로, 승지들을 8도에 나누어 보내 시험장을 설치하고 사람을 뽑았다. 그때 민여임(閔汝任)은 호남에, 김치(金緻)는 영남에, 박사제(朴思齊)는 호서로 나갔다.10월 22일 시험장을 열고 만여 명을 뽑으니, 방목(榜目)의 칭호를 만과(萬科)라고 불렀고, 해과(海科) 이래로 대사(代射 대신 활 쏘는 것) 출신이 부지기수이었다. 근래에는 더욱 꺼리낌이 없어져 이번에 이르러서는 몸은 시험장에 가지도 않았는데도 이름이 방에 들어 있는 자가 반은 되었으며, 시험관도 또 많이 뽑는다는 바람에 성급하였으므로 철저히 살피지도 않았으니 또한 세상의 변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험 장소는 호남은 담양, 영남은 성주, 호서는 공주이었다.

 

 

■경신년 : 광해군 13년(1620년)

○ 동쪽의 틈을 아직 보수도 않았는데 서쪽에 틈이 크게 벌어졌다고 계하니, 궁궐의 역사(役事)는 심히 괴롭고, 당화는 날로 심하여 백성은 가난하고 재물은 다하였으며, 국가의 재정은 탕진되어 관작을 억지로 사게 하니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부의 전민(田民 전답과 노비)을 통곡하면서 팔아 먹게 되고, 금관과 옥대를 흐느끼면서 사게 되니, 이때의 생민의 실정을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다.

 

 

■신유년 : 광해 14년(1621년)

○2월 유학(儒學) 신지익(申之益)이 상소하기를...대개 이이첨이 방자하여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신경희(申景禧)는 이이첨의 가신이었는데, 그 흉악한 책모가 발견되자 이이첨의 집에서 체포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전하께 아뢰는 자가 없습니다. 허균(許筠)은 이이첨이 품어 기른 자로서 부자(父子)와 다름이 없었으나, 반역의 죄상이 이미 드러나자 솔선하여 그를 죽여 그의 입을 없애니 사람들은 모두 그가 두려워 감히 한마디라도 전하께 아뢰지 못합니다. 황정필(黃廷弼)이 이이첨의 노예라는 것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로서, 황정필을 엄하게 국문하면 곧바로 자백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이첨은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밤중에 사람을 시켜 몰래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죄안(罪案)을 작성하고 자백을 받을 때에는 이미 죽은 지가 오래였으니, 그를 시켜 서명할 수 없어 수촌(手寸 수결)만 모방하여 한 글자도 모르는 자가 한 것같이 하였습니다.

○3월 명 나라 사신이 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 20일 노적(奴賊 누루하치)이 요동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4월 누루하치 추장은 스스로 후금 황제라고 칭하고 천명(天命)이라고 개원(改元)하였다. 조보(朝報)

○○ 오랑캐의 국서에, “후금국의 한(汗)은 조선국에 글월을 드립니다. 귀국은 작년에 명 나라에 군사를 원조하여 옛날 왜란을 구해 준 공에 보답했습니다. 이제 혹 명 나라를 돕지 않고 각기 스스로 지킨다면 강을 건너간 명 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니, 모두 다 쫓아 보내주시오. 이들은 바로 우리 백성이니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요동 백성들이 전부 머리를 깎고 투항하여 왔습니다. 만약 다시 명 나라를 돕는다면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선은 곧 예의바른 큰 나라로 무슨 일인들 모르겠습니까? 귀국이 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5월 10일 ○ 삼사가 이이첨이 천단한 죄상을 합계하고, 한찬남(韓纘男)ㆍ이위경(李偉卿)ㆍ박정길(朴鼎吉) 등의 간사하고 흉악한 죄를 합계하였다. 비답에, “너희들은 이이첨의 응견(鷹犬)이 아니냐? 종놈처럼 얼굴과 종년의 무릎으로 굽신거리며 치질을 핥고 등창을 빠는 일도 또한 일찍이 하였는데, 오늘날 창을 돌려서 죄를 청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12월 아래 세 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징집하였는데, 본도는 3천여 명이었다. 15일 감병사(監兵使)가 전주에서 점검하고 떠났는데, 세 도의 군사는 모두 수원에 모였다가 이듬해 2월에 진(陣)을 파하였다

 

 

 

 

속잡록 2(續雜錄二)

 

■임술년 : 광해군 15년(1622년)

○1월 중전 유(柳)씨는 국문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주상전하의 뜻으로는 명 나라 조정에 죄를 짓고 싶지 않으시고, 저 오랑캐 놈들에게도 노여움을 사고자 하지 않으시어 양전(兩全)의 계책을 쓰려고 하시나 천하의 일이란 반드시 한 곳에 전심해야 하고, 결코 둘 다 이로운 이치는 없습니다. 부득이 저 오랑캐가 우리를 미워하고 성내어 원한을 삼는다면 군신 상하가 한번 죽기를 기약하고 명 나라 조정과 힘을 모아 싸우고 지킨다면 비록 오랑캐를 멸망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천하의 대의를 잃지 않을 것이니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오랑캐에게 미움을 사지 않고자 하여 일체 명 나라를 돌보아주지 않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긴다면 마침내 둘 다 실책이 되어 막대한 근심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하온데도 정부 대신, 비국(備局) 당상(堂上)은 극진히 이해를 생각하여 주상 전하의 뜻을 돌리려 하지 않고, 주상의 하시는 대로 따라서 날이 가도 저러할 따름이니, 군사의 기회란 일각이 급한 것이오니 진실로 민망하옵니다.

○2월3일 명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가 서울에 와 있으면서 시를 짓기를

향내 나는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이고 / 淸香旨酒千人血

잘라 놓은 고기반찬 만백성의 고혈이라네 / 細切珍羞萬姓膏

촛농이 떨어지자 사람 눈물 떨어지고 / 燭淚落時人淚落

노랫소리 드높은 곳에 원성도 드높구려 / 歌聲高處怨聲高

하였다. 이는 광해군 시대에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이 곤궁함을 지적한 것이다.

○3월 오랑캐 서신이 다음과 같이 또 왔다.

“대금국(大金國) 한(汗)은 조선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니 아시오. 남조(南朝)와 조선은 부자(父子)의 나라로 나라도 크고 군사도 많으므로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킨 지 6년이니 짐이 무엇인들 모르겠는가. 짐이 보건대, 남조는 아비가 되고, 조선은 아들이 되어 서로 의지하고 떨어지지 않게 되었는데, 짐이 그대 아비 남조를 치는데 어찌 군사를 머물러 두어 나라를 보살피지 않고 마침내 경거망동하시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람을 시켜서 소식을 탐지하시오? 그대들이 와서 정탐하기로 우리는 배나 엄하게 삼가거니와 그대들이 몰래 와서 엿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찌 경솔히 태만하겠소? 우리 진강(鎭江) 백성을 그대들이 너무나 많이 괴롭혔소. 그대가 이미 남조를 부모라 일컬으면서, 요동성(遼東城) 두 우물 안에 혈수(血水)가 넘쳐 나오고 북경성(北京城) 하수(河水)에도 혈수가 두 차례나 넘실댔는데도 그대는 어찌 토지의 신에게 기도하여 혈수를 그치게 하지 못하며, 각 아문(衙門)의 큰 수목과 대궐 등성마루에 있는 잡상(雜像)이 큰 바람에 넘어졌는데도 그대는 어찌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여 광풍(狂風)을 그치게 하지 못하시오? 짐의 모든 행사는 위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대 조선이 스스로 강대하다는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무시하며, 하늘의 행사를 거역하여 남조 부모와 더불어 서로 두호하고 보조하나 무엇이 유익하랴. 일을 많이 만들 따름이오.”

하였다.

○9월 몰래 문희현(文希賢)을 오랑캐 나라에 보냈는데, 오랑캐 추장이 선물을 받지 않고 국서(國書)에 답장도 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공갈만 했다. 문희현은 강홍립(姜弘立) 등을 만나고 돌아왔다.

모문룡(毛文龍)이 용천(龍川) 가도(椵島)로 들어가 진영을 마련하고 진에 머물러 있으니, 요(遼) 나라 백성으로 와서 항복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계해년 : 인조 원년(1623년)

○정언 한유상(韓惟翔) 등이 아뢰기를,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 등이 대비를 두호할 음모를 오랫동안 품고 있으므로 화가 장차 멀지 않을 것이오니, 감히 미리 손쓸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광해는 바야흐로 김상궁과 함께 후원에서 잔치하며 노니는데, 김상궁이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외부 의론이 진실로 가소롭습니다. 성지(成之) 김 생원(金生員)이 어찌 이런 뜻이 있으오리까.” 하였다. 광해가 아뢴 것을 도로 돌려주며, “서서히 처리하겠다.” 하였다. 유상 등이 또 아뢰기를,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리고, 크게 간사한 놈은 믿음직한 법이오니 훗날 설혹 후회가 생길지라도 신들이 말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마시옵소서.” 하였다. 광해가 상궁에게 묻자 상궁이 웃고 제지하니, 광해가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아무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서 충성되고 선량한 신하를 해치려 하지 말라.” 하였다. 먼젓번에 이귀의 딸이 김자겸(金自兼)에게 출가했다가 일찍 과부가 되자 절개를 무너뜨리고 불당(佛堂)에 노닐며 부처에 종사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게 되자 궁녀로 들어가기를 자원하니 광해가 허락했다. 그래서 궁중에 들어오게 되자 상궁과 결탁하여 모녀(母女)가 되기로 약속하고, 항상 그 아버지와 그 남편의 형 자점이 지극한 충성심이 있는데 불행히 대북(大北)에게 미움을 받아 항상 모해당한다는 말을 하며, 날마다 하소연함과 동시에 또 다른 궁녀에게 금은(金銀)을 빌려 주어 상궁에게 바치게 한 것이 수천 냥에 가까웠다. 광해가 유상의 장계를 볼 때마다 잡아다 국문을 하려고 하면 김이 말하기를, “성지는 일월 같은 충신입니다. 하물며 김 생원은 한낱 선비인데 무슨 권력이 있어 다른 계획을 하겠습니까.” 하니, 광해는 웃고 끄덕이며 전혀 의심함이 없었다.

○3월 12일 소성 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가 복위하고, 금상전하께서 즉위하였다.

○14일 ...광해를 뜰에 엎드리게 하여 낱낱이 외치며 면책하게 한 다음 종묘사직에 죄상을 고유하고, 광해(1575-1642) 및 비(妃) 유(柳)씨와 세자 및 아내 박씨를 강화도(江華島)에 안치하되 특별히 동서문 안에 두었다. 그리고 세자를 폐하니 이때 나이 26세였다. 그는 나룻배에서 시를 읊기를,

번복되는 세상일 파도 같으니 / 麈寰翻覆似波瀾

하필 근심하리 마음 절로 한가하다네 / 何必憂愁心自閑

26년 참으로 한 꿈이로다 / 二十六年眞一夢

구름 사이로 돌아가게 되어 좋다네 / 好須歸去白雲間

하였다.

 

 

■갑자년 : 인조 2년(1624년)

○2월 10일 역적 이괄(1587-1624)이 명련과 나란히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괄의 아우 이수(李邃)와 이충길(李忠吉),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이욱(李煜) 등이 모집한 군사 수천 명을 대동하고 사라현(沙羅峴) 북쪽에 와서 적을 영접하여 선도(先導)가 되고, 또 각 시(寺)의 서리(胥吏)ㆍ예대(隸臺)가 관과 의복을 갖추고 나와 영접하는 자도 있었으며, 동민은 길을 닦아 황토를 깔고 영접했다. 적은 들어와 경복궁(景福宮)을 점거하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선조의 아들 를 추대하고, 이충길을 대장으로 삼아 역적 이제를 호위하게 하니, 이제는 음식을 준비하여 충길의 군사를 먹였다.

 

 

■을축년 : 인조 3년(1625년)

○4월 책봉(冊封)의 임무를 맡은 명 나라 사신이 바닷길을 경유해 와 서울에서 한달을 머물렀는데, 그의 토색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속 관청에서는 민가의 세금을 거두어 은자(銀子) 수만 냥을 무역했으나 오히려 부족하여 모장(毛將)의 은자(銀子) 7백 냥을 빌려서 썼다. 그 후 상환미(償還米) 2천 석은 민간의 세금으로 거두었음.

○9월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이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는데, 거느린 군사는 도합 5ㆍ6만 명이었다. 그는 지위가 높고 권력도 중하므로 몸가짐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우리 나라에 대해 불측한 태도가 많이 보이니, 서관(西關)의 장사(將士)들이 의심을 품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또 항상 사람을 시켜 오랑캐 지역에 왕래하게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병인년 : 인조 4년(1626년)

○1월 1일 서울 및 팔도 대소 관민에게 호패를 차게 하고, 호패를 도용하는 자나 호패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참형(斬刑)하며, 고발하는 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하기로 했다. 1ㆍ2품은 아패(牙牌), 3품 이하는 각패(角牌),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는 황양목소패(黃楊木小牌)로 정하고, 이상의 호패는 후면에 도장을 찍었으며, 품관(品官) 유생(儒生)은 소목패(小木牌)로 정하되 연호를 크게 쓰고 도장을 찍고, 도장이 전면에 찍힌 것은 나이와 거주지를 적으며, 도장이 후면에 찍힌 것은 다만 연방(年榜 소과(小科)에 합격한 해)만 적었다. 군민(軍民)은 대목패(大木牌)로 나이ㆍ거주지ㆍ신장(身長)ㆍ흉터를 다 기록하고 연호를 크게 하고 낙인을 찍었으며, 색(色)은 종실(宗室)과 문관은 홍색, 무관은 청색, 남행(南行 음직(蔭職))은 황색, 잡인은 백색으로 하고, 승려는 남한산성 공사에 석 달 동안 부역하여 도첩(度牒)을 받은 자에게만 호패를 지급하게 하였다.

○5월 오랑캐가 모문룡(毛文龍)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동부마(佟駙馬)와 요동ㆍ광녕의 여러 장수는 모두 진중에서 얻은 사람들이지만 지금 다 높은 벼슬에 있는데, 장군이 만약 귀순해 온다면 다른 장수에 비유할 바가 아니다. 이해를 잘 생각해서 천명(天命)을 헤아리라.

 

 

■정묘년 : 인조 5년(1627년)

○1월 13일 오랑캐가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육박해 들어오면서 먼저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 외치기를, “대 금국(金國) 이왕부(二王府)는 명령을 받들어 토벌하노니, 성중 장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나와 항복하라. 그리고 남방 군사는 모조리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철 기병이 짓밟아서 씨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겠다.” 하였다. 이날 부윤 이완(李莞)이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니 성중이 흉흉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몰랐다.

○24일 전라도 군사가 여산(礪山)에 모였는데, 병사 신경인(申慶裀)이 3천 명을 뽑아서 인솔하여 서울로 향하고, 그 나머지는 진(鎭)에 머물러 훈령을 듣기로 했다.

○27일 임금 행차가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자전(慈殿)과 중전(中殿)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해 들어가는데, 영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김유(金瑬), 이상(二相 찬성) 이귀(李貴), 참판 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 등 여러 고관이 모두 시종했다.

○도원수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강홍립과 박난영 두 집 자식에게 국서(國書)를 주어 적에게 보내 그 아비로 하여금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 달라고 말하고, 인하여 적의 정세를 탐지해 오도록 하였는데, 홍립의 답서에, “엎드려 대감의 편지를 받자오니, 위로하는 말씀이 간절하여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저는 모진 목숨이 죽지도 않고 화친(和親)되기만을 바랐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되니 다시 무슨 말을 하오리까. 군중(軍中)에서 이에 대한 말이 나오면 한결같이 역설하여 목숨을 걸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지금 두 집 자식이 국서를 받들고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을 보니 자못 과감한 뜻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노니, 영형(令兄)께서는 힘껏 협조하여 조정의 근심을 풀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군사가 이미 깊이 들어와서 군정(軍情)이 몹시 예민하니 한갓 입만 가지고 변론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진실한 호의를 강론(講論)하고 겸하여 예물과 군인들에게 상줄 만한 물자를 후히 보내어 빨리 군사를 퇴각시키는 것이 상책이며, 경조(慶弔)의 일에 이르러서는 추후에 닦아도 늦지 않습니다. 사세가 지극히 급박하니 높으신 소견에 응당 짐작이 있을 줄 믿으며, 차사(差使)는 기어코 어전(御前)에서 친히 문서를 전달하게 하여 피차가 한 모양으로 화친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긴요한 처사이니, 아무쪼록 심사숙고하여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제 자식은 잠깐 만나고 바로 돌아가니 만류할 수 없는 형편이라 마음이 찢어질 것 같지만 어찌하리까. 영감은 양찰하시오.” 하였다.

○2월 1일 적병이 평양을 지나 황주(黃州)에 당도하자 차사(差使)를 보내어 화친하자고 협박하며 세 가지 일을 요구하는데, 첫째는 땅덩이를 떼어달라는 것, 둘째는 모문룡을 잡아오라는 것, 셋째는 군사 1만 명을 빌려 주어 명 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당초에 오랑캐가 한윤(韓潤)의 말을 듣고 우선 의주를 침범하여 우리 나라 군사의 힘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인데, 마침내 닥치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고, 멀리서 바라보고는 놀라서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 달아나기 때문에 깊이 들어와 침범한 것이라고 한다.

○5일 세자가 여산(礪山)에 당도하고, 이튿날 전주를 향하여 삼례참(參禮站)에 당도하자 큰 비가 내려 출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완평(完平)이 지급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비를 맞고라도 떠나야 한다고 청하므로 세자가 따랐다.

○9일 오랑캐 차사 유해(劉海)가 강홍립ㆍ박난영(朴蘭英)과 함께 개성(開城)ㆍ풍덕(豐德)을 경유하여 행재소로 들어갔다. 이 보고가 오자 도성에서는 적병이 이미 육박해 왔다고 여겨 일시에 달아나 무너지니, 김상용(金尙容)은 급히 부하 군사를 시켜 쌀과 포목이 들어있는 어고(御庫), 병ㆍ호조의 대창(大倉)ㆍ선혜청(宣惠廳)ㆍ경영고(京營庫) 등 여러 창고에 불을 질러 국가의 저장물이 거의 탕진되었다. 그리고는 상용이 곧장 행재소로 달아났다. 노량진 가에 양곡 천여 석이 있었는데 역시 다 유실되고, 여인길(呂裀吉)이 배 두어 척을 거두어 겨우 2백여 석을 싣고 갔을 뿐이다.

○11일 강홍립 등이 오랑캐 차사 9명과 강을 건너 행재소로 나가 홍립 등이 숙배(肅拜)를 드렸다. 이튿날 군(軍)의 위엄을 베풀고 오랑캐 차사를 인견하는데, 주상전하가 답례를 하지 않으니 오랑캐가 크게 성냈다. 그래서 그날 밤에 통역을 시켜 좋은 말로 타이르게 하고, 보창군(普昌君) 강인(姜絪)으로 회답사(回答使)를 삼아 적진에 보내어 위로하게 하니 유해(劉海) 등도 같이 돌아갔다. 유해는 본래 요동 사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이왕자(二王子)의 사위가 된 자였다.

○12일 내가 방원진(房元震)과 남문 밖의 대장장이 한운(漢雲)의 집에서 자면서 군무에 대한 것을 상의하고 내일 새벽에 향병을 일으켜 전주로 향하기로 기약했는데, 밤중에 성중에서 떠들고 소란하므로 급히 탐문해 보니, 세자가 지금 전주를 떠나서 이튿날 임실(任實)ㆍ남원(南原)을 지나 순천(順天)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온 경내 백성이 적병이 이미 육박해 온 줄로 알고 겁내어 달아나면서 가축을 땅 속에 묻고 산중으로 피난갔다. 감사의 분부로 인하여 남원 객사에 임시 가옥 백여 칸을 만들고 민가 수백 호를 수리하여 민가의 건초(乾草)를 받아들였다. 순천 한 곳에 차사를 보내어 길을 닦는데, 잇달아 들으니 적병이 이때에 평산에 있고, 오랑캐 차사는 강화도에 드나든다 하므로 세자는 그대로 견성(甄城 전주(全州))에 머물렀다고 한다.

○28일 강홍립과 유해가 오랑캐 차사 13인과 함께 또 강도에 들어와 맹약하자고 협박했다.

○3월 3일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오랑캐와 맹약을 하기 위해 강도 서문 밖에 단을 만들고 밤중에 이쪽과 저쪽이 단상에 모여 백마와 검은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여 맹약을 다짐하는데, 먼저 국서(國誓)를 강(講)했다.

금국(金國)의 맹약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대금국 두 왕자와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 조선이 만약 금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병마를 정돈하고 새로 성보(城堡)를 건설하여 마음가짐이 착하지 못하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만약 두 왕자가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나라 임금이 심덕을 같이하여 공정하게 처신하면 용천(龍川)이 보호하여 많은 복을 얻을 것이다. 정묘년 3월 3일 맹약한다.

우리 나라 맹약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은 지금 정묘년 갑진월 경오일에 금국과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맺었으니, 금후로는 두 나라가 각기 맹약을 준수하여 각기 제 나라를 지킬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화친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일으켜 화친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침범한다면 또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다. 두 나라 군신이 각기 착한 마음을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릴 것이니, 천지신명은 이 맹약을 들어주소서.

대마도(對馬島)에서 우리 나라에 오랑캐 난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조총(鳥銃) 3백 자루와 장검 3백 자루와 염초 3백 근을 바치며 바로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청했다.

○철산(鐵山)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가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다. 처음에 여러 성이 와해되고 백성이 분산되어 부모 처자까지도 모두 보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봉수는 흩어진 군사를 모집하여 원수 갚기를 선언하니, 듣는 자가 기꺼이 따라서 목숨 바치기를 원하므로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매복하고 토벌하여 전후에 베고 죽인 것이 거의 수백 명에 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당상관으로 승격시켜 가산 군수(嘉山郡守)에 제수했다.

○4월 28일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이 자기들 대신 아들을 적에게 볼모로 잡히고 본국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수년 전에 죽었는데 이제야 슬픔을 고유하고 상(喪)을 입었다. 오신남(吳信男)은 아들이 없어 대신 시킬 수 없었으므로 도로 갔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윤(韓潤)을 남겨주기를 원했으나 적은 듣지 않았다.

○5월 배신(陪臣) 권호(權怙)를 명 나라에 보내어 오랑캐가 두 도를 함락시킨 것과 국왕이 섬으로 파천한 것과 오랑캐가 화친하자고 협박한 것들을 황제에게 주달했다.

○모문룡 진영의 군졸들이 저 오랑캐들이 있다 없다 하는 틈을 타서 함부로 사람을 살해하여 머리를 깎아 오랑캐를 만들어 공과 상을 요구하므로, 피살된 우리 나라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여자와 노약자는 더욱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우므로 조정에서는 접반사(接伴使)를 보내어 효유하니, 모문룡은 모르는 일이라고 핑계대고 영을 내려 엄하게 금했다.

○3일 삼전(三殿)이 강도에서 출발하여 그 이튿날 환궁했다.

유해(劉海)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군(昌原君)과 함께 호중(胡中)에서 떠나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한길 가에 줄지어 두고, 가정(家丁) 수백 명을 거느리고 곧장 서울로 왔는데, 오신남(吳信男)도 함께 왔다. 그래서 재신(宰臣)을 명하여 성문 밖에 나가 영접하게 했는데, 유해는 주상전하가 친히 왕림하지 않았다 해서 성내고 욕하며 통분히 여기는 꼴이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었다. ...강홍립과 박난영은 오랑캐 나라에 살면서 장가를 들었는데, 모두 유해의 처제(妻弟)였다....명 나라에서는 유해가 본시 요동 사람으로 오랑캐 속으로 들어가 그놈들을 도와서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는 말을 듣고 소속된 여러 나라에 이르기를, “유해를 생포하는 자가 있으면 중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을 막론하고 즉시 형주 자사(荊州刺史)에 제수함과 동시에 은자(銀子) 만 냥을 얹어 준다.” 하니, 호양보(胡良輔)와 모 장군 등 여러 장수가 정탐해서 유해가 밖으로 나온 것을 알고 길을 갈라 맡아 대기하는 한편 비밀리에 우리 나라에 통첩하여 그의 거처를 찾았다.

○7월 13일 강홍립(1560-1627)이 고국에 돌아온 뒤에 중국 여자가 또 오고, 거느린 권속들도 많았으므로 마음에 병이 되어 운명(殞命)하니, 모장군이 그 소문을 듣고 중국 여자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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