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2
허균 : 1569년 ~ 1618년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 8 논(論)
○학론(學論)
...임금이 진실로 공(公)과 사(私)의 분별을 밝게 한다면, 참과 거짓도 알아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이미 공과 사, 참과 거짓을 분별하면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고 도리를 밝히는 사람이 나와서 그들이 배운 것을 행하리라. 그들의 겉이나 꾸미는 자들은 감히 그들의 계책을 행하지 못하여 모두 깨끗이 거짓을 버릴 것이며 나라의 커다란 시비(是非)도 역시 따라서 정해지리라.
그렇다면 그러한 기틀[機]이 어디에 있을까? 임금의 한 몸에 있으며, 역시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정론(政論)
세종대왕이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임용했던 것을 본다면 알 수 있다. 저 황희와 허조는 유자(儒者)가 아니었고 재능 있는 신하도 아니었다. 오직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이 잘못하는 일에까지 그냥 따르기만 하지는 않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세종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의 윤곽이 완성되지 못하여 국사(國事)를 대부분 개혁할 수도 있었는데, 두 신하는 왕도(王道)로써 힘쓰지 않고 다만 너그럽게 진정(鎭定)시키는 것만을 최고로 여겼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임금의 정사를 도와 익(益)ㆍ직(稷)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는가?
그러나 나라가 신뢰받고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것은 모두 세종(世宗)의 힘이었으며, 두 신하가 보좌의 역할을 했었노라고 말해진다. 만약 고요ㆍ익ㆍ직 같은 분들이 보좌하여 정치를 하였다면 그 공렬(功烈)이 왜 이 정도로 낮으랴.
아! 선왕(先王 선조(宣祖))의 정치는 밝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보좌했던 신하들이야 많기도 했지만 애호하며 서로 믿었던 사람은 이이(李珥)였으며, 전권(專權)을 맡기고 일하도록 책임 준 사람은 유성룡(柳成龍)이었다. 두 분 신하는 역시 유자(儒者)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다.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일의 성취를 독책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끝내 그들의 포부를 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이 아니었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 때를 당해서 그의 정력과 지혜를 다했으나, 더러는 건져냈고 더러는 막혔던 게 그 당시 형편의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이 있어서였다. 그가 이 순신(李舜臣)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그런데 유성룡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이순신까지도 싸잡아 죄주었으니, 그 해가 나라에 미침이 그 이상 더 심할 수 없었다.
이이가 곤욕을 당했던 것으로는 의론하던 사람들이, 공안(貢案)을 고치려 했음은 불편했다느니, 여러 군(郡)에 액외병(額外兵 가외군사)을 둠은 부당하다느니, 곡식을 바치고 관작을 제수(除授)받음은 마땅치 못하다느니, 서얼(庶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 함도 옳지 못하다느니, 성(城)과 보(堡)를 다시 쌓자는 것도 합당치 못하다느니 했던 때문이었다. 병란(兵亂)을 치른 뒤에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부지런히 강구하던 방책으로는 위의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명확하였다. 몇 가지의 시행은 평상시에는 구차스러운 일임을 알았지만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데에는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때문에 뭇 사람들의 꺼려함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했었다. 그러나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소란하게 된다느니, 타당하지 않다 하여 요란하게 차질을 내었으니 당연히 그의 지위도 허용되지 못했고 나라도 되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하는 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이이를 배척하면서 앞의 다섯 가지 일을 받들어 시행하는데 오히려 힘을 다하려 않으니 이거야말로 매우 가소로운 짓이다....후세에 훌륭한 다스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긴다.’라는 이 두 가지면 다할 수 있다고 하겠는데, 그 결과야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만 나올 뿐이다.
○관론(官論)
...우리나라의 관제(官制)는 당(唐) 나라를 본받았으나, 더욱 관직이 늘어났고 또 헛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중국처럼 큰 천하로서도 오히려 권한이 분산되고 녹의 비용이 드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하물며 궁벽진 조그마한 우리나라에서야 어떠하랴....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ㆍ6조(曹)ㆍ3사(司)와 시종(侍從)을 제외한 이외에 아문(衙門)과 관원(官員) 숫자의 넘치고 번다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병론(兵論)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까? 그런 나라는 없다.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포악한 무리들을 막겠는가? 포악한 것들을 막을 장비가 없다면 나라가 어떻게 자립하며, 임금이 어떻게 자존(自尊)하며, 백성들은 어떻게 하루인들 그들의 잠자리를 펴랴.
그런데,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다. 군대가 없고도 오히려 수십 년이나 오래도록 보존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나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다....
○유재론(遺才論)
...그런데, 어찌해서 산림(山林)과 초택(草澤)에서 보배스러운 포부를 가슴에 품고도 벼슬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하며, 영특하고 준수한 인재들이 지위 낮은 벼슬에 침체하여 끝내 그들의 포부를 시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있는가! 정말로 인재를 모두 찾아내기도 어렵고, 쓰더라도 재능을 다하도록 하는 일은 또한 어렵다.
우리나라는 땅까지 좁아, 인재가 드물게 나옴은 옛부터 걱정하던 일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하는 길이 더욱 좁아져, 대대로 벼슬하던 명망 높은 집안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고, 암혈(巖穴)이나 띳집에 사는 선비라면 비록 기재(奇才)가 있더라도 억울하게 쓰이지 못했다. 과거 출신(科擧出身)이 아니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어, 비록 덕업(德業)이 매우 훌륭한 사람도 끝내 경상(卿相 판서나 정승)에 오르지 못한다. 하늘이 재능을 부여함은 균등한데,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과 과거 출신으로만 한정하고 있으니 항상 인재가 모자람을 애태움은 당연하리라.
예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멀고 오래이며, 세상이 넓기는 하더라도 서얼(庶孼) 출신이어서 어진 인재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改嫁)했으니 그의 재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어머니가 천하거나 개가했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의 차례에 끼지 못한다. ...
○후록론(厚祿論)
...지금 우리나라에는, 관리들의 녹은 줄이면서 그들의 청렴만을 독책하고 있으니 천하에 이러한 이치는 없다. 신라 때 1품 벼슬의 녹은 1년에 3백이었고, 왕씨(王氏 고려(高麗))는 그 절반이었는데, 대체로 동경(東京 경주로 신라를 가리킴)보다도 관직을 많이 설치해서였다. 조선에 와서는 관직이 세곱으로 늘어나 녹을 깎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분의 2를 깎으니 봉급은 모자라기만 했다. 대부(大夫)나 선비마다 섬기고 양육함에 곤궁하여 청렴할 겨를이 없음도 당연하다. 임진란 뒤에는 달마다 주던 요(料)를 다시 녹(祿)을 받도록 설계함에 이르러서는 또 예전의 절반으로 줄였고, 그 말[斗]의 수량도 줄이니 받는 사람은 열흘도 지탱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받드는 제사(祭祀)의 규모와, 생존한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할 비품들은 평상시보다 줄인 것이 없고 의복과 말[馬]를 꾸미고 음식은 사치스러워 절제하지 못하여 공덕 높던 임금[祖宗] 때보다 열 배나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마지 못하여 뇌물까지 받는다. 이래서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고, 풍교(風敎)는 날로 야박해지건만, 사대부(士大夫)들은 태평하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뇌물을 바쳐서 관직을 얻고 죄를 가볍게 하는 자들이 연달아 서있는데, 이건 모두 선비를 권장하는 제도를 시행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 것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제할 수 있을까?
헛되이 들어가는 관비(官費)를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소한 태도로써 통솔한다면 되리라고 여겨진다.
○소인론(小人論)
...요즈음의 이른바 군자ㆍ소인이란 서로간에 큰 동떨어짐이 없다.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면 모두 군자로 여기고, 달리하면 모두 소인으로 여긴다. 저편이 이쪽과 다르다면 배척하여 사(邪)하다 여기고, 이편과 같이 뜻하는 사람이라면 치켜 세워 정(正)이라 여긴다. 시(是)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시이고, 비(非)란 그들이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비이니, 이건 모두 공(公)이 사(私)를 이길 수 없는 이유로 그런 것이다.
진실로 대인 군자(大人君子)로서 학행(學行)과 재식(才識)이 한 시대의 대표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와서 높은 지위에 있도록 하여, 모든 관료들을 권장해 주고, 신분 높은 대부(大夫)들로 하여금 모두 바름을 지키고 공(公)에 봉사하며 시비(是非)의 분별을 밝힐 줄 알게 해 준다면, 한 시대의 음흉한 붕당 떼거리들이 장차 면모를 개혁하는데 시일이 걸리지 않으리라. 어떻게 감히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함부로 날뛰는 짓을 요즘같이 하겠는가? 그렇다면 음흉한 붕당 떼거리들의 해로움은 소인들이 국권을 전횡함보다 심한 것이 분명하다.
나라에서 소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것을 미워해서이다. 오늘날 나라에 해를 끼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권간(權奸)이 국정을 쥐지 않고도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음은, 모두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져서 권한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고, 기강(紀綱)이 이미 무너져 다시는 진작시킬 수 없는 때문이다.
이른바 권간(權奸)이라는 자들도 있었다. 김안로(金安老)가 일찍이 농간을 피웠고, 윤원형(尹元衡)도 일찍이 전권을 휘둘렀다 요즘에는 최영경(崔永慶) 역시 전횡하고자 하여 자기 자신만을 이익되게 하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배척했음은 동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에 있어서는 여전했었으니 이건 다름이 아니라 권한이 한 곳에서 나왔던 까닭으로, 전천(專擅)하던 사람이 물러가면 곧바로 예전대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호민론(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ㆍ고무래ㆍ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변변치 못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만은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 관청)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러운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守令)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 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에 대한 논
...만약 정도전이 좌명(佐命)의 날에 살륙당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면, 결코 몇 년 동안의 살아갈 목숨을 아껴서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부귀만을 생각하여 그의 지혜가 어두워져버렸으므로 자신의 공로만을 자부하여, 바로 또 임금에게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우자는 계획을 권하여 자신의 세력을 굳히려고까지 했었다. 그거야 자신을 편안하게 하려던 것이었지만 자신을 위태롭게 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에서 정도전에게 더욱 죄가 있다고 여긴다.
○김종직론(金宗直論)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남효온론(南孝溫論)
어머니가 과거 공부하라고 말하면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영화롭게 해주고는, 일생을 마치도록 녹(祿)은 말하지 않아 애초에 했던 말을 실천하였다. 이것은 지사(志士)나 개부(介夫)가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부귀(富貴)에 개의하지 않던 사람이나 하던 일이었다. 어떻게 이록이나 취하고 명망이나 훔치던 사람들과 함께 싸잡아 말할 수 있으랴. 그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였다.”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남효온의 뜻을 애석하게 여기니, 그의 지혜가 밝지 못했고 그의 국량(局量)이 좁아서다. 그런 항소(抗疏)를 하던 해에 남효온은 겨우 20세였다. 수양하던 바가 과연 다 성취되었는지도 모르거니와, 한갓 가슴속에 격앙된 것으로써 기필코 임금이 시행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되어질 때인가 아닌가를 알지 못했었다. 한갓 임금과 더불어 유위(有爲)한 일을 하리라고만 알고, 그 말했던 바가 갑자기 모두 시행되기 어려울 줄은 알지 못했다.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 10 독(讀)
○노자(老子)
...후세에 그의 무리들이 노자의 학술을 전환하여 신비롭게 만들어, 그것이 더 흘러가서는 수련(修煉)ㆍ복식(服食)ㆍ부록(符籙)ㆍ재초(齎醮) 등의 법을 만들어 괴이하고 황당하여 바르지 못하게 됨으로써 세상을 현혹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았다. 이 무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아울러 노자까지 비방하게 된 것이니, 괴이하고 황당한 행동이 어찌 청정(淸靜 노자의 사상)의 본뜻이겠는가. 그 글은 곧 경(經)이고, 그 뜻은 곧 전(傳)이며 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똑바로 하늘의 핵심을 깨뜨렸으니, 내 재주로는 어떻게 윤곽을 잡을 수가 없다. 진정 용과 같다 하겠다.
○장자(莊子)
내가 어릴 때는 장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문체를 찾고 장구를 따와 문장하는 법으로 삼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중년에 다시 읽어보니,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며 사상이 황홀하여 어림잡아 헤아릴 수 없을 듯하였지만, 이미 그 우화(寓話)를 나는 좋아하였고, 죽고 삶을 똑같이 보고 얻고 잃음을 똑같이 취급한 것은 소중히 여길 만하였다. 지금은 이 글을 보니 그 염담 적막(恬淡寂寞)하고 청정 무위(淸靜無爲)한 사상이 은연중에 불자(佛子 석가모니)와 서로 합치되었다. 오직 그 요원하고 황당한 말이 올바른 언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이 읽지 않아서 그 단서를 알 수 없다. ...
○상자(商子)
...후세의 군자들은 툭하면 왕도만 들먹이고, 관중ㆍ상앙은 천시하여 내리깎지만, 그의 공적을 따져보면 도리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아, 어떻게 하면 상자(商子)와 같은 이를 얻어서 그의 계책을 사용하여 부국 강병을 이룩하고 외적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을까?
○묵자(墨子)
묵자(墨子)의 학술은 그 도의 큰 테두리가 우(禹) 임금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자주, 우 임금의 도라고 일컬었으니, 그것은 마치 허행(許行)이 농학(農學)을 닦으면서 스스로 ‘신농씨(神農氏)의 말씀을 한다.’고 일컫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시초는 모두 성인(聖人)에게서 나왔으나 그 말류(末流)의 폐단이 마침내는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孟子)가 극력 배척하였던 것이다. ...
○순자(荀子)
순경(荀卿)이 노담(老耼)을 배척하여 ‘굽힐 줄은 알았으나 펼 줄은 몰랐다.’ 하였고, 장주(莊周)를 배척하여 ‘하늘의 도에 가려서 인간은 알지 못했다.’ 하였는데, 그의 설이 매우 타당하다. 또 능히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霸道)를 천시할 줄 알고, 공자를 높이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안 것으로는 맹자 이후 일인자이다. 오직 그의 천품이 거만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함부로 도를 안다고 자처하고 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를 제치고 곧바로 부자(夫子 공자)의 전통을 직접 이으려고 하였으므로, 이론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데 있어 제유(諸儒)와는 다르게 하느라 노력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천성이 착하다.’ 하였는데, 순경은 ‘사람의 천성이 악하다.’고 말하여, 맹자를 이기고자 하였으나 끝내 이길 수 없었다.
○손자(孫子)
춘추 전국 시대 이래로 병사(兵事)를 말한 자는 손무(孫武) 한 사람일 뿐이다. 후세에 용병(用兵)을 잘하였던 사람이라도 그의 도량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은 아니었지만 아, 역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문장도 풀고 잠그고 열고 닫고 하는 곳이 있어서 마디마디 정감이 생동한다. 선진(先秦) 제자(諸子)의 글 중에 한비(韓非)와 손무가 최고의 작가로서 간절하고 분명하게 하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문부 11 송(頌)
○성옹송(惺翁頌)
성옹이 그 누구기에 / 惺翁何人
감히 그 덕 기리려나 / 敢頌其德
그의 덕이 어떠냐 하면 / 其德伊何
어리석기 짝이 없고 게다가 무식하지 / 至愚無識
무식다 못해 고루하고 / 無識近陋
어리석다 못해 미련스럽지 / 至愚近庸
미련하고 고루한 걸 / 庸而且陋
어떻게 내세울 건가 / 奚詑爲功
고루하면 성급하지 않고 / 陋則不躁
미련하면 성미를 안 낸다네 / 庸則不忿
성미 안내고 성급 멎으면 / 忿懲躁息
겉 보기엔 못나 터지지 / 容若蠢蠢
온 세상이 허겁지겁 다 가는 길을 / 擧世之趨
옹만은 안 따르고 / 翁則不奔
남들은 고생으로 여기는 것을 / 人以爲苦
옹만은 달갑게 여긴다면 / 翁獨欣欣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깨끗하고 / 心安神精
못나 터지고 고루하지만 / 庸陋之取
정기는 뭉쳐서 단단하다네 / 精聚氣完
어리석고 무식하니 / 愚無識故
형벌 받는다 해도 두려움 없고 / 遭刑不怖
좌천된다 해도 슬퍼도 않네 / 遭貶不悲
헐뜯건 꾸짖건 내버려 두고 / 任毁任詈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만 / 愉愉怡怡
제 스스로 송을 짓지 않으면 / 非自爲頌
뉘 있어 그대를 기릴 것인가 / 孰能頌汝
성옹이 그 누군가 / 惺翁爲誰
허균 단보 바로 그일세 / 許筠端甫
■성소부부고 제17권
□문부 14 묘지(墓誌)
○신평(新平) 이생(李生) 묘지
돌아가신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모의 부인 이씨는 자기의 외사촌 동생 허균을 불러 울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씨 집 며느리된 지 이제 57년이 되었다. 조상의 복을 입어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모두 다 자랐으나 현재 남은 아이는 다섯 명이다. 이들은 모두 관복(官服)을 입고 왕께 벼슬하고 있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는가. 다만 나의 장남 이문시(李文蓍)와 그의 동생 이문지(李文芝)ㆍ이문봉(李文葑)은 이천(伊川)에서 왜적을 만나던 날 효를 위해 죽었다. 죽은 아이들이야 유감이 없겠으나, 모자의 정으로 항상 살점을 깎아내는 것 같아 잊을 수가 없다. 막내 봉을 나는 더욱 생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 성실하고 언행을 삼가하여 남과 희롱하여 웃는 일이 없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목사(牧使) 나급(羅級)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나씨는 행실이 현명하고 부부가 서로 공경하는 것이 아름다웠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나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는데 왜적 수십 명이 졸지에 나타났다. 넷째 아들은 나와 제 누이동생을 끌고 높은 숲을 넘어 숨었고, 죽은 세 아들들은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왜적이 할머니를 베이려 하자 그의 아버지가 몸으로 가리니 칼날이 그의 귀를 상하였다. 이문시는 먼저 싸우다 죽고, 이문지는 이어 칼 밑에 쓰러졌다. 이문봉은 산골 물가에 있다가 크게 소리 지르며 옷을 벗어붙이고 나와 제 몸으로 아버지 몸 위를 덮으며 손으로 왜적에게 대항하니, 열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어도 소리는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 열여섯 군데나 칼을 맞아 끝내 운명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어 적군이 버리고 떠났으므로 조모와 아버지는 이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현관은 이러한 사정을 적어 왕께 보고하여 특명으로 그의 가문을 포상하였다. 다음해에 파영(坡塋 파주 선산을 칭함)에 묻었다. 나씨는 자식이 없고 서출이 있을 뿐이니 나는 이것이 늘 마음 아프다. 이제 우리 양반이 묘를 교하(交河)에 옮기게 되어 그의 묘도 따라 옮기라 하시니, 아이들의 행적도 그대로 없어지게 할 수는 없다. 아우는 글을 지어 이들의 저승길을 밝히고 길이길이 전하게 잘 써 주게.”
하셨다. 균은 절하고 받들어 그 말씀을 이어 적는다.
■성소부부고 제18권
□문부(文部) 15 기행 상(紀行上)
○조관기행(漕官紀行)
신축년(1601,선조34) 6월 가부(駕部 사복시(司僕寺)) 낭관(郞官)으로 있던 나는 전운 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삼창(三倉)에 가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되었다.
7월 17일(병오) 홍주(洪州)에 이르러 동상(東廂 관아 동쪽에 있는 방)에서 잠깐 쉬는데 벌목관(伐木官) 박형 경현(朴兄景賢)이 아헌(衙軒)에 와서 아전을 보내어 어느 방에 묵을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가 동상에 들어오려는 것을 알고는 따지지 않고 지름길로 바로 아헌에 이르니 박경현과 목사 우공 복룡(禹公伏龍)이 벌써 연회를 시작하고 소리하는 기녀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나는 취중에,
"목사는 내 형님과 같으시니 아헌에서 며칠 머물렀으면 하는데 이곳으로 옮겨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청하니, 목사가 쾌히 승락하였다. 저녁에 박(朴)은 동상으로 옮겨 갔다. 밤에 박의 방에 들어가야 할 기녀가 내가 있는 곳으로 잘못 들어왔으므로 쫓아 보내고 수기(首妓)에게 곤장 수십 대를 때렸다.
20일(기유) 비를 맞으며 서천(舒川)으로 갔다. 진흙탕이 미끄럽고 옷에 튀어 종들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원망이 대단하였다. 오정 때쯤 군(郡)에 이르니 태수(太守) 김희태(金希泰)는 연회장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치 대국의 제후를 섬기듯이 하였다. 대낮부터 밤새도록 묵은 회포를 풀고서야 파하였다. 밀물이 바로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23일(임자)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 :매창 1573-1610)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28일(정사) 지름길을 잡아 사기원(四岐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鄭成一)과 그의 아들 경득(慶得)ㆍ희득(喜得)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에서는 마침 사신(使臣)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날 서울에서 정을 준 기녀 광산월(光山月)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어 굳이 독촉하니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 이웃 고을의 소리하는 이는 모두 모아 놓았는데, 술은 동이에 넘치고 고기는 산과 같이 많아 품위가 없었다. 저녁에 한공과 함께 묵었었다.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8월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羅時浦)를 건너 한산(韓山)에 도착하여 태수 한회(韓懷)와 만났다. 저녁에 임천(林川)에서 묵었는데, 저보(邸報)를 보니 나의 큰형이 전라도(全羅道)의 방백(方伯)으로 임명되었다.
9월 7일(을미) 삼례(參禮)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妓樂)과 잡희(雜戲)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북소리 피리소리로 천지가 시끄럽고, 천오(天吳 바다 귀신춤)ㆍ상학(翔鶴 학춤)과 쌍간희환(雙竿戲丸)과 대면귀검(大面鬼臉 탈춤) 등 온갖 춤으로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에 넘쳤다.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합격해서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다.”고 농담을 하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중동헌(中東軒)을 비워 나의 숙소로 하였다.
10월 16일(갑술) 12읍의 삼수병(三手兵)이 교장(敎場 연병장)에 모여 전체 사열을 하는데, 나는 형님을 모시고 참관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주먹이 날래고 용감하였다. 좌우군(左右軍)을 펴서 어려진(魚麗陣)과 아관진(鵝觀陣)을 만들었는데 병기는 예리하고 깃발은 선명하고 북과 피리의 군호 소리는 우렁찼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동작이 모두 절도에 맞으니 이(군대)것으로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벌벌 떨며 남쪽을 돌아보고 걱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녁에야 파하고 여러 가지 놀이를 벌여 잔치하여 군사를 먹였다. 밤이 되니 불을 밝힌 성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12월 15일(신미) 공주에 도착하여 삼창(三倉)의 아전들을 모아 중기(重記 사무 인계 서류)를 만들었다. 목사는 상경하고 이유위가 찾아와 인사하였다.
○서행기(西行紀)
이해(1602, 선조35) 2월 6일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는 종사관(從事官) 박동열(朴東說)이 병 때문에 뒤처져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나를 대신 그의 종사관으로 삼아 보내 주기를 재촉하는 급한 보고서를 올렸다.
주상(主上)께서는 도감(都監)에 명하여 날짜를 정해 놓고 따라 가기를 재촉하였다.
2월 13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고 벽제(碧蹄)에서 점심을 먹고 파주(坡州)에서 묵었다.
2월 21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일행(원접사 일행)과 방백(方伯) 이하는 성문 밖에 나가 마중하고 관에 들어가서 환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상사(上使)는 연폐(宴幣 연회할 때 보내는 선물)가 없다고 연회를 받지 않아 간신히 청해서 잔치를 벌였다.
22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쉬고 잠잔 곳마다 비용을 지불하였다.
3월 10일 새벽에 서울 서쪽 교외에 이르렀다. 상(上)이 황제의 조서를 맞아 태평관(太平館)에 들어갔다. 조서를 선포하는 일을 마치고 양사는 남별궁(南別宮)에 자리 잡았다.
21일 양사가 돌아가게 되었다. 홍휘세(洪輝世)는 탄핵을 받고 김남창(金南窓)은 병들어 모두 따르지 못하였고 박희현(朴希賢)도 사양하고 가지 않았으므로 사(使 원접사)는 송효남(宋孝男)을 추가해 인솔하고 벽제에서 묵었다.
28일 복명(復命)하고 집에 돌아왔다.
○병오기행(丙午紀行)
을사년(1605, 선조38) 겨울 명(明) 나라 황제의 장손이 탄생하였다. 황제는 한림수찬(翰林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도급사(刑科都給事) 양유년(梁有年)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遼山)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공 근(柳公根)이 상께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정월 초6일에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 직(職)을 제수받았다. 이달 21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였다.
28일 사(使)는 조카와 읍에서 만나기로 하여 중화에 머물렀다. 이숙은 나와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다. 서윤(庶尹)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가 구름무늬로 장식한 선방(仙舫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잔치를 베풀었다. 내가 관서(關西) 지방을 아홉 번이나 왕래하였으나, 이번 잔치가 가장 성대하였다. 기생 향란(香蘭)은 내 형님께서 돌봐주던 자이다. 노래 잘하고 우스개 소리를 잘하므로 백가관서곡(白家關西曲)을 부르게 했다. 방백 박자룡(朴子龍)이 중화에서 돌아와 함께 배타고 놀았다. 성 위에 횃불을 밝혀 놓으니 여장(女墻 성가퀴)이 대낮같이 밝았다. 이고(二鼓)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숙야가 나를 자기 처소에 들게 하였다. 내가 예전에 돌봐주던 기생 춘랑(春娘)이 기적(妓籍)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서울에서 온 지 두어달이 되었다 한다. 숙야가 굳이 밀어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옷매무새도 어지러워 병이 심한 듯하므로 내가 만류하였다.
3월 18일 표헌과 이해룡이 돌아와,
“양사는 매우 관후하게 대해 주었고 관속도 고천준(顧天俊)과 최정건(崔廷健) 때(선조 36년(1603)에 온 명 나라의 사신)보다 적어 따라 오는 요동 사람들이 모두 노하고 욕하며 쥐어 박으려 하더라.”
고 하였다.
20일 양사(兩使)가 진강(鎭江)에 도착하니 원접사는 박인상과 진예남 통역을 보내 인사하게 하였다. 양사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 차출되어 온 사람들의 성(姓)ㆍ자(字)ㆍ호(號)를 자세히 물었다 한다. 하인들 말로는 도중에 지은 시가 매우 많다 한다.
23일 양사가 강을 건넜다. 사(使) 이하와 방백 등 모든 관원이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환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조금 뒤에 현관례(見官禮)를 하였고 저녁에는 연위연(延慰宴)을 베풀었는데 하인들이 으시대며 위협하고 시끄러운 것은 고(顧)ㆍ최(崔)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23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상사(上使)는 강상(江上)에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시를 아홉 수나 지었고, 부사가 지은 시도 그의 절반이나 되어 화답하기 매우 군색하여 사(使)와 나,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여 겨를이 없었다.
24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이날 지은 시도 5~6편이고 부사도 의례 그 반을 짓는 것이 매우 상례가 되었다.
25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상사는 사에게 《천고최성(千古最盛)》이란 책자를 내놓고 발문(跋文)을 짓게 하였다.
27일 상사는 먼저 공강정(控江亭)에 이르고 나는 뒤따라 갔더니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내 누님의 시에 대해 물었으므로 누님의 시집을 드렸더니, 상사는 이를 읽으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시는 출판되지 않았는가?”하고 물어, 나는 감히 출판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우리나라 산천 지리(山川地理)를 매우 자세하게 물어 모두 글로 써서 대답하였더니, 장선(掌扇 의장(儀仗)에 쓰는 자루가 긴 부채)을 꺼내어 자기가 지은 제산정시(齊山亭詩)를 적어 주고 화답하라고 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구두로 지어 화답하였더니 상사는 감탄하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저물녘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녹주(綠珠) 집에 묵었다. 연주(延州)의 옛 정인(情人)이 찾아와 인사하고 창아(昌娥)와 교섭하여 자신을 대신하였다.
4월 1일 생양(生陽)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黃州)에서 묵었다. 민숙정(閔叔正 숙정은 민인길(閔仁佶)의 자)이 문 중간에 서 있으므로 나는 상사의 왕 장반(王長班)에게 귀띔하여 그의 뺨을 후려치게 하였더니 숙정은 아슬아슬하게 피하였으니 재미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하다가,
“북경(北京)에서 《황화집(皇華集)》 구본을 보았는데, 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ㆍ이이(李珥)와 같은 이들이 모두 문집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왜란으로 판본(板本)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하니, 상사가 탄식하고 아까워하며,
“최근에 유로(柳老 유영경(柳永慶)을 가리킴)의 작품을 보니 원전(圓轉) 완량(婉亮)한 것이 예전 사람들보다 훌륭했습니다. 귀국 사람들의 시를 빨리 베껴 보여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노상이라 바쁘고 서수(書手 글씨 쓰는 사람)도 없으니 며칠만 기다리면 모두 베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길가의 관역(館驛 역사(驛舍)) 벽판(壁板)에 왜 귀국 사람의 시문이 없습니까?”
하기에, 나는,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 지나는 곳에 변변치 않은 시를 보이게 할 수 없어 선례가 붙이지 않습니다.”
하니, 상사가 웃으며,
“나라로 보면 화이(華夷 중국과 주변국)의 구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에 어떻게 내외(內外 내륙과 외지(外地))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천하 모든 나라가 한집안 같고 사방이 모두 형제가 되어 나와 당신이 모두 천자의 백성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뽐낼 수 있겠습니까. 요즘 귀국 사대부를 보면 예절이 한아(閑雅)하고 문장이 빼어나니 이들을 중국에 가서 벼슬하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들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5일 회란석(回瀾石) 위에서 잠깐 쉬고 금교(金郊)에서 점심을 먹고 송경(松京)에 들어갔다. 저녁에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최고운(崔孤雲) 이하 1백 24명의 시 8백 30편을 써서 4권으로 만들고 노란 표지로 꾸며 두 본을 만들어 양사에게 올렸다. 상사는 녹화단(綠花緞 꽃무늬가 놓인 푸른 비단) 한 필과 안식향(安息香) 1천 매를 주고 부사는 남화사(藍花紗) 한 끝과 《태평광기(太平廣記)》 한 부를 줬다.
6일 개성에 머물렀다. 잔치가 파한 후 상사는 나를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평하기를,
“최고운의 시는 거칠고 힘이 약한 것 같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洪侃)이 매우 좋습니다. 이숭인(李崇仁)의 오호도(嗚呼島), 김종직(金宗直)의 금강일출(金剛日出), 어무적(魚無迹)의 유민탄(流民歎)이 아주 좋고, 이달(李達)의 시의 여러 형태는 대복(大復 명(明) 나라 하경명(何景明)의 호)과 아주 비슷하나 가수(家數)가 크지 않습니다. 노수신(盧守愼)은 힘차고 깊어 감주(弇州 명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에 비해 조금 고집스러우나 오율(五律 오언 율시)은 두법(杜法 두보의 시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색(李穡)의 시들은 모두 부벽루에서 지은 것만 못합니다. 나는 밤새 불을 켜놓고 보았는데 귀국의 시는 대체로 음향이 밝아 매우 좋습니다.”
하고는 이달의 만랑가(漫浪歌)를 소리 높여 읊조리면서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10일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하였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와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사(二使)는 서울에 10일 간 머물렀다.
5월 12일 영(令)과 이숙이 먼저 떠났다. 부윤이 남산(南山)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영은 내가 돌아본 일이 있는 창기(娼妓)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끌어내어 앉히니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진짜가 아닌 사람이 여섯 명이 끼어 있으니 더욱 우스웠다. 이숙의 연아(蓮娥)는 이별이 서러워 흐느끼며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 나는,
“내 정인은 이렇게 많아도 슬퍼 우는 사람이 없는데 이숙은 단 하나이면서 이렇게 연연하니 이야말로 많아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뭔가.”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저녁에 양책에서 묵었다. 연아가 나의 봉량(鳳娘)을 끼고서 이숙을 뒤따라 왔다. 나는,
“30명 중 너 만 왜 왔는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용리(龍吏)를 이별하는 게 더 나을걸.”
하였더니, 이숙은,
“형은 어찌 그리 박정한 말을 하시오.”
하였다.
13일 아침에 연아는 이숙을 붙들고 슬피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봉랑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울음을 참았다가 용리를 이별할 때에는 울어라.”
하였다. 이는 옥당(玉堂)의 관리 용우린(龍友鱗)과 좋아하였으나 나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16일 가산을 지나 대정강(大定江)에 도달하였다. 연주(延州)의 창기가 사의 방기(房妓)와 함께 있는 것을 배 위에서 만나자 서로 정을 품고 바라보았다. 이숙은 그를 끼고 안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사(使)의 기(妓)가 혼자 갈 수 없다고 굳이 말리니 그는 슬퍼하며 가버렸다. 저녁에 안주에 당도하니 양오와 점마(點馬) 조여익(曹汝益)이 배에서 맞이하였다.
23일 나는 먼저 중화(中和)를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숙야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송인수(宋仁叟 송영구(宋英耈)의 자)와 함께 뱃놀이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26일 동선에서 묵었다. 《황화집(黃華集)》이 비로소 완성되니 모두 6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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