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5권 한정록
허균 : 1569년 ~ 1618년
■한정록 서(閒情錄序)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찌 벼슬을 더럽다 하여 버리고 산림(山林)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그 도(道)가 세속(世俗)과 맞지 않고, 그 운명이 때와 어긋난다 하여 고상(高尙)을 가탁하여 세상을 피한 자의 그 뜻은 역시 비장한 것이다.
당우(唐虞) 시대에는 요순(堯舜)을 임금으로 모시고 군신간에 화합하여 임금을 도우니 정치가 잘 되었다. 그런데도 소부(巢父 요 임금 때의 고사(高士))나 허유(許由 요 임금 때의 고사(高士)) 같은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귀를 씻고 표주박을 걸어 놓으며,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에 의해 더럽혀질까봐 세상을 버리고 가버렸다. 저들의 이러한 인생관은 또한 어떠한 것인가.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말함)은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찬찬하지 못하였고, 또 부형(父兄)이나 스승 또는 훈장(訓長)이 없어서 예법 있는 행동이 없었다. 또 조그마한 기예(技藝)는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하지도 못하면서도 21살에 상투를 싸매고 과거를 보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경박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에 당세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는 바 되어 나는 마침내 노장(老莊)이나 불교(佛敎) 같은 데로 도피하여, 형해(形骸)를 벗어나고 득실(得失)을 구별 없이 하나로 보는 그런 것을 좋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상일 되어 가는 대로 내맡기어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금년으로 내 나이 이미 42세(1610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무엇인가 할 만한 일도 없고,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는데 공업(功業)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내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하니 슬퍼지누나. 제일 멋지게 산 저 사마자미(司馬子微)나 방덕공(龐德公)처럼 산과 계곡에 마음과 뜻을 자유스럽게 내팽개쳐 놓게 하지도 못하였고, 이들보다 못하지만 그 다음으로 멋지게 산 저 상자평(向子平)이나 도홍경(陶弘景)처럼 자녀를 필혼(畢婚)하고 멀리 유람하거나 관직을 사직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도 못하였으며, 또 그들보다 못한 것이지만 마지막으로 저 사강락(謝康樂)이나 백향산(白香山)처럼 벼슬을 하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와 정회(情懷)를 푼 것과 같이 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는 형세(形勢)에 급급하여 끝내 한가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해(利害)에도 어긋날까 마음이 두렵고, 보잘것없는 자들의 칭찬이나 비방에도 마음이 동요되었다. 이렇게 되자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혹시 함정에 빠질까 여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큰 기러기나 봉(鳳)이 멀리 날 듯, 매미가 허물을 벗듯 초연히 탁세(濁世)를 벗어나는 옛날의 어진이와 나를 비교해 보니, 그들의 지혜와 나의 어리석음의 차이가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에 그치겠는가.
근래 병으로 휴가를 얻어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중에 우연히 유의경(劉義慶)ㆍ하양준(何良俊)의 서일전(棲逸傳《세설신어(世說新語)》의 편명), 여백공(呂伯恭 송(宋) 여조겸(呂祖謙)의 자)의 《와유록(臥遊錄)》, 도현경(都玄敬 명(明) 나라 도목(都穆))의 《옥호빙(玉壺氷)》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거기 담긴 서정(敍情)이 소산(蕭散)하여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네 사람의 차록(箚錄)을 합하고, 그 사이에 내가 보고 기록한 바를 덧붙여 책 1권을 만들고, 또 거기다 고인(古人)의 시부(詩賦)나 잡문(雜文)에서 한일(閒逸)에 대해 읊은 것을 가져와 후집(後集)을 만들었는데, 모두 10편(編)으로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고는 내 스스로 반성하려는 것이다.
이 늙은이는 적은 재주로 아직 도(道)를 듣지 못하였으나 성세(聖世)에 태어나 관(官)은 상대부(上大夫)요, 직(職)은 교서(敎書)의 직분이니, 어찌 감히 소부(巢父)나 허유(許由)를 따르려고 요순과 같은 임금과 결연히 결별하고 내 스스로 고상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때와 운명이 맞지 않으므로 옛사람이 탄식한 바와 비슷한 데가 있다. 내 만약 몸이 건강한 날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나의 천수(天壽)를 다한다면 행복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다.
다음날 언젠가 숲 아래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 이 책을 꺼내 가지고 서로 즐겨 읽는다면 내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본성(本性)을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범례
내가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병으로 세간사(世間事)를 사절(謝絶)하고 문을 닫고 객(客)을 만나지 않아 긴 해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보따리 속에서 마침 책 몇 권을 들춰내었는데, 바로 주난우(朱蘭嵎 명(明) 나라 주지번(朱之蕃)의 호) 태사(太史)가 준 서일전(棲逸傳)ㆍ《옥호빙(玉壺氷)》ㆍ《와유록(臥遊錄)》 3종이었다. 이것을 반복하여 펴 보면서 곧바로 이 세 책을 4문(門)으로 유집(類集)하여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였다.
그 유문(類門)의 첫째가 ‘은일(隱逸)’이요, 둘째가 ‘한적(閒適)’이요 셋째가 ‘퇴휴(退休)’요 넷째가 ‘청사(淸事)’였다. 내 손으로 직접 베껴 책상 위에 얹어 두고, 취미가 같은 벗들과 그것을 함께 보며 모두 참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일찍부터 집에 있는 사적(史籍)이 적고 이 《한정록》이 매우 간략(簡略)한 것이 아쉬워, 여기에 유사(遺事)를 첨입(添入)하여 전서(全書)를 만들기를 간절히 바라 계획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바빠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갑인(1614)ㆍ을묘(1615) 양년(兩年)에 일이 있어 북경(北京)에 두 번이나 가게 되어, 그때 집에 있는 돈으로 약 4천 권의 책을 구입하였다.
그 가운데서 한정(閒情)에 관계되는 부분에는 부첩(浮帖 책갈피에 표시로 끼우는 종이쪽지)으로 책 윗부분에 끼워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적을 때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맡아(1616) 공무(公務)가 너무 많게 되어 감히 취선(聚選)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금년 봄에 남의 고발을 당해 죄인의 몸이 되자 두렵고 놀란 정황에 깊은 시름을 떨쳐버릴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그 책들을 가져다가 끼워놓은 부첩을 보고 베껴내고, 이것을 다시 16부문(部門)으로 나누니 권(卷)의 분량도 역시 16권이 되었다.
※허균이 광해군 폭정하에 대북당(大北黨)에 가입, 동지를 규합하던 중 광해군 9년(1617) 기준격(奇俊格)의 고발로 동지 하인준(河仁俊)이 체포되어 마침내 허균도 체포되고, 반역죄로 몰려 이듬해 광해군 10년(1618) 8월에 참형(斬刑) 당했다.
아, 이제야 《한정록》이 거의 완결되었고, 나의 산림(山林)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이로써 더욱 드러났구나.
1. 고인(古人 )이 세상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는 것은 이름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몸을 오래도록 속세(俗世)를 떠나서 한거(閑居)하게 하여 그 은거의 즐거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일 처음을 ‘은일지사(隱逸之士)’로 하였고, 거기 수집(收集)한 것이 다른 것보다 많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1로 ‘은둔(隱遁)’으로 한다.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신이 발라, 부정한 자리에는 앉지도 않고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다. 뒷날 패택(沛澤) 지방에 숨어 사는데, 요(堯)가 허유에게 천하를 양여하려 하자, 허유가,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이미 다스려졌는데, 내가 오히려 당신을 대신한다면 내가 장차 명예를 바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명예란 것은 사실의 객체(客體)인 법인데, 내가 장차 객체가 되어야 합니까. 나는 천하가 소용이 없습니다. 포인(庖人)이 비록 주방(廚房) 일을 제대로 못하더라도 시축(尸祝)이 도마를 넘어가서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고서, 받아들이지 않고 도피하였다.
그리고선 허유가 중악(中岳)으로 가 영수(潁水)의 남쪽인 기산(箕山) 아래서 농사를 짓는데, 요가 또 구주(九州)의 장관으로 부르자, 허유가 듣고싶지 않아 영수 가에서 귀를 씻었는데, 그때 그의 벗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와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허유가 대답하기를,
“요가 나를 불러 구주의 장관으로 삼으려 하는데,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귀를 씻는 것이네.”
하자, 소부가,
“자네가 만일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높은 절벽 깊은 골짜기에 산다면 누가 자네를 보게 되겠는가. 그것은 자네가 떠돌아다니며 명예를 구하려 했기 때문일세. 우리 송아지의 입이 더러워지겠네.”
하고서, 송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고사전》
2. 고인(高人 품행이 고상한 사람. 재야(在野)의 은군자(隱君子)ㆍ고사(高士))이나 일사(逸士 은거하는 사람. 은군자ㆍ은둔자)가 앞의 ‘은둔(隱遁)’ 부문에서 많이 나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다만 속세(俗世)의 선비로서 자연(自然)으로 달려가고 싶은 뜻과 한적(閑寂)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는 벼슬을 줄 수 없다. 은둔자 중에서도 기이한 자취를 가진 자와 높은 관직에 있는 자로서도 모범을 보이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2 ‘고일(高逸)’로 한다. 끝에 세 가지 일은, 그 사람이 고상(高尙)하거나 은일(隱逸)의 풍은 없으나 높일 만한 점이 있으므로 끝에다 붙였다.
■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동토(東土)의 인사들과 산수 사이에 노닐면서 사냥과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와 함께 복식법을 닦으며 명약(名藥)을 캐러 다녔다. 천리(千里)도 멀다 하지 않고 동중(東中)의 여러 고을에 있는 명산(名山)을 유람하였는데, 창해(滄海)에 배를 띄워 타고는 말하였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에서 한평생을 마치리라.” 《소창청기(小窓淸記》
3. 한적(閑適)이 이 집록(集錄)에서 제일 중요한 곳인데, 그것은 은둔하여 이 세상을 떠나 있거나 속세에 있거나 모두 자적(自適 속박됨이 없이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하며 생활함)에 이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3 ‘한적(閑適)’으로 한다.
■...나는 본시 한가로움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여 시(詩)를 짓고 술[酒]을 마련하거나 꽃나무를 가꾸고 새[禽]들을 길들이는 데에 무척이나 바쁘다. 옛날 한치요(韓致堯 한악(韓偓)의 자)의 시에,
벽화 그리며 꽃 모종할 날짜 내심 기억하며 / 畫墻暗記移花日
술독 씻으며 술 빚을 기회 먼저 짐작하네 / 洗甕先知醞酒期
한인에게도 바쁜 일 있다는 걸 알아다오 / 須信閒人有忙事
아침 일찍 비 맞으며 어부를 찾아가네 / 早來衝雨覓漁師
하였으니, 옥산초인(玉山樵人 한악(韓偓)의 호)이야말로 나와 뜻이 같은 자라 하겠다. 《미공비급(眉公祕笈)》
4.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좌태충(左太冲)은 이런 시를 지었다.
공(功) 이루고 상받지 않은 채 / 功成不受賞
예(禮) 올리고 전야로 돌아갔네 / 長揖歸田廬
이태백(李太白)은 이런 시를 지었다.
일 마치고 분연히 떠나가 / 事了拂衣去
몸과 이름 깊이 감췄네 / 深藏身與名
이 시를 보아도 그들의 사람됨을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다. 《패사휘편》
5.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고장강(顧長康 장강은 고개지(顧愷之)의 자(字))이 회계산(會稽山)에서 돌아오자 사람들이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고장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천의 암석은 높이를 다투듯 치솟았고 수만의 골짜기엔 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있었으며, 울창한 나무숲 위엔 구름이 일듯 내가 꽉 끼어 있었다.”
《세설신어》
6. 한정(閑情)을 좋아하는 선비의 뜻은 자연히 달라서, 속인(俗人)은 비웃고 고인(高人)은 찬탄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6 ‘아치(雅致)’로 한다.
■사안석(謝安石 안석은 진(晉) 사안(謝安)의 자)이 지둔(支遁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에게 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人生)이란 마치 길손과 같아서 지난날의 풍류(風流)와 즐거웠던 일들이 모두 없어지고, 종일 적적하게 지내니 일마다 서글퍼지네. 만일 그대가 와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어 이런 심정을 씻어주면 하루 사는 것이 천년을 사는 것 같겠네.” 《소창청기(小窓淸記)》
7. 퇴거(退去)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福)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7 ‘숭검(崇儉)’으로 한다.
■소하(蕭何)는 궁벽한 곳에다 전택(田宅)을 장만하고 살았으며, 자기 집을 위하여 담장이나 가옥을 꾸미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손 중에 어진 자가 나면 나의 검소한 것을 본받을 것이고 어질지 못한 자가 나더라도 권세가에게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권계총서》
8. 세속의 울타리를 벗어난 선비의 소행(所行)은 마음대로여서 법도(法度)가 없지만, 그 풍류(風流)와 아취(雅趣)는 속진(俗塵)을 씻거나 더러움을 맑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므로 제8 ‘임탄(任誕)’으로 한다.
■유령(劉伶)은 항상 술을 실컷 먹고 방탕하여 혹 옷을 벗은 알몸으로 집에 있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나무라면 유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지(天地)를 집으로 삼고 옥실(屋室)을 옷으로 삼는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나의 옷 속에 들어왔는가?” 《세설신어》
9. 장부(丈夫)의 처세(處世)는 마땅히 가슴이 탁 트이도록 가져야 하니, 상황에 따라 마음을 크게 먹고 순리(順理)로써 스스로를 억제하면 인품(人品)이 고상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 고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9 ‘광회(曠懷)’로 한다.
■당(唐) 나라 배진공(裴晉公 배도(裴度))은 술수(術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닭고기든 돼지고기든 물고기든 마늘이든 닥치는 대로 먹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때가 오면 그대로 따른다.”
하였다.
수(隋) 나라 위세강(韋世康)이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하는 뜻이 있었다. 그는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녹(祿)을 어찌 많은 것을 기다리랴. 기한이 차면 물러가야 하고, 나이는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몸이 병들었으면 사퇴해야 한다.” 《문기유림》
10. 한가한 곳에서 혼자 살면서 담박하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일상 생활하는 일이야 그 일을 당하면 역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10 ‘유사(幽事)’로 한다
■향리[故山]의 물가에 터를 잡아, 가시나무[荊棘]를 둘러 심어 울타리를 하고서 간간이 대나무를 심고, 남은 터에는 부용(芙蓉) 2백 68그루를 심어 부용이 두 길쯤 되게 하고, 매화 8그루를 둘러 심는데, 매화는 세 길 남짓하다. 겹 울타리 밖에는 토란과 밤나무 같은 과일나무를 심고, 안에는 거듭 매화를 심는다. 앞은 띠, 뒤는 기와로 팔각을 지어 ‘존경각(尊經閣)’이라 이름하여 고금의 서적을 저장하며, 왼쪽에는 자손을 가르칠 글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도원(道院)을 마련하여 손님을 대접한다. 전사(前舍)가 셋이니, 침실 하나, 독서실(讀書室) 하나, 약재실(藥材室) 하나요, 후사(後舍) 둘을 지어, 하나는 술과 곡식을 저장하고 농구(農具)와 산구(山具)를 두며, 하나는 복역(僕役)들의 방, 주방(廚房)ㆍ욕실을 알맞게 배치하여, 사동(使童) 하나 종[婢] 하나 원예사[園丁] 두 사람이 있게 한다. 앞에는 학옥(鶴屋)을 마련하여 학을 기르고, 뒤에는 개 한두 마리와 나귀 한 마리, 소 두 마리를 기른다. 손님이 오면 채소에 밥과 술 및 과일을 마련한다. 틈이 나면 독서하고 농사일을 보며, 괴롭게 시(詩)를 짓지 않고, 타고난 여생을 편안히 지낸다. 《옥호빙(玉壺氷)》
11. 고인(古人)의 짤막한 말이나 대구(對句) 같은 것 중에 속된 것을 치유하거나 세상을 훈계할 만한 것이 있는데, 한거 중에는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제11 ‘명훈(名訓)’으로 한다.
■병에 마개를 꼭 막듯이 입을 다물어 말을 삼가고, 군사가 성(城)을 지키듯 마음에 사욕(私欲)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라. 《공여일록》
12. 글은 고요한 데서 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한거자(閑居者)가 글이 아니면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며 흥(興)을 붙이겠는가. 그러므로 제12 ‘정업(靜業)’으로 한다.
■또 안지추는 말하였다.
“독서란 비록 크게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한 가지 기예는 되는 것이라 스스로 살아가는 바탕이 된다. 부형(父兄)은 항상 의지할 수 없고, 향국(鄕國)도 항상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일단 유리(流離)하게 되면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여야 한다.” 《안씨가훈》
13. 옛날에 고인(高人)이나 운사(韻士 시가(詩歌)나 서화(書畫) 등에 취미가 있는 사람. 운치가 있는 사람)는 풍류(風流)를 서로 감상하거나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러므로 서화(書畫)나 거문고 타기, 바둑 등 여러 가지 고상한 놀이는 사람의 성미(性味)에 맞아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도구(道具)로서 없앨 수 없다. 따라서 제13 ‘현상(玄賞)’으로 한다.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이 강을 건너 의진(義眞)에 도착하여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유장산시(遊蔣山詩)에 화답(和答)하는 시를 지어 형공에게 보내니, 형공은 그 시를 읽다가,
산봉우리가 많으니 햇빛을 가리고 / 峯多巧障日
강이 머니 하늘을 띄우고자 한다 / 江遠欲浮天
한 데에 이르자 탁자를 어루만지며 감탄하였다.
“내가 일생 동안 지은 시가 이 두 구절만 못하다.” 《하씨어림》
14. 산에 은거하여 살 때도 역시 필요한 일용품(日用品)이 있는데, 침석(枕席)이나 음식이 세속(世俗)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제14 ‘청공(淸供)’으로 한다.
■산거(山居)에 필요한 도구 : 경적(經籍)과 기저(機杼)를 준비하여 풍속의 교화와 자손의 교육에 사용하고, 약품과 방서(方書)를 준비하여 사악(邪惡)한 것을 물리치고 질병을 막는 데 쓰고, 좋은 붓과 종이를 저장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는 데 쓰며,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서 손님의 접대와 홀로 술을 마실 때 쓴다.
또 떨어진 옷과 낡은 갓을 수리해 두었다가 눈 내리고 바람 불 때 쓰고, 아름다운 돌과 좋은 먹ㆍ고옥(古玉)ㆍ기이한 서적 등을 수집하여 긴 날의 지루함을 덜고, 유서침(柳絮枕)과 노화피(蘆花被)를 만들어서 침상을 잇대 놓고 야화(夜話)를 즐기는 데 쓰고, 황면 노수(黃面老叟 석가여래의 별칭. 여기서는 중을 가리킨다)와 백발의 어부를 가까이하여 늙는 근심과 번거로운 세상사를 잊도록 한다. 《암서유사(巖棲幽事)》
15. 신선(神仙)을 구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애매하여 잘 알 수 없다. 산택구자(山澤臞者) 장우(張雨 원(元)의 도사(道士) 산택구자는 그의 호)같이 복식(服食)과 섭양(攝養)으로 오래 살수 있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5 ‘섭생(攝生)’으로 한다.
■음식을 먹고 나서 입 다물고 똑바로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모든 잡념 다 잊고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아무 물건도 보지 말고 아무 소리도 듣지 말고 정신을 내수(內守)에 집중하면서 숨을 고르게 조용히 들이쉬고 내쉬고,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모를 정도로 끊기지 않게 계속한다면 자연히 심장 화기는 아래로 내려가고 신장의 수기가 위로 올라와, 입 속에 침이 생기고 영진(靈眞)이 몸 속에 있게 되어 오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서전집》
16.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의 생업 중에서 농업(農業)이 근본으로 한거자(閑居者)가 해야 할 사업(事業)이다. 그러므로 제16 ‘치농(治農)’으로 한다.
■택지(擇地)
생활의 방도를 세우는 데는 반드시 먼저 지리(地理)를 선택해야 하는데, 지리는 수륙(水陸)이 서로 잘 통하는 곳을 제일로 치기 때문에 산(山)을 등지고 호수(湖水)를 바라보는 곳이라야 가장 좋다. 그러나 반드시 지역이 관대(寬大)하여야 하며, 또한 긴속(緊束)한 곳을 필요로 하니, 대개 지역이 관대하면 재리(財利)를 많이 생산할 수 있고, 지역이 긴속하면 재리를 모아들일 수 있다.
■자본(資本)
모든 경영(經營)이 다 근본이 없으면 정립(定立)될 수 없고, 재물(財物)이 아니면 이룩할 수 없다. 동류(同類)는 이미 얻었다 하더라도 자본이 넉넉하지 못하면 또한 성공(成功)할 수 없기 때문에 장차 경영을 하려면 먼저 재물을 축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창업(創業)한 자는 탐(貪)하지 않고 차서에 따라 하여도 자연히 이익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꼭 부(富)까지 이룰 필요는 없다.
■정거(定居)
거처(居處)와 음식(飮食)은 인도(人道)의 대단(大端)이 되는 것이니, 지리(地利)는 이미 얻었다 하더라도 거처할 곳이 없으면 이 몸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어떤 땅을 경리(經理)하려 할 때 또 집 짓는 일까지 하다보면 시기를 잃어서 일을 망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産業)을 제정하는 데 있어 이미 완성된 가옥(家屋) 등을 사는 것이 옳다. 그러나 또한 너무 크지 않은 것으로 해야 한다.
■곡식을 심음[種穀]
거처를 옮기는 데는 먹을 것이 넉넉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농사(農事)로 우선을 삼는다. 그러므로 한번 거처를 정하면 모든 복종(僕從)에게 즉시 각기 그 산업(産業)을 맡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主)와 종(從)이 모두 10인(人)이라면 60석(石)이 아니고서는 연간 생활을 영위할 수 없으므로, 전지(田地)의 다과(多寡)를 보아서 편의(便宜)할 대로 처리해야 한다. 만일 전지 1백 묘(畝)가 있다면 복종(僕從)에게 스스로 30묘를 경작(耕作)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전인(佃人 소작인(小作人))에게 경작시키는 것이 옳다.
■채소를 심음[種蔬]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을 기(饑)라 하고 채소가 익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 하는 것이니, 오곡(五穀) 이외의 채소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살고 있는 집의 좌우(左右)에 즉시 땅을 일구어서 심되, 김매고 물주기에 편리하도록 둑을 쳐서 파종한다.
■나무를 심음[樹植]
이미 거처할 곳이 정해졌으면 모름지기 그 근방의 산장(山場)을 호미로 두루 파 보아서 그 토지의 적성에 따라 재목(材木)을 심고 과일나무도 심어 가꾸어서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의 자본으로 만들어야 한다.
누에를 쳐 고치를 켬[蠶繅]
《예기(禮記)》 월령(月令 제의(祭儀)의 착오인 듯함)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반드시 공상(公桑)과 잠실(蠶室)을 두었다.”
하였는데, 하물며 사대부(士大夫)와 서인(庶人)의 집이겠는가. 일단 거주할 곳을 정했으면 집 주위에다 뽕나무를 널리 심고, 또 미리 곡(曲)ㆍ식(植)ㆍ거(籧)ㆍ광(筐) 등의 잠구(蠶具)를 구해 놓는다면, 누에를 기를 때에 누에를 먹일 뽕이 결핍될 걱정이 없을 것이며 잠구도 따라서 결핍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가축을 기름[牧養]
생활을 영위하는 방도는, 일정한 거처가 있고 일정한 산업(産業)이 있는데다 가축(家畜)을 기르면 이(利)가 일어날 것이다. 도주공(陶朱公 춘추 시대 범려(笵蠡)의 변명(變名)이 의돈씨(猗頓氏 춘추 시대 노(魯)의 대부호(大富豪))에게 고(告)하기를,
“그대가 치부(致富)를 하려면 마땅히 오자(五牸 다섯 종류의 암짐승)를 기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이 5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수축(水畜 물고기)이 제일이다.”
하였으니, 가축 기르는 일을 서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때를 따름[順時]
천하(天下)의 일을 성취시키는 데는 시기를 따르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씨앗을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데도 각기 알맞는 시기가 있으니, 그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옛 성인(聖人)이 촌음(寸陰)도 아꼈던 것은 진실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농사(農事)를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써 부지런히 일함[務勤]
전(傳)에 이르기를,
“일생(一生)의 계책은 부지런한 데에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거름[糞]이 많고 부지런히 일하는 집이 상농(上農)이다.”
하였으니, 반드시 밤이면 생각하고 낮이면 일을 하며, 용기 있게 앞으로 전진하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적당한 시기를 놓치는 허물만 저지르지 않으면 이(利)가 갑절 오를 것이다.
■검소함을 익힘[習儉]
씨앗을 뿌리고 누에를 쳐 고치를 켜는 데서 곡백(穀帛)의 근원이 벌써 열리고, 나무를 심어 가꾸고 가축을 기르는 데서 재화(財貨)의 밑천이 벌써 갖추어진다. 하지만 진실로 그 재물을 절제 없이 써 버린다면 몸만 수고로울 뿐 재용(財用)은 더욱 부족해질 것이다. 구 내공(寇萊公 송(宋) 구준(寇準)의 봉호)의 육회명(六悔銘)에 이르기를,
“부자로 살 때에 재용을 절약하지 않는다면 가난해진 때에 뉘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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