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성소부부고3

청담(靑潭) 2018. 2. 5. 23:04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3

 

허균 : 1569년 ~ 1618년

 

■성소부부고 제19권

□기행 하(紀行下)

○기유서행기(己酉西行紀)

무신년(1608, 선조41)에 나는 공산(公山)에서 부안(扶安)으로 돌아와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이 있어 북쪽으로 여행하여 서울에 이르러 형님을 찾아 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고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이 되었다. 1609년 2월 초하루에 유 태감(劉太監) 원접사(遠接使) 이공 상의(李公商毅)가 나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천거하니 주상께서 서장관을 바꾸어 종사관으로 이공을 따라 가라 명하셨다.

2월 26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성 위를 보니 단청한 누각이 보였다. 물어 보니 새로 지은 연광정(練光亭)이라 했다. 평양부(平壤府)에 들어가 서상(西廂)에서 묵었다. 나와 동갑인 이 방백(李方伯)이 찾아와 사신의 일행이 지나는 도내(道內)의 연변에서 접대할 계획을 완벽하게 하여 역참에 나오지 않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자 사(使)가 감영의 예방(禮房)을 가두라고 명령하니 방백은 불쾌하여 돌아갔다.

3월 4일 숙천(肅川)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도 전에 부민(府民) 상하 남녀가 길을 막으며 부사(府使) 윤삼빙(尹三聘)의 유임을 호소하였다. 사는 나와 연숙을 불러 백성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의 거류(去留)에 대해 계품(啓稟)할 것을 의논하였다.

29일 방백이 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대부(大府 부윤을 가리킴)는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믐날이었으므로 뒷동산에 올라 홀로 앉아 송춘시(送春詩)를 지었다. 붉은 꽃잎은 비오듯이 지고, 그윽한 새소리는 영롱하게 들려오니 고향 생각에 서글펐다.

4월 7일 웅사(熊使)가 진강(鎭江)에 도착하였다. 양행(兩行 유 태감 원접사와 웅 대행 원접사 일행)은 모든 관원을 대동하고 교외(郊外)에서 칙서를 맞는 예를 행하였다. 성으로 돌아오는데, 구경하는 남녀로 성곽이 꽉찰 지경이었다. 여인(汝仁)은 내 곁에 있다가 길가의 여자들 중에 부(府)의 창기(娼妓)들이 모두 나와 줄지어 꿇어앉아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여인이 헤어보니 내방에 들어온 일이 있던 자가 12명이었다. 나는 시를 지어 자조(自嘲)하였다. 시의 끝 구절에,

남쪽 길가 열두 여인 / 十二金釵南陌上

일시에 고개 돌려 봄바람에 웃는다 / 一時回首笑春風

하였는데, 여인은 풍류(風流)는 끊어지지 않고 바로 이 사람에게 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23일 교외에 나가 예의를 행하였다. 오정 때쯤 유사(劉使)는 진강에 도착하고, 저물녘에 왕진과 전강이 먼저 관(館)에 도착하였다. 사(使)가 대문에서 맞아 술을 따르며 정성껏 접대하였다. 백패가 비로소 왔다. 원역은 소당(小璫) 3명, 상공(相公) 16명, 근수(跟隨) 12명, 조례(皁隷), 취수(吹手), 주역(廚役) 등 모두 1백 20여 명이었다.

25일 그대로 머물렀다. 전강이 표헌과 정득 두 대역(大譯)을 불러 은폐의 수를 의논하였는데, 너무나 많아 사(使)는 종일 힘껏 싸웠으나 겨우 그들이 말한 액수의 반을 감했다. 그러나 엄만이 왔을 때에 비하면 두 배나 되었다.

5월 10일 아침에 유사(劉使)는 사(使)와 우리 두 사람(허균과 유연숙)에게 예물을 보냈다. 저사(紵絲), 향선(香扇), 서책 등 물건이 매우 푸짐하였다. 저물녘에 숙녕에 당도하였다. 서명이 찾아와 말하기를,

“북경에 있을 때 서자(庶子) 도망령(陶望齡)을 만났다. 그는 궁유(宮諭) 주지번(朱之蕃)을 만난 일이 있는데, 주(朱)는 ‘조선에 허모(許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의 시는 천하에 으뜸간다.’고 하더라며, ‘네가 그 나라에 가면 꼭 그 시집을 구해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바로 그 사람이구료. 시집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바로 보따리에서 한 부를 꺼내주었다.

14일 사가 연회할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는 기자묘(箕子墓)에 참배하고는 은(銀) 20냥을 내어 서윤(庶尹) 이홍주(李弘冑)에게 주면서 사우(祀宇)를 중수하라고 하였다.

15일 부자묘(夫子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고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또 은 20냥을 내어 중수에 보태게 하였다.

26일 유사의 생일이라고 임금께서는 문안사(問安使) 여유길(呂裕吉)을 보내고 명삼(明蔘) 백 근과 은 천 냥,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을 이에 어울릴 만큼 보내셨다. 유사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에 서 상공이 내 숙소로 와서 《백락천집(白樂天集)》을 주었다.

28일 유사는 임금께 답례를 푸짐하게 하였다. 망단(蟒緞), 서금(瑞錦), 소옥대(素玉帶), 옥배(玉盃), 아각선인(牙刻仙人) 등 이었다. 전 상공의 말로는 3백 금(金)에 해당하는 값어치라 한다.

28일 황주에 이르러 연회를 받았다. ...서는,

이번에 유사가 귀국에서 얻은 것도 7만 금이니 귀국 백성의 고혈(膏血)이 말랐을 것이다.”

고 하였다.

7월 25일 아침 일찍 복명하고 유사가 어전에 드리는 예물을 정원(政院)에 전달하였다. 예방(禮房) 유공량(柳公亮)이 일일이 수효를 점검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물러나와 형님을 뵈었다.

이번 길은 마침 국상(國喪) 중이어서 풍악을 금하는 때라 연도(沿道)의 주군(州郡)마다 환영하고 전송하며 오래 지체하는 일이 없었고 풍악과 여색[聲色]으로 귀를 어지럽히거나 정을 나누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관(旅館)은 한가하고 조용하여 한묵(翰墨)만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지은 시가 4백여 수나 되었으니 참으로 많다 할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文部) 18척독 하(尺牘下)

○허자하 형에게 보냄 경술년(1610) 6월

쌍성(雙城 옛 선녀의 이름)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조강지처(糟糠之妻)는 하대하지 못하는 겁니다. 형께서 멀리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형수가 아이를 안고 울 터이니 너무 박정한 듯합니다.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비단에다가 글쓰는 짓이야 바로 중국의 소년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형은 50이 가까우니 흰 머리가 날만도 합니다. 모름지기 조금씩 몸을 단속하여 교송(喬松)의 장수(長壽)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냄 기유년(1609) 9월

문한(文翰)을 맡은 신하가 시험관으로 참가했다가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는 일은, 수(隋) 나라에서 과거 제도를 시작한 이래로 없었던 일인데, 아우가 몸소 당했습니다. 게다가 불행스럽게 우리 집안에서 나왔으니 선대의 교훈을 욕되게 했음이 크기만 합니다. 오직 죽고 싶을 뿐입니다. 황돈(篁墩 명(明) 정민정(程敏政)을 가리킴)도 고문까지는 당하지 않았고 백호(伯虎 명(明) 당인(唐寅)의 자)도 삭적(削籍)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법률을 엄하게 적용하는 일이 지금은 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러나 역시 운명인데 어찌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지세에게 보냄 무신년(1608) 3월

큰 고을을 맡아 복을 누리면서도 원헌(原憲 공자의 제자)처럼 가난한 친구를 구제해 주지 못하여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고을의 창고는 봄을 당하여 곡식 알 하나가 구슬과 같습니다.

보내드린 것은 겨우 말[馬] 한 필에 실을 정도이지만 나의 월급의 절반입니다. 범순인(范純仁)이 그의 친구 석만경(石曼卿)에게 배로 보리를 가득 실어 보내던 것에 비교하면, 부끄러워 땀이 납니다.

○조지세에게 보냄 무신년(1608) 9월

저는 세상 의논에 액운을 당했으니 쉬고 싶은 게 본래의 뜻입니다. 이제 다행히 파직되어 곧장 부령(扶寧 전라북도 부안(扶安)의 옛 이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오후(五侯)의 문에는 향하지 않으렵니다. 어떻게 해야 형과 화산(華山)을 절반으로 나누어 살 수 있을까요? 종이를 대하니 슬프기만 합니다.

○조지세에게 보냄 기유년(1609) 10월

제가 시험관이 되어 형의 책문(策文)을 2등으로 뽑았으니, 이른바 눈이 흐려 5색의 햇빛을 구별 못함입니다. 그러나 형의 사업(事業)은 한치규(韓稚圭 치규는 송(宋)의 정승 한기(韓琦)의 자)와 같으며 문장(文章)은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과 같으시기를 바라오니, 그만 하면 충분합니다.

○임자승(林子昇)에게 보냄 경자년(1600) 2월

어떤 이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호)를 헐뜯고 설서(說書) 벼슬을 얻었다고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무척 분노하였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小人)을 헐뜯고서 벼슬을 얻는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서애 정승을 헐뜯으면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럽게 마음을 가질 것이며, 조급하게 행동하지 마시게. 앞 길이 만 리라 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며, 괴상한 행동으로 요행하게 얻을 수 없는 것은 공명(功名)인 것이네. 속담에 ‘바삐 먹으면 목에 걸린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비속하지만 큰 의미를 깨우치게 하네.

○기헌보(奇獻甫)에게 보냄 신해년(1611) 1월

이달 15일에 유배지(함열)에 도착하였습니다. 새우도 부안만 못하고, 게[蟹]도 벽제(碧隄) 것만 못했습니다. 먹을 것만 탐하는 사람으로서는 굶어서 죽겠습니다.

○용산(龍山)의 원님 이할(李劼) 에게 보냄 신해년(1611) 3월

아침에 일어나니 식지(食指)가 움직이더니 문득 좋은 어물(魚物)의 선사를 받았습니다. 하필이면 바다의 용왕만 아름다운 맛을 낸다고 하던가요. 양강(襄江)의 축항(縮項)이란 고기나 서주(徐州)의 독미(禿尾)라는 고기가 모르긴 하지만 그 맛이 이에 대적이 될는지요.

실처럼 잘게 썰어 회(膾)를 쳤더니, 군침이 흐르더이다.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니 국수나 먹던 창자가 깜짝 놀라 천둥 소리를 냈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감히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함산 원님에게 보냄 신해년(1611) 3월

사람들이 이곳은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이곳으로 유배지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는 전혀 없으니, 역시 운수가 기박합니다. 늙은 저는 입맛을 위해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조카 채(寀)에게 답함 신해년(1611) 3월

네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부터, 서울의 여러 친지들이 모두, 형보(亨甫 함열 현감(咸悅縣監) 한회일(韓會一))가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가령 너의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말이 우리 집으로부터 나왔다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그러한 일이 없었지 않느냐.

이 고을은 본디 쇠잔한 곳인데다가 함열은 규모가 협소하니, 어떻게 고을마다 임피(臨陂)와 같고 사람마다 기백(畿伯)과 같겠는가. 너무 심하게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삼가서 이러한 말을 하지 말라. 괜스레 네가 박정하다는 말만 더해질 것이다.

○이손곡(李蓀谷)에게 보냄 기유년(1609) 4월

옹(翁)께서는 저의 근체시(近體詩)가 순숙(純熟)하고 엄진(嚴縝)하여 성당(盛唐)의 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여 배척하고는 돌보아 주지 않고, 오직 고시(古詩)만 좋다고 하여 남조(南朝)의 문장가인 안연지(顔延之)와 사영운(謝靈運)의 풍격이 있다고 하니, 이는 옹께서 고집만 부리시고 변할 줄을 모르신 것입니다.

고시(古詩)야 비록 예스러우나 이건 그대로 베낀 것이어서 옛것과 핍진(逼眞)할 따름이니, 그렇게 중첩된 것을 어떻게 귀하다고 하겠습니까. 근체시(近體詩)는 비록 당시(唐詩)와 흡사하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저의 조화(造化)가 있습니다. 저는 저의 시가 당시나 송시(宋詩)와 유사해질까 두려워하며,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이 아닐는지요.

○이여인에게 보냄 병오년(1606) 2월

어젯밤 소랑(蕭娘)을 불러 왔기에 숙야(叔夜 박엽(朴燁)의 자)의 강요로 만나보았네. 자세히 보다가 원망이 사무쳐,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는데 촛불 그림자 속에 비치는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진 화장, 구겨진 옷, 부드러운 얼굴은 곱게 단장하고 고운 옷을 입은 때보다 훨씬 예뻤으니, 서시(西施)의 찡그린 얼굴을 못생긴 모모(嫫母)가 흉내내는 일을 비로소 믿게 되었네.

잠자리에 들어서는 우는 듯, 호소하는 듯했으나 10년 전의 옛일을 이야기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사뭇 다정스럽게 하면서 한마디의 말도 착오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또 망연자실하였다네. 그대는 시험삼아 정사(情詞)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여 주게.

○이여인에게 보냄 무신년(1608) 4월

자네의 애첩(愛妾)은 매우 깜찍하고 지혜로워 젊음이 잠깐임을 반드시 알 것인데, 그가 비구니(比丘尼)가 되어서 끝까지 절개를 지킬 것인가. 속담에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을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잘해 보게나.

그가 비록 금빛 휘장과 맛좋은 고아주(羔兒酒)의 맛에 익었지만 눈 녹은 물에 끓인 차[茶]도 특별히 운치 있는 일이네. 만일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반드시,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것이네. 자네가 그에게 나는 놈 위에 타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이여인에게 보냄 무신년(1608) 7월

처마의 빗물은 쓸쓸하게 떨어지고 향로의 향내음은 살살 풍기는데 지금 두서너 친구들과 소매 걷고 맨발 벗은 채, 방석에 기대어 하얀 연꽃 곁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볼까 하네. 이런 때에 우리 여인(汝仁)이 없어서는 안 되겠네.

자네의 늙은 아내가 반드시 으르렁대며 자네의 얼굴을 고양이 상판으로 만들 것이나, 늙었다고 두려워 위축되지 말게. 문에서 기다리는 종이 우산을 지녔으니, 가랑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네. 빨리 오시게. 모이고 흩어짐도 늘 있는 일이 아니니, 이러한 모임인들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계랑(桂娘)에게 보냄 기유년(1609) 1월

아가씨는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山鷓鴣)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은 참선(參禪)은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계랑에게 보냄 기유년(1609) 9월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 송(宋)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說部) 1

○성옹지소록 상(惺翁識小錄上)

우리나라 의정부(議政府)의 권한이 문종(文宗)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공(三公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六曹)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참알(參謁)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사(公事)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ㆍ서벽(東西壁)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후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대통(大統)을 이어 즉위한 이래 위와 같은 절차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국가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지금은 공신(功臣)으로서 정1품에 오른 자는 으레 부원군(府院君)이라 하는데, 이것도 본래의 뜻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하게 여기는 관직은 이조 낭청(吏曹郎廳)이다. 직제학(直提學) 이하 청망 관직(淸望官職)에 승진하거나 퇴임시키는 것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堂上官)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士禍)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서 발단되었다.

근래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分黨)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金仁伯 인백은 김효원(金孝元)의 자)이 판서 심충겸(沈忠謙)이 전랑(銓郞)에 선발되는 길을 막은 데서 발단한 것으로서 선비들의 의논이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정승 김응남(金應南)이 언젠가 말하기를,

“임금의 외척으로 전랑(銓郞)을 삼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당초의 의논은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심(沈)이 국가를 위해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忠臣)이다. 그때 사론(士論)을 지나치게 따름으로 해서 마침내 붕당으로 갈라졌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추천하는 일을 폐지하였는데 병조(兵曹)는 그대로 두었다 한다.

...옛 규례에 이조 낭관(吏曹郎官)은 좌랑(佐郞 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正郞 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바로 사인(舍人 의정부의 정4품)으로 승진되었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준직(準職 당하(堂下)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사론(士論)의 지적을 받아서 자리를 물러난 경우에도 초승(超陞 차례를 무시하고 승진함)에 급급해서 1년 내에 반드시 계제직(階梯職)으로 옮겨갔다.

찰방(察訪 종6품)ㆍ판관(判官 종5품)ㆍ도사(都事 종5품) 등의 외직(外職)은 사람들이 낮게 여기고 싫어하여 회피하고 가지 않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宋仁叟)와 김숙도(金叔度)는 다 찰방(察訪)으로 나갔고, 오여익(吳汝翼)은 늙은 아비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宋弘甫)는 4품직을 지냈는데도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나갔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관직을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 요행수로 얻는 자가 많은 데에서 시작되어 결국은 사람들이 벼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兵曹)이다. 그래서 조종조(祖宗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된 자는 대부분 변방의 일을 아는 자를 임용해서 오래 맡겼다. 김종서(金宗瑞) 같은 분은 10년 동안 체직되지 않았다.

이계동(李季仝)과 유담년(柳聃年)은 무신(武臣)이었으나 또한 십수 년이나 나라의 군무(軍務)를 도맡아서 작은 일은 모두 자신이 결단하고 큰 일은 대신(大臣)에게 아뢰나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약간 수정할 뿐이었다.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면서부터는 대소 군정(軍政)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유사 당상(有司堂上)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에서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할지를 몰랐다. 근래에는 내지(內地)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까지도 비변사에서 선임하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공물(貢物)의 제도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연산조(燕山朝)에 창설된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용재(成慵齋)의 말에 ‘성종조(成宗朝)에 비로소 횡간(橫看)을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조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贊成) 이이(李珥)가 개혁하려다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 선조27)에 서애 선생(西厓先生)이 국정(國政)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梧里政丞 이원익(李元翼))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京畿)에 시행하였는데 경기의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산릉(山陵 왕ㆍ왕비의 무덤)의 일과 두 차례의 조사(詔使 중국의 사신) 접빈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요역(徭役)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八道)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승정원(承政院)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중히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堂上官) 중에서도 이조(吏曹)나 대간(大諫)을 지내야 겨우 할 수가 있다.

평성군(平城君 평성은 원종의 봉호) 박원종(朴元宗) 같은 이를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체직시켜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한 것이 이 경우이다.

근래에는 물망이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합칭)의 아래에 있다. 또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반드시 무신(武臣) 한 사람씩을 참여시키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의 인망을 키워서 후일 크게 쓸 바탕을 만들고자 해서이다. 그래서 서북 방면(서쪽은 황해ㆍ평안도, 북쪽은 함경도를 지칭함)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에서 임명한다. 근래에는 선왕(先王 선조를 지칭) 때의 남언경(南彦經)과 양사형(梁思瑩)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근래에 과거에 등제(登第)하지 않고서 승지(承旨)가 된 자는 정내암(鄭來庵 내암은 정인홍(鄭仁弘)의 호)과 정한강(鄭寒岡 한강은 정구(鄭逑)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전시(殿試)의 시관이 되었으니 역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康明之 명지는 강복성(康復誠)의 자)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감반(甘盤)으로서 수고한 때문이었다. 간옹(艮翁) 홍가신(洪可臣)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하였지만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서인원(徐仁元)은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가 되었으며, 이외에 참의(參議)가 된 자가 겨우 두세 명이다.

선왕조(先王朝)에는 남행(南行)으로 사헌부(司憲府) 벼슬을 한 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과감하게 말해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자도 있었다. 간옹(艮翁)이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安汝慶)을 부윤(府尹)으로 임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였는데, 상(上)이 이에 노하여 안(安)을 부윤에서 체직시킴과 동시에 이후로 남행(南行)은 대관(臺官)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풍속이 문과의 장원은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의 별칭)의 장원을 중시한다. 사마시는 문장의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1~2등 10여 명을 뽑으며 인물을 가려서 하기 때문에 한번 방(榜)에 들면 종신토록 공경을 받는다.

...세묘(世廟 세종(世宗)) 때에 처음으로 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해서 사가독서(賜暇讀書)케 하여 후일에 크게 임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명하고 민첩함이 뛰어난 것으로 얘기되는 사람이 국조(國朝) 이래로 많이 있지만,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 사문 계선(尹斯文繼善 : 1577-1604)이 가장 총명한 것으로 얘기된다. 내가 태복시(太僕寺)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3백여 필의 털빛과 소재 지명, 기르는 이의 이름을 적은 마적책(馬籍冊)이 옆에 있었는데 윤이 한 번 보고는 다 외었다. 3일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任叔英)도 중조(中朝)의 《이력편람(履歷便覽)》을 보고는 정확하게 모두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윤계선(1577-1604)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술(而述), 호는 파담(坡潭). 이조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윤춘년(尹春年)이다. 아버지는 윤희굉(尹希宏)이며, 어머니는 이택(李澤)의 딸이다. 숙부 윤희정(尹希定)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 30 : 21세)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병조정랑·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정6품)으로 경연청검토관(經筵廳檢討官)을 겸직하였고, 1600년 사헌부지평(24세, 정5품)으로 재직중 설화(舌禍)로 황해도 옹진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개의하지 않고, 청렴하고 엄격하게 사무를 처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총명하고 인정이 있게 선정을 베풀어 관찰사의 추천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 뒤 평안도도사(종5품)로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탁월하고 큰 뜻이 있어 함부로 남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나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만여언(萬餘言)을 지었으며, 특히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잘 지었다.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가서 황제를 모신 자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로 해서 권영균(權永均)ㆍ여귀진(呂貴眞)ㆍ최득비(崔得霏)는 열경(列卿)이 되었고, 조선에 있으면서 중국의 봉록(俸祿)을 받았으니, 왕감주(王弇州 감주는 왕세정(王世貞)의 호)가 이전술(異典述)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갖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 갔으므로 불러서 광록소경(光祿少卿)을 제수하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이한 은전(恩典)이다.

중관(中官 내시)으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代)마다 있었는데,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1488~1505) 연간에 이르러 뽑아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피해가 되고 있는 일의 한 가지를 덜어준 것으로서 이를 명한 효종 황제(孝宗皇帝)는 참으로 성인(聖人)이었다.

...우리나라의 공사(貢士)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고려조에서 홍륜(洪倫)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金義)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기발한 절조가 없는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빈공과(賓貢科)에 참여하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郎中) 가유약(賈維鑰)에게 물었더니,

“안남(安南)과 유구(琉球)는 모두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한다. 안남출신 진유(陳儒)는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506~1521) 연간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右都御史)를 지냈고, 완악(玩鶚)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었으며, 손응오(孫應鰲)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廣西)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현재에도 거인(擧人)이나 공사(貢士) 출신으로서 주현(州縣)의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 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나라는 삼국(三國) 이래의 국성(國姓) 중에서 박(朴)ㆍ김(金)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은 없다. 석씨(昔氏)와 고씨(高氏)ㆍ부여씨(扶餘氏)는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王氏)가 적어진 것은 왕자는 으레 중이 되었기 때문에 종성(宗姓)이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남은 종실(宗室)이 겨우 50여 명이었다.

본조(本朝)는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선계 찬술관(璿系纂述官)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冠帶)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자가 3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ㆍ무관과 남행(南行)으로 벼슬하는 자도 백여 명이었다. 이 외에 유사(儒士)와 충의(忠義)로운 사람과 무인(武人)에서부터 아래로 지서(支庶 지손과 서손)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종성(宗姓)으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과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헌국(李憲國)이다. 두 사람 모두 원훈(元勳)으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說部) 2

○성옹지소록 중(惺翁識小錄中)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시호)이 영상(領相)으로 있을 때, 김공 종서(金公宗瑞)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었다.

하루는 삼공(三公)ㆍ육경(六卿)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었으므로, 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왔다. 익성공이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당(朝堂)에 앉아 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법외(法外)에 사사로이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힐책했다. 말이 매우 엄숙하니 종서는 진땀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이러기를 한참 한 후에야 돌려보냈으니, 익성공이 규범(規範)을 지킴이 이와 같았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과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은 두 형제가 다 정승이 되었고 덕업(德業)도 모두 현저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다. 그의 누님도 문행(文行)과 식감(識鑑)이 있었고 백 세나 살았으므로 문중(門中)에서는 지금까지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가 누님을 매우 공손하게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면 두 형제가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묻곤 했다.

성묘(成廟 성종)가 윤비(尹妃)를 폐위하려 할 때에 두 형제가 자문을 구하니,

“아들이 동궁(東宮)으로 있는데, 그 어미를 죄주고서 어찌 국가가 편안히 탈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충정(忠貞)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문정(文貞)은 의논을 달리하여 체직되었다.

그후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가 황란(荒亂)해져서 ‘윤비(尹妃)의 폐위가 마땅하다.’고 논의한 자는 다 죽였는데 문정(文貞)이 홀로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식견에 탄복하였다.

...창산(昌山 ;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에, 이미 굳세고 과감해서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하례(下隷)에게 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연명(聯名)하여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 하례는 당시의 수규(首揆 영의정)인 신 정승(愼政丞 신승선(愼承善))의 종이면서 좌상(左相) 이광릉(李廣陵 광릉은 이극배(李克培)의 봉호)의 여종의 남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판서(判書) 한치형(韓致亨)은 죄를 결단하기 어려우므로 병을 구실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 일로 광릉(廣陵)의 아우 극돈(克墩)이 공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를 만나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공이 조당(朝堂)에 나아가니 두 정승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좌중에게 내놓고 말하기를,

“여러 유생(儒生)이 한 천한 종에게 구타당했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오. 이것이 국법이니 용서할 수 없소. 그러니 어찌 상공(相公)을 위해서 용서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주상(主上)께 아뢴 뒤에 스스로 물러가겠소.”

하니, 두 정승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동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서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과단성이 이와 같았다.

...모재(김안국)가 우상(右相) 성세창(成世昌)과 함께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였다. 둘이서 같이 직숙(直宿)하였다. 성공(成公)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금침을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고, 모재는 본래 가난한데다 성품 또한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베 이불에 목침을 베고 자니 한사(寒士)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성공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도록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국경(國卿 김안국(金安國)의 자)이 차라리 나의 사치부리는 것을 비웃어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하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잤다 한다.

...요즈음 외방(外方)에는 향안(鄕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내외가 사족(士族) 출신인 자를 가려서 기록한다. 외족(外族)이나 아내가 다른 고을에서 왔고 현족(顯族)이 아닌 경우에는 비록 고관(高官)이라도 또한 이에 기록될 수 없다. 그래서 이에 실리는 것이 홍문록(弘文錄)이나 이조천(吏曹薦)에 드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공(宋公 송순(宋純))은 담양(潭陽) 사람이다. 외가가 남원(南原)에서 왔고, 현달한 벼슬을 한 이도 없었기 때문에 공도 향안(鄕案)에 들 수 없었다. 공이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였다. 휴가를 얻어 성묘(省墓)를 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향청(鄕廳)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히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로(鄕老)에게,

“도헌(都憲 대사헌) 이 성찬(盛饌)을 보내어 마을의 노사 숙유(老師宿儒)들을 대접하고자 하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향로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즉시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자,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서 우리와 합석(合席)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니, 모두들, ‘옳다.’ 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청했으나 사양하고 오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니, 일찍이 훈도(訓導)를 지낸 늙은 선비로 공과 동갑이면서 생일이 위인 자가 있으므로 급히 그 다음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로들이 말하기를,

“도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鄕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공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공의 기민(機敏)하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미암(眉庵 : 유희춘)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에 삼재(三宰 좌참찬) 백인걸(白仁傑)은 무장(茂長) 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宋麟壽 : 1499-1547)가 방백(方伯)으로 부임하자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공(宋公)은 부안(扶安)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그와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사랑하여 수레에 태워서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늘 글을 보내어 무장 원과 남평 원을 불렀고, 노는 곳에 항상 함께 다니니, 도내(道內)의 사람들이 세 차비[三差備]라고 불렀다 한다.

송공이 임기가 차서 떠날 때에 여량역(礪良驛)에서 공을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기생이 따라왔다. 송공이 기생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슬기를 사랑하여 1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죽을까 염려 되어서였네.”

하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많은 무덤을 가리키면서,

“과연 그렇습니다. 저기 보이는 많은 무덤들이 다 나의 서방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는 공을 원망해서 한 말이었으므로 온 좌석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기생은 늘 송공의 일을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說部) 3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한경홍(韓景洪 경홍은 한호(韓濩)의 자)은 글씨에 능하여 선왕의 지우(知遇)를 받아 사랑이 극진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여 장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술ㆍ쌀ㆍ찬거리ㆍ붓ㆍ종이를 매우 넉넉하게 사급(賜給)하도록 명하고, 봄 가을 의대(衣帶) 및 안장 얹은 말과 신발 등 하사하는 물품이 끊임없었다. 특명으로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제수된 지 수 년 후에, 헌부(憲府)에서 탄핵하자 추고(推考)만 하도록 하였다.

그 후에 공부 낭관(工部郞官)으로 있을 때는 으레 바치는 글을 법대로 하지 않았다가 파직당하게 되었으나 임금은 다스리지 말도록 명했다. 그의 병이 위급하자 약을 가져가서 치료하도록 명했고, 죽자 임금은 한동안 슬퍼하고 부물(賻物)을 후하게 내리는 등 임금과 신하 사이의 지우가 이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예부터 동방(東方)을 정벌한 장사(壯士)는 공을 세우더라도 모두 죄를 당했다.

한 무제(漢武帝) 때 사군(四郡)을 평정한 다음 순체(荀彘)와 양복(楊僕)이 모두 죄로써 수감되었고, 당 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다음 영공(英公)은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계자(階資)와 녹봉(祿俸)을 삭탈당했다. 백제를 평정한 후에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공을 다투다가 봉후(封侯)가 정지되고 관작(官爵)도 낮아졌다. 요동(遼東)에서 강조(康兆)를 사로잡았으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왕을 추격하지 않았다 하여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元) 나라는 살례탑(撒禮塔)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써 부장(副將) 아록첩목아(牙祿帖木兒)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이래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참소를 당해서 회적(回籍)했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공적을 너무 과장하여 보고했다는 참소를 받아 죄를 당했으며, 찬획사(贊畫使) 유황상(劉黃裳)과 원황(袁黃)은 아울러 파직(罷職)되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양 경리(楊經理)가 참소를 받아 돌아갔고, 군문(軍門) 형개(邢玠)와 제독 마귀(麻貴), 제독 유정(劉綎)은 아울러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의 탄핵을 받았다. 그 후 정(丁)도 이 일로 해서 관직이 낮아졌고, 만 경리(萬經理 만세덕(萬世德))도 또한 안신(按臣)의 말로써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자못 괴상한 일이다.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의 시호) 때에 사인(士人) 이언방(李彦邦)이란 자가 노래를 잘했다. 가락이 맑고 높으니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최득비여자가(崔得霏女子歌)를 불렀는데, 온 좌석이 모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서경(西京)에 유람했는데 교방(敎坊) 기생이 거의 이백 명이 되었다. 방백(方伯)이 열지어서 앉힌 다음, 노래에 능하거나 못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도상(都上)에서 동기(童妓)까지 한 사람이 창(唱)하면 언방이 문득 화답했는데, 소리가 모두 흡사했으며 막힘이 없었다.

송도(松都) 기생 진랑(眞娘 : 황진이)이 그가 창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언방은 자신이 언방의 아우인 양 속이면서,

“형님은 없소. 그러나 나도 제법 노래를 하오.”

하고 드디어 한 곡조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를 속이지 마시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찌 또 있겠소. 당신이 바로 진짜 그 사람이요. 모르기는 하지마는 면구(綿駒)와 진청(秦靑)인들 이보다 더 잘하겠소?”

하였다.

진랑(眞娘)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知異山)을 지나 금성(錦城)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虱]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다.

평생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 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出喪)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자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또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무엇인가?”

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小人)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웃었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저 송도는 산수가 웅장하고 꾸불꾸불 돌아서 많은 인재가 나왔다. 화담의 이학(理學)은 국조(國朝)에서 제일이고, 석봉의 필법(筆法)은 해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자에는 차씨(車氏) 부자와 형제가 또한 문명(文名)이 있다. 진랑도 또한 여자 중에 빼어났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으므로 우선 보고 들은 것으로써 기록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宰相班列)에까지 오른 자도 많다. 이제 20세 이전에 과거에 합격한 자에서부터 30세 이전에 고관(高官)이 된 사람과 40세 이전에 공경(公卿)이 된 사람들의 명단을 다음에 적어둔다.

14세 : 곽거완(郭居完)이 진사가 되었고, 그 후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校理)였으나 일찍 죽었다.

15세 : 구수영(具壽永)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고, 이희순(李希舜)ㆍ이승건(李承楗)ㆍ권주(權倜)ㆍ김규(金珪)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沈彦光)은 향시(鄕試)에서 삼장(三場)에 모두 장원하였다.

16세 : 권홍(權弘)ㆍ심은(沈隱)ㆍ장계금(張繼金)ㆍ이명한(李明漢)이 진사가 되었다.

17세 : 남지(南智)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이행(李荇)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8세 : 구성군 준(龜城君浚)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李坡)는 문과에 합격하고, 김수녕(金壽寧)과 박지(朴篪)는 문과에 장원했으며, 허봉(許篈)ㆍ윤훤(尹暄)ㆍ이구(李久)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

19세 : 이대해(李大海)ㆍ이집(李㙫)ㆍ이후(李厚)는 문과에 합격했고, 오남(吳楠)은 무과(武科)에 장원했다. 우흥적(禹弘績)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20세 : 박은(朴誾)ㆍ박홍린(朴洪麟)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李久)는 문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이었다.

21세 : 구성군 준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며, 윤계선(尹繼善)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22세 : 성표(成㟽)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다.

23세 : 엄흔(嚴昕)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24세 : 허봉과 김신국(金藎國)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南怡)는 승지가 되었다.

25세 : 윤계겸(尹繼謙)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朴東亮)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26세 : 남이는 병조 판서, 이파는 도승지, 박원종(朴元宗)은 병조 참의, 김신국은 사인(舍人)이 되었고, 정사룡(鄭士龍)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27세 : 허봉은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성표는 당상 첨지(堂上僉知), 김수녕은 이조 참의, 신면(申㴐)은 승지가 되었다.

28세 : 구성군 준은 영상(領相)이 되었고, 이행(李荇)은 승지가 되었다.

29세 : 윤사흔(尹士昕)은 감사(監司), 박은(朴訔)은 승지, 한숙창(韓叔昌)은 호조 참의, 이계동(李季仝)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30세 : 권건(權健)ㆍ신종호(申從濩)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柳雲)은 충청 감사가 되었다.

31세 : 이덕형(李德馨)은 겸 대제학(兼大提學)이 되었다.

32세 : 박원종(朴元宗)은 판윤(判尹),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33세 : 김감(金勘)은 예조 판서, 김정(金淨)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4세 : 박은(朴訔)은 병조 판서, 한확(韓確)은 이조 판서, 허종(許琮)은 행 함경감사(行咸鏡監司)가 되었다.

35세 : 김감은 겸대제학(兼大提學), 윤사윤(尹士昀)은 참찬(參贊), 유담년(柳耼年)은 판윤(判尹)이 되었다.

36세 : 성준(成俊)ㆍ이극감(李克堪)은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37세 : 윤사흔은 찬성, 이정귀(李廷龜)는 호조 판서, 이자(李耔)는 참찬이었다.

38세 : 이덕형은 우상(右相), 한확은 찬성, 이정귀는 대제학, 장운익(張雲翼)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9세 : 윤사흔(尹士昕)은 우상(右相), 이파(李坡)는 찬성, 황치신(黃致身)은 참찬, 성표는 음직(蔭職)으로 봉군(封君)되었다.

40세 : 김질(金礩)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남지(南智)는 우상, 최천건(崔天健)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耼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런 일을 들어서 오성 상공에게 이야기하니 상공이,

“그 동네에 무장(武將)이 있는가?”

하기에 내가,

“성우길(成佑吉)의 관직이 가장 높습니다.”

하니 다시,

“그대와 상대해도 괜찮을까?”

하므로 내가 웃으면서,

“성(成)도 북문(北門)에서 공을 세우면 후세에서 오늘날을 볼 때, 오늘날 예전 일을 보는 것과 같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공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沈連源)은 정호음(鄭湖陰)과 같은 신해년(1491, 성종22)생이었다. 호음이 병자년(1516, 중종11) 봄 중시(重試)에 장원하고 응교가 되어 찬성 김당(金璫)의 집에 갔다. 심 정승은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불러내어 호음과 배면(拜面)토록 하였다. 좌정한 다음, 그의 나이를 물으니,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은 벌써 두 번이나 과거에 올랐는데, 공은 아직 유학(幼學)이어서 그때에 자못 부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그 후 심공(沈公)도 과거에 올라서 좋은 벼슬을 지내고 정부(政府)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은 돈녕부 지사(敦寧府知事)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추천해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세상에 벼슬이 수없이 변하는 것이 대개 이러한 것이다.

...참의(參議) 박미(朴楣)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 중 소영(召榮)과 증영(增榮)은 모두 일찍 과거에 올라서 함께 이조 낭관이 되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이인 광영(光榮)은 그럭저럭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40세의 나이로 박사 제자(博士弟子)로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무랐고, 공도 스스로 곤혹(困惑)스럽게 여겼다.

그 후 두 동생은 잇달아 죽었고, 공은 늦게야 과거에 올라서 청요(淸要)한 관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封君)되었으며 76세에 죽었다. 그의 자손도 연달아서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해서 이르고 늦음과, 통하고 막힘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서 급사가 일찍이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국(金國) 장종(章宗)이 만든 것이오,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가져다가 갈아보니 빛깔은 정흑색(正黑色)이면서 조금 엉기었고, 향기가 아직도 대단하다. 무술년(1598, 선조31) 겨울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금 13년이 되었으나 다만 한 글자만큼 갈렸을 뿐이니 참으로 기이한 물품이다.

...주 태사(朱太史 주지번)가 나에게 다섯 자루를 주었는데, 토끼털은 강하여 쉽게 마르고, 양털은 부드러워 쉽게 꺾이어서 모두 우리나라 황모(黃毛) 붓만은 못하였다.

...주 태사(주지번)가 나의 을 써보고는,

“5일 동안을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 천하에 제일가는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하여 갔다. 또한 우리나라 종이를 좋아해서 아주 엷은 것을 많이 가려 가지며,

“이것은 탑본(搨本)이나 모본(摹本)하기 좋다.”

하였다.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었다. 큰 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워 개원(開元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ㆍ대력(大曆 당(唐) 대종(代宗)의 연호)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서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는 고문(古文)을 공부해서 시격(詩格)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賦)는 더욱 뛰어나서 국조 이래로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4부자(四父子)가 함께 제고(製誥)를 맡았다. 선대부께서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3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했다. 작은형과 나는 같이 과거에 장원했고, 나는 또 세 번이나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 문헌(文獻)하는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첫째로 꼽았다.

 

□설부(說部) 4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ㆍ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厚)한 맛이 없다. 다만

가을 바람 일어라 애달픈 노래 / 秋風唯苦吟

한 세상 돌아봐도 지음 드무네 / 世路少知音

삼경이라 창밖에는 비가 으시시 / 窓外三更雨

만리라 등잔 앞엔 내 고향 생각 / 燈前萬里心

○정 대간(정지상)의 서경시에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 /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 / 大洞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이익지(李益之 이달(李達)의 자)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서로 사이해서 아가씨가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 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기약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고되이 배 저어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船逆上波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우(七夕雨)란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그 시에

얇은 적삼 삽자리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 輕衫小簞臥風欞

꾀꼬리 울음 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깼네 / 夢覺啼鸎三兩聲

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까지 남아 있고 / 密葉翳花春後在

엷은 구름 헤친 햇살 빗속에 밝도다 / 薄雲漏日雨中明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읽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

관인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 官人閑捻笛橫吹

부들자리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 蒲席凌風去似飛

천상에 걸린 달은 천하가 함께 누릴 텐데 / 天上月輪天下共

내 배에 혼자 싣고 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

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

○이쌍매(이첨)의

신선이 차고 온 옥소리 쟁그랑쟁그랑 / 神仙腰佩玉摐摐

고루에 올라와서 벽창에 걸어놓고 / 來上高樓掛碧窓

밤 들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 入夜更彈流水曲

한 바퀴 밝은 달이 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

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

쌍매의 문앵시(聞鸎詩)에

삼십육궐(三十六闕) 후궁에 봄 나무 깊숙하고 / 三十六宮春樹深

미인이 꿈을 깨니 남창은 어둑해라 / 蛾眉夢覺午窓陰

영롱한 울음소리 수심 엉겨 듣자 하니 / 玲瓏百囀凝愁聽

모두가 향규의 님 바라는 마음일레 / 盡是香閨望幸心

라 했으니 두목지(杜牧之)의 시와 흡사하다.

○봉래(양사언)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

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

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

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

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

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

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

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

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

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

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백옥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寧越)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오일 간은 장간이요 삼일 간은 영월(寧越)이니 / 五日長干三日越

노릉의 구름에 슬픈 노래 목이 메네 / 哀歌唱斷魯陵雲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라 /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 소린 차마 듣지 못할레라 / 此地鵑聲不忍聞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익지(이달)의

동풍에 촉제(蜀帝) 혼 괴롭고 / 東風蜀魄苦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네 / 西日魯陵寒

라는 시구와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우사(羽士) 전우치(田禹治)는 사람들의 말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하며 그의 시는 매우 청월(淸越)하다. 일찍이 삼일포(三日浦)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 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 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 / 靑鸞不至海天闊

서른 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 / 三十六峯秋月明

라 하니, 이를 읽노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부안(扶安)의 창기 계생(桂生 : 매창)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 一曲瑤琴怨鷓鴣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 亦有佳人墮淚無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李汝仁)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호)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

라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행록(강선)  (0) 2018.03.01
성소부부고 중 한정록  (0) 2018.02.06
성소부부고2  (0) 2018.02.02
성소부부고1(허균)  (0) 2018.02.01
삼봉집(정도전)  (0) 2018.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