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
허균 : 1569년 ~ 1618년
■허균의 일생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69년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26세)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 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으로 물러났다.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수천 권의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때 양명학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양명학 극좌파에 속하는 태주학파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외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이 중심이 된 왜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선조 대에 붕당이 형성되었을 당시 대북에 속했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대 권신이었던 이이첨(李爾瞻 1560-1623)과 함께 조정의 집권세력을 형성하였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였으며 예조참의· 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河仁俊)· 김개(金闓) ·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당시 세자빈이 후사가 없자 허균의 딸이 세자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후궁이 소생을 낳게 되면 허균이 실세로 등장할 우려가 있어 모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교산시화(蛟山詩話)》,《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도문대작(屠門大爵)》,《한년참기(旱年讖記)》,《한정록(閑情錄)》,《남궁선생전 등이 있다.
惺所覆瓿藁는 허균의 문집이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이며, 1913년경에 작성되었고 부부(覆瓿)는 장독 뚜껑을 덮는다는 의미를 뜻한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이 책에 대해서 알고 일부는 읽은 바 있으나 미처 모두를 읽어보지 못했다. 조선의 천재지만 잘못된 정치적 선택으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은 허균의 문집이므로 그 어느 고전보다 더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성소부부고 서(惺所覆瓿藁序)
○난우(蘭嵎) 주 태사(朱太史 : 주지번)가 《부부고(覆瓿藁)》라는 4부(部)로 된 책 1질을 가지고 와서 나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었다.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가서 그 나라의 많은 관신사(冠紳士)들과 추종했습니다. 그 중에서 허씨(許氏) 집안이 그 장점을 독차지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 계장원(季壯元 : 허균을 말함)의 문집입니다. 그의 문(文)은 우여 완량(紆餘婉亮)하여 감주(弇州 : 명의 왕세정)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는 창달 섬려(鬯達贍麗)하여 화천(華泉 : 명의 변공)의 청치(淸致)가 있으므로, 나는 그윽이 기뻐하여 그 전집(全集)을 구했던바, 금년에 비로소 1질을 서울에서 보내와 저리(邸吏)가 전달한 것입니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詩部)1 정유조천록(丁酉朝天錄)
○본국 수군통제사 원균(元均) 및 수사 이억기(李億麒)와 최호(崔湖)가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라 소식 들어보니 동쪽 왜놈이 / 傳通抹桑寇
바다에 목을 지켜 수군을 쳐서 / 潛邀下瀨師
병선(兵船)이 파도 속에 뒤집어지니 / 戈舡俄渰水
통제사라 수사가 다 죽었다는군 / 都護摠輿屍
한장은 능히 월을 베었지마는 / 漢將能誅粤
주 나라는 기산(岐山)으로 도읍 옮겼네 / 周居恐邑岐
한밤중에 홀로 앉아 눈물 쏟으니 / 中宵坐垂涕
이 분통을 어느 뉘 알아주리요 / 憂憤有誰知
○남원(南原)이 함락당하여 양원(楊元)이 달아나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서
말 들으니 용성이 함락당하여 / 聞道龍城陷
장군이 어둔 밤에 빠져나왔네 / 將軍夜突圍
백제땅을 남김없이 다 집어삼키고 / 噬呑窮百濟
봉예가 서울까지 육박했다고 / 鋒銳逼王畿
답답해라 지친(至親)들은 어디로 갔지 / 骨肉知焉往
식미를 노래하는 임금과 신하 / 君臣定式微
옛 동산이 시호의 소굴됐으니 / 鄕園豺虎窟
어드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 何處可言歸
□시부 1 좌막록(佐幕錄)
○운자를 나누어 산(山) 자를 얻다(손곡(蓀谷) 및 오정(梧亭)이 우저(寓邸)에 와 모였는데 정시망(鄭時望)이 또 왔다. 그래서 네 사람이 ‘설만군산(雪滿群山)’으로 운(韻)을 했다.)
병을 안고 누워서 열흘을 나니 / 抱痾臥經旬
쌓인 눈이 사립문을 묻어버렸네 / 積雪埋柴關
어드메서 왔는가 시인 늙은이 / 詩老何方來
시름찬 내 얼굴을 펴주다니 / 使我開愁顔
다슨 방에 앉아라 등 돋우고 / 呼燈坐燠室
윤건(綸巾)을 높이 쓴 채 서로 대했네 / 相對岸白綸
정자는 본래부터 탈쇄한 친구 / 鄭子素脫酒
윤생 역시 청한한 사람이로세 / 尹生亦淸閒
형을 잊은 웃음 얘기 꽃을 피우니 / 忘形劇笑談
겨울 밤도 따라서 길지를 않아 / 良夜從闌珊
생선회를 눌러대는 아름다운 술 / 美酒壓霜膾
더구나 고운 기생 권하는 노래 / 纖歌勸雲鬟
타향이니 나그네니 내 전혀 몰라 / 都忘客殊方
아마도 예는 정녕 서울 아닌가 / 宛疑京洛間
먼동 튼다 가물가물 은하수 돌고 / 寥落曙河轉
둥그렇게 걸려 있는 아득한 저 달 / 蒼茫初月彎
흥 진하면 이별 온다 슬퍼를 마소 / 興極莫傷離
세상 길은 거의 다 험난하다오 / 世路多險艱
인생이란 살았댔자 백 년이 한정 / 人生處百歲
빨리 닫는 수레를 뉘라 붙들리 / 倏駕難久攀
형역에 어찌 오래 얽매이리요 / 形役豈久拘
종당에는 속세를 뜨고 말 텐데 / 終當謝塵寰
녹라로 돌아갈 계획 섰으니 / 綠蘿有歸計
얼마 안 가 동산에 노닐 거로세 / 未幾遊東山
□시부 1 남정일록(南征日錄)
○여산(礪山)에서 윤지중(尹止中)을 만나다 지중의 이름은 의립(毅立)이다
붓대를 귀에 꽂고 대궐에 번을 설 적 / 珥筆承明直瑣闈
시종신(侍從臣)의 옷자락 어향 함께 스몄었네 / 御香同襲侍臣衣
천균이 밤을 비춰라 천 척의 배 모이고 / 天囷照夜千艘集
수복이 봄에 빛나라 네 필 말 치달리네 / 綉服輝春四牡騑
여관방 이불의 기쁨보다 더하겠나 / 深喜聯衾俱逆旅
고삐를 마주 잡은 풍경놀이 그도 좋군 / 不妨竝轡賞芳菲
강남이라 만 리에 꽃이 장차 필 터이니 / 江南萬里花將發
자미원(紫薇垣) 마주 보던 금문을 그릴는지 / 能憶金門對紫薇
총마(驄馬) 타고 잠깐 동안 외대에 있자 하니 / 乘驄暫許外臺居
청운을 돌아보매 자취 점점 성글구려 / 回首靑雲跡漸疏
시속 무리 아무리 축빈부를 조롱치만 / 時輩雖嘲逐貧賦
벗님네야 어찌 저 절교서를 지을쏜가 / 故人寧著絶交書
봄이 오니 꽃과 새는 이별한을 더 보태고 / 春來花鳥添離恨
늙어가니 수석 좋은 옛집이 생각나네 / 老至林泉憶弊廬
어이 없다 밝은 조정 너나 나나 낙척 신세 / 却笑淸朝俱落拓
부름을 기다려라 짝이 됨을 용납하리 / 可容聯佩待公車
○전주(全州)
고향의 탕목이요 나라의 부도(副都)라서 / 沛鄕湯沐國陪都
아름다운 용의 기운 제업(帝業)이 웅장쿠나 / 佳氣爲龍壯帝圖
개와 닭도 이제껏 읍리를 알고말고 / 鷄犬至今知邑里
바람 구름 영원토록 분유를 두호하네 / 風雲長爲護枌楡
맑은 때 관우들은 우뚝하고 빛났는데 / 時淸館宇曾巍煥
난리 뒤 산천만은 상기도 울창하이 / 亂後山川尙鬱紆
남방의 웅번으론 제일이라 일컬으니 / 南服雄藩稱第一
문신(文臣)이 어찌하면 동부를 빌려보지 / 詞臣安得借銅符
○양진당(養眞堂) 태인(泰仁)에 있다
봄 그늘 아득아득 추녀 끝을 비추는데 / 春陰漠漠映璇題
동상의 베개맡에 낮닭이 하마 우네 / 欹枕東廂已午鷄
바람 탄 화로 연기 난간을 살살 돌고 / 風裊篆煙縈檻細
비 머금은 푸른 안개 나직이 발에 드네 / 雨含山翠滴簾低
들꽃은 일 아는 양 사람 맞아 싱긋 웃고 / 欄花解事迎人笑
골짝 새는 정이 많아 손을 짝해 우짖누나 / 谷鳥多情伴客啼
이별이 싫다 해서 넋이 다시 끊기겠다 / 非有別懷魂更斷
위교의 서에 있는 옛 동산이 그립구만 / 故園今在渭橋西
○부안(扶安)에서 도위(都尉) 민인길(閔仁佶)을 만나고 자는 숙정(叔正)으로 진사(進士) 인백(仁伯)의 아우이다
신성이라 내실(內室)은 하도나 깊고깊어 / 新城燕寢杰潭潭
말 멍에를 잠깐 풀고 풍헌에 잠 붙였네 / 寄睡風軒暫卸驂
한바다에 구름 깔려 섬이 문득 없어지고 / 大海雲平俄失島
변산에 해가 솟아 안개 잠깐 걷혔구려 / 邊山日出乍收嵐
가인의 묘한 가락시를 처음 읊조리고 / 佳人妙語詩初詠
도위의 사귄 정은 술이 반쯤 취해오네 / 都尉交情酒半酣
그늘 속에 울어대는 꾀꼴 소리 들었으니 / 聽盡綠陰鶯百囀
수병풍 높은 베개 강남을 꿈꾸누나 / 繡屛高枕夢江南
○금강(錦江)을 건너면서
그림배 쌍쌍이라 산기슭에 매였는데 / 雙艚畫舸靠危巖
뱃전에 기대자니 빗줄기는 우수우수 / 倦倚船舷雨脚?
맛진 단술 사람 권해 우상(羽觴)을 기울이고 / 楚醴勸人傾羽?
고운 계집 손님 뵈자 선삼을 입었구려 / 吳姬看客試蟬衫
연기 잠긴 아랫섬에 어옹(漁翁) 노래 들려오고 / 煙沈下渚聞漁唱
바람 부푼 앞여울에 바다돛이 올라오네 / 風飽曾灘上海帆
왕정을 돌아보니 머물 수도 없는 이 몸 / 却顧王程留不得
부질없이 지저귀는 저 제비가 수고로울 뿐 / 謾勞檣燕語喃喃
□시부 1 풍악기행(楓嶽紀行)
○만폭동
층층 벼랑 짜개져 골짜기 되니 / 兩峽擘層崖
온갖 내가 그 안에서 용솟음치네 / 百川潰其中
뿜는 물결 날마다 넘실거리니 / 噴流日澒洞
뿌려대는 물방울 노상 자욱해 / 濺沫常溟濛
처음에는 푸른 벼랑 사이 벌어져 / 初驚蒼壁拆
두 마리 하얀 용이 날아가더니 / 飛出雙白龍
자세히 보니 하늘에 틈이 벌어져 / 細看天罅破
옥 무지개 거꾸로 걸렸구려 / 倒掛萬玉虹
벽력이 대낮에 메아리치니 / 轟霆當晝起
널린 돌에 뇌풍이 부딪쳤어라 / 亂石薄雷風
이못 저못 굽어들어 물을 모으니 / 潭潭曲相瀦
뛰는 물결 지척에서도 통하네 / 咫尺跳波通
장한 구경 내 마음 떨리게 하니 / 壯觀駴我心
거룩할사 조화의 공이로구려 / 韙哉造化功
사 강락은 석문에 노닐었다면 / 康樂遊石門
이백(李白)은 향로봉을 바라보았소 / 謫仙望爐峯
모를레라 천 년이 지난 뒤에는 / 未知千載後
어느 곳이 이곳과 겨룰 것인지 / 此景誰雌雄
□시부 1 요산록(遼山錄)
○ 요산록
갑진년(1604) 가을에 나는 고을살이를 청원(請願)하여 요산 고을을 얻었는데, 본래 벽지로 일컬어져 내 생각으로는 마땅히 경술(經術)에 전념하고 겸하여 문필에 미칠 수 있다고 여겼었다.
급기야 수레에 내려 도임하자 소송의 문서가 빗발치듯 밀려들어 귀가 시끄럽고 눈이 어지러워 밥 먹고 숨쉴 겨를조차 없는데다 지방 백성이 또 호횡(豪橫)을 숭상하여 다스려 억제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천 권의 도서를 묶어 놓은 채 펴보지도 못했는데 더구나 구사입의(構思立意)할 수 있었겠는가. 2년간의 소득이 겨우 서른 두수에 불과한데, 대개는 떠들어대고 종아리치곤 하는 사이서 나온 것이라, 족히 채택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폐추(弊帚)를 스스로 아껴 선뜻 버리지 못하고 우선 세 편을 남겨 요산록을 만들었다.
○석봉(한호 : 1543-1605)의 부음을 듣다
손잡고 이별한 지 얼마 아닌데 / 摻別無多日
옥루에 불려갔단 소식 듣다니 / 驚聞召玉樓
높은 이름 온 누리에 남았거니와 / 高名餘四海
큰 업적은 천추를 기약할 걸세 / 大業且千秋
통곡하니 천지가 아스라하고 / 痛哭乾坤迥
슬픈 노래 일월도 시름하누나 / 哀歌日月愁
산양이라 젓대 속의 솟는 그 눈물 / 山陽笛中淚
서주를 지나도록 기다리지 않아 / 不待過西州
■성소부부고 제2권
□시부(詩部) 2 병한잡술(病閑雜述)
○ 계랑(桂娘 : 매창 1573-1610)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 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 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 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 竊藥去人群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 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려 / 香殘翡翠裙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 明年小桃發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 誰過薜濤墳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 / 凄絶班姬扇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 悲涼卓女琴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 / 飄花空積恨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 衰蕙只傷心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 蓬島雲無迹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 / 滄溟月已沈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 他年蘇小宅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 / 殘柳不成陰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바뀌므로 느낌이 있어서
나주는 그야말로 호남의 웅진이라 / 湖南雄鎭錦官州
동장을 둘러 차고 원님 되길 원했었네 / 願佩銅章作邑侯
임의 덕택 깊이 입어 발탁된 줄 알았는데 / 拔擢已知蒙睿澤
원수놈이 탄핵할 줄 뉘라서 알았으리 / 拜彈誰料出深仇
유박으로 사람 모함 나의 일이 아니거니 / 陷人帷箔非吾事
치황으로 세상 구경 제 스스로 꾀한 걸세 / 玩世緇黃寔自謀
한산을 홀로 대해 한번 허허 웃었노라 / 獨對寒山成一笑
봉래산 아니 가고 머뭇거려 무엇하리 / 蓬萊歸隱敢夷猶
□시부 2 화사영시(和思潁詩)
◯꽃을 접붙이면서 유곡종화(幽谷種花)의 운을 쓰다
연분홍 복숭아를 한 가지 접붙여서 / 緗桃折得一枝來
흙 모으고 정성스레 내 손수 심었다네 / 封土慇懃手自栽
이 몸이 언제까지 예 있을 줄 모르지만 / 未卜此身長寓此
주인님을 위하여 명년에는 피어다오 / 明年惟爲主人開
□부록 교산억기시
◯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
나는 젊었을 적에 시를 할 줄 알아서 이손곡(李蓀谷 : 이달 1539-1612)에게서 이백(李白)을 배웠고 당(唐) 및 한유(韓愈)ㆍ소식(蘇軾)을 중씨(仲氏)에게서 배웠었다. 그리고 난리 속에서 비로소 두보(杜甫)를 익혀 부질없이 소기(小技)에다 공력을 허비한 지도 이미 일기(一紀)가 지났다. 그 사이 소득으로 말하면 비록 옛사람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성정을 읊조리고 물상을 아로새김에 있어서는 마음을 괴롭히고 힘을 쓴 것이 역시 얕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장정(章程)에 발로됨에 있어서는 혹 조려(藻麗)가 볼 만한 것도 있으니 비교하면 연석(燕石)을 깊이 감추고 서박(鼠璞)을 남 몰래 보배로 여김과 같아서 끝내는 식자의 한번 웃음거리에도 차지 않을 것이다. 승평(昇平)한 때에 《북리집(北里集)》ㆍ《섬궁뢰창록(蟾宮酹唱錄)》이 있었는데 난리통에 소실되어 버리고 관동에 와서 《감호집(鑑湖集)》을 지었는데, 친구들이 돌려보다 잃어버리고 《금문잡고(金門雜稿)》 한 책은 아이들이 보다가 망가뜨려 버렸으니, 수염을 꼬부려가며 애를 무진 쓴 것들이 거의 다 유실된 셈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어찌 아까운 생각이 없을 수 있으랴. 접때 낙가사(洛迦寺)에 있으면서 우연히 기억난 것이 있었는데 이미 열에 일여덟은 잊어버린 나머지였다. 세월이 오래가면 기억난 것마저도 차츰 잊게 될 것이므로, 책자에 써서 파한(破閒)거리로 삼으며 이름을 억기시라 했다. 기억나는 대로 따라 썼기 때문에 일월(日月)의 선후로 써 서차하지 않았으니 보는 자는 눌러 짐작함과 동시에 이로써 장항아리나 덮지 말아주었으면 다행일 따름이다.
◯매[鷹]
매 눈초리 수심 어려 항복한 오랑캐인 양 / 蒼鷹愁眼似降胡
골격이랑 풍채는 한의 질도 방불하네 / 風骨依俙漢郅都
빼어난 날개 비록 금선에 묶였지만 / 逸翮縱爲金鏇繫
이채로운 모습은 뭇새와 다르고말고 / 異姿應與鳥群殊
세 굴 파는 토끼놈을 미처 잡진 못했으나 / 未擒狡兎營三窟
한로와 짝이 되어 한번 부름 고대하네 / 且伴韓盧待一呼
조만간 자주끈을 벗어만 난다면은 / 早晩紫絛如脫去
창공에서 붕의 새끼 후려채고 말거로세 / 碧天當搏大鵬雛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賦部) 1 부(賦)
◯동정부(東征賦) 병서(幷序)
계묘년(1603, 선조36 : 35세)에 내가 사복시(司僕寺)의 관원에서 파직되어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풍악산(楓岳山 금강산)을 유람하고 마침내 명주(溟州 강릉의 옛이름)의 별장으로 가서 머물렀다. 며칠간 해산(海山)의 관광이 뛰어나고 기이한 점이 많았으므로 붓을 들어 그 일을 기록한다. 허나 내 재주가 흥공(興公)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천태산(天台山)의 아름다움을 다하듯이 못하였다. 후일 내 글을 보는 이는 다만 그 드문 행적, 고상한 자취만 취하고 문사(文詞)가 서투른 것은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사구부(思舊賦) 병서
정미년(1607, 선조40 : 39세) 4월에 나는 진주(眞珠 삼척(三陟)의 옛 이름)에 부사로 부임되어 가는 길에 명주(溟州 강릉의 옛 이름)를 거쳤는데, 나이 많은 노인들은 많이 죽어버렸고 게다가 고을이 큰 홍수를 겪고 나서 읍리(邑里)가 쓸쓸하여 번화한 옛날의 경치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매헌(梅軒)에 도착하였더니 작약은 예나 다름없이 울안에 가득하였으나 사람이 없어 쓸쓸하였다. 지난 일을 느끼고 현실을 슬퍼하여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아, 내가 이곳을 내왕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16년이 지났다. 그 당시는 고향 늙은이들이 모두 별탈이 없어서 서로 모여 좌담하고 찾아다녀 헛되게 보낸 저녁이 없었고, 술 노래가 질펀하여 좋은 놀이를 수답한 지가 12년이 가까운 동안 이미 확포(矍圃)의 구경거리와 다름이 없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는 자가 드문드문 새벽녘의 별과 같이 되었다. 우주를 둘러보면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가. 나 역시 빨리 늙고 병이 많은 몸이니 이 세상에서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후인이 지금사람 슬퍼하기를 지금 내가 옛사람 슬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아니한가. 옛사람이 ‘죽음과 삶을 동일시하고 장수와 단명을 같이 취급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 뜻은 역시 슬픔을 억누르고 스스로 너그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생각을 뽑아 부(賦)를 지었으니 이것은 상자(向子) 산양(山陽)의 감회일 뿐이다.
□부부 1 사(辭)
◯도원량(陶元亮)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함 병인(幷引)
나는 처세에 재주가 없어서 육식(肉食)이나 가식(家食) 모두 잘 도모하지 못한 채 이제 반생에 이르니 머리털은 벌써 희어졌다. 오직 독서하는 것만을 기뻐하여 방 한 개를 치워 만권 서책을 꽂아 놓고 그 속에서 즐긴다면, 옥에 갇히고 이리저리 쫓겨다녀도 다 낙국(樂國)이겠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세속 사람과 함께 지낸다면 당연히 얽매이고 어수선하여 책을 펴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즉 비록 높은 처마, 높은 기둥, 좋은 음식, 화려한 방석이라도 형틀이 몸에 매여 있는 것과 같아서 내 자신이 마치 화택(火宅)에 들어갔는가 싶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 오두막 아래서 책을 널려 놓고 휴대하며 발을 버리고 나체로 지내는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다. 비록 귀양살이 속에 있다손치더라도 귀문관(鬼門關) 이외에는 어떠한 곳이라도 돌아가지 못할 곳이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을 지었다.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文部) 2 서(序)
◯손곡(이달 : 1539-1612)집 서(蓀谷集序)
...같은 때에 손곡옹(蓀谷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 두보(杜甫)와 소동파(蘇東坡)를 호음(湖陰)에게서 배웠다. 그 읊고 읊조린 것이 이미 웅대, 치밀하였으나 최경창과 백광훈을 사귀게 되자 배움의 허술함을 깨닫고 진땀이 흘러내리므로 그간 배운 바를 모두 버리고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의 시는 공봉(供奉 이백(李白)을 가리킴)에 근본을 두었고 우승(右丞 왕유(王維)를 가리킴)과 수주(隨州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를 드나들어 기운이 다사롭고 지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말이 담담하며 그 곱기는 남위(南威 춘추 시대의 미녀)와 서시(西施)가 성복(盛服)하고 밝은 화장을 한 듯하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는 듯하며,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흐르는 듯하고, 그 울림의 통량함은 마치 높은 하늘에서 학 타고 피리 부는 신선이 오색 구름 밖을 떠도는 듯하며, 끌어당기면 노을빛 비단과 미풍의 잔물결 같고 깔아놓으면 구슬이 앉고, 옥이 달리며 두드리고 갈면 비파의 애절함과 구슬의 울림이요, 억제하고 누르면 기마(驥馬)가 멈추고 용이 움츠렸고, 그 일없는 때에 천천히 걸음은 평탄한 물결이 넘실넘실하여 천리를 흘러가는 듯하며 태산의 구름이 바위에 대질러 흰 옷도 되고 푸른 개도 되어,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ㆍ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ㆍ대력(大歷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의 사이에 놓아도 왕유(王維)와 잠삼(岑參)의 대열에서 멀리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나라 여럿 이름난 작가들과 비교하면 그들 또한 눈이 휘둥그래져 90리나 물러설 것이다.
옹은 지체가 미천하여 사람들이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많으니, 저술한 것이 여러 수천 편이었으나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아는 데 힘입은 바 있다.
그가 죽으매 남긴 글이 민멸되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아까워하며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시 2백여 수를 모아 판각하려고 했는데 또 상사(上舍) 홍유형(洪有炯)의 처소에서 1백 30여 수를 얻게 되어 이군 재영(李君再榮)을 시켜 합하여 모으고 분류하여 여섯 권을 만들게 하였다.
옹의 시는 우리나라 여러 이름난 작가를 넘어섰으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려 썩지 않는 것이 되랴. 그러나 남긴 시들을 주워 모아 천 년 뒤에까지 전하자는 것이 나의 마음인데 부처님의 머리를 더럽혔다는 나무람을 회피하겠는가?
위아래 수백 년에 이르러 여러 노대가(老大家)를 평하고서 옹을 언급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참월(僭越)하여 한 시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오래 되면 의논은 정해질 것이니, 어찌 한 사람도 말을 아는 자가 없겠는가? 드디어 이를 써서 서를 삼는다.
옹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달(達)이며 자는 익지(益之)로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호)의 서후손[庶裔]인데 손곡(蓀谷)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성소부부고 제7권
□함열현(咸悅縣) 객사 대청(客舍大廳) 중건기(重建記)
○함열(咸悅)의 고을됨이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채 못되고, 백성은 가난하여 저축이 없으며, 또한 큰 산이 없어 편남(楩枏)과 예장(豫章) 같은 좋은 재목이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써 지었다. 또한 정유년(1597, 선조30) 난리를 겪으면서, 왜적이 몹시 잔인하여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자가 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십중 칠팔이다. 이 고을에 부임한 자들은 모두 무사 안일하여 스스로 제 몸 구완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어서, 관사와 창고가 모두 중건된 바 없었다. 이것이 비록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러나 수령된 자로서 그 죄를 또한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홍후 우(洪侯遇)가 겨우 관사의 동쪽 곁채를 짓고 사신을 맞아 머물게 하였으나,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목패(木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궐례(闕禮)를 행하는 곳을 짓기에는 미처 겨를을 얻지 못했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한후(韓侯)가 현감(縣監)으로 와서, 조심히 법을 받들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검약으로써 몸가짐을 하고 은혜로써 백성을 기르니, 백성들이 이미 화락하여 도망하고 이사갔던 자들이 모두 모였으며, 물이 괴고 잡초가 무성했던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으니, 가위 다스려졌다 할 만하다. 씀씀이를 절약하여 부유해지매, 관력(官力)이 갖추어져 황폐해서 버려진 땅을 들어다 관사를 창건하여 옛 모습을 복구하고 대청(大廳)을 만들고 싶어했다. 마침내 예를 행하는 곳이 법으로 보아 응당 먼저 지어져야 하므로, 공문을 수령들에게 보내어 배로 변산(邊山)에서 나무를 베어 오게 했으며 봉상(捧上)의 나머지를 털어 일꾼들을 먹이니, 몇 개월 안 되어 목수들이 끝났음을 아뢰었는데, 훤하니 옛 모습보다 나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관에서 큰 역사(役事)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온 경내의 노소(老少) 군민 남녀들이 모두 그 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 원님 인자하고 재주있네. 어디에서 이런 분을 얻겠는가?”
나는 죄로써 이곳에 유배를 왔는데, 후(侯)의 보호를 받아 그의 정사(政事)를 익히 알므로, 그 고을의 노인들에게,
“대체로 요즘 수령이 되는 자 중에서 가장 낫다는 자도 겉치레만 일삼으며 고분고분 어리석은 백성에게 아첨이나 하며, 감사나 병사의 격문을 극력 막는 데 힘쓰면서 관의 사무가 제멋대로 타락되고 지체됨을 돌보지 않으며, 경솔히 이전의 법규를 바꾸어 좋은 평판을 취하기가 일쑤이며, 조금만 견디지 못하게 되면 문득 버리고 떠나니 그들은 다스렸다는 이름은 얻겠지만 고을은 이로 말미암아 버려지는 것이오. 그 다음은 수완을 닦는 데 힘써 제 능력을 자랑하고, 방탕하고 사치하기를 급히 하여 폐단이 불어남을 돌보지 않으며 다만 남의 이목만을 즐겁게 할 뿐이고, 피로하고 쇠약한 이로 하여금 역역(力役)으로 곤욕을 치르게 하여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들지요. 최하자(最下者)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도 않고 그 백성을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한갓 백성의 살갗과 골수를 벗겨먹을 뿐이니, 이는 노약자로 하여금 날로 흩어지게 하고 제 주머니는 날로 풍부해지며, 이익이 제 몸을 살찌게 하는 것을 일삼는 자에게 돌아가게 하니, 대개는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 원님은 그대 백성들을 인애(仁愛)하고 그대 고을의 황폐한 것을 일으켜서 그대들로 하여금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을에서 배를 두드리게 하며 순식간에 크고 넓은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었으되, 그대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며 나무 하나 끌어오지 않고 ‘야호, 야호.’ 소리도 듣지 못하였으며, 또 능히 그대의 청백한 가풍을 지킬 수 있었으며, 세금 외에 달리 거두어가는 일이 없어 그대들의 일정한 재산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원님의 치적이 저 삼자와 비할 때 어떠하며, 그 덕이 금석에 새겨둘 만하니, 여러분 노인들은 그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였다. 그랬더니 여러 노인들이,
“그렇습니다. 대부(大夫)께서 그 사실을 글에 실어 후세까지 썩지 않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청이 몹시 간곡하므로 내가 비록 죄를 얻은 폐인이나 역시 고금의 어진 사대부의 올바른 행실을 자못 이야기할 줄 알며, 나의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아첨할 줄은 모르는데 감히 원님의 정사를 매몰시켜 노인들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드디어 책임을 피하지 않고 즐겨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다.
원님의 이름은 회일(會一)이며, 상당(上黨 청주의 옛 이름으로 한명회의 봉지(封地)임)의 거족(巨族)이다. 부친 상서공(尙書公)은 당시에 크게 유명하였으며, 후(侯)는 삼가 정훈(庭訓)을 받들어 바야흐로 젊은 나이에 관리의 업무를 알고 익숙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더욱 어렵게 여겼다.
■성소부부고 제8권
□문부(文部) 5 전(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의 자는 익지(益之)로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후손이다. 그는 어머니가 천인(賤人)이어서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원주(原州)의 손곡(蓀谷)에 살면서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
이달은 젊은 시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한리학관(漢吏學官 사역원(司譯院) 소속 관리)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을 따라 노닐며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달은 한창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의 시법(詩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하여 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 냈으나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하루는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이달에게 말해주기를,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되네. 자첨(子瞻 소식의 자(字))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
하였다.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ㆍ가음시(歌吟詩),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예전에 숨어 살던 손곡(蓀谷)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十二家)ㆍ유 수주(劉隨州)ㆍ위 좌사(韋左史)와 백겸(伯謙)의《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문을 닫고 외었다. 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어렴풋이 깨우쳐짐이 있었다. 시험삼아 시를 지었더니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어졌었다.
그리하여 당 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長篇)ㆍ단편(短篇) 및 율시(律詩)ㆍ절구(絶句)를 지어냈다. 글자와 구절을 단련(鍛鍊)하고 성음(聲音)과 운율(韻律)을 췌마(揣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으면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모두 감탄해 마지 않으며 깜짝 놀랐었다. 최고죽(崔孤竹)ㆍ백옥봉(白玉峯)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고, 제봉(霽峯)ㆍ하곡(荷谷)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모두 성당(盛唐) 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 세웠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버금하고,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錢起)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래로 당시(唐詩)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정말로 사암(思菴)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그건 진섭(陳涉)이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어 준 것이라고나 할까.
이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칭찬해 마지 않는 분들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3~4명의 거장(巨匠)들이 있었다. 그러나 속인(俗人)들 중에는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줄줄이 이어 있어,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덮어씌우며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담하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검속(檢束)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속(時俗)의 예법에 익숙하지도 못하여 이런 것들 때문에 시류(時流)에 거슬렸었다.
그는 고금(古今)의 이야기를 잘했으며,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술을 즐겨 마셨다. 진(晉) 나라 사람(왕희지 등을 가리킴)에 가깝도록 글씨도 잘 썼다. 그의 마음은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먹고 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서 사람들 중에는 이 때문에 더 그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며 걸식(乞食)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不朽)의 명시를 남겼으니 한 때의 부귀로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인데 내가 가려서 4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하였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태사(太史) 주지번(朱之蕃)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았다. 만랑무가(漫浪舞歌)라는 시를 읽고서는 격절차상(擊節嗟賞)하면서,
“이 작품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도 이달의 반죽원(斑竹怨)이라는 시를 보고서,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호)의 시집 속에 넣어도, 안목(眼目) 갖춘 사람일 망정 판별하기 쉽지 않으리라.”
했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망언(妄言)을 할 사람이겠는가. 슬프다. 달의 시야말로 진실로 기특했었다.
○장생전(蔣生傳)
장생(蔣生)이란 사람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무렵에 서울에 왕래하며 걸식하면서 살아갔다.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역시 알지 못한다 하였고,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거주했던 곳을 물으면,
“아버지는 밀양(密陽)의 좌수(座首)였는데 내가 태어난 후 세 살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비첩(婢妾)의 속임수에 빠져 나를 농장(農莊) 종의 집으로 쫓아냈소. 15세에 종이 상민(常民)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주어 몇 해를 살다가 아내가 죽자 떠돌아 다니며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수십 고을에 이르렀고 이제 서울까지 왔소.”
하였다.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미목(眉目)도 그린 듯이 고왔다. 담소(談笑)를 잘하여 막힘이 없었고 더욱 노래를 잘 불렀으니 노래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裌衣]을 입고 다녔는데,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갈아 입는 적이 없었다.
창녀(倡女)나 기생들 집에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 잘 알고 지냈으며, 술만 있으면 곧바로 자기가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 아주 즐겁게 해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맹인ㆍ점쟁이ㆍ술취한 무당ㆍ게으른 선비ㆍ소박맞은 여인ㆍ걸인ㆍ노파들이 하는 짓을 흉내냈으니 하는 짓마다 아주 똑같이 해댔었다. 또 가면을 쓰고 열심히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흉내 내면 꼭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또 입을 찡그려서 피리ㆍ거문고ㆍ비파ㆍ기러기ㆍ고니ㆍ무수리ㆍ집오리ㆍ갈매기ㆍ학(鶴) 등의 소리를 내는데, 진짜와 가짜임을 구별하기 어렵게 하였다. 밤에 닭우는 소리ㆍ개 짖는 소리를 내면 이웃 개나 닭이 모두 울고 짓어대는 지경이었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나 저자에서 구걸을 했으니, 하룻동안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斗]이었다. 몇 되[升]쯤 끓여 먹고 나면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밖으로만 나오면 뭇 거지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날에도 또 그와 같이 해버리니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전에 악공(樂工) 이한(李漢)이라는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계집이 호금(胡琴)을 배우느라 조석으로 만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하루는 구슬로 이어진 자주빛 봉미(鳳尾 머리에 꽂는 노리개)를 잃어버리고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연유를 들어 보니, 아침에 길 위에서 오다가 준수한 소년이 있기에 웃으며 농을 붙이고 몸이 닿고 스치더니 이내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더란다. 그래서 장생은,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아가씨야 울지 마라.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다.”
하고는,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이 되자 계집아이를 불러내어 따라오게 하고서는, 서쪽 거리 곁 경복궁(景福宮) 서쪽 담장을 따라 신호문(神虎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계집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왼쪽 어깨에 들쳐매고 풀쩍 뛰어, 몇 겹으로 겹친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한창 어두울 때여서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급히 경회루(慶會樓) 위로 올라가니 두 소년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마중나와 서로 보며 껄걸 웃어대었다. 그러더니 상량 위의 뚫어진 구멍에서 금구슬ㆍ비단ㆍ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다.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 또한 있었다.
소년들이 그걸 돌려주자 장생(蔣生)은,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
하였다. 그런 뒤에 끌고 다시 날라서 북쪽 성(城)으로 나와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계집은 다음날 밝기 전에 이씨(李氏)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하려 했더니 술이 취해 누워 있으며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사람들 또한 밤에 외출했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4월 초하룻날 값을 뒤에 주기로 하고 술 몇 말[斗]을 사와, 아주 취해서는 길을 가로 막으며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다가는 거의 밤이 되어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넘어졌다. 다음날 해뜬 지 늦어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었다. 시체가 부패하여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전부 날아가 버려 하룻밤에 다 없어지고 오직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라는 사람은 연화방(蓮花坊)에서 살았으니, 장생(蔣生)과 친하게 지냈었다. 4월에 이일(李鎰)을 따라 왜적을 방어했었다. 조령(鳥嶺)에 이르렀을 때 장생을 만났다. 그는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면서 손을 붙잡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한 나라를 찾아 떠나버렸소.”
하더란다. 그러면서,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오. 병화(兵禍)가 있으면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정유년에는 삼가고 남쪽으로는 오지는 마시오. 혹 공사(公事)의 주관한 일이 있더라도 산성(山城)으로 오르진 마시오.”
하고는 말을 끝마치자 날아서 가버리니 잠깐 사이에 있는 곳을 알 수 없더란다.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彈琴臺)의 전투에서 그가 해 준 말을 기억해 내서 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정유년(1597, 선조30) 7월에 금군(禁軍)으로 숙직을 할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정승에게 임금의 교지(敎旨)를 전해 주느라 그가 경계해 준 것을 모두 잊었었다. 돌아오면서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군의 추격을 당하자, 황석성(黃石城)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 함을 듣고는 급히 달려갔는데, 성(城)이 함락되자 함께 죽고 말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와도 해학(諧謔)을 걸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던 탓으로 그의 잡기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슬프다, 그는 신(神)이었거나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劍仙)과 같은 부류가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