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삼봉집(정도전)

청담(靑潭) 2018. 1. 21. 22:23

 

삼봉집(三峯集)

정도전 : 1342년 ~ 1398년

 

삼봉집 제1권

 

■차운하여 정달가 몽주(1337-1392) 에게 부치다[次韻寄鄭達可 夢周]

마음을 같이한 벗이 / 夫何同心友

하늘 한구석에 각각 있는지 / 各在天一方

때때로 생각이 여기 미치니 / 時時念至此

저절로 사람을 슬프게 하네 / 不覺今人傷

봉황새는 천 길을 높이 날아서 / 鳳凰翔千仞

돌고 돌아 조양(朝陽)으로 내려가는데 / 徘徊下朝陽

이 사람은 출처에 너무 어두워 / 伊人昧出處

한 번 움직이면 법에 저촉되누나 / 一動觸刑章

지란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 芝蘭焚愈馨

좋은 쇠는 갈수록 빛이 더 나네 / 良金淬愈光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 共保堅貞操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세 / 永矢莫相忘

 

■꿈에 도은(1347-1392)이 스스로 말하기를 항상 바다를 건널 때에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된다 하였는데 초췌(憔悴)한 기색이 있었다[夢陶隱自言常渡海裝任爲水所濡盖有憔悴之色焉]

만리 밖에 떨어져 있는 벗님이 / 故人在萬里

밤이면 꿈에 혹 보이네 / 夜夢或見之

맥 빠진 노고의 기색 / 草草勞苦色

곤궁한 나그네의 몰골이로세 / 瑣瑣羇旅姿

헤어진 지 아무리 오래라지만 / 雖謂別離久

여느 때와 다를 게 별로 없구려 / 宛似平生時

바다엔 물결도 거센 것이고 / 淮海足波浪

길도 간험한 곳 많을 터인데 / 道途多嶮崎

그대는 지금 날개도 없으면서 / 君今無羽翼

어찌하여 별안간 여기 있는가 / 何以忽在茲

꿈이 깨자 더욱더 측은하여 / 夢覺倍悽惻

부지중 두 가닥 눈물이 줄줄 내리네 / 不覺雙淚滋

 

 

삼봉집 제4권

 

■경복궁(景福宮)

신은 상고하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ㆍ당(漢唐) 이래로 궁전(宮殿)의 호칭이 혹은 전에 있던 이름을 따기도 하고 혹은 고쳐 부르기도 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동을 일으키게 한 바는 그 의의가 동일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이 되던 해,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시고 먼저 종묘(宗廟)를 세운 다음 궁전을 건립했습니다. 그 이듬해 10월 을미일에 상께서는 친히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선왕(先王)ㆍ선후(先后)에게 새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어 군신들에게 새 궁전에서 잔치를 여셨습니다. 이것은 대개 신(神)의 은혜에 감사하며 미래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술이 세 순배가 돌자 신 도전(道傳)에게 명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사 지내고 새로운 궁전이 낙성되어 여러 군신들과 잔치를 열게 되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길이 빛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주아(周雅 《시경》 대아(大雅)와 소아(小雅))에서, ‘술대접 받아 실컷 취하고 또 많은 은덕을 입었으니, 비옵니다 군자께서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景福] 받으시기를’이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새 궁전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짓기를 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전하께서는 자손들과 더불어 만년이나 태평한 왕업을 누리게 될 것이며 사방의 백성들도 길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에서 백성에게 부역시키는 것이나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일들을 몹시 삼가고 중난하게 여겼으니, 임금이 된 이가 백성만을 부려 스스로를 받들게 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서는 안 되오니, 한가로이 넓은 집에 있을 때는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를 비호할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양생(凉生)이 구본에는 생량(生凉)으로 되었음. 전각(殿閣)에 어떤 본에는 전합(殿閤)으로 되어 있음. 있으면 그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만민(萬民)이 받듦에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아울러 언급합니다.

 

■근정전ㆍ근정문(勤政殿 勤政門)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황폐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의 큰 것이겠습니까?

《서경》에 이르기를, ‘근심이 없을 때 경계하여 법도를 잃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를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소서. 하루 이틀에도 기무(幾務)는 만 가지나 됩니다. 그리고 서관(庶官)을 비워두지 마소서. 하늘의 공(工)을 사람이 대신 처리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순(舜)ㆍ우(禹)의 부지런한 바이오며 또 《서경》에 이르기를, ‘아침부터 해가 기울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일하여, 만백성을 잘 살게 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인군으로서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한데도, 편안히 봉양하기를 이미 오래한지라 교만과 안일이 쉽게 생기며, 또 아첨하는 사람들이 그에 따라서 하는 말이, ‘천하 국가의 일 때문에 나의 정력을 소모시켜 나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은 불가하다.’하고, 또 ‘이미 숭고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자기를 낮추고 수고를 해야만 됩니까?’ 합니다. 거기에 이어서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완호(玩好)로, 혹은 토목(土木)으로써 아첨하여 무릇 황음한 일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인군은 그가 나를 제일 사랑한다 어떤 본에는 아(我)자가 없음. 고 하며 스스로 태황(怠荒)에 빠지는 것은 알지를 못하게 됩니다.

저 한ㆍ당(漢唐)의 인군들이 삼대(三代)만 못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니, 그러하다면 인군은 하루도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인군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부지런히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함이 번쇄하고 까다로운 데 흐르고 말므로 볼 만한 것이 못 될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낮에는 어진 이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조령(朝令)을 만들고, 밤에는 몸을 편히 쉰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인군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어진 이 구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어진 이 임명하는 데는 빨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로써 올리는 것입니다.

 

■가난(家難)

내가 죄를 지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간 후부터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이 터무니없이 퍼져서 화가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내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하므로, 나는 답장을 아래와 같이 썼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 구름같이 흩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지고 은혜로써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부부의 관계는 한번 결혼을 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으며 다 같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소? 각각 그 직분만 다할 뿐이며 그 성패와 이둔(利鈍)과 영욕과 득실에 있어서는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근심하겠소?”

 

■회시책(會試策)

.....저 예(禮)로써는 문(文)을 질서 있게 하고 전(典)을 조리 있게 하여, 위로 종묘와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과 향정(鄕井)에 이르기까지 문(文)으로써 서로 대하고 은혜로써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며, 저 형으로는 그 분별을 똑바르게 하고 행하는 것을 조리 있게 하되 위로 권세 있는 자도 회피하지 않고 아래로 유약한 자라도 업신여기지 아니하여, 형벌을 쓰지 않는 지경까지 가서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제생들은 체(體)에 밝고 용(用)에 맞는 학문으로써 유사(有司)의 물음을 기다린 지 오래일 것이니 그 모두를 글로 나타내게 하라.

 

 

삼봉집 제5권

 

■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큰 일이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는가 하면, 그렇다고 해서 하루도 구차하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목숨을 해칠 것이요, 구차스럽게 먹으면 의리를 해칠 것이다. 그러므로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에 식(食)과 화(貨)를 앞에 두었고, 백성에게 오교(五敎 오상(五常)의 교를 이름이니,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ㆍ붕우의 가르침이다)를 중하게 하되, 식을 처음에 두었으며, 자공(子貢)이 정사[政]에 관하여 물으니 공자(孔子)도 대답하기를,

“먹을 것부터 족(足)하게 하라.”하였다.

...불씨가 그 최초에는 걸식(乞食)하면서 먹고 살 뿐이어서, 군자(君子)는 이것을 의(義)로써 책망하여 조금도 용납함이 없었는데도,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殿堂)과 큰 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왕자(王子) 받듦 같이 하고, 넓은 전원(田園)과 많은 노복을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아 공문서를 능가하고, 분주하게 공급하기는 공무(公務)보다도 엄하게 하니, 그의 도(道)에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에서 떠나 청정(淸淨)하고 욕심 없이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옷과 음식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좋은 불사(佛事)라고 거짓 칭탁(稱托)하여 갖가지 공양에 음식이 낭자(狼藉)하고 비단을 찢어 불전(佛殿)을 장엄하게 꾸미니, 대개 평민 열 집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온통 소비한다. 아아! 의리를 저버려 이미 인륜의 해충(害虫)이 되었고, 하늘이 내어주신 물건을 함부로 쓰고 아까운 줄을 모르니 이는 실로 천지에 큰 좀벌레로다.

 

 

삼봉집 제9권

 

■재상의 직[宰相之職]

...재상의 일을 맡기는 데는 반드시 재상의 재목이 있으니, 그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혹은 유약(柔弱)하여 제압되기 쉬우며, 혹은 아첨하고 간사한 자가 아첨하여 나오거나, 혹은 외척과 결탁하고, 혹은 중인(中人 환관이나 궁녀)에게 붙는다.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거하고 치도(治道)를 논하는 직책에 처하면, 간사한 자는 권세를 부려 복록을 지으며, 벼슬을 팔고 법을 팔아 천하를 어지럽게 하며, 유약한 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하고 입을 다물어 말을 아니하여 은총만을 굳히매, 크게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작게는 기강을 무너뜨리니, 재상의 임무를 어찌 가벼이 주겠는가.

 

 

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국호(國號)

해동(海東)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견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고 일컫고,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일컬었으며, 왕씨(王氏)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으니 비록 호칭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취할 게 있겠는가? 단 기자만은 주무왕(周武王)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天子 명태조(明太祖)를 가리킴)가,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공자가,

“나는 동주(東周)를 만들겠다.”

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국본을 정함[定國本]

세자(世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의 선왕(先王)이 세자를 세우되 반드시 장자로써 한 것은 왕위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반드시 어진 사람으로써 한 것은 덕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천하 국가를 공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님이 없었다.

그래도 오히려 세자의 교양이 부족하면 덕업(德業)이 진취되지 않아, 부탁한 중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노성한 학자와 덕행이 높은 현인을 택하여 세자의 사부(師傅)로 삼고, 단정한 사람과 정직한 선비를 세자의 요속(僚屬)으로 삼아서, 조석으로 강권(講勸)하는 것이 바른말ㆍ바른 일이 아닌 게 없도록 하였으니, 그를 훈도(薰陶 덕으로써 감화함)ㆍ함양(涵養 서서히 양성함)함이 이렇듯 지극하였다. 선왕은 세자에 대하여 다만 위(位)를 정해줄 뿐 아니라, 따라서 그를 가르침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간혹 기술을 가진 인사를 초빙하여 한갓 사장(詞章)의 학문을 배우는 경우가 있어서, 그 배우고 익힌 것이 도리어 본심을 미혹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들만을 신임하고 유희나 안일한 일만을 좋아하다가 끝내 세자의 위를 보존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니, 아! 애석하다.

우리 전하는 즉위 초에 윤음(綸音)을 내리어 먼저 동궁의 위를 바루고 서연관(書筵官 왕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아치)을 설치하여,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조준(趙浚)ㆍ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ㆍ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정총(鄭摠)의 학업이 세자를 강권할 만하다고 믿어서 명하여 세자의 사부와 빈객으로 삼았는데, 불민한 신 또한 이사(貳師)의 직책을 더럽히게 되었다. 신은 비록 학문이 소략하여 세자의 덕을 제대로 보필하기는 어려우나 마음속로는 항상 책임감을 잊지 않았다.

지금 우리 동궁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서연(書筵)에 참여하여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일취 월장하여 반드시 그 학문이 광명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 기대된다. 세자의 위를 바루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종묘(宗廟)

왕자(王者)는 천명을 받아 개국을 하고 나면 반드시 종묘(宗廟)를 세워서 조상을 받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 도리이다.

공덕이 있는 조상은 조종으로 높여서 불천지주(不遷之主)로 받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경》에,

“7세(世)의 묘(廟)에 가히 덕을 볼 수 있다.”하였다.

전하는 즉위하자 아버지 되는 환왕(桓王) 이상 4대(代)의 조상을 추숭하여 왕의 작위를 가하고, 묘실(廟室)을 세워서 신주(神主)를 봉안하였다. 제사에 쓰는 희생(犧牲)과 폐백(幣帛)의 수량, 보궤(簠簋)ㆍ 보궤가 어떤 본에는 보거(簠筥)로 되어 있음.변두(籩豆) 등 제기의 품질, 그리고 관헌(祼獻)ㆍ배축(拜祝)하는 예절 등을 자세히 강구하여 책에 기록해 두었다. 예조(禮曹)는 필요할 때마다 청하여 거행하고, 모든 관부는 분주하게 자기의 직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수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공경의 지극함이다.

 

■사직(社稷)

사(社)라는 것은 토신(土神)이고, 직(稷)이라는 것은 곡신(穀神)이다. 대개 사람이란 토지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자에서 제후에 이르기까지 인민을 가진 자는 모두 사직을 설치하는 것이니, 이것은 인민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직을 설치하여 여기에 바치는 희생은 가장 살찐 것을 사용하고, 제기와 폐백은 가장 정결한 것을 사용하며, 헌작은 세 번으로 끝내고 주악은 여덟 번으로 마친다. 모두 유사가 있어서 때에 맞추어 제사를 거행하고 있으니, 인민을 중히 여기는 뜻이 이렇듯 큰 것이다.

 

■문묘(文廟)

온 천하가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문묘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안으로는 국도(國都)로부터 밖으로는 주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학(廟學 묘(廟) 안에 있는 학교)을 세워서 매년 봄 2월과 가을 8월의 첫번째 정일(丁日)에 예로써 제사를 지낸다. 성교(聖敎)가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운행하는 것과 같다. 여러 군왕이 이것으로써 규범을 삼고, 만세에 이것으로써 사표를 삼는 것이다.

대개 언어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성(人性)의 고유한 것에 뿌리를 박고, 인심의 공통성이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전하는 문묘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넉넉하게 하고 제기를 정결하게 하여 스승을 존중하는 뜻을 극진하게 하였으니, 이를 적어 둔다.

 

■악(樂)

악(樂)이란 올바른 성정(性情)에서 근원하여 성문(聲文)을 빌어서 표현되는 것이다. 종묘의 악은 조상의 거룩한 덕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고, 조정의 악은 군신간의 장엄하고 존경함을 지극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향당(鄕黨)과 규문(閨門)에서까지도 각기 일에 따라서 악을 짓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유계(幽界)에서 악을 사용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명계(明界)에서 사용하면 군신이 화합하며, 이를 향당과 방국에 확대하면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악의 효과는 이렇듯 시원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이것을 봉상시에 소속시켰다. 종묘의 악에는 당악(唐樂 중국의 속악(俗樂))과 향악(鄕樂 우리 나라의 속악)이 있는데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여 이를 관장케 하고, 이 악은 조정에서도 사용하고 연향에서도 사용한다.

또 문덕(文德)ㆍ무공(武功)의 곡(曲) 을 새로이 지었는데, 이것은 전하의 거룩한 덕과 신기로운 공을 서술하여 창업의 어려움을 형용한 것이다. 이 악곡에는 고금의 문장이 갖추어져 있다. 이른바 공업이 이루어지면 악이 지어지고 악을 보면 공덕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역(曆)

역(曆)이란 천도의 운행을 밝히고, 일월의 운행 도수를 정하며, 절후의 빠르고 늦음을 구분하는 것이다. 농사도 이것으로써 이루어지고, 여러 공적도 이것으로써 빛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왕은 이것을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운관(書雲觀)을 설치하여 역에 관한 직책을 관장하게 하였다.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일월의 운행을 계산하는 술법에 있어서는 수시력(授時曆)과 선명력(宣明曆)

【안】 수시력은 원세조(元世祖) 때의 역이고, 선명력은 당목종(唐穆宗) 때의 역임.

이 있는데, 때에 맞추어 이것을 시험하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존중하는 국가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연(經筵)

전하는 즉위하자 먼저 경연관(經筵官)을 설치하여 고문(顧問)을 갖추었고, 항상 말하기를,

“《대학(大學)》은 인군이 만세의 법을 세우는 데 필요한 책이다. 진서산(眞西山)은 《대학》의 뜻을 확대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었다. 제왕이 정치를 하는 순서와 학문을 하는 근본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정사를 청단하는 가운데 여가가 있을 때마다 혹은 《대학》을 친히 읽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강론하게도 하였으니, 비록 고종(高宗)의 시시로 학업에 힘쓴 것이나, 성왕(成王)의 학업이 일취월장한 것이더라도 어찌 이보다 나을 수 있었으랴.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로다.

 

■학교(學校)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 이전에는 학교 제도가 크게 갖추어졌었고, 진(秦)ㆍ한(漢) 이후로도 학교 제도가 비록 순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학교를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니, 일대의 정치 득실이 학교의 흥패에 좌우되었다. 그러한 자취를 오늘날에도 역력히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앙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공경(公卿)ㆍ대부(大夫)의 자제 및 백성 가운데서 준수한 자를 가르치고, 부학 교수(部學敎授)를 두어 동유(童幼)를 가르치며, 또 이 제도를 확대하여 주ㆍ부ㆍ군ㆍ현에도 모두 향학(鄕學 향교(鄕校))을 설치하고 교수와 생도를 두었다.

병률(兵律)ㆍ서산(書算)ㆍ의약(醫藥)ㆍ상역(象譯 통역(通譯)) 등도 역시 이상과 같이 교수를 두고 때에 맞추어 가르치고 있으니, 그 교육이 또한 지극하다.

 

■사신을 파견함[遣使]

우리 나라는 예로써 사대를 하여 중국과 통교하고 공물을 바치며 세시(歲時)에 사신을 파견하니, 이것은 제후의 법도를 닦고 맡은 바의 직무를 보고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로 학문이 풍부하고 사명(辭命)이 능란하여 사신 임무를 오로지 수행하고 국가의 아름다움을 선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러한 직책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전하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조정사(朝正使)ㆍ성절사(聖節使)ㆍ진표사(進表使)ㆍ진전사(進箋使)로 간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 성명을 상고할 만한 사람은 모두 적는다.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음주례(鄕飮酒禮)에는 선왕의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뜻이 갖추어져 있다. 빈객과 주인이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올라가는 것은 존경과 겸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요,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 것은 청결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매사에 반드시 절을 하는 것은 공경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존경하고 겸양하고 청결하고 공경한 다음에 서로 접촉하면 포만(暴慢)이 멀어지고 화란(禍亂)이 종식될 것이다. 주인이 빈객과 빈객의 수행인을 가리는 것은 현자와 우자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요, 빈객을 먼저 대접하고 수행인을 뒤에 대접하는 것은 귀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현자와 우자가 구별되고 귀천이 밝혀지면 사람들은 권면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술을 마실 때는 즐겁게 하되 유탕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엄숙하되 소원한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신은, 경계하지 않고서도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음주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례(冠禮)

사마 온공(司馬溫公 이름은 광(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冠)을 씌우는 것은 성인(成人)을 만드는 도리이니, 성인을 만든 것은 장차 자식이며 동생이며 신하며 젊은이가 되는 행동을 책임지우려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행동을 장차 남에게 책임지우려는 것인데, 그 예를 어찌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세에는 인정이 더욱 경박해져서 아들을 낳으면 아직 젖을 먹고 있는데도 건모(巾帽)를 씌우고, 관작을 가진 자는 어린 아이를 위하여 관복을 만들어 입히고 희롱한다. 열 살이 넘으면 총각으로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그들에게 이상 네 가지 행동을 책임지운다 해도 어찌 잘 알겠는가? 그러므로 가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어리석고 유치하기가 여전한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성인의 도리를 모르는 때문이다.”

신은 그 격언을 기술하여 성인의 도리를 책임지게 하려는 뜻에서 관례편(冠禮篇)을 짓는다.

 

■혼인(婚姻)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남녀간에 구별이 있은 연후에 부자간이 친해지고, 부자간이 친해진 뒤에 의가 생기고, 의가 생긴 뒤에 예가 이루어지고, 예가 이루어진 뒤에 만물이 편안해진다.”

하였다. 남녀란 인륜의 근본이며 만세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경(易經)》에서는 건(乾)ㆍ곤(坤)을 첫머리에 실었고, 《서경(書經)》에서는 이강(釐降 치장해서 시집보내는 일)을 기록했으며, 《시경(詩經)》에서는 관저(關雎)를 기술하였으며, 《예기(禮記)》에서는 대혼(大婚)에 대해서 공경스럽게 다루었으니, 성인이 남녀를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삼대(三代) 이래로 나라의 흥폐와 가정의 성쇠가 모두 이것으로 연유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혼인하는 집안이 남녀의 덕행이 어떠한가는 따지지 않고 일시의 빈부만을 가지고 취사를 하는가 하면, 또 배필을 서로 구할 적에는 터놓고 하지 않으면 비밀로 하여 이 사람에게 중매하고 저 사람에게 혼인하기를 마치 장사꾼이 물건을 파는 것처럼 하여, 타성끼리 혼인을 하고 구별을 두텁게 하는 뜻이 전혀 없다. 그리하여 더러는 옥송(獄訟)을 일으키기도 하고, 더러는 침해를 입히기도 한다.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오는 일)의 예가 폐지되어,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부인이 무지하여 자기 부모의 사랑을 믿고 남편을 경멸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교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서 마침내는 남편과 반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가도(家道)가 무너지는 것은 모두 시작이 근엄하지 못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예를 지어서 이를 정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풍속을 통일시킬 수 있겠는가? 신은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본시(本始 인륜의 근본과 만세의 시작)를 삼가서 혼인편(婚姻篇)을 짓는다.

 

■가묘(家廟)

이천 선생(伊川先生 정이(程頤))은 말하기를,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는 예 중에서 가장 큰 것이거늘, 요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승냥이나 수달도 모두 제 근본에 대한 보답을 아는데, 요즘 사대부들은 대부분 이것을 소홀히 여겨, 산 사람을 봉양하는 데는 후하나 선조를 제사하는 데는 박하니, 이것은 매우 옳지 않다. 무릇 죽은 사람을 섬기는 예는 산 사람을 섬기는 예보다 후하게 해야 한다. 인가에서 능히 이러한 두어 건 일을 잘 수행한다면 비록 어린 아이라도 점차로 예의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삼봉집 제14권 조선경국전 하(朝鮮經國典 下)

 

■둔전(屯田)

둔전법(屯田法)이란 둔수(屯戍)에 있는 병졸로 하여금 싸우면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니, 즉 조운(漕運)하는 불편을 덜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도적(盜賊)

사람의 성품은 다 착한 것이며, 수오(羞惡)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적이 되는 것은 어찌 인간의 본정이겠는가? 일정한 생업이 없는 사람은 따라서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기한(飢寒)이 몸에 절실해지면 예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대부분 부득이한 사정에 압박되어 도적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장이 되는 사람은 능히 인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이 자기의 생업에 안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들을 부릴 때에는 농사 짓는 시기를 빼앗지 않아야 하고, 그들에게 수취할 적에는 그들의 힘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

남자에게는 먹고 남은 곡식이 있고, 여자에게는 입고 남은 베가 있어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풍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기에 풍족하면, 백성들은 예의를 알게 될 것이고, 풍속은 염치를 숭상하게 될 것이므로 도적은 없애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욕심은 한량없고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쉽게 솟구치는 것이다. 만약 형벌을 밝혀서 이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역시 금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서경》 주서(周書) 강고(康誥)에,

“재화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고 넘어뜨리면, 모든 백성들 중에는 이를 미워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다.”

고 하였다. 성품의 착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간사한 도적을 징계해야 한다. 도적편(盜賊篇)을 짓는다.

 

■궁원(宮苑)

궁원(宮苑)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 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운 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검소란 덕의 유이고, 사치란 악의 큰 것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모자 토계(茅茨土階)로 한 경우에는 마침내 태평스러운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고, 요대 경실(瑤臺瓊室)을 꾸민 경우에는 위망(危亡)의 화란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방궁(阿房宮 진시황(秦始皇)이 위수(渭水) 남쪽에 지은 궁전)이 지어지자……(원문 4행 빠짐)……마음의 일단을 여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창고(倉庫)

나라에 3년간 쓸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관자(管子)는,

“창고가 가득 차 있어야 예절을 안다.”

하였다. 창름(倉廩)과 부고(府庫)는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실로 중요한 것이다. 창고가 가득 차 있느냐, 비어 있느냐 하는 것은 저장 관리를 신중히 하느냐, 못하느냐와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모든 창고의 명칭은 전조의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광흥창(廣興倉)은 백관의 녹봉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고, 풍저창(豊儲倉)은 국용(國用)을 저장하여 흉년과 뜻밖의 재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장흥창(長興倉)과 의창(義倉)은 빈민에게 곡식을 진대(賑貸)하기 위한 것이고, 의성고(義成庫)ㆍ덕천고(德泉庫)ㆍ내장고(內藏庫)ㆍ보화고(保和庫)ㆍ의순고(義順庫) 등은 내용(內用)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교량(橋梁)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이런 말이 있다.

“10월에 작은 다리가 이루어지고, 12월에 수레가 다닐 다리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은 물을 건너는 일에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를 가진 사람은 교량을 놓아서 왕래를 통하는 것이 또한 왕도 정치의 일단인 것이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소부부고2  (0) 2018.02.02
성소부부고1(허균)  (0) 2018.02.01
산림경제(홍만선)  (0) 2017.12.01
목민심서 3  (0) 2017.09.13
목민심서 2  (0) 2017.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