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잡록(續雜錄) 3,4
조경남(趙慶男) : 1570년 ~ 1641년
■조경남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와 함께 살았다. 13세부터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난중잡록)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도덕·의리를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격장으로 활약하며 10여 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왜적에 포위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을 찾아가 성을 방어할 계책을 전달하였으나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후 뛰어난 계책으로 전장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159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하에서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에 들어가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처하며 살았다. 성리학에 능통하고, 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난중잡록(亂中雜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07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난중잡록》은 1582년(선조 15)부터 1610년(인조 16)까지 즉 조경남이 13세 되던 해부터 69세까지 57년간 쓴 일기로, 당시의 전란 기록과 정세·풍속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윤리변(倫理辨)》, 《성리석(性理釋)》, 《오상론(五常論)》 등의 책도 썼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속잡록(續雜錄)》도 조경남이 쓴 일기(1611년~1638년)로 후일 난중잡록과 합쳐 발간되었는데‘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1. 속잡록 3(續雜錄三)
■무진년 하1 : 인조 6년(1628년)
○8월 옥당의 차자에, “신들이 요사이 듣건대, 한 촌부(村婦)가 굶주림을 참은 지 여러 날인데 어린 아들이 울부짖으나 먹일 방도가 없고, 그 지아비가 공청에서 돌아와 밥을 달라 하나 줄 길이 없으므로 울며 말하기를, ‘내가 남의 집 주부가 되어 아이가 굶주려도 능히 먹이지 못하고, 지아비가 굶어도 밥을 지어 주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 수 있는가.’ 하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데, 듣고 보니 마음이 아파 음식이 목으로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가을에 들어서 이미 이러하니 명년 봄은 이미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황건(黃巾) 갈영(葛榮)이 일찍이 흉년에 일어나서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지 않았습니까. 당장에 방침을 세우지 아니하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른바, “말을 타고 머뭇거리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한 것이 이것이니, 이러한 것은 참으로 비참하지 아니합니까.” 하였다.
○양서(兩西) 사람들로 서울에 들어온 자가 무수하여 1만여 가구를 배에 실어 양호에 내려 보내고, 육로로 분산하여 걸식하기를 희망한 자는 허락하여 주었는데 서울 근방에 와서 걸식하는 사람은 모두 선천ㆍ철산ㆍ용천ㆍ의주 사람들이었다.
○10월 회답사 정문익(鄭文翼) 등이 오랑캐 수중에서 돌아와 올린 계사는 다음과 같다.
신들 일행이 8월 13일에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는데,...신들이 대답하기를, “새나 짐승도 그들이 살던 둥지와 굴을 생각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고토를 잊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도주하여 돌아온 것은 진실로 그 정리(情理)가 본래 그러한 것이요, 그 중에도 부모나 부처(夫妻)나 자녀가 있는 사람은 그 정이 더욱 불상하고 가엾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이웃 나라끼리 좋게 지내야 하는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용단을 내려 쇄환하셨지마는 측은하고 가슴아파하는 생각을 오히려 스스로 금하지 못하셨고, 그 일행이 곧 출발할 때에 당하여 5인의 여자가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아신다면 우리의 이 가련한 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돌아와 끝내 고국의 혼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길가에서 보는 사람들도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들도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소.” 하였습니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인정이 누군들 이러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돌아가 보고하겠습니다.” 하고, 곧 일어나 갔다가 또 다시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서로 이렇듯 좋게 지내는데 쇄환된 사람을 유치하여 두는 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이니, 그들의 부모나 동생들 중에 만일 속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허락해 주어야 한다고 하기고, 인하여 5사람을 사신들께 송환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대답하기를, “지금 한의 말을 들으니 후의에 감격할 뿐이오. 우리 임금님께서 들으시면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오. 다섯 여자가 모두 다 걸식하는 사람들로서 난리를 치른 뒤에 이미 친척도 없으니 누가 속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소. 사신 및 일행인 사람들이 마땅히 힘을 합쳐서 거두어 그 값을 준비하여야 하겠는데 또한 그 값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모르겠소.” 하였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각 사람의 주인인 자들이 욕심 내는 바가 너무 지나쳐 한 사람의 값이 그 액수가 너무 많다고 아뢰자, 한께서는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사환(使喚)으로 있는 처지이니 저의 부모나 동생들이 들어와서 속바치기를 원한다면 그 값을 마땅히 액수대로 받아야 할 것 같으나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벌써 이미 도주하여 돌아갔기 때문에 그 주인된 자가 자기 몫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인데,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게 됨에 따라 정(情)을 버리고 묶어보낸 것이므로 의당 결정된 값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사람마다 청포(靑布) 60필씩 작정하여 이미 영을 내렸습니다.” 하기에, 신들이 다시 감사를 표한 후 바로 호조에서 보내준 청포 3백 필로 그들의 속바치기를 마치고, 아직도 1백여 필이 남았습니다. 용골대가 신들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 집에 정주 사람 남녀 둘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속바치기를 허락하여 주려고 하니 아울려 사가시오.” 하였습니다. 신들은 내심으로 골대가 오랑캐 중에서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그의 요청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고 여겼고, 또 생각하기를, 1백 필이나 되는 청포를 도로 가지고 오는 것은 별로 유익할 것이 없는데 한 사람을 속바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았기 때문에 1백 필 외에 부족한 액수는 신들이 종이 다발과 호초(胡椒) 등의 물건을 더하여 주고 두 사람 다 속을 바쳤는데, 여인은 장년이고 남자는 12세 아이기로 나올 때에 정주 목사에게 인계하였습니다.
■무진년 하 2: 인조 6년(1628년)
○12월 1일 접반사(接伴使) 조희일(趙希逸)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사정을 탐지할 일로 친히 섬[島 가도(椵島)]에 들어가 모 도독(毛都督 이름은 문룡(文龍))을 보고 대략 말을 건네 보았더니, 수작(酬酢)이 침착하지 못하며 기색이 교만하고 거동이 거만하였습니다. 신이 그 밑에 있는 문자(門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학사 조사(學士詔使)를 모셔서 예모(禮貌)를 익히 보았다. 이번에도 접반사로서 왔는데 지상에서 절을 하고, 또 노야(老爺)ㆍ대야(大爺)라 칭하는 예절이 모두 전날에 보던 것과는 다르니 지금 명 나라에서 서로 대접하는 예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노야는 일품 도독(一品都督)에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한 분으로 그대 나라 일에 대해서는 편의 대로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가졌으니, 학사 조사가 어찌 이런 것이 있었던가.” 하였습니다. 도독의 자처하는 행동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올 가을 등주(登州)에 갔을 때는 불의에 덮쳐서 공갈하였으므로 군문(軍門) 이하가 두려워서 겁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또 그는 양 총병(揚總兵)의 공덕비를 쳐부수어서 양 총병이 자기를 모함한 설분을 쾌히 하고 우리나라 화물(貨物)을 약탈하였으며, 중원(中原)에서 장사하는 사람으로 물건 매매를 거간하는 전(錢)가 성 가진 사람을 잡아 가지고 돌아와서 여러 달 감금하고 다음해 봄까지 기다려서 십만 냥의 은자(銀子)를 바치라 하여 그대로 승낙을 받은 뒤에야 석방하였는데, 그 사람이 항상 가슴을 치면서 크게 통곡하다 합니다. 그 밑에는 장관(將官)ㆍ부총(副總)ㆍ참장(參將)ㆍ유격(遊擊)ㆍ수비(守陴) 등의 수효가 심히 많은데 그들을 기용하고 파면하는 것은 거의 자기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만 따르므로, 여러 모씨(毛氏)와 그 외에 자기가 총애하는 자는 다 편하게 작록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조금이라도 미운 일이 있어서 성이 나게 되면 그만 벼슬준 사령장을 박탈하거나 월봉(月俸)을 삭감하며, 어떤 때는 곤장으로 치기도 하고 가산을 몰수하기도 하는데 조정에 주청하는 일도 없다 합니다. 이렇게 죄를 받은 사람이 혹은 거지가 되어 다니면서 원통한 사정을 말하는 이가 있으므로 이런 일로서 인심이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진영(鎭營)을 이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러 말하기도 하나 지금으로 봐서는 그러한 형적은 아직 볼 수 없습니다. 이 섬 가운데 사는 사람이 만여 호에 가깝고 저자와 상점에는 물화가 가득 차 있으며, 창고에 저장한 것도 아주 풍족합니다. 쌀의 값은 가을과 사이에는 은자 1냥으로 1곡(斛)을 살 수 있고, 그 1곡은 5두(斗)가 들어가는데 우리나라의 두로는 8두나 된다 합니다. 관(官)에서 내는 곡식은 그보다 조금 덜한다 합니다. 장관의 급료는 각기 그 벼슬의 등급에 따라서 주는데, 신이 사관(舍館)의 수졸(守卒)들이 받는 것을 보니 한 달에 쌀 1곡을 주고 또 은냥(銀兩)도 주며, 계절에 따라서 청포(靑布) 2필(疋), 목화(木花 솜) 2근(斤)과 모자ㆍ신발 등 물건을 준다 합니다. 다른 군졸도 다 그렇게 받는데 처자도 기한(飢寒)은 면한다 합니다. 모 도독이 생활하는 것을 보면 하루에 5, 6 때를 먹고 그 중에도 아침ㆍ점심ㆍ저녁 등 세 때에는 상에 오르는 그릇 수가 5, 60가지나 됩니다. 장관들도 한 상에 20가지를 먹으며, 적어도 10여 가지 음식을 먹는다 합니다. 도독이 총애하는 첩이 8, 9명인데 다 진주(眞珠)ㆍ비취(翡翠) 등 보화로 장식하고, 시녀도 많은데 그들은 다 놀고 먹으며 호화롭게 잘산다 하니 사치를 숭상함이 이와 같습니다.
■기사년 : 인조 7년(1629년)
○1월 1일 선천(宣川)ㆍ정주(定州) 등지에는 한인(漢人)들이 촌락에 널리 퍼져 폐를 끼치는 일이 말할 수 없이 커서 주민들이 편안히 살지 못할 지경이며 농사짓기에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평안 병사[平兵]의 장계이다.
○ 회령(會寧)에는 여진족(女眞族)인 자호(者胡) 등이 우시장(牛市場)을 차려서 소 매매를 하지 아니한다 하여 공갈과 위협이 날로 심하며, 감사와 병사가 주재하는 곳까지 달려가서 야단하고 잇달아 서울까지 가겠다고 하였다. 북병사[北兵]의 장계이다.
○ 평안 감사가 장계하기를, “떠돌아다니면서 굶주리는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기기를 애타게 생각하여 북쪽으로 도로 돌아가는 자들이 길에 이어져 있으나 이들을 정착시켜서 생활할 방도를 온갖 방법으로 계획하여도 방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15일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에, “사포진(蛇浦鎭) 쪽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 높이 뻗쳐 오르고 있으니 명 나라 군대와 금 나라 기병이 지금 서로 접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5월 큰 장마가 져서 남원성(南原城)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수일 전부터 장마로 비가 잇달아 내리더니, 29일 아침에는 큰 비가 급히 흘러서 동도방천(東道防川)이 무너져 물이 성 동남문으로 들이닥치니 성안에 물리 가득 차 남녀가 죽고 물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부사[府伯]가 말 등에 엎드려서 간신히 객사(客舍) 앞길에 나와서 백공성(白空城)으로 달려갔다. 성안 사람들은 울부짖으면서 달아나고 남문 밖 사람들은 성 밑 해자[濠]에 물이 넘 쳐서 큰 밧줄을 던져서 성안으로 끌어당기고 그 줄을 잡지 못한 자들은 그대로 죽음만을 기다렸으며, 지막(紙幕)과 강변에 있던 인가 7, 80호와 외촌(外村)으로 물가에 있던 민가들은 모두 떠내려가고 물속에 잠겨서 피해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물난리가 대낮에 났으니 죽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내가 되고 모래를 덮어쓸 논밭이 그 수량을 계산조차 할 수 없을 만치 많았다. 또 담양(潭陽)ㆍ함양(咸陽)같은 고을도 수해가 여기와 같았고, 함경도 고령(高嶺)ㆍ온성(穩城)에는 우박과 수재가 아주 심하였다 한다.
○6월 10일 명나라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황제의 밀조(密詔)를 받들고 쌍도(雙島)에서 모문룡(毛文龍)을 목베어 죽였다.
○12월 15일 진하사(進賀使) 이흘(李忔)이 영원위(寧遠衛)에서 올린 징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8월 26일에 광록도(廣鹿島)에서 바람에 막혀 쉬고 27일에 배 3척이 같이 떠나서 진하사ㆍ동지사(冬至使)ㆍ서장관(書狀官) 등이다. 삼산도(三山島)를 지나 저녁에 해성도(海城島)에 도착하여 3일간을 머물었으니 연이어 역풍(逆風)에 막혀 있었습니다. 9월 2일에 발선(發船)하여 백여 리를 가서 백평도(伯平島)에 도착하여 또 3일간을 머물고 6일에 여순(旅順) 어귀에 도착하였으며, 8일 새벽에 동풍을 따라서 발선하여 철산자(鐵山觜)에 도착할 무렵에 북풍이 갑자기 크게 불어닥쳐 하늘을 뒤흔들고 바다를 요동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와 3척의 배가 겨우 철산자 밑으로 들어갔으나, 밤에는 그대로 바다 위에 있다가는 바람으로 표류될까 두려워서 육지에 내려 장막을 짓고 3일 밤을 지냈습니다. 11일에 약간의 바람을 타고 새벽에 떠나 겨우 쌍도까지 도착하였으니, 이곳은 모문룡이 참수당한 곳입니다. 13일 오시부터 바람의 형편이 점차 순해졌으므로 6백여 리를 가서 밤 3경에 남범구(南汎口)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아침에 노를 저어 북범구(北汎口)에 와서 3일간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각화도(覺華島)까지는 아직도 심히 멀다고 합니다. 17일 4경에 마침 남풍이 불어오므로 3척이 일시에 떠났는데, 오후부터 서남풍이 크게 불어 배는 나는 것처럼 바다 가운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탄 배가 질주하여 가장 앞에 가고 동지사가 탄 배가 그 다음에 멀리 떨어져 따라왔으며, 서장관의 배와 신의 짐을 실은 배는 또 그 뒤에서 오고 있었습니다. 신시나 되어 뱃사공들이 동지사의 배를 멀리 바라다보니 큰 돛 2개가 서로 딱 붙더니 돛 하나가 먼저 뚝 떨어지고, 뱃머리가 왼쪽으로 가로 기울어지더니 조금 있다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풍랑이 들이 덮쳐 그만 형적이 간 곳도 없어졌으니 반드시 영영 침몰되고 만 것이었는데, 신이 놀랄까 염려하여 해서 저녁 무렵에야 조예(皁隸)의 우두머리가 비로소 보고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서 망극한 심정이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각화도 까지가 1백 40여 리라 하는데,...신들 일행이 대동강(大同江)에서 배를 타고 꼭 50일 만에 영원(寧遠)에 도착하였으나,
○ 동지사 서장관 정지우(鄭之羽)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흘(李忔 1568-1630)과 동지사 윤안국(尹安國 1569-1630)을 따라서 9월 17일에 북범구에 도착하였다가 바로 각화도를 향하여 가는데, 진하선(進賀船)이 앞서 가고 동지선(冬至船)이 그 다음에 가며 신이 탄 배가 맨 뒤에서 가니 서로 거리가 30리씩 떨어져 갔습니다.
■경오년 : 인조 8년(1630년)
○3월 3일 진하사(進賀使)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
신의 일행은 때마다 불행한 일에 부딪혔습니다. 그 중에도 절박하고 민망한 것은 격군(格軍)의 양료(糧料)를 처음부터 3개월 동안에 먹일 것만 가지고 왔는데, 그 사이 바다 위에서 두 달 영원위에서 한 달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먹을 것도 없으므로 그 뒤의 양식은 오로지 본위(本衛)에 의지해야 되겠으나 이렇게 병화를 당하여 대군(大軍)들이 왕래하므로 영원위에도 식량이 이제 떨어졌다 하면서 12월부터는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며칠 배를 머물러 두었다가 군관 유경우(柳敬友)가 일부러 와서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다 고하였으나, 일행의 반전(盤纏 행자(行資)를 말함)은 거의 다 쓰여졌고 돈 한 푼 날 곳이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별인정(別人情 특별히 쓸 교제비를 말함)으로 쓰려던 은자(銀子) 1백여 냥을 돌려주어 그것으로 여러 사람이 죽이라도 끓여 먹고 연명하도록 하였습니다. 돌아갈 때 타고 갈 배의 격군ㆍ포수(炮手)ㆍ사수(射手)ㆍ단련사(團練使) 등 합쳐서 전부 1백 20여 명의 일행이 양식을 이어나갈 방법이 없으니, 이곳에 머물러 있을 기한이 속할지 더딜지 예정할 수도 없고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그대로 앉아서 굶어죽는 것을 차마 볼 수도 없어서 감히 이같이 사정을 치계하는 것입니다. ...
■신미년 상 : 인조(仁祖) 9년(1631년)
○1월 25일 영부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전교하고 이불과 요, 침석을 갖추어 보내었으며 인하여 승지를 보내어 존문(存問)하였다. 승지가 갔다 와서 입계하기를, “원익이 좌우의 부축을 받아 겨우 전교를 받고 다만 말하기를, ‘신이 나이가 90에 가깝고 기력이 다되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조석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상께서 이렇게 생각하시어 승지를 보내 존문하시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이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그가 거처하는 집은 잡목으로 두어 칸짜리 초옥을 지었는데 겨우 몸이나 용납할 정도이고, 집이 낮고 작고 좁아서 형편없었습니다. 그 앞에 가속이 들어 사는 집은 더욱 한쪽으로 기울어져 곧 허물어 질 것같이 누추하여 비바람도 피할 수 없으니 사람으로서는 살아나갈 수 없는 집이었습니다. 또 들으니, 그가 살고 있는 땅은 이것이 여러 세대의 선조의 묘가 있는 산 밑에 있는데 그 곁에는 한 이랑의 전답도 없고, 또 두어 사람의 노비도 없어서, 온 집안이 다만 매달 나라에서 주는 쌀로서 겨우 목숨을 연장하여 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가 정승으로 수십 년이나 있었는데 모옥(茅屋) 몇 칸에 비바람도 피하지 못하니 그 청백한 살림살이와 가난을 편안히 여기는 슬기로운 마음은 옛날에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평생에 공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의 공덕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간(淸簡)한 행실을 만조 백관이 다 본받아서 배운다면 지금 우리 백성들의 곤궁하고 병든 것이 무엇이 근심될 것이 있겠는가. 나이 많은 원로 대신에게는 의당히 우대하는 법이니 그 검소한 덕을 또한 표하여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該道)에 명령하여 정당(正堂)을 새로 지어주게 하고, 또 호조에 명하여 베이불과 흰 요를 내려주어서 그가 숭상하는 바를 이루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원익이 듣고서 차자를 올려 굳이 사양하면서, “집을 지어 주라는 명은 지극히 민망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집 두어 칸 지어주는 것을 어찌 그다지 어렵게 여기는가. 안심하고 사양치 말라.” 하였다.
○ 경기 감사의 서목에, “이원익이 나라에서 정당을 지어주는 일로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겠다. 하므로 명령을 봉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극히 황공합니다.” 하니, 다시 이원익에게 승지를 보내서 돈유하기를, “경이 정승이 된 지 3기(三紀 1기는 12년)가 되어도 집이 없으니, 이러한 청렴과 검소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이에 집을 지어주라고 한 것은 그 뜻이 세상을 면려하려는 것이니 경은 나라를 위해 안심하라. 만약 이것으로 고장을 떠난다면 비단 나의 마음이 불안할 뿐 아니라 경도 역시 식언(食言)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영부사의 집에 공신(功臣)의 노비를 다른 예에 준하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미년 하 : 인조 9년(1631년)
○선전관(宣傳官)을 여러 도(道)로 나누어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입위(入衛)하게 하였는데, 본도(本道 전라도)에서는 2천 3백 명이었다
○도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한강을 건너 적을 피했다.
○7월 진위사(陳尉使)로 갔던 배신(陪臣) 정두원(鄭斗源 1581- ? )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다. ...어느 날 육약한(陸若漢)이 신을 찾아와 만났는데, 신이 보니 그는 정신이 수려하여 마치 속세를 초월한 신선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천문(天文)에 정통하였던 까닭에 천조(天朝)에서 때마침 역법(曆法)을 개수하는 데 오로지 육약한의 말을 쓰고 있어 예부 상서(禮部尙書) 서광계(徐光啓)가 우대하자고 제청하였으니, 천조에서 신이(神異)한 사람이라 호칭합니다. 또 대포법(大炮法)에 정통하여 신묘함이 천하에 다시 없다고들 합니다. 신이 대포를 얻어 돌아가 국왕께 바치겠다고 원하니, 즉각 허락하고 다른 물건도 주었습니다. 그 물품의 이름은 장계 뒤에 기록하였습니다. ...
■임신년 : 인조 10년(1632년)
○11월 9일 금 나라 차사가 말하기를, “마땅히 형제의 맹약을 고쳐 군신의 맹약으로 맺어야 하며, 사신도 천사(天使)의 예로써 대접해야 하오.”하며, 그는 황금 만 냥ㆍ백금 만 냥ㆍ5색포 10만 동(同)ㆍ흰 모시베 1만 동ㆍ정병(精兵) 3만 명ㆍ전마(戰馬) 3천 필을 요구하였다.
■계유년 : 인조 11년(1633년)
○11월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처음으로 돈을 쓰게 하고 본청으로 하여금 주조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김기종(金起宗)이 계청한 것이었다.
■갑술년 : 인조 12년(1634년)
○4월 금 나라 차사가 서울에 오니 임금께서 불러서 만나 보았다.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데 쓸 3결포(三結布)와 각 항의 물건 다수를 내게 하여 제때에 올려보냈다.
○이문웅(李文雄)이 이수백(李守白)을 도성 안에서 목 베어 죽였다. 이문웅은 이중로(李重老)의 아들이다. 갑자년 봄에 이괄(李适)이 저탄(猪灘)에 이르렀는데, 이중로는 해서 방어사(海西防禦使)로서 강을 지켰다. 이수백은 적의 선봉이 되어 이중로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중로와 박영신(朴英臣) 등을 참수하였는데, 이북(利北)에서 패전하자 이괄의 목을 베어 항복하니 조정에서 그 죄를 용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면을 받아 배소(配所)에서 돌아오니 이문웅이 대낮에 그를 목 베었다.
■을해년 : 인조 13년(1635년)
○10월 15일 암행어사를 각 도에 파견하여 관리들의 정치의 잘잘못을 염탐하게 하였다. 본도의 어사 조경(趙絅)의 장계에 의하여 순천 부사(順天府使) 정지우(鄭之羽), 낙안 군수(樂安郡守) 안위(安偉), 광양 현감(光陽縣監) 이동명(李東明) 등 5ㆍ6인을 파면하여 내치고, 순창 군수(淳昌郡守) 임탄(林坦)을 잡아갔다.
2. 속잡록 4(續雜錄四)
■병자년 : 인조 14년(1636년)
○2월 20일 금국 차사를 맞을 영후관(迎候官) 이숙(李淑)이 벽제로 나갔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정묘년에 화친을 허락한 것은 그저 얽어매 두자는 계획에서 나온 일이었는데, 그 후 10년 사이에 욕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도 이럭저럭 시일만 보내면서 일찍이 싸워서 지키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재물을 주어 달래는 것만을 일삼으며 국가의 존망을 저 조그마한 오랑캐의 희로(喜怒)에다 맡겨 버리니, 아, 고금 천하에 나라를 요행만 바라는 입장에 두고서 능히 장구한 복을 누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오랑캐 차사가 싸 가지고 온 국서(國書)에 대하여는 비록 그 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변신(邊臣)과 문답한 것을 들어 보면 너무도 거칠고 거만하며 더구나 참람되이 황제 칭호를 쓰는 데에 이르러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바입니다. 저놈들이 우리 나라에서 대의를 들어 배척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아니하면서도 감히 이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내는 데는 그 속셈을 이미 알 수 있으니, 앞으로 닥쳐올 일이 십분 염려됩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조석을 보장할 수 없는데, 상하가 아무렇지 않게 조금도 격려하는 뜻이 없이 마치 앉아서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 같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실로 통곡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뉘우치고 깨다를 계기가 바로 오늘에 있으니 진작시킬 책임을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오랑캐 차사가 사관에 당도하면 엄한 말로 거절하여 대의를 밝히시고 더욱 분발하는 뜻을 격려하여 방어하는 책임으로 삼으시면 중외(中外)의 인심이 어찌 솟구쳐 움직이지 아니하오리까. 충의의 선비가 모두 전하를 위하여 한번 결사전(決死戰)을 벌이고자 할 것이니 강약(强弱)과 승패는 따질 바 아닙니다. 그러하오니 조정에서 국서에 회답할 적에는 명백한 사연으로 대의를 들어 책하여 자강(自强)의 길을 마련하십시오.”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정온(鄭蘊 1569-1641)이 차자(箚子)하기를, “빨리 원수(元帥)를 보내어 방어할 계책을 지휘하고 움츠러들어 후퇴하는 행동은 하지 말게 하며, 일국의 무사가 모두 제장(諸將)의 수하에 모였으니 여러 군에서 포수를 뽑아 내어 그 반을 원수에게 주어서 아예 정묘년에 늙은 원수(元帥)가 강도(江都)에서 하던 짓과 같은 것이 없게 하고, 전하께서는 친히 수레를 몰아 송도(松都)로 진주하시어 장병을 독려하여 의기를 진작시키시옵소서.”하였다.
○29일 대신의 인대(引對)가 있자 영상(領相)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이번에 오랑캐 차사가 들어왔을 때 외부의 인심이 조정에서 대의를 들어 배척하고 거절한 것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의혹이 없지 아니하오니, 8도에 유시를 내려서 명백히 알게 해서 충의의 마음을 격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좋은 말이다.”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갑자기 정묘년의 변을 만나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임시 기미(羈縻) 정책을 허용한 것인데, 그 동안 10년 사이로 그놈들의 욕심이 한이 없어 공갈이 날로 심하니, 이는 진실로 우리 나라가 전에 당해 보지 못한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 위로 성명(聖明)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을 머금고 쓰라림을 참아 가며 한 번 분발하여 이 치욕을 씻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이 오랑캐가 더욱더 창궐(猖獗)하여 감히 참호(僭號 황제가 되겠다는 것)의 설을 내걸고 화의(和議)를 통하자고 칭탁하니 이 어찌 우리 나라 군신(君臣)으로서 이 말을 차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강약(强弱)과 존망(存亡)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의로 결단하여 그 글을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였으며 엄중히 그 말을 배척하셨던 것입니다. 오랑캐 차사들은 여러 날을 두고 요청했으나 끝내 말을 붙이지 못하고 성이 나서 하직도 없이 도망가는 지경에 이르니, 도성(都城)의 인사들이 함께 듣고 보아서 비록 전쟁의 화가 조석에 박두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쾌하게 여기는 터이니, 사방에서 만약 조정이 이러한 바른 의논이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면 반드시 격동하고 분발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함께 일어날 것이니, 어찌 원근과 귀천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전부터 국가에서 오랑캐 변란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먼저 민간에 고유(告諭)하는 글을 내렸으니, 지금 이 뜻으로써 여러 도에 유시를 내려서 충의의 선비들에게 각기 지략을 짜내게 하고 용감한 사람들에게 자원하여 종군하게 해서 기어이 이 국난을 극복하도록 하시옵소서.”하였다. 김류(金瑬 1571-1648)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오랑캐와 화친을 하고서도 능히 10년을 보전한 일이 드물었습니다. 적이 갑자기 참호(僭號)를 일컫고 사신을 보낸 것은 그 의도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에서 이미 배척하고 거절하였으니, 반드시 조석간에 병란을 받게 될 우려가 있으니 마땅히 전심전력하여 방어할 따름입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아뢰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서관(西關)에서 결정되게 되었으니 안주(安州)ㆍ철옹(鐵甕)ㆍ자모(慈母) 등의 성에는 모두 중신(重臣)을 배치하고 대장(大將)으로써 지키게 하며, 또 중신을 평양에 보내되 만일 머뭇거리고 규율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처단하여야 합니다. 또 우리 나라에서 대의를 들어 오랑캐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장차 병화를 입을 우려가 있으니 명 나라에 주문(奏聞)하여 군신의 대의를 밝히시옵소서. 듣건대 진홍범(陳洪範)이 방금 여순(旅順)에 있다 하오니 공문을 내어 급한 사정을 알리면 비록 와서 구원은 못 할지라도 성원의 호응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좋은 말이다.”하였다.
○9월 14일 평안도(平安道)에서는 무과(武科)에 입격한 자가 1만 2백 34명인데, 조총(鳥銃)으로 입격한 자가 7백여 명이었다. 명 나라 조정의 뜻에 의하여 사람을 심양(瀋陽)에 보내서 염탐하였다
○합계하기를, “나라를 계획하는 도리는 반드시 먼저 대의를 밝혀야 하고 사특한 수작을 부려서는 안 되는데 지금 듣기에 지경연(知經筵)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일찍이 석상(席上)에서 금한(金汗)을 청한(淸汗)이라 일렀다 하니, 이는 잘못된 말입니다. 저놈들이 청(淸)이라 국호(國號)를 정한 것은 실로 우연한 칭호가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게 불러 주면 이는 그 참호(僭號)를 허여한 것이니 만연되는 폐단이 어디인들 아니 미치오리까. 최명길이 몸소 훈구(勳舊)의 중신(重臣)이 되어 가지고서 공론이 한창 일어나는 날을 당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감히 차마 못 할 말로써 우러러 성상 앞을 더럽혔으니, 그 방자하고 기탄없음이 진실로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가 또 말하기를, ‘국가의 대사는 심복(心腹)의 대신과 비밀리에 논의해야 하니, 승지(承旨)나 내관이라 하더라도 물리쳐야 한다.’ 하였으니,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온단 말입니까. 승지란 왕의 후설(喉舌) 노릇을 하는 친신(親臣)으로서 명령을 내고 들이므로 한 시각이라도 임금의 곁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지금 최명길이 감히 물리쳐야 한다고 말을 하니 그 심리가 어디에 있는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대신이 서로 세전(細氈)의 위에서 모의하는 것은 실로 군국(軍國)의 중대사로 광명정대한 일인데, 승지에게 숨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이목을 격리시켜 보고 들을 수 없게 만들려는 것은, 임금의 총명을 엄폐하고 반드시 자기 마음먹은 대로 실행해 보자는 것이니, 만약 그 말이 세상에 행해지게 된다면, 국가에 미치는 화가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옛날 대간(大奸)의 행위도 이에 지나지 아니하오니, 청컨대 명령을 내리셔 관직을 삭탈(削奪)하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판윤(判尹)이 청(淸)이란 새 칭호를 쓰자고 청한 것은 사례(事例)로 보아 당연하나, 그가 비밀리 의논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은 아마도 경솔한 자가 대사를 함부로 누설시킬까 염려해서일 것이다. 만약 그대들이 말한 대로라면, 옛날의 장량(張良)ㆍ진평(陳平)도 모두 만고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이 사람은 원훈(元勳)의 중신(重臣)으로서 허명(虛名)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실질적인 일만을 힘쓰며 충성과 계려(計慮)는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데, 그대들이 이 두어 마디 말을 가지고 모함하여 죄를 만들어서 다시 등대(登對)하지 못하게 하려 드니, 그 계획이 너무도 엉성하다 하겠다. 지난번에, ‘사정(私情)에 따라 자기 당을 두둔하지 말라.’는 교서(敎書)를 내려 경계하고 신칙하였는데 그 후 두어 달도 못 가서 또 마음가짐이 이와 같으니 오늘날 국사를 생각하면 한심하다 하겠다.”하였다.
○11월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박인범(朴仁範) 등이 격문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오랑캐놈들이 발동할 것은 조석에 있습니다. 합빙(合氷)한 뒤에 불의의 경보가 있다면 아래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하는 일이 어렵고 급한 처지에 놓이는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에 지난날 삼남(三南) 및 강원도(江原道)에 나누어 정한 선운(先運) 정초군(精抄軍) 5천과 후운(後運) 1만 1천 3백 90명은 이미 단속(團束)되었으니, 경상도(慶尙道) 좌ㆍ우 병사(兵使)와 전라도(全羅道)ㆍ충청도(忠淸道)의 병사와 강원도(江原道)춘천 영장(春川營將)은 12월 10일 전으로 각기 소요될 기계(器械)를 가지고 국경에 진주하여, 얼음이 풀리기 전까지 변란에 대비하게 하여, 본관(本官)으로부터 국경에 당도할 때는 경유하는 각 관에서 요(料)를 내어 공급하게 하고, 국경에 주둔하는 날에는 각기 본관에서 그 군사의 수효에 따라 식량을 운반하여 나누어 주며, 또 진주하는 날부터는 항시 조련(操鍊)하여 완급(緩急)에 대비하게 하고, 만약 기계가 정교하지 못하거나 조련이 근간(勤幹)하지 못하거나 군사를 놓아 함부로 해를 끼치는 일이 있을 때는, 주장(主將)이 중죄를 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을 주어 내려보내서 유시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줄 아뢰옵니다.”하였다.
○ 박인범(朴仁範)이 들어갈 때 오랑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조선이 우리를 따라 함께 강남(江南)을 도모하기로 하고, 우리와 화친을 끊자고 주장한 신하와 왕자(王子)를 볼모로 들여보내 주면 서로간에 믿음이 있게 되어 다시 화친을 정할 것이며, 예단(禮單)등속(等屬)은 1년에 한 차례로 한다.”하므로, 소역(小譯)이 답하기를, “여러 가지 말들이 모두 의외의 말이지만 왕자와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한 신하를 들여보내라는 말에 이르러는 귀로 차마 듣지 못하겠으니 우리 나라에 전달할 수 없소.”하였더니, 용골대가 발끈 안색이 변하여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말하기를, “왕자와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한 신하만 들여보내 주면 비록 군사가 압록강에 다다랐을지라도 즉시 정지시키고 혼인(婚姻)을 맺어 길이 서로 좋게 지낼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한(汗)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할 것이다. 이미 군사도 정돈되었으니 너희들에게야 어찌 감히 속이겠느냐.”하므로, 소역(小譯) 등이 답하기를, “왕자와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한 신하를 들여보내는 일일랑 다시 말하지 마시오. 우리 나라가 본래 예의의 나라라 칭하여 서로 사귀는 친구 사이에 있어서도 정이 만약 절친하다면 함께 혼인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우리 두 나라는 형제가 되기로 맹약하여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벌써 형제가 되었는데 지금 또 혼인을 청한다면 될 말이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것이오.”하였더니, 용골대는 다시 말하지 아니하고 갔다가 즉시 돌아와서 예물을 주고 가므로 소역(小譯)도 5리 밖으로 나왔는데 역관(譯官) 김돌시(金乭屎)가 쫓아오며 말하기를, “또 한 가지 할 말이 있으니 다시 듣고 가라.”하였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본즉 용골대ㆍ마부대 두 오랑캐가 따라와 말하기를, “우리 한(汗)의 말이 전일 받아본 편지 가운데 화친을 끊으려는 의사가 다분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인을 하자는 말까지 내서 서로 믿음을 갖자는 것이었지, 절대 진담은 아니니 너희들은 그리 알고 가라.”하였다.
○12월 11일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이 9일에 성첩(成貼)하여 치계하기를, “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하더니 이날 저녁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강을 건너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도(倍道)로 빨리 전진하고 있습니다.”하였다. 12일에 용골대가 5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서울에 당도하여 강화(講和)하자고 말을 하므로 조정에서는 예전 병조(兵曹)에다 두고 대접하는데 그 기색을 보니 전날과 같지 아니하였다. 이날 저녁에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으로부터 장계가 들어왔는데, “적의 기병이 이미 안주(安州)에 당도하여 군사를 지휘해서 포위하려고 하다가 도로 군사를 해산시키고 서울로 향하였습니다.”했다. 급한 경보가 이와 같은데도 조보(朝報)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들어 아는 자가 없었다.
○13일 정오에 장계가 들어오고 저물녘에 또 들어왔는데 적의 기병이 평양에 당도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도성에는 인심이 흉흉해져 도망해 흩어졌다.
14일 새벽에 장계가 들어왔는데, 적의 기병이 이미 중화(中和)에 당도했다고 하였다. 이날 저녁에 적병이 장단(長湍)에 당도하였다. 부사(府使) 황직(黃稷)과 군민(軍民)이 뜻밖에 적을 만나자 모두 사로잡혔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적군의 대열에 편입되어 그 건복(巾服)을 입고 전구(前驅)가 되어 나아갔다.
○14일 조정에서는 한성 판윤 김경징(金慶徵)으로 도검사(都檢使)를 삼고 참판 이민구(李敏求)를 먼저 강도(江都)로 보내어 배 나루 등에 관한 일을 검찰하게 하였다. 원임(原任) 윤방(尹昉)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동궁(東宮)의 빈전(嬪殿)과 원손(元孫) 봉림(鳳林)ㆍ인평(麟坪) 두 대군(大君)과 그 부인(夫人)을 모시고 강도로 가게 하였다. 온 조정의 경상(卿相)들이 모두 강도가 견고하다고 여기고 부모 처자를 남보다 먼저 들여보내려고 했다. 이날 큰눈이 내렸는데 적병은 이미 파주(坡州)에 도착하였다. 용골대는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숭례문(崇禮門) 밖에다 진을 쳤다. 조정에서는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쳐온 것을 알고 동궁과 더불어 남대문으로 달려 나가니 날은 이미 미시ㆍ신시였다. 주상 전하는 문루(門樓) 위에 좌정하고 백관(百官)들은 말을 타고 섰는데 탐졸(探卒)이 달려와 고하기를, “적병이 이미 연서(延曙)를 지났습니다.”하므로, 곧장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정(申景禎)에게 모화관(慕華館)에 진을 치게 하였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허둥지둥 얼굴빛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최명길(崔鳴吉)이 들어와 주상 전하 앞에 아뢰기를, “신이 이경직(李慶稷)과 함께 적의 진영에 가서 화친을 간청해서 그 날랜 서슬을 완화시키겠사오니 이때를 틈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차하시옵소서.”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그렇게 하겠다.”하고, 곧장 말을 돌리는데 동궁의 말고삐를 잡은 놈이 이미 도주하고 없어서 급히 다른 사람을 불렀으나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친히 채찍을 잡고 떠나서 구리재[銅峴]를 넘어 수구문(水口門)으로 나가는데 군색하고 급박하게 달려가는 형상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전후의 사대(射隊)ㆍ기휘(旗麾)ㆍ의장(儀仗)이 모두 분리되어 서로 잃고 성중의 남녀들은 맨발로 걸어서 어가(御駕)와 서로 뒤섞이고, 부자ㆍ부부ㆍ형제ㆍ노비들은 서로 떨어져서 분주히 달리며 길가에 넘어지고 자빠지며 곡성이 진동하였다. 승여(乘輿)의 말이 울자 친히 칼을 뽑아 쳐 버리고 다른 말을 타고 남한산성으로 달아나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사람은 주리고 말은 지쳐서 걸음을 재촉할 도리가 없었다. 어가(御駕) 앞에 선 선도(先導) 5ㆍ6명이 거의 성문에 이르자 들사슴이 길을 가로질러 달아났다. 한 황문(黃門)이 말하기를, “이것은 길한 징조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래지 않아 환궁하실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묻기를, “어째서 길한 징조라고 하느냐?”하자, 그가 대답해 아뢰기를, “지난날 공산(公山)에 행차하실 때에 이런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하였다. 2경(二更)에 비로소 성에 들어갔다. 최명길이 적장(賊將)을 보고서 군사가 온 이유를 묻고 화호(和好)하자는 뜻으로 타이르니, 답하기를, “우리는 맹약을 어긴 것이 아니다. 너희 나라가 먼저 화친을 끊었으니 너희 임금을 보고서 그 까닭을 힐문하려는 것이다.”하므로, 최명길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계시니 용이하게 뵈올 수 없다.”하였다. 이어 그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가 보고 화친하여 좋게 지내자는 말을 하였더니 자못 순한 말로 대답하였고 또 적의 군사가 와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하였다. 조정에서는 큰 적이 들어오기 전에 강도(江都)로 옮기려고, 15일에 닭이 울자, 대가(大駕)가 남문으로 나가서 도보로 겨우 5리쯤 지점에 당도하니, 얼음길이 극히 험하여 옥보(玉步)가 미끌리므로 기체(氣體)가 불안하여 부득이 도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이 또 아뢰기를, “저놈들 말로는, ‘우리들의 이번 걸음은 오로지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너희 나라는 인민과 촌락이 온통 비고 주상이 파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만약 화친을 하고 싶거든 왕자(王子)ㆍ대신과 척화(斥和)하는 사람을 보내라. 그렇게 하면 마땅히 이로부터 돌아가겠다.’ 하며, 또 살육은 절대 하지 않겠다 하옵니다.”하였다. 조정에서는 호부(戶部)의 관원을 서울로 들여보내어 무고(武庫)의 물품을 가져와 화친하는 물자로 삼게 하고 또 각 부의 관원 한 사람씩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주관하는 물자를 지키게 하였다. 적병이 모화관(慕華館)으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와서 진을 치고 또 5ㆍ6진영은 성 안에 머무르다가 동대문 밖에 나와 진을 쳤는데, 기치와 검극(劍戟)을 휘두르며 군악으로 떠들어대서 이목을 놀라 당황하게 하며, 성중의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아니하고 출입 내왕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되, 다만 소ㆍ말을 보면 빼앗고 어여쁜 여자는 잡아갔다.
○ 도원수 김자점(金自點)ㆍ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안주(安州)에서 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이 지나간 뒤에 출병하여 산 고을을 경유해서 관동(關東)으로 향하는데, 중로에서 적을 만나 신경원은 잡혀갔다.
○ 적이 차츰 남한산성 아래에 이르러 오니 광주(廣州) 백성들은 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미처 옮겨 피하지도 못하고 앉아서 죽기만 기다렸다. 신시(申時)에 서방에서 해가 둘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선전관(宣傳官) 충청 수사(忠淸水使)를 보내어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강도(江都)의 나루를 파수하게 하였다.
○16일 이른 아침에 오랑캐 용골대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산성을 육박하여 산봉우리로 흩어져 올라가서 진을 나누어 말을 달려 돌격하면서도 성 아래 백성들에게는 조금도 침범하지 아니하며, 혹시 담배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서 피우곤 하더니, 저물녘에 이르러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보내어 복병하고 비로소 약탈을 자행하였다. 서울 내외의 적이 줄을 대어 강을 건너와서 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때에 광주읍을 산성으로 옮기고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머물러 있으면서 조치하였다. 이때에 이가(二駕 주상ㆍ동궁)가 입성한 다음 4명의 대장에게 군대를 나누어 파수하게 하였는데 서쪽에서 남쪽까지는 신경인(申景裀)이 맡고, 남쪽에서 동쪽까지는 구굉(具宏)이 맡고, 동쪽에서 북쪽까지는 신경정(申景?)이 맡아서 사졸을 격려하며 밤낮으로 방비하였다. 조정에서는 가함(假銜 임시 직함을 빌린 것) 대신 심집(沈諿)과 왕제(王弟) 능봉군(陵蓬君)을 적의 진영으로 보내어 화친을 맺으려고 하니, 적진에서 대답하기를, “우리는 본시 왕제를 말하지 않고 왕자를 말하였으니 반드시 왕자를 얻은 뒤에야 돌아가겠다.”하므로, 심집이 말하기를, “왕자가 지금 복을 벗지 못했으니 먼 길을 떠날 수는 없다.”하고, 이어 순한 말로 타일렀다.
○17일 정오에 적병이 남문(南門) 밖에 당도하니 체부(體府) 김류(金瑬)가 즉시 이시백(李時白)을 곤장 치고 분명하게 척후(斥候)하지 못했다고 책하고 이어 문을 닫고 성을 지켰다. 그리고 주상께서 친히 순찰하였다. 조정에서는 또 좌상(左相) 홍서봉(洪瑞鳳) 및 한여직(韓汝稷)을 보내어 적진에 가서 적을 달래어 말하기를, “왕자가 현재 강도에 있으니 인솔해 와서 보내려고 한다.”하니, 대답하기를, “반드시 왕자를 얻은 뒤라야 화친을 허락하겠다.”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주상전하께 아뢰기를, “만약 일이 급박하오면 신이 마땅히 나가겠습니다.”하니, 주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또한 눈물만 흘리셨는데 신하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 없었다. 성 안에는 훈련(訓鍊)어영군(御營軍)과 광주(廣州)ㆍ수원(水原)ㆍ이천(利川)ㆍ양주(楊州)ㆍ여주(驪州) 등에서 수합(收合)된 군사가 모두 1만 8천여 명이 되고 성이 험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성을 굳게 지키고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성을 등지고 한번 결전을 벌이고자 하는데, 조정에서는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주상께서 또 친히 성을 순시하고 망월대(望月臺)에 앉아서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겠다.”하니, 이에 중의(衆議)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䂓)가 호남ㆍ영남에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오랑캐가 서울로 침범하여 주상과 동궁께서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시자 적의 군사가 사방으로 포위하여 무릇 명령이 통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내 군병을 징발하여 급히 영솔하고 근왕(勤王)하도록 하라.”하였다. 적병이 성을 포위하기 전에 선전관(宣傳官)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달려가서 삼남(三南)에 유시를 전갈하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하게 하였다.
○ 제도(諸道) 사민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나라가 신하가 되어 명 나라 조정을 섬긴 지 지금 2백 년이 되었고 명 나라가 천지처럼 덮어 주고 길러 준 은혜는 임진년(1592, 선조 25)에 이르러 극에 달했으니 이는 만고에 변할 수 없는 대의다. 저 서쪽 오랑캐놈들이 중국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우리 나라로서는 의리상 중국과 같이 그 놈들을 원수로 삼아야 하는데, 정묘년(1627, 인조 5) 변란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명 나라에 주달하고 임시 기미(羈縻)를 허락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온 나라 사람의 목숨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오랑캐놈들이 참람되이 황제라 칭하기까지 하고 우리와 화친을 통하기를 강요하여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러는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그 사신을 배척하였으니, 이것은 다만 만고 군신(君臣)의 대의를 뿌리박으려는 것에서였다. 내가 종시 민생을 위하고 명 나라를 위한 것이 저 일성(日星)과 같이 밝은 것은 온 나라 사민들이 모두 다 알고 있으리라. 이 오랑캐가 갑자기 흉악을 부려 군사를 이끌고 저돌적으로 나오므로, 나는 남한산성으로 나와 주둔하여 기어이 이 성을 사수(死守)하려고 한다. 존망의 형세가 호흡하는 사이에 결정짓게 되었으니, 너희 사민들은 모두 함께 명 나라의 은택을 받은 처지라서 화친함에 있어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 적이 오래되었는데, 하물며 지금 군부(君父)의 위박한 화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충의의 선비가 몸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시기가 아니냐. 아, 나는 오직 지혜가 밝지 못하고 인(仁)이 넓지 못하여 너희 사민을 저버린 적은 있지만, 이번 이 화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내가 자초한 것이 아니라 차마 군신의 대의를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과 이 의리는 천지 상하에 통하는데, 너희들도 어찌 차마 군신의 의를 무시하고 나의 급난(急難)을 구원하지 않겠느냐. 마땅히 각기 지혜와 힘을 분발하여 의병을 규합하기도 하고 군량과 기계를 준비하기도 해서 용맹을 떨치고 북으로 올라와 큰 난리를 깨끗이 맑히고 강상(綱常)을 뿌리내리며 공명을 세우면 어찌 쾌하지 않을까보냐.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고시한다.”하였다.
○24일 큰눈이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덮여 천지가 캄캄해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관원을 명하여 날이 개기를 빌었다. 졸병 한 사람이 와서 어전(御前)에 청하기를, “이 적을 제압하기 용이하온데 그럴 만한 장수가 없습니다. 주의(紬衣)나 금의(錦衣)를 입은 사람으로 장수를 삼지 않은 뒤에야 적을 쳐부술 수 있습니다.”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밖으로 나가서 말을 하라.”하고, 침전(寢殿)의 지의(地衣)와 의창군(義昌君)이 바친 산양피(山羊皮)로 만든 이불을 다 끌어내서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섬거적을 깔고 앉아서 향을 피우며 하느님께 축수하며 그대로 밤을 새니 홍포(紅袍)가 다 젖었다. 정원(政院)에서 임금께 들어가시자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장병의 말들이 모두 굶주려 죽고, 피란하여 성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자녀를 버리는 참혹한 형상은 차마 볼 수 없었다.
○25일 주상이 친히 호군(犒軍)하시고 이르기를, “국가의 재물이 다 떨어져서 성대히 장만하지 못했으니 주찬(酒饌)이 비록 박하더라도 너희들은 다 먹도록 하라.”하니, 장병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 없었다.
○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이 밤을 틈타 군사를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경유하여 들어가 고함을 치며 포를 터뜨려 크게 적을 놀라게 하니, 적의 진중이 불안에 떨면서 모두 달아났다가 이튿날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 내어 죽이니,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에 우선 피해 있던 사람치고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 적이 성 안에 있는 좌우 행랑과 공관(公館)을 모조리 불태웠다.
○29일 성 안에서 군사를 북문으로 내보내니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척하였다. 우리 군사가 적의 군막을 불지르고 소 세 마리와 말 세 마리를 빼앗아 돌아오는데 적의 군사가 삼면에서 말을 달려들어와 마구 찍어 대니 우리 군사는 죽은 자가 무려 수백 명이었다. 원수부(元帥府)의 군관 이원길(李元吉) 등 30여 명이 다 죽었다.
○29일 청 나라 한(汗)이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을 경유하여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래서 사령(沙嶺)에서 한강(漢江)까지 연이어 진을 치고 또 성 안으로 들어와 동대문 밖을 나가서 주둔하여 모였는데 그 수효가 한량이 없었다. 놈들은 깃발을 휘날리고 무기를 번득이며 풍악으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뛰노는데 그 꼴이란 형언할 수 없었다. 오후에 적의 기병이 잇따라 강을 건너서 전진하여 산성을 육박하였다.
■정축년 : 인조 15년(1637년)
○1월 3일 김류(金瑬)가 최명길(崔鳴吉)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뜻이 영공(令公)과 서로 같지만 선비들의 논란을 어찌한단 말이오.”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차라리 만고의 죄인이 될지언정 차마 군부(君父)를 반드시 망할 곳에 둘 수는 없지 않소.”하고, 이에 국서(國書)를 지어 바로 청(淸)의 연호(年號)를 썼다. 대사헌(大司憲) 김수현(金壽賢)은 힘써 다투는데 오직 정온(鄭蘊)ㆍ김상헌(金尙憲)이 싸워 지킬 것을 주장했다. 홍서봉이 국서를 가지고 청진(淸陣)에 가니, 청장(淸將)이 답하기를, “몽고 왕자가 창성(昌城)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분명 진중에 당도할 것이니, 그가 오기를 기다려서 서로 상의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회보하겠다.”하였다.
○13일 대전(大殿)ㆍ동전(東殿)이 성을 순시하여 동문에서 남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홍서봉ㆍ윤휘ㆍ허한 등이 나와서 산꼭대기에 앉았노라니 용골대ㆍ마부대와 아지호(阿之好)ㆍ정명수(鄭明水)ㆍ김돌시(金乭屎)ㆍ김여호(金汝毫)가 나와서 양편이 서로 읍하고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난날 맹약을 파기한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가? 너희에게 있는가?”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진실로 잘못이 있었다.”하였다. 마부대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와 싸우지 않는가?”하니, 허한이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큰 나라와 맞붙어 싸우겠는가.”하였다. 용골대 등이 국서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도로 나와서 말하기를, “이미 들어가 계(啓)하였으니 계가 내려오면 비록 밤중이라도 즉시 회보하겠다. 이 뜻을 서문(西門) 군사에게 말하라. 내가 사람을 시켜 즉시 통부하게 하겠다.”하니, 홍서봉은, “그렇게 하겠다.”말하고 성 안으로 돌아왔다.
○15일 전주에 모신 영정을 무주(茂朱)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옮겨 모셨다.
○17일 청인이 급히 대신을 청하므로 홍서봉 등이 나갔다. 청장(淸將)이 답서(答書)를 내주었는데, 말단에 이르기를, “살고 싶거든 성을 나와 귀명(歸命)을 하고, 죽고 싶거든 성을 나와 한 번 결전을 벌여서 황천(皇天)의 명령을 들으라.”하였다. 대개 그 답서 가운데 쓰인 말이란 귀로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청장이 말하기를, “네 임금께 받들어 올리고 이대로 행동하라.”하므로, 홍서봉이 말하기를, “답서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으니 그 대략이나마 들어 보기를 원한다.”하니, 용골대ㆍ마부대 등이 좌우를 물리치고 최명길(崔鳴吉)에게 이야기하며 또 편지의 대략과 뇌물을 보여 주면서 용골대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큰 죄가 있을 것이니 삼가 입 밖에 내지 말라.”하고, 또 이르기를, “네 나라 문서에는 모두 우리를 적이라 칭하였으니 형제의 의가 과연 이러한가?”하므로, 홍서봉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귀국 땅에 침범하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면 귀국 사람도 반드시 적이라 칭할 것이다.”하였다. 마부대가 또 말하기를, “네 나라에서 우리를 오랑캐라 이른다니 장례원(掌隷院)에 질정하기를 청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얼음 위로 배를 끌고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갈 예정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19일과 29일이 가장 길하니 장차 결전을 벌이겠다.”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갈 협박하는 말이었다.
○19일 최명길이 또 국서를 지어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니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빼앗아 찢어 버리고 이어 통곡을 했다.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들어와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비록 만고의 청명(淸名)을 얻을지라도 장차 두 분 전하를 어느 땅에 모셔 두겠는가?”하니, 김상헌이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바야흐로 부체찰사가 되었으니 오직 마땅히 한 번 싸울 뿐이거늘 무엇 때문에 화친을 일삼는가?”하니, 이성구가 말하기를, “오늘 사세로 보아 싸워야 옳겠는가? 화친해야 옳겠는가? 영공(令公)의 뜻이 이와 같다면 어찌 청진(淸陣)에 나가서 자신이 화친을 배척했다고 밝히지 않는가?”하니, 김상헌이 말하기를, “영공이 나를 잡아서 적에게 넘겨 주려는가?”하였다. 이성구가 나가니 동양위(東陽尉)가 칼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영공이 화친의 의논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마땅히 이 칼을 뽑아서 베겠노라.”하였다. 오후에 홍서봉이 병이 나서 이홍주(李弘冑)로 대신 우상(右相)을 삼았다. 최명길이 국서를 가지고 나가니, 용골대ㆍ마부대가 받아서 보았는데 성에서 나간다는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서계는 주달할 수가 없다.”하므로, 이홍주 등이 따라주기 어렵다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마땅히 힘써 도모해서 알려 줄 터이니 문 안에 가서 기다리라.”하였다. 이홍주 등이 그 말을 믿고서 돌아와 기다렸으나 밤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일 새벽에 청인이 급히 부르므로 이홍주 등이 나가니, 청인이 말하기를, “척화(斥和)한 사람을 내보내 주면 당장에 포위망을 해제하겠으니 들어가서 여쭈어 결정하라.”하였다. 이홍주가 말하기를, “척화(斥和)를 맨 먼저 제창한 홍익한(洪翼漢)이 그 죄로써 멀리 귀양갔다.”하니, 용골대가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홍주 등이 돌아왔다.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이 대죄(待罪)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화친을 배척하자는 주장으로 상소하였사오니 적의 진에 나가 죽고자 하옵니다.”하였다. 두어 자나 많은 눈이 내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대다수 얼어 죽었다.
○22일 동궁(東宮)이 내관을 불러 말하기를, “사세가 급박하다. 나는 형제간이 세 사람이고 또 아들 하나까지 낳았으니 종묘 사직을 받들 수 있은즉 비록 죽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장차 성을 나가겠다는 뜻으로 비국(備局)에 말하라.”하니, 비국은 즉시 이조(吏曹)ㆍ병조(兵曹)에게 척화(斥和)한 사람을 출두시키게 하였다. 정온(鄭蘊)이 또 차자를 올려 나가기를 청하였다. 이날 적병이 육지(陸地)로 배를 운행하여 갑곶(甲串)에 이르러 먼저 호준포(虎蹲砲) 세 자루를 쏘아 수군 26척과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ㆍ유수(留守)장신(張紳)ㆍ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ㆍ우후(虞候) 변이척(邊以惕)이 모두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적이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사람 없는 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남문에 들이닥치니 대신 김상용(金尙容)과 홍명형(洪命亨)ㆍ심현(沈俔)ㆍ이시직(李時稷)ㆍ송시영(宋時榮) 등이 모두 자결하여 죽었다. 윤방(尹昉)은 종묘 사직을 버리고 갔으며, 비빈(妃嬪)은 상민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여염집에 숨었는데 내관이 찾아 냈고, 한흥일(韓興一)ㆍ여이징(呂爾徵) 등은 다 나와 항복하였다. 성 안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니 적이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화친하는 일을 위하여 온 것이니 놀라지 말라. 또 군졸들이 얼고 굶주릴 것이니 마땅히 주식을 먹어야겠다.”하고, 곧 소고기와 술을 주어 먹게 하였다. 적이 또 말하기를, “성 안을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 한쪽은 조선 사람이 살고, 한쪽은 우리 군사가 살 것이다.”하여, 그 말과 같이 하니 또 두 대군(大君)과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종묘 사직의 신주를 어디에 모셨느냐고 묻기까지 하니 묻어 두었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묻을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오래지 않아서 마땅히 도로 봉안(奉安)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적이 제 군사를 독려하여 성호(城壕)를 헐어 버리고 행궁(行宮) 관사를 불태우고 곧 빈전(嬪殿)과 두 대군과 부인을 인솔함과 동시에 잡혀 있는 상하 남녀를 나오게 하였다. 원손(元孫)은 외숙(外叔) 강문성(姜文星)이 내관 김인(金仁)과 더불어 교대하여 등에 업고 바닷길로 나와 작은 배를 얻어 바다를 건너다가 민광훈(閔光勳)ㆍ송국택(宋國澤)을 만나서 함께 배웅하여 교동(喬桐)을 건너 마침내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맨 처음 적이 강도(江都)에 들어오던 날에 김경징(金慶徵)ㆍ장신(張紳)은 어미를 버리고 먼저 달아났으며, 섬 안에 들어와 있는 여러 사람은 다 가속을 버리고 달아나서 모두 잡혀가거나 죽었다. 영상(領相) 김류(金瑬)의 집에서는 절사(節死)한 부인이 세 사람인데 즉 영상의 부인ㆍ김경징의 부인ㆍ김진표(金震標)의 처였고 잡혀간 사람으로는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俊謙)의 집에서 열한 사람, 한명욱(韓明勗)의 처ㆍ정백창(鄭百昌)의 부인ㆍ여이징(呂爾徵)의 부인,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집에서 열두 사람, 그리고 신익융(申翊隆)의 처ㆍ정선흥(鄭善興)의 처ㆍ김반(金槃)의 부인이었는데, 김반의 아들 익겸(益兼)은 죽었다. 이성구(李聖求)의 부인은 죽고 그 장자와 차자는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왔으며 나머지 두 아들은 죽고, 김상용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 처첩ㆍ이지항(李之恒)의 처와 세 아들이 모두 죽었다. 윤방은 사로잡혀 갔다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나왔으며, 가족이 사로잡혀서 행방불명이 된 자가 20여 명이었다. 이명한(李明漢)은 죽고 이소한(李昭漢)은 포로가 되었고, 이경엄(李景嚴)은 피해를 입었으며, 한여직의 부인도 포로가 되었다. 조익(趙翼)은 처음부터 호종(扈從)하지 아니하고 강도로 들어왔다가 변란이 일어나자 도망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참판(參判) 이상길(李尙吉) 역시 피해를 입었으며, 이시직(李時稷)은 시임(時任)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서 처음에 대군을 호종하여 강도로 들어왔다가 두 대군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칼에 엎드려 죽었다. 그는 그 아들에게 유서(遺書)하기를, “장강(長江)이 천험(天險)을 상실하여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취한 장수는 겁이 나서 벌벌 떨면서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구차하게 유지하려 드니, 파수는 와해되고 만백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했다.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 조만간에 또 함락을 당할 것이니, 의리상 구차히 살 수 없으므로 기꺼이 자결하려 한다.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었으니 아무에게도 부끄럼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다치게 하지 말고 돌아가서 유해(遺骸)를 장사하고, 노모(老母)를 잘 봉양해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의탁하여 영영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유원(遺願)은 네가 잘 계승하는 것에 있다.”하였다. 처음에 경기(京畿) 연도의 여러 고을 백성들이 가속을 거느리고 다 강도로 들어왔다가 적병이 강을 건너오게 되자 모두 마니산(摩尼山)으로 들어갔는데, 적이 연일 수색하여 몰고 주봉(主峯)까지 가서 다 죽이고 잡아가곤 하였다.
○23일 전교(傳敎)하기를, “성을 지키던 군사들 가운데 천인(賤人)을 면하고 직책을 받은 자는 아울러 복호(復戶)하고, 전란이 평정된 뒤에는 각기 기술에 따라 널리 여러 가지 과거를 보인다는 일을 체찰사(體察使)에게 말하여 알리라.”하였다. 최명길이 또 국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인즉, 내일 새벽에 척화(斥和)한 사람을 잡아 보내서 폐하의 처분을 듣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우상(右相) 이홍주(李弘冑)가 가지고 나가 니, 적이 말하기를, “용골대ㆍ마부대두 장군이 한강의 진에 나갔으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이홍주가 돌아왔다. 밤 3경에 적의 군사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한 부대는 망월대(望月臺)를 침범하고 한 부대는 동문(東門)을 침범하고, 한 부대는 서암문(西暗門)을 침범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바야흐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순시하며 경계하던 선전관(宣傳官)이 서암문에 당도하여 적이 침범한 사실을 알고 무사(武士)를 발로 차서 잠을 깨게 하니 무사가 일어나서, “적이 왔다.”고 크게 외치자 군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서 계엄(戒嚴)하고 변에 대비하였다. 적이 먼저 허수아비[偶人] 전술을 써서 시험하는데 형세가 장차 성을 넘어 들어올 모양이므로 수어사(守禦使)가 활을 가지고 군사들과 더불어 힘을 모아 항거하며 싸우다가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이른 아침에 보니 붉은 피가 흥건하고 운제(雲梯)ㆍ갑주(甲冑)ㆍ활ㆍ칼 등속이 사방에 흩어지고 떨어져 있었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세 곳을 다 쳐서 물리쳤다. 장병들이 모두 심사가 산란하여 성을 버리고 행궁(行宮)에 나와 큰 소리로 체찰사를 부르며 말하기를, “척화(斥和)한 사람을 내보내기가 어렵거든 그들로 장수를 삼아 적을 치게 하시오.”하니, 체찰사가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물러가서 성을 지키라.”하였다.
○본도(전라도) 가운데 영군(營軍) 2천여 명이 여산(礪山)에 있었는데, 초저녁에 고함을 치며 포를 터뜨리고 나와서 종사관(從事官)을 부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우리를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편안히 앉아서 사태의 추이만 관망하고 있느냐. 너는 구리로 만든 머리에 쇠로 만든 몸뚱이가 아닐 것이니 마땅히 먼저 너를 베어 뭇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들고서 적을 치겠다.”하고서, 일시에 흩어져서 한길에 있는 파발막을 다 불질렀다. 종사관은 전날 밤에 바깥 마을에 나가서 하루를 묵고 사관으로 돌아왔기에 다행히 면했다. 이 뒤부터는 유지경(柳持敬)과 함께 사관에 머무르고 군사를 엄밀히 배치하여 수직하였다.
○체부 별장(體府別將) 김익룡(金翼龍)이 나가서 공주(公州)를 염탐해 보니 적군이 와서 금강(錦江) 북쪽 언덕에 주둔하고 부서진 교량(橋梁)을 보수한 다음 강을 건너 성에 들어가 낱낱이 수색하다가 한 부대는 궁원(弓院)에 머물러 도적질을 하고, 한 부대는 목천(木川)ㆍ청주(淸州) 등지로 향하여 매우 심하게 노략질을 하였다. 이시방(李時昉)이 청주에 있다가 적군이 불의에 돌격하여 오므로 간신히 빠져 나와서 옥천(沃川)으로 달아났다. 적군이 문의(文義)에 당도하니 이시방은 덕유산(德裕山)으로 달아났다.
○26일 포성이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장병들이 또 궐문(闕門) 밖에 모여 크게 외치기를, “척화(斥和)한 사람을 어찌하여 내보내지 아니합니까. 그 양반들이 척화한 것을 보면 반드시 용력(勇力)이 많은 모양이니 원컨대 장수로 삼아 저 북성(北城) 위에 두어 주십시오.”하니, 체부(體府)가 말하기를, “척화를 맨 먼저 부르짖은 홍익한(洪翼漢)을 이미 청인에게 말했는데, 청인이 응답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 밖에 또 따라주기 어려운 청이 있는 모양인데, 너희들의 이른바 척화한 사람이란 또 누구를 지적하는 것인가?”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글을 읽은 재상들도 남의 성명을 잘 기억 못 하는데 무식한 무사(武士)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배부르게 밥먹고 따뜻한 온돌방에 앉았으니 성 한쪽이 적의 포탄에 맞아서 부서지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요?”하고, 궐내로 들어가 곧장 임금께 주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상전하께서 도승지를 명하여 유시하니 장병들이 그제야 물러갔다. 적진에서 횡이포(橫珥砲)를 터뜨려서 성이 많이 파괴되었으니, 군사의 사기가 저상되고 군정(軍情)이 크게 변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홍서봉(洪瑞鳳) 등이 나가서 동궁(東宮)이 성을 나올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결코 되지 않는다.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던들 너희 나라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하였다. 이는 대개 당초 최명길(崔鳴吉)에게 말한 뜻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또 강도(江都)가 함락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며 이어 진원군(晉原君)과 내관 나산업(羅山業)을 나오게 하여 보이며, 또 한흥일(韓興一)의 장계와 두 대군(大君)의 서장(書狀)을 꺼내어 주고 이어 말하기를, “빈전(嬪殿)은 본국 사람에게 모셔 오게 하고, 우리 군사가 10리 밖에서 호위하며 가면서 오늘은 김포(金浦)에서 자고, 명일에는 마땅히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영감(令監)의 대부인께서도 나이 높으시지만 역시 평안히 모시고 올 것이니 모름지기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홍서봉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온 조정의 사부로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본도 여산(礪山)에서 뒤에 모인 군사가 또 마구 외치며 무너져 흩어지니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도 모두 도망왔다. 종사(從事) 김광혁(金光赫)은 5ㆍ6명의 기병을 데리고 익산(益山)으로 달아났다가 이어 태인(泰仁)으로 달아나니 본 고을 사람들이 거느린 군관과 휘종(麾從)들을 몽둥이로 두들겨서 쫓았다. 김광혁은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달아났다.
○ 전주 부윤(全州府尹) 오서(吳瑞)가 판관(判官)을 시켜 관아의 권속을 거느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사창(司倉)관청(官廳)과 무고(武庫)형옥(刑獄)이 일시에 개방되어 관가에서 소용하던 잡물이 씻은 듯이 다 없어지고, 성 안의 사람들은 크게 혼란하여 마구 달아나서 경(京)ㆍ호(湖)의 피란민과 서로 길에서 섞이니 사방 길이 메워져서 발에 밟혀 넘어지는 자가 많았다.
○27일 조정에서는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기별을 저놈들의 속임수라 여기고 반신반의 중에 있으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내가 어찌 내 자식의 친필을 모를까보냐. 종묘 사직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하고, 드디어 출성(出城)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양사(兩司)에서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최명길에게 국서를 짓게 하여 홍서봉이 가지고 나가니, 마부대가 말하기를, “네 임금이 간신히 외로운 성을 지키며 구차히 살기를 바라더니 지금에야 나오려고 하니 실로 너희 나라로서 다행이다. 마땅히 황제에게 품달하여 날짜를 정해서 회보도 하려니와 또 군사도 철수하도록 하겠다.”하였다. 이날 저녁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을 뒤덮었다.
○적병이 이산(尼山)ㆍ은진(恩津)에 당도하여 사방으로 흩어져서 노략질하고 이어 계룡산(鷄龍山)을 탐색하니, 사로잡힌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또 적병 5ㆍ6기가 말을 달려 은진에서 여산(礪山)황화정(皇華亭)에 당도하였다가 이어 익산(益山)ㆍ용안(龍安)으로 내려가서 전주(全州)나매약촌(羅每若村)에 이르렀는데, 병세(兵勢)가 심히 고단하여 횡행하지는 못하고 다만 말과 소 두서너 마리를 약탈해 갔다.
○28일 조정에서는 적이라 칭한 문서를 뒤져내서 불에 태웠다. ...이윽고 용골대ㆍ마부대가 칙서(勅書)를 가지고 나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남조(南朝 명 나라를 말한 것)의 칙서를 받을 적에 의식을 어떻게 하였느냐?”하므로,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 받든 자는 남으로 향하여 서 있으면 배신(陪臣)은 곧 꿇어앉아 받는다.”하였다. 홍서봉이 칙서를 받고 꿇었다. 용골대 등은 동벽(東壁)으로 홍서봉은 서벽으로 정한 뒤에 용골대가 말하기를, “근일 몹시 차가운데 노고스럽지 아니한가?”하므로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칙서를 받음이 마치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것 같은데 무슨 노고가 있겠는가.”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마전포(麻田浦) 가에다 이미 수항단(受降檀)을 쌓아 놓았으니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시거든 명일에 이곳으로 와서 예를 행하는 것이 좋겠다. 항복할 때는 으레 팔을 뒤로 얽어매고 수레에 상여를 싣고 구슬을 입에 무는 등속의 허다한 절차가 있는데, 지금은 모두 생략하게 될 것이다.”하므로, 홍서봉이 묻기를, “국왕이 항상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계시니, 이 옷을 입으셔도 되겠는가?”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곤룡포야 입을 수 없지 않는가.”하며, 최명길이 입고 있는 남의(藍衣)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마땅히 이와 같은 의복을 입고 오시게 하라.”하였다. 홍서봉이 묻기를, “어느 문을 경유하여 나갈까? 남쪽 문을 경유하여 나갈 것인가?”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남문은 정문이라 죄 있는 사람이 출입할 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예를 행한 뒤에는 황제께서 곧장 양주(楊州)를 경유하여 환궁(還宮)하고자 하시니, 너희 임금은 거느리고 가시지는 않을 것인즉, 너희 임금은 당연히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후로는 절대로 남조(南朝)와 다시 교통하지 말라.”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다시 교통하겠는가.”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돌아갈 때에 가도(椵島)를 공격하려고 하니 수군과 포수를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자(世子)와 대군(大君) 한 사람과 삼공(三公)ㆍ육경(六卿)의 자제 각각 한 사람씩을 거느리고 가기로 이미 완전히 정하였다. 세자는 비록 어버이를 떠나서 멀리 가지만 우리 황제께서 인자하시니 반드시 잘 돌보아 주실 것이며, 만약 근친(覲親)을 하고 싶을 적에는 번을 교체하여 왕래하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국보(國寶 인장)는 의당 다시 주조하여 줄 것이고, 세공(歲貢)에 있어서는 백미(白米) 1만 석ㆍ백금(白金) 1천 냥ㆍ백저포(白苧布) 1천 필ㆍ호피(虎皮) 3백 장ㆍ황금(黃金) 1백 근인데 1년에 세 차례씩 바치고, 군대를 철수하는 일에 대하여는 이 맹약이 있기 전에 3천 군대를 하삼도에 보내고, 3만 군대를 남북도에 보냈었는데, 이미 전령하여 불렀으니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당연히 철수할 것이다. 맹약을 정한 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은 전부 다시 돌려보낼 것이고, 맹약을 맺기 전에 사로잡힌 사람은 강을 건너간 자라도 일일이 찾아서 돌려보낼 것이다.”하니, 홍서봉은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용골대ㆍ마부대는 홍서봉ㆍ최명길 등과 더불어 웃고 말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는데 마치 본래부터 사귄 사람같이 하였다.
○29일 밤 2경에 서남쪽 하늘에서 동요하는 현상이 있었다. 최명길(崔鳴吉)ㆍ이영달(李英達) 등이 척화(斥和)한 사람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을 잡아서 내보내니 주상전하는 문을 닫고 통곡하다가 한 시각이 지나서야 그쳤다. 홍익한 등 세 사람이 한(汗)의 앞으로 들어가니, 한이 묻기를,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두 나라 사이의 화친을 배척하였느냐? 이왕 화친하는 것을 배척했으면 어째서 나를 공격하지 아니하였느냐?”하니, 세 사람이 말하기를, “화친하는 것은 배척하지 않고 다만 사신을 보내는 일만 저지시켰습니다.”하였다. 한은 크게 웃더니 그 포승을 풀고 관(冠)까지 주며 최명길을 불러 앉히고 크게 음식을 장만해서 상을 들여왔는데, 진수 성찬이 모두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었다. 또 표구(豹裘) 각 한 벌씩을 주니 최명길 등이 입고 구배례(九拜禮)를 거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내일 국왕이 성을 나올 때에 시종하는 사람은 5백 명으로 제한하고 그 밖에는 수효를 보태지 말라.”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30일 주상전하께서 성을 나갔다. 남한산성이 포위를 당한 지 47일 만에 패하였다. ...적이 금안장을 갖춘 큰 말로 두 전하를 모시고 우리 군사 5백 명과 자기 군사 5백 명으로 옹위하여 가는데 호종한 여러 신하는 다 도보로 걸어갔다. 처음에 우리 사신들이 내왕하여 화친을 약속할 때 수달피로 만든 큰 차일(遮日)을 아래 뜰에 치고 사면은 모두 초피장(貂皮帳)을 두르고 백양피(白羊皮) 요를 가득히 깔고 열지어 앉고서 부인을 두 줄로 앞에 세웠는데 한편은 비녀를 꽂은 미색이요, 한편은 머리를 딴 미색으로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었다. 그 수효는 자그만치 수백 명에 달하여 풍악을 울리고 가무를 벌이며 술잔이 오갔다. 이에 이르러 두 전하가 진에 당도하자 한(汗)은 주홍칠을 한 교의(交椅)를 삼층의 대상에 설치하여 그곳에 앉고, 우리 주상은 가운데 층에, 세자는 아래 층에 세워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게 하며, 종신(從臣)들은 아래층에서 절을 하게 하였다.
예가 끝나자 자수의(刺繡衣)와 표구(豹裘)각 한 벌과 백마(白馬) 한 필을 내어 상으로 하사하고 또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잔치를 베풀고 파하였다. 두 줄로 늘어선 부인들이 종신(從臣)에게 묻기를, “화친을 약속한 뒤에는 우리들도 은혜를 입습니까?”하니, 모른다고 대답하자 일시에 울음을 터뜨려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한(汗)의 분부에 따라 주상께서는 단지 인평대군(麟平大君)과 더불어 청 나라 호위를 거느리고 궁으로 돌아오고, 세자 및 빈(嬪)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그 부인은 청(淸)의 진에 머물러 있었다.
○2월 13일 청 나라 한(汗)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데 사로잡힌 남녀를 앞에 몰고 가니 곡성이 진동하였다. 주상전하는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실성(失聲) 통곡하니, 한(汗)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 나라에 수년 동안 머물러 두고 성신(誠信)을 시험한 뒤에 돌려보내겠다.”하였다. 적의 군사가 네 길을 나누어 출발하는데, 공(孔)ㆍ경(耿) 두 적은 수로(水路)를 경유하여 가도(椵島)로 가고, 몽고(蒙古) 군사 7ㆍ8만이 강원도(江原道)를 경유하여 철령(鐵嶺)을 넘어 이어 두만강을 건너갔다. 적이 도중에서 서로 관계한 계집은 말에 태워 가고, 만약 업혀서 우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빼앗아 작대기에 꿰어서 던지니, 죽은 아이가 길가에 즐비하였다.
○3월 동궁(東宮)이 우리 나라 사람을 도망시켜 돌려보내고자 하여 항상 노상에서 병을 칭탁하고 서서히 가면서 눈물을 흘려 그치지 아니하니, 한(汗)이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어나서 길 걷는 노고를 모르다가 지금 비로소 먼 길을 걷자니 질병이 생길 것은 형편상 당연한 일이며, 또 따라온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니 온 나라가 텅 빌 것만 같은데 군부(君父)는 누가 있어서 임금 노릇을 할 것이며, 일용지공도 역시 나올 데가 없을 것이라, 이를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자연 슬픔을 억누르지 못합니다.”하였다.
한(汗)은 또 경기도 부근 남녀 5백 명을 덜어 내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이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니 나룻배 사공이 뱃삯을 내라고 지연시키고 도망해 돌아오는 우리 나라 사람이 역시 계속해서 많이 오니 청 나라 병사가 쫓아와서 놓여온 사람과 도망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살육하여 참혹한 형상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9일 청병(淸兵)이 가도(椵島)를 침공하여 함락시켰는데 우리 나라 장병들도 청병의 뒤를 따랐다.
○4월 동궁(東宮)이 장계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신이 강을 건너온 뒤로 더욱 참혹한 일이 있습니다. 강변에서 통원보(通遠堡)까지 5백여 리를 지나오는 동안 시체가 서로 겹쳐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 마음이 상하고 눈에 걸리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었습니다. 소신은 요동(遼東)을 건너온 뒤로 온갖 병이 연달아 침범하여 목숨이 조석에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는 소신이 살아 돌아올 것을 바라지 마시옵고, 종사(宗社)의 중임은 인평(麟平)에게 전적으로 맡겨 후사(後嗣)를 삼으시옵소서. 한(汗)이 통원보(通遠堡)에 와서 소신을 불러 놓고 술 석 잔을 주고 나서 소신더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니, 반드시 그 화답을 보내 오도록 곧 통문을 내라.’ 하였사온즉, 이 일을 조정에서 상의하여 처리하시옵소서.”하였다. 동궁이 그곳에 계시면서 날마다 조회하여 동궁은 한(汗)의 처소에 나가고, 빈(嬪)은 한실(汗室)에 나가는데, 출입 왕래할 적에 빈이 옷으로 얼굴을 덮고 다니니, 한이 말하기를, “이 땅에는 부인이 얼굴을 가리는 절차가 없다.”하고, 이어 그리 못하게 하였다.
■정축년 하 : 인조 15년(1637년)
○윤 4월 척화(斥和)를 주장한 홍익한(洪翼漢) 등 세 사람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다 심양(瀋陽)에서 죽었다.
○5월 광해군(光海君)을 제주도(濟州道)에 옮겨 안치(安置)하였다.
○11월 20일 청 나라 칙사(勅使)가 서울에 들어왔다. 상사(上使)는 용골대(龍骨大)이고, 부사(副使)는 몽고세자(蒙古世子)이고, 서장관(書狀官)은 중국에서 투항(投降)한 고학사(高學士)라고 부르는 자이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를 맞이하였다. 산대(山臺)놀이의 절차와 풍악과 기구는 명 나라 사신이 올 때와 꼭 같이 하였다. 의주(義州)에서 서울까지 가마를 타고 오는데, 거동ㆍ지공(支供)ㆍ대접(待接)은 모두 명 나라 조사(詔使)의 예에 의하였고, 조정에서는 남별궁(南別宮)에 관을 설치하였는데, 전일 명 나라 사신이 들었던 곳이다. 가지고 온 칙서(勅書)는 다음과 같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제(制)하노라. 천지는 차갑고 따스한 시령(時令)을 폈고, 제왕은 상주고 벌주는 공도(公道)를 잡았소. 배반함과 항복함이 떳떳함이 없으므로 은혜와 위엄이 다르게 내리오. 생각건대, 그대 나라 조선은 나의 이웃 나라에 속해 사신의 오고감이 아우와 형 같을 뿐만 아니었소. 짐(朕)은 금석 같은 굳은 맹약을 기대하였는데, 왕(王)은 갑자기 참상(參商)같이 멀어지려 했소. 우리의 신사(信使)를 거부하였고 나의 중신(重臣)을 해치려 하였으니, 왕이 실로 전쟁을 일으켰으므로 짐(朕)은 무력(武力)을 움직여 발동한 것이오. 비록 죄를 토벌하였으나 오직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소. 왕이 지금 전일의 그른 것을 뉘우쳤으니 짐이 어찌 왕의 전일의 악한 것을 생각하랴.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롭게 하여 봅시다. 이미 번병(藩屛)으로 정하였으니 마땅히 고명(誥命)을 내리노라. 이에 명 나라가 준 전국(傳國)의 인(印)을 녹여 없애고, 동문(同文)의 부인(符印)을 나누어 주노라. 특히 사신을 보내서 인(印)과 고명(誥命)을 싸가지고 가서 그대 모(某)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으니, 그대가 공손히 해서 나의 번병이 됨을 가상히 여김이오. 금장(金章)과 보책(寶冊)이 거듭 새롭고, 황하(黃河)가 되고 띠가 태산이 숫돌이 되도록 고치지 아니하리라. 한때의 명분을 세움에 천지에 사(私)가 없고, 만고의 강상(綱常)을 정하였으니 상하의 순서가 거꾸로 되지 않으리라. 왕은 마음으로 경계하고 옛 생각을 씻어서 대대로 떳떳한 조공을 닦을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해서 길이 평안한 몸을 보전하오. 공경하고 힘써서 짐의 명령을 폐하지 마시오.”하였다.
청국사신 3사람이 행차(行次)에 거느리고 온 수행원이 1백 20명이었는데, 사신이 대궐에 가기도 하고 임금이 혹 남별궁에 가기도 하여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으니 좌기(坐起)하는 절차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먼저 홍시(紅柿) 40바리를 요구하므로 가져다 주었고, 사신 3 사람에게 무녀(巫女)와 의녀(醫女)를 들여보냈더니, 옷을 빨가벗기고 몸을 세밀히 검사하여 조금이라도 점이나 흠집 흔적이 있으면 즉시 물리치고 다시 갈아서 넣게 하였으며, 퇴출당한 여자들은 그 밑에서 졸개들이 가로채서 붙잡고 내보내지 아니하였다. 용골대가 남한산성을 가서 보고 우리 나라에 명령해서 몇년 4월 전으로 살고지〔箭串〕에 대첩비(大捷碑)를 세우게 하고, 비에 새길 글은 자기 쪽에서 지어가지고 온다 하였다.
○30일 최명길이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한(汗)이 친히 나와서 접대하고 날마다 잔치를 즐겁게 하고 정의를 쏟아서 피차에 간격이 없게 되므로 볼모로 갔던 왕세자도 이번에 함께 돌려보낼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명 나라에서 온 배반한 장수들이 한(汗)에게 역설해서 아직 돌려보내지 못하게 했으므로 중지되고 말았다.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청 나라에서 청구하는 혼인(婚姻) 후보자는 오로지 조정에 벼슬하는 집들에만 책임을 지워도 옳지 않으니, 각 도의 사대부(士大夫) 집의 처자(處子)를 초괄(抄括)하여 청 나라와의 약속에 응하자.”하니, 임금도 그렇게 하라 하였다. 각 도 감사에 명령하여 그 도내의 처자를 조사하여 단자(單子)를 만들어 성책(成冊)한 후 기한까지 올려 보내도록 공문을 발송하였다.
12월 각도에 처자가 있는 집안에서는 청국에 끌려간다고 겁을 먹고 인심이 흉흉하고 분주하여 날마다 혼례를 거행하여 신랑의 행차가 길에 연이어졌는데도 오히려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때가 참으로 어느 때이길래 일마다 이와 같을까.
■무인년 : 인조 16년(1638년)
○1월 전라도의 처벌 받은 군인들이 서울로 향해서 떠났는데, 도계(道界)에 이르니 포(布)를 거두기로 정하였다는 공문(公文)이 내려와서 군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포는 한 집에서 11필씩 바치기로 되었다. 본부(本府)에는 해당되는 군졸이 80여 명이었다.
○청국에서 조총(鳥銃) 천 자루와 염초와 화약 천 근과 검은 각궁(角弓)과 편전(片箭)ㆍ장창(長鎗)ㆍ대검(大釼) 등 각 천 자루를 바치기를 기한을 정하여 왔으므로 이것을 준비하느라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강원도 처자(處子) 단자가 이달 20일까지 기한을 정하여 올리기로 되었으나 아직까지 한 장도 올리지 아니하니 극히 부당합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감사를 추고(推考)하여 빨리 독촉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소서.”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감사 관문(關文)에 의하면 병사(兵使)ㆍ수사(水使)와 우후(虞侯)ㆍ수령(守令)ㆍ찰방(察訪)ㆍ첨사(僉使)ㆍ만호(萬戶)와 각기 그 고을 안에 사는 사대부 집의 처자를 조사하였으나 한 사람도 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니, 지극히 부당한 말입니다. 다시 엄중히 조사하여 이달 안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게 하고, 그중에 처자의 나이를 가감하거나 끝까지 숨기고 있는 자는 그 가장 (家長)을 적발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리도록 공문을 보내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 청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담배를 아주 좋아하여 사절들이 갈 때마다 사상(私商)들이 무수히 싣고 갔는데, 이후에 담배로 화재가 나서 집 천여 호의 부락이 일시에 불탔다. 한(汗)이 크게 성내어 일체 담배 수입을 금지하고 범하는 자는 목을 베기로 하고, 이어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5월 29일 전라도에 배정된 처녀 시종비(處女侍從婢)는 6명인데, 전라도에서는 전부 기생으로 충당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본주(本州)에서는 배정된 한 명을 기생 애당춘(愛堂春)을 정하여 보내기로 하고, 행자(行資)로 관(官)에서 면포 한 동(同)을 주기로 하였다. 떠나갈 때 가는 기생은 물론이고 친족들이 창황히 통곡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주(全州)에 가서 자색이 못났다고 점퇴를 받고 나왔는데, 담양(潭陽) 여자로서 사촌 오빠와 몰래 간통하다가 방금 잡혀서 옥에 갇혀 있는 자를 대신 보냈다.
○6월 초5일 지난 임진 계사년과 정유년의 왜란(倭亂) 때에 각 도 여러 고을의 사대부의 처로서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의 남편들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을 올려 그 처와 이혼(離婚)하고 다시 장가들게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다. 조정의 의론이 혹은 그렇게 허가하는 것이 옳다 하고, 혹은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서로 시끄럽게 다투었는데, 선조(宣祖)는 허가할 수 없다고 하는 의론을 윤허하며, 이르기를, “이것은 음란하여 절개를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처자를 버릴 수는 없다.”하여, 이혼하고 다시 장가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병자년과 정축년 호란(胡亂)에도 각 도의 부인들이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가 많았는데, 역시 이혼하고 다시 장가 들어야 한다는 의론이 조정에서 일어나 허가하자, 허가하지 말자 하는 의론이 있었다. 성상이 선왕조에서 정한 전례대로 시행하도록 하여 이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명을 내렸다.
○7월 16일 진도독(陳都督)에게 주상이 자문(咨文)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조선 국왕은 우리 나라의 패망한 사정과 곡절을 자세히 진술하여 대감께 아뢰니 불쌍히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먼저 지난해 봄에 심양(瀋陽)에서 보내온 사람 용골대(龍骨大)가 여러 왕자와 몽고 왕자(蒙古王子)의 서간(書柬)을 가지고 와서 두 나라 사이의 칭호에 관하여 의논하자고 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였던 일들은 이미 앞서 자문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구름과 우레같이 쳐다보고 눈물로 목이 메어서 울먹이고 있으니, 우러러 생각하건대, 도독(都督)께서는 어진 마음과 의로운 기개로서 혹 어여삐 생각하고 민망하게 여겨서 행동을 양해하고 마음을 살펴주시는 것이 구구한 나의 소원이오. 정은 넘치고 말은 오그라져서 이를 바를 모르겠소.”하였다.
○신구 출신(新舊出身)으로 심양 가는 파발(擺撥)을 세웠다. 전라도 출신은 15일에 여산(礪山)에서 호군(犒軍)하였는데, 다른 도에서도 다 그렇게 하였다.
○8월 15일 양서 지방(兩西地方)의 5천 명 병졸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흩어지고 어떤 자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자도 있었다. 유림(柳琳)이 다만 무과 출신(武科出身) 수천 명만 거느리고 의주에서 장계(狀啓)하기를, “군졸들은 심양으로 들어갈 리가 만무하고, 신도 역시 우리 땅에서 죽고 싶습니다.”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병마를 속히 들여보내라고 독촉이 심하니, 유림이 하는 수 없이 남은 병졸을 이끌고서 강을 건너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또 전(前) 병사(兵使) 이시영(李時英)으로 장수를 삼아서 국내에 남아 있는 무관 출신을 초발(抄發)하여 앞서 도망간 병졸의 수를 보충하고, 아직 차지 못한 수는 기한을 정하여 더 보내기로 하였다.
○ 이번에 청국 사람들이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여러 나라에서 볼모로 잡아온 사람을 뽑아서 장수로 삼았다. 우리나라 봉림대군(鳳林大君)도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다.
○ 경기 지방과 호남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거지가 되어 각 시골 촌락에 돌아다니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치 지나간 계해(癸亥)년과 갑자(甲子)년의 기색과 같았다. 전라우도(全羅右道)에서는 3백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전주 부자 이도길(李道吉)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저렇게 죽으나 이렇게 죽으나 죽기는 같으니,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창고문을 열어젖뜨리고 쌀과 곡식을 퍼내서 싣고 가면서 말하기를, “풍년이 오기를 기다려 갚겠다.”하니, 주인 이도길이 금하지 못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공은(公銀)으로 속전(贖錢)을 주고 돌아온 자로부터 일일이 은을 받아들이는데, 사람 수효가 2천 3백여 명에 그중에서 이미 받아들인 것이 2천 7백여 냥인데, 유림과 박노가 전후에 가지고 갔고, 그 외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6백 9냥이요, 아직 받지 못한 것이 9백 70여 명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는 혹 간 곳을 몰라서 그 이웃에게 해가 미치고, 어떤 자는 본인 자신이 비록 있다 해도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곳도 없어서 그 돈을 바쳐 낼 도리가 없고, 어떤 자는 그 사이에 죽어 없어진 것도 있고, 혹은 그의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도 있어서 그 이름만 가지고서 돈을 받는다면 폐단이 많습니다. 대간(臺諫)의 아뢰는 바에 의하여 모두 탕감해 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은을 양서(兩西) 지방에 나누어 보내 그것으로 동(銅)ㆍ석(錫)ㆍ기치(旗幟) 등 잡물을 조비하는 자금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27일 사시(巳時)와 오시에 햇무리가 지다. 감사가 전주에 이르니, 굶주린 백성들이 길에 가득 찼으므로 감영(監營) 창고에 쌓아놓은 포(布)를 내어 차례대로 나누어 주어 식량을 사들일 자본으로 하고, 풍년이 오거든 갚으라 하였다.
○11월 서울에 살던 인물들이 모두 시골로 내려가서 다시 돌아와 살 의사가 없고, 조정에 벼슬하던 무리들도 다 사직한다는 글을 올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하나도 조정에 돌아오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서 독촉하여 오게 하였고, 또, “서울에 있지 않은 자는 벼슬길에 후보자로 주의(注擬)하지 않기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2월 청 나라 한(汗)이 지난 10월에 30만 병력을 이끌고 3로(三路)로 쳐들어갔는데, 한 부대를 거느리고, 요면(要冕)이 한 부대를 거느리고, 구왕자(九王子)가 한 부대를 거느렸다. 명 나라 국경까지 가서 요면(要冕) 등 두 장수는 바로 북경으로 향하고, 한(汗)은 금주위(錦州衛)로 갔는데, 지키는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수천 병력으로 맞서 싸우다가 거짓 패전한 것처럼 하면서 물러가서 연대(煙臺)로 달아나 들어가니, 한(汗)이 군사를 독려하여 추격하였다. 공(孔)과 경(耿)두 적이 앞에 있으면서 화구(火具)가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고 있을 무렵에 연대(煙臺) 위에서 빨강 옷 입은 자가 빨강 깃발을 들고서 세 번 휘두르고 또 재촉하는 북을 쳐서 신호로 하니, 졸지에 불이 일어나서 적의 진중 수십 리 안에는 초목이 다 타버리고 적병도 모두 잿더미로 타버렸다. 공(孔)과 경(耿)은 미리 달아나서 탈주하였고, 한(汗)은 뒤에 있어서 겨우 몸만 살아나서 소굴(巢窟)로 도망쳐 돌아왔다. 한다.
○회은군(懷恩君 : 왕족 덕인)의 딸이 심양에 들어갔는데, 한(汗)이 후궁에 들이니, 마침내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앞서 요면(要冕)이 한(汗)과 서로 의사가 맞지 않고 배반할 뜻이 있어서 일이 서로 어긋남이 많았는데, 그중에 피파각씨(皮巴各氏)라는 오랑캐가 요면의 뜻을 한(汗)에게 몰래 고하니, 한이 기뻐하여 즉시 회은군(懷恩君)의 딸을 피파각씨에게 주었다. 오랑캐 풍속에 공이 많은 자에게는 상으로 그 처를 주는 풍습이 있다. 이 오랑캐가 근일에 장인과 장모를 본다고 우리나라에 나온다는 말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