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송도기이(이덕형)

청담(靑潭) 2018. 6. 29. 10:41



송도기이(松都記異) 

이덕형(李德泂) : 1566~154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호군 이오(李澳)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奉敎)·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崇政)으로 오르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崇祿)으로 품계가 올라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 1561-1613과는 다른 인물이다.



▣송도기이(松都記異)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에 내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세대가 멀어져서 고려조의 남은 풍속이 변하고 바뀌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장사하고 이익을 좇는 습관만은 전에 비하여 더욱 성해졌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넉넉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이를만 하다. 상가(商街)의 풍속은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기 때문에 사기로 소송하는 것이 많을 듯한데도, 순후한 운치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서 문서 처리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매양 긴 여름에는 문서를 다 처리하여도 해는 항상 점심 때밖에 되지 않았다. 아전들이 물러가고 사람들이 흩어지면, 남은 해가 아직도 길어서 반드시 베개에 의지하여 졸게 되는데, 조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지만 졸음을 물리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는 것은 본성이 즐겨하지 않는 것이며, 명산이나 경치 좋은 곳도 늙다보니 흥취가 점점 엷어만 가므로, 때로는 혹 한두 사람 향로(鄕老)들을 불러다가 민간의 병폐를 묻기도 하고, 또 겸해서 항간의 풍속이나 가담(街談)ㆍ야화(野話)들을 캐내기도 하니, 깨달은 바가 자못 많았다.

또 나는 만력(萬曆) 갑진년(1604, 선조 37)에 본부(本府)의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었는데, 일이 끝나지 않아 거의 열흘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은 안사내(安四耐)ㆍ진주옹(陳主翁) 등으로 나이가 모두 80여 세였다. 그들은 근고(近古)의 견문이 넓고 일을 경험한 것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교목(喬木)의 유로(遺老)들이었다. 나는 그때 이들 두 늙은이에게서 새롭고 이상한 말을 얻어들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30여 년이 되었으니 아득히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일과 같다. 항상 신구의 설화를 기록하여 파적거리로 삼았다. 생각건대 전조(前朝)의 지난 사적은 모두 방책(方策)에 실려 있지만 백년 동안의 옛일은 사실과 거짓이 혼동되었으므로 중고(中古) 이래의 일 중에서 두드러지게 이목을 끄는 것을 뽑아서 소설(小說)을 만들어 심심풀이로 보도록 한다. 말은 비록 속스럽지만 역시 명교(名敎)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신미년(1631, 인조 9) 중하(仲夏)에 죽천병옹(竹泉病翁)은 송악(松岳) 아헌(衙軒)에서 쓴다.


진이(眞伊 : 16세기 전기)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이 꽤 자색이 아름다웠다.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로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요구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고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도 한 번 마셔 보아라.”

했는데, 마시고 보니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眞伊)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絶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유수(留守) 송공(宋公)(혹은 송염(宋?)이라고도 하고 혹은 송순(宋純)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이 처음 부임했을 적에 마침 절일(節日)을 당했다. 낭료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진랑(眞娘)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인(風流人)으로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다. 한 번 그녀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헛되이 얻는 것이 아니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款待)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名物)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들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으며, 붉게 분칠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한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眞娘)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光彩)가 사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손들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조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발[簾] 안에서 엿보고 전날과 같은 변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眞娘)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진랑은 매무새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래 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송공은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했다.

악공(樂工) 엄수(嚴守)는 나이가 70세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했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했다. 노래 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했다. 이때 조사(詔使)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들이 구경하는 자가 모두 모여들어 길 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두목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는데, 그는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너의 나라에 천하 절색(絶色)이 있구나.”

했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花潭先生 : 서경덕 1489-1546)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으니, 어찌 절대(絶代)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本府)의 어사(御史)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집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書吏) 진복(陳福)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했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러했던가?”

하니, 늙은이는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했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顚末)을 들었다.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이다.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본래 낙척(落拓)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고 나이 40여 세에 문음(門蔭)으로 비로소 송경(松京)의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었다. 이때 본부의 관료들이 마침 좋은 명절을 당했으므로 본부의 속관(屬官)들을 모두 청해다가 만월대에서 잔치를 열었다. 한공(韓公)도 여기에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공은 본래 웅호(雄豪)한 데 뜻이 있어 당시는 의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또한 모양도 내지 않았는데, 여러 손님 중엔 귀한 집 자제들이 많아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을 서로 숭상하는 터이므로, 그들은 한공의 행색을 깔보았다. 술이 얼큰하자 그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서울에 사는 친구들로서 고도(故都)에 와서 벼슬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런 좋은 놀이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서로 모여 만나기도 기약하기가 어려우니, 이제 마땅히 계(契)를 만들어서 길이 다음날에도 잘 지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했는데, 한공에게는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공이 말하기를,

“나도 거기에 참여하기를 원하오.”

했더니, 모든 손들은 이를 비웃었다. 좌중에 본래부터 한공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있어 유독 말하기를,

“오늘 한공이야말로 연작(燕雀) 중의 홍곡(鴻鵠)이다.”

했다. 이듬해에 한공은 좌명(佐命)의 원훈(元勳)이 되어 공명이 크게 빛났고 3ㆍ4년 이래에 훈공으로 개부(開府)가 되니 지위가 상공(上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 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모두 옛 계급에서 맴돌면서 한갓 한공의 풍성(風聲)을 우러러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한스럽게 여길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송도 사람들은 이것을 기이한 이야기로 여긴다. 예로부터 영웅 호걸의 선비도 품은 뜻을 펴지 못했을 때에는 판축(版築)에서 괴롭게 지내기도 하고, 남의 가랑이 밑을 참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풍운(風雲)이 한 번 모이면 하늘과 못같이 멀리 차이 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저들 귀하게 놀던 범상한 사람들이 띠끌 속에 이런 기이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는 것을 어찌 알았으랴? 세상의 세력을 믿고 남에게 거만하게 구는 자를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고 했는데, 이를 듣는 자는 배를 안고 웃었다.


○사문(斯文)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차식(車軾)의 아들로서 호는 오산(五山)이다. 문장에 능하고 더우기 시를 잘하여 장편(長篇)과 거작(巨作)을 별로 생각지도 않고서 끊기지 않고 줄줄 써 내려 갔는데, 구법(句法)이 웅건하므로 입에 오르내려 전해 외우는 자가 몹시 많았다. 중국 사신이 올때마다 제술관(製述官)으로 빈상(儐相)을 따라가서 시를 읊어 주고받는데, 만일 강운(强韻)이나 짓기 어려운 체제를 만나면, 반드시 차천로의 시를 내놓으면 중국 사신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고 탄복했다. 선묘(宣廟)가 인재를 길러서 시로써 세상에 울린 자가 많이 나왔으나 그 웅혼(雄渾)하고 부섬(富贍)한 것이 모두 차천로에게 미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그가 저술한 시문도 권질(卷秩)이 꽤 많았는데, 다만 사람됨이 우활해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직 마시고 먹고 글을 읊을 뿐이었다. 일찍이 알성과(謁聖科)에서 남을 대신하여 글을 지어 주었는데, 그 사람이 과연 장원했으나 일이 탄로가 나 그 과거가 취소되고 차천로는 옥에 갇히어 죄를 얻었다. 이 때문에 비방이 일어나서 드디어 불우하게 되어 벼슬이 겨우 4품으로 세상을 마쳤다. 그 아우 차운로(車雲輅)가 개성 교수(開城敎授)로 있었는데, 그때의 유수 조공 진(趙公振)이 제법 천문(天文)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운로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규성(奎星)이 광채를 잃었는데 이렇게 되면 문인(文人)이 반드시 죽는 법이요. 지금 세상에 문장으로는 그대의 백씨(伯氏)만한 이가 없으니, 혹시 이 별의 변괴가 백씨에게 맞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얼마 안있어 차천로가 과연 죽자 듣는 자들이 이상히 여겼다. 차천로가 만일 별의 정기를 타고 났다면 인품과 명위가 어찌 그다지도 천렬(賤劣)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가 타고 난 것은 다만 뛰어난 재주일 뿐으로, 시를 짓는 궁한 데에 주저앉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 애석한 일이다.


한호(韓濩 1543-1605)는 송도 사람으로 호는 석봉(石峰)인데, 필법(筆法)이 힘차고 아름다워 스스로 한 체(體)를 이루었다. 공사(公私)간의 비석이나 묘갈ㆍ병풍ㆍ족자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모두 보배로 여겨 간직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은 하늘이 낸 성인의 기질에다가 또 시ㆍ서ㆍ화에도 모두 묘법을 얻었는데, 그의 필적을 볼 때마다 탄식하기를,

“세상에 드문 특출한 재주다. 이 조그만 나라에 이런 기이한 재주가 태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했다. 중국에서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난 자도 역시 한호의 글씨를 보고는 놀라고 탄식함을 마지않으며 평가하기를,

“목마른 고래가 구렁에 나가는 것 같다.”

했는데, 이것은 그 글씨의 힘이 웅건함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사 가서 석봉의 이름이 천하에 전해졌다. 한호(韓濩)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제일 힘을 들인 글씨는 서화담(徐花潭)의 비석이다.”

했는데, 지금 그 인본(印本)을 보니 참으로 묘필(妙筆)이었다. 국조(國朝)에서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후의 서법(書法)은 한호로서 첫째를 삼는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근신하며, 한미한 데서 일어나서 글씨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벼슬은 겨우 군수에 이르고 죽었다.


○사문(斯文) 임제(林悌 1549-1587)는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일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송도를 지니다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진이(眞伊)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글이 호방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외워지고 있다. 임제는 일찍이 문재(文才)가 있고 협기(俠氣)가 있으며 남을 깔보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침내 예법을 아는 선비들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이 겨우 정랑(正郞)에 이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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