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송계만록(권응인)

청담(靑潭) 2018. 6. 27. 14:27


송계만록(松溪漫錄)

권응인(權應仁 : 1510년경~1588이후)


16세기 초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참판 권응정(權應挺)의 서제(庶弟)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제자로 시문에 능하였다.

권응인은 서류 출신인 탓에 서얼금고(서얼 출신은 벼슬에 재한을 두는 것)에 얽혀 벼슬은 겨우 한리학관(漢吏學官)에 머물고 말았다. 당대의 명문장가이다. 1562년(명종 17)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 나온다고 했을 때에 누구를 선위사(宣慰使)로 하여 응접케 하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조정에서 “전 한리학관(사역원소속 관리, 서얼 이달도 이 벼슬에 임명된 바 있음) 권응인은 글을 잘하여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지금 본도에 있으니 청컨대 관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역마로 달려 선위사의 행차에 끼어 좌우에서 일을 도와 급한 일을 구하는 자격으로 보냈으면 한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임금이 이것을 윤허하였을 정도였다.

권응인은 송대의 시풍이 유행하던 당시의 문단에서 그는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시평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에 있어 국내에서는 남명(南冥)조식(曺植)을 당대 제일이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가장 높이 숭상하였다.

권응인의 문명은 후일 영조 즉위년인 1725년(영조 1)에 정진교(鄭震僑)가 올린 상소문에서 조선조에 걸출했던 서얼출신 문인을 열거하는 가운데에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曺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林芑)·양대박(梁大樸)·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기문총화(記聞叢話)』·『자해필담(紫海筆談)』 등에 그와 청천(聽天)심수경(沈守慶)에 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권응인의 문집으로는 『송계집』이 있으며, 그밖에 저서로는 1588년(선조 21)경에 지은 『송계만록』 상하 2권이 있다. 『송계만록』의 상권에는 시화, 하권에는 시화 및 잡기·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계만록 상(松溪漫錄 上)

○옛날 한 부인의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는 다음과 같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千古興亡問可知

어떤 사람은 어우동(於宇同 ? -1480)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

○진천(晉川 진천은 봉호(封號)) 강혼(姜渾 1464-1519)이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깊이 정이 들어 절구(絶句) 삼장(三章)을 지어주었는데, 그 제이장에,

고야산 선인 옥설같은 이 흰 살결 / 姑射仙姿玉雪肌

새벽 창 금 거울에 나비 눈썹 그리누나 / 曉窓金鏡畫蛾眉

아침 술 반쯤 취해 얼굴이 붉어지니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에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네 / 東風吹鬢綠參差

하였다. 내가 그 기생을 보았을 때는 나이 이미 80이 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던 것이 이제는 흰 귀밑머리 흐트러지는 것[白參差]이 되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중국 사신 왕(王)씨가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가고, 홍재상(洪宰相) 인재(忍齋)공이 역시 원접사로 갔다. 환관(宦官) 천사도 함께 용만(龍灣)에 있었다. 호음이 홍 재상에게 주는 시의 셋째 연구에,

진지를 겨루어 기운 저상되니 의당 물러나야 하고 / 摩壘氣沮宜退舍

난초 향기 맡아 마음 꺾이니 함께 깃발 멈췄구나 / 襲蘭心折共停旄

내가 저(沮) 자가 음률[律]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공(公)이,

“쇠(衰) 가가 어떠냐?”

물었다. 내가,

“최(摧) 자만큼 힘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네가 옳다.”

하였다. 중국 사신에게 주는 시에,

접해와 진성 만여 리에 / 鰈海秦城餘萬里

몇 겹 구름 나무 놀을 격하였네 / 幾重雲樹隔煙微

라고, 하였다. 내가,

“운(雲) 자에 또 연(煙) 자를 붙여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운(雲) 자를 춘(春)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네 말이 옳다’하였다. 공은 시를 적을 때마다 반드시 나로 하여금 붓을 쥐게 하였고, 매번 글자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나에게 하문(下問)하여, 답한 것이 뜻에 맞으면 바로 고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내가 경성(京城)에 도착하여 춘(春) 자의 뜻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품평을 청하니, 유항(柳沆)이 말하기를,

“너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춘수(春樹)를 쓴 아래에는 운(雲) 자를 붙이는 것이 옳다마는 연(煙) 자는 본색어(本色語)가 아니다.”

하였다. 내가 탄복해 마지않았다. 운(雲) 자를 《황화집(皇華集)》에 적어 넣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인재(忍齋)는 이름이 홍섬(洪暹)이다.

○아계(鵝溪) 상공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나이 7~8세도 되기 전에 능히 큰 글자를 썼고, 이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종이 끝에 자국을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3세에 호서(湖西)의 향시(鄕試)를 보아 해원(解元 향시의 장원)이 되었으니, 천재가 아니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를 지목하기를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일찍 청운(靑雲)에 올라, 이름이 자자하더니, 40이 겨우 넘자 반열은 구극(九棘)에 올랐고, 수년이 못 되어 뛰어 홍화(弘化)에 오르고, 50에 정승이 되었으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는 재주와 명예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우리 동국(東國)에 무인(武人)으로 시에 능한 사람은 박휘겸(朴撝謙 15세기, 1449년 등용) 이후로 전혀 이름난 사람이 없다. 중묘조(中廟朝)에 중추(中樞) 이사증(李思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탐닉하는 버릇이 있었다. 함경 일도의 시판(詩板) 중에 상정(橡亭)이라 한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시는 혹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근세에 함양군(咸陽郡)에 한 무사가 있는데,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척(陟)이며, 스스로 호를 죽계(竹溪)라 한다. 그의 시에,

죽계의 늙은이는 벼슬을 마다 하고 / 竹溪窮老謝籫纓

이 누각에 누웠으니 병든 몸 가벼워라 / 臥着玆樓病骨輕

물새 한 울음에 산비도 멎을시고 / 水鳥一聲山雨歇

구름에 새어나온 저녁 놀 반쯤 밝았더라 / 漏雲殘照半邊明

하였다. 무인이라고 해서 가벼이 볼 수 없다.

○무릇 중국 사신이 평안 역관(平安驛館)에 올 때면, 동인(東人)의 시판(詩板)을 일체 떼어버리고, 단지 대동강(大同江) 선정(船亭)에 정지상(鄭知常)의,

비 갠 긴 둑에 풀빛은 짙은데 / 雨歇長堤草色多

라는 시만 남겨두었다. 호음 상공(湖陰相公)이 말하기를,

목은공(牧隱公 1328-1396)의 부벽루(浮碧樓) 시에,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 / 昨過永明寺

오늘 부벽루에 올랐네 / 今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바위는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한 것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발을 구르며 칭찬하였다. 이것이 정지상의 시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고, 이것 역시 남겨두고 떼지 않았다.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

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

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

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

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

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

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

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

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

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

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

말 통하려고 땅에 글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

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

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로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문데, 하물며 재인(才人)을 얻기 어려운 지금에랴? 옥봉(?-1592) 여도사(玉峯女道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낭군이 지방의 수령이 되어 공사로 서울에 갔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여자가 시를 지어 낭군에게 부쳤다.

싸우는 것은 비록 서생의 길과 다르지만 / 干戈縱異書生道

나라 근심으로 응당 머리 셀 것이네 / 憂國唯應鬢髮蒼

적을 칠 이때 곽거병을 생각하고 / 制敵此時思去病

오늘날 산가지 놀리는 것 장량을 생각하네 / 運籌今日憶張良

원성의 싸움 피는 산하를 붉게 물들이고 / 源城戰血山河赤

아보의 요망한 기운 일월도 누르스름 / 阿堡迷氛日月黃

서울 소식은 아직 오질 않으니 / 京洛音徽尙不達

창호의 봄빛 처량하네 / 滄湖春色亦悽涼

창호란 사는 곳의 물 이름이다. 그 낭군이 집에 돌아오자 또 한 절구를 적었다.

버드나무 강 언덕에 오마의 울음 소리 듣고 / 柳外江頭五馬嘶

반을 깨고 수심에 취하여 누각을 내릴 때라 / 半醒愁醉下樓時

봄꽃 붉은 빛이 야위어져 거울 보기 부끄러우나 / 春紅欲瘐羞看鏡

시험 삼아 매창 향해 반달 눈썹 그려보네 / 試畫梅窓却月眉

두 시는 청신 원활하고 장하고 고와서,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여 매우 가상하다. 그는 사문 조원(趙瑗 : 1544-1595)이 사랑하는 여인(소실)이었다.



▣송계만록 하(松溪漫錄 下)

○성청송(成聽松 수침(守琛 1493-1564))의 필법(筆法)은 가장 고기(古氣)가 있어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이후로는 그에 짝할 만한 이가 드물었다. 그런데 유독 호음(湖陰)이 좋아하니 않으며 말하기를,

“친구 아무개를 방문하고 싶으나 그 집에는 성모(成某)가 쓴 병풍이 있으므로 가지 않는다.”

하였다. 황고산(黃孤山)의 초서는 한때 제일이었는데, 오직 조송강(趙松岡)만이 좋아하지 않아서, 매양 남의 집에 가서 황고산의 글씨를 보면 반드시 그것을 치우고 나서 들어갔다. ‘성청송ㆍ황고산’ 두 분의 글씨는 비록 글 한 자(字)라도 반드시 보존하려 하는데, ‘정호음ㆍ조송강’ 두 분의 호오(好惡)는 사람들과 다르니, 무슨 까닭인가?

○재상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은 공용경(龔用卿)ㆍ오희맹(吳希孟)이 온다는 말을 듣고, 수개 월 전부터 장녕(張寧)의 60운(韻)을 가지고 미리 지어 다듬어두었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이르자, 심 재상은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먼저 내어보였다. 두 사신이 돌아갈 때 각각 보답하는 글을 요구하는데 가는 길이 바빴으므로 원접사 호음이 글을 쓸 겨를이 없어서 겨우 상사에게만 화답(和答)하였다. 그때에 안분(安分) 선생이 재상 조인규(趙仁奎)와 더불어 선위사(宣慰使)로 함께 갔다. 호음이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부사(副使)에게 화답하도록 하였더니, 안분은 붓을 잡고 시를 짓느라 정력을 이미 다하였는데, 조 재상은 기생을 끼고 실컷 마시고는 시를 짓는 데는 마음이 없었다. 안분이 사람을 시켜 엿보았더니, 밤중이 되도록 태연히 마시다가 닭이 울 제서야 취하여 침소에 누웠다. 안분이 몹시 편치 못하여 새벽에 자기의 원고를 소매에 넣고 자는 곳에 가서 붙들어 일으키고 준엄하게 책망하자, 조 재상이 붓을 멈추지 않고 잠깐 동안에 다 지었다. 실은 술을 마실 때 뱃속에 지어두었던 것이다. 비록 시가 간혹 하자(瑕疵)는 있었으나, 민첩함이 짝이 없어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한다. 안분이 말한 것이다.

○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올 때, 학사(學士)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종사관이 되었다. 백상루(百祥樓)에 올라가니 공(龔)공의 40운(韻) 배율(排律)이 걸려 있었다. 공이 그 운에 따라 즉석에서 지으니 마치 붓이 나는 듯하였다. 비록 이무기와 개미가 섞인 것[蛟螻之雜]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역시 한 기특한 재주였다.

○옛날, 문경 현감(聞慶縣監)이 통인(通引)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은 매우 한가하니 연구(聯句)나 지어볼까?”

하였다. 통인이 원[倅]에게 먼저 짓게 사양하였다. 원이 먼저 읊기를,

주흘산 앞에 곰이 논론한다 / 主屹山前能論論

하였다. 능(能)은 웅(熊)과 통해 썼으며, 논론(論論)은 곰이 노는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말이 떨어지자 통인이,

막동문 밖에 개가 몽몽 짓는다 / 莫同門外大蒙蒙

하였다. 대(大)는 견(犬)과 통용한 것이고, 몽몽(蒙蒙)은 개 짖는 소리인 것이다. 원이 말하기를,

“어떻게 개 견(犬) 자를 큰 대 자로 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또께서는 곰의 네 발을 끊어 쓰셨는데, 소인이 어찌 개의 귀 하나쯤 뗄 수 없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이 이가 시리도록 입을 벌리고 웃었다.

○사문 맹종인(孟宗仁)은 성질이 오활하고 정치하는 재주가 없었다. 정승(政丞) 권균(權鈞 1464-1526)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좌랑(佐郞) 이환(李芄)에게 말하기를,

“맹모(孟某)가 외직(外職)을 청하니, 어느 고을을 맡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니, 이환이 농으로 답하기를,

“백성이 없는 고을이 좋습니다.”

하였다. 그러다가 예산(禮山)에 원이 되어 갔는데, 몇 장의 소장(訴狀)이 들어온 것을 며칠을 두고 판결하지 못하고, 아전이 훔쳐갈까 두려워 창고에서 잠을 잤다. 몇 달 되지 않아 파직당하였다.

○조적암(曺適菴 조신(曺伸))은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배다른 아우다. 그는 책을 널리 읽었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시를 가장 잘 지었다. 성묘조(成廟朝)에 육승지(六承旨)가 동성(同聲)으로 추천하여 곧 소명(召命)을 받았다. 상이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더니, 그 시가 지극히 상의 뜻에 맞아, 동부 주부(東部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대간(臺諫)이 논핵(論劾)하여 중지시켜 사역원(司譯院)에 소속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연경(燕京)에 갈 때, 연산이 돈을 넉넉히 주면서 오색(五色) 비단을 사오게 하였다. 그런데 사오라는 것은 얻지 못하고, 대신 진주(眞珠)를 샀다. 고국에 돌아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환관(宦官)들과 꾀를 짰다. 환관들은 모두 조적암이 사부(師傅)로 있을 때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마음을 합하여 형벌을 면하게 할 방법을 모의하여 모두,

“임금께서 노함이 있으려면 아침부터 수염이 갑자기 뻗고 좋은 일이 있으려면 화평한 빛이 말과 얼굴에 나타나니, 우리들이 이것을 잘 살펴 글을 보낸 후에 들어와 배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조적암이 그 말대로 하여 뜰에 들어가 엎드려 배알하였다. 연산군이 묻기를,

“내가 구하던 것을 얻어 왔느냐?”

고 묻자, 대답하기를,

“구하지 못하여 진주[明珠]를 사왔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대단히 기뻐하며, 그것을 동반(銅盤)에 부우니, 그 광택이 햇빛같았다. 연산군이 손으로 집어 비빈(妃嬪)에게 나누어주고, 사섬시(司贍寺)의 무명[吉貝] 1백 50필을 상으로 주었다. 적암은 고향에 좋은 토지를 많이 샀다. 포악한 연산군도 그를 해치지 못했으며, 또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인생의 사생 화복이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 친우 4~5명과 함께 인동(仁同) 묘봉사(妙峯寺)에서 독서하였다. 하루는 어떤 중이 밖으로부터 와서 법당에 앉아 우리를 보기를 마치 천한 사람같이 보기에, 그 불손한 것을 꾸짖었더니, 중이 지팡이를 끼고 납의(衲衣)를 벗는 품이 마치 구타라도 할 것같았다. 내가 힘껏 중의 지팡이를 뺏으니, 중이 분을 풀지 못하고 바랑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절이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높은 산에 있는데, 저들이 이 절의 중들과 서로 짜고서 밤을 틈타서 독을 부린다면 우리들은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큰 절로 옮기면 안전할 것이다.’ 하고, 나서서 1리(里) 남짓 가니, 콩알만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절문에 닿기 전에 들이붓는 듯이 쏟아져 시냇물이 언덕을 넘었다. 다음날 들으니, 우리가 자던 방이 흙에 묻혔다 했다. 하늘이 일부러 이 중을 보내어 우리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한 것인지 모른다. 당시의 친우들이 잇달아 죽었고, 40년 후에 오직 나 혼자 남아 있으니, 내 명이 짧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나의 힘을 입어 살아난 것인지, 그 이치를 추측할 수 없다.

○‘세상 만사가 모두 운명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의 백씨 추부공(樞府公 권응정(權應挺 1498-1564))과 중씨 참판공(參判公 권응창(權應昌)1505-1568)은 정미년(1547, 명종 2) 봄에 벼슬을 잃고, 이해 가을에 호남(湖南)에 귀양갔다가, 그해 겨울에 서북(西北)에 옮겨졌다. 신해년 여름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가 계축년 봄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정사년 겨울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한번 좋고 한번 나쁜 것이 모두 같은 날이었다. 오행(五行)으로 미루어보면 같은 해에 난 사람이, 달과 날이 역시 같더라도 난 시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평생이 크게 달라지는 법인데, 두 분의 운명은 영화와 괴로움이 일마다 서로 같으니, 운명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중묘(中廟) 이후, 재상(宰相)으로 큰 복을 누려 높은 품질(品秩)에 오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재상 송흠(宋欽 1459-1547 89세)은 나이 90여 세에 벼슬이 1품에 이르고, 재상 이현보(李賢輔 1467-1555 89세)는 나이 89세에 벼슬이 1품에 이르고, 재상 송순(宋純 1493-1582 90세)은 나이 92세에 벼슬이 정2품에 이르렀으며, 재상 오겸(吳謙 1496-1582 87세)은 나이 89세에 벼슬이 1품에 이르고, 재상 정사룡(鄭士龍 1491-1570 80세)은 나이 81세에 벼슬이 1품에 이르고, 재상 홍섬(洪暹 1504-1585 82세)은 82세에 벼슬이 삼공에 이르고, 재상 원혼(元混 1496-1588 93세)은 나이 89세에 벼슬이 1품에 이르러 아직도 병 없이 지낸다. 향년 70이 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나이와 벼슬이 모두 높은 사람이란 적지 않겠는가? 원 재상(元宰相)은 92세에 죽었다.

○재상 오겸(吳謙)이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을 때, 온 고을이 은혜를 품어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떠난 뒤에 글을 써넣으려고 하였다. 공이 듣고는 거짓말로 부로(父老)들에게,

“나의 정치가 어찌 비를 세워줄 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무릇 비의 글은 사적과 부합하여야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가기 전에 쓰게 되면 내가 보아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 할 수 있다. 너희들이 비를 실어오면 내가 친히 보겠다.”

하니, 부로가 이 말을 믿고, 그 말대로 하였다. 공이 부로들을 물리치고 석공(石工)에게 명하여 하마(下馬 말에서 내려라) 등 글자를 파서 향교(鄕校) 앞에 세우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체모 있다 하였다.

○옛 사람들의 저서(著書)는 풍화(風化)와 교육에 관계 있는 것이었는데,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간혹 추잡하고 비루한 말들이 있다 사문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이라는 것은 음사(淫辭)와 설어(褻語)가 글에 가득하니, 실로 음탕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찌 풍화나 교육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인가? 불에 집어넣는 것이 가한데, 호음 상공(湖陰相公)도 그 서문을 썼으니, 무슨 까닭일까?

안분(安分)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가정(嘉靖) 경진년(1580, 선조 13) 무렵에 내가 선산(善山) 원으로 있을 때에 공사(公事)로 성주(星州)에 갔었다. 목사(牧使)였던 김공 우(金公佑)가 말하기를, ‘교리(校理) 이희민(李希閔) 공이 말미를 받아 고향 초계(草溪)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에 우리 고을에 묵게 되어 통판(通判)에게 특별히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으니, 공은 바로 돌아가지 말고 종일 잔치하며 노는 것이 좋겠소.’ 한다. 조금 있다가 마중갔던 아전[候吏]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교리(校理)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니, 김공(金公)이 문득 화를 내며 내 귀에 대고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교만하면서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더니, 몇 달을 지나서 교리가 과연 죽었으니, 그 말이 바로 맞았다. 나의 한때 친우들이 옥당(玉堂)에 출입하면서 자기를 뽐내고 남을 모멸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세상에 살아 있지 않고, 나만 홀로 옹졸한 탓으로 남아 살아 있으니, 김공의 밀이 후세의 법이 될만한 것이다.”

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이, 정을 통하였던 경주(慶州) 기생이 임신한 지 두어 달만에 선생이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그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윤손(曺潤孫)이 그 기생을 차지하였다. 기생이 해산하자 조윤손이 자기 아들인 줄 알고 몹시 사랑하고 이름을 옥강(玉剛)이라 하였으나, 일문(一門)에서는 모두 그가 이씨의 아들인 줄 알았다. 조공이 죽은 뒤, 배 다른 형제들이 배척하여 여막(盧幕)에 거처하면서도 그 방을 따로 정해 주었다. 임금의 소명을 받았던 남명(南溟) 조 징군(曺徵君이름은 조식(曺植))은 조씨 문중의 어른이었다. 신주(神主)를 쓰면서 옥강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조 징군의 명령이었다. 옥강이 울며 그 이유를 자기 어머니에게 물으니, 그 어머니가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당시 회재 선생은 강계(江界)에 귀양가 있었는데, 옥강이 적소에 달려가니 선생이 허락하고, 이름을 전인(全仁)이라 고쳤다. 그는 조공(曺公)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그 사실이 대개 이와 같으니, 어야족(魚也足)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나는 조 징군의 가까운 친척에게 들었다.

○재상 황효헌(黃孝獻 1491-1531)은 나이 40이 되지 않아 이조 참판을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포의(布衣)를 입은 형상은 마치 서생(書生)같아, 보는 사람이 모두 그가 재상(宰相)인 줄 몰랐다. 저녁에 신륵사(神勒寺)에 투숙하였는데, 유생(儒生) 서넛이 둘러앉아 멸시하여, 공이 말석에 자리잡았다. 한 유생이 먼저 말하기를,

“내가 얼마 전 금강산을 유람했는데 정말 명산이었소. 한 중이 황모씨(黃某氏)의 시를 소매에서 내보이는데 정말 가작(佳作)이었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도 한번 가보았는데 과연 공의 말과 같았소.”

하니, 유생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서생이 어찌 그리 일찍이 구경을 하였을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일찍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우연히 한번 보았소.”

하니, 유생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공이 그들을 불러 말하기를,

“공들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며 정말 솔직하니, 친구가 될 만하다.”

하고, 작은 술상을 차려 마음껏 즐기고 헤어졌다. 이후로 서로 내왕하며 매우 깊은 우정으로 사귀었다.

○가정(嘉靖) 을축년에, 백어(白魚 : 백상아리) 두 마리가 바다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한 마리는 두모포(豆毛浦)에서 죽었다. 그 모양은 머리가 말 같고 꼬리는 키[箕]같으며, 귀 뒤에 구멍이 둘이 있는데 길이는 몇 길 남짓 되고, 전체에 비늘 하나 없었다. 서울 남녀들이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이 날로 수천 명은 되었으나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 알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옛날 한 사신[奉使]이 지방으로 갔는데 그는 머리가 몽땅 빠졌다. 동침하던 기생이 그가 마루에 나가 앉아 있는 틈에, 장난으로 그가 쓰는 털모자에 복숭아를 담아 병풍에 걸어두었다. 사신이 이것을 보고 노하며 꾸짖기를,

“이것이 복숭아 담는 그릇이냐?”

하니, 기생이 말하기를,

“이것이 수박을 담는 것이니 복숭아를 담으면 좀 어떻습니까?”

하니, 사신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14) 무렵에 열읍(列邑)의 기생들을 폐지하였다. 한림(翰林) 채세영(蔡世英 1490-1568) 공이 포사관(曝史官 : 사고관리를 파견된 관리)으로 성주(星州)에 갔었는데, 엄중히 명령하여 기생을 숙소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의 목사(牧使) 김우(金佑)공은 문음(門蔭)으로 출신하였는데, 호걸스러운 선비였다. 몰래 기생 승두추(勝杜秋)를 시켜 매일 저녁 숙소 앞을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수일이 지나자, 한림이 창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빼고 보고는 소리(小吏)에게 말하기를,

“저게 어떤 사람이기에 밤마다 이곳을 지나가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집이 담 밖에 있으며, 교방(敎坊)에 드나드는 길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기생이 이 말을 듣고, 거짓으로 놀라 달아나다가 일부러 땅에 넘어졌다. 모습이 아름답고 의상이 깨끗하였다. 한림이 몰래 소리(小吏)를 시켜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때부터 밤에 들어와 새벽에 돌아가곤 하여 정이 무르익었다. 조정에 돌아가는 날, 목사가 성문 밖에 송별연을 벌이고, 몇몇 기생을 목사 뒤에 앉혀 술을 데우는 심부름을 하는 모양을 하여 한림과 상대하도록 하니, 한림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로 쳐다보는데, 눈물이 몇 줄 흘렀다. 한림이 자신의 눈물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얼굴을 점점 높이 들었다가 잠깐 낮추니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목사가 앞으로 나와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길가 읍에 부임한 지 3년인데 아직도 포쇄관(曝曬官)처럼 큰 눈물은 보지 못하였소.”

하고는, 서로들 손뼉을 치며 즐겼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무오년(1558, 명종 13)에 한림 고경진(高景軫) 공이 역시 설매향(雪梅香)에게 정이 들었다가, 눈물이 채세영보다 덜하지 않았다. 신유년에 한림 박희립(朴希立)이 역시 포쇄관으로 왔었는데, 떠날 즈음 내가 시를 지어주기를,

떠나는 길 두 줄기 눈물 괴이히 여기지 말지니 / 臨歧莫恠雙涙垂

채사와 고군을 거울 삼게나 / 蔡史高君是伐柯

하니, 박 한림이 크게 웃었다. 승두추(勝杜秋)는 나이 80세가 넘어 만력(萬曆) 임오년에 죽었는데, 매양 사람들과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흐느껴 울더라는 것이다.

○ 평양기생 무정개(武貞介)는 판서(判書) 유진동(柳辰仝 1497-1561)의 사랑을 받았다. 데리고 몇 읍을 다녔는데, 마침 먼저 서방의 종을 보더니 슬퍼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유진동의 종이 꾸짖기를,

“낭자의 정이 오로지 저쪽에 있고 우리 주인은 중히 하지 않는 것을 알겠소.”

하니, 답하기를,

“네 정말 사리도 모르는구나. 내가 너의 주인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겠지마는, 혹시 불행히 다른 데로 갔다가 뒷날 너를 만나면 이것보다 10배는 더할 것이다.”

하였다. 이처럼 민첩하게 말하였다.

○ 성주(星州) 기생 영산홍(映山紅)은 일찍 제 뜻에 만족했던 사람을 말하면서 오직 수재(秀才) 이계열(李繼悅)이 제일이라 하였다. 그후 한 조정 관원이 역시 정을 쏟았다. 농담으로 영산홍을 시켜 갑을(甲乙)의 등수를 매기도록 하고, 관원이 붓을 잡았다. 홍이 말하기를,

“이계열을 먼저 쓰고, 그 다음이 아무개, 그리고 그 다음이 아무개입니다.”

하였다. 관원이,

“나는 이 열에는 끼지 못하는가?”

하니, 영산홍이 말하기를,

“낭군의 어깨와 목이 이계열과 비슷하니, 끄트머리에 들어갈 만합니다.”

하였다. 관원이 붓을 던지고 손바닥만 비볐다.

○ 한 내금위(內禁衛)가 조정 관원의 사랑하는 기생을 간통(奸通)하였다. 하루는 서로 만나서 한참 정을 나누는데, 그 조정 관원이 갑자기 이르렀다. ‘물렀거라’ 하는 소리를 듣고 관대(冠帶)를 하고 문밖에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조정 관원이,

“너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관(醫官)입니다.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이 낭자께서 편찮다는 말을 듣고 가보라는 명령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니, 조정 관원이 대단히 기뻐하고, 기생의 맥을 짚게 하고는, 술잔을 나누어 크게 취한 뒤에 돌아갔다. 이것은 기생이 아픈 데가 있어서, 조정 관원이 정원(政院)에 의원을 구하였던 것을, 몰래 간부(奸夫)에게 가르쳐주어 의원이라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속을 수 있는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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