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燕行錄)
강선(姜銑):1645년 ~ 1710년
■강선(姜銑)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79년에 부수찬· 정언을 지냈고, 홍문록(弘文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680년 지평으로 재직중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교리에 등용되어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나국(拿鞫: 체포하여 신문하는 일)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6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다시 파직당하였다. 1698년 형조참의로 다시 기용되었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705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708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 기묘년(己卯年, 1699) 12월
■초2일 [병인(丙寅)]
○도착하니, 잘 오셨는지 문후를 여쭈었다. 저 오랑캐도 또한 인사를 차릴 줄 안다고 하겠다.
■초3일 정묘(丁卯)
○연천(連川)에 살았다는 박일득(朴一得)이라는 사람이 와서 알현하면서, “병자년에 포로로 잡혀 왔는데, 겨우 15세 때 와서 이제 나이가 79세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초4일 무진(戊辰)
○황태자가 사냥을 하러 심양(瀋陽)으로 나와 나흘 머물렀다고 한다. 사냥해서 잡은 것이 3백 수레에 이르는데, 큰 범이 네 마리요, 작은 범 열 마리며, 노루ㆍ사슴ㆍ꿩은 몇 마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태자는 얼굴 코끝이 동상에 걸렸다고 한다.
■초7일 신미(辛未)
○방물을 심양에 들인 후 장계(狀啓)를 지어 올리고 또 집으로 보낼 편지를 부쳤다.
■13일 정축(丁丑)
○대개 성절사(聖節使)로 가는 사신 행차는 반드시 섣달 26일까지 북경에 도착하여야 하므로, 매일 일정을 치계(馳啓)하여야 한다. 이날의 여정이 부족하여 역참 하나를 더 가려 하였지만 압군(押軍)이 막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득이 행렬 중에서 역관이나 상인들이 추렴하여 90냥을 맞추어 지급한 다음에야 허락을 받았다. 약소국의 수치를 차마 어찌 말로 하겠는가?
■21일 을유(乙酉)
○왕이(王怡)의 집에 머물러 잠을 잤다. 그 부친 왕운(王惲)은 곧 부친께서 중국 사신으로 가실 때 묵었던 집 주인이다. 왕운은 작고하고 왕이가 홀로 생존해 있었다. 당시에 서생으로 와서 알현하는 이가 9명이었는데 다 죽고 남은 사람은 왕이와 그 아들, 조카 세 사람뿐이었다. 풀잎의 이슬처럼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고단한 우리 인생에 이곳에 다시 오니 서글프게 그리워하는 감회가 가슴속에 곱절이나 격렬하게 일었다. 40년 세월이 흐른 사이 슬프고 기쁜 세상사를 두루 겪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또 왕이와 말을 나누다가 예전 일에 미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인간 세상이 무엇인지 탄식하였다. 왕이가 과일과 차를 내어놓는 등 대접이 특별히 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혼미해져서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한스러웠다.
■26일 경인(庚寅)
○삼행이 말을 타고 성문에 이르러 바로 예부(禮部)로 나아갔다. 통관(通官)이 말하기를, “예부의 시랑(侍郞) 왕봉영(王封榮)이 자문(咨文)을 받게 되어 있지만, 황제가 사냥을 하러 해자(海子)로 나갔는데 황성에서 20리 떨어진 곳으로 어제 막 환궁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바로 대궐에 들어가 문서를 바로 고쳐 적을 일이 있을 것이므로, 한인 상서(漢人尙書) 두진(杜臻)이 대신 와서 이를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참 지난 후 한인 상서가 왔기에 자문을 전하였다. 자문을 전할 때 삼행이 모두 대청마루 위에 꿇어앉은 채 벽 앞으로 가 탁자 위에 자문을 올려놓았으니, 그 굴욕이 매우 심하였다. 약소국의 수치를 차마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옥하관에는 대비달자가 와서 머물고 있었다. 과거 시험을 2월에 보기 때문에 사신 일행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찰에도 넓은 데가 많은데 모두 권력가들의 원당(院堂)이어서 여기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독포사(督捕司)는 곧 명나라 때 행인사(行人司)로 예전의 명칭을 그냥 쓰는데 그곳에 사신 일행을 머물게 하였다. 너무 더럽고 좁으며, 방에는 구들이 없는 곳도 많았다. 일행 중 원역(員役)은 많이들 바깥에서 노숙하였다. 접대하는 처소도 매우 좁아서 거의 견딜 수 없었다.
■29일 계사(癸巳)
○새벽에 조참(朝參)할 때 의전을 연습하는 일로 삼행이 정관(正官)을 인솔하여 홍려시로 가서, 의전을 연습하게 하였다. 벽 앞에 꿇어앉아 있으니 홍려시에서 부르는 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익숙하게 연습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의전을 첫 번째처럼 다시 한 번 연습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도 또 익숙하게 연습하지 않았다 하여 관아로 가서 다시 의전을 연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금 늦게 대통관(大通官) 문봉선(文奉先)과 김사걸(金士傑), 유논금(劉論金), 차통관(次通官) 최대보(崔大保) 등이 왔다. 사신(使臣)은 일부러 예를 행하지 않고, 역관들로 하여금 마당에서 절하고 꿇어앉게 하였다. 전날 임양군(臨陽君)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예법을 잘못 한 일이 있었고, 이 때문에 예부의 낭관(郞官)이 파직된 일까지 있었다. 예부의 이번 담당자가 또 이러한 일이 있을까 우려하여 의전 연습을 두세 번이나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컬어지다가 도리어 오랑캐에게 예법을 잘못 하였다는 질책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2. 경진년(庚辰年, 1700) 정월
■초하루 을미(乙未)
○청인(淸人)이 예를 행한 후에야 네 번째 반열로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예를 마친 후 정사(正使)는 종실이라 하여 어탑(御榻) 전좌(殿坐)의 앞쪽에 나아가 앉았다가 한참 있다가 물러났다. 일행은 정사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왔다. 궁궐의 아름다움과 제도의 성대함이 모두 예전 명나라 의전(儀典)과 한가지였기에 눈길 닿는 곳마다 강개한 마음이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가 늦게 태어나 명나라의 전성기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와서 오랑캐의 뜰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게 되었으니, 그저 분하여 주먹만 꽉 쥘 뿐이었다.
■초5일 기해(己亥)
○수역(首譯)이 와서 차통관(次通官) 최대보(崔大保)가 황태자를 위하여 우리나라의 인삼을 구한다는 기별을 해왔다.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또 찾아서 보낸다면 반드시 앞으로 살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하였다.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찾아서 보내는 것도 편한 일이 아닌데다 그 전례를 만들 수는 없었기에 엄중하게 사양하고 굳게 거절하였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초6일 경자(庚子)
○차통관 최대보가 어제 황태자가 구한 약재 인삼의 일로 찾아와 역관들에게 재촉하였다. 역관들이 사신들의 뜻을 말하였더니, 최대보가 곧바로 정사(正使)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삼행이 함께 모여 짐 속에 보낼 것이 없는 데다 비공식적인 경로를 열 수 없다면서 강하게 보내줄 수 없다는 뜻을 표하고 준엄한 말로 물리쳤다. 차통관은 끝까지 감히 윽박지르지는 못하였다. 결국은 약간의 약재 인삼만 얻으면 된다고 하였다. 정사가 그 정도는 구해 주겠다고 하니, 차통관이 이에 물러갔다.
■12일 병오(丙午)
○차통관 최대보가 역관 변이황(卞爾璜)에게 말하기를, “전날 약재 인삼을 구하였는데, 대개 사려고 한 계획이었소. 이제 짐 속에 줄 것이 없다고 하고, 약재로 쓰려고 해도 반드시 몇 근은 되어야 쓸 수 있겠지요. 반드시 나중에 올 사신 인편에 몇 근을 보내준다면 살 수 있겠습니다. 또 귀국의 담배〔葉南草〕와 왜능화지(倭綾花紙)도 넉넉하게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미리 알려주도록 돌아가 그렇게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귀국의 북관에 있는 육진(六鎭)에서 개시(開市)를 할 때, 귀국에서 접대하는 차인(差人)이 매우 냉정하고 각박하니, 차후에는 각별히 잘 대해주도록 돌아가서 보고하여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역관들은, “피차가 교역을 할 때 접대하는 것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므로, 만약 조약을 위배한다면 분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쉽게 변통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17일 신해(辛亥)
○길에서 전해들은 말로, 황제의 딸 격격공주(格格公主)가 투기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지경에 이르러, 황제가 그 자리에서 석씨(石氏) 성의 부마를 베어 죽이고 온 집안의 종족들까지 함께 관직을 삭탈하였다 한다.
■25일 기미(己未)
○24일 특지(特旨)가 내려, 사은(謝恩) 방물(方物)을 바치는 일은 감면하고, 이후 이러한 일로 인해 공물로 바칠 예물을 면제한 데 대해 사례하는 글을 올리는 일도 생략하라는 말까지 있었다. 통관들이 모두 이것이 전에 없던 특이한 대우라 하였다. 보통 이러한 공문은 사흘 이내 즉시 봉행하지만, 지금은 사흘이 지나도록 끝내 해당 부서에 문서를 돌려보내지 않았기에 다시 품지(稟旨)하였더니, 이러한 특별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26일 경신(庚申)
○황제(성조 강희제 : 재위 1661-1722)가 정월 29일 황태후, 태자, 그리고 여러 비빈들과 함께 통주(通州)의 강으로 가서 배를 타고 동남쪽 수로를 따라 2백여 리 떨어진 파주(巴州)로 향하여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달포 후에 돌아올 것이라 한다.
3. 경진년(庚辰年, 1700) 2월
■초9일 계유(癸酉)
○한인 상서(漢人尙書) 두진(杜臻), 낭중(郞中) 동보(佟寶), 그리고 제독(提督), 통관(通官) 등이 접대하러 와서 만났는데, 두진은 예의를 생략하고 상석에 앉아 있겠다고 하고 통관 문봉선(文奉先)은 마땅히 겸양하는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의 말을 두진에게 전하였더니, 두진은 다시 예의를 생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득이 하여 두진 앞에 나란히 서서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불행하고도 곤란한 일이라 하겠다.
■20일 갑신(甲申)
○정사의 군관(軍官) 김정휘(金挺輝)가 작고하였다. 참으로 처참하다.
김정휘(金挺輝)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군망(君望)이다. 1651년생인데 1678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4. 경진년(庚辰年, 1700) 3월
■20일 계미(癸未)
○비. 새벽에 출발하여 40리 가서 고양(高陽)에서 점심을 먹었다. 군수 홍만선(洪萬選)이 와서, 만나보았다. 곧바로 길을 나서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였다. 의주 부사(義州府使) 임윤원(任胤元), 감찰(監察) 노세하(盧世夏), 도사(都事) 심사현(沈事玹), 창녕 군수(昌寧郡守) 이재춘(李再春), 용강 현령(龍崗縣令) 유귀징(柳龜徵), 조 생원(趙生員) 형제, 진사(進士) 김두수(金斗壽), 유생 이만제(李萬濟)ㆍ이지장(李之張)ㆍ이한상(李漢相)이 와서 정사가 묵을 사갓집에서 기다렸다. 동평위(東平尉)와 함께 만나보고 옷을 갈아입은 후 복명(復命)을 위해 대궐로 들어가 기다렸다.
5. 부록(附錄)
■기묘년(1699) 11월 25일 강을 건너면서 올린 계문
○신등의 일행이 이번 달 19일 의주부(義州府)에 도착하여, 방물(方物) 세폐(歲幣)를 다시 싸고, 사람과 말을 정돈하였습니다. 25일 □시쯤 바로 강을 건넜습니다. 방물은 원쇄마(元刷馬) 1백 4바리(駄) 중에서 백면지(白綿紙)를 실은 80바리는 근년의 전례에 따라 1짝(隻)을 덜어내어 10권(卷)으로 고쳐 바리를 만드니, 가파쇄마(加把刷馬)로 16필(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 장수역(長水驛)의 노비 연상(連上)의 말이 죽었기 때문에 평안도 대동역(大同驛)의 역원(驛員) 이수발(李秀發)의 말 1필을 대신 가지고 갔습니다. 원반전(元盤纏) 정은(丁銀) 1백 20냥과 별반전(別盤纏) 정은 96냥, 그리고 저들이 사용할 정은 3백 냥은 전례에 따라 운반해서 풀어먹였습니다. 그리고 세폐를 가지고 가던 몽학(蒙學) 전 직장(前直長) 박동열(朴東說)이 이번 달 22일부터 다시 상한(傷寒)의 병세가 생겨 여러 날 그냥 머물러 지내다가 증세가 매우 위중하여 전혀 나을 기세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박동열을 뒤에 남겨두어야 하는 연유를 함께 보고 드립니다. 이런 전차로 선계(善啓)합니다.
■12월 초7일 심양에서의 장계
○신등 일행은 지난 달 27일 책문을 들어선 연유로 바로 치계(馳啓)한 바 있습니다. 이번 달 초5일에 심양에 도착하여 세폐의 원래 물품 수인 2백 45포(包) 중에서 홍면주(紅綿紬)와 녹면주(綠綿紬) 각 1백 필과 백면주(白綿紬) 2백 필, 생목(生木 무명) 2천 필, 대호지(大好紙) 5천 장, 소호지(小好紙) 4만 장, 청서피(靑黍皮) 20장, 점미(粘米 찹쌀) 6석, 도합 1백 3포를 저들에게 분부하여 심양에 머물러두게 하였고, 나머지 1백 48포와 쌀 1백 62포, 방물 중 원래 물품 수인 2백 38포는 일일이 숫자대로 점검하여 심양의 압거장(押車將)에게 주어서, 운반해 북경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해당 부에서 지난 번보다 화를 내는 일이 더욱 심하여, 반드시 까탈을 잡아 문제를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대호지와 소호지는 권(卷)마다 그 장수를 헤아려 두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그 밖에 여러 물품은 다음 날 아침에야 납부하였는데 겨우 별 탈이 없었습니다.
방물을 실은 바리는 숫자대로 대조하여 조사한 후 밀원(密院)에 둘 때 백면지 1짝(隻)은 끝내 간 데가 없어, 신들이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쇄마 말몰이꾼들을 엄중히 신문해보니 의주 말몰이꾼 막활이(莫伊)의 공초(供招)에서 자기가 실은 백면지 1짝을 의주 말몰이꾼 천립(天立)이라는 놈에게 무단히 빼앗겼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이 어린 아이놈으로 강한 놈들에게 맞서지 못하여 빼앗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립을 붙들어 문초하고 대질하니 그놈의 공초에서 과연 봉성에 사는 고용한 수레몰이꾼 유가(劉哥) 놈에게 빼앗아 주었고, 목화(木花) 4칭(秤)은 팔아먹기로 약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용한 수레몰이꾼 유가 놈을 잡아와 대면하여 신문을 하였더니, 죽을 때까지도 굳게 입을 다물어 끝내 토설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시하여 끝내 사실대로 공초하지 못하였습니다.
■경진년 2월 21일 산해관에 도착해서 올린 장계
○신등의 일행이 작년 12월 초5일 심양에 도착한 일은 이미 치계(馳啓)한 바 있습니다. 같은 달 17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니, 성문을 지키는 장경(章京)과 세관(稅官) 등이 길가에 죽 앉아서 방물 세폐와 일행의 인마(人馬), 싣고 간 짐을 숫자와 맞추어 점검하였는데 전보다 더욱 엄하였습니다. 같은 달 26일 북경의 성 바깥 동악묘(東岳廟)에 이르니, 통관(通官) 문봉선(文奉先) 등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오늘 안으로 표자문(表咨文)을 바치라 하여, 성에 들어가 예부로 가서 문서를 바쳤습니다. 한인 상서(漢人尙書) 두진(杜臻)이 와서 숫자가 맞는지 맞추어보고 수령하였습니다.
...25일 상참례(常參禮)를 행하였는데, 24일 황제의 특지(特旨)로 사은(謝恩) 방물(方物)을 모두 감면한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예부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30일 처음으로 방물 세폐를 바쳤는데, 목면과 종이, 피물(皮物) 등의 물품이 모두 품질이 떨어진다 하였지만 마침내 별 탈이 없었으니 정말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대비달자(러시아인)가 세밑에 옥하관에 머물고 있다가 돌아갔고, 몽고 사람도 지난날 오래 머물렀다고 하는데 전후 조참(朝參)의 의식 때에는 모두 참석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물건을 매매하는 일만 할 뿐, 청나라에 귀순하려 하지 않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 곡절을 통관들에게 물어보니, 저들이 모두 무식하여 깊이 책망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궁색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주 8인은 모두 몽고의 여러 왕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몽고 지방의 거처와 음식은 감내하기 어려워서 이 때문에 공주들이 귀근(歸覲)할 때 모두 눈물을 쏟으면서 애원한다고 합니다. 회유하려는 정책이요, 통제는 할 수 없는 정황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동지부사가 상고한 일
○경감한 방물 가운데 팔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를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부서의 공문에 따르면 판 것 외에 혹 저들에게 기증한 것도 있는데 백면지(白綿紙)가 2천 5백 권입니다. 2천 2백 권은 역원(役員)들에게 주어 가격을 적절하게 정하여 팔도록 하였습니다. 나머지 3백 권은 당초에 방물을 납부할 때 불편한 일이 많아서 통관(通官)들을 통하여 임시변통으로 뇌물을 주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각 고관(庫官)이나 여러 통관들도 전에 공물을 감면받았을 때에는 뇌물을 나누어 준 전례가 있었습니다. 뇌물을 구하는 일이 만 가지 방식이라, 차통관 최대보(崔大保)의 경우에는 반드시 은 한 덩어리를 얻으려 들고, 혹 주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만들어 내려고 듭니다. 부득이 각 사람들에게 뇌물을 나누었습니다. 백저포(白苧布) 10필과 자주면(紫紬綿) 3필, 붓과 먹 각 50개를 저들에게 모두 전례에 의거하여 나누어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 때문에 사실대로 공문을 올립니다. 두루 잘 알아서 거행하여 문제가 생기는 폐단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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