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환봉사(東還封事)
조헌(趙憲):1544-1592
■조헌(趙憲)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
1. 먼저 올린 8조의 소 갑술년(1574, 선조 7) 11월
■서(序)
○조종조(祖宗朝)에서 반드시 질정관을 보내는 것은, 저 명왕 성제(明王聖帝)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제도와 오랜 치안의 법술을 상세히 궁구하여, 이 땅의 백성을 태평한 지경에 두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역로의 잔졸(殘卒)을 괴롭히고라도 지금 행하고 있는 선정(善政)을 들어, 장차 크게 폐단을 없애고 교화를 일으키는 근본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성묘의 배향[聖廟配享]
○육구연의 학문만은 예의(禮義)를 강론하지 않고 오직 돈오(頓悟)에만 힘썼으므로 당시 주자가 그 설(說)의 해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설이 더욱 멀리 전파되어 사람들의 침혹이 더욱 심하여 온 세상이 모두 선학(禪學)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횡의(橫議 멋대로 지껄이는 논의)로 주자를 비방했던 왕수인(王守仁) 같은 자를 오히려 종사하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필시 강서(江西) 사람들이 평소에 익히 견문하다가 벼슬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며 힘써 상산학파(象山學派)를 지지함으로써 위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치게 된 것입니다.
...대저 김굉필(金宏弼)은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일으켜 계왕개래한 업적이 있으며, 조광조(趙光祖)는 이어서 사도(斯道)를 밝혀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을 착하게 한 공이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道)를 본받기를 순독(純篤)하게 하여 기울어지려는 도를 부지(扶持)한 공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을 중국에서 찾아본다면 허형(許衡)ㆍ설선(薛瑄) 밖에는 짝할 만한 이가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 같은 이도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동유(東儒)를 집대성하였고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옳은 도리로 인도한 정성이 장소(章疏) 가운데에 간절하게 나타나 있으며, 물러가서는 인재들을 가르치는 뜻이 강론할 때에 간절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경모(景慕)하였으며 악한 사람도 멀리서 그 풍모를 우러러보고 스스로 몸을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내외의 서관[內外庶官]
○그리하여 동쪽에서 뽑아 서쪽에 보충하고,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바꾸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외(京外)의 관원된 자가 자기가 맡은 직분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혹은 앉았던 자리가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떠나는 자도 있으며, 장부를 없애고 재화(財貨)를 도적질함은 간사한 아전의 꾀에 빠진 것이며, 신관(新官)을 맞이하고 구관을 보내느라고 인마(人馬)를 차출해서 천 리 밖까지 분산(奔散)을 피워 잔민(殘民)의 항산(恒産)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폐단입니다. 중국의 관원은 비록 천만 리 밖으로 부임한다 하더라도 다만 사마(私馬)와 사인(私人)으로 가족을 이동시키며, 말 하나 사람 하나 관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사람마다 항산(恒産)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수된 사람이 목민관에 적합하지 않으면 속히 의논하여 체차하는 것이 옳은데, 꼭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아뢰어 파직합니다. 그리하여 멀리서 온 관속(官屬)이 처음에 가지고 온 양식이 한 달분뿐인지라, 다시 월이자(月利子)를 내가지고 신관(新官)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게 되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는 밭을 팔아 겨우 월이자를 갚게 되므로 가산은 이미 탕진되고 맙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의 파직자가 한둘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한 관원을 맞이하는 데 백인(百人)을 요란하게 할 뿐만이 아니므로, 한 해에 이로써 실업(失業)한 사람이 몇 백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 이조에서 사람 쓰는 것을 잠시 살피지 못하므로 해서 사방의 사민(士民)이 해를 입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니, 작은 일이라고 해서 고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이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이윤(伊尹)의 ‘삼가야 한다.’는 훈계를 몸소 행하시고, 공자의 ‘인재 얻기가 어렵다.’는 탄식을 생각하시어, 이조를 신칙함으로써 논정한 것이 우선 공의에 합당한 연후에 그 망(望)을 채우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삼망을 반드시 다 채울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귀천의 의관[貴賤衣冠]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큰 이엄을 좋아하여 상민들도 두 가지 가죽을 쓰며 여인의 모관(毛冠)은 거의 세 가지의 가죽을 쓰고, 이른바 대이엄(大耳掩)이란 것은 거의 다섯 가지 가죽을 씁니다. 이 때문에 가죽 값이 매우 비싸서 가난한 노병자(老病者)는 비록 사서 쓰고 싶어도 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엄을 중국 것에 의하여 고치고 사치스러운 풍습을 일체 금하면 가죽 값이 오르지 않아서 늙고 병든 사람에게 널리 보급될 것입니다.
■식품과 연음[食品宴飮]
○신이 보건대 중원 사람들은 절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관원의 집에도 공용(供用)하는 그릇이 몇 개뿐이고 사가의 음식은 더욱 검소했습니다. 연음(宴飮)할 때에는 작은 잔에 따르고 그 드는 횟수를 제한하여 절도를 벗어나 본성(本性)을 어지럽게 하여 모든 일을 황폐하게 하지 않으므로, 공사가 모두 넉넉하며 서정(庶政)도 실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풍속은 오로지 음식을 푸짐하게 하고 술은 가득 채워 마시기를 일삼아, 재물을 다해도 걱정을 모르고 백성이 곤궁해도 구원해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식품과 연음[食品宴飮]
○아! 중원의 관원들은 닭 한마리, 물고기 하나라도 감히 민간에서 헛되게 거두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관리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조종(祖宗)의 백성[赤子]을 병들게 하는 것이 몇 천만 가지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맹서하여 간소한 음식으로 정공(正供)을 삼는 데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중원에서는 주화(酒禍)가 오히려 적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술을 좋아해서 일찍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으니 비록 저들이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것이지만 성상께서 세상을 수역(壽域)으로 만들려는 마음으로 볼 때는 가엾은 일입니다.
...아! 중원의 관원들은 닭 한마리, 물고기 하나라도 감히 민간에서 헛되게 거두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관리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조종(祖宗)의 백성[赤子]을 병들게 하는 것이 몇 천만 가지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맹서하여 간소한 음식으로 정공(正供)을 삼는 데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변방의 장수들은 더욱 술을 많이 마시기를 숭상하여 인경(隣境)에서 수수(守帥) 및 병사(兵使), 수사(水使)가 가고 올 적에는 영송한다는 명목으로 소를 잡고 술을 빛으며, 재화를 가지고 진(鎭)을 버리고 월경(越境)하여 갑니다. 그리하여 술에 잔을 띄워 놓고 계속해서 몇 날을 마십니다. 양계(兩界 평안도와 함경도)와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이 모두 이와 같으니 이것은 오직 쇠잔한 군사를 못 살게 하는 걱정이 될 뿐만 아니라 적이 그 허점을 노린다면 누가 다시 방어하겠습니까? 예를 들면, 일찍이 이우증(李友曾)도 혼취(昏醉)했기 때문에 부산(釜山)이 함락된 것을 몰랐던 것인데 뒷날에 이러한 일이 반드시 없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아! 중원에서는 주화(酒禍)가 오히려 적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술을 좋아해서 일찍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으니 비록 저들이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것이지만 성상께서 세상을 수역(壽域)으로 만들려는 마음으로 볼 때는 가엾은 일입니다.
■사부의 읍양[士夫揖讓]
○아! 중국에는 모든 벼슬아치가 예를 좋아하고 일에 부지런함이 이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육조 등처는, 예모는 엉성하고 폐풍(弊風)에만 엄하여, 희만(戱慢)하고 무리한 일이 지금은 조금 고쳐졌으나, 좌랑이 정랑에게 가서도 감히 머리를 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공사(公事)가 있으면 조사(曹司)인 좌랑에게 맡기는데 좌랑이 그 일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를 혹 순월(旬月)이 지나도록 신복(申覆)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군민(軍民)의 송첩(訟牒)은 서리에게 뇌물을 먹이지 않으면 곧 결판해 주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러한 폐단이 제거되지 않으면 나랏일은 끝내 잘 다스려질 날이 없을 듯합니다.
■사생의 접례[師生接禮]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유(師儒)가 처음 강당에 앉아 있을 때 학생들이 두 번 절하는 예만 행하고 정조나 동지에는 절하고 축하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초하루ㆍ보름에 알성(謁聖)하는 관원도 없고, 성균관에 있는 유생만이 초하루에 성묘에 절할 뿐이며, 그들 역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인사하는 의식이 있다고는 아직 들은 바 없습니다. 그리고 종친(宗親)으로서 처음 관례(冠禮)한 사람과 생원ㆍ진사, 문과 및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알성하는 예는 있으나 대사성에게 인사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향려의 습속[鄕閭習俗]
○우리나라는 원래 예의 바른 나라로서 열성조께서 차차 좋은 방향으로 감화시키는[漸摩] 가르침을 더했으며, 거듭 주상(主上)의 유신 정치(維新政治)에 힘입어서 해마다 명령을 발하여 오로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이루기에 힘써 왔으니, 마땅히 집마다 착한 사람이 있고 마을마다 온후한 풍속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근년 이래로 민심이 날로 천박해지고 강상(綱常)의 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버이로서 그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칠 줄 모르고, 자식으로서 그 어버이에게 효도할 줄 모르고, 형이면서 아우에게 우애를 갖지 못하고, 아우로서 능히 그 형을 공경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 능히 그 아내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내로서 그 가장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이웃된 자가 친절하더라도 날로 싸움을 일삼고, 친우된 자가 달관(達官)이라도 날로 모략하여 서로 잘난 체합니다. 집에 있으면서 능히 그 품행을 닦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을 섬겨도 능히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임금의 명을 거슬러 백성에게 학정을 하는 자가 안팎에 두루 있으니, 신의 소견으로는 이른바 ‘신하로서 신하 노릇을 못하고, 아들로서 아들 노릇을 못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군사의 기율[軍師紀律]
○신이 계주(薊州)의 길에서 보졸(步卒) 수천 명이 군량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리의 힘을 믿고 남의 물건을 노략질하지 않았으며, 나귀와 노새로 병거(兵車) 수레 위에 누(樓)가 있어 4인을 수용할 만한 것이 두 대 있었으니 이것은 장거(將車)였고, 누가 있고 종을 단 것이 두 대 있었으니 이것은 고거(皷車)였고, 수레 위 한 면을 판자로 막아 방패처럼 한 것이 수십 대 있었으니 이것은 대개 수구(水口)의 성이 끊어진 곳에 세워 호병(胡兵)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수십 대를 끌고 가다가 밭가에 쉬면서도 감히 볏단 하나를 가져다 노새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신이 그 군대의 행진이 규율이 있는 것을 기특히 여겨 물으니, 하는 말이 “오랑캐가 변방에 침입하여, 계진 총병관(薊鎭摠兵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중군장(中軍將)인 예선(倪善)에게 명하여 기현(畿縣)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주장(主將)의 위신이 평소부터 알려졌기 때문에 군사들이 그 영을 두려워하여 감히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중에 총병(摠兵) 척계광(戚繼光) 같은 사람은 비록 이것이 세습했던 직책이라 하지만 일찍이 양개(梁玠)에게 배워서 허다한 식견을 길렀습니다. 신이 도로에서 그 사람됨을 들으니, 공평하고 올바름을 지키며 나라만 걱정하고 사사로운 일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왜구를 남방(南方)에서 방어할 때, 병정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켜 약한 병졸을 강하게 만드는데, 그 아들이 군령(軍令)을 범하자 잡아다가 죽이면서, ‘네가 나의 명령을 어기면 누가 나를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했다 합니다. 그 후로는 삼군(三軍)이 두려워하여 해이해지는 습성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모두 힘써 싸우니, 날뛰던 오랑캐가 흩어졌던 것입니다. 강남의 연해 지방이 끝내 안녕을 유지한 것은 척공(戚公)이 군법을 엄하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늠름한 명장(名將)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올리려던 16조의 상소
■격천의 성의[格天之誠]
○세종 대왕께서도 약간의 수재나 한발을 당하여 백성의 먹는 것이 어렵게 되면 궁중에 들이는 술과 음식을 거두시고, 하늘의 뜻을 돌이켜 재앙을 물리친 연후에야 처음과 같이 음식을 드셨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도 재앙을 만나서 수양하고 반성하시는 것을 과연 이같이 하십니까?
■추본의 효도[追本之孝]
○신이 상인(常人)의 정(情)을 생각해 보건대 고생하는 때에는 더러 길러 준 부모의 노고를 생각하다가도 부귀를 누리게 되면 마음이 사치한 욕심에 빠져 낳아 준 은혜를 생각하는 자가 드뭅니다. 그런데 고황제께서는 바야흐로 부귀함이 극에 달하였건만 추모하는 마음이 해이하지 않았으므로, 이 효심(孝心)에 감통(感通)해서 민덕(民德)이 후하게 된 것입니다.
■능침의 제도[陵寢之制]
○신이 들으니 홍무(洪武) 연간에 처음 황릉(皇陵)을 세우는데, 능의 경계를 측량하여 담장을 쌓다가 유사(有司)들이 그 부근에 있는 민가와 분묘들은 옮길 것을 청하니, 고황제께서는 이를 말리며 “이 분묘들은 모두 우리와 오랜 이웃이니 꼭 밖으로 옮길 필요가 없다.” 하시고, 오히려 봄 가을로 백성들의 제사와 성묘하는 것을 윤허하시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 죽은 자의 해골도 오히려 차마 함부로 옮기지 아니하였는데, 생민의 산업을 어찌 흩어져 흔들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효릉(孝陵)이 남경(南京) 종산(鍾山)의 남쪽에 있는데, 그 북쪽을 공신(功臣)의 장지(葬地)로 많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조(成祖) 이하의 여러 능을 모두 천수산(天壽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돌아간 황태자는 금산(金山)에 장사지냈는데 능 앞의 석물(石物)을 옛것과 같게 하였으며 감히 점차 호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눈앞의 근심으로 말한다면 양주와 고양은 실상 서울의 근본인데, 겨우 도문(都門)을 나서면 풀이 우거져 무인지경(無人之境)과 같습니다. 서민으로서 의지할 곳 없는 자가 어찌 거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리까마는 그렇게 못하는 것은, 한 번 수호군(守護軍)의 역(役)에 걸리면 자손에게까지 전해 가면서 괴로움이 이어져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중국의 제도와 같게 한다면 한두 능의 수호자로 능히 모든 능을 수호할 수 있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군액(軍額)에 보충할 수 있습니다. 요역(徭役)이 어찌 몹시 괴로워서 살지 못하는 데 이르겠습니까?
■제사의 예절[祭祀之禮]
○또 눈앞의 근심으로 말한다면 부고(府庫)에 쌓인 곡식이 지난해에 비해 날로 적어지고 백성의 가난도 전보다 더욱 심한데, 제사에 쓰이는 쌀과 면(麵)의 비용이 백관의 녹보다도 많습니다. 그리고 소채를 바치는 것도 한결같이 궁한 백성의 노력에서 얻어집니다. 저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은 한 줌을 모으고 한 됫박을 빌려서 어렵게 본색(本色)을 갖추어 바치게 되는데, 서리(胥吏)들은 인정금(人情金)을 요구하며 여러 가지로 트집을 부립니다. 산채(山菜)거나 가채(家菜)거나 캐어 바치는 자에게 편리하게 해야 하는데 혹 관리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시장의 물건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한다. 시장의 물건은 산촌(山村)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꼭 월리금(月利金)을 구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워 주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 형편입니다. 이를 본다면 조종의 하늘에 있는 혼령도 불안해 할 것입니다.
■경연의 규례[經筵之規]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이렇듯 몸소 실천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러 까닭 없이 자주 강을 정지하는 일이 있으시며, 혹 경연에 납시어도 상하의 정이 믿음을 나누는 때가 드물고 혹 아랫사람이 정당한 말씀을 올려도 전하께서는 다른 일을 물으시며, 혹은 위에서 바야흐로 즐겨 듣는데 밑에서는 엎드려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엎드리는 예가 지극히 공경하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 조종조에서는 으레 편히 앉게 했습니다. 세종 대왕께서는 상참(常參)이나 전향(傳香)하는 날에도 휴강하지 않고 온화한 얼굴로 조용히 물으시기를 식구나 부자간처럼 하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임금과 신하의 뜻이 통하지 않음이 없고 백성의 원망과 나라의 병폐가 진달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큰 계책으로 왕업을 정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은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할 때에 군신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는데 그 뒤부터 습관이 되어 보통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는데도 한결같이 엎디었습니다. 그리하여 명종이 경연에서 매번 편히 앉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조회의 의식[視朝之儀]
○신이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 상참(常參)으로는 비록 육조에서 하는 예는 있으나 일을 여쭙는 의절이 없으며, 외읍(外邑)의 배전(陪箋)하는 관원들도 아직 용안(龍顔)을 뵙지 못했는데 진공(進貢)하는 이졸(吏卒)들이야 더욱이 가망이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는 조회에 자주 납시지 않으므로 공보(公輔)와 시종(侍從)들도 전하의 의상을 드물게 뵙습니다. 감사와 수령이 하직할 때에도 성교(聖敎)를 직접 뵙고서 받은 자는 없고 다만 정원(政院)에 ‘의전언송(依前言送 전례에 의해 말해 보내라)’ 넉 자를 명할 뿐이니, 아! ‘의전언송’ 네 글자가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겠습니까? 공조(公朝)에서 이러할진대 외읍의 서관(庶官)으로 민사(民事)에 게으른 자는 족히 물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 조정에서 정사를 처결한다는 것이 어찌 아리따운 얼굴이나 바라보고 예의 절차나 익힐 뿐이겠습니까? 어제 내린 영이 만일 백성을 해롭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빨리 대신과 의논하여 고치고, 밤 동안 생각한 정사가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빨리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옥체가 미령하기 전 몇 해를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시정(時政)을 강론하고, 수령으로서 조정을 하직하는 자들을 다 일일이 면교(面敎)하시기를, ‘아무 읍에는 어떤 재앙이 있으며 아무 읍에는 어떤 폐단이 있으니, 네가 가서 직무를 충실히 하여 우리 백성을 소생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정부가 직무를 하지 않은 날이 없고 육조의 일은 관백(關白)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그 중요한 것은 취하여 경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처리하게 했으므로 기무(機務)가 번거롭지 않았는데도 성치(聖治)는 날로 높아 갔습니다.
■간언을 듣는 법[聽言之道]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즉위 초에는 진실로 묻기를 좋아하시고 착한 말 듣기를 좋아하셔서 구신 이황(李滉)의 육조소(六條疏)와 《십도설(十圖說)》 같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재보(宰輔)의 신하들이 사신을 갔다 돌아오면 특별히 영을 내리시어 일로(一路)의 농사에 대한 일을 서계(書啓)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셨습니다. 이때부터 폐단을 제거하고 시대를 구하는 책략이 조야에서 아울러 일어나, 온 나라 신민이 모두 전하께서 착한 것을 좋아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정성이 여느 임금보다 만 배나 뛰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머리를 들고 받돋움하여 태평을 기다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차츰 처음 같지 않아서 편사(偏私)가 해마다 자라고 의린(疑吝)이 날로 쌓여, 그른 것을 바로잡으려고 간하면 경시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폐단을 개혁하자는 의논이 나오면 번잡하게 고칠 염려가 있다 하셨습니다. 지난겨울에 이이(李珥)가 올린 소는 참으로 시무(時務)에 간절하온데, 약간의 포상을 내렸을 뿐 실제로는 다 쓰지 않으셨으며, 다행히 좇으신 것도 사소한 일 뿐인데 대신들은 곧 의복(議覆)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의 병은 어느 때 제거되며 백성의 괴로움은 언제 소생되오리까? 대개 위에서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인데 선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그 기회 얻음을 기뻐하여 헐뜯는 것이 미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경망(輕妄)하다 이르지 아니하면 생사(生事)의 죄를 가하여 반드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용납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런 뒤에야 그 마음에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식견이 있는 선비는 이 세상에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므로, 내직(內職)에 있는 자는 몸을 빼어 멀리 가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머물러 있는 자도 모두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데는 마음이 없고, 다투어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세속을 따라 농담을 하고 익살을 부려 비방을 면하며, 밖에 있는 자는 모두 목을 늘였다가 도로 움츠리고, 요행히 나아간 자는 서로 풍색(風色)만을 관망하다가 혀를 차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다만 하위(下位)에 맴돌면서 녹이나 받아 부모나 공양하는 계책만을 세울 뿐입니다. 아! 이 두 종류 사람은 자기 몸을 위하는 계책이야 얻었지만 국가에는 어찌되며 종사(宗社)에는 어찌되옵니까?
■사람을 쓰는 법[取人之方]
○대개 고려 중엽부터 권신들이 나랏일을 맡아보면서 장차 충지(忠智)한 선비가 초야에서 일어나 세정(世政)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서얼들이 과거보는 것을 폐했습니다. 그래서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이 좁아져서 나라가 날로 쇠퇴하였습니다. 아조(我朝)에 와서도 정치를 하는 대신들이 다만 그 자손이 잘되기를 위하고 만세에 인재를 잃는 근심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재가(再嫁)한 자손들을 모두 금고(禁錮)하여 법전에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비록 전하의 지공하심으로도 그 미천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급무가 됨을 오히려 알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글을 아는 서얼로서 소속이 없는 자는 모두 군보(軍保)로 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대저 서울 100만 가구에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많으나 구두(句讀)에 분명하여 어린아이를 가르칠 만한 자는 십수 명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이라면 비록 사노(私奴)와 천한 종이라도 관에서 그 신분을 풀어 주고 겸해서 그 요(料)를 주어 경대부의 아들로 하여금 머리 숙여 절하고 가르침을 청하게 한 연후에라야 스승을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가족 관계는 한미하더라도 능히 《소학》이나 사서(四書)를 가르칠 수 있는 자면 천한 사람은 관에서 풀어 주어 양민(良民)을 삼고, 서얼과 재가한 이들은 군역(軍役)에 정하지 말고 모두 학장(學長)을 만드소서. 그래서 그 요(料)를 넉넉히 주고 양반의 자제로 하여금 스승의 예로 대우하게 하고 관원이나 부형된 자들도 벗으로 대접하도록 중외(中外)에 포고하소서. 그리하여 모두 알려서 차츰 덕을 귀히 여기는 풍습이 일어나고 착한 것을 부러워하는 뜻을 일게 하면, 사람을 진작시키는 성황이 비록 명 나라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천하면서 재주 있는 자가 거의 헛되이 늙지 않을 것이고, 장래에 뛰어난 재주들이 거의 장진(獎進)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선을 좋아하고 세(勢)를 잊는 성의가 있어야만 스승을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교화가 흥행할 것입니다.
■음식의 절도[飮食之節]
○신이 듣건대, 황조의 어선(御膳)에 쓰이는 것이 모두 백성의 세금에서 나오는데, 은으로 거두어 상선감(尙膳監)에 비장해 두었다가 태감(太監)이 날마다 은을 가지고 시장에서 반찬을 사고 사옹원(司饔院)에서 장만하여 올린다 합니다. 대저 중국에는 인마(人馬)가 성하고 겸하여 강으로 수운(水運)하는 길도 있으므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곧 새것으로 취하여 올 수가 있는 데도 반드시 세금 받은 은으로써 시장에서 삽니다. 이것은 대개 명 나라 성조(聖祖)의 마음이 반드시, ‘생물을 꼭 가져오게 하면 천만 리 수송해 오는 노고가 수운하는 비용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고, 은냥(銀兩)을 정하면 600마리의 말이 운반할 것을 한 마리 말로 운반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법이 한번 정해지자 백성은 갑절을 더 내던 걱정이 없어지고 역(驛)에서는 거듭 운반하는 수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시장에는 백물이 모두 구비되어 있고 값에 따라 은이 정해져 있으므로 어선(御膳)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중원의 백성이 풍부해지고 태평의 기반이 갈수록 견고해진 것입니다.
...대개 물선이 생산되는 것은, 혹 옛날에는 생산되던 것이 지금은 안 되는 것도 있는데 생산 여부를 불문하고 일체를 갖추라고 추궁합니다. 그리하여 겨우 조석을 이어가는 백성들이 양식을 메고 갑절을 더 주며 멀리 여러 날 걸리는 곳에까지 가서 구하게 되니, 고기 한 마리 값이 본토에서는 쌀 한 되에 불과한 것이 먼 곳의 사람이 급하게 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4, 5두를 주어야 사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힘으로 품을 팔아서는 그를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마지 못해 밭을 팔아서 지탱해 나갑니다.
비록 토산물이라 할지라도 경주(慶州)의 전어(錢魚) 같은 것은 명주 한 필로 바꾸고, 평양(平壤)의 동수어(冬秀魚) 같은 것은 정포(正布) 한 필로 바꿉니다. 열읍에서 진상하는 물가가 이와 같은 것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을 수송하는 데 소용되는 색리(色吏)의 양식과 경리(京吏)의 뇌물이 하나같이 백성에게서 나옵니다. 먼 지방의 물건을 얼음에 채워 짐이 무거우므로 말의 등이 온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역마가 지탱하기 어려우면 백성들의 소를 끌어냅니다. 그리고 황해ㆍ충청ㆍ강원ㆍ양남(兩南) 지방의 역에는 크고 작은 사신의 행렬과 왜(倭), 야인(野人) 등의 왕래가 빈번하여 능히 지탱하지 못하게 되어 열 집에 아홉이 비었습니다.
아! 역졸들도 백성[赤子]인데 집을 떠나 구렁에 뒹구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거니와 국가는 앞으로 장차 무엇으로 중국 사신을 우대하고 이웃 오랑캐를 접대하겠습니까?
...지금에 와서는 고기 값이 점차 올라서 혹 4결(結)로 고기 한 마리 값을 정하는데 4결로 마련하기 어려워지자 8결로 정하여, 매 결에 두 말씩 16두의 쌀을 모아야 한 마리의 고기를 살 수 있습니다. 네 전(殿)에 올리는 것이 몇 마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나 각 읍에서 마련하는 것은 몇 16두인지 모릅니다. 대저 16두의 쌀은 궁한 백성 8, 9명의 식구가 한 달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입니다. 한 결에 두 말을 내는 것이 적은 것 같으나 가을이나 겨울에는 마련하기 쉬운 일입니다만, 봄과 초여름에 묵은 곡식이 다 떨어질 때는 관창(官倉)도 이미 다했고 사사로 빌릴 곳도 없으므로, 서리가 한 번 독촉해서 마련하지 못하면 잡아다가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알몸의 주린 아낙네들이 스스로 짧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마련할 길이 막막하여 부르짖으며 우는 그 정상을 보신다면 성상의 측은한 마음으로 어찌 차마 그 백성의 원한을 모아 앞에 가득히 차려 놓으시겠습니까?
■희름을 알맞게[餼廩之稱]
○신은 들으니 중조(中朝)에서는 안으로 부부(部府)의 연리(掾吏)로부터 밖으로 진읍(鎭邑)의 서리(胥吏)까지, 무릇 관아를 바라보고 사는 문자(門子), 사수(寫手), 조예(皁隷), 뇌자(牢子) 같은 자까지도 월봉(月俸)의 은(銀) 2냥 5돈 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한 사람이 벼슬자리에 있게 되면 집에 있는 자제가 4, 5명에 이르더라도 정역(定役)을 하지 않는다 합니다. 그가 천한 아전이라 하더라도 아침 저녁으로 관에 있게 되면 급료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은을 주어서 그 의식을 잇게 해 주고 부역을 봐주어 그 가계(家計)를 온전히 해 줍니다. 이는 실로 주(周) 나라 때에 부사(府史) 서도(胥徒)의 녹이 하사(下士)와 같았던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으로 서리(書吏), 조예, 전복(典僕)으로부터 밖으로 아전, 서원(書員), 사령(使令)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관(官)을 떠날 수 없으니 그 괴로움은 이보다 심함이 없는데 한푼의 돈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농사를 지을 겨를도 없고 또한 공장(工匠)이나 상고(商賈)도 할 수 없어서 옷과 밥이 조금도 나올 데가 없는데, 도적질을 하자니 겨를이 없고 빌어먹자니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관을 속이고 술책을 써서 백성을 협박하여 재물을 요구하고 장부를 위조하여 재물을 도취(盜取)하고 창고에 들어가 곡식 훔치기를 염치불고하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형벌을 엄히 하고 법을 무겁게 해서 그 폐단을 막으면 장차 온갖 간계가 생김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의식의 길을 열어 주고 염치를 가르쳐서 스스로 간계를 부리지 않게 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나라에 쓸 것이 이미 다해서 허다한 재곡(財穀)을 마련하여 허다한 서리(胥吏)의 급료를 나누어 주기 어렵다.’고 합니다. 신의 우매한 생각에는, 허다한 서리들이 그 급료를 받지 못하여 여러 가지로 농간을 부려, 나랏일을 그르치는 것이 얼마나 되며, 나라의 재화(財貨)를 도적질하는 것이 그 숫자가 얼마며, 군민(軍民)의 산업(産業)을 파괴하는 것이 몇 호(戶)가 될지 알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도적맞는 희름(餼廩)을 고루 나누어 주어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해치지 말도록 한다면, 설사 법을 범한 자가 있게 되더라도 위에서는 할 말이 있고 그들도 그 죄에 자복할 것입니다.
...또 외방 고을에 가령 원곡(元穀) 만 석이 있는 곳에는 가을에 쓰고 축나는 것이 천 석에 이릅니다. 만일 예(禮)가 아닌 잔치를 하지 않고 사사로 요구하는 것을 응하지 않는다면, 400석으로 관아에서 쓰는 비용을 충당하고 600석으로 관속(官屬) 50명의 1년 급료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매달 한 사람에게 조(租) 한 섬을 줄 수 있다.
더구나 원곡이 10만 석 있는 땅이라면 만 석은 축나게 되는데 이것을 회계(會計)에 돌리지 않고 한갓 수령이 사사로이 쓰는 데에 돌립니다. 그 많은 백성의 곡식을 거두어 한 사람의 사욕을 채우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춥고 굶주리게 만드니, 이 어찌 천심(天心)이라 하겠습니까? 만일 2000석은 저축하고 불시에 쓰게 되는 것을 대비한다. 2000석은 관의 비용으로 쓴다면 사객(使客)을 접대하고 아속(衙屬)을 먹이는 데 쓴다. 6000석으로 600명의 급료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큰 부(府)의 관속이라 하더라도 600명은 안 되지 않습니까?
■인구의 번식[生息之繁]
○아! 우리나라는 양계(兩界)로부터 도성 문밖까지 기름진 땅과 좋은 들이 혹은 경작하지 않은 데가 있고 옛날 백성들이 살던 곳이 지금은 풀이 무성하며, 집에서 기르는 소와 말을 각각 한 마리씩 가진 자가 열에 한두 명도 안 되고 자녀를 두어 떼를 이룬 자 또한 심히 보기 드무니, 대체 어찌 천지의 만물을 내는 수가 치우쳐 우리나라만 부족하겠습니까?
대개 조정의 법은 본래 백성을 편케 하려 한 것인데, 목민(牧民)하는 관리들이 거개 본받아 준행하지 않아, 일정한 공부(貢賦) 외에 까닭없이 거두어들이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팔결베[八結之布]를 해마다 세 필씩 바치고 봉족 값[奉足之價]을 해마다 5필 호수(戶首)가 혹 한 해에 두 번 갈리면 내는 베가 거의 10필에 이른다. 씩 주는데, 권농(勸農)과 이정(里正)으로서 호(戶)를 대통(大統)ㆍ소통(小統)으로 편성한 자가 한 달에 여섯 번 점검하여 한 번이라도 혹시 빠지면 벌로 베를 거두고, 관속(官屬)이 된 자가 더러 매일 한 번씩 점검하여 빠지면 벌로 베를 거두고, 일족의 역[一族之役 일가붙이 대신 당하는 역]은 원근 친소(遠近親疎)를 불문하고 한 사람이 서너 사람 빠진 값을 물게 되어, 베 짠 것이 이 때문에 하나도 없어 어른도 그해 입을 바지저고리를 마련할 겨를이 없는데 어린아이의 강보(襁褓)인들 마련하겠습니까? 이래서 백성이나 아이들이 추위에 보호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졸의 선발[士卒之選]
○우리 조선에 와서는 군역(軍役)이 가장 괴로워 백성들이 이겨 낼 수 없으므로 아들을 가진 사람은 중 되기를 허락하지 않으면 천비(賤婢)에게 장가 보내며, 딸을 둔 사람은 천노(賤奴)에게 시집보내고 값을 받아 일족(一族)의 침해를 면하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내수사(內需司)의 종의 경우는 국가에서 특별히 그 호(戶)를 보호하게 되므로 잔약한 백성들이 더욱 거기에 소속되기를 다툽니다. 지금 살 만한 땅의 전답이 개간되지 않은 것이 아니요 호수가 증가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새로 개간한 밭과 새로 세워진 집을 보면 모두 양반이나 사노(私奴)와 내노(內奴)의 전호(田戶)이고 양인(良人)의 전호는 날로 줄어들어 정군(正軍)의 수가 20만도 못 된다고 하니, 비록 호솔(戶率)을 모두 계산하더라도 40만이 못 될 것입니다.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 더구나 20만 가운데에 실로 쓸 만한 사람은 천 명도 못 되지 않습니까? 아 ! 편안한 나머지 사단과 재앙이 곁에서 생기는 것인데, 변란을 제어할 준비가 허술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만일 만기(萬機)의 여가에 생각이 종사(宗社) 만세의 대책에 미치신다면, 비록 중하기가 몸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응당 아까울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중함이 몸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연전에 비록 노비가 너무 많다는 의논이 있었으나 각기 사정에 끌려 그 근본을 캐지 못하고 말았으니, 신은 참으로 절통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중국의 제도는 비록 경상(卿相)일지라도 감히 사인(私人) 수십 명을 두지 못하는데, 우리나라는 천얼(賤孽)의 무리라도 혹은 사노(私奴)를 100명씩이나 둔 자가 있으며, 훈귀(勳貴)의 집에는 천 명도 넘는 수가 있으나, 국세(國勢)가 고단하고 약함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칠 생각을 하지 아니합니다. 지금 만일 성상께서 먼저 종 두는 것을 제한하시어 내수사의 노비를 각각 천 명씩만 남기시고 그 건장한 자는 뽑아서 군정(軍丁)에 보충하시며, 공경(公卿) 이하는 차례로 한계를 정해서 힘 있는 자를 가려 보병(步兵)으로 정하시고, 전토(田土)가 있으되 몸이 고단한 자는 솔정(率丁)으로 정하셔서, 사람은 누구나 다섯 식구가 된 연후라야 보[保役]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사노가 된 사람은 전토를 가진 자가 적기 때문이다. 10년은 양성하시고 10년은 가르치신다면 20년 뒤에는 100만의 정병(精兵)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련을 부지런히[操鍊之勤]
○신은 이로 인해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는 무예를 검열하는 법이 해마다 거행되지 않았고 올 가을에 다행히 한 번 실시했으나 항오(行伍)가 맞지 않고 기고(旗鼓)가 정돈되지 않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들의 장난 같다고 탄식했습니다. 평시에도 이와 같은데 적을 만나면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상번(上番)한 군사는 하루 건너 활쏘기 연습하는 규례가 있으나 훈련시키는 관원이 준례대로 궐지(闕紙 빠진 값으로 받는 종이) 한 권만 거둘 뿐 활 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경위(京衛)에서도 이 모양인데 외번(外藩)이야 어찌 책하겠습니까? 이러므로 장수는 진법을 알지 못하고 사졸은 부오(部伍)를 알지 못하니 가령 위급할 때를 당한다면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또 우리나라 풍속은 음식을 내놓게 하는 폐단이 없는 곳이 없는데 군졸들이 더욱 심하여 새로 소속되는 자는 신래(新來)라는 예(例)가 있어 거의 몇 마리의 소를 허비하며, 상번(上番)하는 자는 지면(知面), 향미(鄕味) 등의 예가 있어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여러 장수가 받아 내는 침해는 기다리기도 전에 그 소속 패장(牌將)과 장무(掌務)에게 뜯기는 비용이 식량의 배나 되며, 색리(色吏)와 여사(旅師) 된 자에게도 으레 주는 인정포(人情布)가 두어 필이나 되어, 변방에 들어가는 군사는 15필 봉족(奉足) 세 사람에게서 각각 5필씩 거둔다. 을 가지고 가도 끝내는 그래도 부족하여 옷을 팔아 양식을 사니, 만일 허비되는 것으로 군장(軍裝)과 마필(馬匹)을 마련한다면 관에서 비록 주지 않더라도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성대를 견고히[城臺之固]
○남도(南道) 해변에 적선이 정박할 만한 곳에는 어민들의 마을이 즐비하게 있는데도 강진(康津)의 성 남쪽 구십포(九十浦)와 같은 곳이다. 적이 와서 육지에 올라 마구잡이로 불을 놓으면 성안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지려고 합니다. 만일 이 지역의 좌우측에 축대를 에워 쌓고 거기에 많은 군기(軍器)를 두어 급할 때에 백성을 모아 엄히 지킨다면, 저놈들은 본래 의심이 많은 자들이라 을묘년에 노략질할 때에도 경솔하게 인가(人家)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지체하여 머물면서 사람이 없는 것을 살핀 연후에야 들어갔으니, 왜인(倭人)들이 의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배에서 내려 성으로 가고 싶어도 혹 대 위의 군사가 돌아갈 배를 파괴할까 염려하여 감히 배를 놓아 두고 육지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만일 중국의 제도를 따라 성을 쌓고 대를 설치하더라도 한결같이 백성의 힘만 쓰려고 한다면 성과 대는 완성되지 못하고 백성은 이미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양계(兩界)의 병영(兵營) 안에는 해마다 유치해 두는 사미(私米)가 거의 천여 석에 이르는데 다만 개인의 청탁에만 응하고, 기타 포백(布帛)도 쓸데없이 쌓여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하니, 어느 도의 병영(兵營)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병조에 해마다 들어오는 베를 쓸데없이 쌓아 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만일 그 병조 판서나 병사(兵使)된 자가 몸을 나라에 바칠 뜻이 있고 생계를 마련하고 살림살이를 경영할 생각이 없다면, 이 쌀과 베를 내어 굶주리는 백성을 모집하여 나누어 주어서 해마다 두어 성을 완성시킬 것이며, 그러고도 혹 부족하다면, 전하께서 또한 내수사 노비의 공물(貢物)을 내놓아 그 부족을 보충해 주시면, 저 변장(邊將)들이 지극히 미련한 사람일지라도 또한 전하의 지성에 감동되어 다투어 사용(私用)하는 재물을 내놓아 성을 쌓는 일을 돕게 될 것입니다.
■출척을 밝게[黜陟之明]
○어리석은 신이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8도에 감사를 나누어 보내시어 출척(黜陟)의 법을 밝히게 하신 것은 중조(中朝)의 제도에 가까운 일인데, 사정에 따라 공(公)을 망치는 폐단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하여 무릇 모든 관원을 포폄(褒貶)할 때 그 군사와 백성이 기뻐하고 슬퍼함이나 그 직무의 근간하고 게으름은 살피지 않고 먼저 당로(當路)와의 족척(族戚) 관계를 헤아리고 다음으로 자신과의 친분을 따져, 비록 탐장(貪贓)ㆍ암매(暗昧)함이 심한 자라도 으레 상등[最]으로 주문(奏聞)하고 추고(推考)하라는 명이 있을까 염려하며, 죄를 돌릴 곳이 없으면 그중 작은 현(縣)의 감무(監務)나 작은 보(堡)의 권관(權管)을 약간 폄론(貶論)하여 색책(塞責)을 합니다. 그중에 스스로 직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수레를 휘장으로 가리고 순행하며 사사로이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고하(高下)를 정할 뿐이요, 그 사사로이 다니는 자는 거개 항심(恒心)과 항산(恒産)이 없이 사방에서 얻어먹는 자이므로 후하게 대접하는 수령에게는 칭찬을 입으로 다할 수 없이 하고 그 뜻에 차지 않는 자에게는 걸핏하면 근거 없는 말을 해서 훼방하여, 그 말에 참이 없으되 감사는 모두 그 말을 믿는다. 그 능히 경내(境內)를 분주하게 다니며 두루 탐문하여 들판을 보고 정사를 알아 차리거나 기풍을 관찰하고 세속을 살펴서 경하(慶賀)와 처벌을 분명히 하는 자는 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군민(軍民)을 사랑하여 키우는 것이 수령과 장수보다 절실한 사람이 없는데 군사와 백성의 괴로운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수령과 장수들의 기강을 바로잡음이 감사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누구의 소행이 어떤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명 여부를 분별하지 못하고 일체 어물어물 등급을 안배하는데, 6년 동안 백성에게 해독을 끼쳐 온 지경 백성을 도산(逃散)하게 한 자라도 사사로 다니는 사람에게 대접을 잘하여 칭찬을 얻게 되면 한 번도 중(中)을 받지 못하여도 다시 다른 고을로 가서 방자하게 행하며, 비록 철저하게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키우는 데 다한 자라도 사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 훼방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 직을 파면시켜 궁항(窮巷)에서 한을 품게 하니, 재질에 따라 가려 보내고 인품에 따라 맞도록 가르쳐 장래의 일을 권장 격려하는 것을 어느 겨를에 바라겠습니까?
■명령을 엄하게[命令之嚴]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 중외(中外)에 하교(下敎)하신 것이 인심(仁心)과 인문(仁聞)의 발로가 아닌 것이 없으신데, 상사(上司)의 서리(書吏)와 감사(監司)의 영리(營吏)들이 술에 취해 어지럽게 쓰되 반은 빠지고 반은 마구 써서, 작은 각사(各司)와 주현(州縣)에 전달하면 그 서리들은 대강 등록(謄錄)에 써서 관원에게 보이고 관원된 자는 오로지 뜻을 두지 않거나 혹은 끝줄까지 다 보지도 않고서 급히 가져다 두도록 명령하기를, “이것은 지금 세상에는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혹 조정의 명령을 준행하려는 사람이 하리(下吏)에게 물으면, 하리는 그것이 자기에게 이됨이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꾸며 고하기를, “만일 이 일을 행하게 되면 관사(官司)를 부지하기 어렵다.” 하며, 관원인 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치우라고 하면, 하리는 조명(朝命)을 종이 모으는 상자에 던져 두었다가 혹은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가지고 가서 벽을 바릅니다. 애처롭고 저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은 조정에서 무슨 명령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까닭없이 거두어들이기를 옛날처럼 해도 감히 말도 못하고, 괴로운 역사가 전과 같아도 감히 호소하지 못합니이다. 아! ‘임금이 명령하는 것을 신하가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른 것이겠습니까? 장차 임금의 덕을 선양해서 백성에게 이르게 함인데, 지금 당로(當路)의 절간(折簡 편지)이 있게 되면 극히 중난한 일이라도 벽에 붙여 놓고 시행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 유독 성주(聖主)가 백성을 걱정하시는 명령은 쉽기가 손바닥 뒤집기 같은 일이라도 치워 버리고 소홀히 하기를 이같이 하니, 신이 앞에서 이른바 ‘삼강(三綱)이 밝지 못하다.’는 것이 여기서 증험될 수 있습니다.
■발문(跋文) : 안방준(安邦俊)
○위의 글은, 우리나라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 7년 갑술에, 중봉(重峰) 조 선생(趙先生)이 질정관(質正官)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의 훌륭함을 살펴보고서 우리나라에도 시행해 보고 싶어 지은 글이다.
돌아온 뒤 선생은 상소 두 장을 초하였는데, 이는 사무(事務)에 긴절한 것 8조(條)와 근본에 관계되는 것 16조였다. 선생은 먼저 8조의 소(疏)와 질정록(質正錄) 1편(篇)을 올리며, “우리나라도 명 나라 제도를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왕(先王)께서 비답(批答)하기를, “수천백 리 밖이라 풍속이 같지 않은데, 만일 풍기(風氣)와 습속(習俗)의 다름을 헤아리지 않고 그대로 강행(强行)하려고 하면 한갓 해속(駭俗)스럽게만 되고 일은 맞지 않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말이 쓰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감히 다시 다음 16조의 소는 올리지 않았는데, 지금 그 유고(遺稿)가 아직 다행히 남아 있다.
삼가 보건대, 선생의 뜻은 그대로 명 나라 제도를 본받아 시행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를 계속해 밀고 올라가 3대(三代)의 정사를 만회해 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명 나라의 제도도 오히려 시행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밖의 일을 또한 어찌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리하여 입을 다물고 물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아! 선생은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 39)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 7)에 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는 겨우 30이었다. 그런데 그 식견과 학문의 힘이 이미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기자(箕子) 이래 수천 년 동안 세상에 드문 영기(英氣)를 타고난 걸출한 참선비[眞儒]이시다. 이러한 신하가 있었는데도 말과 계책이 쓰이지 않아 종신토록 불우(不遇)했고 끝내는 절의를 지켜 돌아가셨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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