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이의현(李宜顯):1669-1745
■이의현(李宜顯)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문학(文學)에 뛰어나, 숙종 때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 의해 당대 명문장가로 천거되었다.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설서(說書)·정언(正言)·금성현령(金城縣令)·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12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판서 윤덕준(尹德駿)과의 불화로 부제학으로 옮겨 그 뒤 대사성을 지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2년여 재임한 뒤 도승지·경기도관찰사·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재임하던 중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문제로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일어나 많은 노론 관료가 죄를 입자, 그 역시 정언 정수기(鄭壽期)의 논척(論斥)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하자, 풀려 나와 1725년(영조 1) 형조판서로 서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면서 명류(名流)를 조정에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같은 해 왕세자 죽책제진(竹冊製進: 세자의 책봉을 대나무에 새긴 글을 만들어 올림)의 공로로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와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겸했다.
공정한 성품을 인정받아 특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어, 유봉휘(柳鳳輝) 등 소론의 죄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예조판서로 옮기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세자빈객을 겸하다가 1727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때 좌의정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김일경 소하(疏下)의 이진유(李眞儒) 등 5인의 죄를 성토하고 처형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지나친 강경책에 염증을 느낀 왕에 의해 정권이 소론에게로 넘어가는 정미환국 때 파직되어 양주로 물러났다.
이듬해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용되어 반란 관련자들의 치죄를 담당하였다. 이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732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5년 특별히 영의정에 임명되어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신원(伸寃: 원통함을 품)을 요구하는 노론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도록 부탁받았으나, 신원할 수 없다는 반야하교(半夜下敎: 밤중에 내리는 교서)에 사직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
그러나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의 구원으로 곧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어 양주에 머물면서 국가의 자문에 응하였다. 1739년 영중추부사로 승진, 1742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같은 것임.)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신임옥사 때나 정미환국 등의 비상시 때마다 청의(淸議)를 지켜 의론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영조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보복에 급급했던 민진원(閔鎭遠)·조관빈(趙觀彬) 등의 전횡을 견제하고 청론(淸論)을 심으려 노력해 사림의 신망을 크게 얻었다.
민진원이 죽은 뒤 노론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신원과 신임옥사가 무옥(誣獄)임을 밝히는 데 진력하였다. 그 결과 1740년의 경신처분(庚申處分)과 1741년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신임옥사 때의 충역시비(忠逆是非)를 노론측 주장대로 판정나게 하였다.
청검(淸儉: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실천, 청백리로 이름났다. 「금양위박미비(金陽尉朴瀰碑)」·「충정공홍익한갈(忠正公洪翼漢碣)」 등의 글씨가 있으며, 저서로는 『도곡집(陶谷集)』 32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경자년(1720, 숙종 46) 7월 8일에 나는 예조 참판으로서 동지사 겸 정조성절진하 정사(冬至使兼正朝聖節進賀正使)에 승임(陞任)되었다. 처음에 척숙(戚叔)이신 송상기(宋相琦)께서 이달 5일에 정사(正使)에 임명되고 충주 목사(忠州牧使) 이교악(李喬岳)이 부사(副使)에 임명되고, 김화 현감(金化縣監) 조영세(趙榮世)가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송숙(宋叔)이 몸이 약하고 병이 있어 먼 사행길을 감당할 수가 없고, 그 품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무 지장 없이 갈 만한 사람이 없다 하여, 종2품인 나와 관서백(關西伯) 이광중(李光仲)을 의망(擬望)했는데, 그중에서 내가 낙점(落點)되고 품계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랐다. 전일에는 동지사(冬至使),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등 세 사행(使行)을 각각 나누어 떠나게 하여 동지사는 그해 동지에 들어갔고, 정조사는 정조에 들어갔다. 또 성절이란 곧 황제의 생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사신도 역시 그날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 연간(年間)에 와서는 왕래하는 데 폐가 된다고 해서 이들을 합쳐서 모두 일행을 만들어 정조에 들어가도록 하고, 동지와 성절의 하표(賀表)와 방물(方物)도 모두 이 편에 보내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지와 성절은 비록 날짜가 지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여기에 구애되지 않고 지금까지 예(例)가 되었다.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성문 밖에서 말을 타고 일산을 떼었다. 대개 여기에는 궁궐이 있어 연경(燕京)과 같이 여기는 곳이므로 전부터 수레를 타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시(未時)에 찰원(察院)에 들어갔다. 이곳은 성경(盛京)이라고 하는데 성은 방형(方形)으로 2리가 되는데, 한쪽에 각각 문이 2개가 있어서 모두 8개의 문이 있다. 또한 문로(門路)는 가로세로로 성안을 꿰뚫어서 마치 정(井)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남과 북의 두 길이 동과 서 두 길과 서로 교차되는 곳에는 모두 십자 누각(十字樓閣)이 서 있고, 민가가 즐비하며, 시장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우며,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이곳은 곧 병자년(1636, 인조 14), 정축년(1637, 인조 15) 후에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볼모로 있었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三學士)가 잡혀 와 있던 곳이다. 그들이 와 있던 사실을 물어보았으나 아는 자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세관(稅官)이 아침에 여러 관리를 거느리고 문랑(門廊)에 나와 앉아서 짐짝을 빠짐없이 점검하여 들여보낸 뒤에, 역관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나는 본래 의주(義州)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자손으로, 여기에 온 지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듣자니 본국 사신 일행이 들어온다 하기에 얼굴이라도 한번 바라보기를 간절히 바라니 잠시 교자를 멈추길 바랍니다.”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자 세관은 교자가 오는 것을 보고는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 나와서 교자 앞에 와 서더니, 교자 문을 열고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바로 본국 사람입니다. 내 비록 여기에서 벼슬을 하지만 어찌 근본을 잊겠습니까? 이제 여러 어른을 만나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사신들이 나를 와서 보게 되면 수고로우실 것 같아서 감히 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고 한다. 말소리도 매우 은근하고 예모(禮貌)도 아주 공손했다. 부사와 서장관의 교자 앞에 가서도 역시 그렇게 했다. 우리들은 손을 들어 사례하고, 또 역관을 시켜 대신 사의를 전하게 하자, 드디어 읍하고 갔다.
○...그 말이 상당히 격을 갖추고 엄해서 훈유(訓諭)하는 체통을 얻었으니, 오랑캐로서도 이같이 하는 것은 또한 이상한 일이다. 또 그 사습(士習)을 논한 것이 뚜렷이 우리나라 근일의 폐단과 선비의 풍도가 단정치 못한 것을 그려 낸 듯하니, 천하가 다 같다고 할 일로,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
○황제가 도로 오문(午門)에 들어간 뒤에는 좌위의 시위하는 사람들도 모두 오문 밖으로 물러나간다. 조금 있다가 여러 모양의 의장이 다시 뒤에 줄지어 선다. 코끼리 다섯 마리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데 바라다보니 마치 언덕 같다. 동서로 나뉘어서 황제의 수레 곁에 섰는데 모두 금색 안장을 씌웠고, 노란 헝겊을 덮었다. 코끼리 하나마다 사람이 그 위에 타고 앉아서 부리는데, 이것이 이른바 상노(象奴)라는 것이다. 코끼리 코는 길어서 땅에 닿고, 좌우 어금니는 4, 5척이나 된다. 눈은 작아 소의 눈과 같고 입술은 코 밑에 있는데 뾰족하기가 마치 새의 부리와 같다. 귀는 크기가 키[箕]와 같으며, 온몸이 회색이고 털은 짧다. 꼬리는 뭉툭하여 쥐 모양과 같다. 꼴을 가져다가 그 앞에 던져 주자, 코끼리가 코로 가져다 말아서 차례차례로 입속으로 넣는다. 입은 깊이 있고 코는 굽었기 때문에 말아서 가져가기가 몹시 어렵지만 입에 가까워지면 입 안에 넣는 것은 몹시 빠르다.
○금년에는 우리나라 사신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공물(貢物)을 가지고 온 자가 없고, 몽고에서만 수십 명이 왔다. 우리나라 사신은 원래 몽고의 아랫자리에 앉는 것이 예로 되어 있다. 그런데 통관들이 우리들을 이끌어 조금 사이가 뜨게 앉도록 하고서는 말하기를,
“비록 위아래로 나란히 앉도록 한 예(例)가 있지만, 저들은 몹시 더러우니 옷자락이 닿게 할 수가 없다.”
고 한다. 대개 통관이 우리나라 사람의 자손이라 모든 일을 우리나라 입장에서 하다 보니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른바 몽고 사람이라는 것은 이마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용모가 이상하고 입은 옷은 추하고 더러워서 악취가 사람의 코를 찌르기 때문에 떨어져 앉아 있는데도 마음속으로 몹시 더럽게 여겨진다.
○역관들이 앵무새 하나를 얻어 왔는데, 털은 푸르고 부리는 빨갛고, 발은 붉으며 꼬리는 푸르고 아주 길었다. 철사로 매어서 쇠로 만든 시렁 위에 놓아 두었다. 앵무새는 시렁을 오르내리며 부리로 시렁을 자주 쪼았는데, 그 뜻이나 태도가 조급하고 소요스러울 뿐, 별로 말을 잘하는 일은 없었다.
○김삼개(金三介)가 말하기를,
“내일 황제가 창춘원(暢春苑)에서 남해자(南海子)에 오겠다고 했는데, 이른바 해자(海子)라는 것은 곧 북경 남쪽에 새와 짐승을 놓아 먹이고 과수를 심은 곳으로, 그 물이 몹시 넓어 바라보면 바다와 같은데 거기에 이궁(離宮)이 있습니다.”
하고, 또 ‘27일에는 마땅히 준화주(遵化州)에 가서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의 묘(墓)에 참배할 것인데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세폐(歲幣) 방물(方物)인 면주(綿紬), 자리[席子], 피물(皮物), 백면지(白綿紙), 대소호지(大小好紙), 환도(環刀) 등 물건은 태화전(太和殿) 안에 있는 내무부 각 창고에 실어 들이고, 세폐미(歲幣米) 역시 대궐 문 서쪽 담 밖 창고에 갖다 바쳤다. 쌀은 처음에 빛이 나쁘다고 트집 잡는 것을 역관들이 관서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그렇다고 말했더니, 수량을 계산하여 바치면서 그 물건들의 숫자도 맞추어 보지 않고 바로 여러 창고에 넣었다 한다. 순조롭고도 무사하게 되었다 하겠다.
○신종(神宗)이 그림을 그린 가리개는 값이 비싸서 사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더니, 역관 중에 서반(西班)과 서로 친한 자가 있어 그로 하여금 흥정을 붙이게 해서 부채, 화철(火鐵), 어물(魚物) 등 잡물(雜物)을 주고서 살 수가 있었다. 이로써 더욱 그것이 고의로 위조해서 비싼 값을 받으려는 계획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서양화(西洋畫)도 샀다. 남경(南京) 승[僧]이 《오륜서(五倫書)》 2투(套) 62책을 가지고 와서 파는데 흰 종이에 큰 글씨로 썼고 책이 몹시 길고 크다. 푸른 베로 표지를 했고, 각 권마다 정통 황제(正統皇帝 명 영종(明英宗))의 어보(御寶)를 찍었다. 몹시 진귀하고 볼 만한데 값이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길가에 붉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한 여인이 있는데, 머리에는 붉은 전립(氈笠)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좌우로 따르는 말탄 자와 여인들이 합해서 7, 8쌍이나 된다. 역졸을 시켜서 물어보니,
“이 사람은 몽고의 왕모(王母)인데, 그 아들이 나이 어려서 정조(正朝)에 들어와 하례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
○고려보(高麗堡)를 지나니 개간한 논이 10여 경(頃)이나 된다. 땅이 몹시 기름져서 벼 심기에 알맞은 곳이 이곳만은 아니지만, 이 보(堡)만은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유독 논을 만든 것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하
○출발 후 서울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23일이 걸렸다.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32일이 걸렸고, 북경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돌아올 때에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8일이 걸리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13일이 걸렸다. 왕복한 것이 도합 138일이요, 이역(異域)에 있었던 것이 101일이다. 이수(里數)로는 왕복을 모두 계산하여 대략 6000여 리가 되고 지은 시가 392수이다.
○찰원은 거의 모두가 퇴폐했기 때문에 전부터도 늘 사가(私家)를 빌려서 자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낮이나 저녁이나 한 곳에서 머물면 그 집에 반드시 세를 내야 하는데 그것을 방전(房錢)이라고 한다. 이것을 종이나 부채 등 각종 물건으로 주었는데, 심술꾼들이 물건을 더 요구해서 혹은 다투는 일이 있는 것도 괴로웠다. 만일 한 참(站)을 지나가려면 반드시 수행하는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주선을 청한 뒤에라야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비용이 꽤 든다.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공가(公家)나 사가(私家)는 대개 남향으로 지은 것이 많고, 비록 하층민의 초가일지라도 모두 오량(五樑)으로 지었는데, 들보가 긴 것은 20여 척이나 되고 작은 것도 14, 5척은 되었다. 그중에 큰 집은 7량, 9량이 되는 것도 있고, 더러 들보가 없는 집도 있는데 칸살이 많고 적은 것을 불문하고 모두 일자로 되어 굽었거나 잇대는 제도가 없다. 전면 중앙에는 문을 내고 좌우에는 창을 냈다. 동쪽, 서쪽, 북쪽 세 면에는 모두 담을 쌓았고, 북쪽 담 한가운데에 문을 내어 남쪽 문과 서로 곧게 통하도록 해서 사람이 왕래하게 하였다. 앞뒤 문의 중간이 곧 정당(正堂)이요, 정당 좌우에 각각 문이 있는데 그 안이 곧 방이다. 방 안에는 창을 달고 온돌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걸터앉을 만하고, 길이는 1칸이나 되며, 넓이는 누울 수는 있지만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다. 온돌 밖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는데, 가난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엌이 방 안에 있는데, 모두 솥을 걸어서 밥 짓는 연기가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괴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항상 습관이 돼서 그렇다.
○북경성 안의 모든 거리와 궁벽한 골목 좌우에는 모두 하수도를 파 놓아서 온 성안의 낙숫물이나 빗물이 모두 여기로 들어가 옥하(玉河)로 모여 성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성안에서는 또 거위, 오리, 양, 돼지 같은 것을 먹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성안에는 도랑도 없고, 오물도 없다.
인가에는 변소가 없고 대소변을 모두 그릇에 받아서 버린다. 성안의 궁벽한 거리에는 가다가다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인가에서 분뇨를 버리는 곳이다. 이것이 차면 실어서 밭으로 쳐낸다. 그 변 그릇은 요강 같거나 술 담는 그릇과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보면 술그릇으로 알고 들이마신다. 호인(胡人)도 역시 우리나라 요강을 가져다가 밥그릇으로 썼다니 참으로 똑같은 일이다.
○남자의 의복은 부자로 사치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포(大布)를 쓴다. 비록 북경이라고 해도 역시 그러하다. 여자의 의복은 가난한 자 이외에는 모두 비단을 입는데, 아무리 궁촌(窮村)이라도 역시 그러하다. 여자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털을 묶어 상투를 만들고 이것을 검은 비단 등으로 싼다. 그리고 관자놀이에는 깁을 입힌 옥판(玉版)을 붙이고 분칠을 하고 꽃을 꽂는다. 그런데 그 남편은 의복이 떨어지고 얼굴이 누추하여 언뜻 보면 여자의 종으로 안다.
○모든 크고 작은 역사(役事)는 모두 남자가 맡아 한다. 수레를 끌고, 밭을 갈고, 나무를 지는 일 외에도 물을 긷고, 쌀을 찧고, 곡식을 심는 일로부터 옷감을 짜고, 옷을 짓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자가 한다. 여자는 문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여자가 하는 일이란 신 바닥을 꿰매는 일뿐이다. 촌 여자는 곡식을 까불고 밥 짓는 등의 일을 하기도 한다. 상점에는 절대로 여자가 왕래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여자는 대체로 사람을 피해, 우리들이 상점에 들어가면 갑자기 피해서 숨는 자가 많다. 그러나 역졸(驛卒)들은 피하지 않고 심지어 함께 섞여 앉아서 담배도 피우고 무릎을 마주 대고 손을 잡아도 꺼리지 않으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낙타는 본래 사막에서 난다. 이것은 능히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가기 때문에 기르는 자가 많다. 그 모양은 키가 한 길이나 되고 몸은 파리하고 머리는 작고 목이 가늘고 아래로 굽었는데 걸을 때는 걸음을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머리는 양과 같고 발은 소와 같은데 발굽은 얇고 작아서 털 속에 있다. 등에 2개의 혹이 있어서 저절로 안장 모양을 이루는데, 앞의 혹에는 털이 있어 흩어져 드리운 것이 마치 말에 갈기가 있는 것과 같다. 그 혹은 낙타가 살찌면 딱딱하게 일어서고 파리하면 물렁물렁하게 쭈그러들기 때문에 항상 소금을 먹인다. 소금을 먹이면 살찐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코로 누런 물을 뿜는데 누린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새끼로 코를 꿰어 그렇게 못하게 한다. 그 힘은 말 세 필이 싣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 소리는 소와 비슷하게 운다. 성질이 바람을 좋아해서, 바람이 불면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응한다. 그 빛깔은 대개 누르고 검으며, 또한 흰 것도 있다. 말도 빛이 흰 것이 열에 여섯, 일곱은 된다. 소는 흰 것도 있고, 회색, 흑색과 얼룩진 것도 있는데, 회색과 백색이 많고 순전히 누런 것은 전혀 없다. 돼지도 역시 흰 것이 많고, 닭은 털과 깃이 희게 얼룩진 것 속명(俗名)으로 구수치(求數雉)라 한다. 이 많고, 누렇거나 붉은 빛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대체로 육축(六畜)은 모두 흰 빛이 많은데, 요동과 연(燕) 지방은 서쪽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양 떼가 매우 많다. 모두 붉은 끈으로 머리와 뿔을 묶었고, 등에는 모두 붉은 점을 찍었는데, 이것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매일 아침이면 시장 점포 곁에 열(列)을 지어 놓는데, 거의 100여 마리나 된다. 머리를 구부리고 발을 나란히 하고 가지런히 서 있어 어지럽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말도 또한 한 조그만 아이가 수백 마리 떼를 몰고 가는데, 끝내 옆으로 달아나거나 어지럽게 달리는 놈이 없다. 호인(胡人)이 금수를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장기이다.
말이 멀리 가는 놈은 비록 하루에 수백 리를 가더라도 도중에 풀이나 콩을 먹이지 않고 자는 곳에 도착해서야 한두 시간 쉰 뒤에 비로소 안장을 끄르고 풀과 콩을 먹인다. 밤이 깊은 뒤에 맑은 물을 먹이고 새벽에 이르러서 또 풀과 콩을 먹인다. 물은 있으면 먹이고 없으면 그대로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가서야 먹인다. 여러 달 동안 잘 먹여서 몹시 살진 놈은 멀리 가더라도 콩을 먹이지 않고 밤마다 긴 풀 한 묶음과 맑은 물만 먹이다가 8, 9일이 지난 뒤에 비로소 콩을 먹인다. 먹이고 기르는 방법이 우리나라보다 간편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요령을 얻은 것이다. 또 추운 계절을 만나면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마의(馬衣) 곧 이른바 삼정(三丁)이다. 로 등을 덮어 주지만, 연중(燕中)에서는 들판이나 마당에 내버려 둔다. 원래 덮어 주는 일이 없으나 그래도 역시 상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은 또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다. 발꿈치에는 쇠를 대지 않는데, 나귀는 쇠를 대기도 하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말을 타려면 따로 사람을 시켜 끌게 하지만 연중 사람은 이것을 큰 웃음거리로 안다. 어린애들이 말을 탈 때면 사람을 시켜 말을 끌게 하면서 권마성(勸馬聲)을 내는데, ‘고려 고려(高麗高麗)’라고 하면서 간다. 이것은 장난으로 권마성을 내어서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다. 일찍이 옛 그림을 보니, 말을 탄 자가 자기 손으로 말을 몰고 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사람을 시켜 말을 끌게 하는 것은 실상 우리나라 법이다. 자기 스스로 말을 모는 것은 호인(胡人)의 풍속일 뿐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중국 사람 모두가 그러했다.
또 연중 사람은 죄를 다스릴 때에 채찍으로 그 궁둥이나 다리를 때릴 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곤장 치는 걸 보면 몹시 해괴하게 여긴다.
○개는, 큰 놈은 망아지[駒]만 하여 사슴이나 노루를 잡을 수 있고 작은 놈은 고양이와 같은데 더욱 몸이 가볍고 재빠르다. 호인(胡人)들은 개를 가장 소중히 여겨서 사람과 개가 한방에서 자고, 심지어는 함께 이불을 덮고 눕기도 한다. 도중의 일인데, 한 호인의 집이 대단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벽에는 채색 그림을 바르고 방에는 붉은 융을 깔았는데, 개가 그 위로 걸어다니면서 놀아 보기에 추하였다. 또 우리가 상(賞)을 받던 날 개와 호인이 서로 반열 속에 섞여 있었으니, 더욱 해괴하다.
○청인들은 모두 한어(漢語)에 능하지만, 한인은 거의 다 청어(淸語)에 익숙하지 못하다. 길에서 본 일인데, 청인과 한인이 섞여 있게 되면 모두 한어로 말하고 절대로 청어로 말하는 자는 없다. 청인은 만주(滿洲)라고 하는데 한인은 만자(蠻子)라고 부른다. 만주란 본래 여진(女眞)의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런데 만자라고 부르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조석 식사는 밥도 먹고 죽도 먹는다. 남녀가 한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서 각각 조그만 그릇으로 나누어 먹는데, 한 그릇을 다 먹으면 또 한 그릇을 더하여 양에 따라 먹는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도 주객(主客)이 함께 한 탁자에서 먹는다. 손님이 여러 사람이 되어도 역시 따로 상을 차리지 않고 다만 한 사람 앞에 한 쌍의 수저와 1개의 잔을 놓는다. 그리고 종자(從者)가 병을 가지고 술을 따르는데 마시는 대로 술을 따른다. 잔은 몹시 작아서 두 잔이 겨우 우리나라 한 잔만 하다. 그런데 그나마도 한꺼번에 마시지 않고 조금씩 마신다. 보통 반찬은 촌가(村家)에서는 김치 한 보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잣집에서는 많이 차린다 해도 구운 돼지고기와 ‘열과탕(熱鍋湯)’ 따위에 지나지 않을 뿐, 별다른 반찬은 없다. 이른바 열과탕이라는 것은 양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계란 등 여러 가지를 썰어서 서로 섞어 삶아서 국물을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의 잡탕과 같다. 이것은 본래부터 연중의 맛있는 반찬이라 하지만 누린내가 나고 기름기가 몹시 많아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또 이른바 분탕(粉湯)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물국수로서 간장 물에 계란을 넣은 것으로 역시 열과탕과 같은 종류인데, 조금 담백해서 기름기가 그다지 많지 않다. 모든 음식은 모두 젓가락을 쓰고 숟가락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숟가락도 있는데, 사기로 만들었으며 자루는 짧고 담는 부분은 깊다. 젓가락은 나무로 만드는데, 어떤 것은 상아로 만들기도 하였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는 반드시 차로써 다례(茶禮)를 행하는데 역시 술 돌리듯이 한다. 사람마다 각각 종지를 놓고 마시는 대로 따른다. 차는 반드시 뜨거워야 하고 종지에서 조금 식으면 병 속에 도로 붓는다. 차를 마시는 데는 천천히 마시는 것을 요한다. 차 한 잔을 마시는 데 거의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 걸린다. 차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늘 마시지 않는 때가 없다. 동팔참(東八站)과 같이 차가 귀한 데에서는 볶은 쌀로 대신하는데 이것을 노미차(老米茶)라고 한다.
○담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차와 함께 내놓는다. 그런 이유로 담배를 ‘연다(煙茶)’라고 한다. 시장 상점에서 파는 자가 많으며, ‘명연(名煙)’이라고 써 붙인다.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그 담배는 가늘게 썰고 몹시 바싹 말려서 습기 한 방울도 없기 때문에 한숨에 타 버린다. 그러나 역시 계속하여 피우지는 않고 한 대만 피우고 만다. 그래서 온종일 피우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네댓 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는 또한 가늘고 짧아서, 이것으로 우리나라 담배를 피우게 하면 한 대를 다 피우기도 전에 눈썹을 찡그리고 그만두며, 맵고 독하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계속하여 여러 대를 피우는 것을 보고는 눈을 굴리면서 두려워하는 빛이 있으니, 이것은 그 중독됨을 두려워해서이다.
○실과로 말하면 배는 크기가 계란만큼이나 작지만 맛은 좋다. 잘 익은 배는 역시 맛이 좋다. 감은 우리나라 것에 비하면 몹시 큰데 담담하고 맛이 없다. 말려서 둥글게 만든 것이 우리나라 준시(蹲柹)와 같은데 맛이 약간 좋다. 그러나 그 달기가 밤만은 못하다. 개암, 석류, 사과, 능금도 맛이 역시 보통이다. 오직 아가위만이 크기가 오얏만한데 벌레 먹은 것이 하나도 없고 과육이 많고 맛이 좋다. 포도는 자줏빛 나는 것이 맛이 가장 좋다. 대추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에 비하면 배나 더 크고 살은 두껍고 씨는 작다. 이른바 흑조(黑棗)라는 것이 더욱 좋다. 감귤(柑橘)은 6, 7종이나 되는데, 그 맛이 모두 좋다. 그중에서 유감(乳柑)은 가죽이 유자와 같고, 맛은 배나 더 좋다. 가장 큰 것은 맛이 시어서 먹을 수 없다. 여지(荔支)와 용안(龍眼) 따위는 남방에서 오는 것인데 꽤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 말린 것이다. 전번에 사신이 왔을 때, 날것을 얻어서 먹어 보니 맛이 몹시 좋았다고 하였는데, 이번 길에는 맛볼 수가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수박씨는 모양이 둥글고 검으며 살이 두꺼워서, 우리나라의 뾰족하고 얇은 것에 비교할 바 아니다. 수레에 실려 시장에 쌓여 있어서 남녀노소가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항상 먹는다. 빈랑(檳榔)은 남방에서 나는데 단단해서 먹을 수 없고, 맛도 또 시고 떫다. 그러나 연중(燕中)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두고 항상 씹어 먹는다.
○오곡은 모두 있으나, 옥수수가 가장 흔하고, 그 다음은 콩이요, 그 다음은 조다. 콩은 빛이 검고 작은 것이 더욱 흔하다. 그 모양은 우리나라 흑두(黑豆)와는 조금 다르며 맛도 또한 없다. 소나 말에게 모두 이 콩을 먹인다. 대개 좁쌀과 옥수수로 밥 짓는데 옥수수가 더 많다. 이따금 밭벼도 있다. 북경에는 논벼가 있다. 논벼란 것은 논에 심은 것으로 그 빛이 희기가 은과 같으나, 밥을 지어 놓으면 딱딱하다. 그래도 밭벼에 비교하면 낫다. 대체로 논벼 쌀은 우리나라 것만 못해서, 황제에게는 역시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쌀로 밥을 지어 올린다고 한다.
○생선은 중순어(重唇魚), 메기, 쏘가리, 잉어, 붕어가 가장 많은데 맛은 모두 좋다. 채소는 무, 미나리, 고사리, 배추, 마늘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더러 김치를 만드는데 맛이 모두 짜다. 마늘은 더구나 항상 먹는 것으로, 누린내가 나는 것은 비단 오랑캐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역시 항상 마늘을 먹기 때문에 언제나 매운 기운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오이는 절여 두어 짜게 해 가지고 흰죽 먹을 때 먹는다. 이것이 이른바 오이지인데 맛이 가장 좋아서 우리나라에서 담근 것보다 못하지 않다. 대소릉하(大小凌河)의 것은 달고 짠 것이 우리나라 것과 아주 비슷하지만 맛은 못하다.
○동팔참(東八站)의 꿩 맛은 우리나라 것만 못하지 않다. 기름진 꿩과 메추리도 또한 맛이 좋다. 북경에 들어가니 계속하여 닭, 거위, 양, 돼지, 쇠고기를 내는데, 닭은 먹을 만하나 거위는 맛이 좋지 않다. 양을 푹 익힌 것이 맛이 가장 좋으나 뜨거워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돼지고기는 비록 연하기는 하나 또한 몹시 누린내가 나고 기름기가 많다. 쇠고기도 역시 우리나라 것만 못하다. 오직 족(足)을 삶은 것은 꽤 맛이 있다. 노루나 사슴고기도 또한 맛이 좋다. 술은 계주(薊州) 술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독하지 않아서 쉽게 깬다. 어떻게 담그는 것인지 모르지만, 대개 찰수수로 만드는 것 같다. 우리나라 소주(燒酒)는 연중(燕中) 사람들은 너무 독하다고 해서 마시지 않고, 마셔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간장은 모두 콩과 밀을 섞어서 만드는데, 만드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것과 같다. 한 덩어리의 크기가 말[斗]만하다. 간장 맛은 싱겁고 약간 시다. 시장에서 파는 간장은 혹 팥을 섞어서 만든다고 하는데 맛은 더욱 좋지 않다.
○땔나무는 모두 옥수숫대를 쓰고, 그것이 아니면 버드나무를 쓴다. 이것은 모두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베지 않으니, 뽑힐까 염려해서이다. 숯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목탄도 있다. 석탄은 빛이 검고, 그 덩어리는 크고 작은 것이 똑같지 않다. 잘게 부서진 것은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풀을 섞어서 무늬가 있는 벽돌을 만든다. 시장에 무더기로 쌓인 것이 모두 이것인데, 불에 타지 않는 것은 그 불을 껐다가 다시 태운다고 한다. 석탄은 그 연기가 독해서 연기를 쬐면 사람이 머리가 아프다. 내가 사관(舍館)에 머문 며칠 동안 두통으로 몹시 괴로웠는데 그 까닭을 몰랐다가 시험 삼아 석탄을 꺼내고 태우지 않았더니, 즉시 아프지 않아, 그 독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연중(燕中) 사람은 계속하여 때고 있어도 괴로워하지 않으니, 이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그런 것이다.
○그릇은 궁촌(窮村)이나 벽향(僻鄕)에서는 모두 그림 그린 사기그릇을 쓰는데, 그림 그린 사기가 아니면 모두 검은 사기이다. 흰 사기는 보기 드물고, 구리나 놋쇠 그릇은 거의 없다. 모든 사관(寺觀)의 향로나 인가의 술통, 찻그릇, 촛대는 흰 주석으로 된 것이 많다. 대소릉하(大小凌河) 사이의 상점에 걸어 놓고 파는 호로소강(葫蘆小釭)이 있는데, 투명하기가 마치 유리나 수정과 같다. 그런데 이것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손을 대면 바로 깨지므로 다만 어린애가 한때 가지고 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밥을 지을 때는 모두 가마솥을 쓴다. 가마솥의 바닥은 평평하기 때문에 쉽게 끓는다. 냄비 종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 긷는 그릇은 모두 버들로 짠 것을 쓰는데 가볍고 깨지지 않으며, 또한 새지도 않는다. 우물 주둥이는 몹시 좁아서 겨우 물 긷는 그릇이 드나들 정도이다. 말[斗] 모양은, 주둥이는 넓고 밑바닥은 좁은데, 그 반을 막아서 주둥이가 둘이다. 그 크기는 우리나라 곡(斛)의 거의 반이 된다. 되[升]는 우리나라 말[斗]만 하다. 활은 모두 뿔로 만들었고, 길기는 우리나라 것에 비교하면 5분의 2는 더 있다.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들었고, 대에는 황새깃을 꽂았으며, 화살통 하나에 7개씩 넣는다. 조총(鳥銃)은 길이가 거의 한 발이나 되어 세워 가지고 멘다. 말 위에서 쏘아도 나는 새를 맞힐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벽돌을 만들려고 해도 공역(工役)이 몹시 거창해서 많이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연중(燕中)에서는 잠깐 사이에 능히 만들어 내고 또 몹시 견고하니, 흙이 우리나라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면 공인(工人)들이 묘한 방법을 알아서 그런 것인가? 연중에서는 온돌방에 구들장을 쓰지 않고 다만 벽돌만 깐다. 불을 땔 때는 수숫대를 쓴다. 가볍고 힘이 없어서 나무만 못한 것인데도, 10여 줄기만 때면 7, 8칸이나 되는 긴 위아래 온돌방이 비록 거리가 넓고 멀어도 더운 기운이 밤새 한결같고, 또 차고 더운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온돌방을 잘 만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자기(磁器)에 그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희미한 것이 많은데, 연중(燕中)의 그릇은 마치 가는 붓으로 그려서 만든 것과 같아, 실이나 터럭만큼 가느다란 것도 자세하여 분명하니, 또한 구워 만드는 기술이 능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모든 일용의 소소한 물건을 매매하는 데는 온 천하가 대개 돈을 쓰는데, 우리나라 돈은 연중에서 쓰지 못하기 때문에 북경 경계에 들어가면서는 백금이나, 종이, 부채 등 물건을 연중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서 물건에 따라서 그 돈을 준다. 그 돈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소전(小錢)으로서 333개를 1냥으로 친다.
○연중 경계에 들어가면 밀랍은 볼 수가 없고, 모두 짐승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고 조그만 나무를 그 속에 꽂아서 태운다. 초의 모양은 상당히 큰데 기름이 끝내 흘러내리지 않고 밝고 깨끗하여 밀로 만든 초보다 나았다. 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 따뜻하면 가지고 멀리 갈 수가 없다.
○정세태(鄭世泰)는 북경의 큰 장사꾼으로 그 부(富)함은 견줄 사람이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사 오는 비단은 모두 그 집에서 나온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이 집에서 구하면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꽃, 실과, 대나무, 돌, 명향(名香), 보기(寶器)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구비되어 있다. 집은 옥하교(玉河橋) 큰길 남쪽에 있는데, 제도가 몹시 커서 궁궐에 견줄 만하다. 우리나라의 매매하는 주인이 되는 때문에 역관들은 크건 작건 매매할 것이 있으면 그 집으로 달려가므로 밤이나 낮이나 시장과 같다. 이 사람은 남쪽과도 교역을 하는데 이번 화물이 도착하는 것이 조금 늦어서 역관들이 이것 때문에 행기(行期)를 늦추고 있는 것이니, 사신 행차가 더디고 빠른 것도 이 사람이 실상 그 권리를 잡고 있다. 그 용모는 파리하고 검어서 풍채가 몹시도 없어, 만금(萬金) 재산을 가진 자 같지가 않다고 한다.
○우리가 산 책은 다음과 같다. 《책부원귀(冊府元龜)》 301권,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100권, 《도서편(圖書編)》 78권, 《형천비편(荊川稗編)》 60권, 《삼재도회(三才圖會)》 80권, 《통감직해(通鑑直解)》 24권, 《명산장(名山藏)》 40권, 《초사(楚辭)》 8권, 《한위육조백명가집(漢魏六朝百名家集)》 60권, 《전당시(全唐詩)》 120권, 《당시정성(唐詩正聲)》 6권, 《당시직해(唐詩直解)》 10권, 《당시선(唐詩選)》 6권, 《설당시(說唐詩)》 10권, 《전주두시(錢註杜詩)》 6권, 《영규율수(瀛奎律髓)》 10권, 《송시초(宋詩鈔)》 32권, 《원시선(元詩選)》 36권, 《명시종(明詩綜)》 32권, 《고문각사(古文覺斯)》 8권, 《사마온공집(司馬溫公集)》 24권, 《주염계집(周濂溪集)》 6권, 《구양공집(歐陽公集)》 15권, 《동파시집(東坡詩集)》 10권, 《진회해집(秦淮海集)》 6권, 《양귀산집(楊龜山集)》 9권, 《주위재집(朱韋齋集)》 6권, 《장남헌집(張南軒集)》 20권, 《육방옹집(陸放翁集)》 60권, 《양철애집(楊鐵厓集)》 4권, 《하대복집(何大復集)》 8권, 《왕엄주집(王弇州集)》 30권, 《속집(續集)》 36권, 《서문장집(徐文長集)》 8권, 《포경재집(抱經齋集)》 6권, 《서호지(西湖志)》 12권, 《성경지(盛京志)》 6권, 《통주지(通州志)》 8권, 《황산지(黃山志)》 7권, 《산해경(山海經)》 4권, 《사서인물고(四書人物考)》 15권, 《황미고사(黃眉故事)》 10권, 《백미고사(白眉故事)》 6권, 《열조시집소전(列朝詩集小傳)》 10권, 《만보전서(萬寶全書)》 8권, 《복수전서(福壽全書)》 10권, 《발미통서(發微通書)》 10권, 《장원책(壯元策)》 10권, 《휘초변의(彙草辨疑)》 1권, 《제금편(製錦篇)》 2권, 《염이편(艷異篇)》 12권, 《국색천향(國色天香)》 10권. 이중에서 잡서(雜書) 몇 가지는 서반(序班)들이 사사로이 준 것이다.
서화(書畫)로는 미원장서(米元章書) 1첩(帖), 안로공서가묘비(顔魯公書家廟碑) 1건(件), 서호서삼장화상비(徐浩書三藏和尙碑) 1건, 조맹부서장진인비(趙孟頫書張眞人碑) 1건, 동기창서(董其昌書) 1건, 신종어화(神宗御畫) 1족(簇), 서양국화(西洋國畫) 1족, 직문화(織文畫) 1장, 숭채화(菘菜畫) 1장, 북극사정비(北極寺庭碑) 6건이다. 이것은 탑본(榻本)한 것이다.
■임자연행잡지(壬子燕行雜識)
○임자년(1732, 영조 8)에 나는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서 양주(楊州) 도산 촌사(陶山村舍)에 물러가 있었다. 이해 4월 3일의 정사(政事) 때 나를 사은 정사(謝恩正使) 뒤에 또 진하사(進賀使)까지 겸했다. 로, 조최수(趙最壽)를 부사(副使)로, 이귀휴(李龜休)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임했다.
이에 앞서 청국(淸國)에서 편찬한 《명사(明史)》 속에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일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현종(顯宗) 때 연경에 사신 갔다 돌아와서 변무(辨誣)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 두고 시행되지 못했었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 후에 이정의 무리가 다시 먼저 말을 아뢰자, 권세 있는 간신들이 그 말에 의해서 사신을 보내어 변무했다. 그러나 청 나라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떻게 해서 금서(禁書)를 볼 수가 있었느냐고 힐문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감히 다시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묻어 두고 있은 지가 근 50년이 다 되었다. 을사년(1725, 영조 1)에 이르러 조문명(趙文命)이 서장관으로 갔다 돌아와서, 다시 변무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는 말을 일기(日記)에 써서 아뢰었다. 왕이 이것을 보고 이것은 마땅히 급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드디어 사신을 보내서 변무했다. 청 나라에서는 비록 고쳐 찬하겠다고 허락하기는 했지만 미루기만 하고 행하지 않은 지가 또 6, 7년이 되었다. 지난해에 절사(節使)가 갈 때에 또 간행하여 반포하기를 청했더니, 청 나라에서는 개정(改正)한 책을 베껴서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은혜롭게 여겨서 이번에 사신을 보내게 된 것이다. ...
대개 이번 길은 바로 더위와 장마철을 당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렸고, 종반(宗班)들도 역시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의 생각이나 당시 의논들은 드디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는 사람을 시키고자 해서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조에서 나를 차서를 뛰어 넘어 추천하여 왕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앞서 경술년(1730, 영조 6)에 내가 사은사로 임명되었을 때 끝까지 사양하여 다른 사람으로 바꾼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대개 우리들의 사정으로는 비록 사신 가는 책임이라도 또한 떠나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이번에 두 번째의 명령에는 또 일임하는 뜻도 있어 보통 임명에 비할 것이 아니라 사양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또 잠자코 승낙하고 싶지도 않아서, 두 번 글을 올려 병이 있다는 정상을 말하여 글뜻이 간절했건만, 모두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상의 뜻이 굳어진 것 같았다. 부득이하여 5월 6일에 서울에 들어가 행장을 차려 떠나기로 했다. 예조에서 7월 8일로 택일을 해서 방물(方物)을 꾸리고, 같은 달 11일에 표문(表文)이 계하(啓下)되었다. 6월 13일에 서장관 이귀휴(李龜休)를 승진시켜 승지로 삼고, 한덕후(韓德厚)를 그 대임으로 삼았다.
이때는 가뭄이 심했는데 가뭄 끝에는 반드시 비가 많은 법이어서 7월 보름께는 바로 장마철이 될 것이고 따라서 길이 막히고, 방물이 젖을 것도 걱정이 되는 터였다. 시일이 급박해서 행구(行具)가 군색할 것도 걱정되었다. 이때 조정의 의논들이 자못 떠날 날짜를 물려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부사도 함께 들어가서 아뢰기를 청했다. 나는 반드시 속히 갔다가 속히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에 별로 늦추어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동행의 뜻을 너무 거역할 수도 없어서, 7월 5일에 부사, 서장관과 함께 뵙기를 청하여, 조금 늦출 뜻을 대략 아뢰었다. 좌의정 조문명과 우의정 서명균(徐命均)도 나를 도와서, 상께서 이달 보름 후에 떠나도록 날짜를 물리라고 명했다.
○통주(通州)로부터 북경(北京)까지는 길에 벽돌을 깔았는데, 북경 안에 이르러 성 밖에서 그쳤다. 그 비용이 수만 냥이 들었고, 10여 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또 길 좌우에 버드나무를 벌여 심었는데, 이것은 근래에 시작한 것이라 한다. 듣기로는 이 나라의 이른바 능묘(陵墓)는 모두 계주(薊州)에 있다고 하는데, 길에 돌을 깐 것은 황제가 성묘갈 때 사치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한 것이다. 계주로부터 북경을 연결하려 하였는데, 힘이 아직 넉넉지 못하여 통주에서 중지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또 통주로부터 계주까지 깔고서 그만둘 것이라고 한다. 옛날로부터 제왕(帝王)이 거둥하던 곳에 돌을 깔았단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지금 처음으로 이러한 유익함이 없는 헛된 일을 시작해서 재정을 소모하고 백성을 지치게 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그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수(隋) 나라의 일을 모방해서 한 일인가? 수 나라는 자기 성이 양(楊)인 까닭에 남을 눌러 이길 계획으로 한 것이지만, 성이 조(趙)이면서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무슨 뜻으로 한 것인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삼해(三亥)는 청인(淸人)인데, 낭속(郞屬)을 보내서 안부를 묻는다. 역관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에 보기 드문 일인데, 대신이 왔기 때문에 특별히 존경하는 뜻을 표해서 그런 것입니다.”
한다. 천주당(天主堂)을 가서 보았다. 천주당은 서양 사람이 창건한 것이다. 서양의 도(道)는 하늘을 섬기는 것을 주로 하여 비단 유도(儒道)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선(仙), 불(佛)의 두 도(道)도 배척하고서 스스로 높은 체한다. 강희가 몹시 혹하여 천상(天上)을 상징하여 이 묘(廟)를 지은 것이다. 중간에 무너진 것을 옹정(세종 : 재위 1722-1735)이 또 새로 세웠다. 있는 곳이 수십 보밖에 되지 않아서 두루 보기에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가서 구경한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문득 단청이 휘황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천상을 상징한 것이다 보니, 그 높이가 거의 하늘에 닿을 만하다. 거기에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을 그린 것은 물론이고, 벽에는 음귀(陰鬼)를 많이 그려서 선방(禪房)의 시왕전(十王殿)과 같다. 보기에 어둡고 밝은 기상이 없으니 괴상한 일이다. 수직(守直)하는 사람은 성이 비(費)인데 서양 사람이다. 나와서 우리를 보고 차를 가져다 대접한다. 나이는 지금 60세인데, 푸른 눈에 높은 코이고, 수염이 구부러져 서렸다. 머리를 풀고 둥근 관(冠)을 썼으며,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었다. 그 나라가 북경에서 몇 리나 떨어졌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해로로 9만 리요 육로로 5, 6만 리나 되는데, 대비달자(大鼻韃子 러시아)와 국경이 서로 닿아 있습니다.”
고 한다.
○천주당(天主堂)의 주인인 비씨(費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주제군징(主制群徵)》 각 1책과 채색 종이 4장, 백색 종이 10장, 크고 작은 그림 15폭, 흡독석(吸毒石) 1개, 고과(苦果) 6개를 보냈다. 이에 약간의 물건으로 답례를 했다. 그들이 보낸 두 가지 책은 곧 서양국의 도술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흡독석이라는 것은 그 모양과 크기가 마치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하다. 납작하고 빛은 푸르고도 검다. 그 유래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소서양(小西洋)에 독사 한 종이 있는데, 그 머릿속에 돌 하나가 난다. 크기가 편두인(扁豆仁 한약재로 덩굴콩의 일종)만 한데 각종 독기를 뽑아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흡독석이다. 토인(土人)이 이 돌을 가져다가 빻아, 그 독사의 독과 본토(本土)의 흙과 함께 가루로 만들고 섞어서 돌 하나를 만든다. 모양이 마치 바둑돌과 같은데, 이것이 만들어진 흡독석이다.
그 용도를 보면, 이 돌은 능히 뱀이나 전갈, 지네 등 독충에 물린 것을 고치고, 또 모든 종기와 종기의 독과 악성 부스럼을 치료하는 데 그 효험이 몹시 빠르다. 만일 이러한 병에 걸리면 바로 이 흡독석을 가져다 물린 곳이나 종기나 악성 부스럼이 난 위에 놓기만 하면, 이 돌이 능히 그 독을 빨아낸다. 만일 독이 끈끈해서 잘 떨어지지 않을 때는 독기를 모두 빨아낼 때까지 기다리면 저절로 떨어지게 된다. 이때 빨리 이 흡독석을 가져다가 유즙(乳汁) 속에 담가 우윳빛이 약간 푸른빛으로 변하도록 내버려 둔 후에 이 돌을 꺼내서 맑은 물로 깨끗이 닦아서 말려 두면 후일에 쓸 수 있다. 그 돌을 담갔던 젖에는 이미 독기가 있으므로 반드시 땅을 파고 묻어서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만일 물린 곳의 독기나 종기의 독기가 다 가시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흡독석을 놓고 독기를 뽑아내야 하는데 그 법은 전과 같다. 만일 흡독석이 떨어지고 끈끈하지 않으면 이것은 독기가 이미 다한 것이니, 병은 서서히 나을 것이다. 유즙은 모름지기 반 종지쯤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람의 젖이나 소의 젖이나 모두 좋다. 만일 이때에 유즙이 없어서 담그지 못하거나, 혹 조금만 더디게 담가도 이 돌은 상처난 뒤에 쓰지 못하게 된다.
이른바 고과(苦果)라고 하는 것은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길쭉하기도 하며, 빛깔은 누르고 검다. 그 크기는 한 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의 용도는 능히 내외환(內外患)을 고친다. 하나는 부인의 난산을 고치는데, 이것을 갈아서 청수(淸水)와 먹으면 즉시 애를 낳는다. 또 하나는 곽란(癨亂)과 토사(吐瀉)를 고치는데, 갈아서 청수와 먹는다. 또 하나는 학질(瘧疾)을 고치는데, 갈아서 청수와 먹는다. 또 하나는 체증을 고치는데 갈아서 청수와 먹는다.
또 하나는 모든 화증을 고치는데, 갈아서 청수와 먹는다. 또 하나는 모든 창독(瘡毒)을 고치는데, 마른 것을 소주에 갈아서 붙이면 즉시 아픈 증세가 그치고 서서히 저절로 낫는다. 이것은 다른 병에도 쓰는데 그 효험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이 고과는 큰 것은 열 번 먹을 만하고, 작은 것도 일고여덟 번은 먹는다.
○떠나온 후 경성(京城)에서 의주(義州)까지 39일,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30일 걸렸다. 또 북경에 머문 지 25일이었다. 돌아올 때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7일이요, 의주에서 경성까지 17일이 걸렸다. 왕복한 총계는 137일 이역에 있은 것이 81일이다. 이요, 이수(里數)는 왕복이 대략 6435리다.
시를 지은 것은 350수요, 사들인 책은 《송사(宋史)》 100권, 《기사본말(紀事本末)》 64권, 《봉주강감(鳳洲綱鑑)》 48권, 《원사(元史)》 50권, 《태평광기(太平廣記)》 40권, 《원문류(元文類)》ㆍ《삼국지(三國志)》 도합 24권, 《초려집(草廬集)》 20권, 《서파집(西陂集)》 16권, 《고금인물론(古今人物論)》 14권, 《육선공집(陸宣公集)》ㆍ《종충간집(宗忠簡集)》ㆍ《허문목집(許文穆集)》 도합 6권, 《고황제집(高皇帝集)》 5권, 《주비시경(朱批詩經)》ㆍ《잠미집(蠶尾集)》 모두 4권, 《악무목집(岳武穆集)》 3권, 《나소간집(羅昭諫集)》ㆍ《만년력(萬年曆)》 모두 2권이다.
남이 구해 달라고 해서 산 《조원지(調元志)》, 임중온(林仲薀)에게 줄 《자휘회일(字彙會一)》ㆍ《규벽서경(奎璧書經)》ㆍ《좌전(左傳)》ㆍ《만년력》, 홍치원(洪致元)에게 줄 《근사록(近思錄)》, 황랑(黃郞)에게 줄 《규벽예기(奎璧禮記)》ㆍ《사륙초징(四六初徵)》, 김랑(金郞)에게 줄 《사서대전(四書大全)》, 감역 송경효(宋景孝)에게 줄 《수진사서육경(袖珍四書六經)》, 김숙 창열(金叔昌說)에게 줄 《외과계현(外科啓玄)》, 김치겸(金致謙)에게 줄 《당시품휘(唐詩品彙)》ㆍ《만년력》, 김용겸(金用謙)에게 줄 《규벽소학(奎璧小學)》, 족제(族弟) 이의병(李宜炳)에게 줄 《규벽사서(奎璧四書)》, 허완(許綄)에게 줄 《장과성종(張果星宗)》, 김덕유(金德裕)에게 줄 《주자어류(朱子語類)》, 안윤중(安允中)에게 줄 《규벽시경(奎璧詩經)》ㆍ《역경(易經)》, 이경원(李景瑗)에게 줄 《규벽예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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