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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연행록(서유문)

청담(靑潭) 2018. 3. 9. 00:03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서유문(徐有聞):1762-1822

 

■서유문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학수(鶴叟)이다. 관찰사 직수(直修)의 아들이다. 1787년(정조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에 제수되고, 1789년 특별히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었다.(다산 정약용과 동갑이며 2년 먼저 과거에 급제한다.) 1791년 선대에 하자가 있는 조수민(趙秀民)을 가주서(假注書)로 천거했다가 쫓겨났으나, 곧 적간사관(摘奸史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시관(試官)인 윤영희(尹永僖)와 다투다가 유배되었다. 1794년(정조 18) 개성부에서 큰 화재가 나자, 부사과(副司果)로서 개성부 위유어사(慰諭御史)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고 돌아왔다.

그해 홍문관교리로서 이응혁(李應爀)을 부총관(副摠管)에 임명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유배되었다. 그해 양남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1798년(정조 22) 서장관이 되어 동지사(冬至使) 이조원(李祖源), 부사(副使) 김면주(金勉柱)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가 즉위한 1800년 김이재(金履載)와 한패라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나, 후에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179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한글기행문인 《무오연행록》이 있다.

 

 

1. 무오연행록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8월

○9일 세폐미는 해마다 조공으로 올리는 쌀이요, 밀수품은 곧 금과 인삼(人蔘)과 돈피(獤皮) 등의 물건이니, 본래 못 들어가게 하는 물화(物貨)를 장사치들이 가만히 들여가 이익을 취하니, 나라법에 금지한 물건이 적발되면 압록강의 머리에서 효시(梟示)하는 법이로되, 이익을 탐하여 혹 법을 범하는 이가 있으므로 임금의 명 전함을 엄하게 하니라.

 

■무오년(1798, 정조 22) 10월

○16일 대국의 법에 금으로 만든 인의 거북뉴는 친왕(親王)에게 주는 인이요, 친왕은 황제의 형제와 아들을 일컫는 이름이라. 안남국(安南國 베트남)ㆍ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같은 나라는 다 은으로 만든 인에 탁타뉴(槖駝紐)를 앉혔으니, 이로 보아도 우리나라를 대접하는 것이 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줄 알러라.

19일 표문과 자문을 모시고 모화관(慕華館)에 나와 내용을 확인하고 세 사신이 차례로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저녁에 고양군(高陽郡)에 이르니, 군수 윤행직(尹行直)과 방물 차사원(方物差使員) 양천 현령 임홍원(林弘遠)과 부사 차사원(副使差使員) 평구 찰방(平丘察訪) 한응유 등이 공장(公狀)을 드리고 보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11월

○10일 3경쯤에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 변복주의 수본(手本)을 보니 대강 쓰여 있기를,

“10월 1일 새벽 오문(午門) 밖에 나가 시헌서(時憲書) 100벌을 받으니, 시헌서는 책력을 이름이라. 태상황(太上皇) 이름이 홍력(弘曆)인 고로 책력 ‘역(曆)’ 자를 꺼려 시헌서라 하더라. 대국의 책력을 새로 반포(頒布)하매 궐내(闕內)에서 건륭(乾隆) 연호를 쓰고, 밖에서는 가경(嘉慶) 연호를 쓴다 하며, 5월 21일에 태상황(고종 건륭제 : 재위 1735-1795)황제(인종 가경제 : 재위 1795-1820)와 더불어 열하(熱河)에 거둥(擧動)하여 만만수성절(萬萬壽聖節)을 지내고 백로절(白露節)이 든 후에 돌아왔다 하니, 열하는 북경(北京)서 또 북으로 700리를 들어가 있는 지방이니, 몽고(蒙古) 나라에서 지척(咫尺)이라.

궁궐(宮闕) 배치가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니 이름을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하고, 황제는 해마다 여름이면 이리 거둥하여 3, 4개월을 지낸 후에 돌아오니, 이름은 비록 피서라 하나 실은 몽고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일러라.

...이날 밤에 비변사의 공문이 내려오니, ‘대국 표류한 사람이 있으니, 사행 편에 데리고 가라.’ 한 일이라. 대국 산동성 등주부 영성현(山東省登州府榮城縣) 사람 양재명은 나이 80이요, 왕육례는 71이요, 석진공은 61이라. 그 나머지 무리는 합하여 열두 사람이니, 고기 잡는 배를 탔다가 표류하여 황주(黃州) 연평도에 이르니, 황해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장계하여 아뢰거늘, 하교(下敎)하시어 이르시길,

“대국 사람이 표류하면 불쌍히 여기는 바가 마땅히 상례(常例)에 빼어날지라. 하물며 이번 표류한 사람의 무리 중에 또한 80이 지난 자가 있으니, 자원(自願)하여 육로로 가기를 청한즉, 길이 더욱 먼지라 잘 들여보낼 방도를 생각해야만 하니, 의복을 지어 입히고 한 이틀 쉬기를 기다려, 가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평안 감사에게 맡겨 사행(使行)에 붙여 보내되, 길에서 접대하기를 우리나라 지경에서 하던 대로 하고, 내년 선래(先來)의 장계에 무사히 들어간 연유를 아뢰고, 비국(備局)을 통해 부쳐 양도(兩道 황해도 평안도) 감사와 세 사신에게 분부하여 표류인이 만일 도강(渡江) 전에 도착하지 못하면 선전관이 이것을 사행 이르는 곳에 전하라.”

고 하셨더라.

○13일 부윤과 함께 앉아 여러 가지 짐짝을 받자 하니, 곧 다시마, 해삼, 우피(牛皮), 산피(山皮), 이피(狸皮), 장백지(壯白紙), 남초(南草), 백목(白木), 은자(銀子) 등의 물건이라. 넓은 뜰에 쌓인 것이 산 같아서 보기에 끔찍하더라.

마루[堂]는 높고 뜰은 낮으니 자세히 살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이같이 많은 짐짝을 일일이 손수 볼 길이 없는지라. 전부터 서장관(書狀官)의 비장(裨將)과 행중(行中) 역관과 부윤의 비장이 같이 입회하여 검사하고, 부윤과 서장관은 검사하는 일이 없으니 이미 전례가 되었는지라. 그러나 아주 본 체도 아니 하기 어려워 날마다 친히 검사할 때, 한편으로 저울에 달며 한편으로 응향고(凝香庫)에 넣으니, 날이 저물도록 끝이 없더라.

○19일 이른 식사 후에 부윤과 함께 압록강(鴨綠江) 가에 이르니 모래 위에 장막을 쳤는지라. 가만히 앉았더니 정사와 부사가 나와 주석(酒席)에 동서로 나누어 앉고, 나는 정사 아래에 앉아 부윤과 서로 마주 대하여 앉으니, 앞에 인마가 구름 같고 의주 서문으로 나오는 짐 바리가 끊이지 아니하여 먹줄친 듯이 이었더라. 장막 동편에 나무를 세우고 줄을 매어 안팎을 제한하여 의주 장교로 하여금 북경 들어가는 인마를 하나하나 헤아려 넘겨 보내고, 장막 남쪽에 또한 장막을 베풀어 서장관의 비장과 운량(運糧) 비장으로 하여금 짐을 수색하여 검사할 때, 도강하기 수일 전에 서장관의 수결(手決)을 쇠에 새겨 목패(木牌)에 박아 쇄마구인(刷馬驅人)과 사지마구인(使持馬驅人)과 행중노자(行中奴子)와 사상(私商)에 들어가는 자 비장과 역관 외에는 다 채우니, 이같이 하여 행하는 법이라. 이날 수색하고 검사하여 패를 비교하여 고찰한 후에 짐을 다 풀어 속속이 뒤질 때, 사람은 의복을 뒤지며 상투까지 뒤지니, 혹 성내며 부끄러워하는 모양이 또한 몹시 우습더라.

검사를 마치매 물건 목록을 쓰니 의주 잡복과 역관이 소지한 물화(物貨)들은 은자로 가격을 매기니 합하여 1만 8679냥이요, 당하(堂下)의 22원은 각각 500냥이라. 그나마 179냥 푼수는 일관(日官) 이정덕을 더 주니, 이는 관상감(觀象監) 책 무역을 맡았으므로 특별히 더 주니라.

그런 다음 도강 장계(渡江狀啓)를 띄울 때, 상하 일행이 다 편지를 부치고 떠나려고 하는데, 부윤의 전송을 받으며 비장, 역관들은 장막 옆에 모여 음식을 먹으니 기생이 사이사이 섞였으며, 사상(私商)과 군인의 가족들이 나와 보내는 자가 술과 음식을 갖추어 이별하니 술과 안주가 넘치고 강변 수 리(里)에 사람이 모였으니 또한 장관이러라.

세 사신이 차례로 강을 건너는데, 비장은 다 벙거지에 군복(軍服)을 입었으며, 역관과 건량관(乾糧官) 별배행(別陪行) 외는 모두 갓 철릭(天翼)을 하였더라. 정사와 부사는 옛날과 다름없이 쌍교(雙轎)를 탔으며, 나는 좌거(坐車)를 탔으니 위는 가마같이 꾸몄으며, 길이가 다소 길고 뒤에 두 바퀴를 달았으며, 앞으로 긴 채를 만들어 말을 메웠으니, 길이 평탄하면 별로 해롭지 않으나 비탈길과 돌무더기를 당하면 바퀴에서 벽력같은 소리 웅장하고 흔들림이 심하여 혹 머리도 다치며 뺨도 치이어, 심하게 다치면 다 부어 부풀어지니, 오랜 후에는 꾀가 나는지라, 굳이 앉지 아니하고 몸을 요동하여 수레와 같이 흔들면 다치지 아니하나, 혹 잠이 들었다가 늘 다치니 놀라 깨어, 내 도리어 웃음이 나는 줄을 깨닫지 못할러라.

...앞 참(站)에 이르니 수목이 둘러 있고 산곡이 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자못 원림(園林)의 좋은 경치가 생각나게 하며, 물맛이 기이한지라. 주방(廚房)이 저녁밥을 갖추어 내오니 정결하고 소담하여 비위(脾胃) 열리며, 이곳은 노숙하는 곳이라, 도강 전에 의주 장교가 창군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땅에 구덩이를 만들고 아래 화톳불을 질러 두었다가 이날 그 위에 장막을 베풀고 휘장(揮帳)과 병풍을 사면으로 막으며 촛불을 밝히고 자리를 펴놓으니 엄연히 방 안 같더라.

세 사신이 장막이 10여 보씩 되니 다 한 모양이요, 비장, 역관이 있는 곳은 밑에 불을 피우나 홑장을 쳤는지라 잠잘 길이 없으며, 네 녘으로 그물을 매고 하인이 다 그 안에 들어 불을 피우고 찬 것을 막으니, 날이 마침 더운지라 추위 견디기 어렵지 아니하니 심히 다행하더라.

○22일 올 여름 제주(濟州) 출신 한 사람이 표류하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를 통해서 돌아온 후 여행 중에 본 바를 기록하였으되,

“악양루가 고소대에서 30리라.”

하였으니, 그런 줄은 짐작하나 자세히 몰라서 물으니, 그 대답이 이러하더라.

○23일 저녁에 황가장(黃家莊)에 이르러 황가(黃哥) 집에 숙소를 정하니, 참(站)에 들 때에 마을 사람들이 별같이 뭉쳐 구경하며 권마성(勸馬聲)을 듣고 문득 웃어 이르되,

“이 무슨 소리뇨?”

하며, 또 말하기를,

“한 사람은 끌고 한 사람은 탔으니 이 무슨 모양인고?”

하니, 대개 저들의 법은 왕공 귀인(王公貴人)이라도 견마(牽馬)가 없음일러라

○24일 봉성(鳳城)에서부터 일행(一行)에게 양식과 반찬을 주는 것이 있으니, 사신은 쌀이 두 되씩이요, 차차 감하여 하인은 한 되씩이 되니, 대국 한 되가 우리나라에 서 되가 된다 하며, 반찬은 제육을 삼방에 각각 하루씩 돌려주며, 그나마 잡물은 자세히 모르며, 말도 한 필에 곡초(穀草) 두 묶음씩 준다 하더라. 봉성서 심양(瀋陽)까지와 심양서 산해관(山海關)까지와 산해관서 북경(北京)까지 차차 마련하여 준다 하니, 사행이 전부터 받아 쓴 일이 없으니 처음은 먹기를 부끄러워 않은 일이요, 그 후는 전례(前例)되어 거론(擧論)하는 일이 없으니, 통관과 영관(領官)과 우리나라 만상군관(灣上軍官)과 군뢰(軍牢)의 무리가 서로 받아 먹었다 하며, 영송관(迎送官)은 은(銀)을 7, 8냥이나 주고 자리를 사 온다 하니, 사행에서도 주는 것이 있거니와 참참이 고을서 예사(例事) 주는 것이 또 있다 하더라. 수역(首譯) 김윤서가 수레를 삯을 내어 세폐 실리는 일로 어제 책문에서 뒤처졌다가 저녁에 따라오다.

○25일 길이 좁고 가파르고 험하여 수레를 나란히 몰기 어려운지라, 책문으로 나가는 짐수레가 혹 서로 고갯길에서 만나면 피차 비켜갈 길이 어려워 문득 민망하고 위태하더니, 유가 고개에서 짐 실은 수레 두엇이 부사(副使) 쌍교(雙轎)와 마주쳐 서로 비비어 지나더니, 말이 놀라 쌍교를 떨치고 달아나니, 긴 채 부러져 동강이 나는지라. 부사가 말을 타고 참(站)에 들어가니, 쌍교 채를 갑작스레 고치기 어려운지라. 먼 길에 전진(前進)키 어려워 민망한지라,

○27일 눈이 오히려 개지 않고 바람이 크게 불어서, 늦게야 떠날새 문밖에 나오니 길가 눈 위에 엎어져 누운 사람이 있으니 죽은 지 오랜가 싶으되, 지나가는 사람이 본 체도 아니 하니, 대체 저의 법은 날이 어두우면 비록 제 지친(至親)이라도 문을 열어 들이는 일이 없으며, 자리가 없으면 주막에 붙이지 아니하니, 거리 행인(行人)이 남루(襤褸)한 자라도 모두 포단 이불을 가졌는지라. 죽은 이 사람은 밤에 눈을 맞고 땅에 누워 얼어 죽은 것이라, 친속(親屬)있는 자는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그렇지 않으면 관(棺)에 넣어 길에 버려 둔다 하더라.

○28일 고려총(高麗叢)에 이르니 촌락(村落)이 보잘것없고, 남녀가 모여 구경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어떤 사람이 살던 곳인가 싶으나 자세히 모르며...

○30일 심양은 옛 황도(皇都)라 하여 일산(日傘)을 걷고 말을 모는 소리를 그치니, 이는 존경(尊敬)함을 보임이라. 가마를 내려 말을 타고 차례로 성문에 들어가는데 문에 3층루를 지었으며, 또 옹성(甕城)이 있고 성을 뚫어 문을 내었으며, 성 주위(周圍)가 5리 남짓하되 사방이 네모 반듯하여 입 구(口) 자 같으며 성내의 인가가 1만 5000이 된다 하며, 성내 길가는 다 시정(市井)이라, 각각 전방 앞에 대여섯 길 되는 붉은 깃대를 세우고 파는 물화(物貨)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며, 또 현판을 달아 각전(各廛) 별호(別號)를 표하였으니, 금색 비단이 찬란하고 물화가 밀려드니 황홀 영롱(恍惚玲瓏)하여 눈이 크게 뜨이며, 입이 다물어져 망연자실함을 깨닫지 못할러라.

길가에 구경하는 자가 길을 메워 4, 5리에 뻗칠 정도였는지라.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일-6일]

○1일 고가자(孤家子)에 이르러 조가(曺哥)의 집에 숙소를 정하니, 이날 80리를 가니라. 지나는 곳에 구경하는 계집의 눈이 흰자위가 많고 눈동자를 흘겨 보이는 자가 많으니 매우 괴이하고, 발을 동인 자가 간간이 있으니 이는 당녀(唐女)라. 역관(譯官)이 말하기를,

“근래는 한인(漢人)과 만인(滿人)이 서로 혼인을 하기에 발 동인 계집이 이전보다 매우 적으니 풍속(風俗)이 이렇게 변했다.”하더라.

○2일 대개 참(站)에서 잠시라도 말을 주고받으면 환약(丸藥 청심환)을 달라 하니 매우 괴롭더라.

○5일 해질녘의 길에 여남은 살 먹은 아이가 각각 양(羊)을 수백 마리씩 몰아가는데, 다만 손에 긴 채를 쥐어 뒤를 따르고, 양이 모두 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빗나가는 것이 한 마리도 없으니 이상한데, 두 아이가 함께 가게에 나아가 무엇을 사 먹어도 양이 또한 머물러서 가지 않다가, 아이가 즉시 나와 무슨 소리를 하니 이에 각각 제 주인을 따라 서로 섞이지 아니하고, 도로 앞에서 가니 더욱 기이하더라. 심양 이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태기를 메고 삽을 들어 길가에서 우마(牛馬)의 똥을 줍되, 지나는 말이 똥을 누면 다투어 삽으로 집어 삼태기에 넣되, 흘리는 일이 없고, 마을마다 문밖에 거름을 쌓았으니 높이가 여러 자(尺)요, 네모 반듯하여 마을마다 같은 모양이라, 비록 작은 일이나 절도가 있으며 부지런히 농사지음을 알러라.

○6일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떠날 때 큰 눈이 내리고, 큰바람이 집을 흔드니 여행지에서의 고생이 안타까울 뿐 아니라, 여기에 이르러 상하(上下)에 병들지 않은 자가 없으니, 실로 안타까우나 어찌 할 수 없더라. 발마(撥馬)를 타고 지나는 자가 있으니 둘은 앞에 서고 둘은 뒤에 섰으며, 한 놈이 등에 누런 보(褓)로 싼 것을 지고 달려가더니, 또 타지 않고 빈 말로 따르는 것이 네 필이라. 이는 참이 멀면 가다가 바꾸어 타는게 아닌가 싶더라. 말이 뛰는 모양이 그다지 빠르지 못하니 이것을 가지고 어찌 한 시각(時刻)에 70리를 가리오. 역참(驛站)마다 발마를 두었으되 큰 참은 50필씩이라. 매년 심양으로부터 발소(撥所)의 말 수(數)에 따라 50필 있는 곳은 아홉 필 값을 주되, 매필(每匹)에 15냥씩 정하니, 만일 죽고 병들면 말을 대신 사서 세우란 법이다. 역승(驛丞)이 차지하여 남으면 스스로 먹고 부족하면 또한 물어낸다 하며, 역참에서 지나는 관원(官員) 대접하는 법이 표문(表文)이 있으면 수대로 말을 주고, 음식을 대접하는 법은 한 사람 한 끼에 은대전(銀大錢) 700씩 떨어주니 한 126푼이라. 이 또한 심양으로부터 미리 주는 은(銀)이 있다 하더라.

 

 

2. 무오연행록 제2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7일-22일]

○7일 눈은 조금 개이나, 바람은 더욱 강하고 추위가 혹심하여 온돌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앉아도 오히려 떨리는지라, 쌍양점(雙陽店) 마을 전체가 집집이 문을 닫고 계집도 꿈적거리는 일이 없으며 길에 행인도 없더라. 혹 행인이 있어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가게의 문을 열어 달라 하면 주인이 문을 닫고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대개 길에서 얼어죽기 쉬운지라. 이러므로 서로 미루어 들어오게 하는 일이 없으니, 이런 날 길에 다니다가 죽는 자가 많다 하더라. 세 사신이 상의하여 이 참(站)에서 머물렀다. 대개 병든 자가 많으니, 이 바람과 추위에 고생하며 여행하다가 반드시 죽을 자가 많을지라. 마지못하여 떠나지 못하고 감히 온돌방 밖에 나가지 못하여 방장(房帳)을 예전처럼 치고 굳이 앉았으니 객지에서의 쓸쓸함에 마음이 심란하여 길을 가느니만 못하더라.

곁 온돌방에 주인의 가솔(家率)이 있는지라. 혹 계집의 소리가 나는데 맑고 가늘어 말투가 분명하니, 내 비록 한어(漢語)를 모르나 마디마다 알아들을 구절이 있으며, 어른 아이 대답하는 소리 또한 분명하니, 대개 무식한 계집과 지각없는 어린 것이라도 어차(語次)에 기이한 문자가 많으니 이 때문에 한어의 좋음을 알 만하더라. 계집마다 목소리가 다 꾀꼬리 소리 같으니, 소리를 들을 적마다 마음으로 짐작하되, ‘저 계집이 반드시 아름다울 것이다.’ 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얼굴을 보니 생김이 흉악하고 거동이 추잡하니 이따금 스스로 웃음을 깨닫지 못할러라.

식 후에 주인의 대문 밖에서 여러 사람이 지껄이는 소리가 나니, 주인과 방하인(房下人)이 급히 나가 문을 막고 들여보내지 아니하거늘, 문틈으로 엿보니 여남은 놈이 다 쇠사슬로 목과 발을 잠그고 걸음 걸을 때 한 발을 겨우 옮겨 놓아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려고 옥신각신하여서 내가 묻되,

“어떤 사람이며 무슨 까닭으로 저 모양을 하였느냐?”

하니, 주인이 대답하되,

“저놈들이 다 범한 죄가 적지 않은지라, 함부로 풀어 놓지 못하는 고로 저 형벌을 덜어 출입을 내버려 두었다가 기한이 차면 혹 귀양도 보내며 혹 놓아주는 놈도 있으니, 저 모양으로 있을 때에 시골 마을로 다니며 음식을 빌어 목숨을 보전하는지라. 오늘날 추위가 이와 같으니 민가의 온돌을 의지하고자 하나, 만일 저들이 죽으면 집에 들여놓은 사람이 짐짓 죽였다 하여 살인한 죄와 같이 다루니, 이러므로 백성이 다 저들을 집에 들이지 못한다.”

하더라. 해가 지니 마을 사람이 서로 모여 쇠를 울려 길에서 오르내리니, 대개 서로 불을 방비한다 하더라.

○8일 길을 떠나려 할 때 상사가 수일 전부터 병이 깊더니 밤사이 증세가 더 심하여 전진할 길이 없는지라, 함께 묵으려 하여도 형편상 그럴 수 없으니, 이 참(站)으로부터 이틀을 월참(越站)하여야 16일에 황성(皇城)에 도착할 수 있을지라, 마지못하여 상방(上房 상사) 일행은 이 참에 뒤처져 남고, 부방(副房 부사)과 삼방(三房 서장관)이 먼저 나아가니 오늘 가감(加減)을 기다려 중도에 서로 모이게 약속하였으나, 만리이역(萬里異域)에서 수 개월을 동행하다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니, 가는 사람과 머문 사람의 심사(心事)가 어찌 애처롭지 않으리오. 병환은 비록 염려스럽지 않으나 추위를 당하였으니 어찌 애처롭지 않으며, 눈물을 뿌려 이별할 때 섭섭한 마음을 그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적설호산(積雪胡山)에서 떠나고 머무르는 이별을 이루니, 어이 말씀이 없으며 눈물이 젖지 않으리오. 드디어 소매를 떨쳐 좌차(座次)에 앉으니 마음이 진실로 좋지 못하더라.

○9일 큰 수레 수백이 사냥한 짐승을 싣고 그 위에 모두 누런 기를 꽂고 줄지어 황성(皇城)으로 향하여 가거늘, 마두(馬頭)에게 시켜 물으니,

“달자(㺚子)가 진공(進貢)하는 것이라.”

하더라. 달자는 북쪽의 맨 끝에 있는 오랑캐이니, 지금 황제의 근본이 다 달자의 종류라, 중원(中原) 복색(服色)이 본래 달자의 모양을 본받은 까닭에 다름없는가 싶더라.

○10일 체마소(替馬所)에 이르러 추위가 심하여 가게 앞에 차를 머무르고 분탕(粉湯) 한 그릇을 사먹으니, 돼지고기 끓인 국에 국수를 만 것을 분탕이라 하는지라. 국수를 옥수수 가루로 만드니, 이름을 ‘그뢰’라 하고, 파와 돼지고기 썬 것을 넣어 말았으니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 빼고는 가장 먹음직하더라.

○13일 지나는 참(站)마다 마을 사람이 모여 구경하며, 아이들은, 큰 마을은 4, 50씩 나와 떼를 지어 다투어 구경하며, 계집은 담 위 문안에서 늘어서 보니, 얼굴에 분을 바르고 머리에 다 꽃을 꽂았으니 고운 얼굴을 가진 자가 많아 우리나라의 시골 계집 모양같은 자가 적으니, 대개 북방 풍속은 남자는 농사와 장사에 힘을 다하고, 물을 길으며 불을 때는 일도 또한 스스로 하여 떨어진 옷과 때묻은 얼굴이 사람의 모양같지 아니하고, 여자는 다 온돌 위에 편히 앉아 얼굴만 가꾸고 일삼는 것이 오직 지아비 바지와 버선이요, 이밖은 다 남의 손을 빌리니 남을 위하여 바느질하는 자 또한 남자의 일로 생계를 삼는 자라.

길가에 혹 걸인(乞人) 같은 모양의 계집이 가게 앞이나 마을 문 앞에 나와 앉아 헌 옷을 깁는 자가 행인에게 값을 받고 하는가 싶으나, 손 놀리는 모양이 익숙하지 않고 바느질하는 모양이 둔해서 계집의 본색(本色) 같지 아니하니, 그 여공(女工 여자의 할 일. 침선ㆍ방직 등)이 부지런하지 못함을 알러라. 예부터 북방에 미인이 많다 일렀으니, 그것이 헛된 말이 아니가 싶더라.

관(關) 내외의 여자가 수레[車]를 타고 지나는 자가 많으니, 혹 앞을 헤치고 아리따이 고운 얼굴을 내어 우리나라 사람을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움츠려 앉으니 이는 내외(內外)하는 뜻이 있으나, 수레를 모는 놈이 수레 앞에 반듯이 앉아 더럽고 흉악(凶惡)한 몰골로 수레 안에 앉은 계집과 낯과 등이 서로 닿을 듯하니 분명 제 지아비는 아니라, 이 무슨 내외(內外)라 하리요. 우스꽝스럽고, 혹 우리나라 사람을 눈이 뚫어지도록 보아 부러워하는 기색이 뚜렷한 데도, 수레를 따라가는 자가 돌아보아 무엇이라 중얼거리면 갑자기 문을 내리고 피하니 또한 매우 우습더라.

또 20리를 가서 유관(楡關)에 이르니, 인가가 극히 번성하여 그 수를 세지 못하겠으며, 마을에 이제 한창 집을 짓는 사람이 있으니, 이미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었으되 공사를 하지 않으니, 날이 추워서 중지한건가 싶더라. 이곳에 양한지[養漢的]라 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나라 창녀와 같은 것이라. 문에 기대 구경하거늘, 마두 한 놈이 묻기를,

“너의 벌이가 요사이는 어떠하냐?”

하니, 계집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익이 없으나 있으나 네가 알 바 아니니, 네 마누라 벌이나 물으라.”

하니, 매우 우습더라.

○16일 장차 떠나려 하는데, 상방 서자 한 놈이 온돌방을 지으려 북경으로 먼저 가면서 편지를 전하니,

“병세가 많이 나으므로 이제 전진(前進)하여 어제 노봉구에 숙참이 되리라.”

하니, 쌍양점(雙陽店)에서 나뉜지 열흘이 되었으나 막연히 소식이 막히니 진정으로 민망하고 갑갑하더니, 소식을 들으니 일행이 다 기뻐하여 마음을 놓으나, 역관 김동길을 마침내 구하지 못하니 참혹(慘酷)하며, 역마부 김언소가 또 죽었다 하더라.

○17일 대국 사람은 그저 자고 지나도 방세로 내는 돈이 많아야 소천[小錢] 한 냥에 지나지 아니하나, 우리나라 사행의 하룻밤 방세가 장백지(壯白紙), 부채, 환약과 소천을 합하여 은자 두 냥이 넘고, 낮참 잠깐 앉는데도 장지, 부채로 비교적 많이 주어도 적다 많다 하여 하인들과 종종 싸우니 매우 원통하고 분하더라.

○18일 이곳에 또한 매춘부가 많은지라, 역관 한 사람이 가 보고자 하거늘 그 동행이 말리며 말하기를,

“몇 해 전에 한 사람이 동행한 사람과 함께 매춘부의 집을 찾으니, 한 되놈이 인도하여 들어가니 계집이 웃고 마주 앉기를 청(請)하고 주육(酒肉)을 갖추어 대접하고, 수작이 정다워 만류하는 의사가 매우 정답고 친절하거늘, 인도하던 되놈은 들여보낸 후에 먼저 가고, 다만 조선 사람들만 앉았더니, 및 계집 데려 가노라 하고 문에 다다르니, 문을 잠그고 밖에 두세 되놈이 있어 꾸짖어 말하기를, ‘예법(禮法)을 거스르고 대국 계집을 간통하는도다. 지금은 우리만 알았거니와 여럿이 알면 장차 죽으리니, 네 어찌하려 하뇨.’ 하면서 위협하거늘, 그 놈에게 속은 줄은 아나 이미 문안에 갇힌지라. 할 일 없어 각각 마두를 불러 은을 열 냥씩이나 허비(虛費)하고 간신히 욕(辱)을 면하니, 그대 또한 그 사람의 일을 당하리로다.”

하니, 그 역관이 크게 두려워하여 가지 못하니라.

○19일 이날부터 통관 여섯과 갑군이 아문에 와 있으며 제독(提督)과 대사(大使)는 혹 이르러 통관을 금칙(禁飭)한다 하더라. 해가 진 후에 통관이 화중당(和中堂)의 지휘(指揮)로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태상황이 묻되, 조선 사신이 이미 황성(皇城)에 들었으면 내일 마땅히 양심전(養心殿)에서 인견(引見)하리라.”

하더니, 이윽고 주객사(主客司)에 부자(付子 공문서)가 오니 부자는 우리나라의 이문(吏文)과 같은 것이라. 쓰여 있기를,

“조선 사신은 20일 오시(午時)에 융종문 밖에 이르러 기다리라.”

하였으니, 사행이 20일 되기 전에 황성에 도착함이 매우 다행하더라.

○20일 ...섬라(暹羅 태국) 사신(使臣) 네 사람이 또한 들어왔는지라, 곁 온돌에 앉았거늘 잠깐 보니 의복은 중국 제도와 다르지 아니하되, 붉은 바탕과 검은 바탕에 약간 수(繡)를 놓아 입었으니, 머리에 쓴 것은 금빛으로 만들어 이마에 덮히게 하고 위에 긴 뿔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거의 예닐곱 치가 넘으며, 긴 뿔 아래 두 층도 만들며 세 층도 만들어 네 사람이 쓴 것이 서로 똑같지 아니하니, 옷빛과 관층(冠層)으로 품직(品職)을 표시하는가 싶더라. 종자(從者)가 또한 서너 사람 들어왔으나 키가 작으며 얼굴이 옹졸하여 보잘것없이 생겼으며, 종자가 쓴 것은 곧 중국의 마래기요, 머리털은 모두 깎아 땋아 늘인 머리가 없더라. 해가 돋으니 통관이 와서 말하기를,

“외국 사신은 밖에서 물러가라. 후일 마땅히 다시 인견(引見)하리라.”

하기에 물러나오는데, 궐문 밖에 이르니 거마가 구름같이 모였으니, 말은 머리를 다 가지런히 하여 좌우로 나눠 섰으며, 수레는 좌우에 가득 찼고 태평거(太平車)가 반은 되는데, 푸른 장막과 검은 장막을 두르고 뚜껑에 검은 비단을 얽은 것은 귀인(貴人)이 탄 것이라 하니, 대사가 조회에 들어와 아직 끝나지 못하였는가 싶더라.

이날로부터 광록시(光祿寺)에서 차하[上下]하는 음식물이 있으니, 거위 1수, 닭 1수, 생선 2미(尾), 돼지고기 1근 반, 양고기 1척(隻), 우유 반 근, 메밀가루 반 근, 황주(黃酒) 6병(甁), 두부 2근, 침채(沈菜) 3근, 간장 4냥, 청장(淸漿) 6냥, 된장 6냥, 초(醋) 10냥, 쇠고기 1근, 차(茶) 1냥, 산초 1돈, 소금 1냥, 등유(燈油) 2냥은 날마다 삼방(三房)을 통하여 주는 것이요, 사과 75개, 포도(葡萄) 7근 반, 능금 120개를 곧 통삼방하여 닷새마다 주는 것이니, 날마다 주는 음식물이 상방(上房)은 여러 가지 더하고, 부사(副使)는 서장관과 같더라. 각방이 다 다른 것은 날마다 차하[上下]하는 나무니, 상방은 30근이요, 부방은 17근이요, 삼방은 15근이며, 닷새마다 주는 실과는 삼방을 통해 찾아 쓰니 이는 행중(行中)의 전례러라.

대통관(大通官) 3원(員)과 압물관(押物官) 23원에게 매일 각각 주는 것이 있으니, 닭 1마리, 돼지고기 2근, 메밀가루 1근, 침채 1근, 황주 1병, 두부 1근, 청장 2냥, 날고기 4근, 간장 4냥, 등유(燈油) 2냥, 화초 5푼, 나물 5돈, 소금 1근, 나무 10근이요, 종인(從人) 30명에게 매일 각각 주는 것은 돼지고기 1근 반, 메밀가루 반 근, 침채 8냥, 소금 1냥, 황주 합하여 6병, 등유 합하여 12냥, 나무 4근이요, 상(賞) 없는 종인 170명에게 매일 각각 주는 것은 돼지고기 반 근, 침채 4냥, 간장 3냥, 소금 1냥, 나무 2근이러라.

또 각방과 정관과 상(賞) 있는 종인과 상 없는 종인에게 날마다 쌀을 주는 것이 있으니, 세 사신은 각 두 되씩이요, 그 나머지는 각 1되씩이라. 이곳 1되가 우리나라의 3되가 된다 하더라. 정관(正官)이라 하는 것은 곧 대통관(大通官)ㆍ압물관(押物官)을 이름이니, 사행 관원 수를 예부터 30으로 정하였으니 세 사신이 또한 이 수에 들며, 어의(御醫)와 화원(畫員)과 사자관(寫字官)과 국방의원(局方醫員)으로 메우되, 이전은 군관(軍官)이 비록 이 수에 들어가지 않으나 상(賞)으로 주는 은(銀)을 나눠 다 같이 먹으며, 그 가운데 상으로 주는 비단은 정관 외에 참예치 못하더니, 요즈음은 상을 나누는 전례가 없다 하더라.

상 있는 종인이란 말은 정관 30인에 종인 하나씩 상주는 명색(名色)이 있고, 그 밖은 일행 상하(上下)에 합하여 상 없는 종인이란 이름이러라. 세 사신의 반찬거리는 각방(各房) 서자(書者)들이 맡아 찾아 약간 떼어 먹으며, 군뢰(軍牢)도 차지하고, 역관(譯官), 군관(軍官)의 양식과 반찬은 군뢰 두 놈이 다 받아 제 것으로 삼으니 군뢰의 구실이 극히 일이 많은지라. 전부터 전례가 이렇다 하더라.

장무관(掌務官) 조의진이 이날 저녁에 들어 왔으나, 병이 오히려 낫지 않은지라, 역관 조정규로 바꾸어 임명하니라.

○22일 이날 치형이 비로소 유리창(琉璃廠)을 구경하고 돌아와 대강 전하되,

“식후에 나아가려 하는데, 관 동편 담 작은 문을 지나 아문(衙門) 앞에 나아가니, 아문은 곧 대사와 제독(提督)이 오면 앉는 곳이요, 아문 옆으로 꺾어 한 채 집이 있으니, 이는 통관이 머무는 곳이라. 아문 앞에 작은 담을 가리우고 담 밖에 문을 내었으니, 관 안에 있는 사람이 상하를 막론하고 사신 외에는 다 이리로 출입하는지라. 겨우 문을 나가니 빛난 의장(儀仗)이 길을 메웠으니, 둥근 부채며, 수(繡) 놓은 기(旗)며, 호피패(虎皮牌)와 수정패(水晶牌)며, 은(銀)으로 만든 도끼와 금(金)으로 만든 절(節)이며, 지주(知州), 지부(知府)와 여러 대부(大夫) 가자(加資)를 네모지고 붉은 칠한 나무에 새겨 좌우로 드리웠으니, 의장이 거의 2리 남짓이나 뻗었더라.

가장 오랜 후에 가마 하나가 지나가니, 상하와 전후를 다 금으로 꾸몄더라. 덮개는 지붕으로 되어 있으되 네 귀퉁이가 위로 들리고 큰 꼭지를 달았으며 붉은 휘장(揮帳)을 둘렀으니, 네 기둥은 장막 밖으로 섰으며, 기둥과 장막을 친 사이는 한 사람이 돌아다닐 만하더라. 한 늙은 계집이 장막 밖에 앉았으며, 붉은 옷 입은 여덟 놈이 그 가마를 메어 천천히 지나며, 그 뒤에 태평거(太平車)에 앉은 계집이 또 많은지라, 기이한 향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물으니, ‘임제춘 딸의 혼인(婚姻)이라 하니, 대체로 대국 한인(漢人)의 혼례(婚禮)는 신부(新婦)가 신랑(新郞)의 집에 이르러 서로 맞절을 하여 부부를 맺으며, 만인(滿人)은 신랑(新郞)이 신부(新婦)를 친히 맞이하여 제집에 이르러 또한 경계(警戒)할 따름이러라. 임제춘의 문밖에 이르니 금안준마(金鞍駿馬 금으로 안장한 좋은 말)와 경거수곡(輕車繡轂 바퀴에 수놓은 경쾌한 수레)이 구름같이 모였으며, 좌의교(坐椅轎)가 또 많으니 귀한 손님이 모였는가 싶더라. 말과 수레를 지키고 서 있는 자가 인물이 호방하고 의복 또한 선명하더라.

다시 관문(館門) 앞을 지나 호동(衚衕) 어귀를 지나니 살문을 만들어 이문(里門) 모양같고, 문 위에 ‘정양문성근호동(正陽門城近衚衕)’ 일곱 자를 썼으며, 문 안 성 밑으로 1칸 집이 있으니, 밤이면 갑군이 지키어 만일 사람이 출입하면 주소와 성명을 물을 따름이요, 문 안에 왕래하는 자는 묻는 일도 없다 하니, 이는 황성 안 호동이 다 이 모양이라 하더라.

이 문을 지나 수십 보를 가니 가게가 있으며, 큰길에 이르니 이는 곧 정양문(正陽門) 안이라. 정양문 북편으로 대청문(大淸門)이 있으니, 이는 대궐(大闕)의 궁장(宮墻) 정문(正門)이라. 삼문(三門)을 세우고 누런 기와를 이었으며, 앞으로 석책(石柵)을 하여 둘렀으니, 석책 사면이 네모 반듯하여 석책 안의 사면이 100보가 될 듯하며, 석책 동서로 2칸 넓이의 왕래하는 길을 내어 걸어서 다니고 거마(車馬)는 막으며, 동서 각 수백 걸음씩 지나 아득한 패문이 있으니, 동은 ‘부문(富文)’ 두 자를 쓰고, 서는 ‘진무(振武)’ 두 자를 썼으며, 대청문(大淸門)에서 정양문에 이르기까지 300걸음을 넘지 못하며, 큰길 좌편, 우편에 가게가 있으며, 정양문 안에서 사면을 둘러보니 정정방방(正正方方)하여 금벽(金碧)이 빛나며, 거마와 행인이 문을 가득 메워 수레바퀴 소리 벽력(霹靂) 같으니 지척(咫尺)에서도 말을 서로 못할러라.

문을 나오니 문의 제도가 정양문과 다름이 없으나, 튼튼한 성을 각이 지게 쌓고 남과 동서에 다 문을 내었으니 남문(南門)은 항상 굳게 닫았으며, 네 층 문루(門樓)가 또한 조양문 적루(敵樓) 같으며, 동서 문루는 다만 한 층일러라. 동편 문을 따라가서 남편 큰길로 꺾어 나가니 큰 돌다리가 있으니, 다섯 수레가 가히 나란히 갈 것이요, 좌우 성의 난간이 제도가 정교하며, 다리를 지나 큰 패문(牌門)이 있으니 금자(金字)로 ‘정양교(正陽橋)’ 석 자를 썼더라.

문밖은 다 가게라 서로 한 골목을 들매 길 너비가 세 걸음을 넘지 못하고 온갖 가게가 서로 마주 대하였으니, 파는 것이 아주 기괴한 보배라. 금옥(金玉)과 산호(珊瑚)와 수정(水晶)과 오동(烏銅)과 호박(琥珀)으로 각색 공교한 그릇과 노리개를 만들어 네모진 그릇에 넣고 유리(琉璃)로 뚜껑을 만들어 덮었으며, 필통(筆筒)과 향로(香爐)와 이름 모르는 집물(什物)이며, 옥(玉)으로 부처와 신선(神仙)을 만들어 사자(獅子)와 범과 사슴과 코끼리를 빛을 좇아 또한 금옥(金玉)으로 새겨 놓았으니 쓰는 바를 알지 못하나 이 또한 집물에 쓰는 것인가 싶으며, 벌여 놓은 것이 극히 가지런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며 가게마다 한 길이 넘는 거울을 맨 가운데에 걸었으니 앞에 벌인 것과 마주 대하여 있는 가게와 지나는 사람이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다 비치니 눈이 황홀하여 이루 볼 수가 없으며, 여기를 지나 유리창(琉璃廠)에 닿도록 가게가 끊인 곳이 없고 쌓인 물화(物貨)들의 이름을 그려 낼 방도가 없더라.

유리창은 명(明) 나라 적에 동창(東廠)이라 일컫던 곳이라. 호동(衚衕) 어귀에 또한 이문(里門)이 있고 문을 들어가니 책(冊) 가게가 있으니 각각 당호(堂號)를 명색을 나눠 ‘숭문당(崇文堂)’, ‘문수당(文殊堂)’, ‘성경당(聖經堂)’, ‘명성당(明星堂)’, ‘문성당(文星堂)’, ‘유당(裕堂)’, ‘취성당(聚星堂)’, ‘대초당(大招堂)’, ‘유무당(有無堂)’, ‘문무당(文武堂)’, ‘영화당(英花堂)’, ‘문환재(文煥齋)’ 모두 열세 가게라. 다 두 겹 집을 짓고 안팎으로 여러 탁자(卓子)를 사면으로 높게 쌓았으며, 집 위에 또한 누각을 만들었으니 한 가게에 쌓인 것이 수만 권이 넘을지라. 책 목록(目錄)을 상고하니 태반이 명 나라 때 이후 문집(文集)이요, 태평성대에 유익(有益)이 될 것이 많으니 모두 전에 듣도 못하던 바라. 우리나라 책을 사는 법이 해마다 이전에 나온 것을 구하기에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값을 많이 불러 비싸니,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여기는가 짐작할 일이라.

이 가게 외에 또한 두세 곳이 있으나, 그다지 볼만하지 않으며, 가게는 다 우리나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고이 책으로 꾸며서 서너 질 없는 곳이 없으니, 저들이 귀히 여기는 바인가 싶더라. 안경포(眼鏡鋪)와 서첩포(書帖鋪)와 그림포가 또한 여러 곳이요, 각양 물화(物貨)의 이름을 새겨 패를 세웠으니, 비록 두서너 달을 지냈어도 빠짐없이 볼 길이 없으며, 광대 놀음과 요술 구경이 또한 이곳에 많은지라. 사람의 어깨가 서로 닿으며 수레바퀴가 서로 치어 길이 통하지 못하니, 때때로 수레 앞이 막히어 식경(食頃)이 넘도록 머물러 섰는지라. 수레에 앉은 자가 손에 책을 들고 반 권을 넘게 보니 인품이 조급(躁急)하지 않음을 가히 볼러라. 비록 귀인(貴人)이라도 앞에 서 있는 자가 지난 후에 지나고 통행을 제한하는 일이 없더라.

서편으로 한 호동(衚衕)을 따라 돌아보니, 이곳은 좌의교(坐椅橋)와 태평거(太平車)를 꾸며 파는 점포라. 이외에는 호동이 다하도록 패(牌)에 ‘인삼(人蔘)’ 두 자를 써 달아 여남은 점포가 넘으니, 물화(物貨)의 많음을 알러라. 한 점포에 들어가니 이는 등(燈)을 파는 점포라. 이미 만든 것은 수십 칸 점포에 줄을 매고 걸었으며, 이제 막 만드는 것은 바탕과 각양 물건을 어수선하게 달았으니, 모두 유리(琉璃)와 양각(羊角)이며 살을 바른 것이 10분의 1이 못 되니, 둥글며 각지며 장단대소(長短大小)의 형상을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하며, 휘황찬란하니 하나의 훌륭한 광경이요, 술집에 이르니 5, 60칸 점포에 칸마다 네모진 탁자를 놓고 사면으로 반등(半燈)을 놓았으니, 사람이 대여섯도 앉았으며 예닐곱도 앉았고, 탁자에 벌인 바는 각색 보보(과일 이름)와 나물이며, 주루채란 것은 돼지고기를 가늘게 썰어 볶은 것이요, 지단가오[鷄蛋糕]란 것은 닭의 알로 만든 것이라. 사람 앞마다 병(甁)을 둘도 놓고 서넛도 놓았으니, 병 수로 값을 받으며, 또 차관[茶罐]과 향로(香爐)를 각각 하나씩 놓았으며, 점포 옆으로 여러 다리를 세워 집으로 오르게 하였으니 그 위도 아래와 마찬가지라. 풍류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아니하며, 문밖에 백마 금안이 많이 모였으니, 또한 번화한 기상이라. 황제가 기내(畿內)에 거둥하면 큰 술집에 그릇과 음식(飮食)을 따르게 하여 종관(從官)이 사 먹게 한다.”

하더라.

 

 

3. 무오연행록 제3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23일-30일]

○23일 관(館)에 머물다. 통관(通官) 서계문(徐啓文)이 들어와 보거늘, 내가 그 성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조선 사람이니 8대조(代祖) 대영(大榮)이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는지라, 오히려 조선 천안(天安) 고을로 성씨의 관향을 삼으나, 실제로는 달성 서가(達城徐哥)로라.”

하여 ‘이재(일가(一家)의 중국 음)로다.’ 하니, 일가란 말이라 우습더라. 제 할아버지 서종맹(徐宗孟)이 통관으로 우리나라에 여러 번 나오고, 우리나라 말을 잘하더라 하며, 서계문이 통관 중에 가장 말을 잘한다 하나, 말을 시켜보니 모를 말이 많으며, 나를 말마다 사또[使道]라 일컬으며, 말하기를,

“나는 조선말을 자세히 아나니, ‘하소’ 하며 ‘하옵시오’ 하며 ‘하여라’ 하며, 여러 가지로 아노라.”

하니 대체로 통관의 말이 사신(使臣)에게 혹 ‘진지 먹었느냐.’ 하며. 하인에게 ‘밥 잡소.’ 하니, 이런 말이 무수한지라, 서계문은 비록 이 같지는 않으나 또한 변변하지 아니하더라.

○28일 이날 섬라(暹羅) 상사는 병들어 참여하지 못한다 하여 세 사신과 종인(從人) 네 명이 들어왔으되, 다 얼굴에 병색(病色)이 있어 보기에 매우 위태로운지라.

대개 그 나라가 남쪽의 맨 끝에 있어 겨울이 춥지 않아서 다 겹옷을 입고 솜과 가죽옷을 입지 않았으니, 북쪽 지방의 추위에 어찌 병이 없으리오. 사신(使臣)도 용모가 보잘것없으며 종인은 지난번 밤에 보던 바와 달리 또한 병이 들었는지라, 얼핏 보기에 도깨비와 다름이 없더라.

○29일 창(唱) 소리가 나거늘, 삼궤 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마치자, 태상황(고종 건륭제)이 묻기를,

“국왕(國王)이 평안하시냐?”

상사, 부사가 공경하여 대답하기를,

“평안하시니이다.”

하니, 이어 상사, 부사를 앞으로 인도하여 어탑에서 1칸 거리에 앉히고 태상황이 손에 술잔을 들어 주거늘, 곁에 한 사람이 꿇어 받아 두 사신에게 전하거늘, 잔을 받은 후 반열로 물러나와 앉으니, 음식을 갖추어 먹이되 각색 보보(寶寶)와 실과(實果)며, 희자 놀음 여남은 가지를 차례로 베풀었더라.

전상을 잠깐 우러러보니, 태상황은 얼굴과 터럭이 심히 쇠하였으나, 모진 낯이며 큰 입이 범상(凡常)한 사람과 다르며, 모신 자가 예닐곱 사람이요, 화신(和珅)이 앞에서 오락가락하는지라. 부사가 마침 고개를 돌려 보니, 옆에 통관이 섰다가 급히 말려 말하기를,

“보지 말라.”

하고 겁내는 얼굴에 놀란 사람 모양이라. 희자 놀음을 잠깐 파하니, 사신이 또한 즉시 물러나온다 하더라.

○30일 저녁때에 광록시로부터 음식을 차려 보내었으니, 세 사신에게 한 탁자씩이요, 탁자마다 마흔 다섯 그릇씩을 올렸으되, 그 그릇이 다 백철(白鐵)로 만들어 크기가 작은 쟁반만 한지라, 탁자가 크되 그릇을 다 포개어 놓았더라. 실과는 날밤ㆍ대추ㆍ호두ㆍ사과ㆍ용안(龍眼)이요, 빙당(氷糖)ㆍ칠보당(七寶糖)ㆍ오화당(五花糖 과자 이름) 같은 유(類)요, 떡이 열네 가지로되 모양이 각각 다르나 맛은 한가지요, 겉은 볼만하나 먹을 것은 없으며 고기는 돼지고기 한 마리라. 서반(序班) 세 사람이 함께 가지고 왔거늘, 세 방에서 각각 종이와 부채를 주어 보내니라.

 

■기미년(1799, 정조 23) 1월[1일-8일]

○1일 사경(四更)에 세수하고 머리 빗기를 마치니 주방(廚房)이 떡국을 내오니 간이 맞지 않아 먹음직하지 아니하더라.

...중원(中原) 인물과 많이 달라 물으니, 아라비아 사람으로 관에 있어 조회에 참예하는 자라. 머무른 지 오래라서 능히 한어(漢語)를 하는지라. 역관에게 시켜서 물으니,

“네 나라가 황성(皇城)서 몇 리(里)나 되느뇨?”

대답하기를,

“다섯 달 만에 오느니라. 나라는 바다 가운데 있으나 사신이 올 때에는 도로 육로(陸路)로 오느니라.”

또 장차 묻고자 할 때, 반열에 들어가서 묻지 못하니라.

...두 주방(廚房)으로 세찬(歲饌)이라 하고 큰 소반에 수십 가지 우리나라 음식을 차려 나오니, 매우 정갈하게 차렸더라.

○3일 오시쯤에 역관이 들어와 이르되,

“길에 왕래하는 자가 다 마래기 위에 상모[槊毛]를 떼었으며, 통관이 아문에 있는 자가 또한 그리하거늘, 나가 그 이유를 물으니, 태상황이 오늘 묘시(卯時)에 상사(喪事) 났다.”하더라.

○5일 아라비아 사신은 섬라 사신 아래 섰으되, 곡할 때에 혹 자주 눈물을 씻는 자가 있으니, 중국에 품직(品職)이 있어 자못 높다 하나, 검은 낯과 구레나룻이 밉지 아니하여도 흉악한 오랑캐며, 그들 앞으로 지나가면 비린내가 코를 거슬리더라.

세 사신이 반열에 나아간 후는 곧 인산인해(人山人海)라. 저들이 떼로 몰려들어 네 겹으로 에워싸고 혹 손으로 모대(帽帶)를 어루만져 보며, 혹 손바닥에 글자를 써 벼슬도 물으며, 내내거거(來來去去 군중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모양) 하여 모를 말로 지저귀며, 저희끼리 또한 쑥덕여 끊일 때가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게 하더라.

 

 

4. 무오연행록 제4권

■기미년(1799, 정조 23) 1월[9일-25일]

○12일 날마다 황손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섬라(暹羅 태국)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 또한 옆에 섰으나 한 번 묻는 말이 없고, 홀로 우리나라 사신에게 날마다 삼시를 아니 와 보는 적이 없으니, 그 공경하여 부러워하는 뜻을 가히 볼 것이요, 반열에 출입할 때에 비록 왕공(王公) 대인(大人)이라도 반드시 자세히 보아 혹 웃음을 머금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혹 길을 사양하여 오래 돌아보는 자가 많으니, 우리나라 사신이 들어올 때마다 저들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 본래 이 같다 하니, 진실로 예의가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로다. 칙사패문(勅使牌文)이 이날 먼저 떠났다 하더라.

○15일 황제(皇帝 인종 가경제)에게는 두 형과 아우가 있는데, 이름이 영선(永璇)인 청 고종의 8번째 아들 의친왕(儀親王), 영성(永瑆)인 열한 번째 아들 성친왕(成親王), 이름이 영린(永璘)인 열일곱 번째 아들 석친왕이다.

황제는 열다섯 번째 친왕(親王)으로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이름은 영염(永琰)이다. 처음엔 길 영(永) 자 항렬(行列)이었는데, 천자(天子)가 되고는 길 영(永) 자를 고쳐 자루 영(穎) 자로 쓴다 하더라.

○19일 서양 사람은 끝내 나와 보는 일이 없더니, 돌아올 때에 천주(天主) 위하는 집에서 무슨 경(經) 읽는 소리가 나거늘 문을 열어 보니, 아까 보던 관(冠)과 옷을 입고 북벽(北壁) 밑으로 돌아다니며 무슨 소리 하니, 키 작고 얼굴이 검으며 인물(人物)이 매우 모질어 뵈더라. 성(姓)은 탕개라 하고 이름은 기록지 못하며, 근래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에 가는 일이 없는지라, 우리나라 사람이 이르자 지키는 자가 묻기를, ‘이곳에 다님을 귀국(貴國)에서 금한다 하더니 어찌 왔느뇨?’ 하니, 누가 전하는 말인지 모르되, 극히 괴이하더라.

공자(孔子)가 가라사대, ‘말이 충성되고 미더우며 행실이 도탑고 공경하면 비록 만맥(蠻貊) 지방이라도 가히 가리라.’ 하시고, 유하혜(柳下惠)가 이르되, ‘저는 저요 나는 나니 제가 어찌 내게 더러우리요.’ 하니, 천주당을 구경 않음이 또한 괴이한 의사라.”

하여 치형이 보고 와서 웃더라.

○23일 관에 이른 후 들으니, 여러 역관이 모여 황제 얼굴 봄을 서로 자랑하여 자세히 본 바를 이르더니, 한 역관이 말하기를,

“나는 황제를 자세히 볼 뿐 아니라, 또한 공주(公主)를 보았노라.”

하며, 이르되,

“아침에 나올 때에 어로(御路)로 좇아 나오더니, 뒤에서 한 사인교가 이르되 종자가 10여 인이라 소리 하여 ‘기다리라.’ 하거늘, 자세히 보니, 한 부인이 흰옷을 입었으되, 옷 모양은 급작스러워서 알 길이 없고 머리는 뒤로 상투같이 쪽졌으며, 흰 무명으로 접어 이마를 동이고 두 끝을 굽혀 두 귀 밑으로 빼어 드리웠으며, 담뱃대를 물고 의자에 태연히 앉았으며, 종자 다 양가죽 옷을 입고 나는 듯이 따라 어로(御路)로 좇아 가다가, 휘장으로 길을 막았거늘 종자가 휘장을 떼어 제치고, 가죽 채찍을 들어 군사(軍士)를 치며 지나니 위의가 무서운지라, 이 반드시 공주(公主)이러라.”

하거늘, 한 역관이 말하기를,

“친왕비(親王妃)도 있고 대신(大臣)의 명부(命婦)도 있으니, 그대 그 공주(公主)인 줄 어이 아느뇨?”

대답하기를,

“그 나이가 30 안이로되, 얼굴이 미워 남자와 다르지 아니하니, 공주가 아니면 그 미운 얼굴에 어이 이 같은 귀인(貴人)이 있으리요.”

하니, 듣는 자가 다 웃더라.

○25일 어제 반열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철보(鐵保)가 이르러 부사(副使)와 나를 향(向)하여 손을 들어 예(禮)하고 벼슬과 벼슬에 오른 햇수를 묻고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잘 있느냐? 물으니, 박제가 들어왔을 때에 친했던가 싶더라. 얼굴이 갸름하고 행동거지 자못 분명하여 글하는 사람의 모양이러라. 오랫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나 말을 통하지 못하는지라, 다만 가만히 한참 동안 섰다가 돌아가더니, 이날 반차(班次)에 또 만나나 선 곳이 조금 먼지라, 부사(副使)가 먼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니, 철보가 또한 손을 들어 가슴에 대고 흔들기를 마지아니하니, 극히 정다운 거동이라. 이 풍속이 이러하더라. 오늘도 음식물 한 탁자(卓子)를 주니, 전에 주던 것과 마찬가지더라.

 

 

5. 무오연행록 제5권

■기미년(1799, 정조 23) 1월[26일-29일]

○27일 사인교 대여섯 채가 함께 지나되 말 타고 인도하는 자가 섰으며, 뒤에 따르는 것이 7, 8개씩 되는데 다 내시라. ‘등등(等等)’ 하니 기다리란 말이라. 수레를 멈추고 섰으니, 사인교 안으로 얼굴을 유리에 대고 밖을 보는 모양이 다 소복(素服)한 부인이라. 다 공주와 군주(郡主)라. 지난 후 부사(副使)가 나를 돌아보아 말하기를,

“전혀 내외 할 줄을 모르니, 저것이 말이 되느냐.”

하더라.

○29일 관에 머문지 오늘까지 40일이라. 일 있는 때를 당하여 아직도 떠날 날 기약이 없으니 매우 궁금하더라.

 

■기미년(1799, 정조 23) 2월[1일-6일]

○1일 이곳 사람이 청심환을 기이(奇異)한 보배로 아는지라, 한 환에 3돈 은을 주고 서로 매매하되 반이나 가짜라 이곳 사람이 이러한 줄을 모르지 아니하되, 거짓 것을 얻어도 오히려 좋게 여기니, 그 곡절을 알 길 없는지라. 혹 이르되 ‘청심환 가운데 오랜 얼음을 넣으니 바다 가운데에서 천년이 되어도 녹지 아니하는 얼음이라.’ 하니, 천하에 녹지 아니하는 얼음이 어디 있으리오. 만일 사신에게 하나를 얻으면 이것은 참된 것이라 보배를 얻은 듯이 다행히 여기니, 무슨 기이한 효험(效驗)을 보는지 괴이하더라.

○2일 수십여 일을 궐을 오고가는데 날을 지내고, 수일부터 비로소 관에 있어 종일 문을 닫고 깊이 앉았기 약간 심심한지라, 상사가 행중(行中)의 《노가재일기(老稼齋日記)》를 가져왔거늘, 내가 길에서부터 한 권씩 빌려 보았는데, 못 다 본 것을 어제 오늘 다 보니, 북경 길에 구경을 끝까지 다함은 타인에 미칠 바 아닌 듯한지라, 그 각산사(覺山寺)에서 혼자 밤을 지내고 천산을 찾아 여러 날 애쓰던 것이 더욱 기이하되, 노구교(蘆溝橋)와 서산(西山)을 구경하지 못함을 깊이 한(恨)하는 바일러라 일컬었으니, 사신이 되어서는 비록 구경을 이같이 하고자 하나 얻지 못할 일이어니와, 나는 근년의 사행(使行) 보던 바도 또한 못 본 곳이 많으니, 노가재로 하여금 천재(千載)의 졸(拙)한 사람임을 웃으리로다.

○3일 45리 밖에 산이 둘렀으니, 이름은 만수산(萬壽山)이요, 산 뒤에 층층한 탑과 첩첩한 누각을 멀리서 바라보니 인간 세상의 경치가 아니니, 이는 또한 서산(西山)이라 하는지라, 이윽고 가서 큰 언덕을 돌아 호권으로 들어가니, 문안에 4, 5칸 집이 있으되, 칸살이 가장 커 1칸이 4칸이나 된 듯하니, 큰 범을 넣은 곳이라.

 

 

6. 무오연행록 제6권

■기미년(1799, 정조 23) 2월[7일-30일]

○8일 아침밥을 가장 일찍 먹고 세 사신이 떠나려 할 때, 상고의 짐을 오히려 실어 내지 아니한지라. 상고의 짐이 비록 사신이 상관할 것은 아닐지라도 이 짐으로 하여 책문(柵門)에 이르러 이유없이 여러 날을 묵으니, 대개 사신이 책문을 나갈 때에 짐이 못 따르면 문을 지나지 못하는지라. 이번은 이전에 비하여 10일을 더 묵었으되 떠나는 날 오히려 이같이 지체하니, 역관의 거동과 상고의 태만함이 극히 터무니없는지라, 상사가 상고의 두목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부역 정자현의 마두를 뜰에 꿇려 대신하여 죄를 들추어내고, 사시 말(巳時末)이 된 후 비로소 길을 차례로 떠나는데, 일행 군관, 역관들이 의복이 경쾌하고 가는 것을 기뻐하며, 강을 건너 들어오던 때에 근심하던 일과 확실히 다르나, 각방 쇄마구인(刷馬驅人)과 주방(廚房) 하인은 떨어진 전립(戰笠)이 얼굴을 덮었고 새끼 띠로 허리를 동였으며, 더러운 옷이 현순백결(懸鶉百結)하였더라.

들어올 때에도 그 모양이 진실로 흉악한지라. 지금까지 이르도록 반년을 부엌 사이에 있으며 옷 입은 채 기거를 하니, 의복의 피폐함이 어찌 이렇지 아니하리오.

그러나 흔한 물에 몸도 아니 씻었는지라, 더러운 때가 얼굴에 덮이어 흡사 도깨비의 거동을 이루었으니, 이국(異國)의 비웃음거리가 됨을 면하기 어려우나, 이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라

○10일 역관과 하인이 동락사(同樂寺)에 가 안질약(眼疾藥)을 많이 산다 하니, 절 중 이것으로 이익을 보아 부유하다 하더라. 그 약이 곱게 빻은 가루약이로되 용뇌(龍腦 향료 약재) 기운이 많더라. 첫날 통주 들어갈 때, 한 역관이 말하기를,

“안질약이 이곳에서 매매하는 것인데, 사려고 가게마다 다니되 이미 고려 사람에게 다 팔고 없다 하니, 이는 의주(義州) 상고(商賈)가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하여 한 일이라. 그 소행이 원통하고 분하다.”

하더니, 여기 또한 매매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아니하다 하더라.

○16일 유관(楡關)에 이르러 숙소에 드니, 여러 문과 겹겹 담이 극히 그윽하고 깊숙하더라. 주인이 그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보니, 나이가 65요, 그 아들은 20여 세는 되었더라. 성을 물으니, ‘한가(韓哥)’라 하고, 하는 일을 물으니, ‘이전에는 과공(課公)을 힘썼으나 이제는 버렸노라.’ 하며, 그 아들이 자주 나와 은근한 뜻이 있더라.

내가 앉은 온돌방 앞에 화촉시(華燭詩) 한 수를 진홍 비단에 써 벽에 붙였거늘, ‘누구의 신방(新房)이냐?’ 물으니, 한생이 이르되,

“아들이 2월에 아내를 맞았다.”

하며, 고운 장(欌)이며 채색 궤(櫃)며 의자와 탁자가 다 빛나니 처가에서 얻은 것이라 하며, 젊은 부녀가 문에 비껴 구경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혹 화장이 짙고 의상이 화려하더라. 한생에게 식구를 물으니, 남녀 50여 인이요, 온돌방이 16칸이라 하더라.

○24일 길을 떠날 때, 들으니, 상방 숙소에서 주인이 방전(房錢)을 다투어 문을 닫아 길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자못 곤경(困境)이 많은지라, 통관(通官) 영송관(領送官)이 알고 주인을 잡아내어 가죽 채찍으로 많이 친다 하니, 방전은 다 숙소의 군관이 당(當)하는 바라. 일의 형편이 그저 지날 수 없는 일이어늘, 길에 수레를 머물고 숙소의 군관을 잡아들여 여럿이 보는 곳에서 곤장을 치니, 뭇 되놈들이 놀라고 통관이 또 자기가 무안(無顔)하여라 한다 하기로, 그만 그치니라.

○25일 대릉하 물가에 이르니, 얼음이 오히려 풀리지 않았더라. 다리를 좇아 가다가 중간에 이르러, 다리가 무너져 없고 얼음이 터졌는지라, 한 되놈이 전신(全身)을 가죽으로 싸고 물속으로 왕래하여 일행을 호위하여 넘기고, 또 소에게 메운 수레 하나를 대령하여 하인(下人)을 건너거늘, 물으니, 대릉하 성안에서 보낸 것이라 하더라.

 

■기미년(1799, 정조 23) 3월

○4일 첨수참에 이르러 합가의 집에 숙소를 정하니, 합가 하인들과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되 우리나라 풍속을 이르는 말이 그른 것이 없으니, 책문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회령(會寧), 강계(江界)로 다니며 가만히 인삼[蔘]을 캐는 까닭인가 싶더라. 밤 든 후에 합가가 하처(下處) 군관이 방값을 아니준다 하여 요란히 굴거늘, 까닭을 물으니, 하처 군관이 합가에게 책문 와서 방전을 받으라 한다 하고 싸운다 하니, 대개 하처 군관이 심양 이르던 날로부터 방전이 다했다 하고 의주에 공문을 보내어 불우비은(不虞備銀) 들여오기를 아뢰거늘, 내 엄히 분부하여 물리쳤더니, 제가 저들을 충동하여 짐짓 방전(房錢)이 없음을 알게 하여 이같이 하는 의사라, 그 계교가 통악(痛愕)하거늘, 군관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니라.

○5일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니, 또한 전에 들었던 집이더라. ...의주의 먹거리가 다 이곳에 이르렀으니, 그중에 김치가 입맛을 돋우었다.

○6일 2월 그믐날 편지를 보니 고국이 태평하다는 회답이요, 칙사는 3일 서울로 들고, 진향사(進香使)는 3일 떠났다 하였더라. 통원보에 이르니, 또한 이전 들었던 집이라. 주인 발장(撥長) 이가(李哥) 온돌방 밖에 나와 맞되, 반기는 빛이 있더라.

○8일 구책문에 이르러 가겟방에 잠깐 쉬어 상방, 부방 행차를 기다리더니, 통관 김윤희(金允喜)의 아이가 그 아우와 조카를 데리고 와 보니, 인물이 의젓하여 서계문(徐啓文)에 전형(典刑)이 많더라. 제집이 가겟방 남편에 있으니, 수목이 울창하고 집들이 즐비한지라. 저희 4형제가 문을 나누지 아니하고 한집에 거처하니 식구가 110여 인이라 하니, 이는 쉽지 아닌 일일러라.

○11일 책문에 머물다. 진향사(進香使) 방물(方物)이 이미 책문 밖에 이르니, 차사원(差使員) 위원 군수(渭原郡守) 박광진(朴光進)이 장막(帳幕)을 베풀고 지킨다 하더라. 수역(首驛) 김윤세가 의주로부터 들어오다.

○13일 책문에 머물다. 윤갑종, 박내행이 들어와 아뢰되,

“수레 대여섯은 내일 일찍 들어오고, 여남은 수레는 내일 모레 들어오되, 양쪽 고개에 쌓인 눈이 자[尺]가 넘고 얼음이 미끄러우니, 흙이 질어 수레가 나오기 또 4, 5일을 허비하리라.”

하는지라. 상사가, 함께 데리고 오지 아니하고 먼저 오므로, 온돌방에 나 앉고 두 역관을 각각 곤장치기를 세 번씩 하고, 즉시 도로 떠나가라 하니라. 진향사(進香使) 일행이 신시(申時) 후에 책문에 드니, 부사 참판(參判) 김이익(金履翼 1743-1830)과 서장관 교리(校理) 조석중(曺錫中)이 거처에 이르러 찾거늘, 저녁 식후에 내 답례하니라.

○14일 책문에 머물다. 진향사 상사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 : 영조의 사위)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사와 서장관은 방물 수레를 싣게 하고 떠나려 하여, 미처 수레를 얻지 못해서, 뒤처져서 머물다.

○17일 책문을 나매 시원한 마음이 새가 농(籠) 속에서 나옴 같으나, 다만 반년 동행이 또한 이별(離別)을 이루니, 상하(上下) 일행이 손을 잡고 눈물을 머금은 이가 많으니, 인정이 괴이치 않은 일일러라. 역관 김명규와 이시풍, 박흥규 또한 뒤처지니라. 내 수삼(數三) 종인(從人)으로 더불어 광막한 들 가운데 서로 지키어 있으니, 겹겹 산이 앞에 둘러 있고 긴 내[川]가 베개[枕] 아래 소리하니 의사(意思)가 심히 쓸쓸하더라. 북경 금물(禁物)이 여러 가지로되, 그중 흑각(黑角)과 말이 군기(軍器)에 속한다 하여 더욱 엄히 금하니, 만일 잡히는 일이 있으면 아국의 생사(生事 사건이 생김)가 되는지라, 이러므로 아국이 또한 엄금하니, 흑각은 혹 짐 속에 감추어 가만히 내어 오되, 오직 말을 숨길 길이 없으니, 상사가 말 한 필 밖에는 감히 내어 가지 못하고, 노새와 나귀는 금치 아니하나 삼승 두어 필을 세로 받으니, 이러므로 그 수를 다투어 극히 요란하더라.

○18일 책외(柵外)에 머물다. 이날 칙사(勅使)가 책문에 든다 하는지라, 새벽부터 성장(城將)과 세관(稅官)과 문어사(門御史)와 여러 관원이 연후(延候)를 위하여 연속하여 책문을 나 동으로 나아가며 책문 안팎에 사람이 분분이 출입하더니, 오시(午時)쯤 되어 가정(家丁)의 무리가 아국 역마를 타고 먼저 오되, 마부가 다 말을 끌어 오는지라. 혹 고삐를 놓고 뒤에 처지면 문득 채로 마부를 때리니, 대개 아국 말은 저의 말과 달라 고삐를 끌지 않으면 길을 바로 아니 가니, 이로써 부디 끌림이더라. 짐바리가 무릇 5, 60태(駄)라, 이는 다 의복과 금침(衾枕)과 음식을 받아오는 것이요, 그 밖 예물과 은자(銀子)는 다 의주에다가 맡겨 재자관(齎咨官) 편에 갖다가 주기를 구한다 하니, 대개 황제 칙지(勅旨)가 있어 예물을 받지 말라 함인가 싶더라.

꽤 오랜 후에 부칙(副勅) 항걸(項傑)이 말을 타고 앞에 서니, 통관(通官) 계문 태평보와 가정과 연후 갔던 사람을 합하여 수십 인이 다 말을 달려 따르고, 상칙(上勅) 장승훈(張承勳)은 태평거(太平車)를 타고 뒤에 섰으니 종자(從者)가 또한 수십 인이라. 한데 뭉쳐 일시에 책문을 들고 또한 즉시 닫더라. 칙사가 문을 들어 봉성으로 나아가되 여기서 북경까지 열 엿새에 배참(倍站)하여 4월 3일 마땅히 북경을 들리라 하더라.

○20일 중강(中江)에 이르매 갈대 수풀 사이사이 복숭아 같은 꽃이 붉은빛과 푸른빛이 서로 고움을 다투며, 산허리에 두견화(杜鵑花)가 왕왕이 피었으니, 시물(時物)의 속히 변함을 감동하고, 마수(馬首)의 돌아옴을 기뻐하여 압록강을 건너자, 부윤(府尹)이 강가에 장막을 배설하고 맞으니, 가만히 수작하다가 서문(西門)으로 말미암아 응향각(凝香閣)에 숙소를 정하니 이후 사적(事蹟)은 별로 기록할 것이 없고, 22일 떠나 30일 복명(復命)하니, 의주에서 떠난 날로부터 아흐레 만에 서울 이르니라.

무오(戊午) 10월 19일 서울에서 발행하여 11월 8일 의주 이르고, 19일 도강(渡江)하여 12월 19일 북경에 들고,

기미(己未) 2월 8일 북경서 회정(回程)하여 3월 8일 책문 이르고, 20일 도강하여 30일 서울 들어오다.

무오 10월 소(小), 11월 대(大), 12월 대, 기미 정월 소, 2월 대, 3월 대.

서울서 발행하여 19일 만에 의주 이르고, 의주에 11일 묵고, 도강한 지 30일 만에 북경에 들고,

유관 55일이요,

회정한 지 31일 만에 책문 이르고, 책문서 11일 묵고, 도강한 지 11일 만에 서울 드니, 합(合) 160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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