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서경순(徐慶淳):1803- ?
■서경순
본관 달성, 자 공선(公善), 호 해관(海觀)· 몽경당(夢經堂)이며 부평(富平)에서 태어났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고산현감(高山縣監)에 그쳤다. 성격이 매우 호방하였으며, 벗과 교유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시와 글씨에 능했다.
1855년(철종 6)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연경에 갔다와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저서에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가 있다.
■몽경당일사 서(夢經堂日史序)
○왜 몽경당(夢經堂)이라 하였는가, 꿈을 기록한 까닭이다. 무슨 꿈인가, 석경(石經)의 꿈이다. 왜 일사(日史)라 하였느냐 하면 여행을 기록한 까닭이며, 어디를 갔었느냐 하면 북경[燕]에 갔었다. 왜 사(史)라 하고 당(堂)을 관련시켰느냐 하면 역사를 당에서 수찬(修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록한 것을 왜 사(史)라 하는가? 보고 들은 것을 고르고 주워 모아서 뒷날에 권장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여, 패사(稗史)와 외사(外史)의 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 까닭에 사(史)라 하였다.
내가 을묘년(1855, 철종 6) 정월 보름날 밤 꿈에 중국에 들어가서 어떤 곳에 이르니, 현판을 태학(太學)이라 하였고 돌이 여기저기 서 있었으니, 곧 백개(伯喈 채옹(蔡邕))의 석경(石經)인데, 석면(石面)이 깎이고 패여서 글자 획이 뭉개지고 돌결이 부스러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고 손으로 여러 번 만져 보고, 두 기둥 사이로 올라가서 절하니, 엄연히 공부자(孔夫子)께서 앉아 계신 것 같았다. 사당 모습이 황량(荒涼)하고 잡초가 우거져서 탄식이 일어났다. 옷소매로 벽에 붙은 먼지를 털고 배회하면서 탄식하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 보니, 곧 꿈이었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꿈이란 원인이 있고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도 양을 치면서 곡개(曲蓋)를 두드리거나 부는 꿈은 있었으되, 일찍이 수레를 타고 구멍으로 들어가거나 부추풀을 가지고서 쇠[鐵]를 씹는 꿈은 없었으니, 인연도 없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 10월에 삼종형(三從兄) 우란공(友蘭公 서희순 1793-1857)이 상사(上使)의 명을 받드니, 내가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연경에 들어간 지 열 아흐레 만에 태학에 가서 공부자의 사당에 참배하니, 사당 앞에 있는 석경 92개가 별같이 벌여 있고 바둑같이 퍼져 있었다. 내가 문득 전날의 꿈을 생각하고 기뻐서 다가가 살펴보니, 곧 건륭(乾隆) 때에 새로 새긴 것이고, 한(漢) 나라 때 홍도문(鴻都門) 앞에 새겨 있던 것이 아니어서 내 마음에 섭섭하여 무엇을 잃은 것 같았다. 관(館)으로 돌아오니, 마침 회령(懷寧) 사람 방삭 소동(方朔小東)의 서신이 왔는데, 백개 채옹의 석경 탑본(搨本) 6장을 함께 보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틀림없이 꿈에 본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감탄하여, ‘이상도 하다 꿈이여’ 하고, 그런 뒤에야 꿈이란 인연이 없어도 인연이 있게 되고, 생각함이 없어도 생각이 있게 됨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산천(山川)ㆍ풍속(風俗)ㆍ성시(城市)ㆍ인물(人物)의 볼만하고 느낄 만하고, 놀랄 만하고 기꺼울 만한 것을 대략 기록해 엮어서 《몽경당일사》라 하였다. 이 일사가 역시 황록(隍鹿)이나 장접(莊蝶) 같은 꿈 가운데의 꿈이 아닌 줄 어찌 알까 보냐!
이듬해 병진년 삼월 삼짇날에 몽경당 주인 해관생(海觀生)은 스스로 서문을 쓰노라.
1. 몽경당일사 제1편
■마자인정기 서(馬訾軔征紀序)
○27일 압록강에 이르니 세 사신 부사는 조병항(趙秉恒 1800- ?)인데 벼슬이 참판이고 경신년생이며, 서장관은 신좌모(申佐模 1799-1877)인데 벼슬이 교리이고 기미년생이다. 과 일행 상하가 모두 모였다.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 을묘년(1855, 철종 6) 10월
○28일 낮에 책문(柵門)에 닿았다. 책문이란 곧 1칸쯤 되는 초옥(草屋)인데, 두 짝으로 만든 판자문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되며, 목책(木柵)이란 것이 마치 우리나라 목장(牧場)의 말 우리 같아서 단지 경계만 표시했을 뿐 가리어 막을 만하지는 않았다. 책문이 24곳이나 되는데, 이것이 제일 복판이라 한다. 내가 평소에, 책문이란 것이 전쟁할 때의 책문처럼 성이나 궁궐의 층문(層門) 같은 줄 알았더니, 이번에 와서 본 것은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의 안목에도 차지 않으니, 참으로 보잘것없다. 그래서 내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관(壯觀)으로는 으레 연경을 말했는데 지금 책문에 와서 이런 것을 보니 연경을 알 만하다.’ 하였다. 책문에 도리어 사직동 우리 집의 삽짝문 같은 것도 없으니, 어째서 구차하기가 이러한가?
저들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모두 새옷을 입고 책문에 둘러서서 마두들과 손을 잡고 은근하게 대하는 것이 마치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 같다. 그들 중에 정태평(鄭太平)을 부르는 자들이 10분의 8, 9는 된다. 정태평이란 자는 선천(宣川) 사람으로 상사의 가마를 부축한 사람인데 전후 연경에 들어간 것이 20여 차례나 된다. 그 사람됨이 술을 잘 마시고 중국 말을 잘하며, 순박하고 가식이 없으므로, 저들이 모두 정의가 두텁고 관곡(款曲)하며, 또 ‘정태평’이라는 석 자의 발음이 우리나라 음과 같아서, 쉽게 불러 저들이 조선말을 한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점(店) 안에 있는 젊은 여자들은 모두 분을 바르고 꽃을 꽂고 일부러 요염(妖艷)한 태도를 짓는다. 정태평(鄭太平)과 함께 웃으면서 소곤거리다가 나를 보고 피해 숨어서 문틈으로 엿본다. 내가 정태평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시골 여자들로 물을 긷거나 밭에서 김매는 자가 예사 행인들은 피하지 않고 혹은 말대꾸를 하거나 길을 가리켜 주기도 하는데, 양반을 만나면 꼭 몸을 돌려 서거나 혹은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괴이쩍게 생각하였더니, 이제 중국 여자들도 그러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태평의 말이,
“그거야 뻔한 일이지요. 조선 양반들은 본래부터 예의(禮義)를 잘 알고 또 극히 존엄(尊嚴)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얼굴을 드러내어 남자와 수작하는 것이 예의가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절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니, 예의의 마음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저 사람들이나 우리나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는 천성과 사단(四端)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책문 안 좌우에 있는 시전(市廛)은 일자로 죽 늘어서 있고, 동서 거리의 길들은 세로 가로 먹줄을 친 듯하고, 아로새긴 창과 고운 장식의 문들이며 단청 칠한 기둥과 붉은빛 난간이며 푸른빛 문패, 황금빛 편액(扁額)이 휘황찬란하여 눈부시지 않은 것이 없다. 매매(賣買)하는 물건들은 모두 그 나라의 기이하고 진귀한 것으로 풍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마두 한시량(韓時良) 상방 마두인데 의주 사람 에게,
“책문을 볼 때에는 남산골 샌님들의 100냥짜리 초가(草家) 같더니, 책문 안 시전을 우리나라 운종가(雲鍾街)의 육의전(六矣廛)에 비교하여 보면 10배 100배가 되니, 겉으로는 가난해 보이나 실속은 부자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29일 일찍 일어나니 아침밥을 올렸는데, 밥그릇에 뚜껑을 덮고 반찬 접시도 많아져서 어제와 비교하면 좀 풍족했다. 내가 한 주부에게 이르기를,
“나의 호령이 어떤가? 내가 진사(進士)로 행세한 지 15년이나 되었으나 거재(居齋)한 적이 없으므로 다행히 호령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 중국에 와서 한번 호령하여 밥과 반찬이 이처럼 풍족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만일 나를 호령하는 군관으로 이름을 붙이면 어찌하나?”
하니, 한이,
“내가 어제 분부한 것을 들어 보니 애걸한 것이지 호령이 아니었습니다. 애걸하여 밥을 더 받아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부끄럽게 하고서 호령했다고 자칭합니까?”
한다. 내가 우스워서 튀어 나온 밥알이 밥상에 그득하였다.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을묘년(1855,철종6)11월[1일-16일]
○1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수레를 세내어 타는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이다. 수레의 제도는 대개 우리나라 좌거(坐車)와 같은데, 두 바퀴 위에 휘장을 쳐 집을 만들었다. 두 필 노새에 매어 몰이꾼이 길다란 채찍을 잡고 앞의 왼쪽 장대 위에 걸터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면, 채찍 끝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울린다. 두 마리의 노새는 채찍 그림자만 보면 죽으라고 달려,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오직 사람이 지휘하는 대로 숨소리를 죽이고 가는데, 감히 제 멋대로 가지 못한다. 서(徐)가 성을 가진 사람 하나가 같은 성이라 일컬으면서 와서 보고 반가워한다.
...봉황성(鳳凰城)을 보기 위해 10리를 돌아서 안시성(安市城)을 지났다.
...길가에서 보니 큰 수레가 떼를 지어서 연달아 다닌다. 그 제도가 둔박하여 우리나라 짐수레와 같다. 짐을 산더미같이 싣고 차부(車夫)는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가 하며, 노새나 말이나 소나 나귀를 4, 5마리 혹은 6, 7마리 혹은 8, 9마리를 매었다. 수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수레바퀴의 살은 똑같이 정(井) 자 모양이고 굴대바퀴는 똑같은 척도(尺度)여서 앞 수레나 뒷 수레가 궤도(軌道)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저자 집과 일반 집들이 즐비하고 장려(壯麗)하기는 과연 책문보다 나아서 역시 하나의 도회였다.
○2일 범가장(范家莊)을 지나 통원보에 이르러 묵었다. 옛날의 진이보(鎭夷堡)였는데 토성(土城)의 옛터가 있고, 보(堡)에는 말 13필이 있다. 처음 명칭은 ‘우체(羽遞)’라 하였는데 관제(關帝)의 이름 자를 피해서 비체(飛遞)라 고쳤다. 한 시간에 꼭 70리를 달린다.
○5일 먼지와 모래가 하늘에 꽉 차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일행 상하가 모두 먼지를 흠뻑 뒤집어써서 모두 사람 꼴이 아니었다. 내가 한 주부(韓主簿)에게 말하기를,
“연경 길에 들면서 오관(五官)이 쓸데없어졌다. 수레 바퀴 소리가 덜덜거려 늘 마른 천둥을 쳐서 비록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뒤따른다 할지라도 들리지 않으니, 이관(耳官)이 저절로 귀머거리가 된 것이요, 말이 피차 서로 통하지 못해서, 말몰이꾼과 종일 같은 수레를 타면서도 한마디 수작도 못하니, 구관(口官)이 저절도 벙어리가 된 것이요, 먼지와 그을음이 얼굴을 쳐서 두 눈이 함께 깜깜해지니, 목관(目官)이 또한 저절로 소경이 된 것이요, 코로는 숨을 내어쉴 수 없고 목구멍으로는 침을 삼킬 수 없어, 문득 하나의 생병신이니, 이러고서야 어찌 진짜 발광증(發狂症)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고, 마두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참으로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시킬 일이 있어서 너희들에게 삯을 주고 6000리를 왕복하자고 하면 요구하는 보수가 반드시 10리에 10전(錢)은 될 터이다. 연경 가는 길에 얻어 먹는 것이 혹 은전 3, 4냥(兩) 되는 자도 있으니, 은으로 돈을 계산하면, 돈으로는 품삯에 도저히 맞지 않는데, 눈보라를 무릅쓰고도 고생되는 일을 말하지 않으니, 마음에 병통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소인들의 외도(外道)입니다. 왕래하는 밥값이 소천(小泉) 20조(弔)에 지나지 못합니다. 냥을 조(弔)라 한다. 책문에서는 160엽(葉)을 1조라 하고, 연경 안에서는 500엽을 1조라 한다. 조는 중국 음으로 주[子爲]라 한다. 다섯 달을 공짜로 얻어 먹으며 변매(邊賣) 역원(譯院) 여러 사람들의 물건을 서로 바꾸는 것을 변매라 한다. 해서 횡재를 하게 되면 1년 동안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그중에도 가마를 부축하는 일이나 길 인도 등은 명색이 가장 박한 형편이나, 이것도 머리를 싸매고 다투어서 긴한 연줄을 얻어서 필경은 뇌물을 바치고서야 얻을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은 일정함이 있는데 뇌물도 여기에 따라 많아집니다. 따라서 소인들의 이런 일도 그만두지 않으려 해도 자연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고려총(高麗叢)을 지나다가 보니 산기슭에 무덤이 총총히 있는데,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이 있고 상석 위에는 돌향로ㆍ돌술병ㆍ돌술잔이 벌여 있으며, 또 무덤의 표석(表石)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무덤 제도와 똑같으니, 아마 포로가 된 고려 사람들이 여태껏 우리나라 풍속을 따라서 그런 듯하다.
○7일 조선관(朝鮮館)은 동문 안에 있고 관 안에 봉쇄(封鎖)한 곳이 있으니, 즉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 대왕이 거처하던 방인데, 지금은 도복 마두(都卜馬頭)들이 인부와 마필을 거느리고 유접하는 곳이 되었다.
○8일 내가 말하기를,
“책문에 들어온 뒤부터 너희들이 나에게 조롱하기를, ‘며칠 동안 길을 떠나 연로에서 듣고 익힌 만어(滿語)가 수천 마디였는데도, 한 구절도 해득하지 못하고 한 말도 배우지 못하니, 이러한 둔한 총기로 어떻게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기억하여 외웁니까? 옛날 어떤 상공(相公)은 사신으로 갈 때에 황성에 오자마자 만어를 다 알아서 거리에서 지껄이는 말과 장사치들의 상담까지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역원들도 따를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입으로 읽어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서 아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총명이 어찌 이렇게 다릅니까?’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을 못했다. 너희들이 연경에 다닌 지 자칭 20여 차례나 된다고 하였다. 이는 몽고어를 익히 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몽고 사람의 말에 하나도 입을 열지 못하니, 너희들은 둔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지금 나는 만어를 많이 알고 있다. ‘치반[赤飯]’이란 것은 밥을 먹는다는 말이며, ‘하우수(何于睡)’는 잠자기 좋아한다는 말이며, ‘두류(斗流)’는 돼지고기라는 말이며, ‘지단(只丹)’은 계란을 말하는 것이며, 주인은 ‘장궤적(掌樻的)’이라 하며, 차부는 ‘간차적(幹車的)’이라 하며, 남의 나이를 물을 때에는 ‘도다연기(道多年紀)’라 하며, 물건을 물을 때에는 ‘심마동서(甚麽東西)’라 한다.”
하니, 마두가 킥킥 웃으면서 말하기를,
“장합니다. 나으리 총명이 처음 길에 네댓 마디를 아시니, 만일 3, 4차례 연경에 오시면 10여 마디를 하시겠습니다. 연경에 오는 하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 천 따 지도 알지 못하지만, 한 번만 연경에 오면 한어를 달통해서 마치 미리 외우고 있던 것처럼 하기를 모두 이러합니다.”한다.
2. 몽경당일사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을묘년(1855, 철종 6)11월[17일-27일]
○17일 망해정(望海亭)에 도착하였다. 일명 징해루(澄海樓)인데, 즉 산해관 남쪽에 있는 장성의 동쪽 막다른 곳이다. 명 나라 때에는 관해정(觀海亭)이라 하였다. 정자의 헌함(軒檻)과 기둥이 썩어서 붙들고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정자의 남쪽 성의 뿌리가 바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밑에는 쇠를 녹여서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을 만들었고, 그 위에 큰 돌로 쌓아서 성의 끝이 그 위에 맞닿고 있으니 이른바 노룡두(老龍頭)라는 것이다. 바람이 이니 물결이 용솟음쳐서 거센 파도 소리가 진동하매 쭈뼛하여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다. 동남방에 있는 큰 바다는 아득해서 끝이 보이지 않고, 간혹 돛대만 하늘빛과 같은 퍼런 물결 위에 오락가락 한다. 동쪽을 향해서 5리쯤 되는 바다 가운데 돌이 하나 높이 섰는데, 구름 위에서 솟은 것 같다. 이것이 갈석(碣石)이라 한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믿을 수 없다. 옛날 오른쪽의 갈석이 지금에는 왼쪽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서쪽으로 향해서 수십 리 지점에 모래 무더기가 바다로 달려 든 것을 진황도(秦皇島)라 하는데, 진시황이 동쪽으로 바다 위에서 놀던 곳이라 한다.
○19일 저녁에 무령현점(撫寧縣店)에 도착해서 묵었다. 점문 밖에는 영희(影戱 영상극(影像劇))를 베풀고 있었다. 큰 수레 위의 사면에는 장지로 막고 층루(層樓)을 만들었으며, 다락 한쪽에는 종이를 발라서 창문을 만들고, 창문 안에 촛불을 켜 놓고 촛불 앞에서 종이로 사람과 말들을 만들어서 기계를 돌리고 끈을 잡아당기면 움직이는 그림자가 창문에 비쳐서, 혹은 창이나 칼로 싸우는 형상도 되며, 혹은 노래하고 춤추는 형상도 되며 혹은 남녀가 마주서서 꾸짖는 형상도 되어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호인 6, 7인이 누 밑에 서서 저희끼리 말도 하고 대답도 하며 노래 부르는 시늉, 우는 시늉을 해서 누 위에서 하는 연희와 맞추어 호응하고, 박자를 치고 징을 치며 거문고도 퉁기고 비파를 켜는 시늉을 하여 누 밑에서 하고 있는 가락에 맞춘다. 이 영희를 구경하는 호인 남녀들이 담을 둘러쌓은 것 같다.
○21일 사하역(沙河驛)에 도착하여 지숙하였다.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 : 황력은 중국에서 보내주는 역서(曆書)로 중국 조정에 역서를 청구하는 자문을 가지고 가는 사신을 말한다.) 진계환(秦啓煥)이 제주 표류인 19명을 인솔하고 우리나라로 나오는 길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모두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을 하면서 좋아하는 빛으로 영접한다. 나 역시 친구를 만난 듯하여 다정하게 묻기를,
“무사히 왔느냐?”
하고,
“언제 배를 탔다가 언제 어디서 표류되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임자년(1852)에 제주에서 배를 타고 나와 미역을 따다가 5일 만에 풍랑을 만나서 강남(江南) 지방에 정박(碇泊) 하였는데, 강남 비적(匪賊) 때문에 길이 막혀 지금 겨우 여기에 왔습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막연하게 강남이라 하니, 강남 어느 곳이냐?”
하니, 모른다고 대답한다. 내가 다시 묻기를,
“너희들은 악양루(岳陽樓)을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소상강(瀟湘江)ㆍ동정호(洞庭湖)ㆍ금릉(金陵)ㆍ건강(建康)ㆍ임안(臨安)ㆍ전당(錢塘)을 모두 들렀으나 봉황대나 악양루는 당초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전에 본 일이 있다. 동정호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채각 단루(彩閣丹樓)가 악양루가 아니냐?”
하니, 제주 사람이 당황해 놀라서 미처 대답하기 전에, 마두가 곁에 있다가 깜짝 놀라 묻는 말이,
“언제 보셨어요?”
하고 묻는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속으로 추측하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 같다.”
하였다. 그리고 마두에게 말하였다.
“제주 사람들이 풍랑에 표류하게 되면 그 이익이 미역을 따는 것보다 몇 갑절이나 된다. 10여 년 전에 제주 사람 고(高)가란 자가 처음 강남에 표류되어서 관(館)에 있을 때에는 후하게 먹여 주고 올 적에는 수레를 태워 주고, 제집에 돌아오니 은자가 자루에 남아 있어서 1, 2년을 잘 살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것을 기화(奇貨)로 그 뒤부터는 일부러 조그마한 배를 타고 큰 바다에 떠서 표류되기를 무릇 5차례나 있었으므로 제주 목사가 그 속셈을 알고 법에 의거해서 다스린다고 하였다.”
○22일 진자점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옛날 강주(江州) 여자 계문란(季文蘭)이 난리에 포로가 되어 심양 장경(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 여기를 지나다가 점벽에 다음 같은 시 한 수를 썼다.
머리의 쪽은 부질없이 옛 모양 그대로인데 / 椎髻空憐舊日粧
나들이 치마는 월 나라 의상으로 바뀌어졌네 / 征裙換盡越羅裳
우리 부모들 어느 곳에 살아 계신가 / 爺孃生死知何處
봄날에 통곡하면서 심양으로 가누나 / 痛哭春風上瀋陽
그리고 그 밑에 이런 말을 썼다.
“나는 강주 우상경(虞尙卿)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적에게 죽고 내가 포로가 되어 지금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서 벽을 닦고 이 글을 씁니다. 바라건대 천하에 뜻이 있는 인사들은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구해 주시오.”하였다
○23일 또 고려보(高麗堡)를 지났다.
대개 조선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서 와 살고 있는 곳이다. 길가에 논이 있으며, 물을 대기 위하여 보(洑)를 만들고 논두둑을 만들어서 벼를 심은 것이 우리나라 제도와 같다.
저자에는 누런 조를 쪄서 만든 떡을 판다. 흡사 우리나라의 찰떡 같으며 집과 방의 제도는 연경(燕京) 사람과 같다. 언제나 우리 사신들이 여기를 지나가면 반갑게 영접하는 것이 마치 같은 고향 사람들처럼 대한다. 그러나 요사이 와서는 하인들이 토색(討索)하고 속여서 다시는 그런 정을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
○25일 길에서 낙타에 물건을 싣고 가고, 또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낙타는 머리는 작으면서 위로 쳐들었고 목은 길고 굽었으며 등에는 두 봉우리가 마치 안장을 얹은 듯하며, 다리는 세 마디가 있다. 먼데서 바라보면 거북과 같고 가까이서 보면 학과 같다. 700근을 실을 수 있고 하루 300리를 간다고 하는데, 실은 것은 거의가 석탄이다. 북경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며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하며, 수삼십 필씩 줄을 이어간다.
○27일 한 담장 안의 무덤들이 총총해서 어떤 것은 두 무덤 사이에 발 하나 용납하지 못할 것도 있다.
대저 한집안 묘지가 몇 경(頃)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 사방 산을 전부 점거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또 묘지들이 거의 들판 밭과 모래 밭의 낮고 우묵한 곳이니, 이 묘들도 내룡(來龍)이나 뇌두(腦頭), 좌국(坐局), 안대(案對), 용호(龍虎), 득파(得破)가 있어서 풍수(風水)의 이치에 합치되는 것일까?
...명 나라 때에는 조선관을 몽고관 가까이에 두었더니, 이번에 머물러 있는 곳은 곧 회동관(會同館)이었다. ...상방과 부방의 서자(書者)들은 홍화점에서 먼저 떠나서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6일에 관소에 도착해서 여러 온돌방들을 수리하였다.
관문 밖 좌우의 몇 백 호 문미의 판대기에 ‘천태 인삼국(天泰人蔘局)’이니 ‘광성 인삼국(廣盛人蔘局)’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놓았으니, 모두 우리나라 물화를 서로 무역하는 곳인데, 물화 중에 인삼을 그들은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중한 것만 표시해도 경한 것은 자연 포함된다 하였다.
들으니, 유구관(琉球館)은 우리 관소의 서편에 있다 하기에 가서 보려 하자 문지기가 막는다.
외국 사람은 마음대로 못 들어간다고 말리니, 마두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온 나라 안을 두루 다녀도 아무 거리낌이 없으나, 다른 나라 사관(使館)에는 꼭 예부에 물어보고 다닌다.”
하였다. 문밖에는 인자막(人字幕)을 쳐 놓았는데 지키는 자가 있었다.
3. 몽경당일사 제3편
■일하잉묵(日下賸墨)을묘년(1855, 철종 6)11월[28일-29일]
○28일 삼국(蔘局)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보고 꼭 성명ㆍ관작ㆍ연령을 묻고, 무슨 볼일로 연경에 들어왔느냐 한다. 처음에는 마두를 시켜서 대신 대답하게 하였으나, 끝내 묻는 대로 따라서 대답하기가 어려워 특서(特書)로 ‘별행 상사의 종제 진사 난중 서해관 경순 연령 53세[別行上使之從弟進士郞中徐海觀慶淳年五十三]’라고 써서 좌우의 벽에 붙여 놓았더니, 이것을 보고는 다시 묻지 않는다. 내가 삼국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고 대국의 산천과 인물을 보려고 3000리 먼 길을 온 데 불과하며, 몸에는 한 푼의 엽전이나 은자도 없으니, ‘공공적(空空的) 저들은 가난한 사람을 공공적이라 칭한다. ’이라 불러도 무방할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물건이 좋으니 진짜니, 장점 단점과 몇 근이니 몇 냥쭝이니 하는 말을 하지 말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들은 여태까지 돈 없는 사람이 자칭 돈 없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면서, 여러 가지 진기한 문방구와 좋은 향(香)과 차ㆍ글씨ㆍ그림들을 좌우에 펼쳐 놓고 나에게 감상하기를 청하는데 모두 기이한 형체(形體)여서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다.
○29일 서문을 지나서 월장(月墻)을 따라 돌아 유리창(琉璃廠)을 향하였다. 이 창은 유리 기와를 굽는 곳이며, 청국에서 만인(滿人)과 한인 감독을 두고 가마를 설치해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한다고 한다. 이 유리창이 시가의 도회를 이루어서 남북은 좁고, 동서는 길이가 3리쯤 된다. 아까 서화를 구경할 때에 보니 과연 유리로 만든 보패들이 점포에 가득 차 있었다.
《의청각잡초(倚晴閣雜抄)》를 상고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유리창은 원래 궁전 기와를 굽기 위한 곳인데, 북조(北朝) 위 태무(魏太武 후위의 세조) 때에 월지국(月氏國) 사람이 서울에서 물건을 팔면서 말하기를 ‘돌을 녹여서 오색 유리를 만들 수 있다.’ 하였다. 그래서 돌을 광(鑛)에서 녹여 만드니 그 광택이 서역(西域)에서 온 것보다 더 좋았다.”
지금 창에서 굽는 것은 대개 원래의 월지국 사람이 남긴 방법이라 하며, 그 법으로 만든 기와에는 누런빛과 푸른빛의 두 가지가 있다. 명 나라 때에는 각 창을 모두 내관(內官)이 맡아 보았으며, 궁정 기와 이외에도 어병(魚甁)을 만들어서 금붕어와 잡풀을 넣어 두고, 유리 조각에 오색으로 인물ㆍ화초를 칠해서 창호에 끼워 넣는 것이며, 또 호로병으로 작은 것은 한 치부터 큰 것은 한 자가 되게 만드는데 자줏빛이 많다. 또 한 가지는 향호로(響葫蘆)로, 아이들이 입에 물고 입김을 불어넣어 소리가 나게 하는 것인데 속명(俗名) ‘도액기(倒掖氣)’라 한다. 그리고 철마(鐵馬)라는 것은 처마에 달아서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게 하는 것이다.
서화가 있는 보문재(寶文齋)에 들어갔다. 즉 성은 서씨이며 이름은 지전(志沺)인데 보문재는 책포(冊鋪)의 이름이다. 구슬로 만든 족자의 마구리며 비단으로 장식한 것이 시렁에 정돈되었으며, 비단으로 싼 책갑과 상아로 만든 책갑꽂이가 집안에 그득하여 업료(鄴寮)와 괴시(槐市)가 이것과 비교해서 어떤지 알지 못하겠으나, 여러 책을 뽑아 잠깐 모양만 보는 것이 나부끼는 꽃이나 지나가는 새 같아서, 응접(應接)하기에 눈이 현란하여 백분의 1도 다 볼 수 없다.
■일하잉묵(日下賸墨)을묘년(1855, 철종 6)12월[1일-13일]
○1일 우리 사신들은 네 역관을 따라서 상사ㆍ부사ㆍ서장관의 등호(燈號)를 하고 갔다.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사신은 벌써 도착해서 승상(繩床)에 앉았다가 우리 사신을 보고 일어나서 경례를 한다. 그 사람됨이 준수하고 장대해서 침중해 보이고 비루하거나 경박한 빛은 없어 보인다. 말소리는 중국과 일반이며 누런빛 갓을 썼는데 마치 우리나라 진사가 쓰는 복두(幞頭) 비슷하고 높이는 4, 5치에 지나지 않으며 금을 칠했다. 의상과 신은 중국 제도와 같은데 구름 무늬로 짠 비단이다. 허리띠는 야자대(也字帶)처럼 생긴 것을 맸는데 아주 넓고 드리운 것이 없으며 돈피(㹠皮)로 만든 말굽 모양의 토시를 끼었다.
상사의 성은 상(向)이며 부사의 성은 모(毛)이고 통관의 성은 완(阮)이라 한다. 그 나라에서 복건성(福建省)까지의 거리는 수로로 5000여 리이며, 복건에서 황경(皇京)까지 육로로 4000여 리나 되는데, 전년 8월에 본국을 출발하여 금년 동지달 22일 황성에 도착하였다 한다.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청 나라가 중국에 들어가자 천하가 모두 호복(胡服)을 입게 되었으나 구역 이외 나라는 옛 습속 그대로 하기로 하였는데, 건륭 때에 안남왕(安南王) 완광두(阮光斗)가 청 나라의 의복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자 그 청을 윤허했다. 지금 유구국의 의복 제도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마 그 풍속대로 한 모양이며, 머리를 깎지 않고 갓을 쓴 것은 역시 가상하다. 대개 천하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매우 많지만,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먼 곳은 5년 만에 한 번 조공하고 가까우면 3년에 한 번씩 바치는데, 조선에서 해마다 조공하는 것은 제일 가까운 까닭이다.
○5일 유리창 문화당(文華堂) 책포(冊鋪)에 가서 여러 서적의 목록(目錄)을 앉아서 훑어보고 주인에게 묻기를,
“《금구결(金口訣)》ㆍ《청오경(靑烏經)》ㆍ《석실록(石室錄)》ㆍ《강주근사록(江註近思錄)》이 있는가?”
하였다. 그때 몸이 살찌고 얼굴이 큰 나이 젊은 한 사람이 손에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에게 묻기를,
“천문ㆍ지리ㆍ의약ㆍ성리(性理)의 학문에 능통하십니까?”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소. 그대도 능통하오?”
하니, 역시,
“능합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러면 토론해 볼까요?”
하니, 말하기를,
“저자 가운데는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분주하니 제가 우접해 있는 회령관(懷寗館)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다른 날 다시 만나시지요. 제 성은 방(方)이며, 이름은 삭(朔)이고 호는 소동(小東)이며, 집은 휘주(徽州) 회령현에 있는데, 가을 과거(科擧)를 보러왔다가 볼 일이 있어서 서울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성은 서(徐)이며, 이름은 경순(慶淳), 호는 해관(海觀)인데 중국을 유람하기 위해서 사신을 따라 연경에 들어왔네. 우연히 군을 저자에서 만났으니, 군은 저자에 은거한 사람인가?”
하고 있는데, 종자가 다른 데 있다가 와서 헐떡거리면서 성문을 방금 닫으려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어서서 읍하고 작별했다.
○6일 창두(蒼頭) 하나가 내 하처를 찾아와서 소매 속에서 편지를 꺼내 준다. 어제 문화당(文華堂)에서 만났던 방소동의 편지였다. 그 편지 사연은,
“어제 서사 가운데서 존안을 뵙고 다시 좋은 말씀을 들어서 깊이 흠모하는 바입니다. 이제 특히 이미 판각된 전에 지은 3본(本) 금대 유학초(金臺游學草)와 침경당(枕經堂) 변려체(騈儷體) 글과 채작사(采芍詞) 을 찾아 보내 드리오니, 즉시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좋은 말씀을 주시면 꼭 화답하여 한묵(翰墨) 문자(文字)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바입니다. 졸작 ‘금대 유학초’ 뒤에는 화송잠 소재(花松岑少宰) 사납(沙納) 의 《동사기정(東使紀程)》을 위해서 지은 서문 한 편이 있습니다. 그분은 현재 이부 상서로 있는데 바로 귀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일기입니다. 그의 친형이 왜척정통후(倭陟廷通侯) 습눌(什訥) 가 되어서 역시 전날 두 차례나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 두 분은 정미년과 무신년에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과거를 볼 때 그 집에 유한 일이 있으므로 귀국의 풍경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친구 하나가 사천(四川) 충주(忠州) 사람 이우선(李芋仙) 사분(士棻) 으로, 공생(貢生)에 발탁되었다가 현재는 관직이 교습(敎習)입니다. 그는 시재(詩才)가 높고 음률이 조화되어 이름이 공경들에게 중히 여긴 바이며, 역시 귀국 여러분과 창화(唱和)하기를 원합니다. 그가 우접하고 있는 집은 전문(前門) 밖 양매죽사가(楊梅竹斜街) 온화(蘊和) 객우(客寓)입니다. 만약에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3~5일 내에 창화하고 왕래해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이에 앙달하오니 삼가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서신을 보아 주시기 바라오며 갖추지 못합니다. 방삭 돈수(頓首) 가평(嘉平 12월) 6일. 같은 관에 계시는 여러 시우(詩友)도 함께 안부 말씀 드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내일 마땅히 몸소 가서 회사(回謝)할 것이며, 이우선과 모이기를 약속한다는 뜻으로 회답하였다.
○8일 두 사람은 내 손을 잡고 북쪽 거리로 향해서 동래관(東來館)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술집이었다. 술을 불러서 기분좋게 마시고 칠언 율시 한 수를 방소동에게 써 주었다.
남국 선비가 북쪽에서 노닐며 한 해를 넘겼으니 / 南士北遊歲擲梭
객창에 쓸쓸한 등불 그 심사 어떠하였던가 / 覉窓寒燭意如何
청수에 마음 썩히고 봄에 눈물 지우며 / 腐心淸㶚經春淚
남전에 머리 숙여 여가 보아 시를 읊었네 / 低首藍田暇日哦
경상들의 시우는 월 나라 사람들의 거립(車笠) 맹세인데 / 卿相詩郵盟越笠
고향에 보낼 편지는 오 나라 전쟁에 막혔구나 / 家鄕書鴈阻吳戈
하늘과 땅이 다 객지인데 / 地涯天角俱萍跡
정다운 눈동자 서로 백설가 생각하네 / 靑眼相憐白雪歌
방소동이 말하기를,
“두자미(杜子美)의 노련한 솜씨에 육방옹(陸放翁 방옹은 육유(陸游)의 호)의 호건한 기상을 겸했으니 우리 중국에서도 그 상대될 사람이 드물겠소.”
한다. 내가 말하기를,
“지나친 칭찬은 내가 바라는 바 아니오.”
○10일 청심환ㆍ종이ㆍ붓ㆍ먹ㆍ접는 부채 등을 방소동과 이우선에게 나누어 주었다. 방소동이 답한 글에,
“심부름꾼이 와서 글월과 아울러 보내 주신 많은 진품(珍品)을 받자오니 높으신 의기에 대단히 부끄러움이 있으나, 물리치는 것 또한 공손치 못할까 하여 다만 좋게 사자를 대하여 절하고 받으면서 다시 보답하기를 생각합니다. 공경히 사례하고 공경히 사례합니다.
이우선이 우거하는 곳이 존관(尊館)과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곧 기순(紀順)을 명하여 보내십시오. 열 사흗날 진시(辰時)에 채소를 장만하여 받들어 모시려 하오니 오실 때에 신담인(申澹人) 선생과 함께 양매죽사가(楊梅竹斜街) 죽사 온화점(蘊和店) 여관으로 오시기를 바라오며 천만번 늦지 마시기를 비나이다. 오로지 이것으로 사례 드리옵고 거듭 편안하시기를 바라오며 나머지 말은 다하지 못합니다. 소제(小弟) 방삭(方朔)은 돈수하나이다.
○11일 내가 한 주부를 이끌어 몽고관에 이르니, 관은 3면에 담을 쌓고 1면에 문을 내놓았다. 그들은 애당초 집을 짓는 제도가 없어서 빈 터에 가는 털장막으로 인(人) 자 형상의 장막을 치고 지낸다. 이와 같은 것이 10여 곳인데 장막마다 털담요 두 겹씩을 땅 위에 깔고 남녀가 섞여서 장막 속에서 산다. 흙을 뭉쳐 덩이를 만들어서 노구솥을 걸고 말똥을 때서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털째로 삶아 놓고 남녀가 마주앉아 먹는데, 여자는 모두 젊고 예쁘나 남자는 늙고 못 생긴 사람이 많아서 동떨어지게 서로 같지 않은 데다가, 모두 세수를 하지 않아서 얼굴에 때가 끼어 두 눈만 반짝거려 보였다.
들으니, 몽고의 풍속은 소나 양의 젖과 짐승 고기로 주식을 삼는다고 한다. 3일간 먹지 않고 3일간을 자지 않으며 오곡을 즐기지 않고 집을 좋게 여기지 않아서, 출행할 때면 식구 모두를 싣고 가다가 곳에 따라 장막을 치고 지낸다. 한겨울이나 한더위 또한 걱정하지 않으니,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흉악하고 사나운 것을 무섭게 여기는데 황제가 몽고왕과 혼인을 맺기에 이르러서야 그들을 제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주부가 말하기를,
“오랑캐를 ‘견양(犬羊)’이라 한 것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한 말이군요. 몽고의 선대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기에 나는,
“원 나라의 선대에도 나라 이름을 몽고라 하였는데, ‘몽고’란 우리말로 은(銀)이란 뜻이다. 여진(女眞)이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함을 인연해서 곧 은으로 그 나라 이름을 삼았는데 세조(世祖)가 통일하고 나서 이름을 고쳐 원(元)이라 하였다.
○13일 예부의 한인(漢人) 상서(尙書) 서택순(徐澤醇)이 세 사신과 함께 차례로 서서 예 행하기를 막 끝냈는데 뜰 아래에서 갑자기 떠들썩하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대청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소반과 탁자의 기명이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우레가 울고 파도가 치는 소리가 요란한 것이 마치 병마(兵馬)들이 싸우는 전쟁터 같았다. 혹은 서로 밟고 밟혀서 얼굴에 피가 흐르고 혹은 서로 끌고 끌려 의복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혹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모자가 땅에 떨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져서 고함을 지르는 등, 형세가 아주 위태롭고 급박하여 그 꼴이 아주 망측했으니, 이는 저 사람들이 다투어 연탁의 음식을 움켜가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인(從人)과 말몰이꾼들도 그들에 함께 휩쓸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면서 빼앗아 갖기에 힘을 다하였다. 이토록 서로 엉켜 싸우고 소란을 피우는데도 그 자리에 있던 예부 시랑(禮部侍郞)과 통관(通官) 무리들은 조금도 꺼리지 않고 또 금지하지 않으니, 저들의 기강(紀綱)도 극히 한심스러운데 어느 겨를에 우리나라의 하례(下隷)를 단속하겠는가?
4. 몽경당일사 제4편
■자금쇄술(紫禁瑣述)을묘년(1855,철종 6)12월[14일-22일]
○14일 역관들을 따라 동화문(東華門)을 거쳐 태화전 동월대(東月臺)에 이르러서 태화전을 바라보았더니, 명 나라 때에는 황극전(皇極殿)이라 하다가 순치(順治 1644~1661) 연간에는 ‘태화전’이라 개명하였고, 강희(康煕 청 성조)가 ‘건극유유(建極綏猷)’라 편액을 썼다. 기초(基礎)의 높이는 2장(丈), 전각(殿閣) 높이는 11장에 넓이는 11칸, 세로는 5칸으로서 웅장 화려하였으니, 참으로 황제(함풍제 : 1831-61, 재위 1850-61)가 거처할 만한 집이었다.
○16일 여관방 차가운 등불 아래에 정태평(鄭太平)과 단 둘이 앉아 있었다. 내가 정태평에게,
“너는 오늘 무엇을 본 일이 있는가?
물었더니, 정태평은,
“한심한 일 하나를 보았습니다. 유리창(琉璃廠) 어귀에 있는 노리포(老李鋪) 주인은 저와 원래 친숙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는 길에 들러서 형편을 물었더니, ‘본전을 손해 보아 장사 일이 원만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황상(皇上)이 표지(標紙)에다 손수 서명을 하고 우리 노리포에서 대은(貸銀)해 간 것이 이미 여러 차례이다. 이 때문에 점포가 곤란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기에, 내가,
“그것을 한심하다고 하는가? 은전(銀錢)을 마련하기 어려운 일은 비록 제갈량(諸葛亮)에게 맡게 하더라도 역시 어떻게 할 수 없다. 나는 일찍이 ‘헌적(獻賊)이 형주(荊州)를 깨뜨릴 때 민가에서 한 소열(漢昭烈)이 부민(富民)의 금전을 차용해서 군량을 충당하던 문권(文券)이 있는데,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서명한 종이와 먹 글씨가 새 것 같더라.’는 말을 들었다. 제갈량 같은 사람으로도 오히려 백성의 돈을 차용했는데, 지금의 집정자로서 제갈량 같은 이가 있겠는가?”
○18일 내가 한시량에게,
“코끼리 형상이 어떻게 생겼던가? 낙타보다 크던가?”
물었더니 그는,
“크기는 낙타보다 배나 되는데, 몸뚱이가 산더미처럼 뚱뚱하고 코는 키[箕] 같은데 구부러져서 펴지지 않으며, 우리에 있을 때 사람을 보면 코로 피리나 괭과리 소리를 냅니다. 구경꾼이 돈을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주면서 재주를 시켜 보라고 하면, 코끼리는 반드시 흘겨보고 있다가 부리는 자가 돈을 많이 받은 다음에야 코를 위로 치켜들고 머리를 아래로 수그리고는 ‘오오(嗚嗚)’ 하고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꿇어앉으라면 꿇어앉고 절을 하라면 절을 합니다. 조회(朝會)할 때에는 오문(午門)의 좌우에 단정히 서 있다가, 백관들이 종소리와 편(鞭)소리를 듣고서 다 들어간 뒤에는 코를 서로 맞대고 서 있는데 그런 때에는 한 사람도 감히 지나갈 수 없게 되고, 조회가 끝나면 다시 여느 때처럼 합니다. 그리고 병이 나 의장(儀仗)으로 세울 수 없으면, 부리는 자가 다른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가서 대행하기를 청한 다음에야 다른 코끼리가 대행하기를 즐겨 하지, 그렇지 않으면 끝내 가지 않습니다. 지나다가 혹 사람을 다치는 일이 있으면, 영을 내려서 곤장을 치게 되는데, 코끼리 땅에 엎드려서 곤장을 달게 받고 곤장이 끝나면 비로소 일어나서 사은(謝恩)하되 마치 사람처럼 합니다. 매년 6월 초복일(初伏日)이면 코끼리를 서하(西河)에서 목욕시키는데, 그때에는 의장(儀仗)과 나고(鑼鼓 동라(銅鑼))를 갖춰서 인도합니다. 목욕을 하면 반드시 교배하게 되는데, 물속에서 교배하며 암놈이 낯을 치켜들고 물에 떠서 교합하는데, 양쪽 언덕에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 섭니다.”고 한다.
○19일 방소동이,
“조선의 궁궐(宮闕)과 성지(城池)는 모두 산에 의지해 있으므로 산수의 승경을 모두 앉아서 갖게 된 셈이니, 참으로 좋습니다. 천자가 유연(遊宴)하는 처소는 대내(大內)의 경산(景山)ㆍ오룡정(五龍亭)과 해전(海甸)의 창춘원(暢春苑)ㆍ원명원(圓明苑)으로서 모두 인공으로 만든 것들이니, 어찌 조선 왕궁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산수(山水)를 궁중에서 갖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일전에 해정(海淀)을 가 보았는데, 참으로 가려(佳麗)한 명승지여서 인공으로 만든 것이 도리어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보다 나았습니다. 전당(錢塘)ㆍ임안(臨安)ㆍ동정(洞庭)ㆍ악양(岳陽) 또한 이와 같습니까?”
하고 물으니, 소동은 빙그레 웃으면서,
“전당과 임안이 해전과 같다면 일컬을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채석강(采石江)은 우리집에서 3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채석강을 보지 못한다면 허송 세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 나는,
“명 나라 시인의 시에,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보기가 소원이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라는 글귀가 있으니, 내 생각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보지 못한다면 역시 한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더니, 방소동은,
“금강전도(金剛全圖)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나에게 보여 주지 않습니까?”
하므로, 나는,
“형은 왜 강남 전폭(江南全幅)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소동은,
“내생에는 고려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하기에, 내가,
“나는 중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는,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머리 위의 모자를 벗어서 땅에 내던지면서,
“그것이 이 모자와 뭐가 다르겠소?”
하였더니, 소동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손짓을 하면서 급히 필담하던 종이를 찢어 버린다. 나는,
“중국은 왜 이처럼 심하게 재물이 탕갈되고 백성이 곤궁해졌습니까? 전표(錢票)니, 은표(銀票)니, 납천(鑞泉)이니, 대천(大泉)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민정(民情)을 요란시키기 때문입니다. 표지(票紙) 및 천화(泉貨)의 제도는 황성 100리의 안에서만 행해지고 조림장(棗林莊) 밖에만 해도 오히려 준행되지 않으니, 이는 백성들이 영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황성 안이나 조정이나 여항(閭巷)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기강(紀綱)이 없습니다. 기강이란 천하를 다스리는 제일의 법술(法術)입니다. 유독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만 그렇겠습니까? 한 집안에는 한 집안의 기강이 있고 한 나라에는 한 나라의 기강이 있는 법인데, 지금의 중국은 기강이 땅을 쓸어 버린 듯 없고 온갖 법도가 해이해졌는데, 이렇고서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라고 하자, 소동은,
“군량의 비용과 하수를 막는 역사에 쓰이는 지출은 끊임없이 계속되면서 연공(年貢)은 이르지 않고, 세조(歲漕)가 정지되는 일이 많으니 재물이 어찌 탕갈되지 않겠습니까? 기강이 서지 못하는 것을 형은 어찌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나는 국정을 엿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만 아무리 어리석은 지혜, 천박한 식견일지라도 어찌 이런 것쯤이야 알지 못하겠습니까? 나는 이미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극식(克食) 음식물을 세 사신에게 줌. 은 황상의 특별한 예우인데, ‘공경히 은반(恩頒)을 받았다.’고 거짓 진주문(陳奏文)만을 꾸미게 하고 하사한 모든 물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이는 예부(禮部)에게 도둑질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통사(通事)에게 도둑질당한 것입니다. 대국으로서 이런 짓을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소동은,
“나라의 사정을 잘 보셨소. 나라의 사정을 잘도 엿보았구려!”
라고 하였다. 나는 또,
“대국의 걱정거리는 전쟁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소동은,
“천하의 걱정을 해관께서 걱정하시는군요.”
하였다. 나는,
“남비(南匪)는 왜 용병(用兵)하는 일을 숭상합니까?”
하였더니,
“남비는 학정(虐政)에 시달린 나머지 좁은 구석 땅에서 무리를 모아서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해 왔습니다. 태평 세월이 오래 계속되어 백성들이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다가, 중외(中外)가 갑자기 소동하자 조정에서는 대응책이 없게 되어 그들의 세력은 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황상께서 지혜롭고 용기가 많으시며 장수도 마땅한 인재를 얻어 적세가 점점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1, 2년만 지낸다면 저절로 토평(討平)되어 수년 이래 중흥(中興)한 셈입니다.”
한다. 내가,
“지금 주석(柱石) 같은 신하 중에 누가 안위(安危)를 좌지우지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호남 총독(湖南總督)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본시 호남 사람으로서 지금 나이는 60인데, 조정에서는 그를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처럼 의지하고 사림(士林)은 그를 구양수(歐陽脩)처럼 우러러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당보(塘報) 가운데서 어사(御史) 종직진(宗稷辰)의 상소를 보았더니 거기에, ‘증국번이 천거한 열 사람은 모두 위대한 인재들이다. ……’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증공(曾公)은 참으로 헛된 이름이 난 게 아니군요.”
하였다.
○19일 등불을 들고 관소로 돌아오니, 상사 어른이 부사와 함께 화초포(花草鋪)를 구경하고 와서는 화초포의 승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고 띠풀로 그 위를 덮었으며 남쪽으로 문을 내서 볕이 들게 하였으니, 추호(秋毫)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일광이 투명하였다.
그 안에는 불수화(佛手花)ㆍ천죽화(天竹花)ㆍ수선화(水仙花)ㆍ모란화[牧丹花]ㆍ양강화(良薑花)ㆍ귤유화(橘柚花)ㆍ도화(桃花)ㆍ이화ㆍ매화ㆍ행화(杏花)ㆍ연상화(延祥花)ㆍ탐춘화(探春花)ㆍ영춘화(迎春花) 등이 있어 한창 만발하였으니, 춘삼월과 다를 게 없더라.”
북녘 한대 지방 엄동 설한에 이와 같은 봄 경치가 있으니, 조화(造化)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참으로 괴이하다. 송 나라 무림(武林)의 마승(馬塍)의 장화법(藏花法)은 종이를 발라서 밀실(密室)을 꾸미고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다음, 대로 덮고 그 위에 꽃을 놓는다. 그리고 소 오줌과 유황(硫黃)으로 땅에 거름을 준 다음, 끓는 물을 구덩이 속에 넣어, 그 증기(蒸氣)가 훈훈한 뒤에 부채질을 하룻밤만 하면 꽃이 핀다고 하는데 지금 경사(京師)의 원정(園丁)들은 모두 이 방법을 쓴다고 한다.
계화(桂花)는 날씨가 서늘해야 피는 것인데, 지금 도화ㆍ매화ㆍ모란 등과 같이 온실에 두었다니, 번식하지 못할 것은 뻔하다.
○20일 돌아와 여관에 누워 슬픈 회포를 금치 못하고 있는데 두 하인이 와서 나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오늘 채조포(綵鳥鋪)에 가 보았더니, 온화점 별상(蘊和店別觴)보다 도리어 나았습니다.”
하기에, 내가 묻기를,
“어떠하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기조(奇鳥)와 이금(異禽)이 수없이 많은데 어떤 것은 철망으로 가둬 놓고, 어떤 것은 목가(木架)에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홍앵무(紅鸚鵡)의 색깔이 가장 곱고, 남송압(南松鴨)은 생김새가 앵무와 같으나 작으며 사람의 말을 잘하는데, 그 성음(聲音)의 곡절(曲折)에 따라 혀를 놀리는 것이 두 살 된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기이하구나, 못 본 것이 한(恨)이다.”
하였다.
○22일 한 주부가 왔다가 내가 무료하게 홀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일찍 출발하게 될 것이니 기쁘기 비할 데 없는데 어찌 이처럼 무료한 생각을 하십니까?”
하기에, 내가,
“그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가? 내 시험삼아 말해 주지. 조선 사람은 나이 대여섯 살부터 약간 지각이 있으면 물건의 기교(奇巧)한 것을 구할 적에는 꼭 대국(大國)의 물건을 말하고, 잘난 인물(人物)을 말할 때에도 꼭 대국의 인물을 들어 말하며, 심지어 문장(文章)ㆍ서법(書法)ㆍ산천(山川)ㆍ궁실(宮室)까지도 모두 대국(大國)을 칭도하여, 한번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는데, 지금 내가 본 바로는 그 지난날의 한(恨)은 족히 한스러울 것이 못되었네.
연경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의무려산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로 말하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 같은 성군(聖君)과 고(皐)ㆍ기(蘷)ㆍ직(稷)ㆍ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취모(黑毳帽)와 마제수(馬蹄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네.
황막(荒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을 하여 궁궐이라하며, 관리(官吏)는 높은 자인지 낮은 자인지 등위를 분변하기 어렵고, 민간의 아이와 어른은 관동(冠童)을 분별할 수 없으며, 음식은 반드시 돼지 기름으로 조미를 하므로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 없고 의복은 반드시 털 갖옷으로 입은 모양이 흉해서 볼 수가 없네. 혼사와 상사에 풍악을 사용하니 선왕(先王)의 예는 쓸어 버린 듯 남은 것이 없고 알아들기 어려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오랑캐 풍속이 천성에 박혔기 때문이네.
그리고 금령(金鈴)ㆍ호로(葫蘆) 등은 모두 손이 스치기만 하여도 깨어지고 부서지는 쓸모없는 물건으로서 어린아이들을 속여 돈을 빼앗으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으니, 저 옛날의 당(唐)ㆍ우(虞)ㆍ상(商)ㆍ주(周)의 큰 나라에서도 역시 이러했다면 그래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겠는가?”
하였다. 한 주부가,
“이미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天子)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므로, 내가,
“천자의 상을 알기가 무엇이 어렵겠나. 두 눈 두 귀에, 높은 코 모진 입의 한 나이 젊은 천자이겠지. 나는 도광 황제(道光皇帝 : 재위 1820-1850)의 상과 도광 황후(道光皇后)의 상(像)을 보았지.”
했더니, 한 주부가,
“집사(執事)의 농담 말씀은 모두 허탄에 가깝지만 얼굴을 맞대 놓고 나를 속이시니, 집사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기에, 내가,
“언제 허탄한 말로 나에게 속임을 당했던가? 내가 서화포(書畫鋪)에서 두 상(像)이 그려진 화장(畫障)을 보았는데, 늙고 경강(硬强)하게 생긴 상은 황제라 하고, 뚜렷하고 예쁘게 생긴 상은 황후의 상이라 했네. 점포 주인이 나에게 사겠느냐면서, 값은 은자(銀子) 30정(錠)이라고 했네. 나는 생각하기를 돈이 산같이 쌓였다 해도 이것을 사서 어디에 쓰며 비록 그냥 주더라도 차라리 태상 노군(太上老君)이나 요지 왕모(瑤池王母)의 상이 실내의 벽상(壁上)을 빛내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네.”
하니, 한 주부가,
“과연 그런 게 있더란 말씀입니까?”
한다. 내가,
“그토록 나를 못 믿겠거든 내일 문회당(文繪堂) 서화포에 가서 서쪽 벽상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나.”
하니, 한 주부가 말하기를,
“살아 있는 천자도, 죽은 천자도 다 못 보았으니 나는 천자와 인연이 너무 희박한가 봅니다.”
하였다.
...한 주부가 나에게 묻기를,
“황성(皇城)이 지금은 순천부(順天府)에 속해 있는데 송(宋) 나라 이전에는 어느 주(州)에 소속되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고서(古書)를 상고해 보니, ‘북경(北京)은 곧 당(唐)의 번진(藩鎭)이었던 요(遼)ㆍ금(金)의 별도(別都) 구성(舊城)인데, 원(元) 나라가 도읍을 조금 동쪽으로 옮기어 구성의 동쪽 반이 조시(朝市) 사이에 들어갔고, 서쪽 반은 아직도 보존되어 소태후성(蕭太后城)이라고 하는데 소태후란 곧 요후(遼后)다.’ 했네, 또 ‘당 나라 때에 이곳을 범양(范陽)의 번진으로 삼았다가 안(安)ㆍ사(史)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이름을 노룡(盧龍)이라 고쳤으나 그 치소(治所)였던 유주(幽州) 계현(薊縣)은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계현을 옮겨 주(州)라 명칭하고 노룡을 옮겨 현(縣)으로 이름하였다.’ 하나 이곳에서 모두 수백 리 거리이니, 당의 노룡과 계주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네.”
하였다. 한 주부가 또 묻기를,
“영고탑(寧古塔)은 만주에 소속됐는데 폐사군(廢四郡)과 서로 연접되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영고탑은 바로 옛날 숙신씨(蕭愼氏)의 유허(遺墟)인데,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때 와서는 동북 지방에 강국(强國)과 웅부(雄部)가 없고, 오직 우리나라 한 지역만이 동쪽 땅의 형승(形勝)을 독차지하게 되니 이것이 수(隋)ㆍ당(唐) 때에 와서 조선(朝鮮)을 공격할 때마다 ‘동을 치는 큰 역사[征東大役]’라 하게 된 원인이다. 그때에는 요동(遼東)의 동ㆍ서가 태반이 우리 땅이었고, 산(山) 안팎의 여러 종족이 우리에게 복속하는 자가 많았더니, 한번 여진(女眞)의 만 명이나 되는 종족이 경박호(鏡泊湖 경파호(鏡波湖)로 영고탑에 있음)를 중심으로 일어나면서부터 점점 번성하고 커져서 송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하(中夏)에 들어가 임금이 되니, 이를 금(金) 나라라 한다.
그들이 원 나라 사람들에게 쫓겨 동쪽으로 오게 되자, 그 부락(部落)이 두만(豆滿)ㆍ압록(鴨綠) 두 강의 서쪽과 북쪽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들을 혹은 야인(野人)이라 하고 혹은 번호(藩胡)라고도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침범하던 중에 북쪽은 이탕개(梨湯介 다른 기록에는 ‘梨’가 ‘尼’로 되어 있음), 서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그 큰 자였고, 이때부터는 우리나라 국경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대저 여진의 나머지 부족 중에 숙여진(熟女眞)ㆍ생여진(生女眞)의 구별이 있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이후에 와서는 생여진 동산(董山) 일파가 갑자기 건주위(建州衛)에서 커져서 모린위(毛麟衛)ㆍ좌위(左衛)ㆍ우위(右衛) 등의 종족을 통속(統屬)하였다.
그런데 폐사군이 그들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그의 폐해를 가장 많이 받았으니, 이것이 4군(四郡)이 폐하게 된 원인이었다. 홍타시(弘它時) 이후에 와서는 병력이 더욱 날로 강성하여져서 그 세력으로 북상(北上)하여서 개원(開元)으로부터 심양(瀋陽)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내려와 요양(遼陽)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심양을 성경(盛京)이라 하고, 요양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건주를 흥경(興京)이라 하여 영고탑 서쪽을 모두 점령하여 소유로 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성책들 사이에는 싸움을 거듭하더니, 숭정(崇禎) 말년에는 연경(燕京)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 건주는 곧 능묘(陵墓)가 있는 곳이고, 노성(老城)은 곧 도읍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도와 설치가 성경과 다를 것이 없다.
황도주(黃道周)의 《박물전휘(博物典彙)》 ‘건주고(建州攷)’를 상고해 보니, “건주는 즉 금 나라의 별부(別部)였는데 원 나라는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었고, 청 나라는 나누어 셋을 만들어 건주(建州)ㆍ해서(海西)ㆍ야인(野人)이라 했다. 건주가 그중에 으뜸으로 땅이 가장 요해처였는데, 영락(永樂) 원년에 건주위를 설치하여 해마다 10월에 입공(入貢)케 하니, 이것이 건주가 크게 된 시초였다. 그리고 요야(遼野) 동쪽에 3장군(三將軍)을 열치(列置)하였는데, 그 하나는 봉천(奉天) 등처의 지방을 진수(鎭守)하되 본부를 심양에 두었고, 하나는 영고탑(寧古塔) 등처 지방을 진수하되 본부를 항창(航艙)에 두었으며, 하나는 흑룡강(黑龍江) 등처의 지방을 진수하되 본부를 애호성(艾滸城)에 두니 그 관질(官秩)은 모두 1품직으로 각각 만주를 통치하게 하였다. 강희(康煕) 말년에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흑룡강(黑龍江) 이북의 몽고(蒙古)였기 때문에 백도납장군(白度納將軍)을 더 설치했다고 하나, 그 본부가 있었던 지방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흑룡(黑龍)ㆍ혼동(混同) 사이에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몽고 48부(部) 중에 동북방의 여러 종족이 가장 강성하였다. 대비달자(大鼻獺子)도 역시 흑룡강 북쪽에 있어서 동으로 흑룡강으로부터 개원(開元) 이북까지 이르렀고, 연변이 진(秦) 나라 장성(長城) 밖에 와서는 북으로, 서로 꾸불꾸불 뻗쳐서 한(漢) 나라 서역(西域) 우진(于闐) 지방에까지 이르러 이것이 모두 몽고의 경계여서 그 넓이가 중원(中原)에 비하여 여러 배나 되었다.
상고 시대에는 판도(版圖)상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황막(荒邈)한 사막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없었는데, 당(唐)ㆍ송(宋) 이후에 와서야 땅이 더욱 넓혀지고 사람이 더욱 번창하여 지금은 46부나 된다. 그들은 서로 웅장(雄長)이라 하여 각각 한 모퉁이의 임금이 되어 동ㆍ서ㆍ남ㆍ북 황제라 호칭하니, 하나는 황태극(皇太極), 하나는 청태극(靑太極)인데, 이들은 중국 서남 지방에 있어서 하나는 액라사(厄羅斯)니, 곧 대비(大鼻)이며, 하나는 탑이객(嗒爾喀)이니, 이들은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었다.
영고탑은 동쪽은 동해까지 3000여 리, 서쪽은 개원ㆍ위원보(威遠堡)까지 590여 리, 남쪽은 장백산(長白山)까지 1200여 리, 북쪽은 특합변(忒哈邊)까지 600리나 되었다 한다.
대개 우리나라는 지형(地形)이 북(北)은 높고 남(南)은 낮으며, 중간은 잘록하고 아래는 퍼졌는데, 백산(白山)을 머리라 하고, 대령(大嶺)을 등마루라 하면, 사람이 옆으로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것과 같으며, 영남(嶺南)의 대마도(對馬島)와 호남(湖南)의 탐라도(耽羅島)는 두 발로 괸 것과 같아, 서북쪽에 앉아 동남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라는 것이 감여가(堪輿家)들의 정론(正論)이다.
그래서 경도(京都)를 중심으로 사방(四方)의 방위를 정한다면 온성(穩城)이 정북쪽이 되고 해남(海南)이 정남쪽이 되며, 정서쪽은 풍천(豐川)이요, 정동쪽은 강릉(江陵)이니,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강역(壃域)의 향배(向背)ㆍ편정(偏正)을 알기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데, 지금의 지도(地圖)라 하는 것은 틀리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지도마다 모두 폭(幅)을 따라 위치를 정하고, 위치에 따라 그림을 그렸으므로, 어떤 것은 장광(長廣)이 틀리고 어떤 것은 활협(闊狹)이 맞지 않아, 서(西)의 의주(義州)와 북(北)의 장흥(長興)으로 살펴보면 이 동(東) 서(西) 양계(兩界)의 기준인 것 같다.
그러나 마주 펴놓은 양각이 부채를 편 것과 같아서,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서(極西)로 하고, 두만강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동(極東)이라 한 뒤에 8도(八道) 360주를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뒤죽박죽 펴놓듯이 벌여 놓고 억지로 지점(指點)하며 산천(山川)ㆍ정로(程路)를 의논하는 것이 거의 거울을 엎어 놓고 비춰지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직방씨(職方氏)의 웃음소리가 되지 않을 것이 드물다.
지도가 이렇게 된 것은 다만 백두산(白頭山)의 두 줄기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이 된다는 옛말만을 가지고 고집부린 데 불과하다. 두 물이 동서로 나누어졌다 한 것은 특별히 최초(最初)에 발원(發源)한 곳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그 말류(末流)가 흘러간 곳까지는 의논하지 아니했음을 알지 못함이다.
시험해 보면 두만강이 온성(穩城)으로 향한 것은 혹은 동으로 혹은 북으로 흘러서 미철보(美鐵堡)에 다다른 뒤에, 곧 남쪽으로 쏟아져 서수라(西水羅)에 가고, 압록강은 그 흐름이 점점 길어져서 삼수(三水)ㆍ갑산(甲山)과 폐사군(廢四郡)을 지날 즈음에는 허다한 굴곡이 강계ㆍ위원(渭原)을 엇갈려서 오히려 서남쪽을 향하다가 창성(昌城) 아래에 와서는 곧바로 남쪽으로 쏟아져 통군정(統軍亭)의 서쪽을 싸고 돌아 대총강(大總江)으로 들어간다. 때문에 우정(郵亭)들이 6진(六鎭)에 나가는 자를 모두들 ‘북상(北上)한다.’ 하고, 연경(燕京)을 향하여 가는 사신을 모두 ‘서도(西渡)한다.’ 하니, 이로 본다면 나의 말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5. 몽경당일사 제5편
■옥하선진록(玉河旋軫錄)을묘년(1855,철종6)12월[23일-29일]
○23일 맑고 추웠다. 조반 후 회정(回程)에 올랐다.
역원(譯員) 유재관(劉在寬)ㆍ오시정(吳時挺)과 상방 군관(上房軍官) 오치묵(吳致默)이 선래 군관(先來軍官)으로 길을 떠나기에 나는,
“왜 선래라 하느냐?”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같은 날 길을 떠나 먼저 서울에 도착해야 되기 때문에 선래라 합니다.”
한다.
그 기한을 16일 동안으로 정하여, 기일을 어기면 죄에 저촉되기 때문에 주야로 쉬지 않고 풍설(風雪)에도 관계없이 미친 듯이 질주하니, 자못 혈육(血肉)을 가진 몸으로서 능히 견디지 못할 바이다. 나는,
“비록 동행하고 싶으나 따르지 못하겠네.”
하면서 밖에 나와 수레를 타니 3000리 밖에 있는 고향 산천이며 집안 식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보이는 것 같다. 정신은 날아갈 듯 상쾌하고 마음은 미쳐 날뛰고 싶다. 종자(從者)가 말하기를,
“뽕나무 밑 삼숙(三宿)의 연모(戀慕)가 없습니까? 소인들은 해마다 북경에 들어와도 회정할 때에는 막상 서운한 생각이 듭니다.”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물화(物貨)를 무역하여 이문을 취하는 데에 있지만, 나는 유람이나 한다는 생각에 불과하여 이미 그 대략을 보았으나 한 가지도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부러운 것,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없으니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천하의 토지에 어찌 욕심이 없으며, 황제의 존귀(尊貴)함을 또한 원하지 않습니까?”
종자가 또 말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너희들은 단지 황제의 존귀한 것만 알지, 황제의 괴로운 점은 알지 못하는구나! 지금의 황제는 오랑캐의 의복을 입고 오랑캐의 행동을 따르고 있으니 논할 것도 없겠지만, 비록 옛날의 황제로 말하더라도 갖은 장식품으로 꾸민 면류관을 단정하게 쓰고 명당(明堂)에 높이 앉아서, 궁중 미인으로 눈의 채색을 만족시키고 해내 진수로 입맛을 만족시키니 즐겁기야 하겠지만, 거동은 왼쪽 사관이 기록하고, 말은 오른쪽 사관이 기록하며, 앞뒤에는 보좌하는 신하가 있어 일거 일동과 음식 먹는 것까지 남에게 견제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 반걸음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망칠 임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말이나 명령이 성현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무도한 임금이라 한다. 반적(叛賊)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환관들의 걱정을 항상 끼고 살아야 하니 이 어찌 괴롭디괴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집 미천(微賤)한 남녀는 지극한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으니,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여 족히 그 몸을 보호할 수 있고, 나물국과 거친 밥으로도 족히 배를 채울 수 있으며, 초가집 나지막한 처마라도 몸을 용납할 수 있으며 못난 아내와 미운 첩이라도 족히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며, 꽃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에 친구들과 더불어 심정을 푸는가 하면, 소나무 길과 국화 울타리의 이웃으로 더불어 서로 찾아다닌다. 멋대로 마셔 만취(滿醉)하여도 애초부터 두궤(杜簣)처럼 술잔을 날릴 이가 없고, 마음 놓고 노래를 불러도 이극(里克)처럼 북[鼓]을 끊을 리가 없으니, 그 괴로움과 그 즐거움이 황제에 비기면 어떠한가? 이것이 허유(許由)ㆍ소부(巢父)가 머리를 내두르고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사양한 이유이다. 인간으로서 원하지 않아야 할 자리는 천하를 소유하는 천자 자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
...화대문(和大門) 동쪽으로 나와 통주(通州) 강변을 따라갔는데, 조양문(朝陽門) 석로(石路)에 비하여 매우 가까워서 편리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통주 주막에 도착하니 그 주막에는 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성절 삼사(聖節三使)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상사 조득림(趙得林), 부사 유장환(兪章煥), 서장관 강장환(姜章煥) 부사ㆍ서장관과 함께 그들을 타국에서 만나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니 집안 식구들과 다름없고, 또 나라와 집안이 태평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기쁨을 견딜 수 없다. 밤에 다국(茶局)에 들어가니, 주인은 없고 다만 검은 앵무새가 시렁 위에서 날개를 떨고 있다가 사람을 보고 놀라 ‘다수다수(茶水茶水)’라고 부르는데, 내가 눈여겨보며 아무런 말이 없으니, 앵무새가 또 ‘부야부야(否也否也)’라 부른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사(市肆)에 들어가면, 저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명을 묻지 않고 반드시 먼저 ‘다수(茶水)’라고 물으니, 이는 대개 차(茶)를 마실 건가, 안 마실 건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마시고 싶으면 ‘다수’라 대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야’라고 대답하니, 곧 관례(慣例)이다. 앵무새가 그들과 우리가 문답하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지금 나를 보고 먼저 ‘다수’라 물었다가 내가 대답이 없자, 다시 ‘부야’라 하니, ‘다수다수’와 ‘부야부야’는 새의 소리가 거듭 발음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새는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새는 그렇지 못하니, 어음(語音)의 쉽고 어려움이 중국과 달라서일까? 아니면 새 자체의 지혜로움이 피차 다름이 있어서일까? 중국에서는 말할 수 있던 새도 한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다만 ‘짹짹’ 소리만 내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28일 이날은 입춘절(立春節)이고 맑음. 사하역(沙河驛)에 이르러 잤다. 담인(澹人)이 시를 지었기에, 내가 운에 화답하였다.
석 달 동안 그대로 길손이 되었는데 / 九旬仍作路中人
만리의 나그네 시름 외로운 신세로세 / 萬里覊愁眇一身
허다한 풍설은 벽돌 온돌방에서 지냈고 / 風雪許多經甓炕
무정한 세월을 수레바퀴에 보냈네 / 光陰容易送車輪
백엽주 술동이 새해를 맞으려 하고 / 樽前柏葉將迎歲
관문에 핀 매화 또 입춘이 왔네 / 關裏梅花又立春
제석을 만난 지금 거듭 묵노니 / 除夕如今餘信宿
병든 이내 마음 물화따라 새로워라 / 病思還與物華新
■옥하선진록(玉河旋軫錄)병진년(1856, 철종 7) 1월
○2일 아침에는 맑았다가 늦게 흐렸다. 홍화점(紅花店)에 이르러 잤다. 한 주부는 점주(店主)와 구정(舊情)을 나누면서 마신 술이 대취(大醉)되어 자기 처소에 돌아와 잤다. 그가 자는 처소는 내가 자는 처소와 벽을 사이로 하고 있는데, 만취된 한 주부가 마구 떠들어댔다. 그의 종자가,
“나리[進賜], 취하셨군요. 웬 객담이 이렇게 많으시오. 옆방에서 쉬시는 양반이 잠을 이루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한 주부가 성을 내며,
“네가 양반 양반이라 하는데, 그것이 무슨 물건이냐? 조선에 있다면 양반이라 칭함이 마땅하겠지만 지금 중국에 와서도 양반 양반하느냐? 네 소견으로는 내가 중인(中人)에 불과하니, 양반을 겁낸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조선에 있다면 두려워하겠다만 중국에 있기에 두렵지 않다. 네가 어찌 양반으로 나를 공갈하느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양반 두 글자로 밤새도록 떠들어 나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한 주부가 일찍 내 방에 왔기에 내가,
“오늘부터 나의 양반과 자네의 중인을 바꾸려는데, 자네 의향은 어떤가?”
하니, 한 주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서,
“무슨 말입니까?”
한다. 나는,
“그래야만 잠을 편히 잘 수 있겠어.”
하니, 한 주부는 멍청하니, 대답하지 못한다.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지난밤 일을 자세히 말해 주자, 한 주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제 감히 그럴 수가, 감히 그럴 수가.”
한다. 나는,
“자네가 중국에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지금 도리어 두려워하는가? 옛적에 한 재상이 집이 가난하여 나지막한 문에 항상 머리를 꾸부리고 드나들다가, 그 후 그 문이 높아졌어도 여전히 머리를 꾸부리고 드나들면서 탄식하기를, ‘꾸부림이 습관이 되어 갑자기 펼 수 없다.’ 했다더니 이런 일로 미뤄볼 때 비록 불행한 때를 당하여도 상놈은 양반을 능핍(凌逼)할 수 없는 것이다. 자네가 술에 취해서는 큰소리치다가 술이 깨자 빌붙으니, 이 어찌 대문을 드나들 때 머리를 꾸부리는 것과 다르냐?”
하며,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6일 맑고 추웠다.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잤다. 길가에 조그마한 비석이 있는데 모두 만주 글자로 되어 무슨 비석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 곁에 있던 사람이 만주 글자가 언제 나왔느냐고 묻기에 나는,
“청 태종이 파극십(巴克什)ㆍ액이덕니(額爾德尼)ㆍ갈개(喝蓋)에게 명하여 ‘국내에서 왕래하는 공문서가 모두 몽고 글자로 관습이 되었으니, 몽고의 말을 번역하여 몽고 글자로 우리나라 만주 어음(語音)에 맞추어 구절을 만들면 곧 문자로 말미암아 그 뜻을 알 수 있으리라.’ 하고 드디어 몽고 글자로써 국어에 부합시켜 만문(滿文)을 창작하고, 국내에 반포하였으니, 만주 글자의 전포(傳布)가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라고 하였다.
○7일 흐리고 눈이 내렸다. 소릉하(小凌河)에 이르러 자는데, 신기(神氣)가 불편하여 인삼 가루를 차(茶)에 타서 마셨다. 역원(驛員)이,
“백삼(白蔘)은 약의 성질이 조열(燥熱)하여 화평한 홍삼(紅蔘)만 못합니다.”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그대가 홍삼이 처음 제조된 내력을 듣고 싶은가? 청 나라 초기에 국내 사람들이 인삼을 채취하여 물에 담가 두고 팔리기를 기다려도 명 나라 사람들이 일부러 사려고 하지 않아 국내 사람이 만약 상할까 염려되어 급히 팔려고 하면 이익이 적었다. 이리하여 청 태조가 제법(製法)을 만들었으니 삶아서 건조하여 오래가도록 하여 급히 팔지 않도록 하고 그대로 명 나라에 팔기를 허락하였으니, 병을 구제한 바가 많았고 민간의 용도 또한 배나 풍족하였다.”
고 말하였다.
○8일 한 주부가 말하기를,
“강홍립(姜弘立)의 투항은 만고에 씻기 어려운 조선의 큰 수치로서 찢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당시 조선에 어찌 그를 처치할 의사가 없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청사(淸史)》에 요동백(遼東伯)이 순절한 일은 실리지 않았고 다만 강홍립이 투항한 사실만 실렸다. 《청사》에 이르기를 ‘명 나라 만력(萬曆) 47년에 요동 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에게, 심양(瀋陽)에 군사를 집결시켜 네 갈래로 나누어 청 나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유정(劉綎)과 강응건(康應乾)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하여 조선 군대와 합세하고 흥경(興京)으로 쳐들어가다가 유정이 달리강(達哩岡)에서 전사하였다. 패병한 명 나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가 잔병(殘兵)을 수습하여 조선 도원수(朝鮮都元帥) 강공렬(姜功烈 공렬은 강홍립의 별호인 듯함)의 병영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강공렬이 고납고애(固拉庫崖)에 웅거하여 명군(明軍)이 패한 것을 알고 크게 놀라 통사(通事)를 보내 기(旗)를 잡고 청에 고하기를, 「여기에 온 것은 우리가 원하여서가 아니라, 옛날 왜병(倭兵)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우리나라 성곽을 점거하고 우리나라 강토를 탈취하는 다급한 어려움이 있을 때 명 나라의 도움을 힘입어 왜병을 격퇴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제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니, 당신들이 나를 포용한다면 내 마땅히 귀순하리다. 또 우리나라 군사가 명 나라 간첩이 되어 적에게 이간질하고 분열을 꾀하는 자는 모두 당신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이 영중(營中)은 모두 고려의 군사뿐입니다. 명 나라 군사가 도망쳐 우리에게 와 숨어 있는 자는 유격 한 사람과 그를 따르는 군사뿐이니 잡아서 바치리다.」 하였다. 그리고는 먼저 부원수(副元帥)를 보내 청 나라 진중에 나가 항복하게 하고 드디어 명 나라 군사를 모조리 잡아서 산하(山下)에 던져 청에게 준 후, 이튿날 강공렬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하산(下山)하여 흥경에 들어가 부원수와 함께 기어서 알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9일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요, 산맥이 1000여 리나 뻗쳐 지상에서는 더 이상 험준할 수 없는 곳이다. 산 위에 달문(闥門)이란 못이 있는데 주위가 80여 리나 되며, 압록(鴨綠)ㆍ혼동(混同)ㆍ애호(愛滹) 3강(江)이 나온다. 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고, 그 밑에 포륵호리(布勒瑚里)란 못이 있는데, 전설에 천녀(天女) 셋이 있어, 첫째는 은고륜(恩古倫), 둘째는 정고륜(正古倫), 막내는 불고륜(佛庫倫)이라 한다. 이들 천녀가 그 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신기로운 까치가 붉은 과일을 물어다가 막내 옷에 던졌다. 막내는 그 과일을 입속에 머금었는데, 갑자기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막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줄 알고 몸의 생김새도 기이했다. 그 아이가 장성하자 그의 어머니는 붉은 과일을 먹고 포태한 사실을 말하고 인하여 아들에게 명하기를 ‘너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다. 하늘이 난국을 평정하기 위해 너를 낳았다. 네가 이 물을 따라가면 곧 바로 너의 땅이다.’ 하고는 조그마한 배를 태워 보내고 그의 어머니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는 조그마한 배에 실려 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하수에 이르러 한 언덕에 올랐는데 그곳에는 3성(姓)이 영웅을 다투어 서로 군사를 일으켜 살육을 일삼고 있었다.
하수를 거닐던 자가 그를 보고 이상히 여겨 비범한 사람이라 여겼다.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영접, 3성은 그를 추대하여 국주(國主)로 삼고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하며, 패륵(貝勒)으로 받들었다. 그리하여 그 난이 평정되었다. 그대로 장백산 북쪽 아타리성(俄朶里城)에 웅거하여 국호를 만주(滿洲)라 하였으니, 이것이 창업의 시초가 된 것이다.
몇 대를 지난 후 그 무리를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여 국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일족을 해치게 되었다. 이때 어린 아들 하나가 황야(荒野)로 도망쳐 국인은 그를 뒤쫓고 있었는데, 마침 신기로운 까치 한 마리가 아이 머리에 내려앉아서 뒤쫓던 자들은 멀리 까치가 앉은 것을 바라보고 고목(枯木)인가 의심하여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화를 면하고 몸을 숨기게 되었다. 이후부터 후세에 대대로 까치를 고맙게 생각하여 가해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한다. 청 태조(淸太祖 노화적(魯花赤))에 이르러 그 영용(英勇)이 세상을 덮자 나라 사람들은 모두 영리한 패륵(貝勒)이라고 일컬었다. 앞서 하늘의 기운을 바라보고 길흉을 점치는 자가 만주에서 장차 성인이 나와 난리를 평정하고 모든 나라를 통일하여 천자의 위에 오르리라 하였다.”
○12일 맑음. 백기보(白旗堡)에 이르러 잤다. 등불을 들고 부방(副房)에 가고 싶어 부사(副使)의 거처를 물으니 모두 모른다고 한다. 찾지 않는 곳이 없이 두루 헤매며 길에서 방황하다가 뜻밖에 앞을 지나가는 부방 하인을 만났다. 그에게 부사 사또가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몇 사람이 모두 부사 사또가 왕대인 댁(王大人宅)에서 유숙하는데, 여기에서 5리 가량이나 된다고 한다. 나는,
“부사 사또의 할아버지 댁[王大人宅]이 어찌 이곳에 있을 리가 있겠는가. 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하니, 그 하인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대답하기를,
“부사 사또가 정말 왕대인 댁에 계십니다.”
하니, 이는 대개 왕가(王哥) 성을 가진 자가 현재 경관(京官)이 되어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모두 ‘왕대인 댁’이라고 일컫은 것이다.
나는 즉시 서장관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상사(上使)가 마침 삼방에 와서 서장관과 같이 앉았다. 내가 서장관에게 부사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조금 전에 하인들과 문답하던 말을 했더니, 상사와 서장관이 모두 포복절도(抱腹絶倒)하고 웃는다. 이튿날 아침에 길에서 부사와 서로 만났다. 내가 부사에게,
“어젯밤에 유숙한 곳이 다른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만리 타향에서 왕대인을 만났으니 매우 기쁘겠습니다.”
하니, 부사 역시 크게 웃으면서,
“이와 같은 조롱을 면치 못하겠다. 북경에 들어갈 때 왕씨를 만나 회정할 때 하루 저녁 쉬어 가기로 약속하여 일부러 갔었는데, 비록 저녁밥을 성대히 마련하고 매우 후하게 접대하였으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수저도 들지 못하고 끝내 굶고 잤으니 이보다 큰 낭패가 없다.”
고 한다.
○13일 맑고 바람이 찼다. 고가자(孤家子)에 이르러 자는데, 침소가 조금 정결하였다. 한 주부와 나란히 누웠다. 한 주부가 나에게,
“일찍이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보았습니까? 청 태종이 돌을 싣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갈 때 세웠다고 하니, 어떻게 꼭 승전할 줄 알았을까요?”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역시 그렇게 전해 들었으나 《개국방략(開國方略)》에 실린 비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전에 들은 말이 그릇된 것임을 알았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경술년에 조선에서 삼전도에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고 비문을 기록하여 올렸다. ‘청 나라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강화의 실패가 우리나라 때문이라 하고 불끈거리며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우리나라를 휩쓸매 감히 항거할 수 없었도다. 당시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있으면서 봄얼음을 밟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백일(白日) 같은 날이 오기를 기다린 지 자못 50일이었는데, 동남 제도(諸道)의 군사가 계속 패망하고 서북의 장수들이 골짜기에서 서성대며 능히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양식 또한 핍절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大兵)이 산성으로 육박, 서릿바람이 가을풀을 숙살시키고 화로불에 새털을 사르는 것 같았는데, 황제는 살해하지 않는 것으로 무위(武威)를 삼고 오직 덕(德) 베풀기를 선무(先務)로 삼아서, 이에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나에게로 오면 나는 너희들을 보호할 것이요, 오지 않으면 도륙하리라.」 고 하니 영아이대(瑛俄爾代 용골대(龍骨大))와 마복탑(瑪福塔 마보대(馬保大)) 등 모든 대장들이 황명(皇命)을 받들어 길에 잇달았다. 이때 우리 임금은 문무 제신(文武諸臣)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의 화호(和好)에 의탁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나의 불찰로 인해 스스로 대국의 정벌을 입어 온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도다. 황제는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삼가 받들어 위로 우리 종사(宗社)를 보전하고 아래로 우리 백성을 보호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이에 찬동하여 드디어 수십 기(騎)를 이끌고 군전(軍前)에 나아가 사죄하였다. 이에 황제는 예(禮)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져 단 한번 보매 심복으로 여겨서 내리신 은혜가 종신(從臣)들에게까지 미쳤다. 예를 마치고 돌아와, 우리 임금은 도성(都城)에서 즉시 남하하는 군사를 부르고, 군사를 거두어 서쪽으로 향하며, 백성을 무마하여 농업을 권장하므로 원근에 흩어져 숨었던 자들이 모두 제집을 찾아 살게 되니 어찌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방(小邦)이 대국에게 죄를 지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 군역(軍役)에 도원수(都元帥) 강공렬(姜功烈)이 명 나라를 돕다가 패전하여 생포되었으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는 강공렬 등 몇 사람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니, 그 은혜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도다. 그러나 소방은 미련하여 깨달을 줄 몰랐으며,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정(東征)할 때 본국 군신(君臣)이 해도(海島)에 들어가서 피신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매 황제가 윤허하여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았다. 이리하여 강토가 다시 온전하게 강공렬도 돌아왔다. 이후부터 예우(禮遇)가 쇠하지 않고 사신(使臣)이 서로 잇닿았는데, 불행하게도 부당한 의론에 선동되어 난의 계제를 조작, 소방이 변신(邊臣)을 신칙한 그 말이 불손하게 전해졌고, 그 글을 사신이 입수하여 전하였으나 황제는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먼저 유지(有旨)를 내려 군사 일으킬 시기를 언급하여 효유하기를 너무 간절히 하여 이상 더 친절을 베풀 수 없으되, 끝내 면치 못하였으니 소방 군신의 죄 더욱 도피할 곳이 없도다.
황제가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편사(偏師)에게 명하여, 먼저 강도(江都)를 함락하니, 궁빈(宮嬪)ㆍ왕자 및 경사(卿士)의 권속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으나, 황제는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해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종관(從官) 및 내시들에게 오히려 간호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에 크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소방 군신 및 포로된 권속을 모두 본 고장으로 돌려보내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따스한 봄이 되었고, 가뭄이 변하여 적시에 내리는 비가 되었도다. 나라가 이미 망했다가 다시 존속되었으며, 종사가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계승되었다. 우리나라 수천 리 전체가 모두 생성(生成)하는 혜택을 입었으니 이것은 실로 옛날 사책(史冊)에서도 보기드문 일이었다. 아! 참으로 성대하도다. 한수의 상류 삼전도 남쪽은 황제가 머물던 곳으로서 단소(壇所)가 아직 남아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 공조(工曺)의 별칭)에 명하여 그곳을 더욱 확장하고 돌을 캐어 비석을 세워 영구히 보존하여 황제의 공덕이 곧 조화(造化)와 함께 흐름을 드러냈으니, 어찌 특별히 소방만 대대로 그 공덕을 힘입을 뿐인가. 또한 대국의 그 어진 명성과 무공이 먼 데라도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찍이 여기에서 기초하지 않을 수 없도다. 돌아보건대, 천지의 큼과 일월의 밝음을 쓰고자 함에 만분의 일이라도 방불하게 할 수 없어, 삼가 그 대략을 기재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이 상로(霜露)를 내려 숙살하고 양육하는데 오직 황제가 이를 본받아 위덕(威德)을 아울러 폈도다. 황제가 동국을 정벌할 때, 그 군사가 10만이니 호령 소리 요란하여 범 같고 비휴[豼] 같았도다. 서쪽 오랑캐, 그리고 북쪽 오랑캐가 모두 창을 잡고 앞장서서 그 영기(靈氣)가 너무도 빛나도다. 황제가 어질어 은언(恩言)을 내리니, 열 줄의 글이 밝고 간곡하며 엄숙하고 온화하되,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고 이 화를 스스로 초래하였도다. 황제가 밝게 명하여 잠자는 사람 깨우듯 하매 우리 임금이 이에 복종하여, 서로 거느리고 귀복하니 위엄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덕에 의지함이로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예우(禮遇)를 흡족히 하사 온화한 낯으로 웃으며 간과(干戈)를 거두었도다. 무엇을 주었는가? 준마(駿馬)와 경구(輕裘)로다. 온 도성의 사녀(士女)들 노래하며 즐기는데 우리 임금 환궁함은 황제의 은덕일세. 황제가 회군(回軍)하여 우리 적자(赤子) 살리셨네. 우리들이 망하여 흩어짐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들의 농업을 권유하네. 국토가 예전처럼 완전하고 취단(翠壇)이 오직 새로웠으며,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겨울 풀뿌리가 다시 봄을 만났도다. 큰 강 언덕에 우뚝 솟은 돌, 만세의 삼한(三韓)에 황제의 덕택이로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20일 흐리고 바람 불며 추웠다. 일행이 모두 피곤하고 또 짐바리를 정리하기 위하여 함께 유숙했다. 밥을 먹은 후 삼사(三使)를 따라 안시성(安市城)으로 갔는데, 곧 봉황산(鳳凰山) 전면이었다. 성터가 아직 남아 있고 보루에 돌이 높이 쌓여져 있는데, 성문(城門)의 유허(遺墟)가 있다. 봉황산 3면이 병풍처럼 둘렸고 동남쪽 토둔(土屯)에 가리어 천문(天門)을 지었으니, 참으로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명의 군사가 통할 수 없다.[一夫當關 萬夫莫開]’는 요새로서 당 태종(唐太宗)이 여기에서 곤욕을 당할 만하다. 성안은 1000여 호를 수용할 만하고 만 명의 군사를 감출 만하니 동방의 보장지(保障地)가 이보다 좋을 데가 없다. 그러나 청 나라가 중국을 점령한 후에는 그대로 비워 놓았으니, 이는 청 나라 사람이 조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이다.
○21일 흐리고 세찬 바람이 불며 몹시 추웠다. 일찍 일어났는데 갑자기 징을 치고 피리 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군사를 집합시키는 신호와 같다.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오늘 봉인(封印)을 열기 때문에 악기를 분다고 한다.
대개 음력 12월 21일에 천자로부터 온 천하 아문(衙門)에 이르기까지 모두 봉인하고 공사(公事)를 집행하지 않다가 1월 21일에 비로소 봉인한 것을 여는데, 청 나라가 세시(歲時)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봉인한 후에는 온 나라 사람이 마음대로 놀게 한다.
일행이 출발하여 책문(柵門)을 나가니 사람들은 모두 상쾌하다고 한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새장을 벗어난 새가 넓은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것 같다. 온정평(溫井坪)에 이르러 잤는데, 북경에 들어갈 때처럼 장막을 쳤다.
○22일 흐리고 추웠으며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동이 트자 떠나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러 압록강 동쪽을 바라보니, 뭇 봉우리는 하늘가에 솟았고, 통군정(統軍亭)은 강 언덕에 두둥실 떠 있다. 심사가 쾌활하여 문득 묵은 병이 나음을 깨닫는 듯하다. 삼강의 얼음이 견고하여 곧바로 건넜다. 내선각(來宣閣)에서 행장을 푸니, 마치 내 집에 이른 것 같다. 옛사람의 시에, ‘이 몸 편한 곳이 문득 내 집이 된다.[此心安處便爲家]’는 것이 실로 헛된 말이 아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한경원(韓敬源 1817 - ?)이 부임한 지 겨우 20일밖에 안 된다고 한다. 밤이 깊어 베개를 괴고 3000리를 왕래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한 마당 꿈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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