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전고[心田稿]
박사호(朴思浩) : 1783년경 ~ ?
■심전고
저자는 당시(45세로 추정) 강원감영의 막비(幕裨 : 裨將)로 1828년(순조 28)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정사(正使) 홍기섭(洪起燮)의 부름으로 부사(副使) 유정양(柳正養), 서장관(書狀官) 박종길(朴宗吉)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같은 해 10월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약 5개월 간의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 책은 권차가 적혀 있지 않고, 다른 사행록과는 달리 서명에 저자의 호를 붙여 일반 문집처럼 한 것이 특이하다.
첫째 권은 ‘연계기정(燕薊紀程)’이라는 제목 아래 사행 도중에 보고 느낀 것을 적은 일기이다. 먼저 날짜를 적고 날씨·지명·이수(里數)·역참(驛站)·숙참(宿站)을 기본적으로 썼다. 다음에 그 지방의 연혁·고사·고적·인심·풍속·인물·관방(關防)·산천·승경(勝景) 등을 전거를 들어 자세히 기술한 다음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둘째 권은 약 200여수의 시로서 산천·고적을 읊은 것과 종유하던 중국 사대부와 수창(酬唱)한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도 명성을 날리던 정태(丁泰)·장월(蔣鉞) 등과도 종유하였다.
셋째 권은 ‘유관잡록(留館雜錄)’이라는 제목 아래 중국 서적을 보고 느낀 점을 적은 것인데 주로 명·청대의 명인(名人)·달사(達士) 등에 대한 기담이문(奇談異聞)이다. <태화전기 太和殿記>는 궁성 안의 고적·건물에 대해 적은 것이다.
<대수암야화 大樹菴野話>는 대수암의 증명대사(證明大師)와 필담한 내용이다. <차등만록 車燈漫錄>은 연경을 왕래하며 산천·풍물을 적은 것이며, <제국 諸國>은 몽고나 회회국(回回國)에 대한 위치·연혁·풍속·산물을 적은 것이다.
넷째 권의 <응구만록 應求漫錄>은 유관(留館)하는 동안 중국 사대부들과 종유하며 경의(經義)를 토론하거나 읊은 시를 적은 것이다. 그리고 <춘수청담 春樹淸譚>은 정태의 별장인 춘수재(春樹齋)에서 중국의 명사 10여인과 조선 고금의 학문의 경향 및 풍물을 필담으로 소개한 것이다.
또 <유서관기 楡西館記>는 장월의 별장인 유서관에서 장방 등과 주고받은 필담을 모은 것이며, <난설시감 蘭雪詩龕>은 오숭량(吳崇梁)의 시감에서 정태·웅운객(熊雲客) 및 주인과 담론한 필담을 모은 것이다.
맨 끝의 ‘옥하간첩(玉河簡帖)’은 옥하관에 있을 적에 사귄 중국 사대부들과 오간 서찰 16건을 모은 것인데, 그 중에는 저자가 귀국한 다음에 주고받은 것도 있다. 이 서찰의 내용으로 보아 저자는 학문적으로 중국 사대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부경 사행(赴京使行)은, 조선 초기에는 동지(冬至), 정조(正朝), 성절(聖節), 천추(千秋) 4행을 매년 정기적으로 보내고, 사은(謝恩), 주청(奏請), 진하(進賀), 진위(陳慰), 진향(進香) 등의 사행은 일에 따라 차송(差送)했는데, 청 숭덕(崇德 청 태종의 연호) 이래로 천추사가 없어지고 세폐사(歲幣使)가 생겼으며, 순치(順治) 을유년(1645)에 청 세조의 칙유(勅諭)에 따라 동지ㆍ정조ㆍ성절 및 세폐사를 합쳐 1차 사행으로 하여 동지사라 이름하고 연례로 한 번만 보내게 되었다.
1. 심전고 제1권
■연계기정 서(燕薊紀程序)
○상서(尙書) 홍공(洪公)이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자 나를 종사관으로 불렀다. 이때 나는 동영(東營 강원 감영)의 막부에 있었는데, 휴가를 받아 서울에 가서는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무릇 왕복 150일, 6200여 리의 여행이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글로 적고 시에 읊어 놓은 것이 있어 이를 정리하여 훗날의 볼거리로 삼는 바이다.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0월
○25일 고양(高陽) 40리를 가서 벽제관(碧蹄館)에서 잤다. 세 사신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와 사대(査對)를 행하고 곧 길을 떠났다.
나는 첨지(僉知) 유광호(劉光祜), 찰방(察訪) 현운서(玄雲瑞), 사문 박재굉(斯文朴載宏 사문은 유학자에 대한 경칭) 등과 함께 사신을 모시고 따라가게 되었다. 아들 박내석(朴來錫)이 하직하고 갔다. 이역 만리에서 해를 거르게 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홍제원(弘濟院) 객점에 이르러 친한 벗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이별을 아끼니 거나하게 취기가 돈다. 한림(翰林) 홍재철(洪在喆)이 그의 아들 홍원종(洪原鍾)과 사신의 가마 앞에 와서 하직하였다. 나도 손을 붙잡고 헤어져 길에 올랐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불현듯이 망연(惘然)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동(家僮) 치운(致雲)이 따라가기를 원하므로 허락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겨우 스물 남짓하여 험하고 어려운 일을 겪어 보지 못하였는데, 만 리 머나먼 여행길에 혹시 내 종이 병들까 염려하여 여러 번 망설임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의기양양하여 좋아서 길을 떠나니, 가소롭다.
○27일 내가 임술년(1802, 순조 2 ) 가을 7월 16일에 김사집(金士集)과 적벽(赤壁)에서 뱃놀이를 할 제, 배에 술병 하나, 퉁소 하나, 거문고 하나와 시축(詩軸 시를 적는 두루마리) 하나를 싣고, 배를 몽구정(夢鷗亭) 아래에 띄우고 밤에 화석정 사이를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질탕하게 놀면서 밤을 새웠다. 김사집은 취흥에 겨워 거문고를 뜯으면서 목 놓아 노래 부르고, 퉁소를 불며 시를 읊었는데, 백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품이 완연히 풍류객이었다. 이제 다시 이 고장을 지나니, 한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뽕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듯이[桑田碧海] 변하였구나.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3일 대동역(大同驛)에서 파발마를 갈아 탔는데, 그 말은 눈이 방울 같고 걸음이 유성(流星)같이 빨라 참 좋은 품종의 말이다. 그러나, 몸이 너무 작아서 타고 달리면 흔들고 까불기가 마치 당나귀를 탄 것 같으니, 반천 리나 되는 긴 나그네길에 이러고서야 어찌 먼 데까지 갈 수가 있겠는가? 나는 역리에게 말을 바꾸라고 야단을 쳤더니 역리가 말하기를,
“30명이나 되는 정관(正官)이 꼭두새벽부터 길을 떠나느라고 말을 다 골라 타고 먼저 떠나 버렸기 때문에 말이 동이 나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4일 평양은 제일강산(第一江山)이다. 단군, 기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0년의 번화한 고장이요, 나라 안의 명승지로서 더불어 서로 겨룰 만한 데가 없다. 영제교(永濟橋)에서 대동강을 향해 강 남쪽에 10리나 되는 긴 수풀이 강을 따라 길을 끼고 있고, 바람을 담뿍 안은 흰 돛과 물새들이 그 사이로 숨었다 나타났다가 한다. 그 숲이 다하자, 단청한 누각과 흰 성첩(城堞)이 강가에 우뚝 솟아, 아스라이 비치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산 그림과도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게 한다.
○5일 연광정(練光亭)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 4자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릉(金陵)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또,
긴 성 한쪽에는 굽이굽이 물이요 / 長城一面溶溶水
큰 들 동쪽 끝에는 점점이 산이로다 / 大野東頭點點山
라고 쓴 한 연구(聯句)가 걸려 있는데, 고려의 장원 김황원(金黃元)의 시다. 김황원이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는데, 이 연구 하나를 지어 놓고서는 진종일을 신고하여 애썼으나 다시 다음 구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통곡하며 내려갔다 한다.
부벽루(浮碧樓)는 장경문(長慶門) 안에 있는데, 높고 넓으면서도 아늑하여 연광정과 서로 어금지금하다. 옆에는 모란봉(牧丹峯)이 있으며 앞으로는 능라도(綾羅島)를 마주보고 있는데, 시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으므로 맑고 시원한 기운은 더 낫다. 양쪽 기둥에,
조용한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 / 靜影沈璧
떠오르는 빛은 금을 녹인 듯 / 浮光溶金
이라는 한 연구가 걸려 있다.
○11일 이기영(李基榮)이라는 사람은 박천의 지인(知印 통인(通引))이다. 서적(西賊)의 변란(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적이 이 고을을 점거하고 원을 구류하였는데, 원은 임성고(任聖皐)였다. 관속들은 놀라서 다투어 투항할 제, 이기영이 남몰래 나가 원을 만나보고 구원을 청하는 글월을 받아 옷을 뜯어 그 속에 감추고 포위망을 뚫고 나와, 밤에 절도사영으로 달려가 그 글월을 올리고 원이 구류되었으나 굽히지 않은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날쌘 포수(砲手) 50명을 얻어 가지고 박천 고을 수복하기를 청원하였다. 절도사가 장하게 여겨 허락하였으므로 드디어 그 계책이 성공하여 적을 쫓아내고 고을을 되찾아 원을 구류된 속에서 구해냈다. 아, 임 군수가 부임할 적에는 이기영이 어떤 자인지 알 까닭도 없었으련만, 난리에 임하여 충성을 나타내어 이와같이 뛰어나게 기발한 공을 세운 것은 참으로 특이하다 하겠다. 내가 그 사람을 불러 만나보니 키가 작고 얼굴도 못생겼다. “용모로 사람을 취하다가 자우(子羽)에게서 실수하였다.”는 것이 아니냐?
○13일 곽산은 정주(定州)와 선천(宣川) 사이에 끼여 있어, 고을이 작고 아전 수도 적으며, 지대(支待)가 어긋남이 예전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나, 땅이 기름지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곡식의 품질이 매우 좋기 때문에 연경(燕京)에 바치는 쌀은 반드시 선천ㆍ곽산의 쌀을 가져갔다.
○17일 연경에 타고 갈 말을 용만관(龍灣館) 밑에 가서 점검하였다. 대개, 영남, 호남, 호서, 관동, 관북 5도의 파발마가 의주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 먼저 사신의 수레 끌 말을 고르고, 다음으로 비장과 역관이 탈 말을 잡았다. 전부터 사행(使行)에 말이 나쁜 것을 건족(蹇足 절뚝발이)이라 일컬어서 위법이라 하여 장계를 올리고,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역말을 끌어올렸으나, 양서의 역이 쇠잔하여 거의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번 사행에는 전의 폐단을 엄금하였으나, 다만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언 왕복 4000여 리의 길을 만일 과하마(果下馬 키가 작은 말)로서야 어찌 먼 길을 감당할 수 있으랴?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집공(執公)의 말에는 또한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공충도(公忠道 충청도) 이인역(利仁驛) 장어인노미(張於仁老味)의 말을 잡았다. 그 말은 월따말[騮]로서 눈이 방울 같고, 정강이가 가늘며, 갈기가 높고, 물고 차며 큰소리로 우는데, 이야말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생김새가 작은 당나귀 같아서 사람들이 다 돌아보지를 않았으나 내가 끌고가서 내 것으로 삼았다. 만 리 앞길을 이 한 마리의 말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 골상을 보니 과연 작으나 큰 놈을 대적할 만하다.
○18일 최운태(崔雲泰)는 선천(宣川) 마두(馬頭 파발마를 맡아보는 사람)다. 연경을 무릇 47번이나 내왕했으므로 그곳의 유람한 곳 및 풍요(風謠 지방 풍속을 읊은 노래), 물정(物情)과 재물이 많은 곳이나 잇속을 볼 만한 근원 따위를 남김없이 꿰뚫어 알고 있으매 비록 노련한 통역들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전후의 사신들이 온갖 일을 꼭 그에게 물었는데, 그 자리에서 척척 대답하였다. 그 공로로 몇 해 전에 사신이 어전에서 아뢰어 승자(陞資 자급이 오름)하여 변장(邊將)을 제수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그 사람을 보니 늙었으나 더욱 원기 왕성하여, 연경에서 노닌 발자취를 들려 주었는데, 산천, 길의 이수(里數), 누대(樓臺), 성궐(城闕), 시장, 상점, 원유(苑囿), 화초, 금수, 보화, 진기한 물건들을, 전부터 잘 알고 있는 글을 외듯 하였다. 처음으로 가는 사람들이 죽 둘러앉아 듣고서 모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변방 성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좋은 소일(消日)거리였다.
임경악(林景岳)은 의주의 큰 장사치다. 몸집이 작달막하고 날쌔고 다부진데, 연계(燕薊 북경 지방)에 20여 년 동안을 드나들면서 쌓아모은 재산이 수만금에 이르러 모든 사람이 임경악의 도장 하나만 가지고 가면 비록 천만금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니, 그가 남의 나라 사람에게까지 중히 여김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도주(陶朱)의 재주를 얻어서 그러한 것인가?
○22일 균포(均包)의 법은 해마다 내려오는 전례이다. 비장, 역관에게는 8포(包)의 예가 있고, 당상관은 은 3000냥, 당하관은 1000냥을 감한 2000냥으로 북경 물화와 바꾸게 하여 거기서 남는 것을 취하였다. 근년에 와서는 은화가 넉넉하지 못해서 이 법이 폐지되어 결국 상인들이 연경에 장사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사사로이 가지고 가는 화물은 포(包)의 명목으로 가지고 가는데, 모두 그 경중을 달아서 값을 매기고, 값이 은전 100냥에 차면 세은(稅銀) 12냥을 떼어 균등하게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균포라고 하였다. 그런데 매양 몰래 파는 것이 많았으므로 대조 검사가 잘못되면 의주 부윤과 서장관이 회동하여 달지만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일이 적어서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23일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 : 황력(皇曆)은 보통 황력(黃曆)이라고 쓰는데, 중국으로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는 약식 사행을 말한다. 전에는 동지사가 하던 것을 현종(顯宗) 때부터 따로 가게 되었는데, 세 사신(상사ㆍ부사ㆍ서장관)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역관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자문(咨文)을 보내는 약식 사행이다.)의 선래(先來)가 밤에 강을 건너왔는데, 그들이 듣고 본 일들의 대강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수원(水原) 대청도(大靑島) 사람이 남녀 가족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해서(海西)로 이사를 가던 중 바다 복판에서 풍랑을 만나 계주와 항주[薊杭] 사이에 표착하였다가 돌아오는 재자관 편에 따라나왔다.
○24일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물건은 금, 인삼, 담비가죽[貂]과 수달피[㺚]인데, 홍삼은 그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다. 대개, 인삼 꾸러미는 맨 처음에는 40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해마다 늘어서 지금은 5000근에 이르렀으나, 연경 사람들은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하므로,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대개 5000근 꾸러미의 삼 이외에는 단 한 근도 금물인데, 이번 사행에 있어서는 조정의 경계하는 명령이 지엄하여, 사행이 의주로 들어가던 그날 밤에 의주 부윤이 샅샅이 뒤져서 일행 중의 정관(正官) 고경빈(高景斌)ㆍ이정식(李廷植)ㆍ김성순(金性淳)ㆍ이호기(李好基)가 잡혔고, 찰방 현운서(玄雲瑞)도 붙잡혀 돌아가게 되었으니, 사신 행차에 부끄러움을 끼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행색이 처량하다. 변방에 어떤 이는 돌아가고 어떤 이는 머무르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어둡게 한다.
○27일 글자는 같으나 음은 같지 않으니 실은 문자어(文字語)이다. 중국 사람의 천만 마디 말은 한결같이 글자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만약 그 음을 빨리 깨치면 나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지만, 서로 마주대해서 멀뚱멀뚱 쳐다볼 뿐 감히 입이 열려지지 않으니 어찌 참으로 답답하지 아니한가? 마음속에 한 꾀가 생각나서 그 사람에게 한자리에 앉기를 청하고, 또 유 첨지에게 그 사람과 말을 주고받게 한 후에 옆에서 들어보기로 하였다. 또 머리에서 발까지 의복, 모자, 패물 등의 물건을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보고 묻고 유 첨지로 하여금 그 음을 해석하게 하였더니, 조금씩 중국 말을 깨우쳤는데 날마다 그렇게 하였다.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
○5일 조선관(朝鮮館)은 동쪽 변두리의 작은 골목에 있는데 창틀이며 방 문짝이 거지반 황폐해 있으며 때마침 풀과 나무들이 저녁 햇빛에 비치어 사람의 비분(悲憤)을 일으킨다.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기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괸다. 문의 편액에 전에는 ‘조선관’의 글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없어졌다.
○17일 유관(楡關)은 곧 진 나라 장수 몽염(蒙恬)이 느릅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은 곳으로 주민들이 매우 번성하고 부유하다. 시중에 벤 나무들이 많은데 나무들은 모두 아름드리로서 집의 대들보와 수레 만드는 재목인데 저자에서 나온다. 객점들이 굉장히 크며, 붉은 흙을 바르고 유리를 끼웠다. 세 사신 일행이 모두 400여 명, 말이 모두 300여 필, 태평거가 60여 대로, 수레는 각각 두 마리의 노새가 멍에 메고 있다. 또 중국의 상인으로 수레를 탄 사람이 무수한데 그들이 모두 한 객점에 들어가고도 여유가 있다. 그 객점 안의 심부름꾼 아이나 장정들이 응접을 거침없이 한다. 노새와 말의 고삐를 풀고 넓은 뜰에 흩어놓고 먹이를 먹이는데, 큰 돌구유[石槽]가 3, 40개나 있다.
객점 뒤 냇가에 또 새로 지은 큰 집 한 채가 있는데, 그것이 안채라 한다. 주인 유옹(劉翁)은 나이가 80여 세인데 키는 8척 남짓하고 허연 수염에 풍만한 얼굴로, 자손도 많고 부부가 해로(偕老)하고 있다. 그 재산을 물어 보았더니 70만 은(銀)에 불과하다 하니, 우리나라의 초가집에 그을음으로 더럽혀진 객점들의 먹다 남은 술이나 찬밥 정도인 재산에 비하면 큰 규모라 하겠다. 연로(沿路)의 객점들이 대개 크고 넓은 것이 많지만 이곳이 으뜸이다.
◯동악묘는 웅장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고, 조양문(朝陽門) 밖에 있으니 이것이 황성의 동문인데, 일명 제화문(齊華門)이다. 세 사신은 표를 받들고 반을 지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의 어깨가 맞닿고 수레의 바퀴가 부딪쳐서 상점가 성궐(城闕)의 번화하고 크고 화려하기가 심양(瀋陽), 산해관(山海關)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과연 서울의 대도회지이다. 당시(唐詩)에,
황성의 웅장함을 보지 않고 / 不覩皇城壯
어찌 천자의 존엄함을 알리요 / 安知天子尊
하였으니, 옛날의 낙양(洛陽), 장안(長安)도 일반이었을 것이다. 옥하(玉河)는 물근원이 옥천산(玉泉山)에서 나와 대내(大內)에 들어가 남쪽으로 흘러 성 밖으로 나간다. 하수 남쪽에 옥하관이 있다. 일명 남소관(南小館)이라고도 하는데 사신 일행이 사관하는 곳이다. 제주에서 표류해 온 사람 신항귀(愼恒貴) 등 12명이 앞에 늘어서서 절한다. 그들은 만리 풍파의 험함을 넘어 이태 동안의 추위와 더위의 고생을 겪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라,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집안 사람들을 본 것같이 하니 그들의 정경이 측은하다. 장차 돌아가는 사신 편에 보내기로 하고 우선 관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27일 예부의 지위(知委)를 보면, 조선, 유구(琉球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사신은 다 황제를 지영(祗迎)하여 잔치에 참례하되, 조선 사신은 천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으며, 대동하고 온 사람들을 막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각 문에 지시를 내렸으니, 특이한 은전이다.
■연계기정(燕薊紀程) 기축년(1829, 순조 29) 1월
○7일 표류하여 온 제주 사람 김광현(金光顯) 등이 또 관에 찾아왔다. 따로 ‘표해록(漂海錄)’이 있다.
■연계기정(燕薊紀程) 기축년(1829, 순조 29) 2월
○4일 통주(通州) 50리를 가서 잤다.
선래 군관(先來軍官), 역관 김재성(金載星), 상방 비장(上房裨將) 박유풍(朴有豐), 부방 비장 박진환(朴鎭煥)을 떠나보내었다.
○8일 사류하(沙流河) 40리를 가서 점심 먹고 풍윤현(豐潤縣) 40리를 가서 잤다. 책문(柵門)에서 연경까지 왕복하는 동안은 아침저녁 공궤(供饋)에 김치를 한번도 먹어 보지 못하고 말린 어물이나 시큼한 장 따위만 먹었고, 또 요동벌의 물이 탁해서 입과 위(胃)에 참으로 맞지 않는다. 풍윤(豐潤)에 이르니 큰 사발에 김치를 특별히 내왔는데, 그 고장 토산(土産)의 풍미가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배추의 크기가 파초만 하고 국물이 맑은 기름 같으매 여러 사람들이 소리를 모아 ‘좋다.’ 하고 외치고, 한번에 집어다가 먹어버렸다.
○9일 진자점(榛子店) 5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사하역(沙河驛) 50리를 가서 잤다.
봄바람이 애연(藹然)히 따뜻해지매 아지랑이는 눈에 아물거리고 버들은 실가지를 드리우니, 여러 날 동안의 긴 나그네길에 더욱 고향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재촉한다. 박운루(朴雲?), 유 첨지(劉僉知)와 더불어 서로 번갈아가면서 옛날 이야기로 졸음을 쫓았다.
○15일 사하소(沙河所) 48리를 가서 점심 먹고, 영원위(寧遠衛) 30리를 가서 잤다. 아침에 보니 일행의 사람들이 모자를 산다. 전(氈)을 산다 하면서 출발에 임박해서야 어지러이 붐비니, 대개 그것들은 중후소의 토산물로 양털에 여러 가지 빛깔을 물들인 것인데, 희고 부드러운 것을 상품으로 친다. 황성에서 파는 담요, 모직물 또한 그러하다.
○16일 연산역(燕山驛) 3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주가장(朱家莊) 27리를 가서 잤다.
길가의 점방에서 파는 식품 중에서 오리나 거위의 알을 삶은 것이 많은데, 초란(炒卵)이라고 부른다. 운루(雲?)가 술을 사면서 또 초란을 좋아한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연암기(燕巖記 열하일기)》를 보지 않았는가? 일행 중에 노 주부(盧主簿)라는 사람이 있어 초란을 즐겨하여 참(站)마다 사먹었으므로, 일행 중에서 ‘노 초란’이라고 불렀다는데, 지금 자네를 ‘박 초란’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였더니, 곁의 사람들이 배를 쥐고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1일 여양역(閭陽驛) 52리를 가서 점심 먹고, 광녕참(廣寧站) 40리를 가서 잤다. ※대략 하루에 100여리를 행진함.
○24일 주류하(周流河) 유하구(柳河溝)는 전부터 물이 질퍽거리고 험한 나루라고 일컬었지만 얼음이 아직 녹지 않아서 평탄한 길을 수레를 몰고 지남은 요즘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가다가 한 개울을 지나는데 월천군(越川軍)이 있어 가죽바지를 입고 물속에 서서 삯돈을 받고 사람을 건네준다. 나를 업고 개울로 들어가다가 얼음이 미끄러워 발이 미끄러져 나를 업은 채 물에 주저앉아 버렸으니 비록 맹분(孟賁)의 용기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물에 주저앉을 때에 천천히 내려앉았는데, 나는 그가 주저앉는 자세에 따라 잇따라 ‘이놈, 이놈’ 하고 외쳤으나 물을 건네주는 되가 ‘이놈’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나를 업고 강언덕으로 올라왔는데 아래옷이 온통 물에 젖어버렸다. 양쪽 언덕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이놈 이놈이라니 누구 보고 하는 말인가? 저 되가 어찌 이놈이란 말을 알겠는가? 설사 이놈이란 말을 안다손 치더라도 그런 경우에 이놈이 어찌한단 말이야.”
하였다. 운루(雲?)가 손뼉을 치며,
“이놈 이놈, 통주(通州)에서 내가 물에 빠져 조롱을 받던 앙갚음을 오늘 시원하게 한다.”
하였다. 대개 ‘이놈[此漢]’ 두 글자는 조선 양반들의 입버릇인데, 오늘 느닷없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경솔하게 튀어나와서 부끄럽고 또 우습기도 하다.
○25일 처음 심양을 보았을 적에는 스스로 천하의 장관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황성을 보고 돌아와서는 다시 유람하고 싶지가 않다. 사치하다가 다시 검소해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28일 태자하(太子河)를 건너 목창(木廠)을 지났다. 거민들이 자못 번성한데 톱으로 자른 대들보감 목재들을 잘라 집채처럼 높이 쌓아 놓았다. 일찍이 듣건대, 이곳 사람들이 강을 따라 상류에서 우리나라 폐사군(廢四郡 여연(閭延)ㆍ우예(虞芮)ㆍ무창(茂昌)ㆍ자성(慈城)의 네 고을이다.) 지역에서 나무를 몰래 찍어 내어 강물이 붇기를 기다려 떼를 만들어 떠내려 보내는데 더러는 잘못하여 압록강을 따라 흘려내려 보내면 의주 사람[灣人]들이 그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29일 첨수점(甜水店) 3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연산관(連山關) 40리를 가서 잤다. 이날 소석(小石), 청석(靑石), 회령(會寧)의 세 험한 고개를 넘어 회령 고개 위에 이르러 의주의 찬거리를 가져오는 담당 아전을 만나니, ...저녁 참에 만리(灣吏 의주 아전)가 소 한 마리를 잡아 위아래 사람에게 다 나누어 먹이고, 또 홍로(紅露 술), 김치 같은 것들이 있어 주리고 비위가 상했던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음식을 탐하는 것을 보니 또한 볼만하다.
■연계기정(燕薊紀程) 기축년(1829, 순조 29) 3월
○2일 책문에 도착하였을 때, 의주부의 관속들이 조칙(詔勅)을 영접하는 채색 가마와 의장(儀仗) 등을 갖추어 맞이하였다. 의주 상인의 무리들이 책문 안에 가득 차 있으니, 개시(開市 시장을 열어 상품을 매매함)하기 때문이다.
○4일 책문에 머물렀다.
일행의 수레 끄는 말, 짐실은 말, 저는 말 들을 아울러 먼저 의주로 보냈다. 제주도 사람으로 표류해 갔던 사람도 먼저 내보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은 목숨들이 상방(上房)의 특별히 자애로운 비호의 은혜를 입어 병에 걸려 거의 다 죽어가던 사람도 다 삼제(蔘劑 인삼이 든 귀한 약제)로써 구제되고, 인솔해온 자들에게 빼앗긴 행장과 물품들을, 볼기를 치고 꾸짖고 하여 일일이 조사해서 찾아 주었으며, 또 침탈하는 폐단을 염려하여 참(站)마다 불러다보고 위로하고 타이르면서, 마치 여러 아들이 자애로운 어머니에 의지하듯이 보호를 받아 여기에까지 왔다. 이제 이별하게 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차마 떠나가지를 못한다. 어진 사람의 덕이 사람의 뼛속까지 잦아드는데, 저 압송해 오는 자들은 온갖 꾀로써 빼앗으려고 구박이 특히 심하였으니, 만리 이역에서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마음씨란 말이냐.
○9일 책문에 머물렀다.
짐바리 수레가 일제히 도착하였다. 큰 수레 6, 70대가 책 안에 죽 늘어서니 마치 돛대들이 무수히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매년 사행(使行) 때에 은과 인삼이 연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중국의 잡화로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으로, 비단 등과 약재나 바늘, 모자, 책 같은 쓸 만한 것 이외에 구슬, 부채, 향(香), 당나귀, 노새, 앵무, 융전(毧氈 모직물), 거울, 허리띠, 종이, 벼루, 붓, 먹 따위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건들은 나라의 보배가 아니라 부질없이 작은 나라의 사치하는 풍습만 조장하게 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금물(禁物)은 금, 삼, 초피와 수달피이고 저 사람들의 금물은 병서(兵書), 무기[兵器], 낙타[駝], 말쇠[金鐵], 상모(象毛), 흑각(黑角 무소뿔) 등의 물건인데, 모두 수색 검사한 후에 책문을 내보낸다. 그래서 잠상배(潛商輩)들의 눈을 치뜨고 모면하려는 꼴이란 가증스럽고 가소롭다.
○12일 구련성(九連城) 38리를 가서 점심 먹고, 의주(義州) 30리를 가서 잤다.
○20일 안주(安州)에서 머물렀다. 운주헌(運籌軒)에 들어가 기악(妓樂)을 구경하고, 친구 조존공(趙存恭)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때에 관소(館所)로 돌아오니 유 첨지(劉僉知)가 혼자서 하루 종일 머물러 있으면서 감영 기생 금향(錦香)과 더불어 서로 못내 친밀하여 차마 떠나지를 못한다. 대개, 작년 겨울 처음 길을 떠날 때에 박운루(朴雲?)는 유 첨지와 함께 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서로 조섭(調攝)하기를 힘쓸 것을 약속하고 지금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거처를 같이하였다. 그런데, 지금 유 첨지는 금향의 아리따움을 보고 진정으로 떠나기 어려워한다. 내가 운루에게 말하기를,
“꽃밭에 불을 지를 수 없으니, 우리들이 피할 수 밖에 없다.”
하고는 드디어 동방화촉(신방)을 마련하고 근배례(巹杯禮 혼례식을 말함)를 행하고는 창문을 잠그고 나와서 운루와 함께 이불을 덮고 벽을 사이에 둔 딴방으로 옮아가서 잤다. 먼 길에 오래 막혔던 차라 운우(雲雨)가 낭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다.
○22일 평양(平壤) 50리를 가서 잤다.
기성(箕城 평양의 딴 이름)의 번화함이 고려조 서경(西京) 때에 성하였는데 여러 번 병화(兵火)를 겪었지마는 여전히 옛날과 같아 변함이 없으니 이 사람들은 강남(江南)의 소금항(銷金巷)에 비긴다. 대개 그 남녀의 사치함[都治], 물화(物貨)의 쌓임, 강산ㆍ누대(樓臺)의 수려함이 가히 온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 하겠다.
○23일 평양에서 머물렀다. 조 첨사(趙僉使)는 양주(楊州) 사람이다. 산골 고을에서 생장하여 사람됨이 순박 성실하다. 처음으로 패성(浿城 평양)을 보고 부러워하기를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내 나이가 장차 70이 되려 하고, 살쩍에 쌍옥(雙玉 옥관자)를 달았고, 아들 있고 손자 있고 하니,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다만 천지간에 이런 별세계가 있음을 미처 몰랐다. 만약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기생 서너 명을 데리고 풍악과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싣고 능라도(綾羅島), 부벽루(浮碧樓), 청류벽(淸流碧) 밑에 배를 띄우고 놀게 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29일 총수(蔥秀) 50리를 가서 점심 먹고, 평산(平山) 30리를 가서 잤다.
총수 푸른 벽 위에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명 나라 문장가이며 서화에 능함)의 글씨로 ‘옥류천(玉溜泉)’ 세 글자와 또 그의 화상을 새겨 놓은 것이 있다. 그 밑에서 잠깐 쉬면서 차를 달이고 술을 따랐는데, 물맛이 극히 맑고 시원하였다.
■연계기정(燕薊紀程) 기축년(1829, 순조 29) 4월
○1일 금천(金川) 3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청석동(靑石洞) 30리를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고 나서 송경(松京) 40리를 가서 잤다.
쌍폭(雙瀑)을 찾아 자하동(紫霞洞) 골짜기에서 산골 사이를 보니,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두서너 채의 촌가가 가끔 산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꽃나무 속에 은은히 비치니, 이것은 이초당(李草堂), 김초당(金草堂) 들인데, 그윽하고 한적함이 사랑스러웠다.
○3일 오류동(梧柳洞) 당질(堂姪)네 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는데, 시골 농가의 풍미가 담담한 것이 입에 맞아, 관에서 주는 성대한 음식보다 낫다. 유람한 명승을 대략 이야기하고 벽제관(碧蹄館)으로 급히 들어가니 일행 여러 사람들은 벌써 오중대(五中臺)에 올라가 있었다.
○4일
홍제원(弘濟院) 30리를 가서 잠깐 쉬고, 서울 10리를 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高陽)에서 홍제원까지는 서울 친척 친구들이 잇따라 마중나와 반가이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니 매우 기쁘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조서 맞이하는 의절(儀節)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사신들은 칙서를 받들고 예궐(詣闕)하고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이 태평하였다.
2. 심전고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대개, 중국의 이름 있는 사대부들은 창루(娼樓)나 주사(酒肆 술집)를 꺼려하지 않고 기정(旗亭)의 고사(故事)와 같이 여기므로, 매양 석양이나 명절에는 거마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지으며 서화도 품평(品評)하여 그 시구를 두고 가는데, 술집에서는 그것을 날마다 팔아 그 이익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다. 이와 같이 하여야만 바야흐로 풍류주흥이 있다고 하겠으니, 우리나라 술집과는 다르다. 우리나라 술집은 체[篩]와 등을 장대 끝에 달아서 매주가(賣酒家) 세 글자를 써 놓았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질그릇 술항아리가 있는데 사기 술잔으로 멍석을 편 화롯가에서 청주와 탁주를 가리지 않고 서서 몇 잔을 마시고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치르고 나가며, 혹은 연거푸 10여 잔을 기울이고는 취하여 욕지거리를 하고 싸움질을 하여 취향(醉鄕)에서 싸움터로 옮겨 들어가기도 하곤 하니, 이것이 무슨 취미냐? 그러므로, 사대부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다. 대개 중국 사람의 술을 마시는 법은 아주 작은 술잔으로 조금씩 마신다. 한 번 술잔을 권하는데 손님과 주인이 수없이 절하며, 또 술로 인한 실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큰 술잔으로 마구 마시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서,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건만 주량[酒戶]이 적지 않다는 이름을 얻었으니,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점국(覘國) : 나라를 엿본다.
◯내가 중국에 들어가서 가만히 살핀 것이 한두 가지 있다. 황제의 부(富)가 사해(四海)를 소유했는데도 돈피 갖옷이 다 해지고 채색한 의장(儀仗)이 빛이 많이 바랜 것으로써 그 검소함을 엿보았고, 변새(邊塞)의 버들이 황량하고 연대(煙臺 봉화대)가 퇴락하니, 문교를 숭상하면서 군비를 소홀히 한 것으로써 그 쇠함을 엿보았고, 남만의 상인과 촉의 장사치[蜀賈]들이 아름다운 구슬을 팔지 않는 것으로써 그 진귀한 보배를 멀리함을 엿보았으며, 풍악의 소리가 번잡하고 빠른 것으로써 그 법령이 엄하고 가혹함을 엿보았고, 절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고, 금빛의 채색이 휘황한 것으로써 그 부처를 숭상함을 엿보았으며, 의복이나 거마에 귀천을 표시하지 않은 것으로써 그 등위(等威 신분이나 등급에 따른 위의)가 없음을 엿보았으며, 궁녀를 뽑아들였다가 연한이 되면 내어보내는 것으로써 원망하는 여자가 없음을 엿보았고, 직간하는 신하를 멀리하고서 멀리 관외로 거둥하는 것으로써 아첨하여 총애를 얻는 신하가 많음을 엿보았으며, 황도주(黃道周 명 나라의 명신) 등 여러 사람이 문묘에 승배(陞配)된 것으로써 육학(陸學)을 내쳤음을 엿보았으며, 총애를 받던 신하가 권세를 잃고 멀리 새외(塞外)로 귀양가는 것으로써 그 재상들의 권력 다툼함을 엿보았고, 누런 옷을 입은 선사(禪師)가 금전(金殿)에 거처함으로써 몽고를 견제함을 엿보았고, 상사(賞賜)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써 그 재력의 모자람을 엿보았고, 번신(藩臣)에게 시를 내려 전공(戰功)을 과장하는 것으로써 그 위세를 빛냄을 엿보았다.
■화초포(花草鋪)
○화초포가 융복사(隆福寺) 동쪽에 무릇 세 곳이 있는데, 모두 움푹한 땅에 움집을 만들어 지붕을 땅에서 두어 자 내놓고 사방을 뚫어서 창을 만들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밝기가 높은 곳 못지않은데, 여러 가지 꽃들이 모두 봉오리지고 움이 터 있다. 복숭아, 살구, 매화, 계수 따위는 오히려 신기할 것이 못되고, 그중의 영춘수선(映春水仙), 천추말리(千秋茉莉)는 다 지금 한창 꽃이 활짝 피어, 사철의 풍광을 모아 한 방의 맑은 완상[淸玩]을 제공하고 있다. 꽃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따뜻한 기운이 사람의 몸을 감싸 준다. 이야말로 사람의 힘이 하늘의 조화(造化)를 빼앗았다 하겠다. 그 밖에 석류, 귤, 유자, 해당화(海棠花), 버들, 대, 종려, 선인장, 금란(金蘭), 옥잠(玉簪) 등 여러 가지 화초들도 서로 빼어남을 다투고 고움을 겨루고 있다. 당 나라 임금의 갈고(羯鼓)를 쳐서 꽃을 재촉한 일이나 수 나라 황제의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든 것이 무엇이 족히 기이하랴.
■관화방(官貨房)
○화초포(花草鋪) 가에 한 방이 있는데 편액에 ‘관화방(官貨房)’이라 씌어 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기이한 보화들이 그 안에 가득한데, 대개 오옥(烏玉 검은 구슬), 청동(靑銅), 밀화(蜜花), 금패(金貝) 등과 그 밖의 형형색색, 그 종류가 수없이 많다. 이것들은 한낱 문방(文房)의 제구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도 한 물건의 값이 천금을 밑돌지 않는다. 좌우에 각각 큰 석경(石鏡)이 걸려 있는데, 그 크기가 벽과 가지런하다. 방 안의 보화들이 다 장 속에 쌓여 있으며, 영롱하고 찬란한 것이 기완(奇玩)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볼 만한 것으로 진옥병장(眞玉屛障)이 하나 있다. 반도(蟠桃) 나무를 양각(陽刻)하였는데 높이가 10자 넘으며 그 꽃, 열매, 가지, 잎들이 모두 진귀한 보화로 각각 그 빛깔에 맞추어 만들어서 그 진가(眞假)를 분별할 수 없다. 또 두어 벌의 자명종(自鳴鐘)이 있는데 범품(凡品)에 비할 것이 아니며, 금감(金龕), 옥탑(玉榻), 유리등롱(琉璃燈籠) 등도 모두 진품에 속한다. 이것들은 대개 화신(和珅), 복장안(福長安) 등 여러 신하의 집에서 적몰(籍沒)한 물건을 여기에 사다가 놓은 것이라 한다.
■호권(虎圈)
○만들어서 곰 세 마리를 가두어 놓았는데, 빛깔은 산돼지와 비슷하고 주둥이는 뾰족하며 눈은 푸르고 다리는 크고 발굽은 둥그렇다. 이것은 곰의 우리다.
행각 바로 뒤, 열 계단 위에 평집의 큰 집이 높직하게, 마치 우산을 편 것 같이 있는데, 그 아래에 움집을 만들어 땅 밑 사방을 벽돌로 쌓고 넓이가 10여 칸 되는 데에 아름드리 나무를 세로 놓고 쇠그물을 펴서 그 그물에 못질을 하였다. 또 벽을 파서 움푹하게 만들고 쇠사립[鐵扇]으로 막았는데 위에 도르래[轆轤]를 달아서 그것으로 여닫게 하였다. 그 쇠사립 바깥에 또 큰 우리가 있어 칸을 막아 우리 셋을 만들고 위에 네모 담을 쌓았는데, 그 높이는 어깨에 닿는다. 세 마리의 범이 각각 한 우리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쇠그물 위에 빙 둘러서서 고함을 지르며 돌을 던지니, 범이 성난 눈으로 노려보기는 하나 조금도 놀라 움직이는 기색이 없다가 갑자기 한번 크게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우리를 뒤흔들어 사람들이 모두 움칠하였다. 범 기르는 법을 물었더니, 색부(嗇夫 호권(虎圈)의 번든 사람)가 곁에서 대답하기를,
“범을 하루 기르는 데 다섯 근의 고기가 든다.”
하였다. 마두배(馬頭輩)를 시켜 고기를 사다가 던져 주었더니, 범이 입을 벌리고 받아 먹는데 하나도 잘못하여 떨어뜨리는 일이 없다. 또 고깃덩이를 던져 주는 척하고 안 던지며 그 동정을 보았더니, 귀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쳐들며 사람을 향하여 뛰어오른다.
뒷우리에 또 새로 잡아 온 표범 한 마리가 있는데, 눈알을 굴리며 이빨을 깨물고 성이 난 그 모습이 더욱 사납게 보인다. 빛깔은 아롱지고 무늬가 아름다우며 몸집을 매우 작다.
■노구교(蘆溝橋)
○노구교도 또한 하나의 기이하고 장대한 곳이다. 선무문(宣武門)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돌다리가 동서로 뻗어 있는데 길이는 300보(步) 넘고, 돌난간 141칸에 홍예(虹霓) 12문이 다 배들이 출입할 수 있으며, 다리 위아래 모퉁이에는 돌기둥을 세웠는데, 모양이 경천주(擎天柱)와 같다. 그 기둥은 다 쇠를 녹여서 만든 것으로 그 모퉁이에 못질을 하였다. 동서쪽에 강희(康煕), 건륭(乾隆)의 어제 비기(碑記)가 있으며, 한 비석에 큰 글씨로 노구효월(蘆溝曉月)의 네 글자가 씌어 있다. 후위(後魏)의 유정(劉靖)이 둑을 쌓아 수재를 막았으므로 유사언(劉師堰)이라 부르며, 또 고안언(固安堰)이라고도 한다. 다리를 지나면 관묘(關廟 관우의 사당)가 있는데 사당 밖에 낭각(廊閣)을 짓고 각 안에 관원이 있어, 문부(文簿)를 다스리고 수레와 배의 세금을 거둔다. 대개, 낙양(洛陽), 장안(長安), 금릉(金陵), 성도(成都)의 상인으로 연경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이 길을 거쳐가기 때문이다. 살피건대, 손승택(孫承澤)의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노구하(蘆溝河)는 태원(太原)에서 나와 천지(天池)를 숨어 흘러 삭주(朔州) 마읍(馬邑)에 이르러 뇌산(雷山) 남쪽에서 발하여 혼천(渾泉)이 되고 상건하(桑乾河)가 되는데, 안문(雁門), 운중(雲中) 여러 물이 다 모여 통주(通州)에 이르러 백하(白河)에 미친다. 혼하(渾河), 패수(灞水)는 그 지류이다.”
※노구교와 노구교 사건 : 융딩 강[永定河]에 세워진 돌다리로 1189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192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 266m, 너비 9m이다. 홍수로 인하여 훼손되었다가 1698년에 복구되었다. 281개의 돌난간과 기둥이 있으며, 기둥 위에는 사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예로부터 베이징의 중요한 나루터였으며, 이탈리아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는 루거우차오를 세계 최고의 훌륭한 다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다리에서 1937년 7월 7일 전면적인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는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1987년 이곳에 중일전쟁기념관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둥 위에 조각된 사자는 모양이 다양하고 살아 있는 듯하며 변화가 많아, '루거우차오 위의 돌사자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속담이 전해진다. 조사에 의하면 사자의 수는 총 281개이며, 그밖의 작은 사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485여 개에 이른다.
당시 여기에 장쉐량 휘하 쑹저위안[宋哲元]이 이끄는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해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에 대열에 복귀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右岸)으로 이동하였다.
최초의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모략에서 나온 것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월 11일에는 중국측의 양보로 현지협정(現地協定)을 맺어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중국침략의 기회로 삼아 군대를 증파(增派)하여 28일 베이징 ·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12월 13일 난징대학살을 자행하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중국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중국 내 항일(抗日) 투쟁 의식이 높아졌다.
■금어지(金魚池)
○금어지는 천단(天壇) 서쪽에 있다. 못 물이 자못 넓고, 어족(魚族)이 유만부동(類萬不同)이며 각색이 구비되어 있다. 매양 봄이 화창하고 경색(景色)이 밝을 때면 팔팔하게 헤엄치고 뛰어노는데, 오색이 반짝거리며 물결이 눈부시게 비친다. 그 가는 것은 손가락만 하고 그 큰 것은 부채만하며, 두서너 자에 이르는 것도 있고 혹은 한 마리의 고기가 오색을 겸한 놈도 있다.
수역(首譯)의 온돌 안에서 유리 어항에 서너 마리를 담아 상탁(床卓) 사이에 놓아 둔 것을 보겠는데 또한 기이한 광경이다. 봄얼음이 아직 녹지 않은 때라, 나는 아직 못의 고기가 뛰노는 것을 보지 못하였지마는 수역의 말을 듣고 거두어 ‘금어지기’를 짓는다.
■유리창기(琉璃廠記)
○유리창(琉璃廠)은 조양문(朝陽門) 밖에 있다. 시루(市樓)가 두 줄로 늘어서 있어 금벽(金碧)이 영롱한데, 이것이 천하의 진귀한 보배가 모여드는 곳이다. 주기(珠璣 여러 가지 모양의 구슬들), 패경(貝鏡 조개로 장식한 거울)이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여, 마치 처음으로 파사(波斯 페르시아의 음역임)의 시장에 들어간 것 같아 일일이 형용할 수가 없으며, 그중의 반룡보경(盤龍寶鏡 용이 도사린 모양의 거울)은 그 높이가 3, 4자나 된다. 백옥으로 만든 장자(障子)는 청강석(靑矼石), 밀화(蜜花), 홍산호(紅珊瑚) 등으로 조각하였는데, 기이한 솜씨로 화초와 산수의 모양을 이루어 놓았으며, 크기가 1칸이나 된다.
자명종(自鳴鐘)은 그 생김새가 하나같지 않아서 큰 것은 북만 하고, 작은 것은 말[斗]만한데, 다 검붉은 구리[烏銅]와 푸른 옥[碧玉]으로 장식하였다. 석가산(石假山), 옥가산(玉假山), 목가산(木假山)은 빛깔이 모두 거무스름하며, 구슬과 자개를 박아 놓았는데 완연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요지경(瑤池鏡)은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그 기교(技巧)를 극도로 하였는데, 그 한두 가지를 취하여 엿본다면, 채각경사(綵閣瓊榭 곱고 아름다운 집과 정자), 기화벽수(奇花碧樹 기이한 꽃과 푸른 나무들), 인물과 새, 짐승들이 다 살아 있는 것 같고, 혹은 홍문의 잔치[鴻門之宴]와 적벽의 싸움[赤壁之戰],서원의 점잖은 모임[西園雅集]과 남궁의 큰잔치[南宮大宴] 등이 있어, 굴대를 따라 스스로 돌아서 마치 걸음을 옮기고 그림자가 변환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기이하다.
그 밖에 문방의 제구와 잠영(簪纓 비녀와 갓끈)의 진기함, 의탁(椅卓 의자와 탁자)의 묘함 등을 종일을 분분히 살펴보아도 두루 다 볼 수 없다. 같이 간 한 역관이 보석 2개를 집어 그 값을 물었더니 은 800냥이라 대답했다. 역관이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 감히 다른 물건을 더 묻지 못하고 달아났는데, 다른 물건도 값이 이것과 비등하다.
이런 까닭으로 조선 사람으로서 매매하는 자는 매우 드물며, 산다는 것도 아주 자질구레한 값싸고 별로 소용이 안 되는 것들뿐이다. 그러므로, 유리창 사람들이 이르기를 물건의 천하고 값싼 것을 가리켜서 ‘조선 사람이나 살 물건’이라고 하니 심하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모름이여!
지금 호인의 풍속이 조의(朝衣 조복)는 목에 염주를 걸므로 조주(朝珠)라고 한다. 각로(閣老) 우민중(于敏中)의 집을 적몰할 적에 조주 4개의 값은 3만 7000냥이었다고 한다.
■책사기(冊肆記)
○책사(冊肆 책방)는 정양문 밖에 있는데, 한 군데에 그치지 아니한다. 그 책을 쌓아 두는 방법은 방 2, 30칸을 마련하고 매칸 사면 벽에 간가(間架)를 만들어 층층이 정연히 배열하여 쌓아두고, 매 벌에 쪽지를 붙여 아무 책이라고 해 놓았는데, 집안에 차고 넘쳐 그 수량을 헤아릴 수가 없지만, 앞 채에 한 큰 탁자를 놓고 탁자 위에 10여 권의 책상자가 놓여 있는데 그것이 곧 책 이름 목록이다.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 아무 책을 사고자 할 때에는 한번 손을 들어 얼른 꺼내다 주고 또 갖다 꽂게 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그 목록을 본즉 큰 질[大帙]로는 《사고전서(四庫全書)》ㆍ《문장대성(文章大成)》ㆍ《책부원귀(冊府元龜)》ㆍ《연감류함(淵鑑類函)》ㆍ《패문운부(佩文韻府)》ㆍ《전사(全史)》ㆍ《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ㆍ《강희자전(康煕字典)》ㆍ《만국회통(萬國會通)》ㆍ《대장경(大藏經)》 등이며, 그 밖에 경사(經史), 제자백가(諸子百家), 의약(醫藥), 복서(卜筮 점에 관한 것), 나무심기[種樹]에 관한 것, 《패관잡기(稗官雜記)》, 사대 기서(四大奇書),《연의(演義)》 등의 책들이 또한 매우 많을 뿐 아니라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대개 중국에는 크고 작은 자판(字板)이 있어 잠깐 동안에 박아 내므로 문인(文人)ㆍ사객(詞客)들의 짤막한 사구(詞句)들도 모두 찍어 내어 문집을 이루니 다행스러운 문명의 징조라 하겠지만, 이단(異端)과 패관(稗官)의 음담패설 등 정치와 교화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이 갈수록 더욱 성하여 크게 성도(聖道)가 거칠어지게 되니, 어찌 그 글을 불살라 버리고 그 사람을 잘 교화시킬 수 있겠는가?
■환술잡희(幻術雜戱)
○환술(마술)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능견난사(能見難思)라 일컫는데, 그 잡술이 무릇 수십 종이 된다. 그 하나는, 손에 5, 6개의 구리고리[銅環]를 쥐었는데, 고리는 정원형(正圓形)으로 이어진 틈이 없는 것을 손가락에 꿰어들고 한참 돌리다가 서로 꿰어 이은 고리를 만들었다가 그것을 돌리면 곧 갈라져 각 개의 고리가 된다. 혹은 한 사람이 한 고리를 가지고 마주 대하여 던져 주면 문득 서로 합쳐진다.
또 그 하나는, 달걀 크기만한 돌탄알[石彈子]을 두 사람이 각각 흑백 한 알씩 가지고 입에 넣었다가 아래로 토해 내고, 또 혹은 그것이 손 안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뒤통수에서 튀어나오기도 하며, 혹은 검은 것을 삼킨 자가 입에서 흰 것이 나오기도 하고, 흰 것을 삼킨 자의 입에서 검은 것을 토해 내기도 하여, 그 삼키고 토하는 모양이 신출귀몰하다.
또 그 하나는, 길이가 두어 자나 되는 쇠칼의 날을 입에 넣고 천천히 목구멍을 찔러 그날의 밑동이 거의 다 들어가자, 문득 땅에 엎드리어 눈을 감고 숨이 끊기는 모양을 짓다가 입을 벌리고 그 칼날을 뽑아내는데, 침이 묻고 얼룩얼룩 핏자국이 있다.
또 하나는, 긴 담뱃대를 목구멍으로 빨아들여 그 끝까지 삼키는데, 혹은 둘 혹은 셋을 한꺼번에 삼킨다. 또 대를 쪼개어 두 줄기를 만들어 그 길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 것을 콧구멍에다 넣는데, 힘을 써서 꽂아 넣으면서 눈을 껌벅거리며 입을 벌리고 삼키는 시늉을 하고 또 오랫동안 참는 것같이 하면서 다 넣고 그 끝만 조금 보일 뿐이더니, 그 긴 것을 다 끌어내는데, 모두 침이 묻었다. 이미 다 나온 뒤에 땅에 침을 뱉으니 피가 섞인 침도 있었다.
또 하나는, 빈 보자기 하나를 땅에다 덮어놓고 몸을 굴려 빙빙 돌면서 중얼중얼 입속말을 한참 동안 하다가 그 보자기를 치우니, 2개의 그림을 그린 크고 둥그런 나무접시가 있는데, 그 하나에는 대추를 담고 또 하나에는 화채(花菜) 여러 가지가 담기어 있다. 또 보자기를 전과 같이 덮으니 물을 담은 큰 동이가 하나 있어, 그 안에서 출렁출렁 물이 나오는데 조금도 기울어져 엎질러지지 않고, 부평초, 꽃잎 등이 그 가운데 떠 있으며, 금붕어가 나와 논다.
또 그 하나는, 백분지(白粉紙)를 찢어 잘라서 백십 조각을 내어 입에다 넣고 목이 멘 시늉을 하더니, 그 한쪽 끝이 종이 오라기[紙條]를 찾아 끌어내니 종이 오라기가 서로 이어져서 한 조각도 풀로 붙인 흔적도 없다. 인하여, 두 손으로 번갈아 끌어내는데, 마치 잠사(蠶糸)가 나오는 것 같은 것이 몇 장(丈)이 되는지 모르겠으며, 병아리 두 마리가 종이 속에서 날아 나오니 구경꾼들은 모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또 하나는, 가는 노끈 하나를 당기어 칼을 빼어 잘라서 서너 토막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주어(呪語)를 하며 손으로 어루만지니, 노끈은 다시 한 가닥으로 서로 이어지는데, 붙여진 흔적이 없다.
또 그 하나는, 기둥나무 하나를 뜰에 세워 놓고, 그 손을 뒤로 하여 나무를 지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뒤에서 튼튼히 풀어지지 않게 비끄러매게 하고 손을 묶은 곳에 보자기를 씌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기니, 손에 묶은 것은 비록 저절로 풀어지지 않았으나 세운 기둥은 문득 묶은 손 밖에 있다.
또 하나는, 장대를 세우고 접시를 흔들며 술을 담은 병을 기울여 술을 따른 뒤에 다 따르면 다시 기울여서 마시곤 하는데, 빈 병에서 술이 그치지 않고 줄줄 나온다.
■괴물청(怪物廳)
○괴(怪)란 상리(常理 당연한 이치)와 다른 것을 이름이다. 지금 여기에 천하의 괴물을 모았으되, 이 모든 것을 다 기르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는데, 몸집이 작고 키도 작으며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것이 비틀거리며 다니는데, 입에는 담뱃대를 물고 무엇인가 지껄여 댄다. 그러나 그 음양의 일(남녀 관계)은 보통 사람과 같다고 하는데 키는 4, 5세의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난쟁이가 있어 배가 통통하고 볼 밑에 북만한 혹을 달고 다닌다.
■연희기(演戱記)
○연희청(演戱廳)은 큰 3층집으로 위층은 난간으로 두르고 아래층은 긴 가름대를 깔고 고기비늘과 같이 교착(交錯)하여 배열하였다. 가운데 층에는 희대(戱臺 무대)를 설치하고 그 뒤에 만막(慢幕)을 쳤는데, 그 만막 안에는 각종 제구를 비치하고 있다. 놀이를 벌일 때마다 만막으로 드나드는데, 한 놀이가 끝나면 또 한 놀이가 계속해서 나온다.
밖에는 작은 문 하나를 만들어서 놀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문에 들어오면 돈을 거두는데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은 위층에 앉고, 돈을 적게 내는 사람은 아래층에 앉는데, 자리를 다투는 폐단이 하나도 없게 되어 있다. 앉은 사람이 혹시 일어나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앉는 자리는 고정되어 있으며, 아래위 층에 앉을 자리가 다 차서 빈 데가 없으면 문지기가 사람을 집안으로 더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질서가 정연하며 또한 떠들고 붐비는 폐단이 없다. 구경꾼들은 하루 종일 놀이 구경을 하면서 앉아서 과자나 사탕이나 술안주 따위를 먹는다. 중국 사람들은 비록 희장(戱場)에서라도 역시 규모가 있는데 이것은 배울 만한 것이다. 그 연희 이름(제목)에는, 진시황의 아방궁연(阿房宮宴), 초 패왕(楚霸王)의 홍문연(鴻門宴), 한 고조의 남궁연(南宮宴), 위 무제(魏武帝)의 동작연(銅雀宴), 진 무제(晉武帝)의 운룡연(雲龍宴), 수 양제(隋煬帝)의 서원행락(西苑行樂), 당 태종의 칠덕무(七德舞), 송 태조의 청류관전(淸流關戰),금 태조의 용왕묘전(龍王廟戰),원 세조의 혼하전(渾河戰),명 태조의 금릉전(金陵戰), 그 밖에 거록대전(鉅鹿大戰), 적벽대전(赤壁大戰), 서원아집(西園雅集), 기정고사(旗亭故事), 왕 소군(王昭君)의 출새행(出塞行),오손공주(烏孫公主)의 비파행(琵琶行) 등등,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대저, 연희의 묘처는 오로지 달리고 쫓고 돌고 할 즈음과, 말을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있는데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끔 우레같이 소리를 지르며 웃건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마치 진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같이 앉아 영문을 모른다. 내 마음속에 한 꾀가 생겨 그동안 친해 놓은 이웃 상인 장청운(張靑雲)을 시켜 일일이 그 말을 대신하여 전하게 하고, 또한 역관을 시켜 장청운의 말을 번역하게 하여 듣는 한편, 그 연극 이름을 쓴 패를 보고 그 사적을 상상하면서 보니, 조금은 짐작하여 알 만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빼버려가면서 밤새도록 구경하다가 파하였다.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
○살피건대, 악라사란 또한 이름을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 하여 흑룡강 북쪽에 있으며, 중국과 통상하지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는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다 교체(交替)하는데, 그들은 깊은 눈 높은 코에 천성이 모질고 사납다. ...악라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서 귀국에 가려면 거리가 몇 리나 되는가?”
“2만여 리가 된다.”
“땅의 넓이가 몇 리나 되느냐?”
“청 나라 셋이 우리나라 하나만하다.”
하였다. 대개 땅이 북해에 닿았고 넓이가 매우 커서, 청 나라는 중원이지만 악라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몽고관기(蒙古館記)
○몽고관은 옥하교(玉河橋)의 곁에 있는데, 한 곳에 그치지 않는다. 관 안에 취막(毳幕 모직으로 만든 몽고족의 천막)의 궁륭형의 집[穹廬]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다. 바닥에도 역시 두꺼운 모직을 깔고, 남쪽으로 향한 출입문 위의 덮개 한가운데를 여닫아서 햇볕을 받는다. 남녀가 섞이어 거처하며, 그 사람들은 여러 오랑캐 가운데서도 더욱 사납고 추하고 무례하며, 면목이 밉살스럽다. 말을 달려 돌진하기를 잘하며, 거처하는 궁실(宮室)이 없고, 떠나갈 때에는 취막을 걷어서 낙타에 싣고 하루에 3, 4백 리를 달린다.
음산(陰山)이나 대사막이거나, 그들이 머물러 묵는 곳은 반드시 막을 치고 사냥을 하여 먹을 거리로 삼는다. 명 나라 때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일컬었으며 그 땅이 북쪽으로는 사막까지 닿고 48부로 나뉘었는데,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렵고, 다만 부처만을 정성껏 힘써 받들며 생사를 거기에 맡기고 있기 때문에 그 풍속을 인연으로 하여 이를 회유(懷柔)한다. 승도는 각 절에 나누어 거처하며 원당(願堂)에 사환(仕宦)하는 자는 모두, 남자는 황녀(皇女)에게 장가들고 여자는 친왕(親王)에게 시집가는데, 총애하여 높은 지위를 주며 귀천을 물론하고 다 누런 옷을 입으니, 누런 옷이란 것은 황제의 옷 빛깔이다. 건륭(乾隆) 때에 황화요(黃花謠)가 성행하였으므로 황제가 더욱 몽고를 무마하였다.
■탐라 표해록(耽羅漂海錄)
○탐라인(耽羅人 제주도 사람) 출신인 김광현(金光顯) 등 일곱 사람이 무자년(1828년) 9월 7일에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추자도(楸子島)로 향하였다가 10일에 큰바람을 만나 바다 파도 가운데서 마치 키로 까불듯이 흔들리며 출몰(出沒)하여 위험한 괴로움을 모두 맛보았다. 그러다가 무릇 9일 만에 비로소 남해 보타산(普陀山)에 닿아 정해현(定海縣)에 머무르다가 8일 만에 다시 배를 타고, 진해(鎭海), 영파(寧波), 자활(慈豁), 여요(餘姚), 상우(上虞), 산음(山陰), 소산(蕭山)을 거쳐 전당(錢塘)에 이르러 47일 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배를 타고 석문(石門), 가흥(嘉興), 오강(吳江), 오현(吳縣), 무석(無錫), 상주(常州), 단양(丹陽), 단도(丹徒), 양주(楊州), 고우(高郵), 보응(寶應), 회안(淮安), 청강(淸江)을 거쳐 12월 16일에 육지에 내렸는데, 무릇 수로로 2970리이다. 17일에 다시 육로로 산동(山東), 도원(桃源), 홍화(洪花), 난산(蘭山), 이가장(李家莊), 판성(板城), 몽음(蒙陰), 신태(新泰), 태안(泰安), 제하(濟河), 우성(禹城), 평원(平原), 덕주(德州), 경주(景州), 교하(交河), 하간(河間), 신웅(新雄), 탁주(涿州), 양현(良縣)을 거쳐 7일에 황성(皇城)에 도착하였는데, 무릇 육로로 2000리였다.
표류인의 말은 이러했다.
“9일 동안 바다 가운데서 출몰할 제, 풍랑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으며, 긴 고래, 큰 고기에게 배를 삼키우는 재난을 당할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며, 수륙으로 지나온 길이 합하여 5000리, 그 사이의 산천, 누대(樓臺), 인물, 요속(謠俗 세상 풍속) 등은 무식하여 적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다만, 그 큰 것만을 뽑아서 말한다면, 보타산(普陀山 : 저장성 저우산 군도 소재)은 바다 가운데의 명산으로 절이 정묘하고 아름다우며, 화초가 번화하여 선경이라 이를 만하고, 전당(錢塘)의 경치는 천하에 다시 없으니 지금 보는 북경도 전당에 비교가 안된다. 호수가 거울 같고, 이십사교(二十四橋)가 각각 홍예(虹霓)를 만들어 비단돛의 그림 같은 배가 그 가운데를 드나든다. 채각(彩閣), 단루(丹樓)들이 1층, 2층, 3층, 4층, 5층에 이르는 것들이 호수 위에 즐비하다. 겨울의 따뜻하기가 봄 같고 꽃과 나무들이 섞이어 비치며,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쌀밥에 생선국, 비단옷에 구슬 패물을 차고 있다.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모두들 다투어 끌고 집으로 돌아가 각각 술과 음식을 차려 노고를 위문하고 노자를 후하게 주며, 혹은 풍악을 베푼 누각에서 취하기도 하고, 혹은 주기(珠璣 여러 가지 모양의 구슬들)가 늘어진 저자에서 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7일 동안이나 하였는데, 연기 낀 버들과 그림 같은 다리, 바람에 흔들리는 주렴과 푸른 휘장, 이런 것이 몇만 호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의식의 풍족함, 풍속의 돈후함, 풍경의 아름다움이 천하의 낙원이었다.”
내가 나그네 몸으로 등불 밑에서 그 겪은 바를 듣고, 그의 말을 모아 《표해록(漂海錄)》을 지었다.
■강남 누선기(江南樓船記)
○통주하(通州河) 가운데에 돛대들이 10여 리나 빽빽이 늘어서 있는 것 또한 장관이다. 그 가운데에 강남 누선이 사이사이 정박해 있는 것은 마치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보고는 기이함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드디어 배에 올라가 보니, 그 모양새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다. 2층으로 만들어 아래층에는 물건을 싣고, 위층에는 문이 마련되어 그 안에 들어가니 사면에 창문이 열렸는데 창에는 모두 유리를 끼웠으며, 그 안에는 의탁, 기구, 필상(筆床), 다로(茶爐 차를 달이는 화로), 명화, 법서(法書)들이 놓여 있고, 판자벽과 처마, 기둥에는 모두 붉은 칠을 하였는데 그것이 물에 비치어 눈이 부시다. 또, 안방, 부엌, 찬장[饌龕]이 있어 간살이 정연하다.
여자들이 아름다우며 모두 비단옷에 수놓은 신을 신고 있는데, 창을 열고 바깥을 살짝 내다보며 사람을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부가범택(浮家泛宅)이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여(范蠡)가 오호(五湖)에 떴던 것도 생각하면 꼭 이와 같았을 것이리라. 지금 강남 상인들이 좋은 누각에 오래 살면서 쌀밥에 생선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미인을 곁에 두고 호수와 바다에서 재미있게 놀면서 한평생을 보내며, 한 척의 그림배 이외에 다시 ‘공명, 부귀가 이까짓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니 어찌 이것이 물 위의 신선이 아니겠는가?”
■제국(諸國)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48부(部)의 왕이 해마다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나라 풍속이 귀천이 없이 다 누런 옷을 입는데 황제의 의복 빛깔과 같다. 건륭(乾隆)이 황화요(黃花謠)를 듣고부터는 더욱 견제하고 있다 한다.
회자(回子)는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하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 강희(康煕) 때에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풀어 토벌하여 그 왕을 사로잡아 서울로 데려오자 그 딸을 후궁으로 바치었다. 그곳 사람들은 검은 얼굴에 눈이 깊고 구레나룻이 더부룩하다. 옷과 모자는 청인과 같고, 여자는 알롱달롱한 옷을 입으며 머리는 땋아서 늘어뜨린다. 도광(道光) 때에 또 반역하였으므로 양우춘(楊遇春)을 보내어 토벌, 평정하였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섬라(暹羅 태국)는 적미유종국(赤眉遺種國)이라고도 하며, 점성(占城 참파 Champa, 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인도차이나 남동 기슭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의 극남(極南) 쪽에 있다. 8000리를 항해하여 광동(廣東)에 이르러 육지에 내려, 거기서 다시 7000리를 가 연경에 이른다. 5년에 한 번 조공을 한다. 그 나라 사람은 모두 박박 깍은 머리에 몸은 작고 얼굴은 못생겼다. 강남이라 춥지가 않아서 겨울에도 홑옷을 입는다. 공물은 용연향(龍涎香 향의 이름), 침향(沈香), 백단향(白檀香), 강진향(降眞香), 금강찬(金剛鑽), 빙편(氷片), 장뇌(獐腦), 대풍자(大楓子), 두관(豆蒄 약용 식물), 필발(蓽撥), 계피(桂皮), 취조가죽[翠鳥皮], 공작 꽁지, 상아(象牙), 무소뿔[犀角], 서양담요[西洋毯], 홍포(紅布), 오목(烏木),소목(蘇木) 등등이다.
...안남(安南)은 옛 남교(南交)의 땅이다. 진(秦)이 상군(象郡)을 두었고, 한(漢)이 교지(交趾)를 두었으며, 연경에서 1만 1100여 리 떨어져 있다. 역대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계속되면서 서로 이어왔다. 건륭(乾隆) 때에 광남(廣南) 사람 완혜(阮惠)가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는데, 드디어 안남왕에 봉하였다.
진랍(眞臘 캄보디아 지방)은 땅이 사방 7000여 리인데, 점성(占城) 남쪽에 있다. 국왕이 사흘에 한 번 조회를 보는데 그때에는 오향칠보상(五香七寶床) 위에 앉고 보장(寶帳)을 치며, 조하길패(朝霞吉貝)를 입는데 허리와 배를 감아 배 아래로 늘어뜨려 정강이에 이르게 한다. 머리에 금보화관(金寶花冠)을 쓰고 몸에는 진주 영락을 걸치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귀에는 금귀고리를 하고 있다. 그 신하가 왕에게 조회드릴 때에는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섯 번 부르며, 계단에 오르면 꿇어앉아 두 손으로 어깨를 끌어안고 왕을 에워싸고 둘러앉아 정사를 의논한다.
국성(國城)은 70리, 전우(殿宇)는 30여 곳인데 자못 장엄 화려하다. 풍속이 화려하고 사치함을 숭상하며, 농산물이 풍요하다. 남녀가 다 머리를 깎고, 여자가 10살이 되면 곧 시집을 간다. 중국 사람들은 ‘부귀진랍국(富貴眞臘國)’이라 일컫는다.
농내국(農耐國)은 안남의 부속국이다. 그 군장(君長) 완복영(阮福映)이 안남을 쳐서 멸망시키고 표를 올려서 새로 봉하여 주기를 청하되, 남월(南越)이라는 이름으로 해 주기를 원하였다. 부신(部臣)들이 논박한 끝에 월(越) 자를 위에다 놓아서 월남국왕(越南國王)으로 하여 봉하였다.
유구국(琉球國)은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 우리나라의 탐라(耽羅 제주도)와 가장 가까우며, 나라 안에 보물이 많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유구의 태자가 탐라에 표착(漂著)하였는데, 탐라 사람이 그 보화를 탐내어 물에 빠뜨려 죽였다 한다. 그래서 탐라 사람이 만약에 유구에 표착하면 반드시 죽였으므로 탐라의 표류인은 반드시 다른 고을 사람으로 일컬어 죽음을 면하기를 꾀하였다.
흑진국(黑眞國)은 영고탑(寧古塔) 동쪽 수천 리 얼음바다 밖에 있다. 바닷물이 5년에 한번 어는데 서로 건너다니지 못한다. 그 나라 사람은 온몸에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다만 머리와 얼굴만 내놓는데, 고수머리가 양과 같으며 물고기나 짐승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건륭(乾隆) 때에 흑진인이 홀연히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왔으므로 건륭 임금이 불러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물건을 그 앞에 벌여 놓고 그것들 중 가지고 싶은 것을 살펴 보았으나 끝내 원하는 것이 없었지만 한 여자를 보더니 기뻐하며 다가가서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총명한 여자를 골라 짝지어 주고 또 영리한 사람 5명으로 하여금 그를 호위하게 하여서 그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오곡(五穀)의 씨앗과 농구를 주어 농사를 가르쳐 주었더니, 5년 후에 그 여자와 함께 다시 얼음바다를 건너서 왔는데, 사은의 표시로 주먹만한 큰 구슬과 길이가 1장(丈)이 넘는 몇 장의 표범 가죽을 가지고 와서 바치었다.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군장(君長)이 없다. 사람들은 키가 3장이며, 더러 1장 남짓한 작은 사람도 있다. 오직 새가 짐승의 사냥을 일삼고 생선과 자라를 날로 먹으며, 구슬과 조개가 바다에 넘치는 그 광채의 기괴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
부제국(浮提國)은 바다 밖에 있는데 그곳 사람은 모두 날아다니는 신선으로 천하에 노닐기를 좋아한다. 그 어느 곳에든 이르면 능히 그 지방 말을 알며 본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으면 단숨에 갈 수 있다. 만력(萬曆) 말엽 어사(御史) 섭영성(葉永盛)이 강우(江右 강서성 지방)를 안찰할 때, 한 무리의 광객(狂客)이 있어 능히 황백사(黃白事)를 말하며 술을 몹시 마시고 즐겨 놀며, 저자에서 사는 물건들이 매우 사치하여 구슬과 아름다운 비단을 많이 취하는데 값보다도 많은 돈을 치른다.
3. 심전고 제3권
■응구만록(應求漫錄)
○관에 머물러 있는 40일 동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도 없고 해서 중국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놀면서 경서(經書)를 논하고 시를 짓고 하니, 처음 만나는 사이가 옛 친구 같았다. 옛말에 이르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기질이 같은 사람은 서로 찾아 모인다.[同聲相應 同氣相求]’ 하였으니, 그것들을 거두어 ‘응구록(應求錄)’을 만든다.
웅앙벽(熊昂碧)의 자는 금배(今裴), 호는 운객(雲客) 또는 노유(露蕤)라 한다. 강소성(江蘇省) 송강부(松江府) 금산현(金山縣)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술을 잘 마시며, 담론을 좋아한다. 몸이 헌칠하고 강개(慷慨)하여 호사(豪士)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붙지 못하고, 가재를 팔아 날랜 노새를 사서 남쪽으로 여산(廬山), 형악(衡嶽)에 노닐고, 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을 나가 새외(塞外)의 산천을 두루 구경하였으며, 돌아와 저술한 《운객집(雲客集)》이 있어 나에게 주었다.
■춘수청담(春樹淸譚)
○춘수재는 묘교(卯橋)의 장(莊)이다. 주인 묘교와 설문(雪門), 효봉(曉峯), 역의(亦宜), 원보(元甫), 구산(九山), 난설(蘭雪), 다심(茶心), 운객(雲客)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여러 날을 함께 놀면서 그 필담한 남은 종이를 주워모아 춘수청담을 짓는다.
...이날은 일찍부터 늦게까지 술, 음식, 과일과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는데, 한 그릇을 다 먹으면 또 한 그릇이 나왔다. 양을 통째로 삶은 것, 거위를 지진 것, 볶은 달걀, 돼지고깃국, 돼지고기, 잡채, 죽순 찐 것, 여지(荔芰), 용안(龍眼), 귤, 사과, 호두, 찐 대추, 낙화생, 사탕, 떡 등등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맨 나중에 밥 한 보시기가 나왔는데 모든 것이 다 정결하고 산뜻하였으나 밥은 고두밥[酒米飯] 같은 것이 우리나라 밥맛보다 썩 못하였다. 한 식탁 위에 함께 차려 놓고 열 사람이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먹었다. 매 사람 앞에는 반드시 한 쌍의 젓가락과 1개의 술잔이 놓여 있는데 술잔은 매우 작아서 우리나라 종지의 절반 만하며, 술병을 항상 식탁 위에 놓아 두고 비면 또 갖다 놓는다. 술맛은 향기롭고 시원하였다. 차는 온돌 안에 화로를 놓고 큰 주전자를 그 위에 얹어 놓고 자주자주 그림 그린 찻종으로 기울여 마시는데, 참으로 이른바 항다반(恒茶飯)이었다. 주인이 말하기를,
“술과 과일은 모두 강남 산품이라, 귀국과 조금 다르니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안주도 없이 대접하게 되니 간략함을 용서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미 덕(德)으로 배가 부른데, 또한 술로 취했으니 지극한 후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고, 또 내가 말하기를,
“일찍이 강남에는 향저육(香猪肉)이 있어 맛이 썩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그러합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강남에서 오는 것으로 생으로 절인 돼지고기가 있어 맛이 매우 좋고,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강남 고향 집에는 마침 절인 고기가 있으니, 선생께서 만일 즐겨 잡수신다면 초사흗날 사람을 보내어 그릇을 가지고 오게 하시면 좋은 밤에 지져서 잡숫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일찍이 절인 돼지고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우연히 말씀드린 것인데, 어찌 감히 음식으로 사람에게 누를 끼치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다면 생으로 절인 것을 보내 주시겠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찌 누를 끼치는 일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북저(北猪)는 남저만큼 맛이 좋지 않습니다.”
하였다.
■유서관기(楡西館記)
○유서관은 순성문(順城門) 밖에 있는 소천(小泉)의 별장이다. 소천(小泉), 용재(容齋), 운객(雲客), 중봉(中峯), 백암(白菴), 소백(少白)이 모이기를 약속하고, 나는 운루(雲?)와 함께 가서 하루 종일 놀다가 돌아왔다. 거기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수창(酬唱)하였는데, 그 필담하고 남긴 종이를 거두어 기록하여 ‘유서관기’를 짓는다.
이중봉(李中峯)이 묻기를,
“귀국은 예부터 기자(箕子)의 속봉(屬封)이었는데, 기자가 살던 은(殷) 나라의 수도 하남(河南)은 내 고향 낙양(洛陽)에서 고작 300리를 떨어져 있지요. 나는 낙양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르기를,
만리 밖에서 마음속으로 기자묘를 사모하였으니 / 萬里心儀箕子墓
연원을 따져 보면 향친일세 / 淵源叙到是鄕親
하였는데, 은 나라 의복 제도가 흰빛을 숭상하였으니, 내가 어찌 은 나라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서로 모이니 선민(先民)을 우러러보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패성(浿城 평양)에 기자묘가 있으며, 외성(外城)에 또 옛 궁전의 유허와 정전(井田)의 유지가 있습니다. 백마(白馬)가 동쪽으로 와서 팔조(八條)로써 백성을 가르쳤으므로, 사민(士民)이 예의가 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고 미쁘며 음란하지 않지요. 이는 은사(殷師 기자)의 교화이지요.”
하였더니, 말하기를,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하였다.
■난설시감(蘭雪詩龕)
○난설은 오 중서(吳中書) 숭량(嵩梁)의 호이다. 나와 정묘교(丁卯橋), 웅운객(熊雲客)이 더불어 시감(詩龕 시를 쓰는 서재)에 모여서 놀았다. 시감이 매우 정치(精緻)하여 화초, 서화, 필상(筆床), 다로(茶爐), 문방(文房)의 진기한 기물이 지극히 말쑥하고 깨끗하였다. 그 담화를 주워 모아 ‘난설시감’이라 이름한다.
내가 묻기를,
“선생께서는 지금 무슨 관직에 계시며, 슬하에 자손은 많으신지요?”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나는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거쳐 내각 중서(內閣中書)로 옮겨 지금은 옥첩관 찬수관(玉牒館纂修官)에 충원되었는데, 우서(優叙 특별 승진)되어 자사(刺史)로 나갈 것입니다. 아들은 사내가 넷으로 맏이 17세를 비롯해서 둘째는 6세, 셋째 4세, 제일 어린 것은 수개월이 못 되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나에게 묻기를,
“귀국에 금강산이 있어 제일 가는 명승으로 삼는데, 그 풍경을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명사(明史)》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의 시에,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 願生高麗國
금강산에 한번 보고 싶네 / 一見金剛山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그 풍경을 붓이나 혀로써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오흥(吳興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의 산수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일천 바위가 빼어남을 겨루고, 일만 골짜기가 흐름을 다툰다.’ 하였는데, 이 글귀로써 갖다 대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가 말하였다.
“남금릉(南金陵)의 시를 보았더니, 그 속에 이 산에도 구룡 폭포(九龍瀑布), 오로봉(五老峯), 향로봉(香爐峯) 등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이름이 양방(楊邦)의 여산(廬山)과 서로 같습니다.”
“푸른 하늘에 금부용(金芙蓉)을 깎아 낸 듯하다는 오로봉(五老峯)을 선생께서는 일찍이 이미 가 노닌 적이 있으니 무엇을 그리 부러워합니까?”
“일찍이 꿈에서 한번 노닐었는데, 이튿날, 김추사(金秋史 김정희 : 1786-1856)가 그림을 부쳐 왔는데 사집(私集) 속에 시로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옥하간첩(玉河簡帖)
○옥하관에 있으면서 중국의 여러 군자들과 더불어 호저(縞紵)의 우의가 있어 서로 오고감이 자못 많았다. 그 사이의 부치고 회답한 짤막한 편지들을 거두어 옥하간첩(玉河簡帖)을 삼는다.
○묘교(卯橋)에게 부치는 글 : 봄에 황전(皇甸 황성(皇城)지역)에 들어오니 계절의 경물이 더욱 빛나온데, 한 해를 지나고 보니 돌아감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이 동쪽으로 흐름과 같사옵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는 다시 찾아뵈옵고 청아한 말씀을 조용히 들으면 거의 나그네 회포를 풀어 보겠사오나, 숙직에 당하지 않는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난설옹(蘭雪翁)은 해내의 시종(詩宗)입니다. 다시 한번 자리를 같이하여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해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구산(九山) 및 여러 군자의 빛나는 선물[瓊琚] 주심을 오로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인형(仁兄)의 시집은 눈이 개기를 기다려 받들어 가지고 돌아가겠사오니, 잠시 부쳐 주시어 먼 외지의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드리 구슬[拱璧]처럼 완상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우러러 바라옵니다.
숙우 중한(叔雨中翰) 각하. 경제(庚弟 동갑 아우) 심전(心田) 올림.
○묘교(卯橋)에 답하는 글
등잔 밑에서 가르침을 받잡고 푸른 눈[靑眼]이 문득 열리었습니다. 소생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천하의 좋은 산수를 구경하기를 원하고, 천하의 좋은 책들을 읽기를 원하며, 천하의 훌륭한 인물과 사귀기를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금 인형께서 독서하고 벗을 구하는 외에는 좋아하는 것이 없으시니 우리는 어찌 동지가 아니오리까? 동갑(同甲), 동지인 데다가 다행하게도 또 한 세상에서 사니 우도(友道)의 무거움을 하루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영윤(令胤)은 남녘으로 초국(楚國)에 노닐며 아직 슬하에 돌아오지 않아 난곡(鸞鵠)의 풍모를 보지 못함이 한스럽소이다. 제 자식이 연경에 들어와 만약에 공리(孔李)의 의를 닦는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을 더하는 것입니다. 영초(靈樵)에게 회답할 것과 지산(芝山)에게 치의(致意)할 것은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갖가지 꽃다운 선물들을 받자와 매우 감사하오며, 그중에서도 《학부통편(學部通編)》은 더욱 보이신 뜻이 정성스러우신 데에 감사합니다. 돌아가서 해외에 전하여 우리나라 선비로 하여금 주자학과 육상산의 학문의 다름을 꿰뚫어 알게 하면 이는 크게 오도(吾道)의 빛이 되겠습니다. 내일 길을 떠나려 하면서 글월을 올리려 하오니 섭섭합니다. 별사의 행차에 마땅히 다시 또 인사를 드리기로 하옵고 잠깐 이로써 그치옵니다.
심전(心田) 경제(庚弟) 박사호(朴思浩) 절하고 올림.
○정 사인(丁舍人)에게 주는 글 : 이하는 귀국 후에 오간 것이다.
사호(思浩)는 감히 묘교(卯橋) 족하에게 삼가 아뢰옵니다. 저는 좁은 나라의 한낱 서생[措大]일 뿐이옵니다. 미천한 집에서 생장하여, 앎이란 느릅나무와 박달나무에 그치고, 매일 집을 지켜 절름발이[蹩躄者 재주 없는 사람]의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신을 따라 다행히도 급문(及門)의 소원을 이루게 되어 여러 번 고명하신 가르침을 얻었사오며, 하원(遐遠)한 사람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옛 친구같이 생각하시어 너무 지나친 추장을 아끼지 않으시니, 이것은 오직 상국의 교화가 널리 미치어 먼 곳의 백성을 따르게 함에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족하의 덕이 멀리 상격(常格)에서 벗어난 데 있사옵니다. 돌아보건대 무엇으로써 훈목(薰沐)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아름다운 군자여 종내 잊지 못하겠네.’라 한 것이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한번 제성(帝城)을 하직했는데 매우(梅雨)가 때를 알렸습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존체가 시절 따라 만강하시고, 밤낮으로 꽃벽돌에서 좋은 조치를 끝까지 펴시어 천하의 일을 담당하심을 적이 축하하오며, 하늘이 새로 은택을 내림에 인간의 경지가 적을 듯하니, 혹시 생각이 해외의 말계(末契 변변치 않은 친구)에게도 미치겠습니까? 외람되이 동갑으로, 또한 같은 시대에 살아서, 맹상군처럼 자기를 친애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문 노공(文潞公)의 모임을 얻고자 하오니 비록 보살펴 주심이 특별하심을 믿사오나, 아마도 외람되고 망녕됨을 스스로 드러냄을 덮기 어렵겠나이다. 현랑(賢郞)이 추정(趨庭)함에 진공(眞工)이 나날이 더하겠습니다. 두 몸이 서로 사귀어 그리워함이 마음속에 배가(倍加)되니 대개 또한 인정의 자별(自別)함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성념(盛念)해 주신 덕택으로 험난한 길을 잘 돌아왔으나 베풀어 주신 후의가 크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지금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생각이 아득하여 그 할 바를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별사의 길 떠날 기한이 임박하여 얼마 남지 않아 바쁘게 지은 시라 생각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연공(年貢)의 편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번의 이 소략을 범하여 황공만만입니다. 이에 변변치 못한 정성을 다하여 먼저 문안 여쭙니다. 더욱 자중하시고 바람 편에나마 은혜로운 말씀 들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에 이어서 세 선생께 대한 후의(候儀 계절따라 보내는 선물)도 아울러 드리오니 귀소(貴所)에서 일일이 나누어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행이 돌아올 때에 작별 후의 소식을 알도록 답장을 보내 주십시오.
난설(蘭雪) 노인과 구산(九山) 여러 분께서도 요즈음 태평하십니까? 과거의 기일이 이미 지났사온데 기쁜 소식 간절히 바라오며, 요원지(姚元之) 선생의 예서(隷書)를 제가 매우 좋아하오니, 비옵건대 보내 주시겠다던 약속을 이루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운루는 귀국 후 산수 유람에 나서서 이번 문안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영초(靈樵)의 글월은 즉시 전하였으며, 이번의 유우(兪友) 편에 문후드렸다고 하니 받아 보셨을 듯합니다.
○장소천(蔣少泉)에게 주는 글
무이 부자(武夷夫子 주자(朱子))의 시에 이르기를,
나무 둘레를 천백 바퀴 돌아도 / 繞樹千百廻
글귀는 말없는 곳에 있다 / 句在無言處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족하를 우러르는 생각이 천백뿐만이 아닌즉 무언처(無言處)라는 한 구절로 단정하셔야 합니다. 묻자옵건대 요즈음 기거가 태평하시고 진공(眞工)이 날로 새로워지시는지요? 사호(思浩)는 다행히 탈 없이 산 넘고 물 건너 여행하느라고 바쁘며, 나머지야 무엇을 우러러 말씀드리리까? 부탁하신 서화는 아직 보내 드리지 못하여 송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다음 편에도 사람이 계속하여 있을 것이오니 용서하시고 기다려 주시옵소서. 변변치 못한 표물(表物)은 비록 한번의 웃음거리에도 차지 못하는 것이오나 혹시 천 리 밖에서 간곡한 정성을 받아 주시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묘군(卯君 상대방의 아우를 부르는 말)의 미호(美好)한 풍채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사옵니다. 여러 시채(侍彩)들도 더욱 평안하시고 학업에도 힘쓰고 계신지요? 패도(佩刀)를 보내드리오니 먼 데 사람의 뜻을 표시하게 하심이 어떠하옵니까? 부디 존체를 돌보시고, 도(道)로써 자위(自衛)하시기 바라오며 다시 자주 편지 주시어 해외에서 우러르는 계제(階梯)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웅운객(熊雲客)에게 주는 글
학(鶴)은 음(陰)에서 화답하고, 자석(磁石)이 바늘을 끄는 것을 물류(物類)가 성기(聲氣)에 감응하는 것이외다. 불평한 기운과 격앙한 소리가
천길 벼랑에서 옷을 털고 / 振衣千仭岡
만리 흐름에서 발을 씻도다 / 濯足萬里流
하기에 족한 것인데, 귀하가 과연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해외의 먼 종적으로 아득히 취미(臭味)가 서로 미치지 못할 것 같건만 우연히 성기(聲氣)가 스스로 서로 감응함을 얻었으니, 어찌 고산유수(高山流水)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仙槎)를 따라 남관(南館)에서 다행히도 식형(識荊)의 원을 이룩하고 선경(仙扃 남의 문을 높여서 하는 말)에서 작별하면서는 더욱 경균도름(傾囷倒廩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 놓음)의 속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취한 듯 충연(充然)히 소득이 있으니 뇌문포고(雷門布鼓)도 그 많음을 비유하기에 부족한데 이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잊게 되오리까?
우러러 생각건대, 그동안 상서로운 역서풀[瑞蓂]이 자주 뽑혔사온데, 기거가 더욱 평안하고 점필(佔畢 글을 대강 읽음)에 겨를이 많으신지요? 높이 운수(雲樹)를 우러러 그리워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사호(思浩)는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귀국한 뒤 아무 탈 없사오니 멀리 염려해 주신 덕택이옵니다. 돌아온 후 숨을 돌린 지 얼마 안 되어서 사행이 떠나기를 재촉하여 관개(冠蓋)가 매우 분주하여 하교(下敎)하신 서화는 아직 보내드리지 못하여 송구스럽기 그지없으나 뒤따르는 관개가 자주 잇따라 있을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보체(寶體) 자중하시고 좋은 말씀 주심을 기다려 소회를 토로하게 되기를 구구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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