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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기행(이요)

청담(靑潭) 2018. 3. 23. 22:47

 

 

연도기행(燕途紀行)

 

이요(李㴭 : 인평대군) : 1620-22년경 ~ 1658

 

■이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이름 요. 자 용함(用涵). 호 송계(松溪). 시호 충경(忠敬). 1629년(인조 7)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父王)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1640년 볼모로 선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풀려 귀국하였다. 1650년(효종 1) 이후 4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하였으며,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읊은 시가 전해진다. 또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송계집》《산행록(山行錄)》 등이 있다.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1. 연도기행 상

■총서(總敍)

○경진년(1640, 인조 18) 윤 정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심양(瀋陽)에 인질(人質)로 갔다가 이듬해인 신사년 정월에 돌아왔다. 이때 공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귀근(歸覲)을 위하여 대신 볼모가 되어 심양에 들어갔는데, 세자가 심양으로 돌아온 뒤에 청 나라에서 또 효종의 귀근을 허락했기 때문에, 공은 그대로 머물러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환조(還朝)했던 것이다. 사적이 신도비문(神道碑文)에 보인다.

임오년(1642, 인조 20) 5월에 금주 출항(錦州出降)에 대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심양에 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부사(副使)에는 우윤(右尹) 변삼근(卞三近), 서장관(書狀官)에는 지평(持平) 홍처량(洪處亮)이었다.

계미년(1643, 인조 21) 9월에 청주(淸主 청 나라 임금)의 초상에 진향사(進香使 중국 국장(國葬)에 분향하러 보내던 사신)가 되어 심양에 갔다. 부사에는 형조 판서 한인급(韓仁及), 서장관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심동구(沈東龜)였다.

10월에 나는 금상(今上)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장남)를 호종, 청인(淸人)을 좇아 건주(建州) 우모령(牛毛嶺)에 가서 사냥을 했다. 이 고개는 곧 요동(遼東)을 건너갈 때 우리나라 영장(營將) 김응하(金應河)가 절사(節死)한 곳이다. 음산(陰山)에서 하는 큰 사냥이 비록 장관이라고는 하나, 서리와 눈 위에서 노숙(露宿)하며 얼음길을 달려다니노라니 고생이 심하였다. 심양으로 돌아오자 동반(同伴)해 온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유독 나 한 몸만은 볼모로 바꾸어 돌려보내지 않았고 게다가 가족들까지 데려 오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갑신년 봄에 북쪽 사람들은 명(明) 나라가 이미 망해감을 듣고 온 국력을 기울여 관(關 산해관(山海關))을 침범하고 있었다. 나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함께 군사들의 대오(隊伍) 속에 있었는데, 나는 병이 심했기 때문에 그 일행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오수(吳帥 오삼계(吳三桂))가 관문(關門)을 열자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의 무리를 말함)은 바람에 쓰러지는 듯했고, 북쪽 군사(청군(淸軍))는 한 번 싸워서 연경을 이미 평정해 버렸다. 이때 소현세자는 융진(戎陣 청군을 말함)으로 돌아갔고, 금상(今上)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8월에 소현세자와 금상은 다시 청주(淸主)를 좇아서 다시 연산(燕山)으로 향했고, 나는 쓸쓸하게 본국으로 돌아왔다.

을유년(1645, 인조 23) 3월에 소현세자가 아주 돌아온 뒤, 하북(河北)이 평정되었다 해서 이를 진하(進賀)하려고 연경에 갔다. 부사에는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䂓), 서장관에는 응교(應敎) 성이성(成以性)이었다. 도중에 금상(今上)이 돌아오는 행차를 만나 며칠 동안 심양에서 즐겁게 지냈다. 다시 연도(燕都)로 들어가다가 소현세자의 슬픈 부음(訃音)을 듣고 길을 재촉하여 회정(回程)에 올라 윤6월에 환조(還朝)했다.

정해년(1647, 인조 25) 4월에 반사(頒赦)에 대한 사례 차로 연경에 갔다가 9월에 돌아왔는데, 해마다 바치는 폐백 반을 줄였다 해서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 부사에는 도헌(都憲) 박서(朴遾), 서장관에는 응교 김진(金振)이었다.

경인년(1650, 효종 1) 6월에 금녀(錦女)의 일로 최복(衰服 상복(喪服))을 벗고, 인조의 인산 때임. 연경에 갔다가 9월에 돌아왔다. 부사에는 이조 판서 임담(林墰), 서장관에는 집의 이홍연(李弘淵)이었다.

경인년(1650, 11월은 나랏일이 몹시 어려웠던 때였으므로 개연(慨然)히 사신 가기를 청했다. 세 신하의 일에 대한 상신 이경여(李敬輿)는 금고형에 처하고, 상신 이경석(李景奭)과 판서 조경(趙絅)은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했는데, 모두 극형에 처할 것을 논하였음. 진주(陳奏) 및 원조(元朝 음력 정월 초하루)의 절의(節儀 절일에 행하는 의식) 때문이었다.

1년에 두 번 연경에 가노라니, 그 사이 집에 있던 기간은 겨우 한 달이었다. 이듬해 신묘년 3월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문득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때 부사에는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 서장관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정지화(鄭知和)였다.

신묘년(1651, 효종 2) 11월에 반칙(頒勅)에 대한 사례 및 원조(元朝)의 절의(節儀) 때문에 연경에 갔다가 임진년(1652, 효종 3) 3월에 돌아왔다. 부사에는 대사간 황감(黃㦿), 서장관에는 사간(司諫) 권우(權堣)였는데, 의주(義州)에 돌아오자, 부사에게 귀양가라는 명령이 들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신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계사년(1653, 효종 4) 정월에 반칙(頒勅)에 대한 사례 차 연경에 갔다가, 6월에 칙사(勅使)의 행차를 정지시키고 이에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도 역시 큰 은혜를 입었다. 부사에는 도헌(都憲) 유철(兪㯙), 서장관에는 이광재(李光載)였다. 돌아온 뒤에 이광재가 거짓말을 꾸며내어 화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다행히 임금의 밝으심을 입어 이내 그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갑오년(1654, 효종 5) 8월에 청주(淸主)가 동쪽으로 돌아가 성묘(省墓)하려 하자, 문안사(問安使)로 심양에 갔다. 서장관에는 사간 심세정(沈世鼎)이었다. 평양에 도착하니 북쪽 소식이 막연하여 강선루(降仙樓)에 옮겨 소식을 기다리다가, 그 거둥을 중지했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돌아왔다.

갑오년(1654년, 11월에 책봉 진하(冊封進賀) 차로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을미년 3월에 돌아왔다. 부사에는 도헌(都憲) 이일상(李一相), 서장관에는 심세정(沈世鼎)이었다.

병신년(1656, 효종 7) 8월에 사대부(士大夫)들이 화를 입었다 하여, 이를 진하는 진주 정사(陳奏正使)가 되어 연경에 갔다. 부사에는 호조 참판 김남중(金南重), 서장관에는 사헌부 장령 정인경(鄭麟卿)이었다. 12월에 돌아왔는데, 그때,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등 열여섯 신하가 죄를 용서받은 일과 칙사의 행차를 정지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행이 모두 은전(恩典)을 입었다.

정유년(1657, 효종 8) 5월에 화약 만든 것을 사죄할 일로, 사은사(謝恩使) 우상(右相) 원두표(元斗杓), 부사 우윤(右尹) 엄정구(嚴鼎耉), 서장관 집의(執義) 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차례로 연경에 갔다가 10월에 돌아왔다.

사신(使臣)으로서의 일을 끝내어, 죽을 사람에게 형(刑)을 감하게 했다. 이리하여 두 번 길에 모두 남다른 은혜를 입었다. 이번 길에는 삼복(三伏)을 도중에서 지냈고, 80일 동안을 사관(舍館)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수토(水土)가 맞지 않아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일록 서(日錄序)

○생각하면, 정축년(1637, 인조 15) 병란(兵亂) 때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해서 임금이 수레를 타고 도성을 떠났으며, 강도(江都 강화(江華))까지 함락되어 모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이때에 나는 금상(今上 : 효종)을 모시고 오랫동안 오랑캐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종묘사직의 안위(安危)는 숨 쉴 사이도 없이 다급했었다.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 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동(遼東) 산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경진년(1640, 인조 18)에 볼모를 바꾸게 되어 요양(遼陽)으로 가니, 이때 내 나이 겨우 20세라, 나라를 떠난 슬픈 회포가 심양강(瀋陽江) 물과 함께 깊었다. 이에 혹은 전쟁터에 분주하게 다니기도 하고, 혹은 구류를 당해 신고(辛苦)를 겪기도 했다. 오랑캐의 사관(舍館)에 쓸쓸히 있으려니 시름과 동무할 수 밖에 없었다. 부질없이 소무(蘇武)의 절모(節旄 임금이 사신에게 주는 깃대)를 생각하고 날마다 상림(上林)의 기러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이르러 명나라가 망하여 청나라 군사가 연경으로 몰려 들어갔다. 무관(武關)에서의 볼모 상태에서는 비록 풀려났으나, 성사(星槎 사신들이 타고 다니는 선박)의 행차는 오히려 빈번해졌다. 여름철의 더위와 겨울날 추위에 행역(行役)이 어려워서 자못 몸으로 견디지 못할 바였다. 심지어는 최복(衰服)을 벗어 놓고 길을 떠나기도 하여 예법을 지킬 사이가 없었다. 좋지 못한 때에 태어났다고 해도 어찌 이런 데에 이르렀는가? 반평생을 타향에서 보내며 한데서 자고 먹어 묵은 병은 온몸에 감겼는데, 게다가 나랏일에 바빠 해마다 북쪽 길을 가게 되니, 타고난 운명이 기박하기가 어찌 이렇단 말인가? 어렵고 위태할 때에 심력을 다한 것은, 나의 분의(分義)를 돌아볼 때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와 같이 좁은 소견으로 자주 외교의 중한 임무를 감당해야 했으니, 일을 그르쳤을 것은 이치에 당연하다. 겨우 한 번 돌아와 복(服)을 입자마자 헐뜯는 말이 꼬리를 물고 생기니, 신세(身世)가 어찌 이와 같이 대부분 뒤틀어지는 데에까지 이르렀는가?

금년에 또 북쪽 변방에 일이 벌어져서 사대부(士大夫)들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진주(陳奏)하라는 명령이 다시 또 나에게 내려졌다. 날짜를 가려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먼 길을 달려 가노라니, 일을 처리하기가 넓은 하늘처럼 아득하였다. 더구나 떠날 때에 비참하게도 막내아들의 죽음을 당했는데도 그 무덤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심정을 억제하면서 길에 올랐다. 저물녘에 빈 사관(舍館)에 들어 홀로 객탑(客榻)에 의지해 있노라니 쇠잔한 등잔만 깜박거리면서 천만 가지 시름을 자아낸다. 스스로 헤아리고 스스로 상심하면서 손을 꼽아 곰곰이 생각하니, 경진년(1640, 인조 18)부터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것이 열한 번이나 된다. 20년 동안의 정역(征役)이 비록 북쪽 사신(使臣)의 재촉이 심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중간에 간혹 조정에서 명령해 보낼 적도 있어, 간곡하게 사정을 아뢰기도 했다.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오히려 따뜻한 윤음(綸音)을 내리셨고, 혹시 남의 헐뜯음을 당하더라도 이내 그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 마음속으로 감격하나 보답할 길이 없었다. 끝까지 몸을 바쳐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관로(官路) 3000 리도 역시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갔었다.

전번에 갔다 올 때에는 마침 사고(事故)가 많아서, 듣고 본 것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연대가 이미 오래되면, 그때의 정경(情景)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런 때문에 이번에는 바삐 가는 중에도 틈을 타서 대략 날씨와 그 밖의 일을 기록하고, 또 사신의 일의 본말(本末)을 조목마다 모두 기록하며, 산천(山川)ㆍ이정(里程)ㆍ풍속ㆍ경치까지도 대개 갖추어 쓰는 것이니, 이것을 보는 사람은 어여삐 여겨 주기 바란다.

 

■일록(日錄) 병신년(1656, 효종 7) 8월[3일-21일]

○3일 날이 밝은 뒤에 가묘(家廟) 공은 숙부 능창대군(綾昌大君 1599-1615 인조의 아우)에게 양자 갔기 때문에 집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었다. 에 현알하고, 상차(喪次)에 곡한 다음 대궐에 들어가니 해가 반 발이나 올라왔다.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부사 이하와 함께 표문(表文)을 받들고 나왔다. 이때 풍악을 잡은 악사들은 앞에서 인도하고 백관들은 뒤에 따랐다. 숭례문(崇禮門)을 나서서 반송(盤松)에 다다르니 못가에 크게 장막을 치고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에 들어가 사대례(査對禮)에 참석하고 예가 끝난 다음 사차(私次)에 나와 쉬었다. 지신사(知申事) 신유(申濡)와 이조 참판 김좌명(金佐明)ㆍ공조 참판 정치화(鄭致和)가 와서 보고 서로 회포를 풀었다. 이에 조복(朝服)을 벗고 역마(驛馬)에 올라 관사 뒤 소로를 좇아 길을 떠났는데, 이는 무과거(武科擧)를 방금 시행하기 때문이었다.

사현(沙峴)에서 말을 쉬니 이미 집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 홍제원(弘濟院)에 당도하니, 종인(宗人) 밀산군(密山君) 이하 30여 명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앉아서 술을 들어 전송하였는데, 이는 곧 종풍(宗風)이다. 경평군(慶平君)도 역시 왔는데, 병자(病者)가 멀리 나온 것을 보니 참으로 감사했다. 주원 제조(廚院提調)인 형조 참판 윤순지(尹順之)와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인 삼재(三宰 좌참찬(左參贊)) 오준(吳竣)도 각각 송별연을 베풀어 작별하니, 이는 대개 옛 관례였다. 종친부(宗親府)에서는 당상(堂上)이 병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낭료(郞僚)들이 배반(杯盤)을 마련했을 뿐이다. 전별이 끝나자 또 대간(大諫) 오정일(吳挺一)ㆍ응교 오정위(吳挺緯)ㆍ전 정(正 종3품의 관직) 정선흥(鄭善興)ㆍ한림(翰林) 여성제(呂聖齊) 등 10여 명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서운하게 작별하면서 인하여 죽은 아이의 장사치르는 모든 일을 부탁하노라니, 나도 모르게 오열을 토하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의 폐를 덜어 주기 위하여 기백(畿伯) 조형(趙珩)으로 하여금 뒤에 떨어지게 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 교자를 타고 길을 떠났다.

일행은, 곧 부사 호조 참판 김남중(金南重 1596-1663), 서장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정인경(鄭麟卿1607- ?), 호행 중사(護行中使) 가의(嘉義) 고예남(高禮男)과 비장(裨將) 5명에 병방(兵房)을 맡은 절충(折衝) 전 군수(郡守) 홍여한(洪汝漢), 호방(戶房)을 맡은 절충 이민중(李敏中), 예방(禮房)을 맡은 당하(堂下) 전 현감 이신(李伸), 공방(工房)을 맡은 전 만호(萬戶) 김여준(金汝俊), 마감(馬監)을 맡은 전 만호 최귀현(崔貴賢)과 역관 11명에 수역(首譯) 가의(嘉義) 장현(張炫), 상통사(上通事) 가선(嘉善) 조동립(趙東立), 전 정(正) 최진남(崔振南), 여진학(女眞學) 가선(嘉善) 서효남(徐孝南), 상사 건량(上使乾糧) 통정(通政) 한지언(韓之彥), 별헌 영거(別獻領去) 통정(通政) 양효원(梁孝元), 공사 장무(公事掌務) 전 첨정(僉正) 변승형(卞承亨), 부사 배행(副使陪行) 통정(通政) 박이절(朴而嶻), 건량(乾糧) 전 정(正) 신익해(申益海), 행대 배행(行臺陪行) 전 정(正) 방효민(方孝敏), 압물 청역(押物淸譯) 김흥익(金興益)과 대의(大醫) 2명에 어의(御醫) 전 주부(主簿) 박군(朴頵), 침의(針醫) 전 주부(主簿) 안예(安禮), 화원(畫員) 권열(權悅), 외사 의원(外司醫員) 변이형(卞爾珩), 사자관(寫字官) 유의립(劉義立), 부사 군관(副使軍官) 전 주부(主簿) 이면(李㴐), 출신(出身 과거를 보고 아직 임관되지 못한 자) 박두남(朴斗南), 행대 군관(行臺軍官) 습독관(習讀官) 정기창(鄭祈昌)이며, 또 대전 별감(大殿別監) 남이극(南爾極), 사헌부 서리(司憲府書吏) 이의신(李義信), 내국 서원(內局書員) 염효익(廉孝翼), 하인(下人)으로는 명남(命男) 등 5명과 을생(乙生) 등 8명이었다.

홍제원(弘濟院) 돌다리를 지나 녹번현(碌磻峴 지금의 녹번동(碌磻洞) 일대)을 넘어 양철평(梁撤坪 지금의 양철리(梁鐵里)인 듯)에 이르니, 옛날 편비(褊裨)로 있던 자들 중에 일찍이 깃대를 들던 자 이수창(李壽昌)ㆍ황도창(黃道昌)ㆍ박형(朴泂)ㆍ유성(柳檉)ㆍ이후한(李後漢) 등 다섯 사람이 와서 작별했다. 전석현(磚石峴)을 거쳐 창릉(昌陵 예종(睿宗)과 그의 계비 한씨의 능) 파발을 지나서 덕수천(德水川) 돌다리를 건너서, 여현(礪峴)을 넘어 신원(新院) 나무다리를 건넌 다음 개륜현(介倫峴)을 넘어 저녁 무렵에 고양군(高陽郡)에 도착, 벽제관(碧蹄館)에 유숙했다. 여기에서는 군수(郡守) 유후성(柳後聖)이 지대(支待)했다.

이번 길은, 7월 그믐 하루 전에 비참하게도 자식의 초상을 당했는데, 성상께서 이 사정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글을 내리시어, 처음에는 3일에 부사를 먼저 보내고, 나는 초상일을 보살핀 뒤에 떠나서 부사를 따라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사정(私情)이 비록 절박하지만, 왕사(王事)가 지극히 소중하므로, 심정을 억제하고 차(箚)를 올린 다음 오늘 함께 떠났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길의 심회란 전일 가던 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홀로 여창(旅窓)에 기대어 집안일을 생각하니, 슬픈 심회를 더욱 억제할 수가 없다. 이 날 40리를 갔다.

○5일 송경(松京) 옛 도읍은 성곽이 허물어지고 씩씩한 기운이 사라져 없어지고 있었으나, 다만 민가가 밀집하고 인구도 여전히 많았는데, 대개 장사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 집 만듦새는 한양(漢陽)과 같지 않아서 짧은 서까래에 벽을 쌓았는데 모두 북쪽 창문이 없어 흡사 중국 만듦새와 같았는데, 이것은 고려조 때에 화인(華人)들이 국내에 많아 그들에게 배워서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풍속화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나온 주부(州府)의 관사(館舍)들은 비좁아서 간신히 견디었는데, 이제 여기에 도착해 보니 집이 크고 넓어서 왕기(王畿)라 할 만하고, 또 절효(節孝)의 정문(旌門)이 거리마다 바라보이니 역시 옛 도읍의 유풍(遺風)을 볼 수가 있다.

○8일 송화 군수(松禾郡守) 김종윤(金宗沇)은 지난날 주원(廚院)의 관리로 있던 사람인데, 고적(考績 관리들의 성적을 조사하는 것)에서 성적이 하등(下等)에 매겨졌으므로, 이민(吏民)들만 나와 기다렸다.

○9일 이윽고 황강(黃岡) 기생 10여 명이 떼를 지어 함께 누(樓)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몸에 중복(重服 대공(大功) 이상의 상복)이 있기 때문에 쫓아내 물러가게 하였고,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에서도 모두 노래하는 기생들의 놀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지나온 고갯길은 밤새 내린 비바람으로 인해 진흙에 발이 빠져, 사람들은 자못 피로해 하였다.

○12일 이에 교자를 타고 떠나서 대동관(大同館) 앞에 이르니, 부사ㆍ서장관 및 순사가 비록 직접 청하지는 못했으나 초대하려는 의사를 뚜렷이 보였다. 함께 놀아 우의를 두텁게 하자는데 쌀쌀맞게 거절하기도 어려울 듯하였다.

이에 장경문(長慶門) 돌길로 해서 부벽루에 올랐다. 여기에서 부사ㆍ서장관과 함께 조용히 회포를 풀고 간단히 술잔을 나누었다. 다시 교자를 타고 금수봉(錦繡峰) 밑으로 해서 병현(竝峴)에 이르니, 순사와 도사(都事)ㆍ통판(通判)이 포장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 앉아서 잠깐 이야기하다가 또 두어 잔을 마셨다. 오늘 세 곳에서 추로주(秋露酒)를 거의 20여 잔이나 마셨다.

○20일 방물 별헌(方物別獻) 및 반전 건량(盤纏乾糧)을 고쳐 쌌다. 만상 비장(灣上裨將) 7명, 가선(嘉善) 전 군수(郡守) 김여로(金汝老), 병방(兵房) 담당 가선(嘉善) 임의남(任義男), 응견(鷹犬) 담당 절충(折衝) 백승윤(白勝潤), 호방(戶房) 담당 출신(出身) 김효원(金孝源), 예방(禮房) 담당 전 권관(權管) 김준철(金俊哲), 마감(馬監) 담당 한량(閑良) 김득일(金得鎰), 공방(工房) 담당 한량(閑良) 김추립(金秋立)을 부사(副使) 행중(行中)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모두 사리(事理)를 알고 궁마(弓馬)에 능한 무인들이었다.

북으로 갈 역마(驛馬)는 곧 삼남(三南)에서 뽑아 보낸 것인데, 빠른 말은 비록 바랄 수가 없지만 둔한 말이 반이나 되니, 국가에서 뽑아 보낸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관(馬官)의 직무 태만이 애석할 뿐이다.

○21일 압록강(鴨綠江)의 옛 이름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청하(靑河)’, 하나는 ‘용만(龍灣)’이요, 지금은 ‘압록(鴨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물빛이 마치 오리의 머리와 같기 때문이다. 근원은 호지(胡地)와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1000여 리를 흘러 장강(長江)이 되고 마이산(馬耳山) 밑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 대총강(大摠江)으로 흘러 인산진(麟山津) 앞바다로 들어간다. 삼강(三江)ㆍ중강(中江)은 호지(胡地)에 있고, 이 압수(鴨水)는 곧 우리나라 것이다.

 

 

2. 연도기행 중

■일록(日錄)병신년(1656, 효종 7) 8월[22일-30일]

○22일 날이 밝자 서장관과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구룡연(九龍淵)에 나가서 인마(人馬)를 점검(點檢)하고 위법 행위가 있는가를 조사했다.

늦게 떠나 구룡연에 도착했다. 구룡연은 곧 압수(鴨水)의 상류(上流)로서 건너편에 있는 마이산(馬耳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먼저 떠난 인마(人馬)가 강을 거의 반이나 건넌 다음 채색을 한 큰 배에 올라탔다. 의주 부윤도 역시 배 안에까지 와서 얘기하다가 작별했다. 하인(下人) 위빈(渭濱) 등이 나루 머리에서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다. 과섭 차원(過涉差員)이 남북에서 나누어 기다렸는데, 강남(江南)은 곧 청성 첨사(淸城僉使) 유성길(劉成吉)이요, 강북(江北)은 곧 방산만호(方山萬戶) 이윤성(李胤成)이다. 배를 재촉하여 강 북쪽에 닿아서 언덕 위의 풀을 베고 상(床)에 의지해 조금 쉬노라니 역마(驛馬)들이 모두 건너왔다. 비로소 길을 떠나서 중강(中江)에 도착하니, 강남 차원(江南差員)인 건천권관(乾川權管) 김수창(金壽昌)이 연청(宴廳) 밑에 배를 대고 있었다. 이 연청은 곧 북사(北使)가 잔치를 베푸는 곳이다.

물결이 급하고 바람이 일어나 간신히 나룻배를 이끌고 정박했는데, 강북 차원(江北差員)인 옥강만호(玉江萬戶) 함경상(咸卿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청국(淸國) 땅인데, 무오년 이후로 영원히 황무지가 되어 인가(人家)가 없었으며 쑥대만 가득할 뿐, 겨우 한 가닥 길만이 있었다.

...부사(副使)와 서장관은 중강(中江)을 건너다가 물결이 급하고 바람이 높아 배를 맘대로 잡지 못하고 수십 리를 표류(漂流)하다가 난자도(蘭子島)에 정박했는데, 여기에서 역류(逆流)로 배를 이끌고 간신히 강을 건넜다. 이 때문에 날이 저물어서야 뒤따라 도착했다. 의주(義州) 화수(火手)가 큰 사슴을 바치기에 동료들과 함께 구워 놓고 밤새 얘기했다.

○24일 마패(麻牌) 각씨(却氏)의 집에 들어가 잤다. 마패(麻牌)란 곧 노호(老胡)의 칭호로서 우리나라의 왕래하는 사신을 호행(護行)하는 자이다.

집이 몹시 누추하여 악취가 사람에게 풍겼다. 이족(異族)들이 지껄여대니 도리어 냇가에서 장막을 치고 자는 것만도 못했다. 관청에서 주는 하정(下程)은 곧 추로(秋露 술 이름)와 양ㆍ오리ㆍ닭ㆍ돼지ㆍ땔나무인데, 정관(正官)과 종인(從人)에게 차등 있게 분배해 준다. 대개 정관은 군관(軍官)과 역관(譯官)이요, 종인(從人)은 각항(各項)의 하배(下輩)들이다. 앞으로 갈 길의 각 역참(驛站)도 모두 이 법을 좇는다. 봉성(鳳城)에서 우장(牛庄)에 이르기까지 식구와 노정을 따져 양미(糧米)를 준 것이 이러한 예였다. 주인은 전부터 안면이 있어, 오리와 양을 삶고 낙차(駱茶)를 달여서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예물을 넉넉히 주었다.

○25일 여기에서부터 마패와 아역 각 1명과 갑군 50명이 호행했다.

○27일 저물녘에 첨수참(甜水站)에 도착하여 냇가에서 노숙했다. 이곳 도성은 허물어지고 사람만 있었다. 하정(下程)을 바쳐 왔다. 하인과 화수(火手)가 큰 사슴 한 마리를 바치고, 두 응인은 꿩 일곱 마리를 바쳤다. 이것을 부사(副使)의 행주(行廚) 및 일행 원역(員役)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균등하게 잘 나누는 곡역후(曲逆侯)에 비교하더라도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전후에 모두 이와 같이 했다. 쇄마(刷馬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 방물과 외교문서를 싣고 가던 말) 인부 한 명이 두 번씩이나 도망하여 연산(連山)에 떨어져 있으므로, 초혼(初昏)에 갑군(甲軍)을 달려보내어 붙들어다가 일행에게 넘기게 했다.

○28일 오시에 떠나 사대천(四大川)을 건너 낭자산(狼子山) 냇가에서 노숙했다. 하정(下程)을 바쳐 왔다.

부사와 서장관은 모두 서생(書生)으로서 한고(寒苦)를 견디지 못하여 천총가(千摠家)에 들어가 잤다. ...지나는 길에 쑥대가 들을 가리고 물억새꽃이 눈과 같은데, 사슴들만 떼를 지어 다니고 인민들은 드물며, 산적은 무법으로 횡행하고 있어 나그네들은 자못 괴로움을 받는다. 응인이 꿩 다섯 마리를 바쳤다. 의주(義州)에서 건너올 때에 소 한 마리를 사서 끌고 왔는데, 이것을 잡아 일행에게 나누어 주기를 준례와 같이 했다.

어젯밤에 보낸 갑군(甲軍)이 도망한 사람을 잡아 왔기에, 중한 매를 때려서 천총(千摠)에게 인도하여 우장(牛庄)의 회마(回馬)를 통해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일록(日錄)병신년 (1656, 효종 7) 9월[1일-22일]

○1일 일찍이 경인년(1650, 효종 1)에는 천산로(千山路)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길은 비록 조금 가깝다고 하지만, 산이 높고 물이 깊은 데다가 호랑이가 떼를 이루어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으므로, 도리어 바로 가는 길이 조금 먼 것만도 못했다. 사시에 경가장(耿家莊)에 도착하여 냇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돌려보내는 역마(驛馬) 중에서 정건(精健)한 말을 가려서 북으로 가는 굼뜬 말과 바꾸었다.

늦은 바람이 크게 일어나 모래가 날려 얼굴을 치니, 이는 참으로 강을 건넌 후 첫 번 당하는 고생이었다.

○2일 만상 군관 백승윤(白勝潤)은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성실한데다가 사리(事理)에도 밝았다. 일행의 양식을 천 리 길에 관리하여 일행이 모두 주린 빛이 없게 했는데, 이 사람이 병이 중해서 뒤에 떨어졌으므로, 김득일(金得鎰)로 하여금 대신 그 일을 보살피게 했다.

○3일 장사치들은 뒤에 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11일 장현(張炫)이 소 한 마리를 바치므로, 잡아서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행 중에서 매 두 마리를 팔뚝 위에 올려놓은 채로 가져왔는데, 이것도 이어서 주방의 음식 재료로 삼게 했다. 지나가던 호걸스러운 오랑캐가 말 두 필을 가지고 매 두 마리와 바꾸고자 하였는데, 그 뜻이 몹시 간절했다. 그 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거기에 사냥개 두 마리를 보태서 내주었는데, 그는 곧 청 나라 대관(大官)이었다.

○14일 부사와 서장관 역시 객점에 유숙했다. 거쳐온 여염집이 온돌(溫突) 제도만 우리나라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간혹 옥상(屋上)의 제도도 평평하기가 상(床)과 같아 장마 때에는 비가 새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평옥(平屋)이라도 바다흙을 두껍게 발라서 조금도 젖거나 습기가 차는 일이 없다.’ 하니, 매우 괴상한 일이다.

○18일 지나온 군읍(郡邑)에 쇠사슬로 목을 묶인 죄인이 길에 널려 있었다. 필시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리라 싶어 그 까닭을 자세히 물었더니, ‘백성이 조금만 죄를 지어도 중죄(重罪)로 얽어서 먼 북쪽 왈가지(曰可地)로 압송(押送)했다가 흑초(黑貂)나 흑호(黑狐)로 바꾸어 온다.’ 한다. 청국의 정치가 전경(剪徑 도둑이 노상에서 강도질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생민(生民)이 도탄에 빠진 것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으로 참혹한 일이었다.

○22일 밤에 빈 사관에 앉아서 지나온 길을 자세히 생각해 보니, 한양(漢陽)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북쪽으로 향해서 왔고, 요양으로부터 우장(牛莊)까지는 서남쪽을 향해서 왔고, 우장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는 또 서북쪽을 향해서 왔고, 광녕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는 또 서남쪽을 향해서 왔다. 그 길이 굴곡이 많고 험한 곳은 진강(鎭江)으로부터 냉정(冷井)까지인데, 산과 물이 마치 우리나라의 산이 높고 물이 깊어 도로가 기구한 것과 같았다. 냉정(冷井)으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는 넓은 들이 하늘에 연했고 길이 그 속으로 나서, 지나오는 길이 평탄했다. 그러나 곳곳에 비습(卑濕)한 곳이 있고 때로는 간혹 물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광녕(廣寧)으로부터 풍윤(豐潤)에 이르기까지는 산을 의지하고 들을 껴서 간혹 언덕이 많았고, 풍윤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는 지나온 길이 평탄한 육지였으며, 주위의 길들도 모두 편평했다. 듣고 본 것으로는, 관내(關內)는, 흉년이 들어 좀도둑이 자주 나오고, 어양(漁陽) 동쪽 경계로부터 황성(皇城) 동문까지는 방방 곡곡에 관군(官軍)이 길에 매복해 있어 칼ㆍ창ㆍ활ㆍ포가 서로 길에 연해 있으며, 경사 주변의 주부(州府)에서는 바야흐로 양가(良家 지체 있는 집안)의 미녀(美女)들을 뽑아서 후정(後庭 궁중의 후비)으로 충당하는데, 그 숫자는 3000명이요, 이것을 몫을 나누어 정하여 높다랗게 방문(榜文)을 걸면 인민들은 수심에 쌓인다고 하니, 청 나라 임금의 황음(荒淫)함을 대개 미루어 생각할 수가 있다.

 

 

3. 연도기행 하

■일록(日錄) 병신년(1656, 효종 7) 9월[23일-29일]

○23일 표문(表文 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글)과 자문(咨文 중국 관청과 왕복하던 문서)을 점검하는 일은 서장관(書狀官)의 책임이지만, 서로 떨어진 뒤 소식이 통하지 못했으므로, 어젯밤에 역관들을 데리고 이를 점검하여 종류별로 나누어 놓았다. 오늘 아침 아역(衙譯 중국 관청의 역관)들이 일제히 이르러서 표문과 자문을 올리라고 재촉하므로, 역관 장현(張炫)ㆍ조동립(趙東立)ㆍ최진남(崔振南) 등을 보내어 예부(禮部)에 바쳤다.

○24일 부사의 군관 박두남(朴斗南)이 옥하관(玉河館)으로부터 와서, 자진(子珍)의 감기(感氣)가 매우 중하다는 것을 알렸다. 태의(太醫) 두 사람을 보내서 증세를 살피게 하고 약을 지어 보냈다.

사행의 방물(方物 우리나라의 토산물)을 불시에 바치라고 재촉하는 것이 바로 청 나라 사람의 그릇된 습관이다. 이와 같은 폐단을 염려해서 미리 방물을 점검하고 분류(分類)해서 쌓아 놓았다. 상관(上館 정사의 처소)의 인원만으로는 일손이 모자라서 중행(中行 사신을 맞는 접반사)에 사정하여 하관(下館 서장관의 처소)의 역관 2, 3명을 불러서 함께 이 일을 했는데, 일을 끝마친 후에 작별하고 돌아갔다.

○25일 지난날 흉악한 역관 정명수(鄭命守)가 있을 때는 방물을 바친 뒤에도 양관(兩館 상관(上館) 하관(下館))의 원역(員役)들이 감히 통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방물을 아직 바치기도 전에 원역들이 왕래하고, 관부(館夫)도 출입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혼금(閽禁 관청에서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좀 풀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매우 편리하게 생각했다. 정명수의 행악(行惡)이 어찌 여기에만 그쳤으랴. 비길 데 없이 흉악한 것이 고금에 일찍이 없었다. 혹 지난 일을 한번 생각하면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일록(日錄)병신년(1656, 효종 7) 10월

○2일 조참례(朝參禮)가 처음에는 5일로 정해졌는데, 내일로 개정되었기 때문에 아역(衙譯) 등이 비로소 부사ㆍ서장관ㆍ상관(上館)으로 하여금 일행 원역을 모아 놓고 미리 뜰에서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다. 대통관 이일선(李一善)은 아역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자인데, 황제의 아우 고산(固山 만주어의 미칭으로서 이는 곧 청 나라 종실(宗室)을 말함)의 복상(服喪)으로 인해 공사(公事)를 집행하지 못하므로, 그가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이를 다행하게 여겼다. 그러나 뜻밖에도 100일 기한이 이미 차서, 이제 별안간 나타나 종일토록 문에 앉아서 심히 까다롭게 굴었다. 혼금(閽禁)이 엄밀해서 주방의 관부(館夫)까지도 출입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그 행악은 정명수와 다름없었다.

○3일 ...대개 청주(淸主)가 새로 동기(同氣 형제)의 상(喪)을 당해서 여덟 몽왕(蒙王)이 네 공주(公主)와 함께 위문하러 온 때문에, 오늘 연회를 베풀어서 대접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신도 들어와 참예케 한 것이다. 공주는 바로 홍타시(弘陀始 청(淸)의 태종)의 딸인데 모두 몽왕에게 시집갔다. 네 몽왕은 부마(駙馬)이고, 또 네 몽왕은 부마의 아버지들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올 때는 오문 밖에서 정관(正官) 30여 명이 수참(隨參)이 허락되었으나, 오문으로 들어오기에 미쳐, 정사ㆍ부사ㆍ서장관 외에 정관(正官) 열세 명만이 입내(入內)가 허락되었으니, 이는 아문의 규칙이다. 얼마 후에 예관(禮官)이 반(班)을 나누어 맞아들였는데, 몽왕은 태화문의 협문(夾門)으로 해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신은 정도문(貞度門)으로 해서 들어가게 하였다. ...청 나라 임금이 상좌에 앉으니, 번한(蕃漢)의 시신(侍臣)들이 차례대로 나란히 줄을 서서 조알례(朝謁禮)를 행했다. 몽왕 세 사람이 먼저 예를 행하고 나는 그 뒤를 따라서 예를 행했으며, 부사 이하는 뜰 가운데서 예를 행했다.

배고(拜叩)가 이미 끝난 뒤, 나는 몽왕을 따라 들어가 전각(殿閣) 서쪽에 앉았다. 청 나라 임금(세조 순치제 1644-1661)의 상모(狀貌)를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는 열아홉이건만 기상이 호준(豪俊)해서 이미 범용(凡庸)한 무리가 아니었으며, 눈동자가 사나워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게 했다.

○4일 응련 중사(鷹連中使) 김정립(金正立)이 청 나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모르게 김효원(金孝源)ㆍ최진남(崔振南)을 옥하관(玉河館)으로 보내어 고국 소식을 탐문케 했더니, 한낮이 지나서야 돌아와 보고했다. 비로소 집과 나라 안이 모두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일 김여휘(金汝輝)가 찾아와서 뵈었다. 김여휘는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이름 있는 집안 사람으로, 정묘 호란(丁卯胡亂) 때 온 집안이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지금 청 나라 임금의 친병 초관(親兵哨官)으로 있었다. 그 사람됨이 매우 선량하여 자주 와서 뵈었는데, 비밀히 이번 사행(使行) 편에 사칙(赦勅 죄를 사(赦)하는 황제의 칙서)을 부칠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이 기쁨을 어찌 다 측량할 수 있으랴.

청 나라 사람 맹자시(孟自是)는 청조(淸朝)의 문과(文科) 진사(進士)로서, 문자(文字)를 약간 해득했다. 갑오년(1654, 효종 5) 사행 때 광록소경(光祿少卿)으로 봉성(鳳城)까지 호송(護送)해 주었다. 나도 그를 정성껏 대접했으며, 그의 간청으로 인해 전별하는 글을 써 준 일이 있었는데, 이제 공부 과도관(工部科道官)으로 승진(陞進)되어 별관으로 찾아왔다. 중당(中堂)에서 접견하고 예물을 주었더니 매우 기뻐했다.

○28일 감기가 겨우 조금 차도가 있었는데, 어젯밤에 재발하였다. 종일토록 신음하노라니 여관에서의 나그네 회포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은 개시(開市)한 날이라 모든 역관(譯官)들이 한인(漢人)들과 밤이 되도록 시끄럽게 떠들어 온 관(館)이 소란했다. 오늘의 매매(買賣)는 불리했다고 한다.

○29일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중행(中行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무리의 행악(行惡)과 주구(誅求 강요하는 것)가 갈수록 심하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 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노수(路需)도 고갈되었다. 포학을 부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이일선(李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妻娚)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사행(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일록(日錄)병신년(1656, 효종 7) 11월

○5일 ...저물녘에 사하역(沙河驛)에 이르러 역승(驛丞) 진필달(陳必達)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쇄마부(刷馬夫) 한 사람은 어린애인데 병들고 피곤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 어젯밤에 풍윤현(豐潤縣)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니, 해괴한 일이다. 주호(主戶 총 책임자)에게 엄히 당부하여 갑군(甲軍)과 함께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데려오게 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모두 50리씩을 갔다.

○7일 ...쇄마부(刷馬夫)들이 길을 가면서 시장 상점의 떡ㆍ국수 같은 물건을 약탈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양 이를 다스리려 했으나, 죄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후에 길 위에서 한 한인(漢人)이 꿇어앉아, 쇄마부(刷馬夫)가 엿 등을 빼앗아 먹은 일을 호소했으니, 몹시 해괴한 일이었다. 범인을 색출해서 값을 갑절로 물어주고, 중장(重杖) 80대를 쳐서 일행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20일 어제 오후 도중에서 만주 사람 하나가 말을 달려서 사행(使行)의 선두를 가로질러 갔다. 전구(前驅)가 소리 질러 금했으나, 말에서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달아났다. 막하의 사람들이 모두 격분했다. 돌기(突騎)로 쫓게 하였는데, 그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칼을 뽑아서 휘둘렀다. 그의 양손을 등뒤로 묶어 와서 성장(城將)에게 넘겨주었다. 성장은 우리나라 사람을 입증시키고 중장(重杖)을 쳐서 사람들을 경계했다.

○22일 ...만윤(灣尹)의 군관 전사립(田士立)이 서 역관(徐譯官)을 만나서 비로소 사행이 요동에 이르렀음을 알고 달려왔다. 교자 앞에 이르러 다만 저보(邸報 관보(官報))만을 바쳤으니, 고향 소식이 아직도 의주에 도착하지 못한 때문이다. 고향 소식은 비록 듣지 못했어도 저보를 자세히 보아 국가가 편안함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국의 여러 가지 소식과 도강(渡江 압록강을 건너는 것)한 날짜 등을 물었더니, ‘온 나라가 모두 편안해서 더 말씀 드릴 것이 없고, 10일에 도강하였습니다. 선래군관(先來軍官)들도 무사히 마전곤(馬轉滾)을 지나갔으며, 동지사(冬至使)가 보름경에 의주에 도착합니다.’ 한다. 일행은 모두 환성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얼음 위로 태자하(太子河)를 건너서 요양(遼陽) 새성(城) 밖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전사립이 기백(箕伯 평안 감사) 유심(柳淰)ㆍ만윤(灣尹) 김휘(金徽)의 문장(文狀) 및 쌀과 진찬(珍饌)을 올렸다. 골고루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역(異域)에서 주린 나머지 고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되니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3일 밤에 큰눈이 내려 행차가 떠나지 못했는데, 평명에 조금 개었다.

돌아갈 생각이 화살 같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출발을 재촉하여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사시에 냉정(冷井)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눈이 하늘을 덮어 대낮이 밤처럼 어둡다.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한양(漢陽)에서 연산(燕山)에 이르기까지 냉정(冷井)이 중간이 되니 이미 고국에 절반이나 이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미시에 떠나 옥상령(玉祥嶺)을 넘었다. 삼류하(三流河)를 얼음 위로 건넜다.

○24일 ...동지사의 일행 중 마부와 말이 먼저 이르렀다. 성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상인(商人)이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상고배가 이처럼 혼잡을 이루기는 근래에 없는 일이었다. 해질 무렵에 동지 정사(冬至正使)인 판서 윤강(尹絳 1597-1667), 부사 참의 이석(李晳1603-1685), 서장관 지평 곽제화(郭齊華 1625-1675)가 와서 만났다. 친구와 만나 다정한 말을 나누노라니 시름에 찬 나그네 회포가 시원하게 풀려짐을 느꼈다. 헤어졌던 수역 지사(首譯知事) 박경생(朴庚生) 이하 사람들이 일제히 와서 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윤현(豐潤縣)에서 국화분(菊花盆)을 가지고 올 것을 분명히 부탁했다.

○25일 이른 아침에 윤 판서 이하가 와서 하직하므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몰랐다. 늦게 떠나 돌이켜 보니, 자준(子俊 판서 윤강의 자)의 행차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자준의 마음은 필시 나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성 서쪽의 큰 내는 급한 여울인데, 얼음장이 물 위를 덮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말을 언덕 위에 세우고 막하의 모든 사람, 역졸들까지도 모두 말을 타고 건너게 했다. 사시에 회령령(會寧嶺)을 넘고 벽동 천변(碧洞川邊)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적설(積雪)이 말 배[馬腹]까지 찼다.

○26일 날이 저물 때 선래군관(先來軍官) 최귀현(崔貴賢)이 하인 강적(江赤)을 데리고 서울로부터 달려와서 천서(天書)와 가신을 바쳤다. 낭산(狼山) 이후로 자주 집 소식을 듣고 또한 고국의 진미를 맛보니 나그네의 회포에 위안이 되었다. 사행(使行)의 많은 사람이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번번이 사고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면하게 되어 상하가 모두 기뻐했다. 유독 홍여한(洪汝漢)이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마부(馬夫) 한 사람이 어머니의 상(喪)에 간 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었다. 최귀현에게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면서 이어 왕복한 소식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가산(嘉山)에 이르러서, 이면(李㴐)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서 떠나가지 못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파발을 달려 14일에 입경(入京)했습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셔서 특별히 술과 음식을 주시고 돌아갈 것을 허락하셨는데, 김여준(金汝俊)은 병이 중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고, 혼자서 강적(江赤)을 데리고 16일 다시 서울을 떠나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했다. 저녁때가 되자,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임금이 만안(萬安)하심을 하례했다. 서울서 온 감귤(柑橘)ㆍ청어(靑魚)ㆍ은어(銀魚)로 안주를 만들고, 의주에서 보내온 향기로운 술을 잔에 가득 따라 부어 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변방에서 얻기 어려운 경지였다. 화각(畫角)이 두 번 울리고 인마가 떠났다. 행중에 엄명을 내려 먼저 객점(客店)에 드는 일을 금하였는 데도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많으니, 너무나 분개할 일이다. 오늘은 비밀히 군관 김여로(金汝老)를 보내어 남몰래 먼저 가서 객점(客店)에 이른 자 14명을 붙잡아 중장(重杖)을 쳤다. 그리고 원역(員役) 중에서 종을 제어하지 못한 잘못으로 장(杖)을 받은 자도 있다.

○29일 8리쯤 앞으로 나갔는데, 부사를 배행(陪行)하는 당상 역관(堂上譯官) 박이절(朴而嶻)이 달려와서 급히 고하기를,

“선래군관(先來軍官) 이면(李㴐)의 종이 염초(焰焇)를 수레 속에 감추어 실었습니다. 고용(雇用)한 차부(車夫)는 통원보(通元堡) 사람인데, 좋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城將)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그러나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요행을 바랄 뿐이었다. 또 5리를 가서 책문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인마가 모두 책문을 나가지 못하고 한데 모여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자(轎子)를 책문 앞에 내려놓았다. 성장(城將)이 손에 작은 염초 덩어리 하나를 쥐고서 말하기를 ‘이제 고발로 인해서 금물(禁物)을 이미 적발했습니다. 일행의 짐을 모조리 수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궁극한 곤경에 빠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좋은 말로 설득하고 있을 즈음에 먼저 온 인마가 모두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그야말로 백인(白刄)으로 서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물(禁物)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품목을 일일이 기록하고 연경(燕京)에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내가 생각건대 이는 근년에 없었던 일이므로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인마를 뒤로 물리치고 말안장을 내리고 밥을 짓게 하여 그 형적(形跡)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역관을 보내서 엄격히 항의(抗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갈수록 횡포를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붙잡혀 있는 쇄마부(刷馬夫) 다섯 사람을 교자(轎子) 앞으로 끌어다가 갑자기 중장(重杖)을 치고, 저네들과 다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광록소경과 성장(城將)이 이와 같은 불평의 기색을 보자 도리어 불안스럽게 여기면서 수색을 늦추고 인마를 나가게 하는 한편 부드러운 낯빛으로 와서 위로하기를,

“이 물건들이 비록 금령(禁令)에 저촉되기는 하지만, 가죽은 무두질해서 만든 것이고 금ㆍ은(金銀)은 녹여서 가공(加工)한 것입니다. 대개 중요하기는 하나 그 죄는 중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했다. 다시 광록소경과 작별했는데, 상품(上品) 은장도(銀粧刀)를 예물로 주었다. 채찍을 휘둘러 책문을 나왔다. 이는 필시 만시(灣市)에서 남아 있던 재앙이 억울하게도 사행(使行)에 미친 것이다. 그 노갑이을(怒甲移乙 갑에게서 성난 것을 을에게 분풀이하는 것)하는 소행이 더욱 통탄스럽다. 다섯 죄인은 차원(差員)인 희천(煕川) 원을 시켜 압송해서 가게 했다. 오시에 대룡산(大龍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대동(大同)의 우졸(郵卒)이 말 두 필을 끌고 와서 뵈었다. 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이것은 실로 요동을 드나든지 2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치욕이었다. 붙잡힌 다섯 놈은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침 수색에서 자진(子珍)의 종이 붙잡힌 것을 내가 주선해서 간신히 무사하게 만들었다. 자진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사례했다. 성서(聖瑞)가 뒤를 이어 와서 일을 상의했다. 상통사(上通事) 최진남(崔振南)에게 일행 속에 금물(禁物)을 감추어 오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10대를 쳤다. 비록 체례(體例)에 의해서 벌이 행하여진 것이지만, 어찌 다만 그의 허물이겠는가. 10여 년을 두고 금령(禁令)을 범한 것이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이다. 관서(關西) 음우(陰雨)의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한스럽다.

 

■일록(日錄)병신년(1656, 효종 7) 12월

○3일 ...해질녘에 선래역관(先來譯官) 변승형(卞承亨)이 파발마로 달려서 내려와 가신(家信)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16신(臣)이 모두 죄에서 풀리게 되고, 또 북사(北使 청 나라 사신)가 오지 않게 되었다 해서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하고 있으며, 온 조정의 여러 재상들이 모두 전갈을 보내서 치사합니다. 선래(先來) 세 사람은 모두 은전(恩典)을 입어 외람되게 옥관자(玉貫子)를 다는 반열(班列)에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오직 이면(李㴐)만이 낙마(落馬)로 인해 은전에 참예하지 못했습니다.”

했다. 최귀현(崔貴賢)ㆍ변승형(卞承亨)은 모두 과거를 거치지 않은 자로서 일조에 벼슬이 갑자기 올라 초옥(貂玉)이 찬란하니 그 또한 운수이다. 16신(臣)은 곧 영의정 이시백(李時白)ㆍ좌의정 구인후(具仁垕)ㆍ우의정 심지원(沈之源)ㆍ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ㆍ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ㆍ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ㆍ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ㆍ형조 판서 신준(申埈)ㆍ참판 김여옥(金汝鈺)ㆍ참의 목행선(睦行善)ㆍ공조 판서 이해(李澥)ㆍ지의금(知義禁) 신익전(申翊全)과 오정일(吳挺一)ㆍ도승지 이행진(李行進)ㆍ대사헌 이시해(李時楷)ㆍ대사간 조형(趙珩)이다.

○10일 오늘은 내 환갑(還甲)이다.(※37세 생일을 환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또 서장관의 생일이기도 하다. 저녁때가 되니 순찰사가 간략하게 주안상을 차려 와서 위로했다. 성서(聖瑞) 및 도사(都事)ㆍ통판(通判)이 참석했다. 자진(子珍)은 조부의 기일이 되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촛불이 켜지고 술이 거나했다. 좌상(座上)의 여러 손으로 하여금 술을 들면서 기다리게 하고, 주인과 함께 상아(上衙 감영)로 가서 내실(內室) 수씨(嫂氏)를 뵈었더니, 별찬(別饌)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흉금을 터놓고 실컷 마신 뒤 관사(館舍)로 돌아왔다. 통판(通判) 혼자만이 자리에 있었다. 서장관과 도사는 술을 마시고 서로 떠들다가 이미 헤어졌다. 순찰사가 막하의 여러 사람을 불러 술을 권하고서 자리를 파했다. 기경(箕京)에서 술자리를 베푸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중복(重服 대공(大功) 이상의 상복)이기 때문에 기생들을 물리치고 동자로 술을 따르게 했으니, 이 또한 흠이었다.

○11일 대동강에 이르니 순찰사가 배에 올라서 술잔을 들어 전송했다. 얼음이 굳어서 배를 움직일 수 없으니 유감스럽다. 악수를 나누며 작별하고 썰매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

○12일 ...우리나라 팔도에서 유독 해서(海西)에만 땅이 꺼져 구덩이가 된 곳이 있는데, 간혹 그 깊이를 측량 할 수 없었다. 속칭 ‘화여공(禾如孔)’이라 하는데, 그것도 서흥(瑞興) 경내에서 특히 많았다. 이번 밤길에 한 역졸이 잘못 떨어졌다가 겨우 빠져 나왔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촛불 밑에서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파발편에 부쳤다.

이날 아침에는 40리, 낮에는 35리를 갔으며, 저녁에는 40리를 갔다.

○14일 ...장무(掌務) 박수원(朴受源)ㆍ배리(陪吏) 왕중익(王中益) 등이 서울로부터 와서 뵈이고 이어서 가신(家信) 및 저보(邸報)를 올렸다. 저물녘에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동별관(東別館)에 유숙했다.

○16일 맑음. 아침에 떠났다.

개륜현(介倫峴)에 올랐다. 창릉(昌陵)을 지났는데, 노소(老少) 친구들이 길을 메웠다. 연서관(延曙館) 뒤에 이르니 좌윤(左尹) 구인기(具仁墍) 및 그 아들 도사(都事) 구일(具鎰)이 와서 위문했다. 녹번현(綠磻峴)을 넘으니 이조 참판(吏曹參判) 오정일(吳挺一)ㆍ춘방 보덕(春坊輔德) 오정원(吳挺垣)이 와서 기다렸다. 정답게 회포를 풀었다. 홍제 석교(弘濟石橋)를 건너니, 관장(管掌)하는 각 시(寺)의 하리(下吏)들이 마중하며 뵈었다. 홍제원(弘濟院)에 들어가니 경평군(慶平君)을 비롯하여 여러 종친(宗親)이 모두 와서 정역(征役)을 위문했다. 잠시 앉아서 응대했다. 관할(管轄)하는 여러 시(寺)의 낭관(郞官)이 일제히 와서 인사를 드렸다. 경영 관사(京營官舍)에 이르러 관복을 정제하고 가니, 부사ㆍ서장관 및 각 부서(部署)의 원역(員役)들이 무리를 따라 나갔다. 돈의문(敦義門)으로 들어가, 종루(鐘樓)를 지났다. 눈에 띄는 고향의 모습이 전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8월에 작별하던 때의 회포를 돌이켜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솟는다. 대궐에 나가 입시하여 행정(行程)의 어려웠던 일과 사행의 전말을 진달했다. 복명(復命)을 끝마치고 낙동(駱洞)으로 돌아오니, 서쪽에 걸린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자식이 문에서 마중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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