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行記
서호수(1736-1799)
1756년(영조 32) 생원(生員)이 되고,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했으며 이어 다음 해 식년 문과에 다시 장원하였다. 곧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초임되었으나 언사(言事)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766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특채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1770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어 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 해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정사(正使) 이은(李溵), 서장관(書狀官) 오대익(吳大益)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 등 청관직(淸官職)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 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교열하고, 1781년에는 『규장총목(奎章總目)』 4권 3책을 책임 편찬했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할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를 고출(考出: 자세히 살핌)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또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서호수는 규장각에 원임직제학(原任直提學)의 직함으로 간여하면서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남인(南人)으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채제공(蔡濟恭)과 소론(少論)의 명문이었던 그의 집안과의 갈등으로 일시 휴직했다가 1790년(정조 14)에 다시 진하 겸 사은부사로 두 번째 청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이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1711-1799 乾隆帝)의 팔순(八旬)을 기념하는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 때의 여행일기가 『연행기(燕行紀)』 4권 2책이다.
다음 해 관상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조 때 김육(金堉)이 주장한 바 있는 시헌력(時憲曆)의 사용을 위해 청나라에 가는 사신에게 이에 소용되는 의기(儀器)를 구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795년 삼상(三相)의 후보에 올랐으나 이루지 못했고, 다시 1798년 우의정의 물망에 올랐으나 역시 좌절되었다.
끝내 삼상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이조판서에 그쳤지만, 정조 동궁시의 빈료(賓僚)로서 정조의 즉위에 공로를 세운 서명응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 북학파의 학자로 규장각의 각종 편찬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두 차례의 연행(燕行)을 통해 서적 수입 등 청문화의 도입이라는 정조의 내밀한 임무 부여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둘째아들인 서유구(徐有榘)는 사촌 서철수(徐澈修)에게 출계(出繼)했으나 가학을 계승, 다음 시대 북학자로 활약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1. 연행기 제1권
■진강성에서 열하까지 경술년(1790, 정조 14) 6월
●25일 : 비가 내림. 통원보(通遠堡)에서 밥을 지어 먹고 연산관(連山關)에서 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연산관은 일명 아골관(鴉鶻關)이라고 하니, 나덕헌(羅德憲) 등이 국서(國書)를 내버린 곳이 바로 여기이다. 청(淸) 나라 천총(天聰) 10년(천총은 9년밖에 없는데 10년이라 했으니 착오인 듯함) 4월에 여러 패륵(貝勒), 대신, 만주인과 한인 문무 각원이 표(表)를 받들어 올리며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는 하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받아 운수(運數)에 순응하여 일어나셔서 뭇 백성들을 사랑해 기르시고 여러 나라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시며, 다시 옥새(玉璽)를 얻었으니,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부명(符命)이 명백합니다. 존호(尊號)를 올려 관온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라고 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세 번 주청하자 비로소 윤허하고, 곧 4월 11일로 천지(天地)와 태묘(太廟)에 제사를 올려 고유(告由)했다. 덕성문(德盛門) 밖에 단(壇)을 쌓고 황제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정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고쳤다. 여러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여 다 삼궤 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행하게 하였다. 오직 우리나라의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이확(李廓)이 태묘(太廟)에 절하지 않자, 선유하기를,
“조선 사신의 무례함은 일일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다 조선이 원망을 맺으려는 생각이 있어 짐(朕)이 먼저 빌미를 열어 그 사신을 죽게 한 다음 짐에게 맹세를 저버렸다는 이름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다. 짐은 결코 한때의 작은 분노로써 분풀이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에도 사신으로 온 자를 죽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조회(朝會)하는 때이겠는가? 불문(不問)에 붙이라.”
라고 하였다. 조금 뒤에 나덕헌 등을 돌아가게 하였으나, 답서(答書)가 몹시도 도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였다. 나덕헌 등은 그 답서를 연산관(連山關)에 버리고 왔다 한다.
●27일 : 요양(遼陽)에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는 큰길 좌우편으로 양류(楊柳)를 끼고 있다. 날이 개면 행인을 덮어 주는 그늘이 되고, 장마가 지면 또한 큰길의 표지(標識)가 된다. 이것이 아니면 상인(商人)과 나그네가 볕에 지치거나 물에 빠지는 자가 많을 것이다. 열하(熱河)에서 연경에 이르는 길도 그러하다. 각기 그 지방관(地方官)이 분담하여 수호하고, 한계를 정하여 보호해 살린다.
옹정(雍正) 연간에도 버드나무 심는 일을 독려하는 칙유(勅諭)를 여러 번 내린 일이 《회전(會典)》에 실려 있으니, 상부의 인정(仁政)이 백성에게 미침이 원대하다. 근고(近古)에 우리나라의 사신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변하(汴河)의 버들에서 나라를 엿본 일에 비한 이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저들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게 하겠는가?
●29일 : 맑음. 초저녁에 출발하여 성 밖에서 10리 떨어진 탑원(塔院)에서 잤다.
연일 참(站)마다 쉬지 않고 지나쳐 쉬면서 멀리 행진하였기 때문에 교군(轎軍)과 말이 매우 피로하여 사세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길을 달려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태평거(太平車) 9량(輛)을 빌려서 삼사(三使)와 막비(幕裨)와 역관(譯官)이 나눠 탔다.
성경(盛京)의 부도통(副都統) 성책(成策)은 만주 사람이다. 짐 싣는 수레 3량을 보내 도와주었으므로 행장(行裝)을 모두 실었다. 그리고 쌍교(雙轎)와 부졸(扶卒)과 역마(驛馬)는 바로 연경으로 보냈다.
수레를 빌릴 때에, 수레 주인이 우리 형편이 급한 것을 알고는 빌려 주는 대가를 전에 비하여 10배나 높게 불렀다. 봉성장(鳳城將)이 마침 심중(瀋中)에 왔다가 우리에게 생색내기 위하여 9인의 차부(車夫)를 가두고 값을 감해 주었다. 차주는 유감을 품고서 동(佟)이란 성을 가진 무뢰한(無賴漢) 한 사람을 불러, 9인의 차부를 거느리게 하였다. 동이란 자는 자칭 정황(正黃)의 기하(旗下)라고 하는데 언동과 외모가 가증스러웠다. 9인의 차부들은 다 그가 시키는 대로 가고 멈추고 하는데, 5리만 가면 반드시 말을 쉬고 10리만 가면 반드시 술을 사라고 하여, 가는 곳마다 지체하였다. 그리하여, 혹 차부에게 빨리 달리라고 꾸짖으면 동이란 자가 대신 대답하기를,
“진흙이 당겨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합니까? 차부들이 가엾습니다.”
라고 하여 일행이 몹시 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강성에서 열하까지 경술년(1790,정조14) 7월[1일-15일]
●5일 : 의주(義州)의 경계에서부터 토졸(土卒) 수십 명이 일행을 호위하여 참(站)에 이르러 교체(交替)하는데, 재를 넘고 물을 건널 때마다 문득 수레를 밀고 당기거나 붙들고 껴안았으며, 혹은 삼태기와 삽으로 길을 평평하게 닦는 등 힘을 빌리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 또한 성경(盛京)의 지휘에 따라 징발한 것이다.
●15일 : 맑음. 황토량자(黃土梁子)에서 밥을 지어 먹고, 홍석령(紅石嶺)을 넘어 평대자(平臺子)에서 말을 먹이고, 신시(申時)에 승덕부(承德府) 열하(熱河)에 도달하였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황토량자에서부터는 산이 다 광대하고 험하며 변화가 많아 깊은 산협을 이루기 시작했다. 높은 봉우리는 순전히 중첩된 돌로서 가로의 무늬가 낱낱이 침단(沈檀)의 빛깔을 하고 있다. 어떤 것은 활 모양으로 궁궐 같고, 어떤 것은 빙 두른 것이 성곽(城廓)과 같으며, 어떤 것은 부도(浮屠) 같고, 어떤 것은 홀(笏)과 같다. 홍석령에 이르니 높고 삼엄한 기상이 위로 하늘에 닿아 웅대한 광경이라고 하겠다.
열하는 영 아래 30리에 있었다. 나는 정사(正使), 서장관과 함께 열하의 동쪽 5리 되는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러 잠깐 쉬며 차(茶)를 마셨다. 통관 서계문(徐啓文)이 나와서 맞이하더니, 만주인 예부(禮部) 시랑 철보(鐵保)의 말을 전달하기를,
“각국 사신이 다 친히 어전에 표문(表文)을 올렸으니, 귀국도 내일 연연(宴筵)에서 친히 표문을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행재 예부(行在禮部)에 가지 않고 바로 우관(寓館)으로 들어갔다. 몽고(蒙古)의 여러 부(部)와 회부왕패륵(回部王貝勒)과 면전(緬甸), 남장(南掌)의 사신과 대만부(臺灣府) 생번(生番)은 이달 초순 전에 여기에 도착하였고, 안남왕(安南王)과 그 종신(從臣)들은 이달 11일에 여기에 도착하였다 한다.
열하는 지세(地勢)와 경치가 뛰어난 금성 탕지(金城湯池)의 요지였다. 경추산(磬棰山), 미륵산(彌勒山) 등의 여러 봉우리가 둘러 안았는데, 손을 맞잡고 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에 수십 리의 평평한 골짜기가 열렸는데 난수(灤水)와 열하(熱河)가 좌우로 둘러 있다. 북으로 몽고를 제압하고 남으로 선대(宣大)에 임하였으며, 서로 회부(回部 청 나라 때 동투르키스탄의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살던 지역)와 연결되고 동으로 요양, 심양과 통하였으니, 실로 변방 밖의 중심이며 천하 요지였다.
청 성조(淸聖祖)가 처음 산장(山莊)을 짓고 민가(民家) 1만 호를 모집하여 채우고 성조의 열하시(熱河詩)에, ‘모인 백성이 만 호에 이르렀다.[聚民至萬家]’라는 글귀가 있다. 매년 4, 5월에 여기에 거둥하였다가 8, 9월에 돌아가곤 하였다. 고북구(古北口) 안팎 400여 리 사이에 행궁(行宮)과 사냥터가 뒤섞여 서로 바라보인다.
2. 연행기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 경술년(1790,정조14) 7월[16일-26일]
●16일 : 군기 대신(軍機大臣) 화신(和珅)과 복강안(福康安), 왕걸(王杰)이 소명(召命)을 받고 앞으로 나아간다. 화신이 시랑(侍郞) 철보에게 말하기를,
“표문(表文)을 친히 올리는 일은 이미 타국의 예(例)가 있기는 하지만, 다시 황지(皇旨)를 기다려 친히 올리는 것이 타당하다.”
하고, 또 사신 등을 인도하여 먼저 전정(殿庭)으로 나아가니, 시랑 철보가 진하표(進賀表)를 도로 통관에게 전하고 서서 협문(西序夾門) 밖에서 기다리게 한 뒤에 우리들을 인도하여 전폐(殿陛) 아래 서변(西邊)에 섰다.
화신과 복강안, 왕걸은 전내(殿內)에 올라가 어좌(御座) 동쪽에 시립하였다. 화신이 나와서 황제(皇帝)의 뜻을 전하기를, ‘조선 사신 등은 앞으로 나오라.’라고 한다.
시랑이 나와 정사(正使)와 서장관을 인도하여 전폐 위에 나아가 어좌를 향하여 꿇어앉았다. 황제가 말하기를,
“국왕(國王)은 평안하신가?”
하므로 세 사신이 머리를 조아린 뒤에 정사가 대답하기를,
“황상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하십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국왕은 아들을 낳았는가?”
하였다. 세 사신이 머리를 조아린 뒤에 정사가 대답하기를,
“금년 원정(元正)에 특별히 복자신한(福字宸翰)을 내리신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특별한 은전이었습니다. 국왕께서 감격하여 받들고 가슴에 새겨 밤낮으로 송축(頌祝)하더니 과연 6월 18일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곧 황상이 주신 것입니다.”
하니, 황상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런가? 매우 기쁜 일이군. 매우 기쁜 일이야.”
하였다.
이어 세 사신의 성명과 벼슬의 품등(品等)을 물으므로 화신이 어전에 나아가 손을 들어 차례로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사신 등을 잔치하는 반열(班列)에 나아가게 하라.”
하니, 철보가 우리를 인도하여 각국 사신의 반열에 앉게 하였는데, 수석은 조선사(朝鮮使)이고 다음은 안남사(安南使), 다음은 남장사(南掌使), 다음은 면전사(緬甸使), 다음은 생번(生番)이었다.
반열의 위치는, 친왕(親王),패륵(貝勒),패자(貝子),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은 동서(東序)에 앉았는데, 두 줄로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북쪽이 상석(上席)이었다. 친왕, 패륵, 패자는 앞줄에 있고 대신들은 뒷줄에 있었다. 몽고(蒙古 몽골), 회부(回部 청 나라 때 동투르키스탄의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살던 지역), 안남(安南)의 제왕(諸王)과 패륵, 패자 및 각국 사신은 서서(西序)에 앉았다. 두 줄로 동쪽을 향하여 앉았는데, 북쪽이 상석이었다. 제왕, 패륵, 패자는 앞에 있고 사신들은 뒤에 있었다.
●18일 : 맑음. 열하에 머물러 있었다.
새벽에 통관이 삼사(三使)를 인도하여 여정문(麗正門) 밖 조방(朝房)에 이르러서 잠깐 쉬고, 동이 틀 때에 통관이 우리를 인도하여 연희전(演戱殿)에 들어가 서서(西序)의 협문(夾門) 밖 조방에서 잠깐 쉬었다. 조금 뒤에 황상어전 통관(皇上御殿通官)이 우리를 인도하여 연희의 반열(班列)에 나아가게 하였다. 묘시(卯時) 정(正) 10분에 연희를 시작하여 미시 정 2각에 그쳤다. 연희의 제목은 보탑릉공(寶塔凌空), 하상담로(霞觴湛露), 여산여부(如山如阜), 불식부지(不識不知), 천상문성(天上文星), 인간길사(人間吉士), 화갑천계(花甲天開), 홍희일영(鴻禧日永), 오색서화(五色抒華), 삼광여채(三光麗彩), 주련벽합(珠聯璧合), 옥엽금가(玉葉金柯), 산령서응(山靈瑞應), 농정상부(農政祥符), 요지정비(瑤池整轡), 벽락비륜(碧落飛輪) 등 모두 16장이었다.
선찬(宣饌)과 선다(宣茶)는 다 어제 의식과 같았다. 반열에 나아간 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철보(鐵保)가 나에게,
“안남왕과 조선 사신을 부르라는 황지(皇旨)가 있으니, 나아가 전폐(殿陛) 아래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우리들을 인도하여 전폐 아래 서쪽 가에 서게 한다. 먼저 안남왕을 불렀는데 그는 조금 뒤에 물러나왔다. 화신(和珅)이 나와서 황지(皇旨)를 전하되,
“조선 사신은 자리에 오르라.”
하여, 정사, 서장관과 함께 나아가 전내(殿內) 어탑 앞에 꿇어앉았다. 1칸이 채 못 되는 거리에 황상이 상복(常服)을 입고 침향탑(沈香榻) 위에 앉아 있다. 탑 높이는 2자 남짓한데, 위에는 담흑(淡黑) 바탕에 꽃무늬를 수놓은 담요를 펴고, 뒤에는 산수운물(山水雲物)을 새긴 침향병풍(沈香屛風)을 세웠다. 탑 앞에는 짙은 황색 바탕에 채색 꽃무늬 담요를 깔았다. 좌우 탁자 위에는 금축(錦軸) 아첨(牙籤)이 수백 권(卷)이나 있다. 황지(皇旨)에 말하기를,
“그대들이 마침 장마와 더위를 당하여 장성(長城) 밖을 경유하여 왔으니,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않고 도로가 험난하였을 터인데,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가?”
하므로, 나와 정사와 서장관은 머리를 조아린 뒤에 대답하였다.
“황상의 크신 은혜에 힘입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황지에 말하기를,
“그대들의 나라에 만주, 몽고의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는가?”
하므로, 정사가 대답하기를,
“배신(陪臣) 등의 일행 중에 데리고 온 자가 있었는데, 다 성경(盛京)에서 바로 연경으로 향해 갔습니다.”
하니, 황지에,
“연희(演戱)를 마친 뒤에 짐이 마땅히 환궁할 것이니, 그대들은 먼저 경도(京都)로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이어 연반(宴班)에 나아가라고 명령하므로, 철보가 우리를 인도하여 나갔다.
●21일 : 새벽에 예부(禮部)에서 수레 13량을 준비해 보냈다. 모두 갈대자리로 장식한 것으로 각각 다섯 필의 말을 멍에 메우고, 예부 낭중(禮部郞中) 만인(滿人) 서승아(叙陞阿)가 호행(護行)하였다. 난평(灤平)에서 연경에 이르기까지 읍(邑)마다 공관(公館)을 정하고, 쟁반에 음식을 담아 올렸는데 모두 의주(義州)의 예(例)와 같다.
●26일 : 맑음. 선무문(宣武門)에서 성 밑을 따라 외성(外城)의 서편문(西便門)으로 나가서 내성의 부성문(阜成門)을 지나 서직문(西直門) 밖에서 서쪽을 향해 20리를 행진, 원명원의 우관(寓館)에 들어갔다.
원명원에서 황성에 도달하는 어도(御途)에는 다 돌을 깔았는데 너비가 3칸은 되어 보인다. 길 좌우에는 채붕(綵棚)이 이어져 있고, 형형색색의 기암 이수(奇巖異樹)와 화각 패루(畫閣牌樓)는 이루 다 알아낼 수가 없다. 열하(熱河)에 비하면 연도(沿途)의 장식이 거의 100배나 된다. 관광(觀光)하는 사녀(士女)들이 길거리를 꽉 메우고 수레바퀴가 서로 걸려 말이 뚫고 지나갈 수가 없다. 정말 천하의 장관이다.
3. 연행기 제3권
■원명원에서 연경까지 경술년(1790,정조14)7월[27일-30일]
●29일 : 맑음. 원명원에 머물렀다. 광록시(光祿寺)에서 빈과(蘋果), 포도, 배[梨], 임금(林檎), 밀조(蜜棗) 등 5종의 과일을 보내왔다. 알이 윤택하며 맛이 달고 시원하여,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보다 뛰어나게 좋다. 공사(貢使)가 관에 머무는 동안 광록시에서는 닷새에 한 번씩 과품(果品)을 나누어 주었는데, 《대청회전(大淸會典)》에 실려 있는 규정대로였다.
《대청회전》을 살펴보니,
“각국 사신이 연경(燕京)에 도착하면 공부(工部)에서는 방과 집을 꾸미고 기구를 갖추며 땔감을 공급한다. 호부(戶部)에서는 좁쌀과 말 먹일 콩을 지급하고, 광록시에서는 날마다 포자(脯資 음식물),희견(餼牽 가축)을 준비하고 5일에 한 번씩 과품(果品)을 나눠 준다. 조공(朝貢)하는 일을 마치고 나면 예부(禮部)에서 연회를 베풀며, 돌아가려고 할 때에는 관(館)에서 연회를 베푸는데, 예부의 당상관(堂上官) 1인이 주석(主席)이 된다.”하였다.
●30일 : 내가 말에서 내려서 길가에 앉아 있다가, 마침 예부의 한상서(漢尙書) 기균(紀勻), 만상서(滿尙書) 상청(常靑), 내각 한학사(內閣漢學士) 심초(沈初)와 자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앞에 나아가 안부를 물으니, 다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예가 지나치십니다.”
한다. 기 상서(紀尙書)는 직례(直隷) 헌현(獻縣) 사람으로 호를 효람(曉嵐)이라 하는데, 박식(博識)하고 고아한 지조 있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그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들으니 공(公)께서는 칙명(勅命)을 받들어 《명사(明史)》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교정(校正)한다고 하던데, 이미 다 마치셨습니까?”
하니, 기균이 말하기를,
“《명사》 속의 잘못된 지명(地名), 인명(人名)과 소루(疎漏)한 사실은 다 정정(訂正) 보충하여 각판(刻板)에 붙였으나, 《일통지》는 편질(篇秩)이 거대하고 오류(誤謬)도 더욱 많아서 기필코 철저히 교정(校正)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직도 정리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번 길에 경과한 지방을 가지고 말하자면, 합라전(合懶甸)이라는 곳은 《금사(金史)》ㆍ《고려사(高麗史)》를 참조해 보니, 그것은 분명히 우리나라의 함경남도 땅인데 《일통지》에서 구련성(九連城)이라고 부회(傅會)하였으며, 고북구(古北口)의 조하천영(潮河川營)은 정림(亭林)이 기록한 것을 가지고 고증(考證)해 보면 지금의 도리조하영(道理潮河營)으로서 실로 관구(關口) 밖에 있는 것인데, 《일통지》 계정(計程)에는 이를 관구 안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으니, 작은 실수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기균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잘못들은 하나하나 열거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대체로 산경(山經), 지지(地志)라는 것은 전해 들은 것에 속(屬)한 것이 많은데, 그것을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보게 되면 반드시 서로 어긋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새로 교정한 《명사》를 얻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기균이 말하기를,
“이미 간행(刊行)은 하였으나 아직 나눠 주라는 칙지(勅旨)가 없었습니다. 나누어 줄 때를 기다려 1부(部)를 드리겠습니다. 귀국(貴國)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는 매우 체제가 잘 잡혀 있으므로 내가 서가(書架)에 1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고려사》가 이미 시중에 번각(翻刻)되었습니까?”
하니, 기균이 말하기를,
“바로 귀국에서 간행한 판본(版本)입니다. 귀국의 서경덕(徐敬德)의 《화담집(花潭集)》은 《사고전서》별집류(別集類)에 편입되었습니다. 외국의 시문집(詩文集)이 《사고전서》에 편입된 것은 천년에 한 사람뿐입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을 갑자기 잠깐 사이에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연경에 들어간 뒤에 귀댁에 사람을 보내어 가르침을 청해야 하겠으나, 금례(禁例)에 구애되어 몸소 나아가지 못하니 한스럽습니다.”
하니, 기균이 말하기를,
“나의 집은 정양문(正陽門) 밖, 유리창(琉璃廠) 뒤의 회동관(會同館) 거리에 있습니다.”한다.
■원명원에서 연경까지 경술년(1790, 정조 14) 8월
●1일 : 연회에서 물러나오다가 근정전(勤政殿) 문밖에 이르러 황제의 여덟째 아들 의친왕 영선(儀親王永璇)을 만났다. 준수한 얼굴에 헌칠한 큰 키로 행동거지가 편안하고 고상하여 실로 범상한 부류가 아니었다. 각국 사신들이 다 손을 모아 잡고 길가에 섰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지나간다. 황제의 아들은 본래는 17인이었으나, 지금 생존한 자는 4인으로서, 영선(永璇)과 열한 번째인 성친왕 영황(成親王永璜)과, 열다섯 번째인 가친왕 영염(嘉親王永琰)과, 열일곱 번째인 패륵 영린(貝勒永璘)이다. 황손(皇孫)이 10인, 황증손(皇曾孫)이 2인, 황현손이 1인이라고 한다.
●3일 : 연희에서 물러나와서 우관(寓館)에 돌아오니, 왕 각로(王閣老)가 편지로 목은(牧隱), 포은(圃隱)의 두 문집(文集)을 요구한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의 볼 만한 책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내가 편지로 답하기를,
“목은은 곧 이색(李穡)의 호(號)이고, 포은(圃隱)은 정몽주(鄭夢周)의 호(號)입니다. 이들은 다 고려 때 사람으로서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이전의 사람들입니다.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어서 전집(全集)은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학자(學者)들은 발자취가 수천 리 밖을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견문이 매우 적습니다. 그들의 저술에 어찌 대방(大方)의 볼거리가 있겠습니까?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이라든가, 한백겸(韓百謙)의 《기전고(箕田攷)》 같은 것은 조금은 폭넓고 정제되었다고 일컫고 있으나, 또한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나 죽탁(竹坨) 주이존(朱彛尊)의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합니다.”
하니, 왕걸(王杰)이 회보(回報)하기를,
“귀국의 평양은 곧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으로 그 전제(田制)에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니, 동지 사행(冬至使行) 편에 《기전고》 1부를 부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체로 소대에서 물러나온 뒤로부터 이와 같이 여러 번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으니, 황제의 뜻으로 장차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편입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돌아와 봉황성 변문(鳳凰城邊門)에 도착하였을 때에 편지로 내각에 보고하여 연석(筵席)에 진달(陳達)하고, 《기전고》 20본(本)을 인쇄하여 동지 사행에 붙여 각로(閣老) 왕걸(王杰), 상서 기균(紀勻), 시랑(侍郞) 철보(鐵保)에게 나눠 주게 하였다.
●24일 : 흐림. 남관에 머물렀다.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간(金簡)이 죽청지(竹淸紙)를 요구하기에 300장을 보내 주고, 또 야립(野笠) 1개와 왜경(倭鏡) 1개, 백주(白紬) 2필, 백면포(白綿布) 2필, 채화석(彩花席) 10장, 설화지(雪花紙) 5묶음, 청심원 30환, 부채 30자루를 함께 보내 주었다. 김간의 조선(祖先) 김덕운(金德雲)은 우리나라 의주 사람인데, 김덕운의 손자 김상명(金常明)이 청 나라에 들어가 상서(尙書)가 되었다. 김간은 곧 김상명(金常明)의 종손으로서 전후를 통하여 우리나라 일에 노고(勞苦)를 바친 것이 매우 많다. 그래서 더욱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간은 비단 2필과 춘주(春紬) 2필, 흡연(歙硯) 1개, 호필 2갑, 휘묵 1갑, 조선(曹扇) 1갑, 오색견전(五色絹箋) 1권, 용정차(龍井茶) 2갑으로 보답해 왔다.
■원명원에서 연경까지 경술년(1790, 정조 14) 9월[1일-3일]
●2일 : 각학(閣學) 옹방강(翁方綱)이 《혼개도설집전(渾蓋圖說集箋)》의 발어(跋語)를 써 보내는데, 이르기를,
“건륭(乾隆) 경술년(1790, 정조 14) 추 8월에 박 검서(朴檢書)가 부사(副使) 서공(徐公)의 저서인 《혼개통헌도설집전(渾蓋通憲圖說集箋)》 4책(冊)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었다. 그중 상(上) 2책은 명 나라 인화(仁和) 이수부(李水部)의 원서(原書)이고, 하(下) 2책은 서공(徐公)의 집전(集箋)이다. 나는 추보지학(推步之學 천문이나 역서에 관한 학문)에 대한 학식은 일찍이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 모든 일에 대해 그 본말(本末)을 깊이 탐구하지 못한 자라, 감히 바로 서문(序文)을 쓰지 못한다. 다만, 그 혼평(渾平)한 가운데 서로 응하는 소이연(所以然)을 연역(演繹)해서 분석(分析)하여 자세히 도표(圖表)에서 드러내 설명하여 남김이 없음을 보니, 그 마음씀이 부지런함에 깊이 탄복할 뿐이다. 이에 별지(別紙)에 써서 겸양하고 삼가는 구구(區區)한 뜻을 나타낼 뿐이요, 감히 서(序)의 뜻으로 말하지 못한다. 북평(北平) 옹방강(翁方綱).”
이라 하였다.
기 상서(紀尙書), 철 시랑(鐵侍郞)이 다 옹 각학(翁閣學)은 역상(曆象)에 조예가 깊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가 춘추삭윤(春秋朔閏)에 힘쓴다는 말을 듣고, 이미 그가 새로운 역법(曆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이제 그의 발어(跋語)를 보니 더욱 그 엉성함을 징험하겠다. 대체로 현재 중국의 사대부(士大夫)들은 한갓 성률(聲律)과 서화(書畫)로써 명예를 낚고 승진(昇進)을 매개하는 계제(階梯)를 삼을 뿐이요, 예악(禮樂)과 도수(度數)는 변모(弁髦)처럼 보기 때문에, 조금 실학(實學)을 힘쓰고자 하는 자도 정림(亭林 고염무의 호)이나 죽타(竹坨 주이존(朱彛尊)의 호)의 남긴 오라기를 주워 모으는 데 지나지 않는다.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의 호)과 같이 순수하고 독실(篤實)하며 물암(勿菴 매문정(梅文鼎)의 호)과 같이 정밀하고 투철함은 세상에 드물게 한번 나타날 뿐이요, 많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
흠천감 정(欽天監正) 희상(喜常)과 서사(西士) 안국령(安國寧)이 모두 역상(曆象)에 밝다는 성명(盛名)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방문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3일 : 내가 들으니, 무영전(武英殿)에서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을 새로 간행하였는데, 병자, 정축 연간의 사실(병자호란 때의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고 한다. 꼭 구입(購入)하고 싶었으나 비밀히 숨김이 엄밀하여 어찌할 수가 없다. 박제가(朴齊家)가 마침 유리창 서사(琉璃廠書肆)에 갔다가 장정하지 않은 한 질(秩)이 책공(冊工)에게 있는 것을 보고 두어 줄을 등사(謄寫)하여 왔는데, 삼학사(三學士)가 의(義)를 지킨 사적이었다. 강(綱)에 이르기를,
“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3월 갑진에 홍익한(洪翼漢) 등을 베었다.”
하고, 목(目)에는 이르기를,
“태종(太宗)이 맹약(盟約)을 깨뜨린 두세 신하를 묶어 보내라고 유시(諭示)하자, 조선에서 아뢰기를, ‘대간 홍익한(洪翼漢), 교리(校理) 윤집(尹集),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가 일찍이 소를 올려 척화(斥和)하였습니다.’ 하고, 이들을 성경(盛京)으로 실어 보내왔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저자에서 베어 죽여, 그들이 명 나라에 가담하여 맹약을 깨뜨리고 전쟁을 일으킨 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삼학사가 의를 지킬 때에 장경(章京) 등이 우리나라 사람을 일절 금하였기 때문에, 외양문(外攘門) 밖에 나간 이후의 일은 지금까지 아득히 밝혀지지 않았다. 공사(公私)의 기록이 다 그 종말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심지어는 황당무계한 소문까지 있게 되었다. 어떤 이는 전하기를, ‘청 나라는 삼충(三忠)을 죽이지 않았다. 홍 충정(洪忠正)은 남제(南齊)로 유배되어 오삼계(吳三桂)의 군중(軍中)에 들어갔고, 윤 충정(尹忠貞), 오 충렬(吳忠烈)도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홍충정유산기(洪忠正遊山記)’를 위작(僞作)한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사(國史)에 쓴 것이 이와 같으니, 백세(百世)에 믿을 만한 일이 되기에 족하다. ‘창의단명(倡義袒明 의를 부르짖어 명 나라에 편드는 일)’이라는 한 구절은 바로 삼학사의 실찬(實贊)인 것이다. 배신(陪臣)의 목숨을 버려 종주(宗主)의 나라를 높인 일은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한 일이다. 편사자(編史者)가 미의(微意)를 붙이는 필법이 아니겠는가?
4. 연행기 제4권
■연경에서 진강성까지 경술년(1790,정조14) 9월[4일-30일]
●22일 : 오늘은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의 탄신일이다. 멀리 백료(百僚)의 기거(起居)와 근시(近侍)의 인대(引對)를 생각하니, 술잔을 들어 헌수(獻壽)하며 경하(慶賀)하는 자 구름과 같이 모일 것이다. 나는 각신(閣臣)의 몸으로 멀리 봉강(封彊)의 밖에 있으면서 백관(百官)의 반열(班列)에 따르지 못하니 궁궐을 우러러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신점(新店)의 뒤 언덕에 올라 서북으로 백대자(白臺子)를 돌아다보니 이곳은 바로 7월 초에 열하(熱河)와 연경(燕京) 길이 갈리던 곳이다. 그때는 백대자를 경유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쪽 기슭을 지나고, 구관대문(九關坮門)으로 나가 열하에 이르고, 열하를 거쳐 고북구(古北口)에 들어가 연경에 도착했었다. 연경을 경유하여 산해관을 나오고 의무려산의 남쪽 기슭을 지나 백대자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수로(水路)와 육로를 발섭(跋涉)하는 어려움도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다. 석 달 동안 고루 새산(塞山)의 안팎을 수천 리나 지나왔으니, 또한 상봉의 뜻[桑蓬之志]을 수응(酬應)하기에 넉넉하다.
●26일 : 맑음. 백탑포(白塔鋪)에서 밥을 지어 먹고 십리하포(十里河鋪)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아침에 심양에서 청심원(淸心元) 10알, 시전(詩箋) 100장, 후지(厚紙) 10권(卷), 부채 20자루, 복어(鰒魚) 100개를 부도통(副都統) 성영(成榮)에게 보내고, 또 검서(檢書) 유득공(1748-1807)柳得恭)을 시켜 내 말로 가서 전하기를,
“우리들이 초가을에 열하(熱河)를 향할 때, 각하(閣下)가 장마로 여행이 어렵고 힘들 것을 염려하여 거마(車馬)를 주어 도와주시고 백금(白金)을 증여(贈與)하셨습니다. 백금은 사사로이 주고받기에는 재물에 가까운 혐의가 있어 부득이 사양은 하였으나, 거마(車馬)는 그것을 힘입어서 의주(義州)에까지 가서 열하(熱河)에 도달할 수가 있었으며, 공손히 우리 국왕 전하의 경축(慶祝)하는 정성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번 황상께서 특별히 은혜롭게 내리신 술을 받게 되고, 수레가 편안하게 돌아오니 광휘(光輝)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것은 각하의 주신 바가 큽니다. 두어 가지 토산물(土産物)로 약간이나마 명감(銘感)의 정성을 표시하고자 하니, 웃고 받아 두시기를 빕니다.”
하였다. 성영이 답(答)하기를,
“내가 한 그러한 일은 지주(地主)로서 일상적인 예(禮)를 갖춘 것이니, 어찌 번거롭게 감사할 말한 것이 있겠습니까? 백금을 사절하신 것으로 사신(使臣)의 청렴결백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사람에게 돌려주셨습니까?”
하여, 유득공이 대답하기를,
“통사관(通事官)에게 붙여서 즉시 봉납(奉納)하게 하였습니다. 각하께서 아직 들어 알지 못하신다면 의아한 일입니다. 한번 조사해 물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성영이 말하기를,
“통관(通官)의 무리가 본래 스스로 비루합니다. 비록 중간에서 건몰(乾沒)하였다고 한들 어찌 반드시 간섭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받기를 사양하면서 주고받은 내용은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통관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가져오신 귀한 폐물은 전부를 받는 것은 미안하고 전부를 물리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하니, 약환(藥丸)과 시전(詩箋)을 감사히 받고 나머지는 받들어 돌려보냅니다. 죄송합니다.”
하였다.
성영은 만주 사람이다. 유득공은 그의 모습이 선비답고 고상하며 글씨와 서한(書翰)이 우수한 것을 크게 칭찬하여 재상(宰相)의 풍도(風度)가 있다고 하였다. 근래 만주의 문학은 도리어 중화(中華)보다도 낫다. 시랑(侍郞) 철보(鐵保) 같은 사람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심양(瀋陽)을 떠나서 혼하변(渾河邊)에 이르니 갑군(甲軍) 다섯 명이 급히 달려와서 통관(通官) 여보덕(與寶德)을 잡아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더니, 내가 연산관(連山關)에 도착한 뒤에야 여보덕이 풀려났다. 수석 역관(首席譯官) 홍명복(洪命福)을 보고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모든 왕복에 수역(首譯)을 시켜서 하지 않고 유비(柳裨)를 시켜서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나는 이미 은자(銀子)를 완납(完納)하였으니, 부도통(副都統)이 두렵지 않습니다.”
한다. 이미 크게 곤욕을 치르고 돌아온 모양이다. 한번 웃을 만하다.
●30일 : 맑음. 마천령(摩天嶺)을 넘어서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만부(灣府)의 아전이 찬물(饌物)을 가지고 왔다. 가신(家信)을 얻어 보게 되어, 비로소 서유구(1764-1845 徐有榘)가 은전(恩典)을 입고 직부전시(直赴殿試)한 것이 바로 8월 27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음악을 내리는 특별한 은총(恩寵)이 있었다고 하니, 놀랍고 기쁘고 감축(感祝)하여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연경에서 진강성까지 경술년(1790, 정조 14) 10월
●7일 : 맑음. 변문에 머물러 있었다.
중국 물화(物貨)를 교역(交易)하는 수레 28량(輛)이 일제히 도착하였다. 6월에 처음 변문에 들어왔을 때에는 부채, 종이, 가죽, 포목, 어곽(魚藿) 등 거칠고 무게가 무거운 상품 겨우 18량(輛)이었는데, 지금은 비단, 실, 향, 차(茶) 등 진귀한 중국 물화가 도리어 10량이나 되니, 상인들이 강을 건너올 때에 금제(禁制)를 범함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 상인들이 몰래 싸 가지고 간 황금이 6000냥이 될 것이다.”
한다. 조정에서 금제함이 엄중할수록 간사한 백성이 금제를 범하는 것이 더욱 심하다. 전후를 통하여 국내의 황금이 청인(淸人)에게 돌아간 것이 아마도 수만금(數萬金)에 가까울 것이다. 하늘이 보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헛되게 인국(隣國)에 제공되니 아까운 일이다.
대체로 백금(白金)을 사적으로 캐려면 반드시 땅굴을 몇 길이나 뚫고 대장간을 몇 곳이나 설치해야 하므로 공력(工力)이 매우 많이 든다. 그래서 그것을 금지하기가 쉽다. 그러나 황금을 사적으로 캐는 것은 혹은 밭이랑 가에서 혹은 시냇가에서 사토(沙土)를 파서 걸러서 깨끗이 씻으면 되는 것이므로 공력(工力)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그것은 금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큰 이득(利得)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을 금하는 법의 쓸데없이 이름만 있고 실상은 간민(奸民)의 소굴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많이 생산되는 곳에 금점(金店)을 설치하고 관에서 관리하면서 사적으로 캐는 것을 살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8일 : 흐리다가 밤에는 바람이 불고 눈이 왔다. 변문에 머물렀다.
수역(首譯) 홍명복(洪命福)을 봉황성에 보내어 성수위(城守尉)와 세관(稅官)을 청해 왔다.
변진(邊鎭)을 설치한 것은 장차 금조(禁條)를 엄하게 하여 사명(使命)을 달성함으로써 중국을 높이고 원방(遠方)을 회유(懷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변관(邊官)은 다 사적인 이익을 좋아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만주 사람들이다 보니, 우리 사신 또한 몸을 조촐하게 하고 법을 지킬 수가 없다. 저 사람들의 단속이 점점 죄어들고 재물을 조사함은 날로 더하여 가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임이 더욱더 생기어 금법을 범함이 날로 심해져 간다. 장래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이번 사행(使行)의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이른바 성수위(城守尉)라는 자가 우리나라의 사상(私商)을 엿보아서 몰래 말 24필을 샀으며, 갑군(甲軍)을 보내어 설리참(雪裏站)에서 길을 막고 사상을 공갈하여 백금(白金) 240냥을 얻은 뒤에 놓아 보내곤 하였다. 조정에서 만약 서변(西邊)과 서로 화목하고 편안하게 지내고자 한다면, 잠깐 상호 교역을 중지하는 것이 상책이고, 사신의 선발을 특별히 선택하는 것이 그다음 방법이다. 또 변문(邊門), 성경(盛京), 산해관, 연경의 4처(處)에서 주는 백금은 곧 역관들의 사사로운 일이고 예부(禮部)에서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다 일행의 팔포(八包) 선덕(宣德) 연간에 역관의 여비 조로 사람마다 인삼 80근을 가지고 가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이것을 팔포라고 한다. 뒤에는 백금과 잡물을 대신 가져가게 하였다. 중에서 수역(首譯)이 담당하여 처리해 왔는데, 영묘(英廟)의 신해년, 임자년 사이에 수역 김경문(金慶門)이 공용(公用)이라고 일컫고 조정에 보고한 일이 있었다.
이제까지 60여 년 동안 사행이 갈 때마다 공용이란 명목으로 소비하는 것이 문득 백금(白金) 5, 6천 냥이 된다. 그때 김경문은 전에 없었던 법을 처음 시작하였다고 하여 먼 곳에 귀양 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긴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아직까지도 고치지 않으니, 실로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한번 글을 예부(禮部)에 올리면 또한 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관(譯官)들이 사신을 공갈하고 위협하여 갖은 계책으로 막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으로 변문(邊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하는 일이겠는가? 반드시 중간에서 그대로 삼켜 버리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일 것이다.
●22일 : 복명(復命)하였다.
주상이 희정당(煕政堂)에서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경 등은 복이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압록강을 건넜을 때에 종사(宗社)의 큰 경사를 들었고, 열하(熱河)에 도달하여서는 좋은 소식을 황제에게 전하여 아뢰게 되어 은언(恩言)이 정중하였으며, 자문으로 청한 것은 순조로이 이루어졌고, 여러 번 만수연(萬壽宴) 자리에 올랐으며, 자유롭게 서산(西山)의 좋은 경치를 관람하였고, 옥배(玉盃)를 황제가 친히 주시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예전에 없었던 특별한 은총(恩寵)이다. 나는 기정장본(起程狀本)을 보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하였다. 이에 황인점(黃仁點)과 서호수(徐浩修)는 일어나 아뢰기를,
“하늘의 돌보심과 열조(列祖)의 묵묵한 도움으로 원자(元子)가 탄강(誕降)하는 운(運)을 만났고, 나라에는 종묘의 제사를 주장할 일을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오직 우리 성상(聖上)의 크신 덕(德)이 하늘의 마음을 잘 향유(享有)하여 이 큰 경사를 얻은 것입니다. 신 등이 봉황산에 이르렀을 때에 공손히 길보(吉報)를 받들어 일행(一行)이 머리를 모아 봉함을 열고 기뻐서 뛰며 춤추었습니다. 변문(邊門) 안의 통관(通官), 장경(章京)의 무리도 다 떠들썩하게 와서 역관(譯官)에게 축하하였습니다. 백성의 떳떳한 마음이 다같이 그러한 것으로서 국경(國境)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의 건강은 어떠하며 정령(政令)은 어떠하던가?”
하자, 황인점이 아뢰기를,
“얼굴 모습은 60여 세의 사람 같고 보는 것과 듣는 것, 걷는 것도 또한 장년(壯年) 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령은 전에 비하여 자못 해이해졌으며, 화신(和珅)을 총임(寵任)하여 그 권세가 지나치게 무거워 민심이 매우 답답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고, 서호수는 아뢰기를,
“화신은 비록 권세가 무거우나 수각로(首閣老) 아계(阿桂)는 청렴하고 검소하며 단아(端雅)하여서 크게 백성들의 여망을 받고 있습니다. 황제는 또 그에 대한 대우가 변치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조정이 그에게 힘입어 유지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큰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바로 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도 천하를 가져다가 태산처럼 안정된 곳에 둘 만한 기상이 있던가?”
하자, 서호수가 아뢰기를,
“반드시 그의 덕과 도량이 능히 그와 같지는 못하였으나, 신이 10여 일 동안의 잔치 자리에서 여러 번 더불어 상대하면서 그의 모습을 살펴보니, 단정하고 조심스럽고 정중하여 재상의 풍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신에 대해서도 조금도 아첨하거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에게 달려 나아가서 말을 붙이곤 하였습니다. 그가 안으로 지조를 지킴이 있다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경 등과 더불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누가 통역하였는가?”
하자, 서호수가 말하기를,
“통관(通官)이 통역한 말을 예부 상서가 전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재차 신 등을 불러 보고 긴 말을 하고자 하면서 청어(淸語)나 몽고어를 할 줄 아는 자가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신 등이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더니, 황제가 매우 답답해했습니다. 대체 사대(事大)하는 일 중에 가장 긴급하고도 절실한 것이 바로 청어입니다. 그런데 역원(譯院)의 청학(淸學)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지고 있습니다. 신 등의 이번 사행(使行)에 데리고 간 이혜적(李惠廸)은 이름은 비록 청학(淸學)을 했다고는 하나 으레 쓰는 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역원(譯院)에 권장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다. 경 등은 이제 이것을 가지고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계하(啓下)하여 특별히 해원(該院)을 계칙(戒飭)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