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원직지(燕轅直指)
김경선(金景善)1788-1853
연원직지는 1832년(순조 32) 6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김경선(金景善)이 청나라에 다녀온 사행기록(使行記錄)이다. 이 책은 저자가 1832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경보(徐耕輔), 부사 윤치겸(尹致謙)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6월 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9개월 여간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어느 연행록보다 방대한 분량으로 되어 있다.
권1· 2는 「출강록 出疆錄」으로 북경(北京)의 관소에 도착하기까지 일기와 기(記)를 수록하였다. 권3∼권5는 관소에서 머물 때의 기록인 「유관록 留館錄」 상· 중· 하이다. 권3의 「유관록」 상은 1832년 12월까지의 기록, 권4의 「유관록」 중은 1833년 1월까지의 기록, 권5의 「유관록」 하는 북경을 출발해 귀국하기까지의 기록이다. 권6은 「유관별록 留館別錄」으로 되어 있다. 「유관별록」은 저자의 주에 “한 곳에다 기록할 수 없는 견문을 분류해 기록하였다.”라고 했듯이 한 항목에 들어갈 수 없는 것만을 별도로 작성한 것이다. 중국의 지리· 문물· 제도·풍속 등속에서 그 기본이 되는 것만을 골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김경선은 1830년(순조 30) 진천현감으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39년(헌종 5) 이조참의가 되고, 1841년(헌종 7) 대사성에 취임하였다. 1843년(헌종 9)에 전라도관찰사, 1850년(철종 1)에는 우참찬이 되었는데, 이때 진주사(陳奏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와 1853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연원직지 서(燕轅直指序)
연경(燕京)에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행문(紀行文)을 남겼는데, 그중 3가(家)가 가장 저명하니, 그는 곧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다.
1. 연원직지 제1권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6월
○20일 도정(都政)에,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7월
○정사(正使) 서경보(徐耕輔 1771-1839), 부사 윤치겸(尹致謙 1772-?)과 사역원(司譯院)에서 회동(會同)하였다.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10월
○17일 문서의 원도수(文書原道數)
성절표(聖節表) : 정본 1통, 부본 1통. 방물표(方物表)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禮部咨) 1통.
황태후장(皇太后狀) 1통, 예부자 1통.
중궁장(中宮狀) 1통, 예부자 1통.
동지표(冬至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황태후장 1통, 예부자 1통.
중궁장 1통, 예부자 1통.
정조표(正朝表) : 정본 1통, 부본 1통. 방물표(方物表)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황태후장 1통, 예부자 1통.
중궁장 1통, 예부자 1통.
세폐주본(歲幣奏本) 1통, 예부자 1통. 세폐는 황태후ㆍ황후에게 모두 예물이 없음.
책봉사은방물 이준사은표(冊封謝恩方物移準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사물사은방물 이준사은표(賜物謝恩方物移準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세손궁 사물사은방물 이준사은표(世孫宮賜物謝恩方物移準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동지겸사은사신 참연사은표(冬至兼謝恩使臣參宴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사물사은표(賜物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표민출송사은표(漂民出送謝恩表) : 정본 1통, 부본 1통, 예부자 1통.
삼절방물 이준회자(三節方物移準回咨) : 1통.
유구국 표한입송연유자(琉球國漂漢入送緣由咨) : 1통.
예물총단(禮物摠單) 1통.
공폐물종(貢幣物種)
성절(聖節)
황제(皇帝) : 황세저포(黃細苧布) 1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20필, 황세면주(黃細綿紬) 30필, 자세면주(紫細綿紬) 2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염석(龍文簾席) 2장, 황화석 2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2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20장, 백면지(白綿紙) 1400권, 달피(獺皮) 20장, 육장부 유둔(六張付油芚) 10벌.
황태후(皇太后) : 홍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자세면주 20필, 백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滿花席) 10장, 잡채화석 10장. 황후에게의 예물은 황태후와 같음.
동지(冬至)
황제 : 황저포(黃苧布) 10필, 백저포 20필, 황세면주 2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20장, 만화석 20장, 만화방석 20장, 잡채화석 20장, 백면지 1300권.
황태후 : 나전(螺鈿) 빗 함[梳函] 1사(事), 홍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자세면주 20필, 백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황후에게는 황태후와 같음.
정조(正朝)
황제 : 황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황세면주 2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15장, 만화석 15장, 만화방석 15장, 백면지(白綿紙) 1300권.
황태후 : 나전(螺鈿) 빗 함[梳函] 1사, 홍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자세면주 20필, 백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滿花席) 10장, 잡채화석 10장. 황후에게는 황태후와 같음.
세폐(歲幣)
황제 : 백저포(白苧布) 200필, 홍면주 100필, 녹면주(綠綿紬) 100필, 백면주 200필, 백목면(白木綿) 1000필, 생목면(生木綿) 2800필, 오조룡문석(五爪龍文席) 2장, 잡채화석 20장, 녹비[鹿皮] 100장, 달피(獺皮) 300장, 청서피(靑鼠皮) 300장, 호요도(好腰刀) 10자루, 대호지(大好紙) 2000권, 소호지(小好紙) 3000권, 쌀 40포. 1포에 8두(斗)가 듦. 황태후와 황후에게는 모두 예물이 없음.
무릇 사은(謝恩)이, 전개(專价 전위해서 보내는 사신)일 때에는 예물(禮物)이 있고, 순부(順付 어떤 편을 이용한 것)일 때에는 예물이 없다. 전개 때의 예물은,
황제 : 황세저포 30필, 백세저포 30필, 자세면주(紫細綿紬) 20필, 황세면주 20필, 백세면주 30필, 용문염석 2장, 황화석 15장, 만화석 15장, 잡채화석 15장, 백면지(白綿紙) 2000권.
황태후 : 홍세저포 10필, 백세저포 10필, 백세면주 20필,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황후에게는 황태후와 같음. 이나, 이번은 모든 사은이 다 순부(順付)이므로 예물이 없다.
○20일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사람 둘이 우리나라에 표류해 왔었는데, 이번 길에 데리고 가 북경에 넘기려 한다.
○23일 또 30리를 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향청(鄕廳) 곡산 지점(谷山支店)에 숙사를 정하였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방기(房妓)가 있다. 양서(兩西) 기생들이, 북경(北京) 가는 사람에게 천침(薦枕)하는 것을 별부(別付)라 칭하는데, 미친 듯이 분주하여, 심지어 하룻밤 동안에 3, 4군데를 편력(遍歷)하는 자까지 있다고 한다.
○29일 평양 기생은 본래부터 볼만하다고 하는데, 옛날 보던 자는 하나도 적(籍)에 없고, 간혹 와서 뵙는 자는 모두 촌뜨기뿐이었다. 붉은 꽃은 다 떨어지고 푸른 잎만이 그늘을 이루었으니, 뜬 세상 세월이 어디라고 바쁘지 않으랴마는 이들에게는 더욱 심한 것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즐겁지 못하게 하였다. 자리를 차지하여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자는 모두 다 을해년 이후에 태어난 자들이니, 참으로 이른바 ‘유랑이 간 뒤에 심은 것들[劉郞去後栽]’이다. 만약 취미를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가하게 한다면, 전배(前輩)보다 못하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리 가혹하지는 않을 것 같다.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3일 읍내 기생 선란(仙蘭)은 나이가 27세인데 시(詩)로 유명했다. 일찍이 정사(正使)였던 판서 권상신(權常愼)이 연경에 가는 것을 전송하여 시를 읊었다.
가오 가오 평안히 가오 / 去去平安去
머나먼 길 만리가 넘는다오 / 長程萬里多
변방 구름 달 밝은 밤에 / 塞雲明月夜
외로이 우는 기러기 소리를 어찌하리오 / 孤叫鴈聲何
권 판서가 고교보(高橋堡)에 이르자 병이 나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시참(詩讖)이라 하였으니, 대개 고교(高橋)와 고규(孤叫)가 발음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단고(丹皐) 이종(李從)이 연경에 갈 때 또한 관계한 바 있다 하기로, 다담(茶啖)을 조금 싸서 보냈다.
○17일 의주에 머물렀다.
아침에 방물(方物)을 점검하여 모두 궤(櫃)로 봉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정사, 부사 및 주수와 용강(龍岡)ㆍ용천(龍川) 원이 백일원(百一院)에 모였다. 백일원은 서문 밖 5리쯤에 있는데, 무사(武士)가 준마(駿馬)를 타고 가벼운 갖옷에 궁시(弓矢)를 차고 창을 세워 든 채 달려 나오며 앞에서 치구한다.
늘어앉은 다음에 무사가 말 타고 활 쏘는 것과 기녀(妓女)가 말을 달리며 칼 재주 부리는 것을 구경하였다. 대개 이는 의주 기생들의 특기로서, 사신 행차가 여기에 이르면 으레 이 모임을 하여 객회(客懷)를 위로하였는데, 지금 보면 겨우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할 뿐이니, 이것 또한 옛날만 못하여 그러는 것인 듯하다.
○18일 저녁 무렵에 용강 원과 동문루(東門樓)에 올라 두루 둘러보고 이어 통군정(統軍亭)에 이르니 정사와 부사가 이미 와 있다. 기악을 벌이고 또 군악을 벌였으며, 봉화 올리는 것을 구경하였다. 달이 뜬 뒤 다시 정사, 부사 및 일행 여러 사람들과 기생들을 데리고 압록강으로 나가 썰매를 타다가 밤중에야 돌아왔다.
○21일 그런데 지금은 원포란 것이 한갓 헛이름만 있을 뿐이고, 금법에 해당되는 물건으로는 다만 홍삼(紅蔘) 한 가지가 가장 이득을 노리는 것이다. 법은 한층 엄중하나 금지는 더욱 해이되어 이른바 강변 수색 검문이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곡삭희양(告朔餼羊)에 지나지 않는다. 상리(商利)가 날마다 줄어들고 공화(公貨)가 해마다 축소되는 그 병폐가 여기에 있는데 괴롭게도 고칠 만한 좋은 방책이 없다고 한다.
수색과 검문이 끝나자 다담(茶啖)을 조금 먹고 나서 행구(行具) 및 표문(表文), 자문(咨文)과 방물을 점검하여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여러 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날 일행은 모두 국경을 나서는 옷으로 고쳐 입었다. 정사와 부사는 쌍교(雙轎)를 탔으며, 나는 부사 조카의 옥교(屋轎)를 빌려 탔으니, 대개 책문(柵門) 밖에서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타기 어렵기 때문이다.
○22일 가경(嘉慶) 무렵에, 우리나라의 수송하는 노고를 생각하여 방물이 책문에 도착한 뒤 봉성 장군(鳳城將軍)에게 교부하여 봉성에서부터 차례로 전달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한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세를 받지 않았는데, 지금 수레를 세내어 싣고 가는 것은 단지 사행의 짐과 상인들의 개인 물건뿐이다. 큰 수레같이 육중한 것이 아니고 귀천(貴賤) 할 것 없이 항상 타고 통행하기 위한 것이니, 이를 태평거(太平車)라고 부른다.
거슬러 헤아려 보건대, 10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행은 하나도 수레를 세내어 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비장, 역관 이하 상고에 이르기까지 수레 타지 않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말 타는 것을 수치로 여겨 끌고 간 역마는 단지 하례(下隷)들이 타는 데에 충당한다. 일행의 차량 수를 다 계산하면 100여 대가 넘고, 은(銀)으로 치면 3000여 냥이 된다. 수레 하나의 세가 30냥임. 돌아올 때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이에서도 또한 사치와 낭비의 버릇이 고질적인 폐단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25일 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기록 :1832년 7월
2. 연원직지 제2권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1일-19일]
○1일 심양 세폐기(瀋陽歲幣記)
심양에 바치는 세폐(歲幣)는 원래 정식(定式)이 없고, 해마다 북경(北京)의 예부(禮部)에서 앞당겨 공문을 보내면 그 수량대로 바쳤다. 금년은 녹주(綠紬) 100필(疋), 홍주(紅紬) 100필, 생상목(生上木) 300필, 호대지(好大紙) 150권(卷), 호소지(好小紙) 2210권, 찹쌀[粘米] 3석 5두 3승이었다. 다 바치고서 그 나머지 물종(物種)은 수효에 맞추어 심양의 수레를 관리하는 장경(章京)에게 교부하였다.
○모창기(帽廠記)
모창이란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다. 중국 사람이 쓰는 모자와 우리나라의 관모(冠帽)는 모두 여기서 생산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에 두 번 먹지 못하거나 밥이 사발에 가득하지 않으면 배를 주린다고 한다. 무릇 배를 채우는 것은 오직 곡식에 있다고 알기 때문에 곡식 한 가지가 흉년이 들면 속수무책으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니, 이루 탄식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우리나라는 토질이 양에게 맞지 않아서 기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요동, 심양 이후로 땅이 모두 자잘한 모래이니 우리나라의 수초(水草)가 무성한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따금 보면 양, 돼지를 100마리, 1000마리씩 떼지어 들판에 내어 기른다. 몇 사람이 손에 장대를 들고서 천천히 그를 따른다. 양들은 한 마리도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뛰는 놈이 없고 머리를 나란히 하여 먹이만 구하여 마치 기러기 떼와 같았으니, 이처럼 길들이기를 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육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방법이 잘못되었는데도, 토질이 맞지 않는다고 책망만 하니, 나는 옳은 줄을 모르겠다.
3. 연원직지 제3권
■유관록(留館錄)상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19일-30일]
○22일 식후에 정사와 부사 및 여러 사람과 더불어 수레를 빌려 타거나 혹은 말을 타고서 정양문(正陽門)을 지나 선무문(宣武門)을 채 못 가서였다. 길가에 한 채의 큰 집이 있었는데, 제도가 매우 기이하고 교묘하였다. 물어보니, 이것은 서천주당(西天主堂)이었다. 또 수백 보를 가서 시헌국(時憲局)을 지나 상방(象房)에 이르렀다. 따로 천주당기(天主堂記), 시헌국기(時憲局記), 상방기(象房記)가 있다. 그대로 선무문을 나와 유리창(琉璃廠)을 경유하여 조금 쉬면서 서점에서 차를 들었다. 따로 유리창기(琉璃廠記)가 있다. 악왕묘(岳王廟)에 가서 주방(廚房)에서 율무를 내어 놓기에 요기한 후 묘(廟) 안을 두루 돌아보고 따로 악왕묘기(岳王廟記)가 있다. 정양문을 거쳐 관소로 돌아왔다.
○23일 저녁에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사신이 도착하였다. 따로 유구관기(琉球館記)가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표류한 사람 26명을 끌고 와 예부에 넘겼는데, 본부(本部 유구국을 말함)로부터 우리 일행에 압송되어 와서 대자리로 얽어 만든 긴 집에 거처케 하고는 회정(回程)을 기다려서 데리고 가라 하였다.
夕間。琉球國使臣來到。別有琉球館記 率我國濟州漂人二十六人。到付禮部。自本部押送于行中。以簟席搆成長屋以處之。待回程將携去云。
○24일 몽고관기(蒙古館記)
몽고는 더러 달자(韃子)라고도 한다. 원 순제(元順帝)가 북쪽으로 달아나고 난 뒤에 48부락(部落)으로 나뉘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 의산(醫山) 바깥은 모두 그들의 땅이다. 그곳에는 오곡(五穀)과 궁실(宮室)이 없으며, 그 사람들은 늘 낙타를 타고서 좋은 수초(水草)를 좇아 산다. 궁전(穹氈)으로 집을 삼고 사냥으로 업을 삼아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 이런 것은 대개 북번(北藩)의 습속으로서 옛날부터 그러하였다.
명 나라 중엽부터 이미 여러 차례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청 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자못 그들의 병력을 빌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공을 믿어 교만하고 사납기가 당 나라 때의 돌궐(突厥), 회흘(回紇)과 같았다. 그러나 황제가 그들의 공을 생각하고 또 그들이 강함을 기특하게 여겨 여러 추장(酋長)을 친왕(親王)과 같이 대우하여 반드시 황녀(皇女)를 시집보낸다. 일찍이 몽왕(蒙王) 및 그의 처가 정조(正朝)에 참여하려고 연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들으니,
“그 나라에 있을 때 조례(皁隷)와 더불어 같은 전막(氈幕)에서 침식(寢食)하며 대소변(大小便)을 같이하여 구별이 없으므로 황녀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하였다.
숙위(宿衛)를 위해 와서 머무는 자들은 항상 수천 명이며, 그들의 관사는 옥하관 동쪽 수백 보 바깥에 있었다. 벽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는데 집은 없고 모직으로 된 천막으로 잠자는 곳을 만들어 두었을 뿐이다. 그 속에서 기르는 개는 매우 크고 사나워서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문다.
세시(歲時)에는 또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람 수도 많다.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데 모두 누런 물을 들인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어 썼고, 몸에는 누렇거나 흰 가죽옷을 입었으며, 이[虱]를 잡아 입에 털어 넣어 삼키고, 먼지와 때가 온몸에 끼어서 보기에 매우 추했다.
벼슬을 하거나 태학(太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익히는 자는 옷과 모자가 만주의 제도와 같았으나 단지 누런색을 숭상하는 자들이 많았다. 몽고인으로 승려가 된 자를 라마승(喇嘛僧)이라 한다. 승려 가운데 녹미(祿米)가 가장 많은데, 이들 또한 모두 누런 옷을 입었다. 승려나 속인을 막론하고 누런 옷 입기를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황제와 같은 고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황제 또한 그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하례(下隷)들이 그들의 추함을 보고 반드시 꾸짖고 욕을 하면 그 사람들은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하나 대강 그 능멸하는 것을 알아서 눈을 흘겨보고 심하면 때리려고 한다. 또 황제가 우리나라를 저들보다 더한 예절로 대우하므로 늘 분노를 품고 한 번 분풀이하려고 생각한다 하니, 유달리 두려울 만한 것이다.
○25일 제주 표인 문답기(濟州漂人問答記)
밤에 표류인들을 온돌방 앞에 불러다 놓고 묻기를,
“너희들은 본주(本州 제주도)로부터 몇 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로 어디를 향하여 배를 띄웠고 며칟날 무슨 바람을 만났으며, 또 며칟날 유구국 어느 지방에 배를 대었고 그곳에 머문 지 몇 달 만에 출발하였으며, 또 몇 달 만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대략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표류인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난해인 신묘년(1831, 순조 31) 11월 23일 술시(戌時)쯤에 장사하러 내지(內地)로 가려고 33인이 한 배를 함께 타고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출발하였다. 그 다음날 오시(午時)에 역풍(逆風)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치솟았다. 배는 나는 듯이 가면서 파도에 따라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니, 여러 사람이 어지러워 넘어졌으며 산 사람의 안색이 없었다.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어서 배가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다만 때때로 크고 작은 섬들이 솟구치는 파도 바깥에서 나타났다가 숨었다. 혹 울창한 수목도 있었고, 혹 깎아지른 석벽(石壁)도 있어 올라 보려 하였으나 배를 댈 수가 없었다. 또 정신은 더욱 혼미한 데다가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절하였다. 이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연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조금 들어서 눈을 뜨고 둘러보니, 거처하고 있는 곳이 배가 아니고 집이었으며, 보이는 것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말을 하여 물어볼 기력도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나 점차로 정신이 수습되어서 일어나 앉아 서로 보니 26인만이 겨우 한 가닥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으며 또 2인이 옆에서 구호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문답을 주고받았다.
“여기는 어느 나라 어느 곳인가?”
“이곳은 유구국에 소속된 이강도(伊江島)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 사람은 역관이요, 한 사람은 가노이다.”
“우리들 33인 중에 7인과 배 안에 있던 물건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언제 이곳에 배가 닿았고 오늘은 며칠인가?”
“오늘은 12월 11일이다. 그대들의 배가 이달 7일에 이 섬에 닿았다. 그래서 문정(問情)하러 가 보았더니, 배 안에는 27인만이 있었고 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으며 다른 물화(物貨)는 없고 죽사모(竹絲帽) 이른바 제주의 양대(涼臺)임. 몇 입만이 있었다. 드디어 죽은 사람은 물가 언덕에 매장하고 교자(轎子)로 여러분을 메고 이곳에 데려왔다. 약수와 미음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간호한 것이 이제 5일이 되었다.”
그런데 역관이 지껄이는 우리 말이 겨우 더듬더듬 얽어 놓은 것이어서 똑똑히 다 알아서 요량할 수는 없었으나, 그 말뜻이 대개 위와 같았다.
또 며칠 있다가 비로소 여러 동료들과 함께 배를 대었던 곳에 가 보니, 돛대는 이미 다 꺾여 있었고 썼던 패랭이[平涼子]는 언덕 옆에 버려져 있었다. 여섯 사람은 언제 어디서 빠져 죽었는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의 외로운 분묘(墳墓)는 높다랗게 만 리 이국의 쓴 안개와 독한 장기(瘴氣)가 서린 물가에 홀로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드디어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니, 역관이 옆에서 위로하였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여섯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시체는 마땅히 배 안에 있었을 것이고, 또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의심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득이 그 집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강도(伊江島)는 길이가 7리, 너비가 5리이다. 토지는 기름지고 평탄하며, 민가는 즐비하고 지키는 벼슬아치가 있어 우리나라의 한 고을과 비슷했다.
다시 며칠이 지난 12월 24일에, 역관이 비로소 우리를 압송하여 국성(國城)으로 갔다. 청강도(淸江島), 북강도(北江島), 동북도(東北島)를 지나서 성 못 미쳐 3리쯤에 전총역(磚總驛)이 있었다. 역 안에는 초가집 13칸이 있었다. 이 역은 아마도 외국 사람들을 구제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홍제원(弘濟院)과 같은 곳이라 하겠다. 이른바 삼사관(三司官)이 전례대로 표류인의 옷과 음식의 공급을 관장하였는데, 나와서 옷과 모자를 모두 본을 떠 가지고 갔다. 며칠이 못 되어 옷을 만들어 가져왔는데, 베는 우리나라의 면포(綿布)와 같았지만 얇아서 해지기 쉬웠으며, 갓은 죽사(竹絲)로 성글게 엮어 검은 종이를 붙여서 오래 쓸 수가 없었다. 하정(下程)은 매일 세 끼에 쌀 각각 8홉(合)을 준다 하였으나, 밥은 겨우 반 주발이었으며 반찬은 어물류(魚物類), 두부, 채소, 소금, 장 따위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이 많았다. 명절[節日] 때마다 특별한 하정(下程)이 있어, 소주 1병, 과실, 떡 따위를 보내 왔는데, 맛이 모두 입에 맞았다. 세시(歲時)의 절차는 우리나라 풍속과 대략 같았다.
그곳의 왕기(王畿)는 사방이 각각 300리가 되지 못하며, 그 바깥의 이강(伊江), 청강(淸江)과 같은 여러 섬들이 바다 가운데에 둘러 있다. 왕성(王城)의 둘레는 10리에 불과한데, 중산(中山)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러 중산왕(中山王)이라 일컫기도 한다. 지역이 남극(南極)에 가까워 겨울 날씨가 봄과 같다. 섣달에 모내기를 하여 다음해 5, 6월에 수확하며 2월에 보리와 오이를 먹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모두 유순하고 나라는 작고 힘은 약하다. 일본과 멀지 않아 일본 사람들이 늘 와서 교역(交易)하는데, 그들을 심히 두려워하여 왕성에 들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해 5월에 지나가던 안남(安南)의 배가 근처에 와서 정박하고는 왕성에 들어가 보기를 청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군사를 내어 지키기까지 하였다 한다.
표류인들이 전총역에 머물고 있을 때에, 바깥에 나와 한가하게 거닐며 구경하였으나, 그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궁실(宮室)ㆍ성궐(城闕)의 제도와 종묘사직ㆍ조정ㆍ시장의 위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바깥에서 바라보니, 중산의 한 줄기가 높이 하늘 속에 꽂혀 있었으며, 산 전체가 돌로 되었는데 돌 빛깔은 푸르고 윤기가 났다. 맥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다를 건너와서 우뚝 솟아난 중조(中祖)라 생각된다. 산 아래에 있는 왕의 궁궐은 그다지 장려하지 않으나 원앙와(鴛鴦瓦)가 순수한 녹색으로 해에 비쳐 찬란히 빛나 그 광경이 눈길을 빼앗았다. 여리(閭里)와 가방(街坊)은 대략 작은 규모였다.
국속(國俗)으로 무릇 빈객(賓客), 제사, 혼인, 상장(喪葬)에는 모두 고례(古禮)를 쓰되 국제(國制)를 참작한다. 무릇 시사(市肆)의 매매는 모두 여자들이 주관한다. 귀신을 심히 숭상하여 매일 산천과 절과 도관에 기도를 드리는데 여기에도 또한 여자가 많았다. 남자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니기도 한다. 남녀의 분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아서 여자가 길을 가다가 남자를 만나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양산을 기울여 자기 얼굴을 대략 가리며, 남자 또한 돌아보지 않고 갔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대략 중국과 같아서 온돌을 만들지 않고 대자리를 깐 평상(平床)이 있을 뿐이었다. 주방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었다. 복식(服飾)으로, 조사(朝士)의 장복(章服)에 대하여는 이미 유구관기(琉球館記)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들의 일반 백성들은 겨울이나 여름을 가리지 않고 모두 홑바지를 입고 위에는 두루마기[周衣]를 걸쳤으며 간혹 홑두루마기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버선이나 신발을 신지 않는데, 손님이나 제사 같은 일이 있을 때면 비로소 버선과 신발을 신는다. 신발 모양은 우리나라의 미투리[繩鞋]와 같은데 다만 앞에 두 귀가 있었다. 머리에 쓰는 것으로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머리쓰개를 썼는데 대략 치포관(緇布冠)과 비슷했으며, 나다닐 때에는 갓을 썼는데 우리나라의 삿갓과 같았다. 천인들은 온몸을 발가벗었고 다만 두어 자의 거친 베로 궁둥이와 허벅지만을 가렸을 뿐이다.
음식은 대략 우리나라와 같으나, 대개 감자[甘藷]를 항식(恒食)으로 삼았다. 그곳의 산물로는 해물(海物), 곡물, 채소 등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석류(石榴), 감자(柑子), 귤(橘), 유자(柚子)는 더욱이 그곳 땅에 적합하였다. 금, 은, 동, 주석은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였으니, 한 구역의 낙원이라고 할 만했다. 더욱이 사람들의 성품이 부드럽고 착한 데다가 예의를 조금 알며 부귀(富貴)하다고 교만하지도 않고 모질게 싸우거나 용맹을 좋아하는 풍습도 없다 하였다. 부드럽기는 남음이 있고 강하기는 부족하니 곧 《중용(中庸)》에 이른바 남방(南方)의 강함이다.
그 나라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중국에 조공(朝貢)한다. 중국에서는 유구 사람들이 한어(漢語)를 해득하지 못한다고 하여 옛날에 몇 사람을 유구에 보내 한어를 가르치게 했다. 그 사람들이 대대로 구미촌(九尾村)에 살면서 역학(譯學)으로 생업(生業)을 삼았다 한다. 그리하여 진공(進貢)하는 해마다 세 사신 이외에 구미촌 사람을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우리나라의 역관(譯官)과 같다.
사행(使行)은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는데 세폐(歲幣)인 유황(琉璜), 동철(銅鐵), 황금 등의 물건을 한 배에 실었다. 또 교역선(交易船) 한 척에는 180여 인이 타고 금, 은, 상서(象犀), 관계(官桂) 등을 실었다. 금년 8월 24일에 배가 방패포(邦霸浦)에서 출발하였는데, 뱃머리에는 건령귀(乾靈龜)를 놓고서 유방(酉方)을 향하여 출발한 지 3일 만에야 큰 바다로 나왔다. 무수한 작은 섬들을 지나, 순풍(順風)에는 가고 역풍(逆風)에는 멈추면서 9월 그믐에 복건성(福建省) 어느 땅의 백호문(白虎門) 밖 포구에 정박하였다. 윤9월 6일에 민현(閩縣) 착오가 있는 듯하다. 에 도착하여 육지에 내렸다. 수로로 9만 리를 온 것이다.
복건[閩]의 관소(館所)에 머문 지 20여 일에 교역선에 실었던 물건을 풀어 관소에 들여왔다. 같이 온 180인은 떨어져 남아 민중에서 물건들을 매매한다고 한다. 민은 옛날 위타(尉陀)의 칠군(七郡)에 속하였으니, 바로 중주(中州)의 강역(彊域) 밖이었다. 송 나라 때에 인문(人文)이 점점 발달되어 주자(朱子)가 태어나자 드디어 염락(濂洛)과 함께 일컫게 되었으니, 대개 그 산수(山水)의 명숙(明淑)함을 알 만하겠다.
들으니, 그곳은 마을들이 서로 접해 있고 다방과 주루(酒樓)가 물가에 비친다고 하였으니, 그 민물(民物)의 번화함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10월 5일에 민중의 관소에서 출발하였다. 진공(進貢)하는 물건들은 경유하는 여러 주현(州縣)에서 차례차례로 바꾸어 실었다.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는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서장관(書狀官)은 수레를 타고 종인(從人) 및 표류인들도 모두 수레를 함께 탔다. 현마다 차례로 먹을 것을 주었으며 표류인에게는 각각 털옷 하나씩을 주었다. 일행이 홍산교(洪山橋)ㆍ수구역(水口驛)ㆍ고전현(古田縣)ㆍ청풍역(淸風驛)ㆍ남평현(南平縣)ㆍ금사역(金沙驛)ㆍ연평역(延平驛)을 지났다. 연평역은 연평현 지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연평(李延平)의 옛집을 찾아보았더니, 시내와 산들이 청절(淸絶)하였으며 그 자손이 모두 수십 집이 있어 아직도 시서(詩書)를 숭상하여 옛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 대횡역(大撗驛)ㆍ태평역(太平驛)ㆍ건안현(建安縣)ㆍ건안역(建安驛)을 지났다. 고가(古家)의 후예가 여기에 많이 살았으며, 벼슬아치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누대(樓臺)와 임원(林園)이 마주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참으로 이름난 고을이었다.
다시, 건양현(建陽縣)ㆍ구령현(甌寧縣)ㆍ공점역(孔店驛)ㆍ영두역(營頭驛)ㆍ마람역(馬嵐驛), 인화역(仁和驛)ㆍ임강역(臨江驛)ㆍ포성현(浦城縣)ㆍ어량역(漁梁驛)ㆍ구목역(九牧驛)ㆍ팔도역(捌都驛)ㆍ정호진(靖胡鎭)ㆍ구주부(衢州府)ㆍ통화교(通和橋)ㆍ용유현(龍游縣)ㆍ건덕현(建德縣)ㆍ난현(蘭縣)ㆍ동려현(桐廬縣)을 지났다. 이곳들은, 《여지고(輿地考)》를 상고하건대, ‘우공(禹貢)’에 있는 옛날의 양주(揚州)로 동쪽은 오(吳) 나라가 되고, 남쪽은 월(越) 나라가 되고, 북쪽은 초(楚) 나라가 되는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이 이곳이다. 실로, 고적이 볼만한 것이 많다. 광릉(廣陵)의 가을 파도, 동안(同安)의 저녁 종과 같은 것이며, 회음성(淮陰城) 아래에는 아직도 한신(韓信)의 낚시터가 전해지며, 거소촌(居鄛村) 가운데에는 범증(范增)이 살던 곳을 고증할 수 있었다. 여릉(廬陵)은 내한(內翰) 구양수(歐陽脩)의 고택(古宅)이요, 임천(臨川)은 왕형공(王荊公)의 구관(舊貫)이었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깃들어 있었고, 항적(項籍)은 음릉(陰陵)에서 곤핍(困逼)을 당하였다. 심양(潯陽)의 달밤에는 백 사마(白司馬)의 비파 곡조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산음(山陰)의 저녁 눈에는 왕자유(王子猷)가 섬계(剡溪)의 노를 저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부춘(富春)의 산빛은 자릉(子陵)의 고풍(高風)을 완연히 띠었고, 합비(合淝)의 물소리는 사현(謝玄)의 대첩(大捷)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율양(凓陽)의 옛 관아에 한리(閑吏)의 풍류가 어디에 있으며, 팽택(彭澤)의 외로운 배에 고사(高士)의 종적(踪跡)이라 하는 것이 아득하였다. 한없는 풍경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보였다 들렸다 하며 좌우로 응접하니 조금도 여가가 없었다.
어느 사이에 항주부(杭州府)에 도착하여 며칠을 머물면서 명승(名勝)을 두루 구경하였다. 경정산(敬亭山)에는 사조(謝眺)의 몽아정(夢兒亭)이 있고, 청익강(淸弋江)에는 소소(蘇小)의 기루가 있었다. 영은사(靈隱寺)에서는 지문(之問)이 계자(桂子)의 구(句)를 읊었고, 고산리(孤山里)에서는 화정(和靖)이 ‘매화시’를 외웠다.
옮겨, 망해루(望海樓)ㆍ호강제(護江隄)ㆍ오원묘(伍員廟)ㆍ표충관(表忠觀)ㆍ계신가(癸辛街)ㆍ천립산(天笠山)ㆍ주기시(珠璣市)ㆍ기라방(綺羅坊)ㆍ용금문(湧金門)ㆍ수홍교(垂虹橋)ㆍ수선동(水仙洞)ㆍ옥녀사(玉女祠)ㆍ황려항(黃鸝巷)ㆍ오작교(烏鵲橋)ㆍ정자사(淨慈寺)ㆍ보석암(寶石庵)ㆍ옥천암(玉泉庵)ㆍ호포사(虎跑寺)ㆍ냉천정(冷泉亭)ㆍ뇌공탑(雷公塔)ㆍ국원(麴院)ㆍ한해제(捍海隄)ㆍ입마봉(立馬峯)ㆍ천목산(天目山)ㆍ악왕묘(岳王廟)ㆍ소금와(銷金鍋)ㆍ비래봉(飛來峯)ㆍ대판교(大板橋)ㆍ홍판교(紅板橋)ㆍ석경산(石鏡山)ㆍ의금성(衣錦城)ㆍ대관산(大官山)ㆍ공신잠(功臣岑)ㆍ장군수(將軍樹)ㆍ여정목(女貞木)ㆍ무도산(武都山)ㆍ반운암(半雲巖)ㆍ약시(藥市)ㆍ화사(花肆)ㆍ융화가(瀜花街)ㆍ수의방(修義坊)ㆍ수빙교(水氷橋)ㆍ동청문(東靑門)ㆍ매채시(賣菜市)ㆍ타저항(打猪巷)ㆍ이로(泥路)ㆍ화단(花團)ㆍ귤원정(橘園亭)ㆍ혼수갑(渾水閘)ㆍ청과단(靑果團)ㆍ감자원(柑子園)ㆍ청랭교(淸冷橋)ㆍ희춘루(煕春樓)ㆍ삼교가(三橋街)ㆍ삼원루(三元樓)ㆍ사통관(四通館)ㆍ소언문(小偃門)ㆍ후시채(後市寨)ㆍ행춘교(行春橋)ㆍ북곽문(北郭門)ㆍ대통점(大通店)ㆍ승양궁(昇暘宮)ㆍ무림원(武林園)ㆍ금문고(金文庫)ㆍ평강방(平康坊)ㆍ포검영(抱劍營)ㆍ칠기장(漆器墻)ㆍ사피항(沙皮巷)ㆍ청하방(淸河坊)ㆍ건자항(巾子巷)ㆍ태평방(太平坊)ㆍ금파교(金波橋)ㆍ사자항(獅子巷)에 도착하였다. 경화당(慶華堂)은 부마(駙馬)의 고택(古宅)이요, 원훈당(元勳堂)은 공신이 옛날 살던 곳이요, 만춘당(萬春堂)은 태자가 살던 곳이요, 미수당(眉壽堂)은 기로(耆老)가 살던 곳인데, 지금은 대부분 황폐하였다.
그곳 저자의 물건은 사라(紗羅)ㆍ주기(酒器)ㆍ빙분(氷盆)ㆍ화상(火箱)ㆍ화패(花牌)ㆍ화가(花架)가 귀한 것이다. 그곳 가관(歌館)은 청락방(淸樂坊)ㆍ팔선방(八仙坊)ㆍ주자방(珠子坊)ㆍ반가방(潘家坊)ㆍ수공국(水功局)ㆍ미인국(美人局)이 첫째라 일컫는데, 미인과 가무가 아름답고 어여쁘다.
그곳 주루(酒樓)는 화풍루(和豐樓)ㆍ화락루(和樂樓)ㆍ중화루(中和樓)ㆍ춘풍루(春風樓)ㆍ태화루(太和樓)ㆍ태평루(太平樓)ㆍ서계남루(西溪南樓)ㆍ오간루(五間樓)ㆍ상심루(賞心樓)ㆍ강침점(康沈店)ㆍ화월루(花月樓)가 제일이다. 술 이름은 유향(流香)ㆍ봉천(鳳泉)ㆍ설훈(雪醺)ㆍ주천(珠泉)ㆍ경로(瓊露)ㆍ옥부(玉醅)ㆍ해악춘(海岳春)ㆍ십주춘(十洲春)ㆍ오정(烏程)ㆍ난저(蘭渚)가 아름다운 술이다.
여러 명승 중에서도 서호(西湖)와 전당(錢塘)을 더욱 절승(絶勝)이라 일컫는다. 서로 80리가 떨어져 있는데, 각각 10경(景)이 있다.
서호의 10경은 유랑 문앵(柳浪聞鶯)ㆍ화항 관어(花巷觀魚)ㆍ양봉 삽운(兩峯揷雲)ㆍ삼담 인월(三潭印月)ㆍ국원 풍하(麴院風荷)ㆍ평호 추월(平湖秋月)ㆍ남병 만종(南屛晚鍾)ㆍ뇌봉 석조(雷峯夕照)ㆍ단교 잔설(斷橋殘雪)ㆍ소제 춘효(蘇隄春曉)인데 나머지는 유기경(柳耆卿)의 ‘망해조사(望海潮詞)’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전당의 10경은, 서호 야월(西湖夜月)ㆍ절강 추도(浙江秋濤)ㆍ고산 제설(孤山霽雪)ㆍ서봉 백운(西峯白雲)ㆍ동해 조돈(東海朝暾)ㆍ북관 야시(北關夜市)ㆍ구리 운송(九里雲松)ㆍ육교 연류(六橋煙柳)ㆍ영석 초가(靈石樵歌)ㆍ냉천 원소(冷泉猿嘯)이다.
대저, 경물(景物)의 기이함은 연로에서 처음 보는 것들인데 언어와 문자로써는 그 만의 하나라도 형용할 수 없었다. 드디어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사람이 살아서 이것을 보니 죽어도 또한 한이 없다.”
하였다. 유구의 세 사신도 또한 서로 실컷 마시며 시를 지어서 기록하였다.
두루 구경한 다음 날 다시 석문량(石門梁), 가흥현(嘉興縣), 강망현(江望縣)을 지나 왔는데, 그 사이에 볼만한 곳이 많았으나 어떤 것은 보고 어떤 것은 보지 못하였다. 대개 그 유명한 것으로는 무성(蕪城)ㆍ오공대(吳公臺)ㆍ뇌당(雷塘)ㆍ석량산(石梁山)ㆍ적안산(赤岸山)ㆍ과보주(瓜步洲)ㆍ운하(運河)ㆍ낭산(狼山)ㆍ석항(石港)ㆍ양자강(揚子江)ㆍ백사진(白沙鎭)ㆍ염독(鹽瀆)ㆍ사하(沙河)ㆍ백수피(白水陂)ㆍ도산(塗山)ㆍ집옥허(執玉墟)였다. 또한,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뽕[桑]을 다툰 곳, 양 무제(梁武帝)의 부산언(浮山堰), 장주(莊周)의 관어호(觀魚濠)가 있었으며 구강풍수(九江楓樹)와 상채동문우당(上蔡東門藕塘) 석산(石山), 작약피(芍藥陂), 구정(九井), 곽산(霍山) 등이 있었다.
또 강소성(江蘇省)을 지나갔다. 소주부(蘇州府)는 옛날 강남성(江南省)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청 나라에서는 강남성의 지역이 크다고 하여 갈라 강소성을 만들었다.
구경한 곳은 고소대(姑蘇臺)ㆍ한산사(寒山寺)ㆍ관와궁(館娃宮)ㆍ창합문(閶闔門)ㆍ보대교(寶帶橋)ㆍ담연호(澹煙湖)ㆍ향설해(香雪海)ㆍ낙매암(落梅巖)ㆍ화춘궁(畫春宮)ㆍ홍군음(紅裙飮)ㆍ태호(太湖)ㆍ풍교(楓橋)ㆍ오제봉(烏啼峯)ㆍ수면산(愁眠山)ㆍ금릉(金陵)ㆍ호구(虎邱)ㆍ주작교(朱雀橋)ㆍ오의항(烏衣巷)ㆍ삼산(三山)ㆍ이수(二水)ㆍ봉황대(鳳凰臺)ㆍ백로주(白鷺洲)ㆍ황학루(黃鶴樓)ㆍ진회수(秦淮水)ㆍ능고대(凌敲臺)였다. 남조(南朝)의 480개의 절에 많은 누대(樓臺)가 연우(煙雨) 속에 있으니, 참으로 그림 속의 진경(眞景)이었다.
또, 무석현(無錫縣)ㆍ무진현(武進縣)ㆍ장주현(長洲縣)ㆍ경구고현(京口古縣)ㆍ연주부(漣州府)를 지나왔다. 미남궁(米南宮)이 옛날에 태수(太守)로 있을 때 모아 놓은 진기한 돌은 아직도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또, 양주역(揚州驛)ㆍ개천현(開泉縣)ㆍ고우현(高郵縣)을 지나왔는데, 장사성(張士誠)이 기병한 곳이 있었다. 평교진(平橋鎭)ㆍ산양현(山陽縣)ㆍ청강일(淸江馹)ㆍ어구역(漁溝驛)ㆍ도원현(桃源縣)을 지나오면서 무릉(武陵)의 깊숙한 곳[深處]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바빠서 가 보지를 못했다. 개평현(蓋平縣)ㆍ서퇴역(西退驛)ㆍ천현(遷縣)ㆍ난산일(蘭山馹)ㆍ난산역(蘭山驛)ㆍ난산현(蘭山縣)ㆍ신태현(新泰縣)ㆍ태안일(泰安馹)ㆍ태안현(泰安縣)ㆍ장청역(長淸驛)ㆍ장청현(長淸縣)ㆍ제남역(濟南驛)ㆍ정원역(正源驛)ㆍ직례(直隷)의 덕주부(德州府)ㆍ덕주현(德州縣)ㆍ부장일(富莊馹)ㆍ음현현(音現縣)ㆍ하간현(河間縣)ㆍ임구일(任邱馹)ㆍ신성현(新城縣)ㆍ탁주부(涿州府)ㆍ양향현(良鄕縣)ㆍ완평현(宛平縣) 등이었다. 무릇 육로로 6300여 리를 와서 12월 23일에 비로소 황성(皇城)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그들의 경로(經路)에 복건, 광동, 오(吳), 초(楚)의 땅을 거쳐온 것은 믿을 만하였으나, 해외의 표류인으로 외번(外藩)의 사행(使行)에 붙여 오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대로 구경하기를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말한 것이 사첩(史牃)에 기록된 것과 차이가 많으니, 이것은 반드시 소문에 얻어 들은 것이 많아서 허풍을 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먼 남쪽의 여러 섬에는 간간이 고의로 표류한 자들이 많은데도 그 나라에서 공급해 주기를 후하게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이 사람을 보면, 용모와 언사(言辭)가 교활하고 영리하여 전연 성실한 뜻이 없었으니, 어찌 또한 고의로 표류한 자의 무리가 아님을 알겠는가?
4. 연원직지 제4권
■유관록(留館錄)중 계사년(1833, 순조 33) 1월[1일-13일]
○2일 방우서(方禹叙) 군이 역관에게 당보(塘報)를 빌려 와서 바쳤으니, 작년 2월 우리 사신이 돌아간 뒤부터 지난 섣달까지의 일이었다. 당보는 우리나라의 조보(朝報)와 같은 것인데, 매일 간행하여 월말까지 되면 한 달치를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든다. 그 가운데 볼만한 일 약간 조목을 뽑아 적어, 듣고 본 사건으로 갖추어 놓고 황제에게 복명(復命)할 때에 당보도 아울러 바친다고 한다.
저녁에 세폐 방물(歲幣方物) 짐수레가 무사히 도착하였으므로 벽대청(甓大聽)에 쌓아 두었다. 오늘 저녁부터 쇄구(刷驅)의 무리들이 번갈아 순경(巡更)하였으니, 또한 전례이다.
5. 연원직지 제5권
■유관록(留館錄)하 계사년(1833, 순조 33) 1월[14일-29일]
○15일 경칩(驚蟄). 식전에 눈보라치다가 오후에는 흐렸다. 원명원에 머물렀다. 이날 새벽에 황제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정사, 부사만 참석하였으니 규례가 그렇다.
그들이 돌아온 뒤에 그 절차에 대해 들었다. 이른 오경(五更) 무렵에 들어갔는데 정대광명전은 원명원 안 북쪽 변두리에 있고, 웅장하기가 자광각(紫光閣)과 같다. 문밖에 한참 앉아 있었더니 동틀 녘에 탑전으로 불러들여서 술 한 잔과 과일 그릇이 각각 나왔다. 원소병연(元宵餠宴)을 마치고 조방(朝房)으로 나와 기다리다 상품을 받아 바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물목(物目)을 보니, 자그마한 붉은 종이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상사(賞賜)하는 물건. 망단(蟒緞) 2필(疋), 복자방(福字方) 100폭(幅), 견지(絹紙) 4권(卷), 붓 4갑(匣), 먹 4갑, 벼루 2방(方), 조칠기(雕漆器) 4건, 피리기(玻瓈器) 4건.”
또 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국 화시 사신(朝鮮國和詩使臣) 3원(員)에게 상사하는 물건. 대단(大緞) 각 1필, 전지(箋紙) 각 2권, 붓 각 2갑, 먹 각 2갑.”
그리고 나에게 상으로 내린 물건은 수역(首譯)이 싸 가지고 왔다.
○26일 노구교기(盧溝橋記)
노구교는 북경 장관(壯觀)의 하나이니, 대개 교량으로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이 흐리기 때문에 혹 혼하(渾河)라고 일컫고, 검기 때문에 더러는 노구(蘆溝)라고 일컫는데, 갈대의 빛이 검은 뜻을 취한 것이다. 그 흐름이 이리저리 옮겨 일정치 않으므로 더러는 무정하(無定河)라고도 일컫는다. 지금 청 나라가 영정하(永定河)라고 이름을 고쳤다.
■유관록(留館錄)하 계사년(1833, 순조 33) 2월[1일-6일]
○3일 흐리다가 낮에 비가 뿌렸다. 관소에 머물렀다.
식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상방 주자(上房廚子) 등이 물건을 외상으로 많이 사 갔는데 떠날 기일이 임박했는데도 끝내 갚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대인(大人)의 은혜에 힘입어서 곧 받아 냈으면 합니다. ……”
고 호소하기에, ‘다른 방(房)에 관계된 일이라 간여할 수 없으니, 본방(本房)에 가서 호소하라.’는 뜻으로 타일러 보냈다.
대개 하인배들은 다 적수 공권으로 걸어서 연경에 들어왔다. 관소에 머무른 지 한 달 남짓이 되어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수용(需用)을 더러 동행들에게 꾸고, 또 저들에게 빚을 많이 지고서는 시일을 미루어 나가는 것으로 상책을 삼는다. 그러다가 이제 떠날 기일이 임박해서는 외상 준 자는 갚기를 요구하고 빚 준 사람은 갚기를 독촉, 심지어는 끌어당기고 욕설을 하고 옷을 벗기고 물건을 빼앗는 짓을 하는가 하면, 끝내는 혹 분을 이기지 못해 만취된 자는 대성 통곡을 하고, 쟁송(爭訟)하는 사람은 뜰에 들어와서 따지기도 한다.
무릇 관중(館中)에 관한 일은 으레 다 서장관이 주관한다. 나는 법사(法司), 송관(訟官)의 임무를 겸한 터라, 더러는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하고 더러는 매를 때려 주의시키기도 하면서 좌우로 수응하느라 나도 모르게 심신이 피곤하였다. 들으니, 이런 폐단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저들 중에 우리 쪽 사람과 상관된 자로서 만일 다투는 일이 있다면 불쑥 들어와 갑자기 삼대인(三大人)을 불러 고소하니, 그 삼대인 된 자 역시 괴롭지 않겠는가? 하인배들이 이런 폐단과 소란을 일으킨 것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저들 속담에,
“조선 사신이 관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본국인들은 모두 밤을 대비하느라 문을 닫고서 마음 놓고 편히 자지 못한다.”
하니, 대개 그 뜻은 중국에 온 하례(下隷)들을 다 도둑으로 여긴 것이리라.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또 중국에 들어온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싯돌 하나라도 반드시 자루에 넣어 귀국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귀국 기일이 정해지면서부터는 상하를 막론하고 일행 모두가 마음을 한가히 가진 자가 거의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치 무엇을 잃으면 어떡하나 하는 심정으로 허둥지둥,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리하여 얻은 다소의 물건을 모두 지포(紙布)로 싼다. 싸는 일이 끝나면 피상(皮箱)ㆍ목궤(木櫃)에 나눠 넣고 못을 박는데 그 소리가 관중(館中)을 진동하니 또한 가소로운 일이다
○5일 맑음. 관소에 머물렀다.
식전에 유구국 사람 두 명이 와 뵙고,
“떠나게 되어서 고별하오니,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하였다. 그들이 거년 여름 우리나라에 표류(漂流)해 왔기에 이번 걸음에 데리고 와서 예부(禮部)에 인계했었는데, 내일이면 그 나라의 공사(貢使)를 따라 떠나게 되기 때문에 와서 사례한 것이리라. 온돌 밑에서 절을 하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니, 그 나라의 예법인 듯하였다.
■회정록(回程錄) 계사년(1833, 순조 33) 2월[7일-30일]
○9일 새벽에 상방(上房)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건량 마두(乾糧馬頭)가 저들에게 빚을 많이 지고 몰래 떠나왔기 때문에 그 채주(債主)가 여기까지 뒤쫓아와서 정사에게 호소하니, 정사가 마두를 곤장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점점 더욱 따스하여 아지랑이가 눈에 아른거리고, 가는 버들가지 드리워져 먼 길에서의 돌아갈 마음이 한결 더 간절하니, 철 따라 나는 물건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흔히 이렇다.
지나는 촌락에는 경작하는 일이 막 벌어지고, 이따금 노인들이 나와서 우리 행차를 구경하였다. 지난번 갈 때에는 노인들이 문을 나와 길에 서 있는 일이나, 이고 지고 왕래하는 일을 절대 볼 수 없었으니, 아마 날씨가 차면 깊숙이 들어앉았다가 봄이 되어야 비로소 나오는 모양이었다. 노인을 공양하는 좋은 풍속을 족히 볼 수 있겠다.
○17일 평명에 떠나 양수하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뒤늦게 들으니,
“상방(上房) 일행이 떠나 채 수백 보를 못 갔을 즈음에 점사(店舍) 주인이 뒤따라와서 정사에게 호소하기를 ‘저희 집 시계[時牌]는 본값이 은 50냥인데, 본방(本房) 소속들이 거처한 온돌방에서 잃어버렸으니 찾아 주기를 원한다. ……’ 하였는데, 잠시 후에 그의 아비가 와서 이불 속에서 찾았다면서 아들을 데리고 돌아가니, 아들은 길에서 도리어 제 아비를 탓하였다.”
한다. 모두들 의논이,
“그놈이 필시 그 물건을 일부러 감춰서 시비를 일으키고, 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려다가 계책이 잘 들어맞지 않게 되자 그런 것이다.”
하였는데, 그들의 짓 또한 교묘하고 간악하다. 또 가다가 중후소(中後所)에 이르러 잤다.
○24일 세찬 바람이 일고 흙비가 내렸다. 소흑산을 출발하여 50리를 가다가 이도정(二道井)에 이르러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모래 섞인 먼지가 창문으로 스며 들어 온돌 위에 수북이 쌓이고 바람과 흙비는 어제와 같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하루 더 머물러 날씨가 개기를 기다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다가 날씨가 조금 개자 드디어 떠났는데, 몇 리를 채 못 가서 바람과 흙비가 또 앞서와 같아 진퇴 양난이었다. 더구나 또 3, 40리 사이에는 머물 만한 점사가 없음에랴? 간신히 이도정에 이르러서 잤는데, 밤이 깊어서야 바람과 흙비가 비로소 걷혔다.
○29일 맑음. 포교와를 출발하여 40리를 가다가 난니보(爛泥堡)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또 25리를 가다가 영수사(迎水寺)에 이르러 잤다. 이날은 도합 82리를 갔다.
길이 질기 때문에 녹기 전에 언 길을 이용해서 일찌감치 떠나자고 의논했었는데, 점주(店主)가 상방(上房)이 방값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문을 잠그고 열어 주지 않았다. 정사가 건량 마두(乾糧馬頭)를 잡아들여 곤장을 때린 다음, 점주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돈을 받게 하고서 곧 문을 열라고 호령했으나 점주는 듣지 않았다. 그래서 문짝을 때려 부수라고 호통을 치니, 점주는 그제서야 비로소 겁을 내고 문을 열어 주었지만, 날은 이미 늦었다.
진흙을 뚫고 간신히 가서 난니보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지명을 ‘난니(爛泥)’라고 한 것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 이틀간 진흙에 시달린 것은 거의 평생 처음 당한 일이었는데, 하인배들은 오히려,
“올 봄은 비가 적어서 전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닙니다.”
하고, 또 동남쪽 먼 산 밑을 가리키며,
“진흙이 심할 때는 저 산 밑을 따라서 돌아다닙니다.”
하였다. 그 행역(行役)의 어려움을 짐작할 만한데 여름철 별사(別使)의 행차는 항시 이 걱정을 면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가서 영수사에 이르러 잤다.
■회정록(回程錄) 계사년(1833, 순조 33) 3월
○5일 맑음. 책문에 머물렀다. 듣고 본 사건들을 수정, 정서하게 하였다.
왕복길에서 얻은 시구(詩句) 도합 58수를 점검, 모아 한 축(軸)을 만들었다.
○10일 안시성기(安市城記)
봉산(鳳山) 남쪽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안시성’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그 실은 아니요, 어떤 이가 말한대로 ‘동명구성(東明舊城)’이 옳을 듯싶다. 상고컨대, 《일통지》에,
“안시성은 개주(蓋州)의 동북쪽 70리에 있다.”
했으니, 여기에서 아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책문에서 북쪽으로 5리를 가면 동, 서, 북 3면은 모두 석벽이 매우 험준하고, 산등성이에 이따금 돌을 쌓아서 성을 만든 터가 있으며, 오직 남쪽 한 면만이 약간 펀펀한데, 옛날 성문이 여기에 있었다 한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수십 호에 지나지 않고 모두 쓸쓸한 초가집이었다.
점차 수백 보를 들어가니, 왼편에 별안간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다. 봉우리는 모두 암석이고 높이는 수십 길인데 ‘고장대(古將臺)’라 부른다. 한 바위에는 ‘찬운암(攅雲巖)’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곁에 ‘운문 공용경 씀[雲門龔用卿書]’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뒤 한 바위에도 글자를 새겼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고, 오직 ‘사월십일(四月十日)’이란 네 글자만 어렴풋이 분별할 수 있었다.
바위 서쪽에 숲이 우거진 경치 좋은 절벽이 있는데 진달래꽃이 막 만발하였다. 주방(廚房)이 화전(花煎)을 부쳐서 올리는데, 은연중 고향의 풍미(風味)가 있어 기뻤다.
북쪽 산의 움푹 들어간 곳에 길이 있어 사람들이 통행하니, 그것이 바로 북문이었다.
○16일 맑음. 의주를 출발하여 30리를 가다가 소관(所串)에 이르러 점심을 들고, 또 50리를 가다가 양책참(良策站)에 이르러 잤다.
주수가 와서 작별했다.
식후에 출발하여 소관에 이르러 점심을 들고, 또 가서 양책관(良策館)에 이르니, 용천(龍川) 원이 이미 와서 대기했다가 들어와 보았다. 저물녘에 정사, 부사와 함께 청류정(聽流亭)에 올랐다가 달밤에 돌아왔다.
밤에, 지나가는 파발 편에 가서를 부쳤다.
○23일 맑음. 평양에 머물렀다.
식후에 정사, 부사 및 순안ㆍ용강ㆍ강동(江東)의 여러 원들과 함께 기악(妓樂)을 배에 싣고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수령으로 있는 이돈영(李敦榮)이 근친(覲親)하러 영유(永柔)에 가느라 여기를 지나다가 또한 와서 참석했다. 반나절 동안 강을 오르내리다가, 방향을 바꿔 부벽루(浮碧樓)로 향했다가 어둑해서야 돌아왔다.
○25일 맑음. 황주를 출발하여 40리를 가다가 봉산(鳳山)에 이르러 잤다.
아침에 주수를 들러 보고, 정사, 부사와 함께 월파루(月波樓)에 잠깐 올랐다. 식후에 출발하여 봉산에 이르니, 주수가 보러 왔다.
밤에, 돌아오는 파발 편에 가서를 받았다.
○29일 오후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송도를 출발하여 40리를 가다가 장단(長湍)에 이르러 점심을 들고, 또 40리를 가다가 파주(坡州)에 이르러 잤다.
아침에 유수를 들러 보았다. 경력이 와 작별했다.
식후에 출발하여 판문점(板門店)에 이르니, 김익문(金益文)이 와 맞이하므로 여기에서 서로 만났다. 수레에서 내려 점방(店房)으로 들어가서, 편안하다는 상황을 자세히 들으니, 매우 위로가 되었다. 또 가는데 잠시 후에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파주에 이르러 잤는데, 주수가 보러 왔고 집안 하인배들도 와서 대기한 자가 많았다.
■회정록(回程錄) 계사년(1833, 순조 33) 4월
○2일 맑음. 고양을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서울로 들어왔다.
밥 먹은 뒤에 출발하여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니, 종제 및 하인배들이 많이 와서 맞이하고, 인마(人馬) 또한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수레에서 내려 말을 타고 기영(畿營) 객사(客舍)에 이른 다음, 정사, 부사와 함께 옷을 갈아입고 곧장 궐(闕) 안으로 들어갔다. 당보(塘報) 및 문견사건(聞見事件)을 정원(政院)에 바치고, 곧 들어가서 숙배(肅拜)했다. 머물러 기다리라는 명을 받고 흥정당(興政堂)에 입시(入侍)하고 나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6. 연원직지 제6권
■유관별록(留館別錄) 견문한 일 중에서 한 곳에 붙일 수 없는 것을 기록하여 유관별록이라 이름했다.
●천지 산천(天地山川)
○구련성(九連城)에서 책문(柵門)까지는 그 땅이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곳이어서 버려진 채 사람이 살지 않으니 이 또한 강희(康煕) 이후의 일인 듯하다. 그러나 풍토는 아주 좋아서, 이따금 산이 굽어 돌고 물이 감아 두른 곳에 개가 짖고 닭이 울어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적지 않다. 산의 기운이 밝고 아름다워서 마치 우리나라의 동교(東郊), 서교(西郊)와 같은데 역시 산소를 쓸 만한 자리가 많아 자못 아까운 일이다.
●19성(省)의 도리(道里)와 재부(財賦)
○직례(直隷) 보정부(保定府)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기(京畿)와 같다.
동서(東西) 1228리, 남북 1628리며, 동계(東界)는 성경(盛京), 서계(西界)는 산해관이며, 남계(南界)는 황하(黃河), 북계는 만리장성이다. 부(府) 11, 직할주 6, 주(州) 19, 현(縣) 124를 관할한다. 액징 잡세(額徵雜稅)는 은(銀)이 도합 249만 8100여 냥, 쌀 11만 3300여 석이며, 창곡(倉穀)이 189만 4700여 석이다.
○성경(盛京) 곧 심양(瀋陽)이다.
북경 동북 1470리에 있다. 동서 5100리, 남북 3000리며, 부 2, 주 4, 현 8, 수암성(峀岩城) 1을 거느린다. 동계는 흥경(興京), 곧 영고탑(寧古塔)인데, 이곳은 청 나라의 발상지라 하여 제성(諸省)에 붙이지 않고 해마다 쓰고 남은 재화를 모두 이곳으로 보낸다. 서계는 광녕(廣寧)이며, 남계는 바다, 북계는 아라사이다. 액징 잡세는 은 도합 3만 8700여 냥, 쌀 5만 8500여 석이며, 창곡이 90만 2000여 석이다.
○강소성(江蘇省) 강남성 땅을 크게 2분해서 동쪽을 강소, 서쪽을 안휘라 한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2400리 떨어져 있다. 동서 1630리, 남북이 1700여 리며, 동계는 바다, 서계는 하남(河南)이고, 남계는 절강(浙江), 북계는 산동(山東)이다. 부 8, 직할주 3, 주 3, 현 62를 거느린다. 액징 잡세는 은 도합 217만 3600여 냥이며, 조미(漕米)가 96만 8600여 석, 창곡이 145만 3000석이다.
●성곽과 시사
○전당포(典當鋪)란 것은 물건을 담보로 잡고 이자를 받는 곳이다. 한 달 이자는 100분의 2, 기한이 지나면 잡았던 물건을 팔아서 여기에 충당한다. 잡히는 물건은 몸에 장식한 패물로부터 일용 도구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진열하는 시렁은 잘 정돈되어 있고 또 각각 표지(標識)를 해 놓았는데, 그 간판에는 꼭 ‘무기는 받지 않음[軍器不當]’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다. 이는 금제(禁制)가 있기 때문이다.
책문(柵門)을 들어선 뒤로는 작은 마을로부터 꽤 큰 성읍(城邑)에 이르기까지 시장이 있으면 반드시 전당포가 있다. 그 집의 규모는 으레 큰 집에 아로새긴 창문으로 되어 있어 다른 전포와는 매우 다르다. 아마 그 이식(利息)이 무척 넉넉해서 그럴 것이다. 급한 일은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이것을 의지해서 손을 쓰게 되니, 없을 수 없는 것이겠다.
●공사(公私)의 제택(第宅)
○방에는 모두 온돌이란 것이 있다. 이 제도는 나무로 네모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전과 발이 모두 걸상처럼 되어 있고 높이는 걸터앉을 만하며 너비는 겨우 옆으로 누울 정도이다. 평상이면서 온돌 구실도 하여 온기(溫氣)를 취하는 것인데 이는 중국 북방의 풍속이다. 내가 뒤에 남방 사람으로서 북경에 와 유숙하는 사람을 만나 그 잠자리를 보니, 토캉[土炕]은 없고 목캉[木炕]뿐으로 단지 깔개와 덮개 그리고 휘장, 장막 등 속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추위를 막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우리 고향은 겨울에도 눈이 없을 만큼 따뜻해서 토캉에서 잠을 자면 으레 두통이 난다.”
하였다. 남북의 기후와 습속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만하다.
온돌의 제도는 먼저 높이 자 가웃쯤 됨직한 기초를 쌓고 그 안에다 골을 만드는데 그리 높거나 넓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깨진 벽돌 조각을 바둑판처럼 놓아 굄돌을 삼고 그 위에다 온전한 벽돌을 차례차례 깔아 놓는다. 대체로 벽돌이란 본래가 고르게 제조되어 있어 깔아 놓으면 틈이 나지 않고, 두께 역시 일정해서 굄돌이 흔들리지도 않는다. 굄돌과 굄돌 사이는 엇갈리게 서로 불목이 되고, 아궁이는 바로 온돌 앞에 설치되어 1개의 벽돌로 덮어 놓았다. 언뜻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이것을 열고 보면 아궁이 깊이는 무릎이 빠질 정도이다. 그리고 불목이 그 안에 있는데 수수깡 한 움큼만 꺾어서 불을 지피면 활활 타들어 가는 불꽃이 꼭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불이 잘 들이느냐 하면, 불목 밑에 독[瓮] 하나 들어갈 만큼 땅을 파 놓았는데 이 구덩이에서 바람이 일어나 불길을 몰아가고, 또 이 불길이 골로 들어가면 여러 불목이 번갈아 빨아들여서 도무지 거꾸로 내뿜는 일이 없고 바로 굴뚝으로 나가게 된다. 굴뚝 밑에 깊이가 한 길쯤이나 되게 파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소위 개자리란 것이다. 한편 방고래에 있는 재는 늘 불길에 몰려 굴뚝으로 나가게 마련이며 굴뚝 밖에 또 하나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다 벽돌을 쌓아 놓았는데 모양이 마치 부도(浮屠)와 같다. 그 높이는 집과 맞먹을 정도인데 연기가 그리로 떨어져 마치 입으로 빨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다가 시일이 오래되어 재가 굴뚝에 차면 다시 개수를 해야 하는데 보통 3년쯤이라 한다. 어쨌든 온돌 하나의 길이가 혹 5, 6칸이 되는 것도 있지만 전체가 고루 불길을 받으므로 나무를 적게 때도 구들은 벌써 더워지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아궁이가 방 안에 있어도 사람이 연기에 시달릴 것이 없으니 이는 참 묘한 제도이다.
아궁이가 언제나 불길을 거꾸로 내뿜어 방이 골고루 덥지 않는 것은, 탈이 굴뚝에 있는 것이다. 즉 굴뚝에 틈이 생기면 조금만 바람이 들어도 아궁이의 불을 온통 꺼 버리므로 사리통[杻桶], 나무통[木桶] 같은 제도는 모두가 이상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관(樓觀)과 사묘(寺廟)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사찰이 있고 묘(廟)가 있는데, 요양, 심양, 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또 북경으로 가면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의 수가 인가에 비해 거의 3분의 1은 된다. 그러나 한 사찰에 승려의 수는 큰 절이라 해도 불과 얼마 되지 않고 도사(道士)의 수는 더욱 드물다. 오늘날 부처를 숭상하는 것이 예전 명(明) 나라 때와는 같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혹은 말하기를, 현재의 도승(度僧) 제도가 엄격해서, 사찰마다 일정한 인원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왕묘(關王廟)에서는 반드시 부처를 받들고 절에서는 또 관운장(關雲長)을 받든다. 이처럼 관운장과 부처를 일체(一體)로 존봉(尊奉)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
관왕묘를 숭봉하는 것은 과거부터 그러했었지만 현재 청(淸) 나라에서는 이를 더욱 조심스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질(爵秩)을 엄격히 상고하고 관공(關公)의 후손을 두루 찾아내어 이들에게 박사(博士)를 세습시켜 ‘성예(聖裔)’라 이름하기를 연성공(衍聖公)의 경우와 꼭 같게 한다. 그리하여 시골 마을과 성읍(城邑)에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규모와 사치롭고 검소한 정도는 그곳의 대소 내지 빈부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편패(扁牌) 주련(柱聯) 같은 것은 애써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상을 받들고 조석으로 분향 기도하며 시장 전방들도 그렇게 한다
●토산 제물(土産諸物)
○북방 산물 중에서 가장 긴요하기도 하고 또 많은 것으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벽돌과 석탄과 수수깡이다. 궁실과 성곽(城郭)에는 모두 벽돌을 쓰고, 일용하는 모든 연료는 전적으로 석탄에 의지하게 되는데, 색깔은 검고 모양은 마치 숯과도 같으며 크기가 일정치 않다. 큰 수레와 낙타들이 밤낮으로 끊임없이 실어 나르니 그 수요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 만하다.
처음 불을 붙이면 1주일은 갈 수 있고, 다시 붙이면 5일이 가며 세 번째 붙이면 3일은 가는데, 불이 꺼져 흙이 되어야 비로소 이것을 내다 버린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석탄은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풀과 섞어 꽃벽돌을 찍어 내기도 한다. 시중에 이것을 파는 곳이 많이 있다. 목탄도 혹 있기는 하지만 무척 귀하다. 이는 숯을 구울 만한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대개 집을 덮거나, 밭에 거름을 주거나, 울타리를 만들거나 온돌에 까는 자리를 만들거나 기타 곡식을 담는다든지 과일을 싼다든지 할 때는 모두 수수깡을 쓴다. 민간에서 조석으로 밥을 지을 때도 모두 이것을 때 짓는다. 혹 버드나무를 쓰기도 하는데, 버드나무 이외에는 다른 나무가 없기 때문에 버드나무를 벨 때에 톱으로 자르고 도끼를 쓰지 않는 것은 지저깨비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음식(飮食)
○조석 식사는 밥 또는 죽을 먹는데, 남녀노소(男女老少)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각각 작은 식기로 덜어 먹다가 한 그릇을 다 먹으면 또 한 그릇을 더 먹는다. 그리하여 양이 차면 그만 먹게 된다. 밥그릇은 크기가 찻잔만 한데 모양은 조금 다르다. 많이 먹는 사람은 혹 예닐곱 그릇을 먹기도 한다.
밥 반찬은, 촌가에서는 김치 한 접시에 불과한데, 맛이 무척 짜서 물에 담가서 짠 맛을 뺀 뒤에 가늘게 썰어 먹는다. 혹은 생파나 마늘장아찌만을 먹기도 한다. 부잣집에서는 좀 잘 차려 먹는다 해도 역시 제육(猪肉)구이나 찌개 등에 불과하니 대체로 간단하게 먹는 편이다.
음식은 모두 젓가락으로 먹고 숟가락은 쓰지 않지만, 숟가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기로 만들고 자루가 짧으며 구기는 깊게 돼 있는데 이는 국을 떠 먹을 때 쓴다. 젓가락은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상아로 만든 것도 있다.
술은 소주가 많은데 모두 불그스레한 빛깔이 돈다. 종류로서는 사괴공(史蒯公), 매괴주(玫瑰酒), 포도주(葡萄酒) 등이 있는데 도수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술을 빚을 때는 으레 술독 안쪽에다 석회를 발라 놓기 때문에 이것을 마시면 곧 두통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많이 마시면 설사가 나서 입에 대기가 어렵다. 소위 황주(黃酒)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탁주에 해당하는 술인데, 이 역시 너무 싱거워서 마실 수가 없다. 요컨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술보다 못한 술들이다. 남방에서 만드는 술은 맛이 퍽 좋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술을 마시는 법은 이러하다. 술잔은 매우 작아 겨우 몇 숟가락의 술이 들어갈 정도에 불과하고, 술을 데우는 기구 역시 몇 잔 술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몸뚱이는 둥그스름하고 배는 잘룩한데, 그 허리를 가로막아 위쪽에는 술을 담고 아래쪽에는 불 담는 구멍을 내어 술이 쉬이 데워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잔에 따라 조금 마시고는 안주를 먹는다. 이같이 대여섯 번 마셔야 한 잔을 다하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온종일 술을 마셔도 그다지 취하지는 않는다. 고인(古人)들이 ‘일일 삼백배(一日三百杯)’라 한 것도 실상 까닭이 있는 것이요,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계주(薊州), 역주(易州)의 술이 가장 상품(上品)으로, 그 맛도 시원하고 독해서 마치 우리나라의 백로주(白露酒)와도 같은데, 도수는 약해서 취했다가는 이내 깬다. 만드는 법은 알 수가 없으나 대체로 모두 기장으로 만드는 것들이다.
●복식(服飾)
○여자는 만주인(滿洲人), 한인(漢人)을 막론하고 모두 비단으로 옷을 해 입고 분화장에 꽃을 꽂지만 그들의 남편은 의복이 추악하고 면모도 지저분하게 생긴 자가 많아 언뜻 보면 마치 그들의 종 같기도 하다.
●기용(器用)
○무릇 중국의 일용 기구들은 모두 발로 밟도록 되어 있다. 이는 손으로 운전을 하는 것보다 힘은 반밖에 들지 않으면서 효과는 배나 되기 때문이다.
일용 기계들이 모두 정교하고 간편하며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레는 더욱 그러하다. 여러 가지 수레의 제도가 우리나라 달구지 등과 거의 비슷하지만, 그 정치(精緻)하고 균일(均一)한 점에서 본다면 미묘해서 신통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양쪽 바퀴가 똑바로 굴러가는데, 조금도 요동하거나 기울어지지 않으며 능히 무거운 것을 싣고 먼 거리까지 간다.
●초목(草木)
○소나무와 삼(杉) 나무가 석문령(石門嶺) 동쪽에서는 무성하게 우거져서 숲을 이루었으나 그 서쪽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전혀 없거나 적었고, 전나무와 잣나무 또한 볼 수 없다. 길가나 마을 앞에 심은 것은 오직 능수버들뿐이다.
복숭아, 살구, 대추, 밤은 과일 중에 극히 천한 것들인데, 그 나무들을 도무지 볼 수 없었으니, 아마 그 토질이 맞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중에 모든 과실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그 무역해 들이는 이익을 알 수 있다.
●금수(禽獸)
○관인(官人)의 행차에는 말몰이꾼이나 하인들까지도 모두 말을 타고 따르며, 팔기병(八旗兵) 중에도 도보로 걷는 졸병이 없다. 여항(閭巷)의 들판 사이에는 1000마리, 100마리씩 떼를 이루고 멀고 가까운 곳을 가는 여행자들도 모두 거마(車馬)를 구비하며, 가난한 걸인이 아니고는 도보로 걷는 자가 드물다. 말은 아무리 준수한 것이라도 값이 문은(紋銀) 2, 30냥에 불과하다.
길에서 공마(貢馬) 한 떼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숫자가 100필 가량 되었는데, 다만 몇 사람이 안장도 없이 말을 타고 몰 뿐이었다. 그러나 말은 모두 가지런히 걸음을 걸어 감히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지 않았으니, 그 길들인 공력을 알 수 있었다.
●인물(人物)과 요속(謠俗)
○한족 여인은 모두 분을 바르는데 만족 여인은 바르지 않는다. 한족 여인은 발을 활처럼 만드는 전족(纏足)을 하는데 만족 여인은 그렇지 않다. 발을 활처럼 휘는 법은 남당(南唐) 이후주(李後主)의 궁인(宮人) 이요랑(李窅娘)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대개 어릴 때에 발을 피륙으로 감아 놓으면 발이 구부정하면서 뾰족하여 그 형상이 마치 활처럼 되니, 그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귀고리, 팔찌 및 머리꾸미개는 한족 여인과 만족 여인이 다 같다. 입에 붉은 칠을 하는 법은 입술에만 발라서 바라보면 마치 붉은 구슬을 머금은 것 같다.
한족 여인이든 만족 여인이든 막론하고 대부분 예뻤으며 관외가 더욱 미인이 많다고 일컫는다.
●기예(技藝)
○의약(醫藥)은 별로 숭상하지 않는 풍속이다. 간혹 의약이 있는데 약을 파는 법은 약종에 따라 봉지를 각각 만든다. 이미 샀던 약이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도로 약포에 돌리니, 이 제도는 매우 좋다. 의기(醫技)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진귀하게 여기는데 서사(書肆)에서 간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또 《제중신편(濟衆新篇)》이 있다고 한다.
●구경[眺覽]과 교유(交游)
○나는 일찍이 쉽게 말하기를,
“제일 장관은 오직 봉황성(鳳凰城)에 있다.”
했으니, 이는 대개 그 성곽, 궁실, 시포, 사관이 곧 책문에 든 후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 장관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그 후 요동으로부터 심양,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도록 비록 대소의 다름은 없으나 그 제도는 일반이다. 보는 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목하는 것이 처음 봉성에 이르렀을 때만 못하기에 나는 봉성을 제일의 장관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