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기사(燕行記事)
이갑(李?) : 1737~ ?
1769년(영조 4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수찬 등을 지냈다. 1772년 봉조하 남태저(南泰著)에게 선마(宣麻: 임금이 신하에게 几杖을 내릴 때 함께 끼워서 주는 글)하는 의식에서 선교관(宣敎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령하지 않아 변방의 권관(權管)으로 좌천되었다.
1773년(영조 49)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간·대사헌, 비변사당상 등을 거쳐, 1775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뇌물죄의 보고를 여러 달 지체시킨 일로 파직되었다.
다음해(1777)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어, 홍인한(洪麟漢)·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홍지해(洪趾海)·홍술해(洪述海) 등의 역모 토벌을 아뢰고, 다음해 3월 돌아와 중국에서 견문한 내용을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어 대사헌·도승지, 예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오랫동안 대사헌에 재직하면서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채홍리(蔡弘履) 등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783년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에게 호를 올리는 존호도감의 제조가 되고, 그 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다음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우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178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좌참찬, 예조판서·공조판서·병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두루 거쳤다. 병조판서 때 무관의 인사행정 규례를 변통한 것이 많았다. 1790년에는 관직 제수에 응하지 않은 죄로 청주목사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 이조·병조를 비롯한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했으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정유년(1777, 정조 1) 7월
○11일 : 정사(政事)에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의 수망(首望)으로 낙점(落點) 받았다.
○26일 : 정사(正使) 하은군(河恩君) 이광(李垙), 서장관(書狀官) 이재학(李在學)과 함께 혜민서(惠民署)에서 회동(會同)하였다.
▣정유년(1777, 정조 1) 9월
○20일 : 토역 주문(討逆奏文)을 절사(節使) 편에 부치자고 영상 김상철(金尙喆)이 주달하여 재가를 받았다. 이전에도 토역(討逆) 사건은 모두 진주(陳奏)한 예가 있었으므로 묘당(廟堂)에서는 애초에 별도로 사신을 따로 보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곧 절사(節使)가 가게 되므로 겹쳐 보낼 것이 없다 하여 절사 편에 보내기로 정하고 품의하여 윤허를 받은 것이다. 사신의 명칭은 진하 사은 진주 겸 동지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使)로 하였다.
※토역 주문(討逆奏文) : 영조의 세손인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을 정조가 즉위한 뒤에 사사(賜死)한 전말을 보고하는 글이다.
▣정유년(1777, 정조 1) 10월
○26일 : 표문(表文), 부본(副本), 자문(咨文), 주본(奏本) 및 방물(方物), 세폐(歲幣)의 수량
황태후 존시진하표(尊諡進賀表) 1.
부본(副本) 1.
방물표(方物表) 1.
부본 1.
예부자문(禮部咨文) 1.
방물(方物) 황세저포(黃細苧布) 3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30필.
황세면주(黃細綿紬) 20필.
자세면주(紫細綿紬) 20필.
백세면주(白細綿紬) 30필.
용문염석(龍文簾席) 2장.
황화석(黃花席) 15장.
만화석(滿花席) 15장.
잡채화석(雜彩花席) 15장.
백면지(白綿紙) 2000권.
○30일 : 이곳 현감을 역임한 지 10년이 되었고 황해 감사를 역임한 지가 1년이 되었는데, 오늘 사명을 받들고 거듭 왔으니....밤에 여러 기생과 더불어 다시 만난 기쁨을 이야기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잤다.
▣정유년(1777, 정조 1) 11월
○15일 : 중국의 복건(福建) 사람 28명이 표류하여 장연에 도착했는데, 이에 관하여 조가(朝家)에서 사행 편에 부치는 자문(咨文) 1통과 비국 관문(關文)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21일 : 본부(의주)의 출신(出身) 김하련(金夏璉)이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 명함을 바쳤다. 이어서 호신래(呼新來)를 하고 예에 따라 진퇴보(進退步)를 행하였다. 그는 명경과(明經科)인데 나이는 젊었다. 이날도 머물렀다.
※진퇴보(進退步) : 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상급 관원이 부를 때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두 사람이 두 팔을 추켜 잡고 ‘신래(新來)’를 부르며 상관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갔다 하는 것이다.
○27일 : 그리고 삼강(三江)을 건너 구련성(九連城) 30리에 이르러 잤다. 전에는 성(城)이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 나라 때 여기에 왕을 봉하였다 한다. 비석이 있는 모퉁이에 이르니 길 가에 작은 돌비를 세웠는데, 글자가 다 없어져 무슨 비인지 알 수 없었다. 거친 산이 높고 낮으며 수림이 우거지고 주위가 수십 리 되는데, 가운데에 큰 내가 있어 산을 안고 흐른다. 의주의 장교가 먼저 도착하여 산 밑에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구덩이 가운데 숯불을 피우고 그 위에 막을 쳐 놓았다. 그리고 장막 겉은 개가죽 휘장을 두르고 덮었다. 겨우 한 사람이 누울 만한데 따뜻하기가 온돌과 같았다. 상사(上使)는 몽고 전장(蒙古氈帳)을 쳤다.
새벽녘에 솜을 헤집는 모진 바람이 침막(寢幕)을 흔들어 올렸다. 포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손가락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말 모는 자들은 우레같이 코를 골았으니 참으로 미련스럽기가 목석과도 같다. 장막 앞뒤에서 창군(鎗軍)들이 한꺼번에 고함을 질러 서로 응하며 언 나팔을 자주 분다. 이것은 궁산(窮山) 절협(絶峽)에 호랑이와 표범이 종횡(縱橫)하기 때문이다. 왜역(倭譯) 현상조(玄商祚)는 강 머리에서 뒤에 떨어졌다. 이것은 소원에 따른 것이다. 이날 30리를 갔다.
○28일 : 길 떠난 지 30여 일이 되었다. 얼음을 헤치고 눈 속을 걸어 근력이 지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길이 아득하여 집과 나라를 생각하면 다른 하늘 아래에 있는 것 같다. 실로 나랏일을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 감히 수고로움을 말할 수는 없으나 생각하매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금석산 이후로는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며 사이사이 들판도 많다. 그러나 모두 황폐한 땅이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여기서 경작해 먹게 하지 못함이 못내 한스럽다.
○29일 : 건륭 42년 12월 일, 조선국 진하 사은 진주 겸 연공사 일행 인마 보단(乾隆四十二年十二月日 朝鮮國進賀謝恩陳奏 兼年貢使一行人馬報單)
정사 : 흥록대부 하은군 이광(李垙), 부사 : 이조 판서 연풍군(延豐君) 이갑(李?), 서장관 : 겸사헌부 집의 이재학(李在學), 대통관(大通官) : 박도관(朴道貫)ㆍ이종진(李宗鎭)ㆍ최중재(崔重載), 압물관(押物官) 24원(員), 종인(從人) 30명, 역졸 39명, 역마 55필, 구인(驅人) 55명, 자문재마(咨文載馬) 2필, 구인 2명, 장막재마(帳幕載馬) 5필, 구인 5명, 건량재마(乾糧載馬) 64필, 구인 64명, 반전재마(盤纏載馬) 20필, 구인 20명, 축롱재마(杻籠載馬) 30필, 구인 30명, 포개재마(鋪蓋載馬) 30필, 구인 30명, 사복재마(私卜載馬) 50필, 구인 50명으로 사람이 모두 338명인데 이 가운데 18명이 뒤떨어지고 실제 인원은 320명이다. 말은 모두 219필인데 이 중 22필은 돌아가 실제로는 217필이고, 세폐 286포 내에 119포는 성경(盛京)에 존류(存留)하고, 167포가 진경(進京)하고, 방물(方物) 144포, 공미(貢米) 68포 내에 4포는 성경에 존류하고 64포가 진경하였다.
개피(開皮) 45포, 축롱(杻籠) 26포, 미구대(米口帒) 70포, 찬물초두(饌物梢頭) 50포, 소지(小紙) 30포, 잡물초두(雜物梢頭) 180포, 백목(白木) 50필, 교목(交木) 20필, 해삼(海蔘) 16포, 선자(扇子) 3포, 은(銀) 11포, 대지(大紙) 9포이다.
호행청인(護行淸人) : 영송관(迎送官) 1명과 아역(衙譯) 1명은 봉성(鳳城)부터 북경(北京)까지 호행(護行)하여 돌아올 때 또한 같이 돌아오고, 장경(章京) 1명, 보고(甫古) 2명, 갑군 20명, 민병(民兵) 20명 이상 43명은 봉성부터 호행하여 요동에 이르러 바꾸고, 심양에 이르러 또 교체하며, 또 산해관에 이르러 바꾸어 북경에 도달하기로 했다.
○30일 : 봉성 예단(鳳城禮單)
청성장(淸城將) 1원(員), 주객사 주사(主客司主事) 1원, 부성장(副城將) 1원, 우록장경(牛彔章京) 1인, 세관(稅官) 1인, 문어사(門御史) 1인, 청장경(淸章京) 8인, 몽고장경(蒙古章京) 2인, 잡로장경(卡路章京) 1인, 영송관(迎送官) 3인, 대자(帶子) 8인, 박씨(博氏) 2인, 외랑(外郞) 1인, 세관박씨(稅官博氏) 1인, 아역(衙譯) 2인, 가출장경(加出章京) 1인, 문상박씨(門上博氏) 1인, 필첩식(筆貼式) 2인, 보고(甫古) 17명, 세관보고(稅官甫古) 2인, 분두보고(分頭甫古) 9인, 문상보고(門上甫古) 7인, 갑군(甲軍) 50명, 세관갑군(稅官甲軍) 16명, 가출갑군(加出甲軍) 36명에 대해 도합 장지(壯紙) 161속(束), 백지(白紙) 456속, 청서피(靑黍皮) 116령(領), 소갑초(小匣草) 600봉(封), 봉초(封草) 80봉, 월내(月乃) 8부(部), 청은장도(靑銀粧刀) 8자루, 환도(環刀) 8자루, 장도(粧刀) 38자루, 초도(鞘刀) 286자루, 별선(別扇) 292자루, 전연죽(鈿煙竹) 76개, 은항연죽(銀項煙竹) 76개, 석장연죽(錫長煙竹) 44개, 소연죽(小煙竹) 112개, 별연죽(別煙竹) 34개, 은소연죽(銀小煙竹) 8개, 황필(黃筆) 8병, 진묵(眞墨) 8정(丁), 화철(火鐵) 308개, 대구(大口) 76미(尾), 유둔(油芚) 2부(部)이다.
만교(灣校)가 표착인(漂着人)을 영솔하여 봉성(鳳城)에 교부하고 돌아가는 편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이날 80리를 갔다.
▣정유년(1777, 정조 1) 12월
○2일 : 연산관 예단(連山關禮單)
호행복병장(護行伏兵將) 1인, 영송관(迎送官) 1인, 아역(衙譯) 1인, 보고(甫古) 2인, 갑군(甲軍) 18명, 종인(從人) 7명에 대해 도합 장지(壯紙) 11속, 백지(白紙) 69속, 청서피(靑黍皮) 8령(令), 대갑초(大匣草) 2갑, 소갑초(小匣草) 30갑, 봉초(封草) 42봉, 월내(月乃) 4부, 환도(環刀) 2자루, 초도(鞘刀) 34자루, 별선(別扇) 36자루, 전연죽(鈿煙竹) 2개, 은항연죽(銀項煙竹) 2개, 석장연죽(錫長煙竹) 2개, 소연죽(小煙竹) 24개, 화철(火鐵) 28개이다.
요동성수(遼東城守) 안림(安林)과 장경(章京) 악력(鄂力)ㆍ화막락(火莫樂)이 여기서부터 교체하여 호행하였다. 이날 55리를 갔다.
○5일 : 구요동(舊遼東)에 이르러 동문으로 들어갔다. 외성(外城)과 성문은 다 허물어지고 무지개 다리만이 남았다. 황명(皇明) 말년에 숭덕(崇德) 청 태종(淸太宗)이 성을 공파(攻破)한 뒤,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헐어서 신요동성(新遼東城)에 옮겨 쌓았다는데 지금도 허물어진 벽과 무너진 성가퀴는 금시 난리를 치른 것 같다. 명 나라 때에는 조공하는 길이 여기서부터 서남쪽 안산(鞍山)으로 났었는데, 여기서 안산까지가 60리라 한다.
좌우에는 길을 끼고 상점과 인가(人家)가 줄줄이 붙어 있어, 어깨를 비비고 수레바퀴가 부딪칠 정도로 복잡하다. 온 성안의 둘레는 3, 4리쯤 된다. 상점 앞에 나무 판자를 걸어 놓았다. 이를 조패(照牌)라 하는데, 그 상점의 이름과 파는 물건을 써 놓았다. ‘당(當)’ 자를 써 놓은 곳은 돈을 대부하는 가게이고, ‘잡화(雜貨)’라고 쓴 것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 놓은 곳이며, ‘환제구전(丸劑俱全)’이라고 쓴 것은 곧 약사(藥肆)이다. 서책(書冊)ㆍ화도(畫圖)ㆍ의복(衣服)ㆍ집물(什物)이 모두 각각 칭호가 있어, 검은 삼승장(三升帳)으로 두르고 상점 앞에 ‘산동 대포(山東大布)’라고 쓴 것은 곧 대포(大布)를 매매하는 가게이다. 곳곳에 비단 무더기가 휘황찬란하여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6일 : 요동들의 넓이가 옛날부터 700리라고 일컫는다. 선배들이 말하기를, ‘요동 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이 큰 것을 안다.’ 하더니, 참으로 그렇다. 이날 60리를 갔다.
○8일 : 방물 및 세폐, 여러 복물이 미처 도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물건들을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렵다. 밤이면 갑군(甲軍)이 길을 순라(巡邏)하다가 행중(行中) 사람들이 문밖에만 나오면 곧 금하였다. 이 또한 은(銀)을 잃어버린 뒤의 일이다. 참으로 괴로웠다. 이리하여 하루를 머무르게 되는 것은 전례에도 있는 일이다.
심양 예단(瀋陽禮單)
문장(門將) 1인, 영송관 1인, 아역(衙譯) 1인, 보고(甫古) 2인, 갑군 16명, 종인 5명, 예부 낭중 4인, 필첩식(筆帖式) 4인, 외랑(外郞) 4인, 압거장(押車將) 1인, 보고 2인, 갑군 16명, 종인 5명, 호부 낭중 2인, 외랑 4인, 필첩식 4인, 서리 4인, 고지기[庫直] 4인, 도서리(都書吏) 2인, 미고 낭중(米庫郞中) 2인, 서리 2인, 고지기 2인, 갑군 6명, 종인 4명에 대해 도합 장지 134속, 백지 332속, 소갑초(小匣草) 320갑, 봉초(封草) 192봉, 월내(月乃) 36부, 청은장도(靑銀粧刀) 4자루, 석장도(錫粧刀) 28자루, 초도(鞘刀) 90자루, 별선(別扇) 121자루, 전연죽(鈿煙竹) 26개, 은항연죽(銀項煙竹) 40개, 석장연죽(錫長煙竹) 22개, 소연죽(小煙竹) 76개, 은소연죽(銀小煙竹) 4개, 황필(黃筆) 8병, 진묵(眞墨) 8정, 화철(火鐵) 24개, 대구(大口) 18미이다.
방물 세폐는 으레 심양에 남겨 두기 때문에 대호지(大好紙) 250권, 소호지(小好紙) 2500권, 녹주(綠紬) 100필, 홍주(紅紬) 100필, 쌀 4석 5두 6승을 아울러 먼저 이곳에 납부해야 하는데, 방물 짐들이 오후에야 도착하였으나 아문(衙門)이 복잡하여 곧 수송하지 못하였다. 명일에도 다 바치기 어려울 것 같아 모레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임역(任譯) 3인 뒤떨어져 여기 있기로 했다.
○11일 : 하루 종일 황량한 변방에 티끌 모래가 걷히지 않았다. 교자(轎子)의 창을 비단천으로 막았으나, 가는 가루가 날려 쉽게 스며든다. 갈수록 더욱 괴롭다. 두공부(杜工部)의 시(詩) ‘행로난(行路難)’이 과연 거짓말이 아니다. 데리고 온 통관(通官)의 가정(家丁) 중에 정씨(鄭氏) 성을 가진 자가 있는데 자못 우리나라 말을 잘 알아, 책문(柵門)으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따라왔는데 그의 말이 장차 북경이 가깝다고 하였다. 그는 길에서 우리 사행(使行)을 만나면 곧 말에서 내려 담뱃대를 빼고 지났으므로 다른 호인(胡人)과 다른 데가 있었다. 이날 75리를 갔다.
○17일 : 맑음. 해가 뜬 뒤에 출발하였다.
간밤 눈으로 길이 미처 열리지 못하여 더욱 길이 험하다. 길에서 호마(胡馬) 500필과 낙타(槖駝) 네 마리가 들[野]을 덮어 오는 것을 만났다. 멀리 바라볼 때는 양 떼 같았는데 앞에 가까워지니 장관(壯觀)이었다.
말은 모두 흰 빛이고 낙타는 염소 머리에 말 몸뚱이요 소 발굽에 노새 꼬리이다. 주둥이는 뾰족하고 목이 가늘며 털은 짙은 회색이고 높이는 한 길 남짓하다. 길이는 두 발이 넘는다. 등에는 고기 봉우리가 있어 앞뒤에 불쑥 솟아나서 안장 모양과 흡사하다. 물건을 실을 때에는 길마를 쓰지 않고 두 봉우리 사이에 싣는다. 힘이 말 3, 4필만 하고, 걸음은 넓게 떼나 굽에 살이 많아서 돌길에는 불리하다고 한다. 모는 자가 4, 5인에 불과한데도 한 떼의 짐승들이 감히 달아나지 못하니 잘 길들여진 것을 알 수 있다. 듣건대, 모두 역마(驛馬)인데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분양(分養)하는 법과 비슷한 듯하다.
○27일 : 통주(通州)의 석교(石橋)를 지났다. 이것은 큰길에서 통주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에서 경성(京城)까지가 40리인데 모두 벽돌[磚石]을 깔았다. 너비는 4, 5칸쯤 되고 돌은 모두 반듯반듯하였다. 들으니 돌을 깔 때 두어 칸마다 철정(鐵釘)으로 가로 세로 박아서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한다. 혹은 말하기를, 호황(胡皇)의 능묘(陵廟)는 대개 계주(薊州)에 있기 때문에 거둥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길을 만든 것이라 한다. 또 혹은 말하기를, 그 길이 본래 질기 때문에 청 세종[雍正]이 즉위한 뒤 새로 쌓은 것인데, 남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의 직로(直路)까지 모두 돌길[石路]을 만들었으나 석축이 수십 년 지나자 돌이 무너져 버렸으므로 호부(戶部)의 은(銀)을 내어 고쳐 깐 것이라 한다.
○27일 : 북경 예단(北京禮單)
제독(提督) 1원, 대통관(大通官) 2인, 차통관(次通官) 8인, 문장(門將) 2원, 보고 2인, 갑군 16명, 개시관(開市官) 1원, 대사 1원, 서반(序班) 3인, 화방(火房) 3인, 예부 낭중 4원, 외랑(外郞) 4원, 필첩식 4인, 서반 5인, 방물 면주고 색랑(方物綿紬庫色郞) 4원, 서리(書吏) 3인, 고지기 3인, 피물고 색랑(皮物庫色郞) 4원, 서리 3인, 고지기 3인, 백면지 석자고 색랑(白綿紙席子庫色郞) 4원, 서리 3인, 고지기 3인, 세폐미고 색랑(歲幣米庫色郞) 2인, 서리 1인, 고지기 1인, 피물고 색랑(皮物庫色郞) 2인, 서리 1인, 고지기 1인, 환도봉상(環刀捧上) 1원, 세찬 영래관(歲饌領來官) 2원, 하인(下人) 6명, 고시방 지래 서반(告示榜持來序班) 4인, 연상영래관(宴床領來官) 2원, 하인 12명, 찬물관(饌物官) 2원, 하인 6명, 시초관(柴草官) 1원, 하인 7명, 양미관(糧米官) 1원, 하인 4명, 기명차지 서반(器皿次知序班) 2인, 주객사 주사 낭중 원외랑 필첩식(主客司主事郞中員外郞筆貼式) 합 16인에게 장지 466속, 백지 305속, 청서피 138장, 대갑초 118갑, 소갑초 1300봉, 봉초 150봉, 월내(月乃) 46부, 대모장도(玳瑁粧刀) 4자루, 청은장도 6자루, 환도 4자루, 장도 28자루, 초도(鞘刀) 112자루, 별선 372자루, 전연죽 142개, 은항연죽 140개, 석자연죽 36개, 소연죽 52개, 별연죽 14개, 은장연죽 4개, 은소연죽 6개, 황필 24자루, 진묵 24정, 화철(火鐵) 54개, 전복(全鰒) 11첩, 문어(文魚) 5미, 해삼(海蔘 16두(斗), 대구(大口) 58미이다.
노정기(路程記) - 서울에서 연경(燕京)까지 -
서울에서 고양 벽제관이 40리, 파주 파평관 40리, 장단 임단관 30리, 개성부 태평관 40리, 금천 금릉관 70리, 평산 동양관 30리, 총수참 보산관(蔥秀站寶山館) 30리, 서흥 익손당 용천관(瑞興益損堂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원(劍水站鳳陽院) 40리, 봉산 동선관(鳳山洞仙館) 30리, 황주 태허각 제안관(黃州太虛閣齊安館) 40리, 중화 생양관 55리, 평양 대동관 50리, 순안 안정관 50리, 숙천 숙령관 60리, 안주 안흥관 운주헌 60리, 가산 가평관 50리, 납청정 25리, 정주 신안관 45리, 곽산 운흥관 30리, 선천 임반관 의검정(宣川林畔館倚劍亭) 40리, 철산 차련관 45리, 용천 청류당 30리, 소관참 의순관(所串站義順館) 40리, 의주 용만관 35리이다.
압록강은 5리인데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오고, 소서강(小西江)은 1리인데 건천(乾川)이며, 중강(中江)은 1리로 근원이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오고, 방파포(方坡浦)는 1리인데 곧 건천(乾川)이요, 삼강(三江)은 2리인데 작은 내이고, 구련성은 15리인데 숙참(宿站)이며 성터가 있어 도합 20리이고, 망우(望隅)가 5리, 자음복이(者音福伊) 8리, 비석우(碑石隅) 2리, 마전파(馬轉坡) 5리, 금석산 15리인데 중화참(中火站) 도합 35리이고, 온정 8리, 세포(細浦) 2리, 유전(柳田) 10리, 탕참(湯站)이 10리에 성터가 있고, 총수산이 2리인데 숙참(宿站) 도합 32리이고, 어룡퇴(魚龍堆)가 1리, 사평(沙坪) 2리, 혈암(穴巖) 10리, 상룡산(上龍山) 5리, 책문이 10리인데 중화참 도합 28리이다. 이상은 노숙참(露宿站)이다.
안시성이 10리인데 곧 봉황산 내맥(來脈) 기슭 토산(土山) 높은 곳으로 성터가 있고, 진평(榛坪)이 2리, 구책문(舊柵門) 8리, 봉황산 5리, 봉황성이 10리인데 숙참(宿站) 도합 35리이고, 차호(叉湖)가 10리, 건자포(乾者浦)가 10리인데, 중화참 도합 20리이고, 백안동(伯顔洞)이 10리, 마고령(麻姑嶺) 10리, 송참(松站) 10리 합하여 30리이고, 소장령(小長嶺)이 5리, 옹북하(瓮北河)가 5리인데 곧 팔도하(八渡河)가 끝나는 곳이요, 대장령(大長嶺)이 5리, 팔도하 14리, 중화참 근원이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오는데 합하여 29리이고, 장항(獐項)이 1리, 통원보(通遠堡)가 29리인데 숙참(宿站) 도합 30리이고, 석우(石隅)가 15리, 초하구 답동(草河溝畓洞)이 15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분수령이 20리인데 곧 큰 산[大山]이 남으로 달려 과협(裹狹)한 곳이요, 연산관(連山關)이 10리인데 숙참(宿站) 도합 30리이고, 회령령이 15리, 첨수참이 25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청석령이 20리, 대소석령(大小石嶺) 2리, 낭자산(狼子山)이 18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삼류하가 15리, 왕상령(王祥嶺) 10리, 석문령 3리, 냉정(冷井)이 10리인데 중화참 도합 38리이고, 아미장(阿彌莊)이 15리인데 이 참(站)에서부터 비로소 북쪽으로 가게 된다.
신요동이 15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접관청(接官廳)이 17리, 방허소(防虛所) 8리, 삼도파(三道把)가 5리인데 일명은 난니보(爛泥堡)이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연대하(煙臺河)가 10리, 산요포(山腰鋪) 5리, 오리대 5리, 십리보가 5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판교포(板橋鋪)가 5리, 장성참(長盛站) 10리, 사하보(沙河堡) 5리, 포교와(暴交哇) 10리, 화수교(花水橋) 8리, 전장포(氈匠鋪) 2리, 백탑보가 10리인데 중화참 도합 50리이고, 일소대가 5리, 홍화포(紅花鋪) 5리, 혼하(混河) 1리, 심양성이 9리인데 숙참 도합 20리이고, 원당사(願堂寺)가 5리, 탑원(塔院) 7리, 방사촌(方士村) 3리, 장원교(壯元橋) 1리, 영안교(永安橋)가 14리인데 중화참 도합 25리이고, 쌍가자(雙家子)가 5리, 대방신(大方身) 10리, 마도교(磨刀橋) 5리, 변성(邊城)이 10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신농점(神農店)이 12리, 고가자(孤家子)가 13리인데 곧 숙참을 넘어서 주류하(周流河)가 8리, 주류하보성(周流河堡城)이 9리인데 숙참 도합 42리이고, 북으로부터 서남을 향하여 가서 필자점(泌子店)이 3리, 오도하 2리, 사방대(四方臺) 5리, 곽가둔(郭家屯) 5리, 신민점(新民店) 5리, 소황기보(小黃旗堡) 5리, 대황기보(大黃旗堡)가 8리인데 중화참 도합 33리이고, 노하구(蘆河溝) 8리, 석사자(石獅子) 15리, 고성자(古城子) 10리, 백기보(白旗堡) 5리인데 숙참 도합 38리이고, 소백기보(小白旗堡) 10리, 일판문(一板門) 20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이도정(二道井)이 20리인데 숙참이요, 신은사(神隱寺)가 8리, 신점(新店)이 22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토자정(土子井) 1리, 연대 15리, 소흑산이 4리인데 숙참 도합 20리이고, 양장하(羊腸河)가 12리, 중안보(中安堡)가 12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우가대(于家垈) 5리, 구참리(舊站里) 13리, 이대자(二臺子) 5리, 달자점(㺚子店) 5리, 대소가자(大小家子) 3리, 신점(新店) 2리, 신광녕(新廣寧)이 7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흥륭점(興隆店) 5리, 쌍하관(雙河館) 7리, 장진보(壯鎭堡) 5리, 상흥점(常興店) 2리, 삼대자(三臺子) 3리, 여양역(閭陽驛)이 15리인데 중화참 도합 37리이고, 이대자(二臺子) 10리, 삼대자(三臺子) 5리, 사대자(四臺子) 5리, 오대자(五臺子) 5리, 육대자(六臺子) 5리, 십삼산이 10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삼대자(三臺子) 12리, 대릉하(大凌河) 14리, 구릉하참(九凌河站)이 4리인데 중화참(中火站) 일명 대릉하참(大凌河站) 도합 30리이고, 사동비(四同碑) 12리, 쌍양점(雙陽店) 10리, 소릉하참(小凌河站)이 8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소릉하교(小凌河橋) 3리, 송산보(松山堡)가 17리인데 중화참(中火站) 도합 20리이고, 행산보(杏山堡) 18리, 십리하점(十里河店) 10리, 고교보(高橋堡)가 8리인데 숙참 도합 36리이고, 탑산점(塔山店) 12리, 주사하(朱獅河) 5리, 조라산점(罩羅山店) 5리, 이대자(二臺子) 3리, 연산역이 7리인데 중화참 도합 32리이고, 오리하 5리, 쌍석참(雙石站) 5리, 쌍석성(雙石城) 3리, 영녕사(永寧寺) 10리, 영원위(寧遠衛)가 8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청돈대(靑墩臺) 7리, 조장역(曹莊驛) 6리, 칠리파(七里坡) 5리, 오리교(五里橋) 7리, 사하소(沙河所)가 8리인데 중화참 도합 33리이고, 건구대(乾溝臺) 3리, 연대하 5리, 반납점(半拉店) 5리, 망해점(望海店) 2리, 곡천하(曲天河) 5리, 삼리교(三里橋) 7리, 동관역(東關驛)이 3리인데, 숙참 도합 30리이고, 이대자 5리, 육도하교(六渡河橋) 11리, 중후소(中後所)가 2리인데 중화참 도합 18리이고, 일대자 5리, 이대자 3리, 삼대자 4리, 사하점(沙河店) 8리, 섭가분(葉家墳) 7리, 구어하둔(口魚河屯) 2리, 구어하교(口魚河橋) 1리, 양수하점(兩水河店)이 9리인데 숙참 도합 39리이고, 전둔위(前屯衛) 6리, 왕가대(王家垈) 10리, 왕제구(王濟溝) 5리, 고령역(高寧驛) 5리, 송령구(松嶺溝) 5리, 소송령(小松嶺) 4리, 중전소(中前所)가 11리인데 중화참 도합 46리이고, 대석교(大石橋) 7리, 양수호(兩水湖) 3리, 노계둔(老鷄屯) 2리, 왕가점(王家店) 3리, 팔리보 10리, 산해관이 10리인데 숙참 도합 35리이고, 심하 3리, 홍화점(紅花店) 7리, 범가장(范家莊) 20리, 대리영(大理營) 10리, 왕가령 3리, 봉황점이 2리인데 중화참 도합 45리이고, 망해점 5리, 심하보 10리, 망자점(網子店) 10리, 유관이 10리인데, 숙참 도합 35리이고, 영가장(榮家莊) 3리, 상백석포(上白石鋪) 2리, 하백석포(下白石鋪) 3리, 오가장(吳家莊) 3리, 무령현(撫寧縣) 9리, 양하(羊河) 2리, 오리포(五里鋪) 3리, 노봉구(蘆峯口) 10리, 다붕암(茶棚庵) 5리, 배음보(背陰堡)가 5리인데 중화참 도합 45리이고, 쌍망포(雙望鋪) 5리, 요참(要站) 5리, 부락령(部落嶺) 12리, 십팔리보(十八里堡) 3리, 여조(驢槽) 13리, 누택원(漏澤園) 3리, 영평부(永平府)가 2리인데 숙참 도합 43리이고, 청룡하(靑龍河) 1리, 남구점(南坵店) 2리, 난하(灤河) 2리, 범가장 10리, 망해대 5리, 매화점(梅花店) 8리, 야계둔(野鷄屯)이 12리인데 중화참(中火站) 도합 40리이고, 사하보(沙河堡) 8리, 사하역이 12리인데 숙참 도합 20리이고, 왕관묘(王官廟) 5리, 마포영(馬鋪營)이 5리인데 일명 칠가령(七家嶺)으로 전에 모자점(帽子店)이 있던 곳이고, 신점포(新店鋪) 5리, 우하점(于河店) 5리, 신평점(新平店) 5리, 강우교(扛牛橋) 12리, 청룡교 7리, 진자점(榛子店)이 1리인데 중화참 도합 40리이고, 철성감(鐵城坎) 20리, 소령하(小鈴河) 1리, 판교(板橋) 7리, 풍윤현(豐潤縣)이 22리인데 숙참 도합 50리이고, 조가점(趙家店) 2리, 장가점(莊家店) 1리, 어하교(漁河橋) 1리, 노가점(盧家店) 4리, 고려보(高麗堡) 7리, 초리장(草里莊) 1리, 연계보(軟鷄堡) 10리, 다붕암(茶棚庵) 2리, 사하(沙河)가 12리인데 중화참 도합 40리이고, 양수교(兩水橋) 10리, 양가점(兩家店) 5리, 십오리둔(十五里屯) 10리, 동팔리보(東八里堡) 7리, 용지암(龍池庵) 1리, 옥전현(玉田縣)이 7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서팔리보(西八里堡) 8리, 오리둔(五里屯) 5리, 채정교(彩亭橋) 3리, 대고수점(大枯樹店) 9리, 소고수점(小枯樹店) 2리, 봉산점(蜂山店) 8리, 나산점(螺山店) 2리, 별산점(鱉山店)이 8리인데 중화참 합하여 45리고, 이리점(二里店) 2리, 현거(現渠) 4리, 소교방(小橋坊) 2리, 어양교(漁陽橋) 14리, 계주성(薊州城)이 5리인데 숙참 도합 27리이고, 오리교 5리, 방균점(邦均店)이 25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백간점(白澗店) 12리, 공락점(公樂店) 8리, 가가령(假家嶺) 1리, 석비(石碑) 9리, 호타하(滹沱河) 5리, 삼하현(三河縣)이 5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조림점(棗林店) 6리, 백부도(白浮圖) 6리, 신참(新站) 6리, 황친점(皇親店) 6리, 하점(夏店)이 6리인데, 중화참 도합 30리이고, 유하둔(柳河屯) 6리, 마이핍(馬已乏) 6리, 연교포(煙郊鋪) 8리, 삼가점(三家店) 5리, 등가장(鄧家莊) 3리, 호가장(胡家莊) 4리, 습가장(習家莊) 3리, 백하(白河)가 4리인데 곧 통주강(通州江)이고, 통주(通州)가 1리인데 숙참 도합 40리이고, 팔리교(八里橋)가 8리인데 황성 궐내의 어구(御溝)의 물이 흘러나가는 내의 다리이고, 양가갑(楊家閘) 2리, 관가장(管家莊) 3리, 삼간방(三間房) 3리, 정부장(定府莊) 3리, 대왕장(大王莊) 2리, 태평장(太平莊) 3리, 홍문(紅門) 3리, 십리보(十里堡) 2리, 팔리보(八里堡)가 2리인데 공경(公卿)들의 분묘가 서로 연하여 마을같이 보이는 곳이며, 미륵원 7리, 조양문이 1리인데 곧 황성의 동문으로 도합 40리이다.
인마(人馬)ㆍ행량(行糧) 도수(都數) - 의주에서 심양까지 -
어의(御醫) 1원(員), 사노(使奴) 5명, 원액(員額) 22원, 방료군관(放料軍官) 1원, 만상군관(灣上軍官) 1원, 약방서원(藥房書員) 1인, 도합 인원 31명에게 매일 매원(每員) 당 백미 2승(升)씩 도합 4석(石) 8두(斗) 2승(升)이요, 역졸 73명, 주자(廚子) 4명, 군뢰(軍牢) 2명, 북경노(北京奴) 16명, 우어별차 구인(偶語別差驅人) 1명, 만상군관 구인(灣上軍官驅人) 1명, 도합 97명에게 매일 매명(每名)당 백미 2승(升)식 도합 14석(石) 3두(斗) 4승(升)이요, 상등마 12필에게 매일 매필(每匹) 당 죽전미(粥田米) 2승씩 도합 1석 11두 4승, 매일 매필 당 콩 5승씩 도합 4석 6두, 중등마 35필에게 매일 매필 당 죽전미(粥田米) 2승씩 도합 5석 2두, 매일 매필 당 콩 4승씩 도합 10석 4두, 하등마 9필에게 매일 매필 당 죽전미 2승씩 도합 1석 4두 8승, 매일 매필 당 콩 3승씩 도합 1석 14두 7승이다. 도합하여 백미 18석 11두 6승, 전미(田米) 9석 3두 2승, 콩 16석 9두 7승인데, 의주에서부터 요(料)를 내었고, 은 220냥도 또한 의주에서부터 내었는데, 세 사신은 각각 5냥 6돈[錢]씩이고 수역(首譯) 1원은 5냥, 당상 역관 3원, 상통사 2원, 장무관(掌務官) 1원과 어의(御醫) 1원은 각 4냥씩이고, 종사관 12원, 우어별차(偶語別差) 1원, 사자관 1원, 의원 1원, 화원 1원은 각 3냥씩이고, 내국 서원(內局書員) 1인은 4냥이고, 만상군관(灣上軍官) 2인은 각 3냥씩이고, 도노(道奴) 5명은 각 4냥씩인데, 이상과 같이 도합 은이 151냥 8돈이다.
관하인(官下人) 30명, 군뢰(軍牢) 2명, 주자(廚子) 4명, 교마(轎馬) 14필, 군뢰(軍牢)와 주자(廚子)의 자기마(自騎馬) 6필인데, 이상은 나머지 은(銀) 68냥 2돈으로 날마다 곡식을 사서 요(料)를 주었다.
양료(糧料)ㆍ시초(柴草)ㆍ찬물(饌物) 도수(都數)
관(官)ㆍ종(從) 도합 38명의 요(料)는 봉성에서 낸 것이 속미(粟米) 19석 6두, 심양에서 낸 것이 속미 23석 10두 3승, 산해관(山海關)에서 낸 것이 □□□□□
무릇 양료(糧料)는 만상 군관(灣上軍官)이 모두 받아 내어 지방(支放)하고, 매일 삼방(三房) 찬물(饌物)을 합계하면 닭 6수(首), 돼지 1수, 시당죽(柴糖竹) 110속이고, 역마 및 쇄마(刷馬) 217필에게 매일 매필 당 초(草) 각 1속(束)씩인데 이상은 봉성으로부터 통주에 이르는 연로 각 참에서 진배(進排)한다. 초는 도수(都數)를 받아 내어 역마에게 나누어 준다.
삼사(三使) 및 원역(員役)의 일공(日供) -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을 때 -
정사(正使)는 매일 오리[鵝] 1척, 닭 3척, 저육(猪肉) 5근, 생선 3마리, 우유(牛乳) 1족(鏃), 두부(豆腐) 3근, 백면(白麵) 2근, 황주(黃酒) 6호(壺), 엄채(醃菜) 3근, 다엽(茶葉) 4냥, 장과(醬瓜) 4냥, 소금 2냥, 청장(淸醬) 6냥, 장(醬) 8냥, 초(醋) 10냥, 향유(香油) 1냥, 화초(花椒) 1돈, 등유(燈油) 3종(鍾), 납촉(蠟燭) 3매, 내소유(奶酥油) 3냥, 세분(細粉) 1근 반, 생강 5냥, 마늘 10개, 빈과(蘋果) 15개, 황리(黃梨) 15개, 감[柿子] 15개, 쇄조(晒棗) 1근, 포도(葡萄) 1근, 사과(沙果) 15개, 소주(燒酒) 1병, 쌀 2승(升), 나무[柴] 30근, 3일마다 몽고양(蒙古羊) 1척, 그리고 매일 양(羊)이 공통으로 1척인데 이는 부사, 서장관과 함께 한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은 매일 양(羊)이 공통으로 1척, 오리 각 1척, 닭 각 1척, 생선 각 1마리, 우유(牛乳) 공통으로 1족, 고기가 공통으로 3근, 백면 각 2근, 두부 각 2근, 엄채(醃菜) 각 3근, 화초(花椒) 각 1돈, 다엽(茶葉) 각 1냥, 소금 1냥, 청장 각 6냥, 장 각 6냥, 초 각 10냥, 황주 각 6호, 장과(醬瓜) 각 4냥, 향유(香油) 각 1냥, 등유 각 1종, 쌀 각 2승, 빈과(蘋果) 공통 15개, 사과(沙果) 공통 15개, 황리(黃梨) 공통 15개, 포도 공통 5근, 쇄조 공통 5근인데, 과물은 5일에 한 번씩 준다.
부사는 매일 나무 17근, 서장관은 매일 나무 15근이다. 대통관 3원, 압물관 24원은 매일 닭 1척, 고기 2근, 백면 1근, 소채(酥菜) 1근, 두부 1근, 황주 2호, 화초 5푼, 다엽(茶葉) 5돈, 청장 2냥, 장 4냥, 향유 4돈, 등유 1종, 소금 1냥, 쌀 1승, 나무 10근이다.
상(賞)을 받은 종인(從人) 30명은 매일 고기 1근 반, 백면 반 근, 엄채(醃菜) 2냥, 소금 1냥, 등유 공통으로 6종, 황주 공통으로 6호, 쌀 1승, 나무 4근이고, 상(賞)이 없는 종인 178명은 매일 고기 반 근, 엄채 4냥, 초 2냥, 소금 1냥, 쌀 1승, 나무 4근이다.
○29일 : 같은 날 내각(內閣)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왕(王)의 주문(奏文)을 보니, 그 나라에 불행한 일이 있는데 그 국왕이 처리한 것이 극히 합당하니 짐(朕)의 마음에 가상하고 위로된다. 접주(摺奏 천자에게 진달하는 주문) 안에 있는 내용 가운데 격식에 맞지 않는 곳이 있으니, 해부(該部)에서 왕에게 자문(咨文)하여 알게 하라. 중국 내지(內地) 변경에서 저 국왕(國王)을 위해 여당(餘黨)을 힐문(詰問)하여 수포(搜捕)할 것을 청한 대목에 대하여서는, 이미 성경 장군(盛京將軍), 산동 순무(山東巡撫)에게 힘써 잘 처리하라고 일렀다. 흠차(欽此).”
라 하였다. 같은 날 황상의 유지[上諭]를 받들었는데,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주문(奏文)에 의거하면, 그 나라에 역신 홍인한(洪麟漢) 등이 결당 모역(結黨謀逆)한 일이 있어, 같은 안건(案件)의 죄인들이 이미 복주(伏誅)하였다. 그러나 그 지당(支黨)이 많아서 혹 도망하여 법망(法網)에서 빠진 자가 있을까 하여, 관구(關口) 관원에게 칙령(勅令)하여 사찰하고 잡을 것을 간청한 일에 대해서는, 그 나라가 신복(臣服)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본래 공순(恭順)하다고 일컫는데, 지금 그 국왕으로부터 여당(餘黨)이 숨어 도망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응당 조사하여 내지(內地)로 도망하여 오는 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성경 장군(盛京將軍) 홍구(弘昫), 산동 순무(山東巡撫) 국태(國泰)가 성경, 산동 지방에서 조선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변경의 경계와 해구(海口)에서 소속(所屬)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힘써 조사하되, 만일 언어, 행적에 의심스러운 자가 있거든 잡아서, 조선 인민(朝鮮人民)이거든 곧 붙잡아 주문(奏文)하고, 그 나라에 인도하여 스스로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당해(當該) 장군과 순무는 힘을 다해서 처리하고 형식으로 여기지 말라. 흠차.”
라 하였다.
◉연행기사(燕行記事) 하
▣무술년(1778, 정조 2) 1월
○6일 :
맑음. 날씨가 춥고 얼음이 어는 때인데 사과, 능금, 포도 등이 하나같이 싱싱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홍매(紅梅), 모란(牧丹), 난초(蘭草), 복숭아꽃 등 여러 화분[盆]을 이웃 호인(胡人)에게서 빌려 왔는데, 모두 활짝 피어서 한번 볼 만하다. 또 작은 유리 항아리 하나에 오색(五色) 붕어를 넣었는데 활기차게 움직인다. 창문에 붙인 돌비늘까지도 모두 그림을 그리고 섬세하게 조각하였는데 기술이 정교하다. 오직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0일 :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함께 지영(祗迎)에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우리 사신의 아래에 섰다. 그 나라 왕은 중산왕(中山王)이라고 칭한다. 두 사신의 모자 제도는 누런 무늬 비단을 둘러서 묶었는데, 대강 우리나라 금관 모양과 흡사하다. 모두 흑문단(黑紋緞) 소매가 넓고 긴 옷[闊袖長衣]을 입고 누런 넓은 비단 띠로 허리를 둘러 두 끝을 가지런히 늘어뜨렸으며, 머리털은 묶어 상투를 만들어 두 비녀로 꽂고 발에는 검은 신을 신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한 사람은 크며 수염이 희어서 나이가 60여 세쯤 되어 보였다. 종인(從人)은 모두 회색 좁은 소매옷[狹袖衣]을 입고 상투는 검은 비단으로 쌌다.
그 나라의 공물[進貢]은 유황(硫黃) 1만 2600근, 홍동(紅銅) 3000근, 백강석(白剛錫) 1000근이다. 종인(從人)은 17명이라고 한다.
우리 쪽 사람은 임의로 출입하며 대궐 가운데를 돌아다녀 청인(淸人)과 다름이 없으나 유구국 사람은 한 집에 몰아넣고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하게 한다. 그 숙소가 정양문(正陽門)에 있는데 마음대로 그 문을 나오지도 못한다. 여러 가지로 제약하는 것이 우리 쪽 사람들보다 배나 된다고 한다.
▣무술년(1778, 정조 2) 2월
○2일 : 서사(西山)을 보고자 하여 평명(平明)에 세 사신이 수레를 타고 대궐 밖 서쪽 담을 지나 회회국(回回國) 사람이 사는 관소(館所) 앞을 지나는데 남자들을 보니 모두 호복(胡服)을 입었다. 면목이 추악하고 머리는 깎았으며 수염은 기르고 머리에 호모(胡帽)를 썼는데 그 모양은 위가 뾰족하고 높다. 수레를 탄 여인의 얼굴은 비록 아름다우나 머리에 쓴 것이 남자와 다름없고 비단으로 머리와 목을 둘렀다. 들으니 황제가 그 여자 한 사람을 맞아 비(妃)를 삼고 대단히 총애하여 대궐 담 안에 한층 누각을 세우고 회회관(回回館)과 마주 바라보게 하였다 하는데, 담 안에 과연 누각이 있었다.
또 17, 8세 가량 되어 보이는 호인(胡人) 소년을 보았다. 수레 가운데에 앉아 있는데 수놓은 옷이 선명하고 앞뒤에 말탄 호인 종자(從者)가 거의 20여 인이나 되었다. 곧 황손(皇孫)의 행차라 한다.
○4일 : 아침에 흐리고 늦게 맑았다.
하늘 끝 멀리 떠나 와서 집과 나라가 아득하니 날마다 재자관(齎咨官)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이날 재관 김홍철(金弘喆)이 먼저 그 종인(從人)을 보내어, 11월 27일과 12월 11일에 보낸 가서(家書)와 만윤(灣尹)인 대부(大父)의 편지가 아울러 도착했다. 참으로 세상 밖의 소식이다. 놀랍고 기뻐서 마음이 흐뭇하니 참으로 편지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5일 : 맑고 바람 불었다.
재관 일행이 들어왔다. 오래 여관에 머물러 있다가 고국 사람의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영솔하여 온 표류된 호인은 도합 74명인데, 천진부(天津府)의 호인(胡人) 29명은 표류하여 무장(茂長)에 이르렀었고, 관동(關東) 호인 6명은 진도(珍島), 광동성(廣東省) 호인 15명과 성경(盛京) 호인 9명은 백령도(白翎島), 소주(蘇州) 호인 5명은 영광(靈光)에 표착하였었는데, 모두 상선(商船)을 타고 바다에 표류하였던 자들이다. 이중 한 명은 우리 서울에서 죽고 한 명은 황주(黃州)에서 병들어 죽었으며, 그 나머지는 봉성(鳳城)에 교부하였다 한다.
싸 가지고 온 자문(咨文)이 모두 6통인데, 1통은 금년 가을에 황제가 심양(瀋陽)에 갈 때 사신을 보내겠다는 자문(咨文)이고, 5통은 표착한 호인을 영솔하여 보내는 자문이다. 들으니 작년 겨울에 의주(義州)에 있을 때 표착인(漂着人)들의 물건이 기록과 달랐던 일로 서장관의 장계가 올라간 뒤 관서백(關西伯)이 또 장계하여 두 변장(邊將)은 곤장을 때리고 그 수령(守令)은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해서백(海西伯)이 또한 이 일로 장계하여, 송화 현감(松禾縣監) 심원지(沁原之)가 장연겸관(長淵兼官)으로 죄파(罪罷)되었다 한다.
○10일 : 회송 예단(回送禮單)
동지(冬至)에 대한 것
어전(御前) : 표단(表緞) 5필, 이릉(裏綾) 2필, 이주(裏紬) 2필, 이견(裏絹) 1필, 장단(粧緞) 4필, 운단(雲緞) 4필, 초피(貂皮) 100장.
정사(正使)ㆍ부사(副使) : 각각 대단(大緞) 1필, 모단(冒緞) 1필, 팽단(彭緞) 1필, 주(紬) 1필, 방사(方紗) 1필, 견(絹) 1필, 은(銀) 50냥.
서장관 : 대단 1필, 팽단 1필, 견 1필, 은 40냥.
대통관 3원(員) : 각각 대단 1필, 견 1필, 은 20냥.
압물관 24원 : 각각 팽단 1필, 포(布) 2필, 은 15냥.
종인 : 각각 은 4냥.
원조(元朝)에 대한 것
어전 : 이등영롱안담전비 이등마(二等玲瓏鞍韂全備二等馬) 1필, 표단 5필, 이릉 2필, 이주 2필, 이견 1필, 장단 4필, 운단 4필, 초피 100장.
정사ㆍ부사 : 각각 대단 1필, 모단 1필, 팽단 1필, 주 1필, 방사(方紗) 1필, 견 2필, 은 50냥, 칠안전비 삼등마(漆鞍全備三等馬) 1필.
서장관 : 대단 1필, 팽단 1필, 주 1필, 견 1필, 은 50냥.
대통관 3원 : 각각 대단 1필, 주 1필, 견 1필, 은 30냥.
압물관 24원 : 각각 팽단 1필, 주 1필, 포 2필, 은 20냥.
종인 : 각각 은 5냥.
만수성절(萬壽聖節)에 대한 것
어전 : 이등영롱안담전비 이등마 1필, 표단 5필, 이릉 2필, 이주 2필, 이견 1필, 장단 4필, 운단 4필, 초피 100장.
정사ㆍ부사 : 각각 대단 1필, 모단 1필, 팽단 1필, 주 1필, 방사 1필, 견 2필, 은 50냥, 칠안전비 삼등마 1필.
서장관 : 대단 1필, 팽단 1필, 주 1필, 견 1필, 은 50냥.
대통관 3원 : 각각 대단 1필, 주 1필, 견 1필, 은 30냥.
압물관 24원 : 각각 팽단 1필, 주 1필, 포 2필, 은 20냥.
종인 : 각각 은 5냥.
연공(年貢)에 대한 것
어전 : 표단 2필, 이단 2필, 이주 2필, 이견 1필, 장단 4필, 운단 4필, 초피 100장.
정사(正使)ㆍ부사(副使) : 각각 대단 1필, 모단 1필, 팽단 1필, 주 1필, 방사 1필, 견 2필, 은 50냥.
서장관 : 대단 1필, 팽단 1필, 견 1필, 은 40냥.
대통관 3원 : 각각 대단 1필, 견 1필, 은 20냥.
압물관 24원 : 각각 팽단 1필, 포 2필, 은 15냥.
종인 : 각각 은 5냥.
정사(正使)의 가상(加賞) : 단 5필, 단의(緞衣) 1투(套), 초피 10장.
예단 도합수
어전 : 표단 20필, 이단 20필, 장단 16필, 운단 16필, 초피 400장, 2등마 2필.
정사 : 대단 4필, 모단 4필, 팽단 4필, 주 4필, 방사 4필, 견 6필, 은 200냥, 3등마 2필. 가상(加賞)으로, 단 5필, 단의 1투, 초피 10장.
부사 : 대단 4필, 모단 4필, 팽단 4필, 주 4필, 방사 4필, 견 6필, 은 200냥, 3등마 2필.
서장관 : 대단 4필, 팽단 4필, 주 2필, 견 4필, 은 180냥.
대통관(大通官) 3원 : 각각 대단 4필, 주 2필, 견 4필, 은 100냥.
압물관 24원 : 각각 팽단 4필, 주 2필, 포 8필, 은 70냥.
종인 30명 : 각각 은 18냥.
상은 분정기(賞銀分定記)
수역(首譯) 1원(員)ㆍ상통사(上通事) 2원의 상은(賞銀) 각 100냥씩, 압물관 24원이 각 70냥씩, 도합 상은(賞銀) 1780냥 내(內)에서, 매원에 16냥 6전(錢) 2푼씩 추렴[出斂]하여, 영상원(領賞員) 24원, 미영상원(未領賞員) 7원 합 31원이 각각 53냥 3돈 8푼씩을 받고, 만상 군관(灣上軍官) 2인은 25냥을 주고 남은 은(銀)이 2돈 2푼이고, 종인 30명의 상은(賞銀) 540냥 내에 종[奴]이 있는 사람 15인은 각 18냥씩을 받고, 종이 없는 사람 15인은 각 2냥 6전 6푼씩을 추렴하여 합 은(銀) 39냥 9전과 상항(上項)의 남은 은(銀) 2전 2푼을 합하여 40냥 1전 2푼 내에서, 정사 노자(正使奴子) 1명, 부사 노자(副使奴子) 1명, 내국 서원(內局書員) 1명, 합 3명은 각각 10냥을 주고, 세폐 마두(歲幣馬頭) 2명, 방물 마두(方物馬頭) 2명, 자문 마두(咨文馬頭) 1명, 합 5명은 각각 2냥 2푼씩을 주었고, 2푸은 축(縮)이다.
황태후존시진하표(皇太后尊諡陳賀表) 1도(度), 조서순부사은표(詔書順付謝恩表) 2도, 토역진주문(討逆陳奏文) 1도, 방물이준사은표(方物移准謝恩表) 4도, 성절, 동지, 정조, 연공사절표(聖節冬至正朝年貢四節表) 4조, 합 11도에 대한 예부의제청리사(禮部儀制淸吏司) 회자(回咨) 11도, 주문불합식지회자(奏文不合式知會咨) 1도, 표인입송자회자(漂人入送咨回咨) 1도, 반상자(頒賞咨) 2도, 방물이준자(方物移准咨) 1도, 합 16도.
○16일 : 길에서 보리갈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모두 말, 소, 나귀, 노새를 쓴다. 나귀에 멍에를 메운 것이 반이 넘고 소는 매우 드물다. 보습, 쟁기의 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으나 조금 작고, 땅을 쟁기로 가는 것도 깊거나 두껍지 않다. 이날 100리를 갔다.
▣무술년(1778, 정조 2) 3월
○1일 : 맑고 바람이 불었다.
45리 대방신(大方身)에 이르러 낮에 주씨(朱氏) 성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고 45리를 가서 심양성 안 서씨 성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잤다. 들으니, 문밖에서 쇠를 두드리는 자, 목탁을 치는 자, 혹은 외치고 지나가는 자가 있는데, 모두 사탕을 팔고 떡을 파는 장사치들이었다.
○15일 : 맑음. 밝기 전에 일어나 마전파(馬轉坡), 비석우(碑石隅)을 지나 30리 구련성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
낮에 쉬고 30리를 가서 배로 소서강(小西江)을 건너니, 삼강 과섭 차사원(三江過涉差使員) 청성 첨사(淸城僉使) 진익상(陳益祥)이 선소(船所)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다시 중강(中江)과 압록강을 건너니, 만윤(灣尹) 대부(大父)가 벌써 강 위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영리(營吏) 이인흥(李仁興)이 배행(陪行)으로 알현(謁見)하고, 청북 도차사원(淸北都差使員) 철산 부사 이백연(李栢然), 예차(預差) 용천 부사 민영철(閔永喆), 청북부마차사원 겸 가도사(淸北夫馬差使員兼假都事) 어천 찰방 노태관(盧泰觀), 청남 도차사원(淸南都差使員) 숙천 부사 이혁(李爀), 예차(預差) 자산 부사 조윤빈(曹允彬), 청남 부마 차사원(淸南夫馬差使員) 대동 찰방 남학원(南鶴遠)이 강 위에 들어와 뵙고 도로 강을 건넜다.
장계를 봉하여 발송하고 집에 편지를 부쳤다. 이내 벽유당(碧油堂)에서 잤다. 선래 군관 오도용(吳道容)ㆍ박태진(朴台鎭), 역관 이방욱(李邦昱)이 이날 서울에서 가서(家書)를 가지고 도로 만부로 왔다.
○20일 : 맑음. 50리를 가서 안주 청천강에 이르렀다.
본쉬(本倅)가 아전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곧 순영리(巡營吏)의 고목(告目)을 보았는데, 15일 조보(朝報)에 세 사신을 모두 삭직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라고 한다. 만 리에 명령을 받들고 출사(出使)하였다가 마침내 견책과 삭직을 당하니 황송하고 근심스러움이 더욱 간절하다. 인하여 고을에 들어가 경오헌(景梧軒)에 관사를 정하고 곧 사사 통첩[私通]을 각 고을에 발송하여, 맞이하는 일과 음식과 숙소 등 범절을 모두 감하게 하였다.
○21일 : 금월 15일 차대(次對) 때에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동지 세 사신은 이번 전대(專對)의 사행에 있어, 설사 예부(禮部)에서 이자(移咨)하는 거조가 있더라도, 마땅히 정부 장계(政府狀啓)를 주문(奏文)에 등보(謄報)한 것으로 변명을 하였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흐리멍텅하게 받아 가지고 왔으니 봉사(奉使)하는 사체(事體)를 크게 잃었습니다. 마땅히 책벌(責罰)해야 하겠으니 세 사신을 모두 삭직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라고 하니, 위에서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한다.
○28일 : 맑음. 아침에 유상(留相)이 와서 보았다.
조반을 먹고 떠나 20리를 가서 판문교(板門橋)를 지나서, 세 사신 서용(叙用)에 관한 전교(傳敎)가 나온 것을 보았다. 이것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등사하여 정사에게 보낸 것을 노중에서 보게 된 것이다. 전교의 내용은,
“경계하고 권면하는 뜻을 이미 행하였고, 돌아와 상면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지(冬至) 세 사신을 모두 서용(叙用)하되 구전(口傳)으로 군직(軍職)에 붙이라.”
는 것이다. 직책을 완수하지 못한 죄가 큰데 서용하는 은명(恩命)이 내렸으니 감축한 것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여기서부터 비로소 쌍교(雙轎)를 타고 전배(前排) 등 범절을 모두 전례와 같이 하였다.
○29일 : 맑음. 일찍 출발하였다.
50리를 가서 제원(濟院), 모현(慕峴) 사이에 이르니, 예전 막료와 겸종(傔從), 노복 등 여러 사람이 모두 나와 길 위에서 맞는다. 경기 감영의 대청에서 조금 쉬고, 정사(正使)와 함께 연소(聯疏)하여 승정원에 들어가 바쳤으나 재일(齋日)이기 때문에 퇴각하고 받지 않았다. 대략만을 내었더니, 승정원에서 하교(下敎)로 연달아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므로, 사모 관대를 갖추고 대궐에 들어가 복명(復命)하고, 정사와 함께 성정각(誠正閣)에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이 무사히 왕래하였으니 대단히 기쁘다.”
하였다. 정사가 아뢰기를,
“신 등이 함께 성은(聖恩)을 입어 무사히 환조(還朝)하였사오나 사명에 대한 일은 잘 이루지 못하여 극히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견책(譴責)을 청한 것은 체례상(體例上)의 일에 불과하고 다른 깊은 뜻은 없다. 대개 사사(使事)는 무엇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는가?”
한다. 정사가 이르기를,
“처음에는 거의 순성될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친히 주문(奏文)을 보고 말하기를 ‘자획(字畫)이 정세(精細)하니 나를 대접하는 뜻을 볼 수 있다.’ 하고, 인하여 특별히 전례(前例)를 들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홀연히 황지(皇旨)를 내렸는데, ‘식(式)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극히 놀랍고 의아하여 예부에 탐문하니, 주문 가운데 ‘저군 사위(儲君嗣位)’ 등의 글자를 쓴 때문이었습니다. 신 등에게 마침 가지고 간 등록(謄錄)이 있으므로 전례를 상고하여 보고, 임역배(任譯輩)를 시켜 보내어 예부에 말하기를, ‘전례가 이와 같고 또 이 일이 정부(政府)의 장계(狀啓)로 말미암은 것이라, 잘못된 것을 논한다면 오직 유사(有司)인 신하들이 살피지 못한 소치이니, 어찌 국왕(國王)에게 허물을 돌릴 수 있는가?’ 하니, 저쪽 대답이 ‘이것은 그렇지 않다. 그대 나라 대신이 국왕을 존경하는 것은 진실로 그렇거니와, 국왕이 대황제(大皇帝)를 존경하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인 것이다. 어떻게 정부 장계 가운데에 있는 쓰지 못할 말을 천조(天朝)에 옮겨 주달할 수 있는가? 또 ‘저군(儲君)’ 두 글자가 ‘국군(國君)’ 두 글자와는 다른 것이니 더욱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문견잡기(聞見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상
○연경(燕京)은 옛날의 유주(幽州)이다. 역대의 연혁(沿革)을 따지면 명 나라 초기에 순천부(順天府)가 되었고 영락(永樂) 연간에 북경(北京)이 되었는데, 청(淸) 나라가 또 그대로 답습, 순천부(順天府)로 하여 경사(京師)에 예속시켰다. 지세(地勢)로 논하면 중원(中原)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태항산(太行山)ㆍ연연산(燕然山)이 구불구불 북쪽을 두르고, 끝없이 넓은 바다가 그 동쪽에 흐르고 있어 천하의 대세가 모두 품 안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패왕(伯王)의 도읍지이다. 그러나 이적(夷狄)과 화하(華夏)의 경계가 그다지 서로 멀지 않아서 북으로 거용관(居庸關)을 접하고 서로는 자형관(紫荊關)에 가깝고, 몽고(蒙古)ㆍ달자(韃子)와 지경을 연하고 있어 가까우면 100리가 되고 멀어도 300리에 불과하다. 융적(戎狄)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된 까닭을 살펴보면 너무 가까운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연경(燕京)의 노정(路程)은, 우리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가 1070리, 의주에서 봉성(鳳城)까지가 150리, 봉성에서 심양까지가 443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가 803리, 산해관에서 연경까지가 660리, 통산하여 3126리이니, 우리 노정을 제하여도 실로 2050리가 되는 것이다.
○부인은 얼굴을 하얗게 한다. 예전부터 연경의 풍속이 비록 머리가 센 사람이라도 연지를 찍고 분을 발랐다. 그러므로 연로에서 본 사람은 귀천 노소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입술에 분칠한 얼굴이었다. 또 귀고리는 아무리 걸인이라도 모두 달았고 많으면 3, 4개를 달았다. 심지어는 어린 남자까지도 귀를 뚫고 달아맨 자가 있다. 물어보면 모두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속담에 장수한다고 하므로 달았다.’ 하였다.
○한녀(漢女)는 외인을 피하나 호녀(胡女)를 피할 줄을 모른다. 비록 제왕(諸王) 경상(卿相)의 아내라도 모두 수레를 타고 다니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수레를 멈추고 포장을 걷고 본다.
○남자는 부귀한 자 외에는 모두 베를 입는데 여자는 가난하여도 모두 비단옷을 입는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남자에게 책임을 지워, 물 긷고 쌀 찧고 소제하고 비단 짜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앉아서 장사하고 다니며, 장사하느라 겨를이 없어서 목욕하고 씻지도 못하기 때문에 먼지와 때가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남루하니, 사람 생긴 것마저 극히 추하고 용렬하다. 그런데 그 아내는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귀에 귀고리를 달고 길쌈을 하지 않고 문에 기대어 얼굴이나 다듬으며, 아무리 가난하고 천한 자라도 밥을 짓고 신바닥이나 꿰맬 뿐이다. 그러니 그 남편에 비교하면 종과 상전 같을 뿐 아니라, 그녀가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면 또한 자기 남편이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 대개 관내(關內)의 여자는 경성 여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관 밖은 모두 천한 무리라서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화관(華冠)을 쓴 자도 보이지 않는다. 한녀는 비록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눈을 직시(直視)하므로 보는 자가 매양 호녀가 낫다고 한다.
○한편 소ㆍ말ㆍ나귀ㆍ노새는 모두 붙잡아 매지 않고 항상 굴레를 벗겨 들판에 놓아 먹인다. 수백 마리를 작은 아이 하나가 몰아도 흩어지지 않게 한다. 돼지와 양도 또한 그러하다. 대개 축생(畜牲)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잘 길든 것 같다. 말은 마부가 고삐를 끌지 않고 뛰어 올라타고 달리는데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곧 호인의 장기(長技)이다. 비록 먼 길을 가더라도 노중에서는 먹이지 않고 자는 곳에 이르러서 안장을 벗긴 뒤에 밤이 깊기를 기다려서야 다만 풀을 주고 물을 먹인다. 그리고 7, 8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익은 콩을 먹인다.
○또 음식은 숟가락으로 하지 않고 젓가락을 쓴다. 혹 숟가락이 있어도 모두 구워 만든 것이라 자루가 작고 짧다. 젓가락은 모두 검은 나무로 만들고 혹은 상아(象牙)로 만든 것도 있다. 밥은 가마[釜]에다 하는데 밑이 펀펀하기 때문에 쉽게 익는다. 원래 정당(鼎鐺 세 발 달린 솥) 등은 쓰지 않는다. 조석의 밥은 각각 작은 그릇에 담아서 남녀가 둘러앉아 모두 한 탁자에 앉아 양에 따라 배불리 먹는다. 탁자의 길이는 3척(尺)쯤 되고 너비도 이와 비슷하다. 높이는 교의(交倚)ㆍ등자(登子)와 같다. 이것이 소위 조자(罩子)이다. 교의의 제도는 극히 정교한데 재료는 화축(華杻)이 대부분이고 간혹 잡목도 있다. 등자는 역시 걸터앉는 상(床)인데 교의보다 조금 작고 둘레가 없다. 그리고 모양의 방원(方圓)ㆍ장단(長短)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탁자와 다름이 없다.
손님을 대접하는 예절은 손님이 아무리 많더라도 딴 상을 차리지 않고 손님과 주인이 식탁을 함께 하는데, 다만 각 사람 앞에는 젓가락과 술잔 1개씩을 벌여 놓는다. 그리하여 다 마시면 시자(侍者)가 다시 따른다. 술 마시는 법은 죽 들이키지 않고 조금씩 마시므로 한꺼번에 다 기울여 없애지 않는다. 술잔도 작다. 소주(燒酒)는 우리나라 맛에 비하면 무척 떨어진다. 마신 뒤에 뱃속이 또한 편치 못한데 이는 회(灰)를 타서 빚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환소주(還燒酒)를 저 사람들은 대단히 좋아하지만 한 번 마시면 목구멍을 찌르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마시는 자는 하나도 없다.
▣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오랑캐 풍속[胡俗]은 대개 검소하고 인색하기를 힘쓴다. 그래서 음식에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으며, 옷은 검은 포목을 쓰고, 집에 2년의 저축이 없으면 가난하다고 칭한다. 또 모두 종사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감히 놀고 먹지 않는다. 그래서 재용(財用)이 항상 넉넉하여 우리나라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점이다. 한인(漢人)은 가난한 자가 많다. 그래서 제반 잡술(雜術)하는 사람과 길에 다니며 구걸하는 무리를 보면 태반이 한인이라고 한다.
남자 호인(胡人)은 모두 구레나룻이 드문드문하고 수염이 난 자는 없다. 들으니, 그 풍속이 27세 이전에는 모두 수염을 깎고 28세부터 비로소 기른다고 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곰보는 심히 드물다. 우리나라처럼 두진(痘疹)이 성하지는 않은가 보다.
○각로(閣老) 이하가 벼슬을 파하면 모두 돌아가서 장사를 한다. 황궐(皇闕) 대청문(大淸門) 안에도 가게를 벌여 놓고 있어 성 바깥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세금은 심히 많아서 저자에서 매매하는 정가가 있는 물건까지도 점점 값이 오른다. 고물(古物)ㆍ기완(器玩)같이 정가가 없는 것은 더욱 심하다. 한 권의 서첩(書帖), 한 장의 그림, 한 폭의 족자(簇子) 값이 은자(銀子)로 수십냥 혹은 수백 냥이나 되고, 붓 10개의 값은 4, 5냥이나 된다. 향(香) 1개의 값이 많으면 1냥이 넘는데, 저 사람들은 우리를 우롱하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 서로 매매할 때 값을 너무 높이 부르면 반드시 말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이 아닌데 네가 왜 값을 이렇게 부르는가?’ 한다고 한다. 우리를 능멸하고 무시하는 것이 극히 통분한 일이다.
대개 물가가 뛰고 은로(銀路)가 더욱 고갈되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의 허물이니, 금하는 제도를 거듭 밝혀 재물이 새어 나가는 작은 구멍도 막아야 한다.
○서양국(西洋國)은 서남 바다 가운데 있어 중국에서 가장 서쪽이 되므로 대서(大西)라고 한다. 중국까지의 이정(里程)을 계산하면 9만 리가 되는데, 배로 6만여 리를 가서 소서천축국(小西天竺國)에 이르러 육지에 올라 배를 바꿔 타고 2, 3개월을 더 가야 바야흐로 중국에 이른다.
대체로 대서(大西)에서 2, 3년을 항해(航海)하여야 비로소 소서(小西)에 이르는데, 순풍을 만나 밤낮으로 가면 반 년 만에도 도착한다. 혹 대랑산(大浪山)을 지나다가 소서(小西)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흑인국(黑人國)에서 겨울을 지내고 2년 만에야 비로소 소서(小西)에 도달한다. 육로(陸路)로 오게 되면 빙빙 돌아 여러 나라를 지나는데, 높은 산과 넓은 들이 많아 수목이 막히고 악수(惡獸)가 퍼져 있으며, 도적이 횡행하고 언어가 불통하여 어렵고 험한 것이 도리어 바닷길만도 못하다.
배(船) 높이는 6, 7장(丈)이요 너비도 그와 같은데, 그 제도가 견고하여 1000여 인을 수용할 수가 있다. 또 1년 동안 필요한 물자를 아울러 실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곡(五穀)ㆍ육축(六畜)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오직 염려하는 것은 물이 얕거나 암초(暗礁)가 있거나 화재가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다.
각 배에는 모두 주사(舟師)를 두어 전적으로 나침반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고 바람을 점치며 이정(里程)을 계산하여 행한다. 또 통수수(統水手)라는 3인이 있는데, 모두 역법(曆法)ㆍ천상(天象)에 정통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낮에는 태양(太陽)의 도수를 살피고 밤에는 별의 고하(高下)를 고찰하여, 장기(瘴氣)와 안개가 해를 가려도 다만 북극(北極)이 땅 위로 나온 것과 나침반이 치우쳤는지 바로 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므로 부가범택(浮家泛宅 배나 배 안에 지은 집)이 비록 수만 리를 가더라도 조금도 차착이 없다.
땅에서 산출되는 것은 오곡ㆍ육축이 중국과 다를 것이 없고, 일용(日用)하는 것은 보리[麥]로 주장을 삼으며, 잠사(蠶絲)와 면화(綿花)에 이르러서는 각각 그 시기가 있고, 융단(絨緞) 같은 것은 1필 값이 1, 2백 금이나 되는 것도 있다. 이락초(利諾草)로 베를 짜면 면포보다 더 튼튼하고 깨끗한데 1필 값이 십수 금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이 서양포(西洋布)라는 것인데 떨어져 해진 것을 빨아 다듬어서 종이를 만들면 결백하고 오래 간다.
과일은 포도(葡萄)가 상품(上品)인데 술을 빚으면 극히 좋다. 꽃은 매괴(玫瑰)라는 것이 가장 귀하고 제조품(製造品)으로는 악기(樂器)ㆍ수화기(水火器)ㆍ동철(銅鐵)ㆍ파려(玻瓈) 등의 그릇이 있고, 악기로는 서금(西琴)ㆍ편소(編簫) 두 종류가 묘하다. 편소는 손을 쓰는 법이 거문고[琴]와 대강 같으나, 층층(層層)이 있어 분주(分奏)할 수도 있고 합주(合奏)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풍우(風雨)ㆍ조수(鳥獸)의 소리를 흉내내면 꼭 같지 않은 것이 없고, 노래를 합주하면 그 소리가 더욱 맑고 곱다.
자명종(自鳴鐘)은 중국에서 사용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그 제도는 빙빙 돌다가 저절로 치며 땡땡 소리가 나서 시간을 알리는 것이다. 기타 기이한 그릇과 이상한 완구(玩具)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 복식(服飾)에 있어서는, 주단(紬緞)ㆍ능라(綾羅)는 중국과 같은데 옷 만드는 재제(裁製)는 매우 다르다. 대서(大西) 여러 나라들끼리도 그 제도는 또한 각각 같지 않다. 문관(文官)의 의복은 흔히 넉넉하고 긴 것을 쓰며, 한가운데에 옷깃을 만들어서 좌임(左袵)도 우임(右袵)도 하지 않는다. 모자는 모나고 둥근 것이 각각 그 법식이 있다. 서민(庶民)은 모두 짧은 옷을 입어서 동작이 편하게 한다. 내복(內服)은 백포(白布)만을 쓰는데 때때로 바꿔 입어서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 그들의 풍속은 길에 흘린 것을 줍지 않고 밤에 문을 닫지 않으며, 혹은 교역(交易)할 때 물건이 서로 틀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조사하여 도로 보내는 등 모두 정직함을 중하게 여긴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도와주며, 감히 말을 꾸며 남을 속이지 않는다. 남 사랑하기를 자기와 같이 하는 것으로 도(道)를 삼아, 도둑질하는 자는 손을 자르고, 강도질을 한 자는 사형으로 논한다. 남자는 수염을 기르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남자는 머리를 기르지 않는데 조금 길면 대강 잘라 버릴 뿐 다 깎지는 않는다.
기율(紀律)은, 비록 덕으로 백성을 인도하기는 하나 또한 감옥과 형벌이 있다. 다만 매[箠楚]는 때리지 않고 장(杖)ㆍ도(徒)ㆍ유(流) 등의 죄는 대강 중국의 법과 같다. 매매에는 본국에서 만든 돈을 쓰는데 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작은 것은 동(銅)으로 하고 중간 것은 은(銀), 큰 것은 금(金)으로 하는데 모두 본국의 이름이 있다.
무릇 연례(宴禮)에는 흔히 음악을 베풀어 귀를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이 취포(醉飽)에만 있지 않게 한다. 대서(大西) 여러 나라가 모두 양병원(養病院)을 설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또한 3종이 있다. 병에는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치지 못할 것이 있으며 또 고칠 수 없는 동시에 전염까지 하는 병이 있는데, 이 세 종류를 각각 경우를 나누어 병에 따라 구호(救護)한다.
또 고아와 남편에게 버림받은 과부를 보호는 곳이 있는데, 남녀 어린이를 모두 따로 거처하게 하며 조금 자라면 재주에 따라 가르치고 장성하면 혼인을 원하는 자는 도와주어 원녀(怨女)ㆍ광부(曠夫)가 없게 한다. 제택(第宅)의 제도는 중국과 조금 다르다. 모두 벽돌을 쌓아 담을 만드는데 오직 모래와 회(灰)만을 쓰고, 또 나무 기둥과 판자 벽이 있으니 이것은 오래도록 편안히 살기 위한 것이며 또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궁전(宮殿)은 가볍고 얇은 석판(石版)이나 동판(銅版)ㆍ연판(鉛板) 등을 많이 쓰며 기와를 덮는다. 성지(城池)는 성마다 반드시 적루(敵樓)가 있고, 조총(鳥銃)은 동(銅)으로 부어 만든 것을 제일로 치며, 성문에는 모두 적교(吊橋)가 있다.
가취(嫁娶)는 남녀가 반드시 20세를 넘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비록 용모와 빈부(貧富)를 따지기는 하나, 반드시 덕성(德性)으로 주장을 삼는다. 여자의 자본[資粧]으로는 금은(金銀)ㆍ주패(珠貝)를 많이 싸 보낸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명 나라 말년부터 비로소 중국에 오기 시작, 각성(各省)에 주접(住接)하여 도(道)를 닦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기예(技藝)가 정교(精巧)하여 기후를 점치고 별[星]을 보는 것이 더욱 묘하였다. 그리하여 명(明), 청(淸) 사람들은 그들에게 역법(曆法)을 다스리고 병기(兵器)를 만들게 하였다. 인재를 뽑는 것은, 그 나라에 소학(小學)ㆍ중학(中學)ㆍ대학(大學)의 삼학(三學)을 두었으며, 또 여섯 과목(科目)으로 문(文)을 고시(考試)하는 법이 있는데 중국의 과거 제도와 비슷하다.
그들의 도(道)는 유가(儒家)ㆍ석씨(釋氏)와는 멀고 실상 묵씨(墨氏)에 가깝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조공하는 길은 광동(廣東)을 거치며, 그 물품은 국왕(國王)의 상(像)과 금강석(金剛石), 그리고 금으로 장식한 칼과 금박(金箔)ㆍ서상(書箱)ㆍ산호주(珊瑚珠)ㆍ호박주(琥珀珠)ㆍ가남향(伽㑲香)ㆍ상아(象牙)ㆍ서각(犀角)ㆍ유향(乳香)ㆍ소합유(蘇合油)ㆍ정향(丁香)ㆍ금은(金銀) 등이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공하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대개 여러 나라의 사행은 모두가 간략한 것을 따르는데, 우리 사신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만은 사치하고 떠벌리는 것을 일삼아 인마(人馬)ㆍ보단(報單)의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하면 10배나 된다. 그래서 연로(沿路)로부터 관사에 머무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에 공급하는 양초(糧草)ㆍ시탄(柴炭), 찬물(饌物)과 상사(賞賜)하는 초피(貂皮), 안마(鞍馬)ㆍ단필(緞匹)ㆍ은냥(銀兩) 등을 모두 계산하면 우리나라 방물 수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강희(康煕 청 성조)는 이를 싫어하여 정관(正官)의 인원수를 감하였다. 그리고 옹정(雍正)ㆍ건륭(乾隆)에 이르러서는 모두 인색하여 천하의 공사(公私) 용도(用度)를 일체 절감하여 저울눈만한 것, 물방울만한 것도 빠뜨리는 것이 없어 사행(使行)에게 제공하는 양식까지도 모두 아끼는 정책을 썼다. 우리의 별사(別使)를 막은 것도 실은 그 비용을 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어찌 우리나라를 걱정하여 주는 까닭이겠는가?
이와 같이 그 뜻을 알기 어렵지 않은데 우리는 저들의 곡진한 생각이 참으로 우리나라만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안다. 금증(金繒)과 피폐(皮幣)를 바치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도리어 그들의 우롱을 당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니 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또 어떠하겠는가.
○대개 초피와 인삼이 중국과 우리 두 나라에 큰 이익이 되는데 금하는 것도 지극히 엄하다. 강희(康煕) 말년부터 산동(山東)의 난민(亂民)들이 왕래하며 잠채(潛採)하기 시작한 뒤로 풍속이 되어 그 무리가 대단히 많다. 옹정(雍正)ㆍ건륭(乾隆) 때에 와서는 기강(紀綱)이 점점 풀어져서 간악한 백성이 더욱 방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만 캐는 것이 아니라 각처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요 가운데 이 무리가 야기시키는 분쟁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삼을 캐는 절기가 되면 이 압록강(鴨綠江) 저쪽으로부터 가는 호인(胡人)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된다. 표(票)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표 안에 적힌 정수(定數)에 의하지 않고 사사로 인축(人畜)을 대동(帶同)하는 것이 한이 없다. 우리나라 변방 백성이 또한 잠채(潛採)하는 것으로 업을 삼기 때문에 다투어 이 무리에게 붙어서 일당(一黨)이 되어 표(票)의 지참 여부를 묻지 않고 모두 함께 일한다. 그리고 우리 사람은 교활하고 사나워서 털끝만한 이익이라도 있으면 문득 때려죽이는 등 사건을 일으킨다. 목하의 급무는 피차를 막론하고 관채(官採)를 아주 파한 뒤에야 사채(私採)를 금할 수가 있는데, 저들은 바야흐로 재물을 탐하고 있으니 삼의 이익을 아주 폐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利)의 근원이 이미 열려 백성이 모두 그러한 풍조를 따르니, 엄하게 금하는 법을 만들어도 범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