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燕行錄)
김정중(1742~?)
김정중은 호를 자재암(金自在庵), 이름은 정중(正中), 자는 사룡(士龍)이라하며 1791년 판서인 용암(庸庵) 김이소(金履素 1735-1798) 가 동지정사 겸 사은사(冬至正使兼謝恩使)로 갈 때 아우인 송원거사(松園居士)를 데리고 갔는데 송원거사와 친분이 있는 김정중이 따라가서 기록한 글이다.
※한국고전번역교육원의 한국고전번역DB에는 3개의 연행록이 차례로 번역되어 있는데 목차의 저자 순서가 권혁-최덕중-김정중의 순서로 되어있다. 내용을 실제 읽어보니 김정중-권혁-최덕중의 순서가 맞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연행일기 서(燕行日記序)
●정소백(程少伯)에게 보내는 글
소백 족하(足下)!
정월 말에 남관(南館)에 왕림해서 전별하여 주시니 감사하고 행복하기 한량이 없거늘, 하물며 분운(分韻)한 시 한 장과 송별(送別)의 글 한 축(軸) 및 강정서문(江亭序文) 한 통(通)에다가 그 밖의 도서연(圖書硯)ㆍ모란화(牡丹畫)도 주시니 다 천금(千金)에 해당되는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어떤 사이기에 이런 훌륭한 선물을 얻는 것입니까? 한 평생동안 은혜를 깊이 간직하여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아무 탈 없이 늦봄에 집에 돌아오니, 우리 고향에서도 글 잘하는 사람 무려 열두어 명이 와서 여행 중의 소득을 묻기에, 내가 족하의 시를 꺼내어 보이니, 모두들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시도(詩道)가 가륭(嘉隆) 이래로 그 변화가 매우 많았지마는 격조가 낮고 뜻이 천박해서 다시는 대아유음(大雅遺音)이 없더니, 이 시는 평담(平淡)하고 산뜻하며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써서 충분히 옛글 짓는 이의 기상과 격조가 있다.’라고 하여, 서로 전하며 외어 이제껏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아아! 그들은 시만을 가지고 족하를 알 뿐이지, 어찌 족하의 사람됨이 그 시보다 나은 줄 알겠습니까? 정성스럽고 근실함이 안에 쌓여서 봄의 화창함처럼 밖으로 피어나, 종일토록 사물을 대하여도 조금도 꾸미는 기색이 없으시니, 내가 족하에게 깊이 감복하는 까닭은 오직 그 시 때문만은 아닙니다.
족하가 과거 보러 가시던 날은 바로 8월 18일입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관디[冠帶]를 정제한 뒤에 향을 피우고 술 잔을 들고서 두 손을 모아 멀리 축원하며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축사(祝辭)에 갈음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합니다.
동규의 상서로운 광채 중추에 빛나는데 / 東奎瑞彩耀中秋
황제가 마루에 나와 온 나라를 시험하도다 / 皇帝臨軒試九州
태학 문전에 새로 돌을 새기거든 / 太學門前新斸石
급제 첫머리에 있을 그대 이름 축하하리라 / 賀君名在百花頭
내 성의가 위로 하늘을 감동시켜 주의(朱衣)로 하여금 점두(點頭)하게 하여황갑(黃甲)의 이름으로 먼저 불릴지, 또는 족하의 타고난 운명이 아주 기박하여 백수로 음묵(飮墨)하고서 다시 강남(江南) 길을 찾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득실(得失)과 영췌(榮悴)는 선비가 말할 바 아니거늘, 어찌 한낱 과거란 것으로 우리의 근심이나 즐거움을 삼겠습니까?
아아! 족하의 글이 연경에서 수천여 리 떨여져 있고, 연경부터 우리나라까지 장정(長亭)이 자그마치 370여 리라, 서로 만 리를 떨어져 있으니, 어찌 일찍이 풍채를 바라보아 서로 느끼고, 명성을 들어서 서로 앎이 있었겠습니까? 연경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뚜렷이 서로 뜻이 맞아 막역한 벗으로 받아들이니, 이 몸이 한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스스로 기뻐하였습니다마는, 임금의 심부름 길에 기한이 있고 돌아가야 할 기일도 바쁘매,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던 첫 자리는 이미 해가 저문 느낌이 간절하였습니다. 마음을 다 말하지 못한 채 떠나는 앞길에는 도리어 해가 넘어가려는 한탄이 있었으니, 어찌하고 어찌하리까!
그러나 인과(因果)는 불멸(不滅)이요 이합(離合)은 무상(無常)이니, 뒷날에 연대(燕臺)에서 다시 만나 운(韻)을 나누고 차를 마시며 지난 즐거움을 다시 갖게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또 두 집의 후손이 우리처럼 우연히 만나서 잔을 들고 옛일을 말하며 우리의 교유를 잇게 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모두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아! 산하가 멀어 기두(箕斗)가 다르니 경경(耿耿)히 맺힌 생각이 꿈결처럼 나타나되 향해 가는 정성은 평생을 기약합니다. 이 글월을 쓰는 밤에 등불은 꺼져 가고 시각을 알리는 경고(更鼓)는 드문드문 울리어, 아이놈 한둘이 앉아 있기도 하고 졸기도 하는데, 산설(山雪)이 어지러이 서창(書窓)을 때리고 떨어집니다. 족하시여, 족하시여! 이 저녁의 내 마음을 그대는 아시겠지요?
할 말은 많아서 한이 없으나 종이가 짧아서 다하지 못합니다. 나머지는 바라건대, 명덕(明德)을 높이시고 찬반(粲飯)을 더하시며, 북풍(北風) 편에 좋은 소식을 다시 주소서.
●답서(答書)
정가현(程嘉賢)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룡 김군(士龍金君) 족하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지난해 섣달그믐 전날에 보내주신 글을 받아 족하가 편안하심을 알았으니 매우 기쁩니다. 또 옥 같은 글로 가르침을 주시고 많은 물품까지 보내 주신 것을 받으니,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추위(秋圍)에 낙방하여 지기(知己)의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게 되니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면, 운명의 궁통(窮通)에는 천명이 있으니, 족하께서 나의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영욕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취급하시겠습니까? 현재 나라의 소학(小學) 중에서 3년을 채우고서야 광문(廣文 교수(敎授))으로 한때 뽑혀 쓰이니, 대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전에 듣건대, 남으로 오시어 마침내 장수옥(張水屋)의 거처나 유리창(琉璃廠) 창교(廠橋) 가의 묵장(墨莊) 유아봉(劉峨峯)의 거처에 묵으시어 모두 친숙하셨다고 하는데, 우리 두 사람으로 말하자면,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사는 곳이 천만 리나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하루아침에 연경 거리에서 만나 잠깐 말 나눈 사이인데도 문득 막역한 친구가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만들어 준 만남이지요. 참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니, 마땅히 족하와 함께 도(道)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말고 훌륭한 명망을 떨어뜨리지 말아서 저 하늘이 묵묵히 도우신 뜻을 저버리지 말고, 교유와 친애에만 만족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연행일기》가 이미 책이 되었다고 하니 스스로 마땅히 몇 마디를 서문으로 붙여서 세상에 길이 전하도록 도와야 하겠으나, 엉터리 문구가 많아서 남의 웃음소리가 될 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쇄가 끝나거든 전의 일옹기문(一翁記文)의 탁본과 아울러 두어 질(帙) 나에게 보내주시면 꼭 때때로 펴서 감상하며 만 리에 떨어져 있는 족하의 얼굴을 대하듯 하겠습니다. 도장(圖章)은 좋은 돌도 없고 또 본래 잘 새기지 못하여 그냥 전서(篆書)로 썼을 따름입니다. 시초(蓍草)를 아울러 문궤(文几)에 붙여 올리는 것은 시인으로서 보답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뜻[匪報之義]이오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족하는 음식과 한서(寒暑)에 스스로 몸조심 하소서. 다시 뵐 기약 없으매 글월을 부쳐보내려 하니 슬퍼집니다.
이만 줄입니다.
■연행일기 서(燕行日記序)
옛사람의 말에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은 만 리의 길을 여행하는 것만 못하다.[讀萬卷書, 不如行萬里路]’라고 하였는데 이는 문장에 있어서는 꼭 공교로워야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아마도 듣고 보는 견문이 깊은 것을 바탕으로 하여야 여느 때에 쌓은 것이 글로 나타나 일가(一家)의 경지를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리니, 이렇게 하여야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렇게 되고 마음으로 놀라워하여 그 감동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칭찬과 감탄을 더할 길이 없게 할 터이니 아마도 그 글이 공교하다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일 것이다.
동해의 김군 사룡(金君士龍)은 뜻 있는 선비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지만 벼슬을 바라지 않았다. 대동강 가에 누각을 지어 놓고, 날마다 두세 명의 지기(知己)와 더불어 그 위에서 도(道)를 논하고 글을 강(講)하며, 여가가 있으면 지팡이 짚고 우산 메고서 숲과 샘이 있는 좋은 경치를 뜻대로 찾아다니다가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그에 따라 시를 읊조리고 휘파람 불며 노래하여 즐기는 바에 마음을 붙여, 이것으로 그 한평생을 마치려는 사람 같았다. 그러다가 그 나라의 제도가 해마다 절사(節使)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참으로 유람을 좋아하며 먼 곳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참여하여 갈 수 있으므로, 지난번에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이곳에 와서 유람하였던 것이다.
그는 요양(遼陽)ㆍ심양(瀋陽)ㆍ거용(居庸)을 거치며 산천의 웅장함과 관진(關津)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형세를 골고루 본 뒤에 천지의 요해(要害)가 어떤 것인가 하는 뜻을 알았고, 북으로 황하(黃河)의 큰 흐름이 달리는 것을 보고 개연히 저 먼 옛날 우(禹)의 공(功)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경사(京師)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의 장엄함과 창름(倉廩)ㆍ부고(府庫)ㆍ성지(城池)ㆍ원유(園囿)가 풍부하고도 거대함을 우러러보고서 천하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천하가 크고 아름다움을 알고 중국 인사의 용모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의론이 훌륭하며, 성명(聲名)ㆍ문물(文物)이 날로 새롭고 풍부한 것을 훑어 본 뒤에야 천지의 맑은 기운이 영특한 것을 모아서 이곳에 길러 내었다.’라고 한 것은 소 문공(蘇文公)이 천하를 두루 구경한 뒤에 한 말이었는데 사룡(士龍)도 또한 능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 밖에 전현(前賢)의 유적(遺蹟), 선대(先代)의 일사(逸事), 충신(忠臣)ㆍ의사(義士)ㆍ소객(騷客)의 유풍(流風)ㆍ여운(餘韻)에까지 이목이 미치는 바는 무엇이나 다 글로 적었으니, 그야말로 뜻하는 바가 멀고도 큰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랴?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지은 글을 모아 보니 시가 꽤 많았다. 그래서 《연행일기》 2권으로 만들어 인쇄에 붙이고, 이듬해에 편지를 보내 책머리[篇首]에 얹을 서문을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 ‘동방 사람으로 글 잘하는 이가 없지는 않으나 반드시 그대에게서 말을 받아 내려는 것은, 이로 인하여 만 리 밖의 그대 얼굴을 만나 보는 데 대신하고 또 영원토록 보배로이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오.’ 하였다.
그 뜻이 확고하고 간곡하기까지 하여 한결같이 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니, 이는 아마도 풍인(風人)의 유음(遺音)에서 온후하고 화평한 뜻이 뜻 밖으로 넘치는 까닭이리라. 어찌 시 자체만을 보고 말겠는가? 만물을 자르고 다시 붙여서 등(藤)으로 엮듯이 시를 만든 것은 이른바 공교함의 극치이다. 이는 그 시를 읽는 사람이 스스로 알것인데, 어찌 내 말이 거기에 대하여 만에 하나라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서(序)를 쓴다.
청 나라 건륭(乾隆) 58년 계축(癸丑) 정월 중순에 강남(江南)의 소백(召伯) 정가현(程嘉賢)이 삼가 지음.
▣기유록(奇遊錄)
■신해년(1791, 정조 15) 11월
◯그해 겨울 11월 : 16년 겨울 11월에 용암(庸庵) 김이소(金履素 1735-1798) 상공이 동지정사 겸 사은사(冬至正使兼謝恩使)로 명을 받들고 나라를 나서는데, 계씨(季氏)인 송원거사(松園居士)를 데리고 만 리(萬里)의 행역(行役)을 함께 함은 예전에 상공(相公)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가 연경에 갈 적에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와 함께 간 옛 관례에 말미암거니와, 이 행역에 내가 한낱 벼슬 없는 사람으로 또한 따라가는 사람들의 끝자리에 참여하니 영광스러움이 크다. 도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용암 상공이 아니면 자네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자네같은 사람이 아니면 상공에게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일세. 또 우리 고향에 수백 년 동안 글 잘한 사람이 매우 많았지마는 이 고장에서 이런 행차에 수행한 이는 자네가 유일한 사람일세.”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해보면 매사에 어둡고 용렬한 내가 어떻게 이 영광을 얻어 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아우가 뜻하지 않은 액운을 당하여 막 영남(嶺南)으로 귀양가는데 같은 날에 떠나게 되어, 손을 잡고 집을 나서자 하나는 남으로, 하나는 북으로 가니, 길가던 사람까지도 이를 두고 눈물을 흘린다. 아우를 강 건너 보내고 나서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가 있자니 여윈 말을 몰고 작은 하인 하나가 무성한 숲과 짙은 아지랑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며 오는 것을 보니 또 한번 가엾다.
○26일 점심 뒤에 가게 주인이 방값을 내라고 급히 졸라대었으므로, 백지(白紙) 30속(束)과 부채 30자루와 청심환 20알을 내었으나 가게 주인이 깡충깡충 뛰며 고래고래 소리 질러 크게 한바탕 떠드는 것이 적다는 뜻이었다. 곧 5속의 종이와 5자루의 부채를 웃으면서 더 주었다. 어찌 저런 놈들과 많고 적음을 다투랴? 그 역(驛)의 늙은이에게 물으니, 책문부터 송점(松店)까지는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여 잇속만을 탐내지만 여기를 지나가면 다르다고 한다.
○27일 동지(冬至). 맑음. 주방(廚房)에서 팥죽을 올려 명절을 쇠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지난해 이날에 집사람이 고향 밭의 팥을 씻어 죽을 만들어서 사당에 바친 뒤에, 형제 다섯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차례로 죽을 먹었다. 그때 창밖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내다 보니, 하인이 새 책력을 사 가지고 돌아왔기에, 서로 함께 사시가절(四時佳節)을 점치며 웃음거리로 이야기가 진진하였다. 내가 요동의 나그네가 되어 여관에서 기식하고 아우 또한 멀리 영남으로 귀양 갔으니, 형제가 집을 떠나 각각 1000여 리를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멀리 서로 바라보고 아득히 남과 북에 있으니, 해마다 한집에서 즐기던 일이 하늘 위에 있던 일만 같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신해년(1791, 정조 15) 12월
○6일 잠자리를 주부 김낙중(金樂中)의 온돌방으로 옮기고, 돼지 족발을 사서 소주를 마시고, 함께 자기로 약속하였으나, 송원(松園)에게 이끌려 등불을 돋우고 노정일기(路程日記)를 쓰고는 그대로 송원 곁에서 잤다.
○7일 저물녘에 소흑산점(小黑山店)에 닿으니 수박을 내왔는데 껍질이 푸르고 속이 좋아서 아주 갓 따온 것과 같았다. 잘 간수하는 방법을 물으니, 구덩이를 한 자 남짓 되게 파서 짚을 많이 쌓고 휴지로 덩이 전체를 싸 바람이 조금도 새어들지 않게 하면 이와 같이 된다고 한다.
○13일 길 곁에 홍당무가 있는데 크기가 수박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것이 있으나 색깔과 크기가 그만 못하다. 어찌 나라에 크고 작은 구별이 있어서 그러하랴. 토질이 여기에는 맞고 우리나라에는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14일 오리대(五里臺)를 지나서 홍화점(紅花店)에 닿았다. 송원이 감기를 앓아 밤새 신음하니, 시름겹고 답답하였다. 일행 모두가 한 온돌방 안에서 잤다.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아서 오늘 지낸 일을 이야기하는데, 김광중(金光仲)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 《사기(史記)》에서 진시황(秦始皇)이 서쪽으로 임조(臨洮)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까지 만리장성을 쌓는 대목을 읽고, 너무 멀어서 구경하지 못할 곳으로 여겼더니, 이제 말 한 필로 성을 넘어 왔으니, 사나이의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오.”
하기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 생각도 그러하오.”
하였다. 연대(煙臺)가 여기서부터 연경까지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19일 노가장(蘆家莊)을 지나 고려포(高麗鋪)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사로잡혀 이 땅에 와서 그대로 계속하여 살았으므로 ‘고려포’라 부른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논이 있는데, 북으로 온 뒤로 처음 본다. 내가 지나갈 때에 마을 사람 수십 명이 황량병(黃粱餠)을 가지고 말 앞을 둘러싸고서 일제히 소리내어 떡을 사라고 하는데, 떡은 우리나라의 팥떡 모양 같았다. 아아, 너희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 이곳으로 들어온 환란이 없었던들 너희의 관디[冠帶]도 내내 우리들 일행과 같았을 것이다. 한번 잡혀온 뒤부터는 후손이 다 오랑캐의 말이요 오랑캐의 얼굴이니, 애달프다. 그러나 한 마을을 이루어 옛 나라의 이름을 잃지 않았으니 기특하기도 하다.
○23일 맑음. 일행 중에 온돌방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 회벽돌을 날라 옮기기도 하고 칼과 톱을 들거나 도끼와 까뀌를 들고서 자르고 깎는 소리가 동서에서 들리고, 종이를 바르고 대자리를 두르느라고 종일 애쓰되, 종노(從奴)와 구인(驅人)들은 다 한데서 자므로, 황제가 그 추위에 떠는 것을 염려하여 성 모퉁이에 새 온돌방을 따로 만들어서 구인을 거처하게 하니, 이 또한 크게 비호해 주는 은혜이다.
○25일 이날 저녁에 한 책장수가 많은 시사(詩史)를 가지고 와서 팔려고 하였는데, 그 책이 다 전에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것이었다. 더구나 선비가 책을 가지고 싶은 것은 마치 장사(壯士)가 좋은 검(劍)을 가지고 싶고 호사(豪士)가 아름다운 여인을 얻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데, 스스로 돌이켜보면 행랑에 있는 것은 모지라진 붓 두 자루와 닳아빠진 먹 1개와 백지책 한 권뿐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람을 사절해 보냈다. 책상 머리에 황금이 다했으니 가장 쓸쓸하거니와, 게다가 나라에서 책을 못 사게 하는 금령(禁令)이 있으니 어찌하랴!
○26일 길가에 두어 호인(胡人)이 문을 지나는데 얼굴이 검누르고 깊은 눈에다가 짧은 수염이며, 머리 위에 쓴 것은 마하라(麻霞羅)와 같으나 가운데가 높아서 모자 같고, 발에는 궁혜(宮鞋)를 신고 허리에는 검은 끈을 묶었는데, 그 모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하다. 역관을 시켜서 물으니, 회회국(回回國 아라비아) 사람이라고 대답하는데, 아마도 옛 회흘(回紇)이리라. ‘네 나라가 여기서 몇 리나 되느냐?’고 물으니, ‘1만 5000여 리인데, 7월 7일에 떠나서 섣달 17일에 연경에 들어왔다.’ 하며, ‘어느 분의 사명을 받들어 왔느냐?’고 물으니, ‘우리 대왕(大王)이 통솔하는 외방 부락의 11왕의 종인(從人) 50여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내년 5월 5일에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전에 들으니, 회자국(回子國)의 남자는 매우 추악하나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워서, 황제가 회자국 왕의 누이를 얻어 빈(嬪)으로 삼아 총애가 후궁 중에 으뜸이므로, 회자국 사람을 내지(內地)에 들어오게 하여, 그 나라 사람이 다 연경에 와서 벼슬하고 있다고 한다.
○28일 종노(從奴)가 말하기를,
“이것이 유리창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하기에, 내가 걸음을 멈추고 멀리 바라보니, 걸음마다 금빛 패루인데 용두(龍頭), 사창(紗窓), 수달(繡闥), 경호(瓊戶), 분벽(粉壁)으로 꾸며서 좌우가 영롱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마치 물 가운데에 있는 듯하다.
인삼가게와 골동품가게에 들르니 온갖 깃발이 있는 곳은 모두가 찻집이나 술집이었으며, 또 세시(歲時)를 당하여 등(燈)을 파는 가게가 더욱 번화하였다. 붓가게와 먹가게가 동서에 벌여 있으며 책가게의 깃발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취하게 하고 눈을 어지럽힌다. 진기하고 보배로운 서적이 시렁에 꽂혀서 천정에 연했고, 푸르고 누런 비단으로 꾸민 책이 책상에 겹치고 상에 쌓였다. 들어가 보니,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아내기 어려우므로, 책 표지에 백지 쪽지를 붙여서 각각 아무 서(書) 아무 질(帙)이라 쓰여 있다. 내가 종제(從弟)의 청을 잊지 않아 먼저 소주(小註)가 있는 《예기(禮記)》의 규벽(奎璧)이 있는지 없는지 물으니, 주인이 사다리를 올라가 서쪽 벽의 높은 곳에서 두 갑(匣)을 가져왔다. 하나는 《예기》에 체주(體註)를 단 네 합권(合卷)인데 다 명 나라 선비가 주석한 것이라, 내가 이르는 선유(先儒)의 소주가 아니며, 하나는 《예기》의 규벽이나 소주가 없다. 또 다른 가게에 가서 그것이 있는지 물었으나 있는 것은 먼저 가게에서 본 것이니 한탄스럽다. 설사 그 책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잡서(雜書)를 금하는 법령이 있으니, 결코 가져갈 길이 없다. 종일 방황하며 사랑스러워 놓지 못하는 꼴이 마치 예상(翳桑)의 사람이 밥을 보고도 먹지 않는 것과 같아서 더욱 서운하고 연연하였다.
○30일 포시(晡時)에 쓸쓸히 돌아오다가 한 책가게를 지났다. 그 곁에 작은 가게 문이 있고 문 위에 ‘취호재(聚好齋)’라는 편액(扁額)이 있는데, 글씨가 매우 진기하고 고풍스러웠다. 홍 예경이 나를 불러서 그 문에 들어가니, 두 장부(丈夫)가 탁상 위에 마주 앉아 있는데 곁에 주전자[酒鐺]와 향로(香爐)가 있고, 사면의 벽에는 모두가 명인(名人)의 글씨와 그림이다. 그 사람을 보니 소탈하고 얼굴이 희어 조금도 속된 기운이 없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곧 자리에서 내려와 서로 읍례(揖禮)하는데, 기쁜 빛이 얼굴에 감돈다. 나를 방석 위에 앉히고, 황분지(黃粉紙)와 붓 하나 벼루 하나 먹 하나를 내어 함께 필담하였다. 내가 먼저 묻기를,
“감히 두 분의 고성(高姓)과 대명(大名)을 청합니다.”
하니, 그 사람이 쓰기를,
“제 성은 정(程)이고 이름은 가현(嘉賢), 자(字)는 소백(少伯), 호(號)는 성로(聲路), 강남 사람입니다. 또 옆의 친구의 성은 호(胡), 이름은 보서(寶書), 자는 금당(錦堂)인데 역시 광동 사람으로 객지에서 지냅니다.”
한다. 내가 또 묻기를,
“공(公)들은 혹 명도 선생(明道先生)과 호 문정공(胡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후손입니까?”
하니,
“그렇습니다.”
한다. 내가,
“백장들 틈에서 이러한 풍류 시인을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학문과 법도가 두 분의 몸에 달려 있으니, 어찌 옛적의 비분강개하던 인사들에게 견주리까?”
하니,
“어찌 감히 당하리까?”
한다. 내가,
“지금 무슨 벼슬에 계십니까?”
하니,
“저는 국자감(國子監)의 유생(儒生)이고, 호우(胡友)는 광릉(廣陵)의 수재(秀才)로 일컫습니다.”
하고서, 나에게 묻기를,
“족하께서는 귀국에서 지금 무슨 벼슬에 계시며, 성명은 뉘시고 연세는 몇이십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제 성은 아무이고 이름은 아무이며 호는 자재암거사(自在庵居士)라 하고, 집은 은 태사(殷太師)의 정전(井田) 사이에 있으며, 요즈음 한 서루(書樓)를 사서 만년(晚年)의 소일거리로 삼는데, 서루는 대동강 가에 있습니다. 옛 시에 ‘동방 사는 한 선비, 옷을 늘 안 갖추어.[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하고 또 ‘쉰 살에 나그네되어 낙양에 놀아.[我五十霸 遊在京洛]’ 하였는데, 두 시에 이른 바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입니다.”
하니,
“공의 붓끝은 혀가 달려서 참으로 운치 있는 말을 합니다.”
한다. 내가 그 사람의 학식의 깊이를 헤아려 보려고,
“오늘은 좋은 날이니, 술 마시며 글을 지어 하룻밤의 놀이로 삼고 싶습니다.”
하니,
“한 해가 저무는 때라 할 일이 많으니, 다른 날로 잡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다. 그래서 새해 초엿새를 가려서 기약하기에, 내가 승낙하고 문을 나서니, 그 사람이 저자 가에 따라 나와 작별하는 모습이 날 저무는 것을 한탄하는 듯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1일 이날 밤에 어느 관상 잘 본다는 사람이 송원과 마주앉아 사신[使家]의 골상을 말하는데, 내가 송원의 곁에 앉아 있으니, 그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분의 얼굴은 위가 아래만 못하니, 쉰 이후에야 자손이 있고 벼슬이 있으리다.”
하고, 이윽고 앞에 가까이 앉아서 내 왼손을 잡아 뒤집고 엎어서 보고는 말하기를,
“또한 재(財)와 귀(貴)가 있습니다.”
한다. 무릇 내 아우의 액운과 다시 장가든 일 따위를 모두 알아내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잘 본다고 칭찬하였다. 내가 평생에 술사(術士)의 말을 믿지 않으나, 일기에 적어 넣은 것은 보고 들은 바에 따라서 쓴 것이요,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3일 동쪽 거리로 가서 취호재(聚好齋)의 주인을 찾으니, 주인이 매우 반겨 나를 자리 위에 맞이한다. 문방구들을 내어 놓고 서로 필담하였다. 소백(少伯)이 말하기를,
“동방에 정전(井田)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껏 그 제도를 시행합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저희 고을이 바로 은 태사(殷太師 기자(箕子))의 옛 도읍이라 구획이 아직 남아서 도랑 자리를 미루어 생각할 수 있으나, 정전은 넓지 않고 주민이 점점 빽빽하여져서 능히 은 나라, 주(周) 나라의 옛 제도를 시행하지는 못하되, 이제껏 민간에는 서로 돕는 화목한 풍속이 있습니다.”
○4일 성 밖에 나가지 못하고, 송원(松園)을 따라 담을 사이에 둔 임성(林姓)인 사람의 집을 찾았는데, 이 집은 가장 좋은 저택으로 장안에서 이름났다. 건물이 모두 200여 칸에 중루(重樓)와 복도(複道)가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동쪽으로 나갔다가 서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돌아오는 길을 잃을 지경이니, 비록 황제의 궁궐과 제후(諸侯)의 저택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다. 가운데에 한 정실(靜室)이 있는데, 좌우에 향나무 탑(榻)을 두었고, 사면의 벽이 다 옛사람의 글씨와 그림이며, 유리창과 수놓은 문이 광채가 찬란하고 윤택이 흐르는 가운데에 곽분양(郭汾陽)의 행락도(行樂圖)를 걸었으니, 그 뜻은 주인 스스로의 환락을 견주어 보려는 마음이 스며있다. 아! 그가 저자 안의 한낱 장사꾼으로 감히 왕자(王者)의 거처를 흉내내니, 어찌 그 풍속이 그렇게 시킨 것이랴? 또 그 사당(祠堂)이라는 것을 보니, 왼편 감실(龕室)에 선조의 상을 걸고 오른편 감실에 작은 부처 하나를 앉혔으며, 떡과 과일을 늘 두 탁자에 두어 모두가 화려한데, 가묘(家廟)에 부처를 제향하는 예법이 옛적에 있었는지? 사람을 몹시 우습게 한다.
○14일 이날 김 상서(金尙書)가 글월과 함께 산 잉어 한 쌍과 감귤(柑橘), 비파(枇杷), 석류(石榴), 감제(甘薺) 각 한 함(凾)을 보내 왔는데, 빛과 맛이 다 좋아 새로 딴 물건 같다. 내가 해동의 한 가난한 사람으로 해전(海甸)의 등놀이를 보고 강남(江南)ㆍ강서 만 리의 토산(土産)을 먹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춘몽(春夢)처럼 황홀하다.
○20일 나는 말에서 내려 취호재(聚好齋) 앞에 가서, 정소백(程少伯)을 만나러 들어갔다. 소백이 매우 기뻐하며 나를 탁자에 앉히고 차 한 잔을 권하며 모란도장자(牡丹圖障子)와 일옹정서문(一翁亭序文)과 별장(別章) 시 한 축(軸)을 내어 주니, 그 뜻이 도타움을 느끼겠다. 우리나라와 강남(江南)이 만여 리일 뿐 아니라, 연경 저자에서 우연히 만나 얼굴을 대한 것이 두어 차례에 지나지 않고 나눈 글이 한 묶음도 못 되는데도, 세상에 드문 신교(神交)로 받아들이고 천하의 지음(知音)으로 불러 주니, 이는 전생의 인연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리라. 그 서문은 이러하다.
“신해년 동방의 절사(節使)가 와서 방물(方物)을 바칠 적에, 김 자재암(金自在庵) 선생, 곧 이름은 정중(正中), 자는 사룡(士龍)이라 하는 이가 함께 왔다. 나와 우연히 만나서 바로 친해졌는데, 성씨를 상통한 외에는 시문이 아니면 입에서 내지 않으니, 아마도 그의 성품이 그렇게 시킨 것이리라.
일찍이 나에게 청하기를, 그의 집이 대동강(大同江)에 임하였으며 누다락이 있는데, 절사가 두 공부(杜工部) 시의 ‘넓은 강호를 떠다니는 한 어옹[江湖滿地一漁翁]’의 뜻에서 따서 편액하여 ‘일옹정’이라 하였거니와, 그 위에 책 약간 권을 두고 밤낮으로 수재(秀才)와 함께 향을 사르며 글을 읽고 그러다가 노년을 마치려는 생각이라, 나에게 그 일을 적어 주기를 바랐다. 아아! 내가 일옹(一翁)의 행사를 살피고 일옹의 사람됨을 생각하건대, 옹의 뜻하는 바가 매우 크고 보는 바가 매우 멀거늘, 내 말에 구차히 무엇을 취하랴?
동방의 지도를 살피건대, 대동강이 성의 동문을 돌아서 구불구불 꺾여 흐르되 그 끝간 데를 모르겠고, 그 서쪽 언덕이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옛땅이 되어 기름진 들이 이어 뻗었고 주민이 빽빽하며 정전(井田)이 있어 은(殷)의 제도를 남겼으며, 동쪽 언덕은 먼 봉우리가 흩어져 벌여 있고 아름다운 나무가 빽빽이 벌여 있어 우뚝우뚝 서로 마주 서고 울창하게 서로 무성하다. 그러니, 이 누다락에 오르면 높고 멀리 탁 트여 있어 좌우를 둘러보면 모든 강산이 웅장하고 고우며, 형세가 서로 부둥켜 안은 듯하니 옹의 장한 뜻을 펼 만하다. 강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긴 숲이 한 빛을 이루면 모든 물결이 일었다가 가라앉곤 하고 구름 안개가 걷혔다 폈다 하니, 옹의 장한 영혼을 문장으로 표현할 만하다. 더구나 가을 물, 맑은 하늘, 봄 밭두둑, 수놓은 들에 농부는 노래하며 돌아오고 고깃배는 뱃노래 부르며 돌아가니, 내가 부르면 네가 화답하는 것이 다 옹과 함께하는 곡조요, 자연의 바람 소리 적이 자고, 냇물과 달빛이 서로 비추면 헤엄치며 노는 맑은 물고기는 잠깐 뛰고, 고달픈 새는 다투어 돌아오니, 우러러보고 굽어살피는 것이 다 옹을 변화시키는 기틀이다. 사시가 교체하고 광음(光陰)이 오가며 천태만상이 잠시 사이에 어지러이 바뀌는 것을 옹이 온통 다 얻어서 가지고 있으니 내 말에서 무엇을 취하랴?...
어떤 이는 말하리라. 이는 소자(蘇子)가 이른바 ‘가져가도 막지 않고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자(造物者)의 무진장(無盡藏)이다.’ 한 것과 같다고. 이야말로 우리 사람들이 모두 함께 즐기는 것이거늘, 홀로 일옹이라고 누각에 이름 붙임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생각한다. 호량(濠梁) 위에는 장자(莊子)와 혜자(惠子)도 서로 알지 못하였거니와, 그 어찌 감히 자기가 본 바가 곧 남의 본 바가 된다고 이르겠으며, 또 시대가 지나고 인정이 변하여 오늘날과 옛적의 느낌도 달라져서 오늘날 본 것으로 뒷날을 얽맬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남과 자기의 소견이 분명히 두 가지 것임에랴?
어떤 이는 말하리라. 우리 사람이 막연히 천지 가운데에 처하여,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삼아 백성으로 태어나 만물을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거의 대도(大道)로써 공평한 것인데 감히 그릇 스스로를 변변치 못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 누각을 ‘일옹’이라 함은 거의 또한 은자[考槃]로서 시인이 이른바 ‘대인이 관대하여 홀로 자고 깨어 노래함.’이나 ‘대인이 머물러 홀로 누웠음.’이라 한 것과 같거늘, 대체 어찌 그렇게 이름을 지었느냐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서 석은(石隱)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사람을 피하고 세상을 피하여 흔히 산에 들어가되 오직 깊지 못할까 염려하고, 숲에 들어가되 오직 빽빽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마치 소부와 허유 같은 사람들이거니와, 이제 옹의 이 누다락은 우뚝히, 성(城)도 아니고 저자도 아닌 데에 서 있어 때로 두셋 친한 벗과 함께 그 위에 올라가 바라보고, 무릇 문인(文人), 학사(學士), 소객(騷客), 명류(名流)가 관람하여 누구나 다 머물러서 하루 해를 즐기며, 아래로는 초부(樵父), 목동과 분주히 행상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밑을 지나는 사람이 또한 누구나 다 듣고 보거늘, 사람을 피하는 것이겠는가, 아니면 세상을 피하는 것이겠는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여기에 더 보탤 만한 것은 없다.
또 옹의 나이 50에 천 리를 멀다 않고 중국에 와서 유람하여, 지나간 명산(名山), 대천(大川), 영구(靈區), 승적(勝蹟)을 하나하나 시가(詩歌)에 나타내어 장차 그 문견(聞見)이 미치지 못한 것을 보내리니, 그 보는 바가 어떠하겠으며 그 뜻을 어찌 쉽게 말하랴?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일으켜 도(道)를 행함에, 행운이 있으면 현달하여 윗자리에 있으면서 공을 세우고 꾀를 세워서 임금을 훌륭히 보필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서, 살아서는 영예를 누리고 죽어서는 오히려 사당의 제향을 받아 먹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도를 논하고 글을 강하여 선현의 학문을 잇고 또는 글을 지어 학설을 세워서 일상생활의 흥을 삼아야 할 것이다. 만약 한갓 그 옳지 못한 한 시대의 절개를 가지고 외로이 천지 사이에서 행하고 심지어 생사를 하나로 보고 득실을 똑같이 생각하여 뜻을 방종하게 하고 일을 버려서 핑계를 삼아 피한다면, 그 사람됨이 어질고 변변치 못함이 분명한데, 옹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옹은 또한 돌아갔거니와 뒷날 동방 사람이 내게 들러서 물을 적에, 옹의 학문이 날로 더욱 깊고 도(道)가 날로 더욱 드러나서 그 지방의 인사들이 함께 서로 칭찬하며, 한편으로 옹이 날로 쇠퇴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로써 내가 전에 한 말이 그릇되지 않음을 함께 믿고 나도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는 데에 가까울 수 있으리니, 이는 옹의 책임이며, 또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임자년(1792, 정조 16) 2월
○7일 이날 저녁에 사신[使家]이 역마[刷馬]의 대장[成冊]에 대하여 물으니, 대략 죽은 말이 7, 8마리라고 하므로, 구인(驅人)들 4명을 붙들어다가 곤장(棍杖) 7대로 처벌하고 영장(領將)도 곤장 13대로 처벌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영장이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농간을 부리어 그 말을 사고 팔게 하고 중간에 끼어 들어서 값을 받아먹고, 말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다 거짓 죽음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 곱으로 곤장을 맞았다.
○8일 평명에 떠났다. 어제 저녁에 송원이 주인집 젊은 딸을 보고 그 아름다운 자색에 반하여 그에 대한 칭찬의 말이 진진(津津)하였다. 그리하여 가인사(佳人詞) 두 장(章)을 장난삼아 지었는데, 아마 절로 흥취가 끌렸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늘 아침 떠날 즈음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뜰 모퉁이에 선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과연 들은 바와 같았다. 말 위에서 송원의 운(韻)을 빌어서 읊었다.
산들바람 온갖 꽃향기 불어 보내니 / 微風吹送百花香
남녀의 무쇠 간장 다 녹이누나 / 銷盡男女鐵肝腸
안뜰에 잠시 서서 푸른 눈으로 흘기고는 / 乍立中庭回翠眄
주렴 밑에 부끄러움 머금고 짐짓 깊이 숨네 / 含羞廉不故深藏
또,
내가 등져 서려니 그대가 돌아다보지만 / 儂將背立爾回看
말이 통하지 않아 뜻을 알리기 어려워 / 言不相通意亦難
굳이 시를 쓰려다 도로 땅에 던졌지만 / 强欲題詩還擲地
밝게 꾸민 치장은 오얏꽃처럼 단정한 것을 / 明粧恐似李端端
송원이 보고,
“잘 형용하였네.”
하였다.
○11일 맑음. 평명에 떠나 30리를 가서 사하소(沙河所)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막 떠나려 할 적에, 말 하나가 객줏집 안에서 뛰어나와 일행의 말들과 솟구쳐 일어서 서로 부비는 것이 헤어지기 싫어하는 뜻이 있는 듯한 것을 보고, 내가 이상하게 여겨서 물으려고 할 즈음에 객줏집 아이가 나와서 끌고 들어갔다. 마부가 나에게 고하기를,
“저것은 조선의 말입니다. 의주(義州)의 어느 구인(驅人)이 처음 올 때에 그 말을 이 객줏집에 팔았는데, 주인도 따라서 함께 온 행차에게 거짓말로 고하기를 ‘말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므로, 행차가 다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한다. 이 말이 나귀, 노새와 구유를 같이하고 살면서도 고향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바람을 향해 울고,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향하는 생각을 가졌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제 사행(使行)이 돌아감에, 말들이 문 앞을 지남을 보고는 이 말이 곧 머리를 쳐들고 발굽을 솟쳐 길가에서 반겨 맞으니, 이는 꼭 함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 때문이리라. 내가,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구인(驅人)이여! 이런 짓을 해 내니 무슨 짓인들 못하랴? 옛말에, ‘사람이나 말이나 역시 같다.’고 한 것이 참으로 헛말이 아닌가? 말은 능히 그 주인을 그리워하는데, 그 주인은 모르고 못 본 체하며 지나니,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하였다.
○13일 평명에 떠나 30리를 가서 송산점(松山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송산에서 떠나 18리를 가서 사릉하(沙陵河)에 이르니, 다리가 무너지고 물이 많아서 사람들이 다 건너는 것을 걱정하는데, 물가의 호인(胡人)이 큰 수레로 사람들을 건네주고 한 사람 앞에 수레삯으로 5푼의 돈을 걷는다. 일행 중의 구인(驅人)들이 호인에게 강을 건넌 뒤에 반드시 돈을 내마고 속이는데, 호인이 구종(驅從)들에게 속은 것이 한두 해가 아니건만 또 믿어 의심하지 않으니, 이 또한 큰 나라의 기풍이다. 물을 건너고서는 모든 구인이 다 돈을 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친다. 호인이 언덕 위에 수레를 멈추고 반식경이나 고함 지르다가 한번 웃고 마니, 호인의 뜻에는 반드시 조선의 구인들과는 다투어 따질 것이 못 된다고 여겼을 터이다. 그런데 구인은 이를 능사로 여겨서, 잡용물을 팔고 살 즈음에도 이따금 이처럼 하니, 이들의 고약한 버릇이 아주 통탄스럽다.
○20일 저녁에 가랑비가 내렸다. 밤이 깊어서 사신[使家]이 막 잠들려 하는데, 여관 주인인 호인(胡人)이 허겁지겁 문을 들어와 함부로 떠들어대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구인(驅人)들이 막으려 하였으나, 그놈이 더욱더 목소리를 돋우고 문의 발을 걷어붙이고 사신 앞을 향해서 달려오는데 조금도 거리낌없는 꼴이었다. 사신이 마두(馬頭) 쌍동(雙童)을 불러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의 말이 하처지기[下處直]와 방삯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다툰 것이라고 한다. 사신이 말하기를,
“하인과 다투는 것이 비록 문밖에서 일지라도 당돌함에 마음 걸리거늘, 이제 방안까지 들어와서 자기 외에 사람이 없는 듯이 구니, 이제 만약 하룻밤 나그네로 자처하여 다스리지 않고 따지지 않으면, 해마다 있는 사신길에 적지 않이 욕을 끼칠 터이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여관에 묵을 수도 없다.”
하고, 곧 일어나 행장을 꾸리고, 다툰 죄로 하처지기에게 곤장 10여 대를 세게 치고서, 곧 북쪽 이웃인 마성(馬姓) 사람의 집으로 숙소를 옮기니 그 집 형제 자질들이 방 밖에 둘러서서 반가이 맞이하고 정성스레 접대하겠다는 뜻이 얼굴에 나타나므로, 사신이 좋은 부채 한 자루와 청심원 다섯 알을 내어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4일 평명에 떠나 청석령(靑石嶺)을 넘다가, 효종의 청석가(靑石歌)를 생각하니 저절로 마구 눈물이 흐른다. 비록 무심히 여기를 지나는 사람일지라도 매우 시름을 느끼겠거늘, 하물며 우리 조종(祖宗)이 수백 년을 지켜온 땅을 잃고 궁료(宮僚) 몇 사람과 깊은 두메 사이에서 기구하게 지나셨음에랴? 잡종 나무와 어지러운 돌하며 원숭이는 애처러이 울고 호랑이가 부르짖음이 어느 것 하나 처량한 광경이 아닌 것이 없어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데, 옛적을 회상하면, 종묘사직의 중대함과 백성에 대한 염려가 참으로 어떠하였겠는가?
※청석가
청석령(靑石嶺) 디나거냐 초하구(草河溝) 어드매오.
호풍(胡風)도 차도 찰샤 구즌 비는 므스일고
뉘라셔 내 행색(行色) 그려 내야 님 겨신 듸 드릴고.
<청구영언, 해동가요>
○26일 15리를 가서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객줏집 문을 들어가려는데, 갑군(甲軍) 5, 6인이 내 말을 한 곳으로 끌어가서 말짐 위에 작은 종이를 붙여서 표를 한다. 그 종이에 ‘봉당위(奉堂尉)’라는 세 글자를 쓰고 또 ‘책문일수험(柵門日搜驗)’이라고 썼으니, 그 뜻이 은자(銀子)를 요구하는 데에 있다. 사신[使家]이 그들이 꾀부리는 데에 노하여, 수역(首譯)과 영송관(迎送官)을 시켜서 말하기를,
“접때 낭자점(狼子店)을 지날 때에 너희들이 심양(瀋陽) 객줏집의 일에 유감을 품고 촌가의 집들을 지휘하여 우리가 묵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공물 바치는 길을 막는 것이다. 너희가 길을 막을지라도 해마다 바치는 예(禮)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비록 한 달을 묵더라도 이런 뜻을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황제의 처분이 어떠하신가를 기다린 뒤에야 맹세코 고국에 돌아가리라. 또한 오늘 도장찍은 쪽지를 일행의 말짐에 붙이고 또 상으로 내려 주신 말을 얽매어 가지 못하게 함은 대체 무슨 까닭이냐? 이 몇 가지 일은 너희들과 다투어 가리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그 사람이 크게 두려운 빛을 가지고 곧 빌기를,
“심양의 일은 우리가 모릅니다. 오늘 말짐에 표를 붙인 것은 관로(關路)에서 으레 있는 법입니다. 만약 대인의 일행의 말짐인 줄 알았더라면 어찌 감히 그러하였겠습니까? 제가 대인께 사과합니다. 빨리 붙인 종이를 제거하겠습니다.”
한다. 대개 말이 바르고 이치가 맞으면 비록 교만한 되놈의 간사한 꾀일지라도, 절로 사라지는 것이니 우습다.
○29일 맑음. 평명에 부사 영공을 따라 산책하였다.
냇가에서 그물 치는 사람을 보고, 곧 냇가에 이르러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구인(驅人)들이 들판에서 노숙(露宿)하여, 혹 밥짓고 혹 말을 먹이느라 사람이 피우는 연기가 사면에 일며 봉황(鳳凰)의 골짜기에 온통 들어찼으니, 참으로 하나의 가관(可觀)이다. 여기부터는 의주부의 장교가 미육(米肉)을 지공(支供)하되 끊임없이 계속하며, 우리나라 사람이 저들보다 많으니, 오랜 여행의 회포를 거의 위로할 만하다.
■임자년(1792, 정조 16) 3월
○1일 안시성(安市城)은 봉황성(鳳凰城) 주변 30리에 있는데, 안시(安市)가 쌓았다고도 하고, 혹 고구려의 말로 봉황을 안시라고 하므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책문에서 5리쯤 떨어져서 들 가운데 우뚝히 선 높은 산이 바라보이는데, 이름하여 삭룡산(朔龍山)이라 한다. 벌여서서 천 봉우리가 되었는데 땅에서 빼어나 솟아 올라 병풍처럼 둘러 안고, 그 서쪽이 터져서 물이 흐르는데 겨우 수레 하나가 통과할 만하다. 양 언덕에 석성(石城)의 옛터가 있으니, 곧 옛 안시성이다. 드디어 언덕을 따라서 그 안에 들어가니, 확 트여서 수십만의 무리를 들일 만하며, 사면의 석벽이 깎은 듯이 구름 가에 높이 솟아 우러러보면 큰 독 안에 앉은 듯하니, 참으로 자연히 베풀어놓은 금성(金城)이다. 가운데에 큰 언덕이 돌을 이고 불쑥 서 있는데, 그 꼭대기는 평평하고 반듯하여 장막을 칠 만하며 성 밖 수십 리가 굽어 보이니, 아마도 옛 장대(將臺)이리라.
그 아래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 위의 바위 면에 ‘찬운암(攢雲岩)’이란 세 큰 자를 새겼는데, 운강(雲岡) 공용경(龔用卿)의 글씨다. 그 뒤의 바위에 ‘가정 정유년(1537년, 중종 32) 하사월 십일’이라 쓰였으며, 그 나머지는 이끼가 끼어서 알아 볼 수 없다. 돌이 움푹한 곳에 거인의 발자국이 있는데 세간에서 개소문(蓋蘇文)의 신자국이라고 전한다. 송원이 말하기를,
“내가 아이 때에 ‘성 위에서 천자를 뵙다.[城上拜天子]’라는 글을 지었는데, 이제 이 성에 올라 방황하며 거친 풀 어지러운 돌을 하나하나 가리켜 보건대 의연한 옛 싸움터이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한다.
해가 벌써 낮이 되니, 주인(廚人 : 요리하는 사람)이 율무떡을 쪄서 바친다. 내가 예닐곱 쪽을 먹고, 잠시 서서 머뭇거리다가 송원을 따라서 골짜기를 나오는데, 때마침 저녁 해가 산에 걸려 있으니, 광경이 그림 같았다. 저녁이 지나서 비가 약간 왔다.
○5일 이날 일찍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일행이 짐을 싸고 행장을 차리고서 봉황성장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낮이 지나도록 소식이 아득하다. 아마도, 해마다 절사(節使)가 드나들 적에 봉황성장이 문을 열지 않으려 하면 으레 은자(銀子) 얼마를 주었으므로, 봉황성장이 그 재화를 이롭게 여겨, 이번 행차에 있어서도 심양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핑계하고 6, 7일이 지나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이리라. 사신[使家]이 임역(任譯)들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뇌물을 탐내니 심함을 이를 데 없다. 비록 해를 넘겨 묵더라도 땡전[唐錢, 피천, 노란동전] 한 푼도 주지 않으리라.”
하고, 따라서 영을 내려,
“내일 일찍 말에게 풀을 먹여라. 수레를 돌려 심양으로 다시 들어가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리니, 행중은 모두 그리 알라.”
하였다.
○6일 봉황성장이 어젯밤에 낸 영을 듣고 비로소 와서 문을 여니, 부사 영공이 말하기를,
“전에는 새장에 든 새와 같더니, 이제 골짜기를 뜻대로 다니는 물고기와 같으니, 이는 인간의 제일 유쾌한 일이다.”
한다. 인마(人馬)가 일제히 뛰어서 문을 나가, 40리를 가서 탕정평(盪井坪)에 이르러 노숙하였다.
○15일 맑음. 평명에 내가 먼저 20리를 가서 냉정(冷井)의 선산(先山)에 이르러 성묘하였다. 또 20리를 가서 보통문(普通門) 밖에 닿으니, 형제 및 친우 수십 인이 다 와서 기다리므로, 길가에 함께 앉아서 서로 한잔 술을 마셨다. 곧 서둘러 채찍하여 집에 돌아와 사당에 참배하고, 중당(中堂)으로 옮겨 앉아 제매(娣妹)와 만나고 비단과 화장기구[鏡具]를 내어 방 안에 벌여 놓으매, 어린아이가 웃음을 바치고 여윈 아내가 밝은 빛을 회복하니, 또한 볼 만하다.
저문 뒤에 연광정(練光亭) 위에서 사신을 뵙고, 그대로 송원 곁에서 잤다.
○16일 사신을 배웅하여 강을 건너갔으나, 사신의 분부로 뒤를 따라 서울로 가지 못하고 물가에서 절하고 전송하니, 섭섭함을 형용해 말할 수 없다. 곧 배를 돌려 집에 이르러, 친구와 함께 오래 못 만난 회포를 풀며 유람한 일을 얘기하면서,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몰랐다.
4, 5일 지나서, 사신이 조정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반갑기 한량 없다.
■잡록
○연경(燕京)은 둘레가 67리이고, 인구가 21만이다.
○정사(正使)에 김이소(金履素 판서 1735-1898), 부사(副使)에 이조원(李祖源 한성부좌윤 1735-1806), 서장관(書狀官)에 심능익(沈能翼)이고, 유학(幼學) 김정중(金正中)이 일기(日記)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