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연행록(권협)

청담(靑潭) 2018. 7. 10. 23:20



연행록(燕行錄)

권협(權悏 1553-1618)


본관 안동. 자 사성(思省). 호 석당(石塘). 시호 충정(忠貞). 동지중추부사 상(常)의 아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장령(掌令)으로 서울의 사수(死守)를 주장하였다.

1597년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귀국 후 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607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광해군 때에는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 2월

○12일 새벽에 출발하여 설리참(薛里站)을 지나 삼관묘하(三官廟河)에 다다르니, 얼음과 눈이 녹아 내려서 물이 깊어 건널 수가 없었다. 그 마을 사람이 아상선(丫尙船) 한 척을 가지고 사람을 건네주기로 하여 삯을 치렀는데, 마침 섭 유격(葉遊擊)이 와서 가지고 있는 짐을 일일이 점검하여 싣고 건너게 하였다. 내가 이장(李檣)을 시켜서 ‘배신(陪臣)이 나라의 위급을 알리러 가는 길이라, 일각이 급하니 먼저 건너가게 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했으나, 유격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격이 지나간 뒤에야 내가 비로소 건너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유격이 소지한 물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얻은 것들인데, 차량이 길에 가득한 것을 보니 해괴스러웠다. 유격 또한 우리 일행을 꺼려했다.

팔도하(八渡河)에 이르니, 유격이 또 강가에 앉아 아상선으로 짐을 점검하여 싣다가, 우리가 오는 것을 보자 곧 점사(店舍)로 피하여 숨었다. 아마도 부끄러운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났음이리라. 나는 여울물이 얕은 곳을 골라 건너서, 말을 재촉해 가서 통원보(通遠堡) 5리쯤 못 미친 곳에서 묵었다.

이날 마 총병(馬摠兵)이 왜구(倭寇)에 대비하여 방수(防守)하는 데 쓸 기계를 독려 조처할 일로 연변을 순행하다가 보(堡) 안에 들러 묵는다고 하였다.

○15일 이른 아침에 내가 일행을 거느리고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 나아가 관대인(官大人) 유공윤(劉孔胤)을 뵙고 함께 차를 마셨다.

위급을 알린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묻기에, 표헌(表憲)을 시켜 고하기를,

“일전에 특별히 보냈던 역관 우치평(禹治平), 김득일(金得鎰) 등이 올린 자문에 말한 그 일입니다. 적추(賊酋 풍신수길(豐臣秀吉))가 흉패하여 천조(天朝)와의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책사(冊使)가 돌아서자마자 청정(淸正)이 곧이어 왔는데, 병선(兵船) 60여 척에다 1만여 명의 군사를 싣고 와서 기장(機張), 서생(西生) 등지에 나누어 웅거하고 있습니다. 또 풍무수(豐茂守)는 병선 60여 척을 이끌고 잇달아 죽도(竹島)에 도착하였으며, 그 밖에 따로 출발한 적선(賊船)도 날마다 끊임없이 나오니, 우리나라의 위망(危亡)한 형세는 매우 급박합니다. 이 때문에 사신을 급파하여 위급을 알리는 것이니, 노야(老爺)는 가엾이 여기셔서 빨리 타발(打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배신이 수레를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타고 갈 말[馬匹]을 얻어서 곧 출발해야겠습니다.”

하였더니, 대인은,

“천조에서는 왜적 대비하는 일에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방수(防守)할 것이오. 다만 그대 나라에서는, 적이 반드시 발동할 것을 살펴 탐지한 뒤에 와서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므로, 표헌이 대답하기를,

“적이 이미 우리나라 변방에 가득하여, 돌진을 외치며 형세가 몹시 거칠고, 혹은 사냥한다 일컫고 함안(咸安), 곤양(昆陽) 등지에 횡행하며, 혹은 진주(晉州), 두치진(豆恥津) 등지에 진입하여 서로(西路)를 답사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발동하여 깊이 들어온 뒤에 와서 알리면 천조(天朝)에서 아무리 구원해 주고 싶어도 반드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인이,

“그대 말이 옳소. 당장 타발(打發)하겠소.”

하므로, 나는 곧 물러 나왔다.

조금 뒤에 대인이 진무(鎭撫) 4인을 시켜서 은자(銀子) 4냥을 보내고, 글로 자기의 구하는 물건을 별지에 적어 환무(換貿)하여 바치도록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당신들 갈 길이 아무리 급해도 반드시 이 물건의 수를 모두 바쳐야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소.……” 하였다. 그 뜻을 살피건대, 나의 갈 길이 급한 것을 기화로 조등(刁蹬 고의로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할 계교를 꾸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수목(數目)이 극히 번거롭고 많아서 아무리 일행의 반전(盤纏 여비)을 몽땅 털어놓더라도 그 수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부득이 그 요구하는 것 가운데 겨우 3분의 1을 마련하여 단자(單子)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진무에게는 면피(面皮) 약간씩을 주고, 아울러 보내온 은자를 돌려보내는 동시에, 이장(李檣)으로 하여금 진무와 함께 가서 바치고, 갈 길이 바빠서 가지고 온 물건이 없는 사정을 갖추 말하게 하고, 또 헌패(憲牌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서)를 조금도 더디게 할 수 없으니 속히 타발하여 줄 것을 바라는 뜻을 말하도록 하였다. 진무 등은 벌컥 성을 내어 단자와 헌패를 땅에 팽개치면서, “당신이 감히 헌패로써 나를 위협하오? 요구한 물품은 하나도 바치지 마오. 다만 당신들이 날아가든지 달려가든지 마음대로 하오.” 하고, 곧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가 버렸다. 만류했으나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

책사 : 책봉사(冊封使).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중국에서 난의 평정을 위해 일본 풍신수길(豐臣秀吉)을 왕으로 책봉하려 한 일. 선조 28년(1595)에 이종성(李宗城)을 책봉정사(冊封正使), 양방형(楊邦亨)을 부사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종성이 이듬해 4월에 중도에서 도망치자, 다시 양방형을 정사, 심유경(沈惟敬)을 부사로 삼아 우리나라 통신사(通信使) 황신(黃愼)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그해 11월에 돌아왔다.

○16일 새벽에 관부(館夫 사관의 심부름꾼)를 시켜 진무들을 초청했으나, 성을 내어 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므로, 곧 표헌, 이장으로 하여금 가서 뵙고 초청해 오게 해서, 다시 위급을 알리는 일이 중대하니 빨리 타발하여 주길 원한다고 말했으나, 진무들은, “당신이 만약 성심으로 급히 가고 싶다면, 어째서 우리가 말한 대로 하지 않소?” 하며, 위협하고 토색하는 것이 어제보다도 더 심하였다. 나는 하루 더 묵는 것도 몹시 편치 않은데, 이날 또 출발할 수 없을 듯하니, 근심과 고민으로 가슴이 막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곧 역관으로 하여금 진무들을 인도하여 나의 짐 둔 곳을 일일이 보이고 이어서, “이번 걸음에 차량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일행 원역(員役)이 탈 말을 요구할 뿐이니, 여비가 없는 것은 이를 미루어서도 알 것이오.……”

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야 진무들이 비로소 마음을 돌렸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 단자와 물건을 가지고 이장을 데리고 가서 바쳤다.

○20일 7, 8리쯤 가니, 길이 진흙 수렁이어서 사람과 말이 푹푹 빠졌다. 곧 말에서 내려 걸어서 몇 리를 가다 다시 탔다. 고평(高平)에서 점심을 먹고 말을 바꾸어 출발했다.

노상에서 귀국하는 주문사(奏聞使) 정기원(鄭期遠)의 선래(先來)를 만나 중국의 발병(發兵)하는 일이 잘된 것을 들으니 매우 기뻤다.

○25일 주문사 정기원(1559-1597)과 서장관(書狀官) 유사원(柳思瑗)이 도착하여 잠깐 서로 이야기했는데, 군사 내보내는 적확한 소식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작별하고 10리쯤 갔을 때, 중후소(中後所) 유격이 군사를 거느리고 치달려 가는데, 300여 기(騎)나 되었다. 탑산소에 달로가 쳐들어왔다는 기별을 듣고 급히 구원하러 달려가는 것이라 하였다. 저녁에 사하역(沙河驛)에 투숙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 3월

○3일 제독 주사(提督主事) 이두(李杜)가 부사(副使) 정유미(程惟美)와 함께 사람을 보내어 우리들이 온 이유를 묻고, 또 말하기를, “가지고 온 자문과 주문을 급히 먼저 보아야겠으니 빨리 보내 주오.” 하였다. 나는 곧 주문 등본을 보내 주었다. 저녁때쯤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곧 주문 초고를 많이 베껴 오시오. 내가 과관(科官)에게 두루 보여 준 뒤에야 그대가 주문을 올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과관들은 마침 석 상서(石尙書)가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와 조선을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제독과 과관들은 모두 일을 함께하는 무리들이므로 우리 일행이 온 것을 매우 기뻐한다고 하였다. 나는 곧 수건(數件)의 주문을 등사하여 보내 주었다.

석 상서(石尙書)가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 :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에서 중국에 원병을 청하자, 당시 병부 상서(兵部尙書)였던 석성(石星)은, 왜추(倭酋 풍신수길)를 봉왕(封王)하고 입공(入貢)을 허락하자는 심유경(沈惟敬)의 주화론(主和論)을 적극 주장하였다. 봉왕(封王)에 관한 일이 실패되자, 석성은 파직되었다. 얼마 안 가서 왜구가 남원(南原), 한산도(閑山島) 등을 격파하자, 황제가 몹시 노하여 석성을 하옥시켰는데 옥사했다.

○6일 4경에 일어나 대궐에 나아갔다.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들어가서 금천교(禁川橋)를 지나 승천문(承天門)으로 해서 단문(端門)을 거쳐 오문(午門) 앞에 이르러 왼편 긴 행랑에서 잠시 쉬었다가, 날이 밝아올 때쯤 어로(御路) 아래에 나아가 서 있었다. 이윽고 입위군(入衛軍)과 코끼리[象]가 함께 나간 다음, 홍려시 관원이 어로에 오르라고 외치니, 조회에 참석한 여러 관원들이 모두 어로에 올라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서반(序班 홍려시 관원)이 우리를 인도하여 광록시(光祿寺)로 가서 술과 밥을 대접했는데, 미처 들어가 앉지도 않았는데 당인(唐人 중국 사람)들이 다투어 고기와 실과를 집어 가 버렸다. 곧 도로 나와서 다시 어로에 올라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 - 술과 밥을 대접한 데 대한 사의이다.- 나왔다. 곧 예부(禮部)에 나아가 상서(尙書)를 만나 보려고 했으나, 이날 바람이 몹시 불어 먼지가 날려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서 범겸(范謙)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만나 보지 못하고 곧바로 관으로 돌아왔다.

○7일 일찍 예부에 갔는데, 상서와 좌우 시랑이 모두 나오긴 했으나 이날도 어제처럼 바람이 몹시 불었기 때문에 정청(政廳)에 나오지 않고, 화방(火房)에서 자문(咨文)을 받으면서, 오늘은 만나 볼 수 없으니 내일 일찍 다시 오라고 하였다.

곧 병부(兵部)에 나아갔다. 상서 석성(石星 1538-1599)은 마침 논죄(論罪)를 당하여 두문불출한다 하고 좌시랑 이정(李楨)이 화방에 앉아 자문을 받아 책상 위에 놓고 나를 불러들였다. 내가 즉시 들어가 두 번 절하였다. 그가 묻기를,

“당신이 올 때 왜적의 정세가 어떠하였소?”

한다. 내가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적장 행장(行長)과 정성(正成)은 벌써 책사(冊使)가 돌아서자마자 바로 뒤따라 바다를 건너와서, 동래(東萊)ㆍ부산(釜山)의 옛 진영(陣營)에 둔거(屯據)하고 있으며, 청정(淸正)은 또 정월 14일에 병선 200여 척을 이끌고 와서 기장(機張)의 옛 보루(堡壘)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풍무수(豐茂守)는 또 병선 60여 척을 이끌고 와서 죽도(竹島)의 옛 보루를 점거했으며, 기타 따로 출동한 적선이 잇달아 끊임없이 날마다 바다를 건너와서 원래 머물러 있던 적의 무리와 함께 주차(駐箚)하여 충돌할 것을 외치는 데 형세가 몹시 거칩니다. 혹은 사냥을 핑계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함안(咸安)ㆍ곤양(昆陽)ㆍ고성(固城)ㆍ사천(泗川)ㆍ하동(河東) 지경을 치달리며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고, 혹은 진주(晉州)의 제석산(梯釋山) 등지에 진입하여 두치진(豆恥津)의 도로를 답사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배신(陪臣)이 올 때, 우리나라 민심이 두려움에 동요되어 장차 흙 무너지듯 할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여러 날이 지나 적세가 다시 더욱 치열할 것이니, 아마 우리나라가 반드시 벌써 궤멸되었을 듯하며, 임금님께서도 어느 곳에 떠도시는지 모르겠으니, 슬픔과 답답함을 이겨 낼 길이 없습니다.”

하고, 서로 뜰에서 눈물을 흘렸다. 시랑이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그러지 마오, 그러지 마오. 요즘 당보(塘報 척후(斥侯))에 별로 긴급한 것이 없으니, 당신들은 마음을 놓아도 되오.”

하고,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는 적을 당해 낼 병마(兵馬)가 없소?”

한다. 내가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우리나라는 적의 가혹한 화를 입어 쇠잔하고 파괴됨이 이미 극심하여, 아무리 병화의 뒤끝을 수습해서 힘껏 방비하더라도,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아 훈련한다는 것은 사세가 미칠 수 없습니다. 군병이 몹시 단약(單弱)하고 군량도 완전히 동이 났는데 다시 무슨 힘으로 큰 적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중국의 구원병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인심은 더이상 믿을 데가 없고, 악한 흉적은 더욱 날뛸 것이니, 우리나라의 멸망하는 화가 곧 닥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조(險阻)하고 무논[水畓]이 들을 덮어, 요병(遼兵)이 비록 가더라도 말로 치닫는 데 불편합니다. 노야(老爺)는 가엾이 여겨, 원래 조달된, 현재 근처에 있는 남병(南兵)을 특별히 꼭 타발(打發)하여 주시고, 아울러 이들을 유지할 만한 군량도 운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일 내에 타발하여 주신다면, 그나마 구제될 수 있겠습니다.”

하였더니, 시랑이 두어 번 깊게 탄식하고,

“당신들은 한집안이오, 당신들은 한집안이오. 당신이 원하는 군사와 군량 두 가지 일은 모두 긴급한 것이니, 마땅히 곧 타발하겠소.”

한다. 또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우리나라에도 훈련된 군사가 약간 있기는 하나 궁재(弓材)와 화구(火具)가 바야흐로 결핍되어 모두 맨손으로 적을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왕께서는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특별히 자문을 올려 청하는 것이니, 아울러 바라건대 노야께서는 전례에 비추어 제청(題請)하여 지급해 주소서.”

하니, 시랑은,

“알았소.”

하고,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두세 번 치면서,

“놈들이 몹시도 간사하고 얄밉다.”

한다. 부사 정유미(程惟美)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지 못하고, 곧 꿇어앉아 우러러보니, 시랑이 말하기를,

“왜적이 몹시 간사하고 간사하다.”

하고, 또 나에게 말하기를,

“전자에 우리 군사가 당신 나라에 가서 당신네 백성을 해쳤으니, 매우 얄밉다. 당신네 나라의 민생이 어찌 불쌍하지 않소? 왜적을 제거하려고 중국 군사를 와서 청하는 것인데, 중국군의 침해(侵害)가 또 왜적보다도 못하지 않으니, 민생이 장차 어떻게 지탱하겠소? 이 뒤로 만일 요해(擾害)하는 자가 있으면, 국왕에게 아뢰어 일일이 자문으로 알려 주시오. 그러면 끝까지 치죄하여 용서하지 않겠소.”

한다. 나는 곧 절하여 사례하고 물러 나와서 직방사(職方司)에 갔다. 낭중(郞中) 신용무(申用懋)가 나를 불러들여 서로 읍하였다. 묻기를,

“당신들은 노상에서 귀국하는 정 배신(鄭陪臣 정기원(鄭期遠))을 보지 못했소? 반드시 벌써 군대를 출동시켰을 줄 알았을 텐데, 또 어째서 왔소?”

한다. 내가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정 배신은 작년 11월에 다만 청정(淸正)의 선성(先聲)만 듣고 주문을 가지고 먼저 왔었습니다만, 지금 이 배신(陪臣)은 청정, 풍무수(豐茂守) 등 여러 적이 이미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기장ㆍ죽도의 옛 보루를 점거, 원래 머물러 있던 왜적과 합세 둔거(屯據)하여 충돌의 화가 조석에 박두하였기 때문에, 정월 25일에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 위급을 알리는 것입니다. 정 배신을 과연 관(關) 밖에서 서로 만나 발병(發兵) 소식을 듣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형편이 매우 위급하여 마치 수화(水火)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를 들고 구원을 바람이 하루가 다급한데, 상국은 한갓 발병한다고 말만 하고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정 배신이 지난달 초에 여기에서 이미 발병하는 칙지(勅旨)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1개월이 되었어도 군사 한 명 전진(前進)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배신이 올 때, 양 총병(楊摠兵)이 요병(遼兵) 3000명을 거느리고 3월 안에 출발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이도 또한 길에서 얻어 들은 소식이어서 그 적확한 것을 모르니, 이래서 배신이 밤낮으로 애타게 근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험준한 산이 많고 넓은 들이 적으며, 그나마도 모두 무논[水畓]입니다. 전일 요병(遼兵)이 왔을 때 매양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요병이 가더라도 실로 싸움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노야는 남병 3, 4천 명을 먼저 출동시키고 아울러 이들을 유지할 군량을 운반하여, 때맞추어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낭중이 묻기를,

“당신 나라의 병마는 얼마나 되오?”

하기에, 표헌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피폐가 이미 극심하여 군민(軍民)이 거의 모두 사망했으니, 병마를 어디서 조달해 내겠습니까? 겨우 쇠잔한 병졸을 수습하여 요해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경상도의 여러 장수가 거느린 군사가 모두 합쳐 겨우 1만여 명이고, 전라도도 겨우 수만 명인데, 그것도 모두 겁약(㤼弱)하고 광포(恇怖)하니, 적이 만약 대군을 몰아 쳐들어오면 반드시 혼비백산하여 결코 저항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니, 낭중이 말하기를,

“당신 말이 옳소. 활에 상한 새는 본래 그와 같은 것이니, 당신 나랏일이 참으로 가엾소. 본부에서 이미 군문(軍門)과 상의하여 요병(遼兵) 3000, 선화부(宣化府)와 대정부(大定府)의 병사 각 3000, 남병(南兵) 3000, 수병(水兵) 3000, 도합 1만 5000명의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남병과 수병은 거리가 아득히 멀어서 오는 데 시간이 걸려 용이하게 달려가 구원할 수 없는 형세요. 또 발병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군량 운반하기가 몹시 어렵소. 당신 나라가 풍년이 들었다 하니, 접제(接濟)할 수 있소?”

한다. 표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병화(兵禍)가 있은 뒤로 전야가 황폐하여, 가는 곳마다 쑥대만 보임은 천조에서 목도한 바입니다. 지난해에는 조금 풍년이 들긴 했으나, 죽음에 다다른 백성이 겨우 연명할 정도이니, 군량까지야 비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왕께서 애써 조처하셔서 벼슬도 팔고 죄수에게도 돈을 받는 등 하지 않는 일이 없이 하여, 겨우 일로(一路)에 지나가는 양식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천조에서 만약 계속 군량을 대주지 않으면 결코 접제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배신(陪臣)이 올 때 영평부(永平府)에 남병 수천여 명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군사를 빨리 타발(打發)하되, 성지(聖旨)를 받들어 빨리 달려가 구원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하면 장관(將官)이 지연할 수 없어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조에서 아무리 발병하더라도 만약 때맞추어 구원하지 못한다면, 발병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나라 종사(宗社)의 존망과 군부(君父)의 안위, 그리고 백만 창생의 생사가 모두 발병의 지속(遲速)에 달렸으니, 노야께서는 가엾이 여겨 시종 구제하여 멸망을 모면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군신(君臣)은 죽다가 살아난 은혜를 입었으므로 번리(藩籬)를 보위(保衛)하는 데 몸을 바쳐 장차 결초보은할 것입니다.”

하니, 낭중이 말하기를,

“이제 당신 말을 들으니 당신 나라가 몹시 창황(蒼黃)한 모양이오. 내가 마땅히 급히 성지를 받들어 타발할 것이니, 당신들도 빨리 돌아가 군민(君民)의 마음을 위안시키는 것이 좋겠소.”

한다. 내가 또 표헌을 시켜, 궁각(弓角)ㆍ초황(硝黃)을 사줄 것을 고하니, 낭중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군문(軍門)에 축적된 것을 급여하도록 제청하겠으니, 당신이 그곳에 가서 받아가도록 하오.”

한다. 표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극적(劇賊)이 바야흐로 침입하였는데 전구(戰具)가 전혀 없습니다. 군문에 축적된 것은 아마 필연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급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낭중이 말하기를,

“그렇소. 내가 당신 대신 돌려주도록 하겠소.”

한다. 나는 곧 물러 나왔다.

병부 관리 수십 명이 중문(中門) 밖에서 말하기를,

“이 낭중은 곧 전 각로(閣老) 신시행(申時行)의 아들로서 명망이 혁혁하여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소. 비록 상서, 시랑이라도 모두 그 말을 들어주는데, 지금 낭중의 말을 들어보니, 당신들의 소청은 모두 잘될 것이오. 기쁘오.”

한다.

○15일 이른 아침에 이 시랑이 정유미를 시켜 전언하기를,

“성지가 어제 저녁에 이미 내려져, 이제 당신에게 보내어 보이오.……”

하였다. 성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이 위급을 고하므로 바로 장수를 파견하여 군대를 조달하게 했으나, 아직 출발할 기일은 보지 못했다. 너의 부(部)는 곧 공문을 띄워서 기한을 정하여 출발하도록 재촉하고, 요동 어사(遼東御史)로 하여금 출관(出關)할 기일을 조사하여 주보(奏報)하게 하라. 만약 다시 지연하여 일을 그르치면, 모두 두류(逗遛)한 죄로 논하리라. 군대가 가는 곳에 군량이 따르는 것은 사세가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날은 촉박하고 길은 멀어서 운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독무(督撫)로 하여금 해국(該國)에 통지하여 약속에 따라 준비하게 하되, 담당 관리는 미리 국경에서 기다렸다가 군대가 도착하는 대로 응용(應用)하도록 하라. 그러면 중국은 형편에 따라 군량을 징발해서 산동(山東)으로부터 바다로 운송하여 그곳에 가서 접제케 할 것이다. 기한에 임박해서 서로 미루고 핑계하여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 그 나머지 일은 요량껏 실행하라.”

내가 성지의 내용을 실피건대, 엄밀하기가 한 구절이 다른 한 구절보다 깊었다. 황은(皇恩)이 망극하여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정유미가 말하기를, “병부(兵部)에서는 손 총독(孫摠督)의 자칭(咨稱)에 의거하고, 또 각신(閣臣)의 건의에 준하여, 경리 조선 순무(經理朝鮮巡撫) 및 사도관(司道官)을 설치해서 본국(조선)에 미리 가서 비어(備禦)에 관한 사무를 처리케 할 것을 함께 제청(題請)하였으니, 이것에 대해서도 성지가 금명간에 내려질 것이오.” 하였다.

○16일 맑음. 아침 먹을 때 부사 정유미가 말하기를, “병부의 형 노야(邢老爺)가 조선의 통사를 몹시 급히 부릅니다.” 하므로, 내가 표헌과 이장에게 가도록 하고, 또 선래(先來)가 가져갈 화패(火牌)를 받아 오게 하였다. 조금 뒤에 표헌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형 시랑이 묻기를, ‘손 총독이 말하되, 4월 이후는 반드시 비가 와서 도로가 수렁이 되어 행군에 불편하다 하니, 8월까지 기다려야 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적세가 충돌할까 염려되어, 먼저 요동과 계주(薊州)의 병사 6, 7천명을 출동시켜서 그대 나라를 지켜야겠다. 그런데 이제 왕경(王京 서울)에 주차토록 하자니 적이 있는 곳과 멀 듯하고, 전진하여 주둔케 하자니 엄습을 당할까 두렵다. 주둔지는 어느 곳이 편리한가? 반드시 험고(險固)한 성지(城池)가 있어야 거기에 의거하여 지킬 수 있겠으니, 그대는 참작하여 마땅한 곳을 지적하여 말하라.’ 하므로, 표헌이 말하기를, ‘소인이 감히 마음대로 아뢸 수 없으니 배신(陪臣)을 불러 물으십시오.’ 하고, 이어 고하되, ‘노야의 은혜를 입어 병량(兵糧), 궁재(弓材), 화구(火具)는 모두 준허를 얻었으니, 황은이 망극합니다. 배신이 통관(通官) 한 사람을 먼저 보내어 국왕에게 알려드리고자 화패(火牌)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시랑이, ‘화패는 발급하겠다. 나도 너의 국왕에게 자회(咨會)하려고 하니, 기다렸다가 가지고 가라.’ 하고, 또 말하기를, ‘배신과 함께 너의 나라 지도를 그리되, 지금 왜적이 둔거하고 있는 지점, 왕경으로 가는 경로, 왜적이 횡행하여 사냥하는 지역, 너의 나라의 장사(將士)가 지금 주둔하여 방어하고 있는 부(府)ㆍ주(州)ㆍ현(縣), 어떤 곳에 성이 있어 지킬 만하고, 어떤 곳은 지킬 수 없으며, 어떤 곳은 양식이 얼마 있고, 어떤 곳에는 병사가 얼마나 있으며, 또 천연의 요해처를 일일이 표시하여 나에게 분명히 알려 달라.’ 하였습니다. 표헌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시랑이 ‘내일 배신과 함께 일찍 오라.’ 하였습니다.

표헌이 또 말하기를,

“병부에서 들으니, 경리조선도어사(經理朝鮮都御史)에는 양호(楊鎬), 사도관(司道官)에는 소응궁(蕭應宮)이 이미 성지를 받들어 차임되었다 하는데, 양호는 지금 요동 포정사(遼東布政使)이고, 소응궁은 지금 방해어왜 전관관전금주 우참정(防海禦倭專管寬奠金州右參政)이라 합니다.”

하고, 표헌이 또 말하기를,

“형 시랑의 하인이, ‘우리 노야께서 입경한 이튿날 곧 석 상서(石尙書)를 찾아가 뵈었더니, 석 야(石爺)가 매우 분한(憤恨)한 빛을 띠고 우리 노야에게 말하기를, 조선이 나를 잡는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지금 사신을 보내와서 위급을 알리고, 청정(淸正)이 다시 왔다는 장황한 사설은 모두 나를 잡는 말이다. 어찌 왜적이 왔을 리가 있는가? 하더라.’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랍고 의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석 상서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주선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극히 감사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와 같이 의심을 품어 스스로 풀 길이 없으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17일 맑음. 제독 이두(李杜)가 관에 출근하였다.

내가 나아가 뵙고 재배(再拜)하니 제독이 답배하였다. 내가 이장에게 고하게 하기를,

“노야의 주선으로 처리할 일을 모두 준허 받아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다시금 감사의 절을 하렵니다.”

하고, 곧 재배하니 제독이 또 답배하였다. 다시 이장을 시켜 고하게 하기를,

“궁재와 화구를, 빨리 은(銀)을 수령해서 사 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제독이 대답하기를,

“이번 주청한 일이 복제(覆題)에서 모두 준허되니 나도 기쁘오. 화약은 속히 사서 줄 것이니, 당신들은 밤을 새워서 빨리 돌아가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소.”

한다. 나는 곧 물러 나왔다.

곧 초잡아 그린 지도를 가지고, 또 품첩(禀帖)을 갖추어 표헌 진예남(秦禮男)과 더불어 병부에 갔다. 형 시랑이 전언하기를, “오늘은 일이 많아 만나 볼 수 없으니, 내일 일찍 다시 오시오.” 하였다.

이 시랑이 화방에 있었다. 내가 나아가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니 곧 불러들였다. 내가 들어가 재배한 다음,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배신이 복제를 보니, 군량과 화구가 모두 준허된 것은 모두 노야의 덕택입니다. 또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이시고, 멀리서 온 사람을 대우함에 정성[欵悃]을 다하시니, 베푸신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감히 다시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 사례합니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한집안 사람이오. 급난(急難)이 있을 때 어찌 힘을 다하여 구원하지 않겠소? 감사할 것이 없소.”

하고, 또 말하기를,

“당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시오.”

한다. 내가 표헌에게 고하게 하기를,

“청한 일이 모두 이루어졌으므로 달리 고할 것이 없으나, 다만 속히 은(銀)을 받아서 궁재와 화구를 샀으면 합니다.”

하니, 시랑이 ‘좋소.’ 하고, 직방사(職方司)의 해당 관리를 불러 빨리 시행토록 하였다.

○18일 내가 표헌 진예남과 함께 일찍 병부에 나아갔다.

형 시랑이 화방에서 불러들였다. 내가 곧 들어가 재배한 다음, 지도와 품첩을 주었다. 품첩에는,

“노야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삼가 초도(草圖 초본(草本))를 작성하여 드립니다. 지금 왜적이 둔거한 지역은 부산(釜山)ㆍ동래(東萊)ㆍ기장(機張)ㆍ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가덕(加德)ㆍ안골(安骨)ㆍ죽도(竹島)ㆍ양산(梁山)ㆍ울산(蔚山)이고, 횡행하는 곳은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함안(咸安)ㆍ진주(晉州)ㆍ고성(固城)ㆍ사천(泗川)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이며, 우리나라에서 방수하는 곳은, 읍명 곁에 각각 ‘정장방수(定將防守)’ 넉 자를 적었으니 살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군병이 얼마이며 군량이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비직(卑職)이 맡은 업무와는 직책이 달라 수목(數目)을 상세히 알 수 없어서 감히 적어 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참혹한 화를 입은 것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옛날 즐비하던 처소가 지금은 모두 빈 터가 되었고, 옛날 경작하던 땅은 지금 모두 황폐하여 천 리가 쓸쓸하게 무성한 풀만이 하늘에 연하였으니, 군병은 어디서 조달해 내며, 군량은 어디서 비축하겠습니까? 오직 전라도만이 유린을 면했으나, 경상도는 6년이나 대치(對峙)하여 무릇 기계의 조비(措備)와 군량의 전수(轉輸)를 한결같이 모두 전라도에서 변통하였기 때문에, 전라의 조폐(凋弊)가 경상도에 비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죽령(竹嶺)ㆍ조령(鳥嶺)ㆍ추풍령(秋風嶺)ㆍ팔량치(八良峙)ㆍ두치진(豆恥津)ㆍ한산도(閒山島)ㆍ의령(宜寧)ㆍ경주(慶州)ㆍ대구(大邱)ㆍ성주(星州) 등지와 같은 곳은 장수를 배정하여 방수하고 있으나, 거느린 군병이 적고 잔약하여, 적이 만약 대거 침략해 오면 반드시 새나 물고기가 놀라듯 결코 당해 내지 못할 형세입니다. 군량은 이미 모조리 바닥나 남은 것이 전혀 없고 오직 왕경의 저축미가 전부 6만여 석이고, 수원(水原)에 1만여 석, 남원(南原)에 2만여 석이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대개 영쇄(零瑣)하여 우리 군사를 먹이는 데도 자주 부족한데, 하물며 중국 대병(大兵)의 양식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나라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직(卑職)이 듣건대, 중국의 산동(山東)의 등주(登州)ㆍ내주(萊州) 및 금주(金州)ㆍ복주(復州)ㆍ해주(海州)ㆍ익주(益州) 등은 우리나라 황해도ㆍ평안도와 멀지 않으므로 성지(聖旨)에서도 이미 산동의 해운(海運)을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십분 재촉하여,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군량이 먼저 도착토록 한 뒤에야, 식량 결핍으로 인한 낭패를 볼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 임진년에는 군량 운반이 대부분 요동의 육로를 경유했습니다. 이는 대병이 갑자기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로(西路)가 비축된 양식이 모자라 공급할 수 없을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평안 일대는 임진년에 비하여 잔폐가 더욱 심하니, 노야께서는 이런 사정을 굽어살펴서 한편으로는 바다로 운송하고 한편으로는 육로로 운반하여 시종 구제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하였다.

시랑이 품첩을 본 다음,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 나랏일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소. 이제 발병하여 구원할 일을 경리(經理)하려 하여도, 아득히 손 댈 곳을 모르겠소. 당신은 들은 대로 상세히 말하여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좋겠소.”

하고, 앞에 상을 놓고 그 위에 지도를 펼쳐 놓은 다음, 한 가지씩 매우 상세히 묻고 내가 대답하는 대로 일일이 기록하였다. 해가 기울어서야 그만두면서, 연방(掾房)에 들여 앉히고 말하기를,

“더 물을 일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오.”

하고, 곧 차를 보내 주었다.

땅거미에 전언하기를, “마침 배앓이를 앓게 되었으니, 내일 일찍 다시 오시오.” 하였다.

○19일 맑음. 이른 아침에 형 시랑이 사람을 보내어 나를 오라고 재촉하였다.

내가 표헌 진예남과 함께 가니, 시랑이 불러들여 말하기를,

“송 경략(宋經略 송응창(宋應昌1536-1606)이 당신 나라에 갔을 때 지도를 그려 왔는데, 지금 당신의 지도와 참조하여 보니 대략 같소.”

하고, 연방(掾房)으로 들어와 앉게 한 다음, 좌우의 당리(堂吏)와 사령(使令)을 물리친 뒤에 연리(掾吏 하급관리) 한 사람을 시켜 제본(題本) 초고를 내보였다. 대개 어제 문답한 말을 가지고 제본을 작성하여, 우리나라를 구원하는 계책(計策)으로 삼은 것이다. 내가 제초(題草)를 보니, 극히 상세하게 우리나라의 비어책(備禦策)을 말하여, 직접 보고 실제로 답사한 것 같았다. 비로소 이 노야가 흉중에 상당한 기획(奇畫)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시랑이 이어 말하기를,

“상본(上本)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데, 당신에게 보이는 것은 잘못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고쳐도 관계 없소. 나는 사실대로 상본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불러 와서 보게 하는 것이오.”

한다. 그래서 서로 문난(問難)하는 사이에 또 해가 기울었다. 내가 몇 군데 잘못된 곳을 고쳐서 올렸더니, 다시 앞에 불러다가 말하기를,

“당신이 귀국에 사람을 먼저 보내고자 하였는데, 조금 지체하여 기다리오. 내가 상본하여 성지를 받은 뒤에 자문을 가지고 가도록 하는 게 좋겠소.”

하고, 송 경략의 지도를 주며 말하되,

“이 지도는 잘못된 곳이 많은 듯하니, 당신이 교정하여 보내 주오.”

한다. 나는 곧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 나왔다.

○23일 황제가 하정(下程)을 내렸는데, 와서 구하는 이들이 삼대처럼 많았으므로 나누어 주고 보니 거의 없어졌다.

제독이 관(館)에 출근하여 나를 부르므로, 진예남 이장과 함께 갔다. 읍(揖)을 마치니 제독이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 천조에 은을 청구하여 초황(硝黃) 등 물품을 무역해 가기를 앞서 두 차례나 하였는데, 이제 또 한 차례 하면 모두 세 차례가 된다. 이번은 아직 무역하지 않았지만, 앞서 두 번은 어떻게 잘해서 많은 수량을 사서 가져 갔는가?”

한다. 진예남 등이 말하기를,

“소인은 앞서 두 번 다 오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제독이,

“네가 오지 않았더라도 어찌 들은 것이 없겠는가? 숨김 없이 말하라.”

한다. 진예남이 말하기를,

“소인이 듣기로는, 앞서 한 번은 통관(通官) 등이 은을 받아서 사사로이 직접 사들였으므로 상국(上國) 상인들이 억지로 비싼 값을 들씌워서, 이 때문에 무역한 물품이 자못 적었다 합니다. 그 뒤 한 번은 당시 제독 홍 야(洪爺)가 친히 개시(開市)하여 보고 사주어, 상인이 비싼 값을 들씌워 받지 못하고 한결같이 시장 시세대로 받았으며, 감히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무역한 것도 전에 비하여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소인이 들은 바는 이러합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첫 번은 은 3000냥을 주었고, 뒤에는 은 2000냥을 주었는데, 2000냥으로 산 것이 도리어 3000냥으로 산 것보다 많았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으랴? 그리고 첫 번에 왔던 통관들은 너희 나라에 가서 죄를 받지 않았는가?”

한다. 진예남이 말하기를,

“달리 죄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 나라에서는 수목(數目)도 모르고 형법(刑法)도 없구나. 첫 번에 왔던 통관들은 은자(銀子) 3000냥을 받아 자기 물건으로 여겨 물쓰듯 하고 싶은 대로 했기 때문에 그때 무역해간 궁재와 화약이 겨우 3분의 1 정도였다. 그 당시 홍 낭중(洪郞中)이 제독이 되어, 뒤에 이러한 사실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너희 나라에 자문을 보내려 하다가 못하고, 이듬해 너희 나라에서 또 은을 주어 무역해 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에, 홍 낭중이 직접 시장을 열어 일일이 무역해 주었으나 그때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대개 이 은자는 황상께서 내리신 것이므로 터럭만큼이라도 너희 멋대로 낭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나도 친히 시장을 보아 사서 주고, 너희들의 간여를 허용하지 않겠다. 너도 알아두고 배신에게도 말하라.……”

하였다.

○24일 형 시랑이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손 군문(孫軍門)의 보고에, ‘적선이 우도(右道)에 와서 정박하였다.’고 하니, 우도는 어느 지방이오?”

한다. 내가 곧 대답하기를,

“경상도를 갈라 동쪽을 좌도(左道)라 하고 서쪽을 우도라 합니다. 전라도와 충청도도 그렇습니다.……”

하고, 이어서 그에게 보고 소식을 상세히 듣기를 원한다고 했더니, 형 야(邢爺)가 곧 손 군문의 원첩(原帖)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이 전보(傳報)하되, 3월 11일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양산 군수(梁山郡守) 김극유(金克裕)가 군관(軍官) 김어갑(金魚甲)의 보고를 받고 치보(馳報)하였는데, 본월 3일 왜선 200여 척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출발하여, 100여 척은 서생포(西生浦)로 향해 가고, 100여 척은 우도(右道)에 와서 정박하였다.……”

하였다. 형 야가 이어 묻기를,

“우도에 정박한 적이 어느 곳을 향하여 침범할지 긴요한 곳을 내일 지적하여 오시오.”

한다. 내가 즉 답하되,

“우도의 적은, 육로로는 김해ㆍ웅천ㆍ창원 등 일대이고, 수로로는 거제도ㆍ한산도 등 일대인데, 대개는 모두 전라도로 향하는 길입니다.……”

하였다.

○25일 형 시랑이 나를 부르므로, 곧 진예남 등과 함께 갔다. 시랑이 화방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전일 당신에게 보인 초고를 벌써 상본(上本)하여 성지를 받았으므로 이제 당신 국왕에게 보낼 자문을 준비하였소. 그리고 발보(撥報)를 보니, 당신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관(將官)이 왜적 5명을 참살(斬殺)했다 하오. 왜적 5명을 참살한 것으로는 적을 위압할 수 없고, 원수를 맺어 화를 재촉하기만 할 뿐이오. 이는 전혀 유익함이 없고 해만 있소. 이 뜻을 나도 이미 자문 가운데 대충 언급하였거니와, 배신도 또한 국왕에게 아뢰어 각처의 방수하는 장관(將官)을 신칙해서 삼가게 하고 경솔히 움직여서 참살하지 말도록 하여야 하오. 중국은 반드시 구원할 계책을 마련하여 터럭만큼도 실수가 없도록 할 것이니, 천병이 이르기 전엔 당신 나라에서는 그저 힘껏 굳게 지키기만 하면 되오. 가사 왜적이 움직이더라도, 당신 국왕은 절대로 경솔히 국도(國都)를 버리지 말고 죽음으로써 지켜 천병이 이르기를 기다리오. 혹시라도 가볍게 국도를 포기하여 왜적이 중심부에 침입하게 되면, 천병이 이르더라도 힘이 되기 어렵소. 이 뜻을 배신은 거듭하여 분명히 아뢰어 이러한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한다. 내가 ‘삼가 말씀한 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또 진예남에게 고하게 하기를,

“산동(山東)의 군량을 수로로 운송하는 일은 성지가 정녕하여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만, 수로의 운송은 지속(遲速)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양 총병(楊摠兵)ㆍ오 총병(吳摠兵)이 벌써 군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오래지 않아서 우리나라 국경에 도착할 것이며, 대병(大兵) 또한 차례로 도착할 것인데, 이때 우리나라에서 군량이 모자라 접제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대사를 그르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먼저 요동(遼東)의 곡식을 징발하여 때맞춰 도착하게 하여 끼니를 거르는 근심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나도 이 뜻을 아오. 다만 당신 나라의 적보(賊報)가 급한 듯하니, 먼저 나간 군사는 우선 당신 나라의 곡식을 먹어야겠소. 중국이 현재 산동의 곡식을 독촉하여 운반토록 하고, 요동의 곡식 또한 징발하여 운송하려 하고 있소.”

하고, 이어 자문 두 통과 화패 1개를 주면서,

“당신 나라에 만약 급보가 있으면, 이 화패를 가지고 급히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26일 형 시랑(형개)이 나를 부르므로 진예남과 함께 갔다.

화방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왜적도 또한 종국의 처분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하니, 당신 나라에서 경솔히 충돌하여 혼란을 빚어서는 안 되오. 지난번 왜적 5명을 참살한 것과 같이 만약 쓸데없이 싸워서 그들의 원망을 복돋을 경우, 저들이 이를 트집잡아 조선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면, 일을 그르칠 것이 틀림없소.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소? 마땅히 부드럽고 예의(禮儀) 있는 말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어 진격하지 못하게 하다가, 대병이 모두 도착한 뒤에 분부를 따라 행동하오. 이 뜻을 다시 더욱 상세히 국왕에게 아뢰시오.”

한다. 내가 대답하기를,

“노야께서 이처럼 정녕히 가르치고 경계해 주시니, 마땅히 말씀대로 갖추 아뢰겠습니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사에 관한 일은 비밀로 하는 것이 중요하오. 발병(發兵)과 관계된 모든 일은 절대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소. 하물며 왜노(倭奴)는 교사스러움이 가지각색이어서 간첩(間諜)을 잘하고, 또 중국과 당신 나라의 세작(細作 정탐꾼)의 무리 또한 어찌 없겠소? 만약 이곳 기밀이 적에게 누설되면 일을 그르칠 것이 틀림없소. 이 뜻을 당신 나라가 명심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내가 중국에 올 때, 군사 기밀에 관한 내용은 글로 올리거나 직접 대면하여 아뢰어서 잘 주선하라는 왕의 분부를 받았었는데, 매양 이를 개진하려 할 때마다 시랑이 먼저 언급하니, 감사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내가 곧 꿇어앉아 고하기를,

“이 일은 우리나라가 매양 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무릇 절박하고 다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중국에 달려와 호소하여, 위급을 고하고 군사를 요청한 사실이 혹 적에게 흘러들어감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분을 품고 독을 부림이 더욱 심하니, 무릇 군기에 관한 일은, 우리나라에서 본래부터 십분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상국(上國)에서도 또한 비밀로 하여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하니, 시랑이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 나라에서 비밀히 처리하지 못할까 염려하지, 이곳에서야 어찌 누설될 걱정이 있겠소? 당신 나라에서나 다시금 살펴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한다. 내가 또 고하기를,

“군량에 관한 일로 번번이 귀찮게 하여 몹시 황공합니다. 다만 중국에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에서 적을 제거함을 생각할 때 황은의 망극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도리로는 오직 군사를 반드시 배불리 공궤하고, 말[馬]을 반드시 배불리 먹여 싸움터로 용감히 나가도록 해야 하는데 전화(戰禍)를 겪음이 혹심(酷甚)하여 온 나라가 텅 비다시피하여 재력이 고갈되고 힘이 다하여 준비하고 변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렇듯 안타깝고 절박한 일이 있습니까? 노야는 이런 사정을 통촉하시어, 특별히 재촉하여 군량을 운반토록 해 주십시오. 지극히 간절하고 애타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당신 나라 정세를 알고 있소. 지금 군량 수송에 관한 일을 다시 상본하여 특별히 조처하려 하오.”

하고, 이어 내가 그려 올렸던 지도를 주면서,

“다시 그리되, 더욱 힘써 아주 상세히 꾸며서 보내오.”

한다. 나는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물러 나왔다.

○제독(提督)이 관(館)에 나왔다. 내가 이장에게 은을 받아 초황(硝黃)을 사 가길 원한다는 뜻을 고하게 했더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미 공문을 띄어 독촉했으니, 내일 당신이 태복시(太僕寺)에 가서 받으시오.……”

한다. 내가 다시 지도를 그리고 게첩(揭帖)을 갖추어, 진예남을 시켜 형 야에게 가서 올리게 하였다. 게첩에,

“노야께서 다시 지도를 그리되, 무릇 성(城)의 유무, 지킬 만한가 못한가, 험요(險要)의 소재처와 도로의 통하는 것으로부터, 외면의 문호(門戶)와 이면의 당오(堂奧)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써서 올리라 하시니, 이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구획(區畫) 조처하는 것으로, 빈틈없는 지극한 계책이니, 비직(卑職)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경상 한 도는 이미 그 경개(梗槩)를 대충 진술하여, 대략 통촉하셨을 것이나, 다만 경주(慶州)ㆍ성주(星州)ㆍ대구(大邱)ㆍ선산(善山)ㆍ상주(尙州)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 등지에는 각각 산성(山城)이 있어서 험준하여 지킬 만합니다.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이 성들을 중수하여 높이 수축하였으며, 또 군량과 기계도 약간 준비하여 거수(據守)할 계획을 하였으니, 이것은 아직 진달하지 못한 바입니다.

전라도로 말하면, 운봉(雲峰)의 팔량치(八良峙), 광양(光陽)의 두치진(豆恥津)이 외문호(外門戶)가 되는데, 팔량치는 높고 험준하여 둔거할 만하고, 두치진은 강을 사이에 두고 지킬 수 있어, 모두 믿고 보루를 삼을 만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현재 장수를 두어 방수(防守)하고 있습니다. 팔량치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면 남원(南原)이 제2문이 되고, 두치진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면 순천(順天)이 제2문이 되는데, 모두 성이 있어 지킬 만합니다.

남원ㆍ순천으로부터 또 진전하면 전주(全州)ㆍ담양(潭陽)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 등지가 중앙의 땅이니 당오(堂奧)가 됩니다. 전주ㆍ광주ㆍ나주는 모두 성이 있어 지킬 만하고, 담양은 읍성(邑城)이 없으나 산성이 있으며, 남원은 읍성 외에 또 산성도 있고, 장성현(長城縣)에도 산성이 있는데, 모두 험고하여 지킬 만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이미 증축설비하여 방수 계획을 하였습니다.

충청도로 말하면, 죽령(竹嶺)ㆍ조령(鳥嶺)ㆍ추풍령(秋風嶺)이 외문호(外門戶)가 되고, 그 안에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 등 중앙의 땅이 당오(堂奧)가 됩니다. 충주ㆍ청주는 예전에 성이 있었으나, 임진년 난리에 잔파(殘破)되어 미처 개축하지 못했으며, 홍주는 성이 있어 지킬 만하고, 공주는 본래 읍성이 없으나, 고을 북쪽 수 리(里)쯤에 금강(錦江)이 가로지르고 있어서, 왕년에 강을 따라 산 위에 험한 곳을 골라 성을 설치했는데, 자못 높이 쌓아서 이곳 또한 지킬 만한 곳입니다.

경기(京畿)로 말하면, 이천(利川)ㆍ죽산(竹山)ㆍ수원(水原)이 외문호가 되고, 왕경(王京)이 당오가 됩니다. 이천ㆍ죽산은 성이 없습니다. 수원 또한 읍성은 없으나, 읍 동쪽 5리쯤 대로에 산성이 있는데, 몹시 높고 험준합니다. 근년에 우리나라가 이 성만큼 힘을 쏟아 설비한 것이 없고, 경기 백성들이 믿고 보루를 삼는 것도 이 성 밖에 없습니다. 이천은 비록 성이 없으나, 광주는 산성이 있으니 곧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옛 도읍입니다. 험애(險隘)하기가 견줄 데 없으나 옛 성이 모두 무너졌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금년 정월부터 공역을 시작하여 수축하였으니, 지금쯤은 이미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주(驪州)에도 산성이 있는데 증수 설비한 것이 수원의 성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원ㆍ광주ㆍ여주는 3개의 성이 솥발처럼 대치하여, 험한 곳에 설치되어서 높고 견고하여 지킬 만한 데다가 앞에는 한강(漢江)의 천연적 참호가 있으니, 만약 이 3개의 성을 보수(保守)하면 적이 아무리 왕경(王京)을 진격하려 해도 그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나라 민심이 굳지 못하여 적을 보면 쉬이 무너지니, 만약 중국 군사의 협력을 얻게 되면, 왕경을 보존하여 기필코 지켜낼 것입니다.

황해(黃海)로 말하면, 본래 한낱 잔폐한 도로서 군읍(郡邑)이 많지 않고 또 성도 없습니다. 다만 연해 일대의 연안(延安)ㆍ해주(海州)ㆍ풍천(豐川) 등 읍만이 성이 있어 지킬 만한데, 해주의 성이 가장 높고 견고하며, 또 산성이 있어 매우 험하니, 우리나라에서 또한 벌써 증축 설비하여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평안도는 중화(中和)가 외문호가 되고, 평양(平壤) 이서(以西)가 당오(堂奧)가 되는데, 성이 있는 주부(州府)는 이미 지도 위에 적었습니다.

강원(江原)ㆍ함경(咸鏡) 두 도로 말하면, 비직이 일찍이 답사하여 목도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 말하면,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가 높직이 하늘을 찌를 듯하며 도로가 험절(險絶)하여 통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영해(寧海)로부터 강원도의 평해(平海)ㆍ삼척(三陟)ㆍ강릉(江陵)ㆍ양양(襄陽)ㆍ통천(通川)을 거쳐 회양(淮陽)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행하는 길이 있으므로, 우리가 만약 설비하여 방어하면 적이 난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에 왜적이 이 도에 들어갔다가 그 험애(險隘)에 복병을 설치했을까 두려워서 크게 분탕질하여 위학(威虐)을 떨쳤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산골로 달아나 숨어서 감히 엿보지 못하였고, 그들도 곧 물러가 오래 웅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의 이천(伊川)은 황해도의 곡산(谷山)과 통할 수 있고, 함경도의 덕원(德原)ㆍ문천(文川)은 평안도의 양덕(陽德)ㆍ맹산(孟山)과 통할 수 있는데, 그 사이에는 굽이굽이 고갯길이어서 더욱더 험난하므로, 결코 행군할 지역이 못 됩니다. 비직이 들어 아는 것을 이와 같이 모두 개진합니다.

이곳 만 리 밖에 와서 상의할 곳 없이 감히 어림짐작으로 비슷한 형세를 상상하여 그린 것이라, 그 사이에 반드시 잘못된 곳이 많을 것이지만, 노야께서는 이를 바탕으로 그 대략을 파악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삼가 열람하십시오.”

하였다.

○29일 이날 대궐에서 들으니, 형 야(형개)가 상서에 승진되어 총독(總督)으로 임명되었다 한다.

○30일 제독이 관에 나와 개시(開市)하였다. 제독이 대청에 좌정하여 초황 등 물품을 저울질하는 것을 간검(看檢)하고 소지(小紙)에다 주필(朱筆)로, “상인 아무개[某]의 초(硝) 몇 근(斤), 황(黃) 몇 근, 궁면(弓面) 몇 부(副), 우근(牛筋) 몇 근, 합계 몇 상자[簍]를 징발함.”이라고 손수 써서 나에게 보내어 일일이 세어 보고 받게 한 뒤, 나에게 또, “조선 배신이 이제 상인 아무개의 초 몇 근, 황 몇 근, 궁면 몇 부, 우근 몇 근, 합계 몇 상자를 받음.”

이라고 써서 제독에게 보내게 하여 피차 각각 표문(票文)을 가지니, 상세하기 비할 데 없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 4월

○17일

일찍 출발하여 안교포(雁橋鋪)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삼하현(三河縣)에 투숙하였다. 어둑하여 이장이 뒤따라와서 말하기를, “병부 이 시랑이 말하기를, ‘회답 자문은 그대 배신(陪臣)이 선래 통관(先來通官)을 보낼 때 벌써 하였고, 다만 초ㆍ황 등의 개수자(開數咨 수목을 적은 자문)는 내가 마땅히 여기서 군문(軍門)에 보내어 그대 나라에 전달하도록 하겠으니, 그대는 마음 놓고 돌아가라.……’ 하므로, 제가 곧 그 뜻을 예부에 고했더니, 예부 주객사(主客司)에서 곧 초ㆍ황 개수소단(開數小單)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 5월

○2일 일찍 출발하여 전둔위에 이르니 양 어사(楊御史 양호(楊鎬))가 과연 주재(駐在)하였다.

뵈오려 하니, 중군(中軍)이 말하기를, “노야가 문을 닫고 열지 않으니 뵙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지가 사직을 준허하지 않아서 내일은 길을 떠나 요동으로 향할 것이니, 중도에서 뵈올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출발하여, 저녁에 사하역(沙河驛)에 투숙하였다.

○13일 일찍 출발하여 해주위(海州衛)에 이르러 묵었다.

주인 오종주(吾從周)는 감생(監生)으로 뽑힌 자다. 나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은(銀) 1만 5000냥을 풀어서 금(金)ㆍ문(汶)ㆍ해(海)ㆍ개(盖)의 4위(衛)에 흩어주어, 바야흐로 쌀과 콩을 널리 사들여 당신 나라 군량으로 삼습니다.”

한다. 내가 묻기를,

“은 한 냥으로 쌀이나 콩 몇 곡(斛)을 살 수 있소?”

하니, 대답하기를,

“쌀이나 콩이나 모두 2곡(斛)은 살 수 있습니다. 요동에서도 이와 같이 은을 풀어 사들인다 하니, 당신들은 가거든 탐문하십시오.”

한다. 내가 묻기를,

“언제쯤 운반하기 시작한답니까? 육로로 운반한답니까, 해로로 운반한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수매(收買)를 마치면 운반은 7월경에 할 것이며, 이곳은 해로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배로 운반할 것입니다.……”

하였다.

○17일 길에서 사은사(謝恩使)판서 윤승훈(尹承勳 1549-1611) 일행을 만났다. 고령(高嶺)을 넘어 또 군문의 재자관(賷咨官) 고경욱(高景昱)을 만났다. 스스로 위급을 고하러 간다고 말하면서, 지친 말을 타고 느릿느릿 가니 해괴스러웠다. 저녁에 초하(草河) 인가에 투숙하였다.

○20일 일찍 출발하여 오시(午時)에 도로 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행일기(김창업)  (0) 2018.07.13
연행록(최덕중)  (0) 2018.07.11
연행록(김정중)  (0) 2018.07.08
연행기사(이갑)  (0) 2018.06.09
연행기(서호수)  (0) 2018.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