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송와잡설(이기)

청담(靑潭) 2018. 7. 1. 20:37



송와잡설(松窩雜說)

이기(李墍) : (1522-1600)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가의(可依)이다. 호는 송와(松窩)이다. 장윤(長潤)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질(秩)이다. 아버지는 지란(之蘭)이며, 어머니는 원선(元璿)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했다.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장령(掌令 사헌부 정4품), 1567년 수찬(修撰 홍문관 정5품)을 역임한 뒤 전한(典翰)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직제학(정3품)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정3품)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종2품)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에 다시 양주목사(정3품)로 내려갔는데, 이 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경기감사가 조정에 보고했다. 1583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정3품)을 역임했다. 이어 장흥부사(정3품)를 거쳐 1591년에는 대사간(정3품)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화군 보(順和君)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5년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 해 대사간·대사헌(종2품)·동지중추부사를 차례로 역임한 뒤 이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1597년에 다시 지중추부사·대사헌·지돈녕부사·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정2품)를 역임했다. 이듬해 지돈녕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 1603년에 2품 이상 재신을 청백리로 뽑는데 녹선되었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데 말이 너무 말라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훗날 말이 피곤해 땅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대사헌의 말’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청빈하여 한사(寒士)나 다름없이 직책을 맡아보았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청백리로 벼슬을 높이는 출세에 큰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1571년에 정3품에 올랐는데 1596년에야 정2품에 오르니 별 과오가 없었는데도 무려 25년이나 결렸다. 이 송와잡설에는 오늘날 우리가 본받을 만한 아름다운 교훈이 될 내용이 참으로 많다. 존경할 만한 분인데 그리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다. 34세에 벼슬길에 올라 79세에 지돈녕부사로 죽었으니 참되고 복받은 삶을 누린 분이다.


송와잡설(松窩雜說)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운곡공(耘谷公 : 원천석)은 통제사(統制使) 최영(崔瑩)이 형(刑)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1

맑은 빛 묻히고 기둥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䫝

사방 백성 모두가 슬퍼하누나 / 四方民俗盡悲哀

빛난 공업 마침내 쓰러졌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이야 죽은들 사그라지랴 / ?爾忠誠死不灰

역사에 기록할 일 편질에 가득한데 / 紀事靑篇曾滿秩

가엾게도 황토더미 벌써 되었네 / 可矜黃壤巳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에서 / 相應杳杳重泉下

동문에 눈을 걸어도 분 못 풀리 / 掛眼東門憤未開

2

조정에 홀로 설 제 뉘 감히 간여하랴 / 獨立朝端誰敢干

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하였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使三韓社稷安

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 未亡邪侫骨猶寒

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세상 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 可笑時人用事奸

3

내 지금 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 위한 슬픔보다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의 비태도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 銛鋒已絶嗟何及

충성스러운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 忠膽常孤恨不支

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 白雲流水摠噫嘻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영월군(寧越郡)에 물러간 후에도 매양 아침이면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내려왔으나, 문틈으로 바라보고는 움찔하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날이 차츰 저물자 도사는 때를 늦추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두려워, 걸상 옆에 있는 하리(下吏)와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노산군이 앉은 후면(後面)의 창구멍을 통해, 긴 끈으로 당기도록 하였다. 끈이 모자라자 베띠를 이어서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 노산군(단종)이 영월에서 죽으니, 관(棺)과 염습(斂襲 시체에 옷 입히고 묶는 일)도 갖추지 않고 짚으로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며 말하기를,

“평소에 이름을 알고 지냈고, 보살핌을 받은 분의(分義)가 있노라.”

하고, 며칠을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다. 지금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이라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편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의 글로써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奸臣)이 지휘한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그 한스러움이야 어찌 다하랴? 혼은 지금도 의탁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터이니, 진실로 애달프다.

○목은(이색 : )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1389) 12월에 귀양을 당해,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에 부처(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淸州) 옥(獄)으로 왔으나, 수재로 인해 용서를 받고 다시 장단에 와서 있었다. 임신년 4월에 또 금양(衿陽)으로 귀양갔고, 6월에는 금양에서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벽사(甓寺)에서 거처하면서 ‘배를 띄워 노자암(鸕鷀巖)에 갔다.’는 등의 시가 있는데, 시는 이것이 끝이다.

혁명(革命)한 후에 조정에서 중형(重刑)으로 처치하려고 의논하였으나 태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여흥에서 장흥부(長興府) 남벽사역(南碧沙驛)으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산(韓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은 한 곳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을해년(1395, 태조 4) 가을에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해 11월에 태조가 친서(親書)로 여러번 부르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서 뵈었다.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친구간의 예로써 대우하면서,

“덕이 부족하고 식견(識見)이 어둡다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말씀 가르쳐주시길 바라오.”

하니 공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였으니, 다만 이 해골(骸骨)이나 고향 산천에 묻히기를 원할 뿐이오.”

하였다. 태조는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까지 걸어 나가서 서로 읍(揖)한 다음, 작별하였다.

병자년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變亂)에 하위지(河緯地)도 형을 당했다. 그 처자(妻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연좌법(連坐法)을 걸어 금부 도사를 보내서 처치하게 하였다.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하호(河琥)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고, 둘째 아들 하박(河珀)은 나이가 20이 못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도사(都事)를 돌아보며,

“도망할 리는 없으니, 형(刑)을 조금만 늦추어 주십시오. 부득이 모친과 영결(永訣)하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니, 박이 문으로 들어가서 모친 앞에 꿇어앉아,

“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자식으로서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自決)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적몰(籍沒)되어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의리로써는 죽을 때까지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것이니, 훗날 개돼지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두 번 절하고 나와서 조용하게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하위지는 훌륭한 자식도 두었다 하였다.

○교리 정붕(鄭鵬)은 선산인(善山人)이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수양하여, 그의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공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므로 비록 문안(問安)하는 예는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이 갈 때에는 반드시 숙마(熟麻 누인 삼 껍질)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었다.

한번은 공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의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 꾸어줄 것을 청하자, 유자광이 쾌히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교리가 지나치게 괴퍅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

하며,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서 옥같은 쌀밥을 보고, 얻어온 곳을 물으니, 부인은 사실대로 알렸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쓴 만큼을 채우고 본디 쌀과 합쳐서 돌려보냈다. 그가 궁핍(窮乏)하여도 절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공이 장성하자 부친이 도적의 손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홍유손(洪裕孫)과 친교를 맺고 여러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姓名)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하루는 그 아전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오다가 중간에 인가(人家)에서 묵었다. 공은 그때에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타서 도끼를 가지고 그 사람이 유숙하는 곳으로 걸어서 갔다. 홍유손을 시켜 불러내어 관청일로 서로 고해 주는 척하게 하고 공은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 다음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집과 동행하던 사람은 마침내 무슨 연고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였다.

○고령(高靈 고령은 고을 이름으로 봉호(封號))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성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하였다. 공은 말문이 막혀 몸둘 곳이 없는 듯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을해년 여름 노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일로, 진신(搢紳)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 판서 이세좌(李世佐)의 부인 모씨(某氏)는 모관(某官)의 딸이다. 성묘(成廟) 때에 폐비(廢妃)에게 죄를 주려 할 적에, 공이 대방 승지(代房丞旨)로 사약(死藥)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공이 집에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부인이 묻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폐비를 논죄(論罪)한다더니 필경 어찌 되었소?”

하니, 공은,

“벌써 사사(賜死)되었소.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애달퍼라,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려. 어미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으로서 훗날 보복하지 않겠소? 조정에서 세자(世子)를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후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에 공의 아들 이수정(李守貞)이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동쪽 저자[市]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에 폐비론(廢妃論)을 고집하던 벼슬아치의 자손들이 남김없이 모두 죽었고, 나라도 거의 망할 뻔하였다. 부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실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판서 이자(李耔)는 자(字) 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거사(陰崖居士)이며, 우리 한산이 본관이다. 문장이 능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엄숙하고 충직(忠直)하여 당시 사람들이 뜻을 크게 펼칠 것을 기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는 인아(姻婭 동서)의 친분이 있고, 또 주계군(朱溪君 이름은 심원(深源))에게 함께 배웠다. 그러나 평생에 하는 짓은 향초와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였다. 그리하여 김안로는 매양 공을 해칠 뜻이 있었으나 공이 올바른 도를 지키므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31)에 여러 현인이 내침과 죽음을 당하던 날에 공도 또한 파직되고 내침을 당해, 용궁현(龍宮縣)에 살고 있었다.

그후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휴가를 받고, 함창(咸昌) 지역에 와서 성묘를 하면서, 먼저 공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가는 길에는 옛 벗을 찾겠노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실상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그의 심사를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온다는 날 아침에 홰나무 꽃물로 낯을 씻고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서로 대면하였다. 김안로는 공의 손을 잡고서 지극히 다정하게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음애공(陰崖公)이 죽게 되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군자(君子)가 소인을 대할 때에 가끔은 스스로를 숨겨서 화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도이다.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2백 년이다.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이 백성을 편케 하고 은덕으로 보살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살육(殺戮)을 하였지만, 중종과 명종이 정사를 거듭 밝혀, 너그럽게 돌보았다. 대단한 병란으로 인한 참혹함도 없었고, 9년 홍수(洪水)와 7년 대한(大旱)같은 재앙도 없이, 금상(今上 현재 임금 즉 선조) 때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백성은 번거로운 부역(賦役)에 곤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야(田野)는 개척(開拓)되고 일정한 살림이 있었고 숫자도 많아지고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염집 필부(匹夫)까지 호사하기를 숭상하여, 오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힘을 썼다.

물(物)이 성했다가 쇠하여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상례이다. 수십 년 이래로 역질(疫疾)이 유행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고, 기축년 옥사에 죄를 얽어 만들어서 3년을 끌며 끝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왜노가 온 나라 군사를 몰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거의 다 죽였고, 간혹 남은 백성은 직업을 잃고 농지를 잃어 성안과 지방에 누워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있었다. 또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逆賊)이 있다는 고발이 있어, 그들은 비록 형(刑)을 받았으나, 서민(庶民)들도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

더구나 역질이 한창 성한 중에 학질(瘧疾 말라리아)이 횡행하는데, 고약한 비바람에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재앙이 잇달아서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이내 죽으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인들 그 어찌 며칠 안 되어서 다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본심인데, 어찌하여 진노(震怒)하기를 그만두지 않는가? 왜노를 불러들여 폭행을 하게 하고 악귀가 흉한 짓을 하도록 맡겨두어 죽이고 또 죽여서, 지금 와서는 더욱 심하게 하니, 인(仁)으로 덮어주고 하민(下民)을 불쌍하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 과연 이와 같은가? 옛 사람이 말하는 죽을 운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별도로 마땅한 사람 하나를 낳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청구(靑丘) 수천 리 지역에 다시는 인간이 없고 원귀(寃鬼)의 터로 변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움이 심하고 비운(否運)이 극도에 이르게 하여 인심이 허물을 후회하고 다스림을 생각하도록 한 다음에 다시 태평한 운수를 열어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진실로 알 수 없다.

○만력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에 들어왔다. 잇달아 변경 성(城)을 함락시키고, 별다른 저항을 받음도 없이 그대로 달려왔다. 이일(李鎰)의 군사는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신립(申砬)의 군사는 충주(忠州)에서 함몰되었다.

29일 저녁에 급보가 갑자기 왔다. 이튿날 새벽에, 대가(大駕)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동궁(東宮)ㆍ중전(中殿)ㆍ여러 빈(嬪)과 함께 비를 맞으며 허둥지둥 나섰다. 임진(臨津) 나루를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자고, 개성(開城)을 거쳐 다시 관서(關西)로 방향을 바꾸었다. 종실(宗室)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중도에서 도망쳐 흩어지고 대부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 심지어 첨지(僉知) 성세령(成世寧)ㆍ전 직장(前直長) 성세강(成世康)같은 자는, 사대부로서 또는 7품 녹봉(祿俸)을 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편하게 있다가 왜노에게 항복하였다. 성세령은 손녀(孫女)를 왜장에게 아내로 주어 귀염을 받아 그 덕에 온 동리가 편하였다. 종친 및 사족(士族) 등이 처음에는 모두 성문을 나서서 기내(畿內) 고을에서 난을 피하였으나, 성세령 형제가 평안 무사함을 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간 자도 또한 많았다. 삼의사(三醫司)와 각 관청의 서리(書吏)ㆍ전복(典僕) 및 잡색(雜色)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를 벌이고 물자를 교역(交易)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

더욱이 통분(痛憤)한 것은 대가(大駕)가 막 성문을 나섰고, 왜적은 채 입성(入城)하기도 전인데, 성안 사람이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내탕 부고(內帑府庫)에 있던 재물을 서로 탈취(奪取)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궁궐(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및 육부(六部), 크고 작은 관청에다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심사를 살펴보면 흉적(凶賊)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였으니, 매우 두렵다.

그후 중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섬멸(殲滅)되니, 왜적들은 저희들의 형세가 어려워짐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가려고 사방 성문을 모두 닫고, 오직 숭례문(崇禮門)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밤중에 분탕질하면서 성안의 늙은이 젊은이를 몰아다가 죽였으므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 요행으로 빠져나온 자는 도리어 말을 요사스럽게 꾸며서, 전일에 도성에 남고 떠나지 않은 것은 우리 군사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내응(內應)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다. 민정(民情)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그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 야인(野人 여진족)이 모든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간품(看品) 받는데, 변장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각 거둬들이는 것이 있으니, ‘상납(上納) 인정(人情)’이라는 명목이었다.

서울에 오게 되면 각 해조(該曹)와 정원의 하리(下吏)에게도 또한 다 인정물(人情物)이 있었다.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내가 나가서 양주 원 노릇을 하는데 나의 자식이 돌아가는 야인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면서 묻기를,

“네가 진상한 것이 얼마이며, 어떤 것을 상으로 얻었느냐?”

하니 야인은,

“우리가 진상한 담비 가죽이 극히 좋았으므로, 당초 생각으로는 관직(官職)을 얻게 될까 기대했었는데 다만 상으로 포(布)를 받고 돌아왔소.”

하였다.

“어찌하여 관직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인정 쓴 것이 모자랐던 까닭이오. 딴 사람은 다 주었는데 승지(承旨)에게는 주지 못한 까닭에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정원 하리를 지목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변장이란 자가 간품(看品)하면서 인정물을 직접 받았으므로, 저 사람들은 각 관청에 인정 쓰는 것은 모두 관원이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 우리 나라 인정 쓰는 폐단이 그 해가 먼 지방 사람에게도 미쳐, 욕된 말이 조정 근시(近侍)의 반열에까지 이르니, 애닯구나.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혀 극도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세 대장이 성씨가 다른 경대부(卿大夫)로서,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이 한 일을 행하여, 광포(狂暴)한 사람을 폐하고 성왕(聖王)을 세워서,중종 40년 동안의 태평한 치적을 이루어 사직에 공업(功業)을 세우고, 명성이 후세(後世)에까지 드리웠다. 세 사람 중에서도 성희안은 더욱 문신(文臣)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성희안은 연산군의 후궁(後宮)을 첩으로 삼아 데리고 살았다. 아! 임금이란 하늘이다. 하늘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섬기던 임금이라도 나라를 망치게 하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만 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일신으로는 만고에 불행한 변고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았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랴? 성희안이 성취한 공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 이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 따위라니. 저 따위라니.

○김안로(金安老)는 폐출(廢黜)되어 풍덕(豐德)에 살고 있었다. 민수천(閔壽千)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안로를 찾아보고,

“영공(令公)이 뛰어난 재주로써 연세도 아직 높지 않은데,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치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안로는 다가앉으면서 넌지시 말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어찌 없으리오. 다만 그 길을 얻지 못하였소.”

하니, 민수천은 말하기를,

“지금 세 허씨(許氏)와 두 심씨(沈氏)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이 끌어준다면 조정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는 허항(許沆)ㆍ허흡(許洽)ㆍ허확(許確)과 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을 말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세 허씨와 두 심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고 묻자,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김안로는 조정 논의가 지향(指向)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 그후부터는 남을 보면 반드시, 기묘 제현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간다면 어찌 이와 같이 어물어물 세월만 보내고 말겠는가?”

하였다. 허항 등이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뜻이 같으니, 김안로를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원하고 싶었지만 명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는 인종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동궁을 보도(輔導)한다는 핑계로 말을 만들어, 힘껏 성원하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전일에 한 말을 뒤집어 기묘 제현의 죄를 더욱 꾸며댔다. 허(許)와 심(沈) 등은 이미 그 당파에 들어가 도리어 김안로의 부리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혹은 매와 개[鷹犬] 노릇을 하고, 혹은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어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의 형세도 위태로워졌다. 다행히도 태평할 운수가 열려서, 간신(奸臣)이 죄를 입게 되어 세 허씨와 두 심씨도 혹은 내침을 당하고 혹은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민수천도 역시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형을 받았다. 소인(小人)이 틈을 타서 진출(進出)하기를 구하는 기미(機微)가 처음에는 아주 하찮은 일이었으나, 악인끼리 서로 결탁하여 돕는 화가 이 지경에 이르니, 매우 두려운 바이다.

○연산 무오년(1498)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죽였다. 그후에 연산군은 명문(名文)을 짓는 선비를 이미 잃었으니 이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에다가 유생(儒生)을 크게 모아 시험을 치러 뽑았는데, 전시(殿試)에 책문(策文) 한 가지만 짓게 하였다. 과차(科次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를 정하는 참인데, 한 시권(試券)은 말 꾸민 것이 졸렬하고 껄끄러워 집필관(執筆官)이 차등(次等 4등임)으로 정하려 하였다. 상고관(上考官)은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3등 중 셋째 등급)에 들 만하다 하였으나, 집필관이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관은 계속 우겼고 고시에 참여한 여러 관원은,

“만약 이런 것을 입격(入格)시키면 반드시 과방(科榜)에 오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불가하다.”

하여,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상고관이 삼하로 정하도록 강압하자, 집필관은 분이 나서 붓을 휘둘러 가로 세 획을 그은데다가 바로 획을 내리긋고 점을 찍은 다음 나가버리니, 실제로는 이하(二下 2등 중 셋째 급)가 되어버렸다. 고사(考査)하기를 마친 후에 등수를 갈라서 서계(書啓)하자, 연산군은 2등에다 낙점(落點)하였다. 훌륭한 문장과 뛰어난 글씨로 삼상(三上)에 입격한 자는 모두 떨어지게 되었고, 다만 김극성(金克成) 등 6인이 뽑혔다. 그릇 이하(二下)로 적힌 자는 횡성 훈도(橫城訓導) 오희증(吳希曾)의 글인데, 말등(末等)에라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니냐?

○선조 가정(稼亭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 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27세 때에 제과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논란이 있어 억울하게 이갑 제이인(二甲第二人)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목은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 과거에 오른 뒤에,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란 곳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그의 시에,

부자가 중국 과거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천하가 이 고을 이름 모두 알게 되었네 / 天下皆知此邑名

라는 것이 이것이다.

○원주(原州) 흥원참(興原站)은 왜노가 수로(水路)로 우리 나라에 왕래하는 곳으로, 참(站)에는 뱃사람 이일정(李一貞)과 사삿집 종[私奴] 원유공(元有功) 등이 있는데, 왜말을 잘 해서 왜인들과 서로 친하였다. 내가 이일정을 불러서,

“왜인이 쳐들어오는 이유를 너는 평소에 이미 알고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기축년(1589) 봄에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체직되어 떠나는데, 도사(都事) 안중길(安重吉)이 따라왔습니다. 감사는 배로 건너고 도사는 우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왜의 사신 평조연(平調淵)이 서울로 가면서 여기에 배를 대었습니다. 참정(站亭)에서 식사할 참인데, 반찬과 술과 안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하인을 결박하여 땅에 넘어뜨렸습니다. 도사가 이 소식을 듣고 향통사(鄕通事)를 잡아가니, 왜의 사신은 크게 성을 내며, ‘관원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먹는 것은 국가 회계(會計)에서 빼주는 물건이니, 도사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내가 정식대로 먹겠다는데, 도사는 자기일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업신여기오?’ 하며, 상을 밀치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와 원유공을 부른 다음, 칼을 휘둘러 옆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너희 나라에 잘못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만들고 칼을 주조하여 멀리 휩쓸어 버리려는 계획을 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다. 명년에 우리 국왕의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3~4년 이내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너희 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국왕의 사신이 나와서는 배와 사냥개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청구할 터인데, 이것은 모두 너희 나라 형편을 정탐하려는 것이다. 우리 나라 형벌은 너희 나라 태장(笞杖)과는 다르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곧 작은 환도(環刀)로 목을 자르고 쟁반에 담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므로 각자 힘껏 싸우니, 너희 나라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너희들은 만약 우리 군사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거든 우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착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다. 착한 자를 만난다면 숨어 피하게 하여 해치지 않겠지마는 악한 자를 만난다면 보는 대로 곧 죽일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위해 진심에서 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소인이 원유공과 함께, 비록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또한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말을 목사(牧使) 김찬광(金纘光)에게 알렸더니, 목사는 ‘너는 어찌해서 망령된 말을 하느냐? 저들이 비록 그런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꼭 온다는 것도 아니고, 비록 들어온다 하여도 어찌 우리 나라 군사를 당하겠느냐? 조심하고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해 왜국에서 사신이 나와 매와 사냥개를 청구하였고, 오가는 길에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가 많았습니다. 그 후 4년이 지난 임진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곳곳에 분탕질을 하였는데, 이들 중에 사람을 잘 죽이는 자도 있고, 죽이지 않는 자도 있어 평조연의 말과 꼭 같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를 속이지 않았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있고 또 번호(藩胡)도 있어, 조정에서는 예부터 방어(防禦)하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남북 병사(南北兵使)와 북도(北道)의 대소 수령(守令)은 모두 무부(武夫)를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예(例)였다. 더구나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草芥)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도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들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邑內)이기에 관사(官舍)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

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로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유학(儒學)과 예악(禮樂)을 아는 사람 및 기예(技藝)에 능한 온갖 공인(工人)들을 3천여 명이나 거느리고 왔다. 상(商) 나라 문물(文物)을 다 거둬 동쪽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처음 왔을 때는 미개해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아 땅에다 글자 써서 비로소 뜻을 통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보궤(簠簋)에 담아서 먹고, 변두(籩豆)에 담아서 제사(祭祀)지내도록 가르쳤으며, 살아있는자를 봉양(奉養)하게 하고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였으며, 남녀 혼인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의(仁義)의 교화(敎化)를 일으켜 도둑이 화하여 양민(良民)이 되고, 오랑캐가 변하여 중화(中華)가 되었다. 그가 실시하였던 정전(井田) 제도는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천여 년 동안에 동국 백성으로서 삼강 오륜(三綱五倫)을 알고 군신 부자(君臣父子)의 도리를 유지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됨을 면한 것은 모두 기자의 교화이니, 비록 집집마다 그의 신위(神位)를 만들어서 축원하고 제사하여도, 그의 덕을 갚기에는 오히려 모자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심과 풍속이 교활(巧猾)하여 교화시키기 어려운 곳으로는 반드시 호남(湖南)을 첫째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덕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니, 만약 덕으로써 인도한다면 어찌 변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남방(南方)에 보통 있는 물건을 보더라도 산야(山野) 채소의 맛과 개울의 물고기와 과수원의 과일 모양이 모두 동북(東北) 지방의 것과 같지 않으며, 새ㆍ까치의 울음, 닭ㆍ개의 소리가 모두 앙칼지고 급하며, 집에서 기르는 돼지도 붉은 빛이 많고 고양이의 얼룩도 모두 어두운 청색이거나 회색이며, 흑백 바탕에 금색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아주 없다. 도내(道內)가 모두 그러하니, 물색(物色)이 다른 지방과 다름이 이와 같으니, 매우 괴이하다.

○옛날 명왕(明王)은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지켜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고 능히 그 국가를 보존한 자는 있지 않았다. 한(漢)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같이 너그럽고 어진 임금으로서도 수천 학도(學徒)가 궐문(闕門)에 서서 슬프게 부르짖음에는 비록 애달파하였지만, 구양흡(歐陽歙)의 죄는 끝내 용서하지 않아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광무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唐)ㆍ송(宋) 여러 임금으로서 조금이라도 다스림의 도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조종(祖宗)의 세대는 조정이 맑고 밝아서 간사한 것이 행해지지 못하였었으니, 세종ㆍ성종 두 임금의 다스림은 후세에서 능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다음이지만 국가의 전장(典章)이 아직도 남았고, 공정한 논의도 없어지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로서 탐심이 많고 행실이 더러워서 남의 기롱을 당한 자는 모두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문(咨文)에 쓰는 종이 한 장이라도 개인적으로 쓴 자는 종신토록 누명(累名)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금법(禁法)이 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7년 이래로는 권력 잡은 간사한 자가 잇달아 기율이 없어지고, 재물을 탐내는 버릇이 나날이 성해져서, 공정한 논의에 의해 버림을 당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던 자가 교만스럽게 큰소리를 치며, 남들이 비웃고 욕을 해도 다시 부끄러워함이 없다. 다만 법대로 거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 그 본을 받고, 더욱 그릇된 곳으로 유인하니, 이러고서 민생이 곤란하지 않고 종사(宗社)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제왕(帝王)의 법이란 모두 인정(人情)에 근본하므로, 반드시 인정에서 근본하고 천리(天理)에 순응(順應)한 다음이라야 시행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고 후세에 나무랄 일이 없다. 우리 나라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貞節)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를 일체 금고(禁錮)하고, 개가(改嫁)하여 낳은 자식은 간음(姦淫)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그리고 고자[宦者]라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흉하고 더러워서 실상 인류(人類)가 아닌데, 아내를 두고 가정을 이루어 일반 사람과 똑같이 살고, 혹 아내가 행실을 삼가지 못하면 죄를 주니, 이것이 천리(天理)에 합당할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에 거스림이 이보다 더함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중국은 문명한 지역이다. 구주(九州) 밖의 사해 모퉁이에 있는 나라는 각각 호칭이 있으니, 남쪽을 만(蠻)이라 하는데, 만이란 벌레 같다는 것이고, 서쪽을 강(羌)이라 하는데, 강은 양[羊]과 같다는 것이고, 북쪽은 적(狄)이라 하는데, 적은 개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만은 이(夷)라 하는데 이는 궁(弓)에다 대(大)가 있는 것으로 이것은 큰 활이니, 활을 잘 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지역으로서, 민속(民俗)이 어질고 오래 사는데 ‘이적(夷狄)에 임금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고, 공자가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한 곳도 여기다. 또한 대살[竹箭]은 중국이 비록 넓다 하여도 오직 형주(荊州)의 형산(衡山)에서만 생산될 뿐 다른 고을에는 없는 까닭에, 중국 사람은 모두 나무로써 화살을 만든다. 우리 나라는 북방에서만 나지 않을 뿐이고, 각 도 모두에서 생산된다. 활이 억세고 화살이 날카로우며 사람이 날쌔고 말이 건장한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천하 군사를 일으켜 왔어도 능히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갔는데, 지금 왜적에게 패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은 활 재주가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아니고 다만 민심(民心)이 흩어져 배반한 지가 이미 오래였고 여러 장수가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서, 능히 진격하지 못해서이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기묘 연간에 수상(首相)으로 있었다. 중종이 재변(災變)으로 인해,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문의하니, 좌우에서 차례로 나아가서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었다. 한충(韓忠)이 나아가서,

“성상(聖上)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구하시나, 비루(鄙陋)한 사람이 감히 수상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이며, 다스림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물러나오자, 우상 신용개(申用漑)는 얼굴빛을 바꾸며 큰 소리로,

“신진의 사자(士子)가 면전에서 정승을 배척하니, 이 버릇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공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저어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들이 성내지 않을 줄 알고 이 말을 한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비록 권한다 해도 반드시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운 바가 없으니, 젊은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을 것이 아니오.”

하였다. 신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대신(大臣)의 도량이 있다 하였다.

정 문익공 당시에, 청류(淸流)들이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려 하였고, 삼사(三司)에서도 또한 청하였으나 공만은 옳지 못하다 하여,

“현량이라는 명목이 비록 좋으나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이후에 있어서는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 그후 여러 현인이 배척되고 죽음을 당하자, 그들이 시행하였던 좋은 정사도 일체 뒤엎게 되어, 온 조정에서 현량과도 없애도록 청하였는데, 공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였다. 중종이 공에게 이르기를,

“현량과를 처음 시행할 적에 온 조정이 모두 좋다 했는데 경만은 시행할 수 없다 하였소. 이제 없애려 하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데 경만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오. 어째서 경의 견해가 매양 여러 사람의 논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당초에 진실로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지금은 이미 과거를 설행하여 홍패(紅牌)를 주고 관직도 제수하였으니, 어찌 없앨 수 있습니까? 한번 시행하고 한번 없애는 데에 있어 국가 정령(政令)이 이와 같이 엎치락뒤치락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중종은 또 듣지 않았다. 공의 말이 비록 전후에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곧고 분명하여, 빼앗기 어려운 기개는 바로 옛날의 대신(大臣)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었다.

사재(思齋 김정국 1475-1541) 선생이 또 황모(黃某)에게 부친 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살림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그만 정지하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天命)에 순응(順應)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70살이면 상수(上壽)이니, 가령 나와 그대가 상수를 누린다 하여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인데,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고롭혀 가며 말 많은 자들의 욕을 먹는 것이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지(田地)를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옷을 입고서도 여벌 옷이 있고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을 편하게 지냈소.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 데에 여유가 있었소.

듣건대, 그대가 입고 먹고 잠자는 것이 나보다는 더 좋다 하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오?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1. 서적(書籍) 한 시렁 2.거문고 한 벌 3.벗 한 사람 4.신 한 켤레 5. 잠을 청할 베개 하나 6.바람 통할 창 하나 7.햇볕 쪼일 마루 하나 8.차 달일 화로 하나 9.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10.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이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나,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오. 늘그막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 외에 더 무엇을 구하겠소?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자연과 벗하는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오만, 몸을 빼낼 술책이 없으니, 어찌하오. 오직 나의 지기(知己)만은 알아주기 바라오.”

○우리 나라에서 과거로 사람을 뽑는 제도는, 삼국 때는 물을 필요도 없고, 고려도 5백년이나 오래된 나라여서 그 처음은 자세하게 알지 못하며, 중엽 이후 다만 3년만에 한 번씩 33인을 뽑는 외에 또 다른 과거는 없었다.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전조(前朝 고려)의 규칙에 의하여 식년(式年)에 33인을 시험해서 뽑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때그때 뽑으므로 당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여 처음부터 정해진 날짜가 없었다. 영묘(英廟 세종) 때에 이르러서 문학을 숭상하여, 비로소 학궁(學宮 성균관)에 거둥하여 제술(製述) 시험을 치르고 몇 사람을 뽑아, 홍패(紅牌)를 하사하였다. 이뒤부터는 드디어 특별 규정이 되어서 점점 성하게 되었고, 연산 및 중묘 때에 와서는 극도로 범람하였다. 명종조에 또 점수를 주고 과시(科試)에 나아가게 하여 그 점수를 통계하는 규칙이 있어, 혹은 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가게 하고, 또는 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였다.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별시(別試)ㆍ행학(幸學)ㆍ정시(庭試)라는 명목으로 혹 행사에 따라 거행하기도 하고, 혹은 예(例)를 들어 베풀었다. 봄ㆍ가을에 각각 거행하기도 하고, 한 달에 두 번 거행하기도 하며, 혹 해마다 특별히 베풀고, 혹은 한 해에 세 번이나 거행하기도 하였다. 사방에 알리지 않으며 많은 선비를 모으지도 않고, 오직 표문ㆍ전문(箋文) 두어 문구(文句)를 한정된 시간 안에 짓게 하는데, 이를 촉각(燭刻)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루 동안에 문득 높은 과거에 오르게 되니, 요행을 바라는 문이 활짝 열렸다. 선비들은 모두 분주하게 짧은 글귀를 뽑아 외워서 높은 벼슬을 도모하게 되어 3년만에 보이는, 경서에 통하고 글을 제술하던 대비(大比)의 법도가 점차 예전 같지 못하였다. 정시의 방을 낸 뒤에 보면, 모두가 벼슬아치의 나이 어린 자제이고 시골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한 무리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아! 지금 본다면 전조 때에는 과거가 매우 드물어, 어진 인재가 많이 빠졌을 터인데도, 유명한 공경(公卿)과 웅대(雄大)한 문필가가 모두 과거를 통해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 와서는 과거가 매우 잦았으니, 어진 인재가 무리지어 나올 듯한데, 재주가 빛나고 덕이 있는 선비는 거의 없으며, 여염집과 시골에 사는 사람으로 문채가 빛나서 등용(登用)할 만한 사람이 빠져 있는 탄식을 면치 못한다. 과거는 더욱 번거로우면서도 선비의 풍습이 더욱 경박해지고, 인재는 날이 갈수록 수준이 떨어지니, 진실로 한스럽다.

감찰(監察)은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서, 온 관료(官僚)를 규찰(糾察)한다. 그래서 자기의 처신(處身)이 반드시 검소한 다음이라야 남의 재물 탐내는 것과 분수에 넘치는 짓 하는 것을 책망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추한 옷을 입거나 더러운 얼굴을 한 사람과 둔(鈍)한 말에 망가진 안장을 한 사람과 짧은 모자, 해진 띠를 맨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전중인 줄을 알게 된다. 고려조에는 어떠했는지는 비록 상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1백 70여 년이란 오랜 기간, 아무리 귀족의 자제와 유명한 문사라도 전중이 되기만 하면, 그 복색(服色)은 예전 규칙을 그대로 지키고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명종 말년 무렵에 와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인심이 사치하여졌다. 더럽고 추한 것을 싫어하고 사치하기를 좋아하여 전중들까지도 모두 복색을 바꾸겠다고 청원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심의겸(沈義謙)ㆍ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南) 등이 당시의 논의를 가지고서, 드디어 그들의 소원에 따라 고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전중의 복색 제도가 시종(侍從)의 복색보다 몇 배나 더 화사하고 선명해졌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상대(霜臺 사헌부)의 옛 풍습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존양(存羊)의 뜻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아!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는 것은 국정 중에 큰 것인데, 위에 아뢰지도 않고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스스로 고쳐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권신(權臣)의 방자하며 꺼림 없음이 이와 같으니, 그들의 행위가 참으로 두렵도다.

양한적(養漢的)’이라는 명칭이 중국에서는 유행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다. 대개 중국의 양한적이라는 것은 특히 항산(恒山)ㆍ대산(岱山)의 옛 풍습에서 나온 것인데, 당초부터 금수같은 행실을 즐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길러주는 부모가 없고 의탁할 만한 친척이 없으므로, 추위와 굶주림에 부대끼다가, 서로 모여서 머리 빗고 화장하고 남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계책을 삼은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자가 본남편이 있고, 또한 높고 낮고 헐하고 중한 값이 있어, 남편이 허락하지 않거나, 값이 자기에게 적당하지 않으면 또한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오히려 저들이 우리보다 낫다. 우리 나라에는 비록 양한적이라는 명칭은 없으나, 음탕한 풍습은 크게 성하여, 길가에 있는 관창(官娼)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집의 여종과 여염집의 천한 계집으로서 음란한 짓을 일삼는 자는 값이 있건 없건 사람이 귀하건 천하건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취한 듯 미친 듯하여, 그 하간(河間)의 계집이 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다. 이것을 보면, 우리 나라의 음탕한 풍습이 중국보다 심하다 하겠다. 남의 윗사람이 되어 교화하는 권리를 잡은 자는 막아내는 대책을 세우는 데 태만해서야 되겠는가?

○양 남원(梁南原 남원은 지명으로, 양성지(梁誠之)의 봉호 남원군(南原君)을 가리킴)은 성묘(成廟) 때에 오랫동안 풍헌(風憲)을 맡았는데, 그는 돈을 밝히는 버릇이 있었고 꿋꿋하게 바른 말을 하는 절조가 없었다. 하루는 연석(宴席)에서 성종이 양성지에게 이르기를,

“경은 법관(法官)이 된 지 8년이나 되었으나 나를 향해 한번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매우 장하게 여기오.”

하였다. 성주가 한 마디 풍자로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뜻이 깊다.

○평양 영귀루(詠歸樓)는 남쪽 성 함구문(含毬門) 밖 10 리 되는 지점에 있는데, 지나가는 곳에 정전(井田)하였던 터가 있다. 밭두둑과 도랑이 분명하고 동서로 뻗친 이랑과 종횡(縱橫)으로 뚫렸던 길이 모두 곧고, 비스듬하지 않아 정전의 모습과 제도가 완연히 남아 있다. 길 북쪽에 있는 민가(民家) 담 밖에 우물이 있는데 기자정(箕子井)이라 한다. 입구는 작고, 가운데는 넓은데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때에 여덟 집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우물로서 없는 곳이 없었지만, 천 년을 지난 오늘날에, 어떤 것은 메워져도 쓸 수 없고, 어떤 것은 아직도 주민(住民)이 식수로 이용하고 있는데, 오직 이 우물만을 기자정이라 한것은,기자가 이 우물을 설치하던 날에 고국(故國)을 떠난 시름을 한번 씻어버리고 유민(遺民)에게 존모를 받음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내가 부(府)의 하리(下吏)에게 묻기를,

“정전 제도는, 도랑을 나누는 데 있어 반드시 크거나 작음이 없는데, 밭 모양이 어떤 것은 넓고 어떤 것은 좁은 것은 왜 그런가?”

하니, 하리는 대답하기를,

“때가 가고 해가 바뀌어서, 그 참모양이 점점 없어지는데, 더구나 경계를 수리하지 않아서 토호(土豪)가 침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에 간직된 문안(文案)에 기재된 결부(結負)의 경중(輕重)은 밭의 크기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농부는 같은데 밭이 작은 자는 지금 밭두둑이 침범되었다는 송사를 합니다.”

하였다.

○운곡공(耘谷公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다. 젊은 나이에 아내 상(喪)을 당했으나,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후취(後娶)를 하지 않고, 첩(妾)도 두지 않고서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도를 지키고 궁함을 견디는 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어미 잃은 아이들이 눈앞에 있어 / 失母兒童在眼前곤궁 속에 20여년 분수를 지켰네 / 困窮知分卄餘年시렁 위에 쌓아 둔 천 권 책을 의지했고 / 但憑架上堆千卷주머니에 일 전 없어도 운명에 맡겼네 / 也任囊中欠一錢늙기까지 새 살림 장만하지 못했는데 / 到老不成新活計죽게 되어 옛 인연 공연히 생각하네 / 殘生空憶舊寅緣혼인을 다 시켰으니 남은 한은 없어라 / 已終婚嫁無遺恨이제는 편안하게 구천을 향할 수 있으리 / 方得安然向九泉

공이 아내 상을 당했을 때는 37세였다.

○국상(國喪) 3년 안에는 풍악(風樂)을 그친다. 만약 왕후(王后)의 상이면 신하로서 기년복(朞年服)을 벗은 다음에도 풍악은 들을 수 있어도, 잔치하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임금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므로 신하의 정의(情義)로 감히 그러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지금 우리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상이 기년은 비록 지났으나 상제(祥制)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 경성에서, 밖으로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히 풍악을 울리지 못하였다. 내가 출발한 후에 각 고을에서 접대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록 해서(海西)와 기경(箕京 평양) 두 곳 방백의 간곡한 정으로도 오히려 색다른 것이 없었고, 상을 들 때나 술을 칠 때도 모두 작은 아이를 시켰다. 그러나 안흥관(安興館)에 도착하여 병사(兵使)와 고을 원과 만나 이야기하던 날 저녁에 비로소 기생이 있어 짤막한 노래로 술을 권하였다. 이 다음부터는 참(站)이 있는 곳에는 모두 여인(女人)이 나왔다. 신안(新安)에 이르니 노래와 북을 아울러 연주하였고, 용만(龍灣)에 이르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변경 지역이어서 풍교와 예법이 없고 풍속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너[爾汝니(너)여(너)]’란 것은 가볍게 여기는 호칭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또한 짐승으로서 부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은 인심이 순후하여, 내가 일찍이 사신으로 왕래하며 가는 길을 죽 보았으나, 감히 남에게 폭언(暴言)을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간사하고 완악하여, 예의(禮義)로 양보하기는 생각하지 않고, 거만하고 업신여기기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자기와 뜻이 맞지 않으면 문득 이 자식 저 자식이라 부르고, 혹 남의 어미와 아내를 들어서 꾸짖고 욕한다. 심지어 아이들과 심부름하는 졸개들은 보통 하는 말에도 더럽고 나쁜 말을 못하는 소리 없이 한다. 기명(器皿)을 나무랄 때도 반드시 ‘이놈의 그릇’이라 하고, 마소에게 성이 나도 반드시 ‘이놈의 말, 이놈의 소’라 한다. 버릇이 성품으로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예의의 풍속을 어찌 볼 수 있겠느냐? 내가 일찍이 선배에게 들으니, ‘이런 부끄럽고 나쁜 말이 조종조에는 전혀 없었는데, 연산군 말년과 정릉(靖陵 중종) 초년에 호남의 영광(靈光)ㆍ만경(萬頃) 지방에서 처음 나와서 사방으로 전해졌다.’ 한다.

○조종 때에 궁중 아기씨[阿只氏]가 피접(避接) 나가는 곳은 반드시 종실(宗室)이나 혹은 외족(外族)의 집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군(君) 및 옹주(翁主) 등이 피접하는 일을 여염 사람은 전연 몰랐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는 궁중각씨와 별감(別監) 등이 농간을 부려서 ‘아무 방위, 아무 지역이 가장 좋으니 아무날 아무 시에 아무 집으로 가는 것이 좋다.’ 하고 갑자기 사족(士族)의 집에 와서 바깥 문에다 표를 붙이고 그날로 당장 비우라고 독촉을 한다. 주인집은 당황하여 살림살이 할 것도 제대로 거두어 간수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리고 간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도 많았다. 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혹은 수십 일만에, 혹은 반 달만에 문득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긴다. 이리하여 시끄럽게 구는 폐단으로 원망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성상(聖上)께서 알지 못하니, 한스럽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고려 말기에 적성 훈도(積城訓導)로 있었다. 적성에서 송경(松京)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노옹(老翁)을 만났다. 노옹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이끌고 밭을 갈다가 방금 쟁기를 벗기고 숲 밑에서 쉬던 참이었다. 공도 또한 그 곁에서 말을 쉬이고, 노옹과 서로 말하게 되었다. 공은,

“노옹의 두 마리 소가 모두 살지고 크며 건장합니다. 밭 가는 힘에는 우열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옹은 옆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낮은 말소리로,

“어떤 색 소가 낫고 어떤 색 소가 못하오.”

라고 말하였다. 공이,

“노옹은 어찌 소를 두려워하여 이같이 가만히 말하오.”

하니, 노옹은,

“그대가 나이 젊어서 들은 것이 없음이 심하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사람의 말의 좋고 나쁜 것은 모두 알아듣는다. 만약 제가 못나서 남만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에 불평스러운 것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나? 그대가 나이가 젊어서 들은 것이 없구려!”

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공의 평생에 겸후(謙厚)한 도량은 이 노옹의 한 마디 말에서 얻은 것이었다. 고려가 망하려 하자, 군자(君子)로서 숨어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노옹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 익성공(황희)이 영묘(英廟 세종)가 좋은 정사를 하는 때를 만나서 예법을 마련하고 악(樂)을 지으며, 큰일을 논하고 큰 논의를 결단하였다. 날마다 임금을 돕는 것만 생각하였고 집안 대소사는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 간에 서로 싸워서 한동안 떠들썩하였다. 한 계집종이 공의 앞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아무 계집이 나와 서로 싸웠는데 이렇게 극악하게 저를 해쳤습니다.”

하고 아뢰니 공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 계집종이 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꼭 같이 호소 하였다. 공은 또,

“네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의 조카가 공의 옆에 있다가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나서며,

“아저씨는 몹시 흐리멍텅합니다. 한 사람은 저렇고 한 사람은 이와 같으니,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릅니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심합니다.”

하니 공은,

“너의 말도 또한 옳다.”

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고 끝내 분변하는 말이 없었다.

○상공 이극배(李克培)는 어진 덕과 깨끗한 명망이 당시에 높았다. 그의 아우 이극돈(李克墩)도 또한 재상 반열에 있었는데, 재물을 탐낸다는 것으로써 꽤 나무람을 받았다. 하루는 이극돈이 공에게,

“언제가 저의 생일입니다. 집사람이 간략한 술자리를 베풀고자 하니, 잠깐 왕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므로, 공이 허락하였다. 그날이 되어 공이 정부(政府)에서 바로 아우의 집으로 갔다. 바깥 문간에 들어가다가 새로운 숙마(熟麻) 새끼줄이 처마밑에서 담 위에까지 뻗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은 물러서면서, ‘이 새끼줄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누구에게서 얻은 것인가?’ 물었다. 이극돈은 숨기지 못하고, 바른대로 고하여,

“사복시(司僕寺) 관원 중에 서로 아는 자가 있어 빨래하는 데에 쓰라고 보내 왔습니다.”

하였다. 공은 성을 내며 말하기를,

“사복시의 새끼는 사복시의 말을 매는 데 써야지 어찌해서 너의 뜰에 걸려 있느냐?”

하고, 드디어 초헌을 타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그의 엄한 가법(家法)은 두려워할 만하다. 조종조 재상이 이와 같았으니, 백성이 어찌 부유하지 않겠으며, 나라의 창고가 어찌 가득하지 않겠는가?

○ 고려 때 무과의 제도는 비록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 나라 식년(式年)의 규칙은, 인ㆍ신ㆍ사ㆍ해년(寅申巳亥年)에 문과(文科)와 함께 서울 및 각도에 초시(初試)를 실행한다. 각도에는 정해진 수효가 있고, 과거본 사람이 맞힌 화살의 많고 적은 수효에 따라서 방(榜)을 낸다. 다음 자ㆍ오ㆍ묘ㆍ유년(子午卯酉年)에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에다 모아서, 육량전(六兩箭)ㆍ편전(片箭)을 쏘게 하고, 말타기와 창쏘기에 합격한 다음에 《장감박의(將鑑博議)》나 무경(武經) 중에서 하나, 사서(四書) 중에서 하나와 대전(大典)을 강하게 한다. 그리하여 조통(粗通) 이상을 맞힌 사람을, 맞힌 화살의 수효와 강서(講書)한 점수를 합계하여 높고 낮은 등수를 분간하며 다만 28인을 뽑는 것을 회시(會試)라 한다. 또 회시한 사람의 재주를 임금이 직접 시험하고 그 좌차(座次)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 한다.

광묘(光廟 세조)가 즉위한 지 6년 되는 경진년(1460)에는 사방을 순행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무과를 시행하였다. 초시를 하지 않고 규정에 제한도 없이, 맞힌 화살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뽑았는데, 1년 동안에 뽑은 사람을 통계하면 1천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도 무사(武士)로서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활을 당기지 못하는 자를 ‘경진년 무과’라 한다. 이후부터는 무과도 또한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성묘ㆍ중묘 때는 별과의 규칙이 반드시 육량전(六兩箭)을 말을 타고 20보 밖에서 쏘게 하여 네 번 맞혀야 하고, 강(講)도 조통(粗通)한 다음이라야 방(榜)에 올랐다. 그런 까닭에, 뽑힌 무사는 모두 헌걸차서 쓸 만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계미년(1583, 선조 16)에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변경(邊境)에 들어와서 성을 함락시켰던 그때, 이이(李珥)가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 나가게 하는 계책을 건의(建議)하여 드디어 특별 과거를 설행하여 무사 6백여 명을 뽑았으며, 그 후 해마다 뽑는 것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조종조부터 내려온 과거 규칙은 이때에 와서 씻은 듯이 없어져서 온갖 소임과 여러 군사로서 조금이라도 활을 집을 줄 아는 자는 모두 방에 올랐다. 그러나 왕궁을 시위(侍衛)하는 갑사(甲士)와 별시위(別侍衛)ㆍ정로위(定虜衛)의 무리와 외방 여러 진(鎭)에 기병(騎兵)ㆍ보병과 수군(水軍)을 새로 뽑는 데에는 수효가 많이 부족하였다.

○임진년 왜란 때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후 관서(關西)와 황해도에는 해마다 무과를 실시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동궁(東宮)이 주재하던 전주(全州)의 무군소(撫軍所)와 영남(嶺南)의 도원수부(都元帥府)와 각도에서 뽑은 것도 매우 많았다. 계사년에 대가가 도성에 돌아온 뒤부터 정유년까지 5년 동안에 여러 차례 대과[大擧]를 실시하였는데, 강서(講書)는 하지 않고 다만 화살 하나를 맞혀도 입격시켰으니, 명목은 과거라 하지만 실상은 군목(軍目)과 같았다. 신은방(新恩榜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의 방)을 발표하던 날에는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홍패(紅牌)를 잡고 미투리를 신고 걸어서 가는 자가 많았다. 왜란 이래로 앞서 출신(出身)한 자가 무려 수만 명인데, 그 중에는 한량(閑良)ㆍ사족(士族) 이외에, 서얼(庶孼)ㆍ공천(公賤)ㆍ사천(私賤)ㆍ백정(白丁) 따위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뽑은 사람이 많을수록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다. 용렬하고 어리석어 거의 모두가 활도 당기지 못하며, 글자 한자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이들로써 굳세고 사나운 적을 막고자 하였으니, 국사를 꾀하는 자가 생각지 못한 것이 심하도다.

○팔도하(八渡河) 북쪽에 답동(沓洞)이 있다. 내가 전에, ‘중국에는 산도(山稻)만 있고 쌀[玉粒]이 없는 것은, 남방 구석진 곳 외에는 모두 대륙(大陸)이어서 높고 건조하며, 하수(河水)는 깊고 넓어서 관개(灌漑)할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이라.’ 하였다. 그후 강을 건너 지나가는 곳을 두루 살펴보니, 산세(山勢)가 빙 돌았고 물 흐름도 느려서, 물기 있고 기름진 땅이 많이 있었다. 고려 때에 이런 곳을 논으로 만들려고 하였다면 안 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또 답(沓)으로 동네 이름을 지어 지금까지 그러한데도 오히려 논이 없는 것은 갈고 심으며 김매는 공력이 밭보다 백배나 더 들므로, 힘든 것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임금만이 옥식(玉食 하얀 쌀밥)하는 것이므로 서민(庶民)은 감히 참람히 할 수 없어서 심지도 못하여 그런 것인가? 이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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