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조천항해록(홍익한)

청담(靑潭) 2018. 7. 17. 22:38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

홍익한(1586-1637)


본관 남양(南陽). 자 백승(伯升). 호 화포(花浦)·운옹(雲翁). 초명 습(霫). 시호 충정(忠正). 진사 홍이성(洪以成)의 아들이고 큰아버지인 교위 홍대성(洪大成)에게 입양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알성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권세가의 아들이 아니라 하여 파방(罷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었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 사서(司書)를 거쳐 장령(掌令)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斥和論)을 폈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하니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선양(瀋陽)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해 적들이 감탄하여 ‘삼한삼두(三韓三斗)’의 비(碑)를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화포집(花浦集)》 《북행록(北行錄)》 《서정록(西征錄)》 등이 있다.



■조천항해록 제1권

■조천항해록 서(朝天航海錄序)

명(明) 나라 천계(天啓) 4년 갑자년(1624, 인조 2) 4월에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 권계(權啓 1574-1650)를 성절 겸 동지사(聖節兼冬至使)로 삼아 북경(北京)에 보낼 때, 나는 사헌부 감찰로서 서장관[下价]에 충원되었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7월

◯4일 아침에 정사(正使) 권계 및 역관(譯官)인 지사(知事) 이언화(李彦華), 동지(同知) 박선(朴璇), 상통사(上通事) 권탁(權濯), 사자관(寫字官) 유의립(劉義立), 압물관(押物官) 유성립(劉誠立) 등 20여 인이 출발했는데, 중도에서 비에 막혀 18일에 비로소 평양에 다다랐다. 나는 더위를 먹은 데다 설사까지 겹쳤으므로, 그곳에서 3일간 머물면서 조리하였다.

◯22일 오시(午時)에 역마의 급보(急報)가 왔으니, 이는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 채유후(蔡裕後)의 병세가 위중하므로 나를 그 후임에 옮긴 것이었다. 즉일로 병을 무릅쓰고 말에 올라 밤낮없이 북으로 달려 정주(定州)에 이르니 더욱 피곤했으나, 배를 탈 날짜가 촉박하므로 힘을 내어 병든 몸을 수레에 실었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8월

◯1일 평안도 사사포(□槎浦)에 다다랐다.

해람정(解纜亭)에 나가 정사와 부사를 만나 보고 시행할 일을 물으니, 3선(三船)의 곁꾼들이 태반이나 오지 않았고, 선박의 모든 기구 또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곧 차사원(差使員) 주진 첨사(主鎭僉使) 이택(李澤)에게 힐문하니, 감사에게 미룬다. 감사가 이미 선지(宣旨)를 받들었다면, 바다 건너 중국에 조회 가는 사행(使行)을 어찌 범연히 생각할 수 있는가? 이는 반드시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까닭이다.

◯4일 오늘은 뱃길을 떠나기로 택한 날이다.

내가 본포(本浦)에 당도한 지 3일이 지났으나 병세가 여전하여 하루 먹는 것이 두어 숟갈에 지나지 않았는데, 뱃사람들이 와서 관상감에서 가린 길일(吉日)이라고 고하므로, 부득이 병든 몸을 이끌고 묘시(卯時)에 정사 이덕형(李德浻 1566-1645), 부사 오숙(吳䎘 1592-1634)과 더불어 역관(譯官)인 지사(知事) 표정로(表廷老), 동지(同知) 전제우(全悌佑), 첨지(僉知) 진인남(秦仁男)과 이문학관(吏文學官) 이원형(李元亨)과 상통사(上通事) 황효성(黃孝誠)ㆍ박인후(朴仁厚)와 압물관(押物官) 현예상(玄禮祥)과 사자관(寫字官) 현득홍(玄得洪)과 건량장무(乾糧掌務) 임치룡(林致龍)ㆍ이응익(李應翼) 등 40여 인을 영솔하고 각기 배에 올랐다. 뱃사공들이 일시에 뱃노래를 부르며 돛을 올리니, 북과 화각(畫角) 소리 또한 매우 처량했다. 여러 고을 수령들과 대소 인원이 모두 포구에 나와 전송하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닻줄을 풀고 바다를 향해 점점 멀어져 가는데, 홀연히 수풀 사이에서 노래와 풍악 소리가 일어나 멀리 물가에 들려오니, 이는 여러 수령들이 풍악을 베풀어 원행(遠行)하는 사람의 회포를 위로하려 함이었다.

모든 배가 포구를 벗어나자마자 바람과 비가 크게 일므로 드디어 닻을 내리고 항구에서 유숙하였다.

◯5일 남쪽 해안을 멀리 바라보니, 한 백발 노인이 목 놓아 통곡하며 점점 가까이 온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의 아들이 곁꾼이 되었으므로 전송하러 왔다 한다. 만 리 바닷길에 부자간 이별을 슬퍼하는 정상은 차마 볼 수 없었다.

◯7일 맑음. 이른 아침에 정사와 함께 배에서 내려 바위에서 황효성(黃孝誠)을 시켜 모 독부(毛督府 철산 가도 모문룡 도독부 : 1576-1629)의 군문(軍門)에 가서 현관례(見官禮)를 행할 것을 청하니, 독부의 담당자가 날이 늦었다고 사절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행례(行禮)하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전일 귀국(貴國) 정부의 신문(申文) 가운데 노야(老爺)를 귀부(貴府)로 칭호했는데, 이것이 국왕의 문서라면 옳거니와, 정부의 배신(陪臣)으로서는 규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므로, 노야께서 매우 불만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하였다. 내가 정사에게 상의하기를,

“우리들이 주청(奏請)의 중대한 일로 장차 독부(督府)에 간청하려 하는데, 어찌 문서 간의 말을 가지고 다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정사가 옳게 여기므로 드디어 문서 가운데의 귀부를 노야로 고쳤다.

정오에 부사가 외양(外洋)으로부터 배를 이끌고 돌아와 말하기를, “어제 풍랑에 표류하여 위태로울 뻔하였는데, 다행히 탄도(炭島)에 정박하여 살아서 왔다.” 한다. 조금 후에 일엽편주가 둥둥 떠오니 곧 철산 부사(鐵山府使) 안자연(安子淵)이 사포(蛇浦)로부터 전송하러 온 것이었다. 가도의 후면 항구에서 유숙하였다.

※가도사건 : 1616년(광해군 8)에 건국한 후금은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1619년에 명나라의 요동지방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대륙에서 왕조 교체의 정세를 간파한 광해군은 평안도관찰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는 등 국경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하였다.

그러나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림에 따라 강홍립은 샤르후[富車] 싸움에서 후금에 투항하였다. 즉,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들어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는 양면외교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621년 후금이 요양(療養)을 공격하자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이 이에 쫓겨 국경을 넘어와 철산(鐵山)과 선천(宣川) 사이에 주둔하였다. 이에 그 해 12월에 후금군이 강을 건너와 명군을 습격하는 등 우리측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듬 해 모문룡에게 해도(海島)로 옮길 것을 종용, 마침내 철산의 남쪽 70리에 있는 가도(일명 皮島)에 진을 옮기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명나라는 후일을 도모하고자 가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으며 명칭도 동강진(東江鎭)이라 칭하였다. 1637년에 가서야 조청연합군이 가도를 되찾았다.

◯8일 여명(黎明)에 상사, 부사와 함께 독부의 아문(衙門)에 나아가 현관례를 행하고 예단(禮單)을 올린 후, 이어서 주상(主上)의 뜻을 전달하니, 도독(都督)은 희색이 만면해져서는 곧 주상의 안후를 물었다. 표정로(表廷老)를 시켜 주청문(奏請文)의 내용을 상세히 전달하고 주본 올리는 일에 대하여 간청하니, 도독이 서슴지 않고 쾌히 승낙하기를, “나의 의향도 이미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배신(陪臣)이 간청함에 있어서랴.” 하였다. 차를 마신 후 아문 밖 막차(幕次)에 물러가 있으니, 도독이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사례하고 또 회례(回禮)를 행하겠다고 요청하므로, 사처가 누추하여 왕림할 수 없다고 칭탁하고 재삼 사절하였다.

◯11일 오경(五更) 초에 깃발을 움직이며 동풍이 불어오니, 사공들이 소리치며 일시에 돛을 달고 배를 띄웠다. 그때에 부선 비장(副船裨將) 유경우(柳敬友)가 선두에 앞지를 뜻이 있어 가만히 닻줄을 거두고 몰래 지나가려 하다가, 우리 뱃줄에 잘못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겨우 벗어나니 우스웠다. 새벽이 되자 순풍은 물을 차고 사공은 힘을 합하여 곧장 큰 바다로 향했다. 물결은 비단을 편 듯하고 배는 화살같이 달려 순식간에 천 리를 가매, 사방을 돌아보니 가이없었다. 가끔 외로운 섬이 여기저기에 나타났으니, 거우도(車牛島), 죽도(竹島), 대장자도(大獐子島), 소장자도(小獐子島), 신도(薪島)가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우리나라 강토가 아니었다. 우리 배가 가장 빨라 여러 배들이 모두 뒤처졌다. 미시(未時)에서 신시(申時) 사이에 홀로 녹도(鹿島)를 지나자 바람이 점점 누그러지므로 황골도(黃鶻島) 앞바다에 다다라 정박하였다. 이날은 600여 리를 갔다.

◯12일 이날은 500여 리를 갔다. 아! 땅 한 조각 없는 만여 리의 하늘과 연닿은 망망한 바다에서 오직 일엽편주에 목숨을 붙이고 가는데, 하루 사이에도 비 혹은 바람으로 편안하다가도 갑자기 위태하여 복몰(覆沒)에 이르는 일이 십중팔구이니, 진실로 천명(天命)을 아는 군자가 아니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마음이 성(誠)과 경(敬)에 있다는 옛사람의 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15일 아침 먹은 후에 과연 동남풍이 불어오므로 곧 뱃길을 떠나 광록도(廣鹿島)로 향하였는데, 겨우 중도에 이르러 또 역풍이 일므로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광록도 앞바다에 들어가 정박하였다. 이날은 300여 리를 갔다.

◯17일 사공들의 말이 느지막하게 큰바람이 일어날 것이라 하므로, 뱃줄을 끌고 깊숙이 들어가 해안에 배를 매었다.

양일의 풍랑에 각 배의 사람들이 구토 설사로 신음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상사와 부사가 더욱 심하여 식음을 전폐하였으므로 섬으로 옮겨 셋방을 빌려 조섭하였다. 집집마다 모두 협루(狹陋)하고 비린내가 코를 찔러 구역이 날 지경이었다. 대개 가달(假㺚)이 근자에 요동으로부터 돌아왔는데, 머리를 모두 깎아 죄수와 같고 머리털이 헝클어져 그 누추한 모습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나는 홀로 선비 이암(李嵓)의 집을 빌려 머물렀는데, 환경이 자못 깨끗하였다. 시 한 수를 써서 증정하였다.

한 가달이 와서 말하기를, “오랑캐의 추장(酋長)이 금년 가을부터 삼차하(三叉河)의 동쪽 언덕에 토담[土墉]을 수축하는데, 높이와 너비가 각기 두어 길[丈]이나 되며, 백성을 혹독하게 부리매 사람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모두 도망할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나 또한 가족의 애정(愛情)을 끊고 밤중에 처자가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빠져 나와 이곳에 온 지 겨우 수일이 되었는데 가슴을 에어 내는 듯합니다.” 하고는, 쉴새없이 눈물을 흘린다. 오랑캐의 포학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인심이 모두 흩어졌으니, 하늘이 반드시 정도(正道)로 돌아와 오랑캐의 운수가 끝장날 것이다.

◯20일 여러 선박이 돛을 달고 출발하니 나는 듯이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수백 리를 달려 아무리 눈여겨 살펴보아도 아득하여 찾아볼 길이 없었다. 오직 우리 배는 언덕 위에 높이 매놓아, 조수가 느지막하게 오르므로 배 밑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다가, 조수가 선복(船腹)에까지 차자 비로소 떠오르게 되었다. 급히 돛을 달고 포구를 빠져 나가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 삼산(三山)이 홀연히 뒤로 가고 평도(平島)가 앞에 나타났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물새가 집을 찾아들 무렵에 여러 선박에 함께 정박했다.

이날은 600여 리를 갔다. 저녁에 당선 수십 척이 가도에서 우리 배를 뒤따라왔다.

◯22일 빠른 물결과 거센 바람이 배를 보내 주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섬이 잠깐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로 물러가서, 무릇 경과한 바를 눈여겨볼 겨를조차 없었다. 광록도(廣鹿島)를 지난 후부터는 바다 빛이 붉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며 검푸르기도 하고 짙푸르기도 하므로 뱃사람을 시켜 100여 자쯤 되는 줄로 시험해 보았으나 끝내 측량할 수 없었다. 섬이 칼처럼 뾰족하기도 하고 쇠기둥처럼 깎아지른 듯하기도 하며 병풍처럼 둘러 있기도 하고 문처럼 마주 서 있기도 한데 교룡(蛟龍)은 춤을 추고 악어와 고래가 장난질하여 그 괴상한 모습은 참으로 각양각색이었다.

◯25일 모 독부(毛督府)의 운량차관(運糧差官) 양지응(楊之應)이 가도로 돌아가므로 그 편에 장계를 보냈다. 반송관(伴送官) 주종망(周宗望)이 가도에서 뒤쫓아와서 곧 명첩(名帖)을 통하고 안후를 물으니, 중국 사람의 신의 있고 극히 인후함을 알 수 있었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9월

◯1일 가도로 가는 한 상선(商船)이 있으므로 우리 일행이 등주(登州 산둥반도 펑라이시)에 머무른 것을 장계를 갖추어 부송하였다.

※바닷길 : 평북 철산군 가도에서 출발하여 동남풍을 받으며 라오뚱 반도 연안해로를 따라 가다가 산둥반도 등주로 가고 있다.

◯5일 주종망이 찾아와 문후하였다.

주종망은 양주(揚州) 사람이다. 남방의 수재(秀才)로서, 풍채가 아름답고 글을 잘하며 성품이 교만하고 자존심이 있었다. 이번에 모 독부(毛督府)의 차관(差官)으로서 우리 일행을 감호(監護)하게 되매, 엉뚱한 생각이 규례 밖에 나와 사행(使行)의 대소사를 모두 간섭하고 거조(擧措)가 괴망(怪妄)하므로, 역관 등을 시켜 요동(遼東)으로 통행하던 옛 규례를 말해 주니, 이에 실망하고 스스로 절제하였다. 상사와 부사가 주 중군이 보내 준 물품을 내게 나눠 주어 방한구(防寒具)를 마련하게 하므로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0일 하루저녁에는 예물을 보내는 일로써 상의하니 표정로의 말이, 군문 이하는 족히 예를 닦을 것이 없다 하므로, 내가 옳지 않다 하고 그 말을 꺾어 버렸다. 그런데 이때 와서 감합과 인부 및 마필에 관한 일은 모두 지현(知縣)의 손에서 거쳐 나오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부득이 예단과 명첩(名帖)을 보내고 현관례(見官禮)를 청하니, 동지(同知) 책동(翟棟)이 황효성 등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 배신(陪臣)이 어찌 감히 당돌하게 명첩을 보내느냐? 누가 너희에게 예단을 요구했더냐? 내가 중국의 사대부로서 어찌 외국 사람에게 뇌물을 받겠느냐? 또 명첩 가운데 ‘돈수배(頓首拜)’라는 말은 평교간(平交間)에 쓰는 말인데, 외국의 배신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이제 너희 나라가 임금 폐립(廢立)하기를 내기 바둑 두듯 하여 방자하기 짝이 없으니 기강(紀綱)이 어디 있느냐? 중국에서 의당 배척할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는 일찍이 예를 차리지 않았기 때문에 격노(激怒)한 것이었다. 황효성 등이 그렇지 않다는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니, 책동이 노기가 조금 풀려 안색이 누그러진 후 서서히 말하기를, “사변이 생긴 후에 산동(山東)의 역로(驛路)가 피폐하여 비록 중국 대관(大官)의 행차라도 인부와 마필을 준수(准數)대로 조발(調發)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제 너희 일행에 소용되는 말과 노새가 자그마치 100여 필이나 되니, 세 배신의 교부(轎夫)와 정관(正官)의 기마(騎馬) 및 방물 진공(進貢)하는 데 쓰는 마필 이외에는 조발해 줄 수 없다.” 하였다. 북경에 가는 사신이 긴요하지 않은 관원을 대동하고 온 것이 이에 이르러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느지막하여 연로(沿路)에 소요되는 인부와 마필 및 양곡의 표문을 받아 왔는데 그 수량이 아주 삭감되었으니, 이는 책동이 우리를 박대함이 아니라 사세가 그러하였다.

◯11일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는데 새로 차정된 반송관(伴送官) 왕운륭(王運隆)이 행장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핑계하고 하루이틀 더 기다려 행장을 꾸려 떠나자고 하였다. 내가 굳이 청하기를,

“우리들이 등주에 머무른 지 벌써 10여 일이 지나, 갈 길이 심히 급박하니 그대가 뒤떨어져 오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일행은 불가불 먼저 떠나야 하오.”

하니, 왕운륭이 부득히 응낙하고 돌아갔다. 황효성 등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요동으로 왕래할 때에는 서장관이 으레 말을 타고 북경에 다다랐으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전후의 서장관들이 옥교(屋轎)를 타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또 중국에서 비록 소관(小官)이라도 반드시 옥교를 타고 다니니, 중국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말을 타고 간소하게 가는 것이 창피스러울 듯합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이미 규례에 정해진 일이면 옥교를 탄다 하여 체모가 설 것도 없고 만을 탄다 하여 위의(威儀)가 손상될 것도 없다. 일은 순편한 것이 귀중하니, 일개 서장관이 말을 탄들 무엇이 해로우랴? 내 근력이 아직 강성하고 말 타는 데 익숙하며 또 옥교는 값이 많이 들고 노새는 적게 드니, 비싼 것을 사양하고 헐한 것을 취하는 것이 국비(國費)에도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다시 여러 말 하지 말고 좋은 노새를 구하라.”

하고, 이에 주방(廚房)의 은자 6냥을 내주어 빌려 오게 하였다.

◯24일 생원 이여두(李如杜)ㆍ이성룡(李成龍) 등 두 사람이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이 평소에 예의 바른 나라로 일컬어졌는데, 오랑캐가 요동을 점령한 후에 바닷길을 꺼려하지 않고 조공이 연속되니, 상국을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또 모 독부(毛督府)가 객군(客軍)으로서 가도(椵島)에 외로이 있는데 귀국이 적(賊)의 후방을 노리고 있음을 힘입어 오랑캐들이 오금을 못 쓰고 관외(關外)를 넘보지 못하니, 우리들이 지금까지 편안히 사는 것도 모두 귀국의 힘입니다. 이제 들으니, 귀국의 신왕(新王)이 현명하고 인철(仁哲)하여 예의를 돈독하게 하고 폐단을 제거하여 정사가 일신하다 하니, 명 나라가 원조를 믿고 회복할 것은 오직 귀국뿐입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어찌 사대(事大)의 분의를 알지 못하고 마침내 상국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전일 임진, 정유 양년에 강토가 거의 왜적에게 함몰되었다가 다행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소국을 사랑하여 구원해 주신 은혜를 입어 다시 나라가 회복됐으니, 지금까지 억조 창생이 모두 그 혜택을 잊지 못하고 보답할 길을 생각하거늘, 하물며 우리 주상이겠습니까? 다만 근래 우리나라가 흉년이 잦아 공사(公私)의 축적이 탕진되어 백성은 굶주리고 군사는 피폐하였는데, 모 독부에서 군량 수만 석을 요청하므로, 우리 임금이 이 때문에 밤낮으로 걱정되어 심력(心力)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니, 이여두 등이 재삼 찬탄하고 웃으며 작별하였다.

◯25일 수일 동안 지나온 전야(田野)에는 모두 목면화(木綿花)를 재배하여 흰 구름을 펴 놓은 듯 수백 리에 이어졌으며, 여염이 그들먹한데 태반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이었다. 전답 사이에 심겨진 무성한 수목은 모두 배, 밤, 감, 대추, 호두 등인데 줄이 반듯하여 원근이 한결같았으며, 과실이 익어 땅에 떨어졌으나 지나가는 아이들이 본체만체하고 1개도 주워 먹지 않으니, 중국의 염치를 숭상하는 풍습이 아이들에까지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7일 제남(濟南)에서 머물렀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10월

◯11일 맑음. 새벽에 옥하관(玉河館)을 청소하는 일로 먼저 진인남(秦仁男)을 북경[皇城]에 보내어 우리 일행이 12일 옥하관에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을 관부(館夫)에게 알리게 하였다.

느지막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길을 떠나 장점(長店)에 다다라 유숙하니, 북경까지의 거리가 북으로 40리가 된다 한다. 병세가 완쾌되었다. 저녁에 약간 눈이 내렸다.

◯21일 맑음. 소갑 서계인 등이 통보(通報)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오후에 동지사(冬至使)의 역관(譯官) 정몽삼(鄭夢參)ㆍ장경인(張敬仁)ㆍ현찬(玄燦)ㆍ김의성(金義城) 등이 와서 말하기를, “동지사 일행이 명일 옥하관(玉河館)에 당도합니다.” 하였다. 저녁에 소갑 등이 와서, 과관(科官)이 주본(奏本)을 초하여 보내는 데 인정(人情)으로 쓸 은자, 인삼 등 물품을 요구하였다.

◯28일 맑음. 동지사가 하반(賀班)에서 홍의(紅衣)를 입는 일로 정문(呈文)을 올렸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날 과관(科官)이 비로소 주본을 초하여 예부(禮部)에 보내왔다. 당초예과 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 유무(劉懋)가 조정에서 역설하기를,

“지난해에 조선의 책례(冊禮)를 준허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제공(諸公)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오? 조선이 힘을 다하여 오랑캐를 평정하여야 책봉을 준허하기로 조정의 의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쉽사리 준허할 수는 없소.”

하고, 우급사중(右給事中) 고기인(顧其仁)이 말하기를,

“불가하오. 조선이 상국을 섬겨 온 지 200여 년 동안 열성(列聖)의 고명(誥命)이 일정한 법칙이 있었는데, 이제 도리어 지체하면 이는 규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배신(陪臣)이 만 리 바닷길을 건너 두 차례나 와서 청하는데, 이제 만약 준허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또 오게 될 것이니, 이는 천조(天朝)에서 소방(小邦)을 대우하는 도리가 형식뿐인 것이며, 요동을 평정하는 일에도 방해되는 점이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하고 재삼 역설하니, 여러 관원들이 모두 고기인의 말이 옳다 하여 즉일로 초(抄)하여 보내온 것이다.

◯29일 맑음. 느지막하여 천자(희종 1620-1627)가 황극문(皇極門)에 나와 북을 울리니, 대조 천관(大朝千官)이 입시하였다.

이에 이부 좌시랑(吏部左侍郞) 진우정(陳于廷), 우첨 도어사(右僉都御史) 좌광두(左光斗), 좌부도어사(左部都御史) 양연(楊漣)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서인(庶人)으로 삼아 그날로 백의(白衣) 차림에 관(冠)을 벗기고 성 밖으로 쫓아내니, 도성 사람들이 팔뚝을 부둥켜쥐고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세 사람은 위충현이 국권을 농단하는 것을 극력 논박하여 이리 된 것이다. 그들이 아뢴 상소는 양연이 지은 것으로서, 글자마다 간담(肝膽)을 에는 혈성(血誠)이 어렸으니, 참으로 나라를 구제하는 약석(藥石)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귀에 거슬림을 싫어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비방하는 요언(妖言)이라 하여 형벌하고 배척하였으니, 소인에게 정사를 맡겨 간사한 꾀를 자행(恣行)하여 바른말 하는 자를 쫓아 버리고서 나라가 나라꼴이 된 적은 있지 않았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11월

◯7일 맑음. 제독 이기기가 요청하기를, “먼저 보내온 예단의 인삼은 좋지 않으니, 호품(好品)으로 바꾸어 주오.” 하였다. 또 서관(書館)의 예단 인삼이 동관(東館)보다 수량이 적다 하여 소갑 서상(徐祥)을 곤장으로 다스리고 이어 반송관(伴送官)을 핍박하여 염출(捻出)하게 하였으니, 서관의 예단을 이등삼(二等蔘)으로 보낸 데 노한 때문이었다.

◯15일 맑음. 세월은 흘러가고 사세(事勢)는 점점 요원하므로, 황효성 등을 불러 그 연유를 묻고 지연됨을 책망하였다.

그것은 대개 명(明) 나라 조정에 탐재(貪財)의 풍습이 크게 번져 공경 대부(公卿大夫)와 대소 관리들이 모두 이욕으로 판을 차리고 정치를 뇌물로써 이루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신(陪臣)을 만나면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기회를 만났다고 여겨 침을 흘리고, 날마다 패자(牌子)와 소갑 등을 시켜 은자, 인삼, 수달피, 호피(虎皮), 지물(紙物), 저포(苧布) 등 물품을 요청하는 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아, 아침에 겨우 요청을 들어주면 저녁에 또다시 그렇게 하였다. 때로는 소매 속의 단자(單子)를 연달아 요구하여 말하기를, “지난해 주청사(奏請使)가 왔을 때에는 모관(某官) 앞으로 은자와 인삼이 얼마요 모종(某種) 물품이 얼마며, 또 모관 앞으로 은자와 인삼이 얼마요 모종 물품이 얼마가 되었다.” 하며, 만단으로 토색하여 만족하지 않으면 그치질 않았다. 저들의 생각에는 만약 일이 속히 완결되면 뇌물의 길이 끊어지므로, 시일(時日)을 오래 끌고 문자를 수정하여 물품을 한껏 우려내어 반드시 지난해의 수효를 채운 후에 완결지으려는 속셈이니, 아! 한도가 있는 물건으로써 밑 없는 구멍을 메우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대개 지난해의 주문(奏聞)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저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주다 보니 이익을 넘보는 길을 터놓아 마침내 재물을 낚는 계기(契機)를 만든 것이다. 심지어는 예단 보내는 것을 채권문서(債券文書) 다루듯 하여 여러 번 싸고 깊숙이 간직하는 것이 준례가 되고 점차 조등(刁蹬 고의로 남을 어렵게 함)해져서 이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국이 예로부터 명교(名敎)를 숭상하여 예의염치의 연원(淵源)이 되어 왔는데, 이제 이처럼 극도에 다다랐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소국(小國)의 배신(陪臣)이라 하여 오랑캐와 같이 취급하고 업신여겨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더욱 통분할 일이다.

◯23일 모문룡이 주본(奏本)을 올려,

“오늘날이 어떠한 때입니까? 속국(屬國)의 강상(綱常)이 정착되지 않고 오랑캐의 형세가 만만치 않으니, 저 오랑캐가 어찌 잠시인들 산해관(山海關) 밖에서 움츠리고 있으려 하겠습니까? 다만 소신(小臣)이 그 목을 겨누고 배후(背後)를 찔러 땅을 조선에 빌리고 요동을 기습하려 하므로, 적이 나아가면 승산이 없고 물러가면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소굴에 도사리고 있어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모 도독이 우리나라에 중점을 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년 천계(天啓) 4년 (1624, 인조 2) 12월

◯2일 흐리고 바람. 광록시(光祿寺)에서 하정을 보내왔다.

이른 아침에 제독이 사관으로 찾아왔으므로, 우리들이 나아가 만나 보고 말하기를,

“봉전(封典)에 관한 일은 이미 내각의 비준(批准)을 얻었으나 해부(該部)에서 아직도 복제를 끌고 있으며 또 문을 단속함이 엄중하니, 노야의 표첩(票帖)을 얻어 문을 나가 대당(大堂)에게 정문을 올리려 합니다.”

하였다. 제독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임의로 내각에 정문을 올렸으므로 대당이 노하여 특별히 표문(票文)을 내려 출입을 금지했으니 나도 또한 어찌할 수 없소.”

하기에,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마침내 말라 죽을 뿐입니다. 만 리 바닷길을 건너와 깊은 사관에 갇혀 나랏일은 하루가 급한데 소청을 토로할 길이 없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대당이 관문을 폐쇄한 것은 나 또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소. 그대들이 정성을 다하여 정문을 지어 오면 내가 그 글을 가지고 대당에게 조용히 말을 올려 보겠소. 그 노여움이 풀린 후에야 일이 이루어질 것이오.”

한다. 우리들이 또 고하기를,

“우리나라의 흥망(興亡)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데 노야께서는 어찌 힘을 다하여 은덕을 베풀려 하지 않습니까?”

하니, 제독이 대답하기를,

귀국뿐만 아니라 천조(天朝)의 성쇠도 또한 달려 있으니, 어찌 힘을 쓰지 않겠소. 다만 대당이 노염이 풀리지 않았으니, 서서히 도모함이 옳겠소.”

하였다.

◯6일 맑음. 우리들이 정문 한 통(通)을 지어 올리니, 제독이 보고 잘 지었다고 찬탄하며 소매에 넣고 가서 여러 낭중과 일제히 역설하기를, “조선의 고명(誥命)은 속히 완결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정문을 보니 사연이 간절하여 참으로 측은합니다. 원컨대 노야는 널리 양해하소서.” 하니, 상서가 정문을 자세히 보고 처연(悽然)히 감동하여 곧 주객사(主客司) 주응기(周應期)를 불러 복제를 기초(起草)하게 하였다. 제독이 예부로부터 곧장 사관에 와서 그 전말을 말해 주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선해 준 것은 뇌물을 후하게 주어 은자와 인삼으로 그 욕심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24일 맑고 바람. 예부에서 복제를 올린 후에 패자 등이 와서 말하기를, “조선에 가려는 태감(太監)이 심히 많아 서로 다툽니다.” 하기에, 우리들이 상의하기를, “표정로 등을 시켜 예부 당리(禮部堂吏)에게 주선하여 만력 경술년에 유용(劉用)이 단사(單使)로 왔던 전례를 인용하여 시행함이 옳다.” 하였다. 느지막하여 소갑 서계인ㆍ왕유덕 등이 와서 말하기를, “복제는 이미 성상의 재가를 얻었고 조선의 책봉은 전례에 의하여 내관(內官)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즉일 역관(譯官) 진인남(秦仁男), 전 만호(萬戶) 박정제(朴廷濟), 전 선전관(宣傳官) 하계선(河繼先), 전 부장(部將) 신원(申瑗) 등을 선래(先來)로 차출하여 행장을 수습하게 하였다.

◯28일 맑음. 상사, 부사와 상의하기를, “인정에 쓸 은자와 인삼이 벌써 바닥이 났으니, 본국에 역관을 보내어 은자 2000여 냥과 인삼 30여 근을 가져와 각부(各部)에 인정을 쓴 후에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하였으니, 심히 민망할 따름이었다. 홍려시(鴻臚寺)에서 1월 2일부터 15일까지 백관이 공복(公服)을 갖추고 조참(朝參)에 나오기를 청하였다.



■조천항해록 제2권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1월

◯1일 맑음. 사경(四更)쯤에 동지사 일행과 함께 오봉루(五鳳樓) 앞에 나아가 하정례(賀正禮)에 참여하였다.

천자가 황극문(皇極門)에 납시어 조하(朝賀)를 받는데 의식은 동지(冬至) 때와 같고, 다만 대계년(大計年)이므로 13성(省) 관원이 모두 알현(謁見)하여 쟁쟁한 검패(劍佩) 소리가 안팎 뜰에 울려 퍼졌다. 조정에서 물러 나와 동쪽 장안문(長安門)을 나오니, 짙은 화장을 한 미인들이 길거리에 연락부절했으니, 대개 설[歲時]에 서로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19일 바람. 아침에 소갑 서계인(徐繼仁)ㆍ왕유덕(王有德) 등이 조그만 종이를 가져와 보였는데, 곧 왕ㆍ호 두 태감의 공무에 관한 일이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천계(天啓) 4년(1624, 인조 2) 12월 29일 해부(該部)에서 조선을 책봉한 일에 관하여는 성지를 받들어 삼가 준행할 것입니다. 그 외에 먼저 제청(題請)한 고칙(誥勅), 관복(冠服), 저사(紵絲) 등의 일은 사체가 마땅히 귀부에 공문을 내어, 귀부에서 각 아문에 전달하여 모든 물건이 갖추어진 다음, 본감(本監)으로 보내어 조정을 하직하고 발정하는 데 구애되는 점이 없어야만 공무가 진행되고 봉전(封典)이 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수본(手本)을 보내오니, 귀부에서 상세히 대조한 후 각사(各司)에 전달하여 조속히 물품을 보내 주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수본되어야 할 것.”

하였다.

◯24일 예부 좌시랑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을 남예부 상서(南禮部尙書)로 이배(移拜)하였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2월

◯21일 맑음. 천계(天啓) 5년 을축년(1625, 인조 3) 3월 20일에 책사(冊使)가 출발하기로 이미 택일하였고, 황제가 봉왕(封王)하는 고문(誥文) 등을 모두 완비하였다. 제(制 황제의 분부)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덮음이 없어 나라를 제정(制定)하여 모두 포용하였네. 변방의 종족들도 점차 도의(道義) 있는 데로 향하였는데, 황제의 어진 은혜 먼 나라에까지 미쳤도다. 이에 어진 자를 가려 임금을 삼았고, 여정(輿情)에 따라 명을 내렸노라. 조선의 나랏일을 서리(署理)하는 그대 이종(李倧 인조)은 재주가 중임을 담당할 만하고, 도량이 무리에서 뛰어났네. 매양 칼을 짚고 변방 지킬 것을 생각했는데, 몇 번이나 창을 베개삼아 나라에 보답하려 했던고. 온 나라 여정이 모두 추대하였고 왕실의 서차도 정통(正統)에 돌아갈 바로다.

왕모(王母 왕비)의 진정(陳情)함을 인하여 동방을 유지할 것을 생각하였네. 이에 그대 이종을 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노니, 그대는 옛 규례를 준행하고 새로운 양책(良策)을 강구하라. 선열(先烈)을 이어 충성을 맹세하고 장구한 업적을 도모하여 덕을 삼갈지어다. 육로와 바닷길로 조공을 올려 사대(事大)의 분의를 잊지 말고, 요동을 수복하는 데 협조하여 오랑캐를 토벌하는 데 더욱 용맹을 떨치게 하라. 바라노니 게을리 하지 말아 길이 아름다운 복록을 누릴지어다.”

하였다. 왕비를 봉한 고문(誥文)의 제(制)에 이르기를,

“동방에 중진(重鎭)을 지었으니 임금의 풍도를 삼갔고, 북궐에 영화를 누렸으니 내조(內助)의 현명함을 힘입었네. 총애하여 나라를 봉했으니 부직(夫職)을 좇아 봉작(封爵)을 융숭히 하리로다.

조선의 나랏일을 서리하는 이종의 처 한씨(韓氏) 그대는 훌륭한 문벌에 태어나 명현과 짝지었도다. 삼가 제사를 정성으로 받들었고 온순하여 가정에 금슬(琴瑟)도 좋았어라. 새 임금이 대통을 이었으니 이미 당벽(當璧)의 조짐에 부합하였고, 현숙한 부인이 모범을 보였으니 고명(誥命)의 하사(下賜)함을 맞이하였도다. 이에 그대를 봉하여 조선 왕비(朝鮮王妃)로 삼노라. 아! 현명한 범절이 내전(內殿)에 빛났으니 아름다운 법도는 온 나라가 흠앙하였고, 어진 덕은 임금을 찬조했으니 국운을 천추 만대에 연장하리로다. 덕을 닦는 데 더욱 힘써 국가의 번영에 손상됨이 없게 할지어다.”

하였다. 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오직 조선국은 대대로 충성을 바쳐, 매양 즉위 초에 으레 봉작(封爵)을 청하였으니, 이는 감히 임의로 천단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황조(皇朝)께서 일찍이 그대 나라의 전왕(前王) 이혼(李琿)을 책봉하였는데, 뜻밖에도 저번에 덕을 잃어 폐위(廢位)되었고, 소경왕비(昭敬王妃) 김씨가 나라의 정상을 주달하여 그대 이종(李倧)으로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고명(誥命)을 내려 동방을 진무(鎭撫)케 함이 마땅하다 하므로, 이제 특별히 그대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명(命)이 천조(天朝)에서 나오고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였으니, 그대의 작위와 강토가 이로부터 소속한 데가 있게 되었다. 그대 나라의 모근 신민(臣民)들은 짐이 신중히 선정(選定)한 뜻을 본받아 임금을 보좌하고 정사를 닦아 변방을 굳게 하고 오랑캐를 방비하여 짐의 요동을 수복하는 대업에 적극 협조하게 하라. 나 한 사람이 그대 새 임금에게 사사로운 뜻을 둔 것이 아니다. 이에 밝게 고시(告示)하노니 모두 소상히 알게 할지어다.”

하였다. 다시 칙유(勅諭)를 내리기를,

“황제는 조선 국사를 서리하는 이종에게 칙유하노라.

소경왕비 김씨의 주본에, 그대의 숙부 이혼(李琿)이 실덕하여 나라를 잃어, 온 국민의 추대함과 왕통(王統)의 차서가 그대의 몸에 있다 하였으며, 총병관(摠兵官) 모문룡이 또 대청(代請)한 바 있었다. 이에 특히 사례감 관문서 내관감 태감(司禮監管文書內官監太監) 왕민정(王敏政)과 충용영 부제독 어마감 태감(忠勇營副題督御馬監太監) 호양보(胡良輔)를 파견하여 고명(誥命)을 받들어 온 나라 사람에게 알리고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아 나랏일을 주관하게 한다.

대저 왕이 국란(國亂)을 겨우 바로잡으나 오랑캐 국경과 가까우니, 그대는 원대한 계책을 세우고 선열(先烈)의 유서(遺緖)를 더욱 넓혀 강토의 방비를 굳게 하고 중국의 요동 수복에 협력하게 하라. 그대의 처 한씨(韓氏)를 봉하여 왕비를 삼으며 특히 그대와 왕비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과 채폐(綵幣) 등을 하사하노니, 왕은 삼가 받아 짐의 명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이에 칙유하노라.”

하였다. 인하여 평요 총병관(平遼摠兵官) 모문룡에게 하유(下諭) 하기를,

“짐이 생각건대, 요동을 평정하지 못하고 오랑캐는 그 소굴에 도사리고 있는데, 아직도 큰 공훈을 거두지 못했으니 밤낮으로 근심이 놓일 때가 없다. 오직 그대들 문무 장상(文武將相)들이 진심 갈력하여 제승(制勝)의 방략을 세우고 오랑캐를 평정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어 버리기 바라노라.

후한 상을 내리지 않으면 어찌 충성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의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궁벽한 섬에 주둔하고서, 자주 기병(奇兵)으로 출격하여 누차 첩보(捷報)를 아뢰니, 적추(賊酋)가 배후에 견제를 받아 산해관(山海關)을 넘보지 못한 지 벌써 3년이 되었도다. 오직 그대의 공로를 짐이 가상히 여기는 바이며, 또 생각건대, 여러 장병들이 항오(行伍) 사이에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한데서 거처하여 노고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저번에 도독부(都督府)의 수신(帥臣)에게 상을 내려 주라 한 일이 있었다.

이에 내신인 사례감 관문서 내관감 태감 왕민정과 충용영 부제독 어마감 호양보를 파견하여 조칙(詔勅)과 면복(冕服)을 받들어 이종(李倧)을 책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는데, 길이 피도(皮島)를 거치므로 특히 그대에게 은자 100냥과 대홍망의(大紅蟒衣) 1습을 하사하여 융숭한 은총을 보이는 바이며, 종군(從軍)하는 장병들도 적병을 참획(斬獲)한 공로가 많으니, 그 충용(忠勇)이 또한 가상하다. 이에 짐이 어전(御前)의 은자 4만 냥과 여러 가지 망의(蟒衣)와 슬란(膝襴)과 단저(緞紵) 120필을 모아서 그대에게 보내고 공로 있는 자에게 상을 주게 하는 바이다. 앞으로 그대는 더욱 군략(軍略)을 연마하여 승산(勝算)을 짜내며 속국과 연결하여 삼군(三軍)을 장려하고 우리 병력을 길러 적의 사명(死命)을 제어하여 잃은 강토를 수복하면, 천추 만대에 부귀영화를 같이 누릴 것을 맹세하노라. 짐은 거짓말이 없을 것이니 그대는 이를 명심하라. 이에 하유하노라.”

하였다.

◯22일 맑음. 새벽에 궐문에 나아가 하직하고 장차 출발하려 하였는데, 예부 상서가 황극전(皇極殿) 개기(開基)의 일로 궐내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하직 인사를 하지 못하여 드디어 머무르게 되었다.

정문(呈文)을 올리고 길을 떠나려 하니, 제독과 관부(館夫)들이 굳이 만류하므로 원역(員役)들이 농간하여 출발을 막는가 의심하고 전원(全員)을 치죄하였다. 동지사 일행이 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25일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옥하관(玉河關)으로부터 숭문문(崇文門)을 거쳐 창의문(昌義門)에 당도하니, 문안에 조그만 환자(宦者) 6, 7인이 사나운 졸개 수십 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뭉둥이를 둘러메고 길에 버티고 서서 말을 두드리고 수레를 잡아당기며 말하기를,

“반드시 은자와 인삼을 뇌물로 바쳐야만 보내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관에서 문책이 있으니 보내 줄 수 없소.”

하였다. 우리들이 만단으로 애걸하기를,

“우리가 만 리 바닷길을 건너와 5개월을 사관에서 머물러 겨우 대사를 완결하고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주머니가 모두 비었으니, 뇌물을 줄 것이 없는데야 어찌하랴? 특별히 용서하기 바란다.”

하고, 백 번 간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해도 점점 저물어 가므로 부득이 일행의 행자를 모두 털어 주니 비로소 문을 나가게 하여 겨우 장점(長店)에 다다라 유숙하였다.

◯26일 맑음. 새벽녘에 길을 떠나려 하는데 노새의 주인들이 노새를 끌고 모두 도망쳤으므로 부득이 머무르게 되었다.

이는 대개 역관들의 농간이었으니, 사관에 있을 때에도 일이 완결된 지 오래인데도 저들의 사재(私財)를 매매하기 위하여 백 가지로 출발을 저지하였고, 마침내 간사한 꾀가 다하여 정상이 드러난 후에 마지못해 따라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신이 빨리 달려 멀리 가면 짐이 무거워 따라올 수 없으므로 노새의 주인에게 비밀히 연통하여 중도에서 달아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방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역관이란 천지 사이에 일종 괴물로서 사행(使行)이 서울을 떠나는 날에 문득 서로 속삭이기를, ‘북경에 가서 한탕 잘해 보자.’고 한다 하였는데, 이제 보니 과연 허황한 말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겨 온 지 200여 년에 해마다 조근(朝覲)하고 달마다 빙문(聘問)하여 예물이 길에 잇달았는데, 참으로 번번이 이와 같다면 어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사한 무리들이 드나들며 틈을 타서 구차히 비위를 맞춰 주었으므로 이 무리들이 습관이 되어 저희들 멋대로 자행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3월

◯12일 흐림. 주교포(朱橋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상선(上船)의 사공 정덕룡(鄭德龍)이 등주(登州)로부터 와서 영접하고 말하기를, “상선(上船)의 막차(幕次)에서 불이 나, 강진원(姜進元)이 지니고 있던 통보(通報)와 장계 및 곁꾼의 양식을 모두 태워 버렸고, 부선(副船)의 곁꾼 한 명과 이원형(李元亨)의 종 한 명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한다.

◯14일 간신히 등주(登州)에 당도하니, 역관 강진원(姜進元)이 실화(失火)한 죄로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므로, 곧 잡아들여 죄를 다스렸다. 여러 선인(船人)들이 뵈러 왔기에 제반 사항을 물어보니 모두 탈이 없었다.

◯16일 우리나라 사람 고한로(高漢老)란 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저는 본래 연안부(延安府)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에 진 유격(陳游擊 진린(陳璘))을 따라 중원(中原)에 들어와 남경에서 10여 년을 살다가 유격이 죽은 후에 이곳으로 옮겨 군적(軍籍)에 예속하였습니다.” 하고, 그 형 고한금(高漢金)은 연안부 남신당(南新堂)에서 살았는데 생사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20일 사시(巳時)에 배를 타고 오시(午時) 초에 출발하였는데, 바람이 없으므로 묘도(廟島) 앞바다에서 정박하였다. 섬에는 보(堡)가 있고 보에는 천총(千摠)이 있으며, 항상 전함(戰艦) 수십여 척이 등대하여 항구를 파수하였다.

◯25일 맑음. 아침에 서쪽에서 순풍이 불어오므로 뱃사람들을 독촉하여 닻줄을 거두고 돛을 달며 상선에 연락하게 하였는데 여러 번 불러도 응답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몰래 닻줄을 거두고 먼저 떠났으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었다.

출발한 지 얼마 후에 바람이 멎으므로 상선과 제2선은 노를 저어 황성도(皇城島)로 들어가고 우리 배만 뒤에 떨어져 연안으로 저어 갈 즈음, 남풍이 일어나며 배가 빨리 달려 멈출 도리가 없었다.

인하여 철산취(鐵山嘴) 앞바다에 다다르니 남풍이 홀연히 멎어 가도 오도 못하게 되었다. 이에 뱃사람들을 독려하여 노를 젓게 하니 땀이 비 오듯 하고 목이 타서 더 나아갈 도리가 없었다. 부득이 닻줄을 내리려고 수백여 발 되는 줄에 돌을 달아 넣어 보니, 얼마나 깊은지 끝이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닻줄을 거두고 배 가는 대로 맡겨 버리니 망망한 바다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방을 바라봐도 한 점 섬[島]도 없었다. 교룡(蛟龍)과 고래, 악어 등이 갈기를 떨치고 기운을 뿜어 형상이 산릉(山陵) 같기도 하고 소리가 노한 돼지 같기도 하여 그 괴상한 형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물을 뿜고 파도를 일으켜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매, 배에 탄 사람들이 바라보고 넋이 달아나 이제는 죽었다고 하며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나는 안색을 태연히 가져 여러 사람을 달래기를, “그대들은 두려워 말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 하니, 모두 탄식하며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27일 맑음. 아침에 3선(상사, 부사, 서장관의 배)이 같이 석성도(石城島)로 향해 겨우 10리쯤 가니, 홀연히 바다의 장기(瘴氣)가 증발하고 안개가 사방으로 뒤덮여, 몇 걸음 안에 사람의 얼굴을 겨우 분간할 지경이었다. 상선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고 부선과 함께 석성도 뒷바다에 다다르니 역풍이 조수를 몰아와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으므로 드디어 닻을 내렸다.

밤중에 비가 내리붓듯 쏟아지고 우레와 번개까지 겹친 데다가 어룡이 형세를 도와 작희(作戱)하니, 기상이 무시무시하였다. 폭풍이 일어날까 겁이 나서 사공들이 배를 섬 가까이 옮겨 정박하고 화각(畫角)을 불고 등불을 달아 부선이 알아보고 찾아오게 하였다. 이에 두 배가 불을 들어 서로 신호하고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이른 아침에 내항(內港)에 들어가 같이 정박하였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4월

◯1일 맑음. 새벽에 순풍이 불어오고 바다가 평온했다. 석성도에서 배를 띄워 곧장 가도(椵島)로 향하니, 돛대 그림자는 기러기 같아 바다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고, 만경창파는 한 빛깔로 푸르러 평평한 바닥에 푸른 수를 놓은 듯하였다. 사공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바람이 바다에서 올 때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바람이 육지에서 올 때에는 물결이 잔잔합니다.” 하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공도(恭島)에 다다르니 거우도(車牛島)의 고국 접계가 멀리 바라보였다. 뱃사공들이 손을 들어 가리키니, 어느 고을 어느 진(鎭)의 지경인지 짐작은 하겠으나, 여러 산봉우리가 얼기설기하여 낱낱이 알 수 없었다. 곽산(郭山)의 능한산(凌漢山)과 선천(宣川)의 목미도(木美島)와 철산(鐵山)의 용골산(龍骨山)이 가장 앞에 나타났는데, 푸른 봉우리가 높이 솟아 우리 일행을 맞아들여 기쁜 빛을 드러냈다. 저물녘에 가도를 거쳐 선천당(宣川堂) 뒤쪽 항구에 들어가 닻을 내리고 상사의 배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20일 맑음. 정오에 윤중초가 와서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모두 발론하여, 사신 이덕형(李德泂) 등을 잡아 국문하고 수통사(首通事) 표정로(表廷老)는 효시하기를 청하였는데, 위에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25일 맑음. 아침에 민자섬이 돌아가고, 상사의 군관 김여종(金汝鍾)이 와서 말하기를, “상사가 와서 홍제원(弘濟院) 다리 가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하므로, 서로 만나 술을 나눈 후 한천동(寒泉洞) 이희(李禧)의 집으로 사처를 옮겼다. 정오에 체포 명령이 내렸으므로 의금부에 나아가 원정(原情 죄인의 공술)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입계(入啓)하지는 못하였다.

◯26일 맑음. 원정에 판부(判付)하기를, “형추(刑推 형장(刑杖)을 가하면서 심문하는 것)는 그만두고 관작을 삭탈한 다음 풀어 주라.” 하였다. 이에 명례방(明禮坊)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뵈었다.

※처벌을 받는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5월 8일자에

□<사은사(겸 주청사) 이덕형(李德泂) 등을 하옥하고 대질 신문한 뒤에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고, 단지 역관(譯官) 표정로(表廷老) 등 네 사람만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라고 되어있고, 5월 9일에는

□<동지사 권계(權啓)를 하옥시켰다. 전일 권계가 왕명을 받고 중국에 사신갔을 때 시정의 모리배들을 함부로 거느리고 가서 열읍(列邑)에 폐단을 끼쳤다. 수검 어사(搜檢御史) 김시양(金時讓)이 서로(西路)에서 돌아와 권계의 봉사(奉使)가 형편없음을 심하게 아뢰자, 대간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이때에 와서 하옥하고 대질 신문한 것이다. 상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사신 갔었으니 공로가 없지 않다.” 하여, 단지 관직만을 삭탈하였다.>고하여 연이어 파견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귀국한 두 정사를 하옥시키는 처벌은 내린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5월

◯8일 헌납 권도(權濤)가 역설하기를, “주청사(奏請使) 일행이 원역들을 1개월 동안이나 북경에 머물러 있게 한 사실이 분명한데 도리어 기망(欺罔)하니, 그 죄상은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여러 관원들이 논계(論啓)하니, 상이 곧 삭탈관작할 것을 윤허하였다.

◯23일 계사 가운데 문외출송(門外黜送)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았는데, 권도가 혹심하게 논박한 것은, 아마 권계(權晵)의 모함 때문일 것이다. 이날 사헌부에서 또 계사를 올려,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24일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니, 상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사신이 도착한 일자와 뒤떨어진 원역이 도착한 일자를 소상히 조사하여 아뢰라.” 하였다.

◯25일 승정원에서 조사하여 아뢰니, 양사에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논계에, ‘주청사 일행이 원역들을 북경에 머무르게 한 것이 1개월이나 된다.’ 하였는데, 사행은 4월 2일에 도착하고 원역들은 4월 11일에 도착하였으니,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 않는다. 북경에서 등주가 2000리요, 등주에서 본국까지의 수로(水路)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데, 과연 1개월을 머물렀다면, 도착한 날짜의 차이가 어찌 7, 8일 만 되겠는가? 너희들의 논한 바가 혹 적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다시 소상히 조사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양사가 부득이 정계(停啓)하게 되었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6월

◯3일 조사(詔使)가 경성에 들어오니, 상이 친히 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8일 사간원에서 다시 문외출송(門外黜送)할 일로 일행을 논죄(論罪)했으니, 대개 역관 강진원(姜進元)이 탁주(涿州)에서 은자를 잃어버린 일에 관련된 것이었다. 대사간 윤훤(尹暄)이 주장하여 탄핵하니, 추고(推考)하라는 성비(聖批)가 내렸다.

◯12일 조사(詔使)가 돌아갔다. 사신 일행에 대한 논계가 비로소 정지되었다. 대사간 윤훤이 또 주청사 일행의 방물(方物)이 간 곳 없는 것으로 탈을 잡아 일행을 무함하려고 장차 원찬(遠竄)으로써 논계(論啓)하려 하였는데, 여러 관원들이 힘껏 만류하여 정지되었다.


■을축년 천계(天啓) 5년 (1625, 인조 3) 10월

◯5일 상이 전교(傳敎)하기를, “이덕형(李德泂) 등이 국가의 헌장(憲章)을 무너뜨리고 후일의 폐단을 열어 놓았으니, 국법에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미 죄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성을 다하여 대사(大事)를 완결지은 공로와 사명(使命)을 받들고 험한 바닷길을 다녀온 수고를 생각하면 또한 보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직첩을 도로 주어 서용하라.” 하였다.


■항해 조천록(航海朝天錄)

◯천계 4년 7월 초가을에, 한 조각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척검(三尺劍)을 띠고 경사(京師)를 관광했네. 바다에는 풍랑이 험악하고 육지에는 큰 고을이 연달았는데, 산뜻한 행장(行裝)은 필마(匹馬)와 편 주(扁舟)로다.

사은 겸 주청사 서장관(謝恩兼奏請使書狀官) 통선랑(通善郞) 용양위부사과 겸 사헌부감찰(龍驤衛副司果兼司憲府監察) 신 홍습(洪霫 후에 익한(翼漢)으로 개명)은 삼가 보고 들은 일로써 아룁니다. 신이 사신 이덕형(李德泂)ㆍ오숙(吳䎘)과 함께 경사에 다다랐다가 이제 일을 완결짓고 돌아왔는데, 역로(歷路)에서 듣고 본 일을 날마다 기록하여, 이에 삼가 계문(啓聞)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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